기도 Ⅴ
1. 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예수님(눅22:39-40) ..................................... 2
2. 힘을 다해서 기도하신 예수님(눅22:41-43) .................................... 15
3. 미스바의 기도(삼상7:5-6) ................................................................... 19
4. 실패 앞에서의 기도①(수7:6) ............................................................. 30
5. 실패 앞에서의 기도②(수7:6下-7上) ................................................ 39
6. 실패 앞에서의 기도③(수7:7-9) ........................................................ 49
7. 실패 앞에서의 기도④(수7:10-11) .................................................... 57
8. 실패 앞에서의 기도⑤(행1:14) ........................................................... 63
1. 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예수님(눅22:39-40)
기도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장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던 그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만찬을 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다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 올라가실 때 예수님이 특별히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가장 당신에게 가까운 곳에까지 가셨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하시는 장면이 39절부터 시작해서 46절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39절부터 40절 속에서 나름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도에 관한 교훈을 한 번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다. 감람산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산이었습니다. 산에 올라가신 이유는 물론 기도하기 위해서였는데, 첫 번째 단어, ‘습관을 좇아서 나아갔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언가가 습관화되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습관화되었다고 할때 거기에는 뭔가 부정적인 의미가 많이 있어요.
습관적으로 헌금하는 것, 그리고 습관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 습관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 이런 것들은 부정적인 것들을 매우 많이 내포하고 있지요. 왜 그러냐 하면, 습관적으로 하다가 보면 우리는 거기서 꼭 그러한 -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들이 습관적으로 되어버리고 나면, 마땅히 그 행위속에 깃들여야 할 어떤 생명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저는 뭔가 삶에 있어서 철칙을 세우는 것, 그것은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 보면 조심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을 해요. 건강진단을 받으면서 의사가 하는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게 뭐냐면, 건강한 사람들은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쉽게 애기하면 제가 과일을 먹는 것하고 생수를 먹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안좋은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콜라를 마시는 것이에요. 의사가 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먹을 때마다 ‘이것, 먹으면 안되는데...’ 그러면서도 늘 습관적으로, 특히 외식하고나면 콜라를 좋아해요. 의사가 하는 얘기는 이것입니다. 습관적으로 계속 하는 그 행동은 말하자면 엄청난 영향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에요. 이따금 하는 것은 별로 영향을 안준다는 것이지요.
저도 못하지만, 아침마다 일어나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한참 안하다가 어느 날 건강을 위해서 팔굽혀펴기를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한 사일동안 어깻죽지가 아파서 움직일수가 없는 거에요. 습관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이런 문제를 일으켜요. 그러나 습관화되어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건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거에요. 거기에서 검사를 받는데 (+) 점수를 10점이나 주는 거에요. 늘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수를 먹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그런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는 거지요. 습관은 또한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지요. 그런데 신앙적으로 어느 것이 습관화되어있다면 거기에는 항상 무슨 문제가 있어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습관이 되면 마땅히 그 속에서 깃들여야 할 생명적인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편식만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나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밤에 육신을 가지고는 이 세상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만남이거든요. 그러면 사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벌려놓았는가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예수님에게는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고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저 멀리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요단강 건너편, 예루살렘, 그 다음에 성전에까지 엄청나게 많은 곳에서, 그것도 3년이 넘는 세월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역을 만들어놓으셨어요. 그리고 그 모든 사역이 인간적인 시야에서 볼때는 다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것들을 모두 버려두고 이 세상을 떠나셔야 할 입장인데, 정리하여야 될 일이 얼마나 많으셨겠어요?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의 생애가운데서 이 마지막 일주일, 특별히 마지막 잡히시기 전날밤은 보통 평범한 평상적인 날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매우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비상적인 날이었어요. 그 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러 올라가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잖아요?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특별한 기도였어요, 늘 있는 보통 기도였어요? 특별한 기도였어요. 그 기도가 보통 습관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보통적인 그 습관 속에서 우리는 그 특별한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날이 마지막이니까 오늘 가서 한 번 끝장을 내는 기도를 해야 한다. 오늘은 매우 특별한 날이다. 가서 나무뿌리라도 몇개 뽑자’하고 올라가시지 않으셨어요. 습관을 따라서, 밤에 늘 기도하던 습관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감람산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습관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 인간은 생각보다 매우 연약한 존재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습관속에 끊임없는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또 별개이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해두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이방의 포로로 끌려갔을때 큰 시련을 만나기 전에 벌써 그는 눈치챘어요. ‘여기서 믿음을 지키고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뭘 정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뜻을 세웠고, 뜻을 정했다... 그 뜻을 정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얼마동안 이어져요? 포로로 잡혀온지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것이 거의 이루어지는 거에요. 여러분, 습관을 세우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습관은 반복되는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져요. 그리고 그 습관은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해 버리는 것이에요.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비참한 삶을 살 수는 없어요. 흉악한 삶을 살 수 없어요. 그러니까 습관화되기 위해서는 계속 반복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인간에게 나쁜 것들은 금방 습관이 들어와요. 얼마나 놀라운지 몰라요. 반면에 인간에게 있어서 좋은 습관은 그렇게 쉽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약을 맡고 거기서 풀려나지 못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게 바로 습관이에요. 습관성 의약품이잖아요? 다섯 번만 맞으면 중독되는 것이에요. 어느 정도로? 그것만 보이는 거에요. 그거 안맞으면 죽는 거에요. 담배를 피우다가 끊으면 살인도 할 사람이라고 하지요? 어느 정도에요? 넥타이 매고 멀쩡한 사람이 쓰레기통을 뒤진다구요. 그렇게 해서라도 한 번 피워야지만 심신에 안정이 오는 거에요. 그런데 끊고나면 얼마나 고통이 오는지, 금단현상이 나타나는데 - 저는 한 열흘동안 계속되는데 온 몸이 불안하고 주체할 수가 없어요. 그래봐야 4-5년밖에 안피웠는데도 그래요. 마약은 그것의 200배래요.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나쁜 습관은 잘 들고 끊기는 너무나 힘든데 좋은 신앙적인 습관은 들기는 너무나 어려운 반면 끊는 것은 아주 잘 끊어져요. 왜 그래서요? 인간의 이 못된 본성이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정말 대단해요. 체질에 맞는 거에요. 더구나 신앙이 떨어지면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은 쉬워요. 그러니까 죄짓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냥 육체가 하자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요. 그러면 계속해서 죄의 열매를 열심히 맺으면서 하나님 앞에 진노를 쌓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때요? 가만히 내버려두면 성령의 열매가 그냥 막 달립니까? 어림없는 소리에요. 바울과 같은 성령의 대가도 뭐라고 말했습니까? “날마다 내 육체를 쳐서, 십자가 밑에 복종시킨다...” 노예에게 사용되는 단어라고 했지요? 복종시킨다는 것이... 노예를 길들일때 어떻게 해요? 본때를 보인다고 하면서 들어와서는 막 패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완전히 복종시키는 거에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육체를 쳐서 복종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습관을 붙인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것이에요. 기도의 습관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시간이 되어서 기도를 안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에요. 기도할 수밖에 없어지는 거에요. 그게 바로 습관이거든요. 그건 무엇을 통해서? 계속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어느 목사님이 외국으로 다른 목사님과 집사님들과 함께 성지순례인가를 갔어요. 이 목사님은 외국까지 갔으니까 새벽기도는 없으려니... 하고 밤늦게까지 책보고 휴식하다가 잤는데, 사실은 새벽기도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 교회 집사님이 목사님이 안나오시니까 숙소로 가서 문을 ‘쾅쾅’하고 두드리면서 “목사님! 새벽기도 시간입니다” 하니까 이 목사님이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더니 “그놈의 새벽기도는 여기까지 쫓아왔나?...” 정말 쉽지가 않은 거에요. 일평생을 목회하는데도 그게 쉽지가 않은 거에요. 그래서 저도 개인적으로 기도원 같은데 집회갔을때 새벽기도 없는 팀에 섞여서 잠을 자면, 4시 40분정도 되면 눈이 떠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안떠지고 그냥 잘자요. 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습관을 좇아서 기도하신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뭘 보여주셨냐 하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자신 몸소 기도하러 습관적으로 나아가시는 방법들을 스스로 체득하신 거에요. 그래서 언제든지 그 시간이 되면 습관적으로 기도하러 나아가신 것입니다. 이 습관 자체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에요. 좋은 습관을 몸에 배고 있으면 건강에 좋듯이,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가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 아주 건강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학생은 시간만 남으면 퍼자고 놀고, 어느 학생은 시간만 남으면 단어장을 써서 외워요. 일주일이나 이주일은 아무 차이가 없어요. 그러나 3년, 4년, 5년 동안을 계속 그런 식으로 산다면 엄청난 차이가 벌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우리의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새벽의 시간에 푹 자는 것은 본성이에요. 육체의 본성을 가진 인간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나이가 많이 들고 무릎에 바람이 나면 새벽에 저절로 깨어질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그러나 본성을 거스리는 반복적인 행동이 이런 경건한 습관을 낳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신학교에서 교수들이 연수를 가보면 그 사람의 평소 습관이 나타나요. 한 방에서 둘이나 네 명씩 자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베게에 얼굴을 묻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일어나자마자 푸시럭 푸시럭 소리내어 어디론가 가서 신문을 구해가지고 기름냄서 풍기면서 신문보는 사람이 있고 어느 사람은 일어나자마자 노트를 꺼내놓고 열심히 보는 사람이 있고, 일어나자마자 뛰어나가서 조깅하는 사람이 있고, 또 구석에 앉아서 성경을 보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이 다 천태만상이에요. 그것을 보면 평소에 어떻게 사는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이와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깊이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습관을 좇아서 기도하는 것에 있어서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습관적이라는 말은 절대로 나쁜 말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습관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반복된 행동이 습관을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정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습관은 절대로 안생깁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하고 물을때 “늘 기도합니다”하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라고 했지요. 바울을 능가하는 아주 고매한 삶을 사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거의 기도 안하고 사는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에요.
계속해서 일정한 시간에 반복되는 행동, 그것이 우리에게 습관을 늘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습관은 우리를 아주 놀랍게 변화시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습관을 좇아서 감람산으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습관을 붙일려고 결심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 습관은 싫은데.. ’ 그러면 그것은 신앙의 체질이 아니에요. 세상으로 가야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기때문에 우리 자신을 이런 습관에 늘 묶어두어야 하는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 앞에 습관을 들이세요. 정하세요. 언제를 기도시간으로 할지 정하세요. 그래서 어렵지만 반복적으로 그 행동을 계속 되풀이하세요. 그래서 그 시간이 되면 저절로 깨어지고, 아니면 그 시간에 되면 저절로 기도할 것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기도의 습관을 길러 가도록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권고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습관이 없으면 우리는 이미 영적인 삶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기분 내켜서 아무때나 하면 - 늘 좋은 것?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것이 영적이 삶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영적이 삶에 뛰어나신 예수님이 하필이면 왜 이렇게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몸에 배게끔 만드셨겠어요? 여러분의 습관을 빨리 정하세요. 새벽 미명? 좋아요. 그리고 이른 아침도 좋습니다. 직장에 조금 일찍 나간 시간도 좋아요. 정 시간이 없으면 점심 시간에 한적한 창고도 좋습니다. 저녁때 일찍 들어오는 시간도 좋고 퇴근시간에 교회에 들르는 것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저녁 다 먹고 잠자기 직전에 창문을 열어놓고 다니엘처럼 무릎을 꿇는 것도 좋은 습관이에요.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는 이 습관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습관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그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바치는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죄악을 이기며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한가지 영적 생활의 한 방법인 것입니다.
습관을 좇아서 어디로 가셨다고 했습니까?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뭐가 문제가 되나요? 장소가 문제가 됩니다. 주님은 여러 곳에서 기도하셨지만 이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기를 늘 즐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돌아다니시는 적이 많으셨기 때문에 강에서 혹은 빈들에서, 여러 곳에서 기도하셨지만 그러나 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이 감람산에 올라서 기도하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사도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에서 이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을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시체로 누워있는 그 무덤 앞에서 모든 사람이 예수가 죽은 저 나사로를 어떻게 하나 보자.. 할 때도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하나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실 수 있어습니다.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에도 많은 사람이 그 병을 고치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 모여들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아니하시고 기도하셨어요. 때로는 회당에서, 때로는 저잣거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든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거기가 바로 감람산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있는 기도가 습관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지정된 장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훌륭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방해받지 않는 장소를 예수님께서는 택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제자들이 잠자고 있는 밤에 고요하게 홀로 감람산에 오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홀로 가지시면서 거기에 깊이 몰두하시는 장면들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겠습니꺄? 물론 여러분들이 크고 넓고 좋은 집에서 산다면 한 구석에 가서 기도한다면 식구들의 눈에 띄지 않고, 좋은 곳이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곳은 교회에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좋은 습관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풍부하게 의식하고 깊이 느끼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장소적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곳을 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가 바로 감람산이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고요한 밤중에 그 감람산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깊은 교제를 누리셨습니다. 풍(?)하는 하루를 정리하고 또 수많은 도전과 갈등이 기다리고 있는, 악의 세력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기다리고 있는 내일의 사역을, 그 동산에서 준비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습관이셨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보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감람산은 어디입니까? 어디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오래도록 기도하고 그 곳이 언제나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곳, 거기를 택하시고 그 곳에서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뜻을 세워야 합니다. 요새 저를 포함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해요. 아주 확연하게 느꼈어요. 우리는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선교단체에 가니까 이런 포스터가 붙었어요. ‘When man works, man works' 사람이 일할때 사람은 일한다. 그런데 ‘When man pray, God works’ 사람이 기도할때 하나님은 일하신다.... 사람이 일할 때에는 사람이 일하는 것인데, 사람이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방해받지 않는 장소 속에서 깊이 기도하면서 일주일을 살고 오면 교회에서 기도할때도 그 힘이 뭉쳐져서 기도의 영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도에 불을 붙여주고 변화의 불을 붙여주어서 그들이 교회에서 예배드리거나 함께 기도에 참석하면서 커다란 기도의 은혜들을 새롭게 회복하고 변화받을 수 있는 새로운 힘들이 생겨나요. 그러나 일주일동안 산 것이 거의 기도하는 습관도 없고 장소도 없고 모든 것이 다 무너진 상태속에서 살다가 주일에, 혹은 수요일날, 일주일에 하루 나와서 기도하려고 할때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는데 기도가 되겠어요? 안되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다른 생각만 오고가고 하다가 세월만 보내면서 기도가 마쳐지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보다도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과만 만날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늘 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외로운 장소를 택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조지 스윈녹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우리에게 아주 의미깊은 말을 남겼어요. 그게 뭐냐하면 고독, 외로움,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를 많은 무리들의 억압에서 우리를 풀어주는 것이 바로 고독이다. 우리가 홀로 조용히 있는 시간,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많은 사람의 멍에로부터 굴레로부터 제약으로부터 해방받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으로부터 해방받고 그런 억압으로부터 풀려나와서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 만남을 이룰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외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들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서든지 기도할때 하늘을 여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들 곁을 떠나고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감람산에서 고요히 기도하는 습관을 그리스도께서는 가지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으로 미루어볼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으로 볼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잘 가르쳐 주시지 아니하시고 홀로 아시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셨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장소가 있습니까?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이 복음을 열심히 전하니까 그 중에서 한 토인이 예수를 믿고 놀랍게 회개했어요. 회개하고 나니까 - 회개하고 나서 새 사람이 될때 영적으로 생겨나는 가장 강력한 욕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속에서 살아가고 싶어하는 그것이에요. 그래서 성숙해지면 자꾸 혼자있고 싶어요. 유치원 다닐때는 매일 부모들과 싸워요. 쫓아오지 말라고 싸우고, 쫓아오겠다고 싸우고..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서 목소리가 굵어지기 시작해요.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러고나서는 “야, 가자” “아니에요. 집에 혼자 있을래요” 사춘기가 되면 성숙해 지고 혼자 있고 싶어지게 된 거에요. 무슨 집안에 큰 일이 있어요. 그때는 끌어야지만 간신히 가서, 가서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책을 보거나 아니면 TV를 보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해지고 하나님을 아는 참된 이해가 마음속에 넘치고 나면 그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싶은, 그런 영혼의 갈망들이 속에서 계속 솟아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갈증을 느껴요. 그게 바로 살아있는 영의 모습이에요. 기도하는 습관도 없고 장소도 없고 기도를 언제 했는지도 모르고, 요즘 하는 기도가 응답되었는지도 모르고... 기도할때도 별로 응답된다는 확신도 없고, 기도도 별로 안했으니가... 그렇게 기도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불편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뭔가 불편한 것이 있어요. 갈증이 있어요.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그런 깊은 갈증이 있지요. 환희나 기쁨, 즐거움이 없어요. 놀라운 변화가 없어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도, 만나면 막 떠벌리고 싶잖습니까? 뭘 떠벌리고 싶어요? 친구들이 좋은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만나서 아주 불붙는 연애를 할때 만나면 냉면 한 그릇 사주면서 자기 자랑만 실컷 늘어놓다가 내 얘기는 들어주지도 않고 헤어지는 것, 경험했지요? 뭔가 마음속에 불붙는 경험들이 있으면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에요. 하나님과의 그런 만남이 없으면 사람들을 만나서도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잡다한 얘기나 하고 본론적이고 은혜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하기 싫어져요. 은혜가 떨어지면 은혜받은 사람 만나기도 싫어요. 뭐가 좀 살아있을때 은혜받은 사람을 만나면 기쁘고 그 사람과의 교제가 나에게 활력소가 되고 하지, 이미 내 영혼은 깊이 가라앉아서 잠들어 버리면 그런 것들은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에요. 요즈음 어때요? 전체적으로 기도를 많이 해야할 상황이에요.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그런 갈망은 언제나 하나님을 단 둘이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보장되고 누군가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는, 그런 곳으로 우리가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장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바쁘고 복잡한 삶을 사시면서도 늘 이렇게 장소를 정해놓고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교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따라서 멀리 있는 사람들이 매우 부러워 해야할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교회를 코앞에 두고도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거에요. 왜 그래요?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지만, 교회는 성도들이 그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많은 경건했던 성도들이 그렇게 - 추운 겨울날에 오리 십리씩 걸어와서 기도한 사람들은 비뚤어진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에요? 거기는 하나님이 안계세요? 왜 안계세요? 어느 곳에나 다 계신데... 그런데 그렇게 나왔던 이유는 무엇때문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그 하나님의 집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가는 것을 성도들은 함께 즐거워했던 것이에요.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 사랑과 교히 사랑이 함께 영글어갔던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에 가서 늘 기도하는 이런 사람들, 정말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이겠지만 또 하나님도 그런 마음이시라고 생각해요. 밤에 어디에 갔다가 교회에 와서 문을 열었을때 누가 교회에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요.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구나’ 새벽기도 시간에 나왔는데 뜻밖에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멀리서 온 형제 자매들도 있어요. 그렇게 기도하는 날에는 왠지 마음속이 그렇게 편안하고 좋아요. 이게 제가 목회하는 교회라서만은 아닐거에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정말 당신과 만날 수 있는 그런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기를 바라시는 거에요. 교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장점을 활용해야 해요. 먼데 있는 사람들보고 이사오라고 말할때는 그것을 활용하라는 것이에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멀리 있는 것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그런 것들을 초월하고 넘어설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헬스클럽을 다니는 사람들도 죽자사자해서 새벽에 일어나 츄리닝을 챙겨서 헬스클럽에서 땀흘리며 제 시간에 운동하는데, 여러분, 육체의 연습은 우리 육체의 건강에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영적이 삶에 있어서 경건한 삶을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준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그렇게 방해받지 않는 장소를 찾아서 헤매고 그렇게 수립된 습관들을 삶속에서 누리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절박한 필요들이 우리속에서 생겨나야 하는 것이에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절박한 필요가 우리속에 있어야 하는데, 예를 들어서 주위를 한번 살펴보세요. 기도해야 할 부르심들이 너무나 명백하고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하나님의 일군들이라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애쓰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적은 것은 무엇때문이지요? 혹시 우리가 씨앗대신 구슬을 심으면서 파종을 하기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속에 은혜를 부어주셔야지만 우리가 변화되고,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어요. 그게 기도제목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들은 너무나 적은 열매만을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예화:고등학교 다닐때 집 뒤에 너른 밭이 있었음. 열무같을 심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비가 안와서 싹이 안남. 말라죽을 판인데 그 넓은 밭에 물을 줄 수는 없고 비올때만 기다림. 그러다가 그 할아버지가 할수없이 양수기를 빌려다가 물을 이른 새벽부터 물을 뿜어대는데, 물이 펌프에서 ‘콸콸콸콸’ 쏟아져 나와요. 그런데 하루종일 줘도 다 못줌. 할수없이 그 다음날도 물을 주는데도 간신히 해갈만 될 정도였음. 하루에 일당이 2만 4천원 들었는데 삼일 후에 비가 옴. 비가 ‘툭툭’하고 떨어지더니 ‘쏴아악...’하고 오는거에요. 오 분 오니까 그 할아버지네 밭만 아니라 중부지방에 있는 모든 논과 밭이 한 시간만에 사람들이 도랑을 쳐야 할 상황이 됨. -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도 열매를 거둘 수는 있지만 아주 힘겹고 그 열매가 쭉정이가 너무 많음. 그러나 하나님이 한번 하늘을 열고 비를 내리시니까 온 땅이 젖으면서 해결됨. 그리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비에 의해서 땅이 굳어짐. 분무기로 꽃에 물을 주는 이유가 물이 땅을 누르지 않고 습기만 스며들기 때문임. 사람들이 땅에 물을 주는 것은 어느 곳은 너무 넘치고 어느 곳은 물이 안젖지만 비가 한번 오면 땅을 누르지도 않고, 그 땅에서 많은 열매가 자라도록 만들어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의 삶속에서 이와같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하나님과의 홀로 만남을 사모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속에서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교회속에서 무언가가 모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끼시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왜 열심히 섬기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열매들이 적을까요?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앞에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일을 하는만큼 내 마음이 기쁘지 않을까요?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것을 느껴야 하는데, 일에는 가까이 다가가면서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기도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에서 제일 귀한 사람은 무엇이냐 하면, 남이 갖지 않은 기도의 부담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가장 필요하고 귀한 사람이에요. 정말 누구말대로 음지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홀로 일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열매를 통해서 얻어지는 상급을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가져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만 섬기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 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축복과 은헤들을 예비하고 계신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를 통해서 새롭게 개인적이고 교회적인 위기와 어려움들을 극복하려고 하는 강력한 도전들이 우리에게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러 다니면서도 제일 부러운 교회는 이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에요. 말이 살아있는 교회는 하나도 안부러워요. 솔직히 말해서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교회도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진짜 부러운 교회는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에요. 그런 교회는 순수해요. 매일 매일의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잔재주를 가지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깊은 기도의 사람을 본적이 있어요? 하나님 신앙생활하면서 늘 주판 튀기면서 장부책 적어가면서 잔머리 굴리며 신앙생활하는 사람치고 깊은 기도의 사람은 없어요. 깊은 기도의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너무나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비밀스런 세계를 열어주시고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거에요. 특히 누가는 기도의 세계에 대해서 탁월한 시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한때 은혜받았을때 누가와 결혼했다고 할만큼 그렇게 누가복음을 좋아했습니다. 제 정서하고 참 맞습니다. 누가의 여러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기도에요. 그래서 다른 성경 기록자들이 놓친 기도의 사건들을 상세하게 잘 다뤄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진전시켜 가면서 전환점이 될때마다 사람을 세우신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해서 그것을 이어가게 하시는 거에요. 사도행전을 누가 썼어요? 누가가 썼습니다. 이같은 누가복음에서 나타나는 기도이 예리한 눈이 사도행전에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적같은 것에나 관심이 많고 기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생략할 것을, 특히 기도에 관심있는 누가 - 이 누가는 참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복음서가 끝나고 사도행전까지 이어서 쓰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도 이미,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통속에서 마리아를 통해서 알려주시잖아요? 요셉에게도 그런 교통을 통해서 알려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셔서 장성하여 공생애에 들어서는 순간도 기도속에서 들어서게 되지요. 그래서 그 장면을 누가는, 다른 곳에서는 ‘예수께서 세례받으실때 성령이 임했다’고 기록했는데 누가는 예수님이 세례받으실때 기도하신 것을 놓치지 않았어요. 기도하셨고 바로 그때에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아주 정확한 관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만나시는 사건도, 변화산의 사건도 역시 기도하러 올라가시는 장면에서 나타나지요?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전에도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고 고난을 감당할 용기를 얻게 되시지요? 그리고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못박히신 상태에서 기도하신 것도 누가복음에서 가장 상세하게 전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심 다음에 다시 성령을 보내시는 그 사건도 기도하는 사람들을 먼저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후에 그 기도의 응답을 타고 성령이 오시는 것 같은 장면을 보여주지요.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선교에 있어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는 상황에서도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유대인들 속에 갇혀있던 복음이 그 세계를 뛰어넘어서 이방의 세계로 넘겨질때에 사용하셨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어요. 이방선교의 위대한 Vision을 언제 보여주셨습니까? 베드로가 기도할때 보여주셨어요. 누구에게? 기도하는 사람, 고넬료를 통하게 하셔서... 그리고 기도속에서 두 사람은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기도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게 돼요. 그리고 이방인에게 최초로 성령을 부어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구속의 역사가 파노라마가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기도를 사용하셨고 기도하는 사람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애쓰고 수고한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많이 날리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역이 아니에요.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고 주보에 크게 나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축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한 교회의 역사를 바꾸실 때에는 언제든지 기도하는 사람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두루 찾으십니다. 누가 이 교회를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하는가... 아직 없어요, 그럼 하나님의 역사는 잠시 더 있어야 할 일입니다. 급하면 하나님이 기도하는 사람을 세우셔서라도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를 움직여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Extra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영화배우로 출연하다면 주연이 되고 싶으세요., Extra가 되고 싶으세요?
(예 화 : 어느 날 먼저 교회의 목사님이 양복을 차려입고 TV 촬영을 위해서 나가심. 나중에 보니까 축도하는 손만 나옴..)
여러분, 우리는 모두 그렇게 주연이 되고 싶어요. Extra는 재미없어요. 전쟁터에서 피흘리고 죽는 역할같은 것이나 하고 싶어요? 하나님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주연으로 사용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깊이 기도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이루고 움직여가시는 주연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누구를 제일 사용해요? 그래도 아빠가 제일 나이가 많으시니까... 아니에요. 그럼 똑똑한 우리 엄마를 사용하십니까? 아니에요. 그러면 엄마 말씀 잘 듣고 착한 우리 딸을 사용하십니까? 아니에요. 그러면 씩씩하고 힘좋은 우리 아들을 사용하십니까? 아니에요. 누구를 사용하십니까? 그건 몰라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가정의 모든 문제, 구원의 문제, 변화의 모든 문제, 그것을 짊어지고 자기일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세요. 잠시 후면 비참한 포로의 모습, 죄인의 모습으로 그렇게 포박되어서 끌려가야 할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끌려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주인공으로 삼으신 것이에요. 사람들 눈에는 역사의 무대에서 이제는 체포되어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체포된 순간이 바로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무대의 중심자리에 선 시작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 사람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없이 끌려가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구원의 역사의 중심자리에 세우셔서 역사를 바꾸어놓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귀하게 여기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러한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셔서 이와 같이 일하시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있어서 이와같이 주역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를 한번 돌아보세요. 이 민족의 진정한 복음화를 위해서 애통해하고 진정으로 애원하는, 영적인 전선에서 주역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가족들 중에서 누가 여러분의 가족들의 영혼을 놓고 늘 안타까와하며 그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서기를 사모하면서 부르짖는 사람이 누구에요? 누가 있어요? 또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는 더더욱 여러분 자신이 주역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놀랍게 개척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나아가기를 기도하고 간구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또 그런 중보해주는 사람이나 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보기도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열심있는 기도와 중보의 기도가 만날때 불꽃이 튀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위대한 역사의 주역으로 삼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인이 아무리 늘어봐야 그것이 교회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적게 모이는 것도 또 소망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속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를 갈망하며 남들이 지기 싫어하는 기도의 짐을 지고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에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게 아니면 예배 드리고 흩어져서 돌아가는 그 자리가 야유회에서 흩어져서 돌아가는 자리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몸은 떠나도 마음은 언제나 교회에 남아서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 각자를 구원하고 지체들을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풍성한 은혜가 아직 우리 밖에 있는 양들에게 풍성하게 나타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의 연락 속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장소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늘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도하고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그 곳에서 간증을 쌓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가 굉장히 많이 기도하는데도 그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때가 있잖습니까? 그럼 기도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어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에게 기도하게 시키시는 거에요. 그래서 어저께도 목회하는 형제들을 만나서 얘기하는데, 하나님의 일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 캄캄하고 가망이 없어도 기도는 하지만, 캄캄한 것이 오래 지속되면 기도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데 기도할 때마다 ‘가망없다. 나는 아무리 해야 소용없다. 아무리 기도해도 [넌 안돼]’ 그런 생각만 지속적으로 계속 들고 실제로 목회가 제대로 될 가능성이 없다는 증거들만 계속 나타나면 누가 그렇게 오래도록 기도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도 기도의 제목을 내놓으면, 기도는 것이 진짜 기도면 자기가 하는 기도가 지금 이루어져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관심으로 가지고 쳐다볼 거에요. 관심도 없고 계속해서 그것만 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이지요. 아버지가 복음을 듣고 예수께 나아와서 구원을 얻는 것이 가장 커다란 기도의 제목이에요.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교회에 나가시는지 안나가시는지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고, 요즈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영혼의 상태갸 어떤지, 복음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안갖는다면 그 기도는 틀림없이 형식적인 기도에요. 깊이 기도하면 우리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사람들을 통해서 알고 싶어하는 거에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간절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기도가 이루어질 것같은 가능성을 자꾸 보여주시니까 갈증이 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더욱 기도하는 것이에요. 조금씩이라도 은혜를 받는 사람은 ‘더 받아야 할텐데...’하며 갈증을 느껴요.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무감각으로 인하여 은혜를 구하는 갈망조차도 사라지는 거에요.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 자체도 잊어버리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실때 때로는 우리에게 그 기도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데도 우리를 계속 기도하게 시키실 때가 있어요. 결국은 안이루어졌는데도 계속 기도를 시키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떤 때는 분명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는데도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낼때도 있어요.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흘러간 다음에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구나’하고 알게되는 때도 없다고는 할수 없지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응답의 조짐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래서 감질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어주세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 영혼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약간씩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세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섭리하시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결국은 무엇때문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농축해서 세게 기도를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즉시 얻어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일지는 모르지만 그 기도에 관한 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런 것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뭔가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응답에 목말라 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영혼의 시선은 하나님께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문제에 비례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문제를 주시는 것까지는 주님이 하시지만, 그 문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의무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로 우리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주시기도 하고 기도할 마음을 넣어주시기도해요. 그러나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나는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들 속에서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붙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무슨 기도냐?” 했더니 직장생활 속에서 유혹을 받는다고 해요. 뇌물의 유혹... 유혹받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해요. 그러면 저는 할 필요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도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 실제로 “싫어!”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때 그 유혹받지 않을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불붙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야... 미워하시는 일이야... 싫어... 하면서 본성적으로 격렬한 감정으로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안돼”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뇌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더 크고 풍성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경험이 있어요. 어떤 기도제목은 심지어는 3년동안을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꼭 이루어질 것 같은데 결국은 안 이루어졌어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서 깨어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그 기도제목을 생각할 때마다 대충 살 수가 없어요. 너무나 중요하고 간절하니까... 게으르고 나태하고 태만한 사람이 가장 잘 쓰는 말이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면 나도 할 수 있어!” 결국 뭐에요?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깨어서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이유를 누구에게로 돌리는 거에요? 하나님....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을 부어주시지 아니하시는데...” 그 말은 사랑한 다음에 해야 할 말인 것입니다. “형제여! 어떻게 용서하고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을 부어주시지 아니하셨으면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을 해야지, 저는 사랑하려고 노력도 안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을 부어주셔야지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게 교묘한 위선이고 가증한 교만이에요. 겉으로 보면 얼마나 겸손한 것 같애요? “내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나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주시지 않는데” 얼마나, 그것도 목소리까지 깔아서 분위기 잡으면 성자앞에 앉아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나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주시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그게 진전되어서 “주님이 나에게 큰 믿음을 주셔야지만 제가 주일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집어치우고 주일은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이에요. 그럴때 주일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불일듯 역사하는 것이에요. 비밀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을 훌륭하게 지키고 성령안에서 산 다음에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기업인은 주일 하루를 문 닫기 때문에 5억 2000만원을 손해 본대요, 계열에 있는 모든 회사들이... 그런데도 해요. 왜 그래요? 그렇게 다 산 다음에 “어떻게 그런 막대한 이익을 주일을 지킨다는 것 때문에 포기할 수 있었습니까?”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니 우리가 그렇게 살았지요. 우리의 우리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를 주목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해야지요. 믿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주님은 복잡하게 “내가 너희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주리니, 많은 영 중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특별한 영인데 그 영이 너희에게 부어지면 너희가 기도해야 하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 않기로...” 간단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의무에 대해서 너무나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셔야지만 기도하는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이에요. 무슨 필요가 있어요? 새벽에 ‘기도해야지’하고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거지요. 그렇게 오래 기도한 다음에 “어떻게 그렇게 기도의 생애를 사셨습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을 움직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말해야지 하나님만 자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지요. 우리 주위를 돌아보세요.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보라는 것이에요. 쉬고 싶어요. 육체는 쉬기를 원해요. 앉아있으면 눕기를 원하고 누우면 자라고 요구해요. 그리고 자고나서 새 힘을 얻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힘을 얻은 그 육체를 가지고 범죄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 기도의 세계속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를 통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를 못하게 하고 우리를 유혹하고 도전하는 모든 세력들을 그들은 기도로 이겼습니다. 싸우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과 더불어서 그들은 한치의 양보없이 싸웠습니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싸웠습니다. 수시로 싸웠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어야 할 능력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의 필요를 느끼고 기도했기 때문에 그들은 싸울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언제나 얻을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도록 기도하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그 분은 “할 수만 있으면 내 잔을 피해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 기도를 하실 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잔을 피해가게 해달라고 통성으로 기도하자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에 패인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최고의 관점은 내 십자가를 너희들이 대신 져 주는 것, 그것이 아니었어요. 주님의 중요한 관심은 그들이 깨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커다란 핍박이 다가올텐데 이 무리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보호되고 또한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의탁하셨던 많은 양떼들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능력이나 재능에 하나님의 양떼들의 생명이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그 양떼의 생명이 달렸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양떼들은 생명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 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은 당신의 풍성한 생명을 보여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해 주시는 것을 모두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가 읽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심히 슬퍼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 겟세마네 동산은 여전히 우리속에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이기셨습니다. 이 동산에서 예수님은 성공했고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 실패의 쓴 맛을 제자들이 다 보았습니다. 인간적으로도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때 도망가서는 안되는 사람 아니에요? 그래서는 안되잖아요? 신앙을 떠나서 의리가 있는데 그래서는 안되잖아요? 또 자기들이 옛날에 장담한 말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되잖아요? 그런 것 다 소용없어요. 왜 그래요?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은 우리의 육체의 소욕과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를 통해서 이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설교자는 말만 늘어가고 회중은 귀만 늘어가고 있는 교회는 되고 있지나 않은지 요새 마음에 많은 갈등이 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늘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에 붙잡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바라시고 원하시는 그 많은 열매들을 맺으며 실제로 우리의 삶속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구현되지 않는다면 제가 하는 좋은 말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여러분들이 들은 많은 설교가 하나님 앞에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귀 큰 사람, 입 큰 사람을 부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주 뜻대로 산 사람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된 곳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비밀들을 모두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은 먼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여러분 옆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제가 그 부분을 지난 주에 묵상하면서 참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배경이 어딘지 아세요? 우는 사자와 같이 너희를 삼킬 자를 찾는다... 그게 어디서 나오는 이야기인지 아세요? 동물원에서 사료만 먹다가 이빨 다 빠진 사자가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콜롯세움에서 원형 경기장에서 만나는 그 사자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때문에 사람들을 구석에 몰아놓고 문을 열면 장시간동안 굶주린 사자들을 푸는 것입니다. 쏜살같이 달려나오면서 두려워 떠는 사람들 앞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목표물을 하나 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가 마귀를 지금 비웃으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삶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이에요. 우리는 지금 이해가 안가지만 1세기의 문맥에서 성도들이 이 사도의 편지를 받았을때 그들이 직감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찢기어 숨져가는 사람들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다큐멘타리에서 사자가 짐승을 무는데 입속에서 다리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요. 그런 물어뜯음으로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귀를 깨어서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깨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새롭게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나른해지고 유혹받기 쉬운 이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첫 믿음의 마음,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가깝게는 우리를 이 교회로 보내주신 계획과,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신 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각개전투 - 땅을 기고 뒹구르고 철조망을 통과해야 하는 훈련이 있습니다. 전투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훈련하는 것이지요. 군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훈련중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훈련장의 이론 교육실에 액자가 하나 붙어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훈련장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땀은 전쟁터에서
흘리는 한 사발의 피를 저축해 준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어서 살아가는 삶이 시험에 들지 않는 이 삶이 시험에 들고 나면 잃어버릴 수많은 아름다운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잃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소중한 것들을 잃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도 때로는 시험에 들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당장 베드로 자신이 그러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주님을 팔아먹었을때 살아있으나 그 사람은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사의 거룩한 직분을 잃어버리고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누웠을때 그는 자신의 인생의 일부분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누리던 모든 영적인 아름다운 것들을 잃어버리고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마옵소서”하고 애원하게 되었을때 그는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 중에서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시험에 들었을때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밑천이 든든하십니까? 신앙적으로도 밑천이 든든하시면 기도하지 말아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시험에 들고 나면 여러분들이 제법 많이 쌓아왔다고 생각하신 것, 한번에 날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각하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이것이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텐데 나를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를 위해서 울고 내 십자가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는 것보다 너희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너희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어차피 이 십자가를 지고 내 기도로 승리할 터이니 너희는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너라. 너희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이미 시험에 들어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우리가 시험가운데 있기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빈털터리인지를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입만 무성한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하나님이 우리의 교회생활을 뒤적거리면서 아무리 우리속에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찾으시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열매가 없습니다. 직장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남다르게 그 직장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남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잎파리를 뒤적거려봐도 명함 하나에 매달 받는 월급 밖에는 우리에게서 찾을 것이 없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인격은 고상한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다른 곳에서 실패한 우리의 영적인 삶이 우리의 인격속에서 아름답게 성공하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격은 황폐하게 되어가고 우리의 삶은 열매를 잃어버리고 우리의 영적인 삶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참으로 귀한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깨어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해라. 안하면 시험에 든다” 간단한 것입니다.
2. 힘을 다해서 기도하신 예수님(눅22:41-43)
지난 시간에 앞 절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나아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니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곳에 이르러 저희들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이어든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우선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본 것은 기도의 습관의 문제, 그리고 정해진 장소의 문제, 그 다음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 가운데 특별히 세 사람을 데리시고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셔서도 그들과 돌 던질만한 거리이니까 한 40-50 미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셨다는 평범한 이야기가 오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열 두명의 제자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세 사람만 데리고 가셨을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오늘 답할 시간은 아닌 것 같아요. 문제는 왜 세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답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만, 분명히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 사람이 초대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지도자로,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이미 당신이 부활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야고보, 요한, 베드로, 이 세 사람이 교회의 지도적인 중심자가 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애요. 어쨌든 올라가셨습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기도는 확실히 공부에 의해서 가르쳐지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에게서 기도를 배웠는지 하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누가복음 11장에서 애원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안가르쳐 주실까봐, 또 요한도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다고 했는데..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제자들이 말했을때, 즉 정말로 기도를 배우고 싶어하는 상황이 생겨났을때, 그때가 언제였는가 하면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기도를 하시고 마치셨을때에 그 예수님이 기도하고 마치신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간절히 배우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결국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말로써 가르쳐 지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결국 기도는 깊이 기도하는 사람 옆에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시겠지만, 기도에 있어서 먼저 모범된 생활을 하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것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할때 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어서 오래도록 자기가 기도하신 그 모습을 가슴에 오래 간직하며 살도록 할 목적으로 이 세 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수님이 이렇게 마지막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리에조차 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그렇게 기도하는 자리에서도 제자들이 함께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이제껏 살아오신 삶의 많은 과정 속에서 이 결정적인 구속사역의 전환점, 이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느냐 마느냐 하는 이 구속사의 절대적인 중요한 이 전환점에서 예수님이 최소한 사도들에게 이러한 구속사의 전환점을 기도로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사람들을 가까이 데려가신 것이지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셨어요. 그건 뭐냐하면 다음날 십자가를 지시는 이 문제는 제자들이 나눌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이 싸움은 제자들과 함께 싸워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홀로 하나님 앞에 씨름해야 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해서 싸워야 하는 문제가 있고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결단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들이 있는 것이에요.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올라갔지만 제자들로부터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거리에 가셔서 하나님 앞에 홀로 간절히 기도하셨던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에 부어지는 십자가의 고난은 십자가 형벌과 그 이전에 당한 신문과 체포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영적으로는 이 십자가의 모든 고통은 그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맛보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많은 일로 봉사하면서 자기를 희생하셨지만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가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모든 힘을 다 소진해서 기도에 자신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이런 경험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자유가 많아요. 다시 말해서 자기 멋대로 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도 뭔가를 결정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생각보다 참 많습니다. 정말 자신의 인생의 작은 뜻들이 행여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어떻하나.. 하면서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는, 자기가 뜻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후원을 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농구선수가 생각나요. 화려하게 드리볼하고 공을 몰고가다가 골대를 향해서 집어넣으면 그 점수가 나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인생이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그건 내가 결정하면서, “슛은 제가 쏠테니까 패스나 잘 하십시오” 골인이 되면 그것은 내 화려한 슛솜씨 때문이고 노골이 되면 당신의 패스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아주 결정적인 인생의 순간들이 왔을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갈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복있는 사람들이에요. 믿습니까? 복이 없는 사람들은 반대에요. 평상시에는 하나님 뜻대로 사는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빗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소에도 언제나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사셨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이 사건이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거룩한 구속사역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시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거기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평생을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어요. 그래서 오늘도 이 인생이 구속사역의 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뜻을 구하는 이러한 삶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여러가지 많은 사건들을 만나요. 그러나 어느때가 하나님 앞에 정말로 무릎을 꿇고 모든 삶의 주제권을 하나님께 드려서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는 거기에 순종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 굴복해야 할 대인가를 아는 이러한 지식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비록 평상시에는 조금 부족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점에 와서는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이 나로 하여금 어느 길로 가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닫기를 원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런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태도입니다. 그건 뭐냐하면,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며...”하는 기도였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될 일이었습니다. 어차피 그 십자가의 잔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셔야 할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서를 달고,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십자가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고도 내 육체가 깨뜨려져서 피흘려 십자가에 매달리지 아니하고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하나님께 있다면 그 잔을 나에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여러분, 이 기도는 결코 불순종의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참 사람이었음을 드러내는 그런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께 대속제물로 드리기 위해서는 완전한 죄인인 인간이셔야 했습니다. 연약함을 가진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추우면 춥고 못 잡수시면 배고프고 말을 걸면 피곤하고, 그러한 연약함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육체를 스스로 입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육체의 인간은 육체를 찢는 비참한 고난를 싫어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 다른 주님의 방법을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때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기도하라고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많아요.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뜻을 따라서 가도 상관없어요. 하나님 앞에, 사람이 볼때에는 정말로 너무나 유치해 보일지도 모르는 기도도 괜찮아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에요.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의 소원이에요. 하나님 앞에 다 기도할수 있어요.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 기도할수 있어요. 그러나 다 들어주시리라고 생각하면 안되겠지요?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해요. “결혼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물으니까 자기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고 해요. “가장 이상적인 남자의 모든 조건을 다 놓고 기도하라”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그래서 어떻게 기도하느냐고 하니까, “키는 얼마, 몸무게는 얼마, 목은 짧으면 안되고 배는 나오면 안되고...” 다 기도하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 뒤에 “그러나 또 이렇게 기도하라..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는, 말하자면 그 기도를 하나님 앞에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처럼 자기의 뜻을 가지고 다 기도를 하지만,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러나”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뜻대로 다 기도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 뒤에는 하나님 앞에 “그러나 내 원대로는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혹시 자신의 원하는 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와 충돌한다면 “하나님, 내 원을 버리겠사오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인생의 이 기도를 이루시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신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었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으심을 얻었다”고 했어요. 이 기도는 응답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을 응답된 것이에요. 왜?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이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진정한 소원은 자기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소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응답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얼마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의해서 좌우되기 보다는 나의 육체적인 생각과 뜻을 위해서 내 욕심에 의해서 좌우될 적이 많은가 하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이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의 많은 이기적인 동기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기도를 하면서도 그 동기에 사로잡힌 기도를 하기가 쉬운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을 우리보다도 더 완전하게 아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보다 더 큰 뜻이 제 기도보다 능가하는 어떤 또 다른 뜻이 계시다면 하나님, 그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 우리에게 선한 것이지, 우리가 보기에 선한 그것이 우리에게 선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에요.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 하면, 바로 이것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선하신 것들이 이루어지는 그것이, 그것도 응답이에요.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기도할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응답이에요.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도 응답이에요. 하나님이 말씀 안하시는 것도 응답이에요. 이루어주시는 것도 응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기도하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세로 진지하게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의 영혼의 유익을 얻는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강도를 높여요. 불을 더 세게 땐다는 말이지요. 믿음을 가지고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실컷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러면 그것은 뭔가 그 안에는 하나님의 메세지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의 기도는 언제나 한계를 갖게 되요.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기도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끝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러나’의 주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가정과 학교와 직장 모든 문제를 위해서 다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러나’의 기도를 잊지 마십시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할때 거기에는 순종의 요소가 앉아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거기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는 순종의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 하나님의 그 기도를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수도 있지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아멘”하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마지막으로 43절에 ‘사자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돕더라...’ 그러니까 천사가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도왔다는 것이지요. 천사가 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도와줬어요? 여기서 답변을 “예수님이기 때문에”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요.
여러분, 왜 예수님을 도와줬어요? 여러분이 기도할때 천사가 도와줍니까? 누군가가 기도할때 나를 도와주는 것같은 것, 느낀 적 없어요? 성령이 나를 기도할때 강력하게 도와주신다고 느낄때 있어요? 어떨 때 느껴요? 왜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천사의 도움을 경험하지 못한는 이유는 무엇때문이지요? 이유는 간단해요. 힘을 다해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천사가 왜 도와줬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주님이 힘이 너무 없으시니까 와서 도와주는 거에요. 우리를 좀 도와주고 싶어도 힘이 펄펄 남았아요. 천사가 와서 할 일이 없어요.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을 쏟어붓는 것처럼... 그래서 옛날의 신앙의 선배들은 기도를 진을 빼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정말 그래요.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자기의 몸에서 어떤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껴요. 그렇게 힘든 노동이에요.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그러니까 응답 뿐만이 아니라 기도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계속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하도록 밀어주시는 이런 강력한 힘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운을 다 쏟아서 하나님앞에 힘을 다해서 애써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이것은 소나무 뿌리를 흔들거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영혼 깊은 곳에서 쏟아내는 것이에요.
예 화 : 아이를 낳을때는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힘이 들어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도 해산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힘있는 기도의 속으로 들어가 기도하려고 할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이를 분만하는 산모가 그렇게 부지중에 아이가 나오도록 힘이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기도할때 깊은 기도의 힘을 넣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간절히 기도할때 땀이 핏방을 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여러분, 금식기도를 한 일주일 정도 하고 소변을 보면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옵니다. 힘들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기도하시는 육체적인 힘이 얼마나 강하게 들어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기도속에서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앞에 마음을 쏟우붓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마음을 쏟아부으면서 간절히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주시도록, 무엇을 위해서 구하든지, 그것이 비록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도 그만한 기도만 할수 있으면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도를 하다가 그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일때는 기도에 힘이 붙어요. 성령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기도의 제목일 경우에는 그렇게 기도에 간절한 힘이, 처음에는 들어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식어져요.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처음에는 불이 안붙는데 기도하면 할수록 더 또렷해지고 마음이 움직이고 우리의 마음을 불사르게, 우리의 마음에 진통을 가져온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바꾸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펄펄하게 살아있던 사람이 큰 어려움을 몇 번 당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고 나면 부들부들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가서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실 때에 형체가 변하여지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던 것처럼, 기도하면 사람 자체가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자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도우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러한 기도속에서 예수님의 겟사마네 동산의 기도를 승리로 이끌어가도록 만들어가신 거에요, 하나님께서 직접... 왜? 하나님이 기도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왜? “그러나..”이게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겠지요. “하나님! 간절히 기도하오니 죽지는 말게 하옵소서” 그 기도는 계속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었거니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지도 않으셨겠지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고 기도할때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어서 강한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없고 혼자 기도할때는 통성으로 부르짖고 기도할 수도 있지요. 같이 모였을때 열심히 기도해요. 어떤 식으로 기도하든지 간에 마음을 쏟아붓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힘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고 그때우리의 육체의 힘이 다했다고 느낄때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기도의 능력으로 도와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신령한 기도의 세계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보의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로 하신 기도가 중보기도였거든요.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에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실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기뻐하시고 힘을 쏟아서 계속 부으니까 그 다음에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도와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과 우리가 기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면 우리는 말하자면 거의 땅에 떨어지지 않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어요.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열심히 마음을 다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는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우리의 힘이 다 지나가지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해주시는 그 기도의 진수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힘을 쏟아놓고 기도해야 해요.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지금 이 기도를 들어달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하나님이 보실때, 우리가 기도할때 배부른 흔적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있는 자라고 여겨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싫으면 관두구요” 그렇게 기도하면 백날을 기도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없어요. 정말 간절하고 절박하게,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때 정말 어떻게 견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열망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 화 : 지하철 역 입구에 보면 돈 달라고 있는 사람들... 할 수 있으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함... 그 사람이 돈을 받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있지만... 전철 타면 주는 편인데, 사람들 보면 정말로 애처로운 사람이 있고 그렇게 안보이는 사람이 있음... 추운 겨울에 반바지와 찢어진 옷을 입고 엎드려서 손을 떨며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불쌍하다는 마음으로 구제함.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긍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간절히 기도해야 함... 그때 진정한 기도의 능력이 나옴...
3. 미스바의 기도원(삼상7:5-6)
몇 주전부터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물엘 시대때 있었던 미스바의 기도에 대하여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성전이 아직 지어지기 전이었습니다. 이제 사울에 세워지고 다윗이 세워지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세워지니까 훨씬 전이지요. 햇수로 한 200년 전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법궤 얘기를 오늘 하고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미스바의 기도회의 배경이 바로 법궤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리하고 방황하다가 가나안으로 들어오고 난 다음에 이제 하나님의 법궤는 실로라고 하는 곳에 안착됩니다. 그러다가 이제 에벤에셀이라는 곳으로 옮겨지게 되고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적이었던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여호와의 법궤를 들고 나가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그릇된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법궤를 들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 곳에 아벡이었습니다. 그 아벡에 법궤를 들고 나가서 싸웠는데 불행히도 그 싸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패하고 법궤를 블레셋에게 뺏기고 맙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 법궤가 끌려가서 블레셋의 아수도 땅으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가두로 옮겨지고 결국은 에글론을 거쳐서 벳세미스로 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냐 하면, 그 법궤가 블레셋에 들어온 날부터 블레셋은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이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그것을 빼앗았던 블레셋 사람들이 자진해서 법궤를 반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그 법궤가 벳세미스에서 기럇여하림으로 옮겨서 20년 동안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럇여하림에 이 법궤가 놓였을 때는 말하자면 법궤에 은신처 비슷하게 해놓고 거기에 법궤를 안치시켜 놓았지요. 그래서 이제 아비나답의 집에 들러서 그 아들 엘리야사를 구별해서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는데 그러한 법궤의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크게 가난해진것 같아요. 그래서 20년동안 법궤가 그곳에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의 온 족속에게 때아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요. 그게 뭐냐하면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일어나요. 그러다가 사무엘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일장설교를 3절과 4절에서 합니다. 그러고나서 5절에 미스바의 기도회로 모이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래서 3절과 4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 어떻게 일렀는지는 모르지요. 어쨌든 사무엘의 그 뜻을 백성들에게 다 전해주었습니다. 그때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그러니까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선 우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요체는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에요. 하나님이 원히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하나님께 다 바치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결국 신앙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이스라엘 백성의 고민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고민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블레셋 백성들과의 관계였어요. 그들은 남쪽에 있는 족속인데 그 사람들은 굉장히 오랫동안 그 자리를 버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발달한 철기문화를 일찍부터 받아들이고 호전적이에요. 그리고 기마민족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시로 침략해서 곡식을 빼앗아가고 탈취하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먹고사는 그런 족속이었습니다. 하여튼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오랫동안 많은 영향을 끼치고 괴롭혔던 숙적이 바로 블레셋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블레셋을 통해서 이스라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는데 십분 활용하시는 것이에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블레셋은 무엇입니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해결이 안되는, 여러분의 블레셋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을 가로막고 있는 그 환경,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러분들의 숙적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겸비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도 또한 여러분들을 겸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고민거리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잘 아셨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런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방법을 새로운 성경적인 시야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블레셋을 멸하고 최소한 블레셋으로부터 침공을 받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는데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너희안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하면 내가 블레셋으로부터 너희를 건져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블레셋과 같은 난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그 난제를 붙들고 씨름하느라고 해결하도록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많은 난제들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고나면 사실을 문제에 대한 감각도 바뀌거든요. 은혜받지 못하고 예수를 믿지 않을때에는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자기의 인생속에 예수 그리스도, 믿음, 이런 것들이 깨뜨려지고 들어오는 것이에요. 이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 신앙적으로 살면 복을 받는다.... 그런 것 전혀 없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을 다 깨뜨리고 자기에게 다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우리가 변화를 받게 되고 신앙을 갖게 되면 우리의 관심사가 굉장히 많이 달라져요. 그래서 이전에 내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없이 붙들고 씨름했던 많은 문제들을 잠시 잊어버리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사업에 푹 빠져버리면 교회도 잊어버리고 집도 잊어버리고 또 친구들도 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청춘사업에 바쁘면 다른 사업도 다 집어치우고, 직장도 때려치우고...
예 화 : 직장다닐때 낚시에 미친 사람이 있었는데, 월급타서 낚시도구 사와서 자랑함. 찌, 낚싯대, 일제 바늘... 낚시를 안가면 중독증 비슷한 증상을 보임. 고기를 잡아서 다 풀어주고 옴.. 잡는 그 순간을 즐김.. 이 세상에서 한가지에 미치면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음. 그러면서 자기 친구 얘기를 하는데 휴가 삼 일 받아서 낚시를 갔는데 하도 재미있어서 15일만에 돌아와 직장에서 잘림.
예수 믿는 것도 똑같잖아요? 한참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부흥회 조금 더 하지...’ 지난 번 부산에 가서 시편 23편을 열심히 강해를 했는데 3일째 되는 날, 마지막 끝나는 날인데 목사님이 올라오더니 한숨을 쉬면서 “왜 하나님이 시편 23편을 6절까지밖에 안써주셨을까?” 미치면 보이느게 없고 눈에 들어오는게 없는거에요. 그러니까 잠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미쳐서 살다가 보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는 거에요. 그리고 세상의 고민이 고민거리가 안되는 거에요. 너무나 고민했던 것이 “그게 뭐 고민거리가 되나, 하루 세 끼 먹고살면 되지.. ” 간단하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하나님을 바로 믿다가 보니까 나중에 보면 옛날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문제들이 다 해결이 되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이거든요. 돈 따라서 다닌다고 다 돈이 벌리면 안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어디있겠어요? 돈 싫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식과 하나님이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공식이 얼마나 틀린가 보세요. 그러니까 뭐에요? ‘먼저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들 - 이 모든 것들이 뭐에요? 공중을 나는 새에게 필요한 곡식..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너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게 뭐냐하면 “너희의 최대 고민거리가 뭐냐?” “블레셋 족속, 그것이 문제이옵나이다” 하니까 “너희는 블레셋 족속을 보지말고 나를 봐라” 뭐를 보라는 것이에요? “너희가 나만을 (?)히 섬기고 있는지 생각해 봐라. 마음을 다해서 나만 섬기고 있는지 생각해 봐라. 그리고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바알과 아스다롯 상들이 너희들에게 여전히 있지 아니하는가 보라. 그것들을 다 제해버리고 나만 섬기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작고 사소한 문제부터 시작을 해서 가장 큰 문제까지 해결해 나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선지자가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하면서 미스바에서 기도회를 하겠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여호와께 내가 너희를 위해서 기도해 주리라” 그러니까 이 기도회는 매우 특별한 기도회지요. 지도자가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해주면서 백성들은 그렇게 기도해주는 지도자 앞에서 말하자면 믿음으로 금식으로 반응하면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게 ‘미스바’라는 지명이 바로 ‘계명’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회장소를 미스바로 택한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계명을 버리고 바알신을 좇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들을 그렇게 온전하게 행하지 못하는 이 사람들, 그러면서 블레셋 족속에게 시달리면서 고통받고 있는 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미스바’라는 곳으로 불러 모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미스바’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계명들을 자신들이 어떻게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반성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그거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이번에 열린신문에 나온 노정희 자매님이 쓴 기도에 관한 이야기, 아주 잘 썼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내가 하고있다는 생각이 들면 기도할때 힘이 나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증거를 기도속에서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 주일때 다루었던 것이 그거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힘을 다해서 기도하실수 있었느냐? 물론 예수님은 인간적인 힘을 다 쏟아부으면서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그렇게 기도하실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때문이냐 하면 그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힘껏 기도할때 말하자면 힘이 들어가는 기도가 되게끔 만들어 주셨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수 있는 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오랜동안 기도했는데도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있지요? 습관적인 것은 하여튼 영적인 삶에 있어서 좋은 면보다 나쁜 면이 훨씬 더 많은 것이에요. 그렇게 습관적으로 계속 의식없이 하는 기도의 제목들은 사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정상적인 기도로 취급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뭔가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제목인데도 이 기도가 계속해서, 기도하면 할수록 기도가 우리의 힘을 빼앗아가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기도가 점점, 기도는 기도대로 돌고 우리의 마음은 마음대로 돈다면 우리는 그 기도제목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제목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이스아엘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이라고 할때 온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이게 되었는데 모이기 전에 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그 시대 속에서 무엇이 드러나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이 선지자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에요. 하나님만 전심으로 섬겨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욕구불만에 가득 찬 그런 기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당신과의 관계를 돌아보도록 하나님께서는 늘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기도는 헛된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유익이 있어요. 그것은 뭐에요? ‘이렇게 기도하면 응답이 안되는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니까 유익이 있어요. ‘삼년 기도가 소용이 없구나’ 깨닫는 것이지요. 기도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가 없는데.... 그러나 부정적으로 깨닫는 것보다는 긍정적으로 깨닫는 것이 하나님 앞에 소망이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먼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항상 영적이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기도와 우리의 마음과 행함과 이런 것들이 따로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그래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여러분, 모여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오늘 가슴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일하시는 분이시지요. 언제나 하나님은 일하시고 어디서나 일하시는 분이세요. 시간과 공간에 매이시지 않는 분이시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이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여러분, 구원의 역사에 다리를 놓아가는, 위대한 역사를 이어가는 그 징검다리마다 모여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볼까요?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을때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 오히려 사람들이 12명씩 모여있었더고 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면 경찰이 와서 뭐라고 그랬을지도 모르잖아요? 상황이 그랬잖아요. 유대인에게는 각자 흩어져서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제 육시,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했거든요. 정해진 기도 시간이 있었으니까... 또 그 오순절 성령 강림하고 난 다음에도 교회가 그 시간을 지켜서 기도했어요. 그러니까 육시 구시, 그리고 십 이시, 이렇게 세 시간씩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렇게 기도시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각자 흩어져서 기도하면 됐잖아요? 그런데 성령은 그렇게 흩어져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소리에 오시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한 다락방에 모아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셨어요. 그리고 그들은 간절히 하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리고 며칠을 기도했는지도 잊어버리고 사람들은 간절히 한 마음으로 인해서 기도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실때 오백명이 한꺼번에 봤다고 하니까 기도하는 동안에 오백명이 다 왔는지는 모르지만, 점점 점점 떨어지면서 백 이십명이 남은 거지요, 최종적으로...
기도할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어요. (?)교회가 첫번째 핍박을 받아서 사도들을 때리고 심문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도를 전하지 말라는 금명이 내렸을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도를 말하고 주의 종들의 손을 통해서 이적과 기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땅이 흔들리는 역사가 일어나면서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는 재개되었어요. 여러분, 그 유명한, 1907년에 평양을 휩쓸었던 한국교회의 대부흥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 아세요? 그때에 선교회에 속한 모든 선교사들이 평양에 모여서, 일 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두 시간씩 기도했어요. 여러 날을 기도했어요. 기도를 하다가 하다가 너무나 선교부 일이 바쁘니까 누군가가, “이렇게 계속 모여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있는 처소에서 우리 각자가 기도하기로 합시다” 그랬더니 그때에 한 선교사가 말하기를 “우리 그러지 말고 더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두 시간을 네 시간으로 늘렸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선교사들이 모여가지고 넉달인가 동안을 간절히 그 장대현교회의 집회를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거에요. 그렇게 모여서 기도했을때, 또 모여있는 성도들 위에 말하자면성령이 부어주시는 역사가 일어난 거에요. 여러분, 그때에 전국 각지에서 700여명이 운집했다고 하니까 -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몇 명이나 되었겠어요? 그때 700명이 모였으니까 그 사람들 얘기로는 거의 북녘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남쪽에 있는 사람까지도 짚(?)를 삼아서 뒤에다 메고 하나씩 갈아신으면서 모인거에요. 자기의 먹을 쌀을 가지고... 그렇게 모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거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모이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의식이 없이 모이니까 모이나 마나가 되는 것이에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모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거에요. 어떤 자세를 가지고 모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일때에 역사를 하셨어요. 그리고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면서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셨어요. 어떤 교회의 역사를 보든지간에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부흥을 주시거나 한 교회와 도시에 부흥을 주실 때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모으셨어요. 그리고 모인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거에요.
여러분, 얼마나 재미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는 장면까지 보기 위해서 쫓아나왔어요. 그 사람들의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지요. 그런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나와있는데도,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그 500여명의 모든 사람들, 교회의 승천의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고 앉아서 10일째까지 기도한 사람들에게 부어주신 거에요. 9일까지 기도하다가 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90%의 은혜를 받고 갔을까요? 아닙니다.
성령이 부어지기 그 직전에 자리를 뜬 사람들도 갔어요. 그리고 그 마지막까지 거기에 남아있던 그 사람들이 성령이 놀랍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이는 것, 나아가서는 그 모임을 지탱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그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에 시골에서야 교회가 어디 가깝습니까? 멀잖아요. 새벽에 시골에서는 네시에 종쳐요. 서울에서도 그랬어요. 그런데 시골 노인네들이 말이에요, 그 새벽기도를 사명으로 알고- 새벽기도도 마찬가지고 밤 예배도 마찬가지고, 그것도 굳이 남의 교회가 아니라 자기 교회를 고집하면서 십 리씩 십 오리씩 걸어서 새벽기도 참석한 것, 그게 무엇때문이에요? 그것은 단지 신앙이 유별나거나 뭔가 신앙적으로 정리가 안되었기 때문에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중심적으로 역사하시고 이루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곳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어야 한다라는 일념이었어요.
지난 금요일에 많이들 오셨더라구요. 열심히 기도했어요. 그런데 교회는 일주일에 몇 번 와야 하는 곳이라구요? 매일 와야 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피치 못해서 일주일에 네 번이나 다섯 번 나오는 것이지요. 그것이 신앙생활이 방해가 된다고 하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모이기가 너무너무 약해지는 것, 이것은 ( ), 그 다음에 ( )사람들이 모이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기 자기 일에 매우 바쁘고 고달픈 삶을 살아서 관심이 나뉘어져서 신령한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모이는 이러한 일들이 급격히 사라진다, 이것은 이미 벌써 예언된 일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네가 이 문제를 ( )”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오히려 여러분들이 “주여. 이미 내가 여기 있사옵나이다” 하나님께 손들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가 있고 슬퍼하실 때가 있어요, 성경에.. 슬퍼하실 때는 “너희들이 모여서 무얼 하느냐? 너희는 성전에 발 한 번 들여놓는 사람들이 아니냐? 나는 너희들이 ( )로 모이는 것이 싫고 절기로 모이는 것이 싫고, 하여튼 너희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모이는 것과 월삭과 대회로 모이는 것이 나는 싫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어떨 때?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면서 모일때... 그때 그 모임은 하나님을 구하는 모임이 아니에요.
누가 저에게 그런 얘기를 해요. 굉장히 큰 교회인데, 자기가 교역자로 그 교회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모이는 무리라는 느낌이 안든데요. 어릴때 보면, 할아버지가 이 교회에 다니시니까, 증조 할아버지때부터 다녔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결혼했으니까, 아버지가 다니니까 나오는 거지요.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며 모인 것은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시는 바에요.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너무 기뻐하시는 것이에요. 이 글에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두 세 사람이 모인 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함께 있느니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 두 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에요? 그 앞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한 사람이에요. 하나님 앞에 흠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에요. 두 세 사람이 모인 그 곳에는 나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무엇을 구하든지 나는 너희를 위해서 응답해 주겠노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여서 기도하는 일에 우리는 너무나 약해요. 모여서 노는 일에는 우리 민족처럼 강한 민족이 없어요. 돈 10원, 20원 가지고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사람도- 양주 한 잔을 누가 계산을 했어요. 한 잔에 좋은 것은 3만원까지 간다고 합니다. 그것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에요. 약먹는다고 하면서 약봉지를 보여주어도 약봉지를 뺏으면서 “이거 먹으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모여서 노는데는 1등이에요. 곗군들 모이는 것 봐요. 일사불란하게 모여요. 평일 낮에 좀 한다 하는 음식점에 가 앉았으면 온통 전부 다 여성 동지들 천지에요. 모여서 한없이 시키고 먹는 거에요. 다 먹은 후 책상 밑으로 돈이 오가는 거에요. 그게 뭐하는 거에요? 곗군들이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도 교회 일때문에는 안모이지만, 속된 일에 의해서는 얼마나 잘 모이는지 아세요? 세속적인 모임을 갖자고 하면 얼마나 잘 모이는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마지막 때의 모임의 성격이에요. 사람들은 모이기를 좋아해요. 얼마나 모이기를 좋아하는지 집이 전원에 있는 사람은 ‘전원주택 동네’ 개 키우는 사람들은 ‘애견 동네’, 보신탕 좋아하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심지어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제목들로 모이는 것이에요. 하여튼 모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 처럼 모임을 만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세상 사는 것이 고달플 수 밖에 없어요. 회원증 대여섯 개 이 세상에서 안갖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것저것, 만나고 망년회를 한다 하면 일곱번을 했는지 여덟번을 했는지, 그러면서 살려고 하니까 신령한 하나님을 위해서 모일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로 모이는데 여러분이 계 타는 날이면 모임이 안갈리가 있어요? 계를 타야 하는데... 우리는 계를 타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러 나오는 것입니다. 모이는 날이 계 타는 날이에요. 하나님 앞에 모임을 갖고 축복받는 날인데 모이기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은 그 모임이 순결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교회가 사람만 많으면 되느냐? 고 하는데, 제가 여태까지 수없이 집회에 다녀봤는데 사람은 별로 안모였는데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모이는 교회, 그것은 이론상으로나 가능하지 실제로는 없어요. 예를 들면 교인들이 주일 낮에 나오는 사람이 800명인데 지금 시작을 했는데 400명도 안나왔어요. 그러면 알짜만 나왔느냐? 알짜면 뭐 알짜에요? 말씀을 전해보면 알잖아요? 맛이 간 사람이 반이에요, 어차피...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 교회는 주님을 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야지요. 모여서 기도해야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집, 모여서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 그런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늘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 미스바의 성전의 특징이 뭐냐? 우선 모이는 집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었을까요?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미스바에 모여서 이들이 물을 길어와서 부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 앞에 부었다고 했는데, 하나님 앞에 도대체 물을 부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거기에 대한 해석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왕기상 18장을 봐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그 유명한 엘리야의 갈멜산의 기도가 나옵니다. 한번 펴볼까요? 18장 32절입니다. ‘선지자는 나만 남았고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이라...’ 어느 신이 참 신인가 한 번 보자 하고 대결하는 장면 아니에요? 32절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들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아멘’ 그러니까 여기에서 나온 것이에요. 도랑을 파고 번제물을 쌓고 거기에다가 짐승의 각을 떠서 올려놓고 물을 부은 거에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냐?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기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즉, 무슨 뜻인가 하면 그렇게 놓고,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자기의 신에게 기도했잖아요? 최대의 숙제는 누가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인가? 불을 내리는 신을 보자... 하다가 안되니까 자기 몸에 칼자국까지 내면서 광신적인 행동을 했지만, 그러나 하늘은 잠잠했어요. 그러나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왔습니다.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온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에요.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셨다는 증거로 불로써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불이 하나님의 임재로 씌여진 것은 성경에 너무나 풍부해요. 우선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내어 쫓으신 후에 동산을 두루 지키실 때 거기에 화염검이 나오지요? 그리고 또 어디서 불이 나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으로 꼽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짐승을 쪼개놓고 제사를 드릴 때에 불로 지나가는 장면이 나오지요. 이렇게 풍부하게,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때 불기둥으로 나타나시지요. 이렇게 풍부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이 나타나신 것이에요. 결국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길어서 여호와 앞에 그 번제물에 부은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이렇게 부은 물을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불로 모두 태우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친 이 제물을 열납해 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하는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지요. 결국 사람들이 기도하러 모일때에 그 모임의 기도가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기도가 있는 기도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즉, 다시 말해서 기도의 추구와 목표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그 회중 가운데 나타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행하고 싶어하는 그 일들을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그런 일들이 기도회의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서 물을 길어서 여호와 앞에 제단을 쌓고 거기에 번제물과 나무와 그리고 주위에 파진 도랑에 물을 부으면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하니, ‘우리의 이 모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그것을 느낀 거에요. 왜 그 임재를 필요로 해요? 왜 필요로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이 모여있을 때 이루어주시는 그 임재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래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시고 함께 역사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에, 말하자면 하나님이 앞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너희가 나를 섬기면 내가 너희를 블레셋 손에서 건져내리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표증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에요. 모세가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때 이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뭐라고 해요? “생명책에 있는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나중에 “알았다. 내가 그렇게 하마”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때 모세는 거기세 그친 것이 아니라 뭐라고 했어요? “정말 하나님의 백성을 도와주시렵니까? 당신이 백성을 정말로 버리지 않고 가나안까지 인도해 주시렵니까?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주시옵소서” 그런데 이게 뒤집어서 얘기하면 참 건방진 얘기거든요.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했는데 높으신 분이 “알았다 내가 너를 밀어주지” 했는데도 “각서 써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어느 장로님이 “목사님, 교회를 건축을 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3억을 대겠습니다” 그랬대요. 그것도 한 번 얘기한 것이 아니라 공식석상에서 여러 차례 얘기하니까 그것을 덜컥 믿고 시작을 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마음이 변했어요. 그러니까 큰 교회가 어려움을 당했어요. 그러니까 그 옆에 있는 변호사 장로님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했더니, “그럴 때에는, ‘제가 몇 억을 내겠습니다’ 하면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장로님, 잠깐 제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지금 말씀하신 것을 여기에 간단하게 써 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고는 도장을 받아놓으십시오” 하더래요. 그래야지만 어려움을 안당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게 그러겠어요? 헌금하겠습니다. 하니까 목사님이 “그것을 여기에 좀 적어주세요”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어요? 하나님이 “그래 내가 용서해주고 너희를 도와줄께” 그랬으면 됐지, 아니 지존하신 분이 하시겠다는데 “하나님, 각서를 써주십시오. 표증을 보여주시옵소서. 내가 무엇을 보고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키실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표증을 보여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자들을 “믿지도 못하고, 믿음도 하나도 없고, 내가 된다고 하면 되는 것이지 뭐 그렇게 말이 많느냐?” 그러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표증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러니까 “내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으니 너는 내 등을 보리라” 그러면서 그 앞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나가시는 것이에요. 그 놀라운 영적인 표증을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구약에 나타난,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바에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 )가 나타나는 작은 표증을 구한 것입니다. (..... )
가뭄에 시달릴 때 농부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일어나자마나 제일 먼저 쳐다보는 것은 하늘이에요. 이번 시골교회에 집회갔는데 그곳에서 그래요. “목사님은 시골교회의 목회자 마음을 모를겁니다.” “모르지요” 했더니, “비가 안와서 가무는데 속이 탑니다.” 라고 해요. 속이 탄대요. 새벽기도때마다 기도제목이 “주님! 오늘은 주시렵니까?” 그게 기도제목이래요. 비를 주시도록 하나님앞에 간절히... 왜? 대부분이 농사짓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하나님앞에 타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거에요. 그런데 기도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늘을 본다는 거에요. 봤는데 맑고 환한 하늘이면 그렇게 마음이 섭섭할 수가 없대요. 그런데 어느 날 기도를 간절히 하고 탁 나와보니까 구름이 떠오르는 거에요. 작은 구름이 떠오르는 거에요. 그리고는 그 구름이 아침먹고 나오니까 점점 커져요. 그게 무슨 표증이에요? 큰 비가 내릴 표증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너무나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작은 그 표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행하시고 계시고 있다라고 하는 표증을 보여주기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표증을 믿고 자기를 하나님앞에 의탁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염려해서 안된다는 것은 머리로 다 알아요. 그렇지요?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씨름하고 애써봐야 해결이 안된다는 것을, 둘이 합쳐봐야 200도 안되는 IQ를 가지고도 다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리들이 그 염려와 근심을 놓지 못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앞에 펼쳐진 블레셋과 같은 이 난관을 극복하고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지만, 더 궁극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표증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표증을 발견하지 못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하나님앞에 모여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끝나고 나면 블레셋은 모두 자기의 땅에서 시체로 뻗어있을 것이다.. 그렇게 공상적인 생각은 안했어요. 기도가 끝나도 블레셋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있었어요. 그러나 뭐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라고 하는 표증을 하나님의 번제물 위에 나타내 보이시기만 하면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었던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 생각해 봅시다. 기도할때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의 표증을 구합니까? 기도원의 기도를 기억하시죠?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응답을 물을때 양털을 놓고 바위위에 놓고 기도했어요. 주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양털만 젖게 해 주시옵소서. 양털 주위의 바위만 이슬이 젖게 해 주시옵소서. 뭘 구한 거에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장난친 것 같잖아요? 기도하고 나더니 바위 가장자리만, 또 조금 있으니까 털 위에만... 장난하자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순순히 다 들어주시는 이유는 무엇때문이에요? 그 기도가 하나님의 표증을 구하는 기도였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표증을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뜻대로 살고싶어하는 소원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에요.
오늘 가타부타를 분명하게 하고 들어가요.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정말 살고 싶어하는 소원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앞에 기도하시는 것이에요. 표증을 구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내 앞에 있는 블레셋과 같은 이 큰 문제, 교회앞에 있는 그 커다란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한데 이 믿음은 표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 표증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앞에 쌓는 거에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랑을 파고 거기에다가 나무를 올려놓고 거기에 소나 짐승을 올려놨어요. 가만히 내버려둬도,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어도 그게 탈리가 없어요. 누가 가서 불붙이지 않으면 탈리가 없다구요. 거기에다가 또 뭐를 붜요? 물을 부어가지고, 그건 무슨 얘기에요? 인간이 불을 질러도 도저히 불은 안타고 하나님의 신적인 불이 내려와서 핥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 제단에 불이 붙을리가 없잖아요? 그러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계산될 수 없는 그 일들을 행하는 거에요. 여러분, 여기에 이 불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나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제단을 쌓는 백성들의 마음이에요. 여러분, 장작을 놓고 고기를 갖다 얹어놓고 물을 바께스로 부으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고기를 태우고 장작을 태우고 그 다음에 도랑의 물을 다 핥고 지나가는 역사가 날이면 날마다 일어났어요? 매일 일어났어요? 일주일에 한 번 일어났어요?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기대할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로써 임재해 주시리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단을 쌓은 거에요.
그러므로 몇 사람이 모이든지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가 모이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마음을 다하고 심령을 다하고 하나님앞에 부르짖고 그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은 ( )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 얼굴을 구하는 백성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확신, 믿음, 이것이 기도의 제단에 불붙게 만드는 것이에요.
여러분, 믿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앞에 힘없이 중얼거리다 간 기도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의 때를 수없이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사람이 일할 때는 사람이 일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어디있는지 오늘 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장 커다란 난관, 그리고 우리앞에 놓여있는 블레셋과 같은 수시로 반복되고 있는 습관적인 인생의 고난과 고민과 고통과 어려운 시련거리들은 많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현실적인 임재를 기대하며 하나님앞에 마음을 다하며 기도했는지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고민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는지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 화 : 지난 번에 사천에 있는 교회 부흥회에 갔다왔는데 그 교회에서 계속 편지가 올라옴. 교인이 약 20명이 안되는데 작은 교회에 와서 부흥회 인도해서 감사하다고 편지가 날라옴. 그 교회에서 점심먹다가 교역자를 만남. 재미있는 간증. 교회를 했는데 10명이 안모임. 하다가 지쳐서 그만둘려고, 노회장에게 가서 “제가 뜻이 있어서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오라가야 하겠습니다”하니까 “무슨 뜻이냐?” “이해가 안됩니다.” “네가 교회를 놓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진심으로 기도해 본 적이 있느냐?” 하니까 그 전도사님 얘기는 그 말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림. 결심을 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열 명도 안되는 교회에 600평 땅을 주심. 그래서 교회를 짓고, 그 자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리인 줄 알고 충성을 다해 하나님앞에 지킴...
우리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에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사모함, 하나님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 만으로는 안된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얼굴을 비쳐주셔서 “하나님이 정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셔서 우리의 가지고 있는 이 모든 무기력함과 무능과,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의 많은 문제들과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일시에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라고 하는 그 굳세고 강력한 믿음과 기대,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간절히 나오는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흔히 일어나지 않는 그 일들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물을 붙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지난 달에도 일어나지 않았고 작년에도 일어나지 않았고 재작년에도 일어나지 않았고 10년 전에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자신들에게는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의 사랑을 끊었어요. 아스다롯과 바알로부터 오는 도움을 힘입어 살려고 하는 모든 생각을 끊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앞에 물을 부으며 “여호와여!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강림하옵소서. 이 제단에 묻은 물들을 태우시고 이 모든 것들을 살라버려 주시옵소서” 하며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표증을 나타내시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결국은 이렇게 물을 길어서 여호와앞에 부었으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죄의 물(?)이 따랐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희생이 있는 자세로 이 미스바의 기도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앞에 간구하지 못할 이유는 수없이 많아요. 여러분, 금요일날은 워낙 차가 막히는 날 아니에요? 직장다니는 사람에게는 그 날이 술마시는 날 아니에요? 모임도 많고 교통도 밀려요. 오지 못할 이유는 너무나 많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앞에 이렇게 미스바의 기도회를 드릴때 희생이 있는 기도회를 하나님앞에 시작한 것이에요. 그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드리며 짐승들을 쪼개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임재에 대한 기대는 있고 희생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기도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목이 터져라 하나님의 은혜를 부르짖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는 거룩하고 신령한 기도로 그들의 눈빛들이 하나님의 보좌로 모아졌습니다. 심령이 하나님의 보좌로 모아지고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데 그들에게 아까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의 시간과 건강과 자기의 모든 것들을 다 쪼개어서 하나님앞에 바쳤습니다. 짐승을 쪼개어서 제단위에 바치고 물을 부을때에 그들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쪼개어서 제물로 바친 것이며 동시에 그들속에 있는 수많은 눈물들을 하나님앞에 바친 것입니다. 희생이 있는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제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가끔 억지 은혜를 주시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정말 다른 것은 몰라도 기도는 강제로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정말 하나님앞에 헌신이 있는 마음으로 나와서, 그래서 다른 사람은 어떻든지 나는 오늘 이 시간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실 지라도 나는 벌려놓은 이 제물에 쏟아부은 이 흥건한 물을 하늘에서 내려진 불이 이 모든 것들을 태우고 살라주시는 이 표증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교회가운데 그리고 이 백성의 역사가운데, 나 개인의 인생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의 일들을 행해주실 것이라는 표증을 볼때까지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나는 여호와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리라... 왜? 하나님께서는 간구하고 하나님앞에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응답해 주시지 않으실 수 없는 분이에요. 여러분, 온 땅을 두루 감찰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기울이며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모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그 임재의 표증을 보여주시기를 사모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지요.
여러분, 원가 인생의 커다란 난관앞에 좌절하는 것같은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가? 왜 나의 신앙생활에는 이런 표증들이 안나타나는가? 왜 나의 생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이 안나타나고 있는가? 여러분, 표증을 구해보셨습니까? 여러분,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그 일들을 기대하면서 “하나님, 주님이 나에게 은총 진리를 보여주시기 까지는 내가 무릎꿇은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나이다”라고 하면서 간절히 하나님앞에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인과 더불어 싸우고 하나님앞에 투쟁해야 합니다. 그 ( ) 지난 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셨어요. 성경에서 ( ) 있지요? ( ) 그것이 헬라어에서 보면 “씨름하다”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면,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 ( )과의 싸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그리스오 예수의 마음, 그것과 이 세상의 방해와의 강렬한 싸움이에요. 그것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만 모여진 것을 떨어지는 땀속에 섞인 피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에요.
여려분,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은 판에 박히고 경솔한 기도들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어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앞에 제단을 쌓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단을 기억하신 것이에요. 왜?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도뿐만 아니라 희생이 있는 제단을 하나님앞에 쌓으며 하나님앞에 기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증거는 짐승이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하니까 그 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응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오늘도 기도할때 하나님앞에 바쳐져야 할 제물이 있어요? 기도는 불이에요. 기도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불이에요.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이 어려움과 고통은 우리속에 있는 고뇌에요. 그래서 그 불이 우리속에 있는 못된 자아를 다 태우는 것이에요. 우리속에 있는 더러운 자아와 찌꺼기들을 하나님앞에 다 태우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바뀌는 것만큼 우리를 향한 당신의 태도를 바꾸어 나가시는 것이에요. 여러분, 희생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앞에 기도의 영을 유지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 기도의 영이 우리안에서 역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사람들에게 다 늘어놓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허함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 간구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채우시고 우리의 심령속에 새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러분들이 새롭게 기도로 무장되어서 이기며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오늘 듣고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4. 실패 앞에서의 기도Ⅰ(수 7:6)
몇 주 전부터 우리는 오후시간마다 기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 오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다양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만남은 역시 죄인인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던 유 무명의 많은 성도들의 기록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뵈옵기를 사모하고 갈망했는가, 때로는 피치못할 상황과 처지때문에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영혼속에 일어나는 커다란 고통때문에 하나님을 찾기도 했습니다. 어쨌든지간에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들을 기도로 표현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여호수아 7장에 나와있는 이 장면을 몇 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여호수아 7장과 8장,9장에 걸쳐서 상세하게 이스라엘 역사속에 일어났던 작은 사건을 싣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성의 전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앞전에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제일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성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굉장히 큰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여리고라는 성을 이스라엘에게 정복하라고 명하실 때에 정말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 성을 점령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단지 일주동안 성 주위를 돌았을 뿐이고 한 것이라고는 마지막에 소리지른 것 밖에는 한 것이 없는데 성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삽시간에 팔레스타인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로 알려져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하다가는 뼈도 못추린다는 소문이 각 나라 백성들에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이 여리고 성의 점령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최고조에 달했어요. 그래서 광야에서 볼 수 있었던 그 불신앙 등은 다 쓸어버리고 이제 새로 태어난 신세대의 새로운 믿음으로 이제 가나안 정복의 역사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사기가 충천해 있었습니다. 우선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그런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지요. 법궤를 들고 발을 들여놓자 요단강 물이 마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여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 소수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면 교회가 여기에 있다고 알리지 않아도 세상은 교회를 주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팔레스타인에 분포한 수많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자기들을 좀 보아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광야를 지나왔고 드디어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요단의 물을 말리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단의 물을 말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팔레스타인에서 유명한 여리고 성, 그 엄청난 성을 - 후세의 고대학자들에 의하면 성벽이 두 겹으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외벽과 내벽으로. 그래서 무너질 때에도 바깥쪽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무너지도록.. 그런 엄청난 성을 정복하는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험했어요. 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여기 있다. 우리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 소문을 모두 듣게 되었어요. 이제는 모든 팔레스타인의 백성과 나라들이, 한 번도 광고하지 않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움직임에 온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때문이에요? 이 백성들이 움직일 때마다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알아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렇게 믿지 않는 모든 나라의 주목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리기에 앞서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함께 하는 그 교회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될 때에 그 때에 선교적인 중요한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데 세상에 교회를 알리는 비결은 세상의 상품이 알리는 방법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만방의 주목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 그리고 여리고 성을 점령했어요. 그 여리고 성을 점령할때, 그 어마어마한 성이 무너질때 얼마나 장관이었겠습니까? 저는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남산 외인 아파트, 저도 거기를 차를 타고 지나갈 적마다 ‘세상에! 저 좋은 경관을 해치는 아파트를 짓게 허락했다니’하고 분개하면서 지나다니곤 했어요. 그게 무너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싶어서 몰려왔습니다. 저도 TV로 봤지요. 대단했습니다. 그게 일시에 무너지는데, 필름을 거꾸로 돌리니까 다시 지어지는 모습이에요. 무너지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이게 여리고 성에 비교가 되겠습니까? 어마어마한 장관의 역사였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막 도는데 밖으로 무너졌으면 난리가 났을텐데 안쪽으로 무너지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도 안다치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기가 충천했지요. ‘이제는 하면 되는구나. 이제는 뭐든지 우리 손에 있구나’ 그 성을 뚝딱했는데 그 다음 점령지가 어디인가 하면 아이성이에요. 이제는 정탐군이 가서 정탐을 하고 와서 하는 얘기가 무엇인가 하면, 여호수아에게 “우리가 여리고 성을 점령하듯이 온 백성이 전부다 ‘돌격앞으로’해서 이 아이성을 점령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군대의 수치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까, 조그만 성인데 “온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마시옵소서” 그러니까 온 백성이 수고할 가치가 없고 이삼천이면 족하다는 얘기입니다. “이삼천만 주시면 가서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하니까 여호수아가 많이 써서 삼천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갔다가 돌아왔는데 보니까 그 조그만 성에 삼천의 군대를 보냈는데 결국은 점령을 하기는 커녕 거기서 패배해서 도망을 하고 그 뿐만 아니라 아이성 사람들이 추격을 해서 도망가던 사람 36명 쯤을 비참하게 죽였어요. 그리고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예 쫓아낸 것 뿐만 아니라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린이라고 하는 곳까지 쫓아 내려왔는데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공격을 당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도망다니는 군대들을 보고 바로 얼마 전에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군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쫓겨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쫓겨 내려오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이에요? 그들은 매우 다혈질적인 사람들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하고 비슷하지요. 뭐라고 했는가 하면,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조금 전까지는 ‘요단강을 건널 때에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은지라’했는데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제는 자기의 마음이 물같이 녹았어요. 이 물같이 녹는다는 표현은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스라엘이 얼음이 있는 나라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앞에 너희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 넣어라’ 또 ‘물같이 녹았더라’는 표현이 많이 나와요. 하여튼 이것은 깊이 낙담해서 두려움 속에 휩싸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렇게 된 것이에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는가 하면 “봐라. 내가 함께 하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요단이 마르고 수많은 열방의 민족들이 너희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그리고 너희의 눈앞에서 그 어마어마한 여리고성이 무너져서 결국은 너희가 짓지 아니한 그 성을 차지하고 그 백성들을 모두 이겼지만, 봐라, 내가 함께 하지 않으면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라” 아이의 사건을 통해서 주님이 이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개인으로 보나 교회로 보나 우리의 최고의 자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믿음의 사랑, 믿음이 충만한 교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고 계실 때에만 하나님의 교회에요. 하나님을 사랑해요.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붙들고 계신 것이 얼마나 커다란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깊이 깨닫게 만드신 것이에요. 그리고 어떤 때 하나님이 이 자비의 손을 놓으시는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정복 초기에 아예 깊이 가슴속에 (?)시켜 놓으시려고 하나님께서 이 장면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개인적인 신앙을 생각함에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실 때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고 계실 때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향기를 드러내고 그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는, 전세가 완전히 반전되었어요. 이제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이성에 있는 그 조그만 군대들이 쳐들어올까봐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이 아이성에 있는 사람들이 공격을 해 오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만일 이렇게 물같이 녹았을 때에 이 사람들이 공격을 해 왔다면 영락없이 패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심경적으로 벌써 마음이 녹아서 패배한 경우에는 싸울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우리가 죄된 육체와 하나님앞에 거짓 태어나는 것과 그릇된 것들이 자꾸 살아나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한편으로는 잔인할 정도로 죽여야 해요. 또 한편으로는 계속 살려야 해요. 불씨를 살리듯이. 우리들 속에 ‘주일을 지키고...’ 하는 말씀에 ‘아! 맞어’ 하나님께 기도를 안하다가도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가면 ‘아! 맞어. 기도를 해야 해’ 요만큼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잖아요. 큰 은혜를 받으면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작은 그 마음들이 있잖아요?
한 번은 집회를 갔는데, 기도를 아주 안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슬퍼하셨대요. 그래서 전혀 생각지 않았다가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데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갑자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그랬어요. “평생이라면 못하지만, 또 다음에 수련회 할때 제가 갈지 안갈지도 모르겠지만 다음에 수련회할 때가지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기도할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하니까 우후죽순처럼 드는 거에요. 그 다음에 세 시간, 두 시간, 한 시간까지 했어요. 대단하더라구요. 그런데 나중에 그 목회자에게 들으니까 그것을 지키려고 - 큰일난 거에요. 다섯 시간 이상 기도한다고 했으니까. 기도의 세계가 깊은 사람에게는 덜 힘들겠지만, 그중에 은혜를 받아서 뒤집혀 가지고 다섯 시간에 손을 번쩍 들었는데 큰일난 거에요. 그것을 지키려고 하나님 앞에 애를 쓰는 거에요. 그러면서 매달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기도를 하려고 그렇게 매달리면서 하나님앞에 엎드려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이뻐 보이겠어요? 그게 사랑의 표형이지요. 정말 하나님앞에 놀라운 거지요. 그렇게 ‘하나님앞에 기도해야겠다’ 라고 하는 강한 도전을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백성들이 마음이 물같이 녹아버리니까 기도할 마음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오늘 우리가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제 모두 마음이 완전히 패배한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뭔가 도전하려는 것이 강하게 역사할 때에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해야겠다라는 마음이 조금 살아나잖아요?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세상에 살면서 또 꺼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조그마한 불씨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후-우, 후-우’하고 계속 살려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 기도하지 않으려는 태만, ‘교통도 막히는데 금요기도회에 안나간다고 해서 뭔 일이 생기는 것인가? 그런 소문도 별로 없던데’ 이런 마음은 자꾸 죽여야 합니다. 잡초를 뽑듯이 뽑아야 합니다. 내버려두면 거목처럼 크듯이 되어 뽑지 못하니까... 그때는 도끼가 필요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조그만 싹들이 자랄때 계속 짓밟고 괴롭혀서 아예 못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해야겠다는 좋은 마음은 요만큼 솟아나고 나쁜 마음은 막 자라나니까 거기에 묻혀서 뭔가가 안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좋은 마음들을 ‘후-욱, 후-욱’하고 살려야 합니다. 불을 피울때도 말입니다. 요만한 불씨를 놓고 ‘후욱’하고 불어요. 그리고 마른 장작을 조금씩 올려놓고 불면 이윽고 큰불이 되어서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커다락 장작을 올려놓아도 막 불길을 내면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물같이 녹아서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망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 모습 속에서 어떻게 여리고성을 허물어뜨린 위대한 백성들의 역사를 볼 수가 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마지막날 일곱 바퀴를 돌면서 일제히 “와아!” 했을때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때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함성 소리가 어떠했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석에 삼삼 오오 쭈그리고 앉아서... 원래 패배할때 말이 많은 법이에요. 교회도 은혜가 충만하고 승리할 때는 말이 없어요. 뭔가 은혜가 떨어지고 자꾸 영적인 싸움에서 패배하면 삼삼 오오 수군거리는게 많아요. 수군수군 대면서 주저앉아서 한 숨을 푹푹 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우리 앞에 있는 난관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얼마나 함께 해 주시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그러한 상황이 되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게 뭐냐 하면 한 사람이 엎드리는 것이에요. 누군가 하면 여호수아에요. 잘 될때는 지도자를 쳐다보지 않아요. 잘 안될 때 지도자를 쳐다보면서 “저 사람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다음에 교만해 졌나? 왜 우리가 졌을까?” 그리고는 잘 되면 자기 탓이고 안되면 지도자 탓이 되는 것이에요. 여호수아는 하나님 밖에는 바라볼 분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엎드려서 옷을 찢고- 이 옷을 찢는다는 의미는 구약성경에서 비통한 마음을 하나님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후일에는 사람들이 괜히 찢는 것이에요, 이것을. 그러니까 뭐라고 했는가 하면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고 하는 것이에요. 왜 아깝게 옷을 자꾸 찢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태에서 옷을 찢는 거에요.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 소나무 뿌리를 뽑는다는 것이에요.
누가 기도원에 갔는데 방금 심어놓은 묘목을 붙들고 계속 씨름했다는 거에요.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하다가 보니까 손에 소나무가 붙잡혔고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으면 그것을 잡았는지 안잡았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앞에 “믿사오니”하다 보니까, 그때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소나무도 없었지요. 그런데 기도를 하고 보니까 그게 뽑혔더라.. 그러니까 얼마나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바라보며 그렇게 기도를 했으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뽑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하나님앞에서 자기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하고 원통한지를 나타내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옷을 찢는 거에요. 옷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위엄과 존엄의 상징인 것이에요. 이것을 찢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앞에 자기의 비천함을 말하면서 애통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저는 옷을 찢는 것은 못봤지만 어른들이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에 치마입은 사람들이 주저앉아서 막 머리를 잡아 당기면서 괴로와하는 사람들은 본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옷을 찢으며서 하나님앞에 기도했다는 것은 여호수아가 이미 아이성에서 받은 충격과 하나님앞에서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애절한 것이었는가를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여러분, 기도는 고상하고 큰 것만이 기도의 제목이 아니에요. 무엇이든지 기도의 제목이에요, 무엇이든지. 자녀들이 있어요.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나와서 말하는 것이에요. 아버지에게 나와서 말할때 “아빠, 세계 평화를 위해서 뭘 해줄거야? 지구는 누가 지켜야 하지?” 그렇게 물어봐야지만 아버지가 “그래, 참 말같은 얘기 하느구나. 지구는 독수리 오형제가 지킨단다” 애들이면 애들답게 “아빠, 나 자전거 한 대 사줘.” 아니면 “성적을 못맞았는데 요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니면 “야구르트가 먹고 싶어요” 그런 것을 얘기할때 부모가 “너는 벌써 다섯 살이나 됐는데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냐?” 그러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기도의 제목 자체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말해준다기 보다는 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괜히 고상한 기도제목을 본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지금 가장 고통하고 가장 근심이 되는 문제, 그것은 잔뜩 쌓여있는데 그것들은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께 내놓기에는 너무나 속된 기도제목이니까 “이것은 원래 세속적인 제가 알아서 하고....” 그런 사람속에서 고상한게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기도할때 기도는 하는데 자기의 마음에 와 닿는 기도제목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피상적인 기도가 되고 그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안되었는지도 모르는 이유는 자기가 기도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태도가 모호하니까 응답도 애매모호하게 온 것이지요. 그러니까 뭔가 고상하고 높은 기도제목만이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만이 참된 영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여러분이 필요한 것, 여러분의 마음에 가장 근심이 되는 것, 그리고 고통거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제목이라는 것입니다. 왜? 결국은 말이에요. 우리가 가장 많이 염려되고 안타까와하는 그 기도제목이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야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태도가 문제지요. 여호수아 한 사람만이 이 난관 앞에서 옷을 찢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앞에 기도하러 나아가는 그 사람의 태도가 얼마나 하나님앞에 간절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에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두 개의 그림자였어요. 그게 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버려두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와 같이 백성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니면 문제의 해결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할때 그 백성의 성질을 여호수아가 인도할때도 백성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성질이 뭐에요? 하다가 뭔가 안되면 지도자를 향해서 돌을 드는 거에요.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의 땅에서 인도하였느냐?” 잘 될 때는 누가 인도했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그리고 잘 안될 때는 하나님은 간 곳 없고 모세에게 “네가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인도해 낸답시고 우리를 데려와서 이 어려움을 당하게 하였다”는, 그러니까 마음이 물같이 녹아서-이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카리스마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기적의 놀라운 역사가 현격하게 줄어들어요. 그리고 이 사람은 오히려 자기의 지도력의 대부분을 카리스마보다는 말씀에 의존하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이 1장에서 벌써 여호수아에게 그렇게 지도력을 행사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모세와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여호수아가 맨 처음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그 지도권을 모세로부터 물려받도록 지시받았을때 이 사람의 마음은 틀림없이 선지자로서 부름을 받으면서 심히 두려워 떨던 예레미야나 그런 많은 선지자들과 동일한 느낌이었을 것입다. 그런데 이 백성들의 마음이 자신들이 당한 커다란 환난으로 인하여 물같이 녹아졌을 때는 이 지도자를 향한 마음이 돌같이 굳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그는 이제 하나님앞에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절대적인 난관에 부딪히게 되면 사면을 둘러봐도 우리에게 도움되는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오랫동안 안고 살아온 커다란 기도제목이 있지요? 누가 도움이 되었습니까? 도움이 안돼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제목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앞에 세우는 방법이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아니라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 사람을 의지하고 붙들고 믿지요. 왜냐하면 마지막에 찾아오는 곳이 하나님이거든요, 신앙이 없는 인생에 있어서. 그래서 여호수아가 이렇게 옷을 찢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무슨 문제이든지 그 문제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는 데서 그 기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이에요.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간절한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없이 하나님앞에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위대한 기도는 간절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가 능력을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모든 능력있는 기도는 하나님앞에 간절한 기도에요. 간절히 부르짖을때 기도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처해있는 교회적인 문제나 우리 개인의 문제를 가지고 근심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보냅니까? 저도 개인적으로 뭔가 고민이 되는 것이 있고 근심하면 금방 몸에 표가 와요. 저녁때 근심을 많이 하고 자면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이 쑤시기 시작해요. 그런데 왜 그런가 했더니, 어느 의사 말씀을 들으니까 고민을 하면 피가 진해진대요. 피가 진해져서 잘 흐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온 몸에 아픔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시간들을 똑같은 집착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간절히 매달리기만 한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근심, 걱정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사람들은 근심, 걱정을 친구처럼 생각하며 살아가요.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 6장 강해할때 뭐라고 했어요? ‘적과의 동침’이라고 했지요. 그런 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살아있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근심하는지를 보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는지를 보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피가 진해지도록 걱정을 했지만 정말 피가 진해지도록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걱정과 근심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그러나 하나님앞에 눈물로 우리의 마음을 녹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진멸될 수 없을 것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우리의 괴로워하는 문제들을 놓고 간절히 기도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고3의 문제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생활이 어려워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염려하는 만큼 우리의 생활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그러면 우리가 여호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에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입니다. 가난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유함을 보입니다.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힘없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그리워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속에서 하나님이 역사를 시작하시고 인간이 포기한 시점에서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우리는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옷을 찢으며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인가 하면 그 교회에 설교하러 갔을때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할때 강력하고 간절한 기도의 영이 느껴지는 교회, 그 사람이 어느 교파의 사람이든 얼마만큼의 공부를 했든지간에 저는 무릎을 꿇고 그 사람에게 배우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때 옷을 찢고 하나님이 보시기를 원하며 간절히 부르짖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가 없고 편안하게 살때 하나님을 갈망한다... 그것은 語不成說이고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벌써 커다란 문제와 난관이 있으면서도 피가 진해지도록 고민하면서도 하나님앞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벌써 평화로운 때에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가는 거에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떠나간 사람들이에요. 여호수아는 자기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이 엄청난 패배앞에서 그는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비참하게 낮추고 하나님앞에서 간절히 (?)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었을때 사실은 그가 진정으로 찢고 싶었던 것은 옷이 아니라 자기의 살이요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앞에 찢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그렇게 마음을 찢은 사람들이 하나님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때 정말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은혜가 넘치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 화 :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생전에 목회하시던 교회에 있던 어느 집사님의 얘기... 예배가 시작되기 전이면 항상 한 시간이나 한 시간 전에 나오는 성도들이 있음. 강대 뒤의 골방에서 예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함. 한 사람씩 일어나서 대표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음. 살아계신 하나님께 “오늘 우리의 예배에 함께 해 주셔서 오늘은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강한 역사가 우리의 회중들을 뒤덮도록....” 그가 목회한 시기에 계속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좋은줄 알면서도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앞에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때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라고 하는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 자기의 옷을 찢고 싶어하는 마음이에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마음대로 살다가 보면 마지막에 깨닫는 것은 하나에요. 그게 뭐에요? “우리 힘으로 안되는구나”그거에요.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살아보는 거에요. 결국에는 ‘우리 뜻대로 안되는구나’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똑똑한 사람은 이렇게 말로 할때 알아듣고 미련한 사람은 10년 20년 30년 계속 살면서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그것이에요. ‘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안되는구나’ 그것을 깨닫는 거에요.
여호수아는 이미 알았어요. 왜? 모세를 쫓아다니면서 그렇게 영적인 훈련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그렇게 광야를 지나는 것과 같은 연단을 받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옛날에 홍해를 가르고 요단의 물을 말렸던 하나님, 바산왕을 깨뜨리고 수많은 백성들을 굴복시켰던 그런 놀라운 전쟁의 역사, 그런 것도 오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보면서 단순히 36명이 죽은 것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거에요. 이것은 아주 작은 일에 불과했어요. 전쟁이 일어났는데 서른 여섯 명쯤 죽는 것이 그렇게 대단해요? 거기에 놀러간 것이 아니에요. 놀러가서 사고를 당해 죽은 것이 아니라 전쟁하러 삼천 명이 올라간 것이에요. 삼천 명이 올라가서 서른 여섯 명이 죽은 것은 전쟁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이 여호수아는 삼십 육명이 죽은 것때문에 오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야 할 전쟁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뭔가 우리를 떠나계시다라는 것을 본 것이에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앞에 안타까운 심정을 자기의 옷을 찢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요즘 많은 사람이 몰립니다. 앉을 자리가 없이 다 차는데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올때 준비된 마음으로 왔으면 좋겠어요. 아침부터 하나님이 ‘하나님, 내가 오늘 이 피가 진해지도록 고통스러운 많은 기도의 제목들, 교회적으로 나라적으로 그리고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많이 있는데 하나님, 이런 기도의 제목들이 정말 제 마음에 살아서 이 기도의 제목들로 인해 제가 정말 하나님앞에서 간절해 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내 자신은 낮아지고 비참해져도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우리가 기도할때 정말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하는 이러한 준비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오세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우리의 기도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호수아가 그렇게 기도하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 참모들과 함께 한 사람이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거기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함께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홀로 기도하는 것도 기뻐하시지만, 홀로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는 것과 함께 많은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한 생각과 한 뜻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기도는 역사를 움직이고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교회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움직이는 한 사람의 기도, 그 이후에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할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여호수아가 하나님앞에 그렇게 마음을 찢고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참모들도 들어오지 않고 죽은 36명의 명단도 들어온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이 안타까운 문제,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이 여호수아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수많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다시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전염병과 같은 것입니다. 누가 기도하면 그 기도의 역사가 많은 사람에게 누에처럼 번져갑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신앙생활하면서 그런 경험을 많이 가졌을 것입니다. ‘기도해야겠다’라는 결정적인 생각을 할때 그때는 대개 어떤 때였습니까? 커다란 어려움이 닥칠 때에도 전혀 기도할 것을 생각지 않던 사람이 누군가 깊이 간절히 기도하고 그 기도속에서 응답의 역사를 이끌어내는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앞에 서서 간절히 기도하면 여러분 자신들이 기도의 무릎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기도의 사람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함으로 말미암아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앞에 기도에 있어서 성숙한 사람들로 서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 화 : 어느 시골교회에서 몇 달에 한 번씩 촛불예배를 드림. 처음에는 서너 명이 촛불을 들고 어두운 가운데 간신히 예배를 드림. 그때 도전받는 것은 ‘하나님, 이 교회당을 대낮과 같이 밝게 비추어주시옵소서’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더니 사람들이 한 삼십 명으로 늘어남. 촛불이 늘어나면서 환해지고, 나중에 그 마을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그 교회당이 가득 차게 됨. 결국 모두 초를 하나씩 들고 예배를 드리는데 온 교회가 대낮과 같이 환해지는 역사가 일어남.
마찬가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도의 불씨를 간직하면서 하나님앞에 살때 많은 사람들에게 그 기도의 불을 옮겨붙일 수 있어요. 그리고 교회가 기도의 불로 가득 찰 때 그 때의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표증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서 교회가 난관을 만나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교회에 모여서 성도들이 기도했어요. 그러니까 기도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백성들이 기도할때 우리는 거기에 무언가 기도의 영을 보태는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그런 것을 많이 봤어요. 불을 때잖아요? 불이 잘 안붙어요. 그때 제일 좋은 것은 석유를 한 컵 따라서 붓는 것이에요. 확 하고 불이 붙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택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와서 간절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한 마음으로 부르짖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것처럼 가치있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할때,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모여서 기도할때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서 빠지면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당신의 백성들이 마음을 찢고 옷을 찢고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할때 그런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기도할때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와서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앞에, 이렇게 백성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는 상황에서 여호수아가 제일 먼저 옷을 찢고 엎드렸습니다. 그는 당장 군인들을 모으고 장교들을 모아서 “우리가 왜 아이성에서 패배했느가”에 대한 작전회의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패배의 소식이 전해 내려오고 백성들의 마음이 녹자마자 그는 즉시 기도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앞에 엎드려서 마음을 찢고 자신은 비천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앞에 마음을 통회하며 하나님앞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때에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할때 소리없이 한 사람, 두 사람, 이스라엘의 참모들은 다가와서 여호수아의 기도의 불길에 자기의 불길을 보탰습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아이성의 패배에 관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해결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때 기도의 제목이 없어도 기도해야 해요. 스펄젼은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기도할 수 없다면 더욱 기도해야 한다. 왜?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최대의 기도제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앞에 여호수아가 홀로 옷을 찢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엎드리니까 이스라엘 참모들의 마음이 움직였어요. 한 사람 두 사람 다가와서 여호수아가 하나님앞에 부르짖는 거기에 자기의 기도의 기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한 자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한 자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참모들과 여호수아 사이에 오고가는 말은 없었지만,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여호수아에게 전해졌고 여호수아의 비참한 마음이 이 백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간절히 하나님앞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나와서 간절히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궤 앞에서 기도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상징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궤 앞에서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곧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앞에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 앞에 하나님은 역사하셨지요. 그리고 여호와의 이 궤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음이 틀림없어요. 특별히 이 여호와의 궤는 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여호와의 궤를 통해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내 보여주시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여호와의 궤앞에 엎드려서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여리고 성도 전쟁이었고 이 아이성도 전쟁이었는데 여리고 성의 전쟁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전쟁을 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영적인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의 삶속에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여러분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좋아하시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가 부르는 찬송, 우리가 부르는 승리의 노래, 우리가 말하는 “믿습니다”의 기도는 하나님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습니다’라는 쌍시옷에 매이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의 믿음에 매이신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당신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구원의 손을 베푸시고, 바다 끝에 가서 절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를 구하십니다. 어디에 가 있을지라도 당신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는 자에게 함께 있으시고 당신이 이김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기적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그 장소에서 누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위해 이 일들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 앞에 그들은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 아이성의 작은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배한 자기들의 상태를 보면서 비통하게 하나님앞에 괴로워하면서 이 전쟁이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제 비로소 본질적인 것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뭐에요? 좋은 칼, 좋은 창, 보다 좋은 요새, 병거, 이런 것들이 승리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그리워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임재,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하심 속에서 전쟁을 치루기를 원했던 것이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준비해서 예쁘게 많이 해놨는데, 참 정성껏 했네요. 이것도 하나의 전쟁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때 많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마지막으로 6절을 다 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만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다 소용없었습니다. 땅에 엎드려서 간절히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간절함의 상징인 동시에, 땅에 엎드린다는 것은 땅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무슨 얘기인가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들을 얘기할때 성경에서는 티끌을 얘기해요. 티끌이 바로 먼지에요, 흙먼지. 거기에 엎드리는 거에요. 자신이 그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거에요. 정말 그들이 티끌과 같은 존재들이었어요? 아니에요. 존귀한 자들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떠나가시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앞에 여러분이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 그때 기도가 되는 것, 이것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재산인지 아세요? ‘내가 하나님앞에 기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무릎을 꿇었을때 기도가 되는 것,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할 것을 내가 마음먹었을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가 주목할 수 있고 내가 시간을 낼 수 있고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을때 내 마음속에서 기도가 솟아나는 것, 그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몰라요. 여러분,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잘 보존하면서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그것을 막아놓기를 원해요. 왜? 그것만 막아놓으면 여러분들이 뭘 하든지간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적이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아무리 바쁘게 만들고 복잡하게 만들어도 그런 하나님의 역사속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놀라운 감격을 못얻게 만들고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앞에 땅에 간절히 기도했는데 오늘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저물도록 있다가’ 그랬습니다. 시간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굉장히 많은 시간이 흐른 거에요. 하나님의 응답은 들리지 않고 왜 전쟁에 졌는지도 모르고, 여호수아는 비참하게 울면서 하나님앞에 통곡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왜? 옷을 찢는 상태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기도할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옷을 찢으면서 동일하게 하나님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로들이 나가서 흐니끼면서 여호수아를 부여잡고 하나님앞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지만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물도록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끈기가 있어야 해요, 하나님앞에. 간절히 하나님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어떤 한 형제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그렇게 말하세요. “하나님! 응답을 해 주시옵소서. 응답을 해 주시기 싫으시면 ‘나는 너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안좋아한다’라는 말씀이라도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떼를 쓰고 하나님앞에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응답해 주시옵소서. 응답해 주시기 싫으시면 ‘나는 네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싫다’ 그렇게라도 말씀하십시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간절히 긴 시간동안을 하나님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기도하는 교회,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5. 실패 앞에서의 기도Ⅱ(수 7:6하-7상)
지난 주서부터 우리는 기도시리즈 가운대 여호수아 7장에 나타난 사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들린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사히 점령하고 두 번째 공략할 성인 아이를 향하여 쳐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는 매우 작은 성이었기 때문에 이삼천 정도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해달라는 백성들의 말을 듣고 소수의 무리를 보내었습니다. 그랬더니 여지없이 패하고 그리고 쫓아와서 36명쯤 죽이고 그리고 쫓아내려와서 이 백성들이 결국은 패배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얼마 전에는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면서 가나안의 마음을 물같이 녹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번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자 즉시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 내리는 그런 패배를 경험하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같이 되었을 때에 여호수아가 엎드려서 기도하던 장면을 가지고 지난 시간에 조목조목 살펴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우선 옷을 찢었고 그 다음에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의 궤앞에서 하나님의 현존의 임재를 그리워하며 땅에 엎드려서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기도를 했다는 말씀까지 지난 시간에 장시간에 걸쳐서 드렸습니다. 지난 시간에 6절을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 마지막에 ‘저물도록 있다가’라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서부터 시간 되는데 까지 다루겠습니다. 여기서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저물도록’있었다는 것을 보니까 굉장히 긴 시간을 기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불순종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일에는 상당히 인내심이 있고 끈기가 있어요.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사는 시간은 장기간인데 하나님앞에 그 문제를 해결보려고 할 때에는 단번에 해결을 보고 자신이 그 고통속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겸비하고 간절히 탄원하는 마음으로 비참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앞에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해가 저물 때까지는 하나님의 응답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나서도 한참동안 이 여호수아가 기도하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다룰 7절서부터 9절까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가 저물도록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응답도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앞에 엎드려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과 지시하심이 없는 가운데 기도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가 간구할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우리가 길을 몰라 물어볼때 하나님께서 지시하심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시는, 기도 속에서 체험이 있는 시간 동안에는 정말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뭔가 하나님과 우리사이에서 오가는 것이 있을 때에는 기도시간이 즐겁지요. 그리고 언제 기도가 흘러가는지 몰라요. 그러나 오늘 이 여호수아와 장로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들은 기도했으나 해가 저물때까지 시간이 지나갔는데도 기도에는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은 비참했습니다. 옆에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묻은 자기 동족들의 시체를 끌어다가 옆에다 죽 늘어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보며 여기저기서, 자기의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은 가족들이 전사한 시체를 부여잡고 통곡하고 울부짖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와 지도자였던 여호수아는 엎드려서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해가 저물도록 시간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하늘의 천사가 하나님의 응답을 가지고 땅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벌써 기도의 문을 끝내고 가버리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앞에 “이런 건 어떻습니까? 저런 건 어떻습니까? 이것을 도와주십시오. 저것을 도와주십시오”하고 수많은 청구서를 하나님께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사인을 하고 다 써서 천사를 통해서 “갖다 줘라” 해서 갖는데 조금 있다가 그 하나님의 우편물을 가지고 천사가 나타납니다. “왜 돌아왔느냐?” 하니까 “이사가고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성실하고 끈기있는 그 기도의 자세를 견지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기도가 헛것이 되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기도할때 기도하는 시간보다는 기도하기 위해서 싸우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과 기도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기도하는 것과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에요.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던 그 죄의 껍질들이 벗겨지는 것들을 경험하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를 에워싸서 우리의 마음을 근심과 염려와 이 세상의 슬픔과 이 세상의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찼던 우리의 마음이 점차점차 녹아져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기도는 반드시 경박한 기도에요. 간단한 기도는 그 사람의 영성에 아주 결정적인 해가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교통이 있는 기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에요. 기도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영향을 받는데까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기도하다가 졸 것까지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합니다. 기도하러 나와요. 그리고 하나님앞에 간구합니다. 무엇때문입니까?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간절하게 기도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영적인 교통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혼의 영향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비춰오는 그 빛과 영향을 받아서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어지고 하나님앞에서 변화되어진 생각과 그리고 변화되어진 인격과 변화되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고 또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일들은 오랜동안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간단하고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기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여호수아가 그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10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가나안 정복을 해 나가면서 가나안의 족속들을 정벌하러 나가는데 해가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거에요. 어두워지면 이들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여호수아의 군대들은 이곳 지리에 어두운 사람들이고 원주민들은 이 지리에 통달한 사람들입니다. 어디로 도망가고 숨어버리면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명령하듯이 천지를 대하여 명령하듯이 하나님께 대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해야, 달아. 하늘에 멈추어라”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해와 달이 멈추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짧은 순간의 기도로 하나님의 놀라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정말 기도를 많이 하셨던 분들은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환경과 상황을 명령하는 장면을 봅니다. 나사로가 무덤속에 누워있을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여! 이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Come on. 나사로” “나사로야, 너는 나오라” 명령하였습니다. 악귀들린 자를 내어쫓는 바울의 방법을 보십시오. 더 재미있습니다. “하나님. 이 귀신을 내어쫓어주시옵소서” 복잡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나오라” 바울은 명했고 응답되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것들은 모두 기도인 것입니다. 누가 우리안에 스스로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일으키고 귀신들린 자를 내어쫓을 수 있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모든 선한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능력의 자원을 자기의 자원인 것처럼 마음대로 활용하며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환경이 가로막으면 환경에게 명했습니다. 상황이 가로막으면 상황에게 명령했습니다. 사람이 가로막으면 사람에게 명령했고 심지어 사단에게 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물러나가고 사망은 무서지고 길이 열렸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밝은 빛이 비췄습니다. 바다를 지나는 것과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이 드러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으로 볼 때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이 기도로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군대도 움직일 수 없는 나라의 기도를, 수많은 사람들이 바꿀 수 없었던 선교의 기도를 무릎을 꿇고 기도해서 바꾸기도 하였고 군대를 멸하기도 하였고 사자의 이빨을 꺾기도 했고 불의 시험과 물의 시험을 이기기도 하였습니다. 짧고 간절한 기도가 위대한 능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평소에 오랫동안 기도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앞에 기도의 영역을 쌓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비유를 하자면 자동차의 라이트에요.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것을 비추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여호수아의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간절히 장시간동안 매달렸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거기서 느낀 것이 무엇이에요? 여기서 얘기하는 장시간은 하나님과의 뜨거운 교통이 있는, 겟세마네 동산과 같은 그런 뜨거운 하나님과의 뜨거운 교통이 있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요단강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때 간절히 기도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아들은 아버지앞에 기도하고 아버지는 성령을 보내시고 아들은 세례를 받고 하나님은 아들을 인정해 주시는, 이런 교감이 있는 기도가 아니에요. 어떤 기도에요? 그 전날까지도 안그랬는데 그날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앞에 옷을 찢었어요. 세상의 영광과 즐거움은 관심없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목놓아 기도했어요. 하나님의 궤앞에 엎드렸어요.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하나님앞에 기도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여호수아가 이런 긴 기도속에서 느낀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차가운 하나님의 거절감만 느꼈어요.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들어주신다.... 날이 저물도록 엎드렸지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뿐이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정도까지의 기도에서 버티지를 못한다는 것이에요. 바로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끊어진다면 기도에서 확인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은 날 안좋아하신다. 요즘 하나님은 내가 기도할때 냉담하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냉담한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무릎꿇은 자세에서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보세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엎드려 있었어요. 기도만큼 우리가 하나님앞에 어떤 영적인 상태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측정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없어요. 기도하다가 이런 차갑고 싸늘함을 맛보게 될 때에 - 왜 하나님이 그러세요? 성경이 말씀하실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를 지은 자들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받아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그래도 세상에 범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낫잖아요?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싸늘하게 거절하시는 것이에요. 그때 사람들은 그 차가운 거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이 안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살아있는 기도의 영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에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안변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여호수아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교훈이 이것입니다.
이제 여름수련회를 앞두고 오늘서부터 실행을 결심하세요.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하는데도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는 사람, 마음으로 손들어 보세요. 분명히 있을 거에요. 그것을 이기는 가장 커다란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하나님앞에 그런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엎드려서 매달리는 거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앞에 기도는 해보지만 하나님앞에 기도의 세계가 막혀있는 것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 나를 박대하면 나 어디 가리까’ 이런 자세로 하나님앞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그렇게 매달려서 기도를 하고 뚫어지면 그 다음에는 새로운 기도의 변화와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에요. 뭐라고 해요? “야. 벌써 두 시간 지났다. 그렇게 엎드려 있어봐야 골이나 아프지. 뭘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있느냐. 빨리 가서 텔레비젼이나 봐라. 빨리 일어나 가라. 집에 가서 자라” 그러는 거에요. 문앞에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갔다가 돌아오고, 이게 반복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이러한 기도에 대한 침묵에 대해서는 이미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러 번 설교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여호수아를 우리는 보자는 것입니다. 그는 모세가 가진 카리스마적인 능력은 없었지만, 그러나 모세못지않은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출애굽기 32장과 33장에서 출애굽기의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을때 그 회막에서 모세도 돌아가고 모든 백성들이 돌아갈 때에도 끝까지 그 회막에 남아서 회막을 지키며 하나님앞에 기도했던 사람이 바로 이 눈의 아들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는 장시간동안 기도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하여 자신이 움직여지는 방법을 또한 동시에 기도의 세계속에서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깊은 은혜와 기도의 세계를 경험한 이 사람이 오늘 하나님앞에 어느 날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이 엄청난 이스라엘의 재난앞에서 기도하는데 차가운 거절감밖에는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앞에 엎드려 있었어요. 끝까지 하나님앞에 매달렸습니다. 믿습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끈질기게 매달렸는가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응답을 사모하는가를 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앞에 매달리는 사람,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시간의 시간이 흘러가고 무릎을 꿇고 응답도 없는 이곳에서 하나님앞에 있다가 그는 드디어 하나님앞에 입을 열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의 끈기를 배우십시오. 하나님앞에 내가 이 문제, 내가 안고 있는 이 어려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주님이 나에게 말씀해 주시고 기도의 문을 여실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노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이외에는 내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가 없사옵나이다... 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내와 끈기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을 주실 때도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에서 보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고 나서 그 일이 오늘 아침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10년 후에 이루어질 일을 10년 전인 오늘 응답해 주시기도 해요. 그리고 5년 뒤에 이루어질 일들을 5년 전인 오늘 이루어 주시기도 합니다. 내가 죽어서야 응답되고 이루어질 것들을 오늘 응답해 주시기도 해요. 여러분,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일제가 망하기 전에 1920년대에 가장 혹독한 무단정치가 행해졌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때 이미 일본의 멸망을 예고한 목사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특별히 계시록을 풀어가면서 그런 사실을 믿으면서 하나님앞에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일제의 압박은 더 심해졌습니다., 경건한 성도들이 순교하였고 수많은 목회자들이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교회가 문닫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산상에서 토굴에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들을 반드시 성취하시고야 말리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은 기도하고 또 하나님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인내가 없고 하나님앞에 견디는 이 기도에 있어서의 억척스러움, 이것의 부족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기도생활들을 쓸데없이 소비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 18장에서 과부의 비유를 들면서 ‘항상 낙망치 말고 하나님앞에 기도해야 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간청하는 비유로도 우리에게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내와 끈기로, 한 번의 거절이나 두 번의 무응답, 세 번의 침묵까지도 마음에 쓰지 않고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앞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나를 박대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이옵나이다” 하나님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예 화 : 옛날의 사극에서 시집간 딸이 살다가 살다가 못살 것 같으니까 짐을 싸고 친정으로 도망쳐 옴... 친정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내 딸 돌아왔구나” 맞아줍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빨랫방망이를 들고 쫓아나와서 “죽어도 너는 그 집 귀신이 되라. 너는 출가외인이다. 너는 이제 남이다...”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이런 정신이 필요해요. 우리의 영혼이 낙망하고 하나님앞에 우리의 잘못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기도의 세계가 희박해 지고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주신 기도의 은혜를 경건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에 그래서 기도속에 낙심되고 우리가 하나님앞에 생명력있고 끈기있고 그리고 힘이 있는 기도생활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앞에 기도하려고 엎드렸지만 차가운 하나님의 거절감밖에 들리지 않을때 우리의 영혼은 종종 하나님만 바라보는 일을 그치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일을 그치고 그리고 우리가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때 우리는 마치 그 옛날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의 영혼에게 말해야 합니다. “너는 돌아가라. 죽어도 하나님앞에서 죽고 살아서도 여호와앞에서 살아라. 사나 죽으나 너의 영혼은 아버지의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영혼을 꾸짖을 수 있는 이런 담대한 질책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끈기있게 하나님께 매달리고 애쓰며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못하게 하는 그 영혼을 스스로 깨우쳐서 끊임없이 우리를 타일러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에 대해서 풍부한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42편과 43편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시인은 자기의 영혼에게 말합니다. 막 야단칩니다. “내 영혼아. 너는 못됐다. 왜 하나님 앞에서 낙망하느냐? 나의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고 어찌하여 내 속에서 슬퍼하느냐? 너는 하나님만 바라라” 격렬한 감정을 가지고 우리속에 있는 이 속사람을 일깨워서 하나님앞에 세워지는 경건한 성도들의 모습을 우리는 얼마든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앞에 끈기있게 매달려서 하나님앞에 “주님! 주께서 나에게 응답해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시든지...” 이렇게 매달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래? 그렇게 죽고 싶으냐? 응답이 어디있느냐? 죽어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여, 응답을 주시든지 죽음을 주시든지” 한 사람들은 모두 응답을 받았어요.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 지금 제가 한 말 그대로 한 사람이 한 명 있지요? 누구에요? 에스더에요. 민족의 멸망의 위기 앞에서 왕앞에 나아갈때 삼일동안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 나왔어요.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왕에게 은혜를 얻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끔 만들어 주셨어요.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불순종하며 살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의 문이 자꾸 막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앞에 불순종하고 거역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자꾸 막히는 거에요. 죄때문에 막히는 거에요. 죄가 무엇이에요? 죄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형법에 나오고 성경에 나오는 어떤 특별한 죄를 짓는 것만이 죄가 아니에요. 더 커다란 죄는 무엇이냐 하면 순종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로마서는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믿음과 순종을 함께 말하고 있어요. 복음과 순종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불순종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읽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여러분을 존경하고 여러분들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교회생활에 모범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앞에 순종하려고 살려고 하는 적극적인 마음이 없으면 여러분은 패역한 죄인이에요. 순종하지 않고 살려는 것이지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의가 없었어요? 주님께서도 그들이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렇지만 문제는 뭐에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죄는 술먹고 방탕하고 간음하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겠다’그렇게 고집한 거에요. 내 방식대로 살겠다. 내 방식대로 믿겠다.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도 이래뵈도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는 한 가닥 하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 가지고 있었어요. 이런 불순종이 바로 죄에요. 그런 죄들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기도의 세계를 가로막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기도할 수 없으리만치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들은 그것을 단번에 산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죄의 길을 계속 걸어간 거에요. 인내심을 가지고 걸어갔다는 것이 이상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계속 그 죄의 자리에 늘어붙고 그리고 그 죄와 더불어 살아간 거에요. 그래서 거기에 굳어져 버린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들이 거역할 때에는 하나님이 당시에는 반역하고 거역하는 우리들을 오래 참으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고 20분 30분만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열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거에요. 기도하다가 계속 기도가 안되면 속에서 ‘에이씨’하는 반감 같은 것도 생겨나는 거에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 거지요. 뭔가가 잘못된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여호수아의 기도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계속 엎드려 있으면 결국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시험해 봐요. 그런데 그게 장시간 기도해도 안되면 ‘야! 하나님이 엄청 섭섭하셨구나’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얼마나 섭섭하시면 내가 이렇게 엎드려 있는데 주님이 말씀을 안하시나...’ 그때는 뭐라고 해야 하는지 아세요? 시편 51편의 기자처럼 “주께서 나를 판단하실 때에 나는 ‘주님은 의롭도소이다’그렇게 말하겠사옵나이다. 주님한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엎드려도 응답 안해주시는 것, 당연합니다. 내 영혼아 싸다, 싸” 오히려 그렇게 말해야 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뭐가 기대가 돼요? “하나님. 그러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해야 합니다. “주님. 무릎이 뽀개질 것 같사옵니다” 하지 말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단 한 명도 거절하신 적이 없어요. 믿습니까? 이번에 그런 기도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은 한 번쯤 들은 것 같은데 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어린 소년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로부터 늘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어요. 그게 뭐나하면 “저 산에는 굉장히 많은 금이 있단다” 그것을 전설과 같이 들었지만, 이 아이가 자라면서 그 마음에 ‘언젠가 내가 부자가 되면 저 땅을 한 번 파서 할아버지의 말이 맞나 틀리나 내가 꼭 한 번 확인을 해 보겠다’ 그리고 오랜 세월 그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그 산을 볼때마다 그 속에 있는 것이 금덩어리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면서 장고한 세월이 흘러서 이 어린 아이가 장성한 어른이 되었고 사업을 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어요. 그래서 드디어 금광을 샀고 금을 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떤 영문인지 캐 들어가도 금은 안나오고 맨 흙덩어리만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가지고 간 돈을 다 털어먹고 동업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더 파봐야 소용없다고 다 도망가고 일꾼들도 다 도망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사람들도 없었는데 그래도 뭔가 있을 것 같애요. 그래서 혼자 곡괭이를 가지고 갱도를 파내려 가는데 “팡”하고 부딪치는데 뭐가 “쨍그랑”하고 소리가 났어요. 이상하다고 보니까 그 흙덩어리 속에서 곡괭이가 나왔어요. 알고 보니까 그 곡괭이가 이전에 그 갱도를 파다가 오랜 세월 전에 땅이 무너지면서 묻혀버린 거에요. 그러다가 보통 땅처럼 되었는데 다시 파 들어가기 시작한 거에요. 자기가 거기까지 파들어온 거에요. 그런데 재미있는게 뭐냐하면 그 곡괭이가 탁 꽂혀있는 거에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 곡괭이를 빼려고 했는데 그게 빠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두 사람이 달려들어서 잡아댕기니까 빠졌는데 그 끝에서 노란게 묻어나오는 거에요. “야! 이거 이상하다” 하고 더 파기 시작했는데 곡괭이가 방금 전처럼 꽂혀서 빠지지가 않는 거에요. 그게 금맥이 흐르는 곳이에요. 말하자면 ‘노다지’지요. 앞에 있는 사람이 죽어라고 몇 년을 파다가 거기까지 왔는데 마지막에 곡괭이로 파고 금맥을 찍었는데 그것을 빼가다 안빠지니까 “에이, 없구나”하고 거기에 묻어놓고 지나간 거에요.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것도 이런 깊은 끈질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요구되는 것이에요. 기도하면서 우리의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께 집중되는 것, 장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우리의 차갑고 냉랭했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뜨거워지고 우리의 마음속의 차가운 기도의 제목들이 불을 붙이게 되는 것도 장시간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거에요. ‘빨리빨리’하는 것 치고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빨리빨리’하는 것이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빨리빨리 부르는 찬송, 그게 깊이가 있겠어요? 시간이 없어서 빨리빨리 진행하고 끝나는 그 예배속에 생명이 있겠어요? 시간이 없어서 빨리빨리 설교하고 끝내는데 거기에 뭐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겠습니까? 기도가 빨리빨리 하고 끝내는데 거기에 뭐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쫓기는 것처럼 되는 일치고 아무런 되는 것이 없는 것이에요. 아무런 깊은 것이 없어요. 정말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이 신앙생활, 이 기도생활 속에서는 더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렇게 엎드려 있다가 드디어 여호수아가 하나님앞에 입을 열고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엎드려 있는 동안에는 참담하게 하나님 앞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서 엎드려서 뭘 기도해야 될지를 모르고 망연자실하다가 드디어 입을 열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7절에 보십시오. ‘슬프도소이다.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나이다’ 그렇게 기도했어요. 우선 여호수아는 ‘슬프도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느끼는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이러한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능력이 있는 기도는 이러한 슬픔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때 슬퍼하지 않을 이유는 정말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도 속에서 경험되는 기쁨은 슬픔 뒤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구하고 기도할때 우리의 영혼을 에워싸고 있던 검은 먹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그 속에 하나님앞에 찬송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 느끼잖아요? 비행기를 탔는데 구름이 끼고 비가 오기 시작해요. ‘이거, 이번의 여행은 완전히 구름속을 헤매겠구나’ 했는데 이상하게 그 새카만 먹구름을 뚫고 올라가니까 찬란한 오후에요. 우리의 기도의 세계 속에서도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슬픔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덧입히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인해서 하나님앞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대신 기쁨의 옷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아파하는 모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게 될때 우리속에는 주님의 마음과 같은 아픔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픔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기도하는 사람들을 모두 그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그 마음을 위로하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회상해 보면 - 오늘 제 말을 듣고 이 말이 맞나 틀리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신앙생활해 오면서 정말 가장 기쁨이 충만했던 때가 어느 시기인지 한 번 달력을 꺼내놓고 줄을 쳐 보세요. 그때가 어떤 때였는가 하면 가장 하나님앞에 눈물이 많은 기도의 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눈물이 많은 기도, 슬픈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던 때가 가장 하나님앞에 충만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 때였어요. 그리고 언제 그 기쁨이 사라지기 시작했는가 하면, 눈물과 슬픔이 사라지고 나면서부터 기쁨도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왜?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오늘 설명을 해 드릴께요. 우리가 기도를 하게 되면 우리가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어요. 그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 거룩한 은혜의 세계 속에만 있을 때에는 우리가 기쁘고 즐겁지만, 그러나 우리는 한 쪽으로는 거룩한 은혜의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또 한 쪽으로는 죄와 슬픔과 고통이 많은 세상 속에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두가지를 같이 느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은혜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충만한 기쁨과 하늘나라의 평화를 느끼고 그리고 자기의 현실로 돌아와서는 죄와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땅에 살면서도 하늘나라의 신령한 기쁨과 은혜를 사모해요. 그리고 그것들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정말 하나님앞에 거룩한 기도의 세계를 소유한 사람은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래서 주님도 이 세상에 계실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질때, 기도 속에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되어서 하나님 앞에 드려질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런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에요. 여호수아는 지금 하나님앞에 기도하면서, 조금 있다가 보면 알겠지만 36명의 시체가 죽은 것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슬픈 것이었습니다. 아이성을 빼앗지 못한 것도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물론입니다. 더 큰 여리고 성도 뺐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울고 있는 것은 단지 36명의 시체나 빼앗지 못한 작은 아이성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옷을 찢고 엎드려진 가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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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갔는데 거기서 장로님이 나오셔서 인사를 해요. “우리 교회 장로님이십니다” 악수를 하자마자 자기 소개는 안하고 “목사님. 깨뜨려 주시옵소서” 그래요. 이번 집회에 우리를 깨뜨려 주시옵소서... 그런데 아주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 깨뜨리시냐 하면, 금이 간 사람을 하나님이 깨뜨리세요. 이해가 안가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러시나? 그게 아니라 벌써 깨어진 조짐을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깨뜨리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집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왠지 이번 집회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겠다’ 그리고 왠지 자기의 인생이 위기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이에요. 자기의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되고 내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직 몰라요. 그러나 벌써 심령이 금갔어요. 금간 상태로 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툭’ 건드리시니까 ‘와장창’하고 깨지는 거지요. 여러분, 수요예배때 그런 것을 많이 느껴요. 수요 예배때 보면... 주일예배도 좋지만 확실히 수요예배는 틀려요. 교회에 나와보면, 직장에서 다섯 시나 여섯 시에 끝나면 시간이 많이 남거든요. 그것은 그냥 준 것이 아니라 와서 기도하라는 뜻인 것이에요. 주일에는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지요. 와서 한 시간이나 40분 이상 일찍 와서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에요. 벌써 이미 금갔어요. 그러니까 그 지체들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건드리시니까 금간 영혼이 깨뜨려 지는 것이지요. ‘한 번 나 깨뜨려 보슈, 하나님. 내가 이기나 하나님이 이기나 한 번 깨뜨려 보슈’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전에 벌써 깨뜨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슬프도소이다. 오! 하나님” 하면서 슬프다고 말할때 거기에는 수많은 역사와 그림이 스쳐간 거에요.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어떤 약속을 주셨으며, 광야의 추억과, 그리고 요단을 마르게 하시고 여리고 성을 이기게 하신 그 모든 역사들이 추억처럼 스쳐가는 거에요. 그런 속에서 여호수아는 슬프다고 말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슬픔이 아니에요. 그는 그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모든 관계를 느끼고 의식하는 가운데 슬프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깨뜨려진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는 이런 기도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생둥생둥(?)하고 완전히 생짜배기와 같은 이런 돌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몇 마디 한 것 가지고 우리가 깊은 은혜의 세계속으로 들어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정말로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나아갈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의 깨어진 마음을 정말로 가슴아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다윗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자에 의해서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주님이 받으시는 주일 예배는 주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깨뜨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인 것이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주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는 장시간 엎드려 있는 가운데 자기의 심령이 깊이 깨뜨려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심령이 깨뜨려지기만 하면 마음이 약해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들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세요. 빨리 응답해 줘요. 에이, 빨리 줘요” 이럴 때는 하나님이 대답도 안하시다가 깨뜨려진 마음으로 나와서 “하나님! 주님이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그런 깨뜨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 기도의 자세부터 벌써 틀려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나와서 엎드려서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깨뜨려지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이 여호수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도리시는 것이에요.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뭐라고 했는가 하면,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수아의 아주 귀중한 신앙고백 하나를 읽을 수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뭐냐하면 자기들을 여태까지 승승장구하고 이겨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사실은 자신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민족인 자기들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이기고 승리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물론 지금 기도하는 태도가 공손하고 그런 태도는 아닐지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께 ‘어찌하여’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찌하여’가 어디있습니까? 이 백성들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하나님 앞에 따지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 속에서는 분명한 고백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이 아이성의 전투에서 진 것이 신앙적인 이유였다는 사실을 깊은 기도 속에서 간파한 거에요. 그는 전쟁에 지고 나니까 즉각적으로 참모회의를 소집해서 전쟁의 패배의 원인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선봉 공격대의 지휘관을 징벌하는 그런 행정적인 절차와 부서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이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우리를 저들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이라고 그는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여부에 따라서 전쟁이 오고 간다는 사실을 굳게 믿은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결국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당연한 문제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믿는 믿음없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놀리는 것이에요. 우리가 개인의 어떤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교회의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합니다. 가정의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합니다. 혹은 사업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와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나하면, 그 문제의 해결이 정말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라는 그 고백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에요. 그 고백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놀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졌습니다. 이것은 작전이 잘못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200명, 3000명이 올라갔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진 것은 하나님이 아이성을 손들어 주시고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찾아낸 것이에요. 그리고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에요.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떤 문제를 주실 때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도록 그 문제를 주셨는데, 여러분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내가 이 문제를 얼마나 잘 푸는가 보자’ 하고 여러분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데로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상황을 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재주를 부려보고 우리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 없이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 잘 해결하는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문제를 던져주신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주시는 것은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문제를 갖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문제의 성패가 정말 하나님의 손에만 달렸다고 하는 고백을 가져야 하는 것이에요. 만약에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니면 해결할 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 앞에 놓여있는 많은 문제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그렇게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가정적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의 노력으로도 뭔가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미봉책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시고 해결해 주실때 완전하고 깨끗합니다. 또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문제가 해결되는 것 만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의한 하나님의 해결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 만큼, 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와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씨름할 때는 나는 그 문제를 보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바꾸어 놓으신 것들을 경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기도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 고백해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나의 인생에 있어서 이 모든 어려운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 문제를 내 손에 붙이시면 나는 이기고 나를 그 문제에 붙이시면 나는 그 문제에 집니다. 하나님, 누구의 손을 들어주시겠사옵나이까? 하나님, 내 편에 손들어 주시옵소서’ 이런 고백을 가지고 기도할때 기도는 놀라운 힘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 분이 계시다는 사실과 함께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할때 우리는 그 문제의 해결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벌써 어떤 문제 하나를 문제로 느끼기 전에 수없이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안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의 무능력을 믿지 못합니다. ‘뭔가 여건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과 재주에 호소하려고 합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려는 것 만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교만하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기도의 제목들이 되어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아지만 진정한 해결이 될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먼저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문제를 나의 손에 붙이시고 나의 손을 들어주시면 내가 그 문제를 딛고 이기고 승리하고 그리고 나를 둘러싼 문제가 아무리 크고 높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능력으로 나의 기도속에 역사해 주실때 이 문제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뭔가 믿는게 있는 사람들은 전심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뭔가 믿는게 있는 사람들은 마음을 다하지 않습니다. 뭔가 믿는게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전폭적으로 매달리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뭔가 그래도 깜짝수가 생겨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실 리가 없는 것이에요. 제가 하나님이라면 일을 더 꼬이게 만들어 버릴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아!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에요.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정말로 포기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와 잔재주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고액의 과외비를 지출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를 포기하고 신령한 지혜로 거듭나서 하나님 앞에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고 주님만이 내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 우리의 심령은 가난해지고 깨뜨려진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이다. 여호수아는 분하고 원통했습니다.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왜 하나님이 그렇게 미워하시는 아모리 사람들의 손을 우리 앞에 들어주셔서 우리가 그들의 밥이 되었을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 나라와 이 싸움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마음이 변하셔서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였던 우리를, 오히려 우리에게 아모리 사람의 손을 붙여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말하자면 ..... (끝)
6. 실패 앞에서의 기도Ⅲ(수7:7-9)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 앞에 슬프도소이다’하는 고백,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슬픔의 감정, 그 다음에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에서 승패가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는 믿음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여호수아는 일찌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서 광야로 이끌어갈때 출애굽기 32장과 33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사건, 우상을 만들고 섬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서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으나 너희와 같이 올라가지는 않겠다” 고 하신 그 말씀과 사건을 기억했을 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기억했을 것입니다. “너는 네가 애굽땅에서 인도해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제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내가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라” 하셨던 그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을 여호수아는 여기서 기억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얼마전까지 하나님께서 그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셔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토벌하도록 함께 해주셨는데 지금은 이 아모리 사람에게 비참하게 패하고 자신들은 지금 36명의 시체를 장사 지내게 하는 그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상태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에요. 다시 말씀드려서, 두 가지지요. ‘내가 능히 그 일을 할 수 있다’ 고 하면서 기도하는 것, 혹은 ‘하나님은 결코 이 일을 해결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것, 둘 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자기가 기도하는 일의 성패가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믿음이 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갈 때에 어떤 사람들이 기도 안하나 하고 보면, 교만한 사람들이 기도를 안합니다. 자기를 의지하면서 자기의 힘으로 일련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사람들은 기도가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성패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으며, 그리고 자기는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사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자기의 도움이 된다, 하나님만이 자기의 진정한 도움의 근거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지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이 뭔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난관과 벽에 부딪혔을때, ‘아!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구나’ 그렇게 먼저 고백을 하는 일이 기도보다 더 급하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전심으로 의뢰하면서 일의 상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이 문제를 완전히 고쳐 주시고 해결해 주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안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간절함에서 나오고, 그 간절함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오늘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으셔도 능히 자신들이 이 난관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배한 가운데서- 그들은 전쟁에 패배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전투에 패하면서 이 이스라엘 지도자인 여호수아는 그 속에서 무언가를 깊이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우리를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대신에 저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그는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의 성패,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의 성패를 신앙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고통이 많아지면 기도를 많이 할 것 같지요? 아니에요. 그것도 사람의 마음이 변해야지만 기도해요. 고통이 많다고 해서 사람이 점점 기도하는 것,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형통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부가 늘어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확실해요. 그런데 반대로 고난이 넘치고 위기가 넘치면 하나님을 더 의뢰할 것 같은데 그게 일단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어져야 해요. 오히려 신앙이 없는 가운데 고난이 넘치면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돌멩이처럼 굳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찬송할 수도 없고 오히려 기도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로 바뀌는 것이에요.
그래서 보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참 여러가지에요. 어떤 때에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그리고 도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책망과 도전을 통해서 도저히 기도의 영을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위로를 통해서 기도의 영을 회복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고난이 넘쳐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정말 이 여호수아가 기도한 것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자신들이 아이성에서 실패한 사실을 신앙적으로 해석한 거에요.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일어나는 다양하고 많은 일들을 이런 시각에서 해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직장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사업에서 어려움을 만나고 가정에서 어려움이 있고 뭔가 예기치 않았던 난관들이 여러분들을 찾아올때 여러분들은 이것을 신앙적인 안목에서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고 그리고 신앙으로 되돌아 가도록,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으로 되돌아 가도록, 내 고집과 내 방법과 수단대로 내 재능대로 살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하나님을 부르지만 내 힘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궁극적으로 일의 성패들이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뒷방에 있는 노인네처럼 살아가는 그런 삶을 바꾸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축복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에 지자 즉시 전투에 나갔던 군인들을 불러모으고 작전에 대한 상황 설명을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즉시 하나님 앞에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 반드시 승리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고, 패배는 곧 하나님이 아모리 사람들의 손에 자신들을 붙였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에 부딛히는 모든 문제를 신앙의 시각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부딛히는 크고 작은 일들,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 크고 작게 일어나는 마음의 고통과 시련, 혹은 축복들이 하나님의 무엇인가의 음성을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예기치 않았던 일들, 여러분에게 전에 없이 어느 날 돌출하여 나타난 어떤 사건들, 그 사건들을 통해 큰 손해를 입거나 혹은 큰 이득을 보거나 혹은 그 사건들을 통해서 예기치 않은 큰 경험들을 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중을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모두 필연입니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자기의 문제에 대하여 묻고 해결하고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반드시 기도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을 만났을때 ‘하나님이 왜 이렇게 축복된 곳으로 나를 불러 모으셨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축복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 화 : 몇 달 전에 군부대에 집회를 감... 그때 연대장이 반포에 있는 교회에 다니시는데 그 연대 내에 있는 모든 군병들을 모아서 삼박 사일동안 수련회를 함... 그 교회 군목에게 “저 집사님이 별을 달았으면 참 좋겠는데 우리 기도해 봅시다” 하니까 너무너무 치열하다고 함.. 수련회 마지막날 “어쨌든 집사님이 수고하시는데 빨리 별을 다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기도합시다” 하니까 그 분이 “목사님, 우리가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이 군대에서 하고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함...
자기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려고 하는 사람,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분명히 이겨야 할 싸움에서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리고 싸움에서 졌으면 ‘아마 그럴 법 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길 수 있는 이 싸움에서 패배했습니다. 뜻밖의 사건이 생겼습니다. 여호수아는 즉시 이 사건을 신앙적인 의미에서 생각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무슨 하자가 있고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내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려는 것이구나’ 그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어떤 사건을 주실 때에는 혹은 어떤 고통을 주실 때에는 우리가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고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에서 우리를 즉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앙적인 시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형통할 때는 형통하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고난이 넘칠 땐 고난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야를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우기 그는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모리 사람에 우리를 붙인 것을 풀어주시고 저들을 다시 우리들의 손에 붙이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라는 사실을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아갈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는, 우리가 기도해서 마땅히 넘어야 하는 이 어려운 상황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저 상황을 나의 손에 붙여주시고 저 대적들을 내 손에 붙여야지만 이 문제가 끝날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오로지 하나님 이외에는 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의 결핌때문에 우리는 자주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껏까지 여러분들이 실패했다면 그러면 이제는 하나님이 나와 당신과의 관계를 고치시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셔서 내가 고통받고 어려워하던 그 상황을 내 손에 붙여서 주님이 해결하게 해 주시는 그 놀라운 역사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차례인 것입니다.
또 하나, 다음으로 여호수아의 기도에서 우리들이 네 번째로 살펴볼 수 있는 묘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라고 말하면서, 그 다음에 ‘우리가 요단 저편에...’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그렇게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 땅을 점령해서 거기에서 축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나님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단을 건너기 전에 그 땅을 그리워 하면서 죽은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특별한 사명을 받고 새로운 세대들과 함께 요단을 건너서 이제 놀라운 정복의 역사를 펼쳤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단강 거너기 저편에 광야에서 있었던 일은 아름답고 놀라운 역사도 있었지만 가슴아프고 신물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어요. 불순종때문에 하나님께 심판도 많이 받고 징계도 받고 고난과 어려움을 많이 받고 시달렸습니다. 혹은 병과 싸움과 늙음, 이 모든 인간의 고통으로 말미암아서 구세대들이 모두 시체로 죽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광야는 언제나 결핍이었고 외로운 곳이었고 시련과 고통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 건너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단을 건널 때부터 하나니은 함께 하셨습니다. 요단강 물이 마르고 법궤를 멘 사람들이 안전하게 건너고 돌비를 세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가나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요단강 물을 말리셨다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들은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리고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기적적으로 무너뜨리고 파죽지세로 가나안 땅을 돌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갑자가 이 여호수아가 “요단강 저 편에 우리가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뻔 하였나이다”하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이것은 단지 기도도 아니고 단지 불평일 뿐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한 번 지껄여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기도도 깊이 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도움이 될 때가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하다가 혹은 불평이 나올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인간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도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기도속에서 그런 것을 토해놓으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그런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그 기도가 잘못된 것이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우리의 기도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평을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것 보다는 기도하는 것이 훨씬 유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예를 많이 보여줍니다. 여러분, 하박국을 읽어보셨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1장에서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오는 그런 상황에서 악한 사람들이 부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것을 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억압을 받고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불의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았을때 그는 하나님 앞에 불평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공의는 다 굽었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 것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의로운 백성들은 고난을 받고 악한 자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는 후에 그는 말합니다. “내가 망루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물어보리라” 고 결심합니다. 그러고 나니까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방탕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후에는 믿음을 지키며 산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서도 그것을 보여주지요. 그는 마음이 정결하고 깨끗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눈떠 보니까 악한 사람들도 잘 되고 나쁜 사람들도 번성하는데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고난을 받고 괴로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침마다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손을 씻어 깨끗다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알았으면 나도 막 살아버릴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성소에 들어갈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사후의 세계가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상주신다, 그리고 주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 자기의 형통함을 의지하며 살던 사람들을 주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불평하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깊이있게만 하세요. 간절히만 하면, 그러면 기도 안하고 노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놀면 뭐해요? 조금이라도 기도해서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을 생각을 해야지... 간절히 기도하면 불평하는 기도라도 하면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에요. 여러분, 자기가 지금 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아 내가 지금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구나’ 깨닫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진짜 기도한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에요. 인간이 갖는 생각은 처음에는 불같이 일어나요.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 불이 점점 식어서 물이 돼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은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가 기도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렬한 불꽃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 속에 타올라서 그 하나가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잘못된 기도를 하다가도 깊이 기도하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이 꺼주세요. 그리고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고치게 만드시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그러니까 놀면 안돼요. 놀면 뭐해요? 놀면 손해밖에는 없어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가 혹시 불평하는 기도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도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예 화 : 부산의 한 교회에 집회에 갔는데 “목사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니까 그 교회의 부목사님이 “우리 목사님은 구약으로 따지면 다윗과 같고 신약으로 따지면 바울과 같은 분이지요” 그렇게 말하는데 할 말이 없음.. ‘참 훌륭한 분이구나’ 하고 생각함. 점심식사하는데 그 목사님이 말씀하심... 자기가 부교역자들 때문에 속을 썩여서 속이 곪다시피 함.. 교회는 자꾸 커지는데 부교역자가 오면 목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짐이 됨. 그래서 막 소리지르고 야단을 침. 어느 날 방법이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함. “하나님! 이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다 사표내고 떠나가게 해주세요. 이 사람들하고 일을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간절히 기도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하심 “야! 네가 바뀌면 안되겠냐? 네가 그 부교역자들을 형님처럼 대해주면 안되겠느냐?” 그런데 똑같은 음성을 세 번 들려주심. 그러면서 모두 쫓아내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완전히 바뀌심. 그게 목회의 turning point가 됨. 그 후에 교인들이 목사님이 보는 앞에서 “우리 부목사님은 담임목사님보다 교회 일을 훨씬 더 열심히 잘 해” 하며 칭찬을 함... 어떤 문제가 있을때 그것이 불평하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앞에 깊이 기도하기만 하면, 그 불평하는 기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드시고 우리를 바꾸어 놓으심...
하나님 앞에 불만이 있어요? 감히 말을 못해서 그렇지 많을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마음예 안드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직접 가서 말씀하세요. “하나님, 나는 왜 이 모양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직접 여쭤보세요. 그것도 대충 기도하면 안돼요. 간절히 불평을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너는 심히 못됐다” 그렇게 응답을 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게 있어요. 목사가 교인들에게 “당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정말 못됐다”고 하면 상처를 받아도 간절히 기도할때 하나님이 “너 정말 못되었구나” 하시면 거꾸러지면서 회개가 나옵니다.
그렇게라도 해가지고 다른 길을 찾아서 하나님과 형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도생활하는 것이 옳잖아요? 그러니까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문제가 있으면 말하세요. 하고싶은 이야기는 요거에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이것은 감추고 속에도 없는 얘기를 끌어들여서 하는 거에요. 보따리를 풀러요.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할때 진짜 원색적으로 불평을 했어요. 가나안 땅이고 뭐고 우리 괜히 왔나봐요, 하나님... 쉽게 얘기하면 우리를 왜 이리로 보내셨어요? 거기에 그냥 두시지...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일거면서 하나님, 왜 우리를 복잡하게 요단강 물을 말리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 왜 여기까지 오게 만드셨어요? 그렇게 불평하면서 나아가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그는 진심으로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그것은 잘못된 기도였어요. 그러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깊이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기를 원하시지만 기도할 때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우리가 무슨 사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인데 터놓고 얘기하지, 인간이면 뒤에다 감추면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뒤에 보따리를 감춘 것 다 아시는데 뭐 그리 복잡하게 살아요?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이런 생각입니다. 하나님, 어떻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여리고성을 폼나게 무너뜨리셔놓고 아이성은 왜 안무너뜨리셨습니까? 왜 우리 가운데 36명이나... 왜 이런 패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하나님, 그럼 왜 우리를 (?) 셨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 앞에 매달려 간구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 열린 교회에 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신데 내가 왜 이 교회에 와서 은혜생활 못하고 있습니까? 그럴 바에야 하나님, 내가 이 교회에 안오는 것이 좋았을 뻔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안섬기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요. 깊이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얘야, 나를 믿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게 아니란다”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자녀들이 그 부모 마음을 기막히게 알아서 웃을때 방긋방긋 웃고 부모가 “공부해라”는 말이 나오려고 할때 가 보면 앉아서 공부하고 있고, “재가 운동좀..” 하는데 밖에서 줄넘기 하고 있고 “아이고, 재 방이 왜 저렇게 지저분...” 하는데 청소하고 있고.. 여러분도 부모앞에 그렇게 못살았어요. 우리가 그것을 파악해야 해요. 그런데 우리 자식들에게는 그것을 강요하잖아요. 물론 좋은 기도는 ‘하나님이 뭘 기도하라고 하시나? 아 바로 저거구자’ 하고는 “주님. 하나님의 교회에 부흥을 주시옵소서. 아니면 누구의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만 기도하면 좋지요. 그러나 하나님도 우리가 그 정도를 못한다는 것 뻔히 아세요. 그런데 비록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이 ‘공부했으면’ 했는데 공부하는 모습으로 있지 않고 놀고 있어도 노는 놈 보고 “공부해라” 했을때 “예, 알았습니다. 아버지” 하고는 가서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하면 그것으로 O.K.에요. 그렇지 않아요? 당연하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요구를 쫓아가지 못해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찼어도, 여러분들을 싫어하시는 것은 그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 섭섭하고 토라진 감정을 가지고 살거나 다른 사람 만나서 “야! 하나님이 요새 나를 이렇게 막 보시더라” 그러고 돌아다니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는 것이에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거에요. “하나님, 나 이런 거 이런 거 참 제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섭섭하옵나이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고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물으면서 기도하면 그것이 비록 불평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우리의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다섯 번째로는 이 여호수아가 5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그러니까 이 속에는 결국 어떤 말이 깃들여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의 상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여호수아의 독특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철학이 들어있어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전쟁에서 지거나 물러서거나 패배할 수 없는 백성들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원수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뒤로 물러나서 도망을 갔으니 뭐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에요. 기도생활속에서 우리가 굳건하게 하나님을 유지하며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가 뭐냐 하면 실패나 패 배를 당연시하는 것이에요. 실패를 운명처럼 생각하고, ‘이 정도 실패야, 뭐!’ 하나님이 때리셔도 ‘이정도 맞는 것 쯤이야 뭐 늘 맞는건데...’
아이들을 기르면서도 매를 때리면서 아이를 기르려고 하면 그게 마약과도 같아서 자꾸 단위가 올라가게 됩니다. 제일 처음에는 한 방 때릴 때 절절 매고 겁내지만 계속 맞으면... 학교다닐 때 그래요. 숙제를 안해가면 그 선생님은 때린다는 것을 알거든요. 그 선생님은 참 많이도 때렸어요. 학교에서 몽둥이를 한 학기에 한 번씩 목공소에 주문을 낼 정도였으니까... 잘 깎아서 들어옵니다. 아주 기가막혀요. 학교 마크까지 찍어가지고... 저의 할머니가 중동중학교에 다닐 때, 아침에 등교할 때 모자를 비뚤게 썼거나 가방끈을 잊어버린 아이들을 불러서 엎어놓고 패거든요. 저는 들어갔는데 안들어오시는 거에요. 그러더니 이 노인네가 거기 선생님한테 막 항의를 하는 거에요. 재네들이 우리애들은 아니지만 다 금쪽같이 귀한 자식 돈 줘서 보냈더니 왜 이렇게 개패듯이 패냐는 것이에요. 아주 의분에 떠시는 거에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지요. 선생님이 하는 말이 “애들은 저렇게 맞아야지 사람이 됩니다.” 하니까 “지네들이 한 번 맞아보래지, 그런 말이 나오나. 부모들이 공납금 줘서 보내서 여기서 이렇게 얻어터지는 것 보면 눈에서 피눈물이 날거야” 노인네가 아주 흥분을 해서 - 학교에서 그렇게 때린다는 것을 처음 봤거든요. 벌벌 떠시는 거에요. 간신히 뜯어말려서 학교를 들어갔는데, 그런 적이 있어요. 이것도 분명히 숙제를 안해서 가고 머리 안깎고 가면 맞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맞는 애들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어휴, 골치 아프게 그거 뭐 열 시간씩 매달려서 하냐? 3분 화끈하게 맞고 말지” 그러는 거에요. “남자답게 맞고 말지..”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패배와 실패와 하나님의 징계를 그저 계속 반복해서 받았기 때문에 이골이 나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에요. 안풀리고 비비 꼬이면 ‘꼬인대로 살지, 뭐. 누가 복 받지 말라나?’ 그러면서 사는 거에요.
그러니까 풍성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간 데 없는 거에요. 그리고 기도를 안하는 거에요. 여러분, 뭔가를 간절히 기도하려면 그리움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매달리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가 뭔가 그리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에요. 여호수아는 뭐를 얘기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전쟁에서 패배하고 실패해서 등을 보이면서 도망가면 안되는 법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왜 여호수아가 그런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그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보내주신 이유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보내주신 이유는 그냥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뭐냐하면 지도에서 보면 알지만, 가나안 땅은 이쪽으로는 지중해를 연해서 배를 타고 나가면 서방세계로 가서 닿을 수가 있어요. 그리고 이쪽으로 가면 아시아쪽으로 닿고... 그 자리가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문명의 발상지에요. 그러니까 가장 문명의 국가들이 모여있고 왕래가 많은 곳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이제벨이라는 사람이 그 바다를 타고 들어와서 바알 종파를 전파하잖아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번성한 곳에 하나님께서 그 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애굽에서 불러서 거기에 집어넣으시는 거에요. 그래서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심으셨다”고 말해요. 여기에 있는 나무를 캐다가 가나안 땅에 심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뭘 보여주시려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이 세상의 백성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려고 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전쟁이 났는데 패배하고 도망가요. 그러니까 운 좋으면 이기고 운 나쁘면 지고, 승리하면 정복자가 되고 패배하면 노예가 되고.. 그렇게 반반의 확률을 가지고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게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에요. 벌써 가나안 땅의 요단강 물을 말리면서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나안에 그 소식이 전해져서 간담이 서늘해 졌어요.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한 편으로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놀라운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루시는가 하는 것을 주목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뭘 주목하고 싶었는가 하면, ‘설마, 설마, 설마’ 하면서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란거에요. 그런데 진짜 일어난 거에요. 여리고 성은 무너졌지만 아이성에서 36명이나 도망갔다고 하더라.. 그러면 결국은 뭐냐하면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우연이었다” 그렇게 이방의 사람들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안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가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뭐가 잘 안돼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는 적당주의..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간절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집회를 많이 다녀보면 똑같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교회에서 모여서 주일에 예배 드릴 때하고 수련회가서 예배 드릴 때하고 분위기가 같아요, 틀려요? 그것은 왜 그래요? 수련회는 은혜받는 곳이다..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런 고정관념이 있는 거에요. 예배는 안그럴 때도 많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수련회 가서 몇 만원씩 돈을 내고, 바캉스도 포기하고 와서 하루 이틀 삼일 사일 오일 됐는데 은혜를 못받으면 본전 생각이 나는 거에요. 교회와서도 그런 본전생각 하면 은혜 못 받을 사람들이 없어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변화 받고 은혜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에요. 사모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틀려요.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실패를 여호수아는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의 군대에게 등을 돌릴 수가 있는가? 등을 보이고 도망갈 수 있는가?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여호수아가 장군이었잖아요? 군사가적인 측면에서 이건 말이 돼요, 안돼요? 말이 안돼요. 일전실패는 병가지 상사에요. 한 번 전쟁에서 지는 것은 군인이 되고 나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조금 졌어도 나중에 왕창 이기면 회복될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여호수아는 군인이기 이전에 신앙인이었어요.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마귀에게 지고 자기에게 지고 세상에서 지고 하는 것들을 얼마나 쉽게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몰라요.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의 간절하고 사모하는 것을 앗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이런 것들을 타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수아같이 이런 선명한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어야 합니다. “주여, 내가 지금 대적앞에 패하고 있사오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사옵나이까? 저는 사람도 아닌가 봅니다” 하나님앞에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승리의 약속들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속에서 모든 군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일을 그는 비단 지도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한 낙관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속에서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많은 신앙의 실패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은혜없는 섬김, 그리고 패배하기 잘 하는 삶, 자신에게 지기를 잘 하는 모든 실패, 이런 것들을 어느 한 순간에 ‘이래서는 안되는 일이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기도해야 할 큰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정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가?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제서야 하나님 앞의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매달려서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보니까 이렇게 9절에 씌여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재미있는 것이 6장의 마지막 절에 이렇게 나왔어요. 26절에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면서 다시 건축하는 사람이 저주받을 것을 예언하는 것이지요.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를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 건축하는 자는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을 것이요- 이 계자라는 말이 어린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그 어린 것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령이 - 히브리어에는 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여호수아의 소문이 온 땅에 퍼지니라” 그러니까 모든 이방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크게 겁을 먹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없이 크게 보았는데 이렇게 패배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니까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이후에 일어날 사건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우습게 보고 덤벼들어서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서 끊어버릴 터이니 그렇다면 주님의 크신 이름은 우리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옵나이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며 사는 증거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가는 그 증거를 보여줘서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시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그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결국 이 여호수아의 기도의 여섯 번째 특징은 주의 이름을 위한 기도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불평할 수도 있고 슬퍼할 수도 있고 오래 기도할 수도 있고 또 살면서도 성패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도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앞에 우리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우리는 먼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하고싶은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그 일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일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여호수아의 기도를 통해서, 이 마지막 여호수아 기도의 특징을 통해서 오늘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 어떻하려나이까? 여호수아는 단지 자기의 민족의 패배나, 그리고 자기의 백성들의 죽음,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 큰 것은 자신들이 왜 가나안 땅을 가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두 사람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그 악한 이방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셨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기 위해서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을 왜 하나님께서 예수 믿게 만드셨습니까? 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셨고 왜 시시때때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짐을 위해 우리의 인생이 꼭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런 영적이 상태와 신앙의 변화와 삶의 벽혁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7. 실패 앞에서의 기도(Ⅳ)(수 7:10-11)
지난 시간에는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고 기도하는 것과 또 불평을 기도하더라도 계속 깊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보이신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호수아의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를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기도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9절까지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10절과 11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질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가운데 두었느니라’
결국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비록 이 여호수아가 불평하면서 기도했고 다소간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섞인 기도를 드렸지만,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여호수아가 비록 사태의 진전을 파악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불평을 하며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깊이 기도했다는 것과 오래 기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좇아서 처음서부터 끝까지 기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만을 기도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기도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도대체 자기들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자기 앞에 펼쳐진 그 현실은 받아들이기에 고통스러운 현실이었습니다. 그 큰 여리고 성을 장엄하게 무너뜨린 이스라엘의 군대들이 그 작은 성 아이에서 대피하여 36명의 장례식을 치루어야 하는 이러한 비참한 일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모든 이 세상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전쟁과 투쟁이 기다리고 있는 그 가나안 땅에서 홀로 힘을 잃어버린 군대가 되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호수아가 이렇게 맥을 못잡고 기도를 하는데도 깊이 오랫동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결국 말씀하십니다. 그게 뭐냐하면 “여호수아야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뇨?”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여러분의 마음속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도제목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다짐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우리의 기도제목이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히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깊이 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제목이 옳지 않다는 사실까지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장시간동안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궤 앞에 엎드려서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날이 저물도록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아이성의 공격이 어느 시간이었는지 잘 나오지는 않지만 그러나 새벽의 시간이었다고 한다면 아침에 패전보를 듣고 엎드려서 하루종일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는 여호수아, 그가 기도하는 모습은 하나님께는 참 답답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여리고 성에서 그처럼 도우셨던 하나님이 왜 이 아이성과 같은 작은 성에서는 돕지 않으시는 것인지 모르는 이 여호수아를 보면서 얼마나 답답해 하셨겠습니까? 여호수아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 성을 멸망시킬 때에 거기에서 보물을 도적질해서 사기해서 자기 장막에 감추어둔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여호수아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몰랐습니다. 그것은 비밀이었습니다. 이 여리고에서 도움을 얻었던 이스라엘이 아이성의 전투에서 전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고 대패한 것이 바로 그 비밀 때문이었습니다. 비밀을 알 수 없었습니다.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비록 그 사건을 몰랐고, 몰랐기 때문에 그는 다소 당연히 잘못된 것처럼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린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돕지 않으시는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잘못도 잘 깨달아요.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깊이 깨닫게 되지만, 그러나 기도할 때에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실감하게 돼요.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러나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호수아가 기도한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 본받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그 기도가 올바른 기도든지 어떻게 된 기도든지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잘못된 기도도 깊이 간절히 하지 않으니까 그 기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응답이 안되는 것이에요. 깊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기도가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지를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10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이 말씀은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황당한 얘기일 수도 있어요. 하나님앞에 간절히 엎드려서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아마 성경에는 안나오지만, 분명히 7절에서 여호수아가 티끌을 무릅쓰고 있다가 저녁때쯤 되어서 “슬프도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틀림없이 장로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했던 것 같애요.
여러분, 어떻게 안 울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한 분만을 믿고 그리고 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 나섰고 그리고 여리고 성을 놀랍게 무너뜨리고 ‘아이성 정도야...’하고 올라갔는데 사람들이 죽었으니 서른 여섯 명이 죽었으니까 한 가족이 - 당시에 대가족 사회니까 20명만 식구가 딸렸다고 한다면 최소한 720명이 초상에 참여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어렸을 적부터 모세를 따라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질머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성질입니까? 하다가 잘 안되는 일이 있으면 그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향해서라도 돌멩이를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에게 이것은 국가적인 사건이 동시에 개인적인 사건이에요. 자기의 리더쉽이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혁혁하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이 여호수아가 엎드려서 기도했을 때 두말할 나위없이 마음이 가난했던 사람은 여호수아, 이 사람이 틀림없을 거에요. 여러 모로 볼 때 여호수아는 그 카리스마적인 성격이나 아니면 초인적인 지도자적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확실이 모세만한 그릇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가 모세로부터 놀라운 영적인 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신령한 사람이 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충성심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맨 처음에 모세의 뒤를 잇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부터 그에게 주어진 메시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그 말씀에 대해서 충성을 맹세할 것, 이것이 그의 소명시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여호수아도 역시 걸출한 지도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담력과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에 있어서는 모세를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보면 모세가 얼마나 자주 절망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제 내가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얼마나 괴로우면 하나님 앞에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매달리며 기도했겠습니까?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은 변덕이 죽끓듯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많이 되는 것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할 때 정말 사람들이 칼빈의 목소리를 신의 목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네 제네바 시를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지도해 달라고 그 사람을 모셔온 것 아닙니까? 모셔다가 목회를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칼빈을 청빙하러 갔던 바로 그 사람이 몇 년 뒤에 말하자면 반대당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칼빈을 내쫓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우리 속에 살아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즐거움이고 기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해주는 사람이 참 감사하고 감격적이지만, 자기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싫어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변하고 나면 “왜 저 사람은 맨날 옳은 소리만 하냐?” 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요구하니까 반기를 드는 것이지요. 수많은 반대 세력에 둘러싸여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자기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하루에 열 번 이상이나 죽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였어요. 속히 하나님이 자신을 데려가시기를....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매달리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24년인가 몇 년동안 지내다가 거기서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이 안풀리면 맨 처음에는 잠시 엎드리지만, 그러나 잠시 후에는 모세를 향해 돌멩이를 드는 거에요. 그렇게 강한 모세도, 그런 놀라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모세도 그렇게 쉽게 낙담했는데 이 여호수아는 진짜 이렇게 엎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이었어요. 엎드려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사실은 기도도 못한 거에요. 내용을 보면 어떻게 해 달라는 이야기가 없어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어찌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너 왜 그러고 있느냐? 왜 엎드려 있느냐?” 이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여호수아에게는 엄청 기분나쁜 일 아니에요? 왜 엎드려 있는지 하나님이 모르세요? 상황이 이렇게 벌어졌는데... 지금 이스라엘의 군데는 패했고 줄초상이 나서 이렇게 초상을 치르고 있는 판에 왜 엎드려서 기도하는지 하나님이 모르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세요? “너 왜 엎드려 있느냐?” 간절히 기도하는데 “너 뭐하고 있냐?”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이에요. 여기서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기도가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는 거에요. 그 사실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죄의 문제’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진실을 보이시는데 11절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범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질하고 사기하여...’ 나쁜 단어는 다 나와요 ‘범죄, 어기었나니, 취하고, 도적질하고 사기쳐서’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이해가 안가는 점이 있어요.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누구였어요? 아간이었거든요. 그런데 뭐라고 했어요? ‘이스라엘이...’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그들이 어기었나니, 그들이 사기치고’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죄를 벌하실 때 개인적으로 다루시고 공동체적으로도 다루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느 한 쪽을 보아서는 안돼요. 둘 다 다루시는 것이에요. 개인적으로 다루세요. 개인적으로 (?)
이 삼십 육 명의 죽은 사람들은 아간이 훔친 것을 나눠가진 사람들이에요? 훔치는 것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에요. 언제 외투 나눠갖고 금붙이 은붙이를 나워가진 것이 아니라 이 삼십 육 명은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삼십 육 명을 말하자면 본보기로 처단하시는 것이에요. 누구의 죄 때문에? 아간의 죄 때문에... 그러니까 이 연대적인 죄를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중요시하시는 것이에요. 연대적인 죄가 가득 차면 개인이 다소 경건하고 의로워도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으세요. 쓸어버리시는 것이에요.
늘 반복되는 얘기입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왜 포로로 끌려갔다고 해요? 간단해요. 죄 때문에 포로로 끌려간 거에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잖아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우시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후로 또 정확히 40년 뒤에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지요. 주후 70년의 일이에요.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으면 - 100만명의 유대인들이 모였다니까 - 피가 도랑처럼 흘러갔다고 해요. 그렇게 사람들이 죽는데 거기에 죽은 사람들 중에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던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있었단 말이지요. 이같은 사상은 예수님에 의해서도 지지돼요. 예루살렘의 망대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는 사건이 일어나지요? 그걸 가리켜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세요? 갈릴리 사람들이, 또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특별히 죄가 많아서 죽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여기서는 특별히 이것을 아간 한 사람의 죄로 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로 보신 것이에요. 하나님은 이렇게 연대적으로 죄의 문제를 다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진정한 중보기도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지체들 가운데 어떤 허물이 떠오르면 여러분은 그것을 자기의 잘못으로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의 잘못이 떠오르면 돌멩이 던지는 것은 우리의 취미지요? 그러나 그렇게 공동체 속에서 어떤 죄가 발견되고 그리고 지체 속에서 어떤 잘못이 발견될 때 그것이 자기의 잘못인 것처럼 생각하며 기도하는 일들이 왜 필요한지를 여기서 보여주는 것이에요. 여기에는 이러한 공동체의 연대적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죄지은 자를 형벌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죄에 참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뉘우치는 연대적인 회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즉 개인적인 회개와 연대적인 회개가 동시에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회개해야 할 사람인데 하나님의 진노가 크니까 심판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간을 돌로 쳐서 죽이잖아요? 그것은 사실 개인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쉽게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쓴 뿌리가 되었던 악을 잘라내는 사건이에요. 오늘날에 적용시킨다면 교회마다 사실은 피묻는 돌멩이 투성이겠지요. 너나 나나 서로 치다가 죽은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오늘날은 복음의 시대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루시는 방법이 구약과 많이 틀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받는 공동체의 고통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동체에서 죄가 발견되고 잘못되고 허물들이 발견될 때 언제나 자기 손에서 피가 묻었다는 생각을 여러분은 하고 있습니까? 자기 손도 이미 그 죄에 참여한 바 되어서 피묻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아간 한 사람이 범죄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언약을 어겼고 그들이 물건을 취하고 도적질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럼 왜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때문이에요? 하나님이 한 나라를 이스라엘 손에 붙이실 때 거기에는 이중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에요. 한 쪽의 성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시기 위해서 붙이시는 것이고 또 한 쪽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이 너무나 악이 쌓여서 더 이상 그들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도구로 사용해서 도구로 쓸어버리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의 정복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이거지요. 하나님은 자기에게 범죄한 나라나 백성들을 향해서 진노하는 마음을 품는데 이 하나님의 진노는 심판을 통해서 달려가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뿐 아니라 아이성을 공격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공격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끔찍한 이야기가 많이 있어요. “너희는 그 족속을 쉬되 무릇 숨쉬는 것들은 모두 죽일 지니라” 이런 명령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모두 불태우고 모두 죽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에요? 하나님이 그 땅에 대해서 너무나 분노하시기 때문에 누군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진노를 풀어주어야 할 상황이 생긴 거에요.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에요. 바알 브올의 사건이라고, 말하자면 장로들이 이방 족속들과 함께 교통하면서 성적으로 범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모세가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나서 응답을 받는데 “누구든지 여호와의 품 안에 살 자는 나와라”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는 거에요.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말하자면 십여 만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해요. 그것이 결국 뭐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것이에요. 결국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도가 중요하지만 그러나 기도보다도 더 중요한 사건이 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기도는 반드시 자기의 삶을 정리하면서 하나님앞에 나아가야지만 그 기도에 능력이 있고 그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이에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에 기도의 힘을 얻고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간절한 기도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도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삶을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삶이 하나님앞에 정결케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을 포기할 때 그때 기도는 새로운 힘과 강력한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에게 결단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또한 결단할 때에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는 이러한 복병, 그러니까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러한 일들이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짐작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믿고 하나님앞에 매어달려 기도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시면, 주께서 이미 자신들의 손에 붙이신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서 놀랍게 일해주시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곳에서 문제는 터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일어나 백성을 성결케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즉 무슨 뜻입니까? 성결한 삶, 구별된 삶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한 기도에 능력이 깃들인다는 것입니다. 삶의 탐심과 그러한 욕심, 죄가운데 있는 삶을 내버려두고 그리고 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꺾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빼앗으려고 하는 이러한 기도의 개념들은 여기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아이성을 정복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 우리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입니다. 도저히 알려질 수 없는 이 사건. 혼자 훔쳤어요. 혼자 자기 장막에 갖다 감췄습니다.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기도안하면 발견될 수 없는 이 사건이 여호수아가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해 주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서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이 백성들이 주님의 이름에 모욕을 돌리고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하며 하나님앞에 매달리는 것이 여호수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응답하셔서 “야! 아까는 내가 잠깐 실수했다. 다시 공격해라. 내가 확 밀어주마” 이런 응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과 은혜를 힘입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을 바꾸면 기도의 강력한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죄악과 그리고 허물을, 그것도 계속되는 것을 그대로 부여안고 하나님 앞에 능력을 구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마귀도 비웃는 일입니다. 먼저 우리는 삶이 하나님앞에 바쳐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앞에 새로운 능력과 인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 이 여호수아는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진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히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여리고성도 무너뜨리고 요단의 물도 말리고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완전히 초라한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입지 못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떠났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온 백성은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부족하거나 모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꾸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왜 사느냐? 삶 자체가 다음 기도시간의 준비에요. 삶을 하나님앞에 깨끗하고 올바르게 살면 다음 기도할 때, 무릎을 꿇을 때 힘이 나고 능력이 나오는 것이에요. 또 그렇게 능력있는 기도를 드리고 나면 그 기도의 힘을 가지고 또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그대로 간직하며 사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이 이러한 기도의 세계들에 대해서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련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 수련회의 가장 커다란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충만한 말씀과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고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불꽃처럼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우리들이 경험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수련회에 가기 전에 우리 자신속에 있는 삶을 각자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기도의 날들, 그 많은 수고의 날들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작은 기도의 응답, 지극히 작은 열매밖에 얻을 수 없었던 우리의 신앙적인 삶의 궁극적인 실재의 원인이 혹시, 우리의 기도는 갈수록 수준이 높아지고 말씀을 아는 지식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상당히 높아졌어도 우리의 삶이 도저히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도가 불일치하고 있지는 않는가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품이 있는 기도는 거품을 걷어놓고 보시는 것이에요. 기도는 이만큼 하고 삶은 요만하면 나머지 위는 아무것도 아니고 거품이에요. 삶은 기도안에 묶이고 기도는 삶을 능가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기도하니까 그렇게 사는 거에요. 수련회를 앞두고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점검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공동체 속의 어떤 허물과 죄악이 있을 때 그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봐야 하는 것입니다. 아간 한 사람이 범죄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간이 훔친 것에서 아무 것도 유익을 받은 것이 없고 이득을 얻은 것이 없지만 그러나 36명의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주님은 결코 애매한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들의 죄 때문에 너희들이 죽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모든 문제는 바로 이것이거든요. 이렇게 하나님앞에 연대적인 의식을 가지고 공동체 속에서 발견되는 죄와 고통의 문제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하세요. 여기서도 보세요. 하나님앞에 이스라엘의 패배를 자기의 것으로 느끼면서 장로들과 여호수아가 간절히 기도하니까 인간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 공동체의 문제를 드러내시고 치유하시고 깔끔하게 하시고 그리고 다시 두 번째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나 지체의 어떤 죄악이나 문제들을 발견할 때 먼저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깊이 끌어안고 고민하는 방법이 없이 눈으로 보고 입으로 튀어 나오고 심지어는 주먹이 날라가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러한 문제들을 통해서 그 백성들을 다루시는 그 세미한 방법, 이런 것들이 잘 파악이 되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수련회를 앞두고 우리는 하나님앞에 기대도 많이 갖고 기도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먼저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련회에 참석하는 최상의 회비는 하나님앞에 내가 그동안 이러이러하게 살아왔던 삶, 이런 것들은 내가 하나님앞에 드립니다... 이러이러한 생각들, 내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인간을 향한 미움들이나 이런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이런 것을 하나님앞에 내려놓습니다. 내가 이런 것을 내려놓는 것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받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 이것이 내가 당신의 은혜를 사모하는 내 마음의 정성입니다”하고 그런 종류의 회비를 하나님앞에 바쳐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놀랍게 새롭게 하셔서 우리의 기도가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8. 성령주심을 위한 교회의 기도(행1:14)
지난 시간까지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실패 앞에서의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개인의 차원의 기도를 지나쳐서 교회가 기도하는 모습에 대해서 몇 번 더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1장을 펴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1장의 첫 부분은 누가복음과 중복됩니다. 누가복음은 누가 썼지요? 다 가르쳐줘도 몰라요? 누가가 썼지요? 사도행전은 누가 썼어요? 사도가 썼다고 하지요? 그러면 안돼요. 사도행전은 누가 썼지요? 그것도 가르쳐 줬어요. 누가가 썼어요. 누가는 말이지요. 아주 탁월한 역사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저는 사실 한때 성경을 읽으면 다 좋지만 이 누가복음에 완전히 빠졌었어요. 저는 지금도 이 누가복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때 “나는 이 누가복음과 결혼했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누가복음을 사랑했습니다. 누가가 참 누가 낳는지는 모르지만 참 잘 낳았어요. 우선 말입니다. 누가는 아주 시인이에요. 문학가 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이고 실제로 헬라어 본문을 보면 신약의 각 책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아틱 헬라어(?)로 많이 쓰여졌어요. 그래서 이 누가복음은 문학작품으로서도 탁월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누가복음은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풍부하게 많이 나와요. 그래서 좋고 또 하나는 누가복음에는 제가 좋아하는 시가 많이 나옵니다. 그렇지요? 오늘날 누가가 설교하게 되었으면 아마 저처럼 설교하다가 찬송 하나 부르고 찬송하다가 설교하고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를 그렇게 누가는 사랑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탁월한 것은 뭐냐하면 탁월한 영성이에요.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 그리고 소외된 부녀와 어린아이들, 그러니까 누가복음에는 깃발을 들고 전진하는 사도들만 주인공이 아니에요. 부녀와 어린 아이, 창기, 세리와 같이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서 따뜻한 눈길을 보내면서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누가복음을 아주 사랑합니다. 지금은 능력이 안돼서 전체를 설교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한 10년정도 걸려도 누가복음 전체를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책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이 바로 누가가 쓴 책이에요. 그러니까 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사람 앞에 보내는 편지였어요. 그런데 누가복음도 역사적인 연대기를 따라서 잘 설명해 나갔고 사도행전도 기록해 나갔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서 누가는 탁월하게 역사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 역사가들이 글을 쓸 때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앞의 이야기를 쓰고 뒤에 계속되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할 때는 이렇게 오버랩 시켜요. 겹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 1장에서 나오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이야기가, 또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주시는 이 메시지가 모두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나오는 것을 다시 사도행전에서 써 내려가면서 겹쳐서 이 두 가지가 일련의 한 사건임을 말하자면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뭐냐하면 예수님이 승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감람원이라고 하는 곳이었어요. 예수님의 추억이 많이 서려있는 곳이지요. 늘 찬미하러 제자들과 즐겨 가시던 곳이었고 또 기도하러 가시던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추억이 깃들여 있는 이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제 승천하시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말씀이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도대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뭐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새 시대의 새로운 방법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었어요. 성령이 그렇게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부분적으로는 맛을 보았지만 그러나 한 공동체 위에 강력하게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성령이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사람들은 아직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줄기 시작해서 결국 베드로가 유다를 대신해서 한 사람을 뽑을 때 와서는 120명의 사람들만이 남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루살렘에 돌아오니까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에 알맞은 길이다... 이때 유대인들은 자기네 나름대로 규례를 정해서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정했어요. 그 거리는 대개 900미터에서 1킬로미터 정도 되는 것이었어요. 2000규빗 정도를 허락했는데 1규빗이 45.6센티미터였으니까 정확하게 따지면 9백 십 몇 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지요. 그 거리까지는 안식일에 걸어갈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더 많이 걸어가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한 그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 근거는 뭐냐하면 두 가지를 들었는데, 하나는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도피성 있지요? 다시 말하면 사람을 실수로 죽인 사람들은 도망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일단 도피성에 도피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 의한 타살을 면할 수 있지요. 그 도피성의 거리가 대개 2000규빗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법궤를 메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 요단강에 들어섰던 사람들이 먼저 들어서고 그 뒤에 떨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군을 했는데 그 거리가 약 900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어요. 역사적으로 그런 것들을 근거로 이러한 규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식일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였어요. 그래서 이들이 돌아오게 되어서 다락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도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서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이들로 더불어 마음으로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서 우리는 하나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이 기도한 것이 결국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주마 하신 성령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들은 4절을 한 번 봅시다. 4절에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약속하신 것..’ 분명히 이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기도하기 전에 그들은 붙들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입니다.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도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기도가 굉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의 삶, 모든 우리의 삶을 향한 수많은 약속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약속은 우리가 그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사모하며 기도라고 간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쟁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신 바 약속들을 식언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제가 사실 경제를 잘 압니까? 잘 모르지요. 언젠가 한 번 책을 번역했는데 ‘어음’이라는 것을 누가 가지고 왔어요. 약속어음... 이렇게 되어 있는데 ‘금액 몇 백만 원을 쓰고 이 금액을 몇 월 몇 일까지 이 사람에게 지급할 것입니다’ 아! 정말 멋있게 생겼더라구요, 푸르둥둥해서... 이것을 잘 가지고 있으면 이때 주나 보구나 하고 이것을 몇 번씩 접어서 깊은 곳에다 넣어놓고 그 날 되기를 기다렸지요. 아무 소식이 없어요. 그래서 이 수표를 떼 주고 돈을 안주면 안된다는데 이 사람이 나를 너무나 우습게 보는 거구나... 전화를 걸어서 “오늘이 수표 주는 날인데 이거 부도 안나요?” 했더니 며칠만 더 기다리래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알고 봤더니 그 수표용지가 200원만 주면 문방구에서 얼마든지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어음을 쓰고 했는데 그게 아무 법적인 제재가 없는 모양이에요. 며칠 지나서 받기는 받았습니다마는, 이게 어음이 전부다 그런게 아니구나.. 며칠 후에 어떤 사람이 번역을 해달라고 해서 번역을 해서 60만원인가 100만원인가 되는데 수표를 가져왔는데 이번에는 색깔이 틀려요. 불그스름한 색깔이에요. 그러면서 “아, 우리는 수표로 드립니다”그래서 “수표든 뭐든 아무거나 잘만 주면 되지요” 그러더래요. 그러면서 “교수님, 이게 바로 제때 돈 안주면 발행한 사람이 잡혀 들어가는 그 수표입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아! 이게 문방구에서 파는 시퍼런 수표는 말만 수표지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고 깨닫고 이거 정말 놀라운 거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로부터 한 2년 후에 집안에 사건이 터졌어요. 셋째 동생이 사업을 하는데 울상이 되어 전화를 했어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1억인가를 부도 맞아서 위기를 만났대요. 그래서 퍼런 수표 받았냐고 하니까 벌건 수표래요. 그것도 부도 나냐고 하니까 당연하대요. 한 사람이 부도가 나니까 연속으로 부도가 터진 거에요.
여러분, 왜 사람들은 그런 것보다도 자기앞 수표를 더 좋아할까요? 자기앞 수표도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은 은행에서 돈을 안주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금액이 찍히고 은행의 도장이 찍힌 것, 그것은 자기가 훔쳐왔다고 해도 신고가 들어가지 않는 한 은행에 내밀면 돈을 주기로 되어있고 은행이 보증하기로 한 것이 ‘자기앞 보증 수표’에요. 은행이 자기 앞으로 발행한 수표란 말이지요. 그게 뭐예요? 약속이에요. 확실한 은행의 보증이 있으니까 종이 조각 하나 받고 차를 내주고 집을 내주고 땅을 내주고 그러는 것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확실하고 변함이 없는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훨씬 더 힘있고 능력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시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지만 그 약속을 거저 이루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이 약속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들이 올라가서 다락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 14절 후반부에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런데 이것이 헬라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마음으로, 기도에 있어서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기도를 뻗어나가게 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에 힘썼던 것을 보기 전에 어떤 사람들이 모였는지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베드로라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큰 소리 잘 치고 사건 만들기를 잘 하는 이 베드로라는 사람이 여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실패했지만 요한복음 21장에서 다시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상처가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주님을 모른다고 도망가다가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서 십자가 아래 서게 된 회개한 요한이 있습니다. 야고보가 있고 안드레와 빌립이 있고 의심이 많았던 도마도 있습니다. 바돌로매와 마태와 그리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고 셀롯인, 이 사람들은 열혈당원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말하자면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 광복을 쟁취해야 한다고 믿는 열심 당원들이었습니다. 그런 셀롯인 시몬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래도 하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들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뒤에는 유대인들인 여자는 숫자에도 안쳤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오천 명이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떡을 먹었다고 하면 거기에는 남자만 친 거에요. 아이와 부녀자들 빼고 친 거에요. 그러니까 5000명이 먹었어도 실제로는 한 20000명 정도가 먹은 거지요. 6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제 출애굽을 했다고 하지만 그 인구조사는 결국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만 친 것이에요. 즉, 여성들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이것이 성경 시대의 풍습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풍습이 옳다, 그르다고 말하기 전에 이렇게 심하게 얘기하면 인구 헤아리기에 들어가지도 않던 그러한 여자들과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 이 사람은 예수님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떠한 일들을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왔고 또 공생애 기간 중에 그가 행하신 일들이 어떻게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때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는지를 잘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아우들은 물론 예수님과 한 형제라는 이유 때문에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성품을 잘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될 수 없는 다양한 특징과 독특한 형편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이 지금 모여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에는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한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계속 기도가 뻗어나가게끔 했다고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재미있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부어주셔서 실제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최초로 세우시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나가심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모임은 사도들만이 모이는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기도의 모임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했던 사도들도 있었고 실패했지만 회복된 사도들도 있었고 그리고 말이 많고 의심이 많은 사람도 있었고 계산에 빠른 빌립과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한 여인들도 있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누구이신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답게 십자가에서 구 속의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던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그의 아우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되지 못할 수 있는 아주 다양하고 뚜렷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독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다투기를 잘 했던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일일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누가 높아질 것인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좌우 편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접받기를 좋아했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역의 뒤를 따라서 3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도 희생과 십자가의 보혈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모래알같이 하나되기 어려운 사람들을 제자들로 부르셔서 끊임없이 하나될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예수 안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한 공동체로 이루어 가려고 애쓰셨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약에 사도들이 놀라운 인격을 가진 사람이거나 생각과 경향과 성품이 놀랍게 일치하여 그래서 모두가 매사에 딱딱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의 연합이 진정한 영적인 연합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제 이 사람들은 각기 독특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 출신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열혈 당원도 있었고 소심한 사람도 있었고 계산에 빠른 사람도 있었고 덤벙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되지 못하는 요소는 다양하게 있었습니다. 신분의 차이도 있었고 가문의 차이도 있었고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모임을 사용하셔서 말하자면 구원의 역사의 한 사건을 터뜨리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셔서 한 마음을 갖게 하셔서 기도에 힘쓰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기도로 한 마음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이제 모든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에는 더더욱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한 마음,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표현이 열 번 이상이나 여러 차례에 걸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한 교회에 생명을 부어주실 때는 분명히 빌기를 다하고 기도하기를 마치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저희가 모여서 빌기를 다하매’ ‘저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다하매’ 성령이 부어주시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그들이 한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되지 못할 수 있는 이유가 많이 있었던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주님이 교회에 주실 영광스러운 성령의 강림을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가 워낙 크고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자잘한 것, 작은 것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차이점으로 발견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하고 뚜렷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 가운데 부으실 것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들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기름 부으심이 있고 나서 하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성령의 공동체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던 그 일들의 뒤를 이어갈 것을 이 사람들이 꿈꾸며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이들이 하나님 앞에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뛰어난 기도의 제목 하나를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매 기도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기도의 제목을 공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공통적인 기도를 소유하고 있지 못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뛰어난 기도의 영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일이지 실제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갈리어지고 나뉘어질 수 있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들 앞에 놓여있는 가장 커다란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붙들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많은 작은 것들을 사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약속들을 붙들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에 힘 쓸 수 있었던 비결중의 하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셨어도 함께 계실 때는 예수님을 의지했는데 이제 예수님은 떠나가셨습니다. 다시 이제 이 다음에 오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날이 언제라고 말씀도 안하시고 기약 없는 작별을 고하시고 떠나셨습니다. 쳐다보니까 천사가 말하기를 “뭘 쳐다보느냐?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승천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신비에 찬 눈빛으로 황홀하게 쳐다보는 것 말고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바로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이 살아계신 가운데 자기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는데 바깥에는 핍박의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를 정복하는 새로운 약 속의 부으심이 그들에게 있기를 그들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약속을 믿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비로소 교회가 교회의 일을 행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해도 머리와 생각 속에서 오고가던 성경의 진리들을 어느 날 사람들이 깊이 체험하고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이 머릿속에서 돌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피흘리기까지 안팎에 있는 죄와 더불어 싸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를 소망하는 사모함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결단하고 손해가 있고 피해가 있어도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성령이 오실 때 그런 일들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예수님이 왜 자기를 위해 죽으셨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토록 많이 듣던, 자기가 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왜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수이고 왜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쫓아갈 수 없는 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상식을 부인하고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그리고 자기의 모든 의를 부인하고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이 삶이 결코 고난에 얼룩진 삶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실 때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오실 때 우리의 삶속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고자 하는 큰 확신들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이 없으면 우리의 모임은 사교 클럽과 같은 모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선 느낌을 못 받고 자기의 죄에 대한 확신도 없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도전도 없고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그 놀라운 성도의 기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신념도 없을 때 그 교회 속에서 어떻게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질 수 있겠느냐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실 때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느 특별한 때에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개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때처럼이나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무엇 때문인가 하면 거의 모든 교회가 성령의 충만한 부어주심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어 달리며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 교회를 우리가 몇 년동안 이끌어 오면서 여러분 한 번 ‘나와 내 지체들이 정말 내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들을 능가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그 한 가지 기도 제목, 그것이 있어서 그 기도제목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서 그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는 것을 얼마나 경험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기도의 제목, 그것을 향해서 한 마음이 된 사람들의 마음은 그 기도의 제목이 떠오를 때 마음의 상함이 있어요. 상함이 있다고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그 기도의 제목을 놓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될 때에는 그 기도의 제목이 우리에게 떠오르면 그 기도의 제목이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제목이 떠오르면 하나님 앞에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아무리 샅샅이 들춰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한 가지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기도를 해도 성령을 부어주시지 않는 교회는 있지만 기도 없이 성령을 부어주시는 교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이에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기도를 해도 성령이 개인에게나 교회에 부어주시지 않는 경우는 많이 있어요.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실로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삶을 고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그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고 삶을 하나님 앞에 자기 기도의 제목대로 자기의 삶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아니면 기도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아요.
여러분, 오늘 아침에 저는 신앙생활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렸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당신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죄를 이기는 놀라운 능력, 육체의 불결을 이기는 놀라운 힘, 그리고 세상의 거친 이 더러운 풍조를 이기면서 살아가는 놀라운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님이 보혈을 모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흘려주셨어요. 그런데 너한테는 보혈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재한테는 안 나타나. 나한테도 보혈의 능력이 안 나타나... 죄를 이기면서 살아가는 그 능력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요. 무엇이에요? 여전히 죄가운데 있으면서 ‘보혈의 능력이 내게 임하면 내가 죄도 이기고 상황도 이길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술로 보혈의 능력을 갈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혈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그리고 매주 교회에 나와서 찬송을 부르고 예배 드리는 것이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신앙생활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실제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상식을 부인하고, 주님의 뜻이라면 내가 내 뜻을 부인하겠다... 주님의 뜻이 그러한데 주님의 뜻이 내 뜻과 부딪힌다면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죽어도 하고 싶은 것이 몇 번 있는지 집에 가서 한 번 헤아려 보세요.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의 의를 버려야겠다고 한 번 결심해 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의 삶속에서 자기를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그 무거운 짐들을 철저하게 부인하면서 살아보세요. 그때에 죄와의 싸움이 놀랍게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면서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교회에 성령이 없이는 우리가 이러한 거룩한 삶들을 살아가는 일들이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도 구원받지 못한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리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껍질뿐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자면 자신이 스스로 만족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 모든 것들을 타파함에 있어서도 역시 가장 훌륭한 것은 성령이 그들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실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도 삶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아니하면 변화를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아니하면 보혈의 능력은 역사하지 않아요. 죄가 좋은데, 그 가운데 누워있는 것이 재미있는데... 그러면서 보혈의 능력을 구하는 사람들은 보혈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아요. 실제로 작은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애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놀랍게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우려고 하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손에 붙잡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며 살기를 소원해서 불순종하게 하는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죄악된 요소를 부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모험의 바다에 우리의 신앙의 배를 띄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배를 실제로 파도와 시련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믿음으로 정복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심한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에워싼 세력들이 수만이요 우리같이 예수의 깃발을 든 군사들은 한 두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소심해지고 적군의 공격 앞에서 패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패배주의적인 생각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싸움에서 여러분들은 수없이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능력의 한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의지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을 실패한 것을 경험했다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 우리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삶을 사는 일이 불가능하옵나이다. 주여,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사오니 주여 싸우는 것은 우리지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은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주님은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의 푸른 초장에서 소꿉장난이나 하면서 풀꽃이나 뜯으러 천방지축으로 뛰어 다니는 어린이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도 진석이만하고 어리고 쪼끄말 때에나 돌아다니면서 바지도 벗고 러닝 바람으로 뛰어다니며 풀꽃을 뜯고 하면 귀여워 보입니다. 여러분, 머리가 허옇고 등이 다 굽어서 이제 주님께 갈 날이 가까웠는데 겅둥겅둥 반바지 입고 뛰어다니면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풀꽃이나 뜯으면 노망이에요, 노망. 전혀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라 가슴이 섬짓하다구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은혜의 바다의 깊은 곳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얕은 물가에서 찰랑찰랑 물장구나 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거대한 시련의 바다에 우리의 배를 띄우고 그리고 그들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손에 붙잡혀서 바다를 호령하고 물개를 명하여 잔잔케 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풍파를 헤치고 천국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항해를 하는, 말하자면 불굴의 선장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바다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더 커다란 놀라운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부어주시는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하나님 앞에 깊이 결단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어저께 너무너무 속이 상하고 마음이 상해서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었겠는가?’ 그래요. 여러분, 쥐들이 모여서 의논을 했지요. 가기만 하면 고양이가 와서 쥐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했더니 쥐 한 마리가 하는 얘기가 “고양이가 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게 하자”고 했어요.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면 저 멀리서부터 딸랑 딸랑 하고 올 테니까 도망가자... 젊은 쥐들이 참 캡이다. 참 훌륭하다..라고 했더니 뒤에 있던 쥐가 물었지요. “그럼 누가 달아야 겠는가?” 이론이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은 속임수예요. 삶에서 입증되지 않는데.. 그래요.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뛰어들어가서 자기 몸을 던지는 거예요. 누가, 어느 미친 사람이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을 원치 않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왜 모든 것을 포기해야 겠어요? 할 수 있어요? 다 집어치우고 학교 그만 두고 모든 것 다 뿌리치고 그리고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서 자기 몸을 불사르면서 장가도 못 가고 저기 무인도 비슷한 낙도에 가서 나오지도 못하고... 할 수 있어요?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데 어떻게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분신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좋아요. 가끔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누구에요? 높은 빌딩에서 휘발유 끼얹고 뛰어내리면서 “노동조건 개선하라” 그리고 떨어져서 흐물흐물하게 터져 죽어 가는 사람들,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해요.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과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은 틀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불가능한 것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 성령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우리 교회에 성령의 부어주심은 간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부어주심을 오늘 보십시오. 베드로가 기도원에 올라가서 40일 금식하고 나오니까 성령이 부어도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랬으면 한 사람만 죽으면 돼요. 목회자만 올라가서.. 솔직히 말해서 40일 금식 기도하면 (?)가 된다고 하면 아마 목회자 대부분이 올라갈 거예요.
기도원에 올라갔는데 한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하고 계세요.
“목사님, 왜 40일 금식기도 하세요?” 물으니까 “나도 몰라요”
여러분, 4일만 금식해도 완전히 배가 뒤집힐 지경인데 40일이라는 것이 그게 쉬운 겁니까? 의학적으로는 죽는 거예요. 40일 기도하는 거예요.
“목회 하는데 어려운 일 있으세요?” “아니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교회가 한 300명쯤 됐는데 더 이상 성장하지도 않고 사람도 안 변하고 그리고 끈끈한 인간의 정이 흐르면서 교회가 단단하게 굳어져 가는 것이에요. 자기가 하나님 앞에 괴롭대요.
“그럼 어떻게 해 달라는 겁니까? 하나님 앞에... 1000명 달라고요, 2000명 달라고요?” “나도 몰라요...”
하나님 앞에 한 번 객기 부려보는 것이에요. 자신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건 아닌 것 같으니까,
“하나님! 나보다 더 잘 아시니까 알아서 좀 나대신 신경좀 쓰십시오”
자기는 그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객기 부리듯이 매어 달린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고 내려와서 교회가 변하면 솔직히 말해서 확실한 약속이 있는데 사기꾼 빼고 40일 기도 안하러 갈 사람 어디 있어요? 여기는 베드로 혼자 예루살렘 기도원에 올라가서 광야에서 목놓아 40일 기도하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바뀌지 않았어요. 모였어요. 베드로도 모이고 요한도 모이고 그리고 사람 숫자에 안 들어갔던 여인들도 모였어요. 분명히 이 속에는 막달라 마리아같은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창녀들도 모이고 고관들도 모이고 마리아도 모이고 동생들도 모이고 계산에 빠른 빌립도 모이고 의심 많은 도마도 모이고, 모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속담에 ‘열 사람은 열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것 하나 따져보려고 하면 그 사람과 하나될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많아요.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잘생긴 거야? 나는 저 사람 앞에만 가면 소외감을 느껴’ ‘아니, 나는 점심 먹을 돈도 없어서 라면 사먹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훌륭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거야?’ ‘나는 못 배웠는데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공부를 잘해?’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직분이 높아?’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로 말하자면 노동자도 모이고 시인도 모였어요. 무명 가수도 모이고 아주 유명한 정치인도 왔어요. 하수도 치우면서 먹고사는 그런 사람도 모였어요. 넝마를 줍는 사람도 모이고 전직 콜걸도 모였어요. 얼마 전까지 은혜 받아서 폐업했지만, 말하자면 룸싸롱을 하던 마담 아줌마도 모였어요. 그러고 하나님 앞에 모였어요. 귀신들려서 정신병원에 있던 사람도 함께 모였어요. 그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었어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거예요. 그것은 무엇이에요? “하나님, 새로운 한 시대를 여시는데 있어서 주님은 떠나가셨고 주님의 약속은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모여서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을 이야기하고 변명하는데 세월을 보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그것을 극복하고 나면 성령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가 다하고 나면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는 부흥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가 되어야 되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해도 주님이 부으시지 않는 적도 있지만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기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놀라운 변화를 위해서도 여러분들에게는 성령의 부어주심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책을 읽어보니까 19세기인가에 미국 속담 가운데 제일 험악한 말이 있었대요. “에이, 이놈이 성령 받지 말고 목회자 짓이나 해먹어라” 그게 제일 끔찍한 욕이었대요.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감히 그 말을 하겠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 통용된 거예요. “에이, 못된 놈, 성령 받지 말고 복음 사역이나 종사해라” 왜?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 속에 그러한 유행어가 만들어질 정도였어요. 자! 불신자 세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사역을 시중들고 복음의 사역을 일하고 영혼을 바꾸고 세상을 바꿔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이 일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특이한 부어주심이 아니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인정한 거예요.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도 인정해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인정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인정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가득 차 있는 이 마음의 (?) , 모여서 (?)하고 음악회나 하고 모여서 먹고 마시고 하는 일에 마음을 모두 빼앗기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영혼들이 바뀌고 변화될 것이라고 하는 이 사모함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없는 것은 결국은 교회로 하여금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거슬리는 거대한 (?)으로 만드는 것이에요.
여러분, 부흥이 일어나고 나면 부흥을 극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었어요. 성령 없이 넉넉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서 철저하게 성령의 불을 끄는 일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교회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거예요. 기도해도 안돼요.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이 되어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에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고 나면 발붙일 곳이 없어요.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방해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로 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속삭여요. “야! 일주일에 세 번만 나가면 됐지 무슨 네 번이냐?” “야, 금요기도회에 가지 마, 차라리 금요일은 세상 사람들이 주(酒)의 날이라고 하지 않냐? 술 주(酒)자, 주의 날. 오늘은 먹고 일주일의 피로를 푸는 날이다” 유혹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아니야, 그래도 양심이 있지. 내가 그래도 수련회때 언약 문서에 싸인을 한 사람인데 안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지금. 내가 그때 얼마나 심각하게 도장을 찍었는데..” 그것도 책상 앞에 붙여놨는데. 그리고 잊어버렸다고 핑계 대려고 했는데 코팅까지 다 해 놓았으니... 눈만 뜨면 ‘거룩한 삶을 위한 언약’ 이라고 되어 있어.. 마지막에는 가장 부담이 가는 단어,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 ... ’라고 해놓고 손도장까지 찍었는데, 가야 돼... 그러니까 그저께 많이 왔잖아요.
그 다음에 이제 방법은 뭐예요? 다 기도하게 하는 거예요. 열심히 눈물 콧물 흘리면서 기도하게 하는 거예요. 대신 뭐냐하면 마음을 흐트러 놓는 거예요. 그래서 한 마음이 되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기도가 제대로 되겠어요? 소리소리 지르지만 그러나 교회당 안에는 울부짖음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보좌에는 적막이 흐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있는 기도가 안되는 거예요. 얼마든지 내버려 두는 거예요. ‘야, 부르짖어, 부르짖어. 봐줄 테니까 부르짖어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뭐예요? 오늘 성경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한 마음으로 기도하니까 기도가 강력하게 쫙 뻗어갔다는 거예요’ 원어적인 의미가 그거에요.
기도하니까 흐물흐물 하는 거예요. 칙 하고 나오는가 했더니 찔끔 찔끔 찔끔... 기도하지 못하는 거에요.
여러분, 퀴즈 하나 낼 테니까 알아맞혀 보세요. 불이 나면 불자동차 지나가지요? 그 통이 매우 큰데 그게 불을 끌 때 다 빠져나가는데 몇 분쯤 걸릴 것 같아요? 1분 30초 내지 2분 30초만에 그 한 통의 물이 다 빠져나가는 거예요. 물어봤어요. 놀라와요. 그러니까 불이 막 붙을 때 물을 쏘는데, 정면으로 맞으면 즉사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물이 막 나가는데 두 사람이 잡았는데도 호수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거예요. 스위치를 내리고 물이 나가니까 5밀리 유리가 와장창 깨지면서 물줄기가 방안으로 뛰어드는 거예요. 그런 기도 해보고 싶으면 아멘 하세요. 매일 찔끔찔끔 하지 말고... 올릴 때는 ‘쉭’ 그러다가, 아니 한참 쏴야지 올라갈 것 아니에요? ‘부시시시시시’ 하고 나서 문 앞에서 떨어지는 거예요. 뭐하겠어요? 옛 날에 우리 집에 불이 한 번 나지 않았겠어요? 국민학교때. 별 경험 다했어요. 동생녀석이 김칫광 밑에다가 친구들하고 성냥 장난을 한 거예요. 그러니 겨울에 짚으로 싼 그 김칫광이 얼마나 잘 타요? 후르르르륵 탄거에요. 불이 나니까 무서워서 애들이 다 도망간 거예요. 그리고 나서 숨어버린 거예요. 방에 어머니가 이렇게 누워있는데 ‘투다닥 탁탁 투다닥 탁탁’ 하는 소리가 나요. 그래서 어머니가 그랬어요. “얘야, 나 힘들어 죽겠는데 아무래도 장작불이 밖으로 나오나보다. 장작좀 집어넣고 오너라” 그러니까 미적미적하면서 서로 안 나갔어요. 그러다가 할 수 없이 어머니가 문열고 나가신 거예요. 갑자기 “뭐야 뭐야” 하시면서 ‘쿵’하는 소리가 나요. 무슨 소린가 하면서도 한참 가만히 있었어요. 아무래도 이상해요. 뭐라고 소리가 나요.밖에 나가보니까 너무 놀래셔서 뛰어나가다가 부엌 바닥에서 미끌어져 ‘쾅’하고 쓰러지신 거예요. “불이야”하고 소리쳤는데 옆 방에서도 안 들린 거예요. 나가보니까 집에 불이 번지기 시작했어요. ‘푸지지직’타면서 그게 돼지우리 있는데 붙어서 집 뒤 광으로 타 들어가기 시작한 거예요. 펌프를 보니까 꽝 얼었어요. 이걸 어떻게 하겠어요? 그 다음에 물을 찾아봐도 솥에 펄펄 끓는 뜨거운 물밖에 없는 거예요. 그 물을 돼지우리에 뿌렸는데 불에는 안 맞고 돼지 등에 가서 떨어진 거예요. 돼지가 죽겠다고 난리를 친 거예요. 그래서 어떠해요. 어린 마음에 제가 막 가게로 뛰었어요. 가게로 뛰었는데 아버님이 가게에서 나오셔서 누구하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불났어요” “뉘 집에 났니?” 그러고 나서 신고를 하니까 소방대가 오더군요. 소방대가 오는데, 서울에서는 ‘애-앵’하면서 소방대가 오는데 ‘뎅뎅뎅뎅뎅’ 하면서 소방대가 와요. 소방대가 뭔가 했더니 망대에다 산소통을 매달아서 빨간 칠을 해놓고 경관인가 누군가가 올라가서 망치로 그걸 두들기는 소리에요. 그러더니 소방차가 왔는데 사람이 끌고 왔어요. 달구지에... 그러더니 양쪽에 두 사람이 서서 펌프로 이렇게 하면 물이 나가는데 그 물이 심하게 얘기하면 국민학생 오줌 누는 것밖에는 안돼요. 물이 쫙 뻗어나가야 불이 꺼질텐데 한 번 누를 때 ‘찍찍’하고 나가는 거에요. 그게 뭘 꺼요? 결국은 사람들이 펌프물 녹여서 그것을 양동이로 나르면서 난리를 쳐서 조금 태우고 끝났어요.
여러분, 무슨 기도하고 싶어요? 소방차에서 쏟아나가서 - 기도하는데 뭐 걸리는 게 있잖아요? 걸리고 하는 것들을 유리 깨뜨리듯이 왕창 깨뜨리면서 말이에요. 불난 곳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에요? “주여,” 하다가 다른 생각하고 또 다른 생각하면서 한참 자다가 “아버지여” 그게 무슨 기도가 되겠어요? 그리고 찔끔찔끔 기도하고 밤새고 나면 하나님도 피곤하고 여러분도 피곤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철야는 했는데 기도는 못했어요.
여러분, 우리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면 안돼요.
나는 지금도 얘기하면 생생하게 떠올라요. 물을 뿜으니까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면서 물줄기가 뛰어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기도가 우리에게는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 이상하지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이 통용안되는 것이 많아요. 세상에서는 찔끔찔끔하는 물이라도 많이 모으면 그것도 큰 물이 되잖아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찔끔찔끔하는 기도 다 모으면 오히려 더 찔끔거리는 기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해서 말하자면 막혀있는 것들을 뚫고 깨뜨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부어질 때까지 기도하고 부르짖을 때 그때 하나님이 왜 생명을 부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사람들이 하도 안 믿으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너희들은 악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자식이 ‘아빠, 나 떡좀 줘’ 하니까 ‘떡은 없지만 돌이 떡하고 비슷하니까 이거나 먹어라’하고 주지 않을 것이다. 생선 먹고 싶다고 하니까 전갈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으신 천부께서는 얼마나 너희에게 성령을 잘 주시겠느냐?”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당신의 확장해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악한 세력들을 이겨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의 가장 커다란 기도의 제목은 바로 이거에요. 하나님의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셔서 그 성령으로 우리의 삶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성령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도무지 변화될 수 없었던 환경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깊은 늪에 빠졌던 우리의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유치한 일을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앞에 기도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 마음을 준비하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두 사람이 모이건 세 사람이 모이건 찬송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서로를 기리고 칭찬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능히 기도하게끔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함께 만나 이야기하고 마음 아파하고 함께 토론하다가도 마지막에는 손에 손을 붙잡고 “하나님!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되게 해주시고 주의 거룩한 성령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합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여러 가지 많은 걸림들과 거치는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내 기도여, 소방차 물줄기가 되어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