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회심을 위하여
2023년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 | 2023년 07월 23일 – 08월 06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10월 13일
목 차
1. 참척이 슬프지 않습니까?(눅 7:11-14) 2023.07.23. 주일오전예배 7
2. 내 가족을 위한 고통(롬 9:1-3) 2023.07.30. 주일오전예배 17
3. 가족 구원의 길(딤전 5:8) 2023.08.06. 주일오전예배 26
<설교 프레임>
가족의 회심을 위하여1 2023. 7. 23 주일 낮 예배
< 참척이 슬프지 않습니까? >
“그 후에 께서 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눅 7:11-14)
I. 본문 해설
예수께서 가버나움을 거쳐 나인성으로 들어가실 때 일이었다. 이미 설교 말씀과 기적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다.
제자들과 함께 성문 가까이 이르셨을 때, 예수는 장례행렬과 마주치셨다.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죽은 사람은 젊은 청년(靑年)이었다. 한쪽에는 살아계신 예수를 앞세운 생명의 무리들이 성으로 들어오고, 또 한쪽에는 죽은 청년을 앞세운 사망의 무리들이 거기서 나오고 있었다.
앞서가는 시신을 따르며 슬피 우는 어머니는 남편(男便)을 여읜 여인이었다. 그리고 죽은 청년은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이었다.
참척(慘慼)이라는 말을 아는가? 그것은 “자신이 부모보다 먼저 죽은 것”을 가리킨다. 부모에게 자식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
옛말에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단장(斷腸)의 슬픔이다.
*박완서, 마르크스, 이순신 장군
춘추전국시대에 공자 문하에는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불리던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하(子夏)라는 인물이다. 공자의《시경(詩經)》과《역경(易經)》및 《춘추(春秋)》를 후대에 전한 사람이다.
그 역시 참척을 겪었다. 그 위대한 사상가도 자식을 잃는 슬픔 앞에서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참척의 슬픔을 ‘상명’(喪明)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자식을 잃은 부모는 두 눈이 멀 정도로 슬프다”는 뜻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그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보여준다.
II. 참척의 슬픔으로
두 행렬이 성문 앞에서 마주쳤을 때, 예수께서 죽은 청년의 어머니를 보셨다. 그녀는 슬피 울며 통곡(痛哭)하면서 죽은 아들의 시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때 예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셨다.
A. 죽은 자를 살리심
예수께서 장례행렬을 멈추시고 가까이 다가가셨다. 그리고는 그 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담대히 말씀하셨다.
“…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눅 7:14)
그것이 어찌 가능한 명령인가? 청년은 이미 죽어 관에 눕혀져 있었다. 그런데 죽은 자가 어떻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보다 더 큰 복음의 진리(眞理)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즉,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 말씀은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생명(生命)의 주님께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신 예수의 말씀이 능히 죽은 영혼도 다시 살아나게 할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명하시자, 죽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관을 열고 나와서 앉기도 하고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가장 기뻐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청년의 어머니였다. 다른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기쁨이었다. 죽은 외아들을 생시에 다시 보게 된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다시 살아난 아들을 반겼다.
과부인 그녀가 죽었던 외아들을 다시 만난 기쁨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불신자로 살아가는 자식을 둔 부모는 참척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식의 영혼을 가슴에 끌어안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었을 때, 그 부모의 기쁨은 얼마나 클까?
영적으로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는 부모의 환희(歡喜)가 얼마나 클까?
그것은 회심치 않은 자녀(子女)를 가슴에 끌어안고 통곡해 보지 않은 부모는 결코 알 수 없는 기쁨이다.
"아들아, 내게 있어서 세상낙이라고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할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왜 이렇게 아직도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자 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보겠다는 그 일 … 그랬는데, 하나님께서는 분에 넘치도록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이제 내가 할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느냐" Aurelius Augustinus,『나의 어머니 모니카』(Mia Madre),149.
지금 당신 자녀의 영혼(靈魂)은 어떠한가? 죽음에서 살아나 생명을 누리는가? 진실로 거듭나고 회심하였는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가?
주일날 예배의 감격과 기도의 기쁨 속에서 살고 있는가? 평소에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행복을 아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묻는다. 당신에게는 참척(慘慼)의 슬픔이 있는가? 당신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당신의 자녀의 죽은 영혼을 위해 슬퍼해 주겠는가?
구원받지도 못하고 버림받은 채 살아가는 자신의 자녀(子女)의 영혼이 불쌍하지 않은가?
자기의 영혼을 위해 스스로 울 수 없는 불쌍한 자식을 대신해서 가엾이 여기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 아니겠는가?
구원에서 멀어져 불쌍한 그 자식의 구원을 위해 울어주는 것이 부모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당신의 죽음에 슬피 우는 여인의 큰 무리를 향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해 흘릴 눈물이 없다면, 당신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불쌍한 영혼을 가진 부모(父母)다.
만약 당신이 구원받지 못한 자녀를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모인 당신이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love)이 없기 때문이다.
자녀들의 회심(回心) 여부를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변명하지 말라. 차마 그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운 것은 아닌가?
중생과 비중생, 회심과 비회심 사이에는 모호한 경계선이 없다. 이는 마치 생명과 죽음 사이에 중간지대가 없는 것과 같다.
“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중생(重生)은 하나님을 향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고, 회심(回心)은 본인의 영혼이 살아난 것을 스스로 처음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자가 거듭난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영적 생명이 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고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이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다.
당신의 자녀가 거듭났는지 살펴보라. 그들이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단지 그들이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도덕적으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죽은 영혼이 살아나야 한다.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자녀의 회심을 위하여 기도하라!
B. 불쌍히 여기심
예수께서 육신적으로 죽어가는 모든 자를 살리지는 않으셨다. 그런데 왜 죽어서 묘지로 향하는 이 청년(靑年))은 다시 살아나게 하셨을까?
그 청년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어머니가 예수의 말씀을 굳게 믿었다는 이야기도 없다.
기적이 일어날 당시에 그것을 믿는 이도 없는데 예수께서는 왜 죽은 청년을 살리셨을까?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이 부분을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화에 맞게끔, 소위 등가(等價)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주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시며, 너는 통곡하지 말라고 하셨으니”(눅 7:13 KNJ 私譯)
이는 죽은 외아들을 보내며 통곡하며 아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라. 이는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과 자녀들의 영혼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찢어지도록 아픈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죽은 청년을 살리신 직접적인 하나님의 동기는 사랑(love)이었다. 하나뿐인 외아들을 잃고 통곡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의 마음이었다.
구원과 관련하여 청교도들이 즐겨 말했던 격언이 있다. “하나님에게는 손자 손녀가 없다”
이 말은 곧, 구원받은 모든 신자는 부모의 믿음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개인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자녀들이 스스로 예수를 믿고 회개(悔改)하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구원은 최종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다.
믿고 구원을 얻은 자는 영생을 누릴 것이며, 믿지 않고 구원받지 않은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아무도 그 일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자녀의 죽은 영혼을 위해 간구하는 눈물의 기도(祈禱)는 회심치 못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당장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부모인 우리가 회심치 못한 자녀의 영혼(靈魂)을 위해 흐느껴 우는 일 말고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영원한 구원(救援)과 지옥의 심판(審判)이 무엇인지를 아는 부모가 어찌 구원받지 못한 채 죽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자기 자녀를 위하여 눈물로 매달려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 외에 아무것도 택하거나 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사랑하지도 아니하려는 결심을 허락하신 것은 내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고 확실히 믿고 단언합니다”
Aurelius Augustinus,『질서에 관하여』(De Ordine), 2, 20, 52.
부모는 자식을 위해 울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 마음 안에 자식을 향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love)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父母)는 자녀가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면 감사해서 울고, 그렇지 못하면 그 자식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슬퍼하고 울어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양을 치는 모든 목자(牧者)가 선한 목자가 아니듯이, 자식을 가진 모든 부모가 선한 부모가 아니다.
삯꾼 목자가 있듯이 삯꾼 부모도 있다. 자기 사랑에 빠져서 자녀의 영혼을 고아처럼 버려둔 채 살아가는 사람이 삯꾼 부모다.
자식을 아무리 잘 먹이고 입힌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정부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봉사가 선한 부모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III. 적용과 결론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요 10:11). 양떼들의 영혼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참된 부모도 마찬가지다. 참된 부모는 자식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신앙(信仰)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모는 생각해야 한다.
“내가 더 많이 울었더라면, 너를 위해 기도했더라면, 네가 진작 구원을 받았을 텐데...”
아무리 부모라도 죽은 영혼(靈魂)으로는 그런 눈물을 흘릴 수 없다. 오직 살아있는 영혼만이 죽은 영혼을 슬퍼하며 눈물 흘릴 수 있다.
먼저 당신에게 참척(慘慼)의 슬픔이 있는지 돌아보라. 그리고 지금이라도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가족의 회심을 위하여2 2023. 7. 30 주일 낮 예배
< 내 가족을 위한 고통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말을 아니하노라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I. 본문 해설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이 끝나던 무렵인 주후 57년경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다.
이 편지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다. 첫째는 수신자들과 스페인 선교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나누고 싶었고, 둘째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救援)의 도리를 조직적으로 서술하여 가르쳐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과 9장에서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언급한다.
오늘 본문은 그 맥락 아래 놓여있다. 1장부터 4장까지 이신칭의에 대해서 말하고, 5장부터 8장까지 성도의 거룩한 생활(生活)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격정에 사로잡혀 자기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 본문이다.
“…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II. 내 가족을 위한 고통
A. 그치지 않는 고통
사도 바울이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자기 마음에서 그치지 않는 고통을 이야기했는지 아는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인류를 항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보내셨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죄인(罪人)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사랑의 벅찬 감격을 말하다가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형제 골육의 친척”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성격을 내포하는 감정(感情)이다.
1. 진실성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말을 아니하노라 …”(롬 9:1上)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이 구절이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신(神)에 대해 맹세하는 양식이라고 본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기의 진심(眞心)을 호소하기 위해 이런 형식으로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해석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은 추호의 과장이 없는 진실성(眞實性)이 담긴 고백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2. 지속성
이것은 바울에게 그저 한순간 울컥하고 솟아난 일시적 감정이 아니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復活)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지속되어 온 감정이다.
자신이 아무리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어도 변함없이 지속되던 감정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동족, 곧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의 영혼(靈魂)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가족을 비롯한 골육지친을 향한 연민이었다.
사도 바울에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영혼의 고통(苦痛)이 있었다.
3. 신령성
사도 바울 마음속에서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는 이 큰 근심과 고통은 인간적인 감상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성령(聖靈)의 역사로 이루어진 신령한 염려였다.
이것은 거룩한 성령의 역사로 이뤄진 거룩한 열정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골육지친을 보며 느끼는 고통스러운 마음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받지 못했다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영혼 사랑에 대한 감정이다.
자신의 영혼(靈魂)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있다.
A. 자기 희생의 소원
사도 바울은 여전히 복음 전파를 위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으며, 그럴수록 그의 심령(心靈)은 동포들과 골육지친들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비참함으로 인해 미어졌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下)
그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고 바울은 히브리인으로서 구약성경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저주(咀呪)를 받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끔찍한 징벌을 받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사도 바울의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극단적인 표현은 자신의 “형제 곧 골육지친들”을 향한 애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구원의 화급성, 곧 복음 전도의 화급성을 말해주는 것이아니겠는가? 진실한 사랑의 표현은 언제나 죽음을 동반한다.
“죽도록 사랑한다”, “죽어도 사랑한다” 이는 그렇게 말하는 이에게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사랑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들이 가족이었기에 가족 구원을 위해 많이 울었다. 주일에 온 가족이 함께 손잡고 교회(敎會) 오는 것이 꿈이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정말로 우리에게 믿지 않는 가족들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아직도 있는가? 그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으로 여겨지는 슬픔이 있는가?
구원받지 못한 가족(家族)들이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기를 바라는 사무치는 그리움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얼마간 전도하다가 지치면 입버릇처럼 말한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구원해 주시겠지...”
불신 가족을 위해 마음을 다해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이 고백이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믿는 신앙이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운명에 맡긴다는 뜻이다.
가족들에게 전도(傳道)하여 예수의 복음을 전하여 그를 믿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내의 과정이고 연단의 과정이다.
우리가 아무리 진심으로 전도해도 끝까지 불신앙(不信仰)을 고집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한다. 가족들의 영혼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결코 그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유학 간 아들이 울고 있는 꿈
우리가 참으로 가족(家族)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없이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비참한 영혼을 어찌 그냥 두고만 보겠는가?
가족 전도가 어려운 것은 그들과 우리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다 보고, 때로는 이해 관계도 있다.
그래서 가족에게 전도(傳道)하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서는 늘 양보하고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한다.
이익에 민감한 가족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라. 그 대신 대의가 있는 옳은 일에 목소리를 내라.
항상 사랑하려고 애쓰고 기회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하라. 예수 믿으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라.
가족들을 구원(救援)하는 일에 좌절하지 말라. 아무도 쉽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
깨어진 관계 속에서 몇 번 복음(福音)을 전하다가 포기하지 말라. 그리고 스스로를 반성하라.
“아직도 내 눈물이 가족 구원의 분량에 미치지 못하였구나.”
III. 적용과 결론
구원받은 우리가 아직 믿지 않는 남은 가족(家族)들을 위해 한마음이 되어 간절히 기도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겠는가?
그렇게 많은 은혜(恩惠)를 받고도 가족의 구원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그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의 정신(精神)으로 다시 한번 기도하자.
마침내 모든 가족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를 날을 기대하며 간구하자!
가족의 회심을 위하여3_끝 2023. 8. 6 주일 낮 예배
< 가족 구원의 길 >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I. 본문 해설
주후 62년경에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후, 사도 바울은 다시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바로 그 시기에 디모데전서를 썼다.
그 후 주후 66~67년경, 바울은 네로(Nero) 황제 치하에서 핍박을 받아 다시 체포되었고, 그때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디모데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단에 의해 위협받는 교회에게 참된 교리(敎理)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였고, 아울러 그 교리를 따르는 성도의 참된 생활(生活)을 교훈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교훈의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義務)인 가족 돌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당시 교회에는 돌보아야 할 과부와 고아들이 넘쳐났는데, 어떤 가족들은 그들을 부양할 의무를 외면하였다.
그리고는 그 책임을 부당하게도 교회에 떠넘겨 맡기려고 하였다. 바울은 그런 세태(世態)를 책망하다가 본문의 말씀이 나온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그러나 참된 신자의 가장 큰 고통은 아직도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한 성도에게는 그런 아픔이 없다.
충만한 은혜(恩惠)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의 눈물이 흐른다.
가족 전도가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평소에 신자(信者)인 자신의 삶이 가족들에게 모두 다 드러나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전도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족(家族)을 전도하기 위해서 먼저 꼭 필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love)하는 것이다.
가족들의 모든 허물들을 용서하고 진심으로 화해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또 가족들이 자기의 결단에 알맞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가족을 끝까지 사랑하기로 뜻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전도가 가능해 진다.
II. 가족 구원의 길
사도 바울은 가족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가족을 돌아보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여기서 가족들을 돌본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전인적(全人的)으로, 총체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돕기 위해 살펴본다는 뜻이다.
그들은 마땅히 까리타스(caritas)의 사랑으로써, 가족들을 돌보아야 한다. 육신의 건강과 경제적 형편으로부터 영혼의 구원과 침체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들의 참된 행복(幸福)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들이 잘 갖추어졌는지를 돌보아 주는 것이다.
A. 육신을 돌아봄
먼저 복음에 관한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신자는 가족들의 육체적인 형편을 돌아보고 육신(肉身)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길이다.
먼저 편안한 시간을 마련하라.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 허심탄회한 대화의 시간을 갖으라. 그동안 마음에 맺힌 것을 서로 나누며 마음을 풀고 화목(和睦)을 이루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먼저 믿은 당신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희생이 필요하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다. 가족 관계에서 사소한 것들을 과감히 양보하라. 의견이 충돌할 때 불신 가족과 다투기보다 손해 보기를 선택하라.
진심으로 가족을 선대(善待)하라. 진심으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라. 단, 신앙(信仰)의 가치만은 결코 양보하지 말라.
무엇보다도 불신 가족들의 경제적인 형편을 돌아보라. 그리고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여 당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우라.
물질적으로 어려운 불신 가족들을 섬기되, 규모 있게 하라. 대가(代價)를 기대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며 끝까지 섬기라.
신자는 가족들의 화목을 위해, 자기 이익(利益)을 양보하고 때때로 기꺼이 손해를 보아야 한다.
희생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한없는 사랑을 기억하라. 당신이 받은 구원(救援)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깊이 묵상하라.
신자에게 가정은 첫 번째 선교지(宣敎地)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가족(家族)을 위한 선교사로서 믿지 않는 가족들을 섬기라.
먼저 믿은 당신의 사랑과 헌신 없이는 결코 가족들을 전도할 수 없다.
당신의 가정이 비록 상처와 아픔이 많은 가정(家庭)일지라도 회복될 수 있다. 먼저 당신이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용서하고 그들을 위로하라.
불신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영혼(靈魂)으로 보고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
그들의 육신의 형편을 골고루 돌아보며, 당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진심을 다해 섬기라. 이기심(利己心)을 버려라.
B. 영혼을 돌아봄
신령한 시각으로 가족들의 영혼(靈魂)을 살펴보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마음의 고통과 영혼의 외로움을 헤아리라. 그것들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고 함께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믿지 않는 가족들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다.
왜냐하면 신자가 은혜에서 멀어질 때 경건(敬虔)의 능력은 사라지고, 신자의 마음에서 영혼에 대한 사랑도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가장 탁월한 전도(傳道)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진리와 충만한 사랑 속에서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때 가족들은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저 사람 안에 있는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가?”
아직도 믿지 않는, 혹은 심지어 이미 믿은 가족들과 화목(和睦)하지 못하고 서로 분열(分裂)과 대립 속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사는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이다.
이는 신자(信者)인 당신이 사실은 불신자이거나, 신앙이 어린 가족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가족들에게 당신의 관용(寬容)을 알게 하라. 그들 각자의 영혼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그들을 실제적으로 도와줄 길을 찾으라.
가족들의 영혼을 위하여 진지하게 염려(念慮)하라. 먼저 믿은 가족인 당신이 그리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도와주겠는가?
특히 그들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진심으로 위로하고 도와주라. 과거에 그들이 당신에게 저질렀던 허물이나 죄를 생각하지 말라!
이미 당신이 현재적으로 받아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생각하라.
그 사랑으로 가족 전도(傳道)를 다시 결단하라. 불신 가족들을 예수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족이기 이전에 성도의 고귀한 사명(使命)이 아니겠는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신 것은 단지 나만을 위함이 아니다. 모든 가족들이 나의 전도 덕분에 그분을 믿고 함께 구원받게 하고자 하심이 아니겠는가?
모든 인간이 죽는다. 그 후에 기다리는 것은 거룩한 기쁨의 낙원(樂園)이거나, 멸망에 이르도록 불타는 지옥(地獄)뿐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리고 그 심판은 곧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속으로 던져지는 것”이다(막 9:43,45). 불현듯 가족들의 지상 생애가 끝난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던 우리의 가족(家族)들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죽은 그들이 개별적 영혼으로 모두 하나님 앞에 서서 준엄한 심판(審判)을 받는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라.
그들이 일평생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원수로 산 것에 대해 형벌(刑罰)이 선고된다고 상상해 보라. 평생을 함께한 당신의 가족들이다.
당신의 눈에서는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흐르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가족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審判)을 받는 것을 보면서 그대들은 목 놓아 울지 않겠는가?
설령 아직은 심판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다고 치자.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가족은 그날까지 하나님 없는 인생(人生)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는 우리가 불신자 시절 이미 충분히 경험(經驗)해 보지 않았는가?
그것이 살만한 길이었으면, 어찌하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돌아갔겠는가?
그 옛날에 우리가 불신자(刑罰)로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길을 지금 그대로 따라 걸어가는 불신 가족들이 가엾지 않은가?
혹시 그들이 여러분을 가슴 아프게 했던 과거가 있다고 할지라도 잊어버리라. 용서하라. “진정한 사랑은 사과하지 않아도 용서하는 것이다.”
가족 구원은 시급하다. 그래서 그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야말로 도우라. 가장 좋은 기회(機會)다. 전심으로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도우라. 그것이 행함이 있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8-19)
우리는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 이제껏 사랑하던 것들도 모두 남겨둔 채 이 세상(世上)을 떠난다. 그때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람도 갔다가 돌아온 적이 없는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불신자(不信者)는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믿고 구원 얻은 신자(信者)는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그 천국(天國)에 갔을 때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불신(不信) 가족을 사랑하는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 사랑의 길을 보여주셨다.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苦難)을 겪으셨지만 일체의 온유함으로 참으셨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친히 우리 죄(罪)를 대신해 죽으시지 않으셨는가?
여러분이 불신 가족들을 아무리 많이 사랑해 주고 희생할지라도, 강퍅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그것을 몰라줄 수도 있다.
오히려 어쩌면 누군가가 그런 당신의 선의(善意)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때 잊지 말라. 당신은 지금 사람 앞에서 선(善)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은혜(恩惠)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에 마음이 쓰이고 그 본전 생각이 난다면 당신은 전도할 수 없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진심(眞心)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롭다. 그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다.
그런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담대(膽大)함과 자유(自由)가 있다. 불신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그 사람과 하나님이 친히 동행(同行)해 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가족(家族)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한번 전도에 실패했다고 해서 낙심치 말라.
또 다시 열렬히 기도하면서 계속 도전하라.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신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그 힘으로 지난 시절에 가족에게 받은 상처(傷處)를 지우라. 상처보다 하나님께 받은 더 많은 은혜를 생각하라.
가족을 사랑(love)하는 길은 어려운 길이다. 더욱이 불신자인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 것은 커다란 용기(勇氣)가 필요하다.
더욱이 그들을 예수를 믿은 후에도 참된 신자(信者)가 되기까지 영적으로 성숙(成熟)하게 하는 길은 매우 어렵고 긴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족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신다.
결코 쉽지 않은 가족 전도(傳道)의 과정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의 무정한 마음과 교만을 꺾게 된다. 더욱이 끊임없이 실패하는 가족 전도를 통해서 간절한 기도를 배운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구원은 불신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신자인 나의 문제이며 사명(使命)이다.
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셨는가? 우리 불쌍한 가족들을 주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게 하고자 하심이 아닌가?
우리의 사명이 아닌가? 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의 가족(家族)을 돌아보라!
III. 적용과 결론
불신 가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산제사다.
불신 가족들을 위해 밤낮 쏟는 눈물의 기도(祈禱)는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속히 구원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의 간구를 들으신다.
불신 가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라. 항상 충만한 은혜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하며 전도하라.
1. 참척이 슬프지 않습니까?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눅 7:11-14)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가족의 회심을 위하여 1(2023.07.23._주일오전)
예수께서 가버나움을 거쳐 나인성으로 들어가실 때 일이었습니다. 이미 말씀과 기적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성문 가까이 이르셨을 때 장례 행렬과 마주치셨습니다.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죽은 그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한쪽에는 살아계신 예수를 앞세운 생명의 무리들이 성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죽은 청년을 앞세운 사망의 무리들이 거기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앞서가는 시신을 따르며 슬피 우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남편을 여윈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청년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이었습니다.
II. 참척의 슬픔으로
참척(慘慽)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비참하다' 할 때의 '참'(慘) 자와 '슬프다' 할 때의 '척'(慽) 자가 합쳐진 것입니다. 어려운 한자 말이지만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은 것, 그것을 참척(慘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자식을 잃은 부모의 단장(斷腸)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작고하신 소설가 고 박완서 씨는 의과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있었는데, 그만 사고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두 달 동안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주위에 간청으로 밥숟가락을 뜨면서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식새끼를 앞세워 보내고도 그래도 살겠다고 밥을 입에 떠먹는 에미인 나의 모습이 토하리만치 역겨웠다."라고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이론을 세운 위대한 사상가였지만, 그 역시 자식을 잃은 슬픔 앞에서는 그냥 평범한 아버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리던 그날의 기억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또렷하다." 불쌍한 내 아내는 아들이 죽었을 때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고 했습니다. 민족을 구한 이순신 장군도 참척의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술회하기를 "하늘이 어찌 이렇게 무심하단 말이냐?"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나는 살고 네가 죽었느냐?" 장군답지 않게 아들의 죽음에 애통해하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의 문하에는 공문십철(孔門十哲), 즉 공자 문하의 열 명의 철학자라고 불리던 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뛰어난 사람 중 한 사람이 '자하'(子夏)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사람 때문에 우리가 공자의 시경(詩經)과 역경(易經) 및 춘추(春秋)를 읽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자의 저작들을 후대에 전해준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역시 참척을 겪었습니다. 이 위대한 사상가도 자식을 잃은 슬픔 앞에는 그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평범한 아버지의 불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식을 잃고 보니 참척(慘慽)이라는 말로도 자신의 슬픔을 표현할 수가 없어서, 자식을 잃은 것을 가리켜 상명(喪明)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빛을 잃는다'라는 뜻입니다. 그 뜻은 자식을 잃은 부모는 '두 눈이 멀 정도로 슬프다.'라는 뜻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자하의 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A. 죽은 자를 살리심
두 행렬이 성문 앞에서 마주쳤을 때 예수께서 죽은 청년의 어머니를 보셨습니다. 슬피 울며 통곡하면서 죽은 아들의 시신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렇게 고통스럽게 우는 이 여인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눅 7:14) 이것이 어찌 가능한 명령입니까? 청년은 이미 죽어서 관에 눕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가 어떻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보다 더 큰 복음의 진리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그리스도께 있음과 같이 또한 죽은 영혼을 살리는 능력도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능히 죽은 영혼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하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명하시자 죽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관을 열고 나와서 앉기도 하고,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가장 기뻤던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제자들이나 애곡하며 따르던 조문객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죽은 청년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놀라운 기쁨에 사로잡혔고, 다시 볼 수 없다고 믿었던 죽은 외아들을 생시에 보게 된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감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죽었던 외아들을 다시 만난 기쁨은 세상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 여러분의 자녀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여전히 불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교회는 나오지만 회심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자식을 둔 부모는 영적으로 참척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식의 영혼을 가슴에 끌어안고 통곡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부모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먼저 앞서 보내고, 이 어미는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통곡하며 죽은 아들의 시신을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참척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진정한 부모가 아닙니다. 어떻게 죽으면 지옥에 갈 아들과 딸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아픔을 느끼지 않고 그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가 만약에 놀랍게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었을 때 그 부모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영적으로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본 그 과부의 환희는 얼마나 컸겠습니까? 회심치 않은 자녀를 가슴에 끌어안고 통곡해 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부모로서 여러분의 관심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녀들의 무엇에 대해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자녀들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또 성적이 오르고, 또 여러 가지 재능을 익히고 스펙을 쌓는 것에는 관심이 많지만, 그 아이의 죽은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녀 교육은 일차적으로 가정의 책임입니다. 교회의 책임이 아닙니다.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을 부모는 온 마음을 다해서 구원과 회심에 이르게 하고, 회심에 이른 그 자녀는 성화의 길을 일생동안 걸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본인도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벗어버릴 수 없는 부모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수를 안 믿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선생님과 교역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들을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고마운 마음이 없습니다. 고마운 마음은 그만두고 이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함께 의논해야 되겠으니 학부모들이 모이시라고 해도 3분의 2밖에 모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의 영혼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묻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을 믿으십니까?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떻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사랑하는 딸이, 그런 심판의 자리에, 진노의 자식의 위치에 머물러 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아이의 영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퍼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럼 당신의 눈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달고 태어난 것입니까? 아니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고 가슴이 아파서 울어도 기도가 응답이 될까 말까인데, 왜 그렇게 사랑이 없습니까? 그 아이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춘기에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방황하고 있는지 한번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셨습니까? 그 흔해 빠진 잔소리 집어치우고 아이의 마음에 신음소리를 듣겠다는 의사의 심정으로 사랑의 청진기를 가슴에 대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티끌만큼이라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따라하십시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울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사랑도 지금도 받고 있지요
자녀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부모는 아이가 그렇게 되기 위하여 눈물 흘리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게 부모의 정의입니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나의 어머니 모니카』라는 책입니다. 그 책 149쪽에서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이때는 어거스틴이 회심하고 1년 동안 학습 교인으로 있다가 밀라노에 가서 존경하는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어머니와 함께 따가스떼로 돌아가기 위해서 로마 근교에 있는 오스티아라는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뜰이 넓은 여인숙에 묵고 있었고, 거기서 모자는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불행하게도 모니카는 따가스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모든 큰 소원을 성취해서 그랬는지 열병에 걸려서 오스티아에서 죽고 맙니다. 그러니 유언과 같이 아들에게 남긴 말이었습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서 세상낙이라고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할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왜 이렇게 아직도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자 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보겠다는 그 일이었다." "그랬는데, 하나님께서는 분에 넘치도록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이제 내가 할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느냐" 이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어거스틴의 나이 서른셋, 모니카의 나이 쉰여섯이던 때에 하늘나라로 가고 맙니다.
모니카의 생애는 일생동안 어거스틴을 위한 생애 같았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를 위해 통곡하였습니다. 공부하러 유학을 보냈더니 열일곱 살에 미혼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니카의 마음은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더 있다가는 마니교의 전도자가 되었다고 와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기독교는 거짓이고 마니교를 믿으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니카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들의 얼굴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극한 슬픔 속에서 통곡하며 울 때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해주셨습니다. 특별히 꿈을 꿨습니다. 아주 반듯한 잣대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가 서 있고, 천사가 자기 앞에 있고, 아들은 저 잣대 바깥에 있는데 천사가 말하기를 "네 아들과 네가 같은 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 "네 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 아들에게 그 꿈 얘기를 들려줄 때 "그것 봐요, 엄마. 엄마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마니교로 오라는 증거에요." 그런데 엄마는 말했습니다. "아니다." "분명히 나는 잣대 위에 서 있었고 천사는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로 간다고 말하지 않고 네가 나에게로 오게 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단다." 그래서 소망을 잃지 않고 아들이 서른한 살인가 두 살쯤에 회개하기까지 통곡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지금 당신 자녀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 영적인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진실로 거듭나고 회심한 기독교인입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녀입니까? 주일날 예배의 감격이 있는 생활을 합니까? 기도의 기쁨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어리지만, 젊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행복을 아는 아이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묻습니다. 당신에게는 참척의 슬픔이 있습니까? 당신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영적으로 죽은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통곡하며 슬퍼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아들의 영혼보다 학교 성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자녀의 영혼보다 더 크다면 여러분은 삯꾼 부모입니다. 그 아이는 여러분의 집안이 아닌 다른 경건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너무 행복한 삶을 살았을 아이입니다. 구원받지도 못하고 버림받은 채 고아처럼 살아가는 당신 자녀들의 영혼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자기의 영혼을 위해 그들은 스스로 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자기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불쌍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울 수 없습니다. 그런 불쌍한 자식을 대신해서 그 사랑을 안 부모인 여러분이 통곡하며 울어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에서 멀어져 불쌍한 그 자식이 구원받기를 위해 울어주는 것이 부모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이 사람은 신자인지 불신자인지도 안 나와 있습니다. 자식이 죽었습니다. 통곡하며 쓰러질 듯이 자기 아들이 죽은 그 관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게 엄마입니다. 이게 아빠입니다. 이게 자연적인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거의 울지 않는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당신 앞에 다가오고 있는 죽음 때문에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해 흘릴 눈물이 없다면 당신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가엾은 영혼을 가진 부모입니다. 만약 당신이 구원받지 못한 자녀를 위해 그렇게 눈물로 회심을 위해 간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회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분명히 회심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도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울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생각만 하면 잘못한 일들만 떠오르고, 미안한 일들만 떠올라서 눈물을 흘리고, 연약한데도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흐느끼고, 믿음이 부족할 때는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매일매일 우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들이 회심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회심한 가장 중요한 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중생과 비중생, 회심과 비회심 사이에는 모호한 경계선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생명과 죽음 사이에 둘이 겹치는 것 같은 중간 지대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중생은 하나님을 향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고, 회심은 본인의 영혼이 살아난 것을 스스로 최초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런 회심이 끊임없이 반복이 될 때에 성화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자가 거듭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나라'고 명령하지 않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영적 생명이 있는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고 무엇보다도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내 자식이 진정으로 회심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데 신령한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을 때 나의 아픈 마음을 하나님이 이렇게 놀라운 방식으로 위로를 해주시는구나!' '엄마, 오늘 기도회를 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어.'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셨어.'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린 것 같아.' '엄마, 오늘은 너무 감사한 날이었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이 나를 구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까 하나님 섬기면서 살고 싶어.' 이런 간증이 있는 아이들은 회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교회에 나와도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의해서 깨뜨려지고 뒤집어지지 않으면 그는 결코 회심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거듭났는지를 살펴보십시오. 회심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죽어 있는데 그까짓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께,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께, 자녀의 회심을 위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눈물로 부르짖는 부모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불쌍히 여기심
예수께서 육신적으로 죽어가는 모든 사람을 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청년은 살리셨습니까? 청년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어머니가 말씀을 굳게 믿었다는 이야기도 안 나옵니다. 믿는 이도 없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을 일방적으로 살려주셨습니까? 단서가 이렇게 나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여기 '불쌍히 여기셨다'는 부분이 그리스어로 '에스플랑크니스데'(ἐσπλαγχνίσθη)라는 수동태입니다. '창자가 떨리기까지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바로 예수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셨을 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할 때 쓰인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화에 맞게끔 소위 등가(等價)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주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시며, 너는 통곡하지 말라고 하셨으니”(눅 7:13 KNJ 私譯) 이는 죽은 외아들을 보내며 통곡하며 아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를 보십시오. 이제 그에게는 값진 음식과 아름다운 의복, 커다란 집, 그리고 높은 지위 같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이 죽은 아들 하나만 살아날 수 있다면 자신이 대신 죽어도 좋으리만치 그렇게 이 과부의 마음에는 애틋한 자기 자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엄마 아빠인 여러분에게 내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 자신의 생명을 아들의 회심과 바꿀 수 있습니까? 여러분 딸의 회심을 아빠인 당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습니까? '아멘' 해야지 그게 부모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교회 사무실이 여기에 있을 때 일이었습니다. 어느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비서실문을 열고 두드리면서 목사님을 만나겠다고 하니 '약속을 하셨습니까?' 물으니 전혀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면 제가 안 만납니다. 그런데 너무 딱한 사정이니까 한 번만 만나달라고 해서 만났습니다. 여자분이 40대 초반쯤 돼 보였습니다. (들어오자마자) 눈물을 주룩 흘리면서 '목사님 성함을 듣고 제가 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아무 아무개 대형교회를 다니는 집사입니다.'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우리 어머니가 지금 암 말기로 돌아가시기 직전인데 예수를 그렇게 전했는데 안 믿으십니다.' 그러면서 또 울었습니다. '그래서요? 교회에 가서 부탁하면 되죠.' 그래서 교구 목사님께 딱한 사정을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계신 병실에 가서 복음을 좀 전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돌아가시기 전에 세례도 받게 해줄 수 있냐고 여쭤보았습니다.' '뭐라고 얘기해요?' 부목사님이 '그것은 우리의 업무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까지 가서 그런 식으로까지 도와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이 교회가 그 병원에서 가까우니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도팀이 매주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병상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까지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식의 마음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부모를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고 죽어버린 그분의 생명은 살아있는 자신에게 죽음이 될 텐데,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녀를 둔 여러분에게 내가 묻고 싶습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작정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그냥 늘 하는 기도에 그냥 끼워 넣는 기도 말고, '하나님 40일을 주님께 드립니다.' '이번에 우리 아이들이 주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금식 기도해보셨습니까? 이 죽은 청년을 살리신 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을 바라보시며 찢어지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청년을 살리신 동기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뿐인 외아들을 잃고 서럽게 통곡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던 예수의 마음이었습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청교도들이 즐겨 말했던 격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손자가 없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예수를 믿는다고 저절로 그 백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곧 구원받은 신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은혜로 말미암아 개인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예수를 믿고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원은 최종적으로 개인의 책임입니다. 믿고 구원을 얻은 자는 영생을 누릴 것이며, 믿지 않고 구원받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죽은 영혼을 위해 간구하는 부모의 눈물의 기도는 회심치 못한 그들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지 움직입니다. 성령께서 반드시 그를 위해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설령 당장 그렇게 안 된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은 부모인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자식의 영혼을 위해 흐느껴 우는 일 말고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구원과 지옥의 심판이 무엇인지를 아는 부모가, 어찌 구원받지 않은 채 죽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자기 자녀의 참척에 대해 눈물로 슬퍼하며 매달려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육신으로 죽은 사람은 거의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지만 영혼으로 죽은 자녀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금도 살리시는 분이시니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를 붙들어주셔서 이렇게 살아 있게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도 그렇게 살리실 수 있음을 굳게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쉬지 않고 그 자녀의 진정한 구원과 회심이 여러분의 최고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때든지 주님이 꿈에라도 나타나서 '얘야, 네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우리 아들, 우리 딸, 우리 며느리, 우리 사위가 회심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저는 아무것도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자녀를 위하여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자기의 힘으로 안 되면 목회자에게,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에게, 자기 아들을 변화시켜달라고 부탁하십시오.
모니카가 그러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책 한 권의 아름다운 구절을 한 번 더 소개시켜 드리려고 합니다. 회심한 지 얼마 안 돼서 카시키아쿰이라는 곳에 모여 어머니와 함께 사랑하는 친구, 제자들과 함께 기독교에 관해 공부하고 있던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세상 만물의 『질서에 관하여』라는 책을 씁니다. 그 책에서 자기의 회심이 어머니의 사랑과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지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 외에 아무것도 택하거나 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사랑하지도 아니하려는 결심을 허락하신 것은 내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고 확실히 믿고 단언합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로마의 하급 관리였습니다. 모니카는 남편의 회심과 아들의 회심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결국 신앙 없이 세상을 떠났고, 아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열매를 맺었으니, 그는 인류의 교회 역사상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부모는 누구입니까? 자식을 위해 울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 마음 안에 자식을 향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훌륭한 믿음으로 살면 감사해서 울고, 그렇지 못하다 치면 영혼이 불쌍해서 흐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일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양을 치는 모든 목자가 선한 목자가 아니듯이 자식을 가진 모든 부모가 선한 부모가 아닙니다. 돈만 밝히는 삯꾼 목자가 있듯이 또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삯꾼 부모도 있습니다. 자기 사랑에 빠져 자녀의 병들고 죽은 영혼을 쓰레기처럼 내버려 둔 채 자기 인생을 산답시고 살아가는 사람이 삯꾼 부모입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차이는 이것이니 양에게 밥을 주는 것은 차이가 없지만 맹수가 그를 해치고자 할 때 삯꾼은 도망가고 참된 목자는 막대기로 싸워서 양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겁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너무 사랑하십니까? 어떤 사랑입니까?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돌봐주십니까? 그것은 가정부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봉사가 여러분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부모라는 유일한 증거는 될 수가 없습니다. 선한 부모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선한 부모는 자식의 영혼을 위해 근심하는 사람입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 사랑을 누리고 충만한 사랑 속에 살게 되기를 위해 눈물 흘리지 않는 날이 없도록 그렇게 매일매일 눈물로 부모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 눈물은 자녀 앞에서 흘리는 눈물도 아니고, 이웃 앞에서 흘리는 눈물도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의 영혼이 되게 해달라고 비는, 참 신앙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녀들이 되게 해달라고 비는, 그러한 한 맺힌 탄원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도 모든 자녀들이 회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는 사라지지 않고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통곡하며 슬피 울며 자식의 영혼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파하는 동안에는 여러분의 영혼이 안전하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어느 날 불현듯 하나님은 그 아이를 만나주실 것이고, 여러분의 한 맺힌 기도는 여러분이 생각하지도 않은 날에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흐르는 뺨에 눈물을 씻겨주시고, '딸아, 아들아, 네가 너의 자녀를 위해 눈물로 간구하는 그 눈물을 내가 보았노라.' '이제 평안히 살거라.' '내가 너의 자녀를 변화시켜 주마.' 주님의 위로의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의 불쌍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도록 애처로운 부모가 되십시오. '아, 저 성도에게는 자기의 자녀를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소원이 없구나!' '아, 신앙의 유산을 그토록 물려주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녀를 위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훌륭한 신앙을 가졌던 다윗도 그 일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도와 눈물로 보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아는 그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양떼들의 영혼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선한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부모는 자식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신앙으로 살게 하기 위해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회심하지 않은 자녀들을 둔 부모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냥 운명이려니, 하나님의 섭리려니, 언젠가는 좋은 날이 와서 자기가 예수를 믿게 될 때가 올 거라는 생각으로 안일해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들아, 회심하지 못한 딸아." "내가 너를 위해 더 많이 울었더라면, 내가 너를 위해 더 자주, 더 간절히 기도했더라면, 네가 진작에 구원을 받고 성도가 되었을 텐데 ···" "이 모든 것이 엄마인 나의 죄다, 아빠인 나의 잘못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것이 진짜 부모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육신으로 아무리 부모가 되었다 할지라도 죽은 영혼으로는 그의 죽은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습니다. 오직 살아있는 영혼만이 죽은 영혼을 위해 슬퍼하며 눈물을 시냇물처럼 쏟을 수 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구원받지 못한 자녀들을 둔 여러분, 여러분에게 참척의 슬픔이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씨를 뿌리면 언젠가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 해가 가기 전, 이 여름이 가기 전,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자녀가 진정으로 회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녀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자녀를 위해 최고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작정하십시오. 그리고 자녀를 위해 슬피 울고 울음이 나오지 않을라치면 사랑하는 자식의 죽은 영혼을 위해서조차도 눈물 흘릴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한 영혼 때문에 흐느끼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고, 여러분의 자녀는 기쁨으로 회심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 내 가족을 위한 고통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가족의 회심을 위하여 2(2023.07.30._주일오전)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이 끝나던 무렵인 주 후 57년경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두 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습니다. 첫째는 수신자들에게 스페인 선교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둘째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도리를 조직적으로 서술하여 가르쳐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과 9장에서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언급합니다. 오늘은 그 맥락 아래에 놓여 있는 본문입니다. 1장부터 4장까지는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해서, 5장부터 8장까지는 성도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격정에 사로잡혀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
II. 내 가족을 위한 고통
A. 그치지 않는 고통
"···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그는 자기의 가족을 위한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을 이야기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 (말합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보내셨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벅찬 감격을 말하다가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형제, 골육의 친척들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성격을 내포하는 감정입니다. 첫째는 진실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롬 9:1上)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이 구절이 이방인들이 자기의 신들에 대해 맹세하는 양식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기의 진심을 극단적으로 호소하기 위해서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러한 형식을 빌어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은 추호의 과장이 없는 진실성이 담긴 고백입니다. 이런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가족과 골육 친척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며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진실성이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가족 구원을 향하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의 불쌍한 영혼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진실성이 우리에게 있는지 한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지속성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그저 한순간 울컥하고 솟아난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계속 지속되어 온 감정입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아무리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지속되던 겸손한 감정이었고,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애절한 심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동족, 곧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유대인 동포들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가족을 비롯한 골육지친(骨肉之親)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유대교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던 그의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언제 어디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영혼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고통은 한순간에 끝나는 고통이 아니고, 잊혀지는 고통이 아니라 지속되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잃어버린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지속되고 있습니까? 우리 중 누군들 가족들이 예수 믿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 감정이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오래도록 가슴 속에서 지속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가족의 영혼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심령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세 번째는 신령성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활화산처럼 용솟음치고 있는 이 근심과 고통은 인간적인 감상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신령한 염려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세상에 대한 근심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만 신령한 근심은 마음에서 더 커집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가득히 채울 때 이 세상에 대한 욕심과 유혹을 버리게 되니 근심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염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염려, 교회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염려는 마음속에서 증진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온전한 신자가 될 것인지, 그리고 나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의 영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마음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면 가족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가족들의 영혼에 대한 근심이 자신의 마음을 휩싸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거룩한 열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골육 친척들을 보며 느끼는 고통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영혼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지금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간절히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속에 신령한 근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가족들을 구원하지 못한 채 지옥으로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난감한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인의 가족이 돌아가셔서 조문을 갔는데 그 가족이 믿지 않고 죽었을 때 목회자로서 할 말이 없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연세 많으셔서 나이가 90세가 넘게 사시다 돌아가셨는데, 가족들은 다 교회 다니는데, 그 노인에게 가족들이 복음을 전하질 않았습니다.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죽을 날이 다가오면 그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라도 할머니의 마음을 사서 복음을 듣게 만들고 끊임없이 이끌어 예수 믿고 복음 듣는 자리에 그분을 갖다 놓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신앙을 가지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거짓말을 하나도 보태지 않고 엄밀하게 말하면 그분은 죽음과 함께 지옥으로 가신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인데, 자기 할머니인데, 자기 시어머니인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한집에서 살았으면서도 그 영혼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수십 년이나 있었는데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목사로서 거기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를 위로해야 됩니까? 과연 그 가족들이 위로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과연 그분이 돌아가신 게 슬프기는 한 것입니까? 만약에 고인의 죽음이 슬프다면 고인이 지옥에 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이 슬퍼해야 됩니까? 만약에 그 슬픔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노인을 예수 믿지 않게끔 오랜 시간 동안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세 분의 고모님이 계셨습니다. 고모님들하고 어린 시절에 같이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시골에서 서울로 공부하러 왔기 때문에 할머니 집에서 고모 세 분이랑 살았습니다. 두 분은 열심히 교회를 다니셨고, 한 분은 다니다 말다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첫째 큰 고모님이 저에게 언젠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가족 구원에 대한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고백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아버지가, 저한테는 할아버지인데, 불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얀 두루마리가 하늘에서 쭉 펴지면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백지로 된 두루마리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옆에 붓이 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너희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거라. 편지를 쓰거라.' 세 번 들려오고 꿈을 깼다고 합니다. 그때 아주 강력한 은혜 가운데 살았더라면 그 꿈이 뭘 의미하는지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냥 꿈이려니 하고 넘겼는데, 그 꿈을 꾸고 한 이틀 있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기억이 제가 생생합니다. 시골에 계셨는데 폐결핵을 앓으셨습니다. 위독해지니까 아버지가 시골에 오셨고, 그때 저도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었는데 할아버지를 포대기로 다 감싸서 시외버스에 앉혀드리고, 그 옆에는 나를 앉혔습니다. 그런데 왜 어린 나를 결핵 환자 옆에다 앉혔는지 난 이해가 안 갑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거기에 앉고 시외버스를 타고 올라오다가 시외버스 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 나이 일곱 살 때 일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고모님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가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할 마지막 기회였는데. 마지막 기회였는데.' 이것이 바로 가족 구원의 시급성입니다.
가족이 영원히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이 지나면 내일 또 기회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아무리 전해도 가족들이 예수를 안 믿는데 혹시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지 않으신 것은 아닐까요?' 내가 묻고 싶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전해보셨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그 사람들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시면 '우리 엄마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를 믿도록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본 적이 있습니까?
B. 자기 희생의 소원
자기희생 없이는 결코 복음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전히 복음 전파를 위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으며 그럴수록 그의 심령은 동포들과 골육지친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비참한 근심으로 이어졌습니다. "···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下) 그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고 바울은 히브리인으로서 구약성경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끔찍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질병으로, 때로는 지진으로, 때로는 불로, 그렇게 사라져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징벌을 받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이 극단적인 표현은 자신의 형제 곧 골육 친척들을 향한 애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구원의 화급성, 곧 빨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한 사랑의 표현은 언제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동반합니다. '죽도록 사랑한다. 죽어도 사랑한다.' 이는 그렇게 말하는 이에게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사랑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니 어떻게 하나!' 이것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들이 가족이었기에 가족 구원을 위해 많이 울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은 외제차 타고 교회 오는 사람이 아니라 버스 타고 온 가족이 손잡고 교회 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꿈도 온 가족이 함께 손잡고 교회 오는 것이었습니다. 온 가족을 교회 안에서 만나는 것이 우리의 꿈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믿지 않는 가족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한 부담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을 절절히 녹이고 태우는 그런 눈물 어린 안타까운 심정이 가족 구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인하여 흘리는 눈물의 마지막이 언제였습니까? 여러분이 예배드리는 그 자리를 가족의 영혼에 대한 염려로 흥건히 적셔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죽든지 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지 않고는 내가 눈을 감을 수 없겠노라는 안타까운 심정이 든 때가 언제였습니까?
우리 교인의 경험입니다. 어머니와 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잠을 주무시는데 자다 보니까 어디서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대성통곡하는 울음소리입니다. 눈을 떠보니까 딸의 방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서 딸의 방문을 열어보니까 딸은 책상에 엎드려서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니? 너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아니에요. 엄마,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우니? 무슨 일이니?' '엄마 내가 우는 것은 엄마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날 엄마가 말했습니다. '너를 위해서라도 내가 예수를 믿으마. 너를 위해서라도 내가 예수를 믿으마.'
18세기 조나단 에드워드(J. Edwards) 시대를 살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 Brainerd) 선교사는 자기의 일기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예수 잘 믿어도 가족이 예수를 안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많은 경우는 예수 믿는 가족이 신앙생활을 잘 못하기 때문에, 본이 안 돼서, 복음의 열정이 부족해서, 가족들이 예수를 안 믿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사무치는 안타까움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까? 얼마간 전도하다 지치면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겠지.' 불신 가족을 향해 마음을 다해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이 고백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운명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영혼에 관한 염려보다는 유산에 관해 관심이 더 많은 자녀들이 어떻게 그 부모를, 형제를 예수께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믿지 않는 동생과 믿는 언니가 있었습니다. 언니는 동생을 전도하려고 많이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었고 유산을 분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이 돼서 두 자매가 머리끄덩이를 붙들고 대판거리 싸웠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겠습니까?
가족들에게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내의 과정이고 연단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심으로 전도해도 끝까지 불신앙을 고집하다가 죽는 가족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가족들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들을 구원하는 것보다도 더 큰 목표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올인(all-in) 해야 합니다.
겨울에 햇빛이 비칩니다. 햇빛이 비쳐도 여전히 춥습니다. 그 햇빛은 별로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볼록 렌즈로 그 햇빛을 모아보십시오. 그리고 이리저리 움직여서 초점을 맞추어 보십시오. 종이를 태우고 나무를 태웁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막연한 부담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끊임없이 관계가 깨어지고, 양보할 줄도 모르고, 희생할 줄도 모르고, 자기의 있는 성질 다 부리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한 번씩 (말합니다.) ‘엄마, 교회 좀 한 번 다녀봐.' '우리 교회 한 번 안 갈래?' 그렇게 해서 복음이 전해지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그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 유명하지 못한 남자 배우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한국에 살고 있고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다가 아내가 깜짝 놀라서 깨었습니다. 꿈속에서 아들이 한없이 울면서 '엄마 보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깨웠습니다. '여보, 여보. 이상해.' '왜?' '지금 꿈을 꾸었는데, 유학 간 우리 아들이 엄마 보고 싶다고 애처롭게 우는 꿈을 꾸었어.' 깜짝 놀라서 연락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전화를 받는데 들려오는 이야기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들이 방금 사고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숨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보니까 심정지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시신을 보니까 군데군데 누군가에게 맞아서 멍이 든 흔적들이 수없이 많은 것이었습니다. 부모는 직감적으로 학교 폭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끊임없이 진정하고 경찰에 고발장을 내고 검찰에 호소했지만, 미국에선 조사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버지는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피켓을 들고 검찰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삶은 모두 다 풍비박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되지 않아서 그 동네의 소극장을 빌려서 거기서 아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1인극을 하면서 끊임없이 항의하고 시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게 가족입니다. 이역만리 떨어져 있어도 그렇게 고통을 받으며 죽어갈 때 마지막 생각난 것은 엄마 아빠였습니다. 그래서 꿈에 그 아이가 보여서 그렇게 고통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렇게 ‘엄마 보고 싶어.’를 외치며 울다가 죽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 가족을 전도하겠다고 하면서 사소한 이익을 가지고 형제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끊임없이 싸우고, 갈등하고, 심지어 법원에 소송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가족들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없이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그 비참한 영혼을 어떻게 두고만 보겠습니까? 가족 전도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삶을 다 보고 있고 때로는 이해관계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서부터 양보하는 각오를 해야 됩니다.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익에 민감한 가족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기꺼이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 대신 복음을 전파하는 대의에 대해서 옳은 일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사랑하려고 애쓰고 무엇을 가족을 위해 섬길지 기회를 항상 엿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가는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가족 구원을 하는 일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쉽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변명할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시골에 살고 계셔서 우리가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시골에 가십시오. 그리고 명절에 갈 때마다 부모님에게 간곡히 복음을 전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저절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어제도 청년들과 함께 영상을 시청했는데 거기서 어느 여성 목사님이 자기가 가족들을 어떻게 구원했는지를 전했습니다. 온 집안이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는데 왠지 예수가 너무 믿고 싶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싶어서 너무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교회에 가서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예수를 믿겠다고 했더니 '네가 교회를 믿는다면 이 집을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는데 엄마가 비명을 지르면서 너무 배가 아프다고 막 몸부림을 치셨다고 합니다. 그때 기도하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엄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병들었을 때 믿음으로 기도하면 낫는대. 내가 기도해 볼게.' 그리고 엄마를 위해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는데 나았습니다. 그렇게 예수 믿기 전에 그분은 4일 동안을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 초신(初信) 단계에서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미국에 따로 떨어져 있는 아빠 생각이 났습니다. 절대 예수 안 믿고 불교로 똘똘 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4일을 금식기도 하고 아버지를 위해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냈다고 합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딸의 편지를 보고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서 안 믿더라도 성경이나 읽어보고 안 믿기로 결정하자고 하면서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자기의 가족들을 그렇게 쉽게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오랜 세월 동안 저주받은 사람처럼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자신의 목숨과 가족들의 구원을 바꿀 마음이 있을 정도로 안타까워하다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골에 가십시오. 가셔서 어머니 아버님께 간절히 복음을 전하십시오. 어떻습니까? 너무나 그 영혼이 불쌍해서 통곡하며 울면 아버지 어머니가 와서 '아들아, 왜 그렇게 흐느껴 우니?', '무슨 일이 일어났니?' 그럴 때 '아버님 어머님이 예수 안 믿어서 제 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 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그 자매님은 되는데 여러분은 안 됩니까? 또 하나의 방법은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십시오. 과일이라도 한 박스 사서 목사님을 찾아뵙고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비십시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데, 저는 멀리 서울에 떨어져 있습니다. 밤낮으로 눈물로 기도하는데, 복음을 전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목사님, 우리 어머니 아버님을 자주 심방해 주시고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시면 제가 무엇이라도 이 교회에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내려갈 때마다 그 교회를 방문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한 번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해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전도사님, 내가 아무리 말해도 안 듣는데 우리 집에 가셔서 연로하신 우리 어머니 예수 믿도록 복음을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한 번 가지고 안 되면 부목사님에게 요청하고, 부목사님에게 안 되면 담임목사에게 요청해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이 받았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가 구주인 것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여러분이 어떻게 알게 되었겠습니까? 누군가 여러분은 기억도 못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눈물을 흘려준 끝에 여러분이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 흘린 수많은 눈물이 여러분을 예수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 대신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족을 위해 눈물 흘려주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저는 열네 살에 무신론을 선언하고 무신론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때 교회 착실히 다니고 있는 동생을 말로 끊임없이 설득해서 교회를 못 다니게 만들었습니다.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스스로 얼마나 성경이 거짓말투성이인지, 기독교가 얼마나 비겁한 종교인지, 그리고 황당무계한 종교인지를 제가 입증해 보였습니다. 신앙이 깊지 않았던 동생이 교회 다니기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제가 회심하고 나서 제일 먼저 회개했던 게 그 죄였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구원을 위해서 오랜 세월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철저한 무신론자에서 구원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삼아주셨는데 내 동생이 다시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는 죄책감 때문에 못 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회개했던 것이 동생을 설득하여 예수 믿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결국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이성의 저항 없이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압도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정답을 찾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의 기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눈물 흘리지 못하는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십시오. 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가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하라고 하시든지 나는 할 수 있으며, 무엇을 견디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나의 기도입니다.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포기하지 마십시오. 온 마음을 다하여 가족들의 영혼을 가슴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없으니 여러분이 대신 회개하며 울어주십시오. 아직도 구원받지 않았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직도 내 눈물이 가족 구원의 분량에 미치지 못하였구나.” 내게 눈물을 달라고, 피를 달라고, 가족들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구원받은 우리가 아직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고도 가족의 구원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그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롬 9:3) 이런 정신으로 다시 한번 가족의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온 가족이 한 해가 지나가기 전 모두 손잡고 이 교회에서 만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가족 구원의 길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녹취자: 전병선
I. 본문해설
주 후 62년경에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후, 사도바울은 다시 전도 여행을 떠났는데, 바로 그 시기에 디모데전서를 썼습니다. 그 후 66년에서 67년경 바울은 네로 황제의 치하에서 핍박을 받아 다시 체포되었고, 그때 디모데 후서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앞에 있는 디모데의전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단에 의해 위협받는 교회에게 참된 믿음의 교리를 강조하였고, 아울러 그 교리를 따르는 성도들의 참된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교훈하였습니다. 그러한 교훈의 맥락에서 사도바울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인 가족 돌봄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는 과부와 고아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조직적인 방식으로 초대교회 때부터 이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아 왔습니다. 그것이 경건의 표준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랬는데 교회 다니는 어떤 가족들은 자기의 어머니를 부양해야 할 의무를 외면하고는 그 책임을 부당하게 교회에 떠넘기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세태를 책망하다가 본문의 말씀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참된 신자의 가장 큰 고통은 아직도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한 성도에게는 이러한 아픔이 없습니다.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의 눈물이 흐릅니다. 가족 전도가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평소에 신자인 자신의 삶이 가족들에게 모두 다 드러나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받는 법이 없듯이 그렇게 집 안에서 식구들을 전도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겠노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고 진심으로 화해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또 가족들이 비록 자기의 결단에 알맞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가족이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지 자신은 가족을 끝까지 사랑하기를 하기로 뜻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전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인지를 가족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II. 가족 구원의 길
그러면 가족 구원의 길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가족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제일 먼저 가족을 돌아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여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여기서 가족을 돌본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전인적으로 총체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돕기 위해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가족은 마땅히 카리타스의 사랑으로써 가족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건강과 경제적인 형편으로부터 영혼의 구원 여부와 침체 상태에 이르기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참된 행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들이 잘 갖추어졌는지를 살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A. 육신을 돌아봄
제일 먼저 육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에 관한 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신자는 가족의 육체적인 형편을 돌아보고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길입니다. 편안한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 마음을 터놓은 대화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동안의 마음에 맺힌 것을 서로 나누어 풀고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먼저 믿은 당신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용기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가족 관계에서 사소한 이익들을 과감하게 양보하고 의견이 충돌할 때 불신 가족과 다투고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손해를 보기를 선택하십시오. 진심으로 가족을 선대하십시오. 진심으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해 섬기십시오. 단 신앙의 가치 하나만은 결코 양보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불신 가족들의 경제적인 형편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여 당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우십시오. 물질적으로 어려운 불신 가족들을 섬기되, 자기의 경제적인 형편에 맞게 규모 있게 하십시오. 그러한 섬김의 대가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며 끝까지 불신은 가족을 동일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 신자는 가족의 화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고, 때로는 기쁨으로 손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희생하는 것이 힘들고 자존심이 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그런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떻게 값없이 자신을 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신자에게 가정은 첫 번째 선교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불신 가족을 위한 선교사로서 믿지 않는 가족을 복음화해야 되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새롭게 하셔야 합니다. 먼저 믿은 당신의 사랑과 헌신 없이는 결코 가족들을 전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가정이 비록 상처와 아픔이 많은 가정일지라 할지라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먼저 당신이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용서하고 그들을 위로하십시오. 불신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쌍한 영혼으로 보고,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방황하는 영혼으로 보고, 마음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그들의 육체의 형편을 골고루 돌아보며, 당신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진심을 다해 가족들을 섬기시고 일체의 이기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가족들은 여러분들의 행실에서 무언가 지적할 단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궁금해질 것입니다. ‘저 사람 안에 있는 무엇이 저로 하여금 그렇게 이타적으로 가족인 우리를 사랑하고 또 섬기게 하는가?’ 하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B. 영혼을 돌아봄
그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신령한 시각으로 가족들의 영혼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죽은 영혼과 그 마음의 고통, 그리고 외로움을 헤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고 함께 불쌍히 여겨주며 울어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믿지 않는 가족들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은혜에서 멀어지면 경건의 능력은 사라지고 신자의 마음에서 영혼에 대한 사랑도 식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가장 탁월한 전도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와 충만한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때 가족들은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사람 안에 있는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하고 그렇게 쌀쌀맞던 그가 우리를 진심으로 섬기는가?’ 하고 스스로 묻고 싶어질 것입니다. 아직도 믿지 않는, 혹은 심지어 이미 믿은 가족들과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분열하고 대립하면서 상처나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주신 것은 그렇게 망가지고 깨어진 집안에 평화를 이루는 도구로 쓰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는 신자인 당신이 사실은 불신자이거나 신앙이 어린 가족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혼란이 가득하던 시대에 백성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던 때에 아시시의 프란시스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 도구로 써주소서
가족들에게 당신의 관용을 알게 하십시오. 그들 각자의 영혼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그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길을 찾으십시오. 죽어가는 가족들의 영혼을 위하여 진지하게 염려하십시오. 먼저 믿은 가족인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가엾이 여기겠습니까? 특히 그들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그들 곁에 계십시오. 진심으로 위로하고, 진심으로 들어주며, 진심으로 함께해 주십시오. 과거에 그들이 당신에게 저질렀던 허물이나 죄를 깨끗이 용서하고 다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미 당신이 현재적으로 받아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 보상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용서하십시오. 그 사랑으로 가족 전도를 다시 결단하십시오. 불신 가족들을 예수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야말로 가족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성도로서 가장 고귀한 사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형제, 곧 고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단지 나만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나의 전도 덕분에 하나님을 믿고 함께 구원의 복을 누리게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그 후에 그를 기다리는 것은 거룩한 기쁨의 낙원이거나 멸망에 이르도록 불타는 지옥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 심판은 곧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라고 마가복음 9장 43절은 말합니다.
불현듯 가족들의 생애가 지상에서 끝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았던 우리 가족들이 죽어서 지옥에 던져져 버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죽은 그들이 개별적 영혼으로 모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모든 천사들 앞에 준엄한 심판을 받는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십시오. 그들이 일평생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원수로 산 것에 대한 형벌이 선고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평생을 함께 살아온 당신의 가족들입니다. 만약 당신의 가족들이 그렇게 심판을 받고, 그렇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모두 잃어버린 채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진다면, 당신의 눈에서는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흐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을 받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목 놓아 울지 않겠습니까? 설령 아직은 심판의 때가 도달하지 못 않아서 지금 편안히 살아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가족은 죽는 그날까지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해 전도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우리는 불신자 시절에 이미 충분히 경험해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살 만한 길이었으면 어찌하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왔겠습니까? 그 옛날에 우리가 불신자로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길을 지금 그대로 따라 고통 가운데 걸어가는 불신 가족들이 가엾지 않습니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길을 계속해서 신음하고 고통하며 걸어가야 하는데 불쌍하지 않습니까?
혹시 그들이 여러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게 했던 과거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잊어버리십시오.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불신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그 마음에 끊임없는 번민과 고통을 기억하며 가엾이 여기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사과하지 않아도 용서받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족 구원은 시급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야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때 마음을 다하고 진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우십시오.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전심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공급하며 그들을 위해 옆에 같이 있어 주십시오. 그것이 행함이 있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의 마음을 주 앞에서 굳게 하느니라” 성경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그렇게 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어떤 불신자가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교회에 대해 받은 인상을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말이 아주 많다. 두 번째 뭐냐 하면 말로는 사랑하라고 하면서 되게 이기적이다. 그런 이야기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경 구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뭐라고 말합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러면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주를 알고 또 우리의 마음을 주 앞에 굳세게 하리라” 즉,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을 느끼게 되고 또 우리의 마음은 굳건해진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향하여? 진리를 향하여 굳건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습니다. 이제껏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남겨둔 채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람도 갔다가 돌아온 적이 없는 낯선 세계속으로 들어갑니다. 불신자는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 얻은 신자는 천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에 갔을 때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거기가 어떻게 우리의 천국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불신 가족을 사랑하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가정을 위하여 첫 번째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우리의 선교지이고 개척지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가족을 사랑하며 그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모두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몰라서 할 수 없는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을 겪으셨지만 일체의 온유함으로 참으셨습니다.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심으로 친히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또 여러분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피를 온몸으로 받으며 이렇게 고백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이제 오늘부로 우리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찬양)
이 모든 것 주의 소유 받으소서
그렇게 주님께 모두 드렸습니다. 그러니 남은 인생은 덤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라고 주신 인생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 마음은 변했습니다. 불신 가족들에 대해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갈등이 커지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에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를 한다면 그 사람들이 ‘너나 잘 믿어라. 너 같은 행실을 하며 사는 사람이 믿는 예수는 내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구나.’라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불신 가족을 많이 사랑해주고 희생한다 할지라도 강퍅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그런 걸 몰라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은 그런 당신의 선의를 아주 이용해 먹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도록 그 사람에게 아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은혜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마음이 쓰이고 본전 생각이 난다면 당신은 결코 가족들, 아니 다른 사람들조차도 전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런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담대함과 자유가 있습니다. 불신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그 사람과 하나님이 친히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전도에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또다시 열렬히 기도하면서 계속해서 도전하십시오. 진심을 말로 전하고 여러분들의 진심을 편지로 전하고 선물로 전하고 그리고 부모님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드리고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결코 구원받지 못한 채 지옥에 던져지도록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는 그런 후손들이 되어 사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하실 때까지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이 거듭거듭 가족의 구원을 위해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름에 거두리라” 보십시오.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낙심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끝까지 선을 행해야지만, 포기하지 말아야지만 어느 때인가 반드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그 힘으로 지난 시절에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지우십시오. 여러분들이 결코 일방적으로 가족들에게 상처만 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예외 없이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마음 아프고 힘들었는지를 헤아리면서 잘못했노라고 진심으로 용서를 비십시오. 여러분은 그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불신 가족들은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불신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길은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더욱이 불신자인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한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더욱이 그들을 예수 믿은 후에도 참된 신자가 되기까지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고 긴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족들과 함께 그 길을 가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먼저 예수 믿게 만드신 이유이고, 바로 그 일을 위해 여러분들을 여러분 가정에 첫 번째 선교사로 파송을 하신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가족 전도의 과정은 매달리고 눈물로 기도하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길고 긴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의 무정했던 마음을 회개하게 되고 교만했던 행실을 뉘우치게 됩니다. 더욱이 끊임없이 실패하는 가족 전도에도 불구하고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들고 간절한 기도로 현실과 싸웁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의 가족을 누가 전도하겠습니까? 내 묻고 싶습니다. 최근 일 년 동안에 누군가가 여러분의 집에 찾아와서 여러분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올 일 년만이 아니라 내년 일 년도, 후년도, 그 다음 해도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도대체 가족을 위해서 이런 중대한 사명을 맡고 있으면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이 자신이 그렇게 할 능력이 없으면 맛있는 것 사주고 전도사님 불러다가 대신 좀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하고 자리를 비워주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뭐든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사랑하는 딸이 지금 암에 걸렸습니다. 이 주밖에 못 산다고 병원에서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집에서 조용히 이 주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은 명의를 사방으로 찾아서 이 아이를 진단이 정확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기적이라도 일어나는 방법이 없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안 할지 모르지만 저는 할 것 같습니다. 가산을 모두 들여서라도 말입니다. 그 치료하는 방법이 외국으로 가야만 한 것이라면 저는 집을 팔아서라도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1%의 가능성만 있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구원은 불신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신자인 나의 삶의 문제이며 사명의 문제입니다. 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셨습니까? 우리 불쌍한 가족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게 하고자 하심이 아니었습니까?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 인생의 의미를 깨우치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가족들을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사명이 가족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온 마음을 다하여 다시 여러분 자신의 본분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선교지에서 반드시 구원의 열매가 여러분의 가족들에게 맺히도록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가 여러분들의 사명의 자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III. 적용과 결론
불신 가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산 제사입니다. 불신 가족들을 위해 밤낮 쏟는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속히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간구를 결코 물리치시지 않습니다. 불신 가족들이 내일이라도 죽으면 지옥의 불에 던져질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실 때 가지셨던 그 단장(斷腸)의 마음을 가지고 불신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울어야 합니다. 충만한 은혜 속에서 이 가족들을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한 해가 가기 전에 여러분들이 모두 가족들과 함께 손잡고 교회 나와 예수를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