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안에 있는 은혜와 죄(1)
한 20년 전에 제가 책을 막 쓰던 시대인데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라는 책이 히트작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읽을 때 책을 읽고 고민하던 한 사모님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전화를 했습니다. 인천에 있는 한 1700명 정도 모이는 교회라니까 그때 우리교회가 한 100명쯤 모였으니까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 사모님이 자신의 남편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나에게 상담을 하는 이야기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놀라웠던 게 초등학교 4학년 때 주님을 깊이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이 전화통화 하는 음성을 들어서는 40대중반정도 되신 것 같았습니다.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는 한 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 40대 중반까지 새벽기도를 빠진 적이 없답니다. 우리들이 구약성경이나 특히 구약성경에서 우리의 습관을 질타하는 내용을 보는데 그것은 그 습관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습관 속에 내용이 없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제사는 드리는데 제사의 정신이 없거나 십일조를 드리는데 거기에 주님을 향한 경건이 없거나 율법을 지키는데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을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의무와 습관은 내용을 보호하는 껍질이 됩니다. 우리의 몸이 만약에 뇌에 뼈가 없고 순두부가 위에 올라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나가다 2층에서 애들이 볼펜만 던져도 죽을 겁니다. 이게 보통 딱딱한 헬멧이 아닙니다. 꽝하고 부딪혀서 별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부위일수록 이렇게 딱딱한 껍질에 쌓여있듯이 중요한 내용일수록 습관이라는 형식에 쌓여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개인 규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규범화 하지 않으면 아주 작은 여건의 변동에도 금방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번 기도가 무너지면 다시 세우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앞으로 여러분들이 목회 할 때 되면 거의 기도안하는 시대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기도원들 다 문 닫습니다. 제 기억에 80년대 제가 83년도에 우체국장 발령이 났는데 경기도 의정부근처에 있는 우체국장으로 발령 났습니다. 야간학교를 다녔는데 밤중에 산속으로 들어가 보면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을 짓기만 하면 교회에 들어오는 헌금보다 기도원에 들어오는 헌금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지금은 다 팔려고 내 놓았습니다. 기도 안합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여러분 가지고 있는 핸드폰 때문입니다. 핸드폰 보면서 정신을 빼앗기면서 마음이 찢어지고 종이가 점점 싫어지는 것입니다. 종이인데 성경도 종이입니다. 물론 핸드폰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핸드폰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보다는 유튜브나 영상자료를 보면서 마음에 감동을 받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마라는 것이 아니라 자제력을 발휘에서 멀리하고 죽어도 그런 자제력이 없다 그러면 투지로 갈아타시기 바랍니다. 노인 폰으로 갈아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상을 볼 수 없는 폰으로 갈아타서 전화하고 문자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인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 희생하지 않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흐릿하게 있지 말고, 너무 부러워요 여러분들은 지금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데나 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피곤하지 않고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고 소화 잘 되고 얼마나 좋을 때입니까? 그리고 한번 읽으면 기억이 납니다. 난 여러분 만할 때 하루에 라틴어단어 150개를 외웠습니다. 물론 그 다음 날 한 50개 잊어버리지만 그리고 영어단어는 매일 50단어씩 찾아서 전철타고 다니면서 외웠습니다. 가능했습니다. 온갖 일 다 하면서 교회일 하면서 심지어 직장 다니면서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 눈을 똥그랗게 뜨고 삶의 목표를 찾아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서 대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욜로 타령에 놀아나지 말고 나중에 베짱이 신세가 됩니다. 욜로 라고 말하는 사람은 금 수저 집안에서 태어나고 젊었을 때 그래도 놀랍게 공부도 잘하고 해서 전문직에 올라가 일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 정도의 지위에 오른 사람 아무 것도 안 해도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 때문에 먹고 살고 건물에서 세받아서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욜로 욜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욜로 하고 살면 나중에 올로가 안 됩니다. 뭐가 있어야 욜로를 하지요 더욱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각오를 다부지게하고 그리고 선한 일을 위해서 목표를 가져야 됩니다.
기도와 내제 하는 죄 내제한다는 것은 신자 안에 있는 죄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중요한 성경구절이 하나 나옵니다. 로마서 6장 14절입니다. 성경 한절 한절이 어떤 것들은 굉장히 두터운 진리를 포함하고 있고 어떤 것들은 작은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터운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집중적으로 주목해서 관찰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많은 것들을 보게 됩니다. ‘죄가 너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안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안에 있음이라’ 이것을 희랍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다음구절처럼 됩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왜냐하면 죄가 너희의 주인이 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나옵니다. 중간고사 보기 전 시간에 우리가 배운 것을 잠깐 살펴보면 우리가 타락한 이후로는 철저한 죄인이 되고 우리의 모든 정신과 육체의 기능에 죄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나 감정을 갖는 것이나 그 담에 의지하는 것 어떤 것에도 모든 게 다 죄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것에도 죄의 영향이 미치기 않을 수 있는 범위가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선한 뜻을 가지고 한다고 하더라도 이 죄 자체를 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나온 삶이나 사고나 생각이나 이런 것들은 어떤 것들은 훌륭한 부분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죄에 오염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지기에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의 경우 이것들이 중보에 의해서 죄의 요소들이 제거되고 이것들은 하나님께 올릴만한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선한 것을 하고도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런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올려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지은 죄는 무엇과 무엇이 있습니까? 원죄와 자 범죄라고도 하지만 실행 죄라고도 합니다. 혹은 고범 죄라고 하는데 옛날 할아버지들이 쓰던 말입니다. 실행 죄입니다. 오리지널입니다. 이 원죄는 다시 둘로 나눠지는데 그 결과가 죄책과 오염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원죄의 결과가 죄책과 오염으로 남겨집니다. 그러면 결국 실행 죄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죄 짓는 것이고 예수 믿는 사람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원죄에 대해서 해결이 주어집니다. 해결이 주어지면 죄책은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특히 사법적인 책임입니다. 이것은 칭의 너는 이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이 칭의의 선언을 통해서 죄의 책임문제는 면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면 같은 게 그런 것입니다. 대통령 취임하면 호적에 빨간 줄 있는 사람 지워줍니다. 대통령령 몇 호에 의해서 사면 이렇게 찍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염은 성화에 의해서 서서히 제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화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열매 이것은 진리고 이것은 사랑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변화되어 가는데 문제는 이것은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와 합하여 당신의 이런 성화를 이루어갑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사람은 인격과 삶이 죄의 영향에 벗어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화의 결과는 클라이스트 라이트너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음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삶과 인격에서 가장 잘 드러내신 분이기 때문에 닮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실행 죄는 결국 오염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죄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신 국론에서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네 단계로 나눕니다. 맨 처음에 사람이 창조되어서 죄를 짓기 이전 그담에 죄를 지은 다음 그담에 구원받고 난 다음 그담에 마지막에 천국에 들어간 다음에 1.2.3.4 1번이 호세 떼까레 호세는 라틴어로 할 수 있다 떼까레는 죄를 입는 것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 두 번째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논 호세 논 떼까레 그럼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구원 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물론 완벽하게 어떤 죄와도 관계없는 사람이 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고 그럼 어떤 상황에 대해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성령의 은혜가 그래서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언약백성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첫째가 죄를 지었을 때 무한한 용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죄이든 얼마큼의 많은 횟수의 죄이든 상관없이 회개하면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순종을 위한 능력 순종하기를 원하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무한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천국에 가고 난 다음에는 논 호세 담에 떼까레 어떻게 됩니까? 죄를 지을 수가 없는 천국에서는 더 이상 그럴 리도 없지만 죄를 짓고자 한다고 하더라도 지을 수가 없는 완전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네 상태를 어거스틴이 신 국론이라는 책에서 그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자들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창조될 때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과 함께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담에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똑같이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죄를 짓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언약적 충실함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을 붙들고 믿고 이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성령 안에서 살 때 능히 그것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지인이 아주 재미있는 간증을 했습니다. 젊어서 군대를 갔는데 동해안으로 배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규칙이 그 부대 안에 있는데 군대에서 주는 모든 반찬은 맛이 없습니다. 사제 고추장과 김치를 갔다가 먹어야 되는데 돌아가면서 밤중에 그 동네에 가서 훔쳐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고추장 항아리는 통째로 들고 오고 그렇지 않으면 비닐봉지에 퍼 담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차례가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거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짓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안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고참이 ‘너 이놈 자식 감히 졸병이 고참 말을 안 들어! 하고 때리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내일까지 꼭 마련하겠습니다. 그리고 훔친 게 아니라 낮에 그 집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제가 서울에서 군대 생활하러 여기에 왔는데 우리가 너무 김치가 먹고 싶은데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손을 잡으면서 ‘아이고 가엾어라 우리아들도 군대 갔는데 ’그리고 퍼서 제일 맛있는 것을 더 많이 그리고 저 집에 가니까 고추장을 또 다른 집에 가니까 된장을 그러면서 그때 깨달은 것이 우리는 해보지도 않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안 짓겠다고 결심을 하고 주님께 도와 달라고 하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와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가 언 약적 충실도에 달렸다고 믿기 때문에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자가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에 기도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경외심이 최고의 표현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기도는 별로 순종할 의향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가 안 되고 그 사람 자체가 기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싶어 하고 순종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경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순종할 수 있는 간절한 능력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매일매일 기적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도우시는지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이런 큰 구도를 놓고 본다면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는 로마서 6장 14절은 무엇을 가리키느냐면 신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의 마음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여기에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나 혹은 여기서 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의 지배아래 있었을 때에는 이 율법이 원료가 되어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우리 안에는 또 다른 법이 있었는데 이것이 죄의 법입니다. 그 율법아래서 자신의 죄를 늘 확인하면서 그러면서 이 죄의 법칙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보면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달립니다. 탱크로리 같은 40톤짜리가 달리면 정말 무섭습니다. 뒤에 트레일러에 돌이나 철강 같은 것을 잔뜩 싣고 달리면 원래 25톤밖에 못 싣는데 40톤까지 싣습니다. 운전사들 말에 의하면 너무 빨리 달리면 거의 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없답니다. 그런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인데 옆에서 여러분들이스파크나 모닝을 타고 다니면서 운전 조심하라고 손가락질 하면 그 사람이 쳐다나 보겠습니까? 저 밑에 바퀴벌레만한 차가 굴러가는데 쳐다나 보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 까불고 다니다가 저기서 하얀 옷을 입은 경관이 스피드건을 들고 서있습니다. 그러면 양순한 양같이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달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힘으로는 그까짓 경찰하나 차에 치어버리면 껌입니다. 그런데 뭐가 지배합니까? 그 경찰의 손에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에 술 먹고 운전하면 면허도 취소할 수도 있어서 직업을 날라 가 버리게 만들 수도 있고 중량초과를 하면 벌금이 99만원입니다. 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친 듯이 차가 달리는 것 같아도 법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율법이 지배할 때는 사람들이 그 율법에 순종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더욱이 그 사람 안에는 죄의 법이 사로잡아서 그래서 결국은 죄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적인 지배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이 안에서 죄의 절대적인 지배가 종식됩니다. 그 대신 죄의 상대적인 지배는 여전히 가능합니다. 은혜가 지배했는데 여러분들의 표현에 의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때의 죄는 작습니다. 안에 있지만 문제를 별로 안 일으킵니다. 보통 건강한 사람의 몸에도 암세포가 있답니다. 10만개가 되어서 뭉치기까지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냥 있다가 없어졌다가 있다가 없어지는데 문제는 뭉쳐서 한곳에서 융성하게 되면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은혜가 왕성할 때는 죄가 별로 영향을 못 느낍니다. 있긴 있지만 우리의 삶 전체를 뒤집어 버리고 ‘나 학교 때려 칠거야 하고 아니면 내가 다시 기도하면 사람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결심은 안합니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담에 이 은혜의 실제적인 영향력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데모를 합니다. 옛날에 민주화 시대 때 광화문에서 데모합니다. 그런데 항상 데모대가 데모를 하지만 그러나 국가의 공권력보다는 약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촛불 혁명같이 그렇게 어마어마해서 도저히 안 되면 정부가 바뀌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지배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게 되면 그러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지 않지만 매우 적게 남아 있어서 결국은 죄의 전체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티끌만큼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원리가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위치를 차지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영혼에 대해서 공부했을 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실제가 아니라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영혼이 있고 육체가 있으면 두 개는 한 번에 만나서 작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작동을 합니다. 영혼이 우리보고 밥 먹어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육체와 마음이 만나면서 허기를 느끼는 것입니다. 허기를 느끼는데 이상하게 아무거나 먹고 싶지 않고 오늘은 꼭 돈가스를 먹고 싶은 것입니다. 주머니를 뒤져서 돈이 되나 살펴보고 없으면 못가지만 있으면 가서 다른 메뉴 말고 돈가스 주세요. 하고 돈가스를 먹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자리가 어디냐 라고 말할 때 마음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죄는 어느 자리에 있을까요? 이것도 역시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은 신앙과 죄, 하나님 사랑과 세상사랑, 이런 것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격전지입니다. 그래서 지혜 자가 우리에게 뭐라고 충고합니까?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 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게 샤만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게 어디에 많이 쓰이냐면 영어로 말하자면 홀드입니다. ‘진지를 사수하라’ 할 때 그 사수입니다. 전투상황에서 그 진지를 사수하라 그 요새를 지켜라 목숨을 걸고 사수하라 할 때 그거입니다. 결국은 지혜 자는 자신의 영화 그리고 수치 그리고 자신의 영광 이런 모든 심지어 향락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에게 제일 인생자체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트입니다. 마음입니다.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늘 기도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심각하게 나쁜 사람을 안 만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전도 대상자쯤으로 만나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심각하게 잘못된 사람을 부모로 만나거나 아니면 남편으로 만나거나 아내로 만나거나 직장의 상사로 만나면 여러분들의 인생이 심각하게 꼬입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까 중학교 교사가 제자들 화장실에다가 몰카를 설치해놓고 촬영했습니다. 뭐가 그런 차이 만들었냐면 존경받는 선생님과 쓰레기 같은 성범죄자의 차이입니다. 무엇이 만들었습니까? 다 대학 나왔고 전공과목 있고 교직 이수했고 자격증 가지고 강의하는 것입니다. 그중의 어떤 사람은 다른 교사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명강사입니다. 그런데 뭐가 그런 차이를 만든 것입니까? 마음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의 외모를 바꾸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을까? 그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바꿀 수 있을까? 완전히 불가능 할까?
질문- 그럼 그대는 마음이 태어나서부터 여태껏 한 번도 안변했나요? 그런 것은 있지만 그래도 안변하는 것 같다 형제생각은?
답변-사람의 영향을 받긴 하는 것 같은데 신앙이나 구원에 있어서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일반적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 것 같습니까? 마음이 바뀔 수 있느냐?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악을 향해 가던 마음 혹은 선한 것을 향해 가던 마음 마음의 바탕이 바뀌는 것에 대해서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답변- 환경이나 보고 듣는 것에 따라서 바뀌어 지는 것이 인간에 의한 영향도 있긴 한데 그 관계에 있어서 영향을 많이 관계에 있어서 바뀔 수 도 있다는 것이네요
질문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데 그 마음이 쉽게 바뀔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에 대한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처럼 쉽게 바뀔 수는 어렵지만 가능성은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대충 우리들이 의견이 집약이 되었는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바뀔 수 있는 게 아닌가. 또 한쪽에서는 절대 안 바뀐다. 고쳐도 못 쓴다고 또 한쪽에서는 그래도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두어야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특히 이 마음을 우리들이 단순히 어떤 기호물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아침에 학교 나오면 꼭 족구를 한다. 아니면 자기 전에는 꼭 손을 씻는 습관이 있다든지 이런 아주 개인적인 생활에 관한 것들도 좀처럼 바뀌지 않고 이견이 일어나지 않는 한 쭉 유지됩니다. 저는 퇴근하고 교회에서 끝나고 집에 들어가서 잠자기 전 까지 최소한 다섯 번 손을 씻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벽증이 라고 그러는데 내가 수업을 끝내고 제일먼저 하는 일이 손을 씻는 것은 너무 더럽다 이런 것도 있지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누에 의해서 깨끗이 씻겨나가고 마른 수건에 물기를 털 때의 그 기쁨은 아주 상쾌하고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가글을 하루에 최소한 여덟 번에서 열 번 정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나이가 되었는데 충치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 하는 그런 자연적인 습관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보다도 어떤 도덕적인 문제를 가진 쪽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뀌냐 안 바뀌냐의 문제입니다.
영국에 로이클레맨스라는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벌써 한 18년 전 일인데 이분이 영국에서 천명이 넘는 교회에서 담임을 했습니다. 영국에서 천명이 넘는다는 것은 한국을 기준으로 한다면 천명이 아니라 최소한 8천명에서 만 명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가 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여러 권의 책을 써서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서 실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납치의 가능성과 모든 것을 생각했는데 정부와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정부가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 사람이 써 놓고 간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내 인생의 최대의 실수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결혼한 것 두 번째는 목사가 된 것 왜 그랬을까요? 대학생 때 게이였습니다. 게이였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목회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성을 날렸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잠자고 있었던 그 본성이 은혜에서 멀어지자 다시 살아나서 본래의 하트로 돌아온 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좋았던 사람은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좀 다른 사람을 덜 괴롭히고 친절하고 배려있고 이런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모두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니 못하였더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서 구원을 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고 그담에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는 이 두 긴장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이기고 은혜의 우세한 상태에서 살면 그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던 그 사랑의 마음을 유지하면서 살지만 만약에 은혜가 소량화 되고 실제적인 죄에 대한 욕망이 크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던 그 마음대로 못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기도는 이런 긴장 속에 있는 마음의 상태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15분 후에 계속하겠습니다.
아까 이야기 한 내용들을 모두 기억하면서 한 가지 소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구원 받은 신자의 상태가 그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안전하고 그리고 두 번째 구원 받은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완전히 접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완전하게 소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모를 때에는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지었는데 구원 받은 다음에는 죄를 지어도 복합의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복합의지란 인간의 의지가 두 개는 아닌데 복합적으로 의지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한쪽 마음으로는 하나님 사랑하고 선하게 살고 싶지만 또 한쪽으로는 욕심에 이끌려서 죄를 짓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두 복합적인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면 하나님을 사랑해도 하나님을 한쪽으로 사랑하려고하면 세상이 그립고 세상으로 돌진해서 미친 듯이 살아보려고 하면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단절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자신이 때로는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은 만약에 진정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낼 수 없다면 그러면 그는 실제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괴로움과 고통이 계속 가중될 뿐입니다. 그러면 해결의 방안은 오직하나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자 하는 죄의 성질이 정도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죄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죽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풍성하게 하여 그런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 –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받고 다시 타락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표준적인 해석은 어떤 말씀의 맛을 보고 신비한 경험을 하고 한 것과 그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 받은 것은 일치하지 않는 다고 보는 표준적인 해석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렇게 해서 멀리 떠났는데 그렇게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고 세상이 즐거운 사람들은 아무리 색깔은 신앙의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영혼이 변화되어 구원 받은 사람은 아니라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담에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면 이 문제는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의 자유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자유입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선택한 것을 올바른지 판단하고 내가 그렇다고 믿으면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게 자유입니다. 그 자유가 인간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자유롭게 사는 처지에서만 인간은 가치를 느낄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의 방황은 아주 간단합니다.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은 절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아니면 어쩌구저쩌구 하는 핑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가치설정을 아직 못한 것입니다. 내가 남이 준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나도 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러면 결국 여기에서 어떤 문제가 나오느냐면 그러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으면 하나님이 무엇 하려고 나를 창조하시고 무슨 일을 나를 위해 준비하셨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보 면 어떤 이상한 결과가 나오느냐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맞는데 이상하게 내 인생 같지가 않고 그럼 남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고 네가 진짜 살고 싶어서 사냐? 그건 아닌 것 같고 죽어도 살기 싫은데 사냐? 그것도 아니고 그럼 뭘까? 아무것도 정확한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자기의 주관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먹방 중 이게 좋고 저게 싫다라는 판단은 있을 수 있지만 가치를 향해서 내가 왜 그길로 가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형성하지 않으면 몇 년 있으면 여러분들 직업전선으로 내몰립니다. 돈 안 벌면 세상에서 살수가 없습니다. 장가 못갑니다. 그리고 여성들도 돈 안 벌면 많은 남성들에게 제외됩니다. 어마어마한 부자 집안이거나 진짜 무비스타들이 울고 갈 외모라면 예외입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자매님도 너무 착했습니다. 좋은 형제하고 선을 보았습니다. 예일대학 출신입니다. 잘 되가는 줄 알았습니다. 한 마디로 딱 끝났습니다. 결혼하시고 계속 직장생활 하실 거죠? 자매는 평생 꿈이 현모양처입니다. 뭘 그런 것을 해요 집에서 살림하고 애를 키워야죠! 그 담 주부터 연락이 없답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여러분들도 몇 년 있으면 그리로 내 몰립니다. 그러면 그 직업전선은 여기서 여러분들이 알바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선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회사를 섬겨야 됩니다. 그래야 존재로 남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런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그것은 온몸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부딪치는 직업의 전선에서는 너무 사치스러운 생각입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리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는데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무것도 못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5년 지나고 나면 폐인이 되던지 사회에서 완전히 낙오자가 되어서 아무대서도 안받아주고 펜을 굴리면서 먹고살자니 이미 쳐졌고 땅을 파서 먹고 살자니 그건 너무 힘듭니다. 그게 여러분들 앞에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교직과목 이수하고 어느 학교 선생으로 가느냐. 못 가느냐. 그것도 하늘의 별따기라 합니다. 어째든 그런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잘 아는 형제하나는 잘 나가는 의사였습니다. 자살했습니다. 뭐가 아쉽겠습니까? 잘나가는 의사고 젊었습니다. 잘생겼습니다. 자살했습니다. 왜?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공부는 해냈지만 자신의 마음을 자기도 어떻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는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 이라면 더 이상 나에게 다른 길은 없다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게 살면 모든 것을 이기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인생은 원래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상한 사람들 특강 들으면서 아자 하면 된다고 착가하지 마세요. 절대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인생이 꼬이는 것을 정상적으로 갔더라면 도저히 못 볼 새로운 비전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정상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갔으면 지금쯤 어느 대학에서 영문과 교수 정년퇴직했을 겁니다. 뭐가 재미있겠습니까? 지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도 없지만 주님이 얘야 너 다시 한 번 태어나볼래? 그럼 저는 주님 됐거든요? 진심으로 한번으로 충분합니다.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그럼 보세요. 나는 여러분 어떤 때는 부럽지만 어떤 때는 하나도 안 부러워요. 왜냐하면 그 시절에 너무 삶과 죽음사이에 방황을 했기 때문에 모든 젊음을 되돌려 준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늙은 채로 살고말겁니다. 보세요. 그것을 또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있는 자체가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구원 받은 사람이면 내 말을 안 받아들입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합니다. 해 보라니까요 다 해보고 마지막에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주여 옵니다. 그리고 회개를 할 것이고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면 그냥 흘러가서 무신론자가 되든지 불교신자가 되던지 이단에 빠지던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없이 나는 자연인이다 하고 살던지 넷 중에 하나 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기도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기도를 여태껏 배우면서 무엇에 초점을 맞춰서 기도를 배웠냐면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시고 안하면 못 받는다고 라고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굉장히 약간 신통스러운 분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관한 경륜은 우리가 둘째시간에 배웠지만 기본적으로 기도에 관한 경륜은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그분께로 부터만 오고 우리의 모든 좋은 것들은 그분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의식, 마음, 삶 전 방향에서 훈련시켜서 생사 간에 그분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래서 되게 성질 못된 사람들도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항상 까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께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기도안하는 사람은 자잘한 일에는 늘 순종하고 늘 착한 것 같아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는 죽어도 자기를 안 꺾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는 경륜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합니다. 처음에는 기도의 어려움이 마음을 잘 지키면서 영적인 생활을 했던 사람은 앉자마자 기도 속으로 쑥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깊이 느껴지면서 아주 말이 너무 반가운 친구를 만나면 서로 대화를 나눌 계획이 없어도 속에서 계속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밥시켜 놓고 식도록 안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똑같이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주님께 기도를 해야겠다. 이런 강론이나 강의를 통해서 기도안하면 안 되겠구나 진짜 큰일이구나. 보통일이 아니구나. 기도해야겠다. 하고 결심은 하는데 그런데 결심이 바로 우리를 기도로 데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이상하게 그리고 기도도 안 되거니와 해보려고 하면 실망이 더 큰 것입니다. 아 역시 안 되는구나 나중에 이게 반복되면서 처음에는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반성을 하는 듯 하다가 이게 계속되면 그담에 이속에서 반발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하나님은 나만 미워해 하는 마음이 생기고 기도 안 되면 난 안 하지 뭐 하고 때려 쳐버립니다. 그런데 결국은 다시 기도로 돌아옵니다. 왜냐면 살수가 없을 정도로 괴로움이 점점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신학적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기도할 때 에 하나님의 침묵은 아주 활발한 언어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면 알지만 조금 마음이 상 했을 때는 이 자식 너 왜 그랬어? 너 정말 엄마 말 안 들을래? 이렇게 야단을 칩니다. 그런데 좀 더 화가 나면 너 진짜 맞을래? 그리고 플라스틱 야구방망이나 이런 것으로 때립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을 때 엄마가 최고로 화났을 때 그 표현은 상대를 안 합니다. 말을 안 합니다. 아이는 조용히 자기 방에 있으면서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언어를 엄마한테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언제 끝날까 차라리 엄마가 열받아가지고 한번 소리나 지르고 뭘 하나 집어 던지면 훨씬 날 텐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침묵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교육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있고 없고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에이 씨 하고 때려치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잘못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깨지는 법은 없습니다. 항상 잘못하는 쪽은 나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하나님이 그러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조용히 그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자기를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하나님이 한 말씀도 안하시는데 수많은 양심의 이야기를 그 속에서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거꾸로 공격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계속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가 살아온 내 삶과 행도 그리고 내 못된 마음에 비유한다면 이정도 하나님이 나를 침묵으로 대하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반드시 나의 기도를 들으실 거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거기서 온갖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들이 들립니다. 네가 이것도 잘못했는데 기도할 수 있느냐 야 가증하다 막 이런 소리도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보여 지는 것입니다. 보혈을 지나 그 핏 길을 걸어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우리의 기도를 마음이 출렁거리지 않고 입술로 움직이는 이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으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기도는 마음에서부터 출렁거리며 우러나오는 기도 그것도 마음이 격렬하게 출렁거리면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하나님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도 격렬하게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나오는 그런 종류의 기도를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죄의 자리 신앙의 자리가 어디라고 했습니까?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죄들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 죄들을 쏟아 내버리시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외적인 행위를 아무리 고쳐도 이 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 있는 마음의 성향들은 잠재되어 있어서 아까 로이 목사님이 은혜아래 있을 때에는 옛날에 게이로 살았던 힘겨웠던 생각을 하면서 나를 이렇게 다시 이성애자로 바꾸시고 살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 한가 감격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니까 잠자던 옛 본성이 모두 살아납니다. 그래서 존 화이트는 뭐라고 표현했냐면 우리 모두 무서운 맹수를 우리의 마음속에 기르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그런 마음의 찌꺼기와 같이 쌓여 있는 것들을 확 쏟아내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 전체를 쏟아놓고 움직이는 간절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우리는 매우 불우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하는 것들은 굉장히 풍족해졌습니다. 진짜 55년 전 56년 전을 내가 추억을 해보면 열다섯 살 때 내 친구가 산다고 해서 이 사당동에 왔습니다. 우리 동네도 정말 가난한 동네였지만 어려서 들었던 생각이 어떻게 여기서 사람이 살까? 모래 위에 다 천막으로 판자로 지은 집들이고 길도 찾을 수 없고 하수도도 없는 동네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당동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심각하게 환경오염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오염된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신체는 심각할 정도로 환경물질에 오염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히 중금속 같은 것에 오염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 중 일단 들어온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들어온 것을 내버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운동입니다. 땀을 쏟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들이 땀을 쏟아내도 우리가 사우나에 들어가서 수건 놓고 누워서 꾹 참으면서 땀을 쏟아내면 그것을 받아서 화학성분을 조사해보면 거의 다 물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헬스클럽에 가서 미친 듯이 뛰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 1시간만 하면 땀이 쫙 납니다. 받아보면 다시 먹어서는 안 되는 노폐물과 중금속 덩어리가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냥 여기에 마음은 놓아두고 이속에서만 살살 기도하면 이 죄는 이속에 그대로 있으면서 터치도 안 된 상태에서 말만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절한 기도는 이 안에 있는 약화되었던 성령의 은혜를 우세하게 만들고 융성했던 죄를 소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왕성해졌고 자기 뜻대로 살고자하는 그 욕망이 거의 죽은 상태의 고백이 성경에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것이 인간이 가장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행복한 상태는 남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고 자신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그게 가장 행복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가서 누군가에게 읽어주세요. 그러면 교훈이 될 겁니다. 인간의 가장 행복한 상태는 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외롭다는 타령을 안 합니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충고했습니까? 오빠 아니면 나는 죽어 버릴 거야 그런 자매 만나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절대 결혼하면 안 됩니다. 너는 너 비슷한 애 찾아가라 나는 그냥 쿨 한 여자를 만나겠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주체성이 누구에 의해서 침탈되거나 어떤 한 사람이나 사건이 내 인생의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놓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주관이 확고하게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나누어준 강의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결정적으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크기는 다르지만 결국은 있는데 마음으로부터 간절히 지속적으로 기도 할 때에 그 죄는 쏟아내어져 점점 약화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은혜는 증대되어 죄 되신 그 은혜에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확장시켜서 쓴 책이 죄와 은혜의 지배입니다. 그 책을 페이지에서 페이지 까지 모두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데 읽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 어떤 네티즌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책을 다 읽었다 저자는 나의 다음 행동을 알고 있다 그래서 꼭 한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