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의 감사가 있기까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녹취자: 정윤미
품종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각각 다르겠지만, 언젠가 한번 주어들은 이야기로는 볍씨 한 알이 약 2,700개의 낱알을 맺는다고 합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수리적인 계산만으로는 정말 쌀농사만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한들 2,700배가 나오겠습니까? 모두가 다 잘 사는 게 아니니까 문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추수 감사절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감사는 사실 우리가 있지도 않은, 찾아낼 수도 없는 감사의 내용을 억지로 찾아내서 억지 춘향식으로 그러니까 감사하자, 감사하자 그런다고 해서 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 뿌린 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이제 당신의 마지막 때가 가까워오자 부쩍, 자주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 보니까 “인자가 들리어야 하리라” 십자가의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못 박히실 고난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시는 말씀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많은 말씀을 남기셨지만 “아멘, 아멘 네고스오”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구절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언가 당신 자신과 복음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을 암시한다고 말해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야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겠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너무나 분명한 거죠? 한 알의 밀은 당신 자신이고, 그리고, 많은 열매는 구원받은 우리들이고,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또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면,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같은 정신과 원리가 우리의 삶속에 있을 때에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적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실 우리들이 죽음이라는 것이 사실은 타락하고 나서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지만 인간의 죽음과 모든 식물과 자연세계의 있는 죽음을 같은 차원에서 보면 안 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죽음이 없었겠지만 이 모든 자연의 세계 속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맺는 것, 그런 방식으로 모든 이 세상의 식물들이나 이런 것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번성해 나갔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씨를 맺고 열매를 맺고 하는 하나님의 어떤 자연의 원리로서 이 세상에 두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실 한 알의 밀알뿐만이 아니라 쌀, 심지어는 감자 모든 것들이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씨앗을 놓고 보면, 거기에 배아가 있습니다. 씨눈이라고도 합니다. 그 눈에서 모든 생명이 움트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감자를 어떻게 심는지 아십니까? 감자를 갖다가 칼로 툭툭 쳐서 자른 다음에 재에다가 버무립니다. 재, 나무를 태운 그 고운 재에 버무리고, 그리고 심습니다. 심고, 얼마쯤 있다가, 아직 완전히 자라기 전에 한번 캐보세요, 그럼 신기한 것을 발견합니다. 막 자르면, 감자를 돌려보면, 씨눈이 여기저기에 박혀있습니다. 씨눈이 없는 조각 을을 심으면, 감자가 안나요. 감자에서 싹이 나는 것이 아니라, 씨눈에서 싹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툭툭 자르면, 갖다가 집어넣으면, 며칠 지나고 나면, 썩습니다. 감자의 몸이 썩으면서 즙을 내면서, 썩으면서 그것이 양분이 되어서, 씨눈 하나를 위해서 온전히 헌신합니다. 사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포함된 씨눈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 모든 씨가 썩어서 유기물질을 내면서 자기는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빨아들여서 양분을 삼으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움트는 원리입니다. 그렇게 움틀 때에 그렇게 2,700배의 많은 결실들을 맺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무엇이냐 하면, 정말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수확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 대박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부분이 정작 그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대박이 아니라, 대박이라는 말속에는 크게 박이 터졌다는 말도 있지만, 행운이라는 뜻도 있지만, 행운이 아닙니다. 처절하게 노력하고, 몸부림치면서 살아온 것에 대한 열매입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복은 행운 때문에 적은 수고를 했는데, 많은 열매를 걷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꿈꾸는 것 같이 즐거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자신이 그 씨를 뿌리기 위해서 한 알의 밀이 움트기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수하는 즐거움만을 누리려고 하지, 씨를 뿌리는 고통을 생각을 안 합니다. 많은 열매를 얻는 영광을 생각하지, 정말, 그 영광을 열매를 위해서 죽는 그것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그 씨눈은 살리기 위해서 자신은 모두 죽는 자기희생의 헌신이 있을 때에 추수의 깊은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선교의 역사, 기독교 사역의 역사, 신앙의 역사에서는 이 말이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본래 태생은 그렇지 않은데, 진중하고, 인내심이 있고, 너그럽고, 친잠하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오묘함이 있고, 이럴 때에 우리는 그에게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원래 타고난 성품이 그 사람과 내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성화에 게으른 사람들이 즐겨하는 변명이고, 사실은 끊임없이 죽고, 죽고, 죽고, 죽는 그러한 자기희생이 있었기 문에 그런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학문의 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학자들이라 이런 사람들의 공부하는 과정을 보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어렸을 때의 교육도 토대가 아주 잘 되었고, 그런 데에다가 읽어내는 독서량이, 물론 변명하자면, 자기네 모국어니까, 우리는 영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영원한 외국어이니까, 그런 엄청난 수고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학문의 세계에 근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사람들이 활짝 핀 국화꽃을 그리워해도, 소쩍새 우는 사연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꽃이 활짝 피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사진도 찌고, 신문에도 나고, 사람들이 칭찬도 하지만, 소쩍새가 울 때에,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죽음과 처절한 자기 헌신 속에서 몸부림 칠 때, 그것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사람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가 어디인지, 그리고, 우리가 자연적으로 어떤 이점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불리한 점을 가지 태어났는지, 상처 속에서 인생을 살아왔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다 보여주시지 않으셨지만, 우리 것들 중에서 하나님 앞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각자 각자를 당신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판단하실 때 사람의 관점하고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눈물을 흘리고 씨를 뿌려도 추수의 기쁨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로 죽으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라고 보시고, 구원받은 우리는 당신이 죽어서 살려야할 씨눈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주님이 씨눈이시고, 이제 우리는 한 알의 밀입니다. 지난번에는 주님이 죽으셔서 우리를 구하셨지만, 이제는 우리가 죽어,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이신 당신의 뜻이 이루어 질 때입니다.” 그런 고백 속에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그 큰 핍박을 받으면서,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두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하나가 종말신앙이고, 십자가 신앙입니다. 종말 신앙은 주님이 곧 오신다, 그리고, 주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세상을 건설하실 것이다. 두 번째 무엇이냐 하면, 지난번에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을 차례이다. 그 두 신앙으로 불같은 시험을 극복하면서, 말하자면, 일제 강점기의 고난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고난이 없는 복음을 원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어디에 가겠습니까? 추수 감사절을 앞두고, 마음에 깊이 새겨서 만약에 우리의 삶에 어떤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은 모든 것이 모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다음 추수를 위해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뿌리고 있는가?, 다음 배아의 생명의 움틈을 위해서 지금 나는 어느 부분을 하나님 앞에 죽음으로 받치고 있는가? 그러면, 오늘의 눈물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커다란 감격, 기쁨, 은혜, 이런 것으로 열매 맺게 되리라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