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기도하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 22:45-46)
녹취자: 김세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가 가까이 되자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관해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반복되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고를 들으면서 그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물론 하루 종일 사역으로 고단하기도 하였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고는 만찬 석상에서 더욱 분명한 어조로 들렸습니다. 육체는 연약하여 고단하고 마음은 깊은 슬픔에 기울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대속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 옴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어느 시간도 이처럼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간구하고 기도하도록 그렇게 당부하신 적이 흔치 않을 정도로 간절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깊이 잠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임박한 십자가 죽음을 온 영혼으로 받아들이시면서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건 영적인 사투를 벌이셨습니다. 그분의 간절한 기도는 땀에 피가 베이게 만드셨고, 그 땀은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모두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실 당신의 죽음과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 사이에서 벌이는 영혼의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은 확정되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도 확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전심으로 기도하시고 이제는 성경이 오래도록 예언한 바대로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끝내시고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슬픔으로 인하여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련하게 여기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한 그들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만 연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깨닫게 된 때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 보내신 성령에 의해 감화를 받을 때까지 연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예수님은 이들의 육신이 약하다는 것도 마음은 기도하기 원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정황을 깊이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찌하여 자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연약한 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지금 이 중요한 시간에 잠들어 있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제자들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성도는 기도해야 할 수많은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멀어진 성도들은 기도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기도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첫 번째로 “어찌하여 자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마음이 상해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기도를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우리가 육신이 연약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기도를 못해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이것이 어찌 육신의 잠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짐으로써 매우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어찌하여 자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잠은 육신의 잠 보다 우리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큽니다. 그냥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냥 기도하지 못한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핑계를 대지 맙시다. 이유를 대지 맙시다. 그냥 조용히 “어찌하여 네 영혼이 잠자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엎드립시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육신이 약하지만, 영혼까지 잠들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상하고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나를 에워싸지만 그것이 나의 영혼이 잠든 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아멘.
두 번째는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는 흔히 시험을 이미 은혜에서 미끄러져 죄 짓고 엎드러진 상태를 시험이라 하지만, 그런데 그것은 이미 악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험은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순종하도록 준비되지 않은 모든 상태가 시험입니다. 정신이 또렷하고 몸이 날렵한 젊은이들은 무엇을 시키면 발딱 일어나 그 일을 행합니다. 신체적인 조건도 주어져 있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고 그리고 성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마음이 거의 없고 몸도 무겁고 힘들 때에는 무엇이라 지시해도 그냥 엉덩이로 뭉그적거리고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주 힘겹게, 힘겹게 일어서지만 성의 없이 그 일을 하고 끝냅니다.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은 것이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를 더욱 깊은 시험으로 데려가고 그 시험의 끝은 우리를 넘어뜨려 죄악에 빠지게 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자느냐.”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너희는 반드시 시험에 든다는 뜻이었습니다.
(예화) 시험은 우리에게 실로 많은 것을 앗아갑니다. 최근에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산불을 통해서 수많은 이재민이 나왔고 600명이 실종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대부분 불에 타서 죽었을 것입니다. 현재 이미 난 인명 손실까지 8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화마에 삼킨바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크기로 떨어졌습니까? 아닙니다. 누군가가 실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연적인 나무들의 부딪힘 속에서 우연히 작은 불꽃이 생겼을 것이고, 그것들이 온 산맥을 두루 태우며 지금도 수많은 인명과 집들을 삼키고 있습니다.
시험은 항상 작은 것으로 시작 되서 큰 것으로 발전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큰 악에 빠지게 합니다. ‘아, 이것이 시험이었구나.’ 할 때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렇게 나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새벽에 혹은 늦은 밤에 직장 고단한 길에서 돌아오다가 교회에서 한 구석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간구하고 하나님께 아뢰는 그것, 오늘 하루 말씀을 보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으려 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그 생활이 하찮아 보이지만 불길처럼 자신을 삼킬 그 미래의 큰 시험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무슨 뜻입니까. “계속 자거라. 그러면 너희는 반드시 시험에 들 것이다.” 이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더 큰 손해를 보기 전에 주님 앞에 깨어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일어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는 우리의 영혼의 기능이 주님의 생명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생명을 충만히 받는 것은 곧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게 되는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 안에 역사하면 우리는 우리의 지성에 말씀의 빛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마음속에 없는 사람들은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거의 그것 같고 재미가 하나도 없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마음속에 역사하면 우리 지성에 불이 들어옵니다. 진리의 빛이 비칩니다. 진리의 맛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보게 됩니다.
금년처럼 단풍이 예쁘게 든 계절이 아마 최근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는 단풍이 아쉬울 정도로 얼마나 환상적으로 예쁜지 모릅니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 본 단풍보다 탁월하게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색맹인 사람의 눈에는 그 아름다운 단풍이 때 묻은 빨래를 널은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지성적으로 색맹인 사람처럼 되어서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진리의 세계가 그냥 더러운 빨래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의 지성에 빛이 들어와서 더 많이 깨닫고 싶고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빛을 사모하게 됩니다.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정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기뻐하고 죄에 대해 분노하고 더러운 자신에 대해 혐오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 희로애락! 영적인 희로애락이 분명해집니다. 예전에는 돈 조금 많으면 교만하여 기쁘고 조금 없으면 깊이 자존감이 상하고 처집니다. 조금 남이 날 알아주면 자신에게 열렬하게 박수를 치고 싶고 누군가가 자기를 몰라주면 서운함에 마음이 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을 때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희로애락을 출렁거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이제 신령한 것, 은혜의 세계에 대해 희로애락을 분명히 하며 살게 됩니다. 나와 함께 있던 내 안의 죄가 하나님의 생명이 없을 때에는 그저 그랬는데,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을 때는 그것이 너무 미워집니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줄 몰랐는데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생기면 나 같은 죄인을 이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이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의지는 선한 일을 위해서 커다란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을 때는 도저히 도전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놀랍게 도전할 수 있는 의지의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꿈도 못 꾸었던 신앙의 목표에 대해 도전하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하였던 거룩한 목표에 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그것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면 그 결과가 사랑으로 나타나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 안에서 생명이 역사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도 이겼습니다. 왜 이겼는가 하면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생명으로 역사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긴 것입니다.
(예화) 1980년 전두환 씨가 대통령을 할 때, 우연히 시작된 프로그램이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이산가족찾기>운동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의도에서 상봉하였습니다. 그때 드디어 확인을 하고 확인을 해서 어떤 30대 쯤 되어 보이는 남자분이 엄마를 찾았습니다. 엄마가 어렸을 때 이 아이를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엄마를 그렇게 그리워하다가 결국 찾았는데, 엄마를 찾았다는 기쁨과 자기를 버렸다는 분노가 한 마음 안에 공존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엄마, 그때 왜 나를 버리고 갔어?” 그랬더니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하며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울면서 하는 말이 “그래도 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잖아. 왜 날 버렸어?” 왜 버렸습니까? 왜 버렸습니까? 간단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이 아니라 자식 보다 더한 부모도 버리고 심지어 하나님도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다. 그러니 은혜를 받자.” 은혜를 받자! 왜입니까? 은혜가 없이는 우리에게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이는 우리들이 이것을 이겨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사람들은 반드시 미끄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미끄러진 속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그 결과가 얼마나 쓰디쓴지를 눈물로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깨어 있어서 주님을 찾는 것이, 오늘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세상의 근심과 수많은 시련이 내 마음을 두드리고 지나가도 내가 오늘 한 마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정말 진정한 나의 살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일어나 기도하라.” 일어나라고 하는 것은 엎드려 자고 있으니까, 엎드려 잤는지 똑바로 잤는지 본 사람은 없지만 어쨌든 앉아있는 상태가 아니고 누워있는 상태니까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단어는 저 구약성경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자연적인 동작인 ‘누웠다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 무엇인가 침체되어 있고 미끄러졌던 자리에서 결단을 하고 돌이키는 것을 동사로 ‘일어나라’고 하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수없이 많지만 두 개만 딱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하다가 패배하면서 깊은 낙담에 빠졌을 때 일어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나서 방탕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돼지우리 안에서 쥐엄 열매나 찾는 신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풍족한 집을 생각하며 탕자가 마음을 새롭게 먹습니다. 그때 “내가 일어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각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마음에 뭔가 큰 찔림이 일어난 것이 각성인데 어찌 해야 이러한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막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문이 막힙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공급되지 않도록 만들고 그 다음에 기도의 씨를 말려 버립니다. 그러면 깨어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기도 안 한 것은 안 한 것이고 못 한 것은 못 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깨달아서, ‘아, 내가 여기에 누워있을 자리가 아니고 지금은 누워있을 시간이 아니구나.’를 깊이 찔림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찾으면 언젠가 반드시 우리의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자 하는 저 밑에 있는 마음이 솟구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얼굴빛 앞에서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본성이 잠자고 있고 말씀이 그것을 두드려서 깨우는 것입니다. 그때 이제 떨치고 일어날 마음의 의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긴 세월 목회하는 동안에 열린교회 설교에 도전을 받고 자기의 키보다 더 많이 신학 책을 읽은 사람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미끄러져서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깨달은 것이 비록 그렇게까지 크지 않아도 열렬하게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도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무엇으로도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그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많은 신학지식이, 정리된 교리가, 힘에 넘치는 수고와 헌신이, 교회에서의 직분이, 이따위 것들이 기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살고 싶으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안 하면 계속 짓밟힌 채로 죽은 자 같은 삶을 살아야 될 것이니 그것이 어찌 행복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성경의 요구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