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구문회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배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해서 생겨난 것이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명한 영적 지도자들이 기도하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관습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요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기도하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하는 자세를 이야기한다기 보다 기도의 내용도 함께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유서 깊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그 배경을 다루고 있는 1절에서 4가지 교훈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께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주체가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본체상 하나님이신 분이였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기도하셨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하나님이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를 한단 말입니까? 기도는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간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기도 속에서 죄가 있는 사람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빕니다. 그 응답은 그에게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 능력이 없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깨지지 않고 항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주셔서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기도는) 자신에게 없는 것, 자신이 못하는 무엇 때문에 자기보다 높은 신께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까요? 능력이 모자라셨습니까? 아니면 죄가 있으셨습니까?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그분이 무엇 때문에 기도하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기도하신 장면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생생하게 수많은 장면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것이) 누가복음을 기도의 복음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기도하셨을까요?
그분은 비록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첫째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이신 그분은 죽을 수가 없고 죽을 수가 없다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죽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그는 죄가 없으십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죄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었고 간접적으로 전개되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 뒤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종종 하나님이 음성으로 들려주시기도 했지만 그것은 매우 희귀한 것이었고 그렇게 더듬듯이 하나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그리고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에 대해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사람으로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우시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덜어내어 버려 하나님 아닌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 아래 감추시고 하나님이시면서도 스스로 인간이기를 자처하셔서 죄는 없으시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한 것에 자신을 스스로 복종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셨기에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셨고 먼길을 걸으면 피곤하셨고 잡수지 않으면 시장하신 그런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기도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감추시고 인간의 성품을 짊어지시므로 죄는 없으셨지만 모든 인간의 연약함을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가장 연약한 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던 이유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으신 완전한 사람이심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면 예수님과는 달리 죄가 많은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실 수 있었고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그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만큼 능력이 없는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다른 때와 다른, 다른 때와 꼭 같지 않은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어느 때에(든) 어느 곳에서(든) 주님의 이름을 부르던지 그 주님께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또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예전에 비해 많이 기도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1980년대 초만 해도 금요일이 되면 서울 인근에 있는 웬만한 산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들어서 산기도 때문에 온 산을 기도 소리로 울렸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주 편안한 신앙생활을 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부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만큼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으로 우리의 정신의 진액을 낭비해 버려서, 우리는 많이(오래) 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시간은 극히 작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첫 번째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할까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연약해도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늘 뜻을 이루십니다. 그는 너무나 하찮고 힘이 없지만 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작은 음성에 귀를 기울이셔서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한 곳에서”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신약성경이 기록된 그리스어 성경에는 ‘엔 토포 티니’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어떤 장소에서’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그 장소가 특정할 수 없는 장소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in a certain place’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떤 장소에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정처 없는 생애였습니다. 주거지가 일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것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유대로부터 갈릴리 지방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유대인들이 다니기를 기피했던 사마리아까지 다니시면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정처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환경이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기도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 주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직 주님을 못 만나서 까불고 다니다가 아이가 점점 자라고 나면 대학에 가기 위해 그렇게 불철주야 공부합니다. 공부에 몰입하느라고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대학 들어간 다음에는 시간이 좀 나지만 대학 들어가고 나면 활짝 꽃 핀 젊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은 뒤로 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졸업할 때 쯤 되면 입학 문보다도 더 치열하다는 취업의 문을 뚫기 위해서 시간이 없습니다. 취업을 하고 나면 정신없이 일이 쏟아지고, 결혼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하면 결혼의 재미에 빠져서,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두엇 낳고 나면 그 아이들을 양육하는 재정적인 기여를 하기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돈을 버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크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이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온 노고를 다 쓰고,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면 그 아이들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아이들이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봐달라고 하고, 이제 손주들까지 다 키워서 해방됐는가 했더니 이제는 육체의 죽음의 기운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기억력도 희미해지고, 교회에서 일을 해달라고 부르지 않는 나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결국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골몰하느라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기회가 없이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보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적으로 열심을 내고 결단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렇게 그런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영원히 가슴에 새겨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홈그라운드에서 이루어지는 경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만 명의 자국 관중들이 스타디움을 가득 메우고 상대편 선수에게는 야유를 보내고 우리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지고 우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홈그라운드 경기의 이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홈그라운드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환경이 저절로 우리를 기도하도록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환경을 끊임없이 이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자기 원하는 대로 되는 것 같을 때, 넘어질까 조심하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근심과 염려로 우리의 마음을 휩싸일 때 우리는 그 인생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중심을 쏟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에 어떠한 이유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면 언제쯤 기도할 수 있게 될까요? 그런 때는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그 어려운 시련의 시기를 지냈을까’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기치 못하던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손이 매우 특별했기 때문에 지금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그때에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이기며 믿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든 환경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의 핑계를 대는 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은혜를 예비하시고 그 어려움 속에서 당신을 찾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어찌할 수 없다고 우리의 정신의 맥을 놓고 나면 자신이 한없이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연민 속에서 자신은 시름에 잠겨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에 있는 모든 힘을 앗아가 버립니다. 살아 있으나 알고 있으나 움직일 수 없이 온몸이 나른해 질 때가 있으시죠? 그렇게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냐면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마음대로 안 됩니다. 만약에 그 인생이 여러분 마음대로 되었다면 여러분은 절대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마음대로 안돼서 죽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도하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환경과 타협하지 않고 기도로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세 번째는 “마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한곳에서 기도하고 “마치시매”라고 했는데 이 “마치시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가 ‘에파오 사토’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 ‘샤바트’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치어입니다. 그 단어가 바로 ‘쉬다’라는 뜻이고 샤바쓰[shabbath]라고 하는 안식일이 바로 그 히브리어 단어에서 옵니다. 저는 한 30년 전 교수 생활하던 젊은 시절에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아주 짧은 기도가 아니라 아주 긴 시간의 기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매” (그렇게 표현했는데) 기도하시기를 쉬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것을 재구성해 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하며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깊은 밤까지 환자들이 몰려왔을 수도 있고, 그 사람들을 일일이 기도해서 보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을 것입니다. 9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더니 예수님은 저 멀리 한적한 곳에 가셔서 거기서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거룩함,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는 간절한 기도의 모습을 봬오면서 제자들은 감히 그 기도를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드디어 기도를 끝내셨고, 예수님은 몸과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로 지친 몸을 잠시 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집중적으로 기도하신 시간은 새벽과 깊은 밤이었습니다. 새벽 아직 동이 트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심으로 하루를 여셨고, 모든 사람들이 없는 밤 시간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거기에는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낮 시간에(는) 환자들이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하는 사람들이 쉼 없이 밀려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없는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도는 해야 할 모든 일을 감당하며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거룩한 사명인 것입니다. 직장 다니시는 분들은 직장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고, 가정을 돌보시는 분은 그 가정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다 감당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짧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11세기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책에 보면 이러한 희화한 장면이 나옵니다. 한 주교가 “하나님”하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는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를 쳐다보고 사람이 없으면 기도를 끝내고 사람이 있으면 더욱 큰 소리로 주님을 불렀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하고 부르짖는데 하늘 문이 열리더니 “그래, 네가 나를 불렀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겁니다. (그러자 그 주교가)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어떻게 내가 부른다고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나‘라고 너무 놀래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대화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무슨 뜻을 가지고 계신지 마음을 기울여서 그분의 생각을 깨닫는 시간이 기도 시간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는 항상 같이 갑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깨닫지 않으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한 채 드리는) 기도는 형식에 흐르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과는 상관이 없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기회들을 주십니다. 전도할 기회, 은혜 받을 기회,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를 받을 기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쇄신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한 변곡점이 되는 기도의 기회마다, 변화의 기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를 원하십니다.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깊은 기도가 되어야 하고 깊은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가 시간을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중전화 하는 것 같은 기도가 아니라 정말 대화 하는 것 같은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짧은 기도를 드렸는데도 기적적인 응답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여호수아의 기도였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나안 원주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쫓겨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이스라엘 민족은 익숙한 지형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끝까지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태양은 멈추고 달도 거기에 그냥 있어라’라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되어서 결국은 적들을 섬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께서도 병든 자를 명령하여 고치셨는데 이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을 내어 쫓기도 하고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하였는데 이 역시 짧은 시간의 기도로 일어나는 크고 위대한 일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짧은 기도였지만 큰 능력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한번 그렇게 간절히 짧은 기도 속에 어마어마한 응답을 받아보려고 시도해보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할 것은 성경에서 이렇게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내렸던 모든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긴 기도 속에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긴 기도 속에서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동안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들이 되었고, 그의 마음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좇는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짧은 기도로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기도는 가벼운 영성의 특징입니다. 긴 모든 기도가 깊은 기도는 아니지만, 깊은 기도는 반드시 긴 시간의 기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보냈는가에 의해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가 달라지게 되고,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의 깊이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낙심해야 할 바로 그 시간에 그 길고 간절하고 깊은 기도는 그 (기도)로 말미암아 그(신자)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좌절해야 할 시간에 희망을 갖게 만들어 주고, 꺾여야 할 그 시간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 안하고 살다가 정말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평소에 체력을 잘 기른 사람들이 체력의 한계를 넘는 일에 도전할 수 있지 평소에 체력 관리가 안 된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만약에 평안하다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드디어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평안한 때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시련을 겪고 있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련을 만나서 그 시련이 점점 더 큰 힘이 되어 여러분들을 엄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능력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장시간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감화력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뵈오며 제자들은 간절히 기도를 그분께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큰 사업을 하고 돈을 많이 번다고 칩시다. 여러분 자신이 그것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칩시다. 어차피 나이가 들면 그것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만두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일궈 놓은 업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어도 악마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있고, 죄 가운데 쓰려져도 주님의 마음에 돌아가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여러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여러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누구라고 기억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인 여러분을 여러분의 자녀가 누구라고 기억하겠습니까? 아빠인 여러분을 여러분의 자녀들이 (또한 여러분의) 교우들이 누구라고 기억하기를 원하십니까?
(찬양)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이제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그런 사람들로 기억되셔야 합니다. 우리 엄마가 비록 한 시대를 휘어잡은 여걸은 아니었지만 조용히 그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성경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며 기도하셨던 분이라는 사실이 생각난다면 그는 훌륭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아빠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바쁘고 돈 때문에 정신이 쏙 빠져서 살던 사람, 죽는 순간까지 세상 근심과 걱정을 끌어안고 쓰러질 듯이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아야 합니다. 때로는 시련을 만나고 고난을 겪었지만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사람, 그래서 언제나 그 마음에 기도의 샘물이 흐르던 사람, 그런 아빠로 기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긴 기도가 반드시 깊은 기도는 아니지만 깊은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기도 속에 쏟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화롭게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기도의 감화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들을 보며 기도생활 없이 신앙생활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보면서 기도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여러분들로부터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상 최대의 기도의 스승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의 생애 전체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땀의 생애였고, 눈물의 생애였고, 마지막(으로) 피의 생애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은 흠 없는 당신의 아들이셨으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를 쏟아 붓는 기도가 있고난 후에야 그의 십자가의 피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자신 전부를 주어서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당신이 땀을 흘리시므로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셨고, 눈물을 흘리시므로 죄인들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셨으며, 마지막 자신의 육체를 깨뜨려 우리를 위한 보배 피를 흘려주심으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고 다시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 분이셨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는 제자들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기도에 게을렀던 사람에게는 회개의 눈물을, 고난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할 소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로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많이 더 간절히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쏟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열매를 거둘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의 열매이든 혹은 선교의 열매이든 우리의 또 다른 사역의 열매이든지 우리는 우리의 삶을 기도의 눈물로 적시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간구의 피로 적실 때 그때에 더 많은 열매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 앞에 드러나 보여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엑스트라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을 쏟아 부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이 그 주인공을 사용하셔서 사람이 포기하는 지점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을 보게 만들어주십니다. 쓰러질 그 곳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게 만드시고, 죽음을 생각해야 할 그 절박한 순간에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뿌리가 잘려 잠시 무성한 것 같으나 시드는 벤 풀과 같은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뿌리를 시냇가 밑바닥에 박고 끊임없이 생명의 기운을 머금는, 그래서 가물지라도 잎이 무성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삶을 사시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 앞에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 충만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