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 장주은
제가 34살의 나이에 신학대학교 교수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때나 이때나 늘 바쁜데 아침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한 4시쯤 되면 수업이 모두 끝나는데 야간 학생들이 6시부터 수업을 시작할 때 한 2시간 동안 학교가 조용합니다. 그때마다 연구실에 앉아서 성경을 천천히 정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 연구실이 아주 작긴 했지만 바로 산 아래 있어서 아주 공기가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1장 1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11장 1절을 세 시간 반 동안 읽었습니다. 오늘 사회자가 봉독해주신 11장 1절을 말입니다. 그때 저는 아주 생애적으로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았고 그래서 11장 1절을 교회에 와서 한 달 동안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한 달 동안에 했던 내용을 전부 요약해서 한 40분 동안 여러분에게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요한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이다.’ 인간의 영혼이 아름다울 때가 두 번이 있는데 한 번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는 순간이고 또 한 번은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하는 순간입니다. 그 때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벽하게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냄새도 좋고 그 사람의 목소리도 듣기 좋고 그 사람의 하는 행동을 보고 있는 것도 즐겁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이 누가복음은 기도 복음이라고 할 정도로 누가는 기도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중 기도하시던 장면,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 중 기도하면서 예수님께 나아오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차 있는 복음서가 바로 이 누가복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주기도문이 나오는데 이 주기도문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느냐 하는 역사적인 맥락을 보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하신 그 예수님을 제자들이 찾아갔더니 예수님이 여전히 기도하고 계셨고 그래서 기도를 마친 후에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했더니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아마 신약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를 세운다, 혹은 우리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을 살아간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 지를 완벽하게 가르쳐주시고 당신 자신이 몸소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에는 바로 그것이 그 당시 예수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초대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바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 주기도문은 매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기도문만 제대로 공부를 해도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고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주기도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람들이 읽긴 읽는데 다른 게으름이나 이런 책에 비해서, 게으름은 한 40만 명이 샀거든요 주기도문은 어렵다고 많이 안삽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스타크래프트나 리니지 같은 게임을 하는데 초등학생 보니까 게임 배우는 책이 스타크래프트가 500페이지 짜리였습니다. 그걸 초등학생들이 다 외우고 부산 내려가면 애들이 일본어를 유창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 만화를 원전으로 보려고. 초등학교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합니다. 그러니까 좋아하지 않으니까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이라고 제가 쓴 책을 꼭 한번 읽어보십시오. 꼼꼼하게 읽어보십시오.
그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해야 할 내용의 전부가 아니라 패턴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 간구, 우리를 위한 간구, 송영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그런 기도를 예수님이 왜 어떻게 가르쳐 주시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보면 ‘예수께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이 하늘에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지만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실 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는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속에 당신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모순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평생을 기도의 생애를 사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는 완전한 사람의 성품과 완전한 하나님의 성품이 있었는데 이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 저 아래에 감추시고 스스로 죄는 없으시지만 인간의 한계를 짊어지시기로 스스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는 분이지만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모르시는 것이 있는 분이고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분이었지만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이 무엇인지를 배워 가셨던 분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 인간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참 사람이 누구인지를 인간에게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순종하며 살아야 할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만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실 때에 보여주셨던 삶과 인격까지 모두 복음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시는 공생애 동안에 끊임없이 헌신하셨던 삶이 기도의 삶이었고 그 기도가 간절히 행해질 때마다 구속사의 위대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부터 시작해서 그가 광야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 그리고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해서 열 두 사도를 세우신 것, 이런 모든 중요한 구속사적인 사건들이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면 예수님보다 능력이 모자라고 예수님같이 하나님도 아닌 예수님처럼 완전한 인간도 못되는 죄인들인 우리는 얼마나 기도해야 될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매일매일 목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위대함은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데에, 혹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안 일어나게 하는 데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위대한 힘은 내 마음대로 전개되지 않는 삶의 사태들을 직면하면서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내 마음대로 삶이 전개되지 않을 때 도대체 그 안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으면서 삶의 사태가 내 마음대로 되고 안 되고 와는 상관없이 변함없이 우리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는데 이바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오늘날 집안에 아이들이 하나나 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아이들에게 부모가 뭐라고 가르치냐 하면 잘 될거야, 그리고 세상은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야, 그렇게 가르칩니다. 교육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유치원만 들어가 봐도 마음대로 세상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 유치원 아줌마들이 막 쥐어 팹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좋은 사람도 물론 많이 있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현실이 솔직히 얘기해서 하루를 살아도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보다는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것이 많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삶이 전개되지 않을 때에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괴로움이 엄습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는 것은 인생에 자기주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든 현실들을 소화해 내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속에서 아주 깊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해 가면서 고난과 시련을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아가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들 속에서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묵상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기 인생에 대한 해석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때마다 그런 모든 현실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고 주님을 붙듭니다, 라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이 집약되어서 그대로 표현되는 그 행위가 기도입니다. 그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그랬습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해주는 기도, 중보기도라고 하는데 중보기도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적합하지 않고 섬김 기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해주는 섬김 기도는 많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누구를 위해 기도해주면 놀라운 기도의 증거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남을 위한 섬기는 기도의 놀라운 힘이 있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면 그 능력은 무시할 수 없는 능력이 되지만 그러나 진정한 기도의 능력은 그런 기도를 받는 사람 자신이 기도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남이 여러분을 위해 아무리 많이 기도해 줘도 그것이 여러분 자신이 기도를 게을리 할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몸소 자신이 직접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왔을 때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이 지저분하고 더러운 땅에 와서 건강이 얼마나 안 좋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한국은 지저분한 땅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테니스를 땀을 뻘뻘 흘리며 쳤습니다. 그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서 예수 믿은 양반이 갓을 쓰고 나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선교사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슨 일이냐고 뛰어오니까 아주 안쓰러운 듯이 말하더랍니다. ‘선교사님, 그렇게 힘들게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그러십니까. 그런 테니스는 아랫것들 시키시지.’ 아랫것들 시키면 운동이 되느냐고요. 자기가 직접 해야지 운동이 되지. 계속 나오는 배를 만지면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다이어트 약품 광고 아무리 찾아보고 있어봐야 그 그림에 나오는 여자처럼 그렇게 날씬한 사람이 안 됩니다. 자기가 덜 먹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십니까. 아멘 해야지. 자기가 직접 해야지, 직접. 기도도 자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생애 전체가 기도하기에 적합한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많은 종교의 문을 열었던 사람들처럼 속세를 떠나 한적한 자연에 계시며 여유자적하시며 시간을 가지셨던 분이 아닙니다. 공생애가 시작되었던 때부터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는 날까지 끊임없이 사람들 속에 사셨고 핍박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직접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기도하셔서 모본을 보여주셨으니 여러분도 직접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기도가 환경을 이긴 기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한 곳’이라는 말이 희랍어 성경에 ‘토포티니’라고 나오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곳에서,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in a certain place 라고 나옵니다. 이 말이 주는 암시가 굉장히 큽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기도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집이 근처이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서 일하거나 학교 다니다가도 저녁때는 같은 곳에서 와서 자고, 그렇기 때문에 이른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의 주거지는 어디였을까요? 예수님의 생애는 전체가 끊임없이 여행하던 생애였습니다. 유다 뿐만 아니라 저 위 갈릴리, 그 사이 사마리아를 비롯해서 내륙과 해변, 강변을 두루 다니면서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곤고한 사람들을 상담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다양하게 나옵니다. 어느 곳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를 산이라고 가리키고 어느 곳에서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를 강이라고 가르치고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를 광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끊임없이 안정적이지 않고 여행하고 끊임없이 다니시는 생애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은 여행을 할 때에 많이 흔들립니다. 저도 오늘 영국 목회자를 위해서 세미나를 떠나는데 가다보면 밤낮이 바뀝니다. 기도의 리듬이 깨지기가 쉽습니다. 환경에 의해서 아주 쉽게 우리가 굴복합니다. 예수님은 이곳이 어디였는지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기도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환경이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생애 전체를 돌아볼 때에 환경이 우리를 기도하도록 도와주는 때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쁘고 일이 많기 때문에 기도를 못한다고 하지만 한가하고 시간이 많을 적에는 마음이 게을러지고 부패해서 기도할 욕망을 못 느낍니다. 아마 여러분도 굉장히 일이 많고 아주 바쁘고 심지어는 육체적으로도 질병이 있어서 고통스러웠는데 많은 시간을 기도에 헌신한 기억이 날 것입니다. 환경은 기도하도록 도와주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가득히 있으니까 언제나 그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 속에서도 기도의 헌신을 놓치지 않으셨던 이유는 예수님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지 환경이 도와주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환경이 우리의 기도를 안도와준다고 칩시다. 원래 우리 인생은 그런 것입니다. 솔직히 이 세상에 모든 여건이 좋아졌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힘들 때에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하지만 돈 많고 사업 잘되고 건강하고 애들이 속 썩이지 않을 때에는 마음이 부유해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패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되고 모든 일이 좋은 일만 일어나는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을 이겨내는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하는 것이라.’ 거기서 씨름이라는 말이 희랍어로 ‘팔레’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손에 쇠붙이가 달린 가죽장갑을 끼고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격투기입니다. 한가하게 공을 가지고 재미로 노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때려서 죽이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격투기입니다. 노예들이 하던 격투기 싸움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본질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이 세상살이가 우리 신앙에 도움을 안주는 것 같다, 참 세상살이가 힘들어서 신앙생활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원래 이런 것이다. 우리가 부름 받은 신앙생활은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싸우는 것이다.
축구 경기에 홈경기가 있고 어웨이 경기가 있습니다. 홈경기는 자기들을 좋아하는 고국의 팬들에게 수만 명에게 에워싸여서 박수를 받으면서 경기를 합니다. 힘이 납니다. 어웨이 경기를 갑니다. 스타디움을 메운 5,6만 명의 사람들이 모두 다 자신의 상대방을 응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공을 몰고 잘 달려가면 우우 하는 야유소리가 막 들려옵니다. 그 때에 받는 압박감, 심지어 골을 넣으면 방석도 집어던지고 병도 집어던지고 하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어웨이 경기의 설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홈경기가 아니라 어웨이 경기입니다.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을 만나고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만나게 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이 원래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 이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리차드 벡스터가 말했듯이 성도의 영원한 안식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환경을 끊임없이 극복하고 이기면서 믿음으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세 번째는 이 성경구절이 예수님의 기도시간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 시간이 언제였을까. 성경 본문은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시간이 아침시간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은 대개 새벽 미명과 그리고 깊은 밤중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도 보면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빈들에 나아가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세울 때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고 보도합니다.
어느 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새벽에 기도하셔서 이런 고달픈 전통을 우리에게 만들어 놓으셨을까. 외국에 가면 두 번 깹니다. 여기 새벽시간에 깨고, 거기 새벽시간에는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이게 몸에 죽 배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런 고달픈, 새벽기도를 안 하려고 하면 예수님이 새벽기도 하신 것을 항상 대면서 우리를 족칩니다. 그러니까 왜 예수님은 이런 나쁜 전통을 만들어 놓으셨을까. 분명히 거기에는 뭔가 심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 조사를 하다가 포기를 하고 아무 뜻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새벽과 밤중에 기도하셨을까요? 낮에는 일하셔야 하니까. 간단한 것입니다. 병 고침 받으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얘들아, 오늘은 안 되겠다. 내가 기도를 해야 되겠다.’ 그리고 올라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를 다 고치신 다음에 그 사람들 들어가서 잘 때 기도하러 가셨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그들이 아직 자고 있을 때에 빈들에 가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본문은 이런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딘가를 여행하셨습니다. 그 전날도 밤늦게까지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피곤했을 것입니다. 들어가서 잤습니다. 제자들이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가셨냐? 아 기도하러 가셨나보다. 그리고 막 찾아다녔더니 예수님이 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감히 말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깊은 영적인 분위기 속에서 당신을 헌신하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가 끝나셨을 때에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랬는데 마치시매 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에파오사토’입니다. 이 단어의 희브리어 동치어가 ‘샤바트’고 이것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 쉬셨다 라고 할 때의 그 단어이고 여기에서 영어의 ‘the Sabbath day’ 안식일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기도하고 마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안식하시매 이렇게 번역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예수님의 기도가 간단한 전화통화 같은 기도가 아니라 새벽 미명에서부터 아침 햇살이 퍼질 때까지 장시간동안 당신 자신을 쏟아 부으신 기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기도는 길이보다도 능력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짧은 기도로 큰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예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자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날이 어두워지고 그 원주민들을 추격하고 있을 때에 달을 향해 달아 너 거기 멈춰라, 그렇게 명령합니다. 해에 대해서도 명령합니다. 낮의 시간의 길이가 길어집니다. 이것은 하나의 변형된 기도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을 비롯해서 열두 사도들이 병든 자를 고칠 때에도 이런 변형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틀어 볼 때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불러 내렸던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거의 기도하지 않다가 자기가 필요할 때 이렇게 짧은 기도를 드려서 응답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짧은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불러 내렸던 사람들은 평소에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치며 헌신했던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깊이는 기도의 시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 시간의 길이는 깊이를 보장하지 않지만 깊은 기도는 반드시 긴 시간의 기도를 요구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러실 것입니다. 기도가 잘되고 은혜가 있을 때에는 잠깐 기도하고 일어났는데 어 세 시간이나 흘렀구나, 두 시간이 지나가버렸네,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굉장히 긴 시간을 기도한 것 같은데 3분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벽기도라고 해서 나오긴 하는데 기도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많이 기도하다 가지만 기도의 은혜가 없으면 오는 것까지는 하는데 기도는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는데 600명 정도 모이던 교회였는데 한 400명이 모였습니다. 엄청나게 모인 것입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그 정도로 모여보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두 번 놀랐습니다. 어쩜 그렇게 교회의 방침에 순종하고 새벽에 모이는가에 한번 놀라고 저 평택, 심지어 대전에서도 차를 몰로 새벽기도를 참석하러 왔습니다. 새벽기도 하면 그냥 하다가 가면 되는데 왜 또 여전도 회원들은 그 추운 새벽에 한복을 입고 와서 길에서부터 안내를 하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갑니다. 자기가 늘 다니던 교회인데 뭘 한복을 입고 안내를 받습니까. 그게 놀라웠습니다. 예배시간에 거의 잠자는 교회에 이렇게 새벽기도회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구나, 해서 놀랐고 두 번째는 이제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빨리 모든 사람들이 가버리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15분 만에 눈을 떴는데 거의 사람이 없습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모으게 하는 것은 주님의 도움 없이 가능하지만 사람들을 눈물 흘리며 기도하게 하는 것은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기도를 평소에 하나님 앞에 즐겨하던 사람들이 교회에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고단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나이가 30밖에 안되셨을 때에 사람들이 뭐라고 말했냐하면 ‘50도 채 안됐는데’ 얼마나 고단한 생애를 사셨으며 나이 30의 청년을 50된 사람으로 보았겠습니까? 그런 고단한 생애를 사시면서 예수님은 죄는 없지만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물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고 식사하지 않으시면 배고프신 그런 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싸워 이기면서 하나님 앞에 당신 자신을 드리는 기도 속에서 사셨던 것입니다.
(찬양)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마다 주님도 나와 꼭 같은 환경 속에서 이 모든 괴로움들을 감당하며 아버지께 기도하셨구나, 그리고 예수의 그 고난과 아픔이 자신 속에 침투해 들어오도록 그렇게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핑계대고 여건을 이유로 드는 사람들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독수리가 날개를 치는 것처럼 세상은 그러해도 나는 이 모든 것을 떨치고 우리 주님께 나아갈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이 배우고 싶은 모본이었습니다. 아까 우리 목사님이 저에게 공부를 배웠다고 하셨는데 진짜 제가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요새는 그냥 힘들어서 한 그룹 정도 가르치는데 주일날 오후예배까지 다 설교하고 거의 초죽음이 돼서 들어가서 월요일 날 아침 7시부터 나와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중세 철학사부터 해서 마지막 개혁신학까지 가르칩니다. 온 몸이 파짠지가 되는 것처럼 힘듭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의 날은 잠깐 피었다가 지는 꽃잎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고 교회가 이 세상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시기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시기 동안이 바로 낮인 시간이고 우리가 일하여야 할 시간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바쳐서 헌신해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배우고 싶은 스승과 같은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신앙생활하면서 살 것 아닙니까?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요? 칭찬해주고 싶은 사람들은 이렇게 애기를 업고 나온 자모들인데 참 훌륭합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줄까요? 지금처럼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분이 언젠가 그 여러분의 자녀가 이렇게 여러분을 돌아가신 후에 이런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요?
(찬양)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저는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런 어머니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늘 성경을 읽으며 눈물 흘리시는 모습, 자녀인 우리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시는 모습, 그런 모습이 그리웠습니다. 결국은 모든 부모님들을 다 예수 믿게 만들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항상 영적으로는 제가 부모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서 정말 배우고 싶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진짜 기독교 신앙이 훌륭한 사람들은 그를 보고 기도를 배우고 싶은 기도의 제자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지식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가르칠 수 있고 잘 가르치면 사람들은 와서 배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정말 위대한 스승은 기도의 스승입니다. 나는 오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위대한 설교자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위대한 기도자가 되고 싶으냐고 물을 때 나는 3초도 망설이지 아니하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왜? 설교자는 기껏해야 사람을 움직이지만 위대한 기도자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의 시간을 갖고 인생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