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깨어 있으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 (눅 21:34-36)
녹취자: 이병두
말세에 교훈들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결론 부분으로 장차 올 이 모든 일들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너희는 기도하며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올 일들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함께 도입되는 심판이고, 그 일이 있기 전에 난리와 환란의 소문이 있고 많은 징조들이 나타나 삶의 기반들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외적인 환란과 난리의 소문들,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심판으로 향하여 다가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오면 마음이 둔하여져서 자신이 무감각하게 되고, 안일과 방탕에 흐르게 되기 때문에 이런 위험이 찾아오는 것이기에 이것이 내적인 위험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결국 우리의 외적인 삶과 우리의 내면의 신앙이 함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어려운 신앙생활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처처에 기근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는 이 시대를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셨던 두 번째 내적인 어려움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옛날과는 비교되지 않는 빠른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고, 그 어는 때보다도 아주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달려가니까 나도 달려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높아진 생활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것이 꼭 그래야 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제 신문을 보니까 양가의 결혼하는 사람들이 양가의 재산을 모두 합쳐서 10억이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약 20%의 사람들이 호텔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들어가는 예식 비용은 평균 두 사람의 일 년치 연봉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혼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거기에 소개된 어떤 사람은 남자가 공인회계사인데 결혼식장을 호텔로 잡아서 예식을 하는 당일에만 9,000만원을 썼답니다. 그 돈을 모두 대출을 받아서 결혼식을 했는데, 결국 결혼한 후에 그 대출금의 이자를 어떻게 갚느냐를 가지고 아내와 다투다가 결국은 이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남자가 ‘비록 결혼식 비용 때문에 이혼을 했지만, 만약에 다시 결혼을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첫 번째 결혼이라면 그래도 호텔에서 해야 되겠다.‘ 라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그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남들이 누리기 있기 때문에, 나도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 속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협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나 철학이나 모든 것이 인간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오띠움’이라고 하는 여유가 있어야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지 신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여유라는 것이 참 미묘합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고 한가롭고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을 때에는 오히려 여유가 없다가도, 큰 환란과 시련을 만나서 고통을 받고 죽음의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되면, 아주 놀랍게 여유가 생깁니다. 그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신앙을 발견 하려고 하고, 인생의 의미를 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여유가 준비된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성경에서 ‘심령이 가난한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이렇게 치열한 경쟁 속에 내몰리면서 그 어느 때 보다 분주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 속에서 우리가 우리자신을 바라보는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필요한데, 다시 말해 우리가 주관적으로 마음이 이끌리고 충동 받는 대로 살면서, 왜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이런 주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객관성이 필요합니다. 그런 객관성을 확보해 주는 은혜의 수단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객관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좀 더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객관성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나는 언제나 나의 편이고,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옳고, 그리고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성령이 조명하십니다. 이때 비로소 그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객관적인 것이 아주 잘 극단화 되었을 때, 거기에서 회개가 나오고, 거기에서 자기 배반이 나오고, 자기 심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를 버리는 하나의 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맨 처음에 기도할 때는 어쩌면 주관성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만 억울합니다. 나만 괴롭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인간들은 모두 나쁜 인간들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복수해 주십시오. 내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육정에 사로잡힌 기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부르짖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는 수단이기 때문에, 어는 순간에 가서는 자신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 안목을 이 기도 속에서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도 참 놀랍지만, 기도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섭섭하고, 혹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한을 품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자기가 사랑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사실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남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고하다가 ‘너의 모습을 보아라’라고 주님의 감동을 받고, 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로하고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를 책망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돌이키게 되지 않습니까? 기도는 이미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재생시키는 아주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잘 깨달아도 깨달은바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으면, 그 깨달은 것이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마음으로 열 번을 기도하는 것 보다는, 깨달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훨씬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바꾸는 놀라운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될수록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제도 인턴십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소위 이야기해서 개혁신학을 한다고 그러는데 가서 설교를 하면, 그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이상은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는 참 이상적이고 나무랄 것이 없고 또 어떤 점에서 본받을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마치 밀가루 반죽 할 때에 물을 덜 넣은 것처럼, 그렇게 푸석거리고, 가까스로 뭉쳐 놓았는데 툭 건드리면 우르르 부서지는 것입니다. 물을 충분히 넣고 치대서 이 가루들이 함께 엉겨 붙어야 되는데, 물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힘껏 만지면 뭉쳐있는 것 같은데, 툭 치면 우르르 부셔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푸석푸석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개혁주의하는 교회들이나 개혁주의를 파수하고 있는 교회들은 있는데, 거의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 비근한 예 가운데 하나가 우리 유해무 교수의 지도교수였던 ‘깜푸하우젠’이라는 그 학자가 있습니다. 몇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12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그 전전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명한 교회의 역사신학자이자 교회신학자였습니다. 그분이 한국에 오셔서 6개월 동안 머무셨습니다. 6개월 동안 한국을 보셨으면 얼마나 보셨겠습니까? 그는 한국 교회를 쭉 돌아보시고 책도 한권 쓰셨습니다. 다른 내용들은 제가 잘 모르겠는데 한 가지에 대해서는 깊이 동의가 안되었습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는 너무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이 한다는 표현이 긍정적이고 본받아야 할 그런 의미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어 좀 이상하다.’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하는 그런 투였습니다.
그것이 사실 오늘날 개혁신학의 ‘spirituality’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란만이 아니라 미국도 그렇습니다. 오죽했으면 지난번에 우리교회에 왔던 한명수 전도사는 캘빈 신학교에서 그래도 기도를 많이 하는 학생입니다. 오죽했으면 CRC 지도자를 만나서 “이 CRC 교단의 교리는 개혁주의적인데 왜 그렇게 기도를 안합니까?”라고 하니까 그 교계 지도자가 답변을 못했다고 합니다. 어는 정도인가 하면, ‘이제는 꼭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하겠는가? 그냥 개혁신학을 믿고, 그 말씀대로 착하게 본이 되게 살아가면 되지.’ 하면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물려준 그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의 영이나 정신, 이런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전통과 어떤 역사로서의 개혁주의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화란사람이나 미국사람들의 개혁신학의 ‘spirituality’를 조금도 깎아내리거나 훼손하고자는 하는 뜻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만큼 세월이 아주 오래 흐르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개혁주의 영성 그 자체가 간절한 기도가 동반된 그 ‘spirituality’였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를 우리들이 잊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자꾸 주어지면 그것에 대한 간절한 욕구도 유지되지만, 아예 주어지지 않으면 욕구 자체가 퇴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인 것입니다.
(예화) 아이들이 어려서 한번 사탕 맛을 보고 나면, 미칠 것처럼 사탕을 원합니다. 우리 이슬이도 두 살 때인가 처음 아이스크림을 사줬는데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부라보콘 하나를 사줬더니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을 본 것입니다. 그러더니 이것을 들고 커튼 창문 쪽으로 가더니, 커튼 뒤에 숨어서 커튼을 치고 먹는 것입니다. 누가 뺏어 먹을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열렬히 아이스크림을 원합니다. 지금까지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들이 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한번 맛보고 미쳐도, 그 다음에 엄마가 교육방침을 딱 정하고 죽어도 안사주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이들은 그 욕구가 퇴화합니다. 그래서 결국 나이 들어도 먹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방 가서 보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 패스트푸드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엄마가 교육방침이 확고해서 절대로 안줍니다. 그리고 된장하고 청국장 이런 것을 먹인 아이들은 아주 어리더라도 그런 생활이 유지되면, 나중에 성장해서는 아예 패스트푸드 같은 것을 먹고자 하는 욕구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주어지는 것이 욕구를 자극하고 계속 주어지지 않으면, 욕구 자체가 퇴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알게될 때 우리들이 그런 욕망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화란에서도 보면, 여러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정도 될 것입니다. 보헤미아에 ‘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죽고 나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가톨릭 사람들이 ‘공동생활의 형제단’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근대 경건주의 운동의 효시가 됩니다. 그것이 화란까지 들어가고, 거기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종교 개혁 이후에는 ‘나데레 레포르마티오’(Nadere Reformatio)인 제 2의 종교개혁이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는 정말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진젠도르프’나 ‘스페너’ 같은 사람들도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럽의 ‘spirituality’의 저변 속에는 처절한 기도가 흘렀고, 특히 ‘나데레 레포르마티오’의 선두에 섰던 ‘윌리엄 에임스’나 혹은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그의 제자인 ‘마스트리히트’ 특히, ‘보에티우스’나 ‘아메시우스’ 같은 사람들은 영국의 청교도에서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고, ‘아메시우스’는 영국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트레히트 대학에 봉사하면서 어떻게 하면 식어가고 있는 이 칼빈주의를 청교도의 그 열렬한 열정적인 신앙주의와 접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거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설교와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전통과 유산들이 물려지지 않고 개혁주의의 어떤 뼈대와 골격들만이 남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을 하려고 외국에 나가서 신학을 배워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spirituality’를 배워가지고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아주 심하게 이야기하면, ‘spirituality’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까지 그렇게 이제는 기도 자체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바꾸시는 세 개의 수단이 있었는데, 그것이 말씀과 기도와 성령이었습니다. 특히, 이 기도와 성령은 성령을 가운데 두고, 기도와 말씀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올바르더라도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안되고, 일반적으로 성령의 역사는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하고, 그 사모하는 마음에 가장 훌륭한 외적인 표현이 사실은 이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개가 삼위일체처럼 엮어져 있지, 세 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즉, 셋 중에 하나가 약해지면 나머지 두 개 도 함께 약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할 이야기는 많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구속사의 맥락에서 보면, 성령이 강림하셔서 선교의 시대를 여는 것이지만, 설교사의 맥락에서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말씀을 퍼뜨리기 위한 설교의 부흥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기독교회에서 피어린 증언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의 역사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강림은 구속사 속에서 이미 작정된 것이긴 하지만, 결국 간절한 기도 속에서 성령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500여 형제가 주님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마지막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때 남아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120명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매우 중요한 연관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절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부터 한 30년은 좀 안되고 25년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내수동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대학부 학생들이 여름 수련회를 갔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만, 4박5일 일정으로 갔는데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수련회가 정말 별로 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은혜를 못 받으니까 결국 심통이 나가지고 몇몇 지체들은 막 골을 내면서 떠났다고 합니다. 보따리를 싸가지고 다 떠났는데, 그 중에 몇 명이 ‘우리가 이렇게 내려갈 수가 있겠냐! 바깥에서는 전세버스가 기다리는데 버스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대로 돌아가면 너무 우리 마음이 아프다. 여기서 기도하자!’ 그러자 이제 몇 명이 모였는데, 저 쪽에서는 막 빵빵거리면서 가자고 그러고, 그렇다고 대원들을 떨어뜨려 놓고 가기에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몇몇 사람들은 고집을 부리고, 또 몇몇 사람들은 기도하려고 하다가 빵빵거리니까 다시 버스로 돌아가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버스에 있는 사람들이 한마디로 심사가 좀 꼬인 것입니다. ‘수련회에 와서 은혜도 못 받아서 그러는데 저 인간들은 저렇게 튀고 말이지, 단체 생활에 협조도 안하고..’ 그러면서 결국은, ’내버려둬라’고 하고, 자기네끼리 오라가라 하다가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버스가 떠나고 나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남아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었던 사람이 몇 명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한 20여명 남아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아주 강력한 성령의 임함이 있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다 가지고 있어도 중심을 보시면서’라고 말하면 안 되고, 그것이 아주 구체적인 갈망의 표현으로서 기도 속에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개혁신학을 하면서도 항상 현대 개혁신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을 찢는 것 같은 간절한 기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제가 본 기록에 의하면 ‘마르틴 루터’도 굉장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칼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쯔빙글리 같은 사람도 아주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개혁신학의 전통들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간 것입니다. 신학 그 자체는 객관적이니까 손에서 대를 물려가면서 물려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드렸던 간절한 기도의 실천들은 그들에게 임했던 동일한 성령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지 않으면 전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는 곳에 가든지 간에 개혁신학을 순수한 형태로 보존하려고 하는 학교는 아주 드물게 있지만, 그 속에서 뜨거운 개혁신학의 원동력이 되었던 그 간절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 열렬한 기도를 간직한 그러한 사람들은 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기도의 간절한 실천이 없기 때문에 꽃피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가 다가올수록 우리는 이러한 기도생활에 깊이 마음을 쏟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역도 무슨 경쟁처럼 되어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우리 자신을 막 내몰리고 교통수단과 통신 수단이 발달되니까 옛날에는 거기까지는 나의 사역이라고 줄을 긋지 않아도 되는 거기까지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일 모레도 우리는 6시 반에 출발해서 대구까지 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런 많은 일들 속에서 그 옛날에 하나님 앞에 몸부림 쳤던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기도를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명령과 깨어있으라는 것을 나란히 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깨어 있을 수 없고, 만약 깨어있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여러분들이 물론 바쁩니다. 그리고 이번에 두레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면서도 강형원 교수님이 장로님으로 계신 교회인데, 거기서 교역자들이 꼭 자기들하고 식사를 한번 하게 해달라고 해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 질문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좀 제대로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이제 설교에 있어서 지식의 문제도 이야기했습니다. 최종적인 이야기는 이것 이었습니다. 덜 자고, 덜 쉬고, 덜 즐기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짜피 그림처럼 수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찿는 생활을 할 수도 없고, 그리고 그것도 우리가 신뢰하는 그런 하나님을 찿는 방법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굉장히 복잡하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시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천주교 신부들에게는 피장이라는 것이 있고, 승려들에게는 동안거, 하안거가 있어서 동안거 60일, 하안거 60일이 있습니다. 이때는 면벽을 하고 최소한의 음식을 먹고, 새벽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 잠자리에 들 때까지 면벽을 하고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한번 동안거나 하안거를 하고 나오면, 6kg에서 9kg의 정도의 체중이 빠진다고 합니다.
모든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인데 그렇게 지독할 정도로 수행생활에 힘쓰는 사람들도 인간의 죄성을 극복을 못하는데, 우리는 그 보다 훨씬 더 복잡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니까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되겠습니까? 물론 그들에게는 없는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에게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별히 교역자와 직원 모두 이번 사순절 특히. 우리 고난 주간에 기도 많이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렇게 하루를 살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