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모본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녹취자: 윤은정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이 장면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내면의 뿌리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신앙생활 속에는 강조되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 포괄적인 영역에 있어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하겠다는 뜻이겠죠.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아주 복잡하고, 그리고, 기능적으로 자기화 된 시대에는 더더욱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야 할 영역들이 점점 더 넓어져 간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진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히스베르투스휘치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을 경외함의 진수는 마음을 쏟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야 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최고의 표현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면, 사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입니다. 각각, 자신의 주의주장이 있어서 자기코드에 맞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열을 올리지만, 자기 주장이 어떠하든지 간에, 만약에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고, 그 모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들이 주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경외심 어린 심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반듯이 기도의 자신의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이 교회에서는 기도가 현저히 약화되었고, 그로 말미암아서 교회가 끊임없이 이 사회를 향하여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현대인에게 맞는 목회의 방법들을 연구하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고, 또, 성공을 거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자연스러운 그런, 변화라기 보다는 한 시대의 시대의 정신에 흡수되거나 현대인들과의 코드를 맞추는 일들로 인한 변화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깊이 반성하고 청교도들의 역사를 다이나믹하게 움직였던 그 근원, 보이지 않는 그 근원을 찾아내고, 그리고, 종교개혁과 개혁파 전통주의로 이어오는 이 면면한 기독교 역사 운동속에 다이내미즘을 이 기도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기도는 이론과 어떤 연구의 흔적으로 남길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이 기도에 관한 많은 비밀들은 자신을 꺾는 실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발견될 수 있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청교도들의 역사를 보더라도, 기도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전해내려 옵니다. 사람들은 그런 자료를 접하면서 그들의 신학이 후대의 신학과 어떻게 달랐고,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그런 주제에 관해서 성경 전반에 해박한 해석의 방식들을 동원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실천은 사람의 손에 손에 쥐어져 전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기도에 관한 그들의 교훈의 심오한 깊이를 발견하면서 그들에게서 기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렇게 기도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한, 기도는 가장 즐겁고 기쁜 영혼의 움직임입니다. 할 수 없는 한, 영혼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작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기 전에, 기도하는 행위 자체가 미신적인 행위로 사람들에게 알려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고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조국 교회가 한때, 그렇게 열열한 기도를 특징으로 한 조국 교회인데,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기도의 열정들이 식게 되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소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적으로 5천달라가 기독교신앙의 수용성의 분기점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너무나 가난하고, 한 맺히고 어려웠기 때문에, 세상에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마음을 쏟으며 기도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넉넉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애절함이 없다. 이런 이야기죠. 뭐, 선교적으로 상관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만은 그러나 사실은 만약에 그것 때문이라면,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기도의 은혜가 불 붙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죠? 이것은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들과 종교적인 요인들을 망라해서 그 원인을 분석할 수 있겠지만은, 나의 신학적인 판단으로는 한 가지 사실을 교회가 소홀히 했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는 불구의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회개...
회개가 살아있는 교인들은, 다시 말해서 여러분 주위에서 그리스도인 가운데, 회개의 영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기도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진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졸라서 하나님한테 타내는 것이 기도의 진수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펼쳐 가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칼빈은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한 가지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고, 또, 한 가지는 모든 좋은 것이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부터만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육시키기 위해서다’라고 그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기도하게 하신 큰 섭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졸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타내게 하시기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경륜 속에서 펼쳐가실 때에 간절한 기도 속에 매달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향한 의존의 정신 안에서 살게하기 위함이 하나님의 큰 경륜인 것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논문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늘과 우주 천체에 어마어마한 별들과, 그리고, 그 엄청난 천문학적인 운동들이 아무리 아름답고 기묘할지라도 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 마음을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할 것이라는 하박국의 예언은 사람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덮음을 이야기하는 거지, 산천 초목위에 뒤덮이는 그런 종류의 신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오늘날 회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마다 몇 가지 사실을 뼛속깊이 상기하고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할 수 없는 은총으로 구원해주신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속에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 매일 용서받고 매일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돌아가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가치는 성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한 교회의 가치는 성장을 하지 않는 작은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교회의 예찬론을 펴는데, 저는 동의되지 않습니다. 큰 교회의 예찬론도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하마다 알리라고 하는 사람이 한때 주먹으로 세계를 재패했습니다. 한창때에 그는 벌처럼 날아서 나비처럼 쏜다는 별명을 가지고 15라운드동안 내내 링을 춤추면서 움직였습니다. 그때, 그의 몸무게가 130kg이었습니다. 누구도 그 사람보고 비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70kg밖에 안될지라도 일어나려고 하면, 관절이 쑤시고, 배가 나와서 발걸음을 옮겨놓을 수 없다면은 그 사람이야말로 비만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한번 정직하게 마음의 손을 얻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예기치 못한 시간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해서 온 교인이 눈물로 기도해본 적이 언제쯤 됩니까? 여러분들이 앉아서 그 예배드리는 자리에서 예배가 끝났는데도 오랬동안 말씀을 깨달은 여러분들의 죄와, 그리고, 여러분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뉘우쳐서 성경책이 눈물로 젖은 적이 언제입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의 가슴과 심령을 깊이 파고들어가는 본질입니다. 거기로부터 우러나올 때에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 사상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그 사람의 영적생활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정말로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나오는 교인들 가운데, 주일 출석하는 사람 가운데 절반은, 단 10분도 일주일동안 기도를 안 하다가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속에서 진리가 보존이 되고, 경건의 능력이 보존이 된다면, 그렇게 많은 시간에 기도의 헌신하면서 몸부림쳤던 청교도와 개혁주의의 후의 지도자들은 가장 어리석은 길을 택한 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조지 휘필드라는 전설적인 청교도 설교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들이 참된 경건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알미니안 주의자가 되든, 칸빈 주의자가 되든, 마귀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칼빈 주의자보다는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 훨씬 위대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사상과 그리고, 그들이 남겨놓은 많은 업적들을 우리들이 아무리 많이 섭취하고, 또, 그것에 감탄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정말, 그들이 들어갔던 개혁주의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그 사람들 속에 있었던, 그 거룩한 정동과 그리고 은혜의 경험,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심오한 경건 속으로 우리들이 들어가서 함께 그것을 누리고 맛보지 못한다면, 양보를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비슷하게나마 그것을 맛보지 않는다면, 우린 정말 원숭이처럼 그들의 발자취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여년 전에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런 능력 있는 복음적인 삶을 사셨던 그 원천을 우리들이 더듬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개하는 심령이 있을 때, 그때에 자신이 가장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이 기도는 독립심을 가기고 있을 때 거의 불가능한 정신활동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멸시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의존하는 영혼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런 의존의 영 안에서 인간은 기도할 수 있는 최상의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가운데 기도의 깊은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종종 이 기도의 실천은 시간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고, 간절히 기도할 때에 시간도 있고, 공간도 있고, 주님과의 사귐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그런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의지하던 모든 정신들을 잊어버리고, 온전히 집중하게 될 때, 그때에 기도는 시간을 초월하게 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수 많은 것들이 있고, 그리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추임없이 드러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 속에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쏟아져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열열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열한 기도가 진실한 기도일 수 없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레박을 던져 우물을 길어 오르듯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토해놓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두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상세히 나지는 않습니다만은, 서 목사님은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청교도 역사의 어느 한 페이지를 보니까, 성도들이 모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회자가 어느 목사님께 대표기도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도를 시작을 안합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때에 기도대신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오, 주님’ 한 마디 했을 때, 강력한 성령의 임하심이 있었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을 읽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고,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를 해도, 하나님 앞에 마음의 없는 기도를 하지 말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한 언어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고, 예배도 그렇게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올바르게 하면,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변하지만, 예배와 기도를 옳지 않은 자세로 하게 될 때, 사람이 점점,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나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잘못된 신앙생활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마음을 쏟아놓는 시간들이 너무 없습니다. 이른 새벽서부터 깊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수 많은 사물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치 없는 일부터 꼭 필요한 일까지 수많은 일들에 관여하면서 마음속에서 온갖 정동들이 일어나고, 수 많은 사물들이 표상을 가득 채워 우리의 가치판단에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러면서 우리의 생은 흘러가기 때문에 영혼이 고요히 하나님을 응시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하는 이런 것들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핸드폰을 비롯해서 수 많은 전자 기기들과 현대의 이기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우리의 경건을 헤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앞에 마음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은 기도에 관해서 최소한 네 가지 핵심적인 사실을 가르쳐 주는 본문이 등장합니다. 제일 먼저 성경은,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랬습니다. 제일먼저 나오는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주체에 관한 언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즉각적으로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됩니다. 도대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말입니다. 그분은 본성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의 성품을 아울러 가지셨지만, 사람의 인격은 없으신 하나님의 인격만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기도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개혁파 전통주의자 가운데 기롤라무잔키우스라는 사람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아버지’라고 부른 기도의 대상 속에는 성부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어있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신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기도하셨을까?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죄를 씻어버리고 정결하게 되어야 할 필요 때문에 기도합니다.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받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원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 자원을 손에 넣는 방법으로 아버지께 매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께서 기도하셨다’ 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에 비하여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라고 찬송했던 사도바울의 빌립보서 기독론에서 우리들은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는 구절을 신성을 파내버리고, 혹은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개혁주의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소위 얘기하는 캐노시스라고 하는 이단적인 주장들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이런 주장들을 서슴없이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참 놀라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당신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성육신 안에서 신성을 인성 밑에 감추셨습니다. 누가 강요하는 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신성을 인성 밑에 감추셨습니다.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뜻언뜻 그분이 남루한 모습으로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드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믿음의 눈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만 천하에 드러내고, 찬란한 신성의 광휘로 사람들을 재압하사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희년인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대신에 무엇 때문에 그 인성 밑에 신성을 감추셔서 사람들이 보기에 단지 한 사람일뿐이라고 느끼도록, 그렇게 섭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그 가장 커다란 이유를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지신 그런 비하의 신분에서 발견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하나님만을 위해서 오신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의 찬란한 광휘로만 성육신 하셨다면 그분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하셔야 했고, 한편으로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심으로 중보자가 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동일하게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고 양자사이에 손을 잡으신 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 하나님의 찬란한 아들로 사람들에게 먼저 인정받기 보다는, 그의 형제 중 한 사람으로 당신이 이해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씻는 의식인 세례를 어떤 의미에서도 그분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스스로 그 세례를 받기를 자청하고, 죄인인 세례요한에게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시는 동안에, 우리 모두에게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성육신 안에서 당신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인성아래에 감추신 이유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희생의 고난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는 정말, 사람처럼 사시다가, 한 마리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시고 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찬란한 신성의 영광을 모든 사람이 압도하리만치 그렇게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때를 아버지께서 주실 것임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은 회개하거나, 혹은, 심령이 컬컬하여 기도하였던 것이라고, 우린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죄의 영향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언제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활짝 열린 교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었고, 티끌 같은 근심과, 티끌 같은 절망의 그림자도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 사이에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완전한 기쁨과, 완전한 화목, 무엇에도 막힘이 없는 온전한 교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항상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실 때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눈물로 기도하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의지하며 살기를 주님이 바라셨는지를 일깨워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누가를 비롯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광경을 지켜보았던 모든 제자들의 가슴속에 너무도 오래도록 이 광경이 아로새겨졌기 때문에 오늘 복음서 속에 잊지 않고, 그 수많은 예수님의 생애의 토막들 가운데, 한 토막이 여기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그 완전하시고,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사랑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약에 기도하셨다면, 여러분들, 우리들은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청교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교만이라고 딱 잘라 말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 인격이 하나님께만 바쳐졌다는 것,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회장을 시켜주고, 담임목사를 시켜줬을 때, 열심을 내는 것,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 자리에 있으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심, 그것은 마음을 쏟아 부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깊은 밤, 이른 새벽,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마음을 쏟아 부으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어찌하든지 그분을 본받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교만은 어느 날 한 번의 큰 나무로 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씨앗이 떨어져서 좋은 환경을 만나면서 서서히, 서서히, 자라가듯이 그렇게 우리의 교만도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매일매일 쓸어버리는 제초재의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의 눈물이고 간구의 탄식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특히 젊었을 때에 기도 많이 하세요. 나이 들면, 모든 게 불편해집니다. 건강도 받쳐주지 않고... 기도하세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우리 교회도 청년들이 많이 오는데, 제일 예쁜 청년이 누구인지 알아요? 압구정에 가서 성형수술하고 온 청년이 아니에요. 깊은 밤에 예배당에 가보면, 그 불꺼진 예배당 한 구석에서 무엇 때문인지 그렇게 흐느끼면서 기도합니다. 간절히... 이런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오늘 성경은 한곳에서 기도하셨다고 장소가 나옵니다. 히랍어 성경에는 ‘앤토포티니’ 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인서튼푸에이스’하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도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습관은 일정했습니다. 언제가 예수님의 기도시간이었죠?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죠. 저는 한 15년 전에 왜 예수님이 이렇게 새벽에 기도해 볼려고 그러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 느끼죠? 요새같이 추운때... 밤 늦게까지 일하거나, 놀다가 자고 새벽에 일어나 보려면은 너무 힘들죠. 왜 도대체, 새벽일까? 새벽에 무슨 서억기가 서리는 것일까? 한참을 성경을 보고 고민을 한 결과, 위대한 발견을 했습니다. 아무 뜻도 없다. 그것이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힘든 새벽에 하셨을까? 낮에 할 수 없어서... 만약에 낮에 하시게 되면, 병자들도 돌보실 수 없고, 가난한 자도 구제하실 수 없고, 말씀을 전하실 수도 없잖아요? 허기진 영혼들이 들판에 모였는데, ‘나는 기도중이다’라는 간판을 거실 수도 없으시고, 또, 병고치러온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내 기도가 먼저다’라고 간판을 붙일 수도 없으실 것 아니에요? 그러면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그들이 깨어있을 때, 예수님은 고치고, 먹이고, 가르치시고, 그리고, 당신자신의 영적 생활을 위해서는 ‘그들이 잠자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시면 되겠다’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시간이 새벽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실 장소부터 찾으셨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기도장소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한번 찾아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복음서에 보면,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떤 곳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떤 곳에서는 빈들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동가식 서가식 하시는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그이 주거지가 불완전하셨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언제나 하나님께 바쳐졌고, 변함없이 그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마음을 모두 아버지 앞에 쏟아 부으며,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은 죄 없으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위해 그들의 죄인 것처럼, 그들의 죄가 당신인 것처럼 기도하셨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패턴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는데, 환경이 허락해줘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환경이 어려워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환경 그 자체는 우리를 기도하게 할 수 도 없고, 안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가 그 환경에 화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에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기도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전철타고 출근하면서 어쩜 그렇게 기도가 잘 되는지요. 우리 교회의 성도들 보면은 아침에 찬송하나 틀어놓고, 오전 내내 집안 청소하면서,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심방갔다 오면서 뒤에서는 심방대원들이 이야기하든 말든, 혼자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면, 기도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니까, 환경을 허락해주지 않을 때 금새 미끄러져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환경을 넘어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생활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한 사람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어느 청년이 집이 굉장히 먼데, 새벽기도를 나오라 그러니까, 목사님, 너무 멀어서 못나오고 자기가 맨날 10시 반에 퇴근하는데, 새벽기도까지 나오면 자기는 하루가 전부다 균형이 깨진데요. ‘그러지 말고 나와 봐라. 1주일만 나와 봐라.’ 진짜 차를 몰고 새벽에 40분을 운전을 하고 왔어요.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지난 다음에 저한테 고백을 했습니다. ‘제 생각이 잘못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기도하면 힘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힘을 주십니다. 프라스 마이너스를 따질 때에는 항상 하나님이 준 힘은 계산하지 않고, 새벽기도에 가서 잠 못 자고 기도하면 기운이 빠질 거라고 그것만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생활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환경에 쉽게 굴복하는 것은 기도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환경을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 7년 전인가 제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한 10년 약간 안됐으니까는 지금보다는 그때 체력이 훨씬 좋았죠. 밤늦게까지 심방을 하든지, 글을 쓰든지, 어쨌든 놀지는 않아요. 하여튼 열심히 일하다가 대부분 이제 공부하다가 뭐, 글을 쓰다가 늦게 들어오는데, 그러고, 어제처럼 1시쯤 들어가면 새벽에 너무 힘이 들어요. 그러면, 제일 먼저, 아내로부터 유혹이 시작됩니다. ‘여보, 당신, 안돼. 좀 쉬어야 해. 기도는 내가 할테니까, 부목사한테...’ 그런데, 제가 교회 안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 바로 옆집에 부목사님 한분이 교회 안에 같이 살았거든요. ‘아무게 목사님한테 내가 인터폰 해 줄테니까 당신 더 자.’, ‘그럴까?’ 그러면 이제 못 가는 거죠. 그래서 항상 새벽기도 시간에는 영혼과 육체가 대화를 합니다. ‘따르르릉 새벽기도 가야지.’ 영혼이 말을 하는 거에요. 육체가 말을 합니다. ‘아우, 날 또 데리고 가려고? 정말 죽을 것 같애. 어제 1시에 잤잖어.’ 그때에 영혼이 ‘많이 힘들어?’ 그러면 그날은 못가는 거에요. 영혼이 ‘맞고 갈래? 벌떡 일어날래?’ 그래야죠. 그래서 이불속에서, 청년들이 많이 따라했어요. 이불속에서 ‘충성’ 그러고 그냥 발길로 이불을 뻥 차고 벌떡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면 가요. 그게 선한 의지에요.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누가 어느 방면에 있어서 남다른 업적을 이루거나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때 그 뒤에 걸어온 발자취는 피 흘리며 걸어온 길입니다.
강수진이라는 사람 아세요? 발레리나. 그 사람이 한번 발레화를 벗고, 치마를 걷고 발을 한번 보여주는데, 인간의 발이 아니에요. 거의 기형이에요. 얼마나 많이 연습을 했는지... 그것을 보면서 나는 숙연해 졌어요. 사람 앞에 춤추는 여자도 저렇게 발이 기형이 되도록 몸부림치는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사는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살아야 합니다. 내가 어저께 우리 청년들이 모여서 그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이냐? 대화 좀 하자. 그래가지고 내가 한 2시간 반 동안 대화를 했는데, 결혼, 육아부터, 뭐 그 다음에 직장, 취업, 뭐 벼래 별 얘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뭐냐하면 발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어제보다는 하나님앞에 나은 삶을 살려고 몸부림 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의무이기 전에 살아있는 젊음에 대한 예의입니다. 왜? 오늘 여러분들이 생각없이 흘려버리는 오늘이라는 날이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허락이 안 됐고, 여러분은 오늘 이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청교도와 개혁주의 신앙의 역사는 크게 두가지로 나는 요약이 된다고 봅니다. 사상의 견고함, 빈틈이 없는 사상, 두 번째는 뭐냐하면,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강한 경건. 그것입니다. 그것이 청교도 정신의 힘입니다. 그런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몸부림치면서... 특히 여러분 젊은 사람들, 내가 어저께 그랬습니다. 6시간 이상 자면 그것은 죄짓는 거다. 하나님앞에 정말 몸부림치면서 살아야 됩니다. 시간이 없으면, 덜자고 덜먹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환경에 쉽게 꺾이지 않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랬잖아요? 마치시매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히랍어로 ‘에파오싹토’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누가가 기록했을때 머릿속에 있는 히브리 단어가 있었습니다. ‘샤바트’에요. ‘샤바트’. 창세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셨더라.’ 그 안식하셨다 할때 그 ‘샤바트’ 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쉬시매’ 이렇게 번역이 되야지 맞는 단어라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뭘 보여 주었냐면은, 예수님이 그날 기도하신 기도의 길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는데, 능력이 없는 이유는 공중전화 거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국제전화 통화료 아끼는 건처럼 용건만 간단히 하기 때문에 기도의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깊은 기도는 반듯이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긴 시간이 반듯이 깊은 기도를 보장해주지는 않아요. 그러나 깊은 기도는 반듯이 긴 기도를 필요로 하고, 따라서 절대적인 기도의 시간이 부족해서는 절대로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을 쉬면서 매달리는 시간이 있는 사람들만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은 아주 짧은 기도로 큰 하늘에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믿음의 위인들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얘를 들자면 가나안을 정복을 하던 여호수와의 기도. 귀신들을 내어쫒고 병든자를 고치던 사도바울의 선언적인 기도. 소위 오늘날 왕의 기도라고 그러는데, 그런 변형된 기도들은 아주 짧은 기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큰 능력을 불러드려 그래서 귀신들을 제압하고,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능력을 큰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리는 위대한 일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흉내 내고 싶어 합니다. 답을 어떻게 찾냐하면, ‘믿음이 그 위대한 기도의 열쇠다’라고 생각을 하고, 기도하는 그 순간 ‘믿습니다’라고 연발을 하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꿈꾸지만, 실제로 그런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는 한 가지 사실을 관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위대하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평소에 거의 믿은 적이 없고, 기도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욕망을 가지고 쎄게 ‘믿습니다’라고 연발을 하면서, 한 순간에 여호수아나, 혹은 사도바울의 기도를 흉내낸다고 해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짧은 기도로 큰 능력을 이 세상에 불러 내렸을때, 그 사람은 기도의 자리에 오기 전까지 오랜 시간을 기도하는 생애를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수아가 짧은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불러내려, 달과 해를 멈추게 하여 가나안정복을 완수한 사람이었지만, 광야시절에 모세도 피곤해서 돌아간 때에 홀로 성막을 지키며 주님을 대면하던 사람이었음을 기억해보십시오. 오랜 기도는 깊은 기도를 위해 필수적이고, 마음을 쏟는 깊은 기도는 그 사람을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한 기도 속에서 자신을 쏟아 붓는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서 보여주심으로 장시간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상세한 내용이 안나오지만, 이런 정도의 그림이 아니었을까요? 틀림없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한 여관에 묶으셨던지, 어디서 성도의 집에서 주무셨겠죠? 제자들이 고단한 전도사역속에서 아침에 눈을 떴더니, 예수님이 오간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찾아나서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오래전에 아직 새벽미명에 일어나서 한적한 곳으로 제자들을 일어나라고 휘둘러 깨우지 아니하시고 조용히 홀로 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낮에 보아 두었던, 기도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새벽이슬을 맞으셨고, 그리고, 아침이 훤하게 밝은 후에야 제자들은 겨우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기도하는 모습이 워낙 진지하고 엄숙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그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분위기를 깨뜨릴 수 없는 엄중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그 날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기도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평탄하고 좋은 일들이 일어날 때에는 마음이 미혹에 빠져서 기도의 끊을 놓고, 시련과 고난이 오면 괴로움에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 차마 하나님 앞에 기도할 힘을 얻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가장 좋은 치유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에 어떻게 사셨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기도는 달콤함을 더해줍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받았을때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이 내게 맡기시는 사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할 때에 기도시간은 우리를 어린 아이로 만듭니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 엄마의 가슴을 파고드는 아이처럼, 그분의 향취에 얼굴을 뭍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정말, 고백합니다. 의지할 분이 그분밖에 없다는 것을 진실하게 고백 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과의 대면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이 가장 가까이 계신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게 되고, 주님의 향취를 느끼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그렇게 좋으신 주님 앞에 빛나간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런 사람으로 대우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정말 이런 주님과의 교제 안에 있는 말할 수 없는 달콤함, 그 은혜, 그 사랑,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져야 할텐데, 우리들이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영국에 갈 때,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예배당에 잠깐 들러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감리교 목사님들이 여럿이 그 예배당을 성지순례 가듯이 갔답니다. 그래서 웨슬레 선생이 그 시대에, 그 타락한 영국의 상황 하에서 그렇게 엄청나게 생명력 있는 복음사역을 감당해내는데, 그 비결이 뭡니까? 그랬더니, 그 교회를 안내하던 사람이 ‘목사님, 그걸 꼭, 알고 싶으세요?’, ‘그렇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교회 투어가 끝난 다음에 그 목사님보고, 여기가 선생님이 설교하시던 설교단입니다. ‘올라가십시오.’ 올라갔어요. ‘무릎을 꿇으십시오’. 무릎을 꿇었습니다. ‘손을 모으십시오.’ 손을 모아요. ‘고개를 숙이십시오.’ 고개를 숙였어요. ‘다 됬습니다. 이제는 거기서 우십시오. 이것이 웨슬레 선생의 복음 사역의 성공적인 사역의 비결이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는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먹고 자라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교회마다, 동일하게 진리의 풍부함과 성령의 풍성함을 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셔서 당신 홀로 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진리와 성령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어가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무릎을 꿇고 자기의 교회에서 흘리는 눈물은 교회 밑바닥으로 스며듭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교회에 밑바닥에 고여서 쓴 뿌리들은 그 기도의 눈물을 먹고 죽습니다. 은혜로 심겨진 성도들은 그 눈물을 먹고, 정말, 아름답게 자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에 계시는 동안 웃으셨다는 기록은 안 나오는데,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나오고, 히브리서에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올렸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조국교회가 잃어버린 기도의 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마다 새벽이든, 깊은 밤이든, 모든 사람들이 모여 기도할 수는 없겠지만, 항상 교회당에는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아는 성도들, 기도할 수는 없는 영혼들을 위해 대신 기도해주는 성도들, 그 성도들의 애끓는 기도소리가 교회에 가득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도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이루게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운명인줄 알면서 살아가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운명이라고 믿는 것을 고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평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아무리 예배당에서 고고하게 훌륭한 설교가 울려퍼져도, 그것은 나무 토막에 불과합니다. 뜨거운 기도의 불길이 어우러져 그 열열을 태울 때, 교회는 새로운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 특히, 집안에도 메이지 않고, 뭐, 세상에 거칠것이 없는 청년의 때에 많이 기도하라고 나는 권하고 싶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아직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의 소비나 배우고, 그리고, 이 세상의 문명의 도구들이나 만지작 거리면서, 거기서 기쁨을 누리면 그 사람의 미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썩은 젊음입니다. 그런 것들을 오히려 멀리하고, 그리고, 하나님앞에 간절히 메달리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조국의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강물처럼 흘려보내 주시도록 시들고, 병든 교회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복음의 밝은 광채가 충만하게 비치도록 그렇게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돼야 됩니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 제게 기도에 대해서 한없는 도전을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였습니다. 그 사람의 생애와 일기를 제가 6권을 사서 6번을 읽었습니다. 한번 읽을 때마다 새 책을 샀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살까?' 그 일기를 여러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읽어 보면은 기도하러 들판에 나갈 때 하늘의 새벽별빛이 쏟아졌다. 생각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내용들이 책장을 넘길때마다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한쪽에 치우치는 신앙생활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폐결핵 3기의 몸을 이끌고 눈 덮힌 언덕에서 인디안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고 나면, 각혈을 해서 눈 위에 선혈이 그득했습니다. 그렇게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사용해서 유럽에 있는 수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때려, 깨웠습니다. 엘리어트나, 그 다음에, 헬린 마틴같은 이런 수 많은 선교사들이 줄을 잇게 된 것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그 감동적인 생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억되는데, 열심을 내지 말고, 주님의 마음에 우리의 이름이 기억되도록, 그렇게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경회를 마치기 전에, 마음에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아무도 나와함께 동참해 주지 않아도, 내가 이 교회와 그리고, 조국의 교회, 전 세계의 보편교회, 기독교의 역사를 위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노라.’ 라고 다짐을 하고, 그리고 아버지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