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 조 원 정
오늘 성경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가르쳐 주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모습을 본 제자들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여 생겨나게 된 것이 주기도문이었습니다. 저의 오늘 관심사는 주기도문 자체의 내용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기도를 하고 싶고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 일으켰던 예수님의 기도 생활의 한 장면을 소개함으로서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들은 후에 기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제일 먼저 기도하시는 주체이신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이렇게 나옵니다. 제일 먼저 기도하신 분이 예수님 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동의하기 참 어려운 내용 아닙니까? 우리 인간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 인간은 항상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뉘우쳐야 할 필요가 있고 회개라는 수단에 가장 중요한 표현이 하나님 앞에 올리는 참회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과 본체인 분이시고 능력으로 말하자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하나님이 부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니라 심한 통곡과 눈물을 쏟으시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기까지 기도하신 기록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의 기록들입니다. 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죄도 없으신 그 분이 능력이 한없이 많으신 그 분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 기록된 예수님에 관한 선언 중 가장 아름다운 기록이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기독론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하시고 주라 시인하게 하셨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아름다운 기독론 말입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문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를 가지신 분, 하나님의 인격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셨지만 인격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을 가지셨습니다. 그 인격은 사람의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 하나를 가지고 계셨고 인성을 취하시되 인격은 취하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캐노틱이라고 하는 이단들은 이 구절을 해석할 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에 본체인 하나님의 성품을 다 퍼서 스스로 양도해 버리셨고 순수한 인간으로 오셨다.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되셨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이 의미심장한 구절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는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셨는데 이 신성을 스스로 누가 요구하는 사람이 강요하는 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이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시고 신성을 모두 사용하기를 스스로 마다하시고 인간의 한계에 죄 없는 인간으로 자신이 갇히신 것입니다. 스스로 육신의 몸을 입기 전에 성자 예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는 분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온 예수님은 모르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모자라셨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어서 인간이 갖는 한계를 자초하셨던 것입니다. 오래 걸으시면 피곤하셨고 목마르시면 물을 마시고 싶으시고 배가 고프면 시장기를 느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신성을 인성 아래에 감추시는 가운데 죄는 없으시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아름다운 한 인간의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있었지만 그 하나님이 거룩하고 지극히 위엄 가운데 계시고 자비하신 분이라는 계시가 있었지만 그림으로 보는 것처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그렇게 희미하게 보이던 하나님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강한 성품들을 아주 탁월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계시의 태양빛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과하자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이 일곱 가지 찬란한 색깔로 빛깔로 분광이 된 것처럼 예전에 희미하게 알 수밖에 없었던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이 찬란한 방식으로 눈부시도록 우리 인간들에 비춰졌던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에 대해 희미하게 알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보여주신 그 생활과 인격과 그분의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약의 계시가 구약에 비해서 우월한 가치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모든 성경책이 동일한 깊이의 계시를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의 빛들이 찬란하게 드러난 그 기록들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우리에게 경험하게 함으로서 참으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안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안다 앎의 행위의 대상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 어려운 말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과 또 한 가지는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인간들에게 참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만큼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생애와 인격 그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참으로 그 인간으로 하여금 살기를 원하셨던 되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삶과 인격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세 번째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우리의 죄에 대해서 대가를 치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죽으셔야 했습니다. 신은 불사의 존재이니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33년 동안 사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화목제물로 바칠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성숙한 후에 마지막에 자기를 제물로 드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형벌 받을 죄에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치실 때까지 마치 예수님 자신이 모자라신 분인 것처럼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없는 분이셨지만 스스로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심으로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심으로 자기가 대신 죽어야 할 이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제물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주석가가 말한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도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 십자가의 죽음보다도 더 뛰어난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크기와 넓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가 없다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맥락에서 놓고 보면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은 죄도 없으시고 능력이 한량없이 많으신 분인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일생을 사는 동안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 안에서 일생을 사신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모든 피조물 중 가장 탁월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셔서 천상세계는 당신이 직접 다스리시고 천사들로 섬김을 받으셨지만 지상 세계에는 당신이 직접 다스린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리자로 두어 위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옆으로는 인간을 이해하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이해함으로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의도를 스스로 간파하고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끔 이 세상을 통치하는 대리자로 인간을 세우셨으니 인간의 이 아름다운 지위와 영광은 천사들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인간을 매우 특별하게 창조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게 창조하셨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로 그런 존재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존하는 인간의 영혼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사람이 없는 이 드넓은 우주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 보다는 한 사람의 어린 신자가 마음 깊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린아이 같은 절대의존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기도생활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사람됨을 능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무한한 능력을 가지시고 죄도 없으시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셨던 그 분이 이렇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될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은 교회를 오래 다니고 많이 해 본 사람일수록 잘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나온 생애가운데 언제 그렇게 기도의 열심을 품고 시간 시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으며 기도했는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흔히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처음 회심 때였을 겁니다. 존오웬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첫 번째 회심은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하늘의 영광과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각이 빛처럼 쏟아지는 시기, 하나님 없이 살았었습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던 죄인이 어느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나 자신이 내 인생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최초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회개하게 됩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큰 고난을 당하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인생의 날들이 하나님 의지 않고 살아온 죄의 날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누가 기도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교회당에 와서 무릎을 꿇으면 언제나 눈물이 쏟아지고 우리의 기도는 샘물처럼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은 주일날 교회당에 출석하는 교인 중 50%가 넘는 사람들이 하루에 십분도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이 없는데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의 쏟아 부음이 없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산다면 거짓말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붙들고 십자가를 향하여 산다기 보다는 그냥 상식으로 살아가는 더욱이 현대의 이른 아침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계속 되는 이 복잡한 사회생활은 점점 기도할 수 없게끔 만듭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영혼은 쇠잔해져 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시편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저희들이 원하는 것은 주셨으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도다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이 도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첫 번째 감동이 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기도하며 사셨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실까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본 사람들은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이 녹이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앉았던 그 자리에서 성경을 읽던지 기도를 하던지 예배를 드리던지 마음이 물같이 쏟아졌던 시간 그리고 마음을 다 쏟으며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이던 그런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고 그분께만 우리의 마음을 통한 적이 언제입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누가 질문을 했답니다. 설교와 기도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 목사님은 대답했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쉽고 기도는 항상 어렵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 기도는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나 신앙생활의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교회를 에워싸고 교회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한 교회가 심각한 분쟁에 휘말리고 죄의 추문들이 교회를 부끄럽게 하기 전에 교회를 무장 해제 시키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도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바쁘게 만들어서 마음이 기도에서 떠나게 하고 바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을 부패시켜서 기도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렇게 무장이 해제되고 나면 간단한 것입니다.
(예화) 저는 한번 글을 읽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코털 두 개를 뽑았는데 이틀 뒤에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 남성들 코털 많이 나오면 뽑습니다. 코털을 뽑으면서 상처가 났는데 균이 침입해서 하루 만에 패혈증이 걸렸는데 패혈증에 걸리면 대개 이틀 안에 죽습니다. 피가 균에 감염이 된 겁니다. 체구의 건장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순식간에 죽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코털 뽑는다고 죽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 집에 가서 실험해 보십시오. 그런 정도를 이길 저항력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늘 있습니다. 한 사람은 30대 가장입니다. 직장생활 하다가 아이들 데리고 서해안에 조개잡이를 하러 갔습니다. 낮에 밥 잘 먹고 조개잡이 하고 와서 온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니까 몸살 난 줄 알고 아내가 약국에 감기약을 사다 주었습니다. 정확하게 하루 반나절 있다가 죽었습니다. 원인은 맨발로 백사장을 걷다가 조개에 베었습니다. 그리로 비브리오 패혈균이 들어가서 패혈증이 걸린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변을 걷는다고 모두 이틀 후에 죽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교회에 그런 기도의 세계를 허뭅니다. 교인이 이만큼 줄면 교회는 이게 뭔 일인가 생각하지만 기도가 이만큼 줄면 그것 때문에 당회로 모이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서 귀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보면 예수께서 어디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엔토포티니’(ἐν τόπῳ τινὶ)라고 나오는데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in certain place' 입니다. 어떤 장소에서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비교적 꼼꼼하게 기록하고 싶어 했던 누가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그 장소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장소가 이름이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전체를 놓고 볼 때에 예수님의 생애는 끊임없이 여행하는 생애였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죄인들이 있는 곳, 병자들이 있는 곳, 무지한 사람들이 진리로 깨우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여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동가식서가숙 하는 생애였기 때문에 특별한 정해진 기도의 장소를 확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기도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럼 한번 물어봅시다. 언제 환경이 우리 신앙생활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신학교 다닐 때 같이 다니던 형제가 하나 있었는데 야간 신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날은 좋아서 막 기뻐합니다. 왜 그러느냐 했더니 드디어 직장을 그만 두었답니다. 그래서 어떡하려고 했더니 주님께 맡기고 이제는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를 할 거랍니다. 실제로 저도 직장 다니면서 신학교를 다녔는데 정말 눈물 납니다. 새벽기도 4시 반에 일어나서 교회 청소하고 새벽기도하고 직장으로 달려가고 직장 끝나고 학교로 뛰고 학교 끝나고 나면 열시 반 기도하고 내려오면 열한시 전철 타고 집에 오면 열두시, 한 시간 책이라도 보고 자면 세 시간밖에 못 잡니다. 숙제는 언제 하고 일은 언제 하고 괴로운데 그만 뒀으니까 너무 부러운 겁니다. 정확히 6개월 지나고 나니 다시 직장을 잡아야 한 답니다. 전에는 시간이 너무 없으니까 교회 가거나 채플실 가면 기도는 많이 못해도 눈물이 나온답니다. 왜 너무 괴로우니까!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더 많이 하고 공부도 해야 되는데 시간이 없는데 시간이 많아지니까 TV프로에 대한 지식만 해박해 지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인 우리에게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축구로 말하자면 어웨이 경기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축구를 하는데 우리나라를 위해서 축구를 하는데 저쪽에서 수만 명이 야유를 하고 빈병들을 던지고 이러는 어웨이 경기, 언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렬히 간절히 기도하던 때가 우리 생애에서 가장 편안하고 한가하던 때였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여러분들에게 하면서 반성을 많이 합니다. 정말 저의 생애에 있어서 충만한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았던 때를 돌아보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장실에 앉으면 피를 쏟고 공부하다가 연구실에서 주저앉아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그럴 때 오히려 충만한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끼니가 없어서 가족들이 고통을 받을 그때에 오히려 영혼은 자유로웠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어디에 가시든지 그분은 제일 먼저 정해진 기도시간이 있었고 정해진 기도의 장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당신 자신의 마음을 쏟아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는데 재구성을 해보면 이런 겁니다.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밤늦게까지 전도하고 병고치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느 숙소에서든지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고단하니까 눈을 뜨고 보니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물어 봅니다. 예수님이 어디 가셨는지 보았는지 몰라 나도 지금 일어났어. 어디 가셨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 찾아보자. 그러고 찾아보니 저기 빈들 사람의 눈에 뛰지 않는 곳에서 언제부터 나오셨는지 간절히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시니까 감히 가까이 범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 끝날 때 까지 기다리신 겁니다. 이게 문맥입니다. 황당한 얘기가 아니라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한적한 곳에 가시더니 그날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항상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한 15년 20년 전에 예수님이 언제 기도하셨나 보니까 물론 언제나 기도하셨지만 개인적으로 기도하시던 때는 대개 새벽과 깊은 밤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부담스러운 모본을 남겨서 새벽잠도 못 자게 하시고 이렇게 하셨을까 한 열흘 동안 깊이 생각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새벽 아직까지도 미명에 기도하셨을까! 열흘 동안 깊이 탐구한 결과 거기는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벽에 일어난 위대한 일들을 다 꿰면서 예수님의 새벽기도는 그런 맥락이다 했는데 크고 위대한 일들이 새벽에만 일어났습니까? 밤에도 일어났고 낮에도 일어났습니다. 그럼 왜 새벽미명에 기도하셨나! 간단합니다. 낮에 기도하시지 않으시려고 밤에 기도하신 겁니다. 왜? 지금 환자들이 병자들이 수없이 몰려오는데 나도 기도해야 되니까 세 시간 휴업 기도하러 가면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갑니까. 그 사람들이 아직 밝지 않아서 예수님을 찾으러 오지 않고 곤히 잠든 그 시간에 예수님은 당신을 헌신함으로써 한낮에 사역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축적하시고 모두 돌아간 다음에는 예수님이 다시 밤 시간을 헌신하여 자신을 재충전하시고 이렇게 하면서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생애는 쉼이 없는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삶을 사신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바쁘고 고단하면 그래서 기도를 못하고 한가하고 여유로워지면 마음의 긴장을 잃어버리고 부패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기도가 그렇게 중요한데도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불신 남편을 위해 회심하지 않는 자식들을 위해 걱정하고 염려하는 시간에 십분의 일 만큼 마음을 쏟아 기도했어도 가정은 복음화 되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바쁘고 환경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면 다합니다.
어느 날 우리 교회에 부목사 한 사람이 교역자들에게 보고를 하는데 자기가 요새 사역을 하면서 얼마나 바쁜지를 장황하게 보고를 하는 겁니다. 화장실 갈 시간이 없답니다. 그날 저녁에 동네 영화관에서 부부가 만났습니다. 바쁜 건 사실인데 왜 만날 수 있었습니까? 영화를 좋아하니까! 아무리 바빠도 좋아하는 것은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데도 기가 막히게 시간을 내서하고야 맙니다. 그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정말 우리의 생애를 돌아보면 객관적으로는 정말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인데 누가 봐도 기도할 수 없는 환경인데 너무 그 시간이 좋으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던 경험이 있을 겁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생각합니다.
(찬양)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교수가 되고 첫해였는데 어느 날 마가복음을 읽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고 숙소로 돌아오니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기 위해 모여 있을 때 일일이 한 사람씩 고쳐주셔서 그다음 이튿날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에 가시더니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예수님의 생애는 머리 둘 곳 없는 생애였고 태어나셔서 마지막 십자가에 숨을 거두실 때까지 예수님이 하나님 잘 섬기도록 이 세상의 환경이 그분을 밀어드린 적이 없건마는 당신의 온 몸을 찢으시는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매달리셨던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생각을 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희생 도대체 나의 삶에 십자가라는 것이 있는가! 정말 예수님을 위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나는 전 세계를 다녀 봐도 우리나라만큼 완벽한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나라는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거의 핍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핍박받고 예수 믿는 것들은 무식하고 무지랭이라고 사회적으로 박해를 받던 때보다도 우리는 오히려 기도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우리를 속박해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자유롭기만 하다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것이고 주님의 은혜에 목마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목마름이 없습니다. 부요하고 넉넉하게 사니까 핍박과 고난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향한 가슴을 찢는 애절한 기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절실한 몸부림, 이 기도 제목이 성취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눈을 감아도 좋습니다는 영혼의 절규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피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형편과 우리의 개인의 영적인 상태, 우리 가족들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잣대 같은 것들에 있어서는 정말 우리가 그렇게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가슴을 찢는 몸부림이 없이 살아도 괜찮은 상황인가 돌아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기도의 영으로 기도의 은혜로 이런 모든 환경들을 극복하고 이기면서 살아가는 희생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지워 주신 사랑의 십자가라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맨 처음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부탁 받았을 때 나는 여러분들 자녀의 회심 문제에 대해 설교하고 싶었습니다. 근데 이미 벌써 이 본문이 나갔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러 오신 여러분 자녀들 중에 아직 구원 못 받은 자녀들 있지요? 부모로서 그 아이를 위해 얼마나 눈물을 흘려주었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 불신 가족들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신 눈물 흘려주고 기도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여기저기 교회에 성공 사례는 있지만 정말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어보셨습니까? 하늘로부터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그 거룩하신 영광 앞에 쏟으며 그 영광이 우리 자신 안에서 뿐만 아니라 조국의 교회에 그리스도의 몸인 모든 보편 교회에 그리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이 악한 세대위에 물같이 부어지도록 그렇게 간절히 마음을 모으고 교회가 기도회로 눈물바다가 되어 본 적이 언제입니까?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깊은 헌신 그 속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과 투쟁하고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께 쏟아놓지 못하게 하는 모든 정신의 방황들과 대적하며 하나님 한분을 찾아가는 영혼의 고정된 시선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쏟는 이 모든 노력 속에 우리들이 환경을 이기는 커다란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겨울에 비치는 햇살은 따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커다란 볼록 렌즈에 모아서 비추이면 종이를 태우고 헝겊을 태워 불을 일으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고 그분께 우리의 중심을 쏟기 위해서 환경을 이기고 상황을 극복하는 그런 능력과 단호함 이것이 우리에게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한 신자의 마음속에 기도의 은혜가 마르게 되면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그것을 꽉 붙들고 헌신해야 되겠다고 하는 선한 의지의 결단이 생겨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말씀이 개념으로 계속 돌면서 우리에게 지적인 즐거움 정도로 가져다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어떤 능력이 파워가 말씀을 들어도 나오는 게 아닙니다. 기껏 말씀을 가르쳐 놓으면 그 칼로 그 말씀하고 안 맞는 사람 목에다 갖다 대고 위협을 하는 정도 밖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는 날까지 환경은 우릴 도와주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 예수 믿으라 믿으라 그랬더니 안 믿습니다. 이제는 철이 좀 들어서 말귀를 좀 알아들어서 믿으라 믿으라 그랬더니 이젠 대학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된답니다. 그리고 부모들도 대학 떨어지면 하나님 영광 가리운다고 하면서 교회도 안 보내고 공부만 시키는 겁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대학을 들어가서 이제는 예수를 열렬히 믿겠지 열심히 기도하겠지 하지만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1-2학년 때 무슨 미팅을 하니 뭘 하니 신나는 겁니다. 좀 두고 봐서 4학년 때쯤 돼서 이제는 시들해졌습니다. 이제는 좀 열심히 믿으려니 했더니 이제는 대학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려운 취직의 문을 뚫기 위해서 학원을 다니고 스펙을 쌓는다고 미치는 겁니다. 직장을 들어간 다음 이제는 예수를 좀 제대로 믿고 기도하려나 했더니 적응하느라 너무 바쁘답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니 이젠 승진을 했기 때문에 더 많이 회사에 헌신해야 된다고 합니다. 회사도 적응해서 좀 되려나 했더니 이제는 결혼할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한테 섬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혼을 해서 이제는 좀 괜찮으려나 했더니 혼자 살다 둘이 사니 정신이 없다는 겁니다. 한 1년 지나서 적응이 되려니 했더니 애가 나오는 겁니다. 애 하나 둘 셋 낳으면 십년 동안 영적 침체입니다. 애가 좀 자라서 뭐 좀 하려나 했더니 애들이 속을 썩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애들 셋을 대학까지 가르치려고 하면 한 사람당 3억씩 9억을 준비해야 되는 겁니다. 미친 듯이 돈을 버는 겁니다. 애들 다 졸업시켜서 이제는 좀 괜찮으려니 했더니 먼저 시집간 애부터 애를 하나씩 낳아서 계속 맡기는 겁니다. 얘네들 다 커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 이제는 정말 여유가 있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기운이 없는 겁니다. 그렇게 인생이 끝나는 겁니다. 도대체 어느 인생의 구간에 환경이 우리를 도와주는 겁니까!
우리 하 목사님도 인정하지만 저는 강철 같은 체력을 타고 났습니다. 48시간 정도 눈한번 안 붙이고 공부하고 책상 밑에다 요강을 갖다놓고 22시간 동안 일어나지 않고 에세이를 쓰고 17시간 동안 빵하고 물하고 요강 갖다 놓고 히브리어 성경을 읽은 사람입니다. 지금 그렇게 못합니다. 하루 철야를 하고 나면 일주일 갑니다. 80인생의 절반이 40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계산입니다. 80인생의 40을 살았으면 3분의 2를 산 것입니다. 그 뒤는 품질이 안 좋습니다. 육체적인 품질이 아니라 질이 그 질을 못 따라 가는 시간이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서 탁월한 지혜라도 있으면 좀 나은데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 철이 들지 아니하면 40을 살면 인생의 70%를 산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환경의 핑계만 계속 대고 세월이 흘러가봐야 우리의 삶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일 내가 죽노라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환경을 이기셔야 합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세 번째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고 마치시매 라고 나옵니다. 번역이 잘못 되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에파오사토'라고 나옵니다. 이 단어는 여러분들이 모르시지만 이 단어하고 똑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머리에 있었는데 그 단어가 '샤바트'라는 히브리 단어입니다. '샤바트'가 처음 쓰인 데가 언제인가 하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시니라 할 때 쉬신다는 단어입니다. 번역하면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더니 라고 번역합니다. 예수님의 그날 기도가 공중전화를 거는 것처럼 짤막한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끝낸 후에는 예수님이 휴식을 취하셔야 할 정도로 장시간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장시간의 기도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기도가 깊은 기도라는 것은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기도가 깊은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시간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깊이는 시간의 길이와 필연적인 관계는 없지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런 반문을 제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성경에 보면 간단한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위대한 기도가 등장하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기도입니까? 구약에서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다가 해가 떨어집니다. 원주민들은 그 지형에 익숙해져 있지만 가나안을 정탐했어도 그 지형에 어두우니까 원주민들을 추격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여호수아가 하늘의 해와 달을 향해 명령합니다. 해야 거기 멎어라 달아 너도 거기 멈추어라. 이것은 하나의 변형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변형된 기도를 모두 따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변형된 기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병자를 고치거나 능력을 행할 때도 변형된 기도가 나옵니다. 모두 짧은 기도로 큰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위대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짧았지만 그렇게 짧게 기도할 때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그렇게 짧은 기도로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믿고 기도하면 받은 줄로 알라 하셨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그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그 믿는 사람이 누구냐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아무나 믿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 기도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짧은 기도로 순식간에 능력을 이 세상에 불러 내리던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은 그 기도 이전에 오랜 시간을 기도 속에 자신을 바치며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한 증거가 창세기 34장 35장에 나옵니다. 3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는 너희와 함께 가나안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백성들이 각성하고 회개하기 시작하고 단장품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회막을 만들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기도하게끔 배려했습니다. 불새출의 지도자 모세마저 돌아가 버린 그 회막을 홀로 지키던 젊은이가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나 깊이 기도하는가 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헌신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 기도가 드라마 볼 때만큼 집중하는 기도입니까? 정말 우리의 기도가 마음을 쏟고 간절히 매달려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는 기도의 실천이 우리에게 얼마나 드뭅니까! 정말 우리들 중 기도의 달콤함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한국 교회는 30년 전만 해도 금요일은 교회에 사람들이 가득 찼고 그야말로 11시부터 새벽4시 까지 정말 철야기도였습니다. 그것을 내가 지금 똑같이 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계속 하던지 안하던지 형식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그 가난하던 30년 40년 시절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눈물이 있고 간절한 절박함이 있는 매어 달리는 그 무엇이 있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시간적인 헌신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도에 대하여 할 때마다 우리 목사님 하고 같이 다니던 신학대학원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3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 번져가고 체류탄이 교정으로 날라 들던 때였습니다. 저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결혼 한지 7년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학교 옆에 살았기 때문에 체류탄 가스를 먹고 기관지염에 걸렸는데 한 달에 통 털어 수입이 15만원 밖에 안 되었는데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 가는데 의료보험도 없으니 만오천 원 입니다. 일평생에 나를 가장 사랑하시던 할머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암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어느 사기꾼이 사기를 치고 도망을 쳐서 경매에 넘어가고 매일 빚쟁이들이 와서 우리 보고 길거리로 나가고 방을 비워 달라고 건장한 사람들이 와서 협박을 했습니다. 사면을 다 돌아봐도 형제, 친척, 친구, 이웃 누구 하나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삼삼오오 학교에 모여 웃고 깔깔대고 간식을 먹고 아니면 운동을 하고 하는데 나는 아무 낙이 없었습니다. 학교는 휴교를 했습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일념은 있어서 그 속에서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날은 교수님 석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데 일어나는데 바닥이 휙 도는 겁니다. 그게 뭔지를 몰랐습니다. 며칠에 한 번씩 문에서 쓰러졌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니 영양실조였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양실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주님이 원하셔서 이 신학교에 들어왔고 하나님이 원하셔서 학교 옆으로 이사 왔고 최선을 다해서 살려고 하는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치는 것일까! 조금만 숨통 돌릴 길이 있어도 기도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이건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아침 일찍 나와서 네 시까지 공부를 하고 네 시 반쯤 되어서 채플실로 올라갔습니다. 방학 때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혼자 조용히 앉습니다. 원래 소리 지르며 기도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너무 인생이 벼랑 끝에 몰리니까 앉자마자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는 겁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주님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정말 나를 버리시렵니까. 여기에서 나를 버리시려면 예수 안 믿을 때 그냥 놔두시지 왜 여기까지 이끄십니까. 그렇게 눈물을 쏟고 집에 돌아가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학교 다니는 학생들 눈물을 닦아 주면 복이 있을 겁니다.
제가 교회를 하고 나서 매년 전국 전 세계의 신학교 20개 정도를 매년 다니면서 돌아다니면서 하니까 15개 정도 매년 책도 주고 장학금도 주고 밥도 사주고 그럽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겁니다. 신학생들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매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짧으면 한 시간 반 길면 세 시간 정도 기도를 하고 나면 머리 끝 부터 발까지 여름인데 셔츠와 바지와 내복이 다 젖어서 계단을 걸어 내려옵니다. 주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습니다. 그때 즐겨 불렀던 찬송입니다.
(찬양)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 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걸어가다가 계단에 주저앉아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같이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하나님 저희들을 버리지 마옵소서. 울고 내려오다가 울고 또 내려오다가 울고 한 달 반 지났나요.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는 귀한 체험을 그 기도 시간에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나를 설교자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세상을 움직일 위대한 설교자가 되겠느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위대한 기도자가 되겠느냐고 양자택일을 하라고 묻는다면 난 30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 놓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중심을 다 쏟아 부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여러분들이 운명처럼 여겼던 실패는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실패를 극복하고 이길 힘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인생이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가서 미력이나마 나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 내가 여기 살아 있는 것이 근심이 되지 않고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시간을 기도에 쏟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네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본받고 싶은 감화력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당시에는 세례 요한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서 간절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아 내가 예수님처럼 저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저렇게 우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녀를 둔 여러분들에게 내가 항상 묻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이렇게 신앙생활하다 돌아가시면 자녀들이 부모인 여러분들에게 어떤 인상을 갖게 될 터인데 그 인상이 어떤 인상일까요? 지금처럼 그냥 이렇게 살면 여러분들이 죽고 난 다음에 아이들이 다 자라서 우리 엄마 아빠 돌아가신 날이다. 우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자 할 때 과연 그 자녀들이 이런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요.
(찬양)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니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구역의 식구들이 여러분들의 아내가 남편이 여러분에게 기도를 배우고 싶어 한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성도의 길을 훌륭하게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못지않게 중요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구원 받는 순간 기도의 학교에 입학 하는 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계속 기도의 훈련을 받으며 승급해 갑니다. 오래전에 예수 믿었지만 계속 미끄러져 아직도 1학년이 아닙니까?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기도의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예화)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이가 초등학생이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엄마 우리 전도사님이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 때 목사님이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서 설교할 때 나는 믿어지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 우리 선생님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씀 하시며 눈물을 흘리실 때 나는 모든 게 믿어 졌어” 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심의 표현은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주실 것이고 연약한 자에게는 힘을 주실 것이고 지식이 모자라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지식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인간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시작이 될 것이고 믿음의 놀라운 역사는 거기서 출발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한 분 굳게 붙들고 기도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