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마음의 중심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녹취자:박세원
표제에 다윗의 시라고 되어있고 이 시는 전형적인 탄원 시입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악인들에게 받는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을 시작하기 전 시인은 조용히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회고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에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 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통촉한다. 혹은 헤아린다고 하는 이 말은 원래 히브리어에서 판단한다. 본다. 이런 말입니다. 나는 예전에 번역이 훨씬 좋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자와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존하신 왕과 그 왕께 탄원하는 힘없는 백성과의 관계의 훌륭한 유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 기도에 있어서 마음의 중심 성을 생각해보고자고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 인간처럼 말을 해야지만 그 말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겨우 헤아리시는 분인 것처럼 신인동형론 적으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셔서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무엇을 아시고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값진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어떤 사정과 형편을 아시는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덕스러운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걸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전달되는 것은 기도와 하나님 말씀의 형식으로서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어떻게 보면 나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기도이지만 그 기도가 성취되고 응답되는 과정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러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의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올리는 열렬한 기도의 자세가 기도에 있어서 매우 중시됩니다. 그리고 아마 기도에 있어서 뜨겁고 간절한 열렬한 이것이 없으면 진정으로 기도가 기도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고상하고 높은 기도의 제목을 아무런 마음의 떨림이 없이 되뇌는 기도보다는 아주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기도라 할지라도 자기의 수준에서 온 마음을 쏟아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의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가도록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의 열렬함과 함께 그거보다도 더 중요하게 토대가 되어야할 기도의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언어가 마음을 반영하는 언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 시인이 이 시를 쓸 때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은 왕 앞에 나아와 재판을 받는 백성들의 재판의 문맥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가지고 왕 앞에 나옵니다. 왕이여 나는 이러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했고 나를 이 억울함에서 풀어줄 사람이 없으니 왕께서 친히 나를 재판하여 주옵소서. 하며 그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왕은 아무리 왕이지만 백성들의 모든 삶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팩트는 이 왕이 본적이 없습니다. 모든 재판을 위한 정보와 자료는 이 부르짖는 탄원자의 말을 통해서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자신의 모든 정신을 모아서 이 탄원자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거기서 정보를 획득하고 왕다운 판단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다운 판단력을 행사하게 될 때 그때에 올바른 판결이 나오고 억울한 자는 그 억울함에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런 왕 앞에서 재판의 맥락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호소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는 것을 겨우 인식하실수 있는 인간 왕이신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하나님이 판단하시기만 한다면 자기의 마음에 옳게 내린 그 판단을 실행할 수 있는 그 무한한 능력이 왕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진실을 그 왕에서 고하였던 것처럼 이 시인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간절한 탄원이야 말로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는 가장 훌륭한 표현인 것입니다.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라고 할지라도 언어와 마음사이에 일치가 이루어 지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 앞에 호소력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흠 없이 살았던 한사람의 자기를 자랑하는 고백은 죄를 짓고 자기의 비참하고 더러운 사정을 일치하는 언어로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그 세리보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께 아뢰지 아니한들 하나님께 드러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나를 대하여 당신을 숨길 수 있을지언정 나는 당신을 향하여 나를 숨길수가 없지 안 사옵나이까 하였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마음으로 주께 일치하게 아뢰지 않아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는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 이전에 먼저 자신의 말과 마음의 사실이 합치하는 간구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그릇행하고 혹은 오류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오류에 빠진 사실을 정직히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당신의 진리의 빛을 비춰주십니다. 죄에 빠졌던 사람들에게는 용서를 비참한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료한 뜻을 보여주십니다. 기도에 있어서 이 말의 정직성은 모든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없다면 빛이 빛인 줄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고 따뜻함이 없다면 차가움이 무엇인지를 모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상처가 있는 곳에 거기에서 바로 용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도 속에서 자기를 바라다보는 반성의 작용이 없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자기의 신상에게 비는 것에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들도 자기의 온몸을 상처 내며 상하여 피 흘리기까지 자기의 신을 찾는 열렬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역을 돌아보면서 기도할때마다 우리의 사역을 반성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양떼를 돌보지 못한 것을 숨김없이 하나님께 아룁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애쓰지만 나의 목양의 손길이 다 미치지 못하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을 합니다. 행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지만 자신의 마음이 그 진리를 붙잡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언어와 우리의 중심을 일치시키는 작업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칼빈이 말하는 단순하고 하나 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어린아이 같은 경건의 시작입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기도하는 나 자신의 의식조차 사라지고 나의 도움이요 구원자요 산성이요 바위이시오. 나의 피할 피난처이신 그분만이 가장 커다란 분으로 우리의 지성과 마음을 압도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을 향한 온전한 의존의 마음 안에서 신뢰를 그 신뢰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약할지라도 주님을 우리의 기도의 언어와 마음을 일치시켜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기억하시고 돌아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