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의 기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마지막때와 기도를 연결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교훈 가운데도 종말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때에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말씀도 기도에 관한 교훈을 하시다가 결론에 나온 말씀 입니다.
이 얘기는 뭘 보여주냐 하면은 이미 2000년전에 마지막때에 일어날 거대한 물질문명과 그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면서 살아갈 현대인들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것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로마는 이미 굉장한 문명을 누리고 있었고 아마 다른 곳에 살다가 로마에 오는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그렇게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주곡정도였습니다.
오늘날에 이 폭발적인 물질문명은 인간을 점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 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이렇게 물질문명을 발전시키고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가면서 상당한 삶에 질을 누리게는 되었지만은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더욱더 물질에 골몰하게 된것이죠. 그런속에서 인간에 정신은 점점 갈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런속에서 전개될 오늘날을 이미 알기라도 하시는것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라고 말합니다.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그런 시대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예요. 나이가 들면서 물질문명에 대해서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문명비평가들이 물질에 발전에 대해서 비평하는 것들을 들었지만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보면서 인제 이것이 정말 심각하다는 거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웰스가 말한 것 처럼 우리는 필연적으로 문명과 물질속에 살지만 그것을 마냥 탐닉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오히려 금욕주의도 대안일 수 없고, 탐닉하는 것도 대안일 수 없고 우리들이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물질생활을 해나가야지만 우리에 정신과 영혼에 건강도 유지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하는말이 ‘근신할찌니’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근신한다하는 것은 스스로 삼가해서 그래서 자기에 마음이나 생활이 그저 의식하지 못한채 자기에 본성을 따라서 흘러가는 것을 통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근신이예요. 그런 ‘근신을 하라’ 이런 근신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이죠.
그래서 잠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은 정말 바쁘고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자기에 행복을 찾고 하지만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일이 아니고 또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해야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식생활에 방탕이 치명적인 건강에 잘못을 가져오는 것처럼 우리에 마음을 끊임없이 근심시키고 우리가 이세상에 속에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있지만 우리는 이 사람들과 가는곳이 다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것이예요.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사실 이말을 사도가 하기 위해서 앞에 이야기들을 쭉 끌어오는거죠. 그 이야기가 뭐냐하면은 ‘기도하라’는 이야깁니다. 기도하라. 그래서 세월이 흐를수록 기도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커다란 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루이드 존스목사님이 설교와 기도의 차이를 이야기해달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언제나 어렵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기도는 내것이 아니예요. 손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예요. 설교는 한번 습득을 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내것이 되면은 은혜가 떨어져도 그 지식까지 사라지진 않아요. 그런데 기도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되고 있는 동안에만 자기 품에 있는 기도지 안되고 나면 그 기도는 자기에 것이 아녜요. 물론 예전에는 기도 많이 했겠죠. 거 뭐 누구는 안그렇겠어요? 그러니까 중요한거는 항상 그 기도속에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것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고 자기에 관록을 자랑할수 있는 성질에 것도 아니예요.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이예요. 오늘도 나와서 인제 새벽기도 쭉 인제 하면서 그 생각을 했어요. 정말 마음과 영혼에 자유가 있어야지만 이 기도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예요. 사실은 수 년동안 늘 하는 생각인데, 마음속에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요. 아직도 나는 답을 못냈어요.
정말 정말 옛날에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마음을 모두 쏟아붓던 그런 기도는 기도가 뭐 항상 안 되진잖아요 될 때도 있고 안될때도 있고 한데, 왜 그렇게 정말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그때 마음이 막 강력하게 빨려들어가듯이 그렇게 쏟아져 들어가는 기도는 왜 재현되지 않는 것일까? 이게 순수한 나에 죄에 문제인가? 아니면 원래 그런거는 마치 부부가 살면서 그 살아가는 시기마다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빛깔이 다르듯이 그런것인가? 그런 의문들이 아직 가슴에 참 많이 남아있어요. 그러나 분명한거 하나는 그거에 대한 답이 어떤것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앞에 매일매일 기도해야한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마음을 쏟아부어서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예요.
제가 회심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하나에 기도에 맛을 보았던 것은 한 10월달쯤, 한 10월달까진 아니고 한 75년도 한 5-6월정도에 회심을 하고 그리고 이제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던때에 일이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수준에 맞게끔 다루시기 때문에 기도에 제목도 하나님이 우리에 수준에 맞게끔 그렇게 주시죠. 그런데 그때는 사실은 하나님에 나라나 하나님에 영광이나 그리스도인에 소명이나 창조에 목적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어요. 다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셨다는거 그런 확신이 있었죠. 근데 어째튼 개인적인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일은 내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하나님은 아주 고상하고 훌륭하고 높은 목적을 가지고 그런 것들로만 우리의 기도를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에 가장 약한 부분들 그것들을 사용해서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다루시는 거죠.
그래서 내가 언젠가 책에 그런 얘길 했는데 하나님에 나라와 영광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 이런 기도에 제목들은 굉장히 훌륭한 제목이고 아침마다 고생하는 내 변비를 낫게해주시옵소서 이건 훨씬 수준이 떨어지는 기도에 제목임엔 틀림이 없잖아 그런데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기도에 제목이 아니라 매달리는 기도에 자세예요. 그래서 그렇게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도 심령을 바쳐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매일 아침마다 고생하면서 자기에 병을 낫게해달라고 간절히 부르짓는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더 훌륭하게 주님에 사람으로 바꾸어 가시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에 방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나에 행복과, 그러니까 주님에 뜻으로부터 멀어져 추구하는 나의 기쁨과 만족은 그 초점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초점을 맞추는것보다 때로는 훨씬 강할때가 있는데 그것은 강해도 하나님앞에 기도의 초점과는 맞지가 않기 때문에 그 마음이 기도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거지. 그래서 정욕을 따라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처음 기도할 때는 열정이 있는 것 같으나 자기를 비우고 계속 기도하면 결국은 기도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거예요.
이에 비해서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진 올바른 기도는 처음에는 자신에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 것 같아도 마음을 쏟아서 계속 기도하면 초점이 맞아지면서 그러면서 깊고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것이예요. 이것이 바로 기도의 차이예요. 그런데 마지막때가 되어서 우리들이 물질에 번영속에 살고 그 속에서 자기가 찢기고 그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하는 혼란들이 거듭될 때 이 마음자체가 기도에 초점을 맞추기가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이예요. 그렇게 되면은 결국은 온전히 마음을 쏟아서 기도할 수가 없게 되는것이죠. 그래서 그때 기도를 깊은 기도에 맛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 이렇게 매달릴 수도 있구나하는거를 깨달았어요.
지금은 다 사라졌지만 삼각산 기도원에를 올라다녔는데, 지금도 다시 세워질 가능성, 요즘도 기도한다고해요 거기서 아무것도 이렇게 못하게 해서 텐트쳐놓고 그렇게 기도한다고해요 그런데 건물이 허가날 가능성은 없겠죠. 그치만 이제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무지무지하게 추워요 삼각산에 맨 제일 높은데. 거기에 보면은 맑은 날이면은 인천 앞바다서부터 저기 태능지나서 퇴계원까지 보일 정도로 전망이 아주 높아요.
겨울에 무지무지하게 추워요. 그렇게 기도하다 침을 바르면 입술이 다 얼어붙을 정도로 그렇게 추워요. 막 두툼한 잠바를 입고가서 기도해도 한시간 이상은 못하고 대개 20분 30분기도 하다 들어왔다가 다시 몸 녹이고 가고 그랬는데 거기서 기도하면서 아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이런거구나 매달린다는 것이 이런거구나 하는 것을 배웠어요.
그래서 머리속에 있는 수많은 생각이 필요없고 실지로 기도해야합니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쳐주고 모든걸 인턴쉽에 와서 가르쳐주고 해도 절대로 가르쳐줄 수 없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기도예요. 그것은 가르쳐줄수가 없어요. 방향은 일러줄수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슴하신것처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내용은 가르쳐 줄순 있어요. 그렇지만은 진짜 기도하게 하는 것은 아무도 가르쳐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시련과 고난이 감사한 이유는 시련과 혹은 고통을 당하면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우리를 현혹시키는 많은 물질에 세계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따라가는 자신이 그것들에 의해 배신을 당할수록 우리에 마음은 주님을 붙잡고자하는 욕구가 강해지게 되는거예요.
그래서 그게 기도에 있어서 최고에 준비운동은 상한 심령이 되는거예요. 상한 심령이 되는거. 그래서 마음이 깊이 상해서 쓰라려질 때, 타박상같은거 쾅하고 입으면 누가 손만 대면 자지러지게 아프잖아 마음이 그렇게 되는거예요. 예민하게 되는거. 그것이 인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것이죠. 저도 이렇게 돌아보면은 막 정신없이 바빠요. 너무 너무 바쁘고 아 이게 마치 바퀴없는 바퀴없다고 하면 말이 안되지만 브레이크없이 그냥 막 굴러가는 것처럼 굴러가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문제는 과거를 이렇게 돌아보면은 한가한 것이 기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예요. 항상 모든 여유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어요. 그 여유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한 공간을 마음속에서 비워두는거예요. 내가 모든 일을 하지만 그것이 주님을 대신해서 내 마음을 꽉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주님을 찾도록 비워진 마음 그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마음이 끊임없이 그렇게 하나님앞에 매달리는 것을 싫어해요. 그것이 문제인거예요. 가장 큰 적은 그거지 환경이 아니예요. 그래서 내 인생에 기도에 최고에 호황을 누리던때에는 대부분 정신없이 사역 하거나 정신없이 바쁜속에서 그런 기도에 호황을 누렸어요.
육체가 한가하면서 기도속에 몰입하던 때는 거의 없어요. 그래서 이것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문제예요. 그렇게 어려운때를 지나는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름이니까 몸이 휘지고 굉장히 힘들어요. 그거는 사실이예요. 그래서 나도 이 여름이 속히 갔으면 좋겠어요. 그치만 열심을 내세요. 힘을 내서 그래서 하나님앞에 더 열심히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이 더욱 열심히 주님앞에 기도하며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고 매일매일 자기를 이기며 더 온전해져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나와 그리고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기도를 통해 공급해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에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