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문을 위해 기도하라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2-3)
골로새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여기에서도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대해서 언급하고, 여러 실명이 거론된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전하는 것으로써 서신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인사말 뒤에 전도할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사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전도할 문’이라고 나오지는 않고, ‘말씀의 문’이라고 나옵니다. 'θύραν του λόγου', 'Logos'를 이야기 합니다. “로고스의 문을 열어 주어”라고 나옵니다. 성경에서 ‘로고스’는 제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하고 우리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1장에서부터 전개하였던 우주적인 기독론,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의 엄중한 구속의 사실들, 미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할 신약의 백성들, 단지 바라보아야 할 나라가 아닌 침투해 들어가서 현재적으로 이미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향유자로서 무엇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구원받은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론적 나라가 침투해 들어와서 우리가 이미 그것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의 문제도 그러한 관점에서 단순히 구약의 안식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 뿐 아니라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카타파오시스’와 ‘사바티스모스’의 안식이 침투해 들어와 우리에게 기쁨과 영광을 주고 그 안에서 한 없이 즐거워하는 행복이 바로 주일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주일 성수가 주일을 범했는가, 범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이야기만 하고 우리가 주일에 정말 누려야 할 종말의 기쁨들을 선취적으로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커다란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문’을 ‘상황’이라고도 해석하고, 혹은 ‘입’, ‘전도자의 입’이라고도 해석합니다. 제 생각에는 두 가지 해석 모두 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열려도 전도자의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고 효력 있게 전할 수 없다면 상황이 열린 것이 아니고, 아무리 설교자가 설교를 잘 하고 말씀을 잘 풀어낸다 할지라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열린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 두 가지는 같이 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와 이 세상에 전파되어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설교자의 탁월함을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매우 싫어하시고 그러한 경우에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짧은 성경의 기록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재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사도바울의 경우가 이렇습니다. 고린도지방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 “심히 두렵고 떨렸노라”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마음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사도는 이미 관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그렇게 떨고 두려워하였겠습니까? 고린도에 여러 가지 부패가 있고 철학적인 대적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아데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겠습니까?
전도여행 때 아데네에서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와 논쟁을 합니다. 여기에서 전도를 하지만 그렇게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저의 이러한 해석에 전혀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거기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학자들과 논쟁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열매가 형편없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한없이 가난해진 상태에서 고린도로 왔을 것입니다. 그 때의 고백이 1장에 나오는 고백이었고, 2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다짐하였노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유명한 복음 지혜와 성령에 관하여 철학적 논의를 해갑니다. 어쩔 수 없는 사도바울의 성향을 말했다기보다는 어디를 입구로 해서 들어가고 어디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의 구심점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말한 것이지, 둘 중 하나를 개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저의 생각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향한 변증에는 성공해서 에피쿠로스학자들과 스토아학파 학자들을 꼼짝 못하게 입을 닫게 만들었지만, 사실은 논쟁에서 졌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사도 바울의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가 몇 사람 밖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때 깊이 깨달은 것이 정말 전하고 승부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할 때 비로소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지혜, 소피아에 대하여 알게 되고, 그것에 대해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답게 인생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데 그 지혜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데네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쓸 때는 인생의 말년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고린도전서를 쓴 것이 50년대라고 보고, 이게 60년대 인데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전도할 문을 하나님이 열어 주신다.”라고 하는 것은 단지 설교의 내용이 이성의 설득, 그리스도 예수의 선포라는 사실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심오한 성령의 역사가 함께 일어나서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상황적으로 복음을 전할 길이 열리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열려서 복음의 위대한 비밀이 사람들 속에 각인되고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너무 신비한 분이시고, 알 수 없는 비밀이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비밀스러운 존재이시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진 세계 경륜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고, 왜 이러한 비참한 상태가 되었고, 앞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이고, 어떻게 그렇게 될 것인지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통해 풀리는 것입니다.
제가 2008년도 총신 개강수련회를 가고 4년 만에 2012년도에 갔습니다. 그 전에 총신과 관계를 가지며 세미나, 특강을 하러 여러 번 갔었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라』 책과 청교도에 관한 책들을 읽었던 학생들 속에서 의견이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이 처음에는 뜨거운 청교도 복음으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성주의로 변절되어 가고 있다는 의견과 “아니다. 그게 아니라 저 분 말씀이 맞다. 우리가 워낙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해야 한다.” 등등 강의를 듣고 나면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삼분의 이는 이해를 못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개강수련회 때 저에게 세 번, 네 번 시간을 줬는데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책 내용을 충실하게 이야기 하고 마지막에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때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때 학생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수련회를 참석하고 나서 “봐라. 변한 게 아니라 사실은 핵심을 확장시킨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관심이 없는 학생도 있고 열심히 따라하는 학생도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학생들은 “저렇게 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주의를 가진 학생들도 있고 다양할 것입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제가 정말로 일생을 산 후에 정말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를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던 신학자요 목회자였다.”라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존 오웬의 신학이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종합되면서 어느 해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신학의 중심이 되시는가” 하는 우주적인 열림이 있었습니다.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고 더 자세한 일은 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 후로부터 신학의 어떠한 주제를 만나도 결국 이것이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연관관계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예수를 말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풀렸습니다. 그러한 방식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지 못할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화란의 스킬드나 홀 베르다나, 이러한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구속사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하는 그런 식의 자만심은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야말로 신학의 문이고 하나님이 세계를 어떻게 이끌어 오셨고, 이끌어 가실 것인가에 대한 비밀을 보여주는 열쇠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고전적으로 보면 예수만을 전하는 것이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전도를 보면 사람들의 세계관에 혁명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예수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없지만 대표적인 것을 하나 예로 들겠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고 나서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그 다음에 스데반이 순교하기 전 설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잘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그것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예수만 추가하고 믿어라. 예수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고맙지 않은가? 너도 뭔가 예수님께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경우에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 지식이 종자 씨가 되어서 모든 지식을 교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세계와 인생에 관해서, 이스라엘의 의미에 관해서 대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알던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던 그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적이 왕년에 사라졌던 다윗 왕 때의 영광을 회복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세계에 대한 전망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 역사관, 이스라엘에 대한 관점, 선민사상, 모든 것들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그 중 일부만을 빼서 자기 멋대로 만든 일그러진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옹졸하기 짝이 없는 세계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세계와 우주를 푸는 웅장한 관점이자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선포, 그 의미를 경험하고 아는 것 자체가 새로운 철학사상의 전도와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하나를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설교이고 진정한 전도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신자들의 존재의 울림을 동반하게 될 때 그 선포는 장중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됩니다.
골로새서 1장과 2장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도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을 위해 교회가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목회자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말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신학지식을 가지고 있고 개혁신학을 이야기하고 청교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식을 자랑해도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온전한 복음사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설교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몇 년 했다고 관록이 붙었다고 본문이나 읽고 올라가서 아무 메모 쪽지도 없이 담임목사 따라 한다고 무원고로 설교하면 안 됩니다. 장년예배나 청년예배 강대에 서는 교역자들은 엄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설교를 들어보면 주석 한권도 안 읽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어떻게 열린 교회에서 저런 설교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의 내용 없는 설교, 내용 없는 설교는 잘못된 설교만큼이나 나쁜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세 가지 고민이 묻어나야 합니다. ‘평소에 참 공부를 열심히 하였구나.’ ‘이 본문을 두고 열심히 팠구나.’ ‘자기의 삶을 가지고 씨름하고 고뇌하였구나.’ 하는 세 가지가 나와야 합니다. 첫 번째 것은 그날 나올 수 없습니다. 평소에 조직신학과 성경 신학에 관하여 끊임없이 공부를 하면서 축척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축척되는 것이 정신적으로 유치부에서 초등부, 초등부에서 중등부, 중등부에서 고등부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니까 맨날 지적인 수준이 유치부에 머무릅니다. 그렇게 본문을 폅니다. 본문은 열심히 연구하였는데 유치부 학생이 연구한 수준입니다. 심하게 이야기 하면 유치부 학생이 본문을 놓고 입에 칼을 물고 공부를 한 것과 지적인 수준이 대학원생 쯤 되는 사람이 소파에 앉아서 쭉 넘기면서 ‘이것이 무슨 내용일까?’를 생각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수준이 높겠습니까?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은 입에 칼을 물고 수필을 써도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수필이 나오지 대학생의 수필이나 인생을 달관한 40대의 수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매일 매일 끊임없이 높여가야 합니다. 어디에 가서 발표할 기회도 없고 내가 이것을 공부한다고 해서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공부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보통 열심과 진지한 탐구의 노력 없이는 안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두 번째도 어떻게 보면 당일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유장하게 풀어낼 수 없는 사람이니까 설교하러 올라가려면 적어도 본문을 가지고 깊이 고민하면서 주석을 봐야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 한 권도 안 본 게 너무도 분명합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는데 다른 견해를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권을 읽었거나 아니면 자신의 통찰로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설교가 그러한 모든 내용을 가지고 논쟁하는 시간은 아니지만 옆에 무슨 의견이 있는지 보면 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설교를 들으면서 ‘박윤선 박사 주석이라도 읽고 올라오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껏해야 이 훈노트 달려있는 것 가지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교의 자유는 설교하기 전까지의 부자유함의 결과입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설교할 때의 자유함은 설교하기 전까지의 부자유함의 열매입니다. 부자유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딱 봤는데 ‘나는 이 말씀대로 못 사는데 어떻게 하나? 살려고 노력은 하는데 여기에 부합하지 않은데 어떻게 하나?’ 그 말씀을 보지 않았을 때는 자유로웠는데 말씀이 생각나면 계속 속박되고 부자연스럽고 괴롭습니다. 갈등이 일어납니다. 아픕니다. 그러한 시간들을 많이 거치면서 설교를 하는 순간에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누가 자유롭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도둑질 하던 사람이 있는데 도둑질을 안 한다고 결심을 했다면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도둑질을 끝까지 안한다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완전한 자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속에는 몸부림친 흔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허브 파는 가게에 가서 허브 냄새를 맡으려면 허브를 괴롭혀야 합니다. 손가락으로 막 괴롭히면 향기가 확 납니다. 우리가 손으로 허브를 막 흔들 때 뭔가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그러한 것들이 들어와서 괴로움을 만들어내면 거기에서 향기가 나옵니다.
사실 세 개 다 어렵습니다. 하나도 쉽지 않습니다. 평생 공부하면서 살아야 하고, 두 번째 수없이 설교할 기회가 쏟아져 내려오는데도 치열하게 본문을 탐구해야 하고,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을 붙들고 계속 고민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죽을 맛으로 인생을 살아야만 살아있는 사람처럼 살맛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의 원리입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해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교회 안에서 그것이 울려 퍼지게 해서 그리스도의 세계를 향한 경륜의 비밀에 눈 뜨게 만들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평생 사는 것이 말씀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서 성취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교자 한 사람의 탁월성 때문이 아니라 온 성도들이 붙든 믿음의 철창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에 위대한 일들을 행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