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괴로움과 통곡으로 드린 기도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1:10)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에 대한 마지막 설교가 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한나’라고 하는 경건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엘가나라고 하는 남편의 본부인이었습니다. 남편도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남편을 사랑하는 경건한 여자였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만 그쳤어도 이 여인은 견딜만했을 것입니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은 브닌나라고 하는 첩이 있었는데 그 여인에게는 자식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없더라”라고 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자식이라는 말이 “아이들”이라는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브닌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럿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남성 복수로 나오는데 그것이 꼭 모두 아들들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째든 아들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하여튼 아들 딸 해서 많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한나의 괴로움은 더했습니다. 브닌나는 첩이었을 뿐 아니라 양식이 없는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이제 그 집안에 손을 보게 했으니 본부인 한나를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한나를 심히 괴롭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문맥으로 보면 시집가서 아이를 못낳는 것이 무슨 큰 문제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희도 결혼해서 7년 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저희 할머님이 하시는 말씀이 “애는 해서 뭐하냐. 너희 둘이서 행복하게 재미있게 살면 되지.” 워낙 애를 싫어하시는 노인이었으니까. 하루는 진지하게 그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애야, 천국에도 애들도 있냐?” “그럼요. 천국에 애들도 있지요.” “그럼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가 있겠니?” 하여튼 그러셨지만 그래도 증손주들을 귀여워하셨습니다. 그렇게 노인분도 개화된 세상이니까 우습지만 당시로서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아들이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벤” 영화 가운데 “벤허”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 말입니다. “벤훌” 훌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벤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동사 “바나”에서 왔습니다. 바나는 “집을 세우다”입니다. 그럼 왜 집을 세우는 것과 아들의 관계가 있는가. 여자가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음으로서 그는 그 집안에서 자기의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이 한나는 시집을 갔지만 아직 자기의 집을 세우지 못한 불안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닌나는 여러 개의 집을 세웠습니다. 그의 위치는 점점 굳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가나의 마음은 한나에게 있었습니다. 한나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아내를 덜 사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랑 위에 아들을 낳지 못한 한 여인에 대한 동정까지 보태어졌습니다. 그래서 엘가나는 한나를 깊이 사랑하는 표현을 여러 방법으로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나눌 때에도 브닌나와 자식들에게는 한 몫을 주었지만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면서 마음 속에 있는 한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슬퍼하고 브닌나에게 격동을 받아서 번민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한나에게 다가와서 위로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것을 보면 엘가나도 조금 그런 것같습니다. 아니 그 이야기를 왜 한나에게 와서 하는지, 브닌나에게 가서 해야지, “야, 네가 아무리 애를 많이 낳았어도 내 사랑은 한나다.” 그럴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첩을 가진 남자는 호랑이도 안 잡아 먹는다’고 합니다. 속이 하도 썩어서 먹어봐야 맛이 없다고 합니다. 엘가나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브닌나의 눈에는 남편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런 상식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엘가나가 이제 자기 아내 한나에게 속삭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 아들이 없다고 슬퍼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열명의 아들보다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니까 내가 더 귀하지 않아” 그러나 인간의 슬픔 속에는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슬픔이 있고 사람으로부터 도저히 위로가 안 되는 슬픔이 있습니다. 한나의 슬픔은 후자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름도 착한 한나, 얼마나 발음이 좋습니까? “한나” 얼마나 좋아요. 브닌나가 뭐예요. 브닌나가, 한나, 난 여태까지 많은 그리스도인을 만나봤지만 브닌나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한 사람도 못만났습니다. 한나는 여럿 만났습니다. 인터넷에도 여러번 올라옵니다. “한나”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한나에게 그 브닌나에게 그렇게 많은 자식들을 주셨는데 한나에게는 왜 자식을 안 주셨을까?
그 당시의 문화적인 맥락에서 보면 태를 열고 닫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자가 아이를 못 낳는 것은 하늘로부터 임한 저주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럼 사실인가. 그럼 브닌나는 축복받은 여자이고 이름도 예쁜 한나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여자인가. 우리가 문제를 그렇게 획일적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브닌나가 아이들을 낳은 것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냥 아이를 생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나가 아이를 낳는 것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큰 계획이 하나님에게 있으셨기 때문에 한나에게 아이를 성태치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많이 가졌는데도 도저히 아이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였는가. 섭리사적인 면에서 이제 이 문제를 살펴보고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사무엘이라고 하는 사람은 모세, 다윗과 함께 구약 역사에 구원사의 축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사무엘을 빼놓고는 우리들이 쉽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앞에 있었던 능력이 있는 많은 선지자들을 빼놓고는 구약의 약사를 이야기 할 수 있어도 사무엘을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합니다. 사무엘은 여호수와 이후로 이어지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한 사사시대가 끝나고 그리고 이제 정통 선지자들의 시대를 여는, 왕정시대를 여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수문과 같은 역할을 이 사무엘 선지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인 동시에 또한 직분으로서의 선지자 시대를 여는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선지자의 비전은 모세였지만 그러나 선지자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고, 사무엘에 의해서 왕정시대가 도래하는데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또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람도 바로 사무엘입니다. 그렇게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 인물을 태어나게 하시기에 앞서서 먼저 이 아이를 낳을 엄마인 한나를 하나님께서 신앙적으로 한번 강력하게 연단하여 새사람을 만드시는 이런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중간 결론을 내리자면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남다른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한나가 만약에 시집가서 브닌나 같이 한번 애를 낳으면 둘씩 셋씩 자동으로 막 쏟아 놓았다면 그냥 애를 낳다가 죽은 여자로 기록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기록되었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애를 낳고 죽은 여자가 자기 혼자가 아니고 수없이 많을 것인데, 사람들이 얼핏 보기에는 브닌나가 복받은 여자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자기의 집도 세우지 못하고 첩에게 괄시를 받고 그리고 남편의 동정과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 비참한 이 여인의 처지를 보면서 누구도 한나를 복받은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 한나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기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곧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문제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충분한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를 하나님께서 성태치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브닌나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셔도 그냥 아이를 낳은 여자이고, 한나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부부생활을 가져도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뭔가 자연적인 창조의 섭리, 자연적인 이치를 막으시면서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실 때에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눈에 보기에는 위기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커다란 기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나의 태를 막으신 것입니다. 문제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장이 모두 한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브닌나는 아이를 많이 낳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세월 동안에 브닌나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남편에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 한나는 하나님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태를 막으셨는데 그는 그 문제를 결국은 하나님이 막으신 문제니까 하나님이 푸실 수 있다라고 하는 결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갔어야 하는데, 그는 여러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첩으로 들어오고 그리고 아이를 못낳으니까 거기서 아이가 태어나고 그래서 여러 아이가 태어나는 긴 과정이 있도록 한나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세월을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고 불임 클리닉 같은 곳에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더라’ 안 믿는 사람일 경우에, 그리고 가서 무슨 ‘돌부처의 코를 잘라서 끓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망부석의 코가 잘라져 있습니다. 다 끓여 먹은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하면서 다녔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막으셔서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정답은 하나님이 여셔야 됩니다. 그것은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애를 써도 마지막 내린 결론은 ‘안 되는구나’ 그것만 깨달을 뿐입니다. 주먹으로 쳐서 깨질 수 있는지는 몇번만 두드려 보면 알지, 주먹뼈가 으스러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데도 인간은 하나님이 막으신 문제를 하나님 앞에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과 수단으로 해결하면서 귀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아니 처음 시집가서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즉시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하나님, 나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언제나 나는 나의 집을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 아이를 제게 주시옵소서” 간절히 매달렸으면 브닌나에게 이렇게 괄시를 받지 않고 잘 살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베짱인지 하여튼 갈 때까지 가는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의 심령이 충만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고 염려와 근심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죽이고 찌르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뜨끔’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세월이 흘렀는데도 도저히 어떤 난관이 극복되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데 수없는 세월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신앙까지 버리면서 몸부림을 쳤는데도 전혀 진전이 없고 해결될 것 같다가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고 고쳐질 것 같다가는 다시 덧나는 그런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분명해진 것입니다. 한나에게 문제가 시작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해결된 것은 순식간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응답하셨으니까. 그런데 언제이었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이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염려하고 근심하고 생각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가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소원으로 품고 그분께 아뢰고 간구하고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간절히 빌고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주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릴 때에야 그렇게 오래동안 한나의 피를 말렸던 인생에 있어서 고통스러운 문제에 해결의 빛이 깃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산다.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술먹고 나쁜 짓하고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셔서 당신을 찾으라고 그런 문제를 주셨는데 하나님을 안 찾고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태도가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멸시고 모욕입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한나가 그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한나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처음에 하나님 앞에 올라갔을 때에는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서 올라갔는데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절박하고 간절히 미친 사람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 술먹었니? 그렇게 물어봤습니다. 신령한 사람의 눈이 어두워지니까 이것이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는지 술먹은 것인지 분간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벌써부터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드려서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나 자신이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가 있습니까? 짧은 기도 속에서 ‘주의 여종’ 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 절박한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티끌처럼 낮아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성패는 하나님께 달렸고 나를 성태케 못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내가 아이를 가지려니와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아니하면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결론을 한나가 내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아들 하나를 달라고 올라갔으니까 무슨 그렇게 신령한 기도 제목이 이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기도 제목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를 위해 아이를 달라는 것입니까? 자기를 위해서 아이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내가 아이를 낳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억울하고 분통터지고 브닌나같은 여자에게 멸시를 받고 괄시를 받으면서 동정이나 받으면서 남편에게 이러고 살아야 되는 처지가 너무 견딜 수 없이 괴로우니까 내가 아들 한번 낳아서 저 브닌나를 떡으로 만드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한번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령하고 고상한 기도 제목이 아닙니다. 한나가 기도했을 때 내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그런 감각이 있었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세상적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신기한 것이 기도 제목이 아무리 세속적이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여튼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 우리가 가장 절박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십니다.
‘코 뚫지 않은 소 한 마리를 삼부자가 못 당한다’ 송아지가 어느 정도 큰데 농사일이 바뻐서 코를 뚫지 못하면 그럼 할 수 없이 개처럼 목에다가 줄을 매고 다니는데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산으로 올라가면 막 장정들이 딸려 올라갑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는 말을 무엇으로 억제시킬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코도 마찬가지고 여기 재갈을 먹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이 두 짐승이 결정적으로 약하고 아파하는 부위에다가 재동장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기에다가 재갈을 물렸으면 말이 꿈적이나 하겠어요?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물리는 것입니다. 막 뛰어가다가 탁 재갈을 낙아채면 말이 가다가 급정거를 하면서 앞발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사람을 정지시켜 주려고 앞발을 드는 것이 아니라 아구리가 아파서 앞발을 드는 것입니다.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순해서 주인을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코를 잡아당기니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없지만 코를 이렇게 뚫고 다니는 애들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실을 이렇게 묶어서 잡아당겨보십시오. 그리고 교회로 당겨보십시오. 꼼짝없이 좇아옵니다. 난 그것을 하고 다니는 애들을 보면 꼭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낚시줄 같은 것으로 이렇게 묶어서. 그러니까 쫓아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하지 않은 기도 제목, 인생에 있어서 고통받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려고 그래도 다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십시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신앙 생활하면 ‘너 예수님 닮은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못되게 할거야.’ 그 사람이 겁을 먹겠습니까? ‘어,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비록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해도 나는 주님 닮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주님 닮은 게 뭔데? 냅둬 이대로 살거야.’ 그러지 않겠습니까?
한나에게 있어서 그 고삐와 같고 재갈과 같은 기도의 제목이 바로 아이였습니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아이 하나만 낳는 것입니다. 아들, 못생겨도 괜찮고 잘생겨도 괜찮고 어째든 아이 하나를 낳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나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를 했는데 기도의 자세가 ‘통곡하였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진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고 한이 맺힌 기도입니다. 통곡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아들을 구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한나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것입니다. 전에 염려하고 근심만 할 때에는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인데 이렇게 통곡을 하며 하나님 앞에 아들을 주시도록 매달리며 기도할 때에는 아들이 없이 이렇게 멸시를 받는 상황자체를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있으면 더 좋겠다가 아니라 아들이 없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사람의 욕심은 참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바가지를 바쳐야 될 정도로 허름한 집에서 살던 사람들은 전세라도 얻어서 가면 참 행복합니다. 지하실에서 사글세로 전전하다가 한 13평짜리라도 아파트를 하나 장만해서 가면 그 모든 것이 새것입니다. 샤시도 새것, 장판도 새것, 옷장도 새것, 하여튼 그렇게 좋아합니다. 바다같이 넓습니다. 그러다가 한 1년 삽니다. 그러다가 이제 시들먹해집니다. 마실을 왔다가 갔다가 하는데 건너편에 있는 32평짜리에 사는 동리 사람의 집에 다니면서 갑자가 자기 집이 불편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좀더 넓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집을 바꿀때가 되면 도저히 살 수 없다. 그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여기에서 사는 것은 좀더 넓은 집에서 살면 좋겠다가 아니라 이제는 그런 집에 살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도저히 못살겠다. 그럴 때 빚이라도 내서 집을 장만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가 되지 않으면 ‘했으면 좋을텐데’ 하는 소망입니다. 소망이 점점 커지다가 나중에는 한나처럼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견디기 힘들게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까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사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해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한나가 그런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오묘합니까?
그 브닌나에게 격동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괴로웠을 것인데 한나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죽여버려’ 그러거나 ‘내 팔자야’ 그것일 것입니다. 그런 여자에게 역사를 움직일만한 인물을 맡겼다고 칩시다. 제대로 양육이 되겠습니까? ‘누구든지 너를 무시하면 죽여버려’ 그런 정도의 교육밖에 더 받았겠어요. 젖을 먹을 때 까지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 젖을 뗄 때가 되었으니까 그저 돌이 되었든지 많으면 두 돌쯤 됐을 것입니다. 그때 아이가 얼마나 귀여울 때입니까? 아이가 엄마 아빠 말하고 이빨이 나오고 해죽해죽 웃고 세워놓으면 뒤뚱뒤뚱 걸을 때, 그때 그 아이를 하나님과의 약속 대로 여호와의 집에 떼어놓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시집 가보지 못한 사람이야 아멘 할 수 있겠지만 시집간 사람은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생명과 엄마의 생명은 결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두고 내려올 수가 있겠습니까? 유치원에 갔다가 맡기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실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만 바쳐진 아이입니다. 자기가 죽어도 그 아이는 자기 곁에 올 수가 없는 그런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옛날에 한나가 아닌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전에 그 한나가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한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애적인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결단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변화된 놀라운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 어머니는 젖먹이는 동안에 아이에게 경건한 신앙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집에 올려놓은 다음에도 수시로 부모가 올라갔는데 그러면서도 경건한 영향력을 계속 끼쳤을 것이라고 보고 또 한나가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진 후에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던 제사장 엘리를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건지는 위대한 마지막 사사요. 그리고 하나나님의 귀한 종이 되었을 때, 그 모든 과정에 이르기까지 한나가 자기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있어서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기 전까지는 한나는 그럴만한 위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이 한나를 완전히 새 여인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맡고 계시는 문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주님과 해결을 직접 보기 전에는 여러분들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되는 예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셨는데 하나님이 다른 일을 하시는 동안에 ‘어! 재네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 버렸네. 큰일났네.’ 그러시는 예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대면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에 아이를 못낳는 여자가 한나 뿐이겠어요? 만약에 한나가 하나님이 이런 큰 계획과 섭리 속에서 그의 태를 막으시고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냥 격동하는 브닌나 옆에서 시달리고 남편의 위로나 받으면서 가끔 신세한탄이나 하고 살다가 죽을 뿐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께 매달리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그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은 그런 설음받았던 한 여인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약에 한나에게 이렇게 문제가 없었더라면 그냥 브닌나처럼 쑥쑥 아이를 잘낳고 살다가 죽은 한 여인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없는 문제를 가졌을 때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한나가 징계를 받는 것같고 한나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 같았으나 그러나 문제가 없는 브닌나 보다는 문제가 있는 한나가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실 때에 큰 축복과 은총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문제들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는 것 같은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신다고 할 때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그것은 여러분들이 문제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도록 그런 문제에 봉착하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도하셔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대면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을 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 문제를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주님 앞에 매달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전까지 그 문제의 해결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살고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시려고 주시는 문제들은 세월도 약이 아닙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갔는데도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들은 없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뜨끔’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저 이야기가 내 이야기구나. 내가 지금 씨름하고 있는 이 문제가 10년 이상 지난 문제인데 ‘진짜 되겠지, 되겠지 운이 없었을거야. 재수가 나빴을거야.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되겠지.’ 이렇게 하면서 흘려보낸 세월이 10-2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한나처럼 정신없이 이 세상에서 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모든 소망을 끊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그 인생의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문제를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인간이 범죄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아주 결정적인 원죄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게으름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알았는데 그 문제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된다는 것도 알았는데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도 파악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마음을 안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죄악된 태만함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형벌을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딱 하나입니다. 한나의 태를 막으시는 것입니다. 아이를 못낳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희는 어렸을 때 댐을 많이 만드는 것이 굉장히 나라가 부강해지고 신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희 종이를 아껴쓰면 일년에 댐을 하나 건설한다’고 했습니다. 요즘 가만히 환경학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 국토의 황폐화 현상이 댐하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날에 살던 동리에 가보면 물이 굉장히 많았었는데 물이 없습니다. 다 개천바닥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 주범이 무엇인가 하면 댐입니다. 물론 물을 어느 정도 해서 수리조절을 해서 가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을 하는데, 비행기를 타고 올라 가서 보면 곳곳에 다 물을 저장했습니다. 이제는 산아래 흐르는 물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댐을 하나 막아서 물을 막고 물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아래는 생태계가 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물만 딱 막았는데 다 파괴되고 좋은 채소나 풀들은 다 죽고 가시와 엉겅퀴들이 생겨나면서 황폐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은 한나의 태를 막으신 그 일 하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온통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나의 태를 막으시니까 첩이 들어왔습니다. 첩이 들어와서 아이를 낳으니까 그 첩이 멸시를 합니다. 그 속에서 가장으로서의 지도권을 잃어버립니다. 비교의식이 생깁니다. 견디기 힘든 많은 일들이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브닌나의 마음에 성령을 주셔서 저 한나를 계속 구박해라. 깨닫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한가지를 막으시니까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들이 함께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문제, 결정적인 것 하나만 딱 막으시면 그러면 그것이 막히니까 나머지 많은 문제들이 거기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 있을 때, 그렇게 금실좋은 부부가 사업이 안되고 물질에 고통을 받기 시작하니까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건강할 때는 그렇게 효도하던 자식들이 부모가 병드니까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배신감을 느끼고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고 관계들이 막 찢어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한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남편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이 문제를 쥐고 계시는 하나님만이 열쇠를 가지고 계신 것이었고 그 열쇠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르짖고 매달리는 그 사람에게 주기로 작정하신 열쇠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인생에 부딪히는 수많은 많은 난관과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가슴을 조이고 서로를 미워하고 그 문제에서 파생된 또 다른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소진하는 우리의 정욕을 절반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데 사용했더라면 하나님이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을 것입니다. 다시 댐이 열리고 물이 쏟아져 내려오면 다시 꽃피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변하고 주위에 있는 메말랐던 수많은 논과 밭에 넉넉히 물대인 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것이 무슨 해결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만나시고 여러분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해결되지 않은 그 문제를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받는 수많은 세월을 흘려버렸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이런 한나의 마음, 자기는 다 깨트려지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면서 ‘내 인생의 문제의 해결이 없으면 내 인생도 없습니다. 내가 더 이상 이 문제 속에 억눌려서 살아가는 비굴한 삶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가 죽는 것이 낫겟습니다.’ 그러면서 한나가 하나님 앞에 매달린 것입니다. 통곡하며 기도했다고 했으니까 그는 주위에 시선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물처럼 쏟아져내리는 주체할 수 없는 열렬함과 간절함으로 그간 이 문제로 말미암아 겪었던 인생의 많은 시련과 고통까지 쏟아놓으면서 하나님 한분 앞에 매달렸을 때 이제 한나의 눈에는 브닌나의 서러운 박해나 남편의 따뜻한 위로, 그리고 또다른 인간의 인생에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의 방향들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 아버지시다’라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했고 호소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한가지 서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서원이 무엇인가 하면 ‘주의 여종을 기억하셔서 만약에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를 일평생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습니다’ 머리를 옛날에는 칼로 깎았습니다.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하나님, 내게 응답해주셔서 아이를 내게 주시면 아이를 내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이 서원을 통해서 한나는 인생 전체에 대한 삶의 동기가 새로워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꿈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늘나라를 위해 많이 바친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에 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아니 왜 생전 거울을 안 보다가 양복이라도 하나 사 입으면 거울을 자주 보게 됩니까? 반지라도 하나 끼면 왜 머리가 아픕니까?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소유가 있는 그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가 ‘아이를 낳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애나 하나 낳아서 설음이나 면해봐야 되겠다’라는 지극히 세속적이던 옛날의 동기가 정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가 보면 우리의 인생이 진짜 놀랍게 순결해집니다. 삶의 동기가 정화됩니다. 고상한 기도 제목을 통해서만 우리의 삶의 정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우선 세속적인 기도 제목이라도 그것이라도 놓고 자신이 다 깨어지는 기도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 단계를 딛고 신령하고 고상한 제목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놓고 그렇게 기도해보지 못한 사람이 단숨에 신령한 기도 제목을 붙들고 마음이 녹는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화) 잘 아는 형제가 있는데 그 형제의 기도 제목은 변을 잘 보게 해달라는 기도의 제목인데 아침마다 변을 보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는다고 한 이야기
하나님이 진짜 우리가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한번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만 보일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씨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를 할 때까지 수많은 번민과 고통과 설음 속에서 인생을 보내었지만 그러나 그 모든 번민과 고통과 서러움이 한나의 인생을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아무 도움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마음을 정했고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간절히 자기의 심령을 쏟아부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주시도록 서럽도록 매달려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해주셨습니다. 자, 엘가나의 집안에 본 부인이 오래동안 아이를 못낳고 서러움을 받던 한나가 아름다운 사무엘을 낳았을 때에 어땠을까요?
사라가 이삭을 낳자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이 쫓겨나는 장면을 여러분 창세기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은 아닌데 그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사회적인 규약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본처가 있고 첩이 있는데 본처가 자식이 없는데 첩이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본처가 아이를 낳으면 그 본처에게는 첩과 첩의 자식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라가 요구한 것이 바로 그런 문화적인 맥락에서, 그 당시 관습에 호소하면서 요구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선한 행위라고 볼 수는 없지만, 또 그런 일을 당하게 끔 하갈이 무시를 했습니다. 그런 공식을 가지고 본다면 이제 그 한나가 사무엘을 낳는 그 순간에 위세등등하던 브닌나와 그의 슬하에서 태어난 많은 아이들은 이제 졸지에 한나의 말 한마디에 그들의 인생에 처분이 달린 것입니다. 그런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멋있게 한나를 위해 복수해주셨는지 보십시오. 한번에, 아이를 낳기 전까지 그렇게 멸시를 당하고 그렇게 구박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못난 남편은 그저 와서 ‘그래도 내가 있잖아’ 왜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 밖에는 해줄 수가 없었는데 아이를 나음으로서 한나는 그 집안에 집을 세우게 되었고 그리고 자기의 집이 서자 이제 브닌나와 그의 자녀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수해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매달리지 아니하였더라면 아마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저주 받은 여인으로 첩에게 학대를 받다가 한을 품고 죽었더라’ 그런 정도의 전기밖에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매달리니까 그렇게 존귀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경건한 약속을 지키면서 결국은 사무엘을 잘 길러서 하나님 앞에 바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를 움직이는 지렛대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께 허락을 해드리는 이런 놀라운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그렇게 해결된 시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는 한나를 우리는 얼마든지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인생을 미리 볼 수가 있었더라면 아마 한나에게 이렇게 위로했을 것입니다. ‘걱정마라. 문제는 하나님이 너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브닌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없다.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고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은 너의 집안에 짐승이 새끼 낳고 사는 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네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있다. 네 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일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시려고 그 전에 너를 새롭게 하시려고 네 인생에 남이 모르는 가시와 같이 아픈 문제를 주신 것이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그 서럽도록 고통스러운 문제, 너무나 많은 날 동안 그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고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서러움을 받았던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그 날에는 아마 한나가 맛보았던 기쁨을 동일하게 맛보게 하셨을 것입니다. 땀에 젖은 얼굴로 산고 끝에 낳은 아이를 바라보는 산모인 한나의 표정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승리하였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꿨고 그리고 문제를 하나님 앞에 주님의 열쇠로 해결함으로 말미암아서 문제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히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에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사람,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매어달릴 줄 아는 사람, 인생에 위기 속에서 주님의 해결의 열쇠로 붙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그 문제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한나와 같이 구박받고 설음 속에서 살던 실패한 모든 날들은 이제 다 떠내려 보내고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인생에 당신의 큰 능력과 편팔로 역사하시고 그래서 그 문제 속에서 오히려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의 역사를 맛보고 여러분도 한나와 같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