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기도1
녹취자: 김은혜
이제 우리들에게 기도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질문은 이런 거죠. 000라는 사람은 아주 지독한 기독교에 대한 독설가였어요. 죽었어요. 후두암에 걸려서 결국은 죽었어요. 그 사람이 반신론에서 “하나님은 없다. 근데 만약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인간보다 열등한 하나님의 책임이 없다. 기도를 감당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은 너희들이 계속 레포트를 해야지만 겨우 하나님은 알아들으시지 않느냐. 결국은 지적인 수준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우위에 있고 하나님이 하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였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반론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가 기도하라는 이유가 하나님이 모르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거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 아니죠. 그러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 보고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면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쓸데없는 일을 시키시는 것이죠.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을 하겠어요? “하나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처럼 일깨우면서 기도를 해서 하나님을 일깨워 드려야 된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의 듣고 겨우 아시는 하나님이라면 과연 우리가 기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하나님일까? 라는 질문이 들게 되죠.
이런 질문, 이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는 게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라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걸 알고 계시면서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가라고 하는, 그 본뜻을 읽어내야 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의존’이에요. 의존. 그러니까 인간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시기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는 거죠. 결국은 하나님이 모르셔서 기도를 하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그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여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감동시켜 주시는 거죠.
이렇게 정리를 해보세요. 판단을 해주세요. 우리들이 예수 믿기 전에 우리들이 불신자였잖아요. 불신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신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뭐냐 하면 신자가 된다면 하나님을 의존하게 돼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진정으로 그 마음이 아름다운 때가 언제였냐 하면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을 때에요. 어떻게 의존하냐면 전심으로 의존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두 개의 방문을 들었는데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방문과 그다음에 아나데니아의 정신에 대한 거요. 그런 것들이 결국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줘요. 그게 사람이에요. 불신자 시절에는 자기가 주인이 됐어요.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았는데 신자가 된 다음에는 자기가 주인이 아니에요. 주님이 주인이에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니까 결국은 이것은 형식상의 구호가 아니라 의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의존이 결국은 은혜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근데 이 문제를 우리들이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해봐야 돼요. 이제 하나님 하면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건 절대적인 자유예요. 하나님은 절대적인 자유예요. 존재에게 있어서 누구 때문에 생겨나시는 분이 아니에요. 기원이 없으셔요. 하나님은 원래 거기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당신이 행하심에 있어서 누구의 압박이나 강요도 받지 않으세요. 심지어 우리의 기도에 의해서도 압박되지 않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우리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막 이렇게 몰아붙이는 식의 기도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성경 구절까지 다 적어놓고 와가지고 하나님을 법정에서 죄수몰듯이 몰아치면서 그러니까 ‘당신 이렇게 하셔야 됩니다’라고 훈계조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부 다 기본적으로 기도가 의존의 정신에 반영이라는 사고를 떠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언제나 기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여 있는 그런 비독립적인 실체로서 그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바뀌며 어떤 처지에서든지 겸손하게 주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협박하거나 아니면 몰아붙이거나 하는 그런 태도가 기도 속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개념이 자유에요. 하나님은 다 똑같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는 필연이라는 말을 안 써요. 필연이라는 말을. 인간 자신의 필연성을 갖고 있어요? 안 가지고 있어요? 가지고 있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여태까지 행동을 보세요. 그리고 그 행동이 매일 동일하게 하죠? 그렇죠? 그것이 결국 그냥 자기 자신 속에 습관화된 거예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게 루틴이 있어요. 근데 그게 거의 필연처럼 된 거죠.
저 같은 경우에 저녁때를 예를 들자면 저녁때 집에서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연구실로 다시 돌아와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끝난 다음에는 산책을 혼자서 밤중에 워킹을 해요. 짧으면 한 4km 길면 한 7km 정도 워킹을 하는데요. 워킹이 끝나면 바로 교회로 가요. 밤중에 강대에 올라가서 기도해요. 기도를 하면 집으로 돌아와요. 집으로 돌아오면 11시쯤 넘어요. 10시, 11시쯤 돼요. 11시쯤 되면 들어와서 그 다음에 제일 먼저 샤워를 하고 그다음에 이제 화장이라기보다 화장품을 충분히 바르고 그리고 이제 용모를 좀 가꾼 다음에 그다음에 또 성경을 마지막으로 읽고 이제 수면제를 잠이 들어요. 그것이 깨지는 날은 거의 없어요. 항상 그리 그렇게 계속되면 그중에 하나가 빠지면 무엇인가 ‘내가 좀 뭐가 좀 마무리를 잘 못 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요. 그것들이 일종의 필연이 되는 겁니다.
더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중독이 이런 필연이에요. pc방에 안 가고 못 사는 그런 거, 그다음에 뭐라고 그럴까요? 운동도 중독이에요. 그래서 운동을 안 하면은 몸이 근질거려요. 하나님은 필연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언제나 자유로우셔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는 이렇게 이렇게 행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우리 같은 경우는 말을 했는데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기가 싫어. 근데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요. 이게 일종의 하나의 필연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이런 걸 강요할 수 있는 대상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유로우세요. 그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필연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언제나 자유에요.
그러면 인간으로 돌아오면 인간의 자유는 그러면 무엇이냐 이거죠. 이 자유는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받고 방해받지 않는 상태예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이게 스스로 자결정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럼 이게 뭐로부터의 자유냐? 첫째는 코액션으로부터 자유에요. 코액션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캄플레전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받지 않을 자유. 중요한 거죠. 그래서 근대에 접어들면서 결국 시민사회 운동들이 일어나고 정치 운동들이 일어나면서 그게 가장 중요한 게 뭐였어요? 자유였어요. 자유롭지 않으면 인간이 자결정적으로 살아갈 수 없어요.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질 때 그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데 모든 것이 강요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이 자졀정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요.
이러한 사회 구조는 구체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정치 구조들, 이런 정치 구조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거예요. 임마누엘 칸트 같은 경우, 근데 일생에 꼭 읽어봐야 될 책이 있다면 순수 이성 비판이 있습니다. 읽어보신 분? 근데 임마누엘 칸트는 이제 순수이성비판에서 세 번의 책을 쓰죠. 순수이성비판, 그다음에 실천이상비판, 그다음에 판단력 비판 이렇게 쓰죠. 1784년에 이 책을 쓰고요. 이 책을 쓴 게 한 2~3년 뒤에 이 책을 쓰고요 그리고 판단력 비판 그 후에 나와요. 근데 이 순수이성비판이 칸트 전체가 인류에 남긴 업적의 90% 이상이에요. 책 70권을 쓰는데 만약에 이 책 한 권을 안 썼더라면 영향 비율은 10%밖에 안 됐을 텐데, 이제 80% 내지 90%의 영향을 끼치게 돼요. 철학의 역사를 바꾸고 있어요.
근데 이제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제 인류가 가지고 있는 질문이 이런 거였거든요. 뭐냐면 ‘인간은 존엄하다’ 이 명제에 동의해요? 왜 대답이 없어요. ‘인간은 존엄하다’ 동의해요? 왜 존엄합니까? 여태까지는 그 답변이 애매모호했어요. 근데 기독교에서는 아주 뚜렷한 답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존엄한 것은 형상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어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그다음에 하나님처럼 느끼고, 그다음에 하나님처럼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 이렇게 해석을 한 거예요. 지금도 그 해석이 내려오고 있어요. 근데 이제 임마누엘 칸트는 어떤 종교의 필요성 그 당시로 보면 유일한 종교가 기독교였으니까 기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이런 추상적인 데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찾아야 된다고 믿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순수이성비판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결정적인 존재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자율적인 무슨 뜻이에요? ‘율’ 법칙이에요. 자기 자신이 법칙이 되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런 사물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동물들은 예를 들어서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 먹었다라고 할 때 호랑이에게 살토범이라고 이렇게 명합니다. 토 자 토끼예요. 토끼를 죽인 자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유일하게 사람은, 사람을 죽였으면 살인자라고 해요. 이 규정 자체가 뭐예요? 안 죽일 수 있었는데 죽였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는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그 책임은 뭐에 기초한 거예요? 자유에 있죠. 자유예요. 이런 자유가 있어서 결국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고 안 할 수도 있었는데 했다 이거예요. 그거를 스스로 자율적으로 움직였다는 거죠.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자율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굉장히 인간관의 대전환을 가지고 와요. 그러니까 이거는 공부를 좀 많이 해야 해요. 이해하기 위해서. 이거를 읽으면 이제 보이는 거죠.
교과서를 볼게요. 크게 당시의 사조가 두 개가 돼요. 합리론이에요. 그리고 영국의 경험론이에요. 철학의 사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서 주장하는 건 본 관념입니다. 본유 관념이라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이 이렇게 있잖아요. 인간이 근데 인간이 뭘 보고 알아, a라는 걸 보고 안다 이거예요. 그러면 뭐냐면 이 안에 이미 a의 상응하는 뭔가가 있었던 거예요. 이게 들어가서 이걸 알게 된다는 거예요. 이미 이런 본유 관념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아주 선천적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이 본유 관념을 가지고 외부의 사물을 일치시키면서 그걸 이해하는 거라는 거죠.
대표적인 게 신이라는 신. 신은 인간이 경험해 본 적이 없잖아요. 하나님을 처음 만났다면서요?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알아보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이 안에 어떤 신에 대한 본유관념이 있기 때문에 이게 어떤 경험이 없을 때는 신에 대해서 애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가 구체적인 경험을 하게 되면 이 관념이 깨어나면서 두 개가 일치를 이루어서 여기에 신이라고 하는 그런 인식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여기서 이게 이제 본유 관념이에요.
근데 그런 의미에서 이 경험론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따라 라스타에요. 라틴어로 무슨 뜻이냐면 백색 서판이라는 뜻이에요. 화이트보드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태어날 때 백색 서판의 상태,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근데 여기에서 이것이 그려진다. 이거예요. 그러면서 결국은 여기에 인식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이거는 경험이고 이거를 토대로 가지고 뭔가 사물을 보면서 이해하면서 이것이 계속 변화돼 가는 거예요.
근데 이 사람들의 비판이 뭐냐 하면은 본유 관념이라는 게 믿을 수 없는 게 이거는 너희들이 상상한 것이지 만약에 인간에게 본유 관념이 있다면 어린아이에게도 그게 있어야 되고 정신적으로 백지 상태에 있는 사람 중에서 본유 관점이 있어야 되는데 어떤 사람이 있고 없고 어떤 사람은 분명하고 흐릿하지 않냐.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은 경험에 대해 경험 속에서 오는 것이지 본유관념으로 준 것이 아니다. 이거를 이 두 개가 대입을 해요. 근데 이거 하는 말입니다. 이거는 이런 관념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사물에 대한 법칙 a는 a다라고 하는, 이런 법칙들을 계속 이해하게 만들어요.
어떤 보편적으로 사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틀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이죠. 근데 구체적이지 않아요. 그래서 결국은 이게 공허하게 됩니다. 이건 구체적이에요.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니까. 근데 무슨 이런 법칙을 못 만들어 내는 거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 칠판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라고 얘기하지만 이 칠판의 성질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는 거죠. 여기는 하얀색인데 저 뒷방에는 초록색이고 이거는 이 오일 펜으로 쓰지만 저기는 분필로 쓰거든요. 그러니까 칠판에 대해서 안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하다 보면 마지막은 회의론에 빠지게 되요. 근데 이거를 다 묶어요. 그래서 이해를 하는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칸트에요.
그래서 이제 여기의 합리론에서 인식의 틀을 취해 인식의 형식을 취해요. 그게 공간과 시간이에요. 이 틀을 가지고 그다음에 경험을 취해요. 이 틀을 가지고 사물들을 감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거를 얘기하는 게 뭐냐면 이 둘 다를 비판해서 나온 거죠. 그래서 이걸 비판 철학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게 하나의 여기서 커다란 저수지가 돼요. 여기서 서양 철학이 칸트를 만나서 이것이 결국은 흘러내려가는, 그리고 30년 후에 나와서 서구 사상을 모두 종합하는 하나의 거대한 형이상학이 완성이 됐죠.
이제는 완성이 되는데 이후에 이제 시간이 흘러가면서 무슨 소리냐? 하면서 정신에 치우친 헬겔을 비판하면서 물질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요. 포이엘 바하, 칼 마르크스 같은 사람이 등장하면서 유물론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보편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무슨 소리냐 대변이 너무 중요한 거다. 라고 얘기하면서 키에르케고르나 그다음에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여기에 개별자의 중요성 그다음에 육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반론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런 것들이 내려오면서 이제 현대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현대의 소위 유물론적인 인간관, 유물론적 기계론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들이 내려오면서 이제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미치고, 오늘날 이것들이 혼재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이런 것들을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근본적으로 근대 사상이 태동하게 되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정신적인 측면이냐 아니면 육제적인 측면이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이제 생각이 갈라지면서 지금 현재는 이런 상황들이 이겼다고 봐야 돼요. 사실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나라는 게 어디서 왔을까요? 제가 많이 하는 생각이에요. 별을 보면서 저 별들 중에 하나도 가본 데가 없는데 저거는 얼마나 멀리 있을까? 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해요.
내가 이전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 그러니까 내가 죽은 이후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이건 결국 뭐냐 하면 하나의 튜브 속에 갇혀 있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여기도 없고 몰라. 여기도 없어요. 몰라. 근데 이 속에서만 움직이고 살아가는 겁니다. 결국은 결국 이렇게 되다 보니까 중요한 거 뭐가 남는 거예요? 유물만 남는 거에요 물질과 육체만 남는 거고, 현재 실존만 남는 거에요. 이렇게 해가지고 결국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전반적인 파악이 힘들어지는 거에요. 이 기독교가 훌륭한 대안인데, 왜냐하면 기독교는 너무나 이런 인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 이런 식의 사고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너무 무지해요. 그게 이제 또 아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앙심 같은 걸 품고 있어요.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까 결국은 적절한 대책이 안 나온는 거에요.
그런 기억으로 다시 강의로 돌아가면 이렇게 코액션이라고 했는데 결국 인간의 자유를 지기 위해서는 강요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강요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그러니까 자유를 무조건 모든 강요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힘으로부터 우리들이 행하게 되요.
그다음에 두 번째 뭐냐 하면 그다음에 피지컬 파워, 물리적인 힘이죠. 이거는 뭐예요? 일종의 억압이죠.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결정을 하고 그다음에 그것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그런 구조가 안 되고 이런 물리적인 억압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인간의 자유는 최대한 00해야 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생각은 그래요. 왜냐하면 자유로운 존재라고 하는 것을 존중해요. 그 자유를 규제할 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정말 변명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예를 들자면 19금이 있다. 19살 되지 않은 사람은 못 보는 영화다. 아니면 못 보는 잡지다라고 하는 것이 주어질 때에는 그게 왜 그래야 되는지 이유가 분명해요. 19살 안 됐으니까 너는 머리 물들이지 마 그다음에 화장하지 마 이런 식으로 강요하면 화나죠.
근데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 때부터 이미 이런 시구콩이라고 하는 제도를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그걸 풀어놔 줘버리면은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이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 시절에 한번 풀어놔, 여러분 만약에 성적인 쾌락이나 아니면은 어떤 부도덕한 일에 매달리게 돼요. 그럼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스네이버리. 노예가 돼. 그러면 결국은 자유가 줄죠. 지금 북한에 제일 큰 문제가 뭐냐하면 초등학교 다니는 초등학교 애들도 마약을 해요. 이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그 코카인을 생산하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북한이에요. 북한 지금 최고예요. 그래서 암시장에서 북한제라고 그러면 물어보지도 않아요. 순도가 가장 높아요. 왜냐하면 다른 나라는 마약을 약쟁이들이 만들거든요. 북한에서는 국가 과학자들이 많들어요. 최고의 순도가 높은 마약인거에요. 북한산 그러면은 두배 세배의 값을 쳐줍니다. 그렇게 그렇게 아이들이 그런 마약에 이렇게 오는데 그리고 지금 아프카니스탄에 나오잖아요. 애들이 대마하고 마약하는 광경이 나오고 9살 7살 8살 9살이. 끊을 수가 없어요. 어른도 못 끊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끊어요. 또 하고 또 하고 또 해요.
그럼 어떻게 돼요. 인간의 자유로운 삶이라는 것은 불분명해요. 그러니까 이거 어떻게 돼 못하게 해요. 그런데 이거를 그래도 19세라고 자르는 이유는 뭐냐면 물론 마약을 19세 넘어서 마약을 우리나라에서 하게끔 하지는 않지만, 예를 들자면 그런 중독성에 있는 것들을 19세로 끊는 이유는 뭐냐면 거기서부터는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나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그 판단을 본인에게 맡기고 그 결과도 본인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30살이 됐는데도 통제력과 그거를 판단할 수 있는 게 초등학생하고 거의 똑같은 사람들이 그럴 경우에는 이러한 허용이 결국은 그 사람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거에요. 이게 각 나라가 이 마약을 철저히 규정하고 있는 이유예요. 마약만 그런 게 아니죠. 오늘날에 피시방 폐인이라는 얘기 들어봤죠. 그래서 그 사람의 수기를 읽어봤어요. 인간의 삶이 아니에요. 자기도 모르게 아침에 일어나면 피씨방 가죠. 어두운 별을 보고 오는 거예요. 근데 그거를 이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는데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해서 그걸 반복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그런데 의미 있는 삶 어떤 주체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 걸까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무서운 거예요.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예요.
요즘 자꾸 비혼자들이 많이 나오죠. 그래서 큰 원인이 뭐냐면 짝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나? 정부가 보조를 안 해줘서 무서워서 결혼을 못한다 그게 아니라 남하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거예요. 10년 사이에.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이제 점점점점 관계가 안 되는 거죠. 핸드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시대에는 집에 가면 동생들하고 얘기를 안 하면 살 수가 없었는데 방도 두 칸밖에 없어요. 문 열고 나오면 거실에서 모두 만나 그러니까 얘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근데 이제 저거 들고 각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 먹고 싶은 것도 그렇게 주문해도 받아가지고 창문에서 받아서 자기만 먹고.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사람들에게 이렇게 적응할 수 있는, 이 사회적인 힘이, 역량이 뚝 떨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보면은 10명의 청년 중에 한 두 명 정도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죠. 평균 두 명. 그리고 그중에 한 3명 내지 4명 정도는 결혼 생활의 영위할 것이라고 판단이 잘 안 되는, 능력이 굉장히 떨어져요. 자기 삶에 있어서. 막 고통스러운 거죠. 그러다 보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연예인들도 되게 많잖아요. 결혼 안 한 거. 인연이 없어서 못만난게 아니라, 내가 칠 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다시 돌아가면 그 슬레이버리 형태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슬레이버리로부터의 해방이에요. coaction, physical power, slavery.
그 다음에 이제 만물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그래서 이제 중세 철학에서는 말이죠. 중세 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이 모든 만물을 똑같게 본 것이 아니라 만물의 우열이 있다고 본 거예요. 하나님을 숨마 에세라고 봤어요. 에세는 이거는 말하자면 영어로 말하자면 투 비에요. 인피니티브예요. 이거는 ‘있음’입니다. 이 숨마는 최고예요. 하나님이 최고의 있음이고, 하나님 자신은 없는 것이 없으신 있음으로 충만하신 분이다 이거에요.
존재의 어떤 등급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그래서 존재의 피라미드라고 하는데 여기에 무생물이 있어요. 여기 식물이고 여기 동물이 있어요. 여기 사람이 있다고 이게 뭐냐면 가장 덜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음의 측면에서 보면 이거는 이만큼 있는 거고 이거는 이만큼 있는 거고 이거는 이만큼 있는 거고 이건 이만큼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다 있으신 분이에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무생물은 그냥 존재예요. 있어요. 있어. 근데 식물은 살아서 있어요. 근데 이것은 뭐냐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이동해요. 근데 이건 뭐냐면 살아 있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다음에 감각을 할 뿐만 아니라 이동을 할 뿐만 아니라 인식을 해요. 이게 중요해요. 그러니까 뭐냐면 사람 이외의 모든 것은 반성적으로 사색할 수가 없어요. 짐승은 반성적으로 사색을 하는 동물이 있지만 a라는 방법으로 호랑이가 계속 사냥을 했는데 실패하게 그 방법을 포기하고 b라는 방법을 다시 찾아요. 원숭이가 높은 데에 있는 사과를 먹으려고 애를 쓰는데 몇 번 해보다가 안 되면 도구를 찾아서 그걸 딛고 올라가는 거네요. 그런 점에서 만성적인 사고죠. 근데 그것은 도덕적인 게 아니에요. 본능을 따라 움직이기 위한 반성적 사고예요.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반성적 사고가 되려면 자기를 바깥에서 볼 수 있어야 돼요. 자기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이 반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에요. 근데 그럴 수 있는 사물이 인간 이외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류가 인간의 위대성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이야기한 것이 어떻게 보면 너무 인간 편에서 과장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말하는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어요. 자기 반성적인 존재가 인간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면서 위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동물들과 식물과 이 모든 세계에 대해서 생각함으로써 위에서 종합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 근데 이런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이제 다윈의 진화론부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간은 특별한 게 아니라 동물에 가까운 존재다 이렇게 이해를 하다가 그다음에 이제 과학이 점점 발달되면서는 이제 어떻게 얘기를 했냐 하면 동물도 아니고 다 이렇게 뇌신경 과학이다라는 것들이 발달하면서 물리학과 화학에 의해서 인간이 설명되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인간의 00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소위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이야기가 나와요. 증강 인간. 일론 머스크가 하고 있는 게 이거잖아요. 사람이 쓸데없이 많이 외워야 되는 거예요. 우리 옛날에는 전화번호가 100개 정도는 기본으로 외웠어요. 그거 아니면 매일 수첩을 봐야 됩니다. 근데 지금은 우리 아내 전화를 기억을 하고 있나? 외울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여기에 다 외장이 되니까. 그다음에 이걸 내려놓고 나면 아무 기억도 안나요. 그러니까 예전에는 부지런히 영어 사전을 외웠는데, 외울 필요도 없죠. 이렇게 해서 외국에 가서 그냥 바로 해석이 돼서 여기 사진으로 뜨잖아요. 그러니까 외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게 개념이 달라지는 거예요.
근데 결국 문제는 뭐냐면 인간이 결국 알고 보면은 기계에 가깝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서 그래서 이런 모든 거를 인간이 수고해서 엄청나게 이 뇌 에너지가 쌓여 있는 이게 저장이 되잖아 그거를 여기다가 cpu로 집어넣는거야. 그래서 신경하고 연결시켜가지고 방대한 양의 자료를 전부 집어넣어요..예를 들자면 지금 여러분들이 이제 배우잖아요. 지금 철학 개론부터 시작해가지고 막 배우잖아. 그걸 전부 다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가지고 요만한 칩 하나에 천 년 치 신문이 들어가도 남잖아요. 그 방대한 자료를 전부다 집어넣어가지고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러다 싣는 거야. 그러면 이제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시대로 온다는 거죠. 일론 머스크의 트랜스휴먼 계획이에요. 그게 이제 말하자면 증강 인간. 그런 식으로 되는 거죠.
근데 이게 문제는 뭐냐면 그런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인간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거는 오리무중에 빠지는 거죠. 인간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점점 더 알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모든 기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자연적이고 통계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거를 자기가 재생산해내지만은 이런 반성적 사고 갖춘 것에 대해서는 물리적인 원인이 결핍된 사항에 대해서는 기계가 해낼 수가 없어요. 아무리 ai가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하고 해도 그런 식의 반성적인 사유는 할 수 없는 거죠. 그럴수록 이제 인문학의 힘이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기독교 신앙이 진리에 대한 답이지만 그런 기초를 탄탄하게 할 때 현대 사상에 대한 아주 훌륭한 답이 되는 거죠.
이게 결국 뭐냐하면 이런 식으로 인간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견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도 인간 자신이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는 않아요. ai가 했다는 거는,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선배를 찾아가서 “형 삶이 뭐야?” 이렇게 선배를 찾아가서 “도대체 삶이 무엇이야?” “네이버 쳐봐”라고 했대요. 삶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삶은 달걀이다. 이해했어요? 그런 우스게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기도하고 뭔 상관이 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죠. 이게 진화론적인 삶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옛날에 인간의 몸집의 길이가 110센치밖에 안 되거든요. 독수리가 채가기 좋은 사이즈였대요. 옛날에 사진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수단인가 어디에서 독수리가 어린아이 물어 가려고 다 이렇게 도사리고 있는 그런 장면 봤잖아요. 그렇게 채가기에 가장 좋은 사이즈였던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이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을 하자면 사실 만물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존재였어요. 우생학적으로 이렇게. 근데 인간에게는 모든 동물들에게 없는 아주 독특한 것이 있다. 그게 뭐냐면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도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에요.
그래가지고 지금은 어때요? 자기보다도 몸이 수백 번의 큰 코끼리 같은 거 심지어는 무슨 5톤씩 6톤씩 되는 코끼리를 포획하고 너무 많이 죽여서 문제에요 그리고 일본에 가보니까 오키나와에 가니까 거의 10톤짜리 고래를 수족관에다가 넣어놨더라고요. 내가 세계에서 본 수족관 중에서 가장 압도적이었어요. 한 10m 정도 되는 고래가 헤엄쳐요. 사람들은 어떻게 참아왔을까요. 100kg도 안 가고 안 되는 인간들이 10톤이 넘는 그 바닷속을 헤엄치는 배만 한 고래를 어떻게 생포에서 그거를 그 수조관에 다 넣었을까 참 기이하기만 하죠. 근데 그런 것들이 이제 가능해지는 거죠. 우주를 여행하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결국은 모든 짐승 중에 가장 우세종이 되어버렸어요. 사람이. 그래서 개체 수도 76억이나 되고 모든 지구를 다 뒤덮을 정도로 우세종이 되었고. 한 해에 총기사고로 죽는 사람이 80만 명이에요. 근데 그가 행복하게 일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야. 오히려 이런 행복에 대해서 물을 수 없던 그 옛날이 훨씬 더 어떤 의미에서 행복했다고 말하죠.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 자체가 좀 어폐가 있었는데 60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는 보면 엄청 가난했어요. 여러분들은 세계의 뉴스 속에서 그만큼 가난한 나라를 찾을 수가 없어요. 하여튼 가장 전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 중 하나에요. 그럴 정도로 가난하고 비참했는데. 근데 지금 이렇게 나한테 물질을 누리면서 사람들이 그때보다 행복해졌느냐라고 말할 때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봐요. 적어도 그 당시에는 이런 정신적인 공황 상태가 훨씬 덜했어요. 가족들의 유대관계가 끈끈하고, 국가에 대한 신뢰가 있어 그다음에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서로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뭐냐 인간이 행복해지지 않게끔 되었어요. 그게 바로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산업의 고도화 그러면서 이제 인프라가 도시로 모이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관계가 생산 중심의 구조로 바뀌게 돼요. 여러분 아파트 위층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죠? 10년째 몇 번 이사왔는지 알아요? 우리 아버지 죽었다고 아래층에 있는 사람이 부고도 안 와요. 철저한 단절의 시대가 되었고 가족도 이제 몰라요. 왜냐하면 아빠는 식구 깨기 전에 다 잠들었을 때 퇴근하고 그다음에 각자 또 다 밥 먹는 시간, 출근을 할 때는 다 달라요. 아침 저녁을 같이 먹는 식구라도 그래요. 근데 이게 식구의 개념이 무너져버렸어요. 이제 밥도 같이 안 먹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이 소외되는 거에요. 오늘날의 최고의 관심사가 소외에요. 실제로 철학자들이 이걸 파고든 거예요. 인간의 소외. 인간의 소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그리고 우리가 인간이 이 소외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된다. 해결책이 어떤 거죠? 그냥 소외된 거를 그냥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그걸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걸 하나의 대안으로 여러분이 용감하게 살아가라. 이렇게 보면 그런 존재에서 사람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렇게 뛰어난 존재이지만 동시에 이쪽으로 그래프를 하나 보여드릴게요.
이렇게 그래프를 그리면 이거는 뭐냐면 의존이에요. 이건 이거는 있음이고 이건 의존이에요. 이거는 사실은 하나님을 덜 의존해도 되는 부분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상당히 의존해야 되는 존재죠. 제때 비가 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동물은 이틀만 못 먹어도 생명의 위험이 찾아오니까 이건 더더욱 의존하게 되는 거죠. 인간의 영혼은 그럼 어떠냐? 인간은 이게 이 동물은 밥만 먹으면 살아요. 밥만 먹고 온도와 습도 공기만 유지되면 생존해요. 근데 인간은 육체는 그렇게 해서 생존할 수 있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 정도 가지고 생존을 못해요. 근데 자살하는 사람은 너무너무 사는 게 괴로워서 죽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꿈꿨는데 그것이 현실이 안 되니까 죽는 거예요. 죽은 걸 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자살하는 것은 너무나 너무 살고 싶은 사람만이 하는 행동이에요. 근데 어떻게 지금처럼 말고 달리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끊어졌을 때 그게 결국은 인간의 빙점이 돼요. 그것도 어느 한 순간에 삶을 내려놓게 되는데 그 순간에 있더라. 우리 누구나 모든 사람일 가능성이 있는 거죠.
그렇게 된 걸 보면은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고등하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을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이 말하자면 상반된 결론이 돼요. 이해됐어요? 제가 2020년, 21년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간에 김영사에서 책을 한 권 냈어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밤> 여러분들이 유튜브에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치고 들어가 보면 네이버에 치고 들어가면 한번 들어가서 보시고요 유튜브에 치고 들어가면 그 책의 내용 전체를 가지고 제가 <새롭게 하소서>에서 인터뷰 하는 것이 보면 한 70만 뷰 정도 나왔습니다. 한 1.7배속 해놓고 들으면 한 50분 정도 될 수 있을 거예요. 들어보세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겠다> 그 책을 하나 드릴까요? 이번에 번역이 끝나서 내년에 영국에서 출판해요. 그런 고민이 결국은 뭐냐면 이런 현실에 대한 고민이잖아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욕구와 필연, 이게 육체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너무 강해서 육체의 모든 문제를 생산의 증대로 해결이 되는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 중산층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인 소비의 수준이 17세기 왕족들에게나 가능했던 수준이에요. 17세기 왕족들에게나 가능해요. 중산층입니다. 그러니까 상류층은 어떻겠어요? 상류층은 중국의 황제에 못지 않은 물질들을 향유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거는 너무 외로워요. 고독해요. 그래서 지금 힐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면 얼마나 병든 있는 상태인가 하는 걸 보여주고, 그런 단어가 없어서 그해요. 힐링이라는 단어는 뭐냐면 인간 자체가 병든 거예요. 치료가 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러면 결국 뭘 의미하냐면 결국은 그런 물질의 확대, 재생산은 인간의 육체적인 데 필요한 왕 자원의 규지만 그것을 주면 그것을 충분히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너무 외롭고 소외되는 거죠.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이런 겁니다. 인류 역사에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어디에서 나오냐면 4대 문명에서 나오는 데요. 황하, 인더스강, 메소포타미아, 여기서 철학과 종교가 나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먹고 살만 해야 생각을 하는 거지 먹고 살 수가 없으면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원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좌식이들이 하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앉아서 먹는 사람이에요.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시대 때에 철학이 주전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그 찬란하게 꽃힐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면 노예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시대의 노예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노예 같지 않았아요. 근데 이제 일종의 슬레이프가 아니라 서번트 개념이에요. 무슨 뜻인지 알죠? 이제 노예들이 있어서 허드렛일을 다 하는 거예요. 좌식이들이 이렇게 쳐다보면서 이 천하가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이 앞에 펼치는데 끊임없이 바닥이 물이야 그러니까 물로 되어 있구나. 탈레스. 그러면서 이제 만물의 근본이 물리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이런 식으로 좌식의 것들이 사유를 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먹고 살 만하지 않고 오늘 벌어서 오늘 먹고 살아야 될 경우에는 삶의 갈등이 뚝 떨어져요. 그건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당장 내일 나와서 시간을 해야지 이거 하루라도 벌어 먹고 사니까 할 새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물질이 풍부하고 생산의 극대화는 우리에게 좋은 점도 가져다 주었지만 비로소 어떤 의미에서 정신의 황폐함을 못 따라가는 거예요. 따라갈 수 있는 무엇이 돼야 되는데 못 따라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정신이 부자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 매우 비극적이에요.
아주 더럽고 아주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몇년 전에 막 휩쓸고 지나갔던 그 버닝선 사건 같은 거 기억하죠? 술 한 세트에 1억 원이에요. 1억 원에 누가 술을 먹겠어요? 그냥 술일까요? 술 속에 무엇이 따라와요. 그게 마약이에요. 그게 이제 섹슈얼리티가 따라와요. 결국은 사람들이 그거를 와서 카드를 긁는 게 아니라 가방에다가 현찰를 들고와서 던져주고 술먹는 거죠. 정당하지 않은 돈이 밭에다가 묻어놨던 돈 같은 걸 그런 갖고 와서 던져주고 술을 먹는거죠. 거기에서 마약과 섹스가 오가는 거죠. 부자가 아니었더라면 돈이 없었다면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데.
여러분들 뭘 해 먹고 살지? 고민인 사람들에게 한 가지 힌트를 주잖아요? 심리학 개통으로 가요. 정신과 상담사, 정신과 의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시장이 어마어마하게 커요. 그리고 상담. 많이 신뢰하는 사람은 아니지만은. 현재적인 니즈로 볼 때 사회적인 니즈로 볼 때 상당한 거죠. 석사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한 시간 상담하는데 최소한 5만 원에서 7만 원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럴 정도로 수요가 넘치는 거예요. 자, 그럼 이걸 통해서 뭘 말하려고 하느냐?
그러면 이제 내가 물어볼게요. 음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이런 뛰어난 특징이 하나님을 더 응시하게 만들어가면 더 의지하거든요. 이렇게 이런 인간의 뛰어난 특징이 물질에 국한돼서 말하자면은 물질적인 생산을 촉진해서 인간에게 부족한 것이 없이 많은 것을 공급해 주는데 정신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이런 뛰어난 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의존하게 만들어요? 더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요.
기독교 불신의 시대잖아요. 인기가 없어요. 예전에는 슬며시 거부했는데 노골적으로 거부해요. 사실은 그런 거부의 몸짓이 사실은 자기를 자극한다는 뜻이에요. 진짜 자신이 있으면 거부 그런 식으로 이렇게 명백하게 항소하듯이 그렇게 거부 안 해요. 무엇인가 자기의 핵심을 찌르고 있는 부분이 있다라고 하는 걸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다음 세기에도 앞으로 100년 동안에는 교회의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을 거예요. 종교의 필요성은. 기독교를 전하는 사람들이 참되고 올바른 방식의 종교를 전한다면 그 필요성은 무궁한 시대를 살아가요. 지금 시대에 여러분들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놀라운 축복의 선택이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게 오리지널 기독교가 아니에요. 루이비통 가방이 있는데 70만원이에요. 원래 제품은 800만원이에요. 그런데 70만원에 팔아요. 가품이에요. 어떤 사람은 1900만 원을 주고 가품을 샀대요. 진품이 1900만 원이에요.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생일을 맞아서 백 하나 사주고 싶어서 백화점에 갔어요.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하나가 너무 예뻐요. 저것 좀 봅시다. 190만원이라고 써놨어요. 자세히 보니까 1500만원이에요. 더 이상은 1억 9천만 원이에요. 결국 뭘 얘기하냐면 진품 기독교를 믿어야 되는데 가품을 믿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 가짜를 보면서 진짜를 평가하는 거예요. 그래서 중요한 건 뭐냐면 여러분들이 백은 명품을 못 가지고 있어도 신앙은 명품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진품.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 제가 목회자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결론을 내리면 인류의 이런 문제에 대한 최고의 대안을 기독교가 가지고 있어요. 엄청난 고민을 했고 답을 아는 거죠. 문제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시대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정리를 하겠습니다. 마지막 결론을 낼게요. 인간은 그렇게 뛰어난 존재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뛰어나기 때문에 더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두 개가 대조가 되는 거죠. 하나님은 절대적인 자유, 인간은 절대적인 의존.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대비가 있어요. 그 사이에 기도가 들어있는 거죠. 이 기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말씀 못지않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 기도는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에요. 응답하지 않으면 사실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어요.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깨달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 말씀과 기도는 두 개의 기찻길과 같은 거죠. 그래서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퀴가 양쪽에 깔린 기차를 한 선으로 깔린 철로 위에 놓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다음 시간에 배우겠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독립한 아름다움. 인간의 아름다움은 의존한 아름다움. 하나님은 모든 것과 구별되어 아무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최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을 의존할 때에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을 때가 있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사람의 정체가 뭐냐 하면 의존의 00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의존하게 하시는가, 그리고 인간이 마음과 정신 안에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과 육체가 의존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한 인간 존재의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 우주적으로 확대된다면 그것은 어떤 그림을 그렸는가, 이 관계를 다음 시간에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