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기도2
녹취자: 김은혜
오늘 수업을 위해서 지난 시간에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되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수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저는 반복할 필요도 없지만 그 내용이겠죠. 그래서 어떤 내용이었냐면 첫째, 하나님은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고 그다음에 독립적인 분이세요. 그리고 하나 우리가 얘기했던 것이 뭐냐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결코 필연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없다? 없다. 왜?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하라고 그러신다. 그런데 기도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기도하는 내용을 모두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그 의문을 제시하면서, 결국 기도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기도를 알게 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우리들이 도달하게 되었죠.
결국은 모든 걸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사실 우리 자신의 기도 속에서 우리 자신의 변화를 기대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죠. 근데 여기서 이제 이런 질문도 하게 되는 거예요. 아니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나.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바꿔놓으시면 되지. 무엇 때문에 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기도하면서 우리가 바뀌기를 원하시느냐 그거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처럼 주체적인 존재로 창조가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계처럼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당신과 똑같이 닮아서 당신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느끼고 당신처럼 결정하는 사람이 되게 하셔서 위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받고 아래로는 다른 사람과 모든 자연 만물의 마음까지 이해하면서 자기가 있음으로써 그 모든 관계를 화목하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기도는 본인이 안 하려고 하면 하나님도 안 시키셔요. 신앙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신앙을 갖게 되었고 기도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하나님 앞에 자기 의지를 가지고 순종했던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지, 자기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그런 고백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가 온 힘을 다해서 한 학기를 강의할 거예요. 나도 굉장히 많은 희생을 하면서 한나절을 바쳐서 여기를 오는 거예요. 나도 할 일이 많은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내가 인정을 받아서 내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이미 인정받고 있는 사람인데.
내가 원하는 건 뭐냐면 여러분들이 삶이 바뀌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들의 삶의 갈 길을 신앙 안에서 올바르게 찾지 못한다면은 이렇게 낭비하는 젊음은 30년 후에 갚기로 되어 있는 집을 만기 어음이에요. 이제 더 이상 수입이 없는 노년이 됐을 때 청구서가 날라와요. 어떻게 돼요. 파산하는 거예요. 파산. 그래서 결국 신학과를 나오고 기독교 대학을 나왔는데 신앙이 없는 사람만치도 인생을 못 산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이유는 모두 어디 가서 노가다나 할라고 공부하는 게 아니고 지도자가 되려고 공부하는 거잖아요. 근데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될 수가 있겠느냐 이거예요?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 얘기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거 아무것도 없어요. 학점 갖고 까다롭게 굴지도 않아요. 정말 죽어도 학점이 필요하다 그러면 나한테 편지 쓰세요. 줄 테니까. 그 대신 내가 바라는 건 뭐냐면 진지해지라. 그리고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접근을 해서 이야기를 하라.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이제 강의하는 내용이 그러므로 인간은 해방되어야 된다라는 걸 이야기하면서 그건 무엇이었어요? 강요에 의한 자유, 그다음에 물리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것이 노예 상태로서의 자유. 노예 상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정신적으로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어서 끊임없이 해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게임 중독이나 포르노 그라피 중독이나 도박이나 등등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슬레이버리의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계속 그 성향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지 결코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자기 인생이 아니에요. 누구 인생이냐? 남의 인생도 아니에요. 그러면 그건 뭐예요? 그걸 삽질하면서 인생을 사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라 이거예요. 이거 의미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그다음에 이제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이 존재의 도표를 제시했어요. 그래서 무생물이 제일 많고 그다음에 식물, 동물, 인간이 있는데 결국 무생물은 그냥 있는 것이고, 식물은 있지만 살아있는 것이고, 동물은 있지만 살아있지만 감각하는 것이고, 인간은 있지만 살아 있지만 감각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식하는 존재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동물이다라는 이야기로 강의가 끝났어요. 맞죠?.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동물도 반성을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물리적인 반성일 뿐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떻게 먹이를 잡으려고 했더니 계속 실패했을 때 동물은 실패한 그 방법을 반복하지 않고 방법을 바꿔요.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육체를 생존하기 위한 것이에요. 그러나 인간은 그게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존재예요. 여기에 인간의 가능성이 있는 거죠.
강의라고 하는 것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면 강의를 통해서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진정한 강의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반성을 하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잠재력을 찾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에듀케이션이라고요. 라틴어 에디 파라에서 와요. 뭐냐면 이끌어내는 거예요. 이끌어내는 거예요.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을 머리통 속에다가 집어넣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있는 것들을 이렇게 이끌어내는 거예요. 경험론자들이 되게 좋아하는 거예요. 근데 이끌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할 때 중요한 것은 외우고 암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하는 게 중요해요. 이게 강의를 듣는 순간에도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내 강의에 대해서 질문이 나오면서 ‘왜 그럴까’ ‘아니지, 저건 아니지’ 하는 의문들이 떠오르는 거예요. 떠오르는 의문의 오십 퍼센트는 이미 본인이 이 답을 가지고 있는 거야. 물어보는 학생은 사실은 답을 거의 알고 있기 때문에 묻는 거예요. 묻지 못하는 학생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결국은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존재예요. 그렇게 반성하면서 주체적인 사고를 해나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통해 배우지만 마지막에 누구처럼 생각하지 않고 자기답게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기도도 역시 똑같이 우리는 그런 차원에서 접근하게 되는 거죠.
이제 오늘 배울 이야기는 천지 창조 세계의 질서와 의존의 아름다움이에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제 우리가 배운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디펜던스’예요. 의존이에요. 의존.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독립한 아름다움이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그 독립한 하나님께 의존하는 아름다움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럼 그 의존이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가 이제 기도를 이끌어내기 위한 철학적인 과제들을 제시하는 것인데, 첫 번째 이야기하는 것이 미학적 질서에요. 이 모든 세계는 놀라운 미학적인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세상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중에 누구도 예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예쁘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에요? 예쁘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야 간단하게 말해보세요.
“눈으로 보기에 좋다.” 좋아요. 근데 이거는 주관성과 객관성을 함께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냥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나 혼자 좋을 수 있어요. 그래서 어때요? 누구하고 결혼하겠대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남자를 너무 잘 알아. 그래서 하지 말라 걔는 이미 많이 여러 방면에서 여러 사람에게 입증이 됐다. 정상적으로 결혼 생활을 못할 사람이라고 입증이 됐다. 이렇게 주변에서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줘요. ‘좋다’에 대해서 이의를 거는 거예요. 근데 주관적으로 푹 빠졌어요. 그래서 그냥 좋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게 주관성과 객관성이 같이 연결이 돼 있는 거예요. 이게 그래서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있으면 ‘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안에 같이 있어서 두 개가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아무리 아름답다고 전 인류가 이것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동의해도 이 사람의 관점이 여기에 서 있으면 이거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고 추해 보이고 이쪽에 있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거예요. 그거예요.
이런 구도들이 특히 어디에서 나타나냐면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들이 나중에 강의 끝나고 나서 샹베르그(?)라고 하는 사람을 구글링을 해보세요. 이렇게 강의를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샹베르그라는 거는 구글링해봐요. 그리고 음악을 왜 들어봐요. 그러면 여러분 듣기 싫을 정도로 그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괴기음 같은 게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무조음이에요. 무조음이 뭐예요. 장조가 단조가 있잖아요. 근데 아예 그 조가 없는 거예요. 이상한 음악이 나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같은, 말하자면 무용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것들이 결국은 전에는 이런 것들이 합의를 이루었는데 이제 이게 완전히 깨어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현대주의의 모습이에요.
그러면 이제 이쪽으로 나가면 한없이 나가니까 그럼 다시 이제 이쪽으로 돌아오면, 미학적 질서라고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레오나르도다빈치 같은 사람들을 인체를 그리면서 결국은 우리의 이 몸과 그다음에 이 팔의 길이가 몇 대 몇이 되어야 하는가? 그다음에 인간의 머리와 그다음에 몸 전체는 8분의 1이 되어야 한다. 그니까 온몸 전체를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리면서 비율을 맞추면서 그 비율을 충족시킬 때 황금 비율이라고 얘기해요. 황금 비율이라고 얘기해요. 그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된다. 이렇게 보는 거죠. 결국은 아름답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얼굴을 놓고 보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코가 있고 그다음에 입이 있고 여기다 머리가 이렇게 있고 이렇게 보면 여기 귀가 있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 모든 것에 대한 비율이에요. 그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아름다운 거는 결국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개별적인 사물의 완전성이에요. 여기에 000가 있는데 아주 싸구려가 있어요. 백 개에 한 만 원밖에 안 하는 게 있는가 하면 어떤 거 이거 하나에 오만 원짜리가 있다고 쳐요. 5만 원짜리가 상대적으로 완정성이 더 뛰어나겠죠. 그러니까 하나하나를 확실하게 더 잘 만들었을 때에 개별적으로 완전성이 뛰어나잖아요. 그 사물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쉽게 얘기하면 여러분들이 왜 무슨 길거리에 나가면은 3만 원, 4만 원에 줄 수 있는 가방을 왜 사람들이 1억 9천만 원씩 주고 그 명품 가방을 사느냐? 무슨 서류 가방 하나에 무슨 2천만 원씩 주고 돈을 주고 사느냐?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거를 파는 사람이 있었어요. 대화를 나눠봤어요. 그런데 엄청나게 큰 소 한 마리를 잡을 때 그 서류 가방 하나 할 수 있는 가죽밖에 안 나온대요. 근데 그 소를 기를 때 살을 찌우고 고기를 잘라 먹기 위해서 불을 지르는 게 아니라 이 배 쪽에 있는 이 부분을 잘라내어서 가방을 만들기 위해서 여기에 스크래치가 가지 않도록 그 상처가 나지 않도록 송아지 때부터 그 소가 다 클 때까지 돌본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죽으면 가장 균일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그 가죽을 잘라내서 그래서 하나의 브리프 케이스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비싸게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근데 최고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한 땀 떠서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개별적으로 사물들의 완전성이 높아지게 되죠. 이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그럼 이게 기도하고 우리하고 뭔 상관이 있느냐? 이게 결국 뭘 보여주냐 하면 이게 우리에게 얘기하면 육체로 말하자면 우리가 이렇게 우리 자신으로 태어났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본판 자체를 바꿀 수는 없어요. 근데 내가 어떤 원판을 가지고 태어났어요. 그러면 그 원판 자체가 잘 육체적으로 작동하고 기동할 수 있도록 가꿔야 하는 거예요. 똑같은 사람이 있는데, 똑같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형제가 있는데 하나는 얼굴도 똑같고 모든 조건이 다 같아. 근데 한 사람은 항상 건강과 활기가 가득 차 있어. 근데 한 사람은 맨날 아파서 맨날 결석해. 그리고 오면은 계속 엎드려서 보내는 거야. 그 후자의 사람은 매력 꽝이야. 육체의 완전성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운동하고 화장하고 자기를 가꾸고 이렇게 할 때 육체는 완전성에 가깝게 됐고 그때 예뻐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23살 기준으로 남자는 25살 기준으로 이제 노년으로 들어가게 되요. 늙기 시작해요. 30살만 지나면 몸이 달라지는 게 느껴지고 35세 40세가 되면은 이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45세 넘으면 갱년기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주 현저하게 느끼는데 이때 느끼는 감정이 여기 15, 16살 때 느끼던 그 감정하고 정반대로 유사하게 느껴서 여기를 사춘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비애에 대해서 느끼고 없음에 대해서 느끼고 여기는 있음에 대해서 느끼고. 그래서 이런 없는 것이 확 들어오니까, 여기서 혼란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게 느껴지니까 여기서 혼란이 오는 거예요. 도덕적으로 가장 위험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에요. 거의 그 무도덕 상태로 들어가서 개판인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때가 이때에요.
그러면 결국은 무슨 문제가 대두돼요? 육체만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구나라는 것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쓰세요. 기록하세요.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며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지닌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 있다.” 첫 번째 설명할게요.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무엇의 아름다움이라고요?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시작.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며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지닌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있다. 무슨 얘기예요.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라는거예요? 거짓말하지 말라 그래요. 자기도 그렇게 생각 안 하면서 그냥 사람 듣기 좋으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모든 사람이 아름다워요? 이번에 그 기차역에서 스토킹해서 살인하는 그 사람이 아름다워요? 뭐가 아름다워요 아름답긴. 한 인간의 아름다운은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그건 유효기간이 6개월도 안 돼요. 결혼하고 나면 아무 상관 없어. 그 인물을 추구하는 사는 게 아니에요.
문제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사람이 끌릴 때 그때 놀라운 게 일어나는 거죠. 여러분들은 클레오파트라 들어간 미인으로 알고 있죠? 근데 그 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백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얘기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흑인이었을 거라고 봐요. 그런데 안토니우스를 비롯해서 시저에 이르기까지 그 여자에게 푹 빠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왜 그랬느냐 그랬더니 어마어마한 학식을 지닌 거죠. 그래서 역사 철학 예술 문학 종교부터 시작을 해서 한번 남자하고 말을 틀면 그 말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대요. 그 매력에서. 그게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이라는 거죠. 원래 클레오파트라가 원래 이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왕의 직책이에요. 클레오 파트라 7세예요. 그 사람.
그러니까 그런 것이 정신의 아름다움이에요. 영혼이 아름다운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사람은 솔직히 bts를 존경한다고 말하진 않잖아요. 좋아한다고 얘기해요. 리더가 누구예요? “김남준” 근데 존경을 하는 사람은 사실은 외모 때문에 존경하는 게 아니라 정신 때문에 존경하고, 한 사람 앞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끼고, 압도적인 정신적인 위압감을 갖게 만드는 것도 결국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문제이고 정신의 문제다 이거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어떻게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인가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기도하고 만나면. 기도는 끊임없는 영혼의 화장이에요. 영혼을 가꾸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누구도 자신의 젊음을 팽개쳐 둔 채 죽을 때까지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빨리 늙는 것은 피할 수 있어요.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화장하고 가꾸는 거예요. 화장이라고 하는 것은 색깔만 바르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얼굴 전체와 몸 전체를 가꾸는 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가꾸는 사람과 가꾸지 않고 내버려둔 사람은 그러니까 딱 서면 벌써 비교가 딱 되는 거야.
그렇게 따지면 영혼과 정신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 영혼과 정신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은 아름다운 것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주신 미학적인 질서를 인간과 영혼과 정신 안에서 육체와 함께 찾아가는 것들이에요. 그것이 결국은 기도를 통해서 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삶을 이렇게 살아. 이렇게 살았어. 근데 기도의 모본이신 예수님에 대한 강론을 이렇게 들었어요. 그랬더니 그다음에 이렇게 산 것에 대해서 자꾸 회의를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직은 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이 정도는 살아야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반성이야 반성. 그럼 왜? 이렇게 된 것만큼 자신이 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된 것만큼 예수님은 아름다우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거는 무질서한 삶이고 그다음에 이거는 질서의 삶이에요. 근데 이 질서 안에서 예수님은 속박받고 고통받은 게 아니라 자신의 영혼으로 말하자면 지극한 행복과 만족을 느끼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욕심이 없으셨어요. 당연히 투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연히 무슨 세상의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행복이에요.
그런 거예요. 여러분 여기 혹시 한자 잘 하시는 분들 계세요? 몰라요? 아 어떡하지. 이게 뭐예요? 힘이 아니지 이건 행이지. 신은 그 신라면이고 맵다는 뜻이고. 근데 이게 이걸 읽을 때 이거를 중국어로 씽이라고 읽어요. 실제로 이게 우리 씽푸라고 읽어요. 근데 행의 의미가 ‘어쩌다’라는 뜻이에요. 행복의 개념 자체가 당연히 찾은 게 아니라 어쩌다 찾은 거예요. 그게 한자권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 돼요. 이거는 나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아니다? 나 자신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이미 한자권에 있는 사람들도 이미 이해하고 있었어요. 왜 그래요? 모든 사람이 자기를 행복하기 위해서 미친듯이 노력하는데 진짜 행복한 사람은 소수의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돌아가면 결국은 영원의 아름다움이라는 거죠. 그 아름다움을 인간이 유지하기 위해서 살려면 기도가 필요가 없어요. 유지하면서 안 사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자기 자신이 이러고 사는 동안에는 자기가 얼마나 지저분한 인간인지를 몰라. 근데 진리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거울이 되어서 자기를 보면서 정말 후지고 더럽구나라고 하는 걸 느끼는 거예요. 그거를 마음속에 통렬히 느끼면서 가슴 아파하는 걸 뭐라고 불러요? 회개라고 부르는 거지. 회개는 놀다가 하는 게 아니라 기도하다가 하는 거야. 기도가 없는 사람은 당연히 기도를 해도 진정한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를 할 수 없지만 그러니까 결국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처음서부터 회개 자체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 자체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면은 결국은 끊임없이 자기 일을 이런 식으로 바꾸어 가도 결국 바꾸어 가도, 호랑이를 그리다가 보면은 고양이밖에 안 나오는데 아예 처음서부터 이렇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마지막에 어떻게 됐냐면 고양이가 되는 게 아니라 짐승이 되는 거예요. 짐승이. 우리는 개만도 못한 개, 돼지만도 못한 돼지 새끼라는 말을 안 써요. 어떤 경우에도 그건 그냥 개고 그냥 그거 돼지일 뿐이에요. 근데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거죠. 역설적인 건 인간이 짐승만도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점이 위대한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거를 자기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짐승은 짐승만 못하기를 선택할 수가 없어요. 근데 인간은 짐승만 못해지기를 스스로 선택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위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이걸 거꾸로 뒤집으면 어떻게 되냐면 결국 인간은 인간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거 아니에요. 이런 거예요. 인간이라는 게 이런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야. 육체는 뭐 생각해 보세요. 모두 젊었을 때 누구나 다 예쁘지. 모든 사람이 다 예뻐. 나이가 들면 사라져요.
두 번째,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요. 근데 그거는 어떤 점에서 그러냐 하면 모든 인간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어요. 이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거는 이미지예요. 형태예요. 사람의 형상과 너무나 닮은 원숭이가 있다라고 할 때 형상이에요. 근데 이 형상이 아니라 이 형상이에요. 형상이라는 말이 세 개가 있어요. 이렇게 있어요. 근데 이거는 라틴어로 ‘포르마’고 그다음에 이거는 라틴어로 ‘이마고’야. 포그마는 이거는 마테르, 물질과 대조되는 개념이에요.
예를 들자면 밀가루가 빵이 된 것은 밀가루가 저절로 빵이 된 게 아니라 밀가루와 우유와 설탕이 저절로 빵이 된 게 아니라 그게 탁자에 놓여 있는데 어떤 빵을 만들고자 하는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걸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빵이 되는 거예요. 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밀가루와 물과 우유와 설탕은 매터, 물질이고, 이 요리사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 계획은 포르마에요. 형상이에요. 자기 의도대로 빵이 구워졌을 때 진짜 맛있다. 좋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포로마에요.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형상이에요. 이거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를 얘기하는 것이고, 이 형상은 기독교에서 독특하게 쓰는 하나님의 영적인 특성이에요. 그래서 그걸 0000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셔서 그래서 이 형상을 인간에게만 부여하시는 거예요. 이게 인간 존엄성의 근원이에요. 그래서 아무리 흉악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사람은 넓은 행위에서는 모두 인간으로 있는 하나님의 이 형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근데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결국 그 형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게 돼요. 여러분들이 너무 좋아하는 친구의 사진을 여기다 그대로 붙여놨는데 근데 어떤 사람이 나와서 여기다가 낙서를 하고 욕을 써놨어요. 근데 여러분들이 마음 상하지 않으면 이 친구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이 친구가 누군지 모르는 외국 사람이 오면 화날 이유가 없어요. 누군지도 모르고 이게 가상적인 인간인지 실제 존재하는 인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근데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쓰여 있는데 그렇게 했다. 했더니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게 뭐냐면 이것이 친구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야. 그래서 결국은 어떤 사람이 어떤 인간을 존엄하게 여기지 않을 때 그것은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 형상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무시에요. 도전이에요. 그건 옳지 않은 것이에요. 그건 하나님께 벌 받을 일이다 이거죠.
근데 이제 이런 생각을 임마누엘 칸트에 와서 이게 반성을 하는 거예요. 과연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가 뭔가? 정말 신에게로부터 뭘 받았기 때문인가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건 사실은 이성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거죠. 데이비드 휴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임마누엘 칸트는 기존의 인류 역사에서 내려오던 철학의 체계들이 인간이 끊임없는 오류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리고 어떡하면 학문에 있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오류를 종식하고 어떻게 인간이 참된 진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이고 그 이성을 오류 없이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순수이성비판을 쓰게 되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서 그 사람이 내리는 결론은 이거예요. 인간은 존엄하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결정적인 스스로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개념이 초월적 자아의 개념이에요. 설명은 무지하게 긴데 굳이 이렇게 보면 이래요. 이게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있잖아요.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있는데 결국은 인간에게는 00되어 있는데, 이 인간이 자기를 반성해요. 이렇게 반성할 때에는 이 안에 있는 게 분명한데 - 이게 자아예요. 여기에 이렇게 인식하는 기능이 있어요. - 근데 이게 이거를 이렇게 하면서 자기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요. 이런 게 인식의 대상이에요. 인식에 대해서는 다 내가 바깥에 있어요. 근데 놀랍게 자기에게 탈출해서 자기 자신을 인식의 기능으로 삼는다 이거지요. 그게 아까 얘기한 반성이잖아요.
근데 그렇게 자기를 반성할 때에 이 인간은 자기를 초월한다 이거야. 자기도 초월한다 이거야. 인간은 그런 위대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 초월적인 자아를 가지고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도덕과 부도덕을 선택하고 선과 악을 선택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이런 존재는 이 세계에 결코 없다. 이것이 그런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가 된다고 기존에 있었던 기독교의 존엄의 근거에 대한 이론을 제기하는 거죠. 지금은 이것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칸트 때문에 사실은 유럽과 모든 세계의 헌법이 다 바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인간을 중시하는 사회에 이르게 되는 거죠. 차이는 있지만.
그래서 여기서 내리고자 하는 결론이 뭐냐 하면 인간이 이렇게 자결정적인 존재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리고 인간은 충분히 이렇게 인간은 도덕과 그다음에 부도덕을 구별할 수 있고 그러니까 선과 악을 찾아갈 수 있고 하는 이런 존재라는 걸 이거를 이성으로서 이것들을 찾아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리고 우리를 일단은 이성으로 할 수 있는 그 범위 안에서만 이야기를 하자. 그러니까 이성을 초월하는 문제. 신이라든지 영혼이라든지 세계 자체라든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 형이상학의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니까 그것을 형이상학에 넣고, 그다음에 보이는 이 모든 세계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 세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무엇인가 인생의 철학의 기초를 삼으려고 했던 과거의 모든 철학에 대해서 수천 년 동안에 내려온 철학에 대해서 쐐기를 박으면서 허물어뜨려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그러면 이야기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그러면 중요한 거는 이 위에 결국 기준 문제가 되는 거예요. 기준 문제가. 이게 도대체 미라는 기준 자체가 뭐냐? 미의 기준은 끊임없이 바뀌어요. 그래서 지금도 북한과 남한의 미인의 기준이 달라요. 북한의 미인의 기준은 얼굴이 동그래요. 남한의 미인은 계란형이에요. 동그랗고 여기는 보조개가 있는 사람이 미인이래요. 그리고 여기에 뻐드렁이가 하나 있어야지 미인이래요. 뭐라고 그러지? 덧니라고 그러나. 이렇게 살짝 나오는 거. 캄보디아는 더 황당해요. 이런 류의 인간 여성들의 얼굴을 제일 재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주 미녀들이 모이는 쇼에 가면 등장하는 캄보디아 여성은 모두 얼굴이 사각형이에요. 특히 제일 환영받는 사람들이 요렇게 돼서 메주처럼 여기가 일자 턱이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복을 담는 사람들이고 이건 복을 내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 기준이 다 달라요. 심지어 목이 이렇게 긴 여자들을 미인이라고 치는 아프리카 족도 있어요.
이렇게 기준이 다양한데, 도대체 이 기준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거죠. 이런 사람의 얼굴에 대한 기준은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거는 나는 이렇게 봐요. 북한이 이런 얼굴을 가진 여자들을 미인이라고 보고 이렇게 됐다라고 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뭐냐 하면 서양 영화 때문이에요. 서양 영화가 거의 안 들어갔기 때문에 이거를 계속 고집을 하는 거고 우린 서구화된 영화가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여성의 미에 대한 기준이 이렇게 바뀌게 된 거예요.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bts가 지금 미국에서 엄청 뜨고 있잖아요. 미국 교수가 나와서 30년 후에는 미국 남자들의 미의 기준이 bts가 될 거다. 내 말은 의심하지 말아라. 남자들이 화장하는 미국의 시대가 온다.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근데 미국 미국과 소련 같은 데서는 러시아 같은 데서는 기본적으로 남자가 마초적이어야 돼요. 그러니까 좀 예쁘고 잘생기고 그런 거 모델계에서나 통하는 거고 일단 좀 우악스럽고 다 때려부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식의 남자여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런 기준이 이제 허물어져 가고 있어요. 우리들이 영향을 받는 것처럼 이렇게 영향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 이 문제를 그럼 우리가 지금 탐구하고자 하는 이 질서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 지을 것이냐라고 하는 것이 숙제예요.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의 세계를 보면 결국은 모든 세계의 모든 것들을 미학적인 질서로 만드신 거예요. 그 아름다움의 조건이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이에요. 개별적인 사물이 완전할 때 예쁘고, 두 번째는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이에요.
그러면 이제 예를 들어보세요. 내가 옷을 입고 나와서 이렇게. 위 아래 신발까지. 나 나 마음대로는 신경을 써서 입은 거예요. 여러분들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오늘 특별한 날이니까 오늘. 근데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무릎 뚫어진 청바지 그다음에 하얀 고무신을 신었고 위는 노란 저고리에 그 다음에 초록색 깃을 달아. 그 머리는 펑크 머리를 했어요. 예뻐요 안 예뻐요? 아니 그거를 블랙핑크나 아니면은 걸프렌드 같은 입장의 패션에서 보면 예쁘다고 얘기할 수 있죠. 근데 그건 다분히 실험적인 성격을 가지고 거든요. 근데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에 보면은 그렇게 입게끔 내가 다음 주에 옷을 사다 줄게. 그리고 자매는 그거 입겠어요. 안 입겠어요. 안 입죠.
그거 왜 그래요? 이 청바지가 돌체 가바나에서 350만 원을 주고 샀어요. 무릎 떨어진 거를 저고리는 구찌에서 디자인을 했어요. 머리에 쓴 벙거지는 에르메스에서 최고의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했했어요. 그리고 여기 고무신은 한국 최고의 고무신 장인이 만든 것이에요. 옷 가격이 토탈 해가지고 1500만 원이에요. 그래도 안 이뻐요. 왜냐하면 청바지 하나만을 보면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을 충족해요. 그래서 예뻐요.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요거 하나를 놓고 보면 저고리로서는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을 충족하는 거예요. 근데 세 개가 같은 곳에 같은 사람 몸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조합을 입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입는 거죠. 그럼 안 입을 때 어떻게 되냐면 그게 결국 무질서가 되고 무질서라고 하는 것은 더티에요. 더티.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랑새 예뻐요 예뻐요? 아 대답 좀 해봐 왜 이렇게 반응이 없어. 예뻐요? 안 예뻐? 예뻐요. 근데 그 새 네 마리가 이 강의실에 지금 들어왔어요. 예뻐요 안 예뻐요? 왜 그래요? 여기는 그 새들이 날아다닐 장소가 아니에요. 위치 이탈이에요. 그게 더티에요.
농부가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해요. 바지에 흙이 묻었어요. 더러워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그걸 입고 최고급 호텔 연회장에 나타났어요. 더러워요. 아니예요? 입장 불가예요. 왜? 그 장소가 아니에요. 그래서 더티는 아웃오브 플레이스에요. 지정된 장소를 떠나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아까 다시 아까로 돌아가면 영원의 아름다움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영혼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뭐 때문이겠어요? 영혼이 독특한 위치를 이탈한 거예요. 영혼이 어떻게 위치를 이탈해요. 영혼은 우리 안에 있어요. 이거는 한정된 장소가 있게끔 존재하는 것이지 마음대로 가는 게 아니에요. 내 영혼은 내 안에 있어. 근데 이게 위치 이탈했다는 것은 위치 이탈은 물리적으로 장소만 이탈한 게 아니라 기능과 작동하는 상태가 원래 지정된 것에서 벗어났을 때 그때 더럽게 되는 거예요. 그 질서가 깨어지기 때문에.
그러면 이제 정리됐어요. 그럼 이런 미학적인 질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공간부터 시작을 해서 자연의 모든 사물에 이르기까지. 혹시 여러분들이 이탈리아의 12세기에 과학자이자 철학자 피보나치라는 사람들 기억하세요? 피보나치의 수열이라는 게 있어요. 기름을 공중에 확 뿌렸어요. 그랬더니 방울방울 방울이 되어서 확 뿌리면 그 방울방울이 되어서 공중에 흩어질 거 아니에요. 흩어져서 떨어지는데 그 거리와 간격 이 비율이 그것이 아무렇게나 떨어지는 게 아니라 정확한 규칙을 갖고 떨어지는 거예요. 길거리에서 조개를 주워서 조개 껍질에 이렇게 문양이 생기는데 이게 다 수열을 가지고 있어요. 나무를 하는데 나무를 잘라서 보니까 이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거야. 이거를 피보나치의 수열이라고 이야기해요. 수식으로 설명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자연의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서 이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우주와 자연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 아름다움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실은 두 개의 세계가 있는데 이게 가시적인 세계야. 여기는 물질과 그다음에 인간의 감각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세계에요. 그리고 가지에요. 이거는 정신적으로 알 수 있는 세계이에요. 이거는 영혼과 관련되고 정신과 관련된 거. 이게 불가시적이에요.. 그러면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보이는 세계만을 질서 있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거는 원래의 존재하는 질서 가운데 지극히 일부만을 보여주는 거죠.
한 학교의 수준은 뭘 보고 알 수 있냐면 학교 모두를 조사할 필요 없어요. 한 클라스에 들어가서 강의를 해보면 그 학교의 모든 수준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이 학교의 시설부터 시작을 해서 그다음 학교에 학생들이 얼마나 학생들 앞에 투자하려고 하는가, 들어온 학생들이 얼마나 좋은 학생들이 뽑혔는가, 그리고 그 학생들이 공부에 열의를 가지고 있는가,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 그리고 거기에서 강의하는 교수의 수준은 과연 학생들을 능가하는 등록금을 내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강의인가, 거기에서 뭔가 진리와 함께 마주치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들이 한 강의 시간 안에 모두 드러나는 거예요.
난 전 세계에 있는 학교에 가서 강의를 했어요. 마찬가지예요. 어느 학교든지 간에. 마찬가지로 이렇게 우주와 자연 속에 나타나 있는 아름다움 중에서 우리가 실제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수조 분의 일도 안 돼요. 수조분의 1도 안 돼요. 최근에 별이 하나 발견됐는데 지구의 일조 배래요. 일조 배.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이거 하나를 도는데 매일 만 년을 비행기를 타고 돌아야지만 돌 수 있는 몇십 년을 돌아야지.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한대 분의 일 정도에 불과한 거예요. 근데 이거는 보이는 세계이고 이 밑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이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거를 한눈에 모두 보지 못하는거죠. 세계에 있는 아름다움도 한눈에 안 들어와요.
근데 직관적으로 번쩍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예술가들이에요. 그중에 일부를 미친 듯이 그려낸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도 그가 무슨 아름다움을 봤는지를 이해를 못해요. 더듬더듬더듬하면서 겨우겨우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주 탁월한 사람들이라니요. 추상미술 같은 것들은 아무도 공감하지 못해. 근데 그건 그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런 물질 세계에 대한 자연을 모사했을 때도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데 정신과 영원의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인간이 이해한다고요? 대부분 눈을 감은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거죠. 그래서 인간이 말이죠. 지식이 없으면 삶을 지탱할 수 없어. 지식이 없어도 지탱할 수 있는 삶은 사실상 살 가치가 별로 없는 거예요.
나는 열네 살 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열네 살 2개월 될 때 주일날 교회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져서 펑펑 울면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하나님 없다. 그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와도 상관없고 그리고 하나님은 감히 내 인생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나는 차라리 비굴하게 살기보다는 신 앞에서 폭발하듯이 터져버려도 나는 하나님 없이 살겠다. 다짐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교회에 품은 어떤 앙심이에요. 나는 그렇게 미치도록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어제 누가, 왜 다음 시대에는 교회는 매력이 없고 기독교의 중요성은 증가될 것이라고 말한 이유가 뭐냐? 재미가 없잖아요. 나는 죽을 것 같아서 교회에 갔는데 인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고.
내가 보기에 그때 어른들이 아무 생각이 없어. 무뇌주의자에요. 무뇌주의자. 뇌가 없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하는 일이라고는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밤늦게까지 박수치는 일밖에 없는 거야. 윤리적인 삶. 개떡이에요. 이웃을 위하면 사랑? 교회는 좋아하지, 그것 뿐이에요. 근데 그게 우리의 인생을 해결하는 게 아닌 거야.
이렇게 열네 살짜리가 이렇게 때려 치고 어떻게? 도대체 이 질서가 무엇인가 질문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세계는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네 가지 질문이에요. 그리고 자지러지는 거예요. 기독교에 답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책을 읽는 거예요. 책 읽는 것이 구원이었어요. 근데 요즘은 어때 책을 못 읽어요. 뭐 이해가 안 돼요. 그래서 문상 갔다. 왔니? 이렇게 물어보니까 누가 죽었어요. 그래서 문상 갔다 왔니? 그러니까 예? 문화 상품권이요? 여러분들은 웃는데 그렇게 되는 거예요.
리터러시가 없는 거예요. 문해가 안 되는 거야 그게 왜 그런지 아세요. 아주 조악한 인터넷 언어만을 보고 완성되지도 않은 문장에 익숙해지다가 보니까 이제 논리를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한 문해력이 떨어져 문해력이 떨어지면 문외가 돼. 그래서 문해력이 떨어지면 남의 사상이 자기에게 전달이 안 돼. 요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남에게 전달할 수도 없어요. 외로운 섬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데 결국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어요?.
문학 작품을 읽었어요. 수없이 근데 왜 너무나 감탄을 해 왜 고민하는 사람이 나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내가 미운 우리 새끼가 아니라 백조다. 그러니까 어떤 자만심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친구들이 나보고 만나면 넌 이상한 애라는 거예요. 왜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죽을 듯이 괴로워하느냐 이거예요.
열아홉 살 때 자살을 결심을 했어요. 실행을 했어요. 왜 가난에서 자살을 한 게 아니라 인간으로 살 수가 없는 거야. 너무 살고 싶은데 원래 자살하는 사람은 죽고 싶어서 자살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심리학적으로 너무나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 거예요. 필기하세 쓰세요. 인생의 명언이에요. 쓰세요. 자살은 죽고 싶어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자살은 죽고 싶어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기에 선택하는 것이다. 이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런 강의를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문학은 문학은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하는데 이건 공감을 얻으면 돼, 여기는 뭐냐 노답이에요. 노답. 어떤 문학 작품도 답을 내려주지 못해. 그다음에 어떻게 돼? 사상으로 넘어갔어. 그때 내 나이 불과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때 학교 공부? 전혀 흥미를 못 느꼈어요. 십이년 년 동안 학교 가는 게 하루도 행복하지 않아. 지옥이었어. 그때 내가 불량 학생으로 지냈고 막 쌈박질하고 그리고 돌아다니고 술 먹고 그러고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물론 술 먹었어요. 담배도 피웠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엄마가 담배 사다 주셨어. 담배는 좋은 거다. 건강을 위해서 펴라.
그다음 어떻게 돼? 사상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때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게 실존주의였어요. 칸트부터 시작해서 특히 니체는 내가 거의 모든 작품을 읽다시피 하고. 헤르만 헤세는 내가 전 세계에서 왜 헤르만 헤세라는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다섯 명이 있다면 그중에 한 명은 나일 것이다라고 얘기할 때가 열아홉 살이었어요.
근데 뭐예요. 다 터득을 했다고 생각을 해도 아무것도 인생에 도움은 안 되고 인간은 나 자신은 마른 뼈와 되어져서 거의 고사되어 죽어갔죠. 죽어버리기 직전에 마지막에 폭발한 거죠. 그러고 나서 스물한 살 때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는데 그때 읽었던 것이 톨스토이였어요. 그 톨스토이가 가르쳐준 게 바로 질서예요. 그의 두 개의 작품이 내 마음을 크게 때렸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기독교에 귀의했어요. 그게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작품과 그다음에 인생론이라는 작품이에요. 인생론 작품은 두 권을 사 가지고 꽤 어려운 책이었는데 그 당시에 아주 가볍게 소화가 됐어요. 근데 그렇게 놓고 보니까 결국은 마지막에 두 사람의 결론이 뭐냐하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이 완전한 인간이 되고, 잘 들으세요. 결론을 이제 맺어갑니다. 자기 자신이 완전한 인간이 되고 완전한 인간이 된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에요.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이라면 무슨 뜻일까요?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보세요.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게 완전하다 완전한 인간이 무슨 뜻이에요?
(1시간 35분 55초 – 1시간 37분 16초 학생 대답)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면 완전한 인간이 되어간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뭐냐하면 아까 이야기한 거 다 포함이 돼요 포함은 되는데 여기서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이 완전히 기준 자체가 뭐냐 하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예요.
이렇게 이거 꽤 비싼 거예요. 소리 좋죠 좋아요. 이게 학생들이 하도 투덜거리는데 강의 평가를 하라고 그랬더니 내 강의에 대해서 평가를 할 게 없으니까 앰프 시설이 후지다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해? 근데 학교에 이야기를 해도 이게 강의실마다 다 고쳐주겠어요. 할 수 없이 샀어요. 이게 170만 원이에요. 어느 순간에 자꾸 하워링이 나고 마이크는 지지직 소리가 나요. 그러니까 고쳐달라고 해도 안 고쳐줘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폐기하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성이 끝났을 때 폐기 처분되는 거예요. 이거 그거 바꾸면 안 돼냐. 무슨 소리야 아직 짱짱해 짱짱하다는 얘기 무슨 뜻이에요. 아주 완전해. 그런 뜻이에요. 왜 이거를 원래 내가 구입할 때 의도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완전성이에요. 그러면 그거를 인간에게 대입을 해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 속에 내가 있어요. 그러면은 하나님이 넓게는 사람을 창조하는 목적이 있을 거고 근데 왜 여기에 내가 아닌 네가 아니고 저가 아니고 그가 아니고 왜 꼭 내가 태어날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이유가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해겔철학이에요. 그러니까 인간 개체 그 자체를 우주적인 전체 보편의 한 부속이라고 보는 거요. 누가 들어가도 되는데 나라는 인간이 태어나야 될 것은 필연이 아니에요. 보편적으로 굴러가는 하나의 커다란 구도 속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인간이 개별적인 존엄성에 대해서 눈을 못 뜨는 거예요. 대표적인 게 현대 정치에서 전체주의가 바로 그거예요. 너희들은 모두 중국이 잘사는 데 이바지해야 돼, 네 인생의 보람은 거기에 있는 거야. 그리고 지도자들은 자기는 자기 살 궁리를 한다 이거야. 그게 뭐 중국만의 이야기 아니라 한국의 부패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마이클 장군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고 자기네들은 다 부정부패하고 돈 빼돌려 가지고 해외 은행에 계좌에 집어넣고 여차하면 도망가서 일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 준비를 한다 이거예요. 그 그런 것은 결국은 뭐예요. 그건 결국은 잘못된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라고 하는 인간을 만드시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인간이 한 부속품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나라는 인간이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이유를 발견하는 거. 이게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인 거예요. 그걸 생각하는 거요. 근데 이게 과학 기술이 우리에게 이걸 가르쳐주지 않아요. 가르쳐 주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세계의 월드클래스급에 드는 수학자가 태어났어요. 모든 사람이 너무너무 주목했어요. 이번에 그 필즈상 받은 그 사람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오래전 사람이에요. 모아이스트(?) 교수였어요. 모든 사람이 한국 수학의 미래가 이 사람에게 달렸다고 했어요. 성수행으로 교수생활을 끝냈어요. 그럼 그게 결국은 뭐예요. 뭘 얘기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완전성에 도달하지 않는 그런 능력(?)이 없으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재능과 부, 그리고 물리적인 육체적인 힘 이런 것들은 모두 인생에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에 아까 얘기한 것처럼 여기 이 얘기를 든 것처럼 보편적인 상업 질서예요. 보세요. 서울에 소나무가 한 그루로 있고 강원도에 모래사장이 있고 그리고 저기 진해에 바다가 있어요. 그리고 제주도에 구름이 떠 있어요. 이게 예뻐요? 아니면은 앞바다에 파란 바다가 펼쳐져 있고 하얀 모래 사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수백 년 묵은 노송들이 줄지어 서 있고 하늘에는 구름이 떠가요. 저 멀리 하얀 돛단배가 지나가요 예뻐요 안 예뻐요? 그 다섯 가지 요소들이 기가 막히게 만나서 서로 어우러진 거예요. 예쁜 거예요.
그러면 이 보편적인 질서 안에 있을 때 이 개별적인 사물은 가치가 아주 뛰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숙제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내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거, 그다음에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어떻게 내가 그 보편적인 질서 안에서 그렇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냐.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빛나고 그 때문에 내가 빛나고 우리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가치있게 느껴지는 그런 존재가 될 것인가라고 하는 이 두 가지 고민으로 수렴이 되는 거예요.
근데 이러한 아름다움이 우주 속에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되고 그다음에 물질과 정신 사이에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되는 거죠. 물질은 과학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 질서를 찾아가서 폭발적으로 발전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의 과학의 발전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근데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물질적으로 현재 한국의 중산층이 누리는 물질적인 수준이 17세기에 왕족이 누렸던 수준이에요. 근데 내가 보기에는 왕족보다 더 잘 누리는 거 같아요. 왕족에게 무슨 비스코 냉장고가 있었겠어요. 노예들이 얼음 떠다가 막 난리를 쳤겠지 그리고 뭐 벤츠가 있었겠어요. 뭐 그냥 이번에 여왕의 관을 무슨 뭐 칠십 명이 메고 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했겠죠. 근데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거예요.
이런 것들이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전해 가지고 엄청난 혁명을 가지고 오고 그리고 이제는 점점점점 발전하면은요 옛날에 내가 교수 생활 처음 시작할 때는 그 노트북 하나가 자동차 한 대 값이었어요. 내가 교수인데도 돈이 없어서 못 썼어요. 그 하나에. 1990년도에 노트북 하나에 350만 원 있어요. 350만 이면 르망 중고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못 사요. 근데 지금은 어때요 중고 살려고 마음 먹으면 당근 마켓 들어가면 3-40만 원만 줘도 살 수 있는 노트북 워드프로세스만 쓰면되면은 뭐 이십 만원 이하 줘도 수도록 해요. 그럼 사회로 바뀐 거예요. 근데 무슨 인간의 정신은 향상이 안 되는 거예요. 더 외로워지고 고독하고. 그리고 더 소외되고 더 비참해지고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게 그거예요. 왜냐면 사람들이 교회를 점점 싫어하게 되겠지만 기독교는 점점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결국은 이 기독교와 교회가 똑같은 수준에 있게 되면은 그 교회는 진짜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우리들이 공부를 하게 돼 그러면, 이제 오늘의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5분의 결론을 내리고 5분 동안 질문을 받고 11시 반에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여기서 미학적 질서를 봤는데 그래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러면 마지막으로 내리는 결론이 뭐냐 그렇죠 그 기도와 관련해서 뭐냐. 기도 그 자체는 이 기독교 자체는 질서와 관련해서 새로운 수립과 그다음에 수립의 유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거예요. 기도하기 전에는 니 마음대로 했어요. 근데 기도하면서 깊이 깨달으면서 아 이거는 인간이 할 짓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고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옛날에 이 무질서에서 유질서로 돌아가는 거예요. 유질서로 돌아가. 그게 바로 기도예요.
왜냐하면 기도할 때 정상적인 기도는 누구를 생각해요. 동네 아저씨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누구 생각해요. 하나님을 생각해요. 그런데 엄마를 생각해요. 그래서 엄마를 위한 기도를 하는 거고 동생도 생각해요. 그리고 아직 만나지도 않은 애인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어요. 할 수 있잖아요. 근데 이거는 모두 다 하나님께 소속되어서 연관된 상태에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지 않은 애인을 위해서 기도할 때 무슨 일을 만나서라도 사랑에 빠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엄마가 도둑질을 해서라도 돈 많이 벌어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동생이 몸을 팔아서라도 귀족적인 생활을 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왜 그러냐면 하나님의 질서에 어긋나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기도할 때 기본적으로 이건 모두 딸려오는 거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거예요.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도하는 순간이라도 많이 생각을 하고 기도 안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거의 생각을 안 하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광고 보듯이 15초짜리 광고 보듯이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결국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 관해서 얻게 된 지식을 엮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엮어낼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기도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게 되는 거죠.
총신 여러분 선배예요. 근데 내가 공부를 가르쳤어요. 개인적으로 그때 그룹으로 저한테 와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굉장히 많아서 한참 많았던 70명이 됐습니다. 저하고 같이 공부하려면 모두 시험을 보고 들어와야 되고 입학 시험을 봐야 했어요. 왜 읽는 책이 모두 원서였어요. 근데 어쨌든 70명이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아침에 7시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공부하고 11시에는 프란시스 트레이지(?)를 하고 2시에는 중세 철학사를 하고 6시에는 종교개혁 이후에 신학을 밤 10시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근데 거기 왔던 학생 중에 하나예요. 그 인턴쉽에 들어왔어요. 학생이었어 무슨 과라고까지 얘기를 안 하겠어요. 아주 오래전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엄청난 기도의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왜냐하면 결혼은 하고 몇 달 안 됐는데 스물여덟 살밖에 안된 아내였는데 암 선고를 받았는데 4기. 4기를 병원에서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게으르고 나태하던 친구가 이게 도대체 죽을 고비에 도달한 거예요. 아내를 돌보다가 밤에 재워놓고 밤 12시마다 숲속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리고 기도를 하고. 그게 한 6개월 정도 기도를 했는데 아내는 죽었어요. 하나 알아 갔어요. 그게 뭐냐 그 6개월 동안 밤중에 그게 쉬운 일이에요? 그 추운 겨울까지 포함돼 있으면 밤 12시에 숲속에 들어가서 혼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게 쉬운 일이겠냐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매달리면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때 비로소 뭘 깨달은 거예요. 질서에 의해서 깨달은 거예요. 새로운 질서를 주입.
기도를 하면 이렇게 새롭게 결심을 하고 어떤 질서를 수립해요. 근데 이게 계속 유지가 되느냐면 유지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읽은 책 성경 책 중에 제일 많이 읽은 게 창세기 하고 마태복음이잖아요. 그래서 창세기는 레위기에서 끝나고 마태복음은 족보 있다가 끝나잖아요. 그리고 일 년 기다렸다가 다시 연초에는 다시 마태복음 1장으로 돌아가고 창세기 1장으로 가는 거예요. 제일 많이 읽은 게 창세기예요. 제가 항상 창세기를 시 작했기 때문에 제일 안 읽는 게 말라기예요. 요한계시록이예요. 거기까지 간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뭐냐 질서가 유지가 안 돼요. 근데 이 유지는 이 유지는 결국 기도를 통해서 유지가 돼요.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거예요. 기도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느냐 바뀔 때도 있죠. 근데 그거는 바뀌는 사람만 나와서 이야기해. 주식에서 돈 딴 사람만 이야기하지 돈 잃은 사람은 나와서 얘기를 안 해. 그래서 아직도 사람들이 주식에 투자하면 돈을 버는 줄 아는 거야. 다 날려보내잖아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부동산 영끌을 해가지고 산 사람한테 지금 곡소리가 나잖아요. 뭐 말도 안 돼요 빚을 절반을 갚았는데 이자가 똑같아요. 왜 두 배 올랐어. 두 배 근데 지금 이게 세 배까지 갈려고 해. 2.5%로 돈을 빌렸는데 지금 5%에요. 근데 이게 7.5%까지 간대요. 근데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은 이게 10퍼센트까지 갈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5억을 빌렸으면 5천만 원을 이자를 내야 된다는 거지. 부부가 번 돈을 다 때려줘도 이자가 안 돼, 눈앞에 다가오면 그게 뭐예요. 결국은 뭐가 문제예요. 결국은 자신이 어떤 욕망에 의해 가려서 이런 질서들이 안 보이는 거예요. 어느 한순간에. 이런 질서들이 안 보이는 거야 그렇게 돼요.
어떻게 그럼 어떤 질서를 깨닫고 나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면 그 질서를 계속 유지해야 되잖아. 그런데 매일 창세기부터 시작을 했는데 매일매일 성경을 읽는데 은혜를 받고 간절히 기도를 해요. 그러면 계시록까지 가고 말라기까지 간다고. 근데 그걸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립은 되는데 유지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결국은 기도 그 자체는 뭐냐면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질서에서 떠났다는 걸 보게 해주시고, 그 질서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걸 깨닫는 거죠.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각오를 독하고 하고 시작을 했는데 그게 유지가 안 되는 거예요.
2018년 2008년인가 12년에 신대원에 부흥회 왔어요. 2010년도에 여기 대학에 공부에 대해서 너무 강조를 했던 학생들이 엄청나게 도전을 받고 하여튼 펑펑 울면서 공부하겠다고 결심을 해요. 15명이 듣던 라틴어 수업이 70명이 학생들이 미친 듯이 공부를 하는 거예요. 육 개월 안에 기숙사에서 픽픽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가는 거예요.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이렇게 미치도록 공부하는 것은 김남준 목사의 몫이지, 우리의 몫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던 대로 살자.
유지가 되는 것이 유지가 되는 것이 이게 어려운 것이다. 이거를 하나님이 기도하면서 우리의 이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이 기도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갱신하면서 질서에 어긋난 우리 자신이 이 질서로 돌아가고 이 질서를 새로 수립하고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해서 기도라는 것을 경영하신 거예요. 그래서 뭐냐면 하나님에 대한 유신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밤하늘의 우주를 보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해. 자연의 모든 사물을 보면서 그 질서를 따라 옷을 갈아입는 숲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의존해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결국 우리의 마음도 주님을 의존해야 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의존하지 않는 만큼 기도를 떠나 보시고 의존하는 만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쓰세요. 인간의 영혼이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다. 죄에 대해 진실하게 참회할 때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다. 그게 인간의 영혼이 아름다운 유일한 두 개예요. 그래서 기도는 무질서한 인간을 이렇게 돌아가게 히거. 그거를 이 미학적인 질서 속에서 창조하신 세계를 우리의 마음을 투영하시고 그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셔서 그래서 세계 모두가 그런 질서 속에서 아름다운 세계가 되는 일을 위해서다. 질문 받겠습니다.
Q. 사물의 완전성에서 하나님을 창조하신 의도가 완전성인 것 같은데,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 완전성과 연결되어 있나요?
연결되어 있어요. 인간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거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에 완전한 인간으로 창조됐어요.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잖아요. 그게 원래의 완전성이에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unsafe perfection, 완전한데 불안전해요. 안전하지 않은 완전성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가장 큰 스승으로 생각하는 어거스틴이 자기의 신국론에서 인간의 상태에 따라서 넷으로 구분해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 이게 아까 이야기한 언세이프 퍼팩션이에요. 처음 창조된 인간이에요. 완전해요. 근데 언세이프에요. 언제든지 퍼팩션이 깨질 수 잇는 인간이에요.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에요. 그래서 시비거리가 많죠. 왜 죄를 지을 수 있게 창조된거냐? 심지어는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할 때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버리지. 내버려두셨냐? 하나님이 무책임하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어요. 자신의 뜻을 어긴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주체적으로 살게끔 하나님이 그럴려고 인간을 창조하셨어요. 인간이 위로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닮은 지성을 주셔야 했고, 아래로는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성을 주셔야 했어요. 그러한 탁월한 지성과 이성을 가지고 알아서 하나님 섬기게 하셨어요. 그러시려고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두 번째가 죄를 지었어요. 논 포세, 가능하지 않다. 논 빼갈. 죄를 안 짓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인간이 있는 상태에요. 인간의 상태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에요. 신기한 것은 교육학적으로, 한 아이를 선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려면 엄청난 교육이 필요해요. 그런데 나쁜 아이 만드려면 노력 안해도 돼요. 내버려두면 돼요. 음식물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냉장고에 넣든지, 기름에 풍덩 담그든지, 건조시키든지, 끓여놓던지 난리를 다 쳐야해요.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죠. 돼지고기 사놓고 안방에 던져놓으면 이틀이면 곰팡이가 파랗게 피기 시작해요. 인간이 두 가지 상태가 논 포세 논 빼갈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리스도가 구원하신 거예요. 거듭나잖아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거죠. 죄인은 아닌 사람은 없지만, 죄를 안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도박을 했어요. 주기도문 하면서 도박하는 사람 없어요. 통성기도하면서 도박하는 사람 없어요. 결국 그런 나쁜 일에 빠지게 되는 것은 죄를 안 지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을 거절한 거죠. 그 순간에 주기도문만 외웠어도 그 유혹에 안 ᄈᆞ졌을 텐데, 그 순간에 찬송가를 불렀어도 육체적인 타락에 빠지지 않았을텐데 00를 하지 않았어도 훔치지 않았을텐데...수단을 거부한거죠. 신자들만 가지고 있는 위치에요. 마지막에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논 포세 떼갈,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있거나 여기에 있거나 둘 중에 하나에 있어요.
Q. 이러한 시대에서 교회가 제시해야 할 방향은?
형제는 지옥갈까봐 무서워서 예수 믿게 되었어요? 다른 이야기가 아니에요. 교회에 이미 들어온 사람으로서 아나크로미스틱하게. 여기에 있는 걸 거꾸로 투사하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김00이 AK소총을 메고 대관령을 넘고 있었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에 있는 답을 가지고 거꾸로 거기로 투사를 하는 거죠. 그리스도인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믿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대답을 해보세요. 왜 예수 믿어요? 그게 복음이에요. 결론적으로 뭘 위해서 예수를 믿은 거예요? 복음 전하려고 예수 믿었어요? 뭐예요? 예수 안 믿어도 될 사람을 교회 나가서 예수 믿게 만든 요인이 뭐냐?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거를 교회는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근데 답을 다 자신들은 다 거기서 출발을 했으면서 그걸 다 무시해버리고 추상적인 언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에서 인문학을 공부 안 하는 이유고 인문학을 두려워하는 이유고 또 인문학을 할 때에 삐뚤어 나가는 이유에요. 그래서 세상에 매력이 없어요. 처음부터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지 않았어요. 나 혼자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라도 믿어서 한번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처롭게 교회의 문을 그 자존심 다 버리고 나 파멸할지라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내가 열네 살 이개월 때 그렇게 선언을 했어요. 우주가 나를 폭발시켜도 나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만약에 나를 박살을 내서 가루로 만들어버리면 나는 가루가 될지언정 당신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랬어요. 근데 결국 그걸 꺾고 비겁하게 무릎을 꿇고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빌었던 것은 죽고 싶기보다는 살고 싶어서 그래서 예수를 믿은 거예요. 그러면 지금도 똑같이 그런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근데 문제는 뭐예요? 예수 먼저 믿은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다 엿 팔아먹었어요. 이런 고민을 이런 고민을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묻고 기도를 묻고 삶 전체를 묶어야지만 종교라고 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다음에 아무리 울고 회심했으면 뭐해요? 그 사람도 나쁜 짓 하고 싶은 거예요. 한때 은혜 받고 주님을 만나서 사도바울처럼 고꾸러졌다고요? 그래서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요? 그 사람도 성적으로 타락하고 싶은 거예요. 그 사람도 돈이라도 훔쳐서 부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안 그러면은 믿는 사람들의 타락상을 설명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거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눈꽃만큼이라도 알게 되면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라고 하는 이 삶과 단단한 고리를 묶는 가운데 그 지식을 놓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강론을 들을 때에 ‘음향 기구 참 좋네, 목소리 참 좋네. 설교가 짧네. 기네.’ 그러고 듣는 게 아니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라고 하는 실존을 그 지식과 묶으면서 쓰름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이것이 틀어지면서 자기만의 생각이 터져나오는 거예요. 여기에서 무너진 질서 속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들이 생겨나는 거예요.
Q. 사람들이 사이비로 빠지는 이유가 저희가 근본적인 이유를 까먹어서 일까요?
나는 태어나서 수많은 책을 읽었어요. 근데 내가 플라톤을 읽으면서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무한히 감사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으면 내가 읽으면서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감사했어요. 루터와 칼빈을 읽으면서는 내가 캐톨릭 신자가 아니고 개신교 교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어요. 17세기의 개혁 정통파 신학을 읽으면서 내가 개혁파 교인인 것이 자랑스러웠어요. 무슨 뜻이냐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역사 속의 사상 중에서 가장 휴먼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최고봉이 기독교예요. 나는 기독교 기독교를 믿기 전까지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눈 뜨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존엄성을 짓밟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항거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근데 나는 온몸으로 항거해요.
쓰세요. “한 인간의 영성의 깊이는 사람의 외모와는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은 정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의 술집에서는 무슨 차를 타고 오느냐에 따라서 달려 나와서 문 열어주는 웨이터들이 바뀐 대요. 소나타 끌고 왔어요. 그래서 아무도 안 쳐다본대요. 한 번 부가티베이론 64억 짜리를 끌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뛰어나와가지고 둘셋이서 문을 여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뭘 가졌느냐? 제가 여기로 왔는데 누가 와서 학교에서 나를 소개하면서 우리 김남윤 목사님은 열린 교회를 담임하실 뿐만 아니라 옥스포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하신 후에 하바드에서 두 개를 더 하셨고 하바드에서 10년 동안 교수 생활을 하시다가 우리가 가서 삼고초려를 해서 모셔왔습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신앙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영성은 그런 거를 껍질을 깨고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거죠. 그것이 영성의 깊이에요. 그리고 깊은 영성은 한 인간에 대한 진실하고 솔직한 사랑이에요.
제가 어제 와서 지난주에 와서 강의를 하면서 내가 이번 학기에 농땡이 치면서 강의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심혈을 기울여서 강의를 해야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건 여러분들이 너무나 진지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은 못 미치기 때문에 제가 그런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 거예요. 다음 시간에도 제가 온 마음을 쏟아 모아서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할 테니까 들으시고 그 강의에 대한 최고의 존경의 표현은 질문을 갖는 것이다. 질문을 하세요. 여러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