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기도3
녹취자 : 김세나
이번에 들으라고 하였던 강론이 무엇이었습니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는 예수님”.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박성결 학우가 발표하겠습니다. 박성결 다음은 김하영 학우가 발표하겠습니다.
박성결 학생 (04:42~06:48) / 김하영 학생 (07:03~09:50) / 조영식 학생 (10:10~12:58)
권용진 학생 (13:13~15:55) / 유성훈 학생 (16:20~19:40) / 심재훈 학생 (20:00~22:00)
신예은 학생 (22:17~25:15)
여러분은 가끔 이런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지식에 있어서 탁월할 정도로 나보다 많이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하게 삶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었는데, 예를 들면 그러한 것입니다. 아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삶에 있어서는 전혀 동의가 안 되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끔 이런 사람을 만납니다. 아는 것은 정말 없습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무식한 듯 할정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삶이 너무 훌륭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해도 그 사람과 같은 삶을 못 따라갈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삶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 같습니까?
굉장히 많이 알고 있는데 삶이 개판입니다. 개판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보다 훨씬 더 못 배웠는데 저 정도는 살겠다 느낌이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학식이 정말 부족합니다. 그런데 정말 한 인간으로서 정말 잘 삽니다. 훌륭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처럼은 못 살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학생 답변 : (27:44~29:20)
문제는 사람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결코 변화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꺠달음이 있어도 어떤 사람은 깨달았을 뿐 삶이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놀랍게 변합니다. 차이가 이것입니다. 위로부터 진리라는 것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라는 인간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냥 인식할 뿐입니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정도입니다. 질문을 가지고 대했다가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고, ‘아, 그렇구나.’ 그 다음에 살아갑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Q(질문)에 대해서 답을 찾았으니까 당연히 이 사람의 지식 속에는 Q에 대한 답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나오면 또 다른 답이 나올 것입니다. 결국 이것도 하나의 지식이니까 그것을 쌓아가다보면 훨씬 더 많은 지적인 능력이 생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든지 상관없이, 지난 시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서울대 수학과 교수의 이야기도 그가 태어날 때부터 수학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을 것이고, 그렇게 하면서 지식이 쌓아져 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인간으로서의 A인 삶은 이러한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보의 제공의 차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사람을 바꿔 놓는가 하면, 진리라고 하는 것이 갈고리처럼 내려올 때 이것이 자신 속에서 이 갈고리를 자기도 묶는 것입니다. 진리가 내려오면 그것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고 질문의 갈고리를 묶고 결코 놓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록 이렇게 제시된 진리가 짧습니다. 왜입니까? 학교를 많이 못 다녔고, 책을 많이 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식은 짧은 제시된 진리마다 자신의 의문을 걸고 이 두 개를 하나로 연결합니다. 죽을 때까지 왜 그런가 씨름을 합니다. 씨름을 하는 가운데 이 사람은 비록 이런 분량만큼의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Q=A다라고 하는 진리를 꽉 붙들고 끝까지 파지합니다. 그리고 이 위에 자신의 삶을 겁니다. 이것을 가리켜 ‘지혜’라고 부릅니다. ‘소피아’라고도 하고, 소피아는 그리스어입니다. ‘지혜’라고도 하고 이것들을 전체적으로 묶어 놓은 것을 ‘필로소피아’라고 합니다. 이것도 그리스어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지혜’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도 ‘필로소피아’라고 부릅니다. 가끔 ‘스키엔티아’라고도 번역이 되는데, 히브리어로 ‘호크마’입니다. 결국 이것은 어떤 것들에 대해서 판단하는 능력이고, 그것을 따라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알고만 있는 것으로는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삶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을 왜 말씀드리는가 하면, 나는 이 설교를 썼고, 설교를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오면 전철 안에서 건성건성 들으며 왔는지, 한번 1번 듣고 휙 넘어가서 듣고 왔는지, 아니면 안 듣고 와서 앞에 발표한 사람 이야기를 머리에 담아 대충 너덜너덜하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두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것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간 낭비입니다. 무엇을 해도 깨끗하게, “제가 너무 바빠서 못 들었습니다.” 얼마나 남자 답고 깨끗합니까. 지난 주에 못 나왔는데, “늦잠 잤습니다.” 누가 뭐라고 합니까. 이미 끝난 일이기에 할 수 없습니다. 본인이 늦잠 잔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면 되는 것입니다. 제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안 하고도 한 척 하는 것입니다. 모르고도 아는 척 하는 것, 그리고 아무 것도 없음에도 상당히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척 하는 것, 그러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내 수업 시간에 그것을 배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깨끗하게, “못 들었습니다.” “건성건성 듣느라 거기까지 파악을 못 하였기 때문에 교수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마나 한 사람으로서 깨끗합니까. “반성하겠습니다.” 다음 시간부터 안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건성으로 들은 사람이 네 분입니다. 다음서부터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배울 때, 지금 내가 이야기 하는 태도와 같이 공부하는 것은 이런 태도로 10분 공부한 사람이 아까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없는데도 있는 척, 안 했는데도 한 척, 하고도 안 한척, 이렇게 하는 사람이 100시간 공부한 것보다 이게 더 낫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진실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친구 목사님이 고려대를 나왔습니다. 항상 학생 운동하고 덜렁덜렁 다니는 동안 학교를 다니기 싫어서 4주인가 결석하였습니다. 어느날 우연히 출석부를 보았는데 자기가 전부 출석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교수님, 출석부를 고쳐 주십시오.” 교수님은 출석한 것을 결석으로 처리했나보다 생각하고, “왜?” 이야기했는데, “이날부터 이날까지 결석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들이 대리출석을 했나 봅니다. 다 결석으로 처리해 주십시오.” 그게 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표시입니다. 산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삶의 태도입니다.
이 정도로 내용을 정리하도록 하고, 중간고사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열린교회 가서 저녁에 모여 보강을 듣는 날입니다. 수없이 겹친다든지, 몸이 너무 아프다든지 그러면 안 나와도 됩니다. 그런데 결석계를 써서 제출해야 합니다. 그 결석계를 보고 참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밤에 강의한 것은 여러분 개인 이메일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모두 듣고 A4용지 2페이지 분량으로 강의내용을 모두 듣고, 내용을 요약해서 제출하면 출석하신 분 만큼 점수는 못 드리겠지만 결석한 것으로는 하지 않고 평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광고이고, 두 번째 광고는 10월 11일 화요일이 중간고사입니다. 중간고사는 두 가지 범위입니다. 첫째, 맨 첫시간부터 시작하여 10월 4일 강의한 내용까지 중에서 시험 문제가 나옵니다. 이 시험 문제는 일주일 전, 10월 4일에 친절하게도 예제를 내드립니다. 예제를 풀어서 오셔서, 대신 오픈테스트가 아닙니다. 예제 푼 것은 집에서 푸시고, 와서는 아무 참고자료 없이 오직 탁자 위에서 주어진 시험지에 답을 작성합니다. 답은 10줄 정도 답안을 해야 합니다. 질문을 했는데 한 줄정도 하고 끝났다고 한다면 십분의 일 정도 점수가 나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열 줄을 다 쓰면 무조건 10점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따라 판단을 하는데 내용이 길이가 미치지 못하면 성의가 없는 답안으로 분류가 됩니다. 열 줄이 넘을 경우 별로 환영하지는 않지만, 점수를 깎지는 않습니다. 문제 수는 다음 주 예제와 함께 보시면 되겠습니다. 대게 예제가 나가고, 예제 중에서 몇 문제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반 학기 동안 공부한 것을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세 번째 광고는 이것입니다. 「성화와 기도」라는 책을 구하셨을 것입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범위입니다. 이 책은 시험문제를 내는 의도 자체가 이 책을 읽고 논하라, 기술하라, 서술하라, 비평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책을 정말 읽었는가 확인하는 방식으로 문제가 나옵니다. ○×, 혹은 괄호넣기 같은 문제가 나옵니다. 점수를 잘 받고 싶으면 학력고사 볼 때 사회교과서 읽는 방식으로 두 번정도 읽으면 거의 95점 이상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번 읽고 오면 몇 점 받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건성읽을 경우 점수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결국 목표가 책을 다 읽고 목차를 프린트해서 주면 그 책 내용을 가만히 앉아 사람들을 놓고 책 전체를 이야기 해 줄 수 있을 정도 실력이면 거의 95점 이상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 숙제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불과 백 몇 십 페이지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주 짧고, 본격적으로 읽어 보면 읽는 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줄을 치면서 읽기 시작하시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괄호넣기가 많이 나올테니까, 괄호넣기와 ○×가 많이 나오니까 여러분들이 책을 잘 읽으시기 바랍니다. 만만하게 보지는 않으시기 바랍니다. 중간고사는 이렇게 시험을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다시 질서의 문제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기도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질서’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이 기도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래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향해 계획하고 계시는 질서로 돌아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교와 소통이 되었으리라 믿는데, 교회에서 차편을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해 맛있는 도시락과 바비큐를 준비했습니다. 즐겁게 드시고, 아무에게나 안 보여 드리는 서재, 제 도서관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도서관을 다 돌고나서 공부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가능하면 한분도 빠짐없이 다 오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 한 내용을 살짝 1-2분 정도 복습하여 여러분들의 머리를 상기시키고 나가는 것이 연결성을 갖는 것에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내용에 우리의 기도가 창조의 질서와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아무렇게나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하나하나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내적인 구조, 사물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구조를 ‘결’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내적인 구조입니다. ‘결’을 만드시고, 이렇게 사물이 있으면 내적인 결을 만드시고, 외적인 모양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문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리. 그리고 이것은 결입니다. 이 문리는 지워질 수 있습니다. 메추리가 알을 낳으면 알록달록한 알을 낳습니다. 칫솔로 살짝 문지르면 지워집니다. 이러한 것을 문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본질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안에는 결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이라고 이야기 하고, 다른 이것을 ‘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문리’. 물리학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문리’입니다. 문리. 우리들이 흔히 ‘문리’를 터득한다고 할 때, 어떤 사물의 무늬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결까지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사물 하나하나마다 문리 뿐만 아니라 결까지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 자체가 내적 구조이기 때문에 이것 하나하나 내적인 요소들이 있어서 내적인 요소들이 모두 어떠한 연관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리스토텔리트 같은 사람은 「영혼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영혼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계속해서 있으려고 하는 영혼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지탱하게 해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뽀개버리기 위해서 힘을 가할 때, 안 부수어지려고 이것이 버팁니다. 이것을 소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solidarity’라고 이야기하는데, 물리시간에 배웠을 것입니다. 이러한 solidarity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solidarity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혼의 저항이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사물이 그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내적으로 영혼이 그 상태를 떠받히고 있기 때문에 그 사물이 된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물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물들이 수없이 창조되지 않겠습니까. 개수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창조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단 하나도 서로 연관관계를 가지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연관관계를 가지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미학적 구조에 의해서, 미학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것을 염두해 주시고 오늘은 역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미는 결국 아름다움이라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하나의 질서이고, 역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힘이 가지고 있는 질서를 말합니다. 이것들이 기가 막히게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에 기쁨을 주는 신경전달물질이 있습니다. 도파민, 세라토닌 이라고 합니다. 도파민이라는 물질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도파민이 활활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유효기간이 18개월입니다. 18개월쯤 되면 서서히 환승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 유효기간이 18개월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할 때 이 도파민이 충분히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도파민이 너무 많이 쏟아 나오면 정신분열증이 옵니다. 사람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숨을 딱 쏟을 때 남아있는 모든 도파민들이 뇌속으로 쏟아져 들어갑니다. 그래서 죽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비참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끼면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을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커다란 은총이라고 봅니다. 죽음의 순간에, 목이 졸려 죽을 때에도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직전에는 도파민이 쏟아져 나오면서 온 몸에 쾌락을 느끼며 죽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의 고통을 모면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이것을 한 인간으로 본다면 이 인간 안에도 수많은 질서들이 있습니다. 과학적 질서와 물리적 질서들을 비롯하여 많은 것들이 생물학적 질서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적인 결을 형성하고, 그것이 외적인 문리를 가지고 어떤 사람을 만듭니다. 그래서 인간은 문리적인 존재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약속 시간을 어겼는데 너무너무 미안해서 죽을 죄를 지었다, 약속시간을 어겨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아니야, 괜찮아. 아무 상관 없어. 나 너 오는 동안 책 한권 읽으면서 의미있게 보냈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늦었는데 1분도 안 기다리고 자기를 떠나고 문자가 왔는데, “너 나를 뭘로 아는 거냐. 네 시간은 금이고 내 시간은 똥 인줄 아냐? 이제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마라.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돈 훔쳐 가는 사람보다 내 시간을 훔쳐 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단절을 선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많이 만났습니다. 무엇이 차이 입니까? 이 속에 있는 결이 다른 것입니다. 이 결을 이해하는 것이 사람과 관계를 잘 지내는 비결입니다. 사람은 혹 하고 빠질 때 문리에 빠지지, 결에 빠지지 않습니다. 결을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나중에 처음 만나서 좋은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흐르는데 점점 좋아지는 사람이 그 좋아지는 것이 문리 때문에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결 때문에 좋아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2번. 그러면 똑같이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힘으로도 이러한 것들이 모든 조화를 이루면서 한 사물 한 사물을 만들어갑니다. 이것들을 분석하면서 우리들이 분자, 원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라고 이야기 하다가 이제는 입자, 쿼크, 힉스까지 이야기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쿼크, 힉스까지 밑으로 내려갑니다. 예전에는 분자가 최고였는데 분자는 너무 커서 한 없이 내려갑니다. 왜 입니까?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것이 서로 가지고 있는 내적인 관계들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이 안에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도 힘의 균형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끝내고, 다음 우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여기에 태양이 있습니다. 태양, 그 다음에 뭐가 있습니까?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혜왕성. 명왕성은 잘렸습니다. 태양계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과학자들이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지구입니다. 이것은 화성, 그리고 목성입니다. 이게 이것의 곱하기 천 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것 곱하기 백만 배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성은 이만한 크기입니다. 이것보다 엄청나게 더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돕니다. 신학교 와서 이런 것 강의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지구가 있는데, 이것의 크기가 이것도 넘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천 배니까. 그 다음에 이렇게 이렇게 돕니다. 과학자들이 시뮬레이션을 하였습니다. 목성을 태양계에서 한번 제거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목성을 뺐습니다. 목성을 뺐더니 이상한 시뮬레이션이 나왔습니다. 나머지 7개의 행성들이 궤도를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궤도가 점점 달라집니다. 마지막에는 태양계 바깥으로 이탈하여 우주 미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는 6,800년 전에 멕시코 유카탄 지역, 멕시코만에 운석 하나가 떨어집니다. 길이가 10km였습니다. 이 떨어진 것이 공룡 멸절의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떨어져서 바다에 칙슬룹 이라고 하는 곳에 떨어졌는데, 거의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굉장히 타버리니까, 사실 떨어졌을 때 10km가 아니라 100km짜리가 날라왔던 것입니다. 내려오다가 활활 타면서 내려온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려왔는데, 바다에 부딪히는 순간에 바닷물의 어마어마한 양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증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습니다. 부딪히고 모든 파편들이 튀어 올랐는데, 그 파편 중 십분의 일이 중력 바깥으로 튕겨 나가서 영원히 미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핵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땅의 식물들은 죽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공룡은 완전히 멸종해 버린 것입니다. 불에 탄 것은 물론이거니와 핵겨울이 찾아와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목성이 돌면서, 인터넷에 들어가서 목성을 검색해서 보면 목성 표면이 전체가 곰보 덩어리입니다. 암탉 어미 닭처럼 새끼 병아리인 지구를 싸고, 계속 돌면서 수없이 우주공간에서 날아오는 파편들을 온 몸으로 막아낸 것입니다. 1993년도 쯤에 엄청나게 큰 운석이 날아와서 때렸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때려서 치솟은 불길이 1970km였습니다. 제주도에서 터진 불꽃이 거꾸로 세워서 신의주보다 1.5배 정도를 하늘로 불길이 치솟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지구에 한 방만 맞으면 지구 자체가 흔적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10km짜리 하나만 떨어지면 지구는 종말이 온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가막히게 돌면서 1년이면 수천 개의 날아오는 것을 돌면서 다 막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가 살아남아 있는 것입니다.
18세기에 케플러라는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망원경이 발견되어서 우주의 태양계 천체가 운행하는 주기를 계산하여서 그 주기를 비율표로 만들어서 오선지에 옮겼습니다. 오선지에 옮겨서 악기를 그 악보에 맞춰서 연주해 보니까 최고의 화음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역학적인 질서가 결국 아름다움의 질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세계 전체는 이러한 역학적인 질서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움과 동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만약에 한 인간에 대해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보겠습니다. 육체에는 육체의 역학이 있습니다. 첫 시간에 이야기 했습니다. 운동하라고 말입니다. 특히 남자 형제들은 운동을 하십시오. 지금 운동을 하면 너무 좋습니다. 지금 운동 안 하는 것은 나중에 나처럼 후회합니다. 나는 시간이 아까워서 운동을 못 하였습니다. 제일 혐오하는 사람이 아침 일찍와서 족구하는 형제들이었습니다. 나는 그 시간에 기도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족구도 하면 좋을 뻔 하였습니다. 기도도 하고 둘다 했어야 했습니다.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베드민턴이나 걷기나 하는 거 하지 말고, 그것은 50대, 60대 되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격투기해야 합니다. 헬스와 함께 격투기를 해서, 내가 특수부대 출신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평범하게 군대 다녀온 사람은 여자친구 앞에서 세 사람 정도는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라고 합니다. 이것이 몸의 역학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불량배가 되는 것입니다. 몸의 역학은 뛰어납니다. 머리는 깍두기 머리를 하고, 세 사람 정도는 때려 눕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의 질서가 안 잡혀 있습니다. 감옥소 가기가 십중 팔구입니다. 어떻게 몸이 가지고 있는 힘의 질서와 정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질서가 완벽한 조화를 이룰 것인가. (졸지 마십시오. 제 강의는 피를 토하는 강의입니다.) 이 정신의 힘의 질서와 몸이 가지는 힘의 질서가 조화되었을 때, 이 사람은 진정으로 무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깨져버리면 폭력배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똑같이 질서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 자체가 우리의 무질서를 질서로 돌아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가 왕이라 생각했습니다. 위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옆으로 있으면 안 됩니다. ‘뿌야오’ 중국어 써서 미안합니다. ‘뿌야오’ 있으면 안 됩니다. 이 밑에는 다수.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 자기가 하나님 모르고 살 때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내가 최고라 생각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상천하지에 나 혼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최고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이 모든 것들이 질서지워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질서를 가지고 살아보니까 맨날 불행해집니다. 그 불행이 결국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이러한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왕관을 집어 던지고, 아무리 휘둘러봐야 누가 들어주는 사람 없는 지휘봉 버리고, 거지같은 껍질뿐이 아닌 왕의 옷을 집어 던져 버리고, 자신은 여기에 부복하고, 여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로드로, 로드쉽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 세계를 질서 지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워진 질서 안에서 자신의 질서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을 그 질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을 가졌다고 고백하는데도 이러한 아름다움의 질서와 역학적인 질서를 파괴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신앙고백은 이렇게 해 놓고,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것입니다. ‘호박씨 깐다.’는 말 압니까? 겉으로는 A라고 해 놓고, 뒤에서는 B의 짓을 하는 것을 가키려서 한국 속담으로 ‘호박씨 간다.’고 합니다.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고백해 놓고, 뒤에 가서 다른 여자에게 집적거리며 사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너무나도 착한 척 하고 뒤에서는 딴짓하는 것을 가리켜서 호박씨 깐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앞에 이렇게 뒤에서 표리가 부동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혹시 수업 하면서 ‘내가 이 수업을 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과목 있습니까, 없습니까? 등록금에 과목수와 시간수를 나눠 봅니다. 어떤 과목은 한 시간에 10만원입니다. 죽겠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저 뒤에 가서 영어 원서를 읽습니다. 아니면 히브리어서를 읽습니다. 이게 머리가 너무 안 좋습니다. 들리는 것은 A인데, 하는 일이 B입니다. 자꾸 버그가 일어납니다. 인격 형성에 도움이 안 되겠습니다. 버티기를 했습니다. 무슨 과목이든지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강의 잘 하시는 교수님은 앞자리가 미어지고, 강의 못 하시는 분은 폭탄 맞은 것처럼 이렇게 휘어집니다. 나는 항상 앞자리였습니다. 미안한데, 동급생 중에 내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얼굴을 모릅니다. 공부하는 것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는지 아십니까? 교수님이 강의를 이상하게 하시면 노트를 펼쳐놓고, 이상한 강의내용을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필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수행하였습니다. 이런 강의를 들으면서 연습을 해야 하는가. 그게 학문적으로는 유익이 없었는데 신앙적으로는 매우 유익하였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이긴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결국 이 질서가 이렇게 살아가면 고백과 삶의 불일치가 일어납니다. 균형이 깨집니다. 이것은 안 됩니다. 아주 작게 보면 작은 하나의 개별 사물부터 시작해서 우주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다움의 관계이고, 힘의 관계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육체의 힘이 강한 만큼 정신의 힘이 강력해서 두 개가 딱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기도는 끊임없이 이러한 관계를 내적인 구조에 있어서도 이 결을 이탈하려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인간이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내적인 구조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영혼은 보이는 사물을 초월해서 초자연적인 사물을 감지한다는 것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기본적인 능력은 변함이 없는데 이것들 사이에서 결이 자꾸 바뀝니다. 우리의 몸이 세포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결입니다. 그런데 암세포가 있는데, 암이라고 하는 것이 암세포만 계속 늘어갑니다. 그러한 식으로 결이 바뀌게 되면 암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몸을 삼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식으로 망가지게 됩니다. 똑같이 우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여기에 놓여져 있는 이 조합은 최고의 조합입니다. 이 사이에 갑자기 바깥에서 토성보다도 10배 쯤 큰, 지구의 일만 배 쯤 되는 것이 여기에 개입해서 돌아간다고 할 때 어디엔가 부딪혀 박살내든지 아니면 이 궤도 자체를 다 틀어지게 만들어서 누군가로부터는 이 궤도가 이탈되었기 때문에 행성 자체에 놀라운 기후의 변화라든지 아니면 물리적인 변화가 찾아와 이 질서로운 상태를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이 지구를 뭐라고 불렀습니까? 코스모스라 불렀습니다. 코스모스는 ‘질서’라는 뜻입니다. 혹시 이 단어 아십니까? cosmetics. 무엇입니까? 화장품. 이게 코스모스에서 온 것입니다. 화장품은 뭐냐 하면, 사실은 질서가 없는 얼굴인데 질서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코스메틱입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입니다. 질서를 잡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장을 안한 얼굴이 화장을 하면 무질서한 얼굴이 질서가 잡힌 것처럼 착각을 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코스모스가 이 안에도 코스모스가 있고, 그 다음에 이 안에도 코스모스가 있고, 이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결국 끊임없이 이러한 질서를 이탈하려고 합니다. 왜 입니까? 이 이탈하려고 하는 것은 기도로 해결이 안 됩니다. 이것을 이탈하려고 하는 것은,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역학적 구조입니다. 그 구조가 결국 계속 변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이 변하는 구조를 막아줍니다. 원래의 그 질서로 돌아가도록 끊임없이 만들어줍니다.
예를 들자면, 회개가 무엇입니까? 이러한 역학적인 관계와 아름다움의 관계를 이탈하면 결국 뭐라고 했습니까? 미학이라는 것이 위치의 미학입니다. 그래서 강의실에 날아다니는 파랑새가 다섯 마리라면, 수업 중단해야 합니다. 전혀 예쁘지 않습니다. 위치 이탈입니다. 이렇게 위치를 이탈하는 것을 기도의 힘으로, 기도를 통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위치를 다시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라고 하는 것은 위치 이탈에 대한 통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위치를 이탈하였다고 하는 것에 대한 깊은 통증을 느끼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생각을 돌이키게 되는 것이고, 다시 이 원래의 위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깨닫고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찾아갔던 그것이 얼마나 추한지 깨닫고, 이 추한 것을 미워하고 미를 사랑하면서 다시 위치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 위치에 머물러 있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의 본성은 죄를 가지고 태어난 본성입니다. 죄의 본성 자체는 하나님을 향한 대적과 반감입니다. 반감은 정서적으로, 대적은 의지적으로 그러합니다. 전체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enmity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적의’라고 번역합니다. enemy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형성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적의’입니다. 적의가 정서적으로는 반감으로 나타나고, 의지적으로는 대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결국 힘이고, 역학관계를 깨뜨립니다. 결국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결을 깨뜨립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적의로 가득차게 되고, 자신을 왕 삼으려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깨뜨려야 하는데,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기록하십시오. “인간의 육체는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고, 이와 같이 인간의 영혼은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에 가깝다.” 현대의 산업 도시 문명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질병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게 만듭니다. 의학자들은 말합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좋은 환경 속에서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산다면 의학의 도움 없이도 120세까지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 문명이 우리를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 자연 친화적으로 수명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약을 때려 집어 넣어서 우리의 수명을 강제적으로 늘리니까, 결국 생명은 늘어나는데 삶의 질은 형편이 없어서 아무도 찾아봐 주지 않는 요양원에 갇혀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면서 삶이라는게 특별히 있을까 할 정도로 불편하게 우리의 인생을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고 적절하게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역학적인 관계가 우리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이 2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 가운데 제일 중요한 세 번째 질서를 공부하겠습니다. 잠깐 쉬기 원하십니까? 10분간 쉬겠습니다.
(휴식시간 1:19:35~1:32:22)
“세 번째 질서는 도덕적 질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미학적 어울림과 역학적 어울림에 관해서 존재를 지향하며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게 아니라,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만물들을 통해서 투영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에 갔는데 기원전 1세기 시대의 판테온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오천명 정도가 들어가는데, 기둥이 없는 공간입니다. 그 정도 사람이 들어가면 비가 와도 구멍이 뚫렸는데도 비가 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몸의 열기가 위에 있는 좁은 공간으로 몰려 나가면서 비를 좌우로 밀어내 버립니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은 못 밀어내겠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비 정도는 바깥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저는 건축학을 좋아합니다. 가끔 지체들을 데리고 가서 건축 해설을 하기도 합니다. 토요일 성경 공부 속에 한 프로그램이 있어서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 안도 다다오의 작품을 해설하러 갔는데, 거기에 가서 발표한 건축학적인 충격은 아주 굉장했습니다.
(1:34:39~1:34:51 잡음이 심하고, 발음이 명확하지 않아 녹취가 어렵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건축물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것은 건축 작품에 대한 감탄이기도 하지만, 그 지은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의 추구에 대해서 감탄하게 됩니다. 그것을 해 놓은 것을 보면서 얼굴은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어떤 영혼을 가지고 정신세계를 지녔는가를 보면서 감탄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어로는 ‘독사’이고, 라틴어로는 ‘글로리아’, 히브리어로는 ‘카보드’라고 합니다. 영광, 독사, 클로리아, 카보드. 이 모든 것들이 성경에서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입니다. 이것은 essential glory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 영광입니다. 본체적 영광, 이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발산적 영광은 radiative glory. 이것은 뻗어나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뭐와 관련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은 안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지금 여기 계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임재를 보이십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기도하거나 예배드리거나, 찬송을 할 때 언제 어디서나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 마치 여기에 오신 것 같은 느낌을 받도록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장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서. 그 장소를 정해놓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바뀔 수도 있지만, 장소를 중심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불타지 않는 불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였고, 시내산에서 빽빽한 구름 사이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면서 백성들이 음성을 듣고 두려워 떨면서 모세에게 사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죽을 것 같습니다.”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문법을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 ‘거룩’은 우리말에서 형용사입니다. 이것을 명사로 사용하고 싶으면 ‘거룩함’이라는 명형용사로 써야 합니다. 형용사를 명사화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holiness’입니다. ‘거룩함’입니다. ‘거룩’은 형용사입니다. 그런데 ‘거룩함’이라고 우리가 형용사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냥 용법입니다. 용법은 문법을 초월하니까, 많이 쓰면 문법이 됩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거룩 하나님’ 이것이 정확한 문법입니다. 뭔가 이상하니까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쓰는 것입니다. ‘거룩 생활’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생활’이라고 쓰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거룩’은 형용사입니다.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발산적 영광 말입니다. ‘여기에 임하소서.’라고 할 때 대게 radiative glory를 선택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effective glory입니다. 이것(essential glory)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영광이라면 이것(radiative glory)은 그 자리에서 빛나는 영광이고 이것(effective glory)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영광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학생은 고등학교를 어디 졸업했습니까? 점촌 고등학교. 괴산 있는 곳 점촌 맞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동네 중 하나입니다. 점촌 많이 갔습니다. 거기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소백산이 나옵니다. 저 학생이 전에는 몰랐는데, 이 시간을 계기로 점촌 고등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학교에 들어왔는데 너무 공부도 잘하고, 너무 정직하고, 너무 성실하고, 모든 학생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면 점촌 고등학교는 점촌에 있는데, 그 점촌 고등학교의 이름은 사당동에 있습니다. 다음에 점촌 고등학교 학생이 하나 더 들어오면 모두 기대를 가지고, 그 학생이 저렇게 훌륭했으니까 얘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여기에서 점촌 고등학교는 본 사람이 없는데 점촌 고등학교의 이름을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effective glory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할 때,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에 해당될 것 같습니까? 세 번째 것에 해당합니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에 사용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본체적인 영광을 가진 사람으로서 효과를 드러낸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통하고,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영광은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태어난 인간의 존재의 목적에 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배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보겠습니다. 세 번째 도덕적 질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조금 더 읽어 보겠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나 이 자연적 질서안에 있는 아름다움은 보다 더 궁극적 목적을 가진 아름다움에 종속된다. 그것이 바로 도덕적 질서의 어울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향하여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도덕적 목적을 위한 질서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적 질서에 어울림이 드러나는 것은 세상에서 오직 인간밖에 없다. 물론 인간이 그 질서를 이해 못 하든지, 하든지 와는 상관없이 질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보든지, 안 보든지 그와는 상관없이 아름다움을 지니고있는 것과 같다. 도덕적 통치는 질서의 어울림을 따라 일정하게 행사된다. 따라서 이 질서에 이탈하는 사람은 그것을 인지하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고통받고 질고를 당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분은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도덕적 질서의 어울림을 이해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그 질서에 끊임없이 합치시킨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지으시며 도덕적 질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영혼과 지성을 주셨다. 그 질서를 사랑하고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의지를 주셨다. 성령 안에서 완전한 창조는 이처럼 도덕적 질서를 기초로 형성되었다.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도덕적 질서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이바지하게끔 창조된 것이다. 자연 만물은 이러한 미학적, 역학적 질서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세계의 도덕적 목적을 이루도록 존재하고 작용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자연 사물의 질서만을 가지고 자연적 본성에 빛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그리스도를 보내신 구원계획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창조와 구원계획에 나타난 아름다움을 알게 된 신자들은 이것을 더 잘 이해함으로써, 피조물 아래 충만하게 계신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던 17세기의 요한 케플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 주님은 위대 하십니다. 주님의 탁월하심은 놀라우시며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대들이 어떤 감각으로 인식하든지 무슨 언어로 그대들의 창조주를 말하든지 간에 하늘이 그분을 찬양하며 해와 달과 행성들이 그분을 찬양합니다. 하늘의 조화들이 그분을 찬양하며 드러난 그 조화들의 감탄자들이 그분을 찬양합니다. 내 영혼아 그때 또한 사는 날 동안 그대의 창조주이신 그분을 찬양하라. 이는 만물이 그분께로부터 회복되며 그분을 통하며 그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인식할 수 있고 지성으로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양쪽 모두에 전적으로 무지하고 우리가 아는 것 중 아주 사소한 부분 조차도 여전히 그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립니다. 아멘.”」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여러분들 학교 다니면서 케플러의 법칙에 대해서 공부한 적 있습니까? 고등학교 졸업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집에 가다가 케플러의 법칙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 보십시오. 그것까지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이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간결하고 확실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질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미학적 질서에 관하여, 역학적 질서에 관하여 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질서에 대해서 배웁니다. 여기에서 ‘도덕’이란 말이 나옵니다. 중국어로는 ‘따오더흐’라고 말합니다. ‘도덕’이라는 말은 ‘도’+‘덕’, 두 가지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면, ‘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쓰는 사람마다 의미가 각각 다를 수 있겠지만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I am the way.” 내가 곧 길이요. “… the truth, and the life…”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도’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중국 철학사에서도 ‘도’에 대해서 생각한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알다시피 여러분, 동북아 철학은 우리나라,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 철학은 사실 어떤 단어들을 정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definition, 정의가 부족합니다. 서양철학사는 definition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똑같은 도덕이라는 말도 여태까지 이러한 의미로 써 왔지만, 나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이러한 의미로 쓴다고 명확하게 규정을 합니다. 그래서 건축이나 무엇인가 하는 방식 자체가 학문을 건축하는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엄마 손맛이 맛 있지 않습니까.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엄마 손맛에 익숙해져서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흉내를 낼 수 있습니까?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엄마는 콩나물 무침 하나를 할 때에도 들어가는 재료를 보면 요리사가 아는 것과, 엄마가 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계량을 하지 않습니다. 계량을 하지 않고 콩나물을 삶을 때에도 시계를 놓고 재지 않습니다. 그냥 올려놓고 적당한 시간에 콩나물을 건집니다. 적당한 시간 식히고 다른 이야기 하면서도 소금 조금, 간장 조금, 참기름 조금, 깨소금 조금, 고춧가루 조금, 파 조금, 마늘 조금 해서 무칩니다. 그런데 항상 일정한 맛이 납니다. 동북아에서는 그러한 식으로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쉐프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항상 계량기를 가지고 1g, 2g, 3g,… 몇 그램 수를 넣었을 때 최적의 비율이 되어 콩나물 무침이 나오는가 표준하 하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한국 요리가 세계화 하여 보급되는데 어려움이 바로 표준화입니다. 그러한 작업을 굉장히 부지런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하더라도 온도와 습도를 맞춰서 똑같은 조건을 도입하면 완전히 똑같은 맛이 나는데,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똑같은 맛이 안 나온다고 과학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학생) 엄마의 사랑?
그것은 비과학적인 말씀 같고. 그렇게 물어보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것은 엄마의 문제가 아니라 먹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먹는 사람이 애정을 가지고 먹는다든지, 배가 고파서 먹을 때 맛있고, 배부르고 먹기 싫을 때에는 맛이 없다든지 그 말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밝혀졌는데 사람마다 손에 박테리아 균이 나온다고 합니다. 음식 맛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고무장갑을 끼고 만들면 다 똑같은 맛이 나는데, 이것을 벗고 손으로 할 때에는 그의 독특한 박테리아가 나온답니다. 그래서 그것이 음식과 어울어지면서 아주 고유한 맛을 낸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과, 사실 동양 하면 애매합니다. 인도까지 들어가니까 말입니다. 동북아라고 표현하는데, 중국과 한국을 포함하는 동북아에 있는 사람들이 이론에 접근하는 방식과 구라파 쪽에 있는 사람들이 접근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의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의학에서는 전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의학 하는 사람이 전공을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웃긴 것입니다. 우리 몸을 다 쪼개서 머리 통 전공하는 사람, 뇌 전공 한 사람, 심지어 다리인데 다리를 다 전공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부터 여기 전공한 사람, 무릎 전공한 사람, 정강이, 하족부까지 전공분야가 다 다를 것입니다.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동양의학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바보짓 하는 것입니다. 너무 이상합니다. 몸 전체가 하나의 우주처럼 흐르는데, 그것을 토막을 내어 따로 전공한다?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의학적인 반성이 일어나면서 외과하면 외과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는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내과의사들이 와서 외과의사들에게 조언을 해 주고, 내과에서는 외과의사들이 와서 조언을 해 주고, 심지어 심장내과 하는 사람이 심장외과에 와서 조언을 해주고, 다 도움을 받아 협의를 만들어 합니다. 그것이 이제 현대의학의 발전된 모습입니다. 분과가 나누어지면 나누어질수록 협업을 해야 할 요소들이 많은 것입니다.
약간 옆으로 빗나갔지만, ‘도’와 더불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도’가 무엇인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명확하게 정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작품 전체를 읽으면서 유추할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대체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도’라고 하는 개념은 객관적으로 있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입니다. 객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규범의 근거’입니다. 이러한 것을 ‘도’라고 부릅니다.
좋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무 못 배웠습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막 하는데, 대답을 합니다. “그게 바름이냐? 그것은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지. 어떻게 인두껍을 쓰고 그렇게 할수 있느냐.”라고 할 때 화자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그것을 풀어내어 설명하라면 못하지만, 뚜렷하게 불의에 대한 것들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살아있는 것을 가리켜서 consciéntĭa, 양심이라고도 부르고, synderésis라고도 부릅니다. 양심은 ‘con’입니다. con-은 함께입니다. sciéntĭa은 지식입니다. 지식과 함께가 붙어서 의식 안에서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계속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들이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어로 synderési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객관적으로 ‘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도’가 있는데, 신기한 것은 이것입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법을 비교해서 보면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똑같습니다. 동야에서는 사람을 죽인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이야기 하고, 서양에서는 상관없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서양에서는 부모에게 불효해도 좋다고 이야기 하고, 동양에서는 불효하면 감옥에 가둔다고 그러한 식으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것에서는 거의 일치를 이룹니다. 그런데 많은 신인혁명들을 거치고, 특히 파리의 6.8 학생 혁명운동을 거치면서 기본적인 가치관에 있어서 많은 변동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를 번역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는가 하면, 모든 사람 속에 기본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consciéntĭa나 혹은 synderésis가 일치되게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러한 감각들을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가리켜서 common sense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식이라고도 부르지만, 공통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사물을 판단하는 정서의 문제, 의지의 문제까지도 모두 해당이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아름다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추하다고 하는 것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예이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공통감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뭐가 생겨나는가 하면 유행이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최근에 블랙핑크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는데, 제가 Pink Venom이라는 노래를 들어보았습니다. 묘하게 끌리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가사에는 동의할 수도 없고 내용도 없는 것 같지만, 노래가 끝나도 자기도 모르게 또 다시 틀게 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공통감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것이 바로 예술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BTS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똑같이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유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가 있는데 사실 이것이 무엇인지 규명해 낼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가 만약에 도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가능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도는 그 자체가 우리가 어떤 common sense를 가지고 consciéntĭa나 synderésis를 통해서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규명되었다면 더 이상 그 도는 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물어보겠습니다. “너, 왜 저 자매를 사랑해?”라고 물어볼 때, 최상의 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너 왜 쟤를 사랑해?”라고 물어볼 때, 최상의 답은 무엇입니까?
(학생) 그냥 사랑해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해야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부자시잖아.” 그러면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장인어른 될 분의 호주머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최소한의 대답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도’가 사람의 마음속에 인식은 되지만, 규정이 안 되는 것처럼 사랑한다고 하는 감정이 의식은 되지만 규정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면 말입니다.
어쨌든 ‘도’는 ‘원리’이고 ‘규범’입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전통적 철학에서 본다면 ‘도’의 개념은 가변이겠습니까, 불변이겠습니까? 철학적으로 금새 알수 있지 않습니까. ‘도’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러한 ‘도’가 있다면 이것은 가변입니까, 불변입니까? 확신을 가지고 대답하지 못합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이러한 규명할 수는 없지만, consciéntĭa, synderésis, common sense를 통해서 ‘도’라고 하는 것을 막연하게 인식을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정신 속에서 가변적인 존재입니까, 아니면 불변적인 존재입니까?
(불변적인 존재입니다.)
불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에 이 ‘도’는 객관적이기 때문에 불변인데, 그런데 여기에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도’에 접근하게 됩니다. 이것 하는 것도, 이것 하는 것도 마음으로 하는 것 아닙니까. 실제로 인간의 마음이 있는데 이것이 똑바르게 일평생 살아가는 것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가능하다면 예수님 오실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왜 입니까? 이럴 수 있는 사람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구원의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이게 뭐냐 하면 아예 이렇게 가 버릴 수도 있고, 거의 빗나가지 않으면 대체로 이런 종류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입니까? 거의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대부분은 미안하지만 이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이게 Tao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Tao와 일치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주관적입니다. 이 ‘도’만큼 얼마나 일치된 삶을 살앗는가에 의해서 이 사람의 덕이 결정이 됩니다. 이것은 virtue라고 합니다. 라틴어로는 virtus(비르투스)라고 이야기합니다. virtus는 vir-라는 단어에서 오는데 이것은 힘을 이야기하고, 사나이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덕’은 영혼의 올바른 힘입니다. 아무 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의에 입각한 힘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파 들어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도덕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Tao와 거기에 일치하려고 하는 인간의 정신의 힘, 두 개가 합쳐진 말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Tao는 있는데 이것이 이 사람이 개판으로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부도덕한 삶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비교적 완벽하지는 않지만, 여기에 끊임없이 돌아오면서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도덕적인 삶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 개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 질서가, 하나는 도덕적 질서라 이야기하고 여기에 다른 하나가 있는데 자연적 질서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이 이렇게 하고 살아갑니다. 퍼질러 자고, 술 마시고, 밤 새고, 나쁜 짓 하고, 몸을 함부로 굴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과 일치되는 순간이 너무나 드뭅니다. 그럴 때 이것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육체의 질병으로 이 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젊었을 때는 회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무리를 해도 끄떡없습니다. 제가 기록이 21시간을 에세이를 쓴 적이 있습니다. 한 번 도 안 일어나고 말입니다. 물 하나, 빵 하나, 책상 아래 요강 하나. 그것 놓고 21시간 에세이를 썼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록이 18시간을 똑같이 놓고 히브리어 창세기를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몸을 무리하게 되면 자연적인 질서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21시간 동안 쓰고 났는데 너무 기분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은 망가지게 됩니다. 48시간까지 안 자고 시험공부를 해 본 적 있습니다. 세상이 세상이 아닙니다. 정신이 몽롱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연적 질서입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연적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밤 되면 자고, 아침이 되면 일찍 일어나고, 적당한 운동과 영향과 햇빛과 음식을 먹으며 따라가면 자연적인 질서 안에서 육체적인 건강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똑같이 정신도 이러한 식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불행해지게 됩니다. 행복해지려면 최소한 이것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데, 나간 다음에는 여기까지 갔느냐 여기까지 갔느냐가 중요한데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돌아오게 됩니다. 다 먹고 보니까 ‘한 사발을 퍼먹고 보니까 독약이었더라.’ 그러면 죽음밖에 기다릴 게 없습니다. 혀끝에 약간 맛을 보았는데 너무 이상해서 다 버렸다고 한다면 상처는 받을 지언정 죽지는 않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게으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정신의 질병인 것을 모릅니다. 2003년도에 제가 「게으름」책을 썼는데, 40만 부가 팔렸습니다.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는데, 202쇄가 찍혔습니다. 그 당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냥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영혼의 질병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도덕적이라고 할 때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사실 이 두 가지가 연결이 되겠습니까, 연결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로 창조하셨다고 볼 때, 이 두 개가 연결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밀접하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부터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활동을 하면서 정신이 도덕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질서를 따라 살아갈 때 이상적인 인간의 행복이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 결론을 내겠습니다. 미학적인 질서, 역학적인 질서, 마지막으로 도덕적인 질서가 있는데 결국 인간에게 있는 죄는 끊임없이 이 질서를 이탈하려 합니다. 끊임없이 이탈하려고 하는 그 결론은 자연적인 질서를 이탈하게 되면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고, 도덕적인 질서를 이탈하게 되면 영혼이 피폐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피폐해진 영혼만큼 똑같은 방식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죄짓는 삶입니다. 죄를 지으면 영혼은 더욱 그 질서로 돌아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산란하던 마음이 쭉 정돈이 되면서 무엇인가 질서가 잡히는 느낌이 들고, 기도 안 하고, 말씀 안 읽고, 내팽개치면서 살게 되면 무엇인가 단정하였던 질서들이 흐트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과 신학 뿐 아니라 인문학과 역사, 철학, 사상, 현대문화에 대해서 읽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결국 이러한 질서에 대해서 오류와 진실한 것들이 마구 섞여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지혜를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질서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오해하고, 어떻게 올바르게 이해하였는가. 이 시대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과감하게 나를 삼켜서 어떻게 나의 질서를 합법화 시키면서 무너뜨리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들이 바로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상계, 특히 신학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성 혁명’입니다. 이것은 사실 ‘성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공공연한 주제가 되었고, 넓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에 대해 개방적인 문제를 가지고 와서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인가 할 때, 크게 3단계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극도의 개인주의화입니다. 지난 시간 말한 바와 같이 산업화 사회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프라가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이 되니까 아파트 위에 있는 사람, 옆집에 있는 사람과 서로 알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산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렇게 큰 건물이 있는데 여러분이 건물주라고 생각해 봅시다. 건물주로서 1층에 대형 약국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1층서부터 10층까지 모두 병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을 서로 알게 되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과 계속해서 처방전이 왔다 갔다 하고, 뭔가 부당한 것이 있다면 항의하기도 하고, 고마움이 있으면 인사표시도 할 테니까, 알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생산과 서비스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윗 동 사는 사람과 아랫 동 사는 사람이 생산, 소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공동구매를 하면 모를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단절이 되고, 개인주의화 됩니다. 개인화 됨에 따라 개인행복우상주의가 됩니다. 개인행복우상주의가 되면서 마지막 세 번째는 이러한 식의 성에 대한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을 정치가 이용을 합니다. 영국 총리가 불륜을 저지른 그것에 대해서, 유럽에서는 더 이상 허리 아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총리실 공간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가고, 절교하면 내쫓고 새로운 여자친구를 들어오게 하는 그것이 우리 상식으로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정치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 moral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인간을 노예 취급하는 전근대적인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으면서 퍼져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더이상 성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거나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자체를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체가 똑바로 서 있어야 하지만, 판단하고, 이렇게 자기 길을 찾아갈텐데 이 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마다 다른 거울로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기에 대해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비650 인가, 뷰티 애플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릅니까? 찍으면 가상적으로 자기 얼굴이 나옵니다. 어린왕자 소설에 나오는 별 이름입니다. 뷰티 카메라입니다. 각자 자기 자신이 이것을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모두 비 인간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회도 아니고 인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형법이고 민법이고 필요가 없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 내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구나 결론을 맺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질서를 끊임없이 이탈하면서 살면서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고, 그 자체가 자신 속에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노력을 안 합니다. 그러면서 막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질서를 이탈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이 질서에 이탈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애를 쓰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애를 쓰는 것만큼 계속해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는 이렇게 우리 안에 있는 진정한 Tao가 무엇인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또렷하게 생각나게 만들어주고, 실제로 이 Tao를 이탈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자체가 사실은 아까 이야기하였듯이 이 위를 잘못 인식하였기 때문이고, 힘이 잘못 작동되었기 때문이고, 도덕을 잘못 설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결국 의지의 문제이고, 이것은 정서의 문제이고, 이것은 지성의 문제입니다. 인간 스스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무능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올바른 것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고, 그래서 회심하기 전에 그렇게 예쁘고 아름다웠던 것이 그렇게 추악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 ‘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가져온 것입니다. 똑같이 ‘힘’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도덕’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상에 뭘 잘못한 것이 았냐. 진짜 나쁜 놈들은 감옥에 있다.’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죄인 중에 죄인이요 괴수로다.”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 도덕적인 관념의 변화가 가능해지게 하는 것이 바로 현실속에서는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이 알아도, 많이 알고 기도 안 하는 사람보다는 조금 알고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깊은 행복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