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기도(2022.10.18._총신대 학부생 수업8)
신앙과 기도 7
녹취자: 김정호
오늘 여러분들이 발표할 강론이 뭐죠? 왜 나는 혼자인가?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맨 뒤에 앉아 있는 학생 이름이 뭐죠? 이동훈부터 시작해서 그 뒤에서부터 하나 둘 이렇게 차례대로 하시겠습니다. 발표하시죠, 이동훈 학생 (05:42∼06:55) 김건우 학생 (07:18∼07:38)
송준엽 학생 (07:56∼09:40)
고승윤 학생 (10:00∼11:53)
박성결 학생 (12:19∼13:22)
권용진 학생 (14:30∼15:40)
이지수 학생 (16:03∼17:50)
심재훈 학생 (18:17∼18:43)
신예은 학생 (19:55∼22:17)
유상훈 학생 (22:46∼24:13)
한은빈 학생 (24:29∼26:08)
김효범 학생 (26:30∼28:20)
시를 하나 쓸 테니까 여러분들이 베껴 쓰고 싶으면 쓰세요. 왜 웃어요? 소외감을 느끼게 왜 웃어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이 중학교 수준에서 잘 알아볼 수 있게 다시 써 주겠습니다. 당나라 초기에 진자앙이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당나라에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쓴 유명한 시 ‘유주대에 올라’입니다. 유주대라는 무슨 망루 같은 곳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 올라서 쓴 시입니다. 중국에서 오신 분 계세요?
앞에서 옛 사람을 볼 수가 없고
뒤에서 오는 사람을 볼 수 없도다.
천지의 끝없고 끝없음을 생각하니
홀로 외로워져 눈물이 흐르는구나
무슨 느낌이 들었습니까? 무슨 느낌이 드신 분 한번 말해보실래요?
한은빈 학생 : 저는 다른 사람들과도 단절돼 있고 또 이 세계에서도 본인이 소외감을 느껴서 외로움 때문에 슬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슷하네요. 또 어떤 느낌을 받고 있어요?
학생 : 그냥 외로워서 슬퍼 보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흔히 느끼는 외로움과 이 사람이 느끼고 있는 외로움이 어떻게 다른 것 같아요? 굳이 말하자면?
학생 : 사람과의 단절. 그런 것에 대한 소외감입니다. 사람과의 단절에서 느끼는 소외감.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뭘 보여 주냐면 앞 절에 나오는 앞에서는 옛 사람을 볼 수 없고 (다 지나갔으니까) 뒤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어떤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단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사실은 인간에 대한 단절을 이야기하는 아니라 중요한 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천지의 유효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내가 여기 있는데 옛날 사람이고 이제 후대에 태어날 사람입니다. 근데 어차피 세 사람은 못 만납니다. 근데 못 만나는데 천지의 유효함을 생각하니까 나나 옛날 사람이나 후에 오는 사람이나 모두 다 그 천지 앞에서 티끌처럼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천지의 끝없음을 생각하니까 자기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창연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외로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그냥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자신이 아주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거룩함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했잖아요? 그 거룩함이 하나님의 존재적인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이라고 했는데 존재적 초월성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자신의 미천함이라 그랬습니다. 그런 자기의 의미 없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까 이것은 옛날 사람이나 뒤에 오는 사람을 누구를 만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그런 슬픔이 아닙니다. 그게 눈물이 쫙 흐르는 것입니다.
한시가 진짜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처절한 외로움들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현대인들이 사실은 아주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것은 인간이 외롭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면 그것은 매우 미성숙한 인간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게 외로운 이유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각자 다른 사람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나를 낳았고 만약에 자기 목숨하고 자녀의 목숨하고 바꿔야 될 상황이라고 하면 당연히 정상적인 엄마는 자기 목숨을 버리고도 자식을 어떻게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식은 안 그럴지 모릅니다. 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은 그거고 외로움은 해소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체의 환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주체를 상실하고 다른 주체와 통합됨으로써 완벽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게 드라마 영화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그것도 약간 좀 질이 낮은 영화에서 그런 것들이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환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체는 결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주체성을 포기하고 또 다른 주체에 몰입됨으로써 그 사랑의 만족이라는 것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 결혼 안 했잖아? 내가 일생에 결코 손해 보지 않을 하나 핵심만 가르쳐 주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혼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골라서 결혼을 하십시오. 혼자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사람은 절대 둘이 만나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져서 헤엄 못 치는 사람이 물속에서 손잡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헤엄을 못 치는데 헤엄 못 치는 사람이 또 와서 두 손을 꼭 잡으면 어디로 들어가겠습니까? 깊이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주체의 환상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희생의 환상이 뭐냐 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생각을 그 사랑에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되 항상 자기 주체가 있고 나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주체적인 행위입니다. 주체가 없으면 이미 그것은 사랑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회적으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스토킹 같은 것이 왜 그런지 아십니까? 심리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그 스토커들이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주체로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절대 사랑 아닙니다. 그것은 집착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언젠가 싫증냅니다. 인격적인 사랑일 수가 없는 것이니 진짜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딱 보고 판단하는 게 외모 뭐 이런 걸로 보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의 성격이 정상인가 하는 걸 딱 봐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자기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가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사랑하고 이것을 결정하는 인격적인 일에 있어서 장애가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확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진짜로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데이트 폭력은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주체성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구별법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폭력에 길들여지고 막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운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외로운 것을 사람을 통해서 해결될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그런 방식의 생각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몫입니다. 자기 자신이 해결해야 될 몫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과의 교제가 필요 없다든지 사랑이 우리의 외로움을 완화시켜주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사랑이라는 것도 가능해지고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이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발전도 외로움을 자각하면서부터 정신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춘기 되기 전까지는 맨날 엄마만 찾습니다. 엄마, 어디 있어? 전화통에 불이 납니다. 엄마 어디 가? 나만 놓고 왜 집을 비웠어? 엄마, 어디 있어? 언제 와? 맨날 그럽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엄마 전화들이 절대 울리지 않고 돈 달라는 것 이외에는 문자도 안 받는 때가 옵니다. 그게 뭡니까? 이제 자기 주체성이, 자기 주체가 파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청소년들을 부모들이 잘못하는 것이 교육시킨다고 아이에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넌 왜 이 모양이냐고 하는데 애들의 마음속에는 아직 주체가 형성이 안 됐기 때문에 자기가 누군지 싸우느라고 이 안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염장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과 싸우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엄마와 한 판 붙는 게 훨씬 시원하고 훨씬 더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입니다. 그러니까 염장을 지르면 안 되고 아이들은 자신과의 싸움도 지금 감당하기 힘든 이 내적인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기다려줘야 됩니다. 그게 교육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이 서게 되면 그 사람은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는 토대가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체를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주체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면서 의식한다는 것도 되지만 밖의 세계를 계속 많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라고 하는 존재를 다양한 각도에서 반성하면서 자기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문학 작품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다양한 각도에서 자기를 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왜 어렸을 때 유행가보다도 동요를 권장하는지 아십니까? 유행가는 우리를 입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동요를 어렸을 때 좋아하면 청소년이 돼서 반드시 가곡을 좋아하게 됩니다. 가곡을 좋아하면 좀 더 크게 되면 반드시 클래식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면 클래식은 높은 음악이고 대중가요는 저질이냐?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트로트 같은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때는 어디 모임에 가서 트로트를 부르면 사람들이 너무 창피해했습니다.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트로트가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소비입니다. 그냥 소비입니다. 그러니 인생을 전체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일에 있어서 어떤 철학적인 정교함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감정을 그냥 소비해서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일회용 소비 제품처럼 팔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렇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인생을 입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음악이 딱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예술을 하고 문학을 하게 되면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는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 뭘 읽는다 하는데 그것도 쓰여질 때 목표 그 자체가 읽는 사람을 유쾌하게 하고 읽는 사람을 빠져들게 하기 위해서 쓴 그런 오락용 작품이 있단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특징이 인생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냥 그 자체의 재미 속에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게임이 대표적인 건데 게임을 하면서 우리가 뭔가 반성을 하게 될 그런 건 없습니다. 내가 뭐 키를 잘못 눌렀다든지 이런 건 반성하게 될지 모르지만 인생에 대해서 반성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런 반성적 사고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반성적 사고를 하는 것은 굉장히 훈련 안 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계속 운동하는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안 하던 일반 사람들이 만약에 요가반에 들어간다든지 필라테스반에 들어가면 몇 시간 동안은 계속해서 비명 소리를 지릅니다. 안 쓰던 근육을 찢으려니까 그냥 다리가 쫙 펴게 되고 요가에서 자기 발로 머리 툭툭 칠 정도 될 때까지는 엄청난 비명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왜? 결국 안 쓰던 근육을 쓰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끝까지 파악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외로운 존재잖아요. 사랑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자기의 주체성이 없는 상태에서 사랑의 감정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결국은 주체의 환상에 빠지게 되면서 자기의 주체를 양도하고 다른 사람의 주체와 통합이 되면서 어떤 불멸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소리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잠시 환상에 빠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희생의 환상에 빠져서 저 사람이 몰라주지만 내가 이렇게 미치도록 희생을 하면 애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주체를 손상시키면서까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인생을 다양한 각도에서 많이 볼 때에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이 주체의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이나 예술, 영화 같은 것도 아주 훌륭합니다. <헤어질 결심> 얘기해줬죠? 그것을 보면서 제가 최근 10년 안에 본 영화중에서 가장 예술적인 한국 사람이 만든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의 교훈과 일치하느냐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생각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예술이나 문학이나 아니면 영화나 심지어 드라마도 좋고 아니면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연애사나 혹은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일들, 행복한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항상 들을 때 자기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라고 하는 그 고리 속에서 그것을 들어야 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들릴 때 그 말씀이 자신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고리를 만들어서 그것을 거기다가 자기의 삶을 딱 걸고 이해하려고 할 때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여행 같은 것도 너무 훌륭한 것입니다.
피렌체를 한 댓 번 간 것 같은데 마음 같으면 한 30번 가고 싶습니다. 피렌체에 어떤 젊은 여성이 피렌체에 왔습니다. 어디 남미하고 뭔가 아메리카하고 뭔가 좀 유럽 사람이 이렇게 섞였는데 어느 인종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 언덕에 다 올라가서 그 아래에 있는 피렌체시를 이렇게 돌아보면서 혼자서 말없이 석상 있는 데 걸터앉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물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왜 우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데 제 생각에는 피렌체를 보면서... 저는 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아주 굉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현대 정신이, 근대의 정신이 깨어난 곳이 피렌체나 파도아나 베네치아나 이런 곳에서부터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르네상스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니면 못 갚은 카드 값 할부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저에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런 것이 여기에 깊은 울림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해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외롭다고 징징거리는 사람하고 가까이 지내지 마십시오. 피해를 입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외로운 걸 깨끗이 받아들이고 주체성 있는 인간으로서 어찌 할 수 없는 외로움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이것을 나의 성숙의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뭐냐면 사람의 사랑을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상태가 최고의 상태입니다. 한번 써보십시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을지라도 외롭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다’ 여기에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문장은 ‘자신은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자신은 누구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주체성의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멋있는 인생이겠습니까? 자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가엽고 너무 불쌍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아야 할 그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랑하는 가운데 이미 자신은 충만한 사랑 속에 있기 때문에 외로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성숙한 사람들이 이런 비밀들을 터득하지 못하면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던집니다. 그런데 절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부모에게도 자신을 던지면 안 되고 애인에게는 더더욱 던지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결혼한 자매가 너무너무 결혼하고 싶어서 결혼을 했습니다. 한 달 지났는데 느낌이 어떠냐고 물으니 결혼을 해도 여전히 외롭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답했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성에 대한 환상이 크면 클수록 인생이 힘들고 고달프게 살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제가 얘기했습니다. 너 아니면 죽어버릴 것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하고 절대 엮이지 말라고 제가 얘기하잖아요. 그게 물론 사랑하면 그렇게까지 고백할 수 있지만 진심이 그런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완성해가고 상대방을 완성해갑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나눠 얘기해야 될 것은 사람이 이렇게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이렇게 서 있으면 여러분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되게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오래 섰다가는 그 다음에 앉고 싶고 앉았다가는 기대고 싶고 기댄 다음에 아예 눕고 싶은 것입니다. 눕고 나면 그 다음에 잠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가장 에너지를 적게 쓰는 거니까. 그러니까 궁금한 건 뭐냐면 주체성이라는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이 주체성은 뭘 필요로 하냐면 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정신적인 힘이 없으면 자기 주체성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혹시 ‘교회 오빠’라는 영화 봤습니까? 본 적 있습니까? 그런 영화도 안 봐요? 좋은 영화니 한번 보십시오. 어디 인터넷 들어가면 있을 것입니다. 암에 걸려가지고 죽어 가는데 고통이 너무 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통제를 맞으면 고통은 사라지는데 하나님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통제를 거부하고 그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받는 위로가 육신의 고통을 이기게 만들어 준다는 내용입니다.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힘을 어디서 공급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내가 힘을 내야 한다고 해서 힘이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그걸 어디서 그렇게 자기가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헤어져도 충격은 받겠지만 주체성 자체가 이렇게 무너져가지고 뭐 살인을 결심한다든지 자살을 해버리든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안 하고 여전히 주체로서 자기가 살아가야 할 인생 속에 한 사람을 만난 것이라는 정도로 정리를 하고 가던 자기의 길을 갈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이 세상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걸 오히려 더 사랑의 힘이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주체의 환상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면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요? 왜냐면 혼자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힘든데 똑같이 나처럼 있는 사람을 또 만납니다. 좋아하는 감정의 격류가 일어날 때에는 이게 중독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가 이야기했듯이 일종의 광기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광기 상태에 들어가면 그때는 잊음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마약 같은 진통제를 먹고 피곤을 잃어버린 것이지 그게 진정한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래부터 이런 식으로 사상을 다 퍼뜨리고 텔레비전 켜기만 하면 사랑 타령을 하면서 이런 것들이 막 준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부딪혀서 사랑을 해보고 나면 진짜 이런 힘을 공급받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한번 눈 씻고 찾아보십시오. 상처투성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바보 같은 환상들을 계속 집어넣는 이 근원에 대해서 모릅니다. 어떻게 알아요? 세상 사람이 이걸 어떻게 압니까? 이 진장(60:38)에게도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천지의 유일한 생각하니까 너무나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유주대를 내려갔는데 그러면 무슨 힘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물을 때 과연 이 사람이 대답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자기의 그 미천함을 느끼면서 대답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랑은 원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세계를 감싸면서 그 사랑을 흉내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뭔지 아세요? 이런 중간에 대한 고민 없이 너무나 쉽게 여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답은 찾았는데 그게 문제집에 뒤에 해답 보고 쓴 것입니다. 숫자만 바꿔서 문제가 나와도 절대 못 풉니다. 그런데 인생은 항상 우리에게 문제집처럼 똑같은 걸 우리에게 주는 적은 없습니다. 항상 다르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을 했는데 뭐 어떻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사람을 만났는데 그 인간이 똑같은 인간입니까? 복사판도 아닌데. 그 사람이 똑같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 세월이 실패를 겪는 동안에 내가 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관계는 똑같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그런 식으로 찾은 정답, 누구한테 물어봐가지고 그 사람이 가르쳐준 족집게 과외 같은 것을 가지고 그것을 자기의 답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내가 보기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앵무새입니다.
사랑 얘기만 나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우리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자기화 되지 않은 답입니다. 이것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이 속에서 깊이 체험하면서 자신 속에서 정리되어서 이런 생각들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이쪽으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14세 2개월 때 교회를 떠나면서 느낀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어린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무생각. 생각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 교회였습니다. 인생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곳이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14세의 제 머리에 비치기에 그 많은 어른들이 있었지만 인생에 대한 생각이 14세 된 저만큼도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답을 내리고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찾아가는데 삶은 하나님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은 너무너무 소중한 인생입니다. 그리고 한 번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헤르만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라는 소설에 보면 그 젊은 날들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가를 그림처럼 묘사합니다. 그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말라고 제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는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니까 대지의 현실성을 인정하면서 대지 위에 살아가는 근거는 대지 그 자체가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하늘을 근거로 삼으면서 그 사이에서 우리가 명랑함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여기까지 한 내용 중에서 혹시 질문이 있으면 하십시오. 반응이 없습니다. 질문 없습니까? 여기 먼저 손들었습니다. 먼저 하고 그다음 질문하세요.
질문자 1 : 그전에 교수님의 사모님께서 다치셨을 때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랑의 동일성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과 희생의 환상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그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의 환상이라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자식한테 피눈물이 나도록 잘해주면 결국 하늘도 알아주실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체성과 자율성을 해치면서 자기는 싫은데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식이 그걸 몰라주면 그것이 원망과 원한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한 그 경험은 주체가 한 주체를 상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가 주체를 사랑하는 데서 오는 일체감입니다. 그럼 만약에 내가 사랑하는데 사람이 다쳤는데도 나에게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할 때는 사랑의 감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이 그렇게 넘어져서 여기를 확 다쳐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을 때 나의 주체가 손상됐느냐면 주체가 손상된 게 아닙니다. 나는 나의 주체로서 그가 그렇게 된 것을 너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부당하게 희생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기 위해서 내 주체성을 양보하고 찌그러뜨리는 그런 종류의 감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문자 2 : 총 네 가지 얘기하신 건데 아예 주체성도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막 사랑 노래 이런 거 찾고 그냥 세상 거 찾는 사람이랑 주체성은 있는데 그냥 그것에 대한 힘이 어디 있는지 못 찾는 사람들. 그 힘이 하나님이라는 걸 아는데도 자신이 이런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계속 얘기해 주시는데 약간 전도서 강해 같은 느낌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자신의 주체성도 있고 힘도 어디서 오는지도 아는데 약간 혼란이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하냐면 말입니다. 지성인데 그러니까 원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타락하기 전에는 마음의 구조로 보면 지식이 제일 큰 형입니다. 그다음에 지성이 뭔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 그걸 따라서 그대로 감정이 그걸 느껴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감정이 그것을 느끼고 나면 막내가 있는데 이게 의지입니다. 의지가 이것을 따라서 동하고 하고자 하는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라틴어로 볼로와 놀로라고 하는데 볼로는 하고 싶다는 것이고, 놀로는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좋은 것을 보고 예쁜 것을 보면 하고 싶고 미운 것을 보고 싫은 것을 보면 하기 싫어지는 거잖아요. 어쨌든지 이건 의욕의 방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큰 임무가 이 지성에 있는 것입니다. 지성이라는 큰 형이 딱 보면서 이것은 옳다. 혹은 그르다.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다. 이렇게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이니까 절대 좋아하지 말아라. 이렇게 판단을 내려주는데 이런 기능이 타락하면서부터 망가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뒤집힙니다. 이게 뒤집혀서 지성은 어두워지고 감정은 불규칙해집니다.
그러니까 임의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임의성이 많아서 마음대로 날뛴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의지는 통제가 불능합니다. 그래서 형들의 통제를 안 받습니다. 그래가지고 결국 이게 뒤집혀서 위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마지막 나쁜 일을 하고자 할 때 지성의 동의를 얻어내야 양심의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게 뒤죽박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어거스틴이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우리의 인간의 의지와의 관계는 말과 기수의 관계와 같다. 그래서 말과 기수가 한마음이 되어서 기수가 기가 막히게 말을 몰면서 일체감을 가지고 달리는 게 말 경주잖아요. 그런데 섣부른 기수가 타가지고 말은 말대로 길길이 날뛰고 자기는 거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음이 인간의 성령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않는 그런 상태의 혼란이 인간의 내적 구조 속에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아까 얘기한 것처럼 자기가 자기로서 살아야 되겠다는 어떤 주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고 내가 사랑의 주체의 환상에서도 벗어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희생의 환상 같은 것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충분한 게 아니라 지성적으로 정리가 돼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볼 뿐만 아니라 자기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모든 것들이 자신의 마음과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깨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라는 존재가 여기 있으면 자신의 주변에는 반드시 환경이라는 것이 있을 겁니다. 이 환경에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떤 물질적인 것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함께 교차하면서 이것들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든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영혼의 이런 것들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게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실제적으로 이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그냥 바윗덩어리 같은 사람이 돼서 누가 뭐라 그래도 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이 주체라고 이야기하자는 것인데 주체는 항상 유연한 것입니다. 물처럼 흘러가야 이런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때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가엽게 여기고 눈물을 흘려주고 불의한 사람을 만나면 그를 바르게 인도하고 애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위로하는 등의 물처럼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게 주체성 있는 삶입니다. 그냥 나는 아무도 안 만나도 내 골방에서 혼자 지낼 수 있어. 대표적인 사람이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분들은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떨어져서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 속에서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얘기했듯이 자신이 있어야 될 곳은 사회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최고의 스승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서 교류하면서 내가 뭐가 모자라는지를 깨닫게 되고 내가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내가 못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내가 그래도 쓸모 있는 인간이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자연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최근 1개월 동안 나 때문에 깊은 감동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손들어 보십시오. 내가 감동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마음 깊이 감동을 받았었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들은 삶의 자존감이 아주 높습니다. 자기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을 잘 안 합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그 속에서 자기가 실현되는 기쁨과 자기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세 사람이 손을 들었는데 우리 모두가 손을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을 하면 나는 감동을 못 줬지만 누군가에게 아주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면 손들어 보십시오. 한 달 내에 있다면 한번 손 들어보세요. 똑같이 3∼4명밖에 안 됩니다. 아까 그 2명이모두 들었습니다. 굉장히 건전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맛과 다른 사람의 주체를 해치고 통합함으로써 희열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입니다. 그게 심해지면 소시오패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면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자기 자신도 기쁘게 감동을 받으면서 그 감동을 통해서 서로의 주체성을 고양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 바로 인생에 있어서 숙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잘 아는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절반쯤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 사는 게 너무 외로워서 연애에 올인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좋은 결과가 안 옵니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여기까지 하고 10분만 쉬겠습니다.
질문자 :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랑은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일종의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데이트 할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묻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오후 3시까지 강의를 하라고 하면 칠판에 새카맣게 쓰면서 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이성적인 것일 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자신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가 신비한 것이 사람이 말로 해서 모두 전달될 수 있으면 그것은 하나의 과학이고 학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신앙의 정수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가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느끼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느끼는 것이고 내가 정말 작품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느끼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 경험은 모든 사랑의 경험을 압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생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맹목적이라는 이야기는 내가 잘 안 쓰는 단어고 거의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인의 상상에게 나온 것입니다. 우리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아가페가 뭐냐고 하면 신의 맹목적인 사랑이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냥 교과서에다 끄적끄적 써놓은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맹목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이기적인 욕망 같은 것이 없는 그런 상태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면 무척 깁니다.
오늘 우리 기도에 대해서 좀 나갑시다. 이것도 무척 재밌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학교에서 수업할 때 학생들이 거의 다 나가고 30분 더 질문 받고 강의를 했던 그 부분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나가면 23페이지에 기도와 내재하는 죄의 문제가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상세하게 읽어보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여기서 23페이지부터 시작을 해서 26페이지까지 한 번에 한 20분 동안 확 지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성경 구절을 하나 읽어야 되는데 로마서 6장 1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4) 이 한 구절을 가지고 470페이지짜리 책을 한 번 썼습니다. 그게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이고 2005년도에 기독교 출판문화상을 받은 책입니다. ‘게으름’ 같이 수십만 부가 팔린 책은 아니지만 읽은 사람들은 확실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책이었습니다. 잊히지 않는 건 그 책을 썼는데 470 페이지 정도이고, 2005년도에 기독교출판문화상을 받았고, 4번 받았는데 그중에 한 번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너무 특이한 사람이 있었는데 저자는 나의 다음 행동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지금까지 죄와 은혜의 지배에 대해서 470페이지를 이 14절을 해설하면서 쭉 써내려갔습니다. 다 읽고 나니까 자신의 마음이 모두 들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자는 나의 다음 행동에 대해서 알고 그런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읽으면 똑같은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엉덩이가 스티로폼 엉덩이라서 그것을 딱 붙들고 앉아서 한 일주일동안 읽을 수 있을 수 있어요? 그런 마음의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다루는 내용이 결국 기도입니다. 기도는 결국 하나님과 기도하는 나, 우리, 기도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기도자가 있는데 이 사이에 영적인, 우리가 흔히 교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교제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이 모든 걸 다 포함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재라고 할 때에는 이게 원래 ‘코이노니아’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나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할 때는 이게 단순한 이런 사귐이 아니라 이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당연히 내가 하나님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영향을 받는데 내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내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 자각을 나에게 주어서 나로 하여금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하거나 혹은 그런 삶을 그만두도록 책망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의 교통을 가로막는 것이 사실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 여러 가지로 많이 말할 수 있지만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죄가 그것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도대체 뭐냐? 우리는 그냥 간단하게 죄라고 하면 나쁜 짓 하고 사람을 괴롭히거나 어떤 범죄 행위를 하는 것을 죄라고 얘기하지만 차이가 뭐냐면 말의 definition이 정확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무슨 학문을 하든지 특히 신학에 대해서 공부를 할 때는 definition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말이 나오면 그게 무슨 의미로 쓰여진 건가, 정확하게 그 말의 본뜻을 저자가 지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저자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가 이런 것들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 책은 항상 definition을 하는 것에 상당 부분을 할애합니다. 우리가 흔히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죄가 아니라 사실 악입니다. 이게 다릅니다. 영어 두 단어를 쓸 테니까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아맞혀 보십시오. ‘sin’ 그리고 ‘crime’. 둘 다 뭐라고 번역이 되죠? ‘죄’라고 번역이 됩니다. 그런데 차이가 뭡니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and punishment’입니다. 물론 러시아어가 아니라 영어로 번역된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죄와 벌’이 2번하고 연결될 것 같습니까? 1번하고 연결될 것 같습니까? sin and punishment? crime and punishment? 2번하고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sin’은 드러나지 않은 내적 동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crime’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 사회에 있어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1번을 규제할까요? 2번을 규제할까요? 1번을 규제하면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해 대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실정법은 crime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저 사람을 몇 번 내 마음속으로 살인했어도 그것을 가지고 법이 나를 처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상상을 하든지 그러니까 심지어 이 대한민국을 다 뒤집어 어서 내가 황제가 되는 꿈을 꾸더라도 그런 꿈을 꿨다는 것 때문에 나를 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그것은 sin이지 crime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뭐가 문제가 생기냐면 사회의 법체계가 2번만을 다루다가 보니까 관계가 이렇게 됩니다. 이게 sin이고 이게 crime입니다. 아주 기분 나쁜 이야기지만 가장 좋은 예가 되어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의 성범죄자가 나타나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제 저녁까지 생각지도 못하던 일을 오후에 저지른 게 아니라 그 crime이 나타나기 전에 엄청난 sin이 이 안에서 자기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범죄든지 간에 그 범죄가 있기 전에 아주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수없는 범죄에 대한 상상이 있고 난 후에 실행에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결국 실정법이 손대는 게 이쪽 이 세 개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이것은 사실은 법의 영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의 영역이고 심리와 종교 이런 것들의 교육이나 이런 것들의 바탕이지 이것을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이해할 때 결국 이것을 통합적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적으로 문제를 접근할 때는 결국은 어떻게 하면 어떤 사람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이 문제를 이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고 이 문제가 야기되게 만들었던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보면 사형제가 전 세계적으로 거의 다 폐지되는 수준입니다. 만약에 사형제를 계속 유지하면 국제적으로 왕따를 당합니다. 그러니까 힘 있는 나라들 이외, 중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은 그냥 너희들이 그런 왕따를 시키든 말든 우리가 왕따 당할 처지가 아니라며 그냥 막 사형을 시킵니다. 그런데 우리도 지금 못 시킵니다. 사형제가 폐지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지금 사형수가 백 몇 십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행되지 않은 지가 25년이 넘었습니다. 왜 집행만 하면 엠네스티 같은 데서 가만있지 않습니다. 바로 비난이 들어오고 심지어 경제적인 보복 같은 것도 들어옵니다. 나라가 미개한 나라로 낙인을 찍은 것입니다. 지금 노르웨이 같은 데는 무슨 죄를 저질러도 한 사람을 20년 이상 감옥에 가둘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한 사람이 총격해가지고 이십 몇 명인가 죽였는데 겨우 15년인가 20년형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묵는 그 호텔에 대해서 한번 외국 잡지에 나왔는데 2급 호텔입니다. 영화관, 사우나, 탁구장, 농구장 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했느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죄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개인 귀책주의적인 사고를 갖느냐. 죄를 지은 것은 전적으로 너 자신이 원인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 그런데 점점 전체적인 학자들의 생각은 이제 이러한 사유를 점점 벗어나서 한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형성한 사회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개인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게 그런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뜻이냐면 당연히 이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사회에도 이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여기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문제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겠지만 이런 생각의 배경이 깔려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제가 주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대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냥 이 주체 자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철학의 대세입니다. 그냥 객체다. 그냥 개인은 한 사회의 산물일 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좀 더 도덕적인 가정에 태어나서 도덕적인 사회의 양심적인 사람들 속에 섞여서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서 살았으면 안 그랬을 사람인데 불행하게도 가정도 그런 가정에서 못 태어났고 사회도 개떡 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망가지는 개인이 나온 거다. 그런데 모든 걸 개인에게 모두 책임을 물려서 개인의 규칙으로 결정을 짓고 그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고 나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역사를 보면 속전속결로 재판을 해서 3일 만에 사형을 시키고 했는데 몇 십 년 지난 다음에 다시 조사를 해보니 이게 전부 다 누명 씌워서 죽인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국가가 돈으로 배상을 아무리 해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없으니 인권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러한 생각의 측면이 사실 이해되는 측면이 없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번에도 김근식이라던가 또 어린이 성범죄한 사람을 다시 감옥에 가두고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되는데 개인의 인권의 측면에서 볼 때 그걸 어떻게 우리들이 조화를 이루고 한계를 정해야 될 것인가라고 하는 것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휴머니즘과 정의와의 어떤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런 많은 숙제들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됐는데 그래서 성경은 항상 이 두 개를 같이 통합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evil, 악이라고 하고 이건 sin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결국은 이 sin의 열매가 evil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은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느니라. 쌓았다고 하는 말이 내적인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결국 이 죄가 계속해서 쌓이면 결국 그 싸운 그 죄에서 악이 나오듯이 사람이 선한 성품을 연마하면 거기서 자연스럽게 생활이 나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분리해 놓지 않고 보는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사실 이하에 있는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와서 보여주셨고 바리새인들은 사실은 이 상층부만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겉으로는 너희들이 계명을 지키면서 죄를 안 짓는다고 살아가는데 사실 여기에 보니까 너희의 마음은 죄로 가득 차서 마치 남들이 보기 좋게끔 하얗게 회칠을 한 무덤과 같은 상태라고 하면서 그 속에 이 썩어 죽어가고 있는 너희의 영혼과 마음을 보고 그거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야 되는 것이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무슨 얘기냐 하면 신자에 대해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를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사도 바울 자신이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나에게 있으나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강렬하게 느껴졌는지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상황에 이르게 될 운명을 가진 나의 육체로부터 누가 나를 구원해내리오’하면서 탄식하는데 이 탄식이 학자들에 따라 두 가지 생각으로 나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사도 바울이 자연인이었을 때 예수를 믿기 전에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믿고 난 이후의 경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예수 믿고 난 이후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사도도 그 죄 때문에 자기가 너무나 곤고하게 된 상황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런 경험은 사도 바울의 다윗의 경험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배한다’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그게 dominion입니다. 이게 지배라는 뜻도 있지만 우위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월하다. 세력이 우세해지는 것입니다. dominion이 대개 지배, 통치, 우세 등으로 많이 번역합니다. 그래서 달러의 가치가 강세라고 할 때 쓰는 dominion이 그런 뜻입니다. 또 ‘rul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통치를 하는 것입니다. 통치가 무엇입니까? 여기 권좌에 높은 사람이나 인물이 있어서 사람이 규칙을 부여합니다. 규칙을 부여하면 이 아래에 있는 것들이 이 규칙을 따라서 움직이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통치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모든 곳에 왕이 다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나라는 통치가 잘 되는 나라가 있고 어떤 나라는 통치가 안 되는 나라가 있습니다. 통치가 잘 되는 나라는 왕은 보이지 않지만 왕이 어떤 규칙을 내리면 질서가 정연해서 나라가 모두 그 규칙을 따라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치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통치자에게는 통치의 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상이 여기에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rule over,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dominion은 사실 이런 통치가 아니라 우세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입니다. 죄가 있는데 이 죄가 너희를 rule over 못한다. 죄가 너희를 통치하지 못한다. 그걸 누가 지배라고 번역을 했는데 죄가 너희를 통치하지 못한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뭐라고 얘기했냐면 왜냐하면 너희가 법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서 법은 율법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죄가 너희를 rule over하지 못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자입니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 명제가 뭐냐 하면 죄는 신자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함께 끝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rule over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놓고 본다면 구원받은 다음에도 이 죄가 이렇게 기도를 가로막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데 그것이 실질적으로 현상학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일단 죄에 빠지게 되면 불신자하고 달라요? 똑같아요? 다를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세상 사람하고 조금 더 차이가 없고 어떤 면에서는 세상 사람도 그러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정도로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느끼는 좌절감이 굉장히 큽니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이럴까?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타인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라 사실은 내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만 타인들에게는 그것이 바깥으로 나타날 기회가 있었고 나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거나 혹은 드러났어도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문제가 안 된 것이 있지만 결국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그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였던 로이 클레멘스 얘기했는데 기억나죠? 도망을 갔는데 정부가 남자였더라. 그리고 결국은 내 인생에 두 번의 실수를 했는데 하나는 목회자가 된 거고 하나는 결혼한 거다. 그리고 떠나 가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못 받았거나 구원을 받았는데 죄에 너무 깊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첫 번째 정리하면 죄가 rule over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이 죄이고 이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면 이 두 가지는 신자 안에서 항상 공존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죄만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잠식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보다도 죄가 훨씬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가르쳐서 dominion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dominion of sin and grace. 그러니까 죄와 은혜의 우세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우세하냐, 은혜가 우세하냐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다투는 것입니다. 신기하죠. 막 쓸데없는 욕망으로 차고 때로는 막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 같은 것들이 폭발할 것처럼 쌓였는데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눈 높듯이 싹 사라지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성결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이 모두 사라지면서 주님 뜻대로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dominion of sin에서 dominion of grace로 바뀐 것입니다. 결국 이런 긴장 상태 속에 신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기한 게 뭐냐 하면 첫 시간에 강의했던 걸 기억할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기도에 대한 모든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철학에서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의존. 그거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구원받기 전에만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나느냐면 기도를 많이 하는 상황일수록 자기가 기도를 너무 안 한다고 생각하면 괴롭습니다. 죄를 안 짓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 될수록 자기가 죄가 많다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고 순결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불결하다고 계속 고민합니다. 지혜가 뛰어날수록 자신의 무지한 면을 너무나 많이 발견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지혜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의존의 감정입니다. 그 의존의 감정이 간절히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에서 이 은혜라고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길입니다. 객관적으로 제시된 구원의 길.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구원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좀 더 많이 쓰이는 것은 무가치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 좋은 뜻입니다. 무가치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할 때는 세 번째 의미를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나올 때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 것인가를 보고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쓰인 것은 사람의 감화입니다.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주체는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아까 사랑이 뭐냐고 물어봤죠? 쓰세요. 기록하세요. 사랑은 은혜의 결과이다. 세 번째 의미에서의 은혜가 주어지면 사랑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은혜란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선한 일을 행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다. 세 번째 의미로 많이 쓰는 게 이런 것입니다. 너 요새 공부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구나. 은혜 많이 받았구나. 너는 맨날 그렇게 낙심한 표정으로 다니고 학교 공부도 성실히 하지 않고 연애에 정신이 팔려 다니고 교회 봉사도 안 하고 너 은혜가 떨어졌나 보구나. 그게 정확하게 세 번째입니다. 결국 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고독과 소외의 문제에 대한 답이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사랑의 감화를 못 느끼기 때문에 결국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찾으면 찾을수록 인간이 자기가 정말 절대적으로 소외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독자가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이라는 책을 썼는데 평론을 읽었습니다. 원래 평론을 잘 안 읽는 편이고 6개월에 한 번 정도 그래도 무슨 얘기가 오고 가는지 한번 이렇게 보는데 뭐 심각한 악평 그런 것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가 이 책을 샀는데 이렇게까지 깊이 인생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면서 이 책이 참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나는 지금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나는 여기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다. 이 책은 그냥 다른 사람에게 줘버려야겠다. 내가 그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이 남편을 언제 만나서 언제 결혼했는지 모르지만 그 남편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헤어지는 것입니다. 혼자 남았을 때는 어떻게 될까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는 사람이 된 사람의 사랑이 비주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거에 대해서 극적으로 묘사를 하고 칭송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좋은 사랑이 아닙니다. 비주체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자신의 주체성은 무엇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말도록 해야 되는데 그게 흔들리게 만드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뭐냐면 sin입니다. 이게 원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한쪽에 죄가 있는데 이 마음은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죄가 rule over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죄가 dominion은 가질 수는 있습니다. 우세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 우세해지기를 다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우리 신대원 다닐 때 죽어라고 데모 많이 했습니다. 최루탄이 교실까지 들어왔습니다. 금방 전경들이 와서 까맣게 대치하고 데모하고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서 정부가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에이씨” 그러면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광화문을 다 점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통제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지배를 해서 교통을 통제하고 자기 원하는 대로 모여서 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rule over는 아닙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은 dominion입니다. 몇 시간 정도는 그렇게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경찰이나 군대를 이길 수가 없고 국가의 조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원 위치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dominion과 rule over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절대로 죄가 rule over 못한다. 그러니까 정권 자체를 바꿀 수가 없다. 그런데 죄를 적절히 다루지 않고 내버려 두면 그 죄가 세력을 규합하고 암세포처럼 커져서 너의 마음을 dominion할 수 있다. 그런데 dominion하면 비록 이 dominion이 항구적이지는 않지만 한 사람은 평생 예수 거의 안 믿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게끔 dominion을 행사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들이 간과하고 있는 우리 구원받은 사람의 영혼과 마음속에 있는 진실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 성화론이라고 하는 중요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믿고 나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기만 하면 저절로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관조적인 성화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관조적인 성화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굉장히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성화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시로 죄와의 싸움에 대해서 정체를 잘 모르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반정부 폭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쩔 땐 자기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게 무서운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럴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폭동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dominion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이냐? 그러니까 신자로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죄의 rule over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dominion은 가능하다. 죄가 우리 안에서 우세해져서 우리를 다스리게 될 때 지배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 지배는 결국 짧게 끝날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죄와 우리 안에 있는 이 본성이 결탁해서 항구적으로 죄가 인 박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새 특집으로 동아일보에서 마약 중독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 심각합니다. 저는 왜 이렇게 내버려 두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국제 마약사범들에게는 한국이 봉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1회분이 국제 가격으로 3만 원 밖에 안 되면 우리나라에 갖고 오면 30만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돈스파이크도 1,000회 분을 보관했다고 하는데 1억 원 어치입니다. 그렇게 쉽게 던지기 수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비트코인 쏴주면 총신대 정문 옆에 던지고 가라, 거기 빨간 벽돌 밑에 숨겨 놓으라고 하면 거기 가서 찾아서 타서 주사를 맞는 것입니다. 그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약을 한 번만 복용을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 환상적인 것에서 못 헤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몰래 살짝 집어넣는 것입니다. 대개 집어넣어서 여자들한테 먹이는 것입니다. 먹었는데 굉장히 기분이 좋고 막 흥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 사람은 지식이 없으니까 먹으면서 자기가 이 사람에 대해서 호감을 느낀다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에 대한 집착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그것이 약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반복이 됩니다. 여기 끊을 수가 없습니다. 중독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흡연이 200배입니다. 저는 담배를 끊어본 사람으로서 이야기하는데 무지무지하게 어렵습니다. 저도 4번 만에 끊었는데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4년 후까지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200배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보통 힘으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처지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공공연하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 똑같은 현상으로 이렇게 죄가 dominion하도록 내버려 두면 자기 본성과 결합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죄를 말하는 사람이 죄를 선택했는데 두 번째는 죄가 나를 선택하고 세 번째는 나와 죄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계속 짓지 않으면 나 자신의 주체성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것은 완전히 주체 망각과 주체 상실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악한 죄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아주 예외적이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적절한 환경 속에 들어가서 적절한 대비책이 취해지지 않으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독입니다. 섹스, 약물 심지어 주기적으로 사람을 폭행해야 되는 중독도 있습니다. 폭행 중독입니다. 심지어 살인 중독(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과 떨어질 수 없는 상태에서 진행이 되는데 성경은 이게 신자에게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신자가 그럴 수 있냐고 이야기하는 것은 장애를 가지고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왜 이렇게 절뚝거리냐고 물어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미 장애가 생겼기 때문에 자꾸 그렇게 걸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결국 인생의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새카맣게 멀어집니다.
저는 책을 많이 써서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지금은 조금 뜸한테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편지가 옵니다. 그중에서 답장하기 제일 괴로운 것이 성 중독자들의 편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7번 편지를 보내주고 만나주기도 했습니다. 중독 전문가들도 있지만 저는 중독 전문가가 아니라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얘기했는데 그런 정신 건강에 안 좋은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모아놓았으면 아마 허리까지 올라올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팬레터도 받았지만 고민 상담도 그렇게 수없이 들어왔었습니다. 또 한때는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상담을 받아준다고 해서 일주일에 한 3∼4시간씩 서서 그 글을 불러주면 비서가 받아서 타이핑을 쳐야 할 정도로 그렇게 활발하게 상담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장 괴로운 것은 이런 것입니다. 폭행, 약물, 게임 이런 것에 대한 중독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 절대 답을 못 찾습니다. 그러니까 답을 해줘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약물 치료와 이런 모든 것들이 필요한데 결국 마지막에 이런 모든 것들이 자기 안에 있는 죄가 dominion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데서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한 번 구원받은 신자들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고 싶은 것이 뭡니까? 욥의 아내가 이야기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카드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은혜로부터는 차단하고 죄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서 그냥 죄에 대한 생각을 품거나 죄에 약간 영향을 받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가 자신의 기질을 파고들어서 깊이 스며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 보십시오. 죄가 있는데 원래 이 사람의 기질이 좀 이렇게 우유부단합니다. 우유부단하다는 건 나쁜 표현이고 좋게 얘기하면 신중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단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말도 되지만 어떻게 보면 경솔하다는 것도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아주 행동주의적입니다. 생각만 하는 사람보다는 장점입니다. 그런데 죄가 이렇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신중한 성격과 만나서 죄가 파고들면 이 사람은 우유부단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과단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하고 죄가 만나면 경솔한 사람으로 만들고 행동주의적인 사람과 만나면 폭행으로 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속에 아예 인이 박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가 맨 처음에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아주 힘이 많이 들고 양심을 많이 거슬러야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데 이 죄가 dominion 상태가 되고 우세한 상태가 되면 이렇게 살짝 잡아당기면 금방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송아지가 한 2개월 정도 되면 주인이 감당을 못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한두 달 된 다음에 반드시 얘를 데리고 산으로 가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소를 붙들고 산으로 같이 올라서 크기 전에 빨리 데리고 가서 코를 딱 뚫어야 합니다. 여기에 딱 고삐를 딱 조이면 어린아이가 끌어도 코가 아파서 갑니다. 그게 순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에 통제가 안 되고 죄가 계속 dominion한 상태가 되면 죄가 자신의 본성하고 만나면서 아주 작은 유혹과 작은 힘을 가지고 큰 죄를 짓도록 만들어주는 유익을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기쁨으로 행복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런 삶 대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 맺고 폭행과 싸움에 빠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을 쉽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사단은 어떻게든 우리의 마음을 사용해서 죄가 dominion을 얻은 상태로 가도록 만듭니다. 이해하시겠죠?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