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기도 8
녹취자: 오희열
오늘 강론은 기도로 열린 하늘문입니다. 김성은 학우부터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김성은 학우 : (4:00)
유준하 학우 : (5:16)
하현진 학우 : (7:48)
김하영 학우 : (9:12)
성시온 학우 : (11:10)
이승준 학우 : (12:25)
정아론 학우 : (15:12)
김진아 학우 : (17:22)
이상윤 학우 : (21:00)
김성민 학우 : (23:14)
조영식 학우 : (25:22)
목사님 : 지난 시간에 마지막으로 한 기도와 내재하는 죄에 대해서 잠깐 정리를 하고 오늘은 죄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집에 가서 23페이지부터 꼼꼼하게 읽으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직 못 읽으셨다면 꼼꼼하게 한 번 더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시간이 없어서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죄의 영향과 지배는 구별돼야 된다, 지배는 말하자면 rule over하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에 대해서자기가 전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신자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어떤 우세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데 그거를 ‘도미니온’이라고 부르는데 인간에 대한 죄의 지배는 절대적인 지배와 상대적인 지배로 나뉜다고 말씀을 드렸고, 절대적인 지배는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상대적인 지배는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도 신자는 죄가 절대적으로 지배하지 못한다.
그런데 결국 그런 상대적인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나타나는 현상은 불신자에게 나타나는 절대적인 지배와 거의 흡사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못 지을 죄도 없고 그 다음에 행하지 못할 악도 없다. 그렇게 된 모습은 그리스도인이 정체성을 가장 상실한 모습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주체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바깥으로부터의 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면, 내적인 강요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주체적인 삶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체적인 삶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갈라디아 2장 20절에 나와 있는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죄의 지배는 불가능하지만 영향력이 극대화될 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기 때문에 비참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신자 자신도 행복하지 않고 그와 관계를 맺는 사람도 행복하지 않은 그런 것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현대의 문화나 이런 것들을 꿰뚫어보면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온 것이, 은혜 아래 있는 신자의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와 죄의 지배가 자기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더 많은 은혜를 받으려고 하고 그 다음에 더 많은 기도와 말씀 속에서 살려고 할 때 자신의 은혜의 통치는 자기 마음 안에서 유지된다, 그 때에 우리가 죄의 영향을 극소화시킬 수 있고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중독에 관한 이야기도 했고, 그 다음에 버릇에 대한 이야기 뭐 등등 우리의 주체성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죄의 영향력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지난주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니까 집에 가셔서 꼭 읽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강의안 32쪽에 나와 있는 기도와 죄죽임에 대해서 강의를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꼼꼼하게 잘 이해를 하시고 기도가 이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이해해 온 그 기도는 뭔가를 하나님 앞에 청구하는 그런 종류의 기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 안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기도를 청구용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처음. 개강하는 시간에 제가 여러분들한테 질문한 적이 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그러셨을까, 만약에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 관한 어떤 것을 알게 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실까? 그리고 실제로 기도하면 이루어지고,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도 일어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은 확실한데 모든 걸 아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기도하라고 하실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내려진 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결국은 두 가지다. 하나는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자신의 자기가 이제 학교 다닐 때 제일 어려운 게 등록금이었는데 한 학생은 등록금을 위해 걱정만 많이 하는데 기도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도와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면 “야, 진짜 재수 좋다. 아, 진짜 이번 학기에는 운이 좋았어! 누가 날 도와준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던 학생은 누가 도와준다고 그럴 때 재수가 좋았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운이 좋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효과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얘긴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에 나온 이야기가, ‘인간의 추함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이다.’ 그래서 의존의 신학과 기도는 깊은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드렸을 때, 기도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감정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그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확신시켜줍니다. 놀라운 것은, 아까 예로 든 학생이 이 학생이라면, 이 학생은 별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굉장히 궁핍합니다. 그런데 누가 도와줬습니다. 그 옆의 학생은 이 학생을 위해 굉장히 많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 돈은 이 학생이 받았는데 은혜는 돈 받은 학생이 받는 게 아니라 기도해준 학생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내 친구를 위해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마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내 친구에게 이렇게 등록금을 주셨구나!”합니다. 정작 본인은 재수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옆에 기도 많이 한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공정하신 방법입니다. 우리를 학습시키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인데,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인데도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쇄신시키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쏟아집니다. 그때 그러한 기도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내적인 마음의 쇄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시험 기간에 기도 못 했다고 그러는데 학교 다닐 때 좀 그런 게 있습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공부를 해야 되니까 유혹을 받습니다. 기도를 해야 될 것인가 공부를 해야 될 것인가, 뭐 둘 다 안 하는 학생도 많지만 어쨌든 유혹을 받는데 기도를 간절히 하니까 하나님이 만져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마음의 쇄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쇄신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매일매일, 매 순간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끊임없이 이런 쇄신 속에서 죄를 끊임없이 털어버리면서 죄가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계속해서 자기 마음속에 뿌리 내리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암을 가지고 걱정합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 암으로 죽는다니까 심각합니다. 그런데 의학자들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암세포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데 10만 개가 되어서 뭉치기 전까지는 별로 문제가 안 된답니다. 그냥 그렇게 있다가 또 사라지기도 하는데 모여서 뭉치기 시작할 때, 그때는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암세포가 그런 문제를 일으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실은 죄가 없는 완벽하게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목표로 세우지만 사실 실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정원에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그 잡초의 씨앗들이 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그 정원에서 계속 그 잡풀이 자라는 것처럼 마음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간절한 기도가 계속되면 끊임없이 마음에 쇄신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잡스러운 생각들이 떠올라도 이게 금방 제초가 돼 버립니다. 제거가 됩니다. 기도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에 의한 마음의 쇄신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게 없을 경우에 뿌려진 것들은 반드시 성장하게 돼 있습니다. 아무리 거목이라도 묘목이 아니었던 나무는 없고, 모든 묘목은 씨앗에서부터 시작을 하거나 뿌리에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먹는 잣 있잖습니까? 그 잣 하나를 심으면 신기하게 거기서 잣나무가 나옵니다. 기가 막히게 많은 싹이 나오면서 그것이 소나무처럼 자라는 잣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씨앗 하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씨앗도 다가 아니에요. 씨앗이 있으면 여기 눈이 있어요. 씨앗의 대부분은 이 눈이 싹 틀 때 쓰이는 양식입니다. 이게 썩습니다. 썩으면서 이 눈이 발아가 되면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이런 것들이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이런 죄로부터 멀리 살지만 이걸 피할 수 없으니까 수시로 자신의 마음을 진실하게 쏟으면서 이 마음을 쇄신시키는 작용을 하라고 하나님이 기도라고 하는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와 기도라는 책은 기존의 기도가 이것만을 거의 다루었다면, 기도가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작용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바로 ‘성화와 기도’라는 책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를 접근하는 책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책입니다.
그 책을 내가 잘 썼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기도를 항상 우리는 “어떻게 많이 기도했더니 어떻게 많이 받았다.”라는 내용만 일어나지 그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 기도가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사실은 별로 우리의 관찰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그거를 관찰한 것입니다. 기도라는 주제에 대해서 바깥에서 보면서 여태까지 썼다면 그러면 기도할 때 그 마음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라고 하는 것을 이 안에서 바깥을 관찰하면서 쓴 책이 바로 성화와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아주 쉽게 얘기하려면 ‘아티노데 센티피케뚜르’, 거룩해지다, ‘베르’, 통하여, ‘오라치어넬’, ‘기도를 통하여 거룩해지는 것’,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사람이 성화되지 않습니다. 아주 사람이 거칠고 인격적으로 아주 그 조잡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정도로 서론을 해놓고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왜 기도가 잘 되다가 왜 기도가 안 되는가? 이것이 아까 이야기했던 그 죄의 지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죄라고 하면, 이 죄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죄의 정체는, 정서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의지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대적, 그래서 이것은 ‘aversion’, 이것은 ‘opposition’입니다. 17세기에는 이것을 어버세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은 현대 영어로는 어버이즘입니다. aversion 반감입니다. 싫은 것입니다. 청소년 때 그 부모를, 아버지를 무슨 이유 때문에 싫어하는데, 그러면 아버지만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라 아버지 냄새도 싫고 아버지가 입고 있는 옷이 걸려 있는 것도 꼴보기 싫은 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런 것은 정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의지적으로는 강하게 그 뜻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opposition, 이 두 개로 이루어집니다. 죄의 정체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죄는 속임, deceit 그리고 강압, force 으로 작용합니다. 속이는 것은 지성을 속이는 것입니다.. 생각을 미끄러지게 만듭니다. 죄는 생각을 미끄러지게 만들어서 어떤 행동의 원인과 결과 사이를 감춥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데 이 사이를 감춥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의 경우를 한번 보겠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게 됩니다. 평소의 다윗 같으면 그렇게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생기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다, 내 영혼에는 심각한 피해가 올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바깥에 알려지면 이것은 이스라엘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부도덕한 일입니다. 남편이 있는 아내를 그렇게 한다는 것이 소문이 나면 다윗 당시에 그것은 왕으로서의 권위 같은 것들은 말할 수도 없는 것이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해서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당시에 피임도 없던 때니까 아이가 생길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수많은 생각들을 낳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정상적인 상태에서 생각을 하면 이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강하게 품게 됩니다. 신기하게 이 지성에 죄가 속임이라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감춰버립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생각이 가지 않습니다. 감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죄에 대해서 지성으로 동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의는 무엇입니까?. 의지 의지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강압은 밀어붙이는 힘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가지고 서로 갖겠다고 싸우다가 한 사람이 워낙 힘이 강해서 밀어붙여 버리면 할 수 없이 자신을 손을 놓게 됩니다. 그것처럼 밀어붙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망입니다.
제가 하나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한자인데 한자를 이렇게도 쓰고 이렇게도 써요. 마음 ‘심’이 아래에 있느냐 없느냐만 다릅니다. 여기는 없습니다. 이것과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이고 이것은 죄와 관련이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밥을 먹고 싶다고 할 때 식욕이라고 씁니다. 이것은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과 관련이 있다면 성욕이라고 씁니다. 이 마음 심 변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당한 것은 이 마음 심 변이 없고 부당한 것은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탐욕”이라고 하면 당연히 이게 아니라 이것을 씁니다. “식욕” 이것은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너무 게걸스럽게 많이 먹는 것도 별로 좋지 않지만 어쨌든 식욕 그러면 이거는 죄와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누가 잘 안 가르쳐주는 그런 정보입니다. 한자에 관한 깨알 정보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렇게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감춰지는 이유는 죄가 일단 마음속으로 죄가 들어와서 침투하면 이 죄는 이 마음에 모든 기능에 영향을 줍니다. 지적인 작용, 정서적인 작용, 의지적인 작용, 이 모든 것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들어오게 되면 가장 먼저 속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전쟁이 났다고 합시다. 상대방도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도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습 공격을 하고 싶다면 제일 먼저 어디부터 파괴할 것 같습니까? 폭격기가 떠서 폭격기가 떠서 각 지점으로 폭격을 해야 되겠는데 그때 제일 먼저 적의 어디를 타격할 것 같습니까? 어디? 감시 기능, 그게 무엇입니까? 레이더. 레이더가 있는 기지를 평소에 위성으로 정확하게 파악해 놨다가 엄청나게 많은 강력한 미사일을 정확하게 레이더망에 뿌려서 파괴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뜨는 게 뭔지 아십니까? EMP 폭탄을 쏘는 거예요. EMP 폭탄을 쏘면 전자장비 모든 것들은 다 먹통이 됩니다. 강력한 전자파가 터지면서 핵폭탄이 터진 것 같은 똑같은 효과가 나타나면서 전자로 연결된 모든 것들의 기능이 완전히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당하기 위해서는 EMP 보호 시설 속에 있어야 되는데, 그것은 굉장히 많은 돈이 드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EMP 폭탄을 미사일로 쏘거나 비행기에 싣고 가거나 해서 터뜨리는 것입니다. EMP 폭탄은 전쟁이 나면 레이더 기지와 함께 제일 먼저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날아가는 비행기는 EMP 폭탄이 터지면 전자 장비가 깨지면서 그냥 추락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 상대방이 자기의 공격을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목표이듯이 죄도 똑같이 우리를 공격할 때 가장 먼저 공격하는 것이 지적인 기능을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파악할 수 없게끔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적이 가지고 있는 공격용 무기를 부수기 위해서 미사일을 쏘는데 미사일은 그 성능이 제한돼 있고 값이 워낙 비쌉니다. 그래서 값이 싼 것은 그 위까지 날아가서 그 위에서 폭탄을 쏟아 버리는 것, 그게 제일 가성비가 높습니다. 미사일은 한 발에 비싼 것은 200억씩 되지만 터뜨릴 수 있는 게 한정이 돼 있습니다. 물론 뭐 1만 km도 날아갈 수 있고 1만 5천 km도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발에 어마어마하게 상상할 수 없이 비싼 가격이니까 그걸 건물 하나 폭격하는데 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떠서 그냥 그 구름처럼 그냥 폭탄을 퍼부어 완전히 괴멸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육군이 공격하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게 전쟁의 양상인데 똑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이런 모든 것들을 감시하는 레이더 기능이 이 지적인 기능입니다. 이것을 제일 먼저 쥐가 침투해서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다윗도 마찬가지였지만,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어떤 원인이 일어나면 이 결과가 너무 또렷하게 보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겨내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서 우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악인은 우매하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것들이 원인과 결과 사이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뭔가 어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반응하는 나의 마음이 어떨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나의 마음에 다음 작용을 가져올 것인가, 그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깨어있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뛰어나다’라고 할 때 그것은 이러한 죄의 원인과 결과의 작용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경험적으로 아주 풍부하게 알고 있어서 이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어떤 징후 같은 것들을 아주 또렷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잇몸에서 자꾸 피가 나옵니다.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약도 안 먹고 지냈는데 신문을 보는데 한 페이지 전체가 잇몸에서 나오는 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나서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잇몸에 피가 난다는 것은 이제 잇몸에 염증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계속 생각없이 방치하면 잇몸에서 나오는 피를 자기가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는 그냥 순수한 피가 아니라 피에 말하자면 염증이 있기 때문에 곪게 만드는 바이러스 같은 것들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걸 먹으면 이 안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면서 콩팥을 통과하게 됩니다. 콩팥은 우리 정수기의 맴브레인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수돗물을 정수기에 통과시키면은 그 멤브레인 필터를 한 일 년 쓸 수 있지만 만약에 그 정수기 통에다가 수돗물을 붓지 않고 뜬물을 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며칠만 쓰면 멤브레인이 모두 다 망가져 버릴 거예요. 마찬가지로 그렇게 피를 먹고 고름을 머금은 것을 삼킬 때 콩팥을 통과하면서 이것이 콩팥을 파괴하고 나중에 피가 되면서 심장을 망가뜨려서 결국 심장마비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치과에 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아니 그거 당연한 것입니다. 목사님 그거 상식인데 모르셨습니까?”합니다. 몰랐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내 얘기를 들으니까 알았지 잇몸에 나오는 피가 그렇게 무서운 거라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여기 지식이 없으니까 이런 것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무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어두움으로 표현됩니다. ‘darkness’라고 표현되는 첫째는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객관적인 어두움, darkness가 있고, 그 다음에 주관적인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객관적인 어두움은 ‘intellectual darkness’, 주관적인 어두움에는 ‘spiritual darkness’입니다. intellectual darkness는 진짜 모르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모릅니다. 그 일이 뭘 의미하는지, 그 다음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지적으로 진짜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어두움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기도하면서 “나의 눈을 떠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했는데 그 “기이하다”라고 하는 것은 놀라운 특징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모르니까 나의 지성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spiritual darkness는 좀 다릅니다. 이것은 사랑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intellectual darkness는 지식과 관련이 있는데 spiritual darkness는 사랑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의 경우에 이것이 2번에 해당되는 경우인데 이런 건 이미 이런 결과가 있다는 것을 다윗은 예전에도 이미 모두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경건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죄에 대한 사랑이, 욕망이 치솟게 된 것입니다. 욕망은 사랑하는 감정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다음에 영적인 어두움이 들어온 것입니다. 영혼에 어두움이 들어오니까 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파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노출될 지경에 이르니까 그녀의 남편을 죽여 버립니다. 살인에까지 가담을 하게 됩니다. 명백한 살인입니다. 가담한 사람도 잘못이지만 지시한 다윗에게 더 큰 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spiritual darkness, 이것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기도가 이런 spiritual darkness를 막아주는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죄가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작용을 하는데 ‘광기’입니다. 죄에는 미친 기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친 기운이 무엇입니까? reasonable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인데 결국은 그렇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TV만 켜면 나오는 끔찍한 범죄자들의 얘기, 요새는 왜 이렇게 여자들이 남자를 많이 죽입니까? 껌뻑하면 남편을 죽이고 애인을 죽이고, 이번에 보니까 남편 남편이 어떤 전 남편과 현남편도 함께 죽여서 그 다음에 뭐 아이도 죽이고, 그 시체 옆에서 아이를 키우고 또 그 아이를 죽여가지고 화분 속에 집어넣고 콘크리트로 발라버리고,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광기입니다. 미친 기운입니다. 미친 기운은 이유가 없습니다. 이성적인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광기 그 다음에 맹렬함,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boldness’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무모함입니다. 담대할 뿐만 아니라 무모한 것입니다. 그런 특성을 가지고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관을 하고 나면, 전통적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힘들었던 것이, 이 죄의 기원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의 본질이 무엇이냐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from, 어디로부터 왔느냐는 것의 문제이고 이것은 도대체 그게 무어냐 라고 하는 what 의 문제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를 했을까를 보겠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가장 역사적으로 많이 고민했던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말 똑똑한 학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파프라키우스라고 하는 그 아주 전통적인 로마의 남성이었고 어머니는 여러분이 잘 아는 모니카로서 아주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안에서 그 로마의 문화와 그리스 로마의 문화와 기독교의 문화가 만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로마의 하급 관리였으니 당연히 자기 아들을 아주 높은 관직에 올려 보내기 위해서 공부를 시키려고 했습니다. 굉장히 영특한 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이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제 공부에 관심이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너무 천재적이고 창의적인 학생인데 학교는 어떤 틀에다가 집어넣고 그대로 공부하지 않는 학생은 계속 낙오를 시키고 그 당시에는 무서운 체벌이 가해졌습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어 대해서 말하자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어는 문법, 기하학, 음악, 수사학, 이 네 가지가 이제 사과였습니다. 사막, 사과에 대한 공부를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서 자유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교육하는 것이 로마의 교육의 방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형편에 넘치도록 좋은 학교를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학교에 갔는데 어렸을 때는 그렇게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문법을 못한다고 아이에게 매질을 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나는 이런 식의 교육을 원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면 더 큰 체벌이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제 도저히 해결을 하지 못해서 학교 정규 교육에서 재미를 못 느끼게 됩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주지 못하는 것이 우리 교육에 있어서 너무 아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게 늘 위로를 합니다. “네가 공부 못하는 게 아니라 이 나라 교육이 더럽게 안 맞아서 그럴 수도 있다. 네가 다른 데에 태어났으면 공부 잘했을 수도 있다.” 저도 솔직히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 동안 학교를 다녔는데 하루도 재미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되게 공부 못하는 학생인 줄 알았습니다. 성적표에도 별로 관심도 없었고 영어 하나 재밌어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그냥 열심히 영어 공부하고, 영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거 하나 재미있었고 나머지는 재미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 흥미가 없었습니다. 나는 늘 이렇게 지진아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 나라 교육이 너무 안 맞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쉽습니다.
저는 유학도 못 했지만 중, 고등학교 다닐 때보다는 대학 들어갔을 때 훨씬 공부를 잘했고, 대학 다닐 때보다 대학원 다닐 때 공부를 더 잘했고 대학원 다닐 때보다 박사 과정 다닐 때 공부를 잘 잘했고, 학교를 때려 친 다음부터 훨씬 공부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읽고 싶은 책 한 없이 읽으면서 공부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문학, 역사, 철학, 문학, 정치, 이런 것들을 넘나들면서 내가 원하는 공부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그것이 나를 슬기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어디 가서 내가 무식한 사람이라는 소리 안 듣고 무슨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든지 전 세계의 학자들과 한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가 무슨 전공했든지 간에 대화할 수 있습니다. 더 깊이는 내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논문 하나 가지고 평생을 연구한 사람이고 나야 목회를 한 사람이니까 더 깊이 들어가면 좀 곤란하겠지만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는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도대체 궁금한 게 이거였습니다. 왜 죄라는 것이 생겼느냐? 죄가 만약에 하나의 실체 실체라고 한다면, 그런데 원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게 어디서 왔느냐? 만약에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이거는 하나님과 모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체 자체가 선이신데 선이신 하나님이 악인 죄의 실체를 낳으셨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성품에 모순된 행동을 하신 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죄 때문에 하나님이 손해 보는 것 같은 일들이 역사 공간에서 펼쳐집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논리의 모순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똑똑했던 이 어거스틴은 그 당시에 아주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공부하면서 방황하고 방탕해져서 창녀촌 같은 데 드나들고 그러다가 눈에 맞는 여자 만나서 열일곱, 열여덟 살에 미혼부가 됩니다. 아이를 낳으니까 먹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하고 공부나 해야지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문법학자, 문법 국가 수사학을 가르치는 아주 유능한 교사가 됩니다. 제는 그때 마니교에 빠지게 됐던 이유가 이런 것에 대한 깊은 사유에 대한 답을 못 찾았을 때, 당시 마니교가 지성인들에게 아주 파고들던 종교였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이성적인 것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에 몰입하면서 그런 고민이 그쪽으로 그 탈출구를 찾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마니교 자체가 굉장히 철학적이고 지적인 종교인 척 했는데 너무 궁금한 게 생겨서 끊임없이 이제 파고듭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당시에 이제 최고의 지도자들까지 만나게 되는데, 자기가 자기는 진심으로 마니교를 더 믿고 싶어서 물어봤는데 아무도 대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당대에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던 지도자들조차도 고백하기를 솔직히 우리가 그런 걸 잘 모르니까 네가 할 역할이 있는 거 아니겠느냐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면서 엄청난 실망을 하게 되고 결국 거기에서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로 돌아오는 한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러면 어거스틴은 이런 죄를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하게 되느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플라톤, 플라토니즘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플라토니즘은 이제 그 후에 어거스틴 시대쯤 와서는 이제 신플라톤주의가 2세기경부터 소위 네오 플라토니즘이라고 해서 뉴 플라톤, 신플라톤주의로 발전을 하게 되는데 여기의 거두가 플로티누스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들어봤을 것입니다. 플로티노스은 플루티노스라고 하는데 여기는 당연히 플라톤입니다. 이 플라톤은 이미 이런 걸 가지고 고민을 합니다. 세계가 있고, 세계의 선과 악이 이렇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선은 bonum이라고 하고 악은 malum이라 합니다. 선과 악이 있는데 이 이건 도대체 뭐냐? 이렇게 물어볼 때 마지막에 이 플라톤이 내리는 결론은 이 선만 실체이고 이 악은 현상이라고 규정을 하는 것입니다. 악은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선한 것이 있을 때 그 선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 악이라는 것은 현상적으로 있는 것인데, 있을 때에는 항상 선한 것에 기생하는 방식으로 있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과가 여기 있습니다. 사과의 이 부분이 이렇게 썩습니다. 이 ‘썩음’이라는 이것은 썩지 말아야 할 좋은 어떤 목적물이 있을 때에 이 썩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과가 이렇게 썩는데 그 썩음이라는 현상이 물질 바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간에 썩는 게 나타난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에 기생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게 악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privatio boni’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선, 선의 요건 결핍입니다. “malum est privatio boni”, “악은 선의 결핍이다.” 이것은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선을 잠식해 들어와서 선이 모자라게 된 이것이 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이것을 죄의 문제로 들어옵니다. 앞에서는 악의 문제를 다뤘지만 여기서는 죄의 문제를 가지고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 죄가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형이상학적인 본질로 본다면 이 죄는 힘의 경향성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크게 라틴어에서 둘로 구분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페카툼’ 그리고 ‘포에나’입니다. 이 ‘페카툼’은 위법입니다. 잘못한 것입니다. 범한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포에나’는 이 죄의 결과입니다. 포에나는 죄벌이라고 번역합니다. ‘죄벌’ 번역이 이상하긴 한데 죄벌입니다. 어떤 죄를 지은 것은 페카툼이고, 그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것이 내 마음 안에 어떤 경향성으로 남게 된 것을 가리켜서 포에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자기 마음 안에서 받는 대가입니다.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거스틴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이 있다가, 내가 너무 화가 나서 화를 못 참고 한 펀치를 친구의 얼굴에 날립니다. 그 친구의 턱이 깨지면서 주저앉았습니다. 우리가 보면 나는 가해자고 친구는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것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최초의 피해자는 이 가해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내가 마음에 안 맞았을 때 친구에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은 페카툼인데, 한 번 내가 그렇게 하고 나면 내 마음에는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에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내 마음속에 경향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에나입니다. 이 사람은 한 번 맞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그건 털어버리면 되는 것이고, 다음에 똑같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당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한 대 맞았을 뿐인데, 때린 나에게는 포에나가 생겨나서 이제 폭력의 습관이 붙어서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되면 주먹을 날리는 때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주먹을 휘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해치는 또 하나의 강요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런 방식으로 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중독의 문제 같은 것도 결국은 포에나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기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믿는 많은 것들은 사실 죄와 결합됐을 때 최악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유한 성향, 여러분들이 mbti 검사나 그런 거 검사해보면 성향들이 나타나는데,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검사가 아닙니다. 그렇게 과학적이지도 않고 심리학계에서는 오래전에 폐기한 것들이고 1920년도에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백년이 넘도록 아직까지도 우려 먹고 있는데 나는 그런 성향 검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검사를 한번 받아보긴 했는데 기억도 안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성향들인데 원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성향은 고유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와 결합될 때 그 나쁜 것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우리는 이 두 가지 페카툼과 포에나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리고 자신의 성향과 이 포에나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죄만 털어내면 굉장히 쓸 만한 성품인데 그 자신의 성품 자체를 가지고 고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포에나 때문인지 아니면 ‘나트라’, 본성 때문에 고민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구분해서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 이 두 개를 다 묶은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 어거스틴이나 조노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Gratia’ 은혜입니다. 이 은혜 혹은 사랑이 결핍된 것이 죄라고 보는 것입니다. 페카투미나 혹은 포에나 에스트 프리바티오 그라티아이, 혹은 그라티에라고도 합니다. 그라치아에서 온 것입니다. 그라치아의 이격입니다. 은혜의 결핍이다. 페카투미나 포에나, 특히 포에나는 그라티아의 결핍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느 날 다리가 이만큼 곪기 시작했습니다. 딱지가 앉으면서 막 험하게 고름이 막 나왔습니다. 이게 피부를 계속해서 망가뜨리면서 이게 번져갔습니다. 맨 처음에 요만했었는데 손바닥만 하게 커져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것을 실체처럼 느끼게 됩니다.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내 다리를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기다가 약을 바르고 계속 소독을 하고 잘 관리를 하고. 치료를 받고 나았다고 합시다. 만약 이 상처와 질병이 실체라면 우리 몸을 떠나서 어디엔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료를 하고 나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어디로 이동한 게 아니라 선에 기생해서 작용을 하던 질병이 건강이 회복되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고로 이 질병은 실체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죄가 이렇게 있다면, 이것이 실체라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모두 사라졌을 때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죄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번에도 김근식인가 누군가 그 어린아이들 성폭행으로 도로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권 문제도 나오고 하는데 어쨌든지 간에 그런 사람들의 속에 모든 학자들이 100% 재범한다고 아주 확신을 합니다. 옛날 고소 들어온 사건을 가지고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그 죄가 가득하다는 걸 이제 우리 모두가 압니다. 그 사람이 죽었어요. 그러면 죄는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죄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학생 : 사라질 것 같습니다.
목사님 :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이 죽으면 같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죄가 지옥으로 간다고도 합니다. 엉뚱한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그게 결국은 사라집니다. 그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혹시 이런 단어 아십니까? ‘mortify’. ‘mort’는 무엇입니까? 모르스, 모르십니까? ‘mortify’는 영어로 ‘put to death’, ‘죽게 하다, 죽음에 놓다’ 이것이 mortify입니다. mort가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라틴어에서 ‘모르스’가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mortal’,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immortal’, ‘불멸의 인간’이라고 합니다.
<불멸의 연인>이라는 감동적인 베토벤의 영화가 있습니다. 보셨습니까? 그런 영화를 봐야합니다. 한번 보십시오. 한 20여 년 전에 나온 영화인데 굉장히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불멸의 연인’ ‘immortal’입니다. mortify, put to death입니다. 영어로 쓰면, mortification, 죽임입니다. 그래서 ‘mortification of sin’이라고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이 죄를 죽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이 ‘sin’ 자체가 crime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죄를 짓고자 하는 성향을 얘기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 ‘mortify’의 반댓말이 ‘vivify’입니다. ‘vivid’, ‘생생한, 살아있는’, ‘vivify’, ‘살리다’ 그런 뜻입니다. ‘죽이다’의 반대말입니다. 이것을 명사화하면 그걸 ‘viv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살림’입니다. 이것은 ‘grace’가 됩니다. ‘은혜를 살리는 것’, 그리고 ‘죄를 죽이는 것’ 이 두 개가 동전의 양면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은혜를 계속 vivify 할 때 죄는 아주 자연스럽게 mortify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수업하고. 쉬는 시간 없이 끝내겠습니다.
은혜가 신자의 마음 안에 강력하게 도미니언을 갖게 될 때, 우세하게 될 때, 그때 이 죄는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습니다. 남아있는데 십만 개 미만의 암세포처럼 남아 있어서 별로 커다란 문제를 안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 전체에 그 세균 같은 것들이 많이 있고, 수시로 들락날락합니다. 박수 한 번만 쳐도 미생물이나 박테리아 700만 마리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 안에 많은 것들이 있어도 그래도 사실은 그게 문제를 안 일으키고 결국은 건강에 의해서 해결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은혜 안에 있게 되면 죄 같은 것들이 있어도 그게 큰 영향을 안 미치고 결국 우리 안에서 이것들이 공존하면서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조금씩은 미치는데 그게 우리의 그 도덕적인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도록 심각하게 우리의 인생을 망가뜨리지는 않고 얼마든지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이것이 기도와 뭔 상관이 있는가? 이제 이 얘기가 오늘의 중요한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은혜’라고 할 때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뜻으로 쓰입니다. 이 설명을 지난번에 잠깐 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길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는 호의입니다. 가치 없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세 번째는 감화입니다. ‘은혜에 의해 죄가 죽는다.’라고 할 때 이때 은혜는 세 개 중에서 이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필기까지 했습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다. 그래서 은혜의 목적이 있는데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쓰겠습니다. “은혜란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사랑의 감화다.” 이렇게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철학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가장 명료한 definition입니다. 제가 정리를 한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가 직접 일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한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직전에, 되고 나서도 물론이지만 되기 전에 회심의 전야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은 무화가 나무 아래에서 깊이 회심을 하고 그때 이런 계기가 있었습니다. 폰티치아누스라고 하는 로마의 고관 대작을 지내던 사람이 밀라노에 있을 때 찾아옵니다. 어거스틴이 그 카르타고에서 아주 유명한 문법 교사가 되어 제법 돈벌이를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근데 카르타고라는 곳이 지금의 튀니지에 있는 곳인데 저도 가보지 못했지만 카르타고가 당시 로마에서는 두 번째로 큰 콜로세움을 지을 정도로 로마의 아주 중요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항구였고 엄청나게 돈이 많은 마을이었습니다. 그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다가 결국 방탕한 삶도 살고 마니교에 빠지기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마니교 전도자 노릇도 하고 그러다가 다 때려치고 다시 회의를 느끼면서 돌아가서 결국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기도 전에 이제 그냥 돈이나 벌어야 되겠다고 열심히 공부해서 말발을 세워서 인기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때 알리피우스라는 친구가 로마에서 어거스틴을 부릅니다. 당신 같은 인재가 그 시골에 썩기에 너무 아까우니 로마로 오라고 해서 신이 나서 로마로 갑니다. 로마에서 이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순식간에 유명한 강사가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기 전, 카르타고에서 선생님으로서 어거스틴은 학생들이 너무 버르장머리가 없고 부도덕한 것을 보고 질려버렸습니다. 자기도 예전에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카르타고’라는 말은 라틴어인데, 앞 글자를 s로 바꿔서 ‘사르타고’라고 하면 프라이팬이 됩니다. 사르타고가 월드 플레이를 합니다. “카르타고에서의 생활은 마치 사르타고 같았습니다.” 뭔가를 뜨거운 번철에다가 올려놓으면 콩도 막 튀고 막 곡식이 막 튀고 지글지글 끓는 것처럼 항상 젊은이들이 그랬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짜증이 나 있던 차에 이제 로마로 가게 됩니다. 로마에 갔더니 진짜 훌륭한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옛날에 똑똑한 조선시대에 똑똑한 사람들이 전부 다 다 한양으로 올라왔듯이 지금도 지방에서 공부 잘하는 수제들이 서울로 다 올라와서 좋은 학교 다니듯이 돈이 많거나 아니면 공부를 유난히 잘하거나 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똑똑한 생각을 하고 너무너무 말귀를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신이 납니다. 이해 못하실 것입니다. 뭐 간이라도 다 내주고 싶어집니다.
내가 34살의 교수가 됐을 때 밤 11시까지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10시 10분에 수업이 끝났는데 학생들이 미친 듯이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수업이 10시 10분에 끝나면 내 연구실에서 밤 10시 10분, 20분에 수업 시작해서 11시 10분까지 원서를 읽어주는 것입니다. 특정한 학생들 몇 명이 들어와서 수업을 하는데 너무 좋아했습니다. 마치고 나면 미친 듯이 전철로 달려가서 끊어지기 전에 이제 차를 타야 됐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입니다. 온몸을 다 가르쳐줬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생깁니다. 로마는 등록금 후불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별의 별 선생이 와가지고 선생님 노릇 하려고 하니까 학교에서 강좌를 열고 그 다음에 들어와서 한 달 동안은 수업을 받되 마음에 안 들면 중도에 돈 안 내고 퇴장을 하고 마음에 들면 끝까지 수업을 받고 수업료를 내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 강의는 너무 출중하니까 학생들이 미어질 듯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29일 듣고 그 다음에 그 수강 철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을 안 내도 됩니다.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짜증나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29일 가르쳤으면 한 달을 다 가르친 건데 29일치 수업료를 내야하는데 살짝 도망가서 다른 강의를 듣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아주 깊이 회의를 느끼면서 그때 이제 인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것이, ‘아! 공부 잘하는 게 진짜 좋은 인간이 되는 길일까?’ 한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이제 밀라노에서 부릅니다.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은 밀라노로 와야 된다고 해서 우리로 말하자면 대통령실 산하의 문화 담당 비서관 정도, 황제의 칙서, 연설문 작성 및 해설에 관여하는 그런 아주 높은 직책을 줍니다. 거기서 그 유명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TV에서 나오는 밀라노 대성당이 바로 암브로시우스가 목회하던 곳이었고 거기서 어거스틴이 그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무지무지하게 재밌는 얘기가 많은데 시간이 없습니다. 거기서 깊이 회심을 하게 되는데 그때 폼피치아스라고 하는 로마의 아주 높은 관리를 지내던 사람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거스틴은 옆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이 사람이 이야기하다가 점프를 합니다. 안토니우스라는 사람에게로 점프를 하는 것입니다. 그 당대의 사람이었는데 최초의 수도사였습니다.
아다나시우스가 지은 “안토니우스”라는 전기도 우리나라에 번역돼 있습니다. 안토니오스가 수도 생활을 하면서 철저히 은둔하고 금식하면서 있다가 사람들이 너무너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달라고 애원을 하면 수도원을 떠나서 잠시 내려와서 설교를 하고는 홀딱 사라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거룩한 인격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던져주고 자기는 빈 몸으로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수도사의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하게 됐을 때 어거스틴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면서 하나님을 믿어야 되겠다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 더 이상 이제 나는 갈 데가 없다고 하는 결론과 여전히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 그 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어거스틴의 마지막 양심에 창을 꽂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그 유명한 회개의 장면이 있는데, “톨레레게 톨레레게” 하는 아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집어라 읽어라 집어라 읽어라” 그런 소리가 나서 아무 성경이나 탁 펴서 읽었는데 그게 로마서에 나오는 “이제 더 이상 너희는 어두움 속에 있지 마라 그러면서 이제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통곡하면서 드디어 이제 그리스도교로 귀의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어거스틴이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 바깥에서 인간의 의지 없이 행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의 의지 안에서 인간의 의지와 함께 일하십니다. 특히 도덕적인 문제에 관해서 말입니다. 철저하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율성을 존중하시면서 일하십니다. 은혜는 인간의 지·정·의에 모두 영향을 미치지만 최종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영향을 주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 이 의무는 당연히 선한 의무입니다. 선한 의무로 돌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행하게 한다”고 할 때 이건 뭐와 관계됩니까? 힘. 그 다음에 능력과 관계됩니다. 파워.
여러분, 이런 걸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을 변명할 여지가 없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그렇지 않습니까? 해야 되는데, 나는 정말 그렇게 하길 원하는데 도저히 그럴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문제가 되는 게 무엇입니까? 파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 파워를 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을 행했을 때에는 결국은 무엇 때문에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의지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은혜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은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해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만약에 악을 행했다고 할 때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어거스틴은 초창기에 하나님에게서 그 원인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니교에 푹 빠졌던 이유가 ‘네가 이 안에서 네가 이렇게 악을 행하는 것이 네 책임이 아니라 당구 같은 것이다.’ 그 당시에 당구가 없었지만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당구대가 이렇게 있고. 공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렇게 큐대로 때리면 이거 맞고 이거 맞으면서 이건 이쪽으로 튀어나가고 저건 저쪽으로 튀어나갑니다. 맨 처음 원인이 무엇입니까? 큐대가 A라는 공을 때린 것입니다. A때문에 B는 맞았고 B때문에 C가 맞아서 결과적으로 이쪽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원인은 무엇입니까? 결국은 이 큐대가 때린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마음에 이걸 때린 것입니다. 자기 마음 안에 선신과 악신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어도 사실은 자기 자신도 악신의 피해자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 전부터 계속해서 이게 두 개로 같이 되어왔다는 것입니다. 이 선신은 정신과 관련되고 이 악신은 물질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기본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도 사실은 플라톤주의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마지막에는 이 정신이 물질을 이기고 이 세상의 역사가 이제 종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자기도 뭔가 이 악신이 큐대로 한번 마음을 때리면 그게 계속 이 안에서 당구공이 맞으면서 튕기는 것처럼 결국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니까 자기 자신도 피해자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그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면탈이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죄의식을 소멸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어거스틴이 고백하기를 “저에게는 너무 신나는 설명이었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 사람은 습관적인, 거의 성 중독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게 여자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런 것에 익숙해진 사람이 도대체 변명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기가 막히게 이런 설명을 마니교가 제시해준 것입니다. 기가 막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건 기독교 세계관과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안 맞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밖에 안 계신데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게 이게 말이 되냐는 겁니다. 이 도덕적인 죄와 관련지어서는 궁극적으로 이 죄를 주관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세 개를 이야기합니다. 마귀와 세상과 죄입니다. 이게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어떤 도덕적인 결정을 할 때 마귀의 영향을 받아서 죄를 지었다라고 결정을 하고 자신의 책임을 마귀에게 전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은빈이 손을 이렇게 들어서 이 사람을 이렇게 때렸습니다. 피가 났습니다. 은빈이는 법률적으로 무죄입니다. 나는 손 하나 대지 않았지만 결국 이 손을 들어서 때린 내가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물리적인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결국 인간에게는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악을 행했을 때는 마귀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그것을 선택한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A라고 하는 상황에서는 내가 알파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왜 B라고 하는 상황에서는 베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느냐, 그것은 결국 은혜의 결핍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 은혜의 결핍은 누가 원인이 된 것이냐? 자기 자신이 원인이 된 것입니다. 자기 주체적으로 자신이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지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 함께 그는 죄로 가까이 다가가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그 결과가 자신의 마음과 정신 안에 그대로 남은 것입니다. 남아서 이 포에나가 가중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눈을 꼭 감고 결심을 하기 전까지는 술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말입니다. 그다음에 익숙해지고 나니까 친구가 “먹으러 가자.”하면 따라갈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냥 마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엔 물컵에 놓인 물만 봐도 술 생각이 나서 술을 먹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포에나가 계속 가중되는 것입니다. 죄벌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히 습관적인 죄에 대한 아주 기가 막힌 성경적인 설명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기록하십시오. ‘인간이 세상에서 죄와 무관할 수 없다. 숨 쉴 때 공기 속에 불순물이 들어오는 것처럼 죄는 우리의 생각, 정서, 의지, 모두에 깃든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죄가 마음에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는 것은 피할 수 있다. 그것을 피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이다. 그 선택이 반복될 때 죄는 우세하게 된다.’ 그것에 의해 조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약점을 잡히지 말아야 되는데 한 번 약점을 딱 잡히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아주 부드러운 말로 협박을 해도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 되듯이 그렇게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걸 계속해서 털어내는 역할들을 기도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를 통해 은혜가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은혜에 의해서 이것들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설명을 했습니다. 37페이지 위에까지 갔습니다. 다음 주에 12월 8일 날에는 역설적 개념의 종합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에 가셔서 그 앞에 나와 있는 강의안을 꼼꼼하게 읽으시면서 강의 내용들을 정리하시면 됩니다. 다음에 모였을 때에 이제 역설적 개념의 종합과 프로네마의 개념, 심리 철학, 죄의 활동 등에 대해서 이제 지금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좀 더 공부해 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에 어떻게 기도가 이러한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용들을 이루어내는지 여러분 자신이 연관 지으면서 생각을 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기도 없이 살 수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 있으면 두 사람만 받겠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인간이 죄를 지은 즉시 왜 회개가 어려우냐? 맞습니까? 그것은 일종의 죄에 대한 관성입니다. 막 달려가다가 달려가다가 “멈춰!”라고 말한다고 해서 설 수 없습니다. 보통 차가 시속 100km 정도로 달리면 정지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브레이크를 밟고 멈추는 시간까지 거의 아마 27m 정도를 가야 됩니다. 전심으로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는데 “멈춰!” 한다고 해서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멈추면 오히려 몸이 어딘가로 나뒹굴어지게 됩니다. 죄의 관성입니다. 여전히 죄를 지었는데 한쪽에서는 소위 얘기하는 현자 타임인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면 욕망이 싹 사라지고 나면서 ‘이거 별거 아니었구나.’라는 현명한 마음이 깨끗하게 드는 것입니다. 욕망이 사로잡혀있을 때에는 미친 듯이 그것밖에 몰랐는데 하고 보니까 이것도 별거 아니네 하는 소위 얘기하는 현자 타임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왔는데 그 시간이 오래 갑니까? 또 다시 욕망이 생깁니다. 죄가 마음으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회개라는 것도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돼야 하는데 이게 머리에서만 계속 현자 타임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지 이 마음까지는 안 내려간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여름에 심하게 가물어서 땅이 메말라서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앞이 안 보이게 쏟아집니다. 한 10분 정도 내리니까 온 도시에 물이 흠뻑 젖어서 물이 콸콸콸콸 흐릅니다. 딱 그렇게만 비가 오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땅을 캐려고 곡괭이를 듭니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땅이 질어 보이는데 곡괭이로 두드리면 한 5cm만 들어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먼지가 풀풀 나는 바짝 마른 땅이 나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 갑니까? 이렇게 현타는 왔는데, 어떤 말씀을 들었을 때 ‘아 그게 잘못이구나!’라고 현타도 오고, 실제로 죄를 짓고 나면 현자 타임도 오는데 문제는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않고 이 의식 속에서 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식 속에서 도는데 이 안에서 또 새로운 욕망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욕망이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abasement 라고 합니다.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전에 인간의 마음이 한없이 비참해지면서 바닥까지 내려가는, 그런 고통의 시간들이 항상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다음에 회개하기 전에는 항상 고통의 시간이 있습니다. 바실레어 슈링크라고 하는 사람이 회개에 대해서 말하기를 “회개는 뉘우쳐서 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지은 그대로 벌을 받고서라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다.” 그래서 abasement 개념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못 견딥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오락에 빠지고 딴 생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디베티스모’, 불입니다. ‘디베디스모’ 이게 파스칼이 쓴 용어입니다. ‘회피’입니다. 끊임없이 정신을 딴 데로 쏟게끔 만들어서 이 고통스러운 문제에 직면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답이 되었습니까?.
두 번째 질문, 마지막입니다.
학생 질문 : (잘 안 들립니다)
목사님 :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없어진다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매일 주시는 이 은혜, 이 힘으로 자기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라지면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니 사나 죽으나 내가 주님의 것이로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죄가 없지는 않은데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이야기하는 진정한 자유의 삶입니다. 내적인 어떤 필연과 강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살아가야 될 바입니다.
한 사람만 더 받겠습니다. 진짜 마지막입니다.
학생 질문 : 궁금했던 점이 저희가 선을 행하면 그게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을 하는데, 선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미가 가능한 게이트고 근데 아까 마귀 그다음에 죄에 대해서 악을 행하면 그게 마귀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저희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 선은 저희가 행했는데 하나님께 가는 것이고, 악은 마귀가 꼬셨을 수 있는데 왜 저희가 책임을 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 그게 결국 주체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주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타락을 해서 선을 인간이 선택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을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이 은혜라는 수단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대가 지금 등록을 해야 되는데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돈을 줬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교무과에서 돈을 입금을 하고 수강증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 돈은 그대가 입금했지만 “내가 이 학교에 이번 학기에 다니게 된 것은 등록금을 창구에 납부한 나 때문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돈을 도와주신 교수님 때문입니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개념으로 이해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 인간은 이런 것들의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주체적인 결정을 통해서 된다는 것입니다. 선에 대해서는 인간이 겨우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선택까지는 가능한데 그 선택된 것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라고 하는 그 본성과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이기게 할 수 있는 이런 은혜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만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