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때때로 기도하라
(1999-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염려를 극복하는 기도(빌4:6) 1999.11.10 수요예배 1
2. 평강을 주는 기도(빌4:7) 1999.11.17 수요예배 18
3. 영혼이 피곤할 때 기도하라(욘2:7) 1999.11.24 수요예배 33
4. 긍휼을 불러일으키는 기도(막1:41-42) 1999.12.8 수요예배 43
5. 환란 중에 먼저 기도해야 할 것(시116:3-4) 1999.12.15 수요예배 53
6. 하나님을 아는 기도(시116:5-6) 1999.12.22 수요예배 62
7. 말씀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살후3:1) 1999.12.29-2000.1.19 수요예배 73
1.염려를 극복하는 기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머리에 쌓이는 지식은 시간이 흐르면 양이 늘어나고 그 양이 늘어나면 우리는 그 지식에 있어서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오랫동안 훈련되고 숙달된 사람들은 그 한 방면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같은 조건하에서 훨씬 더 유능하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방면에 있어서 대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대가가 있을 수 없고, 기도를 모두 터득한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단지 지식으로 탐구해 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이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과의 교통을 항상 뛰어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신앙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과의 기도의 세계가 거의 막힌 가운데 살아가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지식에 놀랍게 뛰어나다 하더라도 기도의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경우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세계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경험이고 하나님 자신과의 교통이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기도 자체만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천하기는 하지만 저는 오랜 기도의 경험과 숙제를 푸는 마음으로 기도의 세계와 씨름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사실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만큼만 깊게 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지식 없이 우리의 기도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신앙의 요소와 마찬가지로 이 기도의 세계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하나만을 훌륭하게 어떤 특기생들이 자기의 장기 하나에 집중하듯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아름다운 기도의 세계가 건축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열심 있는 기도 생활로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신앙의 생활에 있어서 우선적인 노력을 기도에다 두고, 기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가 하나님 앞에 신앙 생활하는 중심 자리에 온다 하더라도 그것과 함께 재편되는 삶의 변화 없이는 효과적인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깊이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였기 때문에 그러하기도 했지만 이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정을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이른 첫날부터 빌립보 교회는 좋은 신앙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바울은 항상 감사한 생각으로 기도했고, 다른 모든 교회들보다도 빌립보 교회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서두에서 “내가 너희 무리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라” 고 선언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담대하게 자기의 사랑을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영적인 아버지로서의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알 듯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아버지처럼 섬겼던 좋은 교회였습니다. 지금 복음으로 말미암아 옥중에 있는 가운데서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사람들을 보내었고 그의 선교 사역지에서 그를 위해서 돕는 일들을 쉬지 않고 계속 했습니다. 이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3장까지 기록하고 4장에서 이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와 같은 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 먼저 들어가고, 그 다음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기도의 부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부탁 속에는 ‘감사함으로’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앞에 나오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받는 병행구라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하되 염려함으로 기도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열렬한 기도 생활을 유지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먼저 말하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도 바울의 의례적인 인사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저 늘 가난하고 걱정이 많고 근심이 많은 교인들을 형식적인 겉치레 인사말로 위로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잘 되겠지 뭐’ 하는 마음으로 지금 겉치레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오직 기도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하기 전에 그는 기도에 있어서 커다란 적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 생활을 가로막는 적들은 많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권세와 정사들도 우리의 기도의 방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성품도 유혹을 따라서 죄를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기도의 열렬한 영을 소멸시키고 기도의 방해자로 등장합니다. 뼛속 깊이 사무쳐 있는 사람을 향한 미움이나 원망의 마음도 또한 우리의 기도의 영을 가로막는 그러한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살 속 깊이 박혀 있는 태만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안락함을 추구하는 게으름도 기도 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커다란 대적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그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기도 생활의 대적이 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은 대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이 게으른 생활을 했을 때에 기도를 하게 될 때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해가 동천을 두드리고 친구들이 전부 다 직장에서 한참 일하고 있을 때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밥을 해 먹고 잠옷 바람으로 털썩 주저앉아서 어제 못 본 석간신문, 오늘 일찌감치 온 조간 신문까지 다 보고 나서 밀려오는 피곤 때문에 길게 뻗어서 쉬는 것도 주의 일이라고 목사님께서 가끔 그러셨지--오늘이 주의 일 하는 날이다 하며 실컷 자고 일어났더니 너댓시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나 한 번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오면 기도가 되겠습니까? 낯이 뜨거워서 어떻게 기도를 하겠습니까? 늦게 일어난 일, 신문 본 일, 낮잠 잔 일, 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필요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 저절로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열렬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을 그렇게 살다가 교회에 오면 오히려 죄를 짓고 가책을 느낀 사람은 괴로워서라도 기도를 하는데, 먹고 자고 놀다가 정신적인 백수로 살다가 와서 열렬한 기도가 나온다면 그것은 희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는 느낌을 일주일 내내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는데 어떻게 열렬하게 하나님께 아뢸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이미 삶으로서의 예배, 생활로서의 기도에 실패했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예배와 기도 속으로 못 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태만하게 하루를 살고 나면 저녁 때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다가 해가 환히 떴을 때 일어나면 후회되지 않습니까? 덕도 되지 않는 수다를 친구와 막 떨다가 보면 돌아설 때 허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게으름도 그처럼 가책을 가져다줍니다. 또 범죄를 저질렀을 때도 기도할 때 가책을 느낍니다.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볼 때에도 자책감이 생깁니다.
그런 자책감과 염려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도를 안 할 때는 몰라도 기도를 하려고 마음을 먹을 때는 그런 것들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계를 무력화시키면서도 훌륭하게 우리 속에 파고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죄나 나태, 태만, 이런 것들은 쉽게 우리 스스로 잘못 된 것임을 자각하는데, 염려는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굉장히 커다란 방편이라는 사실을 왜 우리들이 인식할 수 없을까요?
그 이유는 염려의 대부분이 생각이기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어디까지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어디까지가 염려인지 정확하게 가를 수 있습니까? 그것은 힘든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사건을 생각할 때 순전하게 그것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런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기의 이해 관계가 연결되어서 일어나는 것, 그런 것을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인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간절한 기도 제목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것 중에 여러분의 이해가 관계되지 않은 기도 제목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설령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이 먹고, 마시고, 쓰고, 물리적으로 자기와 관련된 것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명백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신앙으로서 그 일이 자기의 이해 관계에, 아니 이해 관계를 뛰어 넘어서 생사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그가 기뻐합니다. 저 사람이 돌아와서 나에게 무엇을 주는 것은 없지만 그런 것과는 관계없습니다. 신앙이 없을 때에는 그 사람이 어찌 되든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신앙이 있고 나니까 저 형제가 변화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고 저 자매가 제자리에 서는 것이 정말 간절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직접 관계가 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이 그 사람의 일이 자기 것인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자기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입니다. 신앙으로서 관련된 것입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든지, 잘 된 것이든지 자기와 물리적으로 관계없어도 관계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신앙이 그런 마음을 갖게 해 준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이해 관계에 연루되게 한 것입니다. 다만 신령한 의미에서의 이해 관계가 연루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볼 때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해 관계가 얽힌 모든 문제는 항상 가볍게 생각할 수 없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를 하찮게 생각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믿음이 뛰어난 사람이거나 아니면 도대체 아무 것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할 때에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이해와 관계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은 그것을 신중하게 객관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진지하게 생각한다 하는 것도 결국은 뭔가 희망에 기울든지, 우려에 기울든지, 두 개가 교차하든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까지가 신중하고 진지한 생각이고 그 다음이 염려이다 라고 무 자르듯이 잘라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상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 필요한 진지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그 동안에 함께 줄서서 염려라고 하는 대적들이 따라서 들어와서 결국 마음속에서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진지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신중하게 기도하도록 만들어주지만 그 진지한 생각을 따라 들어온 염려하는 마음들은 우리로 하여금 낙망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라고 병치되어있는 이 구절을 보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염려라는 그 마음의 작용 자체가 아주 신령하고 특별한 의미에서의 염려를 제외하고 나면 대부분의 염려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염려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시편이나 혹은 선지자들의 글을 보십시오. 그들은 가히 스스로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몸부림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견딜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몸부림치면서 그 안에서 불평도 나오고 하나님께 대한 피어린 탄원도 나오지만 항상 그 갈피갈피 사이에 언뜻 언뜻 파고 들어오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깊이 타락하였을 때 회개의 기도 중에서 사실 감사의 기도부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주심에 감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처절한 용서의 탄원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님 앞에 소망을 발견합니다. 이런 것들이 항상 함께 상황적으로 치열하게 압박을 받는 가운데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탄원하면서도 그 갈피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감사가 파고드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자들이 믿음의 눈으로 보는 낙관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항상 이 두 가지가 교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염려에 깊이 잠긴 사람들은 염려의 때가 길고 잠깐 잠깐씩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감사가 사라집니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보십시오.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는 것은 참 어려워도 주위의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쉽고 정확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볼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없고, 여러분의 마음에 염려가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기쁨을 이 얼굴이 숨길 수 없고, 슬픔을 이 얼굴이 숨길 수 없습니다. 염려는 우리 인격과 영혼 안에 깊이 배어서 그것이 우리의 모든 표정을 만들어냅니다.
그러한 깊은 염려에 잠겨 있을 때 그래도 절대적으로 긴 시간에는 그렇게 염려하지만 이따금씩 감사가 밀려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염려는 완전히 감사의 가능성들을 다 말려버립니다. 다 걷어가 버립니다. 결국 이 염려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깊은 신뢰가 결핍된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기대면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설령 내가 하나님 앞에 기댈 때에 내가 예상하던 방법대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염려할 것이 없다는 마음이 있을 때 인격적인 신뢰가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확보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삶에 대한 전적인 위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이 있고, 몸부림치며 살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찾아가서 여기 좀 도와달라고 하는 그런 식의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 한 이러한 내적인 불안은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라디오의 뚜껑을 잘 열었습니다. 진공관 라디오라 열면 크고 작은 진공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큰 라디오 속이 꽉 차 있어서 여기 저기 뜯어보는데 이 일을 우리 아버지가 인정을 잘 안 해 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드라이버가 꼭 필요한데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아버지께 일 전체에 대한 지도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없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서 아버지께 가는 것입니다. 드라이버만 좀 주시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이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뭔가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까? 정말 제가 괜찮은 자입니까? 제가 주님의 착한 자녀입니까? 제가 세운 모든 인생의 목표들은 하나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것들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 “ 하나님, 드라이버 좀 주세요, 네? 안 빌려주시면 금식 할 거예요!” 이런 식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위탁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신뢰 관계가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으로 믿고, 무엇이든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은 다 좋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제껏 걸어온 길 자체가 실수가 없고 완전했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동기 자체에 대해서 자아 중심적인 동기를 가지고 무슨 일을 계획하거나 인생을 설계하지는 않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나아가려면 뒤에 있는 푯대가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이 보내주셔서 저 여기 있습니다. 순종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 여기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주님을 향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염려의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면 기도의 문제에만 연관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영을 염려가 죽입니다. 그런데 나는 나대로 살고 싶은 삶이 있고, 하나님께 양보하기 싫은데 어떻게 염려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내가 챙기든지, 하나님께서 챙기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신앙의 양심으로 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못할 동기들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자신을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겠습니까? 그것이 염려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깊이 들어가면 결국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드러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평화, 진정한 평정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평안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정이지, 그것 이외의 평정은 마취제일 뿐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매우 위험한데도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이런 식의 태도가 마취제이지, 신앙은 아니란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평정은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안을 떨쳐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시 깊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로 물고 넘어 가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열렬한 기도의 영을 가지고 헌신적인 사람, 하나님이 그 기도에 함께 해 주시는 능력 있는 기도의 삶을 개척자적인 정신으로 살아갔던 모든 사람들은 생사를 하나님께 맡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살짝 빠져나갈 데를 찾는다든지 다른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때 살짝 도망가는 길은 없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은 재치 속에서 살았을 지는 모르지만 헌신적인 기도의 영 속에서 산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영적인 모든 생활의 기초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사업을 하는 사람의 기초는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500원 짜리를 사다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이윤을 남기고 팔면 되는 것을, 구매자가 5000원을 준다고 할 때 원가를 사실대로 말하며 1000원만 주셔도 저는 장사 할 만 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언제 돈을 벌겠느냐고 하니까 그 사람 대답이 참 재미있습니다.
“ 제가 이렇게 장사를 하니까 떼돈은 못 법니다. 그러나 저는 십 수년간 장사를 하면서 한 번도 위기감을 느껴본 일이 없습니다. 어차피 제 꿈은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 사업의 동기를 하나님 앞에 의심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 렇게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사업을 하다가 만약에 망한다면 저는 감사드릴 것입니다. 하나 님이 새로운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정리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확실히 돈은 늦게 법니다. 그러나 그 사람 주위에는 수많은 고객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와 작은 거래를 했던 사람들이 더 큰 거래를 트고, 더욱 큰 거래를 트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을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겼기 때문에, 자기 인생의 목표가 올바른 만큼 그 목표를 달성해 가는 방식도 하나님 앞에 맡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로 인한 염려가 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생산적인 삶이 아니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어마어마하게 생산적인 삶인 것입니다.
마음속의 염려와 고민의 공격을 향해서 항상 문을 열어놓고 살아가는 신앙 생활과 이런 것을 원천 차단하고 하나님 앞에 평정을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삶 중 어떤 삶이 생산적인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인생의 모든 염려와 근심이 사업을 통해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적어도 그 사람은 사업에 있어서는 중요한 사단의 공격의 통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크리스천 사업가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적게 일하고 많은 돈을 주는 직장이 성경 적입니까?”
우리에게 생각할 것을 많이 주는 말이지 않습니까?
염려는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지금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고 있는 그런 부실한 관계의 통로를 통해서 자신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누가 염려를 선택하겠습니까?
6․25 전쟁에서 미군들이 많은 전쟁 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갔습니다. 미국으로 보내기 전에 미군 병사들이 그들을 데려다가 씻기고 좋은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못 자는 이유는 내일 무엇을 먹게 될지 걱정이 되어서였습니다. 미군 병사들은 취사반에 연락을 해서 큰 햄버거를 만들어주었고, 그것을 품에 안고서야 그 아이들이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믿을 수가 없고, 내일에 대해서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속을 모두 내어놓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주님과 수시로 협의하면서 주님이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삶을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염려가 우리 마음에 들락날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생애 적인 결단을 하고 하나님 앞에 삶의 동기를 정화하지 않은 사람들이 깊은 기도와 열렬한 기도 속에 사는 예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세계를 두드리기 전에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면 기도 그 자체가 하나님 자신을 찾아가는 긴 여행의 길이라고 생각해야지 아버지가 동의해 줄지 안 해줄지도 모르는 라디오 부수기를 하면서 드라이버를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로 조립을 하는 숙제를 놓고 아이가 쩔쩔 매고 있을 때, 아버지가 그 현장을 보고 아이의 수준에서는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가 전자의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후자의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밀어 주실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밀어주시고 나면 엉뚱한 일을 하는 곳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또 이나마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에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이라도 꿇지만, 도와주고 나면 하나님 앞에 입을 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삶의 동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재편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런 위험이 따르고,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도 이런 피상성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염려가 가슴속에 파고 들어오고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평정이 없습니다. 늘 기도의 동기 자체는 불안을 쫓아내고자 하는 것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기도하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진짜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열렬한 기도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열렬한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힘, 능력, 지혜, 권세, 그런 것들만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기도 생활의 동기가 될 때, 그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의 영을 수시로 억압하고 혼탁하게 만드는 이 염려의 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고 말하는 이 대목은 우선 우리에게 기도에게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염려의 친구는 믿음 없음입니다. 항상 같이 놉니다. 또 다른 그들의 친구는 세상방법입니다.
염려가 들어왔다고 합시다. 믿음이 있으면 단숨에 염려를 추방해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염려가 들어오고 믿음 없음이 함께 어울리는데 뭔가는 해야되겠고 신앙은 없으니까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험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했습니다. 그가 왜 자기 군사를 시켜서 그 충성스러운 사람을 지금 동료들이 한참 싸우고 있는 때에 휴가를 준다는 미명하에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정말 그를 전쟁 중에 수고했다고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자기 아내와 동침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기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 꾸민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치밀하게 생각한 것입니까?
다윗에게 염려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간교한 일을 행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염려가 되었으면 무릎을 꿇고 매달려서 제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어떤 죄의 값이라도 달게 받을 테니까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시지 말라고 후에 기도할 수 있었던 것처럼 기도했더라면 염려가 들어와도 그것을 잘라내고 , 고난을 받을지언정 그 일로 인해서 염려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염려가 들어왔는데 믿음이 없었고, 생각을 해 내고, 그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 계획을 짜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아무 상의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면전에서 숨은 가운데서 자기가 만들어낸 인간적인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결과는 어땠습니까? 훌륭하게 성공했습니까?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의 지혜를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을 불러오는 데까지는 성공을 했는데 그가 자기 집에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결국은 그를 죽이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 말았습니다.
이 염려가 결국 마지막에 맺는 열매가 그렇게 단순하게 마음을 끓이고 속을 아프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염려가 불신앙을, 불신앙이 인간적인 방법을, 인간적인 방법이 범죄를 , 범죄가 하나님 없는 삶을 계속 확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염려는 굉장히 무섭고 파괴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경계하지 않고 아주 쉽게 받아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은 염려한 것을 죄라고 생각하고 깊이 눈물 흘리며 회개한 적이 몇 번이나 되십니까? 그런 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회개되지 않는 죄 가운데 하나가 염려의 죄입니다. 그것은 회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회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자기의 신앙생활의 뿌리부터 흔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열린 신문에 실린 한 자매의 간증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가장자리에 앉았으면 괜찮았는데 가운데로 밀려들어가 앉고 말았습니다. 죄죽임의 교리 설교가 자기 자신을 깊이 찌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하면서 붙들고 있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것까지 전부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거 빨리 나가야할텐데 비좁아서 나갈 수가 없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것을 경험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이 뿌리라고 하는 것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오늘날에 내가 살아가는 삶이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 뿌리를 흔드는 것은 지금 세워진 내가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새로운 내가 세워져야 한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자기를 허무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이면 매일 매일 자기를 허무는 사람들이 아마도 수 없이 나오겠지요. 아마 회심이 매 순간마다 경험될 것입니다. 이렇게 힘든 것이기에 염려라는 죄가 회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회개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죄는 죄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양심에 강한 가책을 느끼든지 느끼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서 우리의 영혼 속에 영향을 미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염려하지 말고’ 라고 말한 것은 우리를 한 번 하나님과의 관계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런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스스로 바꾸고 변화해서, 즉,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빛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앞에서 인생의 목표가 바르게 되었는지를 점검하고 주님이 뜻 있게 생각하는 그 길을 향해서 우리의 인생이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든든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주님의 심정을 공유하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슬퍼하시는 자리에서 우리도 슬퍼하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자리에서 우리도 아파하고,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셨더라면 살아가고 싶으셨을 그런 삶을 우리들이 공유하며 살아갈 때 ,그 때 우리들이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에게서 완전하게 염려가 사라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택했지만 염려는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안일과 평안을 구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염려가 아니기 때문에 신령한 염려가 거룩한 기도를 촉발시키지, 하나님 없는 불신앙을 유발시키거나 자신이 가진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해서 하나님 신뢰하는 마음을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염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염려는 오히려 우리의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을 강력하게 촉발시킵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에 대한 염려, 그 계획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그런 계획이 성취되지 못하고 있는 동안의 그 이름에 누가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인해서 아파하는 마음은 오히려 기도의 세계를 엽니다.
가만히 보면 염려가 없을 때, 우리가 열렬히 기도하게 됩니까? 열렬히 기도가 될 때에는 그 일에 대해서 강렬한 염려를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이 염려는 같은 염려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에게 눌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교회를 향한 염려라고 했습니다. 이 염려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밤에 결국 주님을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혼자 두고 가야하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지상의 교회를 향한 염려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렇게 불붙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의 이 ‘염려’는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는 그런 신령한 염려가 아니라 정욕과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익을 구하는 그 추구점에 매달린 끝에 발견되는 그런 자기 중심적이고, 죄를 이루는 염려입니다. 그 염려가 결국은 주님을 향한 깊은 인격적인 신뢰에서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 대안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니 ,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의 것이고 너희는 내 것이라. 그래서 내 안에 너희가 있고, 너희 안에 내가 있느니라. 나와 너희는 하나이니라.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하나이니라.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아무도 너희를 빼앗아 갈 자가 없다.”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인격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전한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땜질을 하는 식이 아니라, 열렬히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것, 순결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우선 완전한 위탁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자신을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불사르게 내어주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완전히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왜 그렇게 죄 가운데 그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아야했고, 죽기까지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할 필요를 어디에서 느꼈을까요? 수시로 그도 정욕과 싸우고 자기의 욕망과 더불어 싸웠던 것입니다. 육체에 있는 동안에는 그런 한계를 늘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근본적으로 삶이 나 중심적인 삶인데 가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다 드렸는데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가끔 애굽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염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렇지 않도록 자기 상태를 충만하게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내 인생을 주님의 품에 던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 미래를 위해서 계획하는 이 일을 여러분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어쩌면 하나님이 이것에 대해서 동의를 안 해주실 지도 모른다는 그런 마음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인생의 계획들을 하나님 앞에 활짝 열고 하나님 어떻습니까? 제가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볼 용기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이런 부실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지는 일들이 동반되지 않고는 깊은 기도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봐야 거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뜨려지지 않고 그대로 남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지 않고 남아있는 상태에서 기도만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 평강만 누리는 것, 그런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바울이 왜 그렇게 우울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수많은 시인과 위대한 선지자들이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한편으로는 낙관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처절하게 고통하는 자기 고백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가지고 씨름해야 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기도 시리즈를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항해하고 싶으면 여러분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닷가에 굳게 묶여있는 닻줄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 배가 항해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렇지 않고는 염려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염려가 일단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기도의 영을 철저하게 고사시킵니다. 그리고 평정을 잃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뼈를 썩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근심만을 여기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조바심, 전전긍긍하는 모습, 평정을 잃고 허둥거리는 모습, 그리고 어떤 일의 결과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지 못하는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의 뜻이 내 뜻하고 다르면 언제라도 나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라는 계산된 조건적인 기도, 이런 것은 모두 다 이 염려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생각하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여러분들과의 부실한 관계에 대한 진단이 먼저 내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종하는 옛 사람을 끊임없이 허물고 새 사람을 세우는 그런 식의 삶을 택할 것인가, 아집을 붙들고 살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이제껏 까지 누구도 자기 고집을 꺾지 못했고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적응해야 했다는 그러한 과거를 자랑처럼 생각하는 것은 옛사람의 더러운 오만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 쉽게 깨어지는 우리의 마음, 그리고 그분이 얼마나 쉽게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녹이시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 분의 계획에 감동되어서 우리의 계획을 버리고 우리의 불완전을 버리고 그 분의 완전을 붙드는지, 주님에 의해서 너무나 쉽게 움직여지는 우리의 이 부드럽고 연약한 자아, 이런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로 인해서 우리의 기도의 세계가 오염되지 않게 하는 첫 번 째 비결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무엇이 기도이고, 무엇이 간구인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와 간구는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똑같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넓고 , 간구는 기도 가운데서도 특별히 자기가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대로 이루어지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는 것, 이것이 간구입니다.
감사도 기도 속에 들어갈 수 있고,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도 기도 속에 다 들어갈 수 있겠지만 간구는 그 중에서 특별히 강한 소원을 가지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는 것, 그것이 간구입니다.
기도와 간구, 기도가 만약 하나님과의 일반적인 깊은 교제의 생활, 그것을 아우르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의 세계를 말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서 나오는 간구는 특정한 일에 대해서 강한 소원을 갖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유지해야 될 영적인 상태는 무엇이어야 하느냐면 늘 우리들이 기도의 영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영적으로 순발력이 있습니다. 막 웃고 떠들고 놀다가도 무릎을 꿇고 우리 기도 합시다 하면 간절한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먹고 마시고 놀다가도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난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하면 순식간에 그 흔쾌한 자리가 주던 기쁨이 사라지고 이 좋은 자리에 함께 참여하지 못한 사실상 주님의 품을 떠난 영혼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받는 고통이 느껴지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 이것은 결국은 그 사람의 삶 전체가 기도의 영 속에서 어거되는 삶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뛰어난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인 탁월한 순발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순발력을 가질 수 있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은 수시로 교차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사람이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받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에 지금 많은 분들이 모이셨지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느낌은 다 다를 것입니다. 물론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지만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매우 근심하시고 슬퍼하시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와서 예배드리는 마음이나 동기나 그 자세 자체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매우 가슴 아파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예배에는 나왔지만 도무지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볼 때 너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사실입니다. 그 때 만약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 때 즉시 하나님이 그를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주님이 슬퍼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 할 때 깊이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고통하며 그를 위해서 몸부림치며 통곡으로 중보하게 되고, 그 다음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참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깊이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지고, 그런 것이 사실은 깊은 중보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을 때에 느껴지는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는 곳에는 항상 성도들을 향한 교통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거룩한 공회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한 성령 안에서 거룩한 공회가 만들어집니다. 성도들이 교통하는 것은 식사를 같이 하고, 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류(spiritual communion)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실제적인 교제의 삶,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의 고통이 자기에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양에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 불을 붙인 결정적인 선교사의 설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린도전서를 설교하는 가운데 지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간증을 했습니다. 자신이 사냥을 나갔는데 총을 잘못 쏘아서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손가락을 다쳤을 뿐인데 온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 지체 중 한 사람이 아플 때 우리 모두가 아프지 않습니까 라는 설교에 회개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일제에 대한 신사참배 문제, 사회의 일제 저항 운동 때문에 선교사들하고 굉장한 갈등이 있던 때였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있던 일들 중에 그 설교가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는 항상 그런 교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기도 할 때 저 형제가 한 번도 나를 찾아온 적이 없어도 그 형제의 삶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뭐를 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것은 모르지만 심각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파하는 것들이 느껴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느껴지고, 그런 것들이 기도의 영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특권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의 세계를 소유해서 너희의 모든 삶이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는 그러한 기도의 세계를 소유한 사람들이 되라고 하시는 명령이 ‘기도’라는 말이라고 한다면, ‘간구’는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할 제목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염려를 몰아내는 훌륭한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격적으로 ‘내 인생은 이제 주님의 것이다’ 그렇게 맡긴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염려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다 맡겨도 역시 염려는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강에 투신하려고 갔습니다. 신발을 벗고, 난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지나온 인생을 생각하면서 한참을 서 있는데 겨울 바람이 불어왔습니다.‘오늘은 물이 너무 차갑겠어---’하며 그냥 내려온 겁니다.
죽으려는 각오를 한 것은 한 것이고, 신발 벗고 올라가서 추운 것은 추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모든 목표는 다 하나님께 드렸어도 염려할 이유가 없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가르쳐 주는 것이지, 우리 믿음이라는 것이 항상 충만하지 않으니까 시시때때로 항상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대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전적인 위탁이 이루어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찾아와도 금방 쉽게 떨쳐지지 뿌리를 박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된 사람들에게는 깊이 뿌리를 박고 맙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위탁을 했어도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그런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드리고 나면 참 기쁘지 않습니까?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나면 무거운 마음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왔다가도 열렬히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에 넘치고 나면 ‘맞아,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사나운 비바람이 불어와도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지.’ 하는 깨달음을 기도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염려는 하고 나면 온갖 질병과 마음의 깊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것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뼈를 상하게 하고 성격을 변하게 합니다. 한 동안 근심 속에서 살던 사람은 성격이 변합니다. 뭘 가져다주는 것이 있습니까? 그와 비슷하게 우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쾌락입니다. 쾌락을 계속 추구하면 마지막에 우리가 황폐하게 됩니다. 그러나 쾌락은 그것을 추구하는 동안은 기분은 좋습니다. 그러나 염려는 염려하는 동안에도 고통스럽습니다. 시작도 고통이고, 계속 되는 것도 고통이고, 결과도 고통인데 이상하게 우리는 그 염려를 통해서 겨우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하이덱거라는 철학자는 인간 스스로 불안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답답한 문제입니까? 세상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없습니다. 무슨 탈출구가 있겠습니까?
삶의 현장에서 무거운 근심으로 다가오는 이해가 절박하게 얽혀있는 문제들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좋게 얘기하면 초연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인생을 무책임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염려에 대한 대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간구’하는 것입니다.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민하게 하는 그 일, 그것을 겨냥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염려자체가 불순종이고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하게 손상시킵니다. 그리고 염려는 불신앙과 인간적인 방법을 낳고 범죄를 유발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고 응답을 불러오고 은혜를 불러옵니다. 그런데 근심을 해서 남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근심하는 시간의 반만 기도했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 있다고 하실 것입니다. 염려는 장시간, 깊이, 진심으로, 뼛속 깊이 사무치도록 그렇게 하면서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건성으로, 가볍게, 간단히, 쉽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항상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귀가 어두워서 잘 못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도 물론 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령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는 모두 염려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화 되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이것이 다시 마음에 들어가서 주님을 향한 갈망이 염려하는 마음을 변화시키고 살 속 깊이, 뼛속 깊이 파고 들어가서 주님을 앙망하는 정신이 몸에 배어서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다른 인간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로 초청하시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염려는 성실하고 진실하게, 항상 염려하라, 쉬지 말고 근심하라, 범사에 걱정하라 그렇게 실천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고 마지막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뼈를 녹이고 우리의 살을 썩이는 깊은 근심 속에서 자라는 것은 패역과, 사람과 자신의 능력을 향한 원망, 나아가서 하나님을 향한 불평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삶은 황폐하게 되고, 깊은 염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깨뜨려진 관계, 그런 것들이 재고품처럼 쌓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왜 이런 곳에 낭비하여야 합니까? 제가 여러분과 교회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늘 목사가 설교 단상에서 큰일 났다, 관리 간사가 불났으니까 큰 일이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큰 일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큰 일이 교회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누가 사리사욕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무슨 그런 큰 일과 위기가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위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속에서 독버섯처럼 기생하고 있는 염려를 박멸시키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거기에다가 간구라는 포탄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면 어떻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아무도 모르는 죄악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면서 괴로워하고 염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토설하십시오. 언제 언제 내가 이런 죄를 지었고, 이 죄악이 나를 누르오니, 하나님, 주님 이외에는 내가 호소할 데가 없나이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십시오. 그 문제를 위해서 기도를 시작해서 간구의 폭탄을 퍼부어서 악한 세력들이 그것으로 송사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경제적인 문제나, 환경의 문제로 고통하십니까? 기도의 포문을 열 때마다 거기를 향해 집중포화를 날리십시오. 하나님, 이러 이러한 문제가 우리를 위해 해결되어야 합니다. ‘주님 말고 제가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도와주십시오, 주님 아니시면 이 일을 해결할 자가 없습니다’ 입을 열 때마다 폭탄을 퍼 부으십시오.
그 문제가 너무나 크고 각별할 때에는 기도의 기간을 정해서 집중공격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평범한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에는 평범한 기도 생활로 되지만,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을 때에는 특별한 기도 생활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낮에는 밥 먹고, 밤에는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으면 이러한 창조의 원리를 무시해야 합니다. 졸려도 눈을 비비고, 무릎을 꿇고,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서 주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하면서 매달려야 하고, 배가 고파도 금식해야 합니다. 그 때가 바로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염려를 향해서 집중포화를 붓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로 하여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문제를 가지고 열렬하게 기도하고, 기도의 폭탄을 퍼부어서 염려를 초토화시킨 다음에 우리들이 맛보는 만족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의 염려가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 우리는 거기서 평강의 주님을 뵈옵게 됩니다. 은혜의 주님을 뵈옵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뼈를 녹이기까지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그 위에 여호와의 깃발이 날리는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염려 대신 간구하는 기도의 폭탄을 퍼붓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2.평강을 주시는 기도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지난 시간에는 기도의 대적 중 하나가 염려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어떻게 염려가 우리 안에 있는 기도의 영을 고사시키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은 반드시 지난주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영을 고사시키는데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도와 간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일반적인 교통을 의미한다면, 자기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특정한 문제를 향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간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염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처럼 자기가 염려하는 문제를 기도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마음을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그 염려의 제목에다가 기도의 집중 포화를 퍼붓는 것만이 우리가 그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7절에서는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7절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이 몇 분이나 되는 지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오래도록 이 7절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우선 번역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하면’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모든 지각에 뛰어난’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평강이’,하나님이 지각에 뛰어나다는 뜻입니까, 평강이 지각에 뛰어나다는 뜻입니까? 그리고 그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그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들과 생각들을 지도하시리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이해가 명확해 집니다.
이제 해설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목표를 응답이라고 봅니다. 전쟁을 할 때 작전을 수행할 때는 대목표가 있고, 소목표가 있습니다. 전쟁의 가장 커다란 목적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적이고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적군의 부대를 섬멸한다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총을 들고 주력부대를 향해서 투입을 해서 전쟁을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나 다양한 작은 목표들이 세워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전쟁을 하되 보급로를 차단을 하면서 전쟁을 해야 지만 이길 수 있습니다. 전쟁은 여기서 하지만 수백 리 멀리 비행기를 날려보내서 철도를 끊고 다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적군은 여기 있는데 적군과 상관없는 곳에 가서 철도를 끊고 다리를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목표일 수 있습니다.
삼국지 같은데 보면 또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전쟁을 하는데 청승맞게 피리를 불면서 병사들을 모두 향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총칼로 하는데 피리를 불어서 싸움하려는 모든 군사의 마음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싸움에서 승리가 목표라면, 성을 빼앗는 것이 목표라면 피리를 부는 목적은 저 사람들을 향수에 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많은 목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목표에 있어서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께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응답을 못 받았다면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배 나온 사람이 다이어트에 대해서 아무리 얘기해봐야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응답을 얻는 것이지만, 지나가야 할 작은 목표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뛰어 넘어서 커다란 목표에 도달하려고 할 때에 실패할 때가 많고,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주님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만 해라” 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다 이루어 주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그 평화가 너희를 지도하시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굉장히 중요한 단어 하나를 만납니다. 평화 혹은 평강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희랍어로 번역하면 ‘에이레네’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평화는 평화인데 전쟁이 없는 상태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요새 무슨 일 있어?” 그러면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질문을 받은 사람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실직을 했다든지, 큰 교통사고가 났다든지, 집안에 우환이 겹쳤다든지 그런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아니 별일 없는 데.” 이것은 단순한 peace, 평화입니다.
여기에서의 평강은 사고가 나지 않은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는 물론 아니고, 적극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커다란 양심의 갈등을 느끼면서 고통하지 않는 상태를 평화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기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 화목한 관계로 말미암아서 찾아오는 적극적인 평화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글을 쓰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니까, 회심하고 난 후에 에드워즈에게 일어난 커다란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 자연의 만물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소심하고 똑똑한 젊은이였기 때문에 예민했을 것입니다. 그 고백 속에서 자기는 제일 무서울 때가 천둥 번개가 치고 억수로 비가 쏟아질 때라고 합니다. 그때 그렇게 무서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미국에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미국은 모든 것이 우리보다 큰 것 같습니다. 언젠가 신문에 서 보니까 바람이 불어서 아파트 앞을 지나던 사람이 1m 정도 공중에 떴다가 넘어졌다고 합니다. 진짜 바람에 불려 날렸는지, 쓰러져서 바람에 날려갔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신문에 났습니다. 미국은 크기가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 막 집으로 도착했는데 뭔가 놓고 온 것이 있어서 차를 세워두고 옆 동네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토네이도, 회오리 바람이 지나갔습니다. 와 보니까 옆에 나무로 지은 집들은 다 부서지고, 짚차가 슬라브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비가와도 조나단 에드워즈가 무섭다고 했을 땐 아마 무서울 정도로 억수로 쏟아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섭고 두려웠는데 하나님 앞에 회심하고 나니까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예전에 그렇게 두렵게 느꼈던 천둥과 번개 속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천둥이 치는 날이면 가만히 앉아서 번개가 치면서 새까만 하늘을 가르는 광경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한없이 찬양이 솟아 오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 위엄,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에 무엇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회심한 이후에 그렇게 변화되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런 두려움을 느끼던 자연 현상에서 달콤함을 느끼면서 주님의 위엄과 영광을 찬양하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평강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 앞에 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양심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있는 상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다 그럴 땐 그것은 굉장히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다 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안에서 깊이 느껴지고,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내 안에 경험되는 그러한 관계 속에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할 때에는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고, 두려움도 없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든든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 앞에 계신 것이 느껴지고 그것이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신앙 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져야 합니다. 죄는 죄 자체를 짓지 않기 위해서 경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면서 그 사랑안에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죄를 많이 짓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죄를 지은 것은 없는데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체 핍절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차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의 관계에 대한 차이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의 그 평강을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아서 누리게 되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평화입니다. 그것이 온다는 것입니다. 염려대신 그것이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염려하는 바로 그 문제에 계속 간구의 포격을 퍼부으면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오는 데,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근심과 염려대신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 있어서 매우 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 도둑질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냐 아니냐고 묻는 다면 성령 충만하건 그렇지 않건 우린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공무원이 매일 기도하는 것입니다. 동사무소에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봉투를 받아야 되나요, 받지 말아야 되나요. 그는 응답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응답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걸 뭘 기도하느냐, 그것을 기도하는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신앙이라고 이야기 해 줬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말고 다른 것도 성경에 나와있지 않아도 이런 것은 쉽습니다. 주일날 동창회로 노래방에 갈 것인가, 11시에 예배에 나올 것인가. 이것은 성경에 없으니까 기도를 해야겠습니까? 성경에 명백히 나와 있지 않아도 성경의 정신에 너무나 명백하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통닭집을 할 것인가 오리구이 집을 할 것인가, 방배동에 가게를 열 것인가 사당동에 가게를 열 것인가, 취직을 할 것인가 사업을 할 것인가, 이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금년에 대학에 보낼 것인가 재수를 시킬 것인가, 이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의 정신에 의해 조명을 해도 정확한 정답이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게 정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해라 그러시겠습니까?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지 않는 한 나이 차면 시집 장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않 습니까? 그렇다고 늦게까지 못간 사람이 불순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시에 두 남자가 나타 났습니다. 그런데 양 쪽 모두 내가 좋다고 시집을 오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불교신자이고,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 기도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둘 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별로 이고 한 사람은 열심이면 한 번 생각해 볼 만 한데, 두 사람 모두 신앙이 좋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시집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또 문제는 이런 경우에는 니가 알아서 하는 거다 라는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를 하다가 마게도냐로 가게 됩니다. 아시아로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마게도니아에 있는 영혼들만 영혼이고, 아시아에 있는 영혼들은 영혼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시아로 가서 사도 바울이 돈을 벌겠다는 것입니까, 무슨 명예를 얻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동기는 순수했습니다. 아시아로 가서 중국쪽으로 가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요? “성령이 막으셨다” 성령이 막으셨다는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애쓰기 이전에 하나님이 보내고 싶은 곳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거기서 기도를 하지 않고 결정을 했겠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굉장히 기도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애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막으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경에 명백한 지시가 나와 있지 않거나, 한걸음 양보해서 성경에 비추어서 선악을 판단 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점심을 먹을 때 집에 올라가서 먹을까 아니면 나가서 자장면을 한 그릇 먹을까 그런 것까지 응답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아야 하는데 성경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지도 않고 , 또 우리가 무엇인가 성경의 정신에 의해서 판별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성경에 명백하게 나와있는 문제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랬을 때에 둘 중에 하나이면 별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대해서 강렬하게 끌리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가질 때 그때에는 불순종을 하든지, 순종인지 불순종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위탁과 주님과의 관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결국은 번민으로 이어지고 염려로 이어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희열과 기쁨이 솟아나는 그런 생각들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을 때는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와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그 염려가 되는 문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포화를 퍼부으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일단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면 우리들이 무엇인가 정확하게 분석하고 판단할 힘이 생기게 됩니다.
대개 시험에 깊이 든 사람을 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 시험에 깊이 들고 마음이 온통 염려와 근심에 빼앗기게 되면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옆에서 사람들이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넋이 나간 사람 같습니다.
여기에 맑은 호수가 있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입니다. 그 호수가를 산책하면서 그 호수를 들여가 보면 굳이 호수가 숲을 바라보지 않아도 호수만 쳐다봐도 호수 주위에 어떤 나무들이 서 있으며, 산이 어떻게 이어져있고, 하늘은 맑은 지, 흐린지도 알고, 하늘에 날아가는 새까지 물위에 그대로 비칩니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치기 시작하면 그 물결치는 호수의 수면을 들여다보고는 호수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판단한다고 할 지라도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통사고를 내면, 만약에 이것이 컴퓨터 게임이라고 하고 비디오 테잎을 거꾸로 감듯이 다시 200m 전에서 운전하라고 하면 사고 낼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판단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판단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주일날 교회를 가야 하는데 친구들이 놀러를 가자고 전화를 했을 때 아무 생각없이 눈을 감고 있으니까 발이 자동적으로 움직여서 교회로 온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판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살아온 인생을 가만히 지켜보면 판단하고 선택할 수많은 기회가 있는데, 잘못 선택하고 판단한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지금도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장 커다란 이유는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그 먼 후일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때에는 잊어버렸던 옛날의 일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면서 과거가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왜 그렇게 살았을까? 왜 거기서 벗어 나오지 못했을까? 그런 후회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오고 나니까 무언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다시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염려하는 문제들을 그대로 방치시켜 놓으면 염려가 계속 자라면서 우선 우리의 마음을 지배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근심 걱정 많은 사람이 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이 정말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지배되는 것입니다. 모든 판단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 앞에 염려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파멸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마음속에서 염려를 방치해 두는 것은 유혹을 방치해 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혹 받는 마음을 방치하면 어찌하든지 범죄에 이르지만 염려하는 마음을 방치하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은혜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은혜는 두 가지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객관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호의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교제의 감각을 유지하며 사는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런 은혜를 다 말려 버립니다.
그러면 사단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신령한 성품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 할 수 있는 신령한 은혜를 우리에게서 모두 말려 버린 다음에, 마귀가 그 상태에서 그만하고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의 은혜가 모두 말라 버리고 나면 정항군이 모두 사라져 버린 성을 점령하는 것처럼 그의 인격과 삶을 죄가 지배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런데 그래도 은혜가 남아있는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죄를 들이밀 때 거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가 남아 있으면서도 엉겁결에 범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닙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러 온 여러분들이 옆 사람 지갑에 손 댈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유혹을 하면서는 가책을 받지만, 그러나 염려를 하면서는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염려한 것 때문에 깊이 회개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것들이 들어와서 은혜를 모두 말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두 말리고 나면 유혹에 저항할 힘이 없습니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이치들을 잘 이해하고 지혜로와야 합니다.
유혹이 가는 방향도 뻔하고 우리 안에 있는 염려가 우리를 데려 가려고 하는 방향도 너무나 뻔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기도의 가장 큰 영광은 응답을 받는 것이지만,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평강을,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것입니다. 평정과 평강을 먼저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걱정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는데.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 내가 안정을 누리고 평정을 누리는 데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보여주고 잇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염려되는 그 문제를 향해서 집중적으로 간구의 포격을 쏟아 부으면 그것이 응답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불행은 주위에서 수많은 환경과 사람들이 그 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 교묘하고 치밀하게 작전을 세워서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기 보다는 우연한 선택의 착오입니다. 거기에서 기인하는 것이 많습니다. 한번의 잘못된 선택이 그 사람을 두고두고 따라 다니면서 인생 전체의 모양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그 다음엔 그 선택이 잘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게끔 우리를 계속 데려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이 세상에 있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산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신령한 단어로 여러 가지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충만해야 된다. 성령 은혜 없이는 안된다. 모두 이야기가 됩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의 인생을 정말 행복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우리들이 언제나 평정을 누리는 상태에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이 지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강과 평안은 단지 다툼이 없는 상태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뜨거운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오는 평화입니다.
북한과 우리 나라 사이에 지금 전쟁이 없습니다. 평화가 왔습니까? 평화라고 하지 않습니다. 휴전 상태에 있습니다. 평화가 되려면 철조망을 다 뜯어버리고 남과 북의 동포들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남쪽의 잘 사는 사람들이 입을 것 먹을 것 퍼주면서 두끼를 먹어도 우리 함께 살자, 그 뜨거운 현장이 평화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혹시 남과 북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징벌 상태에 있지는 않고, 내가 마음이 강팍해져서 하나님 앞에 도전장을 내놓고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느껴지는 상태도 아닌 그런 상태입니까? 그런 상태에 있으니까 기도를 해도 우리의 기도가 잘 되지 않고, 염려는 쉽게 들어오고 영적인 사고 속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은 항상 잘못되고,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올바른 판단으로부터 멀어진 판단을 내리기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하지만, 그 문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 사이에 평화가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문제를 항상 간구의 제목으로 삼으면서 집중적으로 기도의 포격을 퍼부어서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런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려 본 적이 이죠? 저는 그런 적이 참 많습니다. 어떤 문제와 깊은 갈등, 고통 속에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과의 놀라운 평화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죠지 위필드가 무어필드라고 하는 곳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한 회심을 체험하고 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가짜다 너무 많은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죄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썩은 달걀을 가져와서 그 설교자에게 퍼부은 것입니다. 닦아 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오물에 뒤집어 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자는 말하기를 자기는 그때가 너무 좋았다는 것입니다.
너무 좋고, 그뿐만 아니라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서 머리에 탕하고 맞더니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것입니다. 자기만 맞은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죄인인 어느 노동자도 한 대 얻어맞았습니다. 그 사람도 같이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그 설교자는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영혼들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 얻어맞아서 피를 흘리는 형제가 그 광경을 보면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머리가 성했을 땐 주님의 은혜를 몰랐는데 머리가 터지고 피가 쏟아지면서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거기서 주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설교자는 그때가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썩은 달걀 세례를 받고, 죽일 놈이라는 소릴 들으며, 주먹만한 돌멩이가 날아와서 머리가 터지고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그 순간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설교자는 왜 그 순간이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완벽한 평화, 그것이 모든 상황을 이기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염려가 생길 때, 그 염려를 향해서 집중적으로 간구의 포격을 퍼부으면 응답이 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평강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정말 현명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목양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저렇게 선택을 하면 불행이 뻔히 보이는데 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보입니다. 훤히 보입니다. 여지없습니다. 몇 주,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나가면 그것이 옳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것이 훤히 드러납니다. 신령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평정을 누리고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민감하게 되고, 민감하게 되면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많이 하고 결정을 했다고 해도, 많이 했다고 그러는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워낙 마음의 상태가 평강이 없고 엉망진창이었던 사람이 많이 기도했다고 해서 이 평강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평강을 누리고 잇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그런 평강을 다 잃어버린 사람이 금식 기도하는 것보다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신통력이 아닙니다.
가끔은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 도저히 안될 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서로 맞춰 보고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잘 부탁해야 합니다. 이상한 사람에게 부탁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인간이 이 땅에 디디고 살아가는 한 어떻게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염려는 안 할 수 없는 데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서 포격을 퍼부어 평강으로 바꾸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염려를 붙들고 은혜를 모두 말리고 유혹과 죄에 대한 저항을 모두 잃어버린 비무장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여러분들이 선택할 일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재밌는 것은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염려하는 사람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염려가 많은 사람이 아침에는 테니스 치고, 점심에는 놀러 다니고, 다음에 오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밤에는 영화 구경하고 그러겠습니까? 염려가 많은 사람은 행동이 갑자기 줄어듭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의욕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면 자신이 그 현장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항상 그 대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것 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치가 자동차와 같습니다. 자동차가 천천히 달릴 땐 운전수에게 모두 보입니다. 거의 120-130 각도로 다 보입니다. 100-150㎞/h, 180㎞/h 이상으로 달리면 하나도 보이지 않고 가운데만 조금 보입니다. 너무나 빨리 달리기 때문에 다른 쪽은 볼 수가 없습니다. 걸어다니면 모두 보는 것입니다.
염려를 많이 하면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그것 하나밖에는 없는 것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염려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닮은 면이 굉장히 많습니다. 처음에 스치듯이 어떤 염려가 하나 주어지고 그것이 점점 크게 부각이 되어서 우리의 모든 지각을 끌어갑니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염려하면 팔다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머리가 아픕니다. 왜? 이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논리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논리와 이해를 통해서 해결점을 얻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찾아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안됩니다.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포기를 하면 오히려 염려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를 못하고 집착을 하면 계속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염려하는 그 문제를 향해서 염려하는 대신 기도의 집중 포화를 퍼붓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는데 그 평강이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 평강입니다.
교회를 방배동으로 옮기는데 갑자기 이곳으로 옮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창세기 34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교인들이 사람 사람마다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저를 찾아와서 “목사님,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그러는 것입니다. 갑자기 마음에 검은 구름이 확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최악의 생각이 막 생각나는 것입니다.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돼” 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집에 앉아 낙서나 하면서 “어떻게 할까?” 그랬으면 이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기도하자.”하고 1주일을 기도했습니다. 많이 나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교인들이 전부 이렇게 교회룰 이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요, 부르심이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공유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만 마련되면 갈 수 있다 생각했던 것이 돈 이외에 다른 변수들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늘 말하듯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경제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여러분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첫날 간절히 기도하는데 누가 와서 “상황이 이랬는데 나아져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걱정마십시오, 목사님.” 이렇게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상황이 변한 것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방배동에 올 수 없는 상황은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계속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 나니까 이상한 일이 생겨났습니다. 어저께까지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서 “신중하게 생각하세요.”라는 그 말이 가슴을 쾅쾅 때리면서 지나갔는데, 모든 상황과 환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근원을 알 수 없는 평화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평화가 밀려옵니다. 이것이 나만의 간증이겠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불안하고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데 이상하게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평화가 확 밀려옵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제가 인생을 살면서 창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했습니다. 공부를 좀 하고 갔다고 가서 신학교에 원서를 냈는데 떨어졌습니다. 저는 제가 수석으로 입학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시험을 봤는데, 그때 자존심을 상하면서 그 학교에 원서를 집어넣었는데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목회를 하라고 하셨는데, 자존심 상하면서 이런 학교에서 수석 입학하면 명예가 될까해서 원서를 냈는데 떨어졌습니다. 교회를 가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정말 불러 주신 것이 맞는지. 교회에 들어가서 5분쯤 기도했는데 마음속에서 ‘너 왜 우니?’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엔 웃으면서 마음의 평강이 왔습니다. 떨어졌어도 무슨 길이 있나보다 하고 학교에 다시 가봤는데 면접을 보지 않아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약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입학 할 수 있다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나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서 등록을 했습니다.
지금 떨어졌는데 왜 평강이 오는 걸까요? 인간의 머리로 추리가 되고 논리가 세워집니까? 이해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모든 이해를 초월합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기도해서 하나님의 평강을 누려 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확고하게,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이렇게 평안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진짜 염려와 근심 속에서 한없이 고통해야 할 사람인데 기도 포격을 퍼붓고 나니까, 집중 포화를 퍼붓고 응답을 해주셨기 때문에 평화가 왔다면 이것은 모든 이해를 초월한 것이 아닙니다. 이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평화가 밀려옵니다. 평강이 밀려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결혼하기 전에 인생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옆에서 많이 기도해 준 성도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제가 일체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니까 너무 잘 아십니다. 어느 날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깊이 낙담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그 성도님이 내 손을 잡으면서 “집사님,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염려 마시랍니다. 주님이 인도하신 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님의 인도함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좌절되었습니다.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기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것과 꼭 같은 것을 느끼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불안할 때 같이 불안하고, 평안 주실 때 평안을 느낍니다. 이것이 성도의 영적 교통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님이 기도하면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이 밀려옵니다. 약속입니다. 그 평강이 왜 밀려왔는지 따지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연결이 안됩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걸 한참 살고 보면, 그때 밀려왔던 평강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가 많도다
그래서 이렇게 염려에 간구의 집중 포화를 퍼붓고 근심을 평강으로 바꾸어 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미쳤다고 말합니다. 근심을 많이 하더니 돌았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 평안한지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고, 그것을 모두 설명 할 수 없지만, 걱정과 근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진실이지만,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는 것도 진실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평강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다.
여러분, 염려와 근심 속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뼈를 말립니다. 우리의 미각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우리의 모든 육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염려하고 여러분들의 뼈를 썩이고 있는 그 문제를 향해서 염려와 근심으로 날을 보내지 말고 뜻을 세우고 간구의 포격을 퍼부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거나 소원했던 사람들이 자기의 염려하는 어떤 문제를 놓고서 집중 포격을 퍼부으면서 무릎으로 매달리다 보면 하나님께 집중된 삶을 살게 됩니다.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씨름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성찰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일도 가서 그 고통스러운 문제에 포격을 퍼부어야 하기 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기도의 영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평화를 찾게 됩니다. 평강을 주십니다. 기도 속에서 이런 평강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너희의 마음들과 생각들을 지키시리라.”는 복수로 쓰여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요동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를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가슴이 저미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눈물이 채 마르기 전에 인간의 육적인 욕심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기도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정말 순전하게 욥과 같이 고난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막 녹습니다. 그 흐느낌이 채 살아지기도 전에 그것 때문에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생각이 솟아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도 너희 마음을 지키라.”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핍박하는 남편입니까? 주님께 부여받은 이 사명이 십자가 짐 같은 고생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지 않는 자기 자아. 성령의 역사가 그칠 때마다 통제할 수 없이 일어나는 이 옛 사람, 옛 생각, 옛 욕망. 이것이 최대의 십자가 짐 같은 고생입니다.
어느 성도가 통곡하면서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죽어, 죽어.”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기도를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미움을 품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그 성도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는 그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한 것입니다. “제발 좀 죽어라, 날 위해서 죽어라.” 얼마나 우리의 옛 사람이 살아납니까?
야곱처럼 자기의 재주대로 살면 이미 다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는데도, 또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고 싶은 옛 사람의 생각. 자기를 위하려고 하는 이욕들. 이런 것들이 끈임없이 솟아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십자가 짐 같은 고생입니다.
여기에서 이기는 길은 이것보다 더 큰 힘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굴복을 하고 꼼짝을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갈등하는 수많은 마음, 요동치는 우리의 생각들을 사로잡아서 그것으로 하여금 가야할 길로 가게끔 움직여 주는 것이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우리의 정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의 감동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야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위해 살고 하는 쪽으로 마음을 움직여 나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성경에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그 평강이 너희의 마음들과 생각들을 지도하시리라.”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평강에 의해서 지도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평강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면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내 마음이 하나님의 평화에 의해서 통제됩니다. 마음속에서 갑자기 강팍한 마음이 솟아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통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지배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염려해야 할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가득차게 하고, 그 평강이 비록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이라 하지만, 그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통제하고 지배하면서 가야 할 길로 가도록 우리를 움직이는 원천적인 힘이 결국은 기도와 간구입니다. 늘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의 생활을 유지하고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가 염려하는 문제에 대해서 집중 포격을 퍼부을 때, 그때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주님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주인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는 바를 따라 삶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근심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심령이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뭐가 근심이고 기쁨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거나, 워낙 뛰어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개인에 대해서는 염려할 것이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사람일 것입니다.
근심이 있지요?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보다도 그 염려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결말은 그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여러분 안에 얼마 남지 않은 은혜도 모두 말라 버릴 것이고, 죄와 유혹에 대한 저항을 모두 잃어버릴 것입니다. 결국은 점령당할 것입니다. 끝이 뻔한 결말을 다 알면서 계속 근심하고 염려하면서 기도 생활을 대신 하겠습니까? 아니면 뜻을 세우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 하시렵니까?
우리들이 평범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평범하게 기도 생활하지만,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특별하게 기도 생활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끊임없이 여러분 속에 있는 은혜를 고사시키는 어떤 특정한 염려를 향한 특별 포격 기간을 정하면 어떻겠습니까?
평소엔 새벽기도 안 하던 사람도, 여기서 미적거리면서 결국은 이 염려에 의해서 은혜를 말려 버리고, 죄에 대한 저항을 잃어버리고, 여기에서 무너질 것입니까? 아니면 오히려 계기를 삼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고 그래서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평화를 되찾고, 모든 이해를 초월한 평강을 경험하고 우리의 염려했던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 획기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것입니까?
여러분 이제 정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시험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뜻을 세웠다”입니다. 염려의 정체가 무엇이고 어떻게 기도해야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염려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두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이 여러분들이 선택해야 할 마지막 일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그 염려하는 시간보다는 기도하는 시간이 훨씬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새벽기도 안 나오는 분들은 1주일이라도 좋으니까 뜻을 정하고 나오십시오. 저녁때 집이 멀어서 교회에 들르지 못했던 사람도 1주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1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염려가 그렇게 큰데 말입니다.
염려하면서 “그 일만 해결되면 뭐라도 할 텐데.” 그 “뭐”가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생명을 건 것처럼 매달리십시오. 주님이 여러분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시고, 그 염려가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깊은 찬양이 울려 퍼지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허다한 증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이유이고, 마라와 같은 쓴 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광야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고, 그 한숨이 변해서 노래가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아야 할 기도의 후예들이 아닙니까?
3.영혼이 피곤할 때 기도하라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2:7)
지난 두 주에 걸쳐서는 염려가 있을 때 기도 드려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영혼이 피곤할 때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요나 선지자는 불행히도 불순종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2장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다가 그만 풍랑 이는 바다 물결 속으로 던져졌을 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하나님 앞에 고백한 시입니다.
이 요나서는 네 장인데, 첫 장은 ‘불순종하는 요나’, 2장은 ‘회개하는 요나’ 입니다. 3장이 ‘다시 돌아가는 요나’이고, 4장은 ‘불평하는 요나’로 소제목을 붙일 수가 있겠습니다. 어쨌든 2장에서는 이 요나의 회개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우리들이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요나의 수준에서 보면 상당히 깊고 진실한 회개를 이 물고기 뱃속에서 하게 됩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요나는 말하기를 ‘내 영혼이 피곤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기억하였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이런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이 피곤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은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학생이나,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이나, 목회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영혼이 피곤한 날이 있습니다.
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약사 자매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자매가 어느 날 몸이 아파서 교회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 자매에게 그랬지요. “남보고는 낳으라고 약을 팔면서 약사도 몸이 아픕니까? ” 그랬더니 그 자매가 답한 말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영적 침체에 안 걸리나요?”
이 세상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 강함과 약함은 정말 백짓장 한 장 차이입니다. 여러분, 오늘을 지내면서 혹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이 없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영혼의 처지, 신앙 생활을 돌아보면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때가 없었습니까? 저는 종종 하루에도 몇 번씩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시간들을 보내곤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주님이 세상에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처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는가하면, 어떨 때는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섬세한 발걸음으로 매순간마다 손잡고 놓지 않으시면서 인도해오신 발자취를 돌아보면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이제껏 산것도 주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어찌 나 같은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없으셨다면 이렇게 세심한 발걸음으로 인도 하셨으랴 하면서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는, 영혼의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때가 없습니까? 우리는 이런 때를 자주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기라성과 같이 한 시대의 교회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이 사실 은밀한 순간에는 얼마나 연약한 사람들이었는지를 읽을 때마다 커다란 위로와 용기를 얻곤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사자처럼 보였고 정말 용사처럼 보였지만, 피묻은 칼을 내려놓고, 피묻은 갑옷을 벗어놓고, 하나님 앞에 단지 한 사람의 자녀로 무릎을 꿇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들이었는지 아십니까?
존경하는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젼은 말년에 통풍으로 심하게 고생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통증이 심하고 아픈지, 50이 넘어서 그린 그의 초상화를 보면 입술이 하얗게 타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기를 ‘매일 밤 악마가 칼을 들고 와서 내 뼈를 후벼판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렇게 고통 가운데 지냈습니다. 정말 한 시대를 뒤흔들어 놓은 사자와 같이 용맹스럽던 사람들도 용맹스러움과 연약함 그 사이에 얼마나 미세한 차이밖에 없는지 우리가 볼 때에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이 이렇게 피곤할 때가 있다는 것이 우리와 같은 범인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사실이라는 것을 언제든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 며칠 동안 글을 쓰면서 네 번 이상 읽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주의 깊게 몇 장 들춰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인디언들 앞에서 말씀을 들고 설 때는 사자와 같던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쉽게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 하나에 낙담하고 처절하게 부서진 가슴을 안고 숲 속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밤에 그 산에서 내려오면서 활기를 얻었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역시 이 강하고 약함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존하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상태에 달려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강함과 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특히 강해 보이는 사람들이 정말 약한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의 생애를 보면서도 저는 설교자로서 그런 그림들을 봅니다. 선지자들은 심판을 눈앞에 둔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 경고의 음성, 돌이키도록 그들을 부르는 음성을 외칠 때에는 사자와 같이 용맹스러웠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두려워했습니까? 칼을 가진 장사나 권력을 가진 귀족을 두려워했습니까? 왕권을 두려워했습니까? 수많은 백성들의 이목을 두려워했습니까? 그들은 아무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증거하고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쇠로 만든 나팔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피를 토하듯이 그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외치고는 돌아서서 흐느껴 우는 선지자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모스하면 받는 인상이 호세아와는 정반대의 인상을 받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대의 사람입니다. 호세아는 뭔가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한 그러한 애정이 있는 사랑의 선지자, 그래서 이 사람은 구약의 사도 요한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지지만, 아모스는 다릅니다.
아모스서를 시작하자마자 아모스는 처절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탄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느 날 제가 아모스 5장을 읽으면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는 아모스의 애가라.”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피를 토하듯이 하나님의 말씀, 임박한 주의 진노, 불의한 백성들에 대한 공의로운 하나님 아버지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진노의 심판을 말한 후에 5장을 써 내려갈 때에는 ‘통곡 속에서 지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선지자도 역시 ‘피곤하여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가 경험하고 있는 영혼의 피곤은, 아까 말했던 거룩한 종들이 경험한 그러한 영혼의 피곤과는 약간 종류가 다른 피곤일 것 같습니다. 그가 왜 2장에서 영혼의 그런 극도의 피곤을 느꼈을까요? 그는 불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주님이 커다란 물고기 속에 그를 집어넣으셨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는 물이 들어와서 물풀들이 자신의 목에까지 차 오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속에서 수 없는 죽음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닷물에 자기를 던져라 라고 말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니느웨에 가서 그 백성들의 회개를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차라리 내가 물 속에 던지워져 죽어버리리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물고기 뱃속에 그를 놓아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는 비로소 죽음의 공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극도로 자신의 영혼이 피곤하여 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충만한 가운데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피곤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모든 소망이 끊어지는 것 같고, 양심의 송사를 받으며 아무 힘이 없는 그러한 영혼의 피곤의 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자주 피곤을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의 불순종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아니면 우리의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패역은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오늘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매 순간 순간을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과거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쌓이게된 우리 속에 깊이 남아있는 패역들이 고쳐지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패역의 저수지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오수를 막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막아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 내면세계에 있는 뼛속 깊이 박힌 패역들이, 순종하는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은혜의 세계 속에 자라가면서 서서히 말라붙어 우리가 온전히 그 패역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리고 불순종하여 오늘 영혼이 피곤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서 우리의 영혼이 피곤해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영혼이 피곤할 때 우리는 곤고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심령은 즉각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모든 인격의 사령부인 우리의 마음은 그 피곤함이 우리의 모든 피 속으로 피곤함이 흘러 들어가서 우리의 전 삶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판단이 흐려지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영혼이 피곤할 때, 심령이 곤고할 때가 없습니까? 기도하려고 나왔지만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려고 하지만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때가 없습니까? 무릎을 꿇어도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자 하여도 도무지 기도 속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뱅글뱅글 돌면서 도무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진전이 없는 영혼이 피곤할 때가 없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불행히도 이렇게 영혼이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피곤할 때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때라고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 요나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그렇게 피곤할 때에 어떻게 기도에 이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묵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이 요나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기억하였더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추리력이 짧다 하더라고 이 선지자가 “ 내가 여호와를 기억하였다고” 말했을 때, 무엇을 기억하였을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선지자는 여호와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묵상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청교도가 말하기를 묵상은 머리 속에 있는 성경 지식, 깨달음을 가슴속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이 묵상을 우리들이 늘 생활화해야 합니다. 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하나님의 성품을 자신에게 관계된 것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상은 필연적으로 그런 방식을 띠게 되어 있습니다.
자,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하는 사실을 묵상할 때에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묵상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만져 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마치 바람이 지나 가는 것은 볼 수 없지만, 흔들리는 빨래를 보며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여러분들이 경험한 사랑의 사실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뿐입니다. 보았거나 직접 경험했거나 했던 것을 통해서 또 들었거나 자신이 깨달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느낄 뿐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연결되지 않으면 그 성경의 본문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진리에 있어서 체험을 통해서 진리를 아는 것이 결국은 더 많은 성경지식의 진짜 의미를 습득하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선지자가 불순종하며 다시스로 갈 때 그를 치셔서 풍랑 이는 바다에 던지우게 하시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는 거기서 견딜 수 없는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아마 이 선지자에게는 더 깊은 괴로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자신의 영혼이 그렇게 피곤할 때 자신의 인생을 체념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나를 바다에 던지라하며 포기하던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불순종하기 위해서 선지자는 강퍅해 지는 것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대단히 소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질대로 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피곤해지는 침체가 올 때, 두려운 것은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마음으로 가지를 않고 마음을 곧게 세우고, 하나님 앞에 강퍅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강퍅한 심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강퍅한 심령에는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자포자기한 마음이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내가 곤고한데 더 나빠지랴 하는 막가는 심정입니다. 분명 선지자는 이 정도의 불순종으로 보아 그러한 심령의 강퍅함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성질을 부리고 토라지면 자신의 손해이지, 하나님께 손해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곧추 세우고 대드는 듯한 태도를 가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같으면 단칼에 목을 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심령이 가난해질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적절히 다루십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성질을 부리고 자기 마음대로 토라지는 것이 얼마나 쓸 모 없는 것인지 여러 번 느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릅니다. 그리고 강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다시 그 풀다가 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풀려고 했을 때는 어느 지점인가 하면 조금도 진전되지 않은 강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토라졌던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낭비요, 결국은 돌아와야 할 길입니다.
이 선지자가 그 모든 과정을 경험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택한 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일, 그리고 자기에게 보여주신 사랑, 자기를 이제껏 인도하시고 또 불순종 가운데서도 완전히 징벌하여 끝내버리지 아니하시고 이 물고기 뱃속에서라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 자신을 기억하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도가 안 될 때에는 하지 마십시오.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너무 안될 때 한시간 두 시간 엎드렸다가 허무하게 돌아가지 말고, 먼저 마음 다스리기 작업부터 먼저 하십시오. 시편을 소리내어 천천히 읽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딱딱했던 마음들이 부드럽게 녹아집니다. 그래도 잘 안 되는 것 같으면 책을 읽으십시오. 딱딱한 책은 말고,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느껴질 수 있는 그런 감동적인 책을 읽으십시오. 또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조차 힘들 때는 성경을 낭독한 테이프를 들으십시오. 좋은 사람의 간증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더 좋은 방법은 설교 테이프를 듣는 것입니다. 기도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이 딱딱한 상태에서 한 시간을 기도하느라고 애쓰는 것보다는 마음이 깊이 녹아진 상태에서 10분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우리의 마음과 삶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설교 테이프를 들으십시오. 그것으로 큐티를 하십시오. 자신의 마음이 곤고하니까 뭔가 그런 계획을 세울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조용히 테이프를 들으십시오. 그러면 천천히 집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말씀과 함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전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기도할 수 있으리만큼 녹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변형된 묵상의 한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워낙 진리를 아는 지식이 뛰어나고 복음에 관한 지식이 충만한 사람들은 늘 묵상 속에서 살았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를 가리켜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는 일평생을 발뒤꿈치를 들고 산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남들이 보면 그가 금방 하늘로 빨려 올라갈 것 같은 신령함 속에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특별한 사람들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생애를 봐도 그런 기록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는 항상 명상 속에 살았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명상 속에서 말입니다. 66권 성경을 그 중세 시대에 거의 외웠다고 하니까 대단한 사람이었지요. 처형당하고 그의 감옥 속에 남은 성경에는 모든 쪽에 새카맣게 메모가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가 깊이 묵상하는 장면을 보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과 신비함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정말 열심도 없이 주일 예배에만 간신히 나와서 수요예배나 새벽예배, 금요기도회의 필요성을 하나도 못 느끼는 그 상태는 영혼이 피곤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가사상태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숨은 쉬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안 읽힐 때는 안 되는데 그냥 읽지 말고 며칠 쉬십시오.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세우십시오. 예전에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가 밥을 잘 안 먹으면 어떻게 하셨습니까? 지독한 독감으로 며칠을 앓아 누워서 학교에도 못 갔을 때 귀한 고기를 사서 요리해 주십니다. 입맛이 떨어지고 나면 억지로라도 먹이기 위해서 애를 쓰십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밥으로 본다면 경건 서적은 반찬입니다. 밥맛이 너무 없을 때에는 반찬을 좋은 것을 찾아보십시오. 그래서 입맛을 돋구십시오. 입맛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묵상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자체를 가지고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속 사람이 피곤하게 되었을 때에는 묵상을 활용하십시오. 지금은 옛날보다 마음만 먹으면 옛날보다 훨씬 더 좋은 도구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일찍 일어나 약수를 뜨러 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까짓 것 몇 년 살면 없어질 그 육신을 위해서 그렇게 노고하는데 영혼의 피곤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합니까? 이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다 경험하신 것이 아닙니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리고, 주님 자신의 거룩한 성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그 분의 은혜로운 터치가 우리의 마음에 느껴질 때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우리에게 쉬운 일입니까?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실 때 우리의 기도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있는 기도를 뽑아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이 효율적인 기도생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잘 관리해야지 그렇게 내팽겨쳐 가지고는 기도고 말씀이고 경건이고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이 필요합니다. 활동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왜 못합니까? 왜 게으릅니까?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사람들이 뭘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먼저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고, 주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마음이 주님의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입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선지자는 죽음을 넘나드는 깊은 회개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심히 피곤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그 성품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경험되었는지를 더듬으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오늘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이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님 속으로 들어갔사오며 또한 주의 성전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히브리어 성경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선지자가 기도의 어떤 것을 기억했습니까?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여러분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주님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기도, 주님의 임재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기도는 여러분에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의 기도가 들어갔습니다. 당신에게로. 당신 속으로 내 기도가 들어갔습니다. 또한 성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쓴 이유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니고 있었던 이 성전 신앙은 하나님 임재 신앙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성전 속으로 자신의 기도가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속으로 자신의 기도가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기도는 인공 위성 같은 기도는 아닙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는 했는데 계속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착륙을 못하고 계속 돌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어떻습니까? 계속 부지런하게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이 교회도 가보고, 저 교회도 가보는데 항상 원을 그리며 돌지, 앞으로 나아가는 전진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선지자가 이 시 속에서 전심으로 자기를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 영혼이 매우 피곤할 때 주님을 깊이 묵상했더니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임재의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세계 속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 어떤 사람이 설교와 기도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거룩한 노인이 하시는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설교와 기도의 차이라고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항상 어렵지요.”
사실입니다. 저는 설교하면서 자신이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기도 속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거의 없는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 혼자만이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의 경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경험에 있어서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기도 생활에 있어서 대가라고 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어느 정도 나는 이제 성립했다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짜 기도의 대가가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기도 속에서 필요한 아름다운 어휘들을 사용하는 것을 가지고 대가냐, 아니냐 하는 것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의 어떤 형식이나 틀을 가지고 측정하는 것도 물론 아니고 기도 속에서 온 몸을 흔드는 열렬한 통성 기도냐, 엎드려서 중얼중얼하느냐를 가지고 대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만약에 기도의 대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언제나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기도, 주의 성전 속으로 들어가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견고한 기도 생활이 힘든 이유는 그 사람 자신이 거룩해져가는 과정 속에서 그만큼 함께 기도를 배워 가는 것입니다. 거룩의 진전이 없으면 기도의 진전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큰 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기도가 부럽지 않습니까?
오늘 이 선지자가 경험한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 기도, 성전 속으로 들어간 기도, 깊이 들어가는 기도, 주의 임재의 영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는 기도, 그것을 이 선지자가 경험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진수를 맛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정말 깊이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빨려 올라가고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 깊은 속으로 파고들어서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고 하는 확증, 이러한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묵상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오늘 이 선지자가 보여준 것 같이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부르짖는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2장에 나온 이 요나의 기도는 요약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3일 동안이나 물고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3일의 대부분의 시간을 죽지도 못하고 살수도 없는 처절한 고통의 순간들을 지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주의 선하심과 깊은 은혜를 묵상하며 기도했고, 그 기도가 하나님 속으로 주의 성전 깊은 임재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또 한가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절망 중에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기도, 절망 중에 하나님 임재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끈기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정말입니다. 마귀는 마지막 때가 될수록 여러분들의 숨통을 조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의 영혼을 죽이는 방법이 무언지 사단은 훌륭하게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말씀의 젖줄을 끊고, 기도의 호흡의 줄을 끊어놓기만 하면 여러분들은 아무 쓸 모 없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말씀의 은혜를 받아도 여러분들이 기도만 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면, 결국은 잘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기만 하는 사람들이고, 실패하면 결국은 그 하나님의 말씀조차 깊이 감화를 받으면서 들을 수 없는 망가진 사람들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훌륭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움을 찾아서 타락한 기독교 생활을 꿈꾸면 그들에게 있어서 기도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깊은 기도 속에서 산 사람들은 모두 외로움을 사랑하며 산 사람이었고, 깊은 기도 속에서 산 사람들은 끈질기게 자기의 기도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하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입증하였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경건의 세계를 지켜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시간에 깊이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서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잠시 앉았다고 훌떡 일어나서 가버리는 그런 스티로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말 끈기 있음, 하나님 앞에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이 환경 속에서 그는 수시로 밀려오는 바닷물과 물풀, 그리고 어쩌면 자신 속에 들어왔을 수도 있는 그 더러운 물고기의 분비물들을 온 몸에 맞으면서 견딜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그는 3일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끈기 있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성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소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이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연약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그런 연약함 가운데서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길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활짝 열어놓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시기를 기뻐하시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자 하는 자에게 기도의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끈기 있게 매달리는 자에게 감동을 받으시고 그에게 비록 불순종에서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피곤해졌다 할 지라도 다시 한 번 영혼의 소생함을 주시고, 그리고 생명의 길을 다시 한 번 걸어갈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피곤한 영혼을 숙명처럼 부여잡고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내일부터 기도하십시오.
4. 긍휼을 불러 일으키는 기도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1:41-42)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절망 속에서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내용을 가지고 앞 절에 말씀을, 40절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얼마나 절망적인 사람인지를 여러분과 함께 느끼려고 애를 썼고, 어느 정도는 주님이 성공을 거두게 하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문둥병에 걸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를 깨끗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린 이것이 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절망보다 무서운 것은 절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체념과 포기가 더 무섭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 사람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께 매달렸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중요한 내용 이였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절망 속에서 그 절망을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들 대신에 이 사람은 그 절망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희망을 찾았고, 그것이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예수그리스도께 부르짖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먼저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셨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는 말씀은 희랍어로 ‘스프랑 크니스데이스’ 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쉽게 말하면 만지면 터질 것 같은 어떤 아주 연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꽉 찬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Being filled with tenderness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서, 원래 ’스프랑 크니스데이스‘ 라는 단어는 창자가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기록된 단어와 마찬가지로 “민망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오늘 날 우리들이 느끼는 “민망히 여기다”라는 단어가 아니라 깊은 고통을 동반한 감동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복부에 인간에 영혼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문화적으로, 그래서 “가슴에다가 손을 대고 생각을 해봐” 만약에 이것을 그 사람들의 문맥에서 등가 번역을 한다면 “아래 배에다 손을 얹고 한번 생각을 해봐. 진짜 네가 말하는 것이 진심인지” 이렇게 번역을 해야지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배는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혼이 깃들여 있는 자리였습니다. 이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말로 번역을 한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애간장이 끓는 것 같이 불쌍했다.” 뭐 그런 정도의 뜻이 됩니다. 아주 굉장히 강렬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그 절망 중에 있는 그 사람, 온 얼굴에 하얗게 꽃이 피고, 그리고 코, 눈, 모든 것들이 거의 다 한데 달라붙고, 그 다음에 문둥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 독특한 고름들이 지저분하게 흘러내리는 그 사람, 다가가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을 쳐야하는 그런 사람이 자신의 절망을 받아들이지를 않고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간절히 부르짖었더니 그 부르짖음에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주목했고 그 사람을 보는 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그 마음이 되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여러분들은 늘 문학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에 썩 가슴에 와 닿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이 단어의 의미를 그림같이 한번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표현을 그럴듯하게 해도 가슴에 다가오지를 않지만 경험한 것은 표현을 하면 액면 그대로 다가옵니다. 자, 제가 이 강단에서 가끔 설교하는 주제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렇지요? 참된 신자의 특징은 ‘깨트려진 심령이다.’ 라고 말입니다. 다윗이 제사보다, 번제 보다 훨씬 뛰어난 제물이라고 믿었던 ‘상한 심령’ 그런 심령이 되어보신 적이 있는 분들은 이 “민망히 여기다”라는 말에 의미를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우리는 흔히 그런 경험을 가진 일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지만 하나님도 우리를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어째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깊이 녹아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아는 죄의식을 동반한 녹아짐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떠한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를 놓고 이 문제가 하나님에 도움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이제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하는데서 오는 그런 녹아짐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중에 어떤 분들은 그런 경험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상당히 많은 분들은 그런 경험이 한 두 번쯤은 있으실 것입니다. 인생에 어떤 위기를 만나거나 위기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번쩍’ 하는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영혼에 심히 위험한 상태를 깨닫게 해주셨을 때, 그때 이제껏 까지 내가 즐거워하던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은 다 내게 더 이상 기쁨과 즐거움이 안되고, 그리고 내가 지금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나의 영혼에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그리고 도울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 데 왠지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을 때,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의 도움을 포기할 수 없을 때, 그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셔도 우리는 많이 아파하면서 고통스럽게 회개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 하나님 한 분에게 고정되어 있어서 그래서 무엇인가 그 하나님 한 분에게만 고정되어 있고 하나님 한 분 앞에서만 해결 받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깊이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하나님 아니면 아무 해결이 없어서 그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제 정말 하나님이나를 버리셨는가. 불안한 마음과 하나님이 아니시면 누가 나를 도우랴. 주님이나를 도와주시겠지. 하는 이 두 가지 기대가 교차하는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을 가져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대면서 마음이 깊이 상한 마음, 그래서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경험, 그 경험 속에서 우리가 간직했던 마음이 바로 이 ‘스프랑 크니스데이스’의 마음입니다.
문둥병자가 그때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겼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이 문둥병을 절망적인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인생에 소망자체를 구호물자나 받아서 ‘배불리 오늘 하루 먹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긍휼히 그런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시지 않았던 매우 특별한 긍휼히 오늘 이 기도하는 문둥병자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에 차별인가, 사랑에 차별이기보다는 하나님께 간구 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은총을 베푸시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사랑에 차별이기보다는 특별히 간구 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가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움직인다는 말씀입니다. 기도가, 여러분,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그 찬송에 깃 든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찬송을 가슴 깊이 녹아 내리는 감동으로 부르는 사람은 주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서 주님께 나아가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지은 죄 때문에 당장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토라지거나, 하나님 앞에 대들거나, 주님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의심하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모른다 하셔도 나는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나를 쫓아 내실지라도 예루살렘을 바랄 수밖에 없나이다” 라는 마음, 그런 마음이 아까 그 찬송을 부르는 마음입니다. ‘집중된 마음’입니다. 그 찬송이 가슴에 깊이 다가올 때는 나에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 하나는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최고의 집중된 단 하나에 소원은 그분이 죄인인 나를 용납해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죄가 가득한 이 불결하고 더러운 죄인을 이유불문하고 용납해주셔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모든 관심사는, 관심사가 적어진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 마음이 ‘스프랑 크니스데이스’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만약에 우리를 향해서 그 마음을 가지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문둥병자를 향해 예수님이 가지셨던 마음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문둥병자를 바라보시면서 진물이 흘러내리는 위 눈까풀과 아래 눈까풀이 붙어버리고 그리고 눈동자도 흐르는 진물에 모두 범벅이 되고 코, 입, 귀는 떨어져나가고 머리도 빠지면서 흉하게 일그러져 나간 하얗게 꽃이 핀 그 문둥병자의 모습을 보면서 간구 하면서 자기를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모습을 보시는 순간에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그 자리에서 ‘스톱’하고 그 예수님의 마음 전체가 절망 속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그 죄인, 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 정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의 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좀 공상 같은 질문인지 모르지만 이런 질문을 짓궂게 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러면 예수님은 꼭 그렇게 절망 속에 기도해야지 만, 마음이 우리를 향한 그런 가슴 저미는 것 같은 그런 긍휼로 가득 차는가. 뭐 이런 쓸데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인데,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데, 따라서 모든 것을 느끼실 수 있는 분인데 지금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시는 분인데 왜 그분은,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절망 속에서 부르짖기 전까지는 우리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긍휼히 꽉 차는, 우리 한 사람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스톱’ 된 그런 긍휼히 가득 찬 마음이 안 드시는가. 그것은 이렇게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과정이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과정과 같은 과정인데 주님이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해서 느끼고 계시는 마음을 우리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일을 아주 기쁘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주님의 마음이 이 ‘스프랑 크니스데이스’의 마음이 되어서 부드러운 긍휼히 꽉 차서 만지면 터질 것 같은 아주 부드럽고 아주 간절한 긍휼의 마음이 되었다. 그런 마음을 불러오기 전에 절망 속에서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주님의 마음이 그렇게 변했다. 굉장히 유사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엇을 하게 하시느냐 하면,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훈련시키시는데 그 훈련시키시는 좋은 방법가운데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심정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교통’입니다. ‘영적인 교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민망히 여기시면서 긍휼히 가득 차서 가슴이 아픈 마음이 되기 전에 이 사람이 절망 속에서 주님을 향해 부르짖으면서 자기를 향해 그런 마음이 된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였고, 예수님의 마음은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한 문둥병자를 향한 가슴 저미는 것 같은 긍휼히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절망적인 상태 속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에 이러한 불붙는 긍휼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의 경험은 우리가 절망 속에 있을 때에는 절망의 정도가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 라고 하는 무력감을 마음속에 계속 불어 넣어줍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 있을 때에 절망스러운 상황도 문제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실상은 더 큰 대적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깊은 절망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도 결국 이렇게 자기밖에 없는 것 같이 터질 듯한 마음으로 우리를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계시는 주님의 심정을 깊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절망을 능가하는 열심으로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간구 의 태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에 쉽게 승복해버리고 그 절망 속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께조차 버림받아서 이제는 육신 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절망감이 가증 될 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더 많이 느슨해지게 되고 더 어떻게 나빠지겠는가 하는 자포자기한 마음이 생기면서 우리가 더욱더 죄악으로 흘러갈 수 있고 그리고 육신의 방종의 기회로 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아니하는 것은 특별한 죄입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부르짖지 않는 것은 결국 나중에는 더 커다란 영혼에 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처음 신앙을 가진 이제껏 까지 주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신앙이 이어온 모든 과정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과 자비가 어떠한 것인지를 배워오는 그러한 과정 이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절망적인 우리 자신의 상태에 눈을 뜨면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죄가 많은 곳에 역사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때조차도 우리를 용납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체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절망보다 더 커다란 그런 좌절로 우리 스스로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그렇게 경험하고 배워오면서 또한 기도도 함께 자라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서있든지 우리는 각자 살아서 지금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고, 우리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절망보다 더 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절히 간구하고 기도할 때 주님은 누구를 향해서든 이런 민망히 여기는 긍휼히 가득 찬 마음을 갖고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성품이 언제나 그분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쓰레기와 같은 죄인들임에도 우리는 주님이 우리 속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주실 때에 그때에 우리는 일평생 용서할 수 없었던 우리의 원수들을 진심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용서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을 보며 놀랍니다. 그리고 역시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안전하고 죄와 그리고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완악하고 강포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 속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부어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도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가득 차서 때로는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의 판단보다는 그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정서가 뭔가 그를 돕도록 만들어주거늘, 하물며 완전하신 그분이 우리가 우리의 고통스러운 형편과 처지를 간절히 부르짖고 그분께만 진정한 소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뢰기만 한다면 주님은 얼마나 더 우리를 많이 긍휼히 여겨주실 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절망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문둥병자가 자기 주위에서 이런 문둥병이 걸렸다가 누군가의 기도를 받고 나은 적이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이렇게 부정적인 질문을 하면서 ‘인생에 참된 소망을 이제 다시 완전한 인간으로 건강하게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이제는 내 인생에 매일매일 행복이 있다면 그저 자비심이 많은 그런 자선가들이 가끔 빈민가에다가 던져주고 가는 떡이나, 혹은 좋은 옷이나, 혹은 어떤 마실 것, 그런 것들을 어떻게 잘 챙겨서 오늘 하루 배불리 먹고사는 것이 내 인생에 행복이고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문둥이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했더라면 그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을 것이고 또 만났어도 간절히 부르짖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많은 문둥병자를 본 것처럼 또 그도 그 시선 앞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문제는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불붙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것이 우리를 향해서 쏟아 부어질 때, 우리는 해결 받기에 너무나 큰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인생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응답 받지 않으면 안될 결정적인 기도의 제목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응답될 수 없었고 응답되기에는, 실현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난관이 있기 때문에 포기했던 기도의 제목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한번 도전해보십시오. 그리고 이제껏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잘 살아보려고 애쓰고 수고한 것,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이런저런 기도들을 올리면서 응답을 간구 했고, 그런 것들에 대한 응답이 있었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이 근본적으로 실패에서 승리로 역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포기한 그 결정적인 기도 제목이 실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일생일대에 그런 기도의 제목들은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 그분의 주권 적인 역사, 그분의 강한 권능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저는 종종 혼자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요즘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야생동물을 포획하는 그 광경을 생각합니다. 저는 한번 직접 본적이 있습니다. 수렵을 하도 못하게 하니까 사람들이 이제 강력한 힘을 가진 덧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등산로가 아닌 깊은 산에 다닐 때는 진짜 조심해야합니다. 큰일납니다. 꼭 이렇게 이빨처럼 생긴 것인데 이렇게 벌려 났습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거기에다 어떤 고기나 먹이를 달기도 하고, 혹은 그런 것을 달지 않고 그냥 밟기만 하면 탕! 튀면서 발을 콱 조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조이도록 만든 정도가 아니라 날카로운 톱니처럼 그렇게 가른 쇠로 된 기구들이 밟으면 탕! 하고 튀어 오르면서 발목을 콱 집는데 한 1~2센티 푹 들어가게 찍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커다란 멧돼지 같은 야생 동물이 걸려도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막 몸부림치면 칠수록 스프링의 힘에 의해서 속살이 찢어지면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뼈 속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딱! 그 올무에 걸리면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가보면 대부분 그것을 나무에다가 매달아놓는데 덧을 매달고 얼마나 피를 흘리면서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는지 그 쇠사슬에 의해서 나무 둥치에 있는 그 껍질들이 하얗게 벗겨집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한 마리도 그것을 달고 달아나거나, 혹은 그것을 풀고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들이 이 문둥병자가 자기의 문둥병을 낫기를 원합니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처음서부터 끝가지 어차피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인간은 절망을 해야되는 상황인데도 절망 안 하려고 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만 희망이 있으면 하나님을 정말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찰스 피니’ 라는 전도자는 ‘죄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다.’ 정말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그 얼굴에 하얗게 꽃이 피고, 진물덩어리가 되어버리고, 옷까지 모두 흐르는 진물에 다 붙어버린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어느 정도 돕고 주님이 힘을 합해서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기대를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고, 안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처절하도록 예수님께만 매달리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주님이 그를 이 절망적인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주님에 그 기도할 수조차 없는, 기도하려고 깍지를 꽉 끼면 손이 짓무르듯이, 손가락 하나 두 개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그런 문둥병자가 깍지 손을 끼고 주님께 간절히 애원하고 있다고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거기에 모든 생을 걸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냐, 아니냐.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느냐, 아니면 이 절망 속에서 죽느냐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고민이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다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절망을 기도의 힘에 실리느냐 못 실리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움직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수많은 문둥이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그 사람의 모습을 보는 그 순간, 그 한사람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주님이 우리의 한계를 아시지 않겠습니까? 무엇까지 할 수 있고, 그 다음 어디서부터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지 주님이 아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 가운데는 분명히 애통하여야 함에도 눈물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절망가운데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하면서도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기회로 삼아야 할텐데 절망 속에서 쉽게 체념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람들은 절망 중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한 은혜를 맛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만 뜨면 피할 수 없는 생각나는 그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무엇으로도 무찌를 수 없고,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처 부수어 버릴 수도 없는 그 문제, 그래서 너무나 오래 동안 그런 상태가 계속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기도할 의욕도 포기하고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도 모두 포기하고 살아가는 그런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그 문제가 주님의 능력보다 더 큽니까? 하나님의 손은 짧습니까? 주님의 눈은 어두워서 그 문제를 보실 수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계속해서 절망 가운데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시기로 작정했다고 하는 어떤 분명한 확정을 가지고 계십니까?
보십시오. 절망 중이던 이 문둥병자가 주님 앞에 간절히 탄원했더니 주님의 마음이 긍휼히 가득 차고 그리고 그를 주목하시게 끔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이루는 것을 보는 것이 신앙이 아닐까요? 인간이 포기하고 절망한 가운데 나타나셔서 절망 적인 상황을 희망적인 상황으로 바꾸어 놓으시고 패배와, 슬픔, 공포, 좌절, 어두움 이런 칙칙한 단어들로 가득 찬 삶의 자리를 희망, 기쁨, 즐거움, 영광, 빛, 거룩, 은혜 이런 단어로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특권이요, 기도하는 사람의 영광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 고민하는 것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문제로 인해서 아파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탄원에다가 싣는 간절한 기도, 그 부르짖음이 절망 중에 신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런 속에서 너무나 많은 날들을 눈물 흘리고, 고통스러워하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문제 앞에서 깨트려지듯이 녹아지는 그 마음이 보좌 앞에서 무릎을 끓는 기도의 마음으로 승화되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분명한 도전을 피할 수 없이 받게되는 것입니다. 절망 적인 상황에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처지를 주목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향한 긍휼히 그분의 마음에 가득 차도록 그래서 그분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비참하게 울부짖고 간구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민망히 여기시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되게끔 만들어드리는 것이 우리가 이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비결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깨끗하여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떻게 깨끗하게 되었습니까? 문제의 뿌리는 남겨둔 채, 대충 봉합한 수술 환자와 같은 그런 방식의 치유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사람의 모든 피부, 살, 코 모든 것들이 새롭게 창조되었다고 까지 추측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어째든 제사장에게 보여서 ‘완전히 나았다.’ 라는 확인을 받아야지 만 이스라엘에 회중 속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예수님께서는 그 문둥병의 근원까지 완전히 치료하셔서 더 이상 그 병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셨을 것이고 그것을 가리켜서 오늘 “깨끗케 하였다.” 라는 표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인간도 인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상황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뿌리까지 완전히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절망 적인 문제에 근원을 하나님만이 완벽하게 재발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완전히 고치실 수 있고 그리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 적인 문제가 있을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바르게 하고 주님을 절실하게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바라보면서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요한 간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에 주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의 문제를 치료하시되 뿌리까지 완전히 말리셔서 더 이상 우리의 인생이 이제껏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었던 그 문제에 노예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내가 원하노니” 라는 말씀입니다.“델로” “내가 원하노니” 기도는 주님의 마음에 우리를 위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그래서 우리를 향해 도움의 손을 뻗고, 그리고 실제로 그 손으로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주고 절망 속에서 이끌어내어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렇게 절망적인 문둥병 속에서 간절히 부르짖었던 이 죄인에 부르짖는 이 모습을 보면서 뭔가 느끼시는 것이 없습니까? 나를 포함해서 여러분 모두 우리에게는 이런 문둥병자와 같이 절망적인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도 이 문둥병자와 같이 절망적인 문제는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만 너무나 오래 동안 잊고 살았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여러분의 사명감을 잊었을 뿐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여러분 자신에 신앙에 인격에 너절함을 인해서 절망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은 물을 주고, 햇빛을 비춰 거름을 주고, 수시로 우리를 말씀의 칼로 다듬고, 정결케 하여서 많은 열매맺는 좋은 신앙을 가진 거룩한 신앙의 인격을 가진 신자들로 기르기를 원하시는데 자라지 않는 우리의 신앙의 인격을 보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안타까워하지 않으신다면 주님이, 주님이 아니시거나 아니면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파하는데 우리는 아파합니까? 주님은 우리의 변화되지 않는 너절한 신앙의 인격을 인해서 고통하고 절망 가까운 그 느낌을 가지시는데 우리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때, 나 괜찮아? 이만하면 잘하지! 혼자서도 잘하지! ‘주님, 많이 자랐죠? 주님, 저 요새 너무 대견해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주님, 아무리 돌아봐도 나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마음이 전해져서 절망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마땅히 절망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바르게 돌보고 그들에게 진정한 회심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인해서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을 우리도 느낄 수 있습니까? 그런 주님에 명백한 소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소원대로 살아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절망적으로 다가오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주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마음에 불붙는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에 도움을 향해서 간절히 사모한 나머지 우리의 마음이 ‘스프랑 크니스데이스’의 마음이 되는 경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조각난 가정, 깨트려진 여러분의 가족관계,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고 있는 돌덩이 같은 가족의 영혼, 주님이 세워주셨지만 주님이 베풀어주신 크신 은혜에 비해서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나라에 확장을 위해서 적은 도움밖에 드리지 못하는 초라한 교회의 모습, 바쁘게 몸부림치면서 한해를 살았지만 없는 것 같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이 지나가 버리고 속절없이 주님 앞에 설날만 가까이 다가오는 세월을 낭비하는 이 삶, 이런 것들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지 우리가 절망할 수 있겠습니까?
처처에 들려오는 기근과 지진의 소식들, 마지막 날은 가까워오는데 아직까지도 주님의 나라의 실현은 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가치가 없거나 적은 가치밖에 없는 일에 매달려서 우리 자신을 소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명예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이름이 모욕 받는 것을 인해서 치를 떨지만 도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 마음, 참된 신자의 길이 무엇인지 모르는 심각한 신앙에 무지로 인해서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는 마음, 절망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 법을 너무나 많이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이 마음을 영원히 잊어버린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간절한 기도라는 것이 우리 속에 존재할 수가 있겠으며, 간절하게 자신을 쏟아 붓는 탄원이 없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들이 기도 응답 속에서 경험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그 대가로 절망에 말발굽 아래 우리의 목을 내어주고, 그 발굽아래 밟혀서 살아가는 이런 퇴보하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지칭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유는 주님이 의지를 가지시게 끔 만들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이말 한마디 앞에서 이 사람의 문둥병이 몇 기에 접어들었느냐. 그리고 이 사람에 절망적인 상황이 다른 모든 사람에 비해서 얼마나 더 뛰어나게 절망적이냐. 이런 것들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주님이 “내가 원하노니”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에 이 의지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 하라 하는 말로 잔잔케 하신 분이십니다. 하늘을 명하여 천군 과 천사들을 불러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시고, 말씀으로 명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라고 말입니다. 우주의 문제,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 비참한 문둥병자가 그 병에서 놓임을 받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 “내가 원하노니” 라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크고 놀라운 능력이 천지를 창조하는데 만 사용되거나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는 우주적인 변혁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 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 그것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고 믿는 그 마음,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이 문둥병자로 하여금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게 끔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절망에 처한 상황에서는 눈을 들어 산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이 어디서 오나” 왜 절망 속에서 눈을 들어 산을 보았습니까? 그 큰 산을 보면서 이 산을, 그리고 이 산과 맞다은 하늘을 지금 자신의 문제를 놓고 간구 할 때에 자기의 이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이 산을 만드시고 하늘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오늘도 간구 하는 자신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 해주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모두 포기해버린 문제로 쌓아올린 여리고 성과 같이 엄청난 문제 앞에서 주님이“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히 문둥병자가 자기의 전 존재를 실어서 주님의 시선을 끌며 간구하였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 앞에 매달렸던 문둥병자 보다는 훨씬 나은 위치에 있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의 성품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깨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주의 도우심과 은혜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우리를 도와주시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들은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입니다. 절망 속에서 벗어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문제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이제껏 믿음이 없어서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갔던 문제 앞에 제가 새롭게 서서 신앙의 옷깃을 여밉니다. 그리고 나에 온 힘과 마음을 실어서 주 앞에 간구 하오니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라고 말입니다.
6. 환난 중에 먼저 기도해야 할 것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시116:3-4)
서양 속담에 ‘비가 오면 억수로 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에 있어서 환난과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 능력에 맞게끔 순서대로 적절히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우리의 형편을 고려하면서 찾아와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에 환난과 시련은 소낙비처럼 퍼붓는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너무 커다란 시련과 환난을 연거푸 만나거나 한꺼번에 만나게 되면 우리는 기도할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기도해야 할 때 즉시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비교적 안전합니다. 그러나 정말 견딜 수 없는 시련이 밀려오고 환난이 연거푸 파도처럼 연약한 여러분들의 심성의 해변을 때릴 때,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환난 속에서 즉시 환난보다도 더 열렬한 강도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시련을 만나보셨나요? 환난을 만나보셨습니까? 연거푸 밀려오는 시련과 영혼의 고통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아침이면 그대로 눈뜨지 말고 그것이 마지막 밤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눈을 뜨면 아침에 너무 겹겹으로 밀어닥치는 환난과 시련 때문에 아침의 햇살과 그 햇살에 반응하는 여러분들의 육체가 미워본 적은 없습니까? 차라리 잠들었을 때가 가장 행복하게 느껴져 본적은 없습니까? 환난도 없고 시련의 비바람도 없어서 언제나 오뉴월의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풀밭에서 뛰어 노는 것과 같은 그런 인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죄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고통을 드릴 적에는 세상 속에서 징계를 받으면서 괴로웠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나면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립니다.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살 때는 그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만 해도 대단한 줄 알고 우쭐했지만 진리의 빛이 그의 영혼에 비치고 그의 어두운 내면의 세계에 비칠 때, 드러나는 자신의 죄악들, 하나님 앞에서 아무 희망이 없는 것같은 처절한 죄의식,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거룩해지기를 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떠나 아무렇게나 옛사람의 성품을 쫓아서 살고자하는 두 개의 자아가 자신 속에 싸우는 것을 볼 때 그 고통은 이 세상에서 돈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혹은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투쟁하면서 겪었던 고통보다 결코 못한 고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죤 번연은 회심하기 직전에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자살하려고 강에 뛰어든 적이 있을 정도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강변에 둥실 둥실 떠다니는 오리 새끼들을 보고 한없이 부러워했다고 하니 그 영혼의 고통이 어땠겠습니까? 신앙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이 세상의 고통을 받고 신앙이 있으면 있는 대로 고통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이런 시련과 고통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 구역예배 시간에 종말을 앞둔 성도의 기도생활에 대해서 배우고 계시지요? 거기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가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끊임없는 시련, 그리고 적절한 고통, 아픔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아서 아무리 형통할지라도 이 세상이 영원히 우리가 정둘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압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보다 완전한 안식을 기다리고 보다 완전한 평화를 고대합니다. 흐느끼면서 말입니다.
오늘 이 시인의 아름다운 고백은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에 시달리는 영혼들에게 어떻게 기도하면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 시련을 능가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사망의 줄, 음부의 고통이 자기를 둘렀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주어도 복수로 나오고 고통도 복수로 나옵니다. 여기에서 사망의 줄이라고 하는 것은 제사를 드릴 때 번제단에 올려진 짐승을 움직이지 않도록 묶는데 사용되는 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망의 줄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부의 고통들, 혹은 고통을 주는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부분은 역시 그 고통의 강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음부의 고통, 그리고 사망의 줄. 이 시인이 어떤 형편에 놓여있는지 여러분들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외적으로 그는 도저히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의 환난과 시련의 줄에 칭칭 감겨있습니다. 정말 시련은 줄과 같습니다. 그런 환난과 시련을 만나지 않았을 때는 그렇게 순발력이 뛰어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 마치 날개가 부러진 새와 같이 되어버립니다. 기도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고 변함없이 주를 위해서 섬길 수도 없는 늘 입에 붙어 다니던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자랑도 사라지고 가슴은 차갑게 식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런 시련의 줄이 이 시인을 칭칭 감고 있습니다. 마치 꼼짝 말고 그대로 환난의 불에 타서 번제물처럼 죽어버리라고 말입니다.
외적으로는 사망의 줄에 칭칭 감겨서 도저히 거기서 헤어나올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내적으로는 음부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이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불길처럼 가득 태웠습니다. 내면의 고통이 너무 커서 혀끝에 열이 나는 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가장 빨리 반응이 오는 곳은 입주위가 헐고 입천장이 부르트고 합니다. 그런 내면의 깊은 고통이 가득 차고 그래서 그 고통을 표현하기를 음부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죽음 후에 들어간다고 믿었던 음부라고 하는 곳은 모든 구약의 사람들이 아주 혐오스럽게 여기던 을씨년스럽고 고통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저주스러운 그곳에 고통과 고뇌는 거기에서나 맛보는 것인데 그것을 미리 당겨서 맛보게 될 정도로 이 시인이 그렇게 사망의 줄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음부의 고통을 맛보면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성경에서 말하기를 환난과 슬픔을 만났다. 그래서 이 환난은 사망의 줄과 연결이 되고 슬픔은 내면적인 고통으로서 음부의 고통과 연결이 됩니다. 환난과 고통, 외면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환난의 줄이 그를 두르고 내면적으로는 지옥의 끔찍한 고통이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때를 지나는 때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이런 때를 지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도 지나온 길인데 여러분들이라고 그런 길을 지나가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지나가신 길인데 우리라고 지나가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 앞에 한숨대신 노래 부를 수 있고 두려움 대신 아버지 앞에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두려움이 변하여 우리의 노래가 되고 가 한숨이 변하여서 우리의 기도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아무 것도 아닌가 하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팡세’에서 “전 인류를 죽이기 위해서는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방울의 수증기로도 족합니다” 라고 했을 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터득하게 되는 진리 하나는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입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자기가 강한 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이 납니다. 얼마나 허하면 저렇게 강한척 할까? 원래 사람들 앞에서 떽떽거리는 사람들이 집에 가서는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웁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피곤한 이 몸을
외치는 그 소리 들으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인간입니다. 잘난척하면서 살아왔던 많은 날들이, 강한 것처럼 허세부리면서 살아왔던 많은 날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 그 착한 마음을 얼마나 많이 앗아갔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멸절시키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시인들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콧김에 날아가 버릴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여러분, 환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에 시련보다 더 강력한 불같은 열정으로, 시련을 능가하는 기도로 존재를 뒤엎고 신앙으로 시련을 이기며 승리하는 기도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바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의 관심은 그렇게 잘 사는 사람들 말고 이기고 싶지만 이길 힘이 없고 살고 싶지만 살 능력이 없는 사람들, 거듭되는 환난의 고통과 시련의 아픔 속에서 기도할 힘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오늘 관심이 있습니다. 잘사는 사람들은 잘사시게 두고 우리는 오늘 이 시편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같이 연약한 사람들이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같은 시련과 환난의 고통이 우리의 외적인 삶과 내면의 세계에 엄습할 때, 어떻게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을 지킬 수 있을 지 한 번 생각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이 안팎으로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인은 선택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결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신앙의 공식은 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도에게 환난과 시련의 고통이 자신의 삶을 엄습하고 내면의 세계를 습격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피했고 기도를 택했습니다. 여러분, 신자가 안팎으로 환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고 견디기 힘든 환난을 만났을 때 기도해야 한다고 오늘 권면하고 있는 저의 이 설교를 구태의연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구태의연한 그것에 수많은 진리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래 전 시인은 몇 년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다윗 시대 사람이라고만 보아도 약 3천년 전에 이미 사망의 줄에 두른 것같은 시련을 만나고 음부의 고통이 밀려오는 마음의 아픔을 경험했을 때 그가 결심한 것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를 삼킬 듯이 덤벼들면 삼킨바 될 수밖에 없고 세상이 우리를 치면 우리는 맞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불행이 밀려오면 우리는 그 불행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 비해서 차이점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에게는 기도라고 하는 피난처가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왜 이런 사망의 줄에 두름을 당하고 음부의 고통에 엄습함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이 고통과 시련이 시인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그에게 주시는 연단이며 시련인지 그런 것들을 한가하게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왜 그런 것들이 생겼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생긴 것이든지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그런 시련과 환난의 고통을 만났을 때에 기도할 것을 택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기도를 택했을까요? 왜 환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에 이 사람이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선택했을까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기도밖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말을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도가 환난을 당하면, 그리고 성도가 견딜 수 없는 내면의 고통을 당하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원하지 않는 환경 속으로 밀어내 던짐을 당할 때, 성도들도 세상에 있는 사람과 꼭 같이 고통을 느낍니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고요히 앉아서 그 일을 모두 당하면서 고통을 받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기도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도 빌 대상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이제껏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만들어 주셨고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보다도 작은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환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피했고, 하나님께 피했을 때 그 하나님께로부터 실망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자로 잰 것처럼 폭풍우 흑암 속을 이끄시고 천둥과 번개가 치고 낙뢰가 마른땅에 내려꽂히는 그런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광야를 주님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인도하셔서 오늘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이것입니다. 환난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며 고통 가운데 여호와는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거기로 피하는 것밖에는 성도에게는 참된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하나님께 피하지 않고 환난과 시련 속에서 죽지 않고 신앙 없이 그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련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우리는 틀림없이 망가진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예화) 서울 시내의 한 교회에서 큰불이 난 후 살아남은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죽은 아 이들이 차라리 행복하다.
이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것은 혼자서 시련을 이기는 것입니다. 혼자서 고통을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여러분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아침이면 눈뜨기 힘들 정도의 시련, 견딜 수 없는 고난의 계곡을 기도 없이 여러분들이 견디고 통과하고 난다고 하면 시련이야 끝나겠지만 그러나 그때 여러분들은 망가진 사람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한 번 고쳐야할 패역을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게 만듭니다. 행복하고 좋은 환경에서......(?)......(?) 가득찬 인생의 골짜기를 주님과의 교제 없이 혼자 걸어온 사람이 멀쩡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고난의 질서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주님이 오실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너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바로 그런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은 환난과 고통, 외적으로는 사망의 줄이 두르고 내면적으로는 지옥의 불길과 같은 고통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그 때에 기도한 것은 기도밖에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기도를 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련 가운데 홀로 지나지 마십시오. 이 밤에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성심성의를 다해서, 주안에서 형제자매 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환난의 밤, 시련의 계곡을 혼자 걷지 마십시오 큰일 납니다. 살아남아도 여러분들은 불구가 될 것입니다. 망가진 사람이 되고야 맙니다. 생존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한 다음의 삶이 문제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신앙이 없는 남녀에게는 너무 호강하며 산 사람과 너무 고통을 받으며 산 사람과는 서로 결혼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왜냐면 둘 다 망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혼자 지나지 마십시오. 살아남아도 우리는 망가진 사람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빛을 받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망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확인하게 되었을 때 왜 우리가 그렇게 망가졌는지에 대해서 잘 몰랐지요? 그러나 한 번 조심스럽게 우리의 신앙의 경험에 의해서 추론하며 돌아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빛을 받았을 때 우리가 망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를 망가트린 요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평탄할 때에 너무 방종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버르장머리가 없어 망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버려진 것과 같은 이 고통스러운 시련과 환난의 골짜기를 홀로 걸어오면서 스스로는 강해졌다고 믿지만 그러나 강해지는 것과 함께 그는 망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시련의 골짜기, 견딜 수 없는 환난이 밀려올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표시인 것입니다. 절대로 혼자 가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겨우 생존입니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라면 차라리 오늘 모두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생존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생존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면서까지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그 약속의 삶, 죄에 얽매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얽매여 있는 것들을 복음의 능력으로 끊어주시고 무지와 어둠 속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지식의 빛을 주어 하나님의 그 감격스러운 은혜와 진리 안에서 아름다운 구속의 때를 누리며 살게 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이 있는데 우리들의 인생의 목표가 겨우 생존이라면 어찌 이것이 하나님께 가당하기나 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가슴속에 밀려오는 지옥의 불길과 같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씹으면서 매일매일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 아직까지도 부스러지지 않고 생존해 남아있는 것을 인해서 감사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이런 시련과 고통을 맞이했을 때 기도하기로 결심했고 여호와 우리 주께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시련과 환난을 당한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기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시키시고 싶으실 때에 잘 사용하시는 방법이 우리에게 심적인 고통과 그리고 우리의 삶에 종종 시련을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는 바람 때문에 만경창파에 떠있는 배가 좀더 빨리 항구를 향해 미끄러져 가듯이 시련을 통해서 우리들이 기도의 항구로 진입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돛대도 접고 삿대도 거두어 놓고 바닷가에서 건져 올리는 몇 마리 생선 토막을 쳐서 고추장 찍어먹으면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벌러덩 갑판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던 어부들도 비가 오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속히 기폭을 올리고 삿대를 저어서 항구로 피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잊었던 기도의 항구로 돌아가 주님을 만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환난을 많이 만난 사람이 저절로 성자 같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환난을 크게 만난 사람이 모두 열렬한 기도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환난과 시련을 만나도 하나님은 환난과 시련을 기계적으로 사용해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도구이고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만나서 주님을 경험하세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생각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환난과 시련 속에서 환난과 시련만을 주목하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분들이 결코 기도하지 않습니다. 환난과 시련 뒤에 느껴지는 주님의 숨결, 사랑하는 우리를 다루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릴 때, 우리는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인격적인 권고를 받게 됩니다. 그리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복 되어져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이라고 설복하고 계십니까? “너희는 환난과 시련의 밤바다에서 기도의 항구로 피하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환난과 시련을 홀로 지내면 큰일난다고 권면하고 있는 이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단지 견디고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으로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환난과 시련 속에서 견딜 수 없는 영혼의 고통 속에서 그는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그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련을 만나고 환난을 당해서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을 때, 여러분들은 그동안 기도하며 살지 않았던 날들을 주님 앞에 정중하게 용서를 빌고, 그리고 이제는 그 기도의 항구로 신속하게 피해야 합니다. 폭풍이 지나는 밤바다에 문닫아 놓은 항구는 없는 것처럼 시련을 만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의 항구를 향해서 미끄러지듯이 나아올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실 때에 주고 싶으셨던 마지막 대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살아온 신앙의 발자취를 한 번 돌아보십시다. 우리의 신앙의 발자취는 하나님의 은혜의 발자취입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 걸출한 믿음의 사람들처럼 수 십 년 동안 시종일관 불붙는 열정으로 견고하고 강렬한 기도의 세계를 지켜오지는 못했지만 주님의 은혜의 역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한 기도 응답의 역사와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은 기도에 크게 응답하시고 그리고 작은 기도에 많이 축복하셔서 오늘 여기까지 주님이 데려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처럼 마음이 강퍅하고 하나님 의지할 줄을 모르는 완악한 사람들인데도 뒤돌아 보면 우리는 기도의 응답밖에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견딜 수 없는 시련 속에서 기도를 택했을 때 주님이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있었습니까? 죄인들에게는 사죄의 은총을 주시고 목마른 자들에게는 은혜의 샘을 주셨습니다. 갈 길을 몰라서 고통하고 있는 영혼들에게는 지식의 빛을 주시고 맺힌 것이 있어서 미움으로 견딜 수 없어서 자신의 영혼을 찌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내 인격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견딜 수 없는 시련의 자리에서 풍요로운 곳으로 옮기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가 별로 없었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꿈꾸는 것과 같은 기도의 응답의 기쁨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시련을 견디고 걸어올 수 없는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서 슬픔과 고난을 딛고 우리는 여기 진멸되지 않고 이렇게 서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경험도 우리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고 그 은혜는 기도 응답의 은혜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 우리가 이 시련 속에서 이 환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로 피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기억하십시오. 거창하게 환난을 당한 사람은 모두 모이라는 특별 새벽기도의 광고가 없어도 우리는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지 아닌지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의 영혼이 잘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껏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면서 우리들이 어떻게 이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까? 남보기에는 가당찮아 보이는 신앙의 길이었지만 우리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이제껏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남들은 능력이 많아서 쉽게 이길 수 있는 시련을 우리는 믿음도 부족하고 능력도 없어서 오래도록 고통을 받으며 극복하면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걸어온 길이 아깝지 않습니까? 환난과 시련 속에서 주님을 찾았던 날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런 기억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여호와께서 나의 간구를 들으심으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라고 간증하고 있는 이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환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깊이 기도하고 그 기도를 통해서 환난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시련의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찬 그 인생의 슬픈 골짜기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겠습니까? 내일부터 기도하십시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그 좋으신 하나님께 피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이해되기 어려운 일이 여기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죽음의 줄이 자기를 에워싸는 환난과 지옥의 고통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내적인 깊은 슬픔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 속에서 이루어진 환난과 시련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없을 리가 없습니다. 환경과 관계가 없을 리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다윗처럼 대적자들의 추격을 받는 상황 때문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116편을 다윗의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만일 사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사망의 줄이 자기를 에웠다고 하는 것은 다윗을 잡기 위해서 원수들이 다가오고 있는 포위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뭔가 환경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무엇을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나를 추격하기 위해서 풀어 놓은 저 자객들을 벼락이라도 내려서 싹 쓸어버리십시오. “내면의 세계에 깊은 고통이 생겼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서 생긴 고통이면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달라고,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해서 생긴 고통이면 그 사람을 돌려달라고, 반대로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라면 저 사람을 정리해달라고,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되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돈 때문에 고통이 왔으면 주님이 돈을 주시면 될 것 아닙니까? 자식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 그 자식이 면화 받으면 될 것 아닙니까? 부모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부모가 변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오늘 시인은 그런 기도 제목을 모두 뿌리치고 우리가 동의하기 힘든 한 기도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것은 “내 영혼을 구원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환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에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판단하는 영적인 시각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시각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환난과 시련을 당하는 많은 그 아까운 시간에 많은 기도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길이 질러가는 길인 적이 있고 질러가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 길이 돌아가는 길인 적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 그 환난과 시련의 원인이 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가장 급선무는 그것입니다. 돈 때문에 문제가 생긴 사람들은 돈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병 때문에 고통 하는 사람들은 고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지요.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은 그러한 환난과 시련,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보게 되었고 그 관계의 빛 아래서 자신의 영혼이 안전한지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 이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 속에서 이 시인의 진정한 관심은 자신의 영혼의 생명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안전하게 되는 것, 주님이 자신의 생명 싸개 안에 자신의 영혼을 감추어서 이 세상의 환난과 시련이 자신의 육신에 내릴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경건한 자신의 영혼이 상처받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의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습니까?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그 환난과 시련이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까? 시련 속에서 들려오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을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그러한 영적인 시야를 가지고 자신의 환난과 시련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대로 된 기도 제목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단지 구원받지 못한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오늘날과 같은 그런 의미만은 아닐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 속에서 그는 위태한 자신의 인생만 본 것이 아니라 위태한 자신의 인생, 그리고 흔들리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의 고통 속에서 위협받고 있는 자신의 영혼, 위협받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일 먼저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보호되기를 원하는 사모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환난과 시련, 견디기 힘든 내면의 고통 속에서 여러분 자신을 내버리지는 않습니까? 아무렇게나 굴려버리지는 않습니까? 시련과 고통 속에서 여러분들은 ‘내 육신은 고통과 시련 속에 시달려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켜야되겠다’라고 하는 여러분들의 영혼에 대한 배려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주님만은 잃고 싶지 않다고 하는 이런 신앙적인 시야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이 내 육신을 멸하고 그리고 시련의 고통과 아픔이 나의 내면의 세계에 커다란 상처를 내어도 내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만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나를 버려도 나는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습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그 진리를 터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과 시련,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많은 것들이 환난과 시련의 이유가 되지만, 그것들을 되찾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 여러분들의 영혼이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우리는 환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 더 열렬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며 살도록 기도해야 하고 주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인생의 시련과 환난의 때를 모두 통과하고 난 다음에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이 가득찼던 날들 때문에 되찾은 우리 영혼의 안전, 회복한 하나님과의 관계, 발견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주님을 높이 찬양할 수 있도록 그렇게 시련 속에서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7.하나님을 아는 기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시116:5-6)
우리는 지난 시간에 환난과 시련의 고통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은 그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때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환난과 시련 속에서 잃어버린 물질이나 잃어버린 명예, 그리고 사라져버린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런 환난과 시련 속에서 보존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우리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핵심에 가까이 다가간 기도일수록 하나님께서 쉽게 우리에게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시인이 말하고 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시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불쌍히 여기시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얘기가 나오다가 갑자기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기도에 대한 응답을 경험하고 나니까 하나님을 찬송할 마음이 생겼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이 보다 더 중요한 기도에 관한 교훈 하나를 찾는다면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시련과 환난의 고통 속에서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새롭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은 기도하는 것 자체일수도 있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모든 기도를 좌우합니다. 리차드 십스라고 하는 청교도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인간의 모든 불행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공통적으로 깨달은 사실이 하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리차드 십스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였으며 사람들을 훌륭하게 다룰 줄 아는 하늘의 의사라고 불려지는 사람이었습니다. 토마스 구디를 비롯해서 걸출한 청교도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 속에서 자기가 만난 그 수많은 사람들, 불행과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성품과 신분이 어떠한지를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곤고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정확히 알고 그 하나님의 성품과 신분이 어떠한지를 제대로 알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기도는 결코 신령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열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올바로 알고 기도하는 것은 열렬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바로 아는 지식을 통해서 우리의 열렬한 경건에 불이 붙여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아는 정확한 지식의 터 위에서 열렬히 기도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제대로 아는 지식이 없이는 우리는 제대로 기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해 동안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설교해오는 가운데 항상 시리즈 시작할 때마다 강조했던 이야기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 없이는 진정한 기도가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우상들을 섬기는 세계에 있어서는 지성이면 감천일 뿐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치성을 드리면 결국은 하늘도 감복을 한다는 이상한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는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정확히 깨달아 아는 말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없이 한 사람이 열렬한 기도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혹시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열정이 모두 신령한 의미에서의 열정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황에 맞는 시시때때로 드리는 기도의 생활로 나아가기에 앞서서 만약에 우리의 기도의 세계가 매우 초라하고 불만족스럽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창고를 두드리기 전에 먼저 지식의 곳간을 두드려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있는가? 정말 그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무속의 세계에서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자신의 지성을 받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몰라도 그저 자기가 빌고 싶은 소원을 열렬히 빌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전국을 다녀보면 곳곳에 배여 있습니다. 샘에는 이 샘물을 먹고 기원을 하면 이루어진다. 온천에는 여기서 목욕을 하고 빌면 이루어진다. 어느 산에는 올라가서 빌면 이루어진다. 어느 바위에는 바위 앞에 가서 빌면 이루어진다. 관심 그 자체가 인간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지 결코 그 기도와 간구를 듣는 그 대상이 되는 신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종교입니다.
(예화) 대만의 어떤 사람이 조그만 우상이 요즘 복을 안 준다고 때리는 이야기.
그러니까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의 심성 속에는 기도에 대한 친근함이 베어있습니다. 병원에 심방가면 그 사람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배드려준다고 하면 싫다고 해도 한 번 기도해준다면 싫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기도를 듣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기도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훨씬 더 뛰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의 기도와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가 기도에 있어서 능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그 하나님에 대한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를 훨씬 효율적으로 만들고 능력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이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난에 처하고 시련의 고통에 처한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아니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는가? 지금 나는 빚에 몰리고 사업은 망했고 내 육신은 병들어서 병원에 누워있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마음 아파하고 있는데, 지금 내게 당장 급한 것은 이 고통과 시련의 문제이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인데 지금 이 기도 응답이 더 중요하지 한가하게 어디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느 시절에 그런 한가한 때가 있나?’ 그러나 인간의 소견에 돌아가는 것 같은 길이 때로는 질러가는 길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의 생각에 질러가는 것 같은 그 길이 하나님의 소견에는 돌아가는 길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환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의 사고 자체를 하나님의 생각 쪽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해결이 보이기 시작하고 시련과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힘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기를 정말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국 환난과 시련 속에서 고통하고 있고, 그 고통 때문에 인간이 많이 불행해지는 것 같지만 불행의 원인은 그 환난과 고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불행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보다 근본적인 뿌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한달 전 어느 여자 분이 돈 10만원을 꿔달라고 찾아온 이야기.
모든 인간들이 불행을 만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 자체에 몰두하고 소진하다가 결국은 해답을 못 얻고 불행 속에서 커다란 시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돈 문제만 이였는데 한참 시간이 흘러가면 돈 문제가 가족들의 관계의 문제로 번집니다. 가족들의 관계의 문제가 더 번져 가면 자신의 문제로 번져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번 불행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사랑하던 관계들을 산산조각 내고 자기 속에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거친 패역을 만들고 그러면서 자기뿐만 아니라 관계된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내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어 갈 때에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변화되어가고 관계가 고쳐지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이르게 되는 것과 정반대의 현상이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될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로부터 궁극적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환난과 시련 속에서 그 시련 자체가 아니라 그 시련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고 자기 속에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정확히 모르는 지식들을 새롭게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새롭게 알게 되면 비로소 그 거울에 비추임을 받아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면 그 다음에 그 하나님 앞에 자기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게되고 그것이 곧 기도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끊임없이 자라 가는 성장이 없이는 기도의 세계에 있어서도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사라지고 나면 기도에 대한 감각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우리의 가슴에 다가와서 도저히 어제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새로운 모습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그 모습이 우리의 영혼과 삶의 어두운 구석을 비췰 때, 감동과 감화가 있을 때 우리 속에서는 메말랐던 기도의 세계에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 있는 언어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차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늘 이 시인이 환난과 고통의 시련 가운데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그 올바른 과정을 통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또한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는 이 찬송은 시편 전체에 깔려있는 고백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뜻없이 되뇌는 후렴구나 혹은 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인은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이 소중한지를 깨닫고 자신의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 열렬히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환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아는 것만큼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기도시키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추구하고 간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여 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 시작하든 지간에 어떻든 순환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시다 라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이 시인이 기도 속에서 경험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시다 는 성품은 이 시인이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 라고 말할 때 이 은혜는 크게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분에 넘치는 호의로서 우리를 특별하게 대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은혜로우시다는 말이 하나님에 관해서 사용되면 그런 뜻이고 이 말이 우리에게 적용되어 사용될 때,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은혜를 느낀다, 은혜를 경함 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특별한 호의와 사랑을 우리들이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것, 즉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친밀함,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남아있는 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은혜가 요즘 떨어졌구나’하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이 시인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에 안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환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에 자신의 영혼이 안전한지를 물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시고 우리에게 호위를 베푸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은혜에 잠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시련을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비록 얼마 안 되는 인생길이지만 뒤돌아보면 눈도 뜰 수 없는 시련의 계곡을 지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결단에서 오는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시련의 고통보다 훨씬 크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없습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문제는 환난이 너무 커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난과 시련의 고통 속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환난과 시련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신령한 사랑, 신령한 은혜를 경험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이기고 승리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환난과 시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임일세
환난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시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영혼을 얼마나 철저하게 세상을 향한 사랑의 줄이 얽어매고 있는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시련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호소하였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은혜를 부어주고나니까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영혼의 모습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제껏 그런 줄 몰랐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눈을 뜨고 보니까 자신의 영혼의 처지는 몸부림 쳤지만 벗어날 수 없는 올무에 걸린 야생 동물과 같은 처지였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전에 깨달을 수 없었던 것들을 깨닫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고 정말 변화된 사람들의 간증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그렇게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으로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가 많았습니다. 시련과 환난을 만났을 때에는 시련을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나니까 그 시련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게 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바로 시인이 오늘 이야기하는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주님은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한없이 감격하면서 울먹이며 찬송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환난과 시련을 당했는데 기도하지 않아 보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 쓴 물이 가득 차고 인간을 향한 극도의 원망과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하는 악한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될 터였는데 주님 앞에 시련과 환난의 고통 속에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런 시련과 환난을 주신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베푸신 은혜를 송축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악한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 있든지 그 속에서 주님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얼마나 크신 은혜를 입은 자들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원수들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침몰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시련의 고통 가운데 떨며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방법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간절히 권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아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향해서 활짝 열린 기도의 문으로 들어오십시오. 여러분들의 그 고통스러운 시련의 아픔이 변하여 하나님을 한없이 높이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은혜를 체험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이 환난의 고통 속에서 간절히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을 송축하게 된 또 하나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찬양은 ‘의로우시며’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 속에 빠져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이 많고 핑계가 많습니다. 처음에 목회의 길에 들어섰을 때 가정에 문제가 있든지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눈물 한방을 안 흘리면서 이야기하는데 듣는 저는 자꾸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보려고 하는 인간을 왜 그 인간들이 저렇게 짓밟고 괴롭게 할까? 하는 마음이 들고 어떤 때는 적대감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저렇게 착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왜 그 사람이 괴롭히는 것일까? 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반대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또 눈물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배운 지혜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공감은 하되 그 사람의 감정 속으로 매몰되는 것은 옳지 않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자기 입장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나는 사연, 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나는 사연입니다. 시련과 환난에 처했을 때 인간의 생각은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가만히 있는 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자기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말이 성립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 인간 세상의 삶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환난과 시련을 당했을 때 “오 하나님, 이 시련과 환난은 나 때문이옵나이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살아온 것에 비하면 제가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시련과 환난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나는 불의 합니다” 라고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많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환난과 시련을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나는 잘못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큰 풍랑과 환난의 많은 고통이 임한 것이 나의 죄와 허물 때문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든 지간에 항상 그 사건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꼭 신령하고 깊은 기도를 통해서 들려오는 커다란 신비체험에서 오는 음성이 아니더라도 의미를 해석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도다”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은 옳고 자신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 큰 풍랑과 시련을 만난 것이 자기의 죄와 허물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러므로 “내가 당한 이 시련과 환난, 거기에서 오는 내 영혼의 손해와 내 육신의 많은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는 우리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 없다”라고 하는 그 고백이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할 때에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내가 ‘주는 의롭도소이다’라고 말하리이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라고 찬송하고 있는 이 시인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환난과 시련 속에서 기도의 문이 막히고 환난과 시련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든 궁극적인 원인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속에 그 시련과 환난 당한 것이 여러분들의 죄와 허물 때문이라는 겸손한 자기 고백이 있습니까? 내 인생에 일어났던 모든 좋은 일, 행복하고 유익했던 일, 하나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드렸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요, 주님의 이름에 누를 돌리고 하나님의 명예에 누를 끼쳤던 우리의 후회스러운 모든 삶, 우리의 죄로 점철된 우리의 불순종했던 모든 나날과 거기서 비롯된 모든 고통은 바로 나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을 뿐입니다 라는 진솔한 신앙의 고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깊은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면 허위와 거짓을 버리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들을 먼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기도의 세계는 영혼을 가진 우리 인간이 순결한 영이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하는 순간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어떻습니까? 저 이만하면 잘 살았지요?” 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도덕적이신 하나님이신데 그런 정도로 산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고백, 기도 한마디를 해도 뜻도 모르고 중얼대는 것 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을까? 하며 지어내고 허풍떨지 말고 한마디를 해도 진실하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해도 부풀리고 뻥튀기 하지 말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환난과 깊은 시련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며 몸부림친 삶을 통해서 이전에는 쉽게 할 수 없었던 자기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나는 불의하도다”라는 고백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 인생의 시련의 원인이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또 한 번 죄를 짓고,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기도의 불씨 마저 모두 말려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시련과 환난 속에서 누구를 향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기도의 샘물을 모두 고갈시키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는 고백이 여러분의 입술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까? 그런 식으로 육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지고 영혼의 깊은 기도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식의 사고를 가지고는 안됩니다. 시련 속에서 겸비하게 무릎을 꿇고, “이 모든 일들이 나로 말미암았나이다. 이 모든 일들이 나의 죄악과 강퍅함을 인함이오니 나의 유일한 소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라는 겸비한 고백, 그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며 때로는 이런 환난과 시련을 당했을 때에는 하나님과 나밖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나에게 자기의 뜻을 보이고 계시다는 고백을 겸비하게 할 때 그의 기도가 비록 청산유수와 같지 못하고 그의 기도가 비록 활화산처럼 타오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죄와 강퍅함을 인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으며 눈물만 흘리는 그런 처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진실이 하나님의 시선을 끄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고개도 감히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말이 너무 뻔뻔스럽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는 죄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송한가, 그리고 내가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떨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나 죄인이오, 어쩔려오”하고 대드는 것 같은 태도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나님 앞에 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죄송스러운가 하는 자기 떨림의 고백이 없으면 배 째라는 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의 교리가 우리를 뻔뻔스럽게 하고 있다면, 십자가 구속의 교리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뭔가 잘못하고 시련을 만났을 때 배째 라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대들라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용서의 교리냐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나고 환난의 비바람이 불 때에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깨달으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의로우십니다. 모든 잘못된 것은 다 나 때문입니다” 그런 고백이 흘러나올 때 그 진실이 시련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붙잡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를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진실해져본 적 있습니까? 시련은 많이 만났지만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시련 속에서 이렇게 진실해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시련은 많이 만나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그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시편을 비롯한 성경의 수많은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시련은 많이 만났지만 성경 속에 나타난 위대한 위인과 비교할 때 닮은 것이라고는 시련을 많이 만난 것밖에는 닮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실해진 적도 없고 그렇게 자기 허물을 벗어버리고 주 앞에 겸비해져 본적도 없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나는 불의 합니다’라고 하는 진솔한 신앙의 고백도 없었기 때문에 환난은 많이 만났지만 주님은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시인이 시련 속에서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그런 성품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시련과 환난 속에서, 누구도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영혼의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제가 오늘 말합니다. 아픔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찬란한 태양 같은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인간이 지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든지 언제나 찬란히 빛나는 의로운 그분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 번개가 치고 눈앞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쏟아질 때, 비행기를 타고 몇 초가 지난 후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찬란한 태양이 빛난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감동적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궂은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고 서러운 날도 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높이 떠오르고 보면 하나님은 불변하신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의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인이 시련의 먹구름 장을 뚫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영적인 깊은 세계로 비상하고 나니까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이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시라는 찬송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사람은 이미 시련이 그를 가두어 두지 못하고 환난의 고통이 그의 발목을 잡지 못합니다. 이미 자유한 사람으로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시인은 말하기를 “자비로우시도다”합니다. 히브리 성경에 “메라헴”이라고 되어있는데, 이는 정확하게 말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말은 자애로울 자(慈)에 슬플 비(悲)를 씁니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슬픔을 함유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예화) 결혼하기 전에는 애인이 많이 먹어도 저렇게 먹고 어떻게 사나 하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한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은 어느 정도 슬픔을 함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항상 슬픔을 어느 정도 동반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눈빛은 촉촉이 젖은 사랑의 눈빛입니다. 사랑에 대한 감격 때문에 눈물겹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염려 때문에 마음이 동정으로 촉촉이 젖은 그런 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메라헴의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더 강도가 강하다고 생각됩니다. 곤고한 우리의 영혼을 붙들고 펑펑 우시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고통 하는 영혼, 죄악 가운데 시달리는 영혼을 바라보시면서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마음에 불타오르는 불붙는 것 같은 하나님의 긍휼, 그런 감정을 내포한 의미의 사랑이요 그런 의미의 동정입니다.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련과 환난 속에서 간절히 자신의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할 때 받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적 없습니까? “그래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의 아픈 마음을 안다. 네가 그렇게 애통해하며 우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안다. 내가 네 눈물을 보았고 네 기도를 들었다. 내가 너를 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것이라
‘그 고통을 잘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안다’는 말씀과 동의어입니다. 그것이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깊은 세계에 맛을 들인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 너무 약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내가 너를 안다. 그리고 너의 고통을 안다. 그리고 고통받는 네 모습으로 인해서 나의 마음이 너무 아프도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속에는 이미 고통받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읽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하다가 부모의 눈에 눈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울먹이기 시작하면 아이는 이제 다 맞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우리의 잘못과 우리의 허물 때문에 시련과 고통의 모진 계곡을 지나며 쓴 물을 머금게 하신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내가 너의 고통을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때, 그것이 징계이면 그 징계가 끝났다는 것이고, 뭔가의 잘못된 것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거기서 우리를 건져주시겠다고 하는 의사의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인은 시련의 깊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자신의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성품 속에서 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약할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보듬어주시고 우리를 높이시고, 세상 앞에서는 우리가 약할수록 세상은 우리를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약한 사람은 세상 앞에 강하고 세상 앞에 약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강한 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입니까?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소망을 걸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긍휼, 그리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이것은 항상 슬픔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의 의지를 좇아서 우리 스스로 불행한 길로 걸어 들어갔고 우리 스스로 택한 죄와 악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망가지고 우리의 육신적인 삶이 모두 파괴되어서 스스로 얽어 멘 그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환난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피흘리는 고통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녀를 향해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거늘 완전히 거룩하시고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 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그리고 이 설교자가 누누이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여러분들의 진정한 피난처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망가트려지고 여러분 스스로 택한 불행의 길속에서 고통하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이외에 누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겨줍니까? 자신의 의지로 택하고 자신의 길로 스스로 걸어가서 도탄에 빠져 좌절하고 상처를 입는 그 피 흘리는 모습을 보고 그 원인과는 상관이 없이 고통받는 사람이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신 자신의 자녀임을 알고 아파하시는 분이 이 세상에 하나님 이외에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참된 행복은 그가 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나 불의한 삶을 살아갈 때나 죄악의 어두움 속에 있을 때나 순종하며 빛 가운데로 걸어갈 때나 하나님 한 분만이 그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정한 피난처인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환난과 시련으로 얼룩진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그 죄악과 불순종이 여러분 영혼의 발목을 얽어 메어 피 흘리게 만들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불행의 올무에서 여러분들을 풀어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환난의 고통과 시련의 아픔을 맛보면서도 하나님께 피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이런 시련과 아픔 속에서 우리를 향해서 슬픔이 담긴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메라헴의 사랑,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슬픔이 담긴 자비의 사랑에 소망을 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힘으로서 이 환난의 시련과 아픔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는 것, 그 정직함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해를 넘기면서 다가오는 한해를 기쁨과 기대 속에서 맞이하는 사람들보다는 새로운 한해가 다가오는데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문제의 짐을 지고 달력 한 장을 넘기고 새해를 맞이하여야 하는 무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와 신앙의 정직한 태도를 회복하고 바꾸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가 풀지 못하고 넘어가는 이 문제는 작년에도 그러했듯이 내년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속히 우리의 시련과 환난의 아픔을 통해서 이렇게 주님을 찬송할 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무는 한해의 문턱에 이제껏 지고 왔던 모든 고통과 죄, 그리고 우리의 허물을 인해서 당했던 많은 시련의 고통과 환난의 아픔들, 우리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이 짐들을 1999년에 모두 내려놓고 새해의 새로운 시대와 공간 속으로 우리는 올무에서 풀려난 새같이 그렇게 날아가 주님이 주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더욱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 내가 비록 환난과 시련의 고통 속에 있지만 여기서도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피난처요 주님만이 상처받은 내 영혼의 진정한 위로자이시며 나를 위해 아파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께로 피하고 주의 자비와 긍휼의 세계로 도망치는 신실한 신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말씀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살후3:1)
우리들이 기도해야 할 제목이 상황에 따라서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들이 흔히 빼놓기 쉽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기도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말씀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부흥해야 우리의 심령이 살고, 그리고 우리의 심령이 살아야 우리가 삶에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교회의 문제들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에 들었을 때, 그 핑계가 한 사람도 겹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인간관계 때문에, 건강 때문에 라는 얘기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생기를 잃어버리고 시험에 들 때도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하나의 형식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고 진정한 이유는 그 속에 말씀에 부흥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결혼하고 처음서부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직장 끝내고 학교 갔다가 오면 우리 집 사람이 저에게 “여보, 뭐도 떨어지고, 뭐도 떨어지고” 그러면서 연탄 광 에 연탄부터 시작해서 쌀로 넘어와서 깨소금 통에 깨소금까지 다 나옵니다. 그러 면 얘기를 합니다. “뭐 그렇게 복잡하게 얘기를 하냐”고 “돈이 떨어졌네.”하지.
맞습니다. 말씀에 부흥이 사라진 것이 모두 원인입니다.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신실한 신앙생활 해 나가는데 있어서 세상은 우리의 편이 아닙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편이 아닙니다. 아군이 아닙니다. 그래서 환경에다가 기대를 걸면 늘 ‘혹시나’ 했다가 마지막에 ‘역시나’ 그러고 끝납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많이 듭니다. 교회에 이랬기 때문에, 저랬기 때문에 그러면서 이유를 많이 듭니다. 그런데 결국은 문제가 없는 개인의 삶도 없고, 문제가 없는 교회도 없습니다. 어디 그런 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곳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 곳이 어떻게 여러분들이 그런 곳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문제가 없는 교회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문제없는 교회에서 여러분들을 왜 받아주겠습니까? 들어오는 즉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텐데, 그런 것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든지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시고 성령강림 하신 다음에 교회가 이루어진 이후로 이제껏 까지 이 세상에서 문제가 없는 교회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어느 시대에는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고, 어느 시대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시들어 가느냐.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문제가 많고 적음 때문에 그랬다기보다는 그 문제를 능가하는 말씀의 부흥이 찬란할 때에는 그 문제를 오히려 불 쏘시게 삼아서 타오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 할 때에는 그냥 꺼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눈여겨봐야 될 대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어디 그렇습니까? 다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근원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당장 자기에게 편한 대로 다급하게 일을 처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식성이 참 좋습니다. 내가 아직 여러분들에게 목회에 있어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먹는 것을 가지고 아직 성도들을 실족시킨 적은 없습니다. 뭘 사주던지, 뭘 갖다주던지 꾸준히 성실하게 먹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도 일정한 룰을 벗어났다 그러면 저는 절대 안 먹습니다. 사람들이 몸에 좋다고 해서 개구리를 잡아서 튀겨먹고, 뱀도 먹고 하여튼 상상을 초월한 일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것은 절대 안 먹습니다. 그런 것 접대 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절대 안 먹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막 먹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리고 보약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체질에 따라서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사가 알아서 지어줍니다. 그런데 의사의 도움도 없이 마구잡이로 먹어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의사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보약이 보약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먹는 것은 노년에 건강을 가불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뭔가 우리들이 망가지면, 뭔가 우리가 근본적인 것을 치유해서 기능을 회복시켜서 그래서 우리의 몸에 조화를 찾으려고 해야하는데 급하니까 그냥 괜히 곤히 자고있는 개구리 뒤통수를 때려서 그 뒷다리라도 먹고 힘을 얻겠다는 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들은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문제에는 늘 우리에게 고통이 되고 아픔이 됩니다. 그래서 성급한 나머지 ‘이것이 빨리 해결이 되어야 되겠다. 그리고 이것만 해결이 되면 문제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매달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개인의 삶의 문제를 깊이 두드리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신비하게도 교회와 깊이 그 사람의 신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삶에 영역에 있어서 아무리 곤고하고 그리고 어려움을 만나도 말씀에 부흥이 있으면 그 사람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잖아요. 하루에 한번씩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고 기도할 수 있고, 하루에 한번씩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며 십자가의 사랑에 펑펑 울 수만 있다면 그까지 것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더 크시지 문제가 더 크겠습니까? 문제가 어렵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해결하시는 능력이 더 크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런 말씀의 부흥이 사라질 때, 그때 우리는 이제 근원적인 힘을 서서히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여러분, 한 주 교회 안 나와서 말씀에 은혜를 흡족히 못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 다음 날 죽는 것 아닙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계속 살다가 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근원적으로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고 그리고 마귀를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근원적인 힘들을 다 소진 당하고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의 부흥만이 그런 사람들 속에 근원적인 힘을 회복시켜줄 수 있고,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에 맞서서 훌륭하게 신앙적인 도전장을 내밀면서 승리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고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의 생각에 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알고 어떤 것은 중요하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하며 어떤 것들은 주된 문제이고, 어떤 것들은 지엽적인 문제이고 어떤 것들은 양보할 수 없고, 어떤 것들은 양보해도 되는지 그런 게 잘 질서 있게 잘 정리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은혜가 떨어지고 말씀의 부흥이 사라지게 되면 그러면 뭐가 먼저이고, 뭐가 나중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 버려 두고, 지엽적인 것 붙들고, 매달고 아무래도 괜찮은 것에서 생명을 걸고 진짜 생명 적으로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고 이렇게 앞뒤가 본말이 전도된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교회에서 말씀의 부흥의 불꽃이 꺼지지 않기를 나아가서 말씀의 부흥에 불꽃이 불길이 되어서 타오르도록 기도하는 것은 목사를 위한 기도나 다른 성도를 위한 기도나 교회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에 놀 것이 없을 때, 깡통 안에다가 불씨를 담아 돌리면서 놀던 이야 기. 불씨를 담아 돌리면서 놀 때 애들이 와서 자기의 깡통에다가 불씨를 주기를 원해서 주면 작은 불씨를 나누어주어도 몇 번만 돌리면 불씨가 타오르는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그리고 신앙생활 하면서 온전히 순종하며 살지 못해서 넘어졌다고 할지라도 예배시간에 나와서 그 교회의 말씀에 부흥에 불씨가 꺼지지 않았으면 거기 가서 당겨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에 부흥이 계속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목사를 위한 것이나, 무슨 교회에 말씀에 부흥을 위해 기도하거나 하는 것이 무슨 교회를 위한 헌신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에 신앙에 불꽃이 다 식어지고 가슴이 차갑게 마를 때, 교회 와 보니까 자기보다도 더 차가운 사람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다 식어서 왔는데 갈 때는 얼어서 간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옛날에 무디 선생이 “여러분, 시원한 것을 원하십니까? 시원한 것을 원하시면 저 동리의 장로 교인들이 드리는 예배에 가보십시오. 얼음보다 시원합니다.” 그만큼 썰렁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부흥이 사라지고 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인생은 미래가 있겠는가.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불씨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신자와 완전히 꺼진 신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그것을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비교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 그러셨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꺼져 가는 심지”라는 말보다는 “꺼져 가는 불꽃”입니다. 초점이 꺼져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불꽃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다 죽어가기는 하는데 아직 불꽃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라고 그랬지 “죽은 갈대”라고는 안 했습니다. 상하기는 상했는데 아직 생명이 남아있는 쪽에 더 초점이 가있는 것입니다. 그런 갈대를 주님이 꺽지 않으시고 그리고 그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사랑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편진데, 이 데살로니가는 지도로 보면 알지만, ‘헬라’ 여러분들이 배운 그리스 윗 지방에 해변 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카산도’라고 하는 사람이 후에 알렉산더 대제의 이복 여동생 이였고 동시에 이복 여동생이 알렉산더 대왕에 부인 이였습니다. 그 사람의 그 여자이름이 ‘데살로니카’ 이였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가’ 라고 지었는데 이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니야 시절에 이 알렉산더 대제 시절에 전국에서 네 번째 안에 드는 굉장히 큰 도시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얘기를 하면서 사도 바울이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도록 그렇게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데살로니가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실라와 함께 일행을 데리고 전도한 곳 이였습니다. 3번에 안식일 동안에 성경을 강론했다고 그랬으니까 말하자면 3주 연속 사경 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3주 동안 그곳에서 성경을 조용히 강론하였는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끝까지 안 믿겠다고 덤벼든 간악한 유대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일은 예수님의 시대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반대자들이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를 가지고 복음에 성공이다 실패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반대자들이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 거기에 “괄목할만한 성공이 있다” 라고 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전파될 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말씀이 선포될 수가” 하면서 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반대편에서는 복음이 상당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 때, ‘멜랑 히톤’ 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멜랑 히톤은 종교개혁 사회에서 마틴 루터에 종교개혁에 뒤를 이어서 루터의 신학을 최초로 조직 신학 화한 신학자입니다. 그 멜랑 히톤은 물론 영적으로는 제자입니다. 멜랑 히톤에게 그런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은 설교할 때에 당신의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화를 내든지, 아니면 당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화가 나든지 둘 중에 하나 할 수 있게끔 설교를 하라”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이해할 수 있지요? 할 수 있지요? 모르면 모른다고 하십시오.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지요? 수준이 높으니까. 그랬습니다.
그런 의도도 말하자면 참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반대하는 강력한 세력이 있습니다. 오죽 꼴 같지 않게 선포하면,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싫어하는 사람도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복음의 역사를 보면 복음은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명쾌하게 선포될수록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냥 엉기덩기 어울려서 살아가던 종교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딱 들으니까 한쪽에는 “저거다. 우리가 정말 회개해야지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 한쪽에서는 “아니다 저거를 죽여버려야 돼. 왜? 하여튼 싫어. 죽여 버릴 꺼야” 그리고 돌덩이를 들고 덤비는 사람들하고, 회개하는 사람들하고 딱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그걸 누가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실패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이제 그렇게 반대하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에서 선교할 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굉장히 많은 헬라 사람들, 그 희랍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당시의 귀부인들, 아주 많은 귀부인들이 지체 높은 귀부인들이 그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회심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로서는 굉장히 놀라운 복음의 성과로 기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자신이 평가하기에는 그런 헬라인들, 더군다나 그 헬라인들은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유대인들을 알기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뭐 선한 것이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설교를 듣고, 그 수많은 헬라인들이 회개하고, 교육도 많이 받고, 지체도 높은 귀부인들이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이 사도 바울은 탁 판단하기를 이게 “말씀에 부흥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참된 부흥은 이렇게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공부도 필요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훈련도 필요하고, 교제의 프로그램도 필요하고 모두 필요합니다. 안 필요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다 필요한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훈련을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이 부흥이라고 부르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부흥의 결정적인 특징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그 변화가 믿는 사람 속에 고요히 갇혀있는 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 속에 파급적인 효과를 미치는 것입니다. 파급적인 효과인데 그런 것들이 즉각적이고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파급적인 효과를 이야기하면 사실 뭐 솔직히 교회 안에서만 갇혀있는 신앙적인 영향이라 그런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교회 안에 모였는데 조금 있으면 전부다 세상으로 돌아가고 내일 아침이면 다 직장 출근하고, 안 믿는 가족들 만나고 동리 사람들 만날텐데 갇혀있는 것이 있습니까? 뭐 어떻게 됐던지 간에 그 속에서 뭔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영적인 영향력이 부흥의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간접적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화) 깡패였던 이기풍씨와 김익두씨가 전도되어 새 사람이 된 이야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큰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접적인 것입니까? 예를 들자면 예수 믿어서 내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이웃에게 말도 걸고, 친절히 하고, 외상값도 갚아주고, 물세도 대신 내주고 세월이 한참 흐르고 보니까 한 일년쯤 지나고 보니까 ‘저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다. 그래 괜찮다.’ 이렇게 해서 받은 영향하고는 좀 다른 것입니다. 물론 그런 영향이 ‘쓸데없다’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부흥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3주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3주 동안에 그 허다한 사람들과 그리고 그 수많은 귀부인들이 회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던 사람들 속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말씀에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일 심각한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분들이 경험해봐서 알지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모두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게 믿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 망가진 그리스도인이 미치는 악영향은 한 사람에 불신자가 미치는 악영향보다도 훨씬 클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수평 이동한다고 그래서 막 그것을 흉보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라도 제대로 잘 믿고 몰랐던 복음을 깨닫고 참된 신자가 되어 가면 그것은 정말 선교입니다. ‘선교’ 그것이 선교라는 것입니다. 아니 내 이야기가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경험에 비추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을 때에 신앙생활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을 때에 그 개판 치는 신앙생활하고 비교를 할 때에 여러분들이 그 차이는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에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비교될 수가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을 안 합니다. “그때에 나는 정말 불신자보다도 나쁜 사람 이였다. 불신자야 주님을 모르니까 그렇게 살지만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도 짐승처럼 그렇게 살았었습니다. 그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가 보니까 이제 정말 그때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지 않아요. 그게 선교입니다. ‘선교’ 필요한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냥 이런 변화도 없이 그냥 철새처럼, 철새야 갔다가 돌아오지만 교인들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소수의 사람들을 빼놓고. 메뚜기 때처럼 몰려다니고, 자기 교회도 없고, 등록하지 않고, 이민 자들 불법체류 하듯이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그런 식으로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어디 가서라도 진짜 바르게 신앙생활해서 거룩한 성도로 살 수 있다면 내가 여러분 다 보내줘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다 보내주고 다시 교회 개척할 용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싸 짊어지고 있는 것이 곤고한 고생이면 고생이지 이게 무슨 수많은 사람들 에워싸고 둘러차고 있는 것이 이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큰 교회 목회 해봐야 고달픈 것입니다. 목회의 대 선배인 모세를 보십시오. 남 전도 회원만 60만 명 이였습니다. 그런데 뭐 남는 게 있습니까? 그러고도 유년주일 학교와 유치 영아 부와, 노년 부, 거기다가 여 전도 회 해봐요. 1.2.3.4 가 아니라 수 백 전도 회는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뭐 되었습니까? 일평생 그냥 죽도록 고생한 삶을 살았습니다.
충분히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데도 문을 두드리면서 상처받은 마음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릴 때, 제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오죽하면 수 십 년 정든 교회를 버리고 떠나는가. 그건 해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 함께 자란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와서 진짜 변화 받아서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자녀답게, 단 십 년이라도 살다가 죽으면 그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무조건 한 교회에만 눌러붙어 있으면 그것이 땡 입니까? 그걸 충분히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제가 “인정한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여러분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인정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말씀의 부흥은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정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막지한 인간들의 가슴속에 쾅 하고 파고 들어가서 그 영혼들이 거꾸러져서 피를 쏟는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해달라” 사도 바울과 일행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순회하는 전도자들 이였습니다. 기도 제목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신들의 신변에 안전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했을 것이고, 그리고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고 얼마나 그런 것들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첫 번째 기도 제목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형제들이여, 그대들 속에 일어났던 그 말씀의 부흥, 그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서 수많은 희랍 사람들이 무릎을 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고 지체가 높은 귀부인들이 체통을 내어버리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던 그 놀라운 변화의 역사, 그 부흥 말씀의 역사가 여기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 이게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누차 말씀드리지만, 여러분들 이다음에 죽기 전에 언젠가는 한가지 잘 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심하게 혼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의 목회자를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하지 않은 것과, 말씀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를 게을리 한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십니다. 그게 여러분이 얼마나 커다란 불순종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고 일하는 사역 자들이 자신의 직업에 성취를 위해서 기도하듯이 기도해야 할 그런 제목이 아닙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산다”고 하는데 그 나라가 이 땅에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 의가 어떻게 이 땅에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확장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데 그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악은(?)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의 나라의 영토를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빼앗아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교회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가슴에 변화와 회심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정말 잘 한 것이냐’ 라는 반성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때, 박 대통령 때, 국력을 기울여서 시도했던 사업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도를 바꾸자’ 이게 무슨 뜻입니까? 땅덩어리는 좁고 있어봐야 산들로 쌓여 있으니 땅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규모 간척사업을 많이 벌였습니다. 해양생태의 문제가 나왔습니다만 벌였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땅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 트럭 갖다가 모래를 부으면 한 뼘, 한 트럭이 아닙니다. 수백 트럭 갖다가 부으면 한 뼘, 수십만 트럭 갖다 부으면 열 뼘, 백 뼘 그랬습니다. 내버려두면 스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을 위해서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을 위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니까 그렇지 정말 한 사람에 신자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제 마음은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님에 진리의 말씀이 내 영혼을 지나가시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할 수 있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네가 그런 것 받을 자격이 있냐? 내가 왜 너한테 말씀에 은혜를 줘야 하니?” 그리고 주님이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네가 정말 그렇게 말씀에 불씨를 얻어가기 위해서 교회 속에 그 진리가 꺼지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네가 살았느냐?” 주님이 그렇게 물으실 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무릎을 끓고, 첫 번 째 시작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일용할 양식입니까? 가정을 위한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것입니까? 기도하는 가장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입니다. 그런 부흥이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 꺼지지 않고 치열하게 일어나도록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선택 사항이 아니고 엄숙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이 지금 지켜보고 계실 것입니다.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엉기덩기 묻어서 이리 우르르 몰리고, 저리 우르르 몰리고 그런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생각도 없이 남이 하니까 나도 따라하는 것이 그게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초점이 분명하게 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에 부흥을 위해 우리들이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큰 은혜를 주시고 예기치 않게 교회 처음 나온 사람들 회심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하나님, 그 동안에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주셨군요.” 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왜 오늘날 교회는 누가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시큰둥하고, 누가 예수를 믿기를 결심하고 변화를 받았다고 말해도 시큰둥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사모하면서 기도했다면 그런 사건을 보는 순간에 그는 번개와 같은 충격이 가슴속에 와 닿을 것입니다. “아! 내가 가슴에 한이 맺히도록 이 일을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이제 이 불씨를 보여주시는구나” 그러면서 가슴이 기쁨으로 차 오를 것입니다. 기도 안 하니까 “누가 회심했데” “응 그거” “누가 예수 믿기로 했데” “어! 참 그 인간 착한 생각했네”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만약에 우리의 시대에 어느 교회의 문을 두드리든지 두드리는 그 순간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가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에게 엄습하고, 언제 어느 시간에 예배당을 찾든지 선명한 예수 그리스도에 복음이 정직하게 선포되는, 그래서 말씀에 부흥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교회에 들여놓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그날 주님을 만나서 새 삶을 살게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서울에서도 예배드리면서 강릉에서도 그 일을 기대할 수 있고, 오늘 우리에게 행하신 이 놀라운 일들이 전국방방곳곳에 수많은 교회 속에서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라고 하는 이 감동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뛰지 않겠습니까? 오늘 수요 예배에 전국에서 수만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데 ‘아! 오늘 저녁에도 수십만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겠구나.’ 우리들이 이렇게 기대할 수 있는 조국에 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아마 벌거벗고 종로4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덩실덩실 춤을 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정말 말씀의 부흥이 있습니까? 부흥까지는 없어도 정직한 복음의 진리가 선포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방문하면 우리는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즉시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복음과 직면하고 있습니까? 뭔가 가리워 진 것 같지 않습니까? 10년 가까이 교회를 다녀도 교회는 한번도 회심하지 못한 그 영혼에 대해서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괘씸하게 생각하고 화를 내 본적도 없고, 그렇게 다녀도 회심을 경험하지 못하면서도 교회에 대해서 화나 본적도 없고, 자기를 그렇게 변화시키지 못하는 교회에 대해서 슬퍼해 본적도 없는 그런 만남이 정말 교회와 성도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말씀의 부흥이 꺼져있는 동안 교회 안에 사단의 세력들은 흥왕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불 신앙의 풍조들은 교회에서 활짝 꽃이 핍니다. 그리고 원수 마귀들은 하늘에서 박수와 갈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망가진 교회, 병신 같은 신자들이 모여있는 그 병든 교회, 그런 교회를 정말 새롭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들로 그 일을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그 일을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의 운동가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으며 탁월한 이데올로기에 미친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신령한 주님이외에는 죽어 가는 교회에 생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자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더 이상 주님께 바칠 사랑이 없고 자기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말씀의 부흥이 그친 교회를 위해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지 않습니다. 그런 동안에 악한 세력들은 참몰하고 하나님의 교회에는 작게나마 남아 있는 불씨도 꺼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조국 교회의 예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기뻐서 펑펑 울던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했으면 말씀에 부흥이 사라진 예배를 드려야하는데 하나님 찾아오지 않는 예배 때문에 서러워서 울던지, 둘 중에 하나 때문에. 뭐 좋은 게 있어서 문 앞에 만나서 활짝 웃고 주님은 통곡하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들이 형편이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 우리에게 수치심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입니까? 교회가 벌거벗음과 그리고 그 상처의 고통을 아는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이따금 주님의 은혜로 마음이 경건해지는 사람들도 말씀에 부흥이 사라진 교회에 초라하고 병든 모습을 보면서 밀려오는 슬픔을 금할 수 없거늘 지존하시고, 완전하시며, 거룩하시고, 아름다우신 온전하신 주님이 자기의 아들을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습니까? 그런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2천년 전에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통곡하며 우셨지만 오늘날은 조국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통곡하고 우시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가슴에 들려오는 세미한 양심의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이 모두 멸망되고 성전이 약탈되고 난 다음에 예레미아 애가 1장에서 그는 울부짖듯이 소리칩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는 너희들이여 너희에게는 오늘 내게 임한 것과 같은 슬픔이 왜 없느냐? 하나님이 나에 골수에 불을 보내어 그 골수에 하나님의 불길이 사무치니 내가 견딜 수 없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이 모두 훼파 당하고 성전에 아름다운 보물들이 모두 바벨론 사람들에게 뜯겨서 겁탈 당한 처녀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 선지자는 엎드려서 통곡하며 울고 사람들은 이 거리 저 거리를 겅둥거리며 뛰어다니면서 어디를 가면 양식을 구할 수 있을까. 집에 숨겨둔 보물들을 가지고 나와서 양식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때 선지자는 피를 토하듯이 울면서 말합니다. “너희에게는 어찌하여 내게 임한 것 같은 이 슬픔이 너희에게는 없느냐. 주께서 나를 이기었고 그 골수에 사무친 불을 내게 주셨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루 먹을 양식을 위해서 이 거리 저 거리를 뛰어 다니는 사람들이 되었느냐.”
하나님의 영광 없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행복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춤추고 노래할 시간이 아닙니다. 웃고 떠들고 즐길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의 가슴을 찢고 우리의 굳어진 무릎을 끓고,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을 주시도록 제발 사라지는 조국 교회의 불꽃들을 끄지 마시고 재 속에서라도 불씨를 찾아내셔서 다시금 불러 일으켜주셔서 그래서 그 불꽃이 다시 불길이 되어 타오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때라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말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말 그 앞에서 아양을 떨어서 그가 회심할 수 있다면 내가 진짜 유치원생도 될 용의가 있습니다. 내복 차림으로 춤출 용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어느 목사님이 “저는 곤장을 맞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람을 회심시키지 못합니다. 오직 누구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진리의 부흥, 말씀의 부흥만이 그 사람들의 마음에 달음질쳐서 그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 일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는 것 말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말씀에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거의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슬픔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얻은 구원이 값지고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참된 그리스도인의 가슴에 밀려오는 슬픔은 더 진했습니다. 왜 이 좋은 주님을 모르다니. 이 아름답고 행복한 구원을 모르면서 살다니. 눈물을 씻으면 천국의 기쁨이 밀려오고, 기도하면 이 기쁨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슬픔이 가슴에 밀려오는 것, 이게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표징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믿었다고 하지만 옛날에 여러분처럼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알고 살아가는 그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볼 때에 슬픔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거룩한 삶으로 들어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에 길을 걸어가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성도들은 거룩한 길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 그 비참함을 인한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그것이 있습니까? 또 우리에게 그것이 있을 때 필연적으로 그 모든 우리의 고통에 대한 유일한 해결이 말씀에 부흥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한번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사도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처지나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핍박을 그만두도록 그런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먼저 부탁하지 않고 말씀이 달음질치도록, 수많은 인파가 가득 모였을 때, 누구 한 사람이 막 미친 듯이 사람을 밀치며 뛰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수많은 군중에 한 사람이 대열을 가르고 지나가는 그 달음질에 이리저리 움직이고 흩어지는 광경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부흥이 있기를 그런 부흥을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이여 너희들도 경험하였으니 너희들이 경험한 그런 말씀의 부흥이 우리에게도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옳다고 안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헤집고 지나가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달음질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 마음속에 역사하고 달음질쳐서 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놓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한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몸소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말씀의 부흥을 위해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의무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오늘 이 시간에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하고 약속하십시오. 그런 말씀에 부흥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그런 말씀으로 이제껏 까지 살았는데 그런 말씀에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은 죄를 구체적으로 회개하고 어떻게 이제는 이 죄를 시정하고 새롭게 고쳐서 주님의 요구에 부흥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바로 이 순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기도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