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문을 여는 길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맺힌 것을 풀어야 기도가 된다 (막11:25)1999.10.18(가을사경회/오후) 1
2. 회개가 기도의 문을 연다 (렘31:20)1999.10.19(가을사경회/오후) 19
3. 절망 속에서 주님을 찾으라 (막5:25-29)1999.10.20(가을사경회/오후) 36
4. 기도하는 자에게는 위기가 기회이다 (열왕기하6:16-17)1999.10.21(가을사경회/오후) 47
5. 주님 안에 거하는 길, 기도하는 길 (요한복음15:7)1999.10.22(가을사경회/오후) 64
1. 맺힌 것을 풀어야 기도가 된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막11:25)
성경이 기도에 관한 교훈을 말할 때마다 그 기도가 응답 받는 조건으로써 강조한 요소 가운데 믿음보다 더 자주 강조되는 요소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도 길가에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가 보다하고 제자들이 함께 예수님이 저주하시는 음성을 들었는데 이튿날 가서 보니까 예수님이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완전히 말라버린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필이면 그 흔한 무화과나무 가운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무화과나무만이 그렇게 다 말라서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되었을까, 그렇게 제자들이 궁금해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으면 된다,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렇게 될 것이다, 거기서 감람산이 보였고, 그 감람산 너머로 사해가 보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마 산은 감람산을 두고 하신 말씀이고 바다는 사해 바다를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그렇게 명령을 해도 아마 믿음이 있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믿음을 얼마나 기뻐하셨는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런 믿음이 기도에 있어서 응답을 받는 얼마나 큰 비밀인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집에 가보니까 큰 거울 위에다 빨간 립스틱으로 “나는 믿는다” 거울에다 써 놓고 매일 쳐다볼 때마다 “나는 믿는다” 무엇을 믿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자기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그것을 거기를 쳐다보면서 매일 나는 믿는다. 얼마나 믿고 싶었으면 거울을 볼 때마다 “나는 믿는다”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실제로 신앙 생활을 해보면 믿어도 안되는 것도 많습니다. 믿음이 만능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정말 꼭 믿어도 안되는 것이 많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어서 “하나님 이번에는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응답해 달라고 매달리는데 이상하게 그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꼭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또 의심하는 마음을 물리치려고 상당히 노력을 많이 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는 말씀을 붙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도는 겨우 시작하였는데 응답은 아주 멀었는데 이루어진 것을 믿고 벌써 감사 헌금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을 믿습니다 라고 감사 헌금을 하는 것이야 자기의 마음이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고 그렇게 되리라고 하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믿고 의심치 않았는데도 안 이루어지는 경우를 여러분들은 한 두 번씩이라도 모두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얼마나 확실하게 믿었는지 그것이 응답되어지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당히 오래 걸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넘쳤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대개 어떻게 생각을 하면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꽉 믿었는데 아마 우리의 믿음에 결함이 있었나보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생각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소원이 워낙 강하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굳게 믿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이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말을 쉽게 하면 우리가 아무리 확실하게 믿어도 안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일러주시기 위해서 믿음이 얼마나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며 믿기만 하면 그 기도가 아무리 힘든 기도의 제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이루어주신다는 그 사실을 믿음에 대해서 강조를 하시면서 즉각적으로 그 믿음과 상관이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지만 기도가 응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이야기가 아마 어쩌면 예수님이 한번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따로 하신 말씀을 후대에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끼어 놓았기 때문에 이런 부자연스러운 문맥이 나왔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경험은 전혀 이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그렇게 분명히 확실하게 믿어도 안 이루어지는 경험이 우리에게는 참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너희들이 서서 기도할 때 뉘게 혐의가 있거든 용서해야 된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우리들이 기도를 하면서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들이 아무리 그 믿음이 확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신다는 단순한 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여러 사유들 중에서 특별히 믿음에 대해서 깊이 강조하신 끝에 바로 이어서 용서의 문제를 덧붙이신 것은 이것이 하나의 기도 응답에 있어서 믿음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똑같이 기도 응답에 있어서 믿음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늘 가르쳐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서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원래 서서 기도하는 것은 엎드려 기도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는 정신입니다. 완전히 엎어져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영광 앞에 자신이 얼마나 겸비하고 비천하지를 알고 엎드려지는 겸손의 표현이라면 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휴식을 취할 수 없이 서서 무엇을 섬겨야하다고 하는 경건의 정신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지체가 높으신 분 앞에서 편안한 자세로 앉으라고 몇 번을 권해도 편안하게 앉지 못하고 무엇인가 섬기고 있는 모습으로 서 있어야 되는 것 같은 그 정신이 서서 기도하는 정신입니다. 그래서 엎어져서 하는 기도가 겸비의 기도라면 서서 드리는 이 기도는 지극한 경건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서 기도할 때에 뉘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그런데 이 번역은 번역을 할 당시에는 이것이 적절한 번역이었을 지는 모르지만 혐의라는 말이 그 동안에 뜻이 많이 변해서 우리들이 죄인을 다룰 때에 죄가 있어 보이는 듯한 느낌과 단서를 가지고 있을 때 그 피해자에 대한 마음을 혐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희랍어 원문을 보면은 이 부분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누군가에게 대항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거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Against” 누군가를 대항하는, 누군가와 맞서는, 누군가와 다투는 그 어떤 것을 너희가 만약에 가지고 있다면 그를 용서하라고 되어있는데 희랍어 본문에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용납을 하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는 흔히 이 본문을 보면서 오래도록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그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뜻인가 보구나 합니다. 우리들이 습관적으로 이 본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본문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이면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 그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관심은 누가 잘했든 잘못했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지금 이 믿음 안에 있는 형제와 형제 사이에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항하는 감정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 자체는 믿음에 공동체를 향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에 주신 말씀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관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본문의 뜻을 그대로 보면 여태까지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런 해석은 아니고 이 본문의 정확한 의도는 왜 형제가 교회 안에 있는데 두 사람 중에 어느 한사람이 한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느냐, 왜 그런 일이 생기느냐, 누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겨서 한사람이 한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대항하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는지 성경 본문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기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누가 어떻게 되었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한사람이 한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그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적으로 보면 이해하기도 힘들고 적용하기도 너무 힘겨운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가 미움과 용서라는 시리즈를 여러분들에게 한 3년 전에 설교를 하면서 그런 말씀을 아주 풍부하게 많이 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은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밖에서도 그렇고 나는 가만히 있는데 그냥 와서 내 가슴에 깊은 상처를 확 내고 도망가는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서로 가다가 비켜가면서 부딪치면 덜 억울한데 그냥 빨간 신호등이 되어서 서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가다가 과속을 해서 확 섰던 것도 아니고 그냥 슬슬 가다가 빨간 신호등이 나와서 섰는데, 그런데 조금 있더니 눈에서 별이 번쩍 하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다보니까 웬 큰 승용차가 총알 같이 달려오더니 얼마나 들이받았는지 머리가 멍하였습니다. 차가 한 1M나 앞으로 밀렸습니다.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왜 와서 받습니까? 그것은 모릅니다. 자기는 사정이 있습니다. 라디오를 끌려고 하다가 그랬다고 합니다. 왜 라디오를 하필이면 거기서 끕니까? 그렇게 들이받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특히 이 교회 안에는 늘 말씀드리지만 세상에서 살다가 살다가 못 살겠으니까 모인 데가 교회입니다. 혼자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도를 해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전도할 때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손들고 옵니다 하면서 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도저히 혼자 살수가 없기 때문에 그 망가진 인간들이 모인 곳이 이 재활용 공장이라는 곳입니다. 여기가 그곳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목회자를 통해서 망치를 들고 용접기를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폐차처럼 된 사람들을 두들겨서 새 차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차는 완전히 똥차가 되어서 왔는데 한참 은혜를 받고 신앙 생활을 하고 나니까 그 차가 한번만 지나가면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눈이 부셔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똥차 그대로 있습니다. 망치만 대려고 하면 자지려지는 것입니다. 제발 손대지 말고 세단으로 만들어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와서 실망했다고 그러는 사람은 굉장히 들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다가 실망시키지 않는 교회를 찾지도 못하겠지만 찾아도 절대로 그 교회에 가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이 들어가는 동시에 실망스러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거의 고쳐져서 새 차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막 똥 냄새를 풍기면서 막 끌려온 차도 있습니다. 그런 차들이 다 있는데 자기는 옛날에 그런 차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차는 아직까지 핸들도 다 망가졌고 라이트도 안 들어오고 빵빵 소리도 못 듣습니다. 그러니까 와서 막 들이받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데 와서 가슴에 상처를 줍니다. 어떤 때는 정반대인 경우가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많이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 잘 도와주고 하는데 차 자체가 망가진 차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망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베푸는 사랑을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남이 베푸는 사랑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만 되면 그 사람은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고쳐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하기는커녕 가슴에다 칼을 꽂고 도망 가버리거나 사랑한다고 끌어안으려고 팔을 벌리고 기뻐서 쫓아가는데 얼굴에다가 가래침을 확 뱉고 도망간다거나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맞아 내가 그 피해자야”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가해자였던 적도 많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해한 것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고 피해를 받은 것만이 기억에 남습니다.
록 펠로우라는 시인이 자기의 세레나데라는 시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하늘로 높이 화살 한 개를 날렸네
그리고 난 그 화살 쏜 것을 잊어버렸네
먼 후일 그 화살이 나무에 깊이 꽂혀 있는 것을 나는 보았네
먼 하늘을 향해서 내 노래 한마디 불러보았지
먼 후일 내가 부른 그 노래가 내 친구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네
화살을 쏜 것도 잃어버리고 노래를 부른 것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가슴에 꽂혀 있고 수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떤 사람의 가슴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게 될 때 미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가해를 해서 잘못을 했을 때에는 은혜를 받고 깊이 회개를 하고 나면 그 머리 속에서 자기가 잘못한 것이 죽을 때까지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래도 은혜 받은 성도는 어느 날인가 깨닫는 날이 있습니다. “아, 내가 그 형제에게 그 때는 내가 화가 나서 그랬고 다른 감정에 의해서 충동을 받아서 고통을 주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형제가 너무나 마음이 아팠겠구나. 내가 잘못했다” 주님의 사랑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안 되겠고 추억을 더듬어 보니까 그 형제가 자기에게 베풀어준 것도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비교적 간단합니다. 찾아가서 미안하다, 내가 그 때는 정말 잘못했다, 그리고 너를 찾아와서 용서를 빌기까지는 자존심과의 싸움이 대단했지만 그러나 너한테 한번 자존심 상하고 무릎을 꿇는 것이 하나님과 등지고 사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에 내가 왔으니까 나를 보고는 용서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기억하고 주께 하듯이 나를 용서해 줄 수 없겠니 하고 용서를 빌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물론 어떻게 그런 것을 용서해 줄 수 있겠니 하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이 움직이면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풀립니다.
그러나 피해자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가 옛날에 나 찔렸지? 그런데 내가 이렇게 계속 아파했거든, 내가 아파해서 미안해” 그렇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누구를 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나 찔렸지 할 때 내가 언제, 그러면 이야기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만큼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어야지 찾아가서 용서를 빕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기도도 합니다. “하나님 저 형제가 나를 저렇게 미워하고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는데, 제가 마음을 다 엽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시면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도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저 친구 앞에서 기라고 해도 길 용의가 있고 땅바닥을 핥으라고 해도 핥을 테니 주님 가르쳐 주시옵소서”
드물기는 하지만 그렇게 기도를 해도 잘못한 것이 없는 때도 있습니다. 또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 있고 사람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앞에 가서 우물우물 거리면서 그것으로 끝내려고 하는 것이 오늘 이 개신교 교인들의 개인들의 신앙의 문제점이 아닙니까? 반대로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을 사람 앞에 가서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은 그것을 용서를 빔을 받는 사람도 직권 남용이고 그 비는 사람도 바보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는 어떡합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대책 없이 살아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끽 해봐야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주께서 알아주시겠지, 물론 알아주십니다. 그런데 알아주시는 것은 알아주시는 것이고 지금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상태가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혐의가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인 다음에야 그 형제가 자기에게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와서 받아버리면서 고통을 주었을 때 어떻게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정신구조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신앙은 뜨거운 것을 차갑게 느끼게 하고 차가운 것을 뜨겁게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그렇게 여러 가지 느낌과 고통,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신앙으로 잘 소화해내어서 자신의 영혼에 양약이 되게 하고 자신의 인생을 뒤틀려서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하는 패역한 길로 걸어가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기회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 지침을 오늘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형제와의 관계에서 가해자든지 혹은 피해자든지 간에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 본문은 그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누가 가해자든지 피해자든지 상관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하나님 앞에 있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무슨 일 때문이든지 누구를 향하여 Against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누군가를 향해서 이렇게 부딪히는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이모저모로 기도가 응답되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이지 그가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만약에 그런 정도의 그런 상황에서 기도의 은혜를 받을 것 같으면 그 서로를 향해서 Against하는, 서로를 향해서 무엇인가 용납을 하지 못하고 대항하는 감정을 모두 풀고 거두어 버리면 마치 예전에 기도 생활이 보슬비가 내리는 기도 생활이라면 그렇게 하고 나면 소낙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기도 생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열렬히 기도하면서 열렬히 믿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누군가를 향해서 혐의를 품고 있지 않습니까? 여태까지는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몰랐을 때에는 내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이 말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의 참된 의미 앞에서 여러분들이 가해자이건 피해자이건 그것은 상관이 없이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향해서 Against하고 있는, 누군가를 용납하지 못하고 대항하고 있는 그 소극적인 마음의 상태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굉장히 큰 기도를 가로막는 범죄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이 기도의 응답은 이 기독교 세계에서의 기도 응답은 이방 종교의 세계에서의 기도의 응답과는 차원이 많이 다릅니다. 이방신들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열렬한 정성이 자신들의 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엘리아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맞설 때에 바알 선지자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부르짖었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온 몸에 상처를 내면서 열광적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는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을 밟으면서 당신 앞에 나아올 때에 주님의 흡족한 사랑, 그리고 흉악한 죄인조차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방 종교의 세계에 있어서 기도의 응답은 인간의 열렬한 정성이 그 기도의 응답을 가지고 온다고 믿지만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존재인 인간 사이에 매끄럽게 흐르고 있는 어떤 흐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기도의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를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에 의해서 쉽게 얼어붙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자, 그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누군가를 향해서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호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수 십 년 동안에 쌓인 그 호의로운 감정이 어느 한 순간에 상대방이 결정적으로 말 몇 마디를 잘못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줄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수 십 년간에 신뢰를 쌓아온 관계가 잘 흐르는 물에다가 비교할 것 같으면 그런 자기의 마음에 깊이 상처를 주는 말 몇 마디를 듣는 순간에 흐르던 그 물이 단숨에 얼음처럼 물이 흐르지 않게끔 완전히 얼어 붙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많이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신뢰인데 몇 마디 말 한마디에 의해서 물처럼 흐르던 인간 관계가 단단하게 딱 얼어 붙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사이에 미치는 영향이 기도 응답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우리의 인격 사이에 흐르고 있는 영적인 흐름을 그런 식으로 얼어붙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영적으로 매우 둔감하기 때문에 그것을 깊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면 하나님의 말 한마디, 누군가를 험담하는 한 두 마디의 말, 그리고 누군가의 죄를 부당하게 지적하거나 누군가를 모함하는 한 두 마디의 무심한 말이 얼마나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잘 흐르던 은혜로운 영적인 교제를 얼어붙게 만드는지, 얼마나 심각하게 만드는지 여러분들이 성령 안에서 살아보면은 그것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풍부한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늘 열린 기도의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령한 응답과 그리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말씀이 그 기도의 통로를 통해서 풍부하게 흘러 들어오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면 자신의 마음이 그 보좌를 향해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는 이 열린 기도의 세계를 가져본 사람들은 조금만 기도가 막혀도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고 조금만 막혀도 그것이 얼마나 영적인 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가를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에 있어서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혀 기도를 하는 사람이 전혀 살아서는 안될 삶을 아무렇게나 덥석 덥석 살면서 담대해지는 이유는 뚫린 기도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경험한지가 매우 오래되었거나 혹은 거의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차피 막혀있는 것 얼어서 막히나 오물로 막히나 막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적인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기억을 해야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죄를 하나님 앞에서 심각하게 느끼든지 안 느끼든지에 의해서 죄의 크기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작은 죄에 대해서 어마어마하게 크게 느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죄를 작다고 생각하시면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거의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심각한 죄라고 생각하시면 그 사람은 심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그 심각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에 모든 영적인 생활에서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들어 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자기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사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합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수없이 가해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뻔뻔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가 되었는데 그 피해자로서 자신을 가해한 사람을 용납치 못하는 사람의 기도를 믿으면서도 안 들어주시겠다고 그럴 때 우리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사실을 하나님의 그 말씀이 먼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응답 받는 기도의 축복된 세계로부터 그만큼 멀어져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실제적인 문제로 들어갑시다. 그러면 저는 두 가지 방면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는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가해를 했다고 판단이 되면 여러분은 즉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여러분들이 가해한 그 형제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기 전에는 여러분들은 결코 축복된 응답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전에 여러분들이 아무리 영적인 축복을 누렸다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가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에게 상처를 준 것을 단지 세월이 오래 흘렀다는 이유 때문에, 두 번째로는 그 사람이 이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세 번째로는 이 문제를 들고 갔다가 그가 기억도 안 난다는 듯이 반응을 하면 내가 얼마나 창피할까 하는 식의 여러 가지 동기와 원인 때문에 여러분들이 명백하게 형제에게 가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이전에 아무리 풍부한 기도의 세계를 누렸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그것을 풀기 전까지는 파리한 기도 생활을 이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많은 증거를 스스로 헤아려 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분들이 받을 수 있는 수많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다 받지 못하는 사람의 자기 변명과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헤아림에 불과합니다.
용서를 빌어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선택할 상황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교회 공동체 속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어떤 동기에서든지 형제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 형제를 미워하거나 내가 그 형제를 험담하거나 그 형제의 성도로서의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가했을 때에 여러분들은 교회 밖에서 살아온 날들의 윤리를 이 교회 속에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세상 속에서는 두들겨 패고 물건을 빼앗기도 하고 없는 죄를 뒤집어 씌어서 법정에 세우는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험담하고 술자리에서 안주 값밖에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신 공동체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죄를 하찮게 생각하면 하나님도 여러분들을 하찮게 대우해 주실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 여러분들의 교회 생활과 신앙 생활을 돌아보고 믿음의 형제들에게 무엇인가 마음에 깊은 고통을 주거나 그에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주었거나 혹은 여러분들의 마음속으로 그에 대해서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여러분들이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은 결코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이 문제를 푸는 첫 번째 방향입니다. 그러면 좀 더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특별히 믿음의 형제들을 미워하는 이 문제를, 믿음의 형제들에게 무엇인가 가해를 하는 행위에 대해서 주님이 왜 이렇게 심각하게 다루시는가,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교회라고 하는 이 공동체의 특수한 성격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그리스도의 머리로 해서 이루어진 이 공동체는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교회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의 99.9%가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사람 때문에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비록 잘못이 명백하게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결국 넘어지거나 공동체를 향해서 가해를 할 때에는 항상 그 빌미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생활이 너무나 힘들어서 교회를 떠날 때 이렇게 핑계를 대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나는 그 교회가 너무 싫어, 그 교회는 매일 하얀 색밖에는 안 칠해” 그러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이 교회는 너무나 후지다고 하면서 떠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대개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과의 문제로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굉장히 부정직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르지 못한 상당 부분을 어느 빌미에 어떤 조건에 맞아떨어질 때 그 사람과의 관계의 탓으로 모두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의해서 정상적이고 좋은 교회 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을 보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보고 교회 생활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항상 교회의 영성을 깨트리고 뒤흔드는 사단의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 어느 날 커다란 죄를 교회 앞에 몰고 와서 확 퍼트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교회를 침몰시키려고 할 때 어느 한 순간 예배드리는 순간에 다가와서 수많은 젊은 남녀에게 간음하여 범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방법을 사단이 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 가난한 성도들에게 예배가 끝나자마자 도둑질하고 싶은 마음을 불어넣어 떼강도로 변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것은 사단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교회를 그렇게 시험에 빠트리고 하나님만을 섬겨야하는 공동체 성을 파괴하기 위해서 사단이 만드는 방법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염려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고 갈라놓는 것입니다. 이미 초대 교회에 성령이 놀랍게 강림했을 때에 조차도 사단이 그러한 교묘한 시도를 보이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부들을 돕는 문제였습니다.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 사이에 불평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서로 섭섭한 감정들을 품기 시작하면서 이전에 은혜를 받았을 때에 재산을 모두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주었던 이타적인 정신들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교회는 아주 기가 막히게 갈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단의 역사가 기가 막히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교회 안에서 형제를 향해서 무엇인가 상처를 주고 가해를 하는 그런 행위를 하나님께서 매우 심각한 죄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런 죄가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살인보다 가벼운 죄라고 생각하면 그러한 사고 방식부터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믿음 안에 있는 형제들을 가해하는 행위, 상처를 주고나 모욕을 주거나 무엇인가 그의 마음에 깊은 부당하게 고통을 주는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범죄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도록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예배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집회를 하면 전문적으로 털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 교회에 보면은 방주교회의 가방이 우리 교회에서 발견되고 우리 교회의 가방이 경신교회에서 발견되고 그런 일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어떤 사람이 옆에서 슬슬 예배를 드리다가 여러분들의 가방을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은혜를 받고 딱 보니까 신용 카드, 버스 카드가 잔뜩 들어있는 가방, 오늘 월급 탄 것까지 다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너무 속상할 것입니다. 은행에 전화를 해서 수표 번호를 알아 가지고 다 정지해놓고 돈이 얼마나 밑지고 안 밑지고 간에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기분이 나쁘고 어떤 의미에서 오늘 저녁에 받은 은혜를 까먹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겠습니까? 가방 하나 잃어버렸다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 아니시군요 하고 떠날 바에야 그 신앙을 가져서 무엇을 합니까? 그런 일이 생겨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주었습니다. 가해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 깊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행동은 그렇게 오해를 하면서 자기가 피해를 받았을 때 상대방에 대해 용납을 못하는 그런 감정을 가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정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 죄가 돈 가방을 가지고 도망가거나 밖에 나가서 간통을 한 것보다 더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각하게 이 문제를 기도의 문제를 이야기하시면서 여기서 거론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식으로 가해한 사람들이 그 죄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고 방식이 본질적이지 않고 피상적이고 굉장히 바리새인 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돈 가방을 가지고 도망가는 것이 오히려 형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것보다 훨씬 점잖은 범죄인지 이제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누가 누구에게 마음에 고통을 주었다고 할 때에 그 사람은 계속해서 교회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인간도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느 집사가 어느 성도의 가방을 훔쳐가다가 걸렸다고 하면 그는 완전히 매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까?
한사람의 진짜 영적인 사람이고 심신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판단은 그렇게 우리들 속에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사고 방식과 타협된 사고 방식이 아니라 복음의 빛 아래서 본,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입각한 그 상태에서 그 죄질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영성의 핵심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은 자기 혼자 범죄한 것입니다. 도둑질 당하는 사람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깊은 상처를 주고 나니까 이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자기를 향해서 혐의를 품은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가해자가 됨으로써 자기가 가해하지 않았으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았을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심히 이 대적하는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 혐의를 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만 실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든지 내 인생을 고쳐보려고 온 사람의 형상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런 죄에 대해서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죄가 이렇게 깊고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들이 이러한 죄를 얼마나 잘 짓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를 저지르면서도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에는 인색하고 사람을 향해서 이런 것들을 돌이키기에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모저모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나지 않은 것까지는 우리가 회개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고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나는 것은 우리가 명백하게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사고가 바리새인적인 사고입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이런 죄가 이 교회에서 형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범죄이고 전자의 두 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범죄이지만 그러나 후자는 얼마든지 용납될 수 있는 범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들이 우리를 바리새인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성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세상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사고 방식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들이 피해자가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느냐 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피해자가 되었을 때는 여러분들이 그 가해자를 향해서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 말씀인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희랍어 원문에서는 용납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던 그 용납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형제에 의해서 깊은 상처를 받는 고통의 피해를 입었다고 할 때,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그 형제를 용납하기 어려운 감정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한 25년 내지 30년은 안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무교동인데 밤에 책가방을 들고 모범생이라서 착실하게 공부를 하고 밤에 횡단보도를 걸어오는데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눈이 나빴습니다. 횡단보도의 중간쯤 건너왔는데 누가 제 얼굴에다 침을 탁 뱉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가 막혀서 눈을 뜨고 보는데 중국집 철가방을 든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었습니다. 보니까 제 또래였습니다. 멱살을 쥐고 횡단보도 밖으로 나온 후 왜 내 얼굴에다가 침을 뱉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미안하다고 하면서 아무도 없는지 알고 공중에다 침을 뱉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탁 들어보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저하고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달을 마치고 빈 가방을 가지고 뛰어오다가 침을 뱉었는데 신속하게 제가 뛰어 들어오더니 그 침에다가 내가 얼굴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교인들이 그 지방에 이사를 가면 그 교회로 가라고 제가 추천해주는 그런 분이십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전도사님들과 심방을 가시는 길인데 웬 처녀가 버스의 손잡이를 잡고 흔들흔들 거리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미를 해서 쏟아지는데 목사님의 옷을 다 버렸답니다. 운전사도 화를 내고 하니 당황을 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이 목사님께서 “괜찮습니다. 닦으면 되지요. 괜찮습니다. 다 나오셨나요? 주여” 그것은 예수를 한참 믿은 목사들 중에서도 몇 사람 하는 것이지 고등학생이 길거리를 가는데 침을 뱉었는데,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목사 이상으로 인격적으로 깊이 성화된 사람들은 진짜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가해도 주여 하고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그 정도로 잘 살아가는 사람을 찌르는 사람도 없겠지만 누가 자주 찌르겠습니까? 그런데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 케이스에서는 자기가 피해자가 되었을 뿐이지 어저께는 자기가 가해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침을 확 뱉는데 어린 마음에는 모욕 받는 감정이 치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하고 모범생이라도 솟아오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확 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할 것은 그렇게 치밀어 오르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일지라도 해가 지나도록 분을 품으면서 있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분을 품고 살려는 자신의 의지도 굉장히 많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피해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면 확 하고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터져 나오는데 그 다음에 그것을 계속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자기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집이 가난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철거로 인하여 대토를 받아서 사는 평화로운 동네였는데 발칵 뒤집혔습니다. 재계발을 한다고 돈을 내놓든지 아니면 돈이 없으면 나가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분담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서로가 씨름을 하였는데 어느 날 직장을 갔다가 왔는데 저희 집뿐만이 아니라 이웃집이 다 없어졌습니다. 평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흙으로 덮여 있는 구멍 속에서 어머니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것도 황당해서 가슴이 떨리는데 철거반이 때려서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피가 확 거꾸로 서는데 이래서 살인을 하는 것을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스물 갓 넘었을 때인데 거기서 파출소가 2Km 가까이 되었는데 단숨에 뛰어가서 들었다가 놓았습니다. 손에 망치와 칼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지서장한테 심한 말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돌아오면서 이것을 내가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 것인가 생각을 하면서 철둑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은혜를 참 많이 받으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혀끝에까지 살기가 뻗어 나오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걸어오는데 강하게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하라” 그러면서 귀에 아주 쟁쟁하게 들려오는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막 들려오는 것입니다. 중간쯤 왔는데 그 철길에 서서 막 울었습니다.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그냥 직장에 갔다가 오니까 집이 없어지고 어머니는 피투성이가 되어서 나왔는데 내가 법 따라서 고소를 하겠다고 그러는데 성령님이 그러면 안된다, 내가 너를 어떻게 용서해 주었는데, 막 씨름을 하면서 걸어왔는데 그 1Km 가까이 걸어오면서 결국은 용서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때 마음속에서 찬양이 나왔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니 예수를 위해 삽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저도 하나님의 강력한 성령에 의해서 움직였고 즉각적으로 순종했으니까 가능하지 그 후에 살아온 저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에게 끔찍한 가해를 했는데도 순식간에 그 문제를 완전히 정리하고 마음에 누군가를 향한 혐의를 모두 없애 버리는 순발력을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연히 그럴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든지 못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어쨌든 그것이 있으면 기도할 때에 응답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도하기가 힘든지 아십니까? 가장 커다란 이유가 시간이 나지 않거나 힘이 들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하는 그 순간만큼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주시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기도가 잘 안되면 특별한 다른 이유가 있어서 안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몸이 너무나 피곤하다거나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 있어서 기도가 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오랜 동안 기도가 안되는 것처럼 여겨지면 하나님이 별로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본인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청교도가 말하기를 “한사람은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그 존재를 넘어설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기도하는 그 순간에 그가 바로 그다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가해자가 되었든 피해자가 되었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응답이 없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느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지 않는구나, 이유가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성경적으로 더듬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나는 피해를 당했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은 아닐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은 자기 장단에 맞추어 주지는 않습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방향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해를 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피해를 본 사람이 어떻게 보면 더 어렵습니다. 가해를 한 사람은 자기가 명백하게 어디서 떨어졌는지 압니다. 또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를 본 사람은 어디서 자기가 떨어졌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고 기도에 있어서 응답이 없고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에 깊이 장애가 오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에 하나는 처음에는 작았던 것 같은 사람의 원망이 점점 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모든 불만까지도 그 사람 때문이라는 원인 제공을 했다는 것에 때려 맞추면서 모든 자신의 영적인 이 어려움, 하나님 앞에서의 이 신령한 기도가 잘 안되는 것, 영적인 회복의 지장이 오는 이 뒤틀린 이 모든 문제들을 가해한 그 순간에 모든 자신의 상태를 몰아갔다 라고 하는 거기에 초점이 맞춰서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딱 아픔을 주었기 때문에 “나, 너무 아퍼. 너 왜 그랬어”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 다음에는 네가 나를 그랬지 하면서 그 상대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이 적극적인 미움의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적어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가해를 했는지 누가 피해를 받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상대방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용납하지 못하는 강한 Against하는 이 마음, 이 대항하는 이 마음 상태 자체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굉장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면서 비슷한 일들이 계속 한사람을 향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은 결국은 피해를 본 그 사람의 마음속에도 이런 점에 있어서 패역이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누구의 책임이냐 하고 묻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구 때문이냐가 아니라 이 상태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용납하라, 용납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항상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해를 해서 상처를 주었을 때 그것이 마음속에서 증폭되면서 아픈 감정이 그 상한 마음으로, 상한 마음이 적극적으로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자신에게 저 사람이 입힌 상처를 주는 행위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생각을 바꿔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우리가 피해자가 되었고 상대방이 가해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피해를 받으면서 살아온 날 보다는 지금처럼, 지금 당하는 것처럼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살아온 날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용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이렇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깊이 상처를 주었을 때 그를 용납하는 것은 그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영혼을 위해서 그를 미워하는 마음,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을 털어 버려야지만 자신의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들이 상대방이 자신에게 이러한 상처와 아픔을 가했을 때에 끝까지 그를 용납하지 못함으로 일방적으로 입은 피해가 아픔, 아픔이 상처로 상처가 적극적인 미움으로 거기에서 발전해서 살인의 감정으로까지 치달아서 피해를 입은 그 사람의 영혼을 모두 망쳐놓는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문제를 풀 때에 자신에게 가해한 그 사람을 보면서 풀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즉시 주님 자신이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주안에서 너희 형제들을 용서하라”하신 것처럼 자신이 주님 앞에 한 때 일방적인 가해자였던 것을 생각하고 자기가 그렇게 가해자가 되었을 때에 우리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그런 미움에서 벗어나는 그런 혐의를 품어서 기도의 세계가 완전히 고사되는 위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격이나 여러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호탕한 기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오히려 그럴 때에 형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떠났을 때 여러분들은 그 아픔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한 때 주님을 이렇게 아프게 한 사람이라는 것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아프게 했을 때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생각해야 되는데 그렇게 주님이 여러분들을 다루신 역사 그 자체가 여러분들의 신앙의 역사입니다. 어떻게 다루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이 세상에 사셨던 이 생애는 용납의 생애였습니다. 만약에 그분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가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명령을 용납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이 죄와 슬픔이 많은 어두운 세상에서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셔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려오셨어도 만약에 그분이 죄인들이 당신 가까이 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더라면 부당하게도 우리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는 비난을 받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죄인들과 왜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는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용납하면서 받는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는 것보다는 그렇게 용납해줌으로써 치료하고 고쳐야할 병든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 더욱 깊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용납하는 태도로 일생을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때때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끌어 오르는 분노로써 그들의 죄악을 탄핵했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흉악한 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그러한 죄가 거룩한 하나님의 명예에 얼마나 더러움이 되는지를 신랄하게 비난을 했지만 바리새인들을 포함해서 그들보다 더 나쁜 사람들, 그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향해서 보여주신 그분의 태도는 그분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그 모든 분노가 죄를 향한 분노였지 죄인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바를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기도를 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악한 원수들의 손에 의해서 못 박히고 가시관을 쓰신 채 하늘 높이 나무에 달리셨을 바로 그 때였습니다. 이제껏 까지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수모와 고초를 당하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에는 메시야의 고난은 극에 달았고 이 세상에서 받는 메시야의 치욕이 극도에 달했을 그 때였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이셨기에 우리가 느끼는 모든 아픔을 동일하게 느끼는 그 분이셨고 그분의 생애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심한 고통을 받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져 온 것이 아니라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의 가해 행위를 통해서 다가온 고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아래에 두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찢어지는 살과 그 살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핏자국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후비고 드는 고통에 마음을 쓰셨던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벌 아래로 들어가게 될 영혼들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바를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셨을 때 사실은 이것은 기도이기보다는 죄인들의 편에서 서서 변명하여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살을 찢으시는 처절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고통에 마음을 쏟는 대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불쌍한 인생들, 자신의 손에 망치 들고 못 든 체, 피 묻힌 그 인간들이 저지른 그 죄악들 때문에 당할지도 모른 그 영원한 형벌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만약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찢어지는 자신의 살과 그리고 뼈를 깎으면서 밀려오는 육체의 고통에 마음을 썼더라면 의롭게 살아온 자신의 지상의 생애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더라면 흠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순결한 하나님이 바로 당신이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쓰셨더라면 그는 그렇게 기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쓰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이 사람의 손을 빌어서 화목제물이 됨으로써 우리와 같이 쓸모 없는 수많은 정죄 받은 우리의 영혼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그 감격적인 기대가 자신의 육체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그들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은 한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스데반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한편의 구원사를 꿰뚫는 장쾌한 설교를 유대인들의 가슴에 새겨놓은 후에 마침 이 설교를 다 마치지 못해서 쏟아지는 돌팔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습니다. 여기저기 자기를 깨트리고 피묻은 돌멩이들이 나뒹구는 그 상황은 사실 구약에서는 율법을 어긴 끔찍한 죄를 지었을 때나 두 세 증인의 증언을 통해서 판결을 받고서야 행해질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를 증언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돌팔매질을 당하고 죽어가면서 그는 예수님의 기도를 되풀이했습니다. 암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기도를 올렸던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가슴속에서 우려 나오는 기도로써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를 향해 돌 던진 사람, 자기가 그토록 기도해오고 사랑했던 인간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죄도 정하지 않고 돌을 던질 수 있었을까하고 생각했더라면 그런 기도는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하늘을 향해서 천사와 같이 얼굴을 빛나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가 죄도 없는 자신을 향해서 돌팔매질로 가해해서 목숨을 빼앗은 흉악한 유대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고난받는 자신을 영접하기 위해서 보좌에서 일어서서 두 팔을 벌리신 자기와 똑같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교회가 나빠서 그런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이 너무나 운이 없어서 그런 상처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교회는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보다 신앙이 성숙한 수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만들면서 그 상처를 딛고 용서하고 용납해주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을 힘입어서 여기까지 와서 오늘은 이제 우리보다도 더 망가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는 처지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내가 나를 가해한 사람을 향해서 나를 변호하고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라고 하는 생각을 되뇌면 되뇔수록 한 인간을 향한 복수심만 불 탈 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럴 때 눈을 들어서 우리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버리셨던 주님,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핍절한 인생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자기를 찢어서 그 피를 길에다가 깔아서 그 피 길을 밟고 하나님 앞에 가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던 우리 주님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미성숙한 지체들로부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을 때에 우리가 이런 태도로 사람을 바라보는 대신 주님을 바라보고,
내 고생한 모든 일들은 주께서 아시리
정말 그래서 그때마다 우리는 교회를 많이 사랑하고 내 평생에 이 교회를 사랑하고 이 교회에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젊음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바치지만 그러나 여전히 이 교회는 우리가 영원히 있을 곳이 아니라 정말 미움도 없고 상처도 없고 원망도 없고 용서하는 사람도 없고 용서를 비는 사람도 없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남들이 모르는 주님의 사랑을 알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는 상처보다도 더 큰 부채 의식을 느끼며 “그래 주님이 내게 저 형제에게는 미처 보이지 않은 더 큰사랑을 나에게 보이셨어. 내가 주님의 큰사랑을 입었으니 내가 주님의 큰사랑으로 형제를 용납해서 내 영혼도 지키고 형제의 영혼도 지켜야지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여러분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지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순교의 순간 순간을 넘기는 것만이 고난이 아닙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고난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시고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용납하셔서 그 복음의 진리아래 살게 하시고 그 은혜의 빛 아래서 살게 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무지와 어두움 속에 살도록 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짐승과 같은 우리를 수시로 깨우치시고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지식과 총명을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받고 있는 이 상처보다는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많이 빚진 사람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특별히 빚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 그때가 주님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교회 안에서 우리들이 그 동안 지체들에게 끼친 상처를 깊이 회개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그리고 내가 비록 피해를 입었더라도 마음 깊이 형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전에는 미워하던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측은하게 보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나아가서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끔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입었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미움의 문제에 하나에 걸려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원대한 하나님의 백성이 가는 인생의 길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얻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이고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이루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뜻이 얼마나 큰데 우리들이 사람을 미워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그 작은 덫에 걸려서 우리의 신앙의 인생을 여기에서 마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들이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고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소망의 길이 너무나 멀고 이렇게 작은 인간 관계에 고통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앞으로 거룩한 소망의 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왕국을 위해 부름을 받은 소명의 길을 걸어가면서 진정으로 주님이 우셨던 그 자리에서 울어야 할 날들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계속해서 기도학교 사경회가 이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마음속으로 화해하고 용서를 빌고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깊이 하나님 앞에 마음에 묶어놓았던 모든 매듭들을 푸시길 바랍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비로소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신령한 기도의 영이 쏟아 부어져서 파리한 여러분들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그 날에 비로소 내가 이전에 하찮게 생각했던 이 형제들과의 맺힌 이 범죄가 이토록 큰 것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망가진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우리 모두 망가진 그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만 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매순간 고쳐지길 원하고 늘 울어도 이만큼 밖에는 살 수 없는 우리 자신에게 아파하면서도 우리는 좀 더 고쳐진 삶을 살고 싶고 하루를 살아도 빛 가운데서 정상적이고 온전한 삶을 살아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소원을 가졌으니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준 지체들을 용납하고 상처받은 지체들이 그것을 깊이 회개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용서하며 그렇게 하면서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여기에 우리를 모아두신 이유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 서로를 긍휼히 여기면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면서 우리의 인생이 다가도록 정말 망가진 사람들이 모인 그 교회를 온전한 교회로 바꾸어나가고 그래서 더 많이 망가진 사람도 더 속히 고쳐질 수 있는 치유의 능력을 가진 교회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은 우리들이 마음에 이런 맺힌 부담들을 모두 떨고 진심으로 형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화해와 화목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기도 생활도 하나님의 축복을 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이 문제들을 이제는 회피하지 말고 모두 정리하고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과 아픔을 주었어도 그 복수심을 안고 살아가고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마지막 대가는 망가진 영혼과 고장난 교회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것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갈망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마음에 깊이 손을 얹고 여러분들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명백히 잘못한 사람들은 오늘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시 나가십시오. 주님이 막혔던 기도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을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회개가 기도의 문을 연다 1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責望)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惻隱)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20)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 임금 때부터 시작을 해서 굳이 연대로 따지면 약 620년 주전 경서부터 시작을 해서 이제 유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586년 그 이후에까지 남왕국 유다에서 예언활동을 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할 때에는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벌써 100여 년 전에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에 의해서 점령을 당하고 지도상에서 이미 사라져버렸습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모든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전적인 부르심에 의해서 선지자가 되었고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되 처절하게 타오르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가리켜서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그 시기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시야 임금을 끝으로 이스라엘은 급격하게 쇠퇴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 여러분들이 역사에서 배운 앗시리아라는 나라에 의해서 멸망해 버렸고 이제 반도막 남아있는 이 유다 마저도 죄악을 인해서 돌이킬 줄 모르는 완고함에 의해서 멸망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었고 그리고 그 역사의 전개의 과정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모두 읽어냈고 백성들이 마지막에는 어떻게 역사를 파국으로 끝낼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닿는 대로 하나님이 이 역사를 어떻게 끌고 가실 테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지만 살 수 있는지를 힘껏 예언했지만 예레미야의 이 진실한 외침은 멸망하기로 작정된 역사 속의 대부분의 백성들이 그러하듯이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서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드디어 예루살렘이 모두 파괴되고 망하는 광경까지 모두 지켜보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이 예레미야가 31장에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오늘 읽은 이 앞부분을 유다 나라에 대한 예언이고 제가 읽기 시작한 그 부분부터 오늘 여러분들이 읽은 바로 뒤편까지는 이미 망해버린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한 예레미야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그를 책망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이 그를 깊이 생각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서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를 반드시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아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기도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하면서 왜 오늘 이 말씀을 택했느냐 하면 그 앞부분을 보면 이제 이 북왕국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가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렇게 회개를 하면 나 여호와는 이렇게 그를 대하리라고 하는 그 공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가상적인 북왕국 이스라엘은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그래서 이미 망해버린 이스라엘이지만 선지자가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러한 하나님의 반응, 이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범죄했기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경고를 하신 후에 결국은 이 북왕국을 앗수르의 손에 넘겨주시고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 나라에 의해서 정복되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애굽의 땅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들어보내셨는데 이제는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거기로 들어보내신 진정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실된 정체를 잃어버리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쓸어버리심으로써 유다에 대해서 경계를 삼으셨지만 유다 역시 자신들의 동족인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북왕국 이스라엘을 모두 쓸어버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심판으로 내어주신 그 하나님이 오늘 다정하게 에브라임을 부르시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애칭을 부르시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시는 자식이 아니냐”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에브라임을 말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조차 그를 깊이 생각하시고 나아가서는 그를 측은히 여기셔서 반드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겠다는 말씀을 여기서 해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보여주셨던 엄격한 하나님의 태도,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자 쓸어버리시던 그 하나님으로서는 어울리시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호의를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바로 앞에 보면 이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기도가 바로 회개의 기도였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주목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야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관건이라는 말씀을 오늘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냉담해지신 것처럼 느껴질 때 사실은 하나님이 냉담해지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차가워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열고 다시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늘에 홀로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하는 삶 가운데 깊이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영향을 주시고 은혜와 변화와 응답과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증거를 보여주시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개의 기도가 선행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탄식하며 내가 정녕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나를 돌이키소서 내가 돌아가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스라엘의 회개하고 있는 이 기도의 특징은 첫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며 겸손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그때에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하나님이 자신들이 징벌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망할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북왕국도 마찬가지이지만 한 나라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려고 할 때 그들이 얼마나 안간힘을 쓰면서 망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생명을 가르쳐서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라고 그랬습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그 자체가 커다란 생명체이고 그리고 그 나라는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정치가들과 모든 사람들은 지위와 모든 것을 동원해서 자신의 민족을 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멸망을 눈앞에 두고 바벨론에게 망하지 않으려고 애굽과 내통하면서 애굽의 세력을 업어서 바벨론을 눌러보려고 시도했던 것도 역시 이러한 몸부림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망하고 난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마 자신들의 나라가 망한 이유를 군사가 부족하거나 탁월한 정치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결정적인 패배를 가져다주었던 어떤 전투를 기억하면서 그 전투의 패배가 자신들의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가 망하고 많은 고난과 환난을 당하면서 가상적으로 성숙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들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길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대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운이 없거나 수준이 낮은 정치 지도자나 좋은 이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에 의해서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다 하는 그러한 생각이 이 회개 기도의 첫 번째 특징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여러분들은 오늘 선지자가 보여준 것 같은 이런 시야로 여러분 자신의 고통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지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여러분들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 역경과 더불어 씨름했지만 여러분들이 아무리 역경과 분투하며 씨름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역경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려고 하는지 신앙적인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은 고난 속에서 고생할 뿐이지 결코 그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할지 찾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완악하고 하나님을 거슬리는 백성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측은히 여기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러주고 기뻐하는 자식이라고 불러줄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을 향해서 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회개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그 신앙을 되찾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죄가 없음에도 받는 애매한 고난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이 우리의 잘못과는 관계가 없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히려 비록 우리들이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고난을 해석하면서 아버지 앞에 다가갈 때에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무슨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닌지 우리들이 깊이 오히려 살피면서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안전한 접근일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가 하고 생각을 하고 그래도 해당사항을 없으면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에게도 옳은지 되물어야 할 것이며 설령 우리에게 그러한 징벌을 받을 만한 죄가 없다할지라도 우리 안에 어떤 더러운 것과 정결하지 못한 것들을 씻어버리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특별한 섭리 가운데 우리를 지나게 하시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나는 의로운데 재수가 없어서 이 고난을 당한다고 하는 불신앙적인 태도나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데도 하나님이 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돌아보시지 않기 때문에 내 고난을 가중되고 있다는 식의 이 자기 의에 빠진 사고 방식들은 결단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들은 먼저 두 가지 각도에서 여러분들의 고난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선 그 고난이 여러분들의 지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닌지 진지하게 하나님께 물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여러분들의 인생을 결정해버린 여러분 멋대로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그 열매를 그대로 거두는 것이 여러분들의 고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혹은 여러분들이 돌이키지 않는 어떤 죄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영혼과 삶을 뼈아픈 고통 속에 몰아넣으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여러분들이 비록 그런 혹독한 징벌을 받아야할 정도로 아버지 앞에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인생의 과정을 거치면서 쌓여온 순수하지 못한 신앙의 불순물들을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정결하게 씻어내시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그 고난 가운데 두실 수도 있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에 이 고난은 매우 부당한 고난이고 그리고 내가 지금 이렇게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식의 반응을 갖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도움이 안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고난받게 하실 때에는 분명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특별히 징벌하거나 특별히 그들이 고통스럽게 느끼는 상황에 그들을 버려 둘 때에는 그들을 향한 특별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는 여러분, 무엇인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고 싶은 수많은 길이 있는데도 막히는 것 같은 불통을 오랫동안 경험하고 있는 여러분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오랜 세월동안 무엇인가 내 인생이 가던 길에서 이탈해서 무엇인가 정상적인 쾌도를 벗어난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여러분들은 이 시간에 오늘 이 에브라임이 고난을 당하면서 정직하게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것은 저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라고 고백했던 그 겸허한 고백을 여러분들 자신들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이야말로 최선의 정책이고 진실한 것이야말로 모든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첩경이라는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깊이 바꾸어야합니다. 고난을 오랫동안 당하면서도 자기 의에 빠져있는 사람들, 자신이 마치 욥의 화신이 된 것처럼 자신이 하나도 잘못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기가 고난을 받고 있다는 그런 식의 자기 의에 빠진 태도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죄를 깊이 인정하는 그 회개의 기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바꾼다는 사실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을 그냥 정치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역사적으로 일어난 이 불행한 일을 신앙적으로 해석을 하고 그것이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라고 하는 인식에 눈을 뜨면서 회개를 하니까 느껴지지 않던 하나님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긍휼과 사랑이 느껴지지 않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회개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하나님 앞으로 자신들이 돌이키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과거에 대한 깊은 후회와 회개,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돌이킴의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회심이라고 불리 우는 양면, 회심의 한쪽 면은 자신의 지난 죄를 깊이 회개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첫째는 자신들이 당한 진한 고난이 하나님 앞에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는 것을 회개하면서 깊이 깨달았고 또 하나는 그들이 그렇게 깊이 회개하면서 강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 욕구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욕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난 죄를 깊이 뉘우치고 우리가 오늘날 당하고 있는 많은 고난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한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회개하는 일이 필요하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우리들이 이대로는 살 수 없으니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야겠다는 강한 욕구를 가져야지만 그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바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어붙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다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실존을 우리들이 신앙 생활 속에서 느끼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우리의 신앙 생활이 모든 관건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길,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없었던 우리의 마음이 열려서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마음이 새겨지고 들려지는 어떠한 변화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회개라는 이 자체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나 드물게 회개하기 때문에 너무나 드물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은 거의 회개가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고 이모저모로 자신의 신앙 생활을 선하게 만들어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러나 조금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은혜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보십시오. 물론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잘 지키며 생명의 근원이 되는 그 마음을 보존하여 견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노력들만으로는 결코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늘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정말 변함없이 주님의 이름만 높이면서 살고 싶어도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완전히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밖으로는 이 세상과 마귀가 끝없이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시험하고 그리고 때로는 이런 마귀와 세상이 공격이 없어도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한 본성이 끊임없이 우리를 죄 가운데로 사로잡아 가려고 합니다. 큰 은혜와 하나님을 향한 감격 속에서 살 때에는 거의 우리 속에 어떠한 죄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잠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독버섯이 솟아나듯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본성, 주님의 영예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하고 십자가를 지고 살기보다는 십자가를 타고 다니며 살고자 하는 사악한 우리의 옛 사람의 본성이 다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정말 충만한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충만하고 뜨거운 하나님과의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이처럼 죄의 영향이 피할 수 없는 영향이기 때문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깊은 회개가 늘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헨리 스쿠갈은 말하기를 살아있는 성도의 가장 일차적인 특징은 깨트려진 마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깨트려진 마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정말 못 살았기 때문에 깨트려진 마음일 수도 있지만 이 깨트려진 마음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기 전에는 만족할 수 없는 마음, 그리고 그 충만한 하나님과의 감격 속에서 살고자 할 때에 그런 신앙의 감격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난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정사나 권세나 이 세상의 주관자나 어떤 불행과 어떤 시련과 어떤 고통과 어떤 가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가능합니다. 사소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고 오늘 아침에 폭포수처럼 복받쳤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감격을 오늘 오후에는 모두 말려버리고 건조한 마음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탁월한 능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전한 성도일수록 그는 회개할 필요가 적어진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언전한 성도일수록 회개할 필요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정말 주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 바울과 같이 고도의 영적인 삶을 누렸던 사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 속에서 살았던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쉽게 경험될 수 없었던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큰 기쁨과 감격을 경험했던 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 상태에서 일생을 지냈으리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가 눈병이 쉽게 나을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저는 직감적으로 아마도 추측하건데 그의 눈물 많은 생애가 그의 안질을 쉽게 낳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자신의 작은 죄로 인해서 아파하며 통회하고 회개하는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은 눈에는 눈물이 고이나 마음에는 신령한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비록 바울과 같이 그렇게 수준 높은 영적인 삶은 아니지만 우리의 신앙 생활의 경험을 뒤돌아보면 묘한 아이러니가 성립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돌아볼 때에 가장 기뻤던 때는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렀을 때입니다. 그리고 가장 마음이 아팠던 때가 사실은 가장 기뻤던 때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때가 가장 기뻤던 때이고 자신의 부족을 인해서 가장 아팠을 때가 하나님께 가장 인정을 받았을 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사도 바울이 이 세상에 누구도 느끼지 못한 그 수준 높은 영적인 기쁨에서 산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은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라는 이 역설적인 두 논리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경도 알고 우리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회개를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은 나는 날마다 나를 죽이노라 입니다. 여러분 혈기망자하던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어떻게 죽게 됩니까? 오래 교회에 다니면 교회 생활의 에티켓을 많이 배우고 다듬어져서 그 혈기가 언젠가는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알던 전도사 한사람이 교회에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는데 전도사가 처신을 잘못하니까 그 제직들이 전도사가 이래서 덕이 되겠느냐 하면서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거기를 막 뛰어들어가서 다 고소해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저와는 헤어졌습니다. 그 후로부터 정확하게 12년 후에 학교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성질 그대로입니다. 그때는 집사들하고 싸웠는데 이제는 교수들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하는 이 말은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회개의 경험 없이는 죽는다는 이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늘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할 수 있는 회개의 영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산을 옮길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산을 옮기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옛날에 교계에서 인격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으면서 교회 일을 많이 하던 사람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그분의 죽음을 보고 일은 참 많이 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무서운 평가입니까. “아 그 사람이 죽다니,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 앞에 늘 하나님을 친근하고 경건하게 살지 않던 사람이 일찍 죽으면 역사는 무엇이라고 말하면 하나님이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데려가셨다고 하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처럼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죽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 상하고 깨트려진 회개의 마음을 가지면서 주님의 친밀한 사랑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 빨리 죽으면 주님이 차마 그 순결한 사람을 이 죄악된 세상에 오래 두실 수가 없어서 데려가셨다고 그럽니다.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빨리 죽으면 사람들이 우리는 청소되었다고 그렇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이 순결했던 사람이, 그래서 주님이 죄악된 세상에서 이 순결한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을 보실 수가 없어서 미리 데려간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겠습니까? 관건은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상하고 깨여진 마음으로 늘 회개의 영 속에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키는 비결입니다.
요즘은 왜 그런지 말씀도 안 들어오고 기도도 안되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회개를 하지 않아서입니다. 한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는 그리고 최소한 그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할지라도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갈망하는가는 회개의 깊이를 보면 압니다. 회개의 깊이는 곧 사랑의 깊이입니다. 오늘 이 에브라임이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이 민족적인 고난을 깊이,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다고 하고 자신들이 이전에 어떻게 살았던지 이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은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관계를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주님이 반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에 에브라임은 분명히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매우 기뻐하는 자식이라는 이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말을 대답을 구하지 않는 의문문의 형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이 음성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그 후에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들려왔던 그 음성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향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청교들은 이것을 이중의 인침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는 관계에 대한 인침이라면 내 기뻐하는 자요 하는 이것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인침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마음이 확 풀어지시면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당연하다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것만 있으면 삽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자녀들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인정해주신다 라고 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든 조건은 다 갖추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빼어나서 훌륭한 직장에 취직해서 남들이 50만원 벌 때에 500만원 받으면서, 남들이 시내버스 타고 다닐 때에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수단이 좋으면 남들이 몇 푼 되지 않는 월급을 받으면서 살 때에 커다란 회사를 가지고 수많은 종업원들을 거느리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장에서 감자 몇 개, 고구마 몇 개 놓고 팔면서 살수가 있고 어떤 사람은 학식을 많이 쌓아서 유명한 학자가 되거나 지성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살아가는 한가지 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저도 여러분 모두 다 직장에서 후진 사람되지 말고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요즘같이 어려울 때는 여러분들이 정말 사업하는 사람들은 옛날에 큰 사업하는 사람들만 오지 말고 지금 큰 사업하는 사람들이 오기를 바라고 그리고 옛날에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여러분들이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양태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어느 날 하나님이 천사 셋을 놓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천사들이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섬기던 그 세 천사가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천사는 땅에 있는 어느 나라에 가서 제왕 노릇을 하며 내 명령을 받들고 일하라, 두 번째는 너는 가서 경제계의 큰 별이 되어서 돈을 움직이면서 내가 시키는 데로 해라, 세 번째는 너는 저쪽 동네에 가서 똥을 푸면서 나를 섬겨라 했을 때 그들이 정신나간 천사들이 아니었더라면 그 천사들은 똑같은 정신으로 이 세상에 내려와서 똑같은 정신으로 제왕 노릇을 했을 것이고 큰 사업을 했을 것이고 똥을 펐을 것입니다.
똥을 푸는 천사가 자신은 똥을 푸는 일이기 때문에 똑같이 하나님이 불러서 명령하셨어도 자기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고 왕으로서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천사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세 명령을 나누어주시다가 보니까 나머지 한 사명이 나에게 떨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왕이 되고 사업가가 된 천사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리가 없고 다른 천사들이 그 세 번째 천사에게 우월감을 느꼈을 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할 수 있으면 여러분들의 자녀 교육 잘 시켜서 제대로 밥벌이하면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저도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한 양태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으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명감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어떤 양태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던지 간에 그것은 결코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양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는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이때까지 우리가 기우려온 노력,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이 기울일 노력에 의해서 가변적으로 변화가 오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주님이 보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고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이 주님에게 느껴지고 그리고 주님에게만 느껴지면 안되고 우리에게 그 사실이 느껴져야지만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며칠 전에 불과 서른 여섯 살 밖에 안된 사람이 한강에서 투신 자살에서 죽은 시체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외국계에 유수한 은행의 중견 간부였습니다. 스물 넷에 입사해서 12년 동안을 뒤도 안 돌아보고 가정도 없이 오로지 일 하나에 매달려서 능력을 인정받고 고속 승진해서 중견 간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가주었으면 좋겠다는 명퇴 제의를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에는 “아들아 너는 결코 아버지처럼 살지 말아라”하고 죽어버렸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너는 내 기뻐하는 자식이라 네가 비록 이 세상에서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또 괄목할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저 평범하게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아들아 너는 내 아들이다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고 나는 네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도 네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만 생각해도 내 마음은 너무나 기쁘다” 이런 관계가 우리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겠느냐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주님을 믿으면서도 불행하다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고 있고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여러분들의 삶이 우울하다면 사실 여러분들이 돈이 없거나 권력이 없거나 무엇인가 근심거리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우울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울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정말 우울한 것은 풀리지 않는 사업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고 신앙의 기쁨이 없는 것은 경제적인 쪼들림 때문일 것이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은 결정적인 이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들이 깊이 침체에 빠지고 천하보다도 귀한 구원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쁘지 않는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사실은 이러한 음성이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너는 내가 가장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누구도 너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리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 친밀함이, 하나님의 자녀 되는 확실한 보증이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우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빨리 회복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인정을 회복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지금 직면해 있는 그 어떤 현실적인 문제보다 더 급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잡지를 보니까 미국에는 복권이 우리 나라는 1억, 2억, 이번에는 10억이라고 나왔는데 이것은 안 줄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월드컵 8강 안에 들면 1등은 10억을 준다고 하니까 그것은 괜히 한번 해보는 것이지, 그렇게 해 가지고 8강은커녕 본선도 못 갈 것 같습니다. 계시 받은 바는 없지만 저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10억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몇 백억 단위로 올라갑니다. 타 가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 쌓입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액수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슈퍼볼인가 해서 이천 육 백만 불인가 당첨이 되어서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계처럼 돈을 모아서 했는데 그 다음날 다 회사를 그만 두는 것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면 다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혼하고 외도하고 알코올중독, 마약중독에 빠지고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직장 때려 치고 집부터 사고 큰 차 사고 놀려 다니는 것입니다.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중요하고 우리의 인생의 곤고하게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실은 가장 시급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시급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 입증이 됩니다. 어느 정도 신앙의 경력이 있는 분들은 한번쯤은 이런 찬양이 가슴에 닿는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도 남겠네
이런 찬송이 가슴 속 깊이 다가와 보신 분들이 여기 많이 있을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저는 그렇게 오래도록 신앙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예수 믿기 시작한지 회심하고 나서 25년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감격적일 때가 여러 번 있습니다. 인간으로 생각하면 불행의 마지막 끝자락까지 가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도 너무 감사하고 어떤 때는 그런 고난을 다시 겪어도 그런 사랑을 맛 볼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기쁨 속에서 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일들이 내 뜻대로 되었기 때문에 온 기쁨이 아닙니다. 어떤 기쁨입니까? 고난을 당하나 그 속에서 언제나 “아들아 내가 비록 불같은 시험을 당하고 있으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나는 너를 기뻐하노라” 그런 주님의 인치심이 기도 속에서 늘 경험되고 있는 동안에 환난이 환난이 아닙니다. 문득 육신의 시선으로 환난을 보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어떻게 이 광야와 같은 위기의 때를 지나가느냐, 나라고 하는 존재는 뒤웅치는 바다에 떠있는 돛대도 잃어버리고 삿대도 잃어버린 그런 작은 쪽배에 불과한데 항공 모함도 뒤엎을 정도의 커다란 파도가 치는데 내가 어떻게 이것을 이길 수 있는가 하고 온 몸을 떨면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만 하면 평안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기도하고 나면은 세상이 헤칠 수 없는 번 접할 수 없는 큰 평화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 큰 위기와 풍랑 속에서 어떻게 그런 평안이 밀려올 수 있는지 그것을 누리고 있는 나 자신도 그것을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내 마음속에 밀려오는 이 평안이 눈앞에 있는 환경이 가져다주는 모든 불안을 잠재워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오는 평안입니까?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가장 시급합니까? 왜 우리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길을 주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발등상이 주님이 가지 못하게 준 가시에 찔려서 상처가 난 것을 보시면서도 가시와 엉겅퀴를 우리 앞에 두셔서 그래서 더 이상 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앞길을 막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천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까짓 것 돈 조금만 주시면 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텐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주님 쓰실 것도 아니면서 인색해 하실까, 내가 누구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다 망가졌는데 그 인간 하나 청소하시면 내 인생이 필텐데, 왜 하나님은 요즘은 사람들을 안 불러가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의 해답을 하나님이 아닌 환경 속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이상하게 하나님이 그것에 허락을 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찔러봐서 안 들어가면 생각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합판 쪼가리나 붙인 줄 알고 문을 찾을 수가 없어서 몇 번 발로 찼는데 자꾸 상처가 나고 뼈가 뿌려지면 그것이 콘크리트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왜 자꾸 실험을 합니까? 인내와 끈기를 가진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바른 길로 그 기도가 들어섰을 때가 해당되는 이야기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따로 있는데 방향을 잘못 잡고 자꾸 밀어 부치기를 하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행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거의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바르게 알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자신이 고통하는 문제를 놓고 주 앞에 매달렸는데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시면 우리는 생각을 다시 해야합니다. “아, 주님이 나에게 관계의 회복을 원하시나 보다” 더 세게 기도의 강도를 높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른 길을 찾지 않는 기도는 결코 강도를 더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합니다.
저는 경험을 못 했습니다만 출산한 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떻게 그 큰 아이가 사람의 몸에서 나올 수가 있느냐고 하니까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생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힘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밖으로 밀어낸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른 길로 들어서면 우리가 조금만 기도를 하여도 그 기도 속에 강한 힘이 들어갑니다. 우리들이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품고 있으면서도 오랜 세월을 기도해도 그 기도의 열정이 붙지 않으면 우리가 성실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고 거기에 하자가 없으면 이 기도를 계속 몰아 부쳐도 될 것인가를 생각을 해야지 계속해서 발은 다 부러져서 너덜너덜하는데 철근 넣은 콘크리트 벽을 두드리고 있으면 마지막에 작살나는 것은 벽이 아니라 자기의 다리입니다. 왜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들인데 무엇을 달라고 그렇게 목이 매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도 안 주시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비로소 자신들의 나라가 망한 이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하고 반문하시면서 그 관계를 새롭게 인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고 우리를 매우 기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하는 그 기회를 하나님께서 깊이 인정하여주시고 우리 존재 자체로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들은 이해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 사랑하는 에브라임을 이 민족에게 내어주어 그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만드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을 원하는 마음이었겠습니까? 내 백성들 가운데 일부를 죽음에 내어주고서라도 나는 내 모든 백성들과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기뻐하는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말합니다.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인생이 막힌 것 같고 되는 것이 없는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 기도를 한번 접고 이렇게 기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이렇게 오래 기도를 했는데 안 들어주시렵니까. 그러면 저는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이 기도가 안 이루어져도 저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 이것은 안 이루어주셔도 좋으니 제가 어떻게 하면 주님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내가 오늘날 처한 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오래도록 기대했는데 그것을 만약에 안 주시려면 주님 자신이라도 저에게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일 천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지상 최대의 제사를 보시면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이미 솔로몬이 무엇을 원하든지 들어주시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너무 뜻밖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기도했더라면 무엇을 달라고 하였겠습니까? 저는 아마 제일 먼저 “하나님 세계 통일을 주시옵소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단순한 I,Q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여호와의 공의와 사랑이 충분히 펼쳐진 사회가 되도록 다스릴 수 있는 그러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를 구하는 목표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 영광스러운 나라로 만들고 싶다고 하는 왕으로서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소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솔로몬의 그 기도를 들으시면서 하나님이 그 기도 제목이 기가 막히는구나 하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진짜 내 마음에 드는구나, 이제는 그 기도 하나를 통해서 다른 것은 몰라도 기도 하나는 잘하는구나하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한가지 기도제목을 보시면서 솔로몬 전체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이라는 그 인간 자체를 하나님께서 재평가를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너는 머리끝에서부터 말끝까지 존재 전체가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입술에서 나온 기도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전체가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하고 하나님께서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드디어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네가 부와 명예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이 지혜를 구했으니 이 지혜를 줄뿐만이 아니라 내가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겠다, 이전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없을 정도의 영화를 내가 네게 누리며 살게 하겠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솔로몬을 얼마나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경험을 하신 이래로 최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솔로몬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마음이 없이 단지 천 번 제사를 통해서 확실하게 부귀와 영광, 하나만을 받아야겠다고 했더라면 하나님이 그것만 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존재를 기쁘게 여기시니까 나머지를 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자식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엇보다도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도제목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저를 깊이 생각하노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노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주 기가 막히게 깊이 생각하노라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잘못해서 하나님께 큰 책망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혀진바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잊혀졌으나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문이 막혔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베푸시는 그 은혜는 여러분들의 느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하게 책망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통렬한 어조로 그들의 멸망을 예언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노가 불같이 타오르는 순간에도 주님의 마음에는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깊이 상하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관심조차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근심과 걱정, 시험에 매달리면서 하나님의 이름 석자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낯설게 느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와서 설교 속에 들리는 그 하나님에 관한 증언을 들으면서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각나는 주일을 지낼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서 그러시려니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에도 내가 깊이 생각하였나니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에게 잊혀진 이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더 많이 은혜를 주신 사람의 이름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한번 자기의 외아들의 피로 그 마음을 발라 구속한 백성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영원한 그리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기쁨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볼 적마다 무엇 때문인지 사랑스러운 공동체를 등지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파리한 지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한때는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은혜 안에 살아서 전심으로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살기로 맹세했던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찼을 때 그렇게 약속하고 지금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지체의 얼굴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련히 밀려옵니다.
아무리 불러봐야 이제는 들리지 않는 곳에 가있고 그리고 아무리 손짓해봐야 이제는 다시 돌아올 리 없는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아파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이것을 무한대로 확대시키면 이게 아마 지금은 당신의 면전에서 충만한 교제의 기쁨을 잊은 채 지금은 어디론가 떠나버린 탕자와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려니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그런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는 때는 있고 징계를 받아서 하나님께 매 맞는 때는 있으나 주님의 마음에서 우리의 이름이 잊혀진 적도 없고 잊혀질 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던 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는 한 그 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 잊혀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믿음 없는 생각일 따름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를 책망하여 말할 때에도 저를 깊이 생각하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이 주님께 기억한바 되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여러분들의 이름 석자는 아로새겨졌고 여러분들이 이제 선택할 수 있는 그 이름, 주님이 여러분들의 이름 석자를 생각할 때에 기쁨으로 여러분들의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여러분들의 이름 석자를 생각할 때에 아무런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가출해 버린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노부모의 마음과 같은 그러한 심정이 되게끔 하나님을 만들어 드릴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어떤 방향으로든지 여러분들의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잊혀질 수 없는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이 간데 시시때때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죄에 빠져서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완악하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면서도 우리의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좋으신 주님을 떠나서 우리가 어디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껏 여러분들이 살아온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의 길에서 여러분들은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 고통 속에서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자기에게 불순종하면서 생명과 기쁨의 길을 버리고 죄와 어두움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면서 그 이름을 기억하며 아파했던 하나님에 비해서 우리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착한 마음을 갖지 않으시렵니까? 이제껏 주님에게 위로를 구했던 여러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스스로를 위로하는 값싼 동정심에 빠지지 말고 죄 없으신 주님,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 것밖에는 잘못한 것이 없으신 그 하나님이 불순종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 채로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는지를 기억하고 오늘 오히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위로를 받아야될 처지에 있다고 한번 생각을 바꾸어보실 마음은 없습니까?
때리시고 돌아앉아서 흐느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그것이 정말 고통과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번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보십시오. 우리같이 못난 인간들을 불순종하며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주님을 원망하며 사는 우리들 때문에 아파하시는 하나님이 사실 오늘 우리들이 그분의 마음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드리고 그 피를 닦아 드려야할 처지에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저를 측은히 여기노라, 내 마음이라고 되어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얼마나 간절하게 표현했는지 복수로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마음이 여럿이 있다면 그 모든 마음들이 불쌍히 여기는 측은한 마음으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늘 이런 마음을 갖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믿음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면서 측은하게 여기시는 이 불쌍히 여기는 눈물에 젖은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진 것은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는 그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껏 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느냐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하소연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혀 이제 긍휼히 없을 것 같은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피 눈물이 흐르고 있고 그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움직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실 때에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련해져서 자기가 겸비해진 가운데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지 않으시렵니까?
회개는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의 담장을 허물고 회개의 눈물은 태산처럼 높이 쌓였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성벽을 허무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죄 가운데 빠져서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향하여 입술을 깨물고 악한 감정을 가지고 마음을 강퍅하게 해봐야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한번에 쓸어버리실 수 있지만 우리의 이름 석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아버지의 마음에 새겨진바 되었기 때문에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불러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도끼와 같은 강퍅함이 치솟아 올라서 내 인생 어떡하든지 하나님 마음대로 하라고 하나님을 향해서 돌진을 하며 대들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진노하실만한 대도 거기에 계셔서 인격적으로 우리를 감화시키시고 우리를 설복시키시고 우리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시고 우리들이 느낄 수 없었던 당신의 마음을 느끼게 만드셔서 결국은 주님보다도 더 귀한 분은 없다라는 고백을 하게 하시고 그 발 앞에 무릎을 꿇어서 주님만이 내 인생에 진정한 행복이시며 주님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식이라고 불리움을 받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몰두하고 있었던 이 세상의 모든 관심거리보다도 최대의 관심사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입이 아닌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입술로서가 아닌 우리의 영혼 깊은 밑바닥에서 인격을 통해 흘러나오는 고백이 될 때까지 주님이 그 뜨거운 사랑으로 방종의 우리를 지켜보시면서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돌아올 때까지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그런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셔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들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얼마나 불행한 날들이 계속되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이 얼마나 춥고 고통스러웠는지 여러분들은 생생이 기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산 날들, 진리의 빛과는 거리가 먼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살았던 날들이 비록 우리의 육신이 잘먹고 잘사는 날들이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그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압니다. 거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주님과의 관계로 돌아오지 않으면 주님은 그래도 여러분들을 거기서 기다리시려니와 여러분들은 이제 언제 다시 이런 음성을 듣고 돌이키도록 촉구 받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직면할지도 모르는 또 다른 긴 날들을 춥고 어두운 인생의 골목길에서 동료도 없이 의지할 이도 없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방황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선 골목길은 이전에 들어섰던 골목길보다 훨씬 춥고 고통스럽고 지리할 정도로 긴 고난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진리의 밝은 빛이 비치는 정오의 대낮과 같은 의인의 대로, 시온을 향해 열린 의인의 대로를 버리고 악인 들이 숨어 다니는 어두운 골목길을 배회하다가 어느 날 불현듯 우리의 인생을 마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가 길고 오랜 날들을 이 세상에 영광 가운데서 어둠 속에 사는 이 보다는 빛 가운데서 잠시를 사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영광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없는 가나안 땅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고 주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 천국 길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지고 어둠 속에서 춥고 긴 침체의 날들을 걸어오는 동안 기도의 영도 막히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담장이 높이 쌓인 그 교도소와 같은 신앙의 생활을 오랫동안 살아오는 동안 우리 모두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한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이 시간에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인생이 아니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3. 절망 속에서 주님을 찾으라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虛費)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救援)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血漏)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5:25-29)
누구도 인생을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때때로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시련에 부딪칠 때가 우리는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바로잡아 보려고 몸부림치지만 언제나 그 결과는 초라하게 끝날 때가 많은 법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고 있는 절망과 같은 깊은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찾았던 여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이 말씀은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혈루증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학적으로 잘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에 여자의 몸에서 끊임없이 하혈을 하는 병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하혈을 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정확한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종양이나 이런 질병들이 이 여자의 몸 속에 생겨서 그것이 계속 피를 흘려보내서 그치지 않는 그런 매우 절망적인 병일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레위기로 넘어가 보면 거기에는 유출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아마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여자가 몸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었고 정말 그것은 육신적으로 고통스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살아가는데 매우 불결하고 더러운 병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12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12년이라는 세월의 숫자는 이 여인의 질병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12년입니다. 기억을 해보십시오. 이 여인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인지 성경을 보아서는 알 수가 없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나이에 이 병에 걸렸다면 아주 어린 때 병든 사람이 이제 중년에 나이에 접어든 상황이 되었을 것이며 결혼한 사람이었다면 중년에 병이 든 사람이라면 노년에까지 계속 이어졌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12년 동안 이 질병은 절망적으로 그녀의 인생을 괴롭혔습니다. 이 병이 그녀를 지배를 하고 있는 동안 그녀의 모든 계획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성경을 빌어서 다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병으로 인해서 그녀의 인생은 자신의 계획과는 상관이 없이 불행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고 이 지점쯤 와서는 불행이기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인이었다면 아마 이 병 때문에 꽃다운 젊은 시절을 모두 보내고 시집한 번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며 결혼한 후에 이 질병에 걸렸다면 그는 이제 많은 가족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지고 있었던 제물을 다 허비하였다 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아마 이 여자는 어쩌면 결혼을 하고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는 여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또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부모의 가산을 탕진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이 질병이 의해서 한번 지배를 받고 나니까 그의 인생의 모든 계획, 그리고 인생의 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미빛 인생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그 여인은 이 병 하나에 인생 전체가 고통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우리들의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은 여러 가지 불행하게 하는 요인들이 모두 합쳐져서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수없이 많은데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요인이 하나가 있으면 그 하나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는 수많은 요인은 모두 우리의 인생을 향해서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 한가지가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이렇게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다른 이유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걸어온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있던 교회 옆집에 우리 나라에서 건설 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모 그룹의 회장의 집이었습니다. 이름만 대만 여러분들이 다 압니다. 굉장히 큽니다. 농구 골대도 집에 만들어 놓고 시커먼 개들과 경호원까지 왔다갔다하는 굉장히 큰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2층에서 내려다보면 그 넓은 집이 보입니다. 풍수 지리설을 믿는다고 네모 반듯한 땅인데 비스듬하게 집을 지었는데 땅도 많이 손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났는데 그 회장이 자기의 안 방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부엌칼로 자신의 가슴을 짓이겼습니다. 얼마나 돈이 많았는지 청문회까지 올라왔던 사람입니다.
무엇이 부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돈 하나 때문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 사람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어서 부엌칼로 자신의 몸을 난도질하다가 서울대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인생에 눈을 뜨면 뜰수록 정말 우리의 인생은 행복해질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이 우리의 인생 중에 있어도 우리를 불행하게 하려고 마음먹는 요소 하나가 우리의 인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우리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주위에는 몸만 건강했더라면 정말 행복하게 살만한 사람, 부부 사이에 금술도 좋고 돈도 있고 그리고 사람들 성품도 괜찮고, 행복한 조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 하나가 없기 때문에 자기만 불행해질 뿐만 아니라 자기의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불행해집니다. 그러다 아파서 먼저 죽고 나면 자기의 자식들과 그 부인, 그리고 살아있는 부모님 가슴에 그리고 나아가서 처갓집 식구들과 동기간들까지 가슴에 피멍이 들게끔 못을 꽂아놓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나의 질병이 이 사람의 인생을 모두 망가트렸습니다. 비참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엇인가 나만이 알고 있는 한가지, 혹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렇게 지나온 세월 동안 세월은 있었는데 세월 속에서 세월을 헤치고 살아온 나는 없고 그 세월에 뒤흔들리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살아온 세월의 제물이 되어버린 분들이 여기에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절망에 순간에 여러분들이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더욱이 주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사랑이 우리를 위한 사랑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우리에게 이런 깊은 절망, 어떤 불행한 요소들이 우리의 인생을 파국으로 휘몰아가고 있을 때에 주님이 우리를 그 절망 속에서 무엇을 하도록 원하시고 계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누구나 짧지 않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몇 번씩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인생의 길을 만나게 됩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도울 이가 없고 그리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쏟아도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향해서 부르짖는 그 울부짖음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외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저주받은 사람, 우리보다 죄가 아주 많은 여인, 우리 가운데서 일어날 수 없는 전혀 어떤 일을 경험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이 여인은 우리 모두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또 우리는 이 여인의 이 불행한 모습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불행해진 과거도 있고 또 불행해질 가능성도 보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 혈루증을 앓으면서 아마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도 그의 곁을 떠났을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당시에는 여자의 목숨을 하찮게 생각할 때였습니다. 이 여인이 이런 질병에 걸려서 12년이라는 절망적인 세월을 지날 때에 염려와 근심 속에서 이 여인을 향해 인내와 사랑으로 돌보아주었던 가족들도 떠나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칠 대로 지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피가 흐르는 혈루 증상을 가지고 있는 이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에 있는 이 여인이 누군가의 부축을 받거나 보호를 받으면서 여기에 왔다는 기록이 없고 피가 뚝뚝 흐르는 그 몸을 이끌고 자기 스스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길까지 걸어온 것으로 볼 때 우리는 이러한 추측이 단지 추측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여인의 이 불행한 상황은 인간적인 외로움을 촉진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시험에 들게 되면 한없이 외로움이 밀려오기 마련입니다. 내가 인생이 잘 나가고 돈도 잘 벌고 무엇이든지 하면은 안되는 것이 없을 때에는 친구도 많았고 회포를 풀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칭찬해주고 좋은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막상 이 여인처럼 절망적인 어려움에 떨어지고 그러한 상황을 긴 날 동안 지나게 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불행이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이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폭풍 후 흑암 속을 지나는 것 같은 인생의 깊은 절망의 시간에는 이상하게 사면을 돌아보면 친구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고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이런 환경들을 통해서 당신만 바라보게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깊은 이 절망 속에서 인간적인 깊은 외로움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마 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은 종교적인 외로움이었을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이 유출병에 걸린 자들은 불결한 사람들로 취급이 됩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낳기 전까지는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갈 수 없었고 그 여자가 누웠다가 일어난 침상도 불결하기 때문에 누가 그 침상에 눕는다든지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한 사람이 되어서 제사에 결례를 통해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전까지는 그도 역시 이 제사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늘 가서 뵈옵기를 원하는 경건하고 정결한 율법의 규례를 따라서 살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이 여자는 존재 자체가 오물과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여자는 신앙적으로도 깊은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 세월이 12년이 흘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이 이렇게 불행을 향해 치닫는 동안에 12년 세월 이 여인은 홀로 조용히 그림처럼 앉아서 자신의 인생을 짓이기기 위해서 다가오는 모든 불행을 가만히 맞이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 다가오고 있는 이 인생의 깊은 어려움과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계획표도 망가트려 버리고 이제는 자신을 절망 속에 몰아넣어서 삶의 아무런 기쁨이 없도록 절망을 향해 치달아가도록 자기의 인생을 뒤흔드는 이 불행한 상황과 맞서서 처절하도록 싸웠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12년의 세월은 단지 이 여인이 절망을 겪으면서 살아온 생애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 그 절망과 처절하게 투쟁을 하면서 살아온 바로 12년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그림처럼 홀로 앉아서 다가올 불행을 향해서 눈물만 짓고 있었다면 아마 병이 이 여인을 죽이기 이전에 절망이 이 여인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의지를 가지고 처절하게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와 더불어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병이 났고자하는 강렬한 욕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삶의 모든 가치를 자신의 건강을 되찾는 그 일에 걸었습니다. 애지중지 모은 많은 재물들을 12년 동안 모두 허비했고 수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습니다. 용하다는 의사, 유명하다는 의사를 모두 찾아다니면서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우리 동창생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이 부인이 결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에 제가 저의 아버님이 중국 가시기 전에 부탁을 해서 약재로 아이의 태를 구해 다가 주었습니다. 마지막에 모든 약을 써도 더 이상 병이 났지 않으니까 의사의 처방도 필요 없고 해서 처절하게 그 병으로 몸부림치다가 어느 민간요법에 복어의 알을 먹으면 났는다고 해서 그것까지 구워서 먹었고 석유까지 먹고 별에 별 것까지 먹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정말 옆에서 보면 눈물이 나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성격에 따라서 성실한 사람도 있고 불성실한 사람도 있고 진실한 사람도 있고 진실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성격적으로 매사에 장난기가 섞여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지한 사람도 있지만, 단 하나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인생의 요소와 대항하는 면에 있어서는 여러분 모두 할만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성실하지 않고는 노력을 안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력을 다해서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와 싸운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사람을 겨냥하는 그 불행하게 하려는 요소들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더 강했거나 삶을 아는 참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잘못 대항했을 뿐이지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인텔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석유까지 한 사발씩 들이키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자신의 병을 낳게 하는지 과학적으로 연관성이 있는지도 모르고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 하나에 희망을 걸고 처절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12년 동안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병이 들면 의원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병들어서 다 죽어가게 되었는데 어디를 찾아가겠습니까? 의원을 찾아가는 것이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정말 좋은 의원을 찾아서 자신의 가산을 탕진하면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많은 의원들에게 괴로움을 당했다고 합니다.
어느 의원이 이 불쌍한 여인을 비록 무료로 진료해주지 못할지라도 이 여인을 괴롭게 하려고 마음을 먹은 나쁜 의원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어느 의사든지 이 여인을 고쳐보려고 온 힘을 기울었을 것입니다. 자선가적인 정신으로 이 여인을 도와주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의사로서 자신의 지혜와 모든 의술을 동원해서 절망적으로 질병 속에 시달리는 이 여인을 돕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많은 의사들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의사들을 찾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질병 속에서 의원을 찾았던 것은 최상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상의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인간이 이런 존재입니다. 의원을 통해서 마지막에 얻은 것은 괴로움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님 만나게 하시려고, 주님을 만나게 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절망에 경우에는 주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결이지 아무리 지혜를 동원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대처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구해주실 수 있는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열심히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절망 중에서도 낙망치 않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스스로를 구원해보려고 애쓰는 성실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때로는 그런 성실함과 진지함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적도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을 하셔야 됩니다.
이 여인의 선택은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몸이 아프니 좋은 의사를 찾으려고 한 것은 최상의 선택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건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행하다면 여러분들은 좋은 의원을 찾아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물질이 없어서 인생이 불행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경우에는 어떡하든지 범죄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돈을 벌려고 발벗고 나서야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불행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나이가 좀 들었어도 지금 부지런히 공부해서 남 못지 않은 지식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정확한 대답이 절망적인 어려움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선택한 명백한 해답의 길이 사실은 해답이 아닐 경우가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열 두 해 동안 절망적인 질병에 시달렸을 때에 열 두 해가 되는 이때에도 그가 생각하기를 나는 이 질병이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 나는 이 질병에서 놓임을 받아야 하겠고 그것을 위한 최선의 해결은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인데 이 좋은 의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그 훌륭하고 좋은 의사에게 데려가 주면 나의 인생이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 갔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그 여자에게는 좋은 의원을 소개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스스로 개척해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생들보고도 제가 늘 말합니다. “돈이 없으면 가서 벌어라, 까마귀를 보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가서 벌어라” 언제가 어느 학생이 지하실에 교회가 있을 때 찾아왔습니다. “교수님 제게 눈물 나는 사정이 있는데 도와주십시오.” “그래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너는 여태까지 어떻게 학교를 다녔느냐?” “매 학기마다 기적으로 다녔습니다. 개학하기 일주일전 금식 기도하러 올라갔다 오면 어떤 사람이 돈을 보태주고는 했습니다.” “일주일 되기 그 전에 긴 방학의 기간 동안에 무엇을 했느냐?” 텔레비전보고 뒹굴 뒹굴 구르면서 소설책이나 보고 교회에서 기타나 치고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베짱이처럼 놀았지 않았겠습니까? 도와주지도 않고 뭐라고 야단을 치면 안될 것 같아서 30만원을 주면서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까마귀를 할테니 보태서 등록금을 하고 그 대신 다음부터는 절대 기적을 의지해서 학교 다니지 말고 벌어서 다녀라. 너는 기적을 경험해서 좋지만 네가 볼 때에 기적이라는 사건을 일으키기 위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달프겠니?”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아프면 의사가 하지 말아라하면 하지 말고, 하라 그러면 하고, 신앙 생활을 하다가도 병이 들어서 목사가 진단을 해서 너는 이것은 하지 말고, 이것은 해라 하면 말을 들어야지 자기 스스로 노력을 해야됩니다. 끼니가 간 곳이 없으면 오늘 나서야 합니다. 가서 날품이라도 지어야합니다. 사지가 멀쩡하고 건강이 있는 사람들이 왜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말만하고 도로 배 깔고 온돌 바닥에 누워버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삶의 태도를 고쳐야 됩니다. 절대 웬만하면 사랑의 빚 이외에 지지 않고 사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됩니다.
그렇지만 종종 우리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문제들은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힘으로 해결을 하려고 해도 되지 않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을 붙들어야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12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이 여인을 절망적인 고통의 상황 속에서 부르실 때에 이 여인이 애타게 부르시는 주님은 찾지 않고 이것이 최상의 선택이다라고 생각을 하며 좋은 의원에게 희망을 걸며 돌아다니는 12년의 세월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그 여인의 인생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워 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병들었을 때에 좋은 의원을 찾아서 12년을 방황하고 그 좋은 의원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 가산을 모두 탕진한 것은 상식적으로는 비난받을 만한 것은 판단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무엇인가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고 있는 영적인 현실에 대해서 눈을 뜰 필요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비록 이 여인과 같이 절망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너무나 긴 세월 동안 그 기도에 제목이 무릎을 꿇고 기도만 하려고 하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대해서 해결되지 않는 숙제로 남아서 여러분들의 인생 전체를 불행한 방향으로 가도록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긴 세월 동안 최선의 해결 방안을 강구해 왔는데도 실패를 했다면 나는 오늘 이 여인과 같이 여러분들의 사고를 상식에서 영적인 사고로 전환해 보도록 여러분들에게 요구하고 싶습니다.
이 여인은 진작에 자신의 이 질병은 주님 앞에 나오도록 부르시는 질병이었다고 판단했어야 옳았습니다. 보면은 모릅니까? 몇 번 진찰하면 이 병이 생명이 걸린 병인지 아니면 약을 먹고 며칠 드러누워서 땀을 빼고 나면 나을 병인지 본인들이 그것을 모릅니까? 그런데도 이 여인은 자신의 질병을 낳게 하는 의사에게는 희망을 걸었지만 자신의 생사와 화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는 생명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을 찾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 여인의 가장 커다란 실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절하게 한계에 닥쳤습니다. 이제는 좋은 의사를 더 찾고 싶어도 이제는 불러올 수 있는 돈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제 자신의 불행을 향해서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모든 힘을 다 소진해버린 상태입니다.
그때에 병이 낫기는커녕 의원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병이 더 깊어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문을 들었겠습니까? “아 그분은 정말 선지자중에 한 분인 것 같기는 하지만 이제껏 있었던 모든 선지자중에 잘 생기셨대” 그런 이야기가 이 여인의 귀에 들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목소리가 그렇게 감미롭다며, 설교가 기가 막히데, 그분이야말로 정말 인자하신 분이시데, 나사렛에서 오셨대” 이런 이야기는 이 여인에게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무엇만 들어왔겠습니까? 병이 난대, 병이 나은 사람이 있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더 절망적인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대,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이 여자는 자신이 이제껏 경험하고 있었던 자신의 상태를 절망적으로 보고 있었던 그 의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이 혈루병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처절할 정도로 자신의 인생을 괴롭히는 절망적인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경험을 통해서는 이해가 되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문둥병보다는 덜 절망적인 것입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보다는 훨씬 더 희망이 있는 것 아닙니까? 살아있으니까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병 걸린 자를 온전케 하시고 눈먼 자를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셨다는 그 소문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 들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들렸을 뿐이고 좋은 의사를 찾고자하는 그 활동은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찾아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묻고 구하고 그런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은 그냥 들려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찾았던 그 의사는 자기를 건져주지 못했지만 그냥 소극적으로 들려왔던 예수에 관한 소문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바꾸어 놓을지는 자기도 몰랐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 가운데 정말 웬만했으면 이렇게 평일 날 저녁에 교회에 나올 리가 없었는데 진짜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이 교회에 나온 분들이 여러분들 중에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교회는 다녀도 평소에 절대 수요예배에 갈 리가 없는 분들이 오늘 여기 나와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소문이 들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오늘 이 수요집회 하나에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숙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온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러나 어쩌다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 잠깐 들러서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도 예수의 소문이 그렇게 들렸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인연이 안 되려면 둘을 갖다가 앉혀놓고 너희들이 결혼을 하면 참 행복해질 것 같다, 한참 들려다 봐라, 그리고 둘이서 한참 들려다 보았는데도 헤어져서 생각도 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연이 되려면 스쳐 지나가다 슬쩍 지나쳤는데 이 사람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언젠가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핸드폰을 잘못 걸어 가지고 그래서 잘못 건 사람하고 잘못 걸림을 당한 사람하고 둘이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 친구의 번호가 끝자리만 틀리는데 자꾸 혼돈을 해서 그 번호로 세 번인가를 걸었더니 자꾸 잘못 걸었다고 해서 이것도 인연인지 모르니까 한번 만나보자고 해서 만나 그렇게 해서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부터 자매들은 핸드폰이 잘못 걸리기를 기대하십시오. 언제가 저에게도 핸드폰이 잘못 걸려왔는데 그 번호로 해보았더니 “족발 왜 빨리 안 가지고 와” 하였습니다. 하여튼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족발은 웬 족발입니까? 내 발도 감당할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막 떠오르는 것입니다.
의사에 대한 소식은 찾았고 예수에 대한 소문은 그냥 바람결에 들려왔습니다. 신기합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소문인데, 그분의 소문 중에 어느 한 사실, 소문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인상,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은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인상이 딱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가면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온갖 큰 사건 때문에 불행해지거나 무엇인가 큰 사건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사건 하나 때문에 행복과 불행에 갈림길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냥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마음에 계속 메아리치면서 이제는 의원을 찾아가려고 애를 써봐야 돈도 없고 그리고 이제껏 당한 많은 괴로움, 마지막에는 아무 효험도 없이, 희랍어 성경에는 아무 이익도 없이,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그렇게 많은 진료를 받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이 여자의 질병은 더욱 깊어져 갔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의사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껏 절망 속에서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모든 노력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 속에서 절망을 벗어나려는 희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포기하고 나니까 비로소 자신의 인생의 궁극적인 해결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자기의 마음에 환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인생에게 절망적인 상황이 주어졌을 때에 그 고통과 절망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하시려는 고통과 절망이라면 이것은 이 세상에서 있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속히 주님께로 돌아가서 손들고 내가 왔습니다 하는 것이 그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오늘 눈길을 끄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 가까이 와서는 뒤로 다가가서 살짝 옷에다 손을 대었습니다. 이렇게 이 여인이 다가갔던 이유는 여러 가지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율법에 규례대로 본다면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을 때에 주님이 구세주인지 몰랐던 이 여인과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종교 지도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선지자나 아니면 최소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경건한 선생님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런 혈루증이 걸린 자기가 다가가서 예수님을 만지면 예수님도 불결해지는데 그것이 율법적으로 볼 때 선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망설이고 부끄러워하고 가책을 받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제가 성경을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만진 것은 만진 것이지 그것이 왜 기도인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엄밀한 의미에서 12년 동안 처절한 불행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요즘 말하자면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살아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여인이 무릎을 꿇고 “전능하신 하나님, 제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나의 저의 죄 때문입니까? 그리고 우리 조상의 죄 때문입니까? 주님의 섭리를 내게 보이시고 이 어두움 속에서 어떻게 해야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에 영예를 돌릴지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시고 말씀의 밝은 빛과 성령의 불을 주셔서-” 모두 산신령 구름 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기도는 여러분들이나 할 수 있는 기도이지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산신령 구름 타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수준대로 대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구도의 길에서 “내가 정말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될까? 아니야.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이 너무나 많던데 비겁하게 또 누굴 의지해, 이렇게 살다 죽지” 예수님을 믿을까? 주님을 의지할까? 신앙을 가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데 나도 그분의 사랑을 받을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고통스러우면 술에나 취하고 두 눈 질끈 감고 죽어버릴까? 이렇게 망설이던 사람이 그 날 문득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고 교회 맨 뒷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예배에 참석하는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심정을 가지고 당신을 바라보고 자기를 주목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회심의 경험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많이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낮에는 우리의 동네가 철거반 때문에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시끄럽습니다. 다 불끄고 자는데 밤중에 일어나서 공부를 하다가 보면 종소리가 댕그랑 댕그랑 들립니다. 그리고 그때에 앰프에서 챠인벨 찬송이 나옵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어서 오라
처음에는 종이 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네 시 반이구나 하였는데 그것이 매일 계속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들리더니 그 다음에는 마음을 때립니다. 몇 달 지나가고 나니까 이 새벽의 종소리가 막 폐부를 찢는 것입니다.
구원의 저 종소리
제가 그 종소리를 듣다가 그때 공부 다 끝나고 가을에 내 발로 걸어서 교회에 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만약에 교회를 옮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다. “야, 이리와. 우리는 교회에서 점심도 주거든” 그러면 “웬 밥!” 하고 갈 사람은 없습니다. 밥 못 먹은 귀신이 있습니까? 아마 지금 여러분들이 교회를 옮긴다고 하면 기도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주님 저 교회에 있어야겠습니까? 이 교회에 있어야겠습니까? 옮겨야겠습니까? 계속 봉사해야겠습니까? 주님 어떻게 할까요? 주님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서 “가기는 어디를 가냐 여기 가만히 엎드려 있어라”하시면 “아멘”하고, 내가 왔던 것처럼 너에게 새 사명을 주겠노라, 너는 어디로 가라” 하시면 “아멘” 하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나보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산신령 구름 타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종소리가 울려올 때 “나는 어릴 때 주일학교시절을 보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데 웬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자기 발로 걸어간 그 자체가 그 때에 저에게는 하나님을 정말 바라보는 간절한 기도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니까 행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이 본문에서 손들고 열렬하게 금식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없어도 이 여인의 12년 동안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 요소와 더불어 처절하게 투쟁하던 그 투쟁의 노력을 그치고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서 그분의 옷깃을 만지면서 자신의 인생을 고쳐주기를 갈망하며 믿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전존재를 건 기도였습니다. 나는 오늘 여기 나오신 분들 가운데도 혹시 그런 분들이 계시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 한마디 못하고 거기 서있고 거기 앉아 있어도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와서 이제껏 여러분들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여러분들이 가졌던 인생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폭풍우처럼 밀려오고 쏟아지는 여러분들의 인생을 삼킬 듯이 밀려오는 모든 불행하게 하는 요소들에 둘러 쌓인 가운데 입을 열어서 주 앞에 기도할지 모르고 또 기도가 무엇인지 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너무나 많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기도의 갈피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침체되어있는 상태에서는 여러분들이 오늘 대포 집에 가서 한잔 술로 시름을 덜어보거나 바보 같은 텔레비전 상자에 앉아서 히이덕거리면서 여러분들의 고통스러운 저녁의 이 시간을 여러분들이 세상의 낙으로 지어보려고 애쓰지 않고 말씀이 선포되는 이곳으로 여러분들이 걸어와서 여기 앉아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주님을 붙잡은 이 여인의 기도처럼 받아드려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통하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중에 고상한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들의 인생에 깊게 시름에 잠겨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얼마나 고상한 문제를 가지고 불행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들이 행복한가? 불행한가?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 있는가? 바르게 되어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고상한 문제를 통해서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드러났던 속된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과 여러분들과의 관계가 드러났던 중요한 것은 무슨 사건을 시금석으로 해서 여러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드러난 그 결과가 무엇인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면 화목한 것이고 불화하면 불화한 것입니다. 주님을 등졌으면 등진 것이고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 속에서 살면 사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이든지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궁극적인 여러분들의 인생의 해결자가 누구인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여러분들의 인생에 열쇠를 쥐고 계십니까? 누가 여러분들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까? 인생이 커다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노력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지만 해도해도 안되는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이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행과 불행을 좌우하는 문제가 있는데 오래도록 고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혹은 오래도록 기도해왔는데도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 보고 문제 해결을 위하여 찾아다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찾아와서 붙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여인이 가졌었던 것과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가 시원스럽게 해결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이 여인처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능력, 주님의 은혜에 전존재적인 소원을 한번 걸어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다가와서 예수님의 옷깃을 붙잡았을 때 이 여인은 단지 한번 붙잡아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좋은 의사를 찾아다니던 노력과도 비교가 안되는 자신의 전존재적인 갈망이 담겨진 믿음의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 하고 평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존재를 건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여인의 혈루증 같이 12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동안 자신의 인생을 엉망으로 모두 만들어버린 이 절망 속에서 몸부림친 이 여인처럼 여러분들이 해결되지 않은 오래된 인생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면서 몸부림을 쳤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며 몸부림친 그날들이 주님을 찾느라고 몸부림친 날과 일치하는지는 다시 물어 보아야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몸부림을 치는 것과 주님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비슷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종종 불행과 어떤 어려움이 극도로 달했을 때 가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적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오늘날 잠잠코 있으라” 너희는 오늘날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지켜보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하나님이 종종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는 오늘날 잠잠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행하시는 위대한 일을 보라, 여러분 혹시 이제껏 여러분들의 인생을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 보려고 수없이 몸부림쳤는데 오히려 그러한 열렬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의 상황은 예전보다 더 나빠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혹시 그 시점에서 이제 상황과 씨름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문제를 통해서 너는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들에게 있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음성을 들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12년 동안 몸부림쳤지만 풀 수 없던 문제를 주님 한 분을 향해서 전존재적인 갈망을 걸고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붙들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것을 당신을 찾는 강렬한 갈망이 담긴 기도로 보시고 이 여인이 직면하고 있었던 그 지긋지긋한 문제를 끝장 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12년을 의사를 찾아다녔는데 의사를 찾아갈 때마다 그 의사의 치료의 행위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치료를 받을수록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졌더라면 12년씩이나 걸리면서 자신의 질병을 고치기를 지속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희망의 증거와 절망적인 증거가 야누스의 얼굴처럼 수시로 나타났고 이 여인은 의사의 치료의 행위를 믿을 수 없을 만하면 효과가 나타났고 믿을만하면 효과가 사라지는 숨바꼭질하는 것 같은 상황을 지났을 것입니다. 인생이 불행할 때 절망 속에서 여러분이 몸부림칠 때 완전 인생을 끝내버리지 않고 그래도 버리적거리면서 몸부림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희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아 하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왔는데 그런데 결국은 잠시동안 고침을 받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이 병의 근원이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잠시 낫는 것 같아도 다시 그 뿌리가 도지면서 결국은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이 여인을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이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깃을 꽉 잡았더니 그 시로 이 혈루의 근원이 말라버리는 것이 이 여인에게 최초로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몸부림치는 해결의 방법과 하나님의 해결의 방법의 차이입니다.
그렇습니다. 돈 없어서 힘들 때 허리띠 졸라매고 땅이라도 파면 밥이라도 먹습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가족과의 관계에서 마음에 원수 맺고 미워하는 불행한 관계로 떨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오늘 하루 입술을 깨물면서 그래도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지 하며 결심을 하면 한나절이야 어떻게 인생을 살아보겠지만 그러나 이미 망가지고 산산조각이 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다시 붙겠습니까? 다시 해결이 되겠습니까? 잃어버린 명예는 의롭고 선한 행실로써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고 잃어버린 건강도 운동과 약품으로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겠지만 우리 인생을 불행하게 몰아넣었던 우리 자신의 내면적인 결함들은 그렇게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혈루증과 같아서 그 질병의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가끔 그런 절망적인 우리의 상태에 희망을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언제까지 임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생에 궁극적인 문제를 끝장낼 수 있고 우리의 그 지긋지긋한 혈루병과 같은 그 근원을 주님만이 말리시고 완전히 회복해 고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여러분 어떻게 하시렵니까? 오늘 양단간에 결단을 하고 가십시오. 집으로 돌아가면 여러분들은 또 결단을 미루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싸워왔던 여러분들의 문제, 지리멸렬하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몸부림치면서 살아왔지만 여러분들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가 남아있는 그때에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제 절망적인 상태에서 12년 동안 노력한 이 여인과 같이 이제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여러분들의 인생의 그 불행을 고칠 수가 없다고 무릎을 꿇고 전존재적인 갈망을 담아서 주님의 옷깃을 붙잡는 주님을 갈망하는 기도로 나아가시렵니까, 아니면 그래도 미련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애쓰다가 결국은 아무 효험도 없이 더욱 중하여가는 상황을 맞이하시렵니까, 어찌하시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소원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받으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아픔을 겪으면서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특별한 뜻이 있어서 당신을 섬기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 외로운 고난을 주시는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진정한 마음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를 향한 그 사랑의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은 고통스러운 문제들이 내 인생을 불행과 파국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런 날들이 절망적으로 계속되고 있으면 내 인생은 더 이상 이러한 파국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 나의 이 불행한 상황을 고치고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할 그때에 의원을 찾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이 여인의 간절한 마음과 같이 그렇게 주님을 붙드는 여러분들 되게 하시려고 오늘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십시오. 12년 동안 이 여인이 이 절망적인 문제에 매달렸을 때에 그는 안암리에 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 인생의 이 질병의 이 문제는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문제이고 쉽게 해결될 수 없는 큰 문제라는 암시를 받아왔을 것입니다. 1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니까, 그러나 12년 동안 그 절망으로 자기를 몰아넣었던 인생의 계획을 모두 파국으로 몰고 갔던 이 불행한 상황이 예수님에게서 12초도 걸리지 않고 해결되었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너무 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너무 작은 것입니다. 불행이 너무나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너무나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바로 그 밤입니다. 이제 우리 12년보다도 더 긴 세월동안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지긋지긋한 문제를 오늘 끝장냅시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도록 작정합시다. 이 혈루병과 같은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여러분들,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의 품으로 피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옷자락을 붙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해서 기다리고 계신 신앙의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4. 기도하는 자에게는 위기가 기회이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祈禱)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6-17)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미국과 일본이 한판 싸움을 했는데 사기 충천했던 일본이 결국은 패배한 이유를 역사가들은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핵폭탄이고 두 번째는 트랙터이고 세 번째는 레이더였다고 합니다. 핵폭탄은 핵폭탄이었으니까 이겼고, 트랙터는 미국 비행기가 일본 비행장에 와서 폭격을 하면 복구를 하는데 일본은 1년 이상이 걸리는데, 일본 비행기가 미국 비행장을 폭격을 하면 미국은 복구를 하는데 불가 2,3개월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졌다고 하는 이야기이고, 마지막에는 그때 바로 발명된 지 얼마 안되었던 레이더 때문에 일본이 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옛날에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보면 적들이 쳐들어오면 북이 저절로 울리는 자명고가 있었다고 어렸을 때 누구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북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똑같은 어려운 상황에 쳐한 나라가 아람이라는 나라였습니다. 이 아람 나라는 아랍이 아니라 아람인데 지도상으로 보면은 남왕국 유다가 있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있고 그 위쪽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성경에서 북방 민족이라고 자주 나오고 또 다메섹이라고 자주 나오는 나라인데 아주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호시탐탐 기회가 있으면 남쪽으로 쳐내려와서 세력을 확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남하정책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한판 붙지 않으면 안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는 오랜 기간동안 적대적인 관계에 있어 왔습니다.
이 다메섹 민족은 굉장히 호전적이고 기동력이 강한 그런 기마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민족이 이제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범하기 위해서 수시로 공격을 하는데 이 옛날 전쟁 가운데 가장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 큰 승리를 얻는 비결은 예나 지금이나 매복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나가거나 군대나 왕이 지나가는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매복을 하면 분명히 거기를 지나간다는 소식이 있고 또 지날 것이 확실해서 군사를 풀어서 매복을 하면 꼭 거기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수 없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생각에는 내응이 있구나, 다시 말하면 스파이가 있구나 하고 왕이 생각을 하였습니다. 누가 적국 이스라엘과 내통을 하느냐고 대라고 하니 신하들이 대답하는 말이 내통하는 자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사람은 너무 신령한 사람이라서 레이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직 쳐들어가지 않고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하는 그 이야기를 전부다 압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이 왕이 들었을 때 그 사람을 먼저 처치하지 않고는 전쟁을 성립을 안하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생각하기를 그렇다면 그 엘리사라는 그 녀석을 잡자, 그래서 가두어버리면 우리가 이스라엘을 공격을 하거나 이스라엘이 쳐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능히 미리 알릴 자가 없지 않느냐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왕을 죽이기 위해서 공격을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온 것을 더 잘 알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그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신하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고 신하의 말이 정말일 것 같으면 그런 어리석은 시도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예나 저제나 항상 역사 속에는 멍한 왕이 있기 때문에 역사가 소설처럼 쓰여져 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이 멍한 왕 중에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성에 있느냐고 하니까 도단이라는 크지 않는 작은 성에 있는데, 성 크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수의 군대와 많은 마차를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인해전술 식으로 겹겹이 둘러싸서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서 결국은 그 엘리사를 잡아야겠다, 일단 가서 둘러싸고 나면 우리가 온 것을 알았던들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생각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군대가 갔습니다. 밤이 되자 그 군대와 병거는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엄청나게 많은 군대가 그 성 가까이 가서 주위의 죽 매복을 하면서 포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워쌌습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생각나게 해주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을 하다가 보면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충만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때가 있는가하면 또 충만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받은 은혜를 다 털어먹고 다시 깡통을 차는 신세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인간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늘 반복되는 신앙생활을 해서야 무슨 하나님 앞에 축복이 있겠습니까. 기억을 해야 합니다. 신앙이 오래 되었는데도 계속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은 신앙이 세월만 흘러가지 영적으로 성숙해가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숙해질수록 그런 일들이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영적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은혜가 가득한 가운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그런 은혜 생활을 바르게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깊은 침체에 들어가서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신앙 생활을 해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생활도 막히고 말씀생활도 막히고 은혜생활이 거의 막히고 나면 우리의 인생에도 캄캄한 밤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밤이 찾아옵니다. 눈이 있어도 이제는 보지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영이 살아있을 때에는 늘 들리던 하나님의 음성이 이제는 그러한 영적인 어두움 속에 있을 때에는 이제 들리지 않습니다.
이따금 교회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지만 한참 동안 엎드려도 하나님 앞에 느끼는 것은 따뜻한 사랑, 기도하는 자의 눈물을 씻겨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니라, 허긴 흘러야 눈물을 씻겨주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기도할 때 차가운 거절감이 느껴집니다. 그런 어두운 밤이 여러분들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 채 그저 매일매일 육체적인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서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그 캄캄한 밤중에 우리를 헤치고자하는 원수들은 그 밤에 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성령의 깊은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원수가 자기를 향해 고개만 들어도 저 원수들이 나를 헤치기 위해서 고개를 드는구나 하고 아는 것입니다. 시험이 오는구나 하고 이 안테나가 살아있어서 금방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과 성령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런 것들을 대항할 수 있는 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어두움이 깊이 찾아와서 우리의 신앙이 밤중에 되고 나면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를 헤치기 위해서 고개를 들어도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가까이 다가와도 그것을 알지를 못합니다. 심지어는 어두움 속에서 휙 하고 화살이 날아와서 자기의 살을 꿰뚫어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릅니다. 한가지 아는 것은 너무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도 그것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어두운 밤을 조심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어려운 때를 만나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러한 영적인 어려움 속에 우리가 있다고 하면 우리가 속히 그런 영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어두움 밤에 아람 군대들이 새카맣게 몰려와서 이 도단성을 철저하게 에워쌌습니다. 엘리사를 수종을 드는 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눈을 딱 떠서 보니 이제는 아무리 엘리사라도 큰일 났습니다. 다 겹겹이 아람 군대가 둘러쌌는데 수많은 병거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이 그들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진짜 하늘로 날라 가거나 땅으로 꺼지기 전에는 그 포위망을 도저히 뚫어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아! 주인이여, 이제 우리는 큰일 났습니다. 이제 절망입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저 원수들의 군대가 우리를 모두 에워쌌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신령한 교제 속에서 사는 참된 행복을 잃어버린 채 우리들이 만약에 어둠 속에서 거하게 되고 영적인 깊은 밤중과 같은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어느 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시험과 어려움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앞에서 단지 그 모습을 볼 때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깊이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엘리사를 따라다니면서 보았던 그 놀라운 기적과 그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베풀어주셨던 헤아릴 수 없던 많은 이적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고 이제 또렷이 눈에 들어온 것은 하나,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절망적인 포위상황밖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면 우리가 열심히 가서 주님을 믿으십시오, 마음을 돌려보십시오,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여러 말로 우리들이 권하고 위로하고 그들의 생각을 돌려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한번 절망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눈이 멀어서 그 절망적인 상황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참 이해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어떤 때에는 근거도 없는 희망에 들떠서 가슴을 찢고 깊이 흐느끼면서 절망을 해야할 그 자리에서 한없이 자신의 인생이 장미빛 미래가 약속된 것처럼 그렇게 펄펄 뜨면서 희망에 들뜨는 인간들인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이제 이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는 기회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갖기보다는 상황 그 자체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절망하고 예전에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절망을 하는 것은 그래도 조금 이해가 가는데 예전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능력의 편 팔과 지금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구원을 받아본 적이 있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 뼈아픈 시련을 이긴 경험이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낙심하고 좌절해서 주저앉아 버리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엘리사의 사환이 자기들을 에워싼 이 포위 상황을 보면서 깊이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생각나지 않았고 옆에 있는 이 엘리사라는 사람이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며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고 이 보다도 더 큰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왔던 사람인가가 모두 잊혀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오직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원수, 딱 하나만 보였습니다. 그 원수들이 강해 보이기 시작하자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이 성도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간밤에도 편안하게 잤을 텐데 이 아침에는 더 이상 이 성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절망 하나에 완전히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경험을 많이 만납니다.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이제껏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를 맛보고 지금까지 큰 시련들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슬기롭게 극복한 사람들이 어느 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고 주님과의 은혜의 교통이 모두 막혀버리자 이 순간에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큰 능력과 권세로 인도하셨는지 주님이 어떻게 말씀으로 자신을 깨닫게 하셔서 이제껏 까지 인도하셨는지 모두 경험이 가져다준 지식은 한번에 사라져버리고 오직 절망적인 상황 하나가 떠올라서 자신의 온 의식의 세계를 지배해 버려서 이제는 자신의 이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자신은 아무 희망도 없다고 하는 단언을 하게끔 만드는 경우, 그런 경우를 우리는 우리들에게서 많이 보게 됩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이 신앙은 현재적인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깊은 은혜 속에서 주의 크신 능력에 붙들려 살던 사람이 목을 향하여 날라 오는 칼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 신앙이 사라지거나 어느 날 갑자기 신앙심이 식어지고 나면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보호해주셨던 그런 기억들은 모두 사라져가고 확실히 자신은 아무 희망이 없다는 좌절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517년에 피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이 반박문을 달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마틴 루터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루터가 지은 찬송이 그것입니다.
이 땅에 마귀 꽉 차서 인민을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그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깃발을 들고 한창 진행하고 있는데 어느 날 교회당에서 마틴 루터가 아침 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때 자기 부인인 폰 보라가 걸어나왔습니다. 상복을 입었는데 “이 아침에 누가 죽었는데 상복을 입었느냐?” 하고 물으니까 “하나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무슨 그런 불경스러운 말이냐” “아니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고야 당신이 그렇게 절망적일 수가 있습니까” 그런 훌륭한 믿음의 사람도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던 시선이 하나님보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바라보게 되니까 와르르 무너지는 좌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강함이라는 것은 항상 양면적인 것입니다. 강한 것 같지만 사실 그 뒤를 보면 한없이 약한 것,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 자체를 바라보면서 이제 낙담하고 있는 이 엘리사의 이 종이 모습은 신앙이 없는 매우 특별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특별한 믿음을 갖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평범한 반응인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시험에 들어보십시오. 진짜 어려움에 닥쳐보고 남들에게 말로만 듣던 불같은 시험을 당해보십시오.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까닥하면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프고 너무나 고통스럽고 기도할 힘이 없고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그 힘과 그리고 여유 자체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 불같은 시험을 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반응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그러한 때가 많습니까? 영적인 침체에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나니까 그 밤에 우리는 모르고 그 어두움 속에서 그저 천국과 지옥도 모르는 채 어둠의 자식처럼 한참을 살았는데 어느 날 눈을 떠서 딱 보니까 우리가 처절한 불행에 휩싸였습니다. 그 원수들이 자신의 인생을 에워싸고 이제는 도저히 자기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의 계산대로라면 그 위기를 벗어날 만한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인들도 절망을 합니다. 이것은 신령한 의미에서의 절망이 아니라 육적인 의미에서의 절망입니다. 깊이 절망을 합니다.
오늘 이 사경회에 참석한 여러분 가운데도 이 엘리사의 종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인생을 한참 살아왔습니다. 어둠 속에 있었지만 항상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눈길을 피해서 은밀히 세상의 낙을 즐기고 육체의 쾌락에 빠지는 기쁜 때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나가고 나면 모두 덧없는 것이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전부이었던 것처럼 즐거워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영혼이 고통만 받은 것이 아니라 재미도 조금은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그렇게 어두움 속에서 허랑방탕하며 잠자는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어느 날 이제는 더 이상은 그 생활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들려다 보니까 자신의 인생은 철저하게 망가질 위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 여기에도 있습니다.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듯이 영적인 깊은 어두움 속에서 신앙의 가책마저 모두 잠재워버리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하나님 없는 삶을 어두운 인생의 밤중에 한참 살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자신의 온 몸이 절망적인 상황에 칭칭 감겨져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세상을 선택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까 이제는 자기가 세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기를 포로로 삼은 것입니다. 이제 상황이 자신을 너무나 불행 속으로 의도적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나머지 자신의 몸부림으로써는 도저히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런 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가르쳐서 인생의 벼랑 끝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왜 없겠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즐거울 때는 즐거웠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제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내 인생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이 내 인생을 처절하게 파탄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나를 읍 죄어오고 있는 상황을 깊이 맞이하게 되었던, 그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절망밖에는 없습니다.
오늘날 사실 사람들이 위험할 정도로 향락에 빠져버린 것도 사실은 우리들이 그 사람들을 정죄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면서 바라보아야 할 질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이기기 위해서 자신들이 선택하는 방법이 그 향락에 빠지고 술 마시고 마취에 취하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잠시 절망적인 상황을 응시하는 상황에서 오는 온갖 두려움에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인류 역사에 대해서 확실히 예측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인간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은 것만큼 점점 더 절망적인 존재가 될 것이며 절망을 인간들이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인간들은 더 깊이 향락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같은 성, 같은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이 사람은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이 엘리사의 사환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그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엘리사였습니다. 그 사람은 그날 아침에도 일어나서 “아 주인이여 우리는 이제 어찌합니까? 우리는 이제 끝장입니다” 하고 절망적인 탄식을 늘어놓는 이 사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담대함 속에서 평화를 잃지 않고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는 이 사환이 볼 수 없는 상황을 같은 상황 속에서 사환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 여러분 배짱하고 믿음하고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아십니까? 믿음은 근거가 있고 배짱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근거가 있는 신뢰이고 배짱은 근거가 없는 신뢰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배짱도 상당히 대단하게 생각을 합니다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은 더 잘 망하는 비결에 지나지 않습니다. 배짱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 그러한 배짱, 그러한 것들을 믿음의 수준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우리 교회가 크게 부흥하리라고 믿는다, 아무 근거 없이 나는 그것을 희망하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것은 배짱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어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해 주셨고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이다, 근거가 있는 신뢰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쉽게 갈라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함께 믿음의 세계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 확신이 저 신뢰가 믿음이라고 말해줄 수 있지만 그런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주 쉽게 저것은 그것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뢰가 정말 신뢰인지 정말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뢰인지 배짱인지 분간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라고 하는 이 사람이 편안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너희들이 아무리 많이 와도 설마 우리가 죽겠느냐하는 배짱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는 그렇게 분명하게 평안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답답하니까 자기가 보고 있는 그 신앙의 세계를 이 종에게도 보여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바라보는 영안으로 이 종도 잠시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의 포위 상황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니까 전에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는 전혀 안 보이는 또 다른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많은 군대의 원수들이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데 육신의 눈을 가졌을 때에는 그것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영안이 뜨이고 나니까 자신들을 포위한 군대들을 헤아릴 수 없이 비교도 되지 않는 천군만마와 같이 어마한 여호와의 군대들이 그 원수들을 포위하고 만약에 이 아람나라 군대들이 엘리사를 헤치기 위해서 공격을 하면 단번에 요절을 내버리려고 기동태세를 갖추고 있는 구름같이 허다한 수많은 군사들, 그 군사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많은 여호와의 군대의 군사들에 비하면 아람이 동원한 이 엘리사를 에워싼 군대는 적은 수의 정찰병들에 불과했고 용맹과 승리에 대한 보장이 있었어도 이들은 여호와의 군대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이 종이 못 보던 이 상황에 엘리사는 그것을 모두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평안한 가운데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히려 평안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의 참된 평화가 환경과 관계가 없다고 하는 말은 지나친 억지일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평안한 환경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때로는 지극히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도 견딜 수 없는 갈등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없이 몰아닥치는 큰 풍파로 자신을 향해 밀어닥치는 폭풍과 같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거야, 좋은 일이 일어날거야, 왜냐하면 오늘 아침에 눈 뜰 때 기분이 좋았으니까, 이런 식의 암시를 가지고는 불행과 절망이 에워싼 우리들이 진정으로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포로의 신세가 되어서 로마로 끌려가던 때에 바다에서 만난 유라굴로라고 하는 폭풍을 기억합니다. 일주일 동안을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지냈고 결국은 파선하여 모든 사람들이 물 속에 짐을 다 버리고 파선하여 헤엄을 쳐서 육지로 올라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구원의 여망은 다 끊어지고 언제 배가 깨질지 모르는 커다란 폭풍이 몰아치고 죄수를 호송해서 가는 이 군대도 아마 이제 정장도 다 벗어버리고 배에 실은 모든 짐들을 모두 버리고 밧줄 하나를 붙들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폭풍우 속에서 그 바다와 더불어 사투를 버리고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도 죽음에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는 그때에 바울이 그들에게 “너희는 안심하라”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때에 이 군인들의 손에 의해서 끌려가는 그저 한낮 죄수에 불과하였습니다. 묶여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죄수의 신세에 있는 이 바울이 자기를 포로로 끌고 가는 그 권세 있는 군사들에게 타이르듯이 “너희는 안심하라” 이것은 분명히 사도 바울의 배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평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면의 그 진정한 평화는 바로 하나님과 그 폭풍우 속에서도 비록 두터운 구름이 가리워서 하늘은 볼 수 없고 태양의 빛은 막혔지만 그러나 그 죽음의 위협이 넘나드는 폭풍우 속에서도 하나님과 바울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폭풍우 속에서 모든 사람이 절망적인 바다의 상황 때문에 몸부림을 치면서 싸우고 있을 때에 바울은 그 폭풍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죽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확실한 근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바울이 안심하라 라고 말한 것이지 인간적인 배짱이나 담대함이 그런 선언을 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이 한사람의 말, 한사람의 평안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집안에서도 이런 저런 일들이 막 몰아치면서 고난과 시련이 막 겹칠 때 아이들과 부인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자식들도 다 어쩔 줄 모를 그때에 남편까지 흔들리면 그 집안은 이제 콩가루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커다란 시험이 다가오고 이제는 어떤 어려움에 빠질지 모르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 되었는데 아버지가 마음에 지극한 평정을 유지하면서 “괜찮다, 이 아비가 오십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것보다도 큰 파도를 수없이 넘었다. 괜찮다. 너희는 나를 믿어라, 걱정하지 마라” 이러면은 가족들이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큰 시험이 닥쳐올 때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시험이 막 닥쳐서 죽을 것 같은데 상담해 준다고 하는 사람이 한숨을 더 쉬는 것입니다. “나라도 못 살겠다” 그러면 어떡하라는 것입니까? 상담을 받는 사람이 “나는 희망이 없어요, 나는 절망적이예요, 그래도 안될 거예요” 하고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희망을 좀 확실하게 심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끔 가다가 보면 아프다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아픈 것은 우리 의원님들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끔 가다가 사람들이 황당 무계하게 자기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다고 합니다. 한참을 대화를 하다가 내가 야단을 쳤습니다. “자기는 분명히 문제가 있고... 옛날에 귀신이 어쩌고...” 그때는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하고 대화가 통하는 것 보니까 너는 정신이 말짱하다” 몇 가지 실험을 거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너는 안전하다, 정신 병원에 계속 쫓아다니면 너는 완전히 돌아버린다, 내가 선언하노니 너는 괜찮다, 괜히 꽤병을 부리지 마라” 자기는 무엇인가 연약한 그리스도인 것처럼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자기는 별로 공격도 못 했는데 조금만 건드려도 으악하고 소리를 칩니다. 그렇게 상담을 받고 나면 마귀가 건드려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이 평화가 자신의 인생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 평화를 가지면 좋다고 하니까 나는 평화가 있다, 있다하면서 다닙니다. 그런데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진짜 평화가 있으려면 무엇인가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쉽게 흔들어 놓을 수 없는 완전한 평화, 오늘 이 엘리사처럼 자기를 잡아가기 위해서 수많은 군대들이 에워쌌는데 전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평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안은 배짱에서 우러나오는 평안이 아니라 어디에서 우러나오는 평안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고 계시다라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근거가 있는 평안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깊은 시험을 만났을 때에는 제일 먼저 회복해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양심의 죄악들을 털어 내어서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책망할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때에 주님이 주시는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오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시인이 말합니다. 참 좋아하는 성경구절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사실 평화를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나 그 말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시련이 닥쳐서 생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든지 “여호와는 내 편이시오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그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고 자기 좋을 데로 하나님을 막 보면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 날 시편을 읽으면서 “여호와는 내편이시니”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슴에 평안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그러면 자신의 양심 속에서는 “야 마귀가 니 편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니 편이니”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나를 돕는 자시며” 자신의 양심이 “웃기네 너는 언제 하나님 도와준 적이 있냐”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사람이 네게 하고 싶은 데로 하지 누가 너를 보호해주겠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절망적이고 시련의 상황에 닥치면 빨리 회개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회개는 우리들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어도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고, 또 그렇게 정결하게 살지 못했으면 지난 우리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를 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때에도 양심의 송사가 없습니다. 이 양심의 송사가 있으면 기도도 안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 평안해” 그래도 이 양심에서 무엇이라고 하면 “내 영혼이라고 하지 말고 제 영혼이라고 그래라” 하고 들려오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는데 어떻게 평안하겠습니까?
이 엘리사는 말하자면 그러한 심중에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사는 사람의 삶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늘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전쟁이 일어나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전쟁이 일어날 가망성이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놀고 먹던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살아온 사람이 그 한번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오늘 여기서도 제가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을 때에 시련 속에서 있을 때에 기도하십시오, 평화하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이고 내 마음속에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평안이 내 마음속에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만은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 책망할 것이 있는 사람과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 책망할 것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일단 기도할 때에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없지만은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이 양심의 악을 모두 털어 내고 회개를 통해서 용서를 받아서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 강한 힘과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생활의 비결입니다. 순결함이 있는 영적인 생활이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생활입니다.
엘리사를 한번 기억해보십시오. 지금 성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아람의 군대들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사환이 특별한 죄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군대가 안보인 것이 아니라 특별히 신령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군대가 눈에 안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엘리사의 사환이 도단성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아람 군대를 보면서 절망한 것은 특별한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특별히 신령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불러다가 데려다 놓고 같이 그 상황을 보았을 때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환과 같은 형편이 되었겠습니까, 엘리사와 같은 형편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당연히 사환과 같은 형편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에서 시험을 당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당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절망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희망을 볼 수 있는 신령한 시야를 가진 사람들은 매우 소수라는 것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위험 속에서 건집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기업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의 신앙을 도와줄 수 있는 신령하고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러분 옆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밑천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매일 돌아다니면서 고스톱이나 치고 술이나 먹으면서 그런 친구들을 세상 사람들은 좋은 친구라고 말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신령한 사람, 내가 잠들어 있을 때에도 나의 상황을 들려다 보고 내가 볼 수 없는 눈을 열어주어서 자신이 보는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정상적인 신앙 생활이 사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시야를 갖고 싶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은 영적으로 침체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날들 동안에 밤중과 같은 여러분들의 인생의 때에 여러분들은 에워싼 수많은 원수들을 보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엘리사의 종처럼 안절부절하지는 않습니까? 이 엘리사의 종은 이른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부지런함과 성실함도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오늘 하나님 앞에 구하여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눈을 떠서 진짜 신앙적으로 볼 때에도 정말 내 상황이 절망적인지를 확인하는 일,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급선무라는 것입니다. 눈을 떠서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문제이겠습니까?
앞으로는 전쟁이 일어나면은 6.25때 경험했던 것처럼 그저 대낮에 멀리다 대고 대포나 뻥뻥 쏘는 이런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 예측을 합니다. 특별히 어떤 군사 전문가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에서 쳐들어오는 것일 텐데, 그 시간은 5시에서 6시 사이일 것이고 시기는 6월경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밤에 전쟁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밤에 전쟁에서 승리해서 남기 위해서 세계는 치열할 정도로 야간 전투에 필요한 수많은 병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야간의 투시경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체에서 나오는 열 같은 것을 감지해서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때에 그것을 개인적으로 주어서 쓰고 있으면 적은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아군은 나무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벌레와 작은 짐승까지도 모두 보이는 것입니다. 심지어 제가 본 어떤 병기에서는 어떤 작은 레이더를 가지고 어떤 건물이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움직이는 것이 있으면 몇 미터에서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그러한 표시가 나오는 병기들이 다 전시가 되어있습니다. 야간에 그것만 딱 보면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캄캄하고 우리가 영적으로 완전히 눈이 감겨있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어찌하든지 그 시험에서 벗어나고 이기고 싶어서 몸부림을 쳐도 여러분들의 눈이 감겨 있는 동안에는 여러 원수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는 캄캄한 밤중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육신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새로운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쓰고 육신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이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공격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악한 세력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 시야를 가능하게 하는 그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신령한 방법으로 여러분들이 눈을 열어주셔서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안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인생을 향해서 밀려오고 있는 이 수많은 환난의 실상을, 고난의 실상을, 시련과 절망적인 상황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이 띄어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주먹을 휘두르거나 총을 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시급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이렇게 답답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절망 이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이 사환의 눈이 뜨여지게 된 때가 언제였습니까? 엘리사가 어떻게 하였을 때였습니까? 기도해 주었을 때였습니다. 그때에 눈이 뜨이고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반대편으로 가서 그러면 왜 이 종은 엘리사의 기도를 받고서야 눈이 뜨여졌고 엘리사는 왜 기도해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어떻게 눈이 뜨였느냐 하는 질문을 한번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미 답이 나왔습니다. 이 종은 신령한 기도가 없는 사람이었고 이 엘리사는 신령한 기도의 세계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늘 떠서 그 세계 속에서 볼 수 있었고 오히려 그 힘이 남아서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니까 하나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절망적으로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포위 상황 너머에 하나님의 천군 천사들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서 원수들을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을 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날은 상담 학교도 많고 별거 다 많이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도 정신병원에 수없이 많이 다니던 지체가 어느 날 와서 저한테 이야기를 해주는데 “목사님 정신병원에서요 40분 상담하는데 7만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목사님의 설교 한편을 듣는 것이 7만원을 내고 40분을 상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 입장에서는 그 만큼만 이야기해주는 것도 저로서는 참 고맙습니다. 교회에서는 7천 원도 받지 않습니다. 7만원을 주고 상담해보았자 알았던 것은 더 모르는 것 같고 몰랐던 것은 더 모르는 것 같은데 설교를 듣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면서 콩 놓을까요, 감 놓을까요, 그러는 사람은 똘만이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면 되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신데 왜 내 문제를 저 사람을 통해서 하시겠습니까?
어느 날 스펄젼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어떤 사람이 와서 “하나님이 목사님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스펄젼이 아무리 높아도 하나님보다 낮지 않습니까. 스펄젼 목사님이 더 재미있습니다. “나보고는 안 그러시던데. 우리 교회의 강단을 빌려주는데 왜 너한테 응답을 하시느냐, 나한테 응답을 하셔야지” 그렇습니다. 가끔 집회 요청이 올 때도 응답을 받았는데 목사님이 우리 집회에 꼭 오셔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나는 아직 그런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을 노예처럼 얽어 메어서는 안됩니다. 겸비하게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각자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렇게 배워가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배를 잘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해 가면서 어렸을 때에는 판단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으나 점점 신앙이 자라면서 이렇게 판단도 스스로 서야되지 않습니까?
우리도 매일 아이들보고 “너 좀 생각을 해봐라 그렇게 공부를 안하면 무엇이 되겠느냐” 그렇게 야단을 치면서 자기도 그만할 때 그 수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라고 보니까 생각하는 것이 너무 어리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자라서 자기도 시집 장가가서 아이 낳고 엄마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도 자라면 엄마도 되고 아빠도 됩니다. 이렇게 신앙도 순서 있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틀게 신앙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먹어도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바르게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 도저히 인생의 밤중이 찾아와서 폭풍의 전야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 굉장히 두렵고 무서운 상황이 자기를 향해 밀려오는 것이 분명한데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마냥 기다릴 상황은 안 되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무엇인가를 속히 선택을 해야하는데 자신의 이 선택은 엄청나게 중요하게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는 선택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 선택에 대해서 엄청난 책임이 동반되는 선택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밤중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잘못 선택하면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불행한 예감이 드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그렇다고 또 이상한 사람을 찾아가서 황당한 도움을 받지 마시고 좋은 사람, 목회자를 찾아가던지 하여튼 신뢰할만한 말씀의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으십시오. 경우에 따라서는 그 헤매이는 밤중 속에 있는 사람이 며칠 금식 기도하는 것보다는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 한 두마디 정확하게 던져주는 대답이 훨씬 하나님의 뜻에 가까울 때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절망과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의 깊은 화목을 유지하면서 살아있는 신령한 영의 세계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가 되어야지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평소에 이렇게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서 산 사람이면 모르는데 어제 제가 저의 예를 들었듯이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제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보다 하고 이제 막 교회에 나오려고 하는 사람에게 자기를 버리고, 정결케 한 후에, 주만 바라보고, 겸비하게 엎드려서, 악을 버리고, 순전하게, 말씀 속으로 들어가서,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내적으로 순복을 하면, 산신령 구름 타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자기 수준은 그것이 안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러면 그냥 보이는 데로 그렇게 살아야겠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볼 수 있는 사람의 지도를 받으면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하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인생을 깊이 하나님 앞에 생각을 하지 않고 잘못 살아서 죄를 짓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살아서 엄한 대로 인생길이 많이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이 길이 아닌 것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해달라고 빌면 죄는 용서해주시지만 그렇게 걸어간 인생의 상황은 금방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런 사업을 하면 안 된다고 성령님이 그의 양심에 일러주셨는데도 돈에 눈이 어두워서 믿음으로써는 도저히 해서는 안될 이상한 사업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이 빚, 저 빚 얻어 가지고 막 한 것입니다. 한번만 하면 대박이 터진다고 하면서 마구 돌진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아 잠깐 기다려라, 돈 벌어 가지고 올께” 대박이 아니라 머리가 터지는 것입니다. 걸어간 수많은 날들이 죄에 의해서 오염된 날들이 아닙니까.
어느 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자기가 열 두 해 혈루증을 앓은 환자와 같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비로소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리고 돌아가서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면 그 날 아침에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습니까. 눈뜨고 나면 빚쟁이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으로 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또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용서해주십니다. 그런데 빚쟁이가 된 것은 빚쟁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채무자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황까지 모두 해결되는 경우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은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죄의 용서는 용서이고 문제는 문제대로 남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해결해나가야 됩니다. 십자가 짐 같은 고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길은 정말 어두움에 들지 말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고의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번 이 세상에서 대박이 터지듯이 복을 얻는 것이 여러분들의 최대의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한번 엄청나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엄청나게 큰 행운을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이제 어둠 뿌리치고 빛 가운데에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에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주님 사랑 안에 하나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주님을 몰랐고 하나님과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면 이렇게 절망하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희망은 보지 못한 채 절망 안에서 흐느껴 울다가 사실도 아닌 그 가슴을 찢는 외로움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절망 중에 눈을 감을 비참한 인생일텐데 주님 만나서 주님과 화목하고 주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 한없이 기뻐하면서 살게 되면 이렇게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절망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나를 만났더라면 그렇게 어두움 속에서 절망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의 눈을 띄어주고 그래서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바라보게 만들고 죄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큰사랑을 발견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로 만들어줄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 그 삶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엘리사의 기도가 절망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이 사환의 눈을 뜨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로부터 받은 이 중보의 기도가 이 사환의 눈을 뜨게 만들어서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보게 만들어 주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인생과 여러분의 시험 속에서 여러분들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해달라고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도를 잘 들어주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기도의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절망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희망을 보았기 때문에 이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절망에 처한 사람의 눈을 열어주어 단숨에 그 절망을 몰아내고 희망의 믿음을 갖게끔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캄캄한 밤중이 여러분들에게 없었으면 좋았습니다. 그 밤중에 수많은 원수들이 여러분들을 에워쌌고 어느 날 눈을 떠보니까 큰 시련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났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지난날을 한탄하며 후회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다면 회개하고 아직까지도 시련을 당하면서도 도대체 이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오는지 이 시련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것인지 아직도 여러분들이 모를 것 같으면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간단하게 눈을 떠서 우리를 보게 만들어주십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면서 이렇게 눈을 뜨게 하시려고 하시겠습니까? 언제까지입니까? 바로 기도할 때까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절망적인 상황에 매달려서 지친 사람들이 잠시 상황과의 씨름을 접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깊이 흘리는 기도의 눈물은 마음의 문의 비늘을 벗게 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깊이 눈물을 흘리는 기도가 없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만들고 그리고 이전에 쓸데없이 환상으로 보였던 헛것들은 그 기도의 진실한 눈물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주님 붙들고 살게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억을 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이제껏 까지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문제는 아직도 여러분들이 밤중 속에서 헤매는 것은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인생의 어둠의 절망의 날들 동안에 사람들은 수많은 근심과 염려로 자신의 마음을 새카맣게 태웁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 근심과 염려로 수많은 날들을 지새우며 마음을 새카맣게 태우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더 캄캄한 밤중으로 데려갈 뿐이지만 여호와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고 흐르는 눈물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죄악을 씻어내는 진실한 기도의 헌신은 우리로 하여금 이 엘리사의 종이 눈을 새롭게 떴던 것처럼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어서 우리가 왜 이 상황에 이렇게 되었으며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그래서 이 기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어서 그래서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역사하시고자 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는 영안을 열어달라고 기도한다면 여러분들은 이 여러분들을 에워싸고 있는 이 큰 어려움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이 문제보다는 훨씬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5. 주님 안에 거하는 길, 기도하는 길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저도 사실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귀머거리가 되면은 저절로 말을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귀가 먹어도 입이 살아있으니 말을 하면 될 것 같은데 태어나면서부터 귀가 안 들리는 사람들은 좀 이해가 가겠는데 언어 습득이 안되니까, 그런데 어린 아이 상태에서 귀가 먹어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발성기관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귀가 먹으니까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세계에 있어서도 딱 맞아떨어지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귀에 들려서 깨달아지는 마음이 없으면 잠시는 들리지 않아도 깨달아지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벙어리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이 교육을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간에 모두 구하는 것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만 불만에 차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도 모두 다 욕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구가 교육에 의해서 얼마나 잘 다듬어진 욕구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짐승에게도 욕구는 있으며 모두 다 이 욕구는 있습니다. 그런 욕구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무엇인가를 구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그 사람에게 신앙이 들어가면 그것이 기도화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논리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 없어서 가장 문제가 되고 어떤 문제가 해결이 안되기 때문에 고민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고민하는 것의 우선 순위와 기도하는 것의 우선 순위가 일치가 됩니까? 고민하는 것이 많으면 저절로 기도도 많이 하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밤을 근심과 걱정 속에서 하얗게 밝혀도 한마디 기도도 안하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속에 있는 욕구가 욕구만 있으면 저절로 기도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생각이지 실제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근심거리가 제일 많은 사람이 제일 많이 기도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환난을 만나고 시련을 많이 당한 사람은 열렬한 기도의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말씀은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가, 나아가서는 기도하는데도 왜 응답이 거의 없는가에 대해서 명쾌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15장을 보면 벌써 그 앞에 이미 세 번이나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하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표현이 이미 15장 7절 그 앞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15장 7절에서는 보다 구체화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과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이 히브리 사람들의 맥락에서는 그 사람이 내 놓은 말과 그 사람이 분리가 안 된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이 사상에는 그 사람이 내뱉는 말과 그 말을 내뱉는 그 사람 그 자체가 분리가 안 된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우리 문화권에서 보아도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사상이 우리들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확실히 말을 해보면 말은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하게 말을 잘하나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지만 그 기교를 가지고는 말을 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잠시는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결국은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바탕이 경건하고 진실하면 말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경건하고 진실한 말이 깊이 배어있는 사람은 대게 삶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야바위 기질이 있고 모리배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말을 해도 항상 그렇게 가시가 돋치고 야비한 논리를 가지고 대화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몸에 배인 사람은 삶도 그러합니다. 말로써 사람을 잘 세워준 사람은 대게 삶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을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후비고 말로 사람들의 가슴을 찌르는 사람은 대게 행동으로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이 우리가 믿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무엇을 행하며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답변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하나님의 성경 말씀, 주님의 진리의 그 말씀이 주님에게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곧 그분이 있다고 하는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육체로 우리 안에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즉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면 여러분들의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있고 자식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각각 그 부모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다릅니다. 장자의 생각은 “나는 맏이니까 법적으로는 내가 우선권이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다 컸어, 나는 찬밥이야”하고 생각을 하고, 둘째는 “아빠는 형만 좋아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셋째는 “나는 매일 형들이 입던 것만 입어”하고 생각을 하고 막내는 “매일 나만 무시해”하고 넷이서 이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의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진짜 그 네 명중에 누구를 사랑하는지 아버지 자신도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네 사람 중에 누구를 사랑하는지는 무엇에 의해서 드러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을 잴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명이 있으면 그 네 명이 똑같이 어느 날 “아빠 추워, 아빠 나 옷이 하나도 없어, 아빠 나 학교만 갈 때가 되면 추워” 이렇게 네 명이 똑같이 이야기를 할 때 세 명의 말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둘째가 이야기할 때는 이상하게 마음이 예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둘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의 말을 깊이 염두에 하나님이 두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서 느낄 때 하나님이 저 사람의 기도는 잘 들어주신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느낌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나 참 좋은 나의 친구
느낌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참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육적인 동물인가를 보십시오. 우리들이 가정에서 똑같이 태어나서 밥을 안 먹이고 옷을 안 해 입힌 것도, 교육을 안 시킨 것도 아닌데 조금만 형이 자기보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평생 가슴에 못이 되는 것입니다. 시집 장가가서 아이를 낳았는데도 가슴에 못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 첫째, 둘째가 있으면 편애를 하면서 자기 엄마, 아빠가 자기를 편애했다는 것이 못이 되는 것입니다.
좀 신앙적으로 그렇게 해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아무개 집사와 함께 등록을 해서 신앙 생활을 했는데 왜 하나님은 그 집사의 기도는 다 들어주는 거야. 왜 나는 찬밥이야. 하나님 똑같이 예수의 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는데 나는 새끼가 아닙니까? 왜 나는 차별대우를 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제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제가 그렇게 치밀한 기도의 응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상처를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왜 받지 않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하나도 사랑 안 해, 그러니까 기도도 하나도 안 들어주시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을 해도 “헤” 확실히 우리는 속이 없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사소한 것에는 목숨을 걸고 쓸데없는 일에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진짜 필요한 일에는 멍하게 있고 세상을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하는 것은 고민하는 데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수준이 높아지면 고민은 사라지고 평화만 있을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다만 이제 고민하는 수준 자체가 영적인 성숙에 따라서 고민하는 수준의 정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러면 이제 우리는 여기서 이 본문을 가지고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요점으로 간추려서 두 가지만 배우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설교를 다 안 들었어도 하여튼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오래도록 설교를 들었으니 깊이는 없어도 눈치는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뭐가 뭔지는 몰라도 그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멘 해보십시오. 왜 좋은 것이냐 하면 오늘 기도의 응답과 관련해서 좋은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들어주리라 하는 것입니다.
주일 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이야기를 해주니까 정말이냐고 물었습니다. 정말이라고 하니까 날아라 슈퍼맨으로 변신하게 해달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느냐고 하는데 이것에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참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만 그럴 것이 아니라 사실 여러분들이 어른이니까 질문할 때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하면 욕먹을 까봐 말은 못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에게도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황당하게 청년들은 “정말일까? 무엇이든” 구하라 이런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왜 그것은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무엇이든지” 그것이 눈에 탁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혹 황당한 상상이지만 그 유명한 세계적인 여배우 자매를 배필로 달라고 기도를 해도 주신다는 것인가 하는 그런 의문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사실 내 놓고는 질문하지 못하지만 옆구리를 찌르듯이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든지 있습니다. 제가 본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대답은 될 수 있다 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런 황당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부산에 집회를 내려갔는데 어느 형제가 공항으로 차를 가지고 배웅을 나왔습니다. 그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좀 늙수룩해 보이기에 “형제 결혼을 했나” “아직 안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탐정처럼 넘겨잡는 태도로 “곧 결혼을 할 모양이지” “아닙니다” “자매가 있지” “아닌데요” 완전히 김목사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 목사님이 무엇인가 통찰력이 있다고 해도 그날 은혜를 받을까 말까 인데 세 번 타석에 올라가서 한번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무슨 신령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자동차의 햇빛 가리개에 예쁜 자매 사진이 꽂혀있기에 그것을 보고 부인 사진인가보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니까 결혼을 할 모양이구나, 그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애인인가 보구나 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영화 배우 이승연 사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항으로 강사까지 모시러 오는 은혜로운 청년이 거기에 웬 이승연의 사진을 거기에 꽂아 놓고 옵니까. 그 형제가 주님 안에 있고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말씀이 형제 안에 있으면 그런 사진을 꽂아 놓고 매일 침을 흘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과 연합되어서 하나가 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온전히 있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하는데 웬 슈퍼맨이 되겠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은 정확하게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누구의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 것 같고 누구의 기도는 안 들어주시는 것 같다고 할 때 그것을 깊이 파 들어가 보면 그 사람이 기도하는 내용과 괜히 바라만 보고 부러워하고 있는 그 사람 기도하고 있는 내용 자체가 다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용이 같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기도를 가능하게 했던 배경 자체, 동기 자체가 다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와 그리스도인은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기도하는지 보면은 그 사람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있고 그리고 기도는 그 사람을 넘어설 수 없고 사람도 그 기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됨됨이 만큼만 기도를 하고 또 기도하는 만큼만 사람 됨됨이가 그러하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루어 주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응답입니다. 기도의 영광은 얼마나 그 기도가 천상유수인가, 얼마나 그 기도가 논리 정연한가, 얼마나 그 기도가 열정이 있는가, 그런 것들은 기도의 영광이 아닙니다. 기도의 영광은 응답에 있습니다.
누가 기도를 했는데 정말 폼이 나게 하는데 응답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슴만 치며 울면서 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며칠을 보냈는데 하나님이 들어 주셨다고 하면 그것으로서 그 사람의 기도의 영광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의사가 아무리 수술을 잘하고 정성을 다했어도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돌팔이가 수술을 해서 병이 낫고 살면 그것은 수술의 영광이 아닙니까.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지만 그것은 영광입니다. 기도의 영광은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 영광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단순하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그것만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이 오면 우리는 그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해 주셨다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품으로 영접되는 느낌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주택 복권을 사 가지고 긁었더니 천 만원이 맞았다, 주택은행장이 나를 열렬히 사랑을 하나봐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인격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수 만장 뿌려놓고 거기에 천 만원짜리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내가 사서 긁었더니 이상하게 하나 맞았다고 하는 그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다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기도의 응답을 수많은 기도 응답의 복권 속에다 집어넣었는데 운이 좋아서 그것을 붙든 사람이 기도의 응답이 터지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격의 됨됨이와 하나님을 향한 자세와 모든 것들을 보시는 인격적인 교통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이 사람의 기도는 응답을 해주어야 되겠다, 의지를 가지고 찾아와서 응답해 주시기 전에는 누구도 응답 받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응답 받을 때 우리는 기도 하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신나고 너무 좋고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 나를 정말 용납해 주시는 것, 나한테 신경을 써주시는구나,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나를 속속들이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시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응답을 자꾸 받고 나면 주님 사랑에 붙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데 응답해 줄 적마다 하나님의 품에 확 안기는 것 같은 사람의 품에 안기는데 그 인간이 연구 대상이 아니고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참 너무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교회당에 왔을 때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를 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을 그대로 남겨두고 가게 하셔서,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이 이 스크린하고 저 뒤에 있는 에어컨입니다. 필요 없어서 다 두고 갔는데 이것을 보는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골고루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무슨 생각이 드느냐하면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쓰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매사에 있어서 주인공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사람들이 놓고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주시려고 두고 가도록 그들을 움직이셨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 속에서 맛보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용납해 주시는구나, 사랑해주시는구나 하는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들의 기도 응답 속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다 라고 할 때에 그 화목의 증거가 가장 여실하게 드러날 때가 언제인가 하면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할 때 기도가 잘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고단하게 일을 하다가 그냥 죽 가면 집에 도착해서 편히 쉴 수 있을 텐데, 아니야 5분이라도 기도하고 가자” 하고 돌아왔습니다. 피곤해서 “하나님”하고 부르는데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하러 내려오는데 오늘은 너무 고단하다 가서 설교만하고 올라와서 자야지 하는데 어느 날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면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을 기도를 해도 길지가 않습니다. 어떤 날은 오늘은 기도를 해야지 하고 내려갔는데 설교하고 엎드리니까 절벽입니다. 그래도 안 피곤하니까 올라가서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우리들이 충만하게 사랑하고 우리들이 그 사랑 안에 산다 라고 할 때에 그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랑을 나누는 관계에 있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잘 입증되는 것이 바로 기도에 경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 우리가 와서 “주님 제가 왔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그래 네가 온 것을 알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고 우리의 기도가 막 쏟아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화하다고 그래도 교회는 나오지만, 만일 교회까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막장까지 간 것입니다. 성경 공부도 참석하고 또 설교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하면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기는 이런 저런 핑계를 됩니다. “요새 회사 일이 바쁘고”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노골적으로 하나님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저를 안 기뻐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라고 하는 정직한 대답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럽기 때문에 이리 저리 돌려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높음이나 깊음이나 환난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그 어떤 천사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왕년에 회사에 안 다녀본 사람이 있습니까? 직장 생활을 안 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런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는 것이 그런 생활 속에서 문득 문득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고 그 사랑이 충만할 때에는 영적인 순발력이 있습니다. 골몰하게 무슨 일에 막 몰두하다가도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오! 주님” 하고 부르면 그 주님의 충만한 사랑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 바쁜 일과 중에도 그러는 것입니다.
전 지금도 그것이 기억이 납니다. 직장을 다닐 때인데 비가 막 쏟아지는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점심시간에 옥상에 올라가서 가끔 한가한 시간을 갖는데 옥상에 올라가니까 옆 건물에 어느 그리스도인이 비가 막 쏟아지는 처마 끝에 두 손을 모으고 서서 막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바쁘고 힘에 겹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기도를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정말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그런 기도 속에서 살면, 화목하면 영적인 순발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막 세속적인 생각이 밀려오는 것 같으면 눈을 감고 지긋이 찬송을 하나 부르면 신령한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께 헌신된 삶을 살고 싶고 수시로 유혹을 받기는 하지만 정말 주님만 사랑하며 살고 싶은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그런 사랑 속에서 살아갈 때 바로 기도의 세계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들어주십니다. 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주님 안에 그가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거했을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들 속에 주님이 우리 자리에 서셔서 살아 계셨더라면 주님이 꼭 하고 싶으셨던 그 일을 나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리에 계십니다. 만약에 예수님 자신이 오셔서 오늘 이 열린교회를 만일 목회를 한다고 생각을 해보면 우리에게는 과분한 말씀이지만 주님이 하고 싶으셨던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제 안에 온전히 살아있으면 주님이 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온전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주님이 가지고 계신 그 마음과 소원을 제가 그대로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분노하시는 그 자리에서 저도 분노하고 주님이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서 저도 눈물을 흘리고 주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그 자리에서 저도 고난을 당하다가 주님이 이 교회의 목사님이라면 죽으셨을 그 자리에서 저도 마지막에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섬김의 질이야 같을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 동기와 마음이 다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가정의 주부라면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사셨겠습니까?
???
예화) 딸이 기도하고 자라고 했더니 닌자 거북이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잤는데 진짜 꿈에서 봤다고 아침에 이야기해서 그게 정말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 같지만 다음엔 텔레비젼으로 보 라고 했다는 이야기.
예화) 우리 총신 선교사 한 분 중에 러시아 선교, 공산권 선교를 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을 꺼예요. 세계가 다 열렸으니까. 그때는 엄청나게 얼어붙었던 시대 였었거든요. 80년대 중반, 초반, 중반이었으니까 그분의 사명은 뭐냐하면 공산세계에 침투해서, 근데 난 그것도 기독교 윤리적으로 말이 되는 줄 모르겠어요. 뭐 증명서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가지고 가짜죠. 공산세계에 침투해서 거기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자유세계로 넘어오는 사람들을 국경을 넘도록 도와주는 선교래요. 사실 정직에 관점에서 어떻게 되는 줄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랬대요. 그 사람 얘기가 참 재밌어요. 러시아에서 어느 사람 하나가 주님을 믿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56루브르, 얼마쯤 되는 돈인진 모르겠어요. 그것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를 했대요. 처음에는 속으로 눈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다가 너무 다급하니까 소리를 내어 통성으로 기도를 한 거예요. 그 동네 담당 케이지비가 있었대요. 왔다 갔다 하는데 정보에 의하면 누가 기도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그래요. 그래서 가서 보니까 뭐라 뭐라 도란 도란 기도를 하는데, 무슨 소린지는 잘 몰 알아 듣겠는데, 그 다음날 다시 와 보니까 열렬하게 부르짖는 거예요. 56루브르만 달라고 막 부르짖는 거예요.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맡는 담당구역에서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생겨나면 자기는 미래에 ???한 지장이 있다는 말이예요. 그래가지고 내려가서 기도하는 사람한테 옆구리 쿡쿡 찌르면서 그랬대. “ 여보시오, 왜 내 구역에서 이렇게 열렬하게 기도하고 난리냐고 56루브르 줄 테니까 제발 다음부터는 여기서 기도하지 말라고.”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다시 기도를 했대요. “하나님,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왠지 찝집합니다. 다음에 응답해 주실 때에는 케이지비 통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응답 좀 해 주시라고”
주님의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감화를 받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런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런 생활 속에서 밖에는 그런 기도의 생활밖에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얼마나 한심하시겠어요. 세 살짜리가 어느날 자고 일어나서 걔(목사님 아들)는 30개월이 되어서는 아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했거든요. 말을 잘 했어요. 세 살 된 얘가 “아빠, 아빠, 나 하나님께 기도해서 닌자 거북이 봤어.” 그렇게 말하면 참 귀엽지만은 수염이 꺼멓게 나 가지고 30이 다 돼가지고 어느날 자다가 일어나 가지고 “목사님! 목사님! 저 기도해 가지고 응답받았어요.” “뭐야?” “꿈속에 진실이를 본 거 있죠.” 해 보라고. “너도 인간이냐!” 안 돼는 건 아니예요.
그런데 되는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되서 되는 건 아니란 말이죠. 신앙이 자라면 기도의 세계도 성숙해 가야 할 것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성숙해 가야되는 거 아니요.
똑같은 거예요. 성숙해 가기 위해선 어떤, 성숙해 줘야 되고, 또 하나 그렇게 말씀에 대해 깨달은 게 없는 사람들은 수십개 기도하다가 하나 응답되면은 그거 가지고, 수십년동안 그거 응답받았단 이야기, 옛날에 응답받은 거, 요즘은 응답받은 게 별로 없으니까 왕년에 응답받은 거 그냥 욿어 먹으면서 다니거든요. 그건 날찌도 안 나와. 예를 들어 옛날에 응답받은 거 거 얼마나 말을 많이 했든지, 보태고 보태고 그래서 얼마나 뻥튀기가 됐는지. 그러고 돌아 다니는 거예요. 요즘 응답 받은 게 많으며 옛날 것 말할게 뭐 있어요.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게 무슨 재미 있는 삶이예요. 그게 정말 진실하고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요. 그런 거 아녀요. 그런 삶은 기도의 세계에서 풍성함을 비할 수 없는 거예요.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실 때에 우리의 기도를 드리면 단지 하나님이 기도 했더니 들어 주시는게 아니라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것,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이 기도가 응답됐을 때야 그 사람이 겨우 느꼈을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기도가 아직 응답이 실현되지 않았어도 그 응답으로 치달아 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묘미가 저쪽에는 없다 이거예요. 그리고 사실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역학관계가 되어서 당구공이 서로 맞듯이 연결되어 있잖아요. 자기는 자기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그러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도가 응답되어서 저쪽에서 똑 떨어졌는데, “아! 내가 기도 응답 받았다.” 사실 그럴지도 몰라요. 그게 사실이예요.
기도의 세계는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는 은혜의 세계가 동반 됐을 때가 은혜이지 그런게 아니라 이거죠. 그런데 그런 차이가 있단 말이죠. 우리는 전자를 지양하고 후자를 지향한다 이 말이죠. 그리고 기도응답의 빈도에 대해서 이쪽하고는 비교가 안돼요. 그쪽하고는 우리는 수시로 기도하는데 응답을 받는 거예요. 수시로 기도하면, 매주의 기도응답의 역사를 보는 거예요. 일일이 얘기를 하면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죠. 그런데 그런 기도응답의 세계를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이거죠. 그렇지 않으면 절대 그런 기도응답의 세계는 가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청각이 끊어지면 벙어리가 되듯이 발성기관이 정상이어도 벙어리가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려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가져다 주고 우리의 마음에 감화를 불러 일으킨다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것이 모든 주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오기 위한 첫 번째 통로가 무엇인가 하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때에 그 때 깨달은 말씀이 우리의 머리를 타고 가슴으로 흘러 내려오면서 여기에서 폭발을 일으켜서 우리에게 감화와 은혜를 가져다 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내려와서 우리의 배를 움직이면서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바꿔 놓아서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예요. 물론 지식에만 그치고 그 이상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충분하지 않은 거죠. 그러니까 잘 깨달아도 깨달음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깨달음을 우리 머리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가슴에 흘러 내려와 우리의 배까지 내려와 흐집어 놓아서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말씀의 역사가 필요한 거예요. 그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라구요.
저한테 그런 얘기 들어본 사람 여기도 있겠지만은 교회에서 목회자를 좀 마음 아프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한 사람도 없어요. 뭐 있겠어요? 부도덕하거나 심지어 죄를 짓거나 그래서 좀 영 안 좋은 사람한테도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교회를 떠나라”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얘기 저한테 들은 사람 몇 사람 있어요. 그 사람 어떤 사람이예요? 절대 깨닫지 않으려는 사람들, 설교도 안 들을려고 그러고 깨닫지도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 몇 년동안 두고 보다가 “넌 딴데로 가는게 좋겠다.” 정식으로 얘기해요. 그렇게 안 들을 바에야 뭐하러 곱절로 예배드리는 이 교회에 남아 있냐. 딴 데 가서 너 한테 맞는 그런 데를 찾아봐라.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거예요?
깨달음이 없으면은 절대 우리 영혼에 변화가 있지 않아요.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기도는 안돼요. 왜 그러냐 하면 들어보세요. 우리의 기도라고 하는 게 있죠. 아까 제가 예를 들을 것 처럼 머릿 속에 있는 이 근심거리가 그대로 기도로 나오는 것은 아니예요. 우리의 머리 속에 아무리 생각하는 게 많고 그리고 기도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우리의 입에 흘러나와서 그냥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기도는 우리의 머리로 하는 게 아니예요.
여러분 생각에는 누가 기도를 제일 잘 할 것 같애요. 소설가가 기도하면 기도 제일 잘 하겠죠. 글쓰는 데 천재니까, 제가 소설가 기도 한번 들어본 적 있었거든요. 우리 학교 다닐 때 교수중의 한 분이 소설가였거든요. 근데 정말 그 사람은 소설이예요. 기도시간에, 항상 마음 속에서 그분 기도하는 걸 들으면 그런 생각하면 안 돼는 데, “어휴, 잘난 체 되게 하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나님, 오늘도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입니다. 길가에 낙엽들은 굴러가고…” 낙엽이 구르든 말똥이 구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수업하니까 “ 하나님, 오늘 잘 배워서 주님 쓰임 받는 좋은 사람 되게 해 달라고” 하나는 푸르고 낙엽이 구르고, 저는 그 사람이 교회 가서 혼자 기도할 때도 그렇게 기도하는지 난 묻고 싶어요. 우리가 있으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느낌이 들어요.
??? 사람들 기도 잘하는 것 같지요? 아니예요. 기도가 만약에 정부 요로로 올라가는 진정서라면 그런 사람의 기도가 가장 잘 띄겠지만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문장을 늘여놓는 기도는 뜯어보지도 않고 천사들이 받아다가 우편물통에서 끄내다가 쓰레기통에 넣는 다고요. 그런데 소설책 하나 읽은 게 없고 어디서 책이라 읽어봐야 국어시간에 읽은 것 밖에 없는 데도, 은혜받아 봐요. 막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나와요. 하도 길게 하면 (땡) 내가 이거 치잖아요. 아니 우리 생각도 좀 해 줘야지. 청산유수로 쏟아져 나와요. 은혜가 안 되서 이거 치는게 아니예요. 저한테 여러 사람 당했죠. 왜냐하면 너무 신령한 세계 속에서 막 쏟아 붇는 동안에 자기가 그만 대표 기도를 한다는 사실을 신령한 은혜중에 잊어버리는 거예요. 생각나게 해 주는 거예요. (땡)-대표기도다. 앞으로 이런 일 일어나도 절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게 아니예요.
????를 해봐요.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 사람보고 기도 말고 정부가 얼마나 정치를 잘못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한번 눈감고 그렇게 말해보라고 그래요. 할 수 있겠어요? 못해요. 왜? 그건 영적인 일이 아니예요. 이건 은혜의 세계의 일이예요. 어떤 사람이 그런 기도가 가능해요? 말씀을 깨달음이 있는 사람,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이 진실한 기도를 하고 풍성한 기도를 해요. 이유가 무엇때문이죠? 말씀이 깨달았을 때 그것이 가슴에 내려와서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바꿨잖아요. 우리의 마음을 바꿨다구요. 근데 기도가 아까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 풍성하고 논리적인 기도는 대개 여기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어디서 나오는 기도예요? 마음에 우러나오는 기도잖아요. 이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된 거예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가 여기서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원래는 주님의 마음이었어요? 내 마음이었어요? 자기 마음이었거든요. 육적인 마음이었고 세상에 속한 마음이었고 정에 속한 마음이었고 욕심에 속한 마음이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그 깨달음이 이 사람의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켜서 영의 마음, 신령한 마음, 은혜의 마음,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거예요. 막 쏟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에 대해 깊이 깨닫고 나면 사람들이 굉장히 정서가 풍부해져요. 정서가 풍부해져요. 예배시간에 다리 딱 꼬고, 다리 꼬는 거 아니예요. 그것은 다리 긴 미국사람이나 하는 거지, 우린 다리도 짧달막해가지고 그거 꼴 다리가 어디있어요. 그러다가 잘못 꼬다가 넘어지잖아요. 꼴 다리가 어디 있어요? 요만한 다리 가지고 그것도 이렇게 뚱뚱한 다리를 꼬느라고 왜 꼬아요? 꼬고 이렇게 하고 여덟팔자 그리고 이렇게 묵상에 잠겨 있는데, 그 묵할 때 묵은 침묵할 묵이 아니라 묵상이예요. 묵사발된 상으로 이렇게 “지겹게 길다.” 그런 사람들은 수없이 교회에 나와도 웃는 날도 없고 우는 날도 없어요. 즐거운 날도 없고 기쁜 날도 없고 가슴 아픈 날도 없어요.
그러다가 그 인간이 변화되는 거예요. 그 인간이 어느날 자기는 안 들을라고 그러는데 이상하게 들려 오는 거예요. 그러다 가만히 들으니까 재미가 있는 것도 같애요. 그러다가 살금살금 귀를 빼았겼어요. 자기표현으로 말하면 귀를 빼았겼대. 정신이 팔렸다 이거죠. 어느 순간에 말씀이 쏙 들어가 버리네. 펑하고 변화가 일어나요. 내면에서 내적인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의 혁명은 창칼로 일어나지만 우리 내면의 세계의 혁명은 조용한 하나님의 말씀과 인격에 의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막 깨닫게 되는 거예요. 주님의 큰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눈 뜨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강한 예배시간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옛날에 그 찬송 부르면서 주르륵 들을때는 “어휴, 죄인도 많네”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도 안 보이는 거야. 아무도 안 보이고 세상도 없고 아무 이웃도 없도 그냥 자기만 보이는 거야. 혼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눈물이 막 흘러요.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러면 막 흐느끼는 겁니다.
“주님이 죽음에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하면 기쁨이 막 밀려 오는 겁니다.
그게 어린 아이의 마음이예요. 그게 바뀌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늘 은혜로운 신앙생활 하는 그리스도인은 말이죠. 눈가에 주름이 많아요. 막 웃느라고 주름생기고 그 다음에 기도시간에는 우느라고 주름이 생기고 말이죠. 그러면서 그 사람이 정서에 있어 풍부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그 사람이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그 사람 안에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인데,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일어나는 거예요. 깨달으면서 일어나는 거예요.
나는 학교 다닐때나 직장 다닐때나 제일 싫은게 조회시간이었어요. 조회시간에 땅보는 게 일이었거든요. 땅 파다가 조회 끝나는데 정말 조회시간이 싫었어요. 수십년동안 조회를 했는데, 그렇게 수십년 동안 조회를 했으면은 한 마디라도 생각나는게 있든지, 그랬을 텐데,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어요. 여러분도 그럴꺼예요. 이유가 무엇때문이죠? 그 사람들의 말이 마음에 담긴 말이라는 느낌을 못 받았다는 거예요.
사람은 말이죠.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사람의 마음까지 이르게 하고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의 머리에까지만 다다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더라도 전에는 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니까 종이짝에서 흘러나오는 말이예요. 그러니까 머리에서 멎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어떤 사람들이 뭐라 그러냐면 “목사님, 성경은 진짜 이상해요. ” “왜?” 머리가 얼마나 총명한지 대하소설을 읽어도 수십권 스토리가 쫘악 생각이 나는데 성경은 뒤쪽만 넘어가도 앞에 것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는 거예요. 소설 읽는 머리하고 성경 읽는 머리하고 똑같애요? 그 머리하고 그 머리하고 다르죠. 그거는 은혜 안 받아도 읽어요. 주님이 눈을 열어 주시지 않아도 길삼이 장가가는 얘기는 다 생각이 난다구요.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한 장을 읽고 다음 장을 넘어가면 생각이 안 난다는 것도 거짓말이예요. 한 줄 읽으면 뒷줄이 생각이 안나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이 딱 깨달아 지면, 깨달아 지고 그 깨달음이 계속 되면서 우리들이 은혜를 받게 되면은 뭐가 흘러 들어되냐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이렇때 전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로만 느껴졌는데, “주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껴지고 아들을 이 세상에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게 머릿속에서 잊혀질 수 있게냐 말이지요. 옛? 그런게 머리 속에서 잊혀질 수 있게냐 말이죠? 둘이 앉아서 서로 이야길 하는 데, 막 딴청하고 이야기 한 내용들을 잊어버리고 “내 눈을 똑바로 봐.”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며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 한 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상담한 우리들의 마음에 잊혀지나요? 잊혀지면 인간도 아니지.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또 다른 말씀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스며들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재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신앙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문제예요.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에도 한번 그런 말씀 드렸죠. 키더미스터에서 목회자 리차드 백스터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기로 유명했어요. 하나 하나 깨우쳐서 동네 전체를 복음화 했어요. 그런데 농부 하나가 그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난 맨날 똥지게나 지고 밭이나 파는 천하 농부나 불과한데, 나도 그렇게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배워야 합니까?” 이 목사님이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어요. “그것이 배우기 싫다면 천국은 당신이 올라가기엔 너무 높은 곳에 있군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 살고 싶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모든 기쁨과 애착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한 깨달음을 우리 자신이 깨달으려고 열심히 노력을 할 때에 하나님도 역사하셔서 그 깨달음이 여러분들에게도 오고 그 깨달음이 단지 지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영혼에 참된 변화로 이어지도록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주시는 거예요. 보내어 주시는 거예요.
간절히 깨닫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필요하다 이거지요. 이거 때문에 교회에는 뭐하는 곳이예요? 교회는 일차적으로 봉사하는 곳도 아니고 뭐하는 곳도 아니고 일차적으로 교회는 배우는 곳이예요. 깨닫는 곳이예요. 와서 자신이 이제껏 내가 겸손해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이제껏 가져왔던 이 세상에서의 나 나름대로의 인생철학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난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되는 지도 모릅니다. 내가 생각한 건 모두 하찮은 것들이고 주님의 생각, 주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들이오니 나를 깨닫게 해 주옵소서. 내가 그래로 믿겠고, 가르쳐 주시옵소서. 내가 그대로 행하겠습니다. ” 그것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이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이 없는 겸비한 마음은 비굴해지는 마음이지, 겸비해진 마음이 아니예요.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이 가난해졌다, 심령이 정말 가난해졌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활짝 열리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간절히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런 깨달음에 대한 진지한 열망이 우리고 하여금 결국은 그러한 깨달음이 깨달음 속에서 살려고 하는 간절한 추구가 결국은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도록 만들어 주는 첫 번째 조건이라 말씀이죠.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정말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으면 말씀의 사람이 돼요.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의 별명은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예요.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 깨달음이 없으면 기도생활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거예요. 그러한 말씀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무엇을 기도하든지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의 조건은 우리들이 얼마나 열렬히 간구하냐에도 달렸지만은 그 사람의 열렬한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 안으로 먼저 들어와야 한다 말이죠.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하게 맞게 살아갈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어차피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하게 맞쳐서 살아가지 못하면 아무렇게나 살든지 결국은 마찬가지다 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예요. 그렇게 말을 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하게 맞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 마음에 영 아니올시다 라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그래도 내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구나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 두사람을 하나님이 어차피 완전하게 내 마음에 맞게 못 살아가니까 너희들은 똑같은 인간들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신다는 거예요. 두 사람을 엄청난 차이를 있는 사람들로 보시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막된 인간과 사람다운 인간으로 보신다 이거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제가 목양을 이렇게 하는데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 산다 하더라도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겠어요? 저도 못 되는데, 그리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어떤 신앙적인 기대를 한다 하더라도 그 기대에 완전하게 “아! 집사님, 형제, 자매, 여러분 세 사람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으니까 하산하라고” 그런 사람들이 있겠냐구요? 인간의 요구에 못 맞추는게 인간이거든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 수 있겠어요? 인간도 그런 인간의 요구에 못 맞추잖아요.
그런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은 그렇게 설교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잘 안해 그렇게, 그런데 할려고 부지런히 애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차츰차츰 나아가 그리고 한사람은 아예 완전히 개판이야. “그렇게 살면 되겠습니까?” “냅둬, 이렇게 살다 죽을꺼야.” 두 사람이 어떻게 똑같으냐 이 말이야. 교회 출석한다고 두 사람이 똑같을 수가 있겠냐 말이지요. 똑같을 수 있겠어요. 두사람이 똑같을 순 없어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들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어요. 그러나 진짜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 완전한 순종이 자기가 애써서 노력하면 가능할 것 같은 기대 속에 사는 사람들이예요.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온전해 지려는 추구라는 겁니다.
어느 부인이 있었대요. 그런데 남편이 큰 병에 걸린 거예요. 죽을병에 걸렸어요. 그러니까 이 부인이 급하면 하나님 찾잖아요. 그건 서양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마찬가지예요. 교회도 옥수수 이 빠진 것처럼 가끔 나오는 사람이 열렬해 지기 시작하면서 불붙었어요. 막 도와달라고 한번만 살려주시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께 바치겠다고 살려주기 전에 바쳐 버리지 뭘 또 살려주시면 바쳐요? 기도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럴 때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니까 어떤 사람이 믿기만 하면 받은 줄로 알라고 말이죠. 의심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막 믿었어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런 것 들 잘하잖아요.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일이 일어날줄 믿고 감사헌금하잖아요. 절대적으로 이루어질 줄 믿는 거예요. 맨날 나는 믿는다. 우리 남편 일어날 줄 꼭 믿는다. 꼭 믿는다. 확실히 이뤄질꺼야. 이건 분명해. 그런데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 부인이 목사님한테 와서 하는 얘기가 목사님, 성경이 모두 하나님 말씀입니까?물었어요. 목사님이 그럼요.그런데 제가 다 조사해 보진 않았지만은 딱 한구절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그러니까는 ‘이 사람이 무슨 황당한 얘긴가!그게 어느 구절이냐하니까 요한 복음이래. 하필이면. 요한복음 우리가 한번 펴 봐요. 그사람이 가지고 온 성경구절이 요한복음 14장이거든요. 펴보세요. 13절을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14장 13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다른건 자기 마음에 하나도 안 들어오고 오직 하나만 들어오는 거예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그래서 자기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안해 본적 없고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 남편의 병낫기를 간절히 구했고,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결국은 자기 남편은 죽고 자기는 이제 과부가 되었다. 그러니 성경에 이렇게 약속이 되어 있는데도 이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다른 건 몰라도 이 성경구절 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해. 그러니 이 목사님이 이렇게 말해. 자매님,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게 말해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그랬습니다. 누구보고 얘기했습니까? ‘너희가’ 그랬습니다. 그 ‘너희’ 속에 자매님은 포함이 안돼요. 그래서 자매가 황당해서 아니 내가 왜 포함이 안돼냐? 당신은 거기 포함이 안된다. 그리고 그 다음을 읽어보라고 그래요. 그 다음을 읽어봤어요. 15절에 뭐라고 나오냐 하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그러니까 그 목사님의 논리는 이거예요. 13절, 14절에 나오는 너희가는 15절에 나오는 너희가와 똑같은 너희라는 거죠. 여기에서 예수님이 염기해 두신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말이죠. 당신이 그렇게 사랑했냐? 막 아무렇게나 살고 남편이 병이 들어서 교회 나와서도 사실은 온 관심은 병을 나은 남편과 세상에 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지 정말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위탁하고 이 불행한 기회를 통해서 내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야 되겠다는 것이 정말 당신의 고민이었냐는 것이죠. 사실이예요. 사실이라구요. 성경은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느냐와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얼마나 응답해 주시냐에 대한 문제를 밀접하게 엮고 있어요. 야고보서 5장에서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기를 구한즉 3년 6개월동안에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비 내리기를 기도한즉 비가 내렸다. 수많은 사람이 비가 오기를 기도했지만 수많은 사람이 기도했을 꺼 아니예요. 비가 왔어요. 비가 왔으니까 우리 기도 들어주셨다고 생각할 거 아니예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 보시기에 웃기는 애기예요.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에는 관심도 없었고 엘리야 한 사람이 기도했기 때문에 들어 주셨는데, 이 사람보고 응답한거 보고 자기네들이 박수 치는 거예요. 아까 얘기한 거랑 똑같은 거지요. 그런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성경의 관심이 무엇을 기도하느냐가 성경의 관심사이지만 누가 무릎을 꿇느냐 하는 것이예요. 누가 무릎을 꿇느냐 하는 것이예요. 여러분들이 기도생활이 힘겹게 느껴지는 것을 무엇이냐하면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순종하는 삶이 너무나 힘겹기 때문인 것이예요. 별로 순종하면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기도생활이 힘겹게 느껴지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계속 된다면 여러분들의 기도는 굉장히 강한 힘을 얻을 것예요. 여러분들이 하루만 실험을 해 보세요. 오늘 저녁부터 목사님이 실험해 보라고 했으니까 한번 실험해 보자. 어떻하든지 간에 오늘 저녁부터 내일 저녁때까지는, 내일 저녁때까지는, 내일 저녁때까지는 안돼지. 모레 아침때까지라도 잘 순종하며 살아가 봐야지. 우선 늘 기도해요. 그리고 원래 여러분들의 마음에 유혹이 느껴질 때에도 아니야, 순종해야돼.해보세요. 순종하기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 보기도 하고 하기 싫은 일도 한번 해봐요. 토요일날 그렇게 전도하라고 나오라고 했으니까 한번 나와 봐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에 참석해 봐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참석하기전에 나와서 하나님, 지난 이틀동안도 열심히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고,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할 때에 그렇게 순종하면서 산 사람의 마음에 정말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할까 라는 그러한 자기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예요. 그게 기도전에 느끼게 되는 참회의 정신이예요. 삶의 공을 들여야지만 기도에 힘이 들어가는 거예요. 삶을 아무렇게나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고 기도시간에 뭔가를 한번 해보려고 하는 그 기도의 모습이 바리새인들의 기도의 모습이예요. 금엄하고 폼잡고 그리고 자기들이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했던 그 모습 자체가 주님이 보시기에 아주 가증스런 모습이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 기도하는 모습 자체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예수님께서 비난하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분들이 기도생활을 견고하게 해 보려고 여러분들이 책을 읽고 아무리 동원해 보려고 애를 써도 여러분들이 삶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갖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기도생활이 진전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려 해요. 시궁창에 빠진 바퀴와 같은 상황을 여러분들은 면할 수가 없어요. 그 양쪽에서 어떠냐 하면 삶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해야 되요. 삶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해야 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이
내 주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이 기도의 문은 한번 열어 놓았다고 해서 3일이 가는게 아니예요. 오늘 기도의 문이 열려서 확 쏟아지는 것처럼 기도해도 여러분들이 삶을 조심스럽게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경건하게 살지 않으면 오늘은 쏟아지는 폭포수와 같은 기도를 드려도 내일 모레는 여기 앉아서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면서 한마디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범죄하면, 삶과 기도는 함께 묶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뜯어내서 고치려고 해보는 것은 반드시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예요. 사는 것만큼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만큼 사는 거예요. 삶은 기도를 능가할 수 없고 기도는 삶을 넘어설 수 없는 거예요. 삶은 기도 안에 갇히고 기도는 삶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결단을 해야지강력하게 결단을 해도 그 결단을 지속하지 못하는 커다란 이유는 뭐냐 하면, 새벽시간이 안 바쳐주는 것이 아니라 새벽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의 삶이 그 기도를 받쳐 주지를 못하니까 그걸 지속하지 못하는 거예요. 여건만 가지고 되는 것 아니예요. 그래서 오늘 마지막 결론으로 그러면 결론적으로 뭐예요.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고 주님 자신이 구하고 싶은 것을 구해서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주님의 맞는 구하는 기도제목이 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이런 감격이 있는 기도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배우려고 하는 의지를 가져야 되는 것이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가장 큰 방법은 예배중에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귀울이는 것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에 단순히 학습의 정신이 아니라 예배의 정신으로 주님앞에 자신을 다 복종시킨 상태에서 하나님의 관한 지식이 흘러들어오는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배의 정신과 지식이 함께 들어오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설교를 잘 들어요. 그렇게 되서 설교의 맛을 느끼면 성경이 달아지기 시작하고 성경이 달게 느껴지면 성경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수많은 책들에 대해 애정이 느껴지게 되고 그런거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고 그렇게 살아갔던 삶을 흠모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되는 것이지요.
그럼, 두 번째는 순종하는 삶을 잘 살아야 돼요. 오늘 한번의 불순종은 잘 쌓아올린 하나님과의 기도응답세계를 파괴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돼요. 기도응답에 풍부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지극히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예요. 온전하게 순종하고픈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 같은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냐면 내가 하나님 앞에 회심한 이후 지난 30년동안 적어도 내 의식속에서는 알면서도 불순종한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다.자기 잘난척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속 거하는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니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생각과 사고, 마음 그리고 의지가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떠나지 않은 거예요.
그런식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 결국은 거룩한 성도로 날마다 날마다 변해 가다가 가장 거룩해졌을 때에 인생을 마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의 참된 말하자면 인생에 대해 거는 가장 행복한 기대가 그런 것이란 것이죠. 이런 기도의 세계가 없고 순종하는 세계가 없으니까 예수를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이 더 야비해지고 치사해지고 더 교묘해지고 아주 단단해 지고 조잡스러워지는 거예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닿고 닿은 사람을 되는 거죠. 혐오한 그리스도인이 되가고 있는거죠. 자기 이해관계가 밝고 찔러도 바늘에 피 한방울 안 나오는 그래서 야비한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거죠. 얼마나 그런 사람이 많은데요. 그런식의 삶을 살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결코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예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되죠. 남다른 일주일을 살다가 와봐요. 예배가 달라지죠. 남다른 예배를 드려봐요. 일주일의 삶이 바뀌죠. 그러면서 상승작용을 하면서 숨질때까지 예배드리기 위해서 잘 살고 잘 살기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잘 살고 살기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잘 살고 말이죠. 훌륭하게 살기 위해서 정성껏 기도하고 열렬인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을 다해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일평생 그렇게 분투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 닮은 모습으로 숨질때에 손들고 그렇게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모습이란 것이죠. 여러분 기도학교 사경회 끝났지만은 삶의 기도학교는 이제 겨우 시작이예요. 이루 입학하는거예요. 오늘부터 삶을 바뀌요. 주님이 슬퍼하는 삶을 칼로 잘라내요. 그리고 이제 새로운 각오로 하나님 앞에 살아요. 그렇게 헌신적인 각오로 새롭게 하고 삶을 통해 풍성한 기도의 세계로 깨달음을 통해 풍성한 기도의 세계로 순종을 통한 풍성한 기도의 세계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문을 여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