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대적을 물리쳐라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염려와 기도(빌4:6-7) 2001.1.15 새해말씀사경회(오전) 1
2. 기도와 게으름(잠13:4, 막1:21) 2001.1.16.-17 새해말씀사경회(오전) 17
3. 기도와 무지(시73:22-24) 2001.1.18 새해말씀사경회(오전) 35
4. 기도와 미움 (엡4:32) 2001.1.19 새해말씀사경회(오전) 48
5. 명철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잠3:5) 2001.1.15 새해말씀사경회(새벽) 61
6. 원수들에게 포위될 때(시3:1-3) 2001.1.16 새해말씀사경회(새벽) 64
7.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시3:4) 2001.1.17 새해말씀사경회(새벽) 68
8. 환난날에 부르짖는 기도(시50:14-15) 2001.1.18 새해말씀사경회(새벽) 71
9. 고난 중에 결단과 기도의 응답(시55:16-17) 2001.01.19새해말씀사경회(새벽) 75
1.염려와 기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전쟁을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공격을 받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급로입니다. 그러니까 수없이 많은 군대가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훌륭한 병기와 기가막힌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전쟁은 무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먹고 입고 쓸 수 있는 고급품들을 원할하게 계속 공급해줄 때 그 병사들이 정상적인 군인으로서 기능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에서의 승패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맞붙어서 싸워서 적을 제압하는 것도 승리의 길이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적을 이롭게 하는 적후방의 보급로를 끊기만 하면 그러면 불과 몇주일이 못가서 아주 좋은 병기를 가지고 있어도 아주 쓸모없는 군인들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병든 자는 치료받을 수 있는 약을 공급받을 수가 없고, 군인들은 먹고 싸울 수 있는 양식들을 공급받을 수가 없고, 탄약은 다 떨어져가는데 탄약을 공급받을 수가 없을 때 군인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세계에서도 이같은 원리는 그대로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그 보급을 통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에 아침에 나와서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주의 신령한 은혜가 우리의 마음 속에 흘러들어오면 그러면 그날 하루가 반은 승리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혈기가 나도 그 새벽의 은혜로 누를 수가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생겨나도 그 새벽에 경험했던 나를 위해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일주일이 곤고해도 주일날 와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그 예배 중에 은혜와 긍휼을 막 부어주셔서 우리의 속사람이 그 신령한 은혜로 소생하고 나면 일주일 동안 어려움이 와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의지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정해진 때에 나와서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또 책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은혜를 받고 이렇게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이 보급로가 늘 열려있는 사람들은 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것들을 예배 시간에, 혹은 새벽기도 시간에, 성경을 읽다가 이렇게 부어주신 것들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통로가 무엇인가 하면 기도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은혜가 살아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지, 기도의 통로가 거의 막혀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떻게 은혜를 받아도 기도가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를 기도 속에서 잘 유지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사단의 입장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우리를 그 은혜에서 차단시키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왠만한 그리스도인이면 사단이 아무리 꼬여도 주일날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안 나오면 당장 가책을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사님이 전화를 하고, 전도사님이 전화를 하고, 구역장이 전화를 하고, 구역식구들이 전화를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기도를 왜 안 했는가 하고 교회에서 전화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내 오늘 당신 기도를 했어. 안 했어? 안 했다고 그러면 담임목사가 전화를 걸어서 너 기도 안 했다며, 구역장이 전화를 해서 너도 안 했다며. 그러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그러니까 공적인 예배 생활같은 것은 눈에 보이게 허물어트릴 수가 없습니다. 마귀의 입장에서. 그런데 이 기도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은밀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너트려도 다른 사람에게 표가 안 나고 자기 자신에게도 별로 표가 안 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이미 몸에 배이고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기도의 습관을 꺽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아침에 아이들 다 학교에 보내고 10부터 11시까지 방에서 조용히 엎드려 기도하는 시간을 벌써 몇 년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그게 틀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무너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새벽기도를 괜히 나오기 싫어서 그만둔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물론 의무감에서도 나오지만, 의무감보다 장구하게 제가 살아온 삶입니다. 교회를 떠나가도 새벽 그 시간에는 동네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서 5시에 새벽기도를 못가는 적은 있지만 그러나 아침시간은 기도 시간입니다. 난 5시도 아니지요. 6시 15분이 기도 시간입니다. 그렇게 이미 틀이 되어 있는 그것을 마귀가 무너트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귀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굳이 무너트릴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굴뚝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불을 안 때면 되는 것이지. 마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굳이 그 틀을 허물어트리려고 그러지 않고 예배에 나오는 것을 허물어트릴 수는 없어도 나오나마나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의 틀을 무너트릴 수는 없어도 하나마나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를 차단해서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신령한 것들을 막으려는 사단의 시도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흔하게 써먹는 카드가 무엇인가 하면 염려입니다. 수요예배 때마다 제가 이 성경 구절로 예배의 부름을 삼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염려입니다. 염려는 무엇으로 합니까? 손이나 발, 그리고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염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머리의 생각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깔대기처럼 마음으로 내려옵니다. 마음 전체에 스며듭니다.
희랍어로 “염려하다”라는 말이 찢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에 위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로 탁 모아질 때 그때에 놀라운 파괴력, 혹은 창조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정신일도면 하사불성이라” “정신이 하나로 모아지면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가 없으랴”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더군다나 기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새벽기도가 중요하다, 밤기도가 중요하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해야지 된다. 수없이 다 이야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가 있다고 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기본적인 하나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그 진실한 간구가 있다고 칠 때에 그것이 새벽 시간으로 고정되었으면 좋겠다든지, 아니면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해야 된다든지, 많은 시간을 기도해야 된다든지, 열렬하게 기도해야 된다든지 뭐 이런 것들이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지 마음은 없는데 새벽이면 어떻고 밤이면 어떻고 아무려면 어떠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데,
그러니까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훼방하게 하는 대표적인 방해물들이 여러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흔하게 써먹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주 쉽게 넘어가는 아주 커다란 장애물 중에 하나가 염려라는 것입니다. 내일도 살펴보겠습니다만 죄도 기도를 가로막고 게으름도 기도를 가로막고 무지도 기도를 가로막고 그렇게 여러 가지가 기도를 가로막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죄나 불순종, 이런 것들은 우리 자신이 죄를 짓거나 혹은 악한 생각을 하거나 혹은 범죄하는 것들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를 한 것 때문에 회개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타락한 이래 인간은 불안한 존재였고 그 불안에 궁극적인 원인은 염려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염려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겨우 확인하게 되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집 지어 놓고 나면 죽는다’ 그런 속담을 들어보셨습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돈을 벌어서- 진짜 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지어 놓은 사람 너무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이야기니까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도 수리를 해보고 일해보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그것인데 밖에서 와서 일하는 사람들은 안 힘든데, 남의 일이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을 지어주는 집이라면 힘이 좀 덜 들텐데 내가 살 집이니까 그러니까 이게 못 하나도 다 신경이 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을 짓는다는 것은 ‘제대로 알아서 지어’ 이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목수를 부르고 일꾼들을 불러서 일을 시키면서 자기가 감독을 하면서 집을 짓는다고 할 때 마음이 그 집을 짓는 일에 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저 지붕을 저렇게 높이 올려도 안 무너지나, 저 정원에는 저런 돌맹이는 안 되는데, 석가래는 어디서 저런 것을 가지고 왔어, 들보는 어디서 가지고 오기로 했는데, 나무가 왜 아직 안 오나’ 이렇게 노심초사하면서 한 일년에 걸쳐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드디어 집을 지어놓고 정원 공사까지 깨끗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꾼들도 다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깨끗이 장만된 방에서 벌러덩 누워보는 것입니다. 새집에서 새옷을 입고 그런데 이제 순식간에 모든 염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 생각에는 아마 그 집을 그 사람이 빚내어서 지었다면 안 죽었을 것입니다. 빚을 걱정하느라고. 집은 좋은데 어떻게 갚게되나. 넉넉한 돈으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죽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인가 하면 염려하던 것들이 일시에 다 사라져 버리고 나니까 자기의 존재가 확인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밀려오는 어떤 정신적인 공백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속담에 표시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마치 염려하며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보람인 것처럼 그렇게 늘 염려합니다. 늘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고 갈라진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기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죄며 잘못이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여러분, 자기가 염려한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한 적이 있으면 여러분 한번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정말 그런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아주 기억에 남는 회개의 순간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염려하는 것이었다.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염려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염려의 궁극적인 이유를 보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그것이 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결국은 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결핍된 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범죄입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과 같은 때에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염려할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인 제 삼자인 제가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서 염려가 되는데 여러분은 어떻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제일 먼저 우리의 염려에 가장 주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자신의 의식주를 위한 염려가 가장 우리의 염려의 비중이 큽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이정표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전 삶을 향한 가장 표준적인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하지 말아라.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모든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가르침은 구체적으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구현하기 위한 조건들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는 그 예수님의 명령을 주시기 전에 맨 처음에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에서 시작되는 것이 마지막 34절까지가 한 문맥입니다. 그런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이야기가 무슨 말씀을 하다가 나오는가 하면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들에 핀 백합, 공중에 나는 새의 말씀을 하다가 그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들에 핀 백합, 공중에 나는 새는 왜 나오는가 하면 맨 앞에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그것을 말씀하시다가 공중나는 새, 들에 핀 백합을 말씀하시다가 이는 다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만히 듣고 보면 이해가 안 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예수님 자신이 가르쳐놓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것들은 다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너희는 그러지 말고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러니까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한분이 두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 그런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왜 아닌가 하면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다시 말하면 이방 사람들도 자기네 신에게 먹고 입고 쓸 것을 구하고 예수믿는 우리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간구하는데 그런데 그 마음의 자세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 속에는 염려함으로 근심하므로 자신의 신들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염려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신뢰가운데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다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 오늘도 제게 양식이 필요한 것을 아시지요? 나에게 그것을 공급해주십시오. 먹고 입고 쓸 것을 공급해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내가 내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요 주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임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그 신앙의 고백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얼마나 어렵습니까? 모두 실직이다. 사업이 안 된다. 사업을 축소한다. 집을 팔아서 작은 곳으로 옮긴다. 우울한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어그제는 신문을 보니까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지방으로 가서 트럭 운전수도 하고, 짐 나르는 일도 하고 6-70만원도 마다하지 않고 지방까지 내려간다는 이야기가 상세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너무 우울합니다. 더군다나 2년 전에 I.M.F가 오니까 대학원을 진학했던 사람은 이제는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똑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우울한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먹고 입고 마실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도 이해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해를 하시지 안 하시든지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해가 가든지 안 가든지 간에 하여튼 염려는 우리의 기도의 영을 메말려버립니다. 고사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염려에 있어서 우리 개인적인 염려인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면 그것은 그 염려의 근원을 계속 파고 들어가보면 근원이 있습니다. 그 근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오는 연합이 약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는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도와주실 것이며 그리고 내 자신과 나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에게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인생에 시종일과 개입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있는 그곳에는 염려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실하면 그런 것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부 다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화: 예전에는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를 하지 못하셨는데 2년 전에 책을 쓰시는 과정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오랜 시간을 글을 쓰고 나서 일어나려고 할 때 너무 아프신 상 황에서 예전에 허리가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을 생각하며 얼마 전에 허리가 아프셔서 진맥을 하시니까 허리의 문제가 아니라 목뼈에 문제가 생겨서 등뼈로, 꼬리뼈로 내려와서 전체적으로 아픈 것인데 건물을 비유하면 지하실의 땅이 약간이라도 내려앉으면 건물에 균열이 생겨서 옥상까지연결이 되어 주저앉는 것과 같이 염려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부실이 온다는 이야기)
염려는 말하자면 허리의 통증입니다. 그 허리의 통증을 캐들어 가보니까 목뼈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과의 온전한 인격적인 신뢰가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 신뢰가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끊임없이 개인적인 염려를 솟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다음에 우리의 인생에 믿을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편?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아니 그 가정이 금술이 좋은 것은 내가 아는데 그래도 강사의 의도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해야지. 그런데 그것도 사실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다음에 자기를 건사해 줄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과 자기를 믿고 사는 것은 항상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신뢰하면 자기를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객관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으면 자기를 굉장히 신뢰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주 결합이 곤고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든지 나와 동행하고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불붙는 인격적인 확신이 없을 경우에는 이제 내 인생 내가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고 손에 넣어야 하는데 아직 없습니다. 그때에 마음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염려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를 다니거나 안 다니는 것과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서 그 분과 연합된 삶을 살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큰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기 전에는 이 염려와 결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먹고 입고 살아가는 이 문제와 결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자기는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염려를 하지 않고 사는데 자기는 좀 더 스케일이 커서 아이들을 유학을 보내는 일, 자동차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는 일로 염려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염려라고 했다는 이야기)
수사법상으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그러면 펜대를 잡은 사람하고 칼을 든 사람하고 이거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펜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표현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하는 것에 대한 염려라고 하는 것은 단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염려인 것입니다. 세상사에 대한 염려입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보호하고 자기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모든 염려가 바로 그런 염려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닌 염려, 모두 먹고 입고 마시는 데에 대한 염려입니다.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그 뜨거운 사랑에 부어진 속에서 살므로서만 우리가 고질적인 염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기도를 잘 합니까? 말재주가 좋은 사람, 저는 예수를 처음 믿고 나서 제일 신기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한글도 모르는 할머니가 어쩌면 그렇게 문장 실력이 훌륭할까. 아니 대표 기도를 시켰는데 25분을 하는 것입니다. 철야기도 시간에, 줄줄 나가는데 그 자체가 명문입니다. 그 할머니를 보고 철야기도가 끝난 그 다음날 아침에 당신이 기도한 것을 여기에 써보라고 그러면 쓸 수가 있겠어요. 못 씁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물흐르듯이 기도가 쏟아져 나오겠습니까? 어디서 나옵니까? 어떤 때에 기도가 물흐르듯이 쏟아져 나옵니까?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을 때,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그때 우리의 기도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연합 속에서 그 사랑 속에서 끝없이 기도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때의 기도는 기도하는 자체가 의무와 고통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달밤에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어떻게 그것이 고문일 수가 있습니까? 벌써 내가 20분째 사랑을 고백하고 있어. 지겨워. 이제 이정도 해서 끝나면 안 되겠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또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이게 하나의 마력입니다. 염려가 우리에게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서 근심할 때는 저것만 성취가 되면 한시름 놓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해서 해결이 되면 그 다음에는 기다렸다는듯이 욕망이 팽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욕망이 염려의 주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분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도의 영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끝없이 더 많이 누리고, 끝없이 더 많이 소유하고, 끝없이 더 높아지려고 하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염려가 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팽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염려를 자꾸 불러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도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대표적인 본보기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가 만든 그 피조물이 당신과 같아지겠다고 그런데 그것을 들어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안 하시는 것입니다.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염려를 극복하는 길은 자기가 바라고 염려하는 그것들이 계속 충족되므로서 자신의 염려가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기루를 쫓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미 성경 말고도 신앙이 없는 철학자들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미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눈을 뜬 것입니다. 마르크스 아올레스 같은 사람의 글을 읽어보십시오. 인간이 평정을 유지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비결은 절제와 금욕,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안분지족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기독교를 그렇게 핍박했던 그 황제도 그런 이치에 대해서 이미 터득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우리의 염려에 근원이 결핍에 있고 그리고 우리의 염려의 근원이 내가 뭔가를 얻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염려로 말미암아 불안한 상태에서 인간에게 강력한 희망이 생기는 것인데 그것은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결핍된 상황 속에서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그 마음을 그 상황을 통해서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쪽으로 자신의 마음의 기대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염려에 대한 신자의 진정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인가. 믿음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들을 반드시 주시고야 말리라고 하는 믿음도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먼저 강조합니다. 그것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그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주님이 입히시는 그 들풀이 오늘 피었다가 내일 사라져서 내일 저녁에는 아궁이에 들어가버립니다. 누구도 그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중을 나는 새는 언제 날았는지 아는 사람이 없고 언제 떨어지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창고도 없고 곳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제 날던 새들이 오늘 여전히 날아다닙니다. 하나님이 공급하고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치없는 것을 이야기할 때 참새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그 보호와 돌보심이 사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실제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주신 그 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자존감이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염려라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좌절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좌절을 많이 경험하면서 염려 속에서 산 사람들은 자신이 없고 자존감이 없습니다. 내가 가치있고 귀한 존재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자존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이 있다는 것 때문에 갖는 그 자존감이 얼마나 비굴한 자존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비록 결핍이 있어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과의 온전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존감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너무 귀하게 생각하신다라고 하는 것들이 경험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시선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데 좋은 옷을 입고 큰 집에 살고 그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왔다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 시야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내려다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굴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물질이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절약해야 합니다. 규모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좀 수입이 넉넉하고 그래도 고통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럴 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천사의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실인데 그 위에 우리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우리의 이런 식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몇푼의 도움만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나와 이런 결핍과 염려를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점검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물질을 의지하며 기대며 산 사람인가, 그리고 우리 주님을 의지하며 기대며 산 사람인가. 이것을 점검하는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듣고 그리고 자신의 이 거품으로부터 가득찼던 신앙을 걷어내고 그리고 진실해져서 없는 것과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적절한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먼 자는 안약을 발라서 보고, 벗은 자는 벗은 것을 발견하고 옷을 찾아서 입고 가난하게 된 자는 금을 사서 믿음으로 부요한 사람이 되고 하는 그런 근본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때 오늘날의 경제적인 위기의 상황들이 교회를 비옥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주식시장을 알기를 원하는 일보다 우리 주님을 더 많이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온전한 사랑이 결합 속에서 비할 때 없는 친교 속에서 염려를 극복하면서 사는 신앙의 비결들을 체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개인적인 염려 뿐만 아니라 먹고 입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만이 아니라 또 다른 염려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염려일 수 있습니다. 근심과 염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염려하고 또 자기 자신의 성화에 대해서 근심하고 하는 것들은 기원자체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절망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들을 잘 수행해야 되겠다라는 충성스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마음 편하게 살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에 나와서도 기도하면서 하나님 왜 나는 이렇게 밖에 못 삽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항상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어떻게 할까. 하나님을 만나는 진정한 회심, 영혼에 진정한 변화도 어떤 의미에서는 근심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나는 안전한가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생명을 이루는 염려이며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근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두 번째의 근심이 아니라 첫 번째의 염려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염려하는 것은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정신현상이기는 하지만 그 염려가 하나님께 대한 의뢰의 마음을 뒤집어 엎을 정도의 염려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충성심이 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시킨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실 것입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한도 안에서 항상 더 잘해야 할텐데, 더 아름답게 이루어져야 할텐데,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되는데 이것을 안 가지고 있으면 죽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때 충성스러운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분투하는 정신과 염려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주님을 향한 의뢰의 마음을 뒤엎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 염려가 과도한 나머지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쪼개지는 그런 종류의 육적인 염려로 흘러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 교회를 섬기면서 주위에 목사님들을 보면서 건축하고 그럴 때 막 염려하고 그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수면제를 먹고 잠들고 진짜 거의 돌 지경에 있습니다. 그리고 빚쟁이들이 몰려와서 밤중에 막 도망가고 그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왜 저러고 살까, 안 짓고 말지. 교회당이 너무 좁으면 그까짓껏 팻말하나 붙이면 되지, 꽉 찼으면 다른 교회로 가시오. 그러면 되지. 전 진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해보니까 그게 그렇게 옛날에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가만히 보면 가난한 집일수록 애들이 많았습니다. 넷은 기본이고, 우리도 사형제입니다. 넷은 기본이고 제가 어렸을 때 기억나는 구호가 이상적은 가정은 아둘 둘에 딸 하나입니다. 그것이 기억이 남습니다. 그러니까 넷은 기본이고 다섯, 여섯, 심지어는 아홉이나 되고 우리 집사람 집안 같은 경우에는 열입니다. 수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능력도 없는데 뭐 그렇게 많이 나’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러니까 그런 고민을 똑같이 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반성하는 것은(?) 처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짓다가 마는 교회들이 가끔 있습니다. 몇 년씩 교회를 짓는데 몇 번을 지나가도 진전이 없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저 목회자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많이 변했습니다. 간판을 세워놓는다는 그런 생각이 그 정도로 변했으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하나님의 일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고 큰 교회를 지어야지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근심이었는데 막 하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의를 위한 근심인지 뭔지 다 필요없고 이제는 마음이 갈라져서 목회자 자신이 영적으로 고사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도 없고 근심과 염려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그렇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칼로 자르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근심인가, 개인이 먹고 입고 사는 것에 대한 근심인가 그렇게 기계적으로 그렇게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이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근심이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이것이 마음이 갈라져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보다는 상황에 대한 염려가 한 사람을 지배적으로 점령해버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염려하지 말라는 말에다가 오늘 뭐라고 붙였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기에서 그런 염려가 그런 부정적인 염려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 바로 아까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깊은 만남, 신뢰입니다.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신뢰입니다. 그 신뢰, 그 사랑,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도가 이제 이야기하는 것은 염려는 하지 말고 기도는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하지 말아라. 이것이 첫 번입니다. 뭐 하라. 기도는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렇게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선 첫 째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기도의 범위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우리를 염려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기도로 덮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염려를 할 때는 집중해서 염려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염려를 할 때는 집중해서 염려를 합니다. 그래서 ‘봐 뭘 생각해 ’그러면 놀래는 것입니다.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그런 정도로 집중을 합니다. 그런데 염려에 그렇게 집중된 사람들에게는 기도 시간에 집중한 법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이 갈라졌기 때문에 기도 속에서 집중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염려도 사랑과 비슷합니다. 처음에 씨앗이 탁 떨어집니다. 그게 없는데, 그리고 그 다음에 그것이 계속 없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 이런저런 고통이 생길꺼야. 그 고통이 계속되면 어떻게 될까. 구 후로 이런저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터질꺼야. 그러면 어떻게 되지. 이렇게 되고 이렇게 되고 쭉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한 회사가 부도가 나면 하청업자가 부도가 나고 이어지면서 마지막에 구멍가게 외상을 못갚는 것과 똑같습니다. 쭉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씨앗이 떨어지면서 생각이 생각을 불러오면서 논리적으로 전개가 되면서 그것이 막 먹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어디서 듣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 자신 속에서 다 경험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에 그렇게 해서 결국 마지막에는 마음이 다 갈라지고 기도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기회는 언제인가 하면 초기, 처음입니다. 생각의 씨앗이 탁 떨어졌을 때, ‘어 그 회사가 부도가 났데. 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논리를 생각하기 전에 씨앗일 때 자신의 마음에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기도로 덮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논리를 생각하지 말고 기도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성장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런 일이 터졌습니다. 주님, 이 일이 터지고 나면 이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생각하기가 싫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대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그래서 자기가 염려하는 것이 염려하는 그 초점과 기도하는 초점이 일치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집안에 공부를 하지 못하는 애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면서 여기에 와서는 구역장 사명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그것만 기도하면 계속해서 똑같은 상황이 개선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역장도 잘 해야지만 자기가 일주일 동안 지배적인 염려가 애가 공부를 안 하고 속을 썩여서 열을 받아서 폭발하기 직전이다. 그러면 폭발하지 말고 여기서 터져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 아이의 그 상황을 그냥 그대로, 이 아니가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될까. 불량배가 되겠지, 감옥을 드나들겠지 그러다가 여자애를 만나고 똑같은 놈을 낳겠지, 그게 내 손자야 손녀야, 그 후손이 퍼져서 나라와 민족을 어떻게 망가트릴까, 그리고 역사에 어떻게 부정적으로 기여할까 그런 것 다 생각하지 말고 ‘저 놈이 왜 저러지’ 그 씨앗 하나로 만족하고 기도로 그것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그래도 눈물로 기도하고 얻은 자식인데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서 간절히 기도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염려는 얼마나 집중된 마음으로 시시때때로 염려합니까? 하루도 염려를 하지 않은 적이 없고 무시로 염려를 합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염려를 합니다. 자나깨나 염려를 합니다. 언제나 그것하고 연관된 비슷한 것만 봐도 염려를 합니다. 소금 염자만 보아도 그것을 염려합니다. 그냥 그 염려가 생활해 되어 있습니다. 온 인격에 깊이 배어있습니다. 그 염려와 그 사람의 인격이 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간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기가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염려를 끊임없이 불어넣어서 이제 완전히 기도의 그 세계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형체는 남아 있는데 그런데 실질적인 기도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염려가 계속 번져가게 되면 염려가 마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개시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행동개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면 그래도 믿을만 한 것이 누구라고요. 자기 자신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적인 것들이 아닐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에 대학 부정입학을 하는 애들을 보십시오. 참 나는 그 부모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진짜입니다. 난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우리 애들을 이런 정도로 사랑할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못하는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데로 그런 방법을 써서 부정적인 방법을 써서 얼마나 많이 염려했겠습니까? 그러다가 그 염려가 꽉 차니까 그 다음에 행동개시에 들어간 것입니다. 브로커를 부르고 만나고 하는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믿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없을리가 없습니다. 약방에 감초인데 없겠어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염려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과의 결합을 통해서 물리칠 수가 있다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행동으로 범죄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속에 있는 염려, 작은 작용 하나 속에서 엄청난 파괴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끌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 하면 염려하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기도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기도가 되는 것입니까, 하는 것입니까?” 거기에 대해서 제가 아주 기가막힌 답변을 주고 싶습니다. 기도가 하는 것입니까, 되는 것입니까? 기도가 안 될 때는 하는 것이고 될 때는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막혔을 때는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몸부림치면서, ‘주님,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저는 제일 마음에 동정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너무 오래동안 영혼이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도를 거의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동정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마음이 동하면 내가 찾아가서 본인이 해달라고 그러지 않았어도 기도를 해줍니다. 그 새벽에 추운데 머리까지 감고 기도하러 나왔는데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곤고하면 기도가 안 되는데도 그 새벽에 나와서 가슴만 치면서 주님을 부르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도 아주 명답입니다. 기도가 안 될 때는 하는 것이고 될 때는 되는 것이다. 더 수사법적으로 다듬으면 기도가 안 될 때는 기도는 하는 것이고, 기도를 잘 할 수 있을 때는 그것은 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진짜 기도가 정말 잘 될 때는 어떻습니까? 놀랍습니다. 어떤 때는 잠깐 기도하고 났는데 서너 시간이 흘렀습니다.
(에화: 전도사 생활을 하실 때 한참 은혜를 받으셨을 때 중고등부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토요일이면 학생들과 교회에서 기도를 하는데 은혜를 주셔서 기도 제목 서너 가지를 놓고 기도하고 나면 날이 샜는데 그 상황은 기도가 된 것이라는 이야기)
그때는 기도 계획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우리를 몰고 가시고 싶으신 데로 몰고가면서 기도가 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염려가 가득찬 사람들은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기도 생활을 안 하면서도 뭔가 풍성한 삶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계속 시도해서 실패하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런 희망을 가집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새벽기도에 이런 정도만 나오면 내가 겨울에도 반바지 입고 다니겠습니다. 진짜 벌거벗고는 못 다녀도 반바지는 입고 다니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간절히 하면서, 염려가 떠오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의 이야기가 하루에 인간의 마음 속에 십만가지의 생각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천분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백가지의 염려가 떠오르는데 사실 구백 구십 가지의 생각은 평안이고 한가지가 염려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염려하는 생각이 안 떠오를 수가 있겠습니까? 떠오릅니다. 그런데 떠오르 때 즉시 기도해서 그것을 덮어버려서 싹이 나지 못하게 해서 고사를 시켜 죽여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도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뭔가 굉장한 염려가 있었는데 한참 기도하면서 살다가 보니까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런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한번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지방에 집회를 내려갔는데 갑자기 교회와 가정을 생각하는데 막 견딜 수 없이 불안한 마음이 드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네가 신령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니까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전화를 해보니까 아무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니까 불과 몇분 사이에 가득찼던 먹구름이 싹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가위에 눌리고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똑바로 해야 합니다. 위험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잘 비우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이상한 꿈을 꾸고 그래도 단번에 확 밀려가고 그 염려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그것이 뭐가 주는 힘입니까? 기도가 주는 힘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면 첫 번째는 염려였고 그 다음에는 기도였으며 그 다음 세 번째는 평강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 신기하게도 기도하자마자 탁 하고 응답되는 예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하늘나라가 어딘데 그래도 여기까지 올 때 시간이 좀 걸릴 것이 아닙니까? 배달이 되어서 오려면, 그래서 옛날에 내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야 땔감을 가지고 와라” 없는데요 그러면 굉장히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래요” 그러면 “아직 도착을 안 했다고 그래라” 기름을 가져오라고 그러면 미착이요. 도착을 안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그리고 어떤 때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응답해주시고도 상당 기간동안 우리를 기다리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남편 변화되도록 역사해주십시오. 저 혼자 이렇게 예수 믿는 것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놀랍게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막 기뻐 뛰는데 집에 가보니까 그 인간이 여전히 담배를 피고 소주를 먹고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운세를 떠본다고 화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염려가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응답해주셨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실현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실현이 되는 것은 좀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렇게 즉각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 보다도 더 빨리 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 속에서 고통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면 평강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참 재미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게 희랍어 성경에 보면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면 지각이라고 번역이 된 것이 ‘이해’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자면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모든 이해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모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것은 즉시 오는 것입니다.
염려가 막 피어나는 것을 기도로 덮어버리면 즉시 뭐가 오는가 하면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무지하게 염려가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며칠을 기도하면서 밤잠을 자지도 못하고 먹을 것을 먹지도 못할 정도로 살을 에이는 것처럼 밀려오던 그 염려가 사라지고 평강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에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바로 그 순간에 누가 가서 어떻게 며칠 전까지 죽을 정도로 괴로워하고 염려하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놀라운 평화를 얻게 되었는데 네가 그렇게 근심을 안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무슨 이유를 댈 수가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이유를 댈 수가 있습니까, 댈 수가 없습니까? 아니 물론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 이것은 이유를 댈 수가 있지만 논리적으로 근심하는 사람의 논리가 복잡하듯이 그런 논리를 통해서 지금 평화를 얻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너 매일 바가지 긁는 아내의 변화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그래 내가 네 기도를 들었다 이렇게 응답해주지, 모년 모월 모시에 누가 너희 집에 갈 것이고 이런 저런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해서 언제쯤이면 교회 출석을 하고 그 후로부터 며칠 쯤에는 변화를 받고 그 후로부터 몇 달 후에 구역장이 될 것이다 그렇게 가르쳐주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논리를 초월하는 평화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오늘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인간의 모든 이해, 혹은 지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기도 응답에 실현은 즉시 될 수도 있고 나중에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든지 그것 보다 먼저 일어나는 일이 이런 평강입니다. 정말 놀라운 평강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번에도 경험했습니다만 목회를 하면서 그런 것을 참 많이 경험합니다. 어느 지체가 위기 속에서 휘말려 어쩔 줄을 모르는데 그런데 기도하면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지체에게 염려하지 말라. 그때는 권위가 있습니다. 괜히 염려하지 말아라 그러는데 아니 염려를 안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갑자기 주눅이 들지요. 그래 내가 남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지 말아라,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잘 해주실 것이다. 그러면 이상하게 그렇게 대들기 잘하던 사람들도 굴복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결핍 속에 살면서도 사는 그 삶의 방식이 두 가지입니다. 똑같이 염려가 떠오르는데 어떤 사람은 그 떠오르는 염려를 즉시 기도로 덮어서 그 염려를 고사시키고 오히려 그 일이 없었더라면 누릴 수 없었던 하나님의 더 큰 평강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고, 어떤 사람은 그 염려를 똑같이 해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계속 피어올라서 결국은 그 사람의 삶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모든 너그러움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화를 많이 누리고 있으면 너그러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아주 각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런 평강이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을 때에는 자기를 절제하고 억제하면서 이렇게 좀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강한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고갈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힘들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황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염려가 가져다 주는 파괴적인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염려는 가슴에 품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암덩이가 여러분의 살에 붙어있지만 여러분의 살의 일부가 될 수 없듯이 염려와 결별하며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 염려가 여러분들의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염려를 품고 있지만 그러나 결코 그 염려와 하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염려와 평강이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은 염려를 극복하고 그 염려 때문에 하나님 의지하면서 오히려 기도의 영이 강해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평강을 맛보면서 인격적인 깊은 친교 속에서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되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염려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평화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도 금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초토화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에서 좀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간절히 원하지만 그것과 함께 여러분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건축헌금만 작정하지 말고 한번 하나님 앞에 기도를 작정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는 제가 돈은 없어도 새벽기도를 일년 동안 꾸준히 하겠습니다. 아니면 아침 기도를 하겠습니다. 아니면 내가 최소한 한시간 이상 무릎으로 하나님과 교회와 그리고 우리의 가정을 섬기도록 결심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결심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처럼 불안하고 어두운 때일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면서 거룩한 평강 속에 살아서 불안해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들에게 여러분 안에 있는 평강의 비밀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면 그들에게는 몇 푼의 돈이나 한사발의 음식보다도 여러분들의 그 가르침과 증거가 더 훌륭한 구원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여하면서 사는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기도와 게으름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13:4)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막1:21)
우리의 기도 생활을 허물어트리는 적 가운데 염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기도를 가로막는 것이 눈에 보이는 뚜렷한 죄, 그것이 기도를 가로막는 커다란 원인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알고 있습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의 기도 생활은 염려같은 것, 아무리 염려하면서도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죄가 별로 없더라도 비교적 바른 생활을 해나간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염려가 꽉 차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죄가 무엇인가를 찾을 때 무슨 특별히 기억이 날만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기가 왜 기도가 안 되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사실 어떻게 보면 이런 염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다루어보려고 하는 게으름인데 이런 것들이 기도를 보이지 않게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적도 무섭지만 보이지 않는 대적들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염려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고 깊이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이 게으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게을렀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한 적이 있습니까? 별 뚜렷한 가책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 것인데 이게 서서히 우리의 기도에 아성을 허물어트리는 그런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잠언 13장 4절 말씀이 꼭 기도를 두고 한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지혜인데 게으른 사람은 마음이 원하여도 얻지 못하지만 그러나 부지런한 사람은 그 마음에 풍요한 것을 얻는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이 마음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마음의 소원은 게으른 자에게도 누구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먹고 노는 사람이 생각은 더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만히 들어누워있으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뭐 좀 먹어야지, 아무 것이나 먹고 빨리 일해야지’ 이렇게 생각하지만 게으른 자는 가만히 누워서 뒹굴뒹굴 하면서 뭐도 먹고 싶고 뭐도 먹고 싶고 끊임없이 생각이 발동되고 솟아오르면서 욕망들이 많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서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생각하기에 적합한 자세가 아닙니다. 물론 서 있는 동안에 머리가 텅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런데 하여튼 서 있는 것보다 사람이 누워 있을 때에 생각이 많이 떠오르게 되는데 사실 누워서 하는 생각은 대부분 건설적인 생각이라기 보다는 쓸모없는 공상이 많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들어누워서 하는 기도는 신령한 기도가 되기 힘듭니다. 들어누워서 공상 하면서 그 속에서 무슨 신령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결국은 그 자세 자체가 게으름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획일적인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게으른 사람은 생각은 굉장히 많습니다. 소원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에 작용이지만 그것을 기도하게 하는 것은 또 하나의 행동이며 실천입니다. 여기에는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누워서 공상하는 것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 생각이 이 물결 저 물결을 따라서 흘러가면서 수없이 생각의 잔해들이 머리에 떠돌아다니지만 그 중에 어떤 건설적인 것들을 붙들고 그것을 기도하려고 할 때에는 거기에는 행동이 뒤따르고 실천이 뒤따르고 거기에는 그 자체가 우리의 에너지를 요구하는 노동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는 여러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음의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가 기도하는 것과 진배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치고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구절이 바로 이런 구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마음에 원하는 바가 있으나 얻지 못한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마음에 원하는 바입니다. 마음에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고 이랬으면 좋을텐데 하는 기대감이 떠오르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그것이 자신의 기도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속에 있는 어린아이는 아직 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완전한 인격체가 되고 그렇게 되려면 몸밖에서 나와서 자기가 독립적으로 숨을 쉬고 생명을 엄마와 절연하고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배안에 있는 아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여튼 그래야지만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배속에 든 아이가 주민등록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까? 일단 나와야지만 주민등록도 나오는 것입니다. 주민등록을 하면서 아이가 열달이 되었으니 주민등록을 해주십시오 하면 아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배속에 보관 중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일단 나와야지만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속에 가지고 있는 그 소원이 그것이 자기의 기도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이, 그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정의는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원과 뜻을 구체적인 언어로 하나님 앞에 이루어지리라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소리를 내어서 호소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마음 속으로 호소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마음으로 소원하는 바가 곧 기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도의 교훈일진데 그러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마음 속에 있는 소원이겠습니까? 그러면 보십시오. 구하고 찾고 두들린다고 하는데 구하는 것은 입으로 찾는 것은 눈으로 발로 두드리는 것은 손으로 이렇게 해서 사지백체를 다 사용해서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무엇인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기도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마음의 소원없이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원이 있으니까 구하는 것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찾는 것이고, 자기가 뭔가 얻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달라고 두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굳이 그렇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다 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러니까 절대 그런 오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도 좀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가 마음에 품고 있는 소원을 마치 오래도록 기도해온 간절한 기도 제목인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외식의 일종입니다. 그냥 내 마음에 이런 희망이 오래동안 있었는데 하고 이야기를 해야지 그게 마치 자기가 오래동안 기도해온 것처럼 내가 기도 제목이 있었는데, 기도를 해왔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소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그 소원이 가슴 속에 있기만 하고 그것이 구체적인 기도로 옮아가지 않게 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음 속에 소원은 있는데 그것이 기도가 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게으름입니다. 영적 게으름, 육적 게으름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총체적으로 게으름입니다. 그리고 이 게으름이 우리의 기도 생활을 병들게 만드는 강력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자신의 기도 생활에 잇어서 이상징후가 나타나면 먼저 이 기도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큰 죄가 무엇일까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일상적인 곳에서 먼저 찾는 것입니다. 염려가 내 마음을 지배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는 내가 기도에 게으르지 않았나, 이런 것들을 먼저 점검하면서 보다더 작은 문제들에서 큰 문제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백번 양보해서 죄가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인데 그것도 부지런한 자들이 용서의 은혜를 쉽게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회개도 부지런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것은 나중에 하고 그러면 이제 우리가 게으름과 기도 생활에 대해서 탐구하기 전에 먼저 게으른 사람들은, 꼭 게으른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그 소원을 그냥 기도라고 강조해주시지 왜 그것을 꼭 언어화해서 표현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실까? 그런데 사실 교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또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엇 보다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에 무슨 소원을 품고 있는지도 당연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면서 우리가 그분이 모르시는 것처럼 하나님 나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내가 이런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지금 나의 대적 나의 원수들이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곤고합니다. 나는 이렇게 괴롭습니다. 나는이렇게 어렵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들이 부지런히 하나님께 기도의 편지를 보내고 알리고 그래도 안 되면 금식까지 하면서 하나님의 눈길을 끌어야지만 겨우 하나님이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라는 성품에 비쳐본다면 그것도 하나의 우리의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은 자기의 기도론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가? 질문하면서 두 가지로 답을 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관계의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기가막힌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희 집안에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신고 있는 신발, 옷, 모자, 하다못해 손에 들려있는 볼펜 하나도 지금 먹고 있는 야쿠르트 하나까지도 모두 아빠가 사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돈으로 벌어서 사온 것이라고는 새배해서 받은 돈으로 산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사실 은혜로 준 것이지 무슨 노동입니까. 십원 한푼도 벌어온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의 삶 자체를 아빠에게 혹은 어머니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모든 필요한 것은 부모를 통해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날이 추워서 코트가 하나 입고 싶으면 누가 생각이 납니까? 아빠한테 사달라고 그래야지 되겠다,. 날이 추워서 못견디겠다. 운동화도 다 떨어졌으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된 것을 하나 사달라고 그래야지. 그러면서 누가 생각이 나는가 하면 아빠가 혹은 엄마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되어야지만 그 속에서 아빠가 가지고 있는 생각, 인품, 인생관, 교육 이런 것들이 흘러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봅시다. 한 아이가 있는데 필요하다고 뭘 느낄적마다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서 자기의 수효를 채웁니다. 그러면 아이가 아주 성숙해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이런 물질적인 공급의 관계로 초월하는 관계이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부음바 되어서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로서 내가 깊이 존경해야 한다라고 하는 신앙적인 인식에 도달하는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보십시오. 물론 획일적인 원칙은 아니지만 대체로 옛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때려서 기른 자식 중에 불효자가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초달을 차마 하지 못하면 자식을 망치느니라’ 초달이라고 하는 것이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때려서 기른 자식이 불효자가 없는가는 거기서 중요한 요점은 두둘겨 패면 효자로 생산이 된다는 그런 공식이 아니라- 그러면 개패듯 패야 합니다. 그러면 효도받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때려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아이를 향한 지대한 관심 속에서 관계를 가지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부모의 사랑 어린 기대가 그 아이로 하여금 잘못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때리게 만들고 징계를 하게 만들고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부모를 멀리 떠나서 필요한 것들을 부모가 아니라 내가 알아서 스스로 공급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없습니다. 의존도가 없이 자란 사람들이 마음 깊이 부모를 사랑하고 효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굉장히 희귀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심성의 구조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런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신앙에 깊은 감화를 얻고 주님을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 부모를 사랑하는 변화는 일어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는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셔서 그것을 들어주심으로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라고 하는 의존의 정신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참 놀랍습니다. 신앙이 안 들어갈 때에는 항상 자기 자아가 펄펄 살아있습니다. 싱싱한 활어같습니다. 펄떡펄떡 뜁니다. 그런데 신앙이 들어가고 깊이 하나님의 인격에 감화를 받으면 그다음에는 그 사람 속에는 의존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참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는데 안 강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서 제일 눈물을 많이 흘리면서 부른 찬송이 그것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 찬송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신앙이 성숙해가고 은혜 속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신앙자체입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절대의존의 마음,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한순간에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딱 끊으시므로서 그것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면서 응답에 무수한 경험 속에서 산 사람들은 약하면서 또 강합니다. 약한 이유는 주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아를 인하여는 약하고 그리고 내가 그 분을 의지할 때에 그 분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 필요한 것들을 이루어주신다고 하는 신앙의 면에서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소원, 그것은 우리를 훈련시키지를 못합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저 소원만 품고 있었던 사람,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아 소원성취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있는 소원을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하면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며 추구한 사람들은 그 일이 이루어지자마자 그 분이 응답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벌써 똑같은 일이 이루어져도 아주 놀랍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좋은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기도를 기도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버지의 성품을 자꾸 배우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기도 응답 하나 받으면서 또 하나 받으면서 그러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첫째는 모든 좋은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끊임없이 자기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이 기도가 응답된 것치고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응답으로 받은 것들을 자신이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기도 응답을 통해서는 항상 선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고 또 하나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들이 계속적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면서 살도록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굳게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기도의 응답이 풍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진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작은 것, 작은 것 속에서 응답을 받다가 나중에 점점 큰 것으로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으로는 감히 기대할 수 없는 더 큰 것들을 하나님께 기대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어느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예화: 어느 책의 내용- 미국에 가면 양쪽이 깍여진 절벽이 있는데 그 사이에 골이 깊어 갈 수 없 는 그곳에 다리를 놓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활에 가느다란 실을 달아 건너편에 쏘아 건너 편에서 잡아당겨서 처음에는 실이지만 다음에는 좀더 굵은 실, 다음에는 밧줄, 다음에는 철 강제를 그런 과정을 통해서 다리를 놓았다는 이야 기)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무엇을 가지고 기도하기 전에 (?)들어줄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어린아이들이 무슨 소원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이제 4-5살밖에 안 된 아이가 하나님이 너 소원 하나 들어줄까? 이렇게 말한다면 그 어린아이가 뭐라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 패괴한 땅을 뒤덮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부흥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말하는 아이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저와 여러분들의 애들 가운데는 그런 애들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화: 아들이 어렸을 때 꿈에 하나님께 구한 닌자 거북이를 만난 내용)
사람마다 자기가 구하는 수준이 다 다릅니다.
(예화: 어느 형제의 오래된 변비를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의 내용)
괜찮습니다. 무엇이든지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들을 염려하게 하는 그 문제, 그것을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처음에는 작은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점점 크게 기도하게 됩니다. 세계를 품고 기도하던 사람들은 처음부터 세계를 품고 기도하던 스케일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도가 우리의 믿음처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고민하는 그 자체는 사실 아무리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그것을 염려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아파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 그것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녀들을 길러보면 그런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녀가 신경쓰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이 되고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데 그 아이의 삶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이 되면 부모가 그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마음을 가지고 그 문제를 직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를 자기의 수준에 맞게끔 하나님께서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갑자기 큰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자기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도록 하나님이 훈련시키시려고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제가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밝히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고자 하면 요점은 이것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소원은 기도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해야지만 그것이 진짜 기도인데 기도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 중에 하나가 오늘 생각해볼 것이 바로 게으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그의 영혼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전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그런 은혜 속에 거하게 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타락한 죄인의 본성상 거룩한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이것이 그 자신의 본성에 어울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인간이 부패하고 실패한 그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없이 자기의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야비하고 더러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속에서 솟아나는 욕망대로 살면 인간이 아주 더럽고 야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와 싸움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기도도, 마음의 소원을 품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간청하고 기도하고 부르짖으면서 사는 이것은 타락한 죄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무엇이 요구가 되는가 하면 자기를 부수는 열심과 부지런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뒤에 읽은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쭉 나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장시간 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어쫓으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사람들 속에 큰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이런 권세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귀신도 명해서 이렇게 나갈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큰 법석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 또 심방을 가셨습니다. 평소에 하듯이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몇시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열병이 들어 누어있는 여인을 고치기 위해서 심방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심방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시니까 날이 저무는 시각이 되었습니다. 어두워지는데 가보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벌써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온 동리 사람들이 다 나오고 각색 병든 사람이 다 나와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어떻게 병자들을 고쳐주셨는지 생각나실 것입니다. 지면에 있는 모든 병자는 이 시간부터 모두 나을지니라, 병마는 썩 물러가라. 그렇게 하시면서 자기의 사역을 대신하시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생각도 좀 해봅니다.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동네 꼭대기에 올라가셔서 우면산 정도 올라가셔서 왼쪽으로 손을 높이 드시면 방배동과 사당동이 들어오실 것인데, 안테나같이. ‘이 동네에 병마는 물러갈지어다. 아멘’ 하면 끝날텐데 그렇게 안 하시고 병든 자를 찾아가시고 자기 앞에 나오는 눈먼 자를 용납하시고 그리고 하나하나 고쳐주셨습니다. 소경을 눈을 뜨게 하실 때 ‘이쪽의 소경 눈을 떠’ 이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면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안수를 해서 기도하시고 치료하시면서 그들 하나하나를 일으켜 세우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어느 땐가 이 부분을 묵상을 하면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 자동이 얼마나 좋은데, 누르면서 ‘나을지어다’ 그렇게 집회를 하다가 그런 분도 있습니다. 무좀에 걸린 사람들 다 나을지어다 하면 무좀에 걸린 사람들이 아멘 하면 낫고,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방법을 몰라서 안 하신 것이 아니라 병낫는 것보다도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만남과 터치였습니다. 문둥병자들은 다 나으라, 치료는 있지만 당신과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가가서 문둥병자를 어루만지고 고쳐주시고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숙소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 나으라. 귀찮다. 가라.’ 그리고 숙소에 들어가서 주무시지는 않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피고름이 흐르는 자를 씻어주시며 기도해주셨습니다. 하나 하나 고쳐주셨습니다.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온 동리가 나왔다고 그러는데 문자 그대로 온 동리가 아니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왔으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겠습니까? ‘애들아 내 근무 시간은 5시까지다. 가라’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화: 호주에는 의무적으로 일년에 한달은 목회자가 강단을 쉬는데 휴가를 떠나려고 하는데 성도 가 와서 누가 돌아가셨다고 말하니까 자기의 근무는 어제까지고 오늘부터는 휴가라며 외면 하고 갔다는 이야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이 사람들은 찬밥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출근 시간도 없고 퇴근시간도 없었습니다. 모든 시간이 아버지의 것이었고 당신의 생애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그런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일일이 다 고쳐주셨습니다. 아마 주님은 부지런히 그들을 치료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곤고한 영혼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육신보다도 더 아픈 망가진 그들의 심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치셨습니다. 그렇게 많이 왔다고 하니까 이게 얼마나 되어서 끝났을까요? 그저 우리가 단언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꼭 본 것은 아니지만 새벽 2시까지는 계속 되었을 것이다고 생각이 듭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저물 때에 오셔서 거의 식사도 못하신채 그렇게 병든 자를 고치셨으니까, 병든 자를 다 내버려두고 너희들 기다려. 애들아, 온 순서대로 번호표르 나누어주라. 그리고 안방에 앉으셔서 거한 식탁을 받으시고 마냥 식사하시고 그리고 이제 한번 해볼까 그리고 나오시지를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고쳐주시고, 깊은 밤 최소한 아니면 새벽 시간까지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참 사람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시기는 했지만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유익을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성품이신 신성을 사용하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오늘 내가 일이 많은데 모든 피로는 물러갈찌어다 하며 자신을 안수하시면 기계처럼 일하실 수 있는 그런 방식의 기도를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그 분도 안 잡수시면 시장하고 그리고 오래 걸으시면 피곤하고 그리운 사람은 보고 싶고 그러신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불쌍한 존재인지를 자신이 온 몸으로 다 경험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잘 순종할 수 있었고 또 우리들을 그렇게 더 깊이 인성 속에서 우리들과 하나 되시고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의 형제 중 한 사람이 되실 수 있었고 그리고 우리의 친구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양성 교리에 비쳐볼 때 예수님께서 피곤에 지치셨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예수님께서 잠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튼날 사건을 성경이 보도하기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 다음날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셨다” 그랬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쏟아붓는 육체적인 깊은 노고에 불과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일찍이 새벽 오히려 미명에 아직까지도 어두움이 깔린 그때에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한적한 곳, 희랍어 성경에는 ‘외로운 곳’ 그러니까 주위에 아무도 없이 방해도 없는 외로운 곳에 그 어두운 밤, 아직 도망하지 못한 그 새벽, 아직 어두움이 깔린 그 시간에 조용히 혼자 걸어서 나아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한번 이런 상상을 해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무슨 멋있는 호텔에서 주무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방을 하나 얻어서 제자들과 함께 주무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자들도 역시 인간인지라 하루 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시종을 들면서 지칠 때로 지쳐서 골아떨어졌습니다. 모두들 곤히 잠든 새벽에- 그리고 이 새벽 잠이 얼마나 맛있습니까? 정말 새벽 잠이 기가막힙니까? 새벽에 잠이 깨면 걱정이 됩니다. 이 좋은 시간에 왜 깨나. 새벽 시간이 얼마나 좋습니까? 요즘같이 날이 쌀쌀할 때는 이 새벽이 더 사랑스런 시간입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푹 자면, -그렇게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누워있는데 부시럭 거리며 예수님 혼자 일어나셔서 제자들이 깰세라 발뒤굼치를 드시고 살금살금 걸어서 문을 열고 아직까지도 어두움이 채 도망하지 않은 그 새벽의 길을 홀로 걸어서 한적한 곳으로 외로운 곳으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지런함입니다.
예수님도 새벽 시간의 잠이 달았을까요, 안 그랬을까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는데 그것을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능력이 제자들보다 더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런 부지런함이 그분으로 하여금 새벽 잠과 새벽 기도를 바꾸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걸어나가신 것입니다.
십년이 넘었는데 우연히 성경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하다. 왜 예수님 기도하신 시간은 맨 새벽이 아니면 밤일까?’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굉장히 오래 씨름을 했습니다. 왜 그렇까. 어디 교과서에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나를 아주 커다란 감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깨달음의 빛이 확 들어왔는데 예수님게서 이른 새벽과 깊은 밤에 대부분 기도하신 이유가 뭘까? 깊이 묵상한 가운데 마지막 깨닫게 된 것은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고 오직 하나 오직 새벽 시간이 더 신령하기 때문이 아니라 낮에는 기도할 시간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낮에는 말씀을 전하고 영혼들을 가르치고 그래야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았는데 병든 자들이 수없이 와서 자기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할 때에 지금은 기도시간이다.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런 사람들은 모두 부지런합니다. 부지런한 모든 사람이 다 충성스럽고 신령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게으른 사람 가운데는 신령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신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몸이 워낙 아파서 시간 이상을 안 자면 활동을 못하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게으른 것은 아주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 속에는 결코 어떤 신령함이 깃들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서 우리는 항상 이런 스케줄 속에서 새벽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면서 역시 하나님의 아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죄만 없으셨을 뿐이지 우리와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싸우신 분이십니다. 그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당신 자신이 이러한 그 기도의 세계를 경험하신 분이기 때문에 육신의 안위를 뿌리치고 주님을 향한 충성심으로 부지런히 기도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그 삶이 얼마나 쉽지 않은 삶인지를 예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지 않아도 아! 그래 맞아, 이제는 내가 결심을 하고 기도해야지. 이렇게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도와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보다도 더 부지런해질 이유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기도가 막히시는 법이 없으셨던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사신 분이십니다. 그 분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교통과 긴밀한 친교의 은혜 속에서 늘 사셨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에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기도는 땅에 떨어진 기도가 아니고 그분에게는 기도를 향한 준비의 시간이 필요없었으며 그 분에게는 기도가 되지 않아서 기도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기도는 드리지 못하며 낭비하는 그런 시간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분보다 더 부지런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것들을 극복하면서 그 분을 닮은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 분보다 더 탁월한 열심으로 주님 앞에 기도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성실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생애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비교할 때에는 더더욱 우리들이 이 짐이 무겁다고 하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뼈저리게 느낍니다.
우리 주위에 열심히 있는 기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감격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가끔은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예배 시간에 와서 하는 것 이외에 특별히 자신의 기도의 세계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자신이 매일매일 기도의 간증을 가지고 자신들의 삶 속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을 자신의 기도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 태워드리는 그런 은밀한 지성소를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자신을 부수는 열심히 열렬한 기도의 영을 간직하고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고자 몸부림칠 때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유별난 삶 처럼 보일 수도 있고 마치 우리 자신도 생각하기에 꼭 이렇게 까지 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하나 할 정도로 우리 자신이 광신자가 된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대는 항상 그랬습니다. 대부분의 모든 시기에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신앙이 대중적이 된 시대는 거의 없었습니다. 항상 전심으로 주님을 구하고 그리고 주님의 마음에 눈물을 담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고통하고 병든 이 세상, 망가진 자신과 고장난 이웃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호소하며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았던 기도의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들로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산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향한 가장 커다란 대의다라고 어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 안하는 사람에게는 사실 그런 사명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나라를 끊임없이 구하며 살아도 우리는 이제 주님의 나라가 다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한정 넓은 이 세상, 구석구석 사방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을 진실한 주님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해도 일해도 끊임없이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까지도 우리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때에 그 나라가 도례하기를 그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간구하고 호소하는 기도의 세계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도 그래서 일시적으로 기도의 문이 열린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의 열린 문을 열린 채로 그대로 유지되게 해서 거기로부터 끊임없이 각양 좋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이런 것들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기도를 하려고 하는 진지하고 성실한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계속 곤고하다가 기분이 좋은 날이 잠깐 생기는 것을 가르켜서 속담에 뭐러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장마철에 햇살같다’ 고 합니다.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세탁기도 없고 하던 때였는데 장마철이면 애들이 가서 지저분하게 옷을 버려서 옵니다. 빨래도 할 수 없는 날이 눅눅하고 비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지도 않게 서 너 시간 잠깐 빛이 찬란하게 납니다. 그럼 아줌마들이 빨래를 해서 널면 잠깐 사이에 바짝 마릅니다. 그리고 눅눅한 집안에 보송보송한 이불, 그리고 속옷, 그리고 옷 이런 것을 차곡차곡 개어서 장롱에 집어넣는 주부들의 마음은 정말 신이 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집도 안 가고 뭘 고개를 끄덕끄덕 거립니까?
기도의 생활도 역시 마차가지입니다. 오래동안 우리의 삶이 기도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우울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어느 한순간에 하늘문이 열리고 주님의 은혜가 쏟아부어지면 우리는 놀랍게 소생합니다. 수십 년 동안 계속 되었던 침체가 며칠만에 극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신령한 결심들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는 하나님이 많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잠깐 동안이고 다시 그 기도의 문이 닫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다시 또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계속해서 열어둘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결국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게으르지 않는 열심히 있는 기도의 실천이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기도의 사람이었던 다니엘이 생각납니다. 그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후로 기도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망한 민족적인 불행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 속에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이 마지막 날에 되어질 위대한 계시를 나라도 잃어버리고 포로로 끌려간 상태에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셔서 나라를 모두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다라고 하는 증거를 그를 통해서 남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 속에서 살아갔는데 정치적인 적수들이 그의 정치적인 생명을 끝장을 내고 싶어서 그 모든 것을 털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안기부 돈을 얻어서 정치자금을 쓴 적도 없고 누구에게 뇌물을 받은 적도 없고 아무 흠도 없고 아무 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수들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안 나는데 뭐가 유별난 것이 있는가 봤더니 그는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을 충동질해서 기도하지 못하게 끔 조서에다가 어인을 찍게 했습니다. 그 일이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그의 기도의 문을 막으려고 하는 간악한 시도가 실행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조서에 어인이 찍힌 줄을 알고도 집으로 돌아가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을 열고 늘 그러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것도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게 결국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부지런함입니다. 변함이 없는 성실함, 그리고 이러한 성실함이 근원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면 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싶고 그리고 그 분에게 대화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의 생활에 있어서 성실함이 요구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기도 생활에 계속 충실할 수 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 사람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삶에 있어서 아직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아직 건강하다라고 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그럼 어떻게 이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급한 것보다는 중요한 우선 순위를 따라서 살아야겠다 라는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 중요하지는 않지만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보는 일은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두었다가 내일 읽는 법은 거의 없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 사소한 일입니다. 텔레비 연속극을 보는 일은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왕건이가 안 나오니까. 오늘 나오니까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급한 것입니다. 이렇게 피부에 밀려오는 급한 필요들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생각이 없이 그 필요에 자신을 던져주고 하다가 보면 결국은 기도할 시간이 안 나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이 늘 잘하는 이야기가 뭔지 아십니까? 너무 바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정곡을 찔렀지 않습니까? 뭐가 그렇게 바쁩니까? 백수들도 바쁘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가정 주부들도 바쁘다고 합니다. 다 바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은 바쁜 것은 사실인데 중요한 일들을 하느라고 바쁜 것이 아니라 급하면서도 사소한 일들을 하느라고 바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도 뭐도 다 해놓고 기도해야지. 그런데 잘 안 됩니다.
거기에는 어떤 함정이 있는가 하면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기도해야 되겠다라는 강력한 요구를 느낄 때에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남이 멋있게 기도해서 응답받는 간증을 읽는 것이 더 쉽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거기에는 엔조이 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염격하게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깍아 세우는 고통은 없습니다. 책을 읽고 소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직면하려고 하는 것들을 이렇게 자꾸 피하는 것입니다. 구실을 대어서, 그런데 그것이 처음 우리가 그런 식으로 계속 살면 처음에는 우리가 기도를 버립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싫으니까 우리가 버립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도가 우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하면서 사는 습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는 것이 그것입니다. 기도가 나의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진짜 경멸한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사람들입니다. 심방을 간다고 하면 물론 다 치워놓지만 불시에 방문하면 그저 마루서부터 시작해서 그릇이 부엌까지 다 줄줄히 있고 도대체 며칠 전에 먹은 그릇인지 커다란 그릇에 쌓아놓고 보자기를 덮어놓은 그런 집, 애들이 있다고 하지만 완전히 집안이 초토화 되어서 도대체 지옥을 방불케 하는 그런 집의 사람의 영성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삶 속에 뿌리가 박힌 것이지 그렇게 하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남하고 똑같이 살면서 살아야 할 생활의 시간을 떼어서 하나님도 섬기고 교회 출석도 하고 기도도 하고 다 하려고 하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질적으로 떨어지는 삶을 영위해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가족들 중에서 그것 때문에 상심하는가족들이 많습니다. 우리 집안은 저 여자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초토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집안이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돈을 많이 벌어오면서 그러면 말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교회에 갖다가 돈을 내면서 집안이 초토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대해서 원망을 하는 사람들도 나는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적으로 교회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처신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즐기던 취미생활을 다 반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간이 모자라면 반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삶에 있어서도 본이 되게끔 살아가면서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바쳐서 주님 앞에 기도 생홀을 허물어트리지 않는 성실함과 부지런함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이 드니까 그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은혜를 구할 때 주님께서 힘을 주셔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진짜 교회에서 사례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저 비가오나 눈이 오나 추운 날이나 더운 날이나 전도를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그렇게 나와서 하루종일 전도하고 집에 들어가서 하루 또 들어누워서 쉬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육신이 연약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고도 나머지 삶을 다른 사람처럼 다 꾸러가려니까 이게 얼마나 부지런해야지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화: 어린시절 별명이 게으른뱅이어서 할머님께서 손가락이 길어서 게으르다고 하시고 실제 게 으르게 사셨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시간을 아껴서 살려고 애를 썼는데 다니던 직장에서 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이야기)
그런데 우리의 육체는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가 하면 편안하게 놔두면 계속해서 자신을 편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하여튼 이런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취해야 할 원리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하면서 살겠다라고 하는 그것을 우리들이 항상 염두에 두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에 있어서 게으름을 면하기 위해서 필요한 두 번 째가 무엇인가 하면 구체적인 자기 규칙을 수립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이 게으름과 대적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올해는 기도를 열심히 해야지. 하나님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 결심이 있지만 그 결심이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열심히 기도 생활을 위한 열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는지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잴 수 있는 척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규칙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규칙이 무엇인가. 장소와 시간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오면 제일 좋습니다. 새벽 기도를 나오면 제일 좋은데 그런데 그것이 도저히 기술적으로 안 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집이라도 좋습니다. 시간이 아무 시간이라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아침에 아이들을 다 보내고 10-11시까지 자기 뒷방에서 아니면 교회에서, 교회가 기도가 제일 잘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오면, 우리 교회 같은 곳은 기도하기가 좋습니다. 새벽 4시 30분부터 12시까지 열어놓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오면 조용하게 여기에서 하면 음악이 나오니까 소음도 없고 누가 야단법석을 떠는 사람도 없습니다. 얼마나 기도하기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 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도 잘 몸에 배지 않으면 이런 성경 읽기표 같은 것을 만들어서 매일 체크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그렇게 우리의 육신의 게으르고자 하는 이 본성, 타협하려고 하는 우리의 게으른 본성을 그렇게 만만한 상대로 보았다가는 우리는 늘 집니다. 여러분, 결심이 늘 약한 것을 보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늘 좋아하는 찬송이 그것입니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그것은 가끔 불러야지 매일 그 찬송이나 부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늘 자기가 깨트려지는 사람이 하나님앞에 가슴 아픈 마음으로 이 모습 이대로 받아 달라고 해야지, 회개할 줄도 모르면서 반성할 줄도 모르면서 자기의 게으름과 싸울 줄도 모르면서 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하는 것은 배째라 신앙입니다. 하나님, 나 이 모습 밖에 없습니다. 받아 주려면 받아주고 그만 두려면 마십시오. 그리고 고개를 디미는 것을 우리들이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뻔뻔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규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규칙을 가지고 자기를 감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제가 초창기에 은혜를 받았을 때 이것이 너무 힘들어서 별의별 짓을 다 했습니다. 표를 만들어서 체크를 해보기도 하고 같은 신앙의 동기들과 모여서 새벽 기도를 안 하면 점심을 사기로 하기도 하고 별 것을 다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터득하게 된 것은 역시 성실한 기도 생활을 위해서는 어느 한순간에 불끈 하고 솟아오르는 강한 도전이나 충동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이 기도 생활 자체를 몸에 배게 하는 그 훈련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가시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몸에 배어서 일부가 되는 것, 그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규칙과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 중에 또 한사람은 새벽 운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새벽에 개를 끌고 나가서 오줌을 누인 다음에 산을 오르고 약수터까지 갔다가 오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새벽 기도를 하니까 새벽에 일어나지 저는 새벽 기도가 아니면 새벽에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저희는 또 밤 시간에 강합니다. 오랫동안 야행성 생활을 했습니다. 야간학교 강의를 하면서 20년 가까이를 야간과 익숙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밤에 한 두시 쯤에 잠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새벽에는 굉장히 약합니다. 그런데 그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게 그것을 규칙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때를 거르지 않고 그저 먹으면 안 되는 약수터에 가서 그 물을 좋다고 떠오고 똥개를 끌고 와서 오줌을 누이고 그렇게 하려고 그 새벽에 일어납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 약수터만도 못합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의 건강만도 못한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청교도가 기도에 대해서 묘사를 했는데 ‘새벽에 천국의 이슬을 맞으며 기도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에 복 됨이여 그들은 마치 저 먼 아라비아와 인도에서 아름다운 특산물을 가득 싣고 오는 무역선을 항구에서 기다리는 선주와 같도다. 아! 복되도다. 새벽 기도의 사람들이여’ 멋있습니까? 얼마나 가슴이 뛰는 이야기입니까? 선주가 배에 가서 물건을 사갖고 와. 그렇게 하고 이제 배꾼들에게 보냈는데 언제나 올지 모르고 매일 같이 나가서 기다리는데 보니까 서너 척의 배가 얼마나 짐을 많이 실었는지 배가 물에 가라앉은 자기네 배가 깃발을 높이 올리고 나팔을 불면서 오는 것입니다. 저게 얼마나 귀한 것인가. 인도와 아라비아에서 저 것을 싣고 왔는데 여기 풀어놓기만 하면 눈이 둥그래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단숨에 귀족과 부자들이 물건을 사서 돈방석에 앉게 될텐데 그 무역선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해도 좀 문학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동의를 안 하는데, 하여튼 그렇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규칙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규칙화해서 몸에 밴다는 것은 좋은 측면도 있지만 나쁜 측면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습관화가 되면서 형식만 남고 내용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도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어떻든 그 틀을 갖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 기도를 한 달 두 달 나왔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10-20년 꾸준히 나와서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은 그렇게 가볍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90%이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도의 세계가 없습니다. 존재하지가 않습니다.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어때요. 가끔 가다가 뒷동산에 올라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런 사람들이 음악 세계가 있느냐고 그런 사람들에게 음악의 세계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조수미의 CD를 사서 탁 펼치니까 조수미가 글을 썼는데 이렇게 썼습니다. 편지가 하나 들었는데 나에게 슨 글이 “저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기의 이 음악이 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냥 노래 속에서 살고 노래 속에서 절망하고 노래 속에서 희망을 갖고 노래 속에서 생명을 호흡하고 노래 속에서 살고 노래 속에서 죽겠다라고 하는 그 음악 세계 속에서 산 일생이 있었으니까 이것이 내 세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 사람의 하는 말이 자기는 음악을 시작하고 여태까지 시원한 물도 먹어본 적이 없고 따뜻한 차도 마셔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항상 미지근한 물을 먹었다고 합니다. 왜 자신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음악 세계 속에서 살았으니까 세계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세계를 가지려면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면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수는 열심히 몸부림을 치고 투쟁하고 기도 속에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희와 기쁨과 성취를 맛보기도 하고 기도 속에서 한없이 좌절하면서 나는 희망이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그런 좌절도 경험하고 그러면서 기도의 세계가 구축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 자체가 별로 존재하지가 않는데 무슨 기도의 세계가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은 엄격하게 기도의 관한 규칙을 세워놓고 그 틀에 우리 자신을 맞추도록 노력하는 아주 진지한 열심, 그리고 그것을 꼭 성취하기 위해서 나를 쳐서 복종시켜야 되겠다라는 그런 강인한 자기 통제력과 자기 부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종종 열렬한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몇 년이 지난 후에 거의 기도에 있어서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게으름이 독버섯처럼 번져가면서 그의 영성을 고갈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실제적으로 기도의 게으름을 면하는 방법은, 끊임없이 은혜로운 정서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왜 우리 이럴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할 수 없는 너무 곤고했는데 와서 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서 은혜로운 대화를 나누었다든지 아니면 감명 깊은 설교를 들었다든지 그럴 때 이상하게 가슴이 촉촉히 젖어오면서 울먹울먹 하면서 하나님 앞에 지금 당장 여기서 뛰쳐 나가서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주님을 찾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로운 정서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서를 계속 유지해야지만 기도의 세계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나쁘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게으름 자체가 노골적인 하나님을 향한 커다란 도전과 반역은 아닌데 그 게으름이 이런 기도할 수 있는 촉촉히 젖은 은혜로운 정서를 아주 급속히 메마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라고 하는 씨앗이 뿌려져도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 가지가 뻗어나갈 수 없는 아주 척박한 마음밭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 게으름과 은혜로운 정서의 관계는 계속 순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르면 이 은혜로운 정서가 사라지고 은혜로운 정서가 다시 회복되면 그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솔직히 말해서 기도가 게으르게 되는 것은 기도에 게을러도 말하자면 기도를 게을리한 것에 대한 강한 자책과 자극을 못 느끼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게을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정서가 있을 때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은혜로운 정서가 마음 속에 늘 있어서 주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대한 은혜 이런 것들이 늘 현재적으로 이 정서 속에서 경험되면 한나절만 기도를 안해도 속이 막 고갈되는 것과 같은 갈증을 느낍니다. 이 때에 아멘을 해야지 이게 수준이 있는 것인데, 그렇게 방언을 듣듯이 하면 되겠습니까? 고갈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은혜로운 정서가 유지되지 못하게 기도를 못하거나 기도에 게을러지면 금방 고갈을 느낍니다. 그리고 갈증을 느낍니다. 그런데 아주 게으름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 다음에 고갈이 되어도 그것이 고통으로 마음 속에 다가오지 않고 불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기도하려고 하는 자체가 아주 강하게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로운 정서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그 마음이 하나님 사랑에 거룩한 정서로 늘 젖어 있는 그런 상태를 유지하도록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목사님, 그럼 그런 것을 어떻게 유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세속적인 접촉을 가능한 줄이고 신령한 생활과의 접촉을 늘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은혜로운 책들을 읽고 나면 마음에 불이 붙어지면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또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에도 유익이 굉장히 큽니다. 모여 앉아서 괜히 수다를 떠는 것은 나쁘지만 주님의 대한 간증을 서로 나누면서 서로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 은혜로운 정서들이 유지됩니다. 말씀에 대한 묵상,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우리 속에 촉촉히 젖어있어야지만 우리가 신령한 일에 우리 자신을 바추기가 굉장히 쉬워지는 것입니다.
(예화: 2년 전에 전주에 있는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의 모임에 가셔서 집회를 하시는데 초청한 어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친구가 하도 목사님 말씀을 하면서 추천해서 모셨다며 그 친구분은 강단에 올라가셔서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감정이 촉촉해지기를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
그것이 뭘 보여주는가 하면 신령한 일에 종사할 때에는 은혜로운 정서가 뒷바침이 되어야지만 신령한 미래에 대한 헌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도 마음이 건조해지는 때가 있으면 그때 무슨 책을 읽는가 하면 딱딱한 신학적이나 그런 것을 읽지 않고 고전적인 책을 읽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의 일기는 제가 4번을 샀습니다. 얼마나 여러번 읽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서너장을 읽으면 정말 마음 속에서 뜨거운 불이 쭉 일어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고 그리고 설교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 은혜로운 정서를 계속해서 유지하며 살아야지만 우리들이 기도에 있어서 게으름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기도에 있어서 게으름을 면하기 위해서는 삶을 좀 단순화 시켜야 합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피로가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갑니다. 그 피로를 계속해서 줄이는 연습을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든 삶과 관심을 다 갖은채 그것을 다 추구하는 채 동시에 기도도 열렬히 하고 하나님 말씀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그 분과의 거룩한 묵상 속에서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희귀합니다. 거의 없습니다.
잘 보십시오.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님밖에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회에서 자기 자신을 쏟아부어서 꽃피운 신앙의 선배들이 목양실에 늘 걸어두었던 현판이 무엇인가 하면 “목양일념”이었습니다. 제가 이것을 아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목사가 아무리 많은 재능이 있어서 수많은 곳에서 자기를 오라고 그렇게 합니다. 수많은 일들이 자기를 부릅니다. 어디어디에서 나를 필요하다고 그러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요구합니다. 그 요구를 다 채워주면서 그러면서도 건강한 목회를 한다고 하는 것은 한세기에 몇 명 나오는 사람입니다. 내가 거기에 해당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한가지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심플라이프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에어로빅도 배우고 등산 클럽에도 나가고 골프도 치고 낚시도 좋아하고 또 망년회도 마다할 수가 없고 계라면 사족을 못쓰고 주식이라면 누가 말리고 이러면서 건강한 기도에 세계를 구축해간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나 가능하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서 주님밖에 모르면서 살아갔던 사람들은 바보같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상 자랑도 잘 모르고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루이스 베일리라고 하는 청교도는 말하기를 경건과 기도에 대해서 쭉 말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 그것이 말하자면 세상과 담 쌓고 살아가겠다는 신비주의 생각이 빗어낸 것이 아니라 경건의 위대한 세계를 보고 나니까 그 세계에 헌신하며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우리의 삶이 단순해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 총신대 학장으로 계셨던 박윤선 목사님의 삶의 이야기- 세상 물정을 모르신 채 오직 하나 님의 일에 전념을 하시며 기도로 사시다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이야기)
보십시오. 단순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과의 건강한 기도의 교제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컴퍼스처럼 움직여야지 이것을 떠나가면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면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아직까지도 더 많이 하고 싶은데, 한 대여섯가지 더 하고 싶은데 배가 고프네요. 여러분, 우리는 금년에 이 게으름이라고 하는 대적을 꼭 밟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못하고 그저 기껏해야 내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그런 찬송 부르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일어서도록 오래된 게으름과 싸워서 금년에 꼭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3.기도와 무지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73:22-24)
기도에 있어서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적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잘 모르는 적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쉽게 그 경계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기도 생활에 패배하고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허둥댈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첫째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바로 ‘염려’ 기도에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허무는, 혹은 성장하게 못하는 강력한 방해꾼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대게 우리들이 기도에 큰 방해꺼리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별로 회개하지 않는 부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첫째날 염려였습니다. 그래서 이 염려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기도일진데 그 마음 자체를 모두 점령해버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로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잠식시켜버리는 바이러스와 같은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어제 우리들이 공부한 것인데 게으름입니다. 게으름도 우리들이 별로 회개하지 않는 잘못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게으름들이 우리의 삶 속에 쭉 배이고 그리고 우리가 부지런히 살아도 중요한 것을 하면서 부지런히 사는 것이 아니라 급한 것을 하면서 부지런히 살다가 보니까 기도에 세계가 게으름 속에서 잠식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기도에 아주 강력한 방해꾼 중에 하나도 여러분들이 별로 신경쓰지 않는 대적들입니다. 무엇일 것 같습니까? 어디, 그렇지 굉장한 수준입니다. 제목을 가려주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잘 아십니까? ‘무지’입니다. 따라서 해보십시오. ‘기도와 무지’입니다. 너무 긴장하실 것이 없고 편안히 앉아서 들으십시오. 시편 73편에 널리 알려진 주제는 신정론입니다. 신정론이라고 하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불의한 세상을 두고보실 수가 있는가 그것입니다. 그것을 풀어나가는 것이 73편의 주제라고 알려져 있는데 약간 각도를 바꾸어서 보면 이게 기도와 아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시편에 맨 처음에 ‘아삽의 시’라고 나옵니다. 학설은 두 가지입니다. 아삽이라고 하는 사람이 실제로 이 시를 썼다고 하는 주장이 있고,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삽 자체가 가문의 이름이기 때문에 어디에선가 누가 쓴 글씨를 아삽의 가문에서 보존한 것이다고 하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 중에 아무 것이면 어떻습니까? 어째든 누가 이 시를 썼고 그리고 시는 자기 개인의 강력한 신앙체험, 어떤 의미에서는 생애적인 신앙의 체험을 반영하는 고백을 노래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아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막 사는 교인이 아니라 경건하고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요즘 말하자면 주일날 예배나 한번 드리려고 교회에 가는 사람이 아니라 아침마다 새벽기도를 하고 돌아와서는 성경을 펼치고 묵상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듣고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그렇게 매일 경건의 생활을 꾸준히 계속하는 그런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신앙의 상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 가까히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맞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정직하고 진실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또 반대편의 사실도 믿었을 것인데 어떤 사실일까요?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징벌하시고 그리고 고통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 그렇게 하므로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보이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경건했기 때문에, 워낙 경건하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경건하지도 않지만 모르겠습니다. 배우들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 것을, 변화받기 전까지는 사실 제가 거의 알고 있었습니다. 진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팝송을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들이 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특별히 경건하지 않아도 주의 일에 바쁘고 교회 생활에 정신이 없어도 그것을 잘 모르는데 그런데 하물며 그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이 시인처럼 경건해서 세상을 향해서 눈을 질끈 감고 오직 주님밖에 모르면서 하나님의 율법밖에 모르면서 기도밖에 모르면서 살던 이 사람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러브 호텔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는데 모른다고 하셔야지만 체면이설 것 같았 는데, 얼마나 경건했으면 그것을 모르실까 생각했다는 이야기)
(예화: 옛날에 모시던 목사님이 상가집에 가셔서 구봉서가 와서 인사를 했는데 누군지를 잘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
(예화: 예전에 모시던 목사님이 머리를 어디서 자르냐고 하시기에 여쭈어보니 머리를 자르려고 시 장에 돌아다니다가 결국 못깍고 왔는데 어디서 자르시는지를 몰랐다는 이야기)
그런 모습들이 어떻게 보면 코메디같은데 사실 우리들이 좀 본받아야 할 모습들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너무나 많이 압니다. 그 중에 많이 아는 것 중에 상당수가 쓸데없는 것입니다. 아느라고 얼마나 비용이 많이 들었겠습니까? 그것을 아느라고 얼마나 많이 마음 고생을 하면서 열심히 배웠겠어요. 성경은 못 배워도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상 구경을 한번 나간 것입니다. 어떻게 사나 하고 보았는데 형편이 없는 인간입니다. 이 사람의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저것은 인간도 아닙니다. 저것은 짐승 중에 상짐승입니다. 짐승도 길들여진 가축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완전히 야생을 뛰어 다니는 그런 살쾡이나 늑대나 여우같은 그런 짐승입니다. 완전히 이성이 없이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하지 않고 사람을 멸시하고 완전히 하나님께 창조된 자로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할 백성으로서 기본조차 안 된 인간입니다. 그래서 탁 볼 때 저것도 인간인가. 그런데 저러니 하나님께서 저 인생에게 복주실 리가 있는가 그렇게 하고 봤더니 떵떵거리고 사는 것입니다. 너무 잘 사는 것입니다. 좋은 집에, 좋은 차에 그 짐승을 태워갖고 다니는데 왜 그렇게 좋은 차가 필요한지 그렇게 좋은 차에 짐승이 타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운전하고 짐승이 뒤에 타고 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사람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잠깐일 것이다. 너 봐라, 이제 며칠이 있으면 하나님이 바쁘셔서 그렇지 너 조금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한번 발로 차서 다 허물어트릴 것이니까 두고봐라. 그런데 점점 번성하는데 주체할 수 없이 돈통에 돈이 쌓이는 것이고 그리고 찾아와서 아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돌리지 않는 경배를 그 짐승같은 인간을 향해 돌리는 것입니다. 재산과 권력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의 환영을 한몸에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는 비참하게 콱 죽을 것이다. 혀를 내밀고 죽을 것이다. 그런데 죽을 때도 편안하게 죽는 것입니다.
뭐 그 뿐이었겠어요. 성경에 자세히 안 나오지만 죽은 다음에 성경에 보면 아끼는 자 없이 죽은 왕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살았을 때는 막 아부하다가 죽고 나면 쓸쓸히 죽어서 아무 조문객도 오지 않는 그럴 것이다. 그런데 죽고 나니까 꽃상여가 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구의 행렬을 뒤따르고 조문을 읽고 그러는 것입니다. 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자기의 처지를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믿고 나서 뭐 잘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금시팔복을(?) 했나면 그것도 아닙니다. 뭐 돈을 많이 벌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났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먹고는 살았지만 그 짐승같은 놈도 먹고 살았는데 내가 그 부분에는 특별히 감사할 것도 없는데, 그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하나님께 대해서 섭섭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침마다 징책을 보나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매일 그렇게 하나님밖에 없는 것처럼 살고 세상과는 담쌓고 경건하게 살았는데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매일 하나님이 혼을 내시는데 ‘그렇게 살아서 되겠니,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얼마나 큰데 그렇게 살아서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니. 그렇게 살면 짐승이지 그것이 사람이겠냐’ 그러면서 하나님이 매일 말씀을 통해서 야단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하고 자기하고 비교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 목사님은 설교 시간을 통해 혹독하게 야단을 치시는데 어느 분이 헌금을 많이 하시는 분인데 그날도 헌금을 하려고 하니까 옆에 있던 아이가 혼나면서 왜 헌금을 하느냐 고 했다는 이야기)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야단을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니까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이게 무슨 필요가 있나. 순간에 경건하게 살았던 것, 말씀대로 살으려고 했던 것, 주님을 의지하려고 했던 것, 주님 앞에서 더 온전히 살려고 했던 이런 것들이 형통하는 악인을 보고 나니까 확 주저 앉아버린 것입니다. 이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 시대의 아들들처럼 궤휼을 행하였으리라” 이 궤휼은 악한 꿰입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아! 나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그러면서 인생을 너무 정직하게 살았어. 그래서 내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에이 막 살아버릴걸’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뭘 보았습니까? 형통하는 악인을 보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똑같이 대해오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이 사람을 섭섭하게 대했다고 우리가 그렇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잘 몰라서 이 사람을 좀 홀대했다. 이렇게 말하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하나님이, 그런데 이 사람이 본 것은 겨우 무엇인가 하면 형통하는 악인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나니까 경건, 하나님을 추구함, 그 속에 하나님 앞에 기도로 자신을 비쳐보는 이런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렸는데 이것은 총체적인 무너짐입니다. 마음 자체가 무너지면서 ‘에이 막 살아버릴걸’ 이렇게 막가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건한 사람이, 이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무지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이 그렇게 형통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진짜 경건하고 신령한 사람들은 그렇게 형통한 악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경건을 모두 포기할 정도로 낙담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앞서 있었던 혹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경건한 사람들, 그 누구보다도 더더욱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낙심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설익은 사람들이 신앙에 실망과 낙심이 많지 진짜 은혜의 세계 속에 깊이 들어간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세계 속에 깊이 들어간 중요한 징표는 무엇인가 하면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악인이 형통한 것과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기 자신이 계속 고통을 받는 것 사이에 아무런 논리도 없고 아무런 대답이 없다고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대답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지식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건하게 추구하던 이 사람이 그 모든 노력이 중지되면서 털석 주저앉으면서 ‘나도 막 살아버릴걸’ 하는 그 짐승을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경건한 자녀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이 무지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내가 막 살아버릴걸 내가 왜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께 야단만 맞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도 막 살아버릴걸’ 이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냥 기도의 세계 자체가 형통하는 악인을 한번 보면서 괴멸되어버린 것입니다. 또 백번 양보해서 말로는 그랬지만 그래도 기도의 세계가 남아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렇게 아침마다 내가 징책을 보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막 살아버릴걸’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 마음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그러면 겨우 뭘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 저 인간을 박살내시고 저 복을 내게 주십시오’라는 정도의 기도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전혀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이 현저히 결핍된 사람들은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말씀의 지식이 현저히 결핍된 사람들은 기도의 기복이 심합니다. 그러니까 열렬히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에 풀석하고 주저앉아버립니다. 그리고 언제 기도했는가 하듯이 막 기도하던 자리까지 걷어치우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 이야기입니다. 물론 사람이 기도에 기복이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항상 기도의 기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기복은 있는데 아까 말씀드린 말씀에 대해서 현저히 무지한 사람은 기복의 표가 이정도입니다. 이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기복이 있어도 막 이러는 기복이 아니라 이렇게 증폭고 작고 출렁거림도 유연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신앙의 수준이 점점 높아질수록 이 증폭도 작아지고 그 다음에 고른 그런 기도의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여기에서 이 무지라고 하는 것은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기도 하나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다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무지라고 하는 것이, 그러니까 이 사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지한 상태에서는 어느 순간에 기도에 강력한 동기가 유발된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아까 말씀드린 기도의 기복이 문제가 되고, 말하자면 견고한 기도 생활이 아니고 또 하나는 기도의 방향과 수준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깊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경건하게 사는 것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좌절하게 한 것이 무지였는데 그런데 그것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깨닫고 나서 그가 어떻게 놀랍게 변하는지 보십시오. 뭐라고 그럽니까? “내기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 앞에 짐승이오니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러니까 이 고백과 아까 에이 막 살아버릴걸 하는 그 고백 사이에는 진짜 그야말로 짐승과 성인의 고백의 차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지한 사람과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고백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고백의 차이가 곧 기도의 세계의 차이입니다. 신앙의 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마음에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체험된 것은 반드시 기도 속에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의 형태를 가질 때 그것이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지에서의 깨달음과 함께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 사람이 무지하니까 경건도 기복이 심하고 어느 한순간에 다 때려치워버릴 것 같은 그런 기세고 그리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향과 수준이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런 기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성소에 들어갈 때에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야 말로 이제 이 당시에 율법이 있었겠지만 이렇게 66권으로 묶여진 성경은 없었을 때입니다. 성경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때쯤에는 이렇게 전체적으로 묶여진 성경이라기보다는 그저 돌아 다니는 성경이고 그리고 그 성경이 보편화되기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커다란 두루마리로 된 그런 것이니까,
어째든지 간에 이 사람이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제사를 드리려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번뜩하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무엇인가 하면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세계가 있다라고 하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아주 형통하게 보이는 그 악인을 하나님께서 죽은 이후에 준엄하게 심판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부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고난을 받으면서 주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아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죽은 이후에 놀랍게 축복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상급을 예비하셨다고 하는 사후 심판에 진리에 대해서 눈을 확 뜬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까는 이해가 안 간 것입니다. 악하게 사는 인간이 번성하고 경건하게 사는 나는 고통을 받는데 이 사이를 메꿀 수 있는 논리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소에 들어가면서 번쩍 하고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목숨을 부지하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만이 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인생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에도 계속 하나님과의 관계가 계속 되고 그 모든 것을 함께 고려하면서 하나님이 공평하신가 하는 것을 판단했을 때 그 분이 절대적으로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모든 의문이 풀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찬란한 지식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옥이 있다 없다를 이야기하기 전에 지옥은 꼭 필요하다 그래야지만 인간사 속에서의 도덕적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이 돈도 많이 벌고 권세도 누리고 그렇게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편안히 죽습니다. 의롭고 그리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 고통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채 죽음 저편으로 건너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어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던 사람들이 이제 세상의 영화와 기쁨을 끝내고 죽음 이후로 들어갔을 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고통의 심판에 처하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살았던 사람들을 위해 행복하게 하시는 이 사후의 세계가 우리 인간 세상에서의 도덕적인 모순들을 해결해주는 아주 중요한 장치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있다 없다 논하기 전에 있어야지만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우리도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렇게 해야지만 이 세상에서 많은 도덕적인 모순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낙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롭게 살면서도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내세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의롭게 살고 주님을 믿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야말로 현세에 고통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안식과 상급 속으로 들어가는 출구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 사람이 전에는 몰랐거나 알아도 그런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실족할 수 있을 정도밖에 그렇게 희미하게 밖에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소에 탁 들어가면서 크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 그랬구나. 사후에는 심판이 있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없이 번영하며 살던 악인들이 멸망하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상급을 받는 주님과 함께 하는 이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구나’ 이것을 탁 깨닫고 나니까 깨달은 그 마음을 가지고 형통하는 악인들이 가득찬 세상, 경건하게 살면서도 고통받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이제는 아까 보았던 완전히 다른 모습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 네가 형통하지만 너는 짐승일 뿐이다. 나는 고통을 받고 하나님께 징책을 받지만 나는 약속을 가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요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그 분이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상의 선물이로구나’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박자가 맞아야 하는데. 그래서 그런 고백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이 형통하는 악인을 보면서 경건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주저앉았던 사람이 갑자기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세상에서도 고통을 받아도 아! 주님이 나의 재산이구나. 나같이 복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하면서 한없이 감격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무엇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악인의 형통함을 탁 보고 나서 와 세상에 짐승과 같이 사는 인간이 저렇게 떵떵거리고 사는구나. 나도 막 살아버릴걸 그렇게 주저앉은 사람에게 그 부자가 와서 뭘 그래 이 사람아,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나는 안 믿는 사람인데 내가 좀 집이라도 한채 사주고 짐승인 나를 태우고 다니던 자가용이라도 한 대 줄테니까 그만 마음에서 섭섭한 것 풀고 당신은 당신대로 하나님을 잘 믿으면서 살아. 그렇게 해서 집도 좀 떼어주고 재산을 나누어주었다고 해서 ‘아! 역시 하나님은 이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무엇인가 하면 고난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더 큰 문제는 저 악인이 나보다 더 잘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저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형통하고 번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누어준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해결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유치한 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적인 축복의 증거만을 의지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이 신앙, 이것은 정말 불안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에 더 많이 축복하는 신이 입증이 되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상대적인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모든 선한 생활은 어떤 축복과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하는 동기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회고로서의 그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십일조를 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늘의 창고를 여시고 창고에 쌓을 것이 없도록 주실 것입니다. 사실 너무 얄팍합니다. 말라기 그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읽어야 되는데 십일조도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이렇게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이 한배나 혹은 십배나 주실 것이다고 하는 그런 어떤 미래에 대한 보상의 욕구 때문에 십일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렇게 십일조를 잘 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면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총체적인 신앙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상관이 없고 돈을 내는 것만 보고 하나님께서 주시겠습니까? 무슨 교회가 돈내고 돈먹는 곳입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계적으로 다루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신앙이 인격적이어야지 그런 식으로 불의에 인격과 어떤 축복을 분리해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들을 훈련시킬 때 돈을 가지고 훈련시키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별 것을 다합니다. 학교에서 십 점을 더 맞으면 5만원을 주겠다, 용돈이 한 주에 만원인데 한번 욕할 때마다 천원씩 깎겠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거저 주는 것을 기르면 안 된다. 용돈은 제로부터 시작을 하는데 한가지 선행을 할 때마다 천원씩 보태준다. 방을 쓸면 천원, 설거지를 하면 천원, 동생을 봐주면 오백원, 그렇게 길러서 그 자식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그렇게 살면서 부모와의 관계에서 은혜라고 하는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거저주는 것입니다. 무엇에 쓰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짜 돈내고 돈먹기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애들을 길러서 뭐하겠습니까? 욕을 했으면 엎어놓고 때리고 돈은 돈대로 주십시오. 그것은 그것이고 그것은 그것이지, 그것을 치사하게 연결을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다루십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욕을 했으면 때리고 그리고 방청소를 하지 않으면 야단을 치고 그것은 그것이지 치사하게 청소를 한번 했으니까 천원을 주고 안 했으니까 도로 뺏고, 그 아이가 그것을 보고 뭘 배우겠습니까. 그것도 또 좋은 교육방법이라고 그냥 텔레비에서 말하는 전부다 서구식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렇게 기르니까 애들이 결혼해서 부모를 본 척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해서 그 무지의 껍질을 딱 깨고 들어오니까 그 모든 것들이 다 해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이 탁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지식과 함께 전반부는 분위기가 아주 침울하고 죽을 맛입니다. 후반부는 어떻습니까? 전반부의 제목을 붙인다면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의 제목을 붙인다면 터질 것입니다. 난 제목붙이는 은사가 있습니다. 전반부는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터질 것입니다. 전반부에 뭐가 죽을 것 같습니까? 심령이 죽을 것 같습니다. 후반부에는 무엇입니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현재적인 감격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것입니다. 아! 진짜 나처럼 복이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유산입니다. 그 당시에 ‘분깃’하면 대게 땅입니다. 그 당시의 땅은 오늘날의 땅과는 다릅니다. 요즘은 자식들에게 땅을 주면 빌딩을 질까, 팔아버릴까, 그것을 팔아서 무엇을 살까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생명이 토지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갈아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 땅이 넓으면 부자고, 작으면 거지고, 하나도 없으면 노예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논리가.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시라는 것입니다. 분깃이시라는 히브리말이 ‘할라크’라는 것인데 제비를 뽑아서 배당된 몫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몫입니다. 그것이 나의 전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무슨 돈이 있었습니까? 만나를 먹고 겨우 산 빈털털인데 그런데 거기서 제비를 뽑아서 땅을 지파별로 나누어주고 다시 종족들로 나누어주고 다시 가족별로 나누어줍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그것이 분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시오’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나의 전부입니다’라는 그런 고백입니다. 그런데 언제는 하나님이 자기의 전부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전반부에서는 ‘죽을 것입니다’라는 고백같은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터질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지에서 깨어난 지식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앞에서도 죽을 것입니다. 전반부에서도 기도를 잃어버렸고 후반부에 터질 것입니다 에서도 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뒤에 나오는 것을 보면 기도가 아닙니다. 사실 기도의 문이 열렸다면 무슨 기도를 해야 합니까? 아까 그대로라면, ‘하나님, 저 하나님 없이 형통한 저 자식을 한번 쳐서 보기 좋게 부셔버리시고 그리고 나같이 경건하게 살면서 고난을 받았던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한번 진짜 돈벼락을 맞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해야 정상인데 그런데 후반부에 터질 것입니다라는 여기에서도 기도 제목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왜 기도 제목을 잃어버렸습니까? 너무 낙심해서 기도 제목을 잃어버렸고 후반부에서는 너무 감격하니까 찬송이 터져나오니까 기도 제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두가지가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새벽기도가 몸에 배일 수도 있고 철야기도가 몸에 배일 수도 있습니다. 무릎에 굳은 살이 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말아야 할 사실이 한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처럼 끊임없이 무지에서 깨어나는 말씀의 감화가 여러분 속에 빛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그 기도에 열심은 이방사람의 구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기도 생활이 여러분의 신앙을 결코 견고하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에 감화가 없는 사람들이 무릎에 굳은 살이 배일 정도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가능하지가 않은 이야기입니다. 상상할 뿐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저는 이 찬송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찬송만 가사를 끝까지 모른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언제 그런 것을 느꼈습니까?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주님밖에 없으시다는 사실, 주님을 깊이 깨닫고 나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의 거룩한 터치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들이 여기에서 굉장히 기도와 말씀의 감화에 대해서 이제 또 다른 교훈을 가질 수가 있는데 그것은 말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견고하고 열렬한 기도의 세계가 없는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든지 두 번째는 아는 것이 참된 것이기는 하는데 너무나 죄에 의해서 억눌린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기도의 영을 살아있게 못하게 하는 경우, 그 두 가지의 이외에 케이스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먼저 전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참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저도 너무 어렸던 때라 기억이 없습니다. 그저 부모님들이 말씀하시니까 그랬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저 나이로 치면 제가 한 4-5살쯤 됩니다. 제 동생이 세 살 차이가 나니까 한 두 살쯤 되었을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사다주신 수박을 공이라고 생각해서 동생과 종일 수박을 굴리면서 놀았는데 부모님이 저녁에 쪼개어 줘서 먹을 때, 그 수박에 대해 알았 던 참된 앎이 아니라는 비유의 말씀)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도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모를 수 있습니다. 인공위성이 지구에 대해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하루에도 수만장씩 사진을 찍어 보냅니다. 그리고 몇시간마다 지구를 한바퀴씩 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돌지만 지구와 만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수없이 예수님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주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 품에 뜨겁게 안겨보는 그 감격은 거의 없습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관해서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 자체가 자기의 가슴을 째고 들어와서 이렇게 무지 속에서 자기를 건져내는 경험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데도 이렇게 견고하고 열렬한 기도의 세계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주 요점을 찌르는 비유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리고 두 번째는 실제로 그 말씀의 맛을 보았을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맛을 본 사람은 저절로 열렬한 기도의 생활을 유지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는데,
(예화: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쳐들와서 당대 최고의 도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와 일본에 가 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고 갔는데 그 도공은 왜놈에게 도자기를 만들어준다는 것 이 장인으로서 민족적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자기의 두 눈을 바늘로 찔러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예전에 도자기를 만들던 그 감각이 상상에만 남아 있는 것처 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말씀에 대해서 깨달았고 뭔가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눈을 떴지만 그러나 그때의 눈뜬 자신의 신령한 세계에 대해 눈을 뜬 이후로 지속적으로 살아서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열렬히 기도하게 하던 그것이 이제는 죽고 그래서 이제 감각만 아스라하게 남는 그런 상태의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두 경우가 바로 말씀을 깨달았다하면서도 열렬히 기도하지 않으면서 살아온 사람은 그런 두 가지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어떤 교훈을 얻게 되는가 하면 우선 자신이 이렇게 열렬하고 지속적인 건강한 기도 생활이 결핍되어 있고 쉽게 낙망하고 좌절하고 하는 것들이 되풀이되면 여러분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인가, 그리고 나의 이러한 춤추는 듯한 기도 생활에 기복이 혹시 나의 말씀에 대한 현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이것을 아주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죽은 자와 방불한 기도의 영을 다시금 소생시키려고 하는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째든 약간 곁가지로 나간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 결국은 그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신앙지식의 지평이 넓어져가야지만 제대로 된 기도 생활일 수가 있다라는 결론을 우리들이 여기서 내릴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그럼 어떻게 해야지만 그런 말씀의 참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요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그 세 가지 요인으로 집약되는데 하나는 성령의 은혜,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 이런 것들이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이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16절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가 심히 곤란하더니” 성소에 들어갈 때에 번뜩하고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셔서 그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성소는 예전에도 드나들던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나들면서도 거의 깨달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깨달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항상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나의 눈을 밝히사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시편 119편의 그 기도가 늘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째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지만 그러나 16절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사람은 그 속에서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기가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이게 이해가 안 간다고 하며 ‘막 살아버릴걸’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은 잠시였고 잠시 후에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어떻게 하면 내가 이것을 알 수가 있을까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뭐를 안다는 것입니까? 왜 악인이 형통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책망을 받으면서 살아가는가. 그 속에서 어떡하면 내가 이것을 깨달을 수가 있을까 이런 구도의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 깨닫고자 하는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게슴츠레하게 조는 사람들이 건강한 기도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왜 졸고 있습니까? 오늘은 조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때에도 없지만 그래도 있습니다. 가끔.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왜 졸고 있습니까? 텔레비를 볼 때 그렇게 초롱초롱 하던 눈이 설교 시간에 이렇게 게슴츠레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일어서서라도 듣든지 아니면 바늘을 가지고 예배당에 들어오든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꼬집으면서 설교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면 얼음을 가지고 들어와서- 뭐 그런 것을 먹으면서 예배를 드리면 경건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합니까. 생리적으로 그렇게 졸음이 쏟아지는데 -먹든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 시간에 깨달아야지 그런 사람들은 사고가 정지된 상태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병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왜 매일 교회 출석을 하는데 이렇게 병들고 저 사람도 매일 출석하는데 어쩜 저렇게 살아 있는 삶을 살까. 어쩌면 내가 이를 알까? 그런 고민을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밥 벌어먹고 사는 것만큼 십분의 일만 고민을 해도 그런 영적인 무기력에서 벌써 탈출했습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다가 보니까 이제 눈에 잘 안 들어옵니다. 비디오라도 찍어서 검사를 해야지 되겠습니다. 예외없이 부릅니다. 불러서 왜 당신 조는가. 굉장히 위험한 적신호입니다. 그것은 병든 것입니다.
(예화: 예전에 섬기던 교회의 집사님이 예배 시간마다 조시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암 이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영적인 잠이 육적인 잠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심각한 범죄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십시오. 낙심했습니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신앙의 수준이 악한 사람이 형통한 것을 보면서 샘이 나고 그리고 기도를 조금 해놓고, 경건 생활을 조금 해놓고 하나님 왜 나는 복을 안 주시고 매일 야단만 치시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수준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도 그것은 수준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수준이 낮아도 어떤 사람은 생각을 안 할 수 있지만 이 사람처럼 내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알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알까 하여 생각하더니. 히브리 성경에서 아주 골똘히 염려가 동반된 고뇌입니다. 묵상입니다. 왜 그럴까?
여러분들이 어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의문점같은 것들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처럼 뜨겁게 기도하지 못할까,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변화가 되는데 나는 변화가 안 될까, 나는 왜 예수를 믿는 기쁨이 없을까? 이런 질문들이 아주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인 질문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질문이 떠오르는데 대답을 찾기도 전에 그 질문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 다름날 대답이 주어져도 그때는 이미 그 욕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것입니다. 뭐 책을 한권 일년내내 읽어보기를 합니까? 바쁘다고 하지만 안 바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책을 한권 읽습니까, 테입을 한절 들어보기를 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해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는 노력이 거의 없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도 생활이 왜 이모양일까 생각하는데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의 수준이, 신앙의 수준이 업그레이드 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기도는 결코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 기복이 심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그리고 기도 생활 그 자체가 절대로 건강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람이 그래도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죽을 것입니다라는 고백에서 터질 것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갔던 그 놀라운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알고자 하는 자신의 어떤 영적 생활에서 제기된 문제를 캐들어가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아주 훌륭하게 열납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자신을 찾고 하나님 자신을 추구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수없이 성소를 넘나드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바로 그 날,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번쩍 하고 열어서 쭉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성경을 보고 깨달았다기보다는 성소를 넘나들면서 번뜩하고주시는 하나님의 어떤 계신의 빛에 의해서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그 깨달음의 방식까지 본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깨달은 이 내용이 이미 성경에 모두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껏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것을 놓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벼락을 치듯이 번쩍 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깨달음의 빛이 필요한데 이제는 이 사람처럼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번뜩하고 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위에 무엇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이 있고 설교자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놓은 책들이 있고 그리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실 뿐이기에 그들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간섭하심과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을 추구하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모두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속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성품을 알고자 하는 이 지식의 욕구,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몰랐던 어떤 신앙의 새로운 지평들을 열어주시는 말씀의 감화와 진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이런 것들이 없이는 여러분들의 기도 생활이 결코 업그레이드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하십시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닫고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내가 몰랐던 새로운 진리들을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읽으면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위로, 격려, 책망, 교훈, 바르게 하는 것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그런 하나님의 손길들을 끊임없이 체험하며 그 분의 성품에 감화를 받을 때 우리의 기도의 세계가 점점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결국 우리들이 이런 시인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했던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서 찬란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에 있어서 경험되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그 탁월한 성품의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식의 빛과 함께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의 빛과 함께 그 분의 성품에 대한 거룩한 체험이 함께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성경도 거의 안 읽고, 체계적으로 성경을 배우지도 않고 그냥 예배만 달랑 나와서 신앙생활 하면서 연초에 사경회를 하면 거기에 가서 무엇 하나 받아보려는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각오로 지금부터 깨달아가십시오.
그러면 어느 한 주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가면 그 속에서 여태까지 내가 전혀 기도하지 않았던 기도의 제목들이 터쳐나옵니다. 말씀의 깨달음이 있는 곳에는 터쳐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올바릅니까? 이정표를 보고 하나하나 걸어가면서 그것을 기도 제목으로 삼으면서 가면 깨달음이 기도 제목을 주고, 기도한데로 살다가 보니까 깨달음의 은혜를 더 주시고, 거기에서 기도 제목을 발견하고 다시 그대로 살고 하면서 실타래가 엮어지듯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 그 다음에 순종하는 삶, 그 다음에 기도의 실천 이런 것들이 계속 꽈배기처럼 꼬아지면서 어느 하나를 풀 수 없게끔 엮어져가면서 우리의 단단한 신앙생활이 더 단단한 동아줄 같이 엮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견고한 신앙의 생활, 기도의 생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유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깨닫고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기도와 미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지난 삼일동안 우리는 기도를 막는 대적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이번 사경회 기간에 우리들이 아침 성경 공부를 통해서 생각해보는 기도의 대적들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큰 대적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의 대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그런 대적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날은 우리들이 염려에 대해서, 그리고 둘째날은 게으름에 대해서, 그리고 셋째날에는 무지에 대해서 이 세가지 다 이것 때문에 기도가 안 된다고는 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나 불순종이나 이런 것들은 아주 너무나 분명하게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자연스럽게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마음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가 마음에 들어오고 게으름이 몸에 배이고 무지가 머리에 꽉 차서 그래서 우리들의 건강한 기도의 생활을 가로막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마지막 시간에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기도의 방해 가운데 하나도 설마 그것 때문에 기도가 안 되려고 하는 우리들이 흔히 잊기 쉬운 그런 대적입니다. 무엇일까요? 미움입니다. 그런데 이제 잘 보십시오. 염려나 게으름이나 깨닫지 않으려는 무지나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미움이나 이 모든 것들이 무엇과 관계가 되는 것인가 하면 마음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교리적으로 볼 때 신앙의 자리와 죄의 자리가 같습니다. 신앙도 마음이라는 자리에 앉고 죄도 마음의 자리에 앉습니다. 신앙도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하면서 지적으로 깨닫고 아! 참 사랑스런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정으로 느끼고 마지막에는 이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되겠다는 의지적인 결단, 이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죄도 똑같습니다. 죄도 야! 이것 참 좋다. 그리고 이것을 내가 가졌으면 좋겠다며 훔치든지 하여튼 잘못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참 좋다, 그래서 알고 그 다음에 강하게 느끼고 충동을 받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기고 해서 죄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에 있어서 이런 것들을 지금 세가지나 상세하게 설명드렸고 오늘 또 네가지의 설명을 드리는데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하나 내릴 수 있는 하나의 중간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든지 간에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성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고 기도할 수 있도록 능히 보존하지 않으면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약수터의 물을 생각해보십시오. 비만 오면 약수터의 물이 펑펑 쏟아져나오고 며칠만 비가 안 오면 물이 안 나오는 그런 약수터의 물은 거의 전부다 먹으면 안 되는 물입니다. 원래 이 약수터라는 것은 변함없이 이 지층에서 걸러진 물이 이게 모이는 것이 그것이 약수터인데 비만 오면 물이 펑펑 쏟아지니까 그것은 지표 가까운 곳에서 흘러들어와서 그 샘물에 합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과정에서 더러운 불순물들이 함께 들어오는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날 깊은 지표층에서 서서히 흘러들어와서 고인 그 물을 채취해서 수질검사를 하는 것과 비오는 날 지표층에 그냥 타고 흘러들어오는 그 물을 검사하는 것과 같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에 검사한 그것만 믿고 그냥 비가 온 후에 약수터에 물이 가득 고인 그것을 좋다고 먹으면 건강에 좋을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염려, 게으름, 또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미움 이런 것들이 계속 불순물들이 흘러들어와서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키면 결국은 대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는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영을 잘 지키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력한 소원을 주셔서 자기의 일을 행하게 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에라는 방면으로 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비라는 방향으로 우리의 마음을 급히 돌리셔서 마치 배가 암초를 만났을 때 항해사가 키를 급히 돌림으로 방향타를 꺽어 그 암초를 피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급히 우리의 마음에 개입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놓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자기의 책임입니다. 마음이 더럽혀지면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자기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이 미움도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여러 곳에서 사람에 대한 그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 누누히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기에서 미움이라고 하는 감정이 기도를 가로막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흔히 인정하기 어려우면서도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기도가 막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저는 반대편에서 논증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 누군가를 마음 속으로 깊이 미워하고 마음에 미움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서 뭔가 그 사람에게 복수하고 나쁜짓을 하고 가해를 하고 괴롭히고 하는 그런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여튼 마음 속으로 오래도록 미워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미움은 일반적으로 사랑을 나누면서 살기로 되어 있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그 믿음이 아주 더 색깔이 진하고 독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치듯 지나갔던 사람, 만나도 되고 안 만나도 되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 사이에 감정이 상하면 하루 이틀쯤 기분이 나쁘다가 그 다음에는 잊어버리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 아내나 남편, 그리고 엄마 아빠, 자기 자식, 그리고 한때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연인 이런 사이에 미움의 감정이 파고들어오게 되면 사랑한 것만큼이나 그 미움의 깊이가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만큼이나 그것이 변해서 미워하는 감정으로 철저하게 돌변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미움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이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면서 그를 용서하게 됩니다. 용서할 때에 맺힌 것이 풀립니다.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에 맺혀있는지 안 맺혀있는지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하여튼 내가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많이 미워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용서하고 자기가 그를 미워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빌고 화해를 하게 되면 그때 갑자기 막 사람과 화해를 했는데 신기하게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마치 하나님 앞에 죄짓고 숨긴 것을 회개할 때에 뭐가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확 무너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가 쏟아져 나오듯이 사람과 화해를 경험할 때에도 이러한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들이 ‘이 미움이 기도에 무슨 영향을 미칠까’ 이렇게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더 깊이 우리의 기도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의 기도를 잘 듣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미워하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제 이렇게 저에게 반론을 제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님, 저 사람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공연히 미운 마음이 들었다면 내가 가해자니까 내가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가만히 있는데 저 사람이 나에게 커다란 정신적이고 혹은 육체적인 타격을 주고 나를 가해해서 내가 너무 아파서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미워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미워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막으십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상처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상처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누가 와서 가격해서 찢어져서 피가 흐르거나 속으로 골병이 든 것은 상처라고 안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막 때렸는데 멍도 안 들었는데 속으로만 골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상처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상처는 찢어져서 보이게 피가 흐르는 것을 상처라고 합니다. 어째든지 간에 요점은 누군가가 와서 우리에게 가해 행위를 해서 피가 흐르든지 하는 것이 상처입니다. 이런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참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를 하면서도 참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처나 치유, 상처가 어떻고 하는데 너무 순진하게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는 이야기를 아주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여러분들에게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상처에 대해서 오고가는 이야기들은 상당히 위험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대는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상처가 많으시군요. 그리고 또 여러분 자신이 저는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는 상처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일 수 있는데 그런데 이 말에 있는 중요한 함정이 있습니다. 상처를 입고 병원을 간 사람을 향해서 의사가 그 상처를 치유하면서 환자를 야단치면서 어디서 행동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상처를 이렇게 심하게 입었느냐고 야단을 치는 의사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그리고 똑바로 되. 어디서 허튼짓 하다가 이렇게 머리가 터졌어. 말해. 무릎을 꿇고 손들어. 그러면 안 고쳐줘. 이런 의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처 그럴 때 우리가 그런 심리를 가지고 상처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긴지 더 들어보십시오.
우리들이 흔히 상처를 이야기할 때는 자신이 어떤 사건이나 관계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고 자기는 피해자다는 것이고 지금 마음에 느끼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에 느끼는 고통과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모든 것들이 다 피해본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그 상처의 개념 속에 들어가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 그러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제 나는 잘못이 없는데 우리 부모가 나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성장 과정에서 가서 매일 술을 먹고 집에 와서 때리고 밖에서는 얻어맞아도 집에 와서는 때리고 그리고 돈도 제대로 안 벌어다주고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그랬다고 칩시다. 그런 일 하는 것에 자식인 내가 뭐 도와주었습니까? ‘아버지, 이것 먹고 힘내서 우리좀 때려줘. 엄마좀 반쯤 죽여’ 그렇게 도와준 적이 없습니다. ‘아빠 수고했어. 엄마 이빨을 네대나 부러트렸다며 역시 아빠 참 수고했어. 보약 먹고 힘내’ 우리가 뭐 그렇게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피해를 본 것에 대해서는 사실 우리들에게 책임이 없습니다. 부모 잘못입니다. 기껏 있다고 해봐야 네가 부모를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했나. 뭐 이렇게 물으면 또 우리 책임도 또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하여튼 어째든지 간에 아버지가 잘못해서 우리에게 그런 피해를 준 것입니다. 그때 그 순간은 상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팍 할켰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탁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상처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상처가 나면 막 새카맣게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넘어져서 피가 흐르면 제일 먼저 뭘 바릅니까? 소독약부터 바르고 그 다음에 곪지 않게 마이싱을 먹고 가루를 바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새살이 돋아나지 않더라도 일단 곪지만 않고 균에 오염만 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와서 확 할켜서 상처를 낸 그 즉시는 내 잘못이 없거나 있어도 그렇게 당해야 할 정도로 그런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확 할킨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 상처가 내 깊은 밑바닥 속에 있는 사람을 쉽게 미워하는 부패하는 본성과 악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이것을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여튼 참 잘 기억을 해야 합니다. 진짜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교리의 틀 속에서 그 미움의 문제를 보지 않으면 오리무중입니다. 여러분들도 지체들 간에 사귐을 하다가 나는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가 어떻고, 우리 엄마가 어떻고, 남편이 어떻고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자기 자신이 깊이 자신의 부패와 그리고 죄된 성품이 이 상처받은 관계 속에 작용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깊은 책임이 있다라고 하는 그런 죄에 대한 강력한 자책감을 가지고 상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낱말을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조심스럽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 확 할켰을 때에는 나에게 책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와서 확 할켰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즉시 염증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상처는 내 책임이 아닌데 내 속에 사람을 쉽게 미워하고 원수를 맺으려고 하는 부패한 본성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를 해치거나 고통을 주는 자를 죽어도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주 부패하고 야비한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상처가 확 났을 때 그 상처로 그냥 확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에게 상처를 가한 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상처를 받은 사람이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한 미움의 정도가 상처를 준 사람이 상처입은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그 미움을 몇배나 더 능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이,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세요. 그런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증명을 할테니까 창세기를 펴보십시오. 4장 16-24절 이것이 기가막히게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래로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여러 세대가 거치면서 라멕이라는 인간이 나오는데 그가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아내들이여 내 말을 잘 들어라 누군가가 나에게 창으로 상처를 살짝 입혔는데 내가 사람을 죽여버렸고 누군가가 나에게 약간 상하게 멍들게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철없는 소년이 모르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콱 쑤셔죽여버렸다. 아내들에게 이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들에게 이야기를 하려면 다시 태어나도 내가 당신에게 장가를 들겠다든지, 젖은 손이 애처롭다든지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나 무서운 사람이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 성질나면 무서운 사람이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칠배나 벌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라멕이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칠배 좋아하네 나는 칠십 칠배다’ 그런데 가인을 해친 자는 칠배를 복수한다고 그럴 때 그 주체는 누구입니까? 왜 이렇게 어릿어릿합니까? 하나님이 그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을 해치는 자에 대한 칠배의 벌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라멕을 건드린 사람은 칠배라고 그럴 때 그것은 누구입니까? 자기가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요즘말로 하면 무엇인가 하면 ‘건드리면 죽어’ 그 이야기입니다. 이게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인간의 내면 속에 깃들게 된 상처에 대한 포악성입니다.
제가 처음에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 미움 때문에 기도가 안 된다는 생각을 별로 안한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상처를 가한 사람들보다도 때로는 포악하게 변해가면서도 항상 자신에게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대한 원망이 너무나 큰 나머지 자신은 피해를 입은 자일 뿐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그럼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워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안 들으시려고 하는 것일까? 왜 이 미움이 기도에 있어서 그렇게 엄청나게 큰 것일까? 그것입니다. 첫째는 미움이 결국 우리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 그 감정이 그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그 사랑이 마음에 미치는 감정과 동일한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꽃을 보아도 그 사람 생각이 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꽃처럼 예쁜 사람인가 하면 사실 아닌데, 그런데 아무도 그 사람을 보면서 꽃 생각을 안 하는데 그런데 자기는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보면서 호박을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색깔을 보아도 아! 그 사람이 좋아하는 색깔인데, 맞있는 것을 보아도 눈물이 핑 도는데, 아! 이것을 많이 먹고 싶어했는데, 또 뭘 그럴까? 떡집에서 떡을 보아도 이 떡을 많이 좋아했는데 뭐 그런 것입니다. 하여튼 무엇을 보든지 간에 전적으로 연상이 되는 것입니다. 미움의 감정도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기도를 바치는 마음은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차 있을 때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기도로 올릴 수 있는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기도가 우리가 다 떠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언어를 통해서 우리를 떠납니다. 뭐 이렇게 이렇게 해주시옵소서 하면 여기서 만들어내서 떠납니다. 좋은 비유입니다.
(예화: 예전에는 가전제품이 너무나 비쌌는데 그때 가장 갖고 싶은 것이 소형 카셋트였는데 요즘 은 똑같은 물건에 똑같은 포장임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틀린 것은 생산지에 따라서 틀린데 외국에서 만든 물건이 싼 것은 일본 본토에서 만들어 직접 조립해 온 물건은 가격이 엄청 비싼데, 부품을 보내서 만들었어도 기술이 부족해서 사용할 때에 문제가 되기에 완전 조립 을 해서 수입된 것인지 아니면 부품을 갖다가 외국에서 조립해서 온 것인지에 따라서 가격 의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
기도가 이 속에서 우러나와서 입에서 이렇게 해서 이제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똑같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 없겠어요. 주기도문 같은 것이야 뭐 완전히 찍어내는 약과 같이 탁탁 찍어내어서 사람들이 수없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기도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야, 생산지를 확인할지니라’ ‘다 중국제입니다. 러시아제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제품은 그럴싸해보이지만 마음이 시커먼 그리스도인이 보내는 줄 아뢰오.’ ‘쓰레기통에 넣어라’ ‘예’ 그러는 것입니다. ‘다음 것은 또 어디서 온 것인가’ ‘이것은 제품은 고도의 기술이 별로 깃들여져 있는 것 같지 않은 단순한 제품이오나 아주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줄 아뢰오’ ‘이리 가지고 오너라’ 이제 응답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 괜찮은 비유입니다. 사실 미리 생각하고 올라온 것은 아니고 항상 여기 올라와서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산지가 어디서 나왔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의 기도 속에는 복수의 감정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기도자체가 오염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잘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기도 뿐만 아니라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와 원수가 된 것이 생각이 나면 가서 화해하고 와서 다시 드려라. 그러면서 결국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화목하며 사는 그것이 하나님께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시급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강조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미워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가, 큰 두 번째에서 첫 번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미워하는 감정이 전체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정도로만 끝나는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감정이 결국은 마지막에 그 미워하는 감정은 무엇을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너무 심한 상상이오. 과장이 아닙니까? 어째든 내가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들어서 마음으로 미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을 죽이려는 생각까지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싸울 때도 죽이려고는커녕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왜 그 사람을 살인하려는 감정까지 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미워하는 감정이 더 이상 발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저 사람이 많이 미워도 내가 적극적으로 가해를 하면 내가 벌받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보복과 혹은 징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미워하는 것까지는 모르지만 내가 칼을 빼서 저 놈을 찌르면 하나님께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신앙적인 영역에서의 그 징벌의 두려움, 그리고 노골적으로 저를 미워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행동할 때 내게 돌아올 줄도 모르는 불명예, 그리고 비록 내 마음 속에 미움은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미움을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호 이런 것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전을 안보고 거기까지 있는 것이지 이런 것들이 확 풀어지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달려가고 싶은 것은 라멕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너 상처냈어, 건드렸단 말이지, 너 죽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서도 참 그런 것들이 더 심각해졌다고 보는데 요즘은 조금 나은 것 같습니다.
(예화: 공중전화에서 통화를 하는데 빨리 끝내라고 뒤에서 재촉하자 전화를 걸던 사람과 싸움이 벌어져 살인하게 된 이야기)
라멕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예화: 집 앞에 자동차를 주차하려고 하자 그 집의 주인이 자기의 마당이라며 주차하지 못하게 하 자 화가난 자동차 주인과 싸움이 벌어져 살인한 이야기)
그것을 보십시오. 사실 저 녀석이 왜 저기에 차를 댈까 그러며 죽여야겠다며 부엌칼을 들고 나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 주차장에서 몇 명이 죽었는데 차를 댈라고 그러는가, 그러면서 칼을 빼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그 죄악이 확 풀어지고 나면 그냥 그 순간에 미움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 다 실화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예화: 잘못 주차한 차 주인을 부르려고 클락션을 누르자 동네에 사는 사람이 시끄럽다며 엽총을 갖고 쏴서 도망가니까 차를 쫓아오면서 쐈다는 이야기)
그 일이 일년에 걸쳐서 일어난 일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통제력을 잃어버리면 그렇게 확 되는 것입니다.
(예화: 신문에 어느 목사가 12년째 복역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성도들을 도와서 복덕방에 갔다 가 불끈 하는 감정에 중개인을 때렸는데 순간에 죽어서 살인자가 된 이야기)
생각해보십시오. 목사가 사람을 살리라고 목사를 만들었는데 ‘그래 오늘 복덕방 이자식 까부는데 오늘 이 자식을 죽여버리자, 너 죽고 나 죽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순간에 솟아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미움의 씨앗은 작지만 그 씨앗이 마지막에 가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면 살인입니다. 저 존재를 이 지구상에서 쓰러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하는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기쁨이고 미워하면 아무 것도 그에게 피해를 보는 일이 없어도 그 인간과 함께 하늘 아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끝내주는 것입니다. 죽여서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이 내제해 있으니까 거기에서 생성되는 기도가 명품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 오염되었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번째로 사람을 미워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사람을 향한 미움이 사람을 향한 미움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또 여러분들이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것도 지나친 억지입니다. 내가 사람을 미워했지 언제 하나님을 미워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어떤 사람에 대한 집요한 미움을 마음 속에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속에 이미 그 사람으로부터 그 상처와 고통을 입게끔 방치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고 그 사람을 정리하시지 않고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반감을 동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를 대겠습니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잘 미워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사람을 쉽게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속에 결핍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기가막히게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왜 성경이 그렇게 집요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 사랑을 일치시켜서 이야기를 하는가. 심지어 예수님께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율법사가 와서 율법 중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까 “마음과 뜻과 목숨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남는 것이 있으면 사람을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첫째 둘째라고 하는 것은 한번에 둘을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까 차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중요도에 있어서 이것이 첫째고 이것이 둘째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런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것과 사람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 굉장히 일치합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과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상당히 일치할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목회자에 대해서 그런 것이 많습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신앙생활을 해도 자기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닫혀있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에는 절대 목회자를 향해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론 하나님과 닫혀있으면서도 목회자를 향해서 마음을 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뭐 꼭 연다고 해서 이렇게 심오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합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냥 와서 잘보이려고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마음을 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면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인생을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인격적으로 열린 마음을 가질 때 목회자를 향해서도 열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비례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첫째는, 둘째는 하고 말씀하신 이것이 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무엇이 또 남아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둘째가 만약에 순서적인 둘째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 갔습니다. 그리로. 아무 것도 이제 없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를 제일 사랑해야 합니까? 왜 대답을 안하십니까? 꿀을 먹고 왔습니까? 이쪽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구를 제일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 그런데 사실 그 대답도 틀렸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를 놀립니까? 그런 대답을 유도해 놓고 틀렸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첫 번째로 사랑해서는 안 되고 모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first가 아니라 all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머리가 좋은 여러분들이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 그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구나.’ 이제 더 이상 설명을 안 해도 되겠지요. 몇 사람이 굉장히 황당해 하시는데 그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십시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끝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긴가 하면 뒤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은 사랑할 것이 이제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자연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흘러나오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눈빛인데 섬길 기회를 계속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한번 이야기를 해봅시다. 가정 주부인 여러분들이 살림살이가 쉽지는 않고 힘들지만 그러나 그 살림살이도 재미있습니다. 예쁜 그릇도 사고 싶어하고 주방도 새롭게 하고 싶어하고 하여튼 주부들 나름대로 자기들이 사랑하는 가정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족이 없이 그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일을 사랑하게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갑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두 개가 말하자면 하나 속에 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즐겨사용하던 비유가 하나 있는데 길어서 내가 안 하려고 했는데 할 수 없이 동원해야겠습니다.
(예화: 어느 여자가 실현을 당해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며 자신을 학대하면서 사는데 그 여자를 불 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새 삶을 살고 싶어하는데 자신의 건강이 안 좋아서 치 료를 받으면서 그 남자와의 미래에 대한 꿈과, 건강에 대한 갈망, 사람들과의 사랑이 자기 가 사랑하는 그 남자를 위해 바친 그 사랑을 나눈 것이 아니기에 그 남자가 죽으면 나머지 사랑도 다 함께 끝난 것이라는 이야기)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그대로 이어서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사랑이 우리가 사랑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 이런 것들이 더 정확하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큰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너무 자기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달라보이는 것입니다. 왜 달라 보입니까? 저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나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거나 받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기독교 만큼 참된 휴머니즘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 사람을 사랑하되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믿고 복음 안에서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경험하면 그는 정말 인간을 사랑하는 신앙적인 의미에서의 휴미니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되면 자기가 하나님께 놀라운 사랑을 받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인 것까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더 목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런 사랑을 경험하고 보니까 저 사람도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구나.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 저 사람도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알게 해주시고 싶어하는 사람이구나. 그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 사랑의 바탕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도저히 끊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개념입니다. 이것이 이웃에 대한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미워한다라는 것은 곧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과 화목하고 좋은 관계 속에서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잘되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인격적으로 응답하시는 것이지 한쪽으로 죽여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거기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한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말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안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원리입니다.
마지막 크게 세 번째로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아니 용서라니 빌면 용서해주지. 와서 빌면 용서해주지. 잘못했다고 비는 사람이 없는데 누구를 어떻게 용서를 해주는가. 그런데 그것도 또 말이 안 되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은 어땠습니까? 우리가 와서 비니까 용서해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받는 느낌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회개를 경험합니다. 어느 날 자기의 죄가 생각이 나서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간절히 눈물로 비니까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이 확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자백하여 빌므로서 하나님과의 교제로서 회개가 열린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우리가 아멘 하고 믿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에 지을 우리의 모든 죄까지 용서해주셨습니다. 만약에 이런 교리를 믿지 않으면 아주 중대한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죄지은 것을 하나님 앞에 다 회개합니까? 안합니다. 지은 죄 백개 중에서 서너개만 회개해도 회개 왕입니다. 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회개한 적이 언제 있습니까? 가슴을 두드리며 용서해다라고 빈 적이 언제 있습니까? 기억이 별로 안 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죄지은 것도 기억이 안 날 것입니다. 죄를 안 지어서 안 나는게 아니라 너무 많이 지어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미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회개하기 전에 이미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다만 회개하지 않고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특성상 회개를 하지 않으면 용서는 해주셨는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런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이 용서해주셨다고 하는 것을 현실적로 느끼게 해주는 것인데 정확하게 그것은 용서의 체험이라고 하기보다는 화해의 체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있어서 첫째는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비는 사람이 없는데, 빌었다고 치고 용서를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바로 그런 용서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러니까 우리 마음 속에서 용서하지 못할 때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와서 무릎만 꿇어라. 그러면 내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끌어안겠다고 그러는데 거기에는 심리적으로 무엇인가 하면 용서해주되 그 용서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입은 내면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런 용서가 아니라 왕으로서 베푸는 것 같은 그런 욕구를 만족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막 와서 빌 때 자기는 보좌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폐하, 흑흑흑’ ‘네 죄를 내가 사하노라. 갈지니라’ 거기에서 뭔가 승자의 허영을 만족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가페의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고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누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오셨습니까? 모든 인류가 열렬하게 ‘예수 우리 구주여 오시옵소서 우리가 죄를 범했습니다.’ 그랬습니까?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죄인들, 그 죄인들이 당신과의 불화한 관계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불쌍해서 관계를 깨트린 것은 인간이었는데 다시 용서하시는 손길을 내미시는 것은 이상하게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은혜의 선도권입니다. 관계회복 선도권을 하나님이 쥐시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보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반대보다 훨씬 쉽습니다. 왜냐하면 상처에 대한 기억이 받은 사람이 또렷하겠습니까, 준 사람이 또렷하겠습니까? 가끔 와서 상처를 받았다고 그러면서 막 울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어떤 때는 황당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그랬나. 내가 왜 그랬지.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가해자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피해자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해자의 마음 속에 그런 것들이 다 생각나서 낱낱이 찾아 다니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왜 상처받은 사람이 가서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또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마음 속서 그렇게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주는데 있어서 선도권을 쥐는 것이 자기 스스로 발에 얽매인 족쇄를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예화: 싱가폴에 새 공원이 있는데 새들이 갇혀 있지 않은데 날라가지 않아서 의아해서 알고 보니 까 뒤꼬리를 다 짤라서 날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인간의 잔인함을 경험했다는 이야기)
그런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다리에다가 족쇄를 채워서 말뚝에 묶어놓고 날개짓 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발목에 상처만 더 생길뿐이지 안 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 그런 것을 봅니다. 열심히 기도하다가 낙망한 사람들은 예외없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해도 들어주지도 않고’ 하는 원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해주는 것은 그것을 먼저 풀러버리는 것입니다. 달카닥 하고 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아가는 것입니다. 훨훨 기도의 세계로 날라가는 것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어떻게 용서를 하는가. 그것은 자기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하면 자기를 용서해주신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어떤 죄인이었었는데 어떻게 주님이 용서해주셨는지를 깊이 생각할 때에 그때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용서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께 받고 용서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베푸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영을 미움에 묶어놓지 않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늘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나를 위해서 자기의 그 고귀한 죄 없으신 몸을 버리시면서 십자가에서 나를 구속하셨는데 내가 그렇게 용서받은 사람인데 내가 내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주어하리라 하는 그런 분명한 신앙을 현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그런 성화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용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점점 커져가면서 그 능력 안에서 사는 것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용서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이런 용서의 능력을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깊은 성화의 세계에 들어가면 갈수록 미움이 계속 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미워하게 될 때 즉시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깊은 성화의 세계 속에 들어간 사람은 영혼에 유익을 얻게 되고 그런 성화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한번 이렇게 미워하게 되면 그것들을 털어내지를 못하기 때문에 계속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그나마 조금밖에 없는 기도의 영을 아예 말려죽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사람은 점점 없어지고 있는 사람은 점점 부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도 다른 죄를 물리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 미움이 탁 들 때 그때가 가장 그 사람을 용서하는데 힘이 덜 드는 법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 미움의 감정들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나면 견디기 힘들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그렇게 미워하면 기도의 영도 잃어버리고 마음도 상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의 삶과 정서 체계 자체도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복수의 감정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진정으로 용서해준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냥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것을 덮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지 않고 그냥 용서해준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서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비니까 주님이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됐다. 네가 회개하지 않았으면 내일쯤 단칼에 목이 달아났을텐데 끝났다 이제 칼은 도루 거두마. 이제 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도 된다.’ 그것으로 회개를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서 다시 쏟아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므로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 용서 속에 회복된 사랑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복수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를 뛰어넘어서 사랑으로 그 관계를 덮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허다한 허물을 덮고 나아가서는 미움의 감정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하나님과 막히지 않는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아마 그 미움 때문에 기도가 응답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먼저 용서의 손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그 용서가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용서를 빌지도 않는 우리와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루셨을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랑의 빚진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고 미워하지 아니함이 마땅하다는 이 교훈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며 기도의 장애물로 삼고 있을 때에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용서하고 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맺혔던 것들이 풀려나가면서 다시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얻게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실망을 통해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희망으로 나아가는 놀라운 변화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 속에 미움을 청산하는 가운데 회복되는 기도의 영과 함께 형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5.명철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인생을 사는데는 반드시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의 지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너무 비참합니다. 지혜있는 사람에게는 저 사람이 몇 걸음 더 인생을 걸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 보이는데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는 머리가 터져서 피가 흐르고 발을 헛디뎌서 발목이 부러질 때까지는 자기가 걸어가는 그 앞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를 못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지혜가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본인 자신이 이런 점에 있어서 미련한 사람이고 두 번째로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미련할 때에 자기를 지켜줘야 할 옆에 있는 사람들 조차도 미련한 사람과 일평생 사는 사람들입니다. 미련한 부모를 만난 자식, 미련한 아내나 미련한 남편을 만난 그런 사람들이 정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지혜를 구비하여 사물을 판단함에 있어서 똑똑한 것을 가르쳐서 성경이 ‘명철’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안이 뭐냐하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그러면 인생을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뭔가 이렇게 사물을 헤아려 판단하고 자신의 인생 앞길에 대해서 생각하는 똑똑한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 그냥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렇게 한다면 눈 딱 감고 그냥 믿습니다 라는 신앙 하나로 살으라는 이야긴가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네 명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삶을 똑똑히 헤아리는 똑똑한 지혜인데 그런데 그 기원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과 탐욕,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본성 이런 것들에서부터 비롯된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혜, 여기에서 오는 명철 자체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지혜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의 방법은 명철이고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인간에게 삶의 원리를 제공해주는 그런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자기 중심적인 지혜, 자기 중심적인 명철이 있는 그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뢰,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하나님과의 그 아름다운 교통 이런 것 자체가 존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의뢰가 그런 인생을 사는 명철을 대신할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의뢰한다”라고 하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내던지고 돌격 앞으로 하는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 그 자체가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느낄려면 이 지성 자체가 멈추고, 그리고 열광하듯이 무언가를 체험해야지만 하나님을 느낄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미신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없이 당신을 향해서 우리의 일생을 내던지는 눈 감은 장님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때에 삶의 지혜를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살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지혜와 명철을 배우는 것,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항상 아버지의 가르침이 무엇일까, 아버지가 나의 살아가는 길에 대해서 무엇을 약속하고 계시는가, 그리고 어떤 것들을 경고하고 계시는가, 그리고 어떤 것들에 대해서 나에게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고 계신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이것은 눈 감고 맹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던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이 인생의 길을 이어갈지에 대한 아주 분명한 지식이 있고 명철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라고 해주시는 그 지혜와 하나님 없이 살았던 때에 내 자신의 지혜가 충돌을 일으킬 때에는 그 때는 내 자신의 과거의 그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된 그 지혜를 따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산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불행한 인생, 고통받는 영혼에 대해서 수많은 이유들을 대지만 그러나 그 중에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우리의 고통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7편에서 사람이 흑암에 앉아 사망의 쇠사슬에 메이는 것은 지존자를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무리 그가 순수하게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경건한 하나님을 향한 의뢰속에서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순간에 종교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 여호와는 너의 도움이시다” 이런 성경의 끊임없는 우리를 향한 의지하라는 이 호소는 철저하게 인격적인 앎을 바탕으로한 의지입니다. 그래서 무지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해 자기 자신을 내동댕이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그 인격적인 앎을 기초로 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도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자라가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신뢰하고, 더 많이 의지하고, 더 많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지혜는 나보고 이렇게 살으라고 가르치는데 성경은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살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전자의 그 길은 수십년 동안 살아와서 익숙한 길입니다. 그 길로 들어가면은 내가 가는 길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걸어보지도 않은 길입니다. 그때에 후자의 길을 택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일단 그렇게해서 그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길을 택했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응답과 축복들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는 그런 경험이 쌓여가면 갈수록 내 자신의 지혜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많이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여러분들이 기도하여야 할 제목은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 자신이 이제껏 익숙하게 살아온 삶의 지혜보다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할 수 있도록 내게 은혜를 주십시오 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 하나님께 대한 신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인생에 대한 지혜를 배울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주십시오라는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나의 눈을 열어서 주의 복을 보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금년 한 해를 여러분들이 살아갈 때에 작년에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믿음 안에서 담대해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고 나의 이제껏 살아온 그 부패하고 세상적인 지혜, 하나님을 거스르는 인간의 지혜를 포기하는 것, 그리고 보다도 순결하고 그리고 신령한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서 그 지혜를 가지고 말씀으로 빛을 삼아서 일생을 살면, 금년 한 해를 살면 하나님께서 작년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원수들에게 포위될 때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시3:1-3)
이 시는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일생에 겪었던 일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사건은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요단강 건너편 남의 나라 땅으로 망명을 간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기의 아버지를 타도하고 왕권을 빼앗기 위해서 3년이 넘는 동안에 아주 면밀주도하게 계획을 했습니다. 성 앞에 서서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는 사람의 마음을 모두 훔쳤습니다. 그리고 무기를 준비하고 자기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모았습니다. 물론 다윗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황망히 도망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도망가는 그는 여러 가지 많은 괴로움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우선 그 사람은 탁월하게 신앙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큰 환난을 만나는 것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괴로웠고, 그리고 두 번째는 왕권을 쥐고 있을 때에는 그렇게 자기를 존경하고 따른다는 많은 무리들이 자기를 비난하고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의 영광과 존귀는 간 곳이 없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그리고 책망의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도전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람에게로부터 오는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가해도 견디기 힘든데 이 반란 자체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온 것이었으니 이것은 또한 가족으로부터 오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을 받아야 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반역이 왠 말입니까? 이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이방의 세계에서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말미암은 고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이 사건을 당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개선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이 난이 평정되었다고 하는 소식은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해져왔습니다. 그때 그는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다윗에게 미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포괄적인 고난이었으며 다윗을 향해 반기를 들고 그를 핍박하고 고통을 주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다윗 이 작은 사람에게 전 방위적으로 밀려왔습니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하나님의 도움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원자를 버려두고 그리고 특별히 법궤까지 버려두고 황망히 도망치듯 예루살렘을 빠져 나아가는 이런 처지 속에서 지은 시입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자기를 치려고 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제 너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특별히 시므온 같은 사람이 도망가는 다윗을 저주하면서 네가 사울의 집을 망가트리더니 하나님이 이제 너에게 갚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돌팔매를 하면서 그에게 한없이 욕을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리고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이 환난의 때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이 뭐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평안하고 행복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별히 이 믿음은 환난의 때에 잘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진짜 참된 믿음을 가졌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이제 이런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름에 산을 보면 그것이 사철나무인지 아니면 봄 여름에 파랗게 피었다가 가을에는 낙엽이 지는 나무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때에 보십시오. 그야말로 백설이 가득한 때 그 눈을 머리에 이고도 푸르름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철나무입니다. 한 때에 푸르름을 자랑하고 가을이면 색이 변하는 나무들을 지금쯤 잎파리는 하나도 없고 앙상한 가지 위에 눈꽃이 피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여기에서 뭐라고 고백을 하는가 하면 “주는 나의 방패이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사실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방패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이 황망히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 여호와가 나의 방패라고 하는 다윗의 고백이 사실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너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는 악한 사람들의 핍박하는 말이 사실처럼 보입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영광이오” 무슨 영광입니까? 나라를 잃어버리고 법궤까지 버려두고 그리고 도망을 가니까 이제 왕권으로서의 정통성은 상실된 것입니다. 법궤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무슨 영광이 있습니까? 그렇게 영광이 있다는 말이 어울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하나님의 도움이 얻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 말이 오히려 어울립니다. “주는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머리를 드는 자니이다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그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머리를 들라’ 이것은 상종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진짜 하나님의 회복이 보입니까? 그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이 망명 길에 오르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저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회복이 아니라 저는 하나님께 파괴를 당했다 그것이 오히려 더 사람들의 가슴에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모든 기대할 것이 있는 그것이 사라질 그 때에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는 것, 자신이 가장 짓밟혀 아무 가망성이 없다 할 그 때에 하나님이 자신을 존귀케 해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 그리고 이제 자기가 아무 소망이 없이 침체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에 주님이 자기를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 상황은 사방에 산재해 있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을 초월하셔서 하늘 위에 계시니,
눈을 들어 영광의 주를 보라
그것이 고난을 당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이 이 기대를 사람들이 이제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할 그때에 “하나님은 나의 방패이시며” 사람들이 이제 너의 도움은 끊어졌다고 말할 때 “주님이 나의 영광이시며 부끄러움을 당할 때 나의 영광이시며” 이제는 너는 무너졌다고 말할 때 “주님은 내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이러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시인이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망명 생활에 대해서 성경이 상세하게 안 나오지만 그러나 이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다시 없을 끔찍한 고난의 시기에 다윗은 진짜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하며 몸부림쳤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서 우리가 다윗을 생각해보면 정말 순수하고 순결하게 하나님밖에 모르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 그래서 사무엘하 11장까지 보면 정말 그랬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 전체를 펼쳐보면서 이 사람처럼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아져서 하나님께 붙어있던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이 다윗을 보면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지라. 내가 그를 통하여 나의 뜻을 다 이루리라” 그리고 이제 이후에 왕국이 갈라지고 왕들이 생겨나는데 그 왕들이 좋은 왕이다. 나쁜 왕이다라고 하는 그 기준에 있어서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나쁜 사람의 기준은 여로보함이고 좋은 사람의 기준은 다윗입니다. 한 왕이 신실하게 주님을 따라가면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그랬으니까 비록 이 사람이 범죄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지금 징계를 받고 있지만 그러나 얼마나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순전하게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는데 이 상황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때 이 시인이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참 훌륭한 신앙입니다. 법궤를 두고 간 것도 그렇고, 그 다음에 그렇게 자기를 욕하는 무리를 향해서 자기 부하가 저 사람들을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겠습니다 그럴 때 다윗이 놔두라고 그랬습니다. 혹시 저들이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라고 그러셔서 그런 것인지 누가 아느냐.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고백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고백을 가지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 고난의 시기에 기도한 것입니다.
참 우리의 인생을 살다가 보면 고난과 어려움, 사람으로부터 오는 모든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상황을 만날 수 있는데 그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더 비참해지고 비굴해집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때,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때 중에 하나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가 의로운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그가 실패한 사람이든지 성공한 사람이든지, 형통한 사람이든지 고난을 받을 때이든지 그런 것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성도가 정말 아름다울 때는 언제인가 하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로 모아질 때, 그 마음에 기도가 실린 그때, 그래서 마음의 뜻과 생각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모아진 그때 그래서 자신을 쏟아부으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때,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잠시 번성한 것 같았던 악인의 무리들은 토벌되고 파멸되고 이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같이 고난 속에서 황망히 도망치듯 이 다윗은 결국 하나님이 그의 방패가 되어주셨고, 그의 영광이 되어주셨고 그의 고난으로부터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다고 해서 다윗 같겠어요. 그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이렇게 “주님은 나의 방패시며 영광이시며 내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고백을 하며 자신의 온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 한분께 모든 기회로 이 고난을 그런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과연 그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그의 영광이 되어 주시고 그리고 그의 머리를 들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너무 커서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7.부르짖는 자의 하나님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시3:4)
그렇게 예기치 않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요 그리고 영광이오 자기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심을 고백한 이 시인은 그것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자기를 그 환난에서 건져주시기를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목소리로 부르짖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기도 생활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중보기도의 능력을 굳게 믿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줄 때 그것은 환경을 뛰어넘고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도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놀라운 그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니 중보기도가 성경에서 굉장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역시 그 중보기도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중보기도를 받는 사람이 함께 그 기도에 동참할 때에 더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중보 기도의 위력도 강조하고 또 중보기도를 받아야 할 필요성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 훨씬 강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수많은 대적들에게 둘러쌓인 상황에서도 “주님은 자신의 방패요 그리고 영광이며 자기의 머리를 드는 자시니라”고 고백을 하고 그리고 그 고백을 가지고 이 시인은 직접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 생활로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부르짖는 시인의 자신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시인을 이 큰 시련 속에서도 아름답게 고백하게 만든 신앙의 고백과 함께 어우러져서 그를 시련 속에서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우리 입술에 있는 많은 고백이 정말 우리의 실제 삶에 있어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고백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련과 환난을 만나고도 하나님 앞에 낙망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 시련 속에서 자신의 신앙의 고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처럼 많은 환난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강력한 대적 속에서도 이 시인처럼 주님이 자신의 방패라는 사실과 자신의 영광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드시는 궁극적 승리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깊은 신앙의 고백이 있을 때에 기도할 힘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이 우리의 도우심이라고 하는 그 신앙의 고백을 잃지 않는 것도 필요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것도 역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환난 당한 사람들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50편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는 말씀,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한 대표적인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근심하고 염려하고 불안해 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기울인다면 훨씬 더 우리의 문제는 해결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순간 이런 깨달음과 그리고 간구의 은혜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에 그때에 우리들이 매순간 마다 패배가 확실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승리의 보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시인은 그렇게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성산에서 응답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성산은 거룩한 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온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가 약속하신 땅, 시온 산이 예루살렘을 향해 둘러싸고 있는 산지인데 그 시온산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고백을 통해서 이제 보여주는 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도 이러한 환난을 당했을 때 자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도 알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폭넓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그런 넓은 마음을 갖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난을 통해서 환난을 일으킨 자신의 원수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자신의 진심을 호소하는 신앙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신은 비록 잘못했고 그래서 나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벌하고 계셨지만 그러나 그 땅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의 약속을 폐할 수 없으리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서는 징벌하신다고 할지라도 그 시온산을 중심으로 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총체적인 언약의 관계는 폐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성산을 비롯해서 여호와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런 성전에 대한 노래가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 대한 이야기가 특별히 제 3권에 많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환난과 시련을 많이 당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 중에 있어도 하여튼 그 성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호소하면 해결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는 언제인가 하면 자신이 그 성산에 올라갈 수 있는 때가 아니라 그 본토로부터 추방되어서 이제 망명의 길을 떠나는 가운데 두고가는 그 성산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윗이 환난을 당하고 망명을 가는 그 과정을 생각하면 그가 잠시 범죄하였고 지금은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 마음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끊을 수 없는 그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이 시편을 읽는 사람들도 그런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데 하물며 이러 믿음, 이런 심경을 가지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면서도 그 약속을 붙들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시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어떤 감동을 드렸겠는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결국 약속을 붙든 신앙입니다. 나는 비록 하나님 앞에 잘못해서 지금 징벌을 받고 있으나 그러나 그 징벌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 신앙입니다. 때리시지만 어루만지시고, 치시지만 싸매시고 그렇게 고치셔서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신다고 하는 그 신앙의 고백, 참 그런 것을 보면 다윗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점에서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참 그에게 있어서 부러운 것은 하나님을 아는 넓은 지식, 그 광대한 지식도 다 부럽지만 그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연약함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신앙에 있어서 특징 하나는, 항상 그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이 그에게 있어서 인생에 전부라고 하는 그 확신과 사랑이 시종일관 견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범죄했을지라도 즉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움, 그 분께 속하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는 그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마음, 그것이 그 생애 동안에 계속해서 그 삶 속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구원을 호소하는 그 기도가 아주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하고 아주 모진 인간들은 거기에서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기도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런 그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약속을 붙드는 그런 신앙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것은 응답에 대한 아주 깊은 확신입니다. “응답하시리라 하나님이 응답하시리라” 그러니까 환난이나 시련이 곧 시험을 불러오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사람마다 말이 많아집니다. 그 말이 다시 말을 만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막 얼키고 설키게 만들어서 걷잡을 수 없는 시험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전에 시련을 만났는데 그 시련이 시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통 뒤엉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련을 당할 때 사단이 아주 잘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시련을 만날 때 입을 다물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막 쓸데없는 입을 다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사람을 향하여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오직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고 하는 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시인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께 자신이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하는 신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자신이 지난 날에 잘못을 인해서 환난을 당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정결케 하시는 한 방법일 뿐 그 분이 나를 영원히 버릴실 수가 없는 분이시고 나도 그 분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그런 신앙이 그로 하여금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했다고 칩시다. 누구한테 가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사람이라고 합시다. 우리가 주님 앞에 안 가면 누구한테 가겠습니까? 우리가 더 큰 환난을 만났다고 칩시다. 더더욱 하나님이 아니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 분께로부터 응답 이외에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따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환난을 만나 사람, 기도하며 갖어야 할 확신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환난 날의 부르짖는 기도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4-15)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처럼 용기와 힘을 주는 구절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환난 날에는 나를 부르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우리는 도처에서 환난 가운데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린 수많은 신앙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만큼 인간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평안하고 평탄할 때는 주님을 찾지 못하고 또 찾아도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부르지 못했는데 환난을 당하고 나니까 마음이 많이 가난해져서 그래서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환난 날에는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다 그런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닥친 환난은 잘 하나님 앞에 하기만 하면 우리가 좀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한다.
시편 전편 속에 흐르고 있는 기도와 응답이라고 하는 사상은 이런 것입니다. 곤고한 자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니까 그 다음에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자기를 환난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선포를 통해서 곤고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에 응답해준 것은 한 사람인데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한 자랑스러운 선포를 듣게 되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환난에서 건져줄 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와 사랑을 깊이 알고 나면 꼭 사람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놀라운 사랑을 잘 열심히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있고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런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 의 선하심을 노래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처럼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날에는 하여튼 기도해야 합니다. 평범한 때에는 평범하게 기도하지만 특별한 환난의 때에는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밤이면 쉬고 배고프면 먹고 그렇게 지내게 되어 있는 몸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 생기게 되면 그런 원리를 깨트리면서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깊은 밤에 자지 않고 기도하고 그리고 고픈데로 먹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렇게 환난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그 매달리는 간구의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향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이제 하나님 한분을 향해 마음을 모으고 그 분께 자신의 인생 전체가 달린 것처럼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환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데 그 부르짖음이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그 무엇이 필요가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은 14절과 함께 이어지는 구절인데 거기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째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과 서원을 하나님 앞에 갚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환난을 당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원망하는 마음이나 아니면 괴로움으로 가득차서 차마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할 없을 정도로 패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환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태도가 환난 날에 부르짖는 그 기도 열심 이외에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은 기도의 깊이하고 관계가 되는 것인데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그 어려움 속에서 뭔가 간절히 부르짖고자 하는 마음은 생리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씩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이 어려움을 통해서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더 큰 환난을 만나고 내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 그 이상이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입니다.
사실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될정도로 환난을 당했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감사라고 하는 것은 결국 환경에서 오는 감사가 아니라 욥과 같은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환경에서 오는 감사가 아니라 환난 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 속에서 비록 환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라지지 않는 관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참된 위로와 평안,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경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결국은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하면 환난 날에 부르짖는 기도가 얼마나 깊이 들어간 기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만 소리치고 그 다음에 양적으로 많은 기도가 아니라 실제로 깊이 들어간 기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서원을 하나님 앞에 갚는 것입니다. 원래 이 서원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약속을 자신이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성찰이 필요한데 하나는 이전에 환난을 당했을 때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약속을 했는가, 또 이전에 평탄할 때에 어떻게 하나님께 약속을 했는가 이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원을 담보로 걸고 기도하는 것이 환난을 당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여러분들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이 환난에서 건져주시기만 하면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한번만 이 어려운 환난에서 건져주시면 내가 일평생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을 추구하면서 살겠습니다하며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그런 서원입니다. 그런데 뭔가 상황이 있어야지 그런 서원을 하지 이유가 없이 서원을 남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큰 축복 속에서 대게 사람들은 서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 나면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합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내게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이 큰 은혜와 축복을 늘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런 서원을 하게 됩니다. 그 서원을 갚으며, 그러니까 환난의 원인이 잘 들어보십시오. 이 이야기는 환난의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배신 때문이 아닌지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야 고난에는 자기의 죄로 말미암은 고난이 있고 자신은 전혀 죄가 없는데 욥과 같이 의롭게 당하는 고난이 있다고 우리가 흔히 분류하는데, 사실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고난은 사실 후자의 고난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자신의 잘못과 죄, 불순종 이런데서 오는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그런데서 오는 고난이니까 일단 고난을 당할 때에 자기 자신의 고난이 일반적으로 오는 고난일 수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욥과 같은 경우보다는 다윗이나 죄로 인해서 불순종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여타의 많은 사람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진짜 자신의 죄와 불순종, 내면에 있는 더러운 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데도 그 고난이 까닭을 알 수 없는 심오한 의미를 가진 고난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환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를 부흥하지 못하고 그 진창을 헤매는 것 같이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보면 하필이면 환난을 만났을 때에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
사실 환난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 앞에 서원을 갚을 여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물질을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이든, 뭐 진실한 삶을 약속한 것이든, 기도 생활을 약속한 것이든 무엇을 약속한 것이든지 간에 그 환난 속에서는 오직 그 환난에서 구출해달라는 기도 하나만을 감당하는 것도 힘겹고 버거운 일인데 하필이면 그 환난을 당했을 때 서원을 갚으리라 이 이야기는 결국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살았는지 그 신실함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환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구출을 받고 어떤 것들을 약속했는가. 그것을 지키지 못했더라면 분명히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과 같은 생을 살았을 것이고 그러한 그 불신실함에서의 돌이킴이 없이는 지금 환난을 당한 가운데 부르짖어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이 좀더 나은 삶을 가져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들 생각해보십시오. 환난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무엇을 간구하셨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약속할 때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리겠다고 다짐하셨습니까? 어떤 삶을, 그리고 어떤 의로운 인격의 열매를 어떤 섬김의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그것을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주 자연스럽게 만약에 그런 하나님과의 언약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담대함에서 기도가 추진력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환난 날에 나를 건져주셨지만 그때 약속한 서원을 갚지 못한 것, 내게 번영을 주셨지만 좋고 번영하는 그 날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갚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회개를 불러일으켜서 환난 날에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에 강력한 힘을 더할 것입니다.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우리의 기도는 그렇게 우리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그 반성 가운데 강력한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살았다면 이미 입증된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의뢰의 마음, 그렇지 못했다면 회개의 마음이 우리의 기도에 강력한 불을 더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난 날에 부르짖어도 기도의 진전이 없다면 오늘 이렇게 우리 자신이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서원을 갚으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여러분을 그 환난에서 건지시며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근심 시켜드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고난 중에 결단과 기도의 응답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편55:16-17)
고난을 당하는 시인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고난과 환난을 닥쳤을 때에 그때에 그가 먼저 결단과 확신, 그리고 기도에 대한 헌신을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는 그렇게 곤고하고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나는 주께 부르짖으리니” 하나의 결단입니다. 어떤 문제를 부딪혀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때 우리들이 그런 큰 어려움 속에서 그 어려움과 함께 고통하며 마음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기도하기를 결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꼭 환난이나 시련만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온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서 오게된 어려움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든지 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어려움 속에서 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이 어떻게 생겼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어린아이를 길러보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 감당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그리고 울면서 달려와서 품에 안기는 것은 엄마 품입니다. 엄마 아빠에게 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일은 저질렀지만 그러나 그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자기가 그 어려움을 해소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가와서 부모 앞에 호소하는 어린아이처럼 우리 인간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좋은 신앙으로 하나님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더 귀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일은 벌려났지만 자신의 힘으로 수습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호소하며 다가오는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멸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린 사람답게 그렇게 하나님께 깊이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 속에서 그는 제일 먼저 “부르짖으리니” 기도의 결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황은 이런 기도를 결단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우리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응답의 확신입니다.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부르짖으리니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신앙의 자세 가운데 하나는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이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나님께서 가장 슬퍼하시는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구원을 덜 의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간절히 기도할 마음을 갖게된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기도의 결단도 있지만 또 하나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 마음의 확신이 그로 하여금 구체적인 기도를 실천하도록 결심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기도를 허물어 버리는 가장 위험한 대적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이런 의뢰의 마음이 없이 하나님 앞에 건성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우리들이 이렇게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온전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하는 온전한 의뢰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뢰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기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욕망에 대한 고백일 뿐이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있는 기도라고 말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그 분께 늘 기대며 사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강력한 호소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의 위대한 힘은 부르짖는 고함소리나 육체적인 어떤 표현이나 이것 보다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 그리고 그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연합된 마음,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지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를 능력이 있게 하고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호소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을 환난 속에서 깊이 의뢰하였던 것을 우리들이 깊이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만 기도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신뢰하게 되는 것,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 이 모두 기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세워가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 보다도 풍부한 기도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그 분과의 어떤 인격적인 연합을 통해서 항상 그 의뢰하는 마음 속에서 사는 것이 그런 풍부한 기도 생활 속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는 구체적으로 자기가 기도를 실천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이것은 결국은 아침과 정오와 저녁,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자신이 환난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전적으로 기도 속에서 살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둘째날 아침에 말씀드렸듯이 이 사람이 이렇게 환난을 만나고 많은 어려움 속에 에워싸이고 있으니까 그의 근심과 염려, 걱정, 고통 이런 것들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어서 의식을 잃어버리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이런 어려움 속에 둘러싸인 가운데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으니까 그런 모든 염려와 고통을 기도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 아침, 정오, 저녁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실천을 스스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로 살겠다라는 추상적인 결심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를 이행하겠으며 그리고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서 산다고 말할 때 그 기도 생활의 표준이 어떤 것이다 하는 개인적인 규범을 만들고 그리고 거기 구체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그런 규칙을 세우고 자기 자신을 엄밀하게 점검하고 거기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그렇게 풍부하게 물 흘러가듯이 기도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도의 은혜가 풍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 속에도 역시 부패한 본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규칙을 정하지 않아도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충만함이 서서히 사라지고 마음 속에 있는 부패한 성향이 월등한 지배력을 갖게 되는 그 순간에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물 흘러가듯 기도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인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기도의 생활을 결심하고 그리고 그 기도 생활에 헌신할 것을 우리는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 될 때는 물론이지만 잘 되지 않을 때도 하나님 앞에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거기에 헌신해야겠다는 진지한 결심이 우리로 하여금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의 대적을 물리쳐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