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찾을 때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결핍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출15:23-25上) 2001.7.29 주일오전 1
2. 범죄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출34:9) 2001.8.5 주일오전 14
3. 본질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출34:9) 2001.8.12 주일오전 28
4. 절망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①(수7:6) 2001.8.19 주일오전 42
5. 절망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②(수7:10-11) 2001.8.26 주일오전 51
6. 갈급 할 때 만나는 하나님(삿15:19) 2001.9.2 주일오전 65
7. 징벌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대상21:7-8) 2001.9.9 주일오전 78
8. 사명 있을 때 찾는 하나님(대상28:9下) 2001.9.23 주일오전 89
9. 축복이 필요할 때 찾는 하나님(시24:5-6) 2001.9.30 주일오전 104
1.결핍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곳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출15;23-25上)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와 당신과의 관계를 상황을 통해서 확인하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인가 부족해서 결핍에 빠트리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부실한 관계를 확인하도록 만들어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도 예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각성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으로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가르시는 그 권능을 보면서 마른땅을 밟고 통과한 후에 광야 길로 들어서서 처음 경험한 끔찍한 재난의 시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재난은 다름이 아닌 광야에서 그것도 물을 구할 수가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오아시스라고 하는 것은 오늘 있다가 다음달에 없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있는 오아시스를 보면서 구약 학자들은 당시의 행적들을 추적합니다. 그렇게 오래된 옛날이 아니니까, 끽해봐야 한 3500년 전의 이야기니까. 긴 역사에서 3500년은 그렇게 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곳이 ‘아인 무사’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까 번역을 하자면 ‘모세의 샘이다’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넌 다음에 제일 먼저 정착한 곳이 아인 무사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착할 때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되니까 물이 없는 곳에 정착할 수 없으니까. 대게 물가에다 진을 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쉬면서 하나님을 찬송했고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서서 삼일 길을 행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장정이 하루에 열 시간을 부지런히 걸을 때 사십 킬로를 걷는다고 보니까 노인네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그 엄청난 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했으니까 이십 킬로를 걸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추측들을 합니다. 그러면 삼일을 걸었으니까 육십 킬로입니다. 거기에서 시작해서 광야 쪽으로 육십 킬로 반경에 있는 오아시스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인 호아라’라고 하는 오아시스입니다. 그들이 삼일 길을 지나면서 그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하면서 몰려갔는데 진을 치고 목마른 김에 물을 먹어보려고 했더니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쓴 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와 같이 땅을 파기만 해도 먹을 수 있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아무튼 먹을 수 없는 쓴 물인데 그곳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상황에서 이제 모세를 원망하며 대적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고 거기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응답을 받은 아주 간략한 사건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록은 간략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인 교훈은 매우 큰 것이고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행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이정표 하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율례를 세워서 그것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를 보시면서 이제 그들에게 축복하시는 법칙을 하나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조건 하나님 앞에 받기만 하던 신앙을 이제 끝내고 이제는 물이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을 계기로 해서 너희들이 나 여호와의 명에 순종하면 너희들이 이런 상황을 많이 만날텐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너희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복 주지만 그러나 너희들이 만약에 나 여호와가 세운 율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이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이제는 무조건적인 은총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큰 기적이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광야의 길을 행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점에서 이제 깊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어째든 오늘 여기를 우리들이 이 기사를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결핍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목회라고 하는 것은 원래 ‘토탈 미니스트림’입니다. 즉 교회 출석 하나를 보살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신앙뿐 아니라 신앙과 관련된 모든 인생의 문제를 돌봐주는 것, 그것이 목회라고 할 때에 한 사람의 신앙이 없어서 영혼이 갈급해 하는 것을 보는 것도 목회자로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그것 못지 않게 고통스러운 것은 그들이 경제적인 난관을 만나서 고통받는 모습들은 참 도움을 줄 여력도 안 되고 참 고통스럽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큰 낭패를 만나서 빚에 쫓겨 다녀보신 적이 있습니까? 직장을 졸지에 잃고 실직을 해서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한 위기를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업을 하는 것마다 실패를 하고 실직자와 다름이 없는 껍데기밖에 없는 일을 하면서 밑도 끝도 없이 계속해서 빚을 얻어서 그 사업의 뒤를 대지만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정도 상황은 좀 낫습니다. 더 지나쳐서 생계가 막막하고 아이들의 학비를 대지 못해서 눈물을 삼켜야 하는 가난의 서러움은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 문제가 인생에 있어서 결코 사소한 문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무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처음에야 신앙이 있으니까 신앙으로 이것을 극복해보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싸움이 너무나 길고 오래되면 사람의 마음도 인내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고통스럽고, 처음에는 그렇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이제 나를 인생의 곤궁한 지경에서 나를 버리셨는가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회의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많은 혹독한 시련을 당할 때 사실은 그런 시련과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참 좋을 것인데 그러나 신기하게 넉넉할 때는 그런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많았고 가족들도 허다했는데 오래 동안 가난과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 고통을 받아서 결핍 속에서 살아갈 때는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그럴까봐 무서워서 그런지 사람들도 슬슬 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에 밀려오는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좀처럼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 고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미루어볼 것 같으면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지 못하게 하는 적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집착과 사랑 못지 않게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의 초점을 흐려놓는 중대한 대적입니다. 그러니 머리가 가득하게 기울어져 가는 사업과 실직 상태, 혹은 돈이 없어서 고통받고 빚에 몰리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머리가 꽉 차고 가슴속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 찬 속에서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영혼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뵈우러 드나드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결핍의 시련을 만나게 될 때 그것이 잘 생각해보면 자기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가 하면 사업이 망한 사람들은 항상 가슴속에 피묻은 칼을 품고 있습니다. 그게 동업자일수도 있고 아니면 돈 안 빌려준 은행 지점장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물건을 가져가고 돈을 갚지 않은 거래처 사장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가 어려울 때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데 도와주지 않고 쳐다만 봤던 자기의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구일수도 있습니다. 그게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시련을 만나게 되면 신앙은 사라져도 원망할 사람은 가슴속에 남습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시련이 몰아닥치고 결핍 속에서 시달리던 때에 그가 마지막에 영혼에 위안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그것은 신앙이 있어야지 하나님이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그 누구를 생각하면서 복수심에 불타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에 결핍은 반드시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돈이 많고도 가정에 불화가 있는 가정이 물론 있지만 그러나 평범하게 보면 집안에 돈이 떨어지고 사업이 망해서 빚에 시달리면 가족들과의 관계도 깨트려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물론 그럴 때 가족들이 더 하나가 되어서 슬기롭게 극복하는 가정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 그것은 뭔가 특별한 세계, 신앙의 세계가 있든지 뭔가 특별한 세계가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그런 것입니다.
부부사이도 그저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때 원만해지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돈이 떨어지면 남편 구박하지, 사실은 구박한 것도 아닌데 남편은 자격지심에 ‘야 내가 돈도 못 벌어주니까 구박하는구나. 이놈의 세상’ 그러면서 속에서 솟아오르고 그래서 가정에 불화가 나고 그런 것이 아닙니까? 원망할 사람이 항상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아니 모세가 뭘 잘못했습니까? 모세가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그랬습니까?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이 너는 내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라 그럴 때 모세가 아이고 하나님 정말 기다리는 바이올시다 그랬습니까? 난 싫습니다. 서 너 번을 거절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신앙으로 거절한 것이 아니라 불 신앙으로 거절한 것이지만 모세는 이미 그 꿈을 접었습니다. 접고 이제 자기는 그것을 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미디안 광야에서 산소 같은 남자가 되고 싶었지. 뭐 그렇게 거기에 가서 그 백성을 끌어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누가 그렇게 등을 떠밀어서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아니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교회의 당 회장으로 불렀을 때 무슨 생활비를 약속했습니까, 퇴직금을 약속했습니까, 휴가를 주었습니까?
그렇게 해서 왔는데 그래서 그 애굽에서 바로와 싸우면서 그 온갖 고난을 다 치르고 또 홍해를 만나서 더 원망하고 대드니까 그냥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그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만들었고 그리고 오합지졸과 같은 그 백성들을 데리고 삼일 길이나 걸어서 그때 뭐 백성들은 물을 못 마시고 뭐 모세는 생수를 허리에 차고 마시면서 걸어왔습니까? 다 같이 고생하면서 걸어왔고 그리고 무슨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면 무슨 모세가 그 나라의 왕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데리고 왔는데 모세를 향해 원망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원망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 속에 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실한 사람들은 항상 사람을 향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다툼을 갖게 되고 호전적이게 되고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결핍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는 평범한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세상에 그 홍해가 갈라지는 그 큰 기적을 보고도 어떻게 삼일만에 하나님을 원망하는가 그렇게 말하는데 그것은 남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지구가 쪼개지는 기적을 봤다고 하더라도 목이 마른 것은 마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삼일을 물을 못 먹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삼일 동안 물을 못 먹어서 도저히 죽을 것 같은데 사일 전에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자식들이 목을 지어 뜯으면서 엄마 물 아빠 물 나 죽을 것 같애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사흘 전에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주셨는데 그것만해도 감사하지 무슨 물이냐.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태도는 사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늘 조심해야 할 것이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읽다가 보면 우리가 예수님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편없는 인간들이구나.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연약한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을 따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렇습니까?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고 이렇게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결핍 속에서 시험을 만나서 괴로워하며 사람들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그 지체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지만 사실은 그 모습이 우리의 옛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슨 해결이 있는가 해결이 없습니다.
이후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번 모세를 치려고 돌을 집어든 적이 있습니다. 죽일 것 같이 지도자를 향해 대드는 적이 있었는데 좋습니다. 모세를 원망했다고 칩시다. 마지막에 그 원망이 가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피묻은 돌맹입니다.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죽였다고 칩시다. 그래서 돌맹이에 피가 묻었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해서 그 결핍의 문제가 해결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어려운 시험을 만나서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원망하는 그 사람을 향해서 어느 정도는 잠재적인 복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소원대로 여러분들이 원망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그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사악한 인간 속에서 우러나오고 있는 악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지 해결이 된 것이 아닙니다. 결코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인생을 볼 수 있는 시야가 따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 시험과 고통을 보는 시야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고통이 오면 아파하고 그리고 좋으면 좋아하고 강아지하고 똑같습니다. 막 주인에게 덤벼드는데 다행히 그 주인이 개를 좋아해서 개를 쓰다듬고 안아주면서 과자라도 하나 주면 꼬리를 치고 좋아하고 그 집안에 온 사람이 개를 싫어해서 막 좋다고 덤벼드는데 어디 흙 묻은 발로 어디를 기어올라오는가 하고 발길로 한방 차면 꼬리를 감추고 ‘깨갱’ 그러면서 마루 밑에 숨어서 두려움에 떨 듯이 그런 반응을 보이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오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 안 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모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도 입증이 됩니다. 아니 홍해를 갈라서 바다 물로 벽이 되어서 서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마른땅을 통과하면서 지났습니다. 갈라진 벽 사이로 고기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바다를 건너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그까짓 것 마라의 물을 하나 달게 할 수 없었을까요? 또 마라의 물이 못 쓰겠다고 하면 새로운 샘을 하나 파서 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반석을 터트려서 생수를 내게 하신 하나님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방금 전에 그 놀라운 기적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신 것은 결핍 속에 잠시 있게 하신 것은 뜻이 계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인도하시는 기간동안 내내 그 이후로도 하나님이 한 법칙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종하면 축복을 주고 거스르면 환난을 만날 것이다. 이 법칙을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고 결핍에 처하고 시험을 만났을 때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실까? 그리고 이 시련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의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부족해지자 갈증이 나게 되었고 광야에서 물이 없이 지내는 고통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강력하게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향한 원망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원망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향해 원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반쯤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자기가 무엇인가에 실패하고 결핍으로 큰 고통을 받을 때에 하여튼 원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다가 복수심에 불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자신이 깨트려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을 계속 원망하게 됩니까, 아니면 다 내려놓게 됩니까? 내려놓게 됩니다.
뭘 말씀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사람을 향한 원망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관계를 반영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개가 함께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따로 존재하고 사람과의 관계는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치료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놀랍게 회복이 됩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에 보면 모세를 대하여 원망했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궁극적으로는 모세의 뒤에 있어서 모세를 통해 자기를 이끌어오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사건이 광야의 생활의 역사를 볼 때에 이 사건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딱 정신차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껏 까지 너희들에게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풀어서 그래서 여기까지 너희들을 인도해왔지만 이제 정신차려라. 여기는 애굽이 아니다. 너희들이 이제 새로운 표준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정신차려라. 그러면서 탁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 표준이 무엇인가 하면 순종하면 이런 어려움 속에서 너희들을 건져주겠거니와 순종하지 않으면 이런 어려움을 만나게 되리라. 탁 가르쳐주시면서 이제 응석을 부리는 어린 시절은 지났다. 그리고 이제 정신 똑바로 차려서 지혜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 광야의 길에서 너희에게 주어질 훈련들을 감당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여기에 기념비적인 사건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종 모세를 지극히 원망하며 대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랜 세월동안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시험 속에서 싸워오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들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도움도 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바뀌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고 고도의 도덕성을 갖추신 말하자면 거룩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는 여러분들이 열심히 기도를 해도 여러분 자신이 어떤 사람이지를 단지 열심 있는 기도 하나만으로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섬기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모습들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부실한 관계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살아가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확하게 점수를 매기고 계시고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축복과 은혜들은 바로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러분들이 그렇게 무엇인가 결핍과 어려운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동시에 그런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정에 변화가 오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대속 제물로 주셔서 여러분들을 구하신 하나님은 이미 그것으로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당하고 있는 결핍이나 시련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보다 더 어려운 시련의 길, 고난의 길속에서도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큰 능력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당하고 있는 많은 시련과 고통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보호하시지 못하시는 데서 오는 환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 결핍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직하게 돌아보고 그분의 얼굴을 뵈옵는 영혼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 시련의 때를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에게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까지 사람을 원망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서 골몰해야 하고 열중해왔던 모든 노력에 십분의 일만이라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결핍과 시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려고 힘쓰고 주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매달렸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그 큰 시험에서 오래 전에 벗어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원망했습니다. 이 원망이라는 마음의 작용은 단순한 결핍과 시험만으로는 이런 원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 원망의 마음은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 생겨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큰 시련을 당해도 가족들 속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동안에는 그 시련이, 시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가족들의 관계가 더 끈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운명 공동체라고 하는 것을 더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그렇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런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난하고 병들고 그리고 진짜 어려운 시험을 당하고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자기에게 느껴지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우리가 한번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한번 이렇게 돌아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이 내 인생에 전부라고 고백했던 때가 항상 푸른 풀밭을 걸어 다니는 것 같은 인생에 평화로운 시기에서만 하나님을 그렇게 고백했던 것은 아닙니다. 폭풍과 시련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몰아쳐서 정말 눈을 뜰 수 없는 시련 속에서도 우리들이 얼마든지 하나님과의 이런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왔고 또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이 신앙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다라는 것을 우리들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있고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사랑 받는 존재라고 하는 깊은 확신만 우리에게 있다면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보았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러나 삼일 길에 물이 떨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결핍 속에서 자기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얼마나 부실했는가 하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경제적인 시련을 만나고 결핍 속에서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원망하고 마음에 독한 마음이 있고 그리고 무엇인가 사람을 향해서 깊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아직까지도 품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서 그 시련과 결핍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껍데기밖에 없고 얄팍한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한없이 물질로 축복하셨을 때에 그가 과연 물질적인 축복 속에서 하나님을 주로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부요함과 평화로움은 타락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인가 사람을 향해서 원망을 하고 있다. 결핍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은 그 결핍과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그 인격적인 관계가 얼마나 부실하고 얄팍한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 그분이 그런 결핍과 시련 속에서 여러분들을 두실 때에는 하나님이 뭐가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시험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인 축복 이상 더 필요한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의 판단이고 우리 주님의 판단은 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너무나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단지 물질적인 회복이 아니라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일시적으로 물이 없는 것 같은 그런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 두시면서라도 당신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대부분 이렇게 결핍과 많은 시험 속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이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어째든 간에 경제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 결핍으로부터이기는 방법입니다. 명예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고 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해결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당신 자신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맥락에서 볼 수 있게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핍과 시험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하나를 기억해야 하는데 무엇인가 하면 급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급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져주시고 그 영혼에 내리시는 복된 축복에 은총들을 풍부하게 경험하면서 살면 물질이 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바꾸시면서 상황들을 고치시고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재 권을 인정하고 결핍에 처하고 시련을 당할 때에는 그 시련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왜 이렇게 오랜 시간들이 흘렀어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나는 고통을 받고 고뇌하고 있는가. 이 문제 앞에서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태도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물질의 문제를 떠나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씨름을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정 반대된 태도로 이제 두 번째로 모세의 태도를 보면 확실한 메시지를 우리들이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에워싸고 모세에게 독한 말을 하면서 원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 원망을 할 때에 모세는 그 원망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더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내가 있고 싶어서 여기에 있는지 아냐. 나도 안 가겠다고 계속 그랬는데 하나님이 보내서 왔는데 너희들이 나를 싫다고 그러면 나 사표 낼게. 그리고 지금이라도 사표를 집어던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또 감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이 세우신 종인데 나한테 대들어. 애굽에서 내가 한번 손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봤지. 한번 들어. 이 지팡이가 보여.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어느 개척 교회를 하는 목사님이 교인도 열 몇 명 모이는데 재정 집사를 하나 세웠는데 목사님께 깐죽깐죽 대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한방 날렸는데 옥수수가 네게나 나갔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열을 받았으면 그렇겠습니까. 모세도 인간이고 다 인간인데 결국 사람들은 어떤 일정한 시련의 상황이 오면 다 유별나게 반응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 비슷비슷하게 반응하면서 삽니다. 좋으면 좋아하고 싫으면 싫어하고 칭찬 받으면 우쭐해하고 남들이 꼬면 복수심에 불타고 근심이 생기면 좌절하고 비슷비슷합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대들면서 왜 우리를 이런 데로 알지도 못하고 데리고 왔는가, 저쪽에 가면 오아시스가 있다는데 왜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왔는가 하며 별의별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보면 모세의 대꾸가 한마디도 안 나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향해서 막 원망할 때 눈을 감고 장님이 된 것입니다. 귀를 막고 귀머거리가 된 것입니다. 입을 꽉 다물고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할말은 많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채 독한 원망의 말을 퍼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과 상대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겸비하게 자기가 당한 상황을 털어놓는 것이 지혜롭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어떤 기도였을까요?
광야 길에 들어서 처음 당하는 시련이었습니다. 바로의 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천지가 개벽하는 재앙이 퍼부어질 때에는 하나님 다음으로 떠받들던 인간들이 목이 마르니까 이번에는 모세를 자기 종처럼 생각하며 대들고 원망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 하나님의 사람 이 모세가 주위에서 들려오는 그 수많은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모세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나를 원망해도 문제의 해결은 이들의 원망에 있지도 않고 이 원망을 상대해주는 자신의 대응에도 해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문제 해결은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 라고 하는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간절히 엎드려서 아버지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결핍과 시련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믿음의 생존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십시오. 무슨 기도를 받으러 다니고 또 무슨 기도를 받으러 다닙니까. 직접 여쭈어보면 됩니다. 그래서 직접 하나님을 대면해서 내가 오늘 왜 이런 결핍과 시험 속에서 이토록 긴 세월을 보내야하는지 내가 하나님께 여쭈어보리라.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엎드리며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당한 상황을 그대로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의 문제가 무엇인가, 나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이제껏 까지 더 크고 어려운 시련들도 하나님의 능력과 편 팔로 하나님이나를 건져내셔서 이제껏 까지 주님을 믿는 증거를 싸워오면서 살아오도록 만들어주셨는데 이까짓 결핍과 시험 앞에서 무너질 수 없을 텐데 이런 시련들이 이렇게 오래도록 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내 사업은 자꾸 기웁니까? 왜 내게 찾아오는 경제적인 곤궁함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내가 정확히 깨닫고 이제껏 고칠 수 없는 부분일지라도 이번에는 내가 하나님 앞에 고쳐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기쁨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나아가면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우리의 문제를 안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내가 부딪칠 이 고통의 문제만 해결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백 날이 가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절대 안 그렇습니다. 10, 20, 30, 40년을 동일한 시련 속에서 살다가 눈을 못 감고 죽는 신자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련 속에서 받는 그 고통이 하나님의 은총과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참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고 무릎을 꿇는 겸비한 마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핍과 시험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일입니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길어올 특공대를 조직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근에 있는 동리를 습격해서 우물을 뺏을 생각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보기에는 가장 관계없는 일에 지금 종사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막 욕하고 모세 물러가라고 원망을 하는데도 그는 가장 미련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리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결핍과 시련 속에 살아왔는데 우리가 기도를 안 했겠어요? 기도를 안 했을 리가 없습니다. 사업이 무너지고 실직 상태로 들어가고 직장이 흔들리고 가정 경제가 위기에 몰려갈 때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모두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때에는 일반적인 기도를 가지고는 응답을 안 해주십니다. 특별한 때는 무슨 기도를 해야지 되는가 하면 특별한 기도를 해야지 됩니다. 창조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배고프면 먹는 것이고 어두워지면 불끄고 자는 것입니다. 아침이면 일어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특별한 때는 일반적인 창조의 섭리도 거슬려야 합니다. 자는 시간인데도 기도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먹어야 할 때인데도 금식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할 기운이 없는데도 일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할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일반적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미 벌써 모세가 그렇게 혈기 충천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결국은 일생동안 완전한 성화가 안 되었습니다. 완전한 성화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화 자체가 불안전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질을 가지고, 하여튼 약점이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왜 그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역사에 길이 남는 지도자로 쓰임 받을 수 있는지 근본적인 싹을 이미 처음 시험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들이 물이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대안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결정적인 시점에서 이것은 단지 물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을 시작하는 첫 걸음마에 뭔가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감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매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어여쁘게 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지 아십니까? 물론 우리들이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교회가 곤궁하고 어려울 때 지체들이 가난할 때 돕는 물질적인 섬김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많은 인정하심을 받고 귀여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있는데 그것은 마음을 깨트리고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시련을 만나고 고난을 당하는데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기를 이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이라고 증거 합니다. 그랬는데도 그 시련과 고난이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이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고난이 무엇으로 말미암은 고난이고 시련이 무엇으로 비롯된 시련인가 상관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매달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 기도의 마음을 보시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오래 동안 결핍과 시련 속에서 견디기 힘들게 살아왔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 이번에 여러분들이 한번 결단을 하고 아버지 앞에 이 상황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기를 나는 당부하는 바입니다. 수련회를 앞두고 이런 권면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것은 우리 열린 교회 수련회가 단지 수양하기 위한 수련회가 아니라 하나님 만나러 가는 수련회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제가 마음놓고 여러분들에게 권면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제껏 까지 견디기 힘들도록 지속되어 온 이 결핍과 시험 속에서 나를 한번 건져주시옵소서. 나에게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한번 베풀어주셔서 이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고 아버지 앞에 다시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한번 간절히 기도해서 수련회에서 주님 만나고 문제 해결을 받아서 경제적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형통하게 하는 축복, 그리고 시험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회복하는 복된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물 없는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실 기도할 때 모세가 하나님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 그 계산 속에 있었습니까? 그런 것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 보다 자기가 더 잘 압니다. 이렇게 도와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몰라서 잘 안 도와주시니까 친절하게 가르쳐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이렇게 오셔서 이렇게 도와주시면 그러면 이렇게 문제가 해결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몇 년 동안 말씀을 드리는데 계속 이해를 못하시는데,
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고 급한 바람 불어와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퀴즈를 냈다고 칩시다. 이제 맛 애굽의 병거가 쳐들어왔는데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막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저의 기도에 꼭 응답해주시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결이 될까?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난 알아. 뭔데 물이 갈라질 거야. 그렇게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왜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말할 수 있지만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옛날 경험에 의존해서 낸 통계학적인 자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모세야 저기 나무 있지,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네. 갖다가 집어넣어라. 그것을 갖다가 집어넣으니까 물이 달아졌습니다. 이것을 놓고 어떤 학자들은 폐루나 인도, 미국 같은 곳에 플로리다 같은 곳에 가면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껍질을 까서 집어넣으면 해독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쥐약을 먹고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먹으면 그러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녹두를 갈아서 그 물을 입을 벌려 집어넣었습니다. 개도 그렇게 하면 살았습니다. 해독 성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무에 그런 성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말도 안 되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서 너 명이 먹을 물이라면 그 나무 한 그루 가지고 해결이 되겠지만 수십 만 명이 먹을 그 물에 나무에서 해독 성분이 나오면 몇 그릇이지, 수십 만 명이 먹을 그 엄청난 물을 어떻게 해독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마치 구리 뱀을 높이 들었을 때 구리뱀과 병이 나은 것이 아무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이었듯이 그 나무를 갖다가 집어넣은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상징적인 행동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물을 정화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던 일입니까? 저렇게 모세가 엎드려 기도하면 아마 나무 하나 캐오라고 그렇게 하실 걸 이렇게 생각했겠습니까? 모세도 생각 못했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도 생각할 수 없었던 방법입니다. 하나 아는 것은 ‘뭔가 우리들이 분명하게 해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이다’ 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죽이려고 목에 칼을 대었을 때도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칼을 대면 하나님이 아서라’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칼을 대려고 하는 순간에 ‘내버려두어라.’ 하나님이 그럴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죽여도 어떤 방법인지 모르지만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그 사이에는 논리적인 추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하나님만이 아시는 해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간절히 기도하면 10년 넘게 여러분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주셔야 되겠습니다 라고 하는 정통적인 여러분들이 기도를 뒤엎고 혁신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작년 이맘때 얼마나 마음이 가난했습니까? 이 교회당을 사야 하는 문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동안 기도해왔습니다. 이 교회당을 사게 해달라고 그런데 결렬되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큰일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곳을 우리에게 안 주실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2년 동안 있으면서 한번도 여기에 한 2-3년 동안 있다가 이까짓 것 집어치우고 크고 넓은 땅을 사서 큰 교회를 지어서 이사를 가야지 되겠다는 식으로 생각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목회자인 제 자신이 없으니까 여러분들은 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놀랍게 이것을 포기하고 엉뚱하게 여러 날 동안을 고민하게 만드시고 기도하게 하신 후에는 전혀 우리들이 상상치도 못하였던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해오셨습니다. 어째든 간에 이제 8월 안으로 거기 이제 말뚝 박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12월 안에 교회는 지어집니다. 어떻게 빨리 짓나. 그것은 묻지 마십시오. 하여튼 지어집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처음에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해주셨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해결해주셔서 무슨 문제가 된 것이 있습니까?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다 해결을 하나님이 시켜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으셔서 작년에 이곳을 계약하고 샀다면 지금 이자를 갚느라고 정신 못 차리면서 허덕 허덕대면서 한편으로는 이제 좁아서 못살겠다 그런 말까지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나중에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돌 머리들이 말이지 이런 결정을 했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들이 이미 만들어 가지고 있는 모범 답은 하나님 이렇게 오셔서 이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세요. 이렇게 생각했던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전혀 정답이 아닐 수 있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보다도 훨씬 뛰어난 방법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그런 것들을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결핍과 시련 속에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나를 어떻게 변화되라고 원하실까? 그리고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 시련과 고통의 종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내가 이제 더 이상 이런 부끄러움과 고통 속에서 남은 인생을 보낼 수 없다. 내가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을 뵈러 벧엘로 올라가는 심경으로 가야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제껏 실패를 숙명처럼 알고 살아왔던 여러분들의 굴복하는 삶의 멍에를 끊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결핍과 시험의 문제를 해결해주셔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고 입에 하나님을 향한 불평을 머금었던 그 자리가 변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의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송축하는 그런 복된 자리가 되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수련회에서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새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범죄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출34:9)
지난 시간에 우리는 결핍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을 만나야 한다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구해야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의 압제로부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나올 때부터 시작을 해서 홍해를 건너고 마라의 들판을 지나고 그리고 많은 난관을 겪으며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만나로 배를 불리기도 하고 메추라기로 고기를 삼기도 했습니다. 물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원망하다가 물을 마시기도 했고 하는 이런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리고 아말렉을 만나서 고통을 받는 전쟁의 위기도 겪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외부에서 오는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는 이 시련은 이제 내부에서 일어나는 시련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서 시내 산에 하나님의 말씀, 즉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세 대신 아론을 지도자로 하여 많은 백성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론은 지도자로서는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날이 지나도 모세가 내려오지 아니하자 그들은 아론에게 항의하기를 모세는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신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이방의 신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신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 동기가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서 섬기겠다고 하는 것인데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매우 싫어하셨고 미워하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구약에 있어서 여호와를 믿는 종교의 고도의 영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모든 선진한 나라들이 보이는 우상에서 자신의 신을 형상화했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신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쳤지만 하나님은 그런 형상을 통해서 자기를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정확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어떤 분인지를 알아 배워나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들이 신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금은 패물을 빼어서 바쳤고 그리고 그것들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 앞에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뛰놀며 일종의 축제를 벌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매우 슬픈 우상 숭배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우상 숭배지만 하나님이 지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려가 봐라. 그리고 너는 가서 봐라. 어떻게 네 백성들이 되었는지 봐라. 이제 우상을 만들어놓고 저렇게 섬기고 있는데 난 도저히 못 참겠다. 그리고 이 백성을 다 쓸어버리겠다. 그리고 모세 너를 두 번째 아브라함으로 삼아서 그래서 너를 통해서 퍼지는 그 씨앗들을 내가 새롭게 선택된 민족으로 삼아서 그래서 내 나라를 위해서 내 명예를 위해서 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구합니다. 마지막에 32장에 가서는 생명 책에 기록된 자기의 이름을 걸고 만약에 이 백성들을 용서해주시지 아니하시려거든 생명 책에 기록된 내 이름을 지워서 나도 이 백성과 함께 지옥에 가게 해달라고 그런 의미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이 간절하고 열렬한 모세의 중보 기도에 하나님께서 일단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전해주신 그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가라. 내가 너희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내가 약속을 지키마. 가라. 내 사자, 즉 천사를 너희 앞에 보내어서 가나안까지 너희를 인도할 것이고 그래서 그 땅을 너희들이 차지하도록 내 천사에게 명령해서 도와주마. 그렇지만 나는 너희들과 가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시 전까지 타락하던 그 모습과는 달리 놀라운 영적인 각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나자 그들은 깊이 뉘우치며 회개하고 또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단장품들을 다 제해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니 이제는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 관심이 있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다 벗어서 내려놓고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의 은혜를 구하는 놀라운 영적인 각성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실로 오랜만에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민족에게 찾아온 위기를 이스라엘 공동체에 찾아온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즉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좋지. 그런데 거기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그 모든 싸움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할지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가시지 않는데 가나안 땅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면서 자신들이 지은 죄를 인해서 슬퍼하고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세워놓은 회막이라고 하는 곳에 나와 무시로 기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놀라운 회개와 영적인 각성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 모세는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이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다시 이 백성과 동행해주시고 이 백성을 하나님의 족속으로 여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가나안이 문제가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주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이 백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이 백성을 그저 백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지만 그러나 용서하시고 그래도 너희는 내 백성이다.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명을 걸고 모세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알았다. 모세야 알았다. 내가 가리라. 내가 친히 너희와 함께 가리라. 그랬더니 모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치지 않고 더 기도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합니다. 하나님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이 꼭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확신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 지은 우리의 죄가 너무나 크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버리셔도 우리는 할말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의 징표가 필요합니다. 보다 더 분명한 확신을 우리들이 갖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랬더니 하나님이 나의 선한 형상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할 것인데 나를 보고는 살 자가 없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내가 너의 앞을 지나가리라. 그리고 이것이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는 표징이니라. 이런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표징까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34장에서 하나님, 이제 다시 십계명을 내가 써주마. 돌 판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하고 인자하며 노하기를 더디하지만 그러나 형벌을 받을 자에게는 반드시 그 죄를 면죄하지 아니하고 징벌하되 삼 사대까지 이르기까지라도 징벌하시는 하나님이로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공의를 함께 이 사랑하는 모세에게 생각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때에 이 모세의 그 유명한 기도가 오늘 9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같이 한번 읽으시다. 시작.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시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아멘 눈이 잘 안보여서 그렇습니다. 양해하십시오. 그러면서 아까 했던 꼭 같은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앞에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구합니다.
여기는 너무나 많은 진리들이 있어서 앞부분만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앞부분에 이렇게 말합니다. “가로되 주여 내가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그랬습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께 은혜 받은 사람입니까? 이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오늘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는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야. 그런 뜻이 아니라 여기에서 은총을 입었다 라고 하는 것은 피동태 인데 나는 공로가 없는데 하나님이나를 특별히 사랑해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자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그 은혜를 입은 자가 맞습니까? 나는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이나를 깊이 사랑해주셔서 분에 넘치는 호의로 나에게 너그러움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사랑, 내가 그런 사람이 맞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 맞지요?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입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행해주시기를, 그들의 악과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기업으로 여겨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이 다음에 알아보더라도 우리들이 여기에서 하나 중요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 한가지를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 받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모세가 하나님 내가 주님께 은총을 받은 사람 맞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주님께 이 상황에서 해야될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로되, 원컨대 하며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에는 반드시 사명이 뒤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이 일은 기쁜 일인 동시에 또한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몰랐을 때는 짐승처럼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해드리면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자기의 생애에 있어서 지축을 뒤흔드는 그런 놀라운 신령한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은혜를 가지고 평생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끊임없이 그런 은혜를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사는 진실한 섬김, 그 사명대로 살아가는 진실한 순종하는 생활이 없이는 그가 아무리 생애 적인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한번 받은 그 은혜로 일생을 순결한 삶을 산다라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면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서 너 명만 우상 숭배를 하고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아론까지 머리로 해서 온 백성이 일심동체가 되어서 거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행하고 범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되 나는 이제 이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모든지 다 주더라도 나는 이제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싫다. 나는 이제 그들이 내 백성이 되는 것이 싫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모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하나님이 애굽에서부터 종살이하는 그들을 건져내셔서 나올 때까지 보여주신 그 호의와 사랑,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자비가 얼마나 컸습니까? 목마르다면 샘을 터트려 물을 주시고, 배가 고프다면 만나를 주시고, 고기가 먹고 싶다면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고, 전쟁이 벌어지면 이기게 해주시고, 어두우면 불기둥을 비추시고, 뜨거우면 작렬하는 태양의 빛을 두터운 구름으로 막아 행로에 지치지 않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이런 반역으로 배신하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모세가 분노하는 마음을 가질 뻔합니다. 그런데도 이 모세는 하나님을 옳고 이 백성들은 잘못 되었는데도 하나님 앞에 이 백성들을 두둔하며 이 백성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자신의 생애를 드리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세는 자기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기의 이름까지 걸고 이 백성 없이 천국에서 홀로 살며 지옥에 고통 하는 내 백성들을 보니 차라리 주님이 맡겨주신 이 백성과 함께 지옥에서 함께 버림을 받겠습니다 라는 유보적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모세는 혈기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아까도 본 것 같이 그는 그 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그 거룩한 돌 판을 던져서 깨트려버렸습니다. 이런 혈기왕성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하나님께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들조차도 뉘우치지 않는 이 죄를 짊어지고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아버지 앞에 기도했습니다.
사실 모세는 이 우상 숭배의 죄와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히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 아버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고 싶어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모세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마치 자기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버림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아버지 앞에 매달리며 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가슴이 에어질듯이 자기의 백성들의 이름을 끌어안고 아버지 앞에 통곡하고 침식을 잊으며 기도하는 이 모세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가 언제 그렇게 큰 광야 교회 당 회장이 되겠다고 아버지 앞에 기도했습니까? 많은 사례금을 받았습니까? 무슨 영화를 누렸습니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애굽의 왕국에서 편히 지낼 수 있는 모든 인생의 안락함을 반납했습니다. 그리고 사명대로 산 그날부터 시작해서 이제껏 까지 고난은 그의 친구가 되었고 시련은 그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삶도 없고 휴식도 없는 분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잘못 아닌 잘못이 그에게 있다면 오직 하나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를 찾아오실 때 그때는 이제 민족 해방의 꿈을 모두 접고 미디안의 광야에서 짐승의 똥이나 치며 살던 이름 없는 목 부였습니다. 모든 꿈을 접고 포기하고 노인네로서의 목 부의 삶을 남의 나라 땅에 얹혀 살아가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불붙지 않는 임재로 오셔서 그에게 내 백성을 건져내어 달라고 부탁하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 그 일이면 제게 맡겨주시옵소서 그렇게 말했습니까? 오만 방자하게도 싫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는 아마 모세의 마음속에는 옛날에 내가 내 백성 건져내기 위해서 애쓰고 애굽의 병사들까지 때려죽이면서 그렇게 내가 혈혈단신으로 몸부림칠 때는 쳐다 도 안 보시더니 이제 와서 뭘 나에게 그런 것을 부탁하십니까. 나는 이제 다 늙었고 애굽의 학문도 다 잊혀졌고 이제 옛날의 사십대의 모세가 아닙니다. 그런 원망이 그의 마음속에 서려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독한 마음을 품고 대들면서 난 싫어. 난 못 가. 왜 나를 보내려고 그래. 난 안 갑니다. 내가 가면 그 사람들이 따라오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언감생신 대들면서 그렇게 못 되게 굴었습니다.
만약에 엄위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비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단칼에 모세의 목을 쳐서 정리하셨어도 시원치 않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바로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강하게 붙들어서 그래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서 은혜를 입게 하였고 그래서 모나고 모자라는 것이 많고 혈기왕성한 모세, 변화되지 않은 모세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지 아니하시고 그 사람을 고쳐서 변화시켜서 사용하려고 애를 쓰셨던 것입니다. 그런 은총을 이 모세가 경험하였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서라기보다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자기도 그렇게 하나님의 일체 오래 참으심을 힘입어서 그 오래 참는 사랑과 은총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고임을 받아서 수많은 결점과 강포한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 섬기는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자기도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오래 참으면서 그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빚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빚진 사람들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진 빚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아직도 나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그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내가 복음에 빚진 자로다. 유대인에게도 그리고 헬라인에게도 나는 복음에 빚진 자다. 그들에게 뭔가 갚아야 할 부채가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유대인이 뭐 도와준 것이 있습니까? 헬라인이 보태준 것이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해준 것이라고는 그가 예수를 믿을 때에 박해하고 그를 핍박해서 몹쓸 사람으로 만들고 그를 향해서 도전한 것 이외에 유대인들이 보태준 것이 없었습니다. 헬라인들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 도와준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가는 곳마다 헬라인들로 인하여서 박해를 받았고 유대인들로 인하여서 그는 고난으로 가득 찬 시련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감격도 있었지만 그러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돌에 맞고 버림을 받는 고난의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헬라인들이 행한 짓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빚진 자로다. 헬라인들에게 또 유대인에게도 빚진 사람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에 빚진 자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이처럼 하나님께 빚진 사람들이고 동시에 나만도 못한 수많은 지체들, 지금도 주님의 이름을 모르고 주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항상 그 은혜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큰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늘 진실한 사람으로 거명하기를 기뻐하셨던 아버지의 사람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을 때에 성신의 권능에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세 번이나 기름부음을 받았고 기름부음을 받을 때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에 자기를 위한 인생이었습니까? 그래서 그의 인생이 개인적으로 행복한 생애였습니까? 그는 아마 그런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충만한 은혜를 입지 아니하였더라면 잘 나가는 왕궁에서 수많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지 않는 특별한 사명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제왕으로 좋은 음식을 먹으며 그리고 호의호식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영혼은 항상 외로운 순례의 길을 홀로 걷는 순례자의 여정과 같았습니다.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자기의 왕궁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바라보며 언제나 가슴을 찢으며 한 나라의 제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한 마리의 상처받은 양처럼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바로 이 사람도 그런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랬는데 이 사람이 은혜를 입고 평탄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가시밭길의 생애를 120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교우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생애에 안식이라고는 없었고 쉼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좋은 휴가도 그리고 호화로운 생활도 단란한 가정의 생활도 그에게는 모두 남의 일이었습니다. 분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 남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생각해보십시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기이한 사람이었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여 한번 설교에 헤롯도 두려워 떠는 설교의 권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래서 그의 생이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그래서 그의 생이 자기의 것이 되었습니까?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며 분투하면서 살았지만 그렇게 목숨을 다해 주를 위해 산 마지막 결과는 악한 헤롯의 칼에 목이 떨어져 소반에 바쳐져서 어린아이에게 주는 선물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은혜를 받기 원합니까? 컬컬하니까. 왜 은혜를 받기 원합니까? 힘드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더 힘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더 힘겨운 길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후서 1장에서 노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쫓아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거라. 무슨 뜻입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데 그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께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능력의 정도만큼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어제도 어느 지체가 저에게 홈페이지에 편지를 하나 올렸습니다. 교회를 아주 사랑하는 지체입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서 너 번을 읽고 그냥 지워버리려다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시간을 앉아서 편지를 원고지 90장을 썼습니다. 한번 들어가서 읽어보십시오. 그 지체의 그 안타까운 호소는 이런 것입니다. 열린 교회가 변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변해가고 있는가 하면 이제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사님도 옛날의 목사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가. 사람들이 가난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려도 정말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지 하는 그런 간절한 사모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옛날에 열린 교회에 왔을 때 안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말은 백 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 개척할 때 굉장히 힘들었는데 힘들 때를 생각하라고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 말하는데 안 힘들었습니다. 뭐 알고 이야기를 하십시오. 아니 진짜입니다. 위선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안 힘들었습니다. 저 훨훨 날라 가서 다시 개척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안 힘들었습니다. 왜 그런지 설명해드릴까요? 지금이 훨씬 더 괴롭고 힘듭니다. 왜 그런지 설명해드릴까요? 7년 전에 교회를 개척했을 때 일주일이면 서 너 번 새벽 기도에 나와서 물을 퍼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못났습니다.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지하실이었는데- 물에 풍덩 들어갔습니다. 무릎까지 물이 빠졌습니다. 그러면 빨리 물을 퍼내지 다리를 들고 새벽 기도를 하고 주기도문을 하고 물을 퍼냅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만약에 감전이라도 되면 우리 모두 죽는 것이었습니다. 참 지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을 펐습니다. 그렇게 하고 들어가면 독특한 지하실의 썩은 냄새, 그리고 눅눅한 그리고 화장실 앞에 지나가면 노래방처럼 빨간 비닐이 깔려있는 그 계단을 지나서 그래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사람들이 사당 사거리에 와서 열린 교회를 찾다가 못 찾고 빨간 벽돌로 지은 큰 교회가 있는가 찾다가 못 찾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 교회는 없었습니다. 세우지를 않았는데 그런 교회가 왜 있겠습니까. 교회를 찾으려면 돌아다니면서 뜻을 정해서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후미진 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와서 등록하는 사람들은 진짜 쉽게 이야기하면 인생 막판까지 와서 여기서 하나님 못 만나면 내 인생이 끝이다 그랬기 때문에 지하실이라도 좋다. 목사가 유명하지 않아도 좋다. 못 생겨도 좋다. 물이 나와서 물을 퍼도 좋다. 좁아서 비기고 앉아도 좋다. 삼십 센티 앞에서 설교자의 침의 세례를 받으면서 설교를 들어도 좋다. 그리고 등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회가 어렵다고요. 물론 개척 교회니까 넉넉하게 교수 생활하다가 작은 생활비를 가지고 살려니까 힘들었지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삼 시 세끼 먹고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힘들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그때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와서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예배를 드릴 때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하는지 소외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말씀만 들으려고. 예배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당연히 예배가 은혜에 넘쳤습니다. 설교의 자유함도 있었습니다. 몇 시에 끝날까 하며 시계를 보고 지금처럼 한시가 넘으면 마음이 조급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2시간 40분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주일 낮 예배를 2시간 20분까지 설교하고 심지어 사경 회일 때는 4시간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바쳐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 중에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으면서 울기 때문에 설교를 계속 할 수가 없어서 좀 절제하라고 진정을 시키고 설교를 해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것에 비하면 오늘날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교회에 오게 되었는가. 그러면 대부분 똑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방송을 듣다가, 혹은 책을 읽고, 혹은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 못 만나면 죽을 것 같아서 모든 것 다 뿌리치고 왔습니다. 수 십 년 다니던 교회,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를 옮기기 위해서 이사를 오고 엄마 아빠가 다니는 평화로운 교회를 다 팽개치고 혼자서 집에서 욕을 먹으면서 등록한 형제 자매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하면 새 가족 환영회 때도 어떻게 교회를 등록하셨습니까 하면 빨간 지붕이 예뻐서, 어떻게 우리 교회에 등록하시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시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요. 11시에 늘 맞추어서 가다가 늘 늦으니까. 그런데 여기는 15분이라고 그러니까 쏙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다가 몇 번 드리다가 너무 편리해서 왔습니다. 또 어떻게 왔습니까? 교회가 가까워서, 또 어떻게 왔지요? 사람이 많으니까 숨어서 신앙생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당이 예뻐서, 열린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교회가 너무 짜임새가 있는 것 같아서, 예배당이 환해서, 새 가족 반 시스템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이런 사람들이 옵니다. 사실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럼 저기다가 바리 케이트를 하나 쳐놓고 목에 칼을 대고 제대로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지하실이라도 올 것인가. 그렇게 해놓고 하나씩 받아줄까요? 그것이 정말 힘겨운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런 지체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더 심각해지리라고 봅니다.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2시까지 설교해도 내 설교가 안 끝났다. 내가 설교할 내용이 아직 안 끝났다 하면 나는 그냥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는 하고 싶은 설교를 다 했을 때 끝났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접습니다. 다음 주에 마저 해야지 하고 접습니다. 왜 누구 때문에, 하나님 만나고 변화되어서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빨간 지붕이 예뻐서 등록한 그 사람 때문에, 왜 오늘 하나님 앞에 은혜를 못 받는다고 해서 그 영혼이 영원히 변화를 못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한번 설교를 듣고 뒤집어지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의 군사로서 살아가겠다는 사람들만 가득하고 그리고 그렇게 연약한 지체들은 모든 은혜 받은 지체들이 교회에 무거운 짐처럼만 느낀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어디 교회이겠습니까 소금 창고지. 그것이 어디 교회입니까 조명기구 상가이지. 그렇습니다. 한때 하나님 만나고 변화 받아서 불같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고 그런 교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와서 저 끝에서 꺼덕이고 다리 꼬고 조는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어떻게. 그리고 한때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정말 이 교회당 문을 들어설 때 그리고 이 교회에 내가 등록하겠노라고 등록 카드를 쓸 때 그 직전에 하나님을 생애 적으로 만나고 참 회심을 경험하고 그리고 이제는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주만 따라가겠노라고 하는 변화와 함께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안 그렇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점점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교회가 커서 오는 사람, 홈페이지가 예뻐서 오는 사람, 지붕이 빨개서 오는 사람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잠시 후 우리 이제 인덕원 예배당으로 12월 달에는 어째든 갈 것입니다. 교회는 소박하게 질 것입니다. 두고보십시오. 다른 교회를 짓는 것보다 훨씬 싸게 저렴하게 소박하게 질 것입니다. 방향이 섰습니다. 그렇지만 지어놓으면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아! 정말 교회 예쁘다. 그러면 그 교회 건물이 예뻐서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거적을 뒤집어씌울까요? 사람들이 옵니다. 그럼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고 마음 깊이 가난한 마음을 안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 변화되어야 할 영혼이 아니라 지금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이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사람들입니다. 끌어안고 같이 가야지 됩니다.
자꾸 교회가 변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저도 받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몇 주간동안 훨훨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진심입니다. 평소에 꿈꾸던 저의 삶은 이런 삶이 아니라 순회 설교자의 삶입니다. 정해진 곳이 없이 섬이든지 바닷가든지 도시든지 수 만 명이 모이는 운동장이든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설교하고 그렇게 순회 설교자의 삶을 사는 것이 제 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변해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 영혼들이 교회에 온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그들이 영혼이 변화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인한 마음에 갈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말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그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사는 영혼의 변화 받은 삶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고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서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고 예수님 의지하면서 사는 진실한 사람들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정말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아가서 이 세상에서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복음만 전해주면 오직 예수만 믿겠다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술주정뱅이, 거렁뱅이, 난봉꾼들 복음을 전하면 여러분들에게 야지를 놓으면서 여러분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기대하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 그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그들에게도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 전도자들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 중에 일부가 아직도 야비한 사람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릅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교회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모두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그리 더러운 줄 이제야 아네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 좋은 대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한때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하나를 경험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 아무 쓸모 없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니까 우리가 이렇게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산 것이 우리가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께만 빚진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런 영혼들을 향해서 빚진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왜 우리 교회에는 아직까지도 변화되지 않은 영혼들이 그렇게 억수로 모여들까. 하나님, 이해하세요. 이 백성들은 워낙 목이 곧습니다. 이들의 악과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나를 보시고 이들을 사해주십시오. 제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 맞지요? 제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 맞지요? 주님께 사랑을 받은 제가 대신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우리가 눈물로 음식을 삼으며 교회당의 의자를 적시며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고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해도 결국은 변화 받지 못한 채 상처를 받고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결국은 변화 받지 못한 채 어려운 인생을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린 소자 하나라도 우리의 힘으로 그 영혼이 변화되어서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육신 적인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는 교회를 변화시켜 신령한 그리스도인들로 붐비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커질수록 짊어지는 이 짐이 너무나 큽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정도 모이는 교회가 큰 교회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지만 백 번 양보해서 이곳이 큰 교회라고 하면 큰 교회를 통해서 내가 받은 유익은 별로 없습니다. 정말 변화되지 않은 영혼들을 대면하고 그렇게 늘어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능력이 부족한 것을 심히 자각하고 그리고 그 영혼들을 끌고 데리고 가려고 하면 먼저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 중에 일부는 마음이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싸움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결코 비관적이지만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주안에서 주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의 의미를 알고 자기를 세워주신 그 자리를 더 감사하게 생각하며 꿋꿋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을 감당해나가기 위해서 군사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제가 교회를 돌아보면서 그래도 심령의 위로를 받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최근 몇 달 동안에 3-4년씩 변화되지 않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 몇 달 동안 변화가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곧 변화 시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3, 4년이 되도록 교회를 떠나지 않고 장승처럼 버티고 앉아서 그래서 열린 교회에 와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에 뿌리를 내리려고 동지들을 모으려고 하는 움직임을 볼 때는 진짜 솔직히 인간적인 심정으로 너무 괴롭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면 기도하다가 목회자도 낙심하면서 ‘저 사람은 아무래도 내 분량이 아닌가봐’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하나님이 아주 신기한 방법으로 그를 만지고 지나가셔서 그래서 변화 받게 하십니다. 불러다 놓고 매일 가르칠 때는 다른 소리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려고 할 때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에 포기하고 돌이킨 후에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양의 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배우는 사실이 무엇인가 하면 정말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 화석화되어가고 있는 교회, 잠든 영혼들, 심지어는 세속화되어 가는 목회자들까지도 사실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의 눈에 더 많은 눈물이 흐르고 모세처럼 내가 위해서 기도하는 내 백성들을 하나님이 기억해주시고 간절히 바라는 것은 가나안도 필요 없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필요 없고 주님이 이 백성들을 주님의 족속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이것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들이 더 많이 울었더라면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더 많이 변했을까요?
아직까지도 은혜 받은 성도들 구석에 밀려나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소외된 그런 많은 지체들이 복음의 빛 가운데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누가 그들을 위해서 울어주었습니까? 누가 그들의 이름을 부여안고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이 지체를 위한 것인 것처럼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해서 우는 일에 있어서 충분히 나는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오늘 하나님 앞에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맞습니까? 제가 정말 주님께 은혜 받은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은혜 받은 저를 기억하셔서 제 기도 하나를 들어주십시오. 하나님 이 백성을 버리지 마십시오. 이 백성을 떠나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목이 곧고 하나님 앞에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악하고 죄인 된 것밖에는 이 백성들에게 없지만 그러나 이들을 용서하시고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십시오. 모세가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말합니다. 먼저 나는 오늘 여러분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고 믿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주님의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닙니까? 교회가 갑작스럽게 커지고 그리고 빨간 지붕이 예뻐서, 십자가 종 탑이 좋아서, 예배당이 깨끗해서, 새 가족 부원들 명찰이 예뻐서 교회를 등록했다고 하는 그런 철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울게 하시려고 그래서 하나님이 이때를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사람들,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당에 붐벼도 그것 가지고 하나님께서 실망하시지 않습니다. 마당만 밟는 사람들, 우리 모두다 한때는 마당만 밟는 사람들이었지 언제 하나님을 깊이 세상에서 주님 만나고 교회에 투신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교회당에 와서 담배를 피고 술을 먹고 돌아다녀도 그것이 교회의 거룩성을 헤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지 못하면 아무리 참신한 새 신자가 여기에 와도 그것은 진정으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는 은혜 받은 여러분들에게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제 자리에 있습니까? 여러분만 제 자리에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만 제 자리에서 눈물을 흘려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베푸신 은혜, 짐승과 같은 어두운 길에서 복음의 빛을 비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건져내셔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에 붙잡혀 살게 하셨던 그 경험을 기억하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그리고 영혼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예수의 생명을 나타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많이 변화되지 않은 영혼들이 교회에 붐비는 것, 아무 문제없습니다. 여러분도 한때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서 울어주지 않는 것이 오늘도 문제이고 주님의 아픔입니다. 철없는 사람들이 교회당에 발걸음을 들여놓고 예배 시간이 끝나기 전에 빠져나가고 무명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그 철없는 것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면서도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릴지 모르는 우리의 굳어진 마음의 신앙생활이 우리 하나님을 아프시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를 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구하셨을까요?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왜 우리를 구별하셔서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했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온전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이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근거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알 수 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우리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이런 은혜를 베푸신 것은 우리를 통해 자기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은혜를 먼저 받은 여러분들이 더 많이 울어야 합니다. 그렇게 건조하게 살아서 안 됩니다.
교회가 커 가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영광이 될 수 있겠습니까. 눈을 들어서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설교자가 왜 우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도 모르고 내일도 모를 것입니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손이 그 마음을 어루만져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기 전까지 그가 어떻게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겠으며 어떻게 그 마음에 동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굳은 마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손이 닿을 때 그 피묻은 손을 붙잡는 믿음의 반응이 있기까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먼저 주님을 만난 여러분들이 더 많이 죽어야 합니다. 더 많이 아파야 하고 더 많이 울어야 합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기 위해서 변화되지 못한 영혼들과 교회가 커지면서 부실해지는 교회 한구석에 기둥을 붙들고 흐느끼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루어지리라
잘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주신 적이 없는 것을 가지고 섬기라고 명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이만큼 밖에 능력이 안 되고 여러분도 이만큼 밖에 능력이 안 되고 교회의 능력은 이만큼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빌라도 교회에 말씀하셨듯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을 배반치 않고 섬기는 그것이 주님께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주님이 주신 그 능력에 한도 내에서 정말 그 영혼들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교회가 무너지는 것 같으면 구석에 가서 붙들고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며 기도하십시오.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두 번째로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참 사랑을 모르고 영혼의 변화를 받지 못한 여러분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그 성실한 교회생활도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변화 받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의 그 성실한 교회 생활은 여러분들이 지옥 불에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하나님께 인격적인 승복이 없이 시계추같이 교회당을 왔다 갔다 하는 형식적인 교회 생활이 여러분들에게 주는 위로가 무엇입니까? 오늘 그래도 나는 예배를 드렸다 라고 하는 그 인간적인 위안 위에 여러분들이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주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변화되기를 기도하는 수많은 지체들의 눈물어린 기도를 뒤로하고 강퍅한 마음을 고추세우며 주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비인격적인 신앙생활을 계속한다고 할 때에 마지막에 손해는 여러분이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느 날 불현듯 여러분들의 인생이 끝나고 주님이 심판대 앞에 여러분들을 세울 때 그날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변명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을 보내주어서 수 없는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변화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변명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교회 생활이라면 일치감치 그만두고 세상으로 돌아가십시오. 누가 여러분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왜 우리가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까.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일까? 그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면 우리에게는 어떤 행복이 있는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 은혜를 자비를 아버지 앞에 구하며 영혼의 변화의 때를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가 필요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와 하나님 거스르며 살았던 우리의 악들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자주 우리들이 배반했습니까? 얼마나 자주 주님을 거스르며 주님을 욕보이는 삶을 살았습니까?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우리들이 지난 죄와 악을 용서해주시고 다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사랑으로 받아주셔서 다시 하나님과의 거룩한 친교 속에서 살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주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3.본질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출34:9)
지난 시간에는 “내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었거든....”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세의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께 특별히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의무는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고 특별히 공동체가 위기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새겨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어서 이제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서 모세는 세 가지로 요약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였고, 두 번째는 우리 악과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였으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이 백성을 당신 자신의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이 세 가지 기도가 바로 자기가 받은 은혜, 곧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 모세의 기도의 제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모세가 제일먼저 기도한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제일먼저 하나님이 자신들과 즉 우리들과 함께 행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행하시옵소서”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행여나 당신 자신이 그 약속을 어겼다는 비난을 자기의 백성들로부터 듣고 싶지 않으신 것처럼 너희가 나를 버리고 우상을 섬겼지만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겠다. 너희들은 가라. 그러나 너희들만 가서는 결코 가나안의 백성들, 그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고 병기들을 가지고 있고 요새를 가지고 있는 그 땅에 족속들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 사자, 곧 하나님이 특별히 부리시는 천사를 내가 너희에게 주어서 그 천사가 너희를 앞서가면서 이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이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천사의 인도를 따라서 가서 그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한 내 약속을 지키겠다. 젖도 흐르고 꿀도 흐르는 땅이니까 너희들이 가서 가져라.
그러나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개처럼 마치 전광석화와 같은 영적 각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무슨 뜻인가 하면 자신들에게 가나안 땅이 소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쫓아가시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그 가나안 땅이 우리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오늘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실제로 구해야 할 제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선 저 같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철저한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저 같으면 안전하게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곳에서 반드시 겪게 되는 싸움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될 것이고 그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기까지 경험하게 될 험난한 여정을 편안히 인도해주시도록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내려주신 그 만나도 그치지 말고 계속 내려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고 그 백성들이 광야의 길에서 목마르지 않도록 적절히 물을 공급해달라는 기도도 시급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모든 기도의 제목들을 다 밀쳐버리고 한 가지 기도를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우리 중에 행하시옵소서” 즉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어달라고 하는 간절한 당부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가나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가나안의 번영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광야의 고난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 사람의 신앙 인으로서의 성공, 마치 교회로서의 이 땅에서의 성공과 유사합니다.
한 시대에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의 참된 영광이 무엇입니까? 성장입니까? 번영입니까? 그래서 교회당을 크게 짓고 그 큰 건물을 보고 돈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 그래서 교회가 재정도 넘치고 사람도 넘치게 되는 것, 그래서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마치 구멍가게에서 대형 슈퍼가 되는 그것이 교회의 성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번영입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정말 성공한 사람을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그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창세기 5장에는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죽음을 보지 않는 사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에녹’ 65세에 므드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어두운 시대에 의의 말씀을 외치다가 죽어간 평범했으나 평범하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백성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 그것 이상의 구별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을 때 전율하게 됩니다. 제가 회심하기 전에 가장 강력한 두려움과 충격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굳게 믿었는데 하나님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들어올 때 충격이 전율했습니다. 인생이 뿌리 채 흔들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과 함께 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은 세상의 번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함께 행해주심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 많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그리스도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먼저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인가 이 세상의 백성들에게는 없는 영적인 실제를 자신 속에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그들 속에 자신은 인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그 공동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영광인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부인할 수 없는 가장 뚜렷한 축복의 표징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의 백성들을 두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가까운 세월, 그 중에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종노릇하면서 보냈으며 그들에게 역사의 비전이라고 하는 것도 없었고 무슨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애굽 백성들에게 예속된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짐승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모세가 그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이제 오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서 잠시 불 신앙했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자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수 천년 동안 흔들리지 않는 아성처럼 굳게 서있던 애굽의 중심부에 핵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신성시하던 나일강의 강물이 피로 변하고 온 땅에 개구리가 뒤덮이고 온 땅에 이가 들끓고 파리가 가득 차서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악질과 독종이 나서 자기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릴 수 없게끔 공격을 받고 메뚜기와 우박, 어두움과 마지막에는 모든 애굽에서 태어난 장자와 초 태생이 죽는 놀라운 위대한 일들이 누구를 통해서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애굽의 온 땅이 어두움에 뒤덮이고 그리고 처음난 초 태생들이 모두 비명 속에서 죽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온 땅에 어두움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고센 땅에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가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서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꼈던 프라이드가 어떻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까지 우리를 부려먹던 눈뜨고 바로 볼 수 없었던 그 엄청난 상전들인 애굽 사람들을 하나님이 짐승과 같이 다루시고 자신들을 보석과 같이 다루시는 광경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꼈을 영적인 프라이드에 대해서 여러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전히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애굽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갖고 계신 간절한 소원은 그 백성들이 내는 헌금이나 제사가 아니라 그 백성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인해서 오시고 싶어도 오실 수 없는 그 문제를 제사를 통해서 해결해서 잠시라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과 교제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독생자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보내시면서 그에게 붙여주신 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임마누엘’ ‘임마누’ 우리와 함께, ‘엘’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가지고 계신 임마누엘의 소원이었습니다.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가치,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의 백성과 구별되는 것은 세상의 번영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의 번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누구였습니까? 당시의 애굽은 지금의 중국, 소련, 미국을 다 합쳐도 애굽만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대통령의 권세를 합쳐도 그 당시의 바로의 권세를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시위대장, 요즘으로 하자면 경호실장입니다.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일군들이 있었겠습니까? 그 중에 요셉은 갓 끌려온 히브리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를 주목해야 했고 마지막에는 바로도 주목하고 마지막에는 온 세상이 그로 인해서 그 흉년에 생명을 부지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가 자기 꿈을 해석해주는 이 요셉을 봤을 때 감탄을 하면서 심정적으로 무릎을 꿇고 거기서 말했던 그 고백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디서 이렇게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그게 믿지 않는 바로의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조국의 교회를 돌아봅시다.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교회와 지금 함께 하시다 고 하는 강력한 표징들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믿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단지 미담을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가 그 가운데 있으며, 정말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육신이 속한 병적인 유아 상태에 머물러있었던 망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아!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도다.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거늘 이제야 내가 주의 얼굴을 뵈옵는구나’ 하는 그런 영적인 권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남, 그래서 오랫동안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을 예배 중에 굴복시키고 오랫동안 주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을 꺾어서 그들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영적인 감화력, 영적인 권세가 하나님의 교회에 함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가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교회가 진실로 교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교회의 최고의 섬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가. 그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존재가 어떤 존재가 되는가. 쉽게 이야기하면 ‘워크’가 문제가 아니라 ‘플레진스’가 문제입니다. 존재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서의 현존, 그것은 그 자체가 아주 위대한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신호등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가 가는 길이 옳다고 확신을 더 합니다 그리고 패역하고 굽은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보면서 빨간 불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걸어가다가는 큰일나겠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맛을 잃지 않는 소금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백성들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고 기도하고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쉽습니다. 사람들을 열렬하게 비난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열렬하게 비난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필연적으로 밀어닥치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는 비난받는 그 사람의 잘못과는 관계가 없는 국외자입니다. ‘아웃사이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비판의 영을 가지고는 단지 비판의 영만을 가지고는 중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입니다. 정말 돌맹이를 던지는 것은 쉽지만 그러나 내 가정에 많은 죄를 내 것으로 여기는 나의 죄입니다. 그러며 하나님 앞에 중보자를 자처하고 주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마음,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잘못되어가고 있을 때 한국교회를 욕하고 자기가 몸담은 교회의 돌팔매를 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화 없이도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안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나의 죄를 인함입니다. 또 내가 만약에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자이거든 이들은 잘못했을지라도 당신께 사랑을 입은 나를 기억하셔서 이들과 함께 해주시옵소서. 이들 가운데 다시 찾아오시옵소서. 주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실 수만 있다면 하나님과 범죄 한 내 지체들 사이에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라는 그 고백이 완숙한 신앙의 고백이고 진정한 중보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오늘 이 모세를 통해서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분명하거들랑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교회 속에서 조국의 교회 안에서 혹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의 가정 속에서 이런 무너진 부분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떠나가시는 것 같은 부분들,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는 것 같은 부분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그 은혜를 구하며 주님이 여러분들의 간구를 통해서 다시 마음을 돌이키시고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교회와 그리고 여러분들의 문제 위에 함께 해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오셨고 앞으로도 인도해주실 것이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제 열린 교회는 더 이상 생사를 결단하고 교회를 등록하는 사람들이 옛날과 같이 많지 않습니다, 지붕이 빨갛고 예뻐서 등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가 커서 푹 묻히면 누가 나를 알아보랴 하고 등록도 안 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중에 태반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 자신은 자기의 영혼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역자들이 밤이나 낮이나 그들을 심방하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최선의 것을 주려고 애를 씁니다. 한번 밤 11시쯤에 교회에 와서 교회를 휙 돌아보시면 여러분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때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런 영혼들을 불러다 놓고 한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쳐서 그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전달해주는 것까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영혼을 변화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그들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그들은 교회에 나와주는 것만 해도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지금 보십시오. 33장에 보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부담을 느끼는 사람을 위해서 ’회막‘이라는 곳을 만들어놓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대부분의 백성들은 모세가 들어가고 하나님의 경건한 사람들이 회막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광경을 멀리서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에 한 교회에 부흥이 일어날 때 매머드 집회를 통해서 부흥이 일어나는 예는 교회역사에 거의 없습니다. 계획된 매머드 집회, 19일날 모이겠으니 그때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해서 모인 부흥은 없습니다. 항상 흐느끼는 소수,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자기의 지체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자기의 죄인 것처럼 아파하며 이름 없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부흥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이 어떻든지 나만 은혜 생활을 잘하면 되지.’ 그런데 아닙니다. 세상도 같이 잘해야 합니다. 은혜를 못 받으면 세상이고 나고 그냥 살지만 조금 은혜를 받으면 세상은 그래도 나라도 잘살아야지 그렇게 하지만 진짜 은혜를 받으면 왜 세상은 나처럼 안 살까 그리고 고민합니다. 그 고민의 시작이 중보 기도의 시작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말합니다. 얼마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까?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말씀을 통해서 진토에 떨어진 영혼의 소생을 경험하고 나니까 뭐라고 고백합니까?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릅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자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심지어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 그들조차도 하나님께 찬송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변화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정말 우리 가운데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제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별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별로 없습니다. 따지기 좋아하고 회의하기 좋아하는 것 빼놓고 자기들과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 별다른 리얼리티, 실제를 지니고 살아가는 특별한 백성들이라고 하는 느낌을 받는 세상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회심의 징표가 없는 지체들이 밀려오고 교회가 점점 그 영혼들을 모두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 가운데 그렇게 함께 하셔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달라고 탄원하고 호소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항상 이렇게 모두다 평안하다고 말할 때 위기를 알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해달라고 탄원한 그 이름 없는 성도들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로 주님의 교회가 서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니 악과 죄를 용서해달라는 탄원이었습니다. 즉 사죄의 탄원이었습니다. 악과 죄는 마치 나무와 열매의 관계입니다. 악은 하나님의 어떤 율법을 어기거나 그 율법을 행하기에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동으로 직접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상태입니다. 그것은 본성적으로 타고난 것이기도 하고 또 그와 관련된 죄성 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를 게을리 할 때에 자신 속에서 더 흥왕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악을 산출해내게 됩니다.
땅에 똑같은 사과나무를 심어도 똑같은 사과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토질에 따라서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일 중에 가을에 나오는 배입니다. 하여튼 한국 배는 전 세계적으로 최고입니다. 미국에 가도 ’코리안‘ 하고 딱 배에다 붙여놓으면 더 이상 논쟁이 없습니다. 최고입니다. 그 배가 얼마나 맛있는지 미국에서 이민간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이 워낙 미국에서 비싸니까 똑같은 것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많이 섰는데 미국 땅이 한국 땅만 못하다고 누가 말하겠어요. 그런데 결국은 안 됩니다. 그만큼 토질이 좌우합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사과나무라고 할지라도 어떤 토질에 심겼는가에 따라서 열매 맺는 것이 다르듯이 나무가 뿌리를 박아서 그래서 뿌리가 쫙 뻗어나가서 좋은 환경에서 빨아들이면 그래서 거기서 기능이 왕성하면 즉 죄성이 우리 가운데 꽉 차있으면 아주 충만하게 악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죄악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쏟아놓으면 다 악이고 건드리면 다 악이고 걸어다니면 다 악입니다. 진짜 마이다스같이 손만 대면 다 악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서 모세가 아주 정확하게 사람의 행동만을 보지도 않고 마음만을 보지도 않고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제까지 하나님 앞에 지은 많은 이 백성들의 악행과 그리고 그런 악한 행동들을 가능하게 했던 마음속에 있는 반 하나님 적인 경향, 그런 죄성들을 함께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자기가 하나님이 부르셔서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십계명을 받을 때 우상을 만들고 먹고 마시며 함께 뛰놀았던 우상 숭배에 죄로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주께 불평한 모든 악행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 신앙과 주님을 거슬려 살고자 하는 반 하나님 적인 죄의 경향들, 이것들을 모두 하나님 앞에 고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이 백성들이 33장에서 각성을 하고 단장품을 다 제거하면서 회개를 했다고는 하지만 냉정하게 33장을 읽어보면 회개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진짜 중심으로 그 백성들이 모두 깡그리 회개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중차대한의 위기에 이제 하나님이 너희와 관계를 끊겠다며 이제 끝이다, 이제는 너희와 관계를 끊자.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그 상황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워하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들이 회막에 와서 계속 기도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데 멀리서 쳐다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충분한 회개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죄와 악이 작습니까, 그들의 회개가 충분합니까? 그들이 뭔가 자기의 악을 뉘우치면서 하나님 앞에 뭔가 선한 일을 해서 그것을 보상을 해드렸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의 악과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한마디로 변명을 하는데 하나님, 이해하십시오. 이 백성들은 원래 목이 곧은 백성들입니다.
성경에서 목이 곧다는 것이 무슨 표현입니까? 하나님 앞에 꺾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입니다. 그렇게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상기시켜드리면서 하나님, 걱정 마십시오. 내가 가서 야단을 쳐서 이 자식들을 전부다 회개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도록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가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를 볼 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하나님이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때로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 그런 것을 배웁니까? 특히 가족들 예수를 안 믿으면서 뺀질 뺀질 그리고 놀릴 때 그때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을 붙들고 해봐야 나중에 싸움밖에 안 납니다. 정말 사람에게 호소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쉽습니다. 모세가 그런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수시로 이 백성들이 대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인간적으로도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사실 누가 먹여 살렸습니까? 하나님이 먹여 살렸지만 모세가 포기했으면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러면 사실 인간적으로는 모세 덕에 먹고살고 광야 여행도 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잘나갈 때는 당신 때문입니다 라고 그런 적이 있습니까? 안 나갈 때 항상 우리를 인도한 사람, 모세는 어디에 갔느냐. 언제 사람이 인도했어 하나님이 인도했지, 그리고 대들면서 빌미를 잡아서 모세를 죽이려고 한 적이 한 두 번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도 안 됩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에게 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차라리 내가 이 백성들을 고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이 낫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영적인 문제나 다른 사람을 돕는 이런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다가, 하다가 안 될 때 사람을 붙들고 매달려서 도저히 안 되었는데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범죄한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다가 다시 하나님이 멀어지셨을 때 다시 그 백성과 함께 하실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과 함께 하실 수 없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무엇입니까?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위험이나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죄악입니다. 그들의 악과 죄,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데서 오는 모든 신령한 축복들을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범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죄와 악을 이제 돌이킬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여기에서 모세가 우리의 죄와 악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지만 사실 모세는 이 우상 숭배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하나님을 충성하고 그 백성들을 뜨겁게 사랑한 것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 앞에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나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사람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지요. 나 기억하시지요. 이 백성들은 악하고 죄악 된 백성들이지만 나를 기억하셔서 이 백성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죄에 대한 예민함과, 그 다음에 죄인들에 대한 신령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 영혼들을 끌어안는 것과 죄와 야합하는 것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지금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은 죄가 굉장히 심각합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이제 나는 너희들과 관계를 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이 죄와 악을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것은 죄와 악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뭐 그까짓 것 갖고 그러십니까? 사람이 살다가 보면 다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항상 그렇게 잘합니까? 우리가 주님 같은 줄 압니까? 하나님 자녀 삼았으니 그 정도는 각오를 하셔야지. 그렇게 하면서 지금 하나님 앞에 떼를 씁니까? 아닙니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혈기가 섞이기는 했지만 그 십계명 돌판을 백성들에게 던진 것은 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모세의 혈기가 아닙니다. 너희 같은 놈들에게 이 거룩한 율법이 뭐가 필요가 있으랴. 말하자면 지도자로서의 강력한 영적 실망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을 만들어놓고 뛰어 노는 광경을 보면서 모세가 얼마나 경악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한 혈기라고 보면 안 됩니다. ‘개발에 편자다’ 그리고 던져버린 것입니다. 편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발굽에 잘 달리라고 말발굽을 깎아내고 굽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따각 따각 갑니다. 달려도 발톱이 안 상하고, 개발에 그것을 박아서 뭐하겠습니까. 개가 뭐 사람을 실어, 짐승을 날라. 경주를 해. 꼬리나 치고 먹을 것이나 얻어먹는 짐승이 편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거룩한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전수 받을 때 모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탁 보니까 십계명이 나오는데 어디서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찬란한 영광 가운데서 그것을 받았을 때 모세가 어유! 10가지나 되는 것을 어떻게 지키나. 그랬겠습니까? 여기는 웃을 대목이 아닙니다. 그랬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와!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특별한 백성으로 여기시는구나. 주님의 기대가 이 정도구나. 그것을 생각하면서 영광 가운데 내려왔는데 내려와 보니까 우상을 섬겨놓고 막 함께 뛰놀았다는 대목을 워터 카이저 같은 학자는 그것을 우상 숭배에 뒤따르는 음행이라고 봅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우상 숭배를 하고 음행을 하는 그 광경을 보면서 그 거룩한 율법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로서 얼마나 영적으로 실망을 했겠습니까? ‘개발에 편자다’ 이 자식들아. 그리고 던져버렸습니다. 혈기도 섞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죄를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사소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그 대신 두 번째로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범죄한 백성들을 향해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에 궁극적인 원천이 무엇인가 하면 그 백성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입니다.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가리켜서 모세의 애족정신이라고 말하는데 애족정신은 아닙니다. 교회를 향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애굽에서 떠날 때 중다한 족속들이, 숫자적으로 아주 많은 족속들이 따라나옵니다. 그 중에 흑인도 있었습니다. 따라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속에 들어가서 다 지파로 배속이 되는 것입니다. 외국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으면서 다 열 두 지파의 한 사람으로 배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 지파에 있는 사람이 유다 지파의 핏줄이라고 생각하면 난센스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할례와 신앙고백을 통해서 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백성들이. 그 백성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열렬하고도 간절한 사랑, 그 뜨겁고 간절한 사랑이 결국은 모세로 하여금 너무 어마어마한 죄를 지었지만 주님 앞에 안면에 철판을 깔고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참된 지체됨은 죄가 함께 흐르게 만듭니다. 죄의식을 같이 쇠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 의식에 최고의 절정의 상태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그 공동체의 연합의 정신이 워낙 투철하면 그 죄를 자기의 죄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보면 오랫동안 계속된 전통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죄를 지체들 앞에서 고백을 하는 전통입니다. 그것이 변형된 것이 카톨릭의 고해성사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분명히 그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너희의 죄를 서로 고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이런 것들이 문제점들이 너무나 많아지니까 그 전통이 끊어졌지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죄를 지으면 이것이 내 문제라고 생각을 안 한 것입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죄다. 공동체의 죄를 내가 더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죄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 무엇이라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철저하게 ‘아워시’ 우리의 죄입니다.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남들이 느낄 수 없는 죄에 대한 민감한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지었는데 그것은 네 문제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진짜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깊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이름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혜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바람직한 것은 주님을 믿고 시종일관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으면 죽기까지 계속해서 충성만 하면서 살고 일 점의 흐트러짐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축복해주셨으면 그 축복을 가지고 오로지 자신은 영광 받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잘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아주 훌륭한 증거에 불과한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잘못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중국에서 모택동이 한 시대 황제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밥 먹을 때마다 모택동을 묵상했다니까 사실 황제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도 그렇게 위대한 사람으로 지금도 추앙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가까이 에서 그 사람의 사생활을 모두 지켜본 주치의가 미국에서 모택동의 전기를 펼쳐냈는데 마지막 결론이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모두 일부분이 알려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의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실한 신자라면 누구보다도 많은 용서의 은혜를 입으면서 주님의 은총에 빚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연약한 지체들을 보면서 가슴아파하고 교회의 부족한 모습을 보고 아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끊임없이 악과 죄에 빠졌지만 죄보다 더 많은 용서, 악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서 그 눈물겨운 사랑으로 불붙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들을 용서하시고 고치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만큼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논하고 교회를 위해서 염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용서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조국 교회에 필요하고 철부지같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하고 빨간 지붕이 예뻐서 열린 교회에 등록한 생각 없는 신자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은 정작,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사람들은 은총을 구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대신 구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필요한데 마음이 강퍅하고 목이 곧아서 자기의 죄와 악을 뉘우칠지 모릅니다. 하나님, 내가 그의 죄를 토설하고 주 앞에 비오니 하나님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용서받지 못한 채 죄와 악에 가득 차서 하나님의 은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곤고하고 지친 그 영혼의 슬픔과 아픔이 자기 속에 느껴져야 합니다. 그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던 우리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만큼 명백한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용서를 구하는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른 기도를 다 마다하셔도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며 자기의 죄와 악을 인해서 그분께 돌려드린 불명예를 가슴아파하며 진실하게 참회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물리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죄인이 정말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교회를 어머니처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더욱이 자기의 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동 그 자체입니다. 오늘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죄악이 충만하면서도 뉘우침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최근에 회개해보신 적이 언제입니까? 다른 이유 말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죄 가운데,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비쳐볼 때 너무나 부당하기 때문에 ‘나는 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밖에 못살까’ 생각하며 뉘우치고 흘리는 눈물로 여러분들의 예배의 자리가 흠뻑 젖어본 적이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온전한 삶을 사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 증거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뛰어넘어서 뉘우칠 줄 모르고 살아가는 교만한 영혼들, 영혼의 변화의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교만과 사위에 가득 찬 삶으로 그것을 거절하며 살아가는 그 악한 죄인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그 중보의 기도를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말씀하셨을 때 그 애통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애통입니다. 자기의 죄와 그리고 공동체의 악을 위해서 기도하며 주님이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도록 간절히 호소하는 그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의기도, 그 속에서 심히 아파하고 흐느끼는 그 백성들의 애통함, 거기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만큼 성숙한 사람이 되어서 조국의 교회와 그리고 여러분들의 교회와 가정을 위해 사회를 위해 이렇게 중보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이 백성을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라는 것입니다. 원래 이 기업이라고 하는 것, 히브리말로 ‘헬레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원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헬레끄 라는, 이 기업이라고 하는 단어가 아주 풍부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이제 성경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때가 언제인가 하면 가나안 정복부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가까이 이르렀을 때 요단강 건너편에서 그 땅의 지도를 가지고 와서 땅을 나눈 다음에 제비를 뽑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정해주시지를 않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은 그 땅이 자기네 땅입니다. 그래서 싸움은 함께 협력해서 하고 점령한 땅은 제비뽑은 순서대로 당첨한 그 지파대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한 지파가 경기도 만한 땅을 소유했다면 그 지파 안에 종족이 있습니다. 종족대로 다시 좀 나누고 구 정도로 나누고, 씨족이 있습니다. 씨족이 한 동정도로 나누고 그 속에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은 다 경계를 잘라서 공평하게 나누어서 그래서 이제 누구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렇게 경계를 나누어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런가보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땅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땅이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맨 처음에 인덕원에 교회당 터, 1000평 약간 안 됩니다만 사놓고 처음에 가보니까 아무리 걸어가도 끝이 안 나왔습니다. 100미터니까 이것이 얼마나 멀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때는 너무 좋아서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빙글빙글 돌아다녔습니다. 이것은 약과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이제 농경사회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옛날에 아버지께로부터 유업을 받았다고 그래봐야 소, 양 이런 것, 금붙이 이런 것들이 기업이었습니다. 사실 동산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부동산을 진정한 의미에서 기업으로 받게 된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땅을 소유하면서부터입니다. 땅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것은 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에게는 땅이 없습니다. 그리고 땅을 자신이 소유하지 못하면 자신의 소유 그 자체도 불안정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농경 사회에서는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땅을 가지고 모든 부를 재는 것입니다. 왕이 제일 부자입니다. 왜 온 나라 땅이 다 자기 것이니까. 왕이 부자입니다. 그리고 왕이 그 땅을 백성들에게 빌려주는 것입니다. 공을 세우면 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 땅을 인해서 주종관계가 형성되고 노예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레위기 25장에서 땅을 주시면서 땅은 절대 너희들 것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 것이다. 내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모두 이 땅에 나그네다. 그 대신 너희들에게 사용권을 주마. 그리고 잘라준 것이 기업입니다. 사용권을 주었어도 그것은 영원한 사용권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놀랍게 ‘기업’ 그러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나와 여러분들은 소장 공사를 지어서 입에 풀칠도 못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땅이 실감이 안 나지만 왜 6. 25 전쟁이 났을 때 이북에서도 그렇게 다 총 들고 괴뢰군 모자를 쓰고 나와서 총질하고 남한에서는 농촌에 있는 청년들이 전부다 지원을 해서 부대에 와서 훈련을 받고 한 일주일 훈련을 받고 나가서 총을 쏘고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직전에 양쪽에서 전부 농지 개혁을 해서 경자 유전의 원칙에 따라서 다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은 좀 불충분했습니다. 그렇지만 거의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땅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문맥을 보면 어마 어마하게 중요한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그 땅에 각기 이렇게 표가 서 있습니다. 이것이 지계표입니다. 이것은 뺏겨도 안 되고 빼앗아도 안 됩니다. 부득이하게 이것을 팔든지 그렇게 될 경우에는 다시 안식년에 찾을 수 있고 안식년에 돈이 없으면 희년에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기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귀한 것, 생명의 근원이 되는 소중한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 보면 두 개가 똑같이 다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시라는 고백도 나오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고백도 나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도 이 세상에서 자기의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다라고 하는 고백이 하나님께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다라는 고백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름다운 천지만물 사람이 있으니까 아름답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이 없는데 하나님에게 아름다운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으니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업이고, 또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은 서로가 서로를 기업처럼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기서 이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땅이고 그 땅은 결국은 신학적으로는 신약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게 되는 성도들의 축복의 예표입니다. 그래서 그 땅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와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주님 없이 살수 없습니다.’ 라는 그런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히 구한 위에 알았다. 그럼 내가 너희들을 벌하지 않으마.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마지막에 또 하나의 소원이 있는데 이 백성을 정말 귀하고 소중하고 어여쁘게 여겨주시옵소서.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기업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회복이 없는 용서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기들의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고 그 교회를 좋아하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시대에 태어나서 비록 구멍가게나 하면서 먹고살든지, 남의 구두나 닦아서 먹고살고, 심지어는 똥을 퍼서 먹고사는 한이 있더라도 한 시대에 태어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일은 이 시대의 교회가 그리고 이 시대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산 삶이면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너무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모세를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행해달라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그 위에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관계가 되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이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매우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화해할 수 없는 부자가 한 집에서 어거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아버지가 아들을 끌어안고 얼굴을 찡그리는 자녀에게 사랑의 입맞춤을 퍼붓는 그런 관계가 되기를 모세가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관계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이 땅에 존재함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교회, 그래서 그 교회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모두 이루고 싶어하시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셨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편애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오래 기다리다가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쏟아지는 사랑을 부어주시면서 ‘내가 너를 통해서 다 이루리라’ 그리고 쏟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어두운 역사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 소수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 주님이 너무나 소중히 여기셔서 그들을 통해서 부족하지만 자기의 뜻을 다 이루고 싶어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절망적인 역사를 움직이는 지렛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쏟아 부어지는 은총과는 거리가 먼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때일수록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의를 위해 고난받는 사람들을 격려하시며 식어진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역사,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향해서 다시금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당신의 사랑을 퍼부으실 필요가 우리들에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냉담하던 사람들이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형식적인 사람들이 그 형식적인 신앙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진실한 신자로 다시 태어나서 주님의 얼굴을 열렬히 구하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들로 다시 태어날 때 그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은혜를 받은 여러분들이 이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자기의 백성들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4.절망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①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수7:6)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잊혀지려야 잊혀질 수 없는 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난 다음에 아이 성을 공격하는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서 제일먼저 마주해야 했던 싸움은 바로 다름이 아닌 여리고 성의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은 가나안 땅에서도 굉장히 큰 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을 어떻게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무너지게 만드셔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셨는지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7일 동안 그 성을 두루 돌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마지막 날 그 성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무너지게 하셔서 피 흘리지 않고 그 성을 정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다시 한번 요단 건너편에 있던 가나안 원주민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 내렸을 것이고 이 백성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백성들이기에 큰 성, 발달한 병기로도 꺾을 수 없단 말인가 하며 탄식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승승장구했습니다. 요단을 건널 때 그 물을 말리셔서 발에 물이 젖지 않게 하신 그 하나님이 이번에는 놀라운 능력으로 여리고 성을 함락시켜주시는 광경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승장구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을 인도하던 장군이었던 여호수아는 그 명성이 온 가나안 땅에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두 번째 공약하여야 할 성을 만났으니 ‘아이’라고 하는 성이었습니다. 그 성은 매우 작은 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서 그 싸움에 참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백성들의 우두머리들은 말하기를 2-3000명만 군사를 주어서 우리가 정복하게 하고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순식간에 성을 함락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듯하여 3000명의 군사를 내어주었고 그들은 정말 믿음으로 아이 성을 공략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철저히 패배하였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비탈길을 쳐서 내려오면서 이스라엘 백성 36명을 도륙 하였습니다. 그 소식이 들려왔을 때에 여호수아가 보인 그 태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이런 절망 가운데, 실패 가운데 하나님을 찾아야 할지를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깊이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패배를 지켜본 이스라엘 백성과 기다리던 여호수아는 그야말로 가슴이 물같이 녹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물같이 녹아 내렸다”는 표현은 그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말리면서 건넌 이야기, 그리고 길갈에서 진치고 그리고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에 가나안 원주민들이 경험했던 그것이었습니다. 마음이 물같이 녹아 내려서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호수아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보십시오.
여기에서 우리들이 크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여호수아가 이 절망 적인 소식을 접했을 때 제일먼저 옷을 찢은 것과, 그리고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린 것과, 그리고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땅에 엎드려 저물도록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선 여기에서 제일먼저 옷을 찢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에 보면 옷을 찢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신약에도 심지어 옷을 찢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옷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존중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옷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옷이 그 사람을 존중히 여기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옷을 성도의 행실로도 묘사를 합니다. 사람이 옷을 입어서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는 것처럼 성도의 올바른 행실은 그가 이전에 죄인이었고 하나님을 거스르던 완악한 인간이었지만 성도의 올바른 행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과거를 잊게 만들고 그리고 현재적인 진실한 성도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을 보게 해준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의 그 옷을 찢는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탄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한탄스럽기 때문에 옷을 입어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 하는 그런 정도의 깊은 탄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그 흉내를 내면서 마음에서 비롯되어서 옷을 찢어야 되는데 마음은 그냥 있으면서 옷만 찢는 사례들이 있어서 예레미야는 하도 옷을 찢는 사람이 많으니까 아까운 옷을 왜 찢는가. 찢지 말고 마음이나 찢어라.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난 그 행동과 속에 있는 내면이 일치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옷만 찢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에 있는 바 어떤 정서가 그로 하여금 옷을 찢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은 탄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종의 그것은 변형된 절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좀 절망할 때는 절망을 해야지 됩니다. 두려워할 때는 좀 무서워할 줄을 알고, 그리고 좀 이렇게 꺾어질 때는 꺾어질 줄을 알아야 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믿음이 없이 살라고 하는가 하면 믿음이 없이 살라는 것이 아니라 불 신앙적인 낙관주의는 신앙적인 비관주의만 못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불 신앙에 기초한 낙관주의는 신앙에 기초한 비관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신앙적인 비관은 필연적으로 잠시 후에 신앙적인 낙관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불 신앙적인 낙관주의는 계속해서 하나님 없는 삶을 부채질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손 좀 보셨습니다. 솔직한 말로 너 그렇게 살아서 되겠니? 그리고 손을 탁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생각에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슬프다. 내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자녀인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 저 뭐 지금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뭔가 두려움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매달려야 되는데 하나님이 손 좀 보시니까 인생 뭐 살다가 보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깊은 신앙이 들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가운데 괴로운 날도 있고 기쁜 날도 있지 이러면서 의지하면 그 낙관주의는 불 신앙적 낙관주의입니다. 도대체 절망을 안 합니다. 낙심을 안 합니다. 좀 낙심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불순종하면서 살아도 되나. 아! 요새는 정말 교회에 나갈 면목이 없어. 좀 그래봤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생활을 안 해서 어떻게 하지. 난 아무래도 껍데기 교인이야. 그래서 목회자가 가서 아니야. 그래도 당신은 그래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야. 이러고 좀 위로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뭐 하나님이 명백하게 잘못 살기 때문에 손 좀 보셨는데 그런데 인생 살다가 보면 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해석을 다 해버렸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심령이 곤고해지면 왜 그럴까? 왜 이렇게 곤고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귀에 안 들어오고 기도할 수도 없고 왜 그럴까? 그리고 난 정말 주님을 멀리 떠나 있나봐. 주님이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나는 정말 주님을 멀리 떠나 있나봐. 왜 그럴까? 그리고 깊이 고민하고 시인이 시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이나를 버리셨는가. 이제는 그 은혜가 다 하였는가 이러면서 두려워하면서 어쩔 줄 모르면서 밤을 지새는 그런 고민의 세계가 있을 때 이게 신앙적인 낙관으로 이어집니다. 뭐 어떻게 항상 충만하겠어. 그래도 이만큼 사는 것만 해도 대견하지.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그러니 무슨 희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백성들이 물같이 녹을 때 이랬습니까? 야, 한번 진 것 가지고 뭘 그런가. 옛말에도 있듯이 한번 실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는데 아니 이번에는 졌지만 조금 아까 여리고 성에서는 크게 이겼으니까 그것을 빼고 나도 남지 않았냐. 다시 특공대를 조직을 하고 군대를 더 보내서 문제를 해결해보자. 얼마든지 이런 식으로 자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안 그랬습니다. 이유는 전쟁에서 36명 죽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36명의 목숨이 하찮다는 것이 아니라 아니 성경의 역사를 보면 뭐 몇십만 죽는 이야기가 심심지 않게 나오는데 그까짓 것 36명, 그것은 사실 전쟁에 있어서 어마 어마한 패배를 경험했다 역사에 이렇게 길게 남을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버스만 하나 굴러도 36명이 죽는데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깊이 탄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물리적인 패배의 크기가 아니라 그 패배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아니 군대가 얼마나 많은데 그까짓 것 36명 때문에 벌벌 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크기가 아닙니다. 크기가 아니라 그 아이성의 패배가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더더욱 아이 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 것입니다. 왜 아니 물리적으로 생각을 해도 하나님이 안 도와주신다고 해도이길 수 있는 성이었는데 뼈저리게 패배를 했으니까 이것은 무엇인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적인 비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낙심해야지 될 때에는 좀 낙심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뭔가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렇게 하잖아요. 오늘 여기서 보십시오. 전쟁에서 그까짓 것 한번 패배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깊이 탄식하고 아파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즉시 느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작전 실패가 있다든지 군대를 너무 조금 보냈다든지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아주 즉시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확 찢는 것입니다.
그래서 7장 초반부에 보면 이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 양식인데 7장 초반부에 보면 먼저 아이성의 전투가 왜 졌는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헤드라인처럼 나오고 그 다음에 그것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사후에 붙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모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미 감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는 전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로 하여금 탄식 속에서 옷을 찢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다. 무엇 때문일까? 아직 정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 작은 전투에서 커다란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지금 이렇게 낙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것을 봅니다. 이제 정신 못 차리고 살기에 기도를 열심히 해줍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저 친구 정신 좀 차려야지 되겠는데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어려운 일이 딱 생겼습니다. 그런데 꼭 심방을 갑니다. 물론 심방 가는 집이 다 그래서 가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갑니다. 잘 돌봐야 되니까 갑니다. 가서 이제 위로를 해주려고, 목사님, 사실 제가 신앙생활을 잘 못했더니 이런 어려운 일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려고 주셨습니다. 정말 제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사니까 우리의 가족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면 가서 눈물을 닦아주면서 아니라고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리고 이제껏 하나님을 찾으면서 살아왔으니 주님이 동행해주실 것이라고 그렇게 위로를 해주고 오려는데 위로를 할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위로를 너무 잘해서 가서 소외감만 느끼고 옵니다. 그래 어렵지 않았어. 뭐 애들이 자라다 보면 다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사업을 하다가 보면 들어먹기도 하는 것이지 뭐. 그것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전 통이 큰 사람입니다. 올 때 그 통이 좀 작으면 얼마나 좋을까. 돌 통입니다.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를 오히려 위로합니다. 너무 걱정하시지 말라고. 사실 나는 걱정한 것이 아니고 기대를 하고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깊이 낙심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었습니다. 어려움의 영적 의미를 파악한 것입니다. 큰 어려움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어려움이 때로는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시련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서 받는 유익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이 다 성도가 됩니까? 곤고하고 고통받는 시절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시련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의미의 크기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의미의 크기를 오늘 여기서 여호수아가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낙심하면서 자기의 옷을 확 찢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적인 실패를 이기는 성도의 한 방법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뭐 사기충천해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들이 한 20만 대군과의 싸움에서 이렇게 실패했더라면 이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그만 성, 저까짓 것하고 올라갔는데 무참하게 패했습니다. 사건은 작은 사건이었지만 의미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큰 성 여리고 성을 무너트린 것은 간단하게 나오는데 아이 성 못 무너트린 것은 길게 나옵니다. 이게 신앙적인 교훈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 실패가 계속되고 있다면 그것이 비록 적은 시련이라고 할지라도 하찮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큰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작은 시련 속에 하나님이 큰 의미를 담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입니다.
옛날에 제가 알던 목사님 한 분은 가끔 넘어지셨습니다. 저도 잘 넘어집니다. 발이 작고 발 폭이 작아서 255 밀리가 맞을 때도 있습니다. 큰 것은 260, 작은 것은 255까지 신습니다. 발이 작습니다. 그래서 잘 뒤집어집니다. 체중이 있고 하니까. 수없이 발을 삐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도 잘 넘어지셨습니다. 옛날에는 보도블록이 없어서 돌부리를 잘 찼습니다. 넘어지면 자기는 즉시 일어나기 전에 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내 가는 길이 뭐가 잘못된 길입니까? 심방 가는데 뭐가 그렇게 잘못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어떤 때는 그 가던 길을 돌이킬 때가 있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우리도 가던 길 잘못가면 하나님이 돌부리를 차서 넘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단번에 칼로 발모가지를 자르시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몸통만 돌아다닐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갔는데. 다 잘라지고 거북이같이 그렇게 굴러다닐지 모릅니다. 그런 것입니다. 충분히 발목을 요절을 내야할 정도의 사건인데도 하나님이 돌부리만 차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가던 길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작은 사건인데도 거기에 큰 의미를 담으시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깨닫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깊이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거기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낙심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낙심은 누구에 대한 낙심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낙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낙심입니다. 깊이 낙심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작은 사건, 계속되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짐승은 고통을 받아도 의미를 모르지만 인간은 고통받을 때 항상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여호수아가 절망적인 실패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법궤였습니다. 그리고 이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실제로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가 그 법궤를 중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신앙이 종종 전쟁과 이 법궤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고 블레셋과의 그 아벡의 전투에서도 법궤를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터에 나갔던 이유도 바로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 전쟁, ‘친전’이라고 합니다. 황제가 왜 친히 전쟁에 나서는 것, 그런 것처럼 ‘여호와 우리 왕이 우리와 함께 나가신다’ 라고 하는 그런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법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법궤를 메고 아이성에 올라갔을 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 성 전투 자체를 아주 하찮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전투에 패배하고 나자 여호수아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로 공격할 특공대를 짜거나 무기를 점검하는 대신에 제일 먼저 옷을 찢은 후에 그는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 여호수아의 신앙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 이 환난과 시련만 지나가면 이제 신앙생활을 똑바로 해야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 주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서 그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본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그것이 질러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보더라도 큰 시련과 어려움이 생기면 그게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다가 보면 그 일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은혜 받으면서 주님 앞에 매달리다가 보면 사실은 그 문제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자기와 현재 자기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고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참 변화되고 보면 언제 보면 자기가 고민하던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흔히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주님이 언제든지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길 때 하나님 자신을 직접 구하는 것, 그 얼굴을 구하고 자신의 고통 하는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 직접 여쭈어보리라. 그분을 직접 대면하리라고 하는 그런 신앙의 자세가 여호수아로 하여금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적인 실패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더욱이 자기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실패인 경우에는 자기의 힘으로 몸부림치면서 자기를 소진하기보다는 이처럼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곤고 할 때나 혹은 시련이 닥칠 때에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이 우리를 에워 쌓아서 우리의 삶을 한없이 괴롭고 곤고하게 만들 그때에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자 마음을 가졌을 때 그는 이미 문제 옆에,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문제 속에 있는 하나님의 해답을 푸는 열쇠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로 하여금 전심으로 자기의 얼굴을 구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삶의 동기를 정화시키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살지 않을 수 없도록 그들을 바꾸어놓으십니다. 그들을 고치고 놀랍게 변화시킴으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영광과 그 은혜를 위해서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동안 모세에게 바턴을 이어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해왔습니다. 요단강의 도하 작전을 진두 지휘했고 길갈에서 진을 쳤으며 그리고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면서 실패 없는 놀라운 승리의 길만을 걸어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름을 인해서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벌벌 떨게 되었고 여호수아의 이름은 온 땅에 두루 그 명성이 휘날리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사기 충천했고 무슨 싸움을 하든지 그들은 이길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가득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여호수아로 하여금 가나안 남은 모든 정벌을 순수한 동기 가운데 완수하게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경험하게 하시고 여기에서 시련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나이 많아 늙은 때가 되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신 신앙을 다 버리고 기울어져가고 있을 때 그 역사의 비탈길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외칠 수 있었던 그 청청한 신앙은 바로 이런 시련을 통해서 열매 맺혀진 바 된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단련하시지 않아도 좋으리 만치 잘 준비된 사람, 단련하지 않아도 좋으리만큼 정결하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해 가시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단련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을 통해서 정화되는 것이지 고통 그 자체를 통해서 정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원하지 않는 시련과 어려움 속에 여러분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철저하게 주님 자신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여러분의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해결이 근원입니다. 문제는 한없이 다양해도 해결의 길은 언제나 하나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변화되는 것, 그래서 주님의 그 임재 앞에서 직접 주님을 대면하고 그리고 이 실패 속에 깃들여있는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깨닫지 못해서 바르게 행할 수 없던 그것을 깨달음을 통해서 그것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고쳐지는 것, 바로 그것이 여러분들의 다양한 문제와 다양한 실패를 극복하는 지름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엎드려졌습니다. 그는 실패한 싸움에 다시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군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사기를 높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람잡이 식의 행동을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에 진 장군의 책임을 묻지도 않았고 패배하고 온 병사들을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은 주님을 대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졌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많은 시련, 그리고 거듭된 실패, 영적인 가난함과 그리고 우리의 삶의 메마름, 이런 것들은 바로 이처럼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엎드리며 주님 자신의 얼굴을 간절히 구할 그날을 기다리시면서 주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시련을 연장시켜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이 그렇게 간절히 당신 자신을 구하고 당신 자신 앞에 엎드려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상황 앞에서, 환경 앞에서 울고 웃는 피에로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주님의 그 얼굴을 간절히 구하며 내 인생의 문제는 다양하고 시련은 여러 가지지만 해결의 길은 오직 이렇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이나를 돌아보시는 것이 것이라고 하는 그 신앙이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 절망적인 실패 속에서 탈출구를 찾게 만드는 두 번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에서 하나 기억에 하나 남는 것 하나는 이들이 이 사람이 기도할 때 혼자 기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는 리더십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는 카리스마에 있어서 모세만 못했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모세 같았으면 홀로 조용히 높은 산에 올라가서 주님을 대면하고 정답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장로들도 같이 자기를 따라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해결의 길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지체들에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도록 돕고 그렇게 하면서 시련과 실패 가운데서 주님의 완전하신 인도를 다시 볼 수 있도록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것, 그것이 실패 속에서 여러분들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여호수아가 한 일은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는 일이었습니다. ‘땅’ ‘티끌’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땅에 얼굴을 대고 그리고 티끌을 무릅쓰며 하나님 앞에 저물도록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여호수아가 작은 실패 속에서 발견한 그 의미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은 무기나 군인이나 새로운 전쟁에 대한 소식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 상황을 만났을 때 그렇게 충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출애굽기 33장에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들은 가라. 그러나 나는 안 간다. 너희들끼리 올라가라. 그리고 가나안을 점령하라. 그것이 모세의 생애에는 물론이거니와 여호수아의 생애에 지도자로서 아주 굉장히 강력하게 새겨졌습니다. 지금 상황이 바로 꼭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너희가 올라가라. 나는 너희와 같이 가지 않겠다. 그때에 하나님이 왜 함께 걸어오시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다가 갑자기 너희끼리 가라. 난 안 간다라고 하셨을 때 그 상황이 무엇이었습니까? 범죄 했을 때였습니다.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였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벌써 여호수아는 뭔가 이렇게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버리셨는데 도대체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전심으로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아이성에 올라가서 전투한 것밖에는 없는데 도대체 무슨 죄가 우리에게 있겠는가. 우리가 이 죄를 알지 못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호수아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깊은 좌절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응답의 예고가 아닐까 하는 깊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여호수아는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땅, 티끌 이런 뜻은 다 ‘하찮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재료가 오만가지인데, 아니 정 지으실 것이 없으시면 춘천에 오셔서 옥이라도 한 덩이 딱 떼어서 그래서 짝 깎아서 빚어서 ‘훅’ 하고 사람을 만드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흙이 무슨 흙이었을까요? 보통 흙입니다. 무슨 특별한 흙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흔해빠진 흙, 그런 티끌을 모아서 사람에게 묻으면 그것을 털어 버리려고 애를 쓰는 그런 가치 없는 티끌을 모아서 사람을 만드셨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 자체 안에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훅’ 숨을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그 행동에 의해서 인간의 어떤 존귀한 가치가 결정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인간이 존귀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영장류의 이기적 오만함입니다. 왜 존귀한가. 사람이니까. 사람이 왜 존귀한가. 사람이니까. 그게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사람이 귀한가. ‘훅’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으니까. 진흙과 같이 가치 없는 것으로 빚어진 존재들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흙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참 심오하지 않습니까? 그 많은 바위를 깎아서 만드신 것도 아니고, 십계명의 돌 판은 돌을 깎아서 만드셨으면서 사람은 흙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시고 인간을 귀하게 생각하시면 서도 만들 때는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할 때의 그 말은 우리로서는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이 봐왔으니까. 그러나 그 선고를 처음 들어야 했던 처음 조상들은 참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가치가 없는 것이구나. 그래서 티끌입니다. 티끌이 히브리말로 ‘아파르’입니다. 이 티끌이 무엇인가 하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할 때의 그 아파르입니다. 그러니까 ‘티끌을 무릅쓴다. 땅에 엎드린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 원래 제 주제를 알고 돌아간다는 그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선을 끄는 기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새벽에 나와서 기도를 하는데, 한번만 더 그랬으면 내가 혼을 내주려고 했는데 한번만 하고 그 다음에 안 보였습니다. 누군지 모르고. 하나님, 이 나라의 교회가 다 썩었습니다. 목사들은 늘 놀면서 기도도 안 하지요. 집사들은 모두, 하여튼 생각이 잘 안 나지 만 황당한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 들으라고 그렇게 기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가 여기에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큰 소리로. 한번만 더 그랬으면 내가 혼내주려고 그랬는데 한번만 그러고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습니까? 자기도 티끌이 되어야지. 이러면 또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목사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 다 내 죄입니다. 그러면 또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워서, 그래서 한참 기도를 듣는데 너무나 심령이 상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가 계속해서 마음으로 내려가지 않고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머리와 입 사이에서 막 돌면서 혈기가 살아있는 기도였습니다. 누가 인터넷에다가 요새 책이 하나 나왔는데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누구 것을 베껴서 제목을 붙였는데, 그런 책을 읽고 누가 질문을 했는데 질문할 것도 없습니다. 읽을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내가 대신 봤으니까 안 봐도 됩니다.
잘 들으십시오. 자기가 펄펄 살아있는 기도는 열정적일수록 가증한 기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가 열렬해도 그 속에서 자기가 펄펄 살아있는 열렬한 기도는 열렬할수록 위험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철저한 자기 죽음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자기가 죽은 가운데 그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가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저 바보 같은 녀석들이 겁쟁이들이 도망 왔습니다. 하나님, 저 녀석들 믿음 없는 것을 하나님 보십시오. 저래서 어떻게 이스라엘의 군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했습니까? 엎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 실패의 모든 책임이 마치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티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6장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여호수아의 명성이 온 땅에 휘날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명성은 고사하고 그 얼굴이 땅바닥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리고 티끌을 모두 무릅쓰고 자기는 아무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는 하찮은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겸비해졌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전부이시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모두 이시라고 하는 그런 결론, 그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자기 겸비의 그 마음으로 엎드려진 것입니다. 겸비한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겸비한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 상황을 통해서 무슨 메시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것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깊이 겸비해져서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시거나 혹은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거나 혹은 그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때때로 이런 절망적인 실패 가운데 두실 때에 하나님이 이제껏 우리 때문에 속썩은 것을 복수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성품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돌아와 돌아와 마음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사실 돌아오기에 너무 멀리 떠난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들이 겸비해지기만 하면 죄의 크기나 불순종의 크기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죄 가운데 있고 은혜 밖에 있을 때 간헐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언제인가 하면 마음이 깨트려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구할 때, 그때에 오랜 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매우 가까이 계시다고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사실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들의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요구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뀌어진 태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할 때가 아닙니까? 그리고 정말 주님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다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할 때가 아닙니까? 이제까지 익숙해왔던 실패 속에서 거짓된 낙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주님이 인정해주시는 대로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 앞에 겸비해져서 그래서 우리의 실패,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우리의 신앙의 태도를 하나님께 인정받아 오히려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정결해지고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5.절망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②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렇게 해서 여호수아는 한번에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리고 성도 간단하게 무너트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였고 그 일로 인해서 가나안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동시에 두려워하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 성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모든 일들이 잘 되어나갈 때는 지도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면 사람들이 모두 지도자만 쳐다봅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지도자인 이 여호수아가 이 문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큰 여리고 성도 무너트린 우리가 왜 아이 성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패배하고 사랑하는 우리 지체들을 30여명이나 잃어버리게 된 이 비극적인 일이 왜 일어났을까? 사람 사람마다 다 그들의 눈빛은 그 상황에 대해서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의 많은 질문에 대해서 어떤 것도 답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깊은 위기 상황에서 아마 조금 아까 까지 모든 사람 위에 커 보이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왜소하고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랬는데 여호수아는 그런 상황에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인간적으로 허둥대지를 않고 하나님의 궤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서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셔서 여호수아야 왜 그렇게 엎드려 있는가. 그러면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이 성 전투에서 너희들이 패배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여리고 성을 쳤을 때 누군가가 거기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 중에 일부를 도둑질해서 감추었다. 그 죄 때문에 너희가 대적들 앞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도망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찾아내서 멸하지 아니하면 그 죄가 여전히 너희들 가운데 있어서 내가 너희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답을 얻고 나니까 이제 문제가 간단합니다. 그리고 딱 여호수아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신속하게 문제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 아이 성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알고 있는 바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너희들 중에 누가 하나님께 바친 바 된 여리고 성에서 노획한 물건 중에 일부를 감추었다.
6장에서 여호수아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곡히 신신당부합니다. 여기에서 전리품으로 거두어지는 물건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아간이 그런 탐심이 날만도 합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화려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광야 생활에서 텐트에서 자고 모래가 잔뜩 일어나는 광야의 길을 거닐기만 하던 사람들에게 무슨 문화가 있었겠습니까. 여리고 성은 당시 엄청나게 큰 성 읍이었으니까 거기에서는 발달한 가나안의 선진문명의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쁜 외투, 잘 가공된 금, 이런 것들이 얼마나 탐이 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런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우리 한국 사람들 외국 여행을 가면 그냥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미국에 가면 전부다 미제밖에 없으니까. 저것도 사고 싶고, 이것도 사고 싶고 막 그래서 막 싹쓸이를 해서 쇼핑을 해오고 그랬습니다. 특히 프랑스 백화점에 가서 싹 쓸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보다도 훨씬 더 어마어마한 문명의 격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탐날 만 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일부를 갖다가 훔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여호수아가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엄중하게 경고를 했는데 그 경고를 어기고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것을 도둑질해서 자기의 텐트에 감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호수아가 고개를 들고일어나서 하나님이 우리와 아이 성 전투에서 함께 하시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너희 중에 누가 하나님께 바쳐질 물건을 감추었다. 누군가. 그리고 지파 별로 나와서 제비를 뽑고 그 다음에 족속별로 나오고 그 다음에 가족별로 나오고 사람을 뽑았더니 아간에게 임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온유하고 모세하고는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온유하고 그런 지도자였는데 이 상황에 딱 도달하니까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끌고 가서 아간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 그리고 그 집에 있는 가축들 물건들 모두 돌맹이를 던져서 다 때려서 죽여버렸습니다. 그래서 돌무덤을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거기가 ‘아골 골짜기’입니다. 그러니까 ‘아골’이라는 이름이 옛날에도 있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강한 인상에 남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스토리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셔서 파죽지세로 가나안 정복에 대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럼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깊은 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살펴보면서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찾아야 할 그 이유와 그리고 주님을 찾는 길에 대해서 오늘 생각을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이 모든 위기의 궁극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결국은 죄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죄의 문제를 개인적으로도 다루시지만 공동체적으로도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아이 성을 정복하러 갔다가 36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배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물같이 녹아 내리는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물건을 훔친 아간은 멀쩡히 살아 있고 죽은 사람은 엄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36명은 아간의 죄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다루심으로서 하나님이 죄를 개인적으로만 다루실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다루실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공동체적인 기도를 사용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준 것같이 내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이 죄를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으로 다루신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범죄하면 그것은 나만을 곤경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내 가족, 그리고 교회, 내 이웃, 나아가서는 사회, 혹은 국가 전체를 곤궁에 처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바로 죄의 강력한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살펴볼 수 잇는 것은 이미 여호수아가 모세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아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이후로도 사실 위기를 여러 번 만납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도 가깝게는 그랬고 그 이전에 요단강을 건너는 그 기적도 위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도 하나의 커다란 믿음을 시험하는 그것이었고 하여튼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이제 여호수아가 점차 지도자로서 부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앞에 있었던 여리고 성의 전투라는 이런 것들은 위기들은 밖에 있는 위기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요단 이편에서 저 편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한편으로는 기대감을 갖는 것들도 알고 보면 그것이 밖에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밖에 있는 환경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이성의 전투에서는 졌습니다. 그리고 물같이 마음이 두려움 속에서 녹아 내렸고 누구도 왜 하나님이 우리를 혼자 가게 내버려두셨는지 누구도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알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여호수아로 하여금 다루시게 하면서 여기에서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여호수아 자신의 마음을 한번 확 씻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에 도취되지 못하도록 만드시고 앞으로 이어질 가나안 정복에 위대한 역사가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 한 분 여호와의 도우심, 그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확연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놀랍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자기의 위대한 일들을 감당해나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크게 두 번째로 하나님이 이제 이런 사태를 굉장히 어려운 위기였는데 이것을 극복하게 하신 결정적인 수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지난 시간에도 우리들이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의 기도였습니다. 위기 속에서 드리는 기도가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해나가게 만드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지난주에 우리들이 살펴본 그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 기도하는 시간이 나오는데 저물 때까지 엎드려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언제부터 이 기도가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장시간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에 있어서 위기를 만나게 되면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위기 속에서 늘 잊고 있는 신앙의 한 명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평범할 때는 우리들이 평범한 기도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엮어가지만 특별한 위기를 만났을 때는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 점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 큰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이런 종류의 시련을 당하게 된 것은 지도자로서는 처음 맞이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모세 밑에서 신앙을 배우고 지도력을 배워갈 때에 이미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 지도자가 된 다음에는 첫 번째 겪는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이미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도 똑같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우상을 숭배하고 범죄하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광경을 경험했고 그 문제들을 기도를 통해서 극복하고 다루어왔던 그 회막에서 드렸던 기도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장시간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인도할 수 있는 놀라운 지혜와 비밀들을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 한 사람이 여호와의 궤 앞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져서 아버지 앞에 죽은 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죽은 자처럼 엎드려져서 주의 은총과 자비를 호소하였을 때 주님이 그를 만나주셨고 그 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자 수십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살게 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커다란 위기에 처해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의 가족이 모두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 한 사람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도 가족들이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만 주님을 인격적으로 제대로 만나도 여러분이 가족을 고치는 주님의 도구가 되어서 그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 가족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인격적으로 전해주고 그래서 그들에게 참된 인생의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주님의 도구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위기 앞에서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법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져서 장시간 동안을 매달려 기도했고 그렇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었을 때 백성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저 우리가 바라기는 여호수아가 여기서 기도하고 그 백성들은 그 주위에서 동그랗게 엎드려서 그 지도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으면 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했으면” 하는 희망사항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커다란 위기를 만났을 때 모든 지체들이 절망에 직면했을 때 한 사람을 만나셔서 그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놀라운 길들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이제 장시간의 기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는 우리들이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간단한 공식이지만 사람들이 가장 지키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위기와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특별히 많이 기도해야지 됩니다. 우리들이 늘 기도하면서 삽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어려움을 만나면 많이 기도해야지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만 하고 살수가 있겠습니까. 때가 되면 밥을 찾아먹고 밤이 되면 드러누워서 자는 것이 창조의 섭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특별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밥을 먹고 싶은 데도 굶어야 하고 밤이면 자야지 되는 데도 깊은 밤에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죽은 이후로 얼마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가나안을 건너오면서 원망했습니까? 불평한 적이 있습니까? 투덜 된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호세아 같은 사람이 이때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을 하면서 국가를 이루어갈 그때에 정말 연애하던 때와 같이 그렇게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도자인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커다란 위기를 통해서 오래도록 많이 기도하게 하심으로서 여호수아 자신도 채 몰랐던 자신 속에 있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다 쓸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조금 있다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쓸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를 하나님이 놀랍도록 정결하게 만드셔서 이제 남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사실 여기서 여호수아가 장시간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은 분명한데 사실 시간적인 길이는 사실 기도가 가지고 있는 깊이에서 비롯된 것이지 시간적인 기도 자체가 기도의 목표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오래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깊이 하려고 애를 써야지 됩니다. 여호수아가 여기에서 이렇게 날이 저물도록 오래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 그가 깊이 있는 기도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상황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만져지는 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항상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무엇인가 주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싶은 의미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깊은 기도가 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얻기 위해서 주님 앞에 무엇인가 빨리 기도하고 그리고 금방 사라져버리는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도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런 기도는 위기에 처했을 때에 보여주어야 할 성도의 올바른 기도 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드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어떤 소원을 갖게 만들어드려서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시게끔 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신앙이 어렸을 때는 그런 식으로 설명해야지 만 겨우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이 장성하고 그리고 기도 생활에 많은 경륜이 쌓이게 되면 사실은 기도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도는 언뜻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또 보면 그 기도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마음속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러면 하나님처럼 예민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지자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물길을 잘 머금은 고운 흙 반죽처럼 되어 있지를 않고 완고하고 딱딱합니다. 이런 것들을 아주 부드럽게 주님의 손으로 빚으실 수 있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합니다. 깊은 기도, 그것을 통해서 장시간이 필요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빚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 뭐도 해주시고 뭐도 해주시고 막 빨리 합니다. 어떤 사람은 써서 와서 청구서같이 빨리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고 끝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다 들으신다면 그리고 나서 당신도 저쪽에서 이야기를 했으니까 주님도 말씀을 하셔야 하는데 다 들으시고 나서 그래 네 기도를 잘 들었는데 나는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말씀을 해주시려고 하는데 벌써 없습니다. 벌써 가버렸습니다. 있어야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이라든지 심정이라든지 이런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기도 자체를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 정도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호수아가 위기를 만나서 궤 앞에 엎드려졌을 때 여호수아의 최고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이 성을 빼앗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소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여호수아 편에서 가장 급한 것이었고 하나님 편에서 급한 것은 그것 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깊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왜 그럼 깊은 기도가 필요한가. 두 가지를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우선 첫째는 마음의 완고함을 고치시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어두움을 벗겨내시기 위해서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 이 본문에 있는 것만으로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마음에 완고함을 벗겨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깊은 기도를 요하십니다. 여호수아가 그런 위기를 만났을 때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궤 앞에 엎드리고 그리고 재를 무릅쓰고 티끌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겸비한 자세는 칭찬할만합니다. 그러나 엎드려서 기도한 그 초기에 기도한 내용으로 미루어지는 그 기도의 내용은 전혀 칭찬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승승장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 여호수아의 마음 밑바닥 속에 무엇인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있다라는 사실을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궤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하고 겸비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진 것은 칭찬할만했는데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한 그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기도가 오늘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원망입니다. 두 번째 나오는 기도가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다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후회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후회를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는데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약속의 땅을 우리가 괜히 왔습니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후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이까 가나안 사람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어버릴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 세 기도 속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것은 전혀 신앙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겸비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졌지만 이 자체로만 보면 믿음으로 드린 기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승승장구하던 여호수아의 밑바닥에 있었던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도자 여호수아가 이렇게 기도해서 되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영적 경험을 그 모세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아오면서 경험한 사람이 이런 일을 만나면 당연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이렇게 패배하게 하실 때에는 이것은 모두 우리 때문이다 하면서 하나님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하나님이 이러실 수밖에 없습니까?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옳으신 것이고 우리는 잘못되었습니다. 좀 그 정도가 되어야지 되지 않습니까? 또 그럴만한 영적 영향을 갖춘 사람이 아닙니까? 여기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원망, 그리고 후회, 그리고 미래의 대한 염려를 감추지 못하면서 기도하는데 사실 이것은 기도이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늘어놓는 넋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의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시작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초기의 기도였을 것이라고 믿어지는데 그렇게 기도를 했다고 하더라도 장시간 동안에 기도한 내용이 여기에 다 실려 있지는 않지만 이렇게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장시간 동안을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나니까 그렇게 순간적으로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를 해서 낙심 끝에 밀려온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후회, 미래에 대한 염려 이런 옳지 못한 것들이 모두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장시간의 기도를 통해서.
그런데 사실 보통 성령이 충만해서 신령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항상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경험할 때에 즉시 그 의미를 간파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감각적인 것부터 먼저 느끼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 어려움을 닥칠 때 즉시 그 속에 있는 영적인 의미들을 중시하고 실제로 자기가 겪게 되는 어떤 어려움이나 감각적인 느낌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신령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도 그런 점에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마음에 완고함입니다. 그것을 깊은 기도 속에서 벗겨냅니다. 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이 빚으시고 만져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나가시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위기의 상황이 닥치게 되면 즉시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두려움이나 근심 같은 것들이 밀려옵니다. 혹은 짜증이 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상황이 닥치게 되었을 때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위기를 만나게 하셨을 때 이 위기를 통해서 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전혀 인식을 못하고 오히려 엉뚱한 것에 몰두하면서 고통을 받고 고통을 주고 해서 결국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깊이 하면 처음 위기를 만났을 때 느꼈던 것들이 자기 속에서 놀랍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이다” 그것은 제가 보기에는 사도 바울의 깊은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고는 사실 이런 식의 진리를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를 당합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 어려움으로부터 받는 즉각적인 인상이 있습니다. 무섭다. 큰일났다. 그리고 아! 나를 위기 상황 속에 몰아넣은 것은 어느 녀석이구나. 죽이고 싶다. 뭐 이런 종류의 어떤 즉각적인 느낌들이 우리에게 와 닿습니다. 그것이 어떤 때는 확신처럼 와 닿습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면 처음에 있었던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이제 본질적인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충고하는 것이 그것인데 순간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 강한 확신을 너무 믿지를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것입니다. 기도를 조금 했는데 큰 확신이 오는 것도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조금 했는데 이상하게 큰 확신이 오는 경우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를 조금 했는데 큰 확신이 오면 그것이 이제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더 간절히 깊이 장시간을 두고 기도를 하면 그것이 점점 더 처음에 가졌던 그 강한 확신이 사라져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누가 그렇게 물어봤습니다. 조금 기도했는데 강한 확신이 들고 기도를 전혀 안 하니까 그 확신이 나중에 다 사라졌는데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처음에도 아무 것도 아니었고 나중에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또 그런 질문도 합니다. 조금 기도할 때 큰 확신이 일어나는 것은 자주 경험을 하는데 더 깊이 기도를 해서 그 확신을 검증할 수 있으리 만치 그렇게 오래도록 기도를 못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면 다행이고-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아니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남들은 기도하면서 걸어갈 때 자기는 다리가 부러지고 나서 여기가 웅덩이구나 하고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또 반대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사소합니다. 확신이 사소합니다. 그런데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싹이 나고 잎이 나고 하면서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깊은 기도를 통해서 마음을 바꾸어가고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아무리 은혜 생활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의 손에 빚음직한 그런 부드러운 찰흙과 같은 마음이 되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요새 이천이나 이런 곳에서 도자기 엑스포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만드는 광경을 한번 보셨습니까? ‘녹로’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발로 돌렸지만 지금은 모터로 돌리는데 녹로 위에다가 커다란 진흙덩어리를 하나 올려놓습니다. 녹로는 막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손가락으로 까닥 까닥 하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도자기들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도자기들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그 도공들이 그 흙을 얼마나 잘 하는지 아십니까? 물에다가 집어넣어서 진흙을, 물론 거기에는 굵은 모래나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 걸러내고 그리고 부드러운 흙을 완전히 물 속에 흠뻑 적셔서 그래서 그 자체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빚어질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에 도자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만들다가 찌그러지든지 망가지면 다시 웅덩이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풀어서 다시 흙으로 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마음대로 사는 것 같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 같고, 마음속에서 늘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순종하는 그런 속에서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가 얼마나 완고함이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기뻐하시는 쪽으로만 인도하시는 동안에는 우리가 부드럽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너무나 하나님께 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우리를 데리고 가시려고 하기만 하면 우리는 자지러질 듯이 하나님 앞에 대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정결하고 부드러운 마음들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는 한계였습니다. 그는 승리에 도취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여러 번의 기적과 같은 승리를 경험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오면서 단 한번의 아이성의 전투에서의 패배를 통해서 그 마음 밑바닥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 그리고 후회,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이런 것들을 다 속에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안 그랬는가 하면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람들을 볼 때에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붙들고 계셔서 훌륭하게 쓰실 때 그때 위대한 것이지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보다 더 했습니다. 하도 힘드니까 하나님 앞에 대들었습니다. 내가 언제 얘네 들을 낳았습니까? 내가 유모입니까? 내가 왜 얘네 들을 데리고 생고생을 합니까? 아! 이제 데리고 가십시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죽일 레면 죽이세요. 그런 뜻입니다. 차라리 죽여요, 죽여.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주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굉장히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아주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성의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가 받은 어떤 감화, 이것은 굉장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저는 그래서 이것이 여기 7장에서의 사건이 24장의 기초라고 봅니다. 24장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다 점령하고 난 다음에 유일신 신앙을 잃어버리고 급속하게 타락합니다. 그때에 여호수아가 독야청청 유일신 신앙을 외칩니다. 그런 신앙적인 감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가 이 7장에서 아이 성의 패배였습니다. 이런 여호수아의 마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완고한 마음을 하나님이 이 위기를 통해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고쳐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신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고치시려면 우리들이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행동들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치료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자기가 죽을병에 걸려서 수술대 위에 딱 누웠으면 그러면 의사가 시키는 대로해야지. 내 배를 째는 것까지는 좋은데 흉터 안 나게 예쁘게 잘 갈라. 자신이 없으면 칼 대지마. 이것은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의사에게 의탁하고 그리고 그를 믿고 신뢰하면서 그가 자기를 고치고 치료하도록 자기 자신을 모두 개방하는 것입니다. 옷을 벗으라면 벗고, 배를 가르겠다고 그러면 배를 벌리고 그렇게 자기를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 가난한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그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그 마음속에 있는 완고함을 하나님이 한번 이 사건을 통해서 굳은살들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쭉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것을 느끼기까지는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마음의 굳은살들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위기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빚어진 갈등의 요소들, 또 그것을 통해서 형성되게 된 어떤 자기에 대한 집착들, 이런 것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데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고치시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쉽게 바뀝니까?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야지 됩니다. 쉽게 바뀝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술 담배를 못 끊는 것을 보면 알잖아요. 습관 하나 고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쉽게 안 바뀝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참 쉽게 바뀝니다. 그런데 왜 처음에 우리가 온 곳이 천국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성도는 무슨 놈의 성도입니까. 원래는 땅강아지처럼 이 세상에서 살던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기회가 있으면 자꾸 그리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쉽게 바뀌어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생애 가운데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깊이 변화를 받아본 적이 얼마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전에는 내가 이런 방향으로 내 마음이 굳어졌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런 방향으로 마음이 바뀌게 되었다.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만져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쪽은 죄를 향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육신 적인 길이었고 한쪽은 신령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러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정말 가볍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 속에서 깊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아이성의 패배라고 하는 이 커다란 위기적인 상황 속에는 반드시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다루어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는 한계, 하여튼 그 무엇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롭게 하나님이 만져주시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지 됩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처음에는 기도하면서 주님을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고, 염려도 하고, 불안도 하고 했겠지만 이 기도를 끝까지 계속 했습니까? 이 기도를 끝까지 계속 했다면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으면서 무엇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셨습니까. 이것은 초기의 기도입니다. 처음에 이렇게 기도를 시작을 했지만 그러나 가면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마음을 만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때 많습니다. 왜 하나님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됩니까? 왜 하나님은 차별대우를 하십니까? 왜 나에게 하나님이 심지어는 뭐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대들고 막 기도하다가 그 기도도 방향이 잘못 되었어도 오래 깊이 하면 바른 방향으로 갑니다. 깊이 하려고 하면 그러면 처음에는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깊이 기도하다가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면서 완고함을 벗겨내시는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이 놀랍게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위기를 만날 때는 반드시 우리를 빨리 하나님이 상황을 다루시지만 그 위기 속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다루고자 하시는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것을 다루시고 우리의 상황을 다루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제일먼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인지를 감찰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깊은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그 완고한 마음들을 움직이시고 고치실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깊은 기도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장시간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다 옳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이 우리의 완고함 때문임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서서히 빚어나가서 그래서 우리를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위기 속에서 장시간의 기도가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어두움을 벗겨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보면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늘 교통하면서 살던 사람이었지만 신기하게 아이 성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난 다음에 잠깐 동안 하나님의 어떤 교통하심이 상황이 어려운 것만큼이나 동일하게 어려움이 옵니다. 딱 그치는 것입니다.
아이 성 전투가 있고 나서 패배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야 재네 들이 올라갔는데 잠시 기다려봐라. 죽어서 내려올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상황이 벌어지고 시체들이 실려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저기서 흐느끼면서 마음이 물같이 녹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런 상황에서 이제 위기를 보면서 그 속에서 정확한 판단을 못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무지의 비늘을 벗겨내시면서 궁극적으로 다시 계시의 말씀을 주시면서 그것이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장시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자,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영화관에 가면 가끔 그런 것을 경험합니다. 이제 캄캄한 곳에서 영화를 상영하는데 탁 들어갑니다. 그러면 깜깜해서 화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계단을 올라갈 때도 사람들을 붙들고 가고 안내원이 후레시를 비치면서 걸어가게 합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한참 있으면 조리개가 열리면서 이제 계단도 보이고 그 다음에 사람의 발도 보이고 의자도 보이고 다 보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즉시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신령한 교제의 상태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면 기도하기 전에 미리 깨닫게 해주시지 왜 그렇게 깊이 기도하고 간절히 기도하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네가 만난 어려움은 무엇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시련을 많이 만난 사람들이 시련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죄를 많이 압니까? 많이 불순종해본 사람들이 불순종의 정체에 대해서 압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위기를 많이 당해봤어도 이렇게 끝까지 가서 신령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이 당한 그 인생의 위기에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단계까지 가지 못한 사람들은 많이 시련을 당해서 그냥 생고생만 했을 뿐이지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습니다. 뭘 배웠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습니다.
밤이 되면 쓰는 전자 해충 제거재가 있습니다. 전기가 흘러서 나방이 확 날라 와서 탁 부딪히면 찌지직 그리고 거기서 타죽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배우는 것입니까? 아마 그 나방은 다시 태어나도 또 돌진할 것입니다. 그 동료들이 무수하게 날라 와서 부딪히면서 구어지면서 타 죽어 가는데 계속해서 불을 보고 날라드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시련을 많이 만나도 시련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지혜로워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 주님이 그 시련에 의미를 알게 해주시는 신령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신령해진 사람, 그 사람이 시련과 위기를 통해서 무엇인가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커다란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호수아의 이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보통 기도의 사람이 아니고 보통 신령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기들의 지체가 30여명이 죽어서 시체가 되어서 실려오고 나니까 이렇게 신령한 사람 여호수아의 마음에도 즉시 파고 들어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왜 이런 시련을 당했을까,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을 것이야, 주님이 우리에게 이러실 수가 없어’ 이런 생각이 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말이나 되. 하나님이 왜 우리를 여기 끌고 와서 다 죽입니까? 또 뭐 여기 가나안 약속의 땅이고 뭐고 들어오지 말 것을 그랬습니다. 이제 우리 여기서 이 사람들에게 다 멸망을 당하는 것이겠지요. 이 불평이 바로 옛날에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던 그런 생각, 그런 불평들이었습니다. 즉각적으로 시련이 왔을 때에 이렇게 신령한 사람도 어쩌면 그렇게 시련이 왔을 때 육적이 되는지. 신령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련 속에는 신령한 의미가 있는데 시련이 닥쳤을 때 이런 지도자도 이렇게 육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육적인 사람이 될 때에 상당한 시간동안 아버지 앞에 매달리면서 기도하는 그 교통 속에서 육적인 자기의 판단과 생각이 죽고 신령한 사람으로서 신령함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말씀해주셔도 안 들어옵니다. 우리들이 오랫동안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다가 생고생을 실컷 하고 나중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다음에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에 회개할 때는 ‘야! 이제 비로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깊이 회개하고 자기를 돌아보면 그 이전에 하나님이 굉장히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안 들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신령한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듣도록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그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에 대한 감각을 회복할 수 있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혹독하게 다루셔서 그래서 고난 속에서 그를 바꾸어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무엇인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판단을 제공해주고 나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요 내 발에 등입니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 사람에게 금이 무슨 소용이 있고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비추어주는 불빛 하나가 자기의 길 하나 하나를 비추고 발걸음 하나 하나를 비추면서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하고 그리고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겠다고 아주 영광스러운 헌신을 꿈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지금 신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여러분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유익해지고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들려지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 여러분들에게도 감지가 되어서 그 하나님과 교통 속에서 여러분들이 그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그 결심이 새로워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여러분들 속에서 지금 작동되지 않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지금 아이 성을 빼앗기고 많은 백성들을 잃어버린 여호수아의 위기보다도 훨씬 커다란 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틀에 잡힌 신앙생활이나 그리고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헌신된 교회 생활을 보면서 여러분들을 아주 더 할 나위 없이 신실한 신자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장시간의 기도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럴 시간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책을 빨리 세워야 합니다. 지금 아이 성은 저렇게 져서 이제 초상이 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는데, 여호수아가 어디 갔어 하니까 기도 중이야.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간절히 깊이 기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위기와 절망의 상황 속에서 순간적으로 솟구쳤던 육적인 성격들, 육적인 판단들을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다 꺾으시고 그리고 다시 신령함을 회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아주 구체적으로 왜 너희가 패배했는지 아는가.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주님을 찾을 때가 아닙니까? 여러분 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간절히 주님을 찾고 무엇보다도 깊은 기도 속에서 여러분들에게 닥친 이 고난과 위기의 의미를 터득하도록 아버지 앞에 매달리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가족과 그리고 여러분들의 지체들이 여러분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여러분들만 주님을 만나면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없습니다. 여호수아처럼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음성을 들으니까 수십 만 명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다시 평화를 얻게 되고 그리고 이제 나아갈 바를 분명하게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지금 상황이 위기라면, 여러분들의 상황이 정말 절망적이라면 거기는 반드시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깊고 긴 기도 속에서 모든 육적인 것들을 죽이고 신령함을 회복하고 나면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들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자기의 백성들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6.갈급 할 때 만나는 하나님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삿15:19)
현대인들이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피곤해’ 정말 피곤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창조의 섭리는 해뜨면 일어나서 일하고 해지면 들어가서 쉬다가 자게 되어 있는 것이 창조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환하게 불을 밝히고 그리고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일합니다. 9시는 초저녁이고, 10시는 저녁이고, 11시는 이제 집에 가야지 될 시간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오늘 모든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옛날에 라디오에서 9시만 되면 사랑의 종이 울렸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9시에 그 종을 치면 아마 사람들이 다 웃을 것입니다. 그만큼 바쁘고 고단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밤늦게 집회를 마치고 오다가 전철을 탈 때가 있습니다. 전철에서 보면 진짜 피곤한 세상이라는 것을 입증해줍니다. 그저 입을 벌리고 자는 사람, 또 옆 사람에게 기대서 자꾸 핀잔을 듣는 사람 뭐 별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피곤한 세상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그림을 하나 그려오라고 그랬더니 어느 1학년 학생이 네모난 데에 발 두 개를 그려서 선생임에게 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 애보고 야 무슨 사람이 네모난 사람이 있는가. 머리도 있고 팔도 있어야 되지 않는가. 그랬더니 이 학생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선생님, 그 사람은 우리 아빠입니다. 애 너희 아빠는 상자 각이냐. 그랬더니 그것이 아니라 일요일만 되면 우리 아빠는 네모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만 내놓고 잠만 잡니다. 그래서 엄마가 이불을 확 벗기면 아빠는 거기 새우처럼 쪼그리고 그렇게 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야지 겨우 사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 피곤함을 온 몸으로 다 짊어지고 그 위에 또 신앙생활을 해야지 됩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갑니다. 그래도 좀 주일날 교회에 잘 나가면 또 수요일 날도 오라고 합니다. 수요일 날 어떻게 나가면 금요일 날 나오라고 합니다. 금요일 날 잘 나가면 밤새서 기도하고 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뭐 끝이 없고 한이 없습니다. 누구 말대로 조금만 양보하면 교회는 끝이 없다고 하는데 진짜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화요일 날 나와서 전도하라고 그렇게 하지, 구역 예배도 드리라고 그렇게 하지, 토요일 날 와서 전도하라고 그렇게 하지. 그리고 다 하니까 새벽기도는 왜 안 나오는가 하지. 새벽기도에 나왔더니 뭐 또 그렇게 빨리 가는가 하면서 기도 좀 많이 하고 가라고 그렇게 말하지. 그것을 다 짊어지고도 또 현대인의 삶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도 피곤합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엉겁결에 나오는 말이 야, 피곤해. 아! 골 아프다. 좀 쉬고 싶다. 이런 이야기가 입에 달아 붙어서 줄줄 나오는 것이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고 지친 모습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인가가 그들의 내면의 속에 있어서 그들로 새 삶을 살게 하지 않으면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산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단지 교회에 나온다는 이유 때문에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산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을 때’ 그 시리즈 중에서 오늘은 메마를 때 하나님을 찾으라 그런 말씀으로 우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사사 중에서 ‘삼손’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의 관할 하에 있었습니다. 블레셋은 팔레스타인 남부 쪽에 해안을 끼고 반달 모양으로 있던 애굽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있던 나라였습니다. 그 기원은 노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노아의 자손 가운데 셈, 함, 야벳이 있었는데 함의 자손들의 중에 일부가 퍼져서 블레셋을 구성을 합니다. 그리고 블레셋은 참 신기하게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이미 벌써 그 족장 시대 그 이전서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 헬라시대까지 블레셋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야기하는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그 영어 단어가 블레셋이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그만큼 블레셋 사람들은 그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그런 족속들이었습니다.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철기 문화가 발달했고 백성들이 난폭하고 포악해서 그래서 곡창 지대가 있는 이스라엘로 올라와서 추수 때면 곡식을 약탈해 가는 일들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때에 사사 중에서 삼손이라는 사람이 낳게 되는데 이 사람이 이제 다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어째든 블레셋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좀 괴롭히고 그리고 이제 자기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아오라고 해서 군인들을 이끌고 유대 사람들에게 옵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이 블레셋의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요구가 무엇인가 하면 삼손을 내 놔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그랬더니 삼손을 감추어둔 유대인들이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너를 잡아오라고 난리이고 안 잡아오면 우리를 죽인다고 난린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너 순순히 묶여서 제발 저쪽으로 좀 끌려가라. 그랬더니 삼손의 하는 이야기가 너희들이나를 해치지 말아. 그러면 나를 묶어서 저리로 보내도 괜찮다. 그래 우리는 같은 동족이니까 안 해치겠으니 묶이기만 해서 그래서 하여튼 저쪽으로 가라. 그래서 이제 밧줄을 꽁꽁 묶어서 삼손을 끌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놔두고 이제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으니까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을 해코지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제 삼손을 해치기 위해서 다가올 때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임하심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시자 다시 이 삼손은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이 되었고 거기에서 힘을 쓰니까 마치 불탄 삼과 같이 밧줄들이 후드득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일 천명이 넘는 블레셋 사람들과 일대일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 사람들은 병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이 삼손은 병기라고는 없었습니다. 손을 뻗어보니까 죽은지 얼마 안 되는 생생한 나귀 턱뼈 하나가 손에 잡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춤을 추듯이 그 사람들을 때려눕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나귀 턱뼈로 일 천명을 때려죽여서 시체를 무덤처럼 쌓아놓고 승리를 했습니다.
그렇게 승리하고 이제 더 이상 자기를 해칠 군인들이 없게된 상황에서 긴장이 풀어지면서 이제 삼손은 주저앉았습니다. 그는 목이 말라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이제 큰 승리를 하나님이 제게 주셨지만 나는 목이 말라서 이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제는 내가 잘못하면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게 부끄럽게 죽임을 당할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도망간 사람들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혹은 응원군이라도 와서 자기와 전투를 하면 자기는 이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고 여기가 한계 상황이고 그 중에 작은 병사 하나가 자기의 목에 칼을 겨누어도 자기는 그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힘이 없습니다. 그런 고백을 이제 삼손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샘을 터치셔서 그를 해갈을 시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이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건조하고 메마르기 참 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영혼 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되고 진실한 기쁨과 유열, 만족과 안식, 평화 같은 것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점점 물질주의적이고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쪽으로 발달하고 그쪽을 향해서 치닫기 시작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만연해있는 이 쾌락적인 풍조들, 이런 세속적인 모든 사람들의 감각적인 생활들은 하나의 영혼의 질병을 반응하는 육신 적인 징후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예외 없이 이런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이고 거듭난 사람들이지만 이런 메마름을 경험할 때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도 이런 메마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혼에 참된 만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메마름에 고통을 잘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만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참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만족이 없을 때 그들의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배나 더 건조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언제나 촉촉이 하나님의 은혜의 물길을 머금으면서 사는 이 생활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내면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슬퍼하시는 자리에서 같이 슬퍼할 수가 있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서 함께 웃을 수 있으며 주님이 우리를 세워주신 그 자리를 우리의 자리로 알고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도 그런 통증에 시달려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안구 건조증’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눈물샘에서 눈물이 적당히 나와서 분비가 되어서 그래서 안구에 항상 습기가 촉촉해야지 만 눈껍풀이 왔다갔다해도 되는데 무엇이 잘못 되어서 눈물샘에 문제가 생겨서 눈물이 잘 안 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그래, 내가 회개를 안 한 것은 눈물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눈을 껌벅 껌벅 할 때 뻐걱뻐걱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 통증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깎여나가는 것 같은 그런 통증을 느낍니다. 할 수 없이 눈물샘을 찢어서 수술을 해야지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건조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제 크게 두 번째로 생각해볼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이런 영적인 회복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제 삼손의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세 가지를 보여주시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샘을 터치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정신을 회복시키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샘을 터치신 사건이었습니다. 삼손은 전투를 끝내고 나서 주저앉았습니다. 어디서도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좋은 병기나 훌륭한 지위,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어디에도 기대할 수가 없었는데 하나님이 레히의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쏟아 나온지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터치시니”가 “박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는 것입니다. 문 같은 것을 여는 것입니다. 한번 얼마나 기가 막힌 묘사인가 보십시오. 하나님이 레히의 한 우묵한 곳에 두 손을 탁 넣으시고 땅을 짝 벌리시는 것입니다. 물이 거기서 확 하고 쏟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샘을 터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의외성과 또 하나는 은혜의 넘침입니다.
첫째는 의외성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은 의외가 아닙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길러 바케스를 가지고 저 댐에까지 내려가서 물을 퍼 가지고 올라온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의외가 아닙니다. 여기에 물이 없는데 먼 곳에 물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수도를 대어서 계속 공사를 해서 겨우 물이 오게 하는 것, 이런 것은 의외 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저히 이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펑하고 샘물을 터치시면서 그 물줄기가 확 솟아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어떤 의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주님을 만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를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 자기를 진정으로 부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어떤 때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만났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지만 주님을 못 만나는 적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참석한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시와 때는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의 건조함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런 풍성한 은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시인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삼손은 목이 마르다 고 깊이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지만 이 부르짖음이 끝나고 나면 자기 앞에 샘이 ‘펑!’ 터져서 샘물이 펑펑 쏟아지리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목마르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호소했고 주님이 그것에 대해서 도움을 주기를 간절히 바랬을 뿐입니다. 방식과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에 형식에 대해서는 그가 개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터치셔서 그래서 그 물을 쏟아지게 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의외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그저 예배에 참석했다가 얼른 마치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을 놀랍게 만나고 생애 적인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분 가운데 어느 분은 곤고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이제 교회를 옮기시려고 했는데 차를 타고 가는데 눈이 쏟아져서 11시에 도저히 가시는 교회에 갈 수가 없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기는 11시 15분이라고 해서 들어왔다가 은혜를 받고 지금 신앙 생활을 잘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날 바로 그날 교회에 늦어서 이리저리 유리하다가 그래서 예배 시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았던 바로 그날 한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완전히 새로워져서 그래서 인생에 빛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리 방황하던 신앙 생활을 끝내고 정착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식이 하도 교회에 다녀서 그놈 잡으러 교회에 왔다가 은혜를 받고 변화된 그런 엄마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의외 적인 성격입니다. 언제 어디서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수 없는 때, 은혜 베푸실 수 없는 장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그렇게 놀랍게 역사 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주님이 자기의 자녀들이 얼마나 당신을 만나고 정말 풍족히 하나님의 은혜의 젖은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간절한 소원이면 주님이 어디서든지 만나주십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그렇게 만나주시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을 오늘 의외로 터치는 이 샘에서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풍성함입니다. 자, 삼손이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아서 주저앉았습니다. 삼손은 특별한 장사였고 체구도 컸을 테니까 모든지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물도 많이 마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얼마나 마실 수 있을까요? 아무리 목이 말라도 한바가지 이상 마실 수가 없습니다. 술은 열 바가지씩 먹어도 물은 한바가지 밖에 못 먹습니다. 뭐 또 거기서 고개를 끄덕입니까? 여기 교회입니다. 못 마십니다. 이것이 낭비 아닙니까? 아니 선지자에게 먹을 것도 까마귀를 통해서 날라주시는 하나님이 아니 한 사발만 딱 갖다가 주시면 되지 그곳을 터쳐서 삼손이 먹고 가면 누가 먹을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터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원망할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라. 그래서 반석을 모세가 쳐서 반석이 쪼개지면서 물이 팍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그 물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이렇습니다. 진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뭐라고 고백을 하는가 하면 아이고 참 하나님 되게 짜시네. 아주 간신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만 은혜를 주시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을 안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떤 고백이 있습니까?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감당할 수 없이 하나님이 부어주셨습니다. 받으신 은혜가 어땠습니까? 딱 맞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딱 그만큼만 주시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항상 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사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모든 사람들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합니다. 그래서 시인도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확 쏟아 넘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삼손은 오직 시원한 냉수 한잔만 마시면 살 것 같았습니다. 그 이상은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펑!’ 하고 샘물을 터치시면서 물줄기가 솟구쳤습니다. 거기에서 블레셋 일 천 명의 군사를 때려죽이기 위해서 싸우는 동안에 온 몸이 튄 그 수많은 핏자국을 보십시오. 거기에서 입을 벌려 그 물을 허겁지겁 마신 후에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는 그 물줄기에 그 핏자국을 닦아내고 온몸을 씻는 그 삼손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레히에서 터친 그 물이 솟구쳐서 그의 온 몸을 적실 때 하나님의 은혜도 그 마음을 적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놀랍습니다.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셔서 우리로 기쁨으로 띠를 띠게 하시는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깃드는 이런 놀라운 축복들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가 필요합니다. 겨우 겨우 의무감에 이끌려서 교회에 끌려나와서 앉았다가는 축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도망가야 하는 그 정도의 삶을 유지하게 만드는 은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전 인생을 주님께 드려서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삶을 드려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도 에너지가 남을 정도로 그래서 내 삶을 열심히 살면서 다른 사람의 삶도 항상 참견하고 다른 사람이 잘살기 위해서 도와주고 그것이 선교의 원리이고 복음화의 원리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서 그래서 그것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흘러가고 흘리다, 흘리다 너무나 남아서 그래서 이것을 안고 하나님을 모르는 도시,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 주님을 모르는 민족들에게로 가서 그것을 흘려보내서 그들도 그 생수에 해갈을 하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 바로 선교의 원리이고 복음화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은혜 속에서 살 수 있고 살 수 있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건조하고 메마른 삶을 이어가는 성도들인 여러분들에게 나는 오늘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넘치는 은혜가 있습니까? 정말 기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인해서 타오르는 기쁨과 환희, 감격과 신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송이 여러분들 속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찬송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는 그런 삶이 바로 주님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기대하는 삶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 자기 앞에서 터치시는 생수의 은혜의 물을 마시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건조한 심령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적게나마 십자가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메마르고 여러분들은 조금 하나님을 섬기면서 메마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명예와 부귀를 위해서 일하다가 세상의 일거리를 짊어지고 허덕이고 기쁨을 잃어버렸지만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나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기쁨을 잃어버리는 삶을 삽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엎드려졌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지고 사명을 짊어지고 주저앉은 사람들이 되었고 양쪽 다 가슴은 건조하고 메마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아무리 무거워도 그 신자의 마음속에 십자가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면 그러면 웃으면서 십자가를 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믿고 예수를 전한다고 두들겨 맞았습니다. 막 얻어맞으니까 사람들이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같이 형편없는 인간들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우리를 인정해주셨구나 그러면서 얻어맞으면서 그냥 한없이 기뻐하는 이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스데반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스데반의 설교를 듣기 싫어서 스데반에게 돌맹이를 던졌습니다. 피묻은 돌맹이가 스데반 위에 가득하게 떨어졌고 온 몸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얼굴이 어떻습니까? 천사와 같이 빛났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돌에 맞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생명과 영생의 놀라운 기쁨이 사랑의 기쁨이 그 속에 그 십자가보다도 훨씬 크게 역사하고 있었더니 그는 돌팔매에 맞아 피가 흐르면서도 자기의 영혼을 받으시기 위해서 보좌 위에 일어서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그들을 용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을 섬기면서 산다고 하지만 주님의 일만 잘되면 안 됩니다. 우리도 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일을 완수하려고 애를 썼고 완수하는 것같이 살았는데 본인은 다 꾸겨졌더라. 그런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요즘 교회당을 진다 하면서 보십시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입니다. 빨리 짓기는 해야지 되는데 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매일 저 자신의 마음을 타이릅니다. 이 일은 반드시 되기는 되는데 기왕에 한번 신나게 기쁘게 해서 그 과정 자체도 너무 너무 기쁘고 너무 너무 즐겁게 사명을 감당해나가서 이 일이 모두 이루어졌을 때 일만 이루어지고 나는 털썩 주저앉아서 삼손처럼 이렇게 흐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 나도 한없이 기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고백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외 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우리 속에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시키는 대로 살아서 거룩한 삶을 살고, 은혜가 시키는 대로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은혜가 시키는 대로 살아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이런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지 만 이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잘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이런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오늘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샘처럼 하나님이 그 땅을 열고 솟아내시는 이런 놀라운 은혜 속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이런 마음으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우리들이 옛날에 하나님께로부터 넘치는 은혜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감격하던 그 옛날이나 회상을 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여기 이 순간에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한 힘과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께로부터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 수 있는 그 내면의 힘들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환경을 이기고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의 상황으로 바뀌며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은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찬송하며 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될 때 정말 우리가 주님을 보여주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넘치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겨우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게 하는 그런 메마른 삶이 아니라 섬기고 섬겨도 여력이 남아서 더 섬기고 싶어하는 넘치는 은혜, 드리고, 드리고 다 드려도 더 드리고 싶은 그런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마음. 이런 것들이 자신 속에 계속 에너지로서 차고 넘칠 때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주님을 찾아야 할 이유입니다.
세 번째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와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주십니다. 자, 보십시오. 삼손이 물을 마시지 못해서 쓰러져 죽을 것같이 주저앉았는데 ‘펑!’ 하고 샘물이 터지면서 물이 솟구쳤습니다. 삼손이 물을 막 마셨을 것입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마셨겠습니까? ‘야, 진짜 오늘 재수가 좋은 날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셨겠습니까? ‘아니 여기 왠 물, 진짜 싸움터 하나 기가 막히게 잡았다.’ 그랬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샘이 ‘펑!’ 터지면서 그 물에 피묻은 자신의 얼굴과 온 몸이 적셔지면서 씻겨나갈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자기의 마음을 적셨습니다. 이 사람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기적적으로 샘을 터치셔서 그래서 그 물이 강수와 같이 쏟아져 나간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기적이 오늘 부르짖는 자기에게 임하였다는 사실을 이 사람이 알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한 모금의 물을 먹고 나면 다시 목마르지만 거기에서 맛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나를 버리지 않고 내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요구하고 간구 할 때 주님이 들어주시는구나. 이것을 경험했을 때 적셔지는 영혼에 이 깊은 충만함이 그의 인생 전체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화: 신학 대학 3학년 때의 일- 생애 적으로 잊혀지지 않는 곤고하고 가난한 시절을 보내셨는데 사방을 돌아보아도 누구에게 의지할 곳이 없어 매일 채플 실에 올라 가 기도하시며 또한 장학금을 타게 기도하셨는데 50만원의 등록금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100만원의 돈이 생겨 그것을 갖고 학교 풀밭에 가서 한없이 울었는데 그 울음의 이유는 곤고한 시절을 보내시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지 않으셨다는 감 격이 돈에 대한 감격보다도 더 크게 밀려왔기 때문이며, 지금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그런 종류의 경험들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이제까지 그렇게 지켜주신 하나님 이 손이 자신을 놓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도 그런 과정들을 통 해서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
삼손이 여기에서 탁 하고 터치면서 물이 솟구쳤을 때 그 속에서 아!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내가 정말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 부은 바 된 주님의 사사구나. 내가 정말 주님의 손에 의해서 붙들린 바 된 주의 일군이구나. 주님이나를 특별히 생각하시는구나. 이런 것들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내 편이시다.
외국에 나가보면 잘사는 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가난해도 어깨를 펴고 다닙니다. 조국이 있으니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돈이 많은 데도 항상 이렇게 하고 다닙니다. 물론 그렇게 보여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항상 이렇게 하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인정도 안 해줍니다. 세상에서 나라가 좀 부자라고 해도 사람들이 어깨를 펴고 다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나를 위하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확신이 그 신자의 마음속에 생겨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삶이 얼마나 달라지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확신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메마른 삶을 터치고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건조하고 메마른 삶을 거절하고 이렇게 우리 앞에서 쏟아지는 은혜의 샘을 마시면서 그 흡족한 하나님의 은혜에 젖으면서 그렇게 살 필요가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당신과의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우리 앞에서 샘을 터치고 쏟아내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 은혜의 감격이 우리로 하여금 도전할 수 없는 크리스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전해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그 주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편이시며 그리고 나의 영혼을 능히 적시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실제적인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들은 관용의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내의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용돌이치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평정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영혼의 진정한 회복을 경험하고 이렇게 넉넉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의 샘에 터침을 허락하셨을까요? 거기에서 솟구치는 샘물을 마시면서 온 몸을 씻은 후에 이제 이 사람이 정신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정신이 회복되었다”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타샤브 르호”인데 “타샤브”는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르호”는 무엇인가 하면 그의 영혼입니다. 그의 영혼이 돌아왔다. ‘혼’ 정신이. 그래서 우리들이 건조하고 메마른 삶을 살고 그러면서 시련을 당하면 혼이 빠진 사람 같습니다. 진짜 그래서 은혜 없이 시련만 많이 당하면 사람이 바보가 됩니다. 멍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섬겨서 강도 높은 헌신을 강요받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가 이 속에 있으면서 이렇게 훈련을 받았을 때는 그것이 요긴하지만 은혜는 없으면서 환경에 의해서 막 강도 높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되는 식으로 강요를 받으면서 자라온 사람들은 사람이 망가집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람이 망가진다고 하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데 있을 수 있습니다. 망가집니다. 사람이 막 뒤틀리고 이상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망가지고 나면 이제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영혼의 회복이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삼손이 그 샘에서 확 쏟아지는 물을 먹으면서 한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계속 쏟아지는 샘물을 보면서 자신의 생애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소입니다. 그럼 뭘 해야 되는가 하면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이름을 붙였는데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엔학고레’라고 붙였습니다. ‘엔’ 은 ‘샘물’ 그 다음에 ‘학’은 영어의 ‘The’ ‘그’ ‘고레’는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르짖는 사람의 샘이다. 그럼 여기서 그 부르짖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삼손 자기 자신입니다. 뭘 한 것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이렇게 샘물을 터치고 자신에게 쏟아져 나오는 의외 적인 은혜, 풍성한 은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새 인상을 갖게 만들어주는 넘치는 이 은혜의 경험이 무엇에 결과였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위기 속에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목마를 때에 간절히 부르짖은 이 기도, 메마를 때에 간절히 부르짖은 응답이 바로 엔학고레였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 앞에서 이런 은혜의 샘을 터치십니다.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맛을 보게 하십니까? 어떤 사람에게 '이제는 그만 내 잔이 넘칩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넘치는 기쁨과 은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평화를 맛보여주십니까?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통상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사모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에 대한 기도의 응답으로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마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메마르게 살아가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두 번 잘못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잘못은 여러분들이 잘못해서 메말랐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메마름이 여러분 자신에게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점에서 두 번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영적인 메마름과 건조함은 우리 자신의 문제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메마르고 건조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이렇게 풍부하게 적시고 싶어하십니다.
아, 오늘 이 말씀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냥 하나님이 탁 벌리시니까 물이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냥 파내고 빨대를 집어넣어서 꺼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딱 벌리시니까 그냥 기다렸다는 듯이 ‘펑!’ 터지면서 솟구쳐 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하수 시추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제대로 된 곳에 가서 보면 구멍을 뚫으면 ‘펑!’ 하는 동시에 하늘로 확 물이 솟구쳐 오릅니다. 온천 같은 곳은 특히. 그렇게 하나님이 터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쏟아지는 은혜를 부어주시고 싶어하십니다. 특이한 은혜 속에서 살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그 대가로 여러분들을 사셨는데 겨우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힘겹게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주님이 기대하셨을 것 같습니까? 그랬더라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셨을 것이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진리 가운데서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놀라운 은혜를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 자신의 영혼의 메마름과 건조함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하나님 앞에 필요로 하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그 은혜와 긍휼에 목마른 사람, 자신에게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어떤 힘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대해서 갈급 해서 주님께서 자기 앞에 그런 은혜의 샘을 터쳐 자기를 이 건조하고 메마른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부르짖는 그 사람들의 것입니다.
어제 열린 신문이 나왔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어느 형제가 글을 썼습니다. 수련회 때 은혜 받은 이야기를 쭉 썼습니다. 읽으면서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자기는 생애 적인 은혜를 받았는데 그냥 수련회 가기 전까지 정신없이 이일 저 일을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수련회 가기 하루 전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수련회에 가기로 해놓고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남았으면 기도도 해보고 기도원에도 가보고 할텐데 내일이었습니다. 하루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하루 금식이 금식입니까? 하루를 그래도 금식하려고 마음을 갖고 작정을 했습니다. 하루는 ‘금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밥 안 먹고 기도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금식기도’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한 삼일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밥을 안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래야 뭐 밤에 잠잤을 것이고 볼일을 다 봤을 테니까 몇 시간이나 되었겠습니까? 실제 시간이. 그런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짧은 시간이지만 수련회가 다가왔는데도 은혜 받을 마음의 준비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하루동안 밥을 안 먹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참석하니까 첫날부터 하나님께서 막 은혜를 부어주셔서 자기의 마음속에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불같은 욕구를 불러일으키셔서 그래서 생애 적인 변화를 주셨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루 그랬는데도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시고 그런 만남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삼손을 보십시오. 얼마나 부르짖었습니까? 당나귀 턱뼈를 휘두르면서 싸울 때 그때 기도하면서 싸웠겠습니까? 끝내고 나서 주저앉아서 목마르고 죽게 되었으니까 하나님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주님 제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제가 목말라 죽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부르짖으니까 주님이 그 샘을 터치셨습니다. 놀라운 생수를 공급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의 시간도 중요하고 길이도 중요하고 횟수도 중요한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깊이입니다. 진짜 그 사람의 영혼에 깊은 밑바닥에서 솟아 나오는 억제할 수 없는 호소, 이것이 갖는 힘은 형식적인 기도 그 수많은 시간에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영적인 메마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목마른 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정말 영혼의 건조함과 메마름을 벗어나서 주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정말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또 하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들이 영적으로 메마르고 건조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는 정답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것인데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간절히 부르짖어, 그럴 때 ‘네’ 하고 시작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건조한 사람이 아닙니다. 메마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영적 순발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육적 순발력은 대단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육신의 소욕에 있어서 억제할 힘이 없습니다. 뭘 먹고 싶으면 막 먹어야 합니다. 옷을 사 입고 싶으면 빚을 내서라도 뿅! 하고 달려가서 사 입어야 합니다. 어디 놀러가고 싶으면 카드로 긁어서라도 갔다가 와야지 됩니다. 그것이 육적 순발력입니다. 그런데 영적 순발력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 기도하지 않고 있다가도 기도해야지 되면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적 순발력입니다. 막 놀러 가는 것으로 정신이 팔렸는데 말씀을 들어야지 하면 정돈되고 조금까지 있었던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말씀 속에 쫙 빨려 들어와야지 그것이 영적 순발력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메마른 사람들에게는,
그러니까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심령 깊은 곳에서 기도를 하면 들어주시잖아. 그럴 때 그런 충고가 이런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데는 도움이 별로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그 비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비장의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많이 있는데 시간상 두개만 오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야지 저도 다음에 또 하지요. 다 가르쳐주면 나를 이제 더 필요 없다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두 개만 오늘 알려드리겠습니다. 뭐에 대해서 알려주는가 하면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메마른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부르짖음으로 기도해야지 만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에 새로운 소생함을 주시는데 그렇게 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지 되나. 그것입니다. 두 가지인데 우선 첫째는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야 합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생각의 흐름을 정서가 좌우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서 생각이 좌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마음을 데워야 합니다. 그러면 생각이 은혜로운 쪽으로 생각이 흘러갑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우리 속에 있는 육적인 기질과 패역, 오래된 불순종의 습관 이런 것들은 단번에 고칠 수는 없습니다만, 그것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은혜로 데우는 것입니다. 은혜로 데우면 생각이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을 자꾸 따라갑니다. 간헐적으로 다른 생각도 나지만 그러나 마음에 의해서 생각이 지배됩니다. 그러니까 은혜로 데우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도하려고 하는데 기도할 힘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해결이 있다고 해서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데 도저히 십분 이상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밀려오는 졸음, 아니면 번잡한 생각 이런 것들 때문에 도저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때는 마음을 데워야 하는 것입니다. 데우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참석한다든지 아니면 흉금을 터놓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과 은혜로운 대화를 나눈다든지 아니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는 감동적인 책을 읽는다든지 그것도 안 되면 은혜로운 영화를 본다든지 아니면 뭔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그 사람들이 느끼는 바를 함께 공유하든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마음이 건조해질 때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시편을 읽습니다. 시편을 읽거나 예전에 읽은 책이라도 좋으니까, 괜찮습니다. 지금 새로운 정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새 마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자기의 마음을 가장 많이 움직였던 그런 책들을 읽는 것입니다. 경건 서적들을, 그러면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지게 됩니다. 그때에 마음이 데워지고 나면 조금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때에 조금씩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을 피우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작은 불을 피우다가 나중에는 크게 피우듯이 조금씩 될 수 있는 만큼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데우는 작업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기도가 안 되면 안 되는 것까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지 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우면 심지어는 그런 마음이 자신에게 옳지 않지만 있다는 것까지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움과 그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런 메마름 속에서 벗어나는 첩경입니다.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은 오늘 이 사실을 명심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데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이렇게 메마른 삶을 살면서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삶을 재편해야지 됩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여러분들이 세상 사람이 되려고 해도 믿는 사람들이 안 하는 짓을 해야지 만 세상 사람이 되는데, 여러분들이 정말 진실한 신자가 되려면 세상 사람이 안 하는 일을 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로 이런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데워지기를 원한다면 안 읽던 책도 읽고 찾아다니지 않던 좋은 신앙의 사람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대화도 하면서 살아가야지, 예전에 살던 대로 똑같이 말갈 때 소 갈 때 가면서 그나마 예배 시간에 조금이라도 은혜 받았던 것들을 다 쏟아버리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기를 매몰시키면서 살아가면서 영적인 회복을 기대하는 것, 그것은 가증한 것입니다. 회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마음을 데우고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솟아나는 정말 주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풍요로운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잘 간직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들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서 그래서 실패와 불순종을 숙명처럼 알고 살았던 여러분들이 변화되어서 정말 주님으로 인해서 솟아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 속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로 다시 세움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곤고하고 메마를 때에는 주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징벌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대상21:7-8)
주일 아침마다 ‘하나님을 찾을 때’라는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범죄 하였을 때 그때가 하나님을 찾을 때라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역대상 21장은 다윗의 생애를 말함에 있어서 잊혀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다윗은 생애 오랫동안 두고 영향을 받게 될 한 사건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은 다름이 아닌 인구조사의 사건이었습니다. 앞부분에서 20, 19, 18장 앞으로 넘어가 보면 거기서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 뿐 아니라 이제 전쟁에 있어서 여호와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아주 영명한 군주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면 다윗에게 점령을 당하게 될 위험에 놓여있는 나라가 더 큰 나라에게 도움을 호소하려면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주는 나라까지도 다윗의 손에 붙이셔서 모두 그들을 굴복시키십니다. 그렇게 해서 위로는 아람 다메섹에 이르기부터 시작을 해서 아래로는 블레셋 족속에 이르기까지 모두 복속시켜서 노예를 삼거나 아니면 주종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에게서 곡물을 받는 그런 큰 나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래 동안 꿈꾸고 그리워했던 그 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은 최대의 판도를 기록하면서 이제 이스라엘 역사의 지도를 바꾸어놓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전쟁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놀라운 승리를 주셨는데 그래서 우리가 읽은 21장 바로 앞에 부분에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그를 이기게 하시니라” 그래서 계속 해서 승전하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21장에서 인구조사라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선 죄라는 사실을 먼저 말씀을 드리고, 그리고 이것이 무슨 죄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세워지고 난 후에는 항상 인구조사를 합니다. 이미 벌써 몇 천년 전의 역사기록을 봐도 인구를 조사한 흔적들이 나옵니다. 오늘날도 인구조사를 해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데도 인구조사를 해서 경제, 산업, 국가의 정책, 그리고 군사 이런 것들을 위한 자료로 활용을 합니다. 그러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면 왜 다윗에게는 그렇게 큰 죄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왕이 자기의 나라의 백성의 머리 수를 헤아릴 그 권한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치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인구조사를 하게 된 동기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당시 인구조사는 특별히 싸움에 나갈 군인들의 숫자를 헤아리기 위한 인구조사였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단의 역사이지 사실 인구를 조사를 해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과거를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전쟁에 이겨왔으니 이긴 전쟁인데 무슨 지금에 와서 인구조사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지금도 무슨 엄청난 군대를 거느린 대적들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도대체 저 군대를 맛 설 수 있겠는가 해서 계산을 해서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위기에 놓여있는 것도 아니니까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 미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면 그 전쟁이 이기는 것이고 주님이 그들을 버리시면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인구조사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무엇에 씌었는지 모르지만 인구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21장에 보면 사단이 다윗의 마음을 격동시킨 것입니다. 그 책임은 사단에게 있는데 왜 야단은 다윗이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령도 마찬가지고 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된 마음에만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이미 사단이 이렇게 기쁘게 다윗의 마음에 찾아와서 격동시켜서 그로 하여금 군대의 수를 헤아리게끔 만들었던 그 이면에는 다윗의 마음속에 이미 사단과 친한 마음이 형성이 되었기 때문에 사단이 온 것입니다. 와서 역사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단이 좋아하던 마음이 무엇이었는가. 결론부터 내면 교만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제껏 승리를 해왔던 그런 승리를 지금도 주고 있고 앞으로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윗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승리할 때에 그 승리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기를 축복해주시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 수많은 전쟁을 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훨씬 큰 나라도 이기게 하셨고 질 것 같은 싸움도 뒤집어서 다윗에게 승리를 안겨주셔서 어디에 가든지 승전고를 울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입니다. 그것은 군대의 숫자를 헤아리는 그것은 하나님을 굉장히 마음 아프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괘씸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아주 토속적인 번역입니다. 괘씸하게 여기셨다고 하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 악이었다” 혹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악이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죄로 인해서 7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야! 하나님 굉장히 무서우신 분이시다. 인구조사를 한번 했더니 하나님께서 7만 명을 쓸어버리시는구나.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를 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이 다윗을 향해서 마음 아파 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왕이 군대의 숫자를 헤아리는데 뭐가 그렇게 잘못한 것입니까? 정말 이렇게 7만 명의 백성들이 목숨을 잃어야 될 정도로 그렇게 어마어마한 죄악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 규칙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된다면 우리 중에 누가 살아남아 있겠습니까?
그랬는데도 하나님이 이렇게 엄격하게 다루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거무죽죽한 옷은 겨울 내내 세탁을 하지 않고 입고 다녀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옷을 집어넣을 때가 되어서 빨래를 해보면 거기서 나오는 새카만 때를 보면서 졸도를 합니다. 하얀 옷을 아마 그 정도까지 입었으면 까마귀가 와서 ‘사촌’ 그랬을 것입니다. 하얀 옷은 김치 국물이 조금만 떨어져도 못 입습니다. 빨아야 합니다. 그런데 까만 옷은 김치 국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털어 낸 다음에 입습니다. 나만 그런 것인가. 하여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진노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리고 얼마나 이 사람의 순수한 신앙을 기뻐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싸움에 이겨도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싸움인데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안 되었는데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예화: 어느 그리스도인의 이야기 - 가난하고 어려움 가운데 기도를 많이 하고 사업을 시작했는 데 하나님께서 사업에 복을 주셔서 그 사업이 잘되어 교회에도 물질로 많이 섬기고 구제 도하고 종업원들에게도 잘하니까 존경도 받으며 윤택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어울리다 보니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왜 이렇게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되나 하고 생 각하다가 깨달은 사실은 사장이기 이전에 성도라는 사실이 자기 가슴속에 파고들었다는 이야기)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이 매일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이 찔림을 주십니다.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아니, 일주일을 내가 무슨 춤을 추러 다녔어. 아니면 화투를 쳤어. 아니, 뭐 나쁜 짓을 했어. 그래도 사느라고 열심히 살았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인가. 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 어떤 때 짜증나지 않습니까, 힘들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매일 나만 미워해.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매우 특별히 생각하신다는 표징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인구조사를 했는데 그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습니까? 그런데 이 사건은 순결하던 다윗의 신앙에 떨어진 오염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세탁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강력하게 커다란 범죄로 보시고 그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 사건을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시는 이유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셨는가. 이 죄가 결국 무엇이었는가. 교만의 죄였습니다. 교만의 죄, 그러면 왜 우리는 대게 잘난 척 하는 사람이 생각이 납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몇 명씩은 있습니다. 정신병적 증세입니다. 잘난 척 하는 것도, 그래서 되지도 않게 턱도 없으면서 막 교만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비웃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사실 여기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뿌리를 캐들어 가보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가만히 보십시오. 도대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자기가 혼자 최고라고 그러면서 공작처럼 꼬리를 펴고 재는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 사람을 인정을 해줍니까? 다 거기서 그 사람이 떠들 때는 듣다가 돌아갔으면 자기네끼리 이렇게 합니다. 돌았다고, 그러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무엇인가를 다윗에게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구조사를 한 것이 뭐가 그렇게 죽을죄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구조사를 한 죄는 죽을죄가 아닌데 그것을 하게 만들었던 사단에게 호응한 다윗의 마음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보다도 자신의 커지는 왕국의 판도와 모든 군사들의 숫자를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탁 교만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강력하게 이 죄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교만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없이도 자기 혼자 넉넉히 살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다’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힘으로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을 졸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다윗의 삶은 어땠습니까? 그러했습니다. 매순간마다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매 전쟁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의 승리의 축복 없이는 내가 준비한 많은 군대와 나를 따르는 많은 충성스러운 신하들, 그들이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다윗이 처음 이제 전쟁터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골리앗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그 사건을 역사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그 골리앗에게 물매 돌을 가지고 나와서 던졌을 때 다윗은 그때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맞춘 것은 사실이지만 평소에도 물매 돌을 던지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술이 뛰어났습니다. 습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기술을 의지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의 저 원수를 쓰러트릴 수 있는 능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물매 돌을 여러 개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준비하고 갖추는 것이 자기의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준비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일을 하신다고 생각을 했지 하나님 대신에 내가 이 기술을 저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다윗이 살아온 것입니다. 임금이 된 후에도.
그래서 다윗이 쓴 시를 보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조금만 기도가 안 되어도 하나님이나를 잊으셨는가. 내게 무슨 악이 있는가. 주님의 은혜가 이제는 다하였는가. 이렇게 하면서 한없이 괴로워하던 다윗이었습니다. 그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너무 너무 마음 아파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이 역사 속에서 오랜만에 만난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 이 다윗이 일평생을 당신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전적으로 의지가 되시고 그리고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전적인 도움이 되시는 그런 생애를 하나님이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 대신에 자신의 군대 숫자를 의지하는 교만을 보였을 때, 그때 하나님의 마음은 커다란 아픔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런 교만이 흐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신병자는 아니지요. 인정해주지도 않는 사람 앞에 뱀처럼 자기를 높이고 교만하게 이러는 적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내면의 속 깊은 곳에서 우리 주님을 의지합니까? 우리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합니까? 주님이 없으면 나의 영화와 영광, 지위와 재산, 나의 건강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까? 내게는 집도 있고, 돈도 있고, 자녀들도 있고,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을 덜 의지할 필요가 있다고 내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정말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아침마다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절망감에서 어린아이처럼 아버지를 붙든 그 손을 놓지 않고 아직도 한참 남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그런 하나님을 향한 집중된 사모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사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말할 수 없는 친교와 그리고 비추어오는 은혜의 빛, 그것을 가장 행복하게 생각하는 마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 깨트려진 마음, 상한 마음, 사업도 잘 되고 목회도 잘되고 또 자녀도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모든 것이 자기의 뜻대로 되도 항상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목마름, 날마다 하나님의 더 많은 사랑,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를 그래서 하나님 앞에 더 성결하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주님의 마음에 더 큰 기쁨을 드리면서 살고자 하는 그 지울 수 없는 목마름이 이 속에서 샘처럼 계속 솟아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그것을 원하십니까? 더욱이 여러분들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더더욱 여러분들이 그런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았으니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목마른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잠시의 성공에 취하는 평안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잠시의 승리에 도취되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승리보다 더 큰 패배를 맛보는 어리석은 군인과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제껏 우리들이 실패했다면 그 실패 속에서도 이만큼 극복하며 살 수 있도록 붙들어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걸어온 신앙의 길이 올곧은 길이었습니까? 지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었고 심지어는 고무신 거꾸로 신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찾아오셔서 우리를 돌이키셔서 바른 길을 걸어가게 하신 주님이 누구이십니까? 우리발로 우리가 범죄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어두움 속에서 고통을 받고 울고 있을 때 그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오셔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분이 우리 주님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정말 우리의 인생의 과거가 주님 없이 살 수 있는 인생이었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주님 없이 앞으로는 또 우리가 주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절박하게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이 우리를 붙드시는 손, 우리의 사업을 붙드시는 손, 그리고 우리의 목회를 붙드시는 손, 우리가 섬기는 섬김을 붙드시는 손, 주님이 놓으시면 안 됩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만이 겨우 주님의 사랑처럼 살아갈 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정말 그렇게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인생의 전부이고 그리고 주님 없이는 내 모든 승리와 성공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는 그 고백을 현재적으로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 모든 것이 교만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 마음은 사단을 향해 준비된 마음이고 사단은 그렇게 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를 향해 농익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찾아가서 오늘 다윗과 같이 이렇게 쓰러트려 넘어트려서 커다란 패배를 경험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마다 이렇게 주님 없이는 우리의 승리도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의 업적, 우리의 성공, 이런 모든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들이 그런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이런 마음을 간절히 갖기를 원합니다. 잘될 때에 조심하십시오. 번영 가운데 항상 조심하십시오. 사업이 잘 될 때, 그때 여러분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주님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교회가 잘 될 때에도 목회자와 성도들은 늘 조심해야지 됩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자꾸 오네’ 이런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겠습니까? 매순간마다 새로 만나는 한사람의 영혼도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응답이구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속에서 사는 것이 정말 겸비한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놓쳤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무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징벌하실 때 하나님은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배려를 하셨습니다. 3년 동안 기근이 들어서 온 나라가 굶주릴 것인가, 석 달 동안 전쟁에 패배해서 죽을 고생을 하며 적군들에게 쫓겨다니겠는가, 아니면 삼일 동안에 온역이 있는 것을 원하는가. 온역은 전염병입니다. 다윗이 세 번째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7만 명이 죽었으니까 하루에 2만 5천명 가까이 온역으로 죽어나간 것입니다. 대가족 사회이니까 7만 명이 10명의 가족들과 함께 살던 사람이었다면 70만 명이 직접적으로 자기 집안에서 죽음을 경험했고 그리고 형제와 인척들까지 다 경험하면 최소한 200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이 죽음의 소식을 들으면서 친인척들이 죽은 것으로 인해서 아파해야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온 나라가 거대한 초상집으로 바뀐 것입니다. 장의사는 아마 쏟아져 나오는 그 7만 명의 시신을 다 치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전대미문의 초상을 보면서 그 다윗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징벌하셨습니다. 그 죄가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게 두 번째로 이 범죄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찾은 것이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래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았는가.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오늘 성경에 보니까 죄에 대한 깊은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주 앞에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큰 죄인 줄을 알았더라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씌운 것입니다. 다윗이 신령합니까, 모압이 신령합니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영적 수준이 낮은 사람도 이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간청을 했지만 다윗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해라. 그리고 밀어붙여서 인구조사를 9개월 20일 동안 인구조사를 하게 했습니다. 그 인구조사가 장기간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다윗의 마음속에 이렇게 인구조사 하는 것이 큰 죄였다 라고 하는 것이 가슴에 스며들어왔으면 그러면 중간에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는 항상 이것은 굉장히 큰 죄이다. 확신을 하고 죄를 짓는 법은 없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 굉장히 큰 죄인데도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사소한 것이라고 끌어 내려오면서 죄가 요만하게 보이게 만든 다음에 그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의 심리학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런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나서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진노하시는 그 모든 곤경을 경험하면서 그가 자기가 지은 그 죄가 사소한 죄가 아니라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회개할 때가 되면 아주 사소해 보이던 죄가 크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가 되면 큰 죄가 아주 사소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가 큰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커다란 징벌을 당하면서 그는 여기에서 영적으로 크게 각성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죄를 재는 기준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교회를 재는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재면 왕인 자신이 오랜만에 인구조사를 한번 한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 다윗의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죄악이었고 그리고 이 죄악을 통해서 죄 없는 백성 7만 명이 시체가 되어서 실려 가는 광경을 보면서 다윗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 교만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구조사를 한 죄를 하나님 앞에 큰 죄라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범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혼의 어두움 속에 있지 않습니까? 기도해도 기도의 문은 열리지 않고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섬겨도 섬기는 기쁨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이런 영혼의 무감각은 바로 이런 범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이 지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여러분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혹은 여러분들이 지금 지은 죄들이 그렇게 크고 중대한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너그러운 마음들,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지 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은 죄,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 그리고 내가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죄들이 사실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았고 그래서 나로 말미암아서 애매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면서 신음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하면서 그 죄의 크기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정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 제가 잘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것이 아니라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똑같은 크기로 자기의 죄를 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사죄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나의 죄를 사하여 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범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언제나 똑
바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순수한 신앙의 사람, 다윗과 같은 순결한 믿음의
사람도 그렇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너무나 마음에 합당하게 생각하는 나머지네 몸에서 태어나는 그 아들에게 영원한 나라를 줄 것인데 그에게서는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사울에게서 나라를 뺏어서 너에게 준 것같이 그런 식으로 하지 않겠다. 그 나라는 영원하고 무궁할 것이며 하나님이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최상급의 표현을 쓰시면서 다윗은 물론이거니와 다윗의 자손들에까지 한없이 축복하시는 광경을 봅니다.
그러나 다윗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이 사랑을 잊어버렸고 그리고 영혼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가장 시급한 것이 죄의 용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이 수없이 온역에 걸려 죽어갈 때에 방을 붙여서 용한 의사들을 불러모으지도 않았고 그는 오로지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잘못해서 징벌을 받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저 하나님이 징벌하셔서 생기게 된 문제들을 수습하러 다니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매꾸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대신에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죄는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오는 참다운 친교의 창문을 가로막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부어주시던 은혜의 창을 닫으시자 다윗은 정말 냉냉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창문을 닫으실 때에 다윗이 우리야까지 죽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원래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날마다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의 마음속에 참된 신자로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진실한 몸부림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이 신자답게 살수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서 떠나가고 나면 그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신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렇게 죄의 용서를 구하면 죽은 백성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죄와 자기의 악함을 하나님 앞에 용서하고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이 다시 자신과 평화를 회복해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고 자신이 그렇게 왕으로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이 세상에서 사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 가운데 곤고하고 영혼의 어두움이 왔을 때 우리는 흔히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흑암에 그늘에 앉는 것은 자신의 죄와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것을 깊이 뉘우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를 다시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 속으로 다시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범죄 가운데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전심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그것이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영광, 많은 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는 비교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을 주고 바꾸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혼의 참된 축복, 주님께로부터 오는 영혼의 참된 만족은 이 세상에 있는 지위와 이 세상에 있는 성공의 기회와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교만으로도 소문난 사람이 되었지만 그러나 자기의 죄의 용서를 구하는 면에 있어서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새로운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생애에 보면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 사건이 가슴에 깊이 새겨져서 일생 동안을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살아갔습니다. 왕이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나라와 온 땅을 다스리면서도 사실은 자신에게는 자신조차 다스리시는 더 높은 왕이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큰 나라를 통치하면서도 사실은 이 나라를 썩고 없어지는 나라이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진 나라가 도례할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다윗이 이런 사건을 통해서 받은, 연단을 통해서 얻게 된 놀라운 신앙의 인격의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다윗이 막상 하나님이 징벌하셔서 삼일의 온역이 찾아왔을 때 그래서 자기의 백성들이 한없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을 때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지 그 중보의 기도를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16절입니다. “다윗이 눈을 들어보니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가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데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나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역으로 죽어가면서도 복된 백성들이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지도자들이 얼마나 필요한가.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 백성들이 얼마나 행복할까. 교회 지도자들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의 백성들이 다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왕의 옷을 벗고 그리고 거친 베옷을 입고, 왕은 그런 옷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왕은 상복을 입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옷을 입고 그리고 땅에 엎드려서 왕이, 한 나라의 지존인 그 왕이 땅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펑펑 울면서 이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인구조사를 하게 한 사람이 제가 아닙니까? 제가 행한 악이 아닙니까? 이 백성이 무엇을 했습니까? 제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치시려면 나를 치시옵소서. 그리고 내 집을 치시옵소서. 사랑하는 이 백성들은 살려주시옵소서.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만약에 다윗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이 백성을 안 치셨을 것입니다. 폐하, 폐하가 불순종해서 7만 명이 죽었나이다. 그래, 얼마 안 되네. 인구조정도 되고 일자리도 늘어나고 구조조정을 하나님이 직접 해주셨구나. 그럴 것이 아닙니까?
옛날에 그랬다고 합니다. 저 남쪽 지방에 가서 데모하고 그럴 때 정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이 사실이었는지 아닌지 죽었으니까 물어볼 수가 없지만 “각하, 20만만 쓸어버리면 됩니다.” 그랬다고 합니다. 이 사람과 한번 비교를 해보십시오. 하나님 이 백성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나의 양떼들이 무엇을 잘못 했습니까? 잘못이 있다면 다 저의 잘못입니다. 다윗은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백성을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너무 사랑했는데 네 마음이 변하고 교만해져서 나를 의지하지 않을 때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너 한번 네 사랑하는 백성이 죽는 것을 통해서 봐라. 그리고 다윗이 가장 사랑했던 그 백성들을 하나님이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7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간 것입니다.
어땠겠습니까? 다윗의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걷어간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은 이런 마음, 베옷을 입은 마음,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건 마음, 사랑하는 양떼들은 살리고 자기는 죽고 싶은 마음, 그 목자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이 모든 백성들의 이 고난과 눈물 그리고 이 죽음과 고통, 이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한 것입니다. 기도한 것입니다. 죄와 악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악으로 인해서 내 백성들이 죽어가고 나의 죄로 인해서 내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드리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핑계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뭐 때문입니다. 뭐 때문입니다. 교회가 신통치 않습니다. 막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어떻습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끌어안으면서 고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죄를 인해서 이 백성들을 치지 마시옵소서. 이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죄 없이 죽어 가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 그들이 당하게 될 미래의 형벌을 두려워하시면서 하나님 이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모르기는 뭐 모릅니까? 다 알지. 그런데도 주님께서 그렇게 변명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저들의 죄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마지막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하나님, 이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주님, 용서해주시옵소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님과 같이 죄가 없는 분은 아니셨지만 이 커다란 불순종과 징계를 통해서 철저하게 자기를 깨트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그 이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 부드러운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치시려면 저를 치시옵소서. 우리의 집을 치시옵소서. 나의 양떼들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범죄한 가운데 주님의 징벌 가운데 시련과 고통 속에서 눈뜨기 어려운 환난과 어려움을 만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이런 엄청난 시련과 고난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영혼의 어두움이 깃들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서 사업도 잘되고 가정도 형통하지만 영혼이 파리하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저희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시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도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절히 매달리면서 기도해야지 됩니다. 영광의 옷을 벗고 베옷을 입고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진토에 얼굴을 묻고 주의 자비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 이렇게 처절하게 기도하는 다윗을 주님께서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그의 많은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래서 이제 일평생을 사는 동안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동행하는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이렇게 불러서 하나님 앞에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의 참 사랑을 알고 배워서 이렇게 주님의 목마른 사람, 주님의 은혜에 갈급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도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다윗처럼 이런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는 교만의 죄에서 돌이켜서 이렇게 고백과 사죄와 그리고 간구가 있는 그런 신앙의 삶을 살아서 주님을 더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아 오히려 그 위기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8.사명 있을 때 찾는 하나님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28:9下)
주일 오전마다 살펴보는 ‘하나님을 찾을 때’라는 시리즈입니다. 오늘 역대상 28장은 특별히 다윗의 말년에 거의 유언 적인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의 충고를 받고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 온 백성과 및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건축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함을 이루게 하는 장소인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간곡히 하나님 앞에 성전 건축을 할 뜻을 비쳤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헌신을 마다하시고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솔로몬은 하나님의 집을 지을 귀한 사명을 맡게 되었는데 그 사명을 맡겨주시는 자리에서 이제 다윗이 자신의 온 생애의 신앙의 경험이 농축된 가르침을 솔로몬에게 주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귀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제 이 본문 구절 하반 절을 살펴봄으로서 우리가 사명을 받았을 때는, 우리에게 사명이 있을 때에는 더더욱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하반 절에서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주는 귀한 교훈은 두 토막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도에 근본이 무엇인지를 요약한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성품을 이 다윗이 말하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저를 찾으면 만나지만 버리면 하나님도 너를 영원히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교훈은 “여호와께서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모든 마음들을 하나님이 아신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생각들의 계획을 하나님이 분별하신다.” 모두 진행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한 이래로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의 마음을 찾으시는 일입니다. 여기 “감찰하신다”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뒤에 나와 있는 “저를 찾으면” 이라고 되어 있을 때 “저를 찾으면”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감찰한다”라고 번역된 것은 그냥 감독하듯이 사람들을 흩어본다는 뜻이 아니라 ‘많은 마음들 중에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들을 간절히 찾으신다’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하나님을 찾는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 속에 많은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 중에서 자기를 향한 마음이 순전한 마음을 찾기에 목마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막 왕이 되려고 하는 솔로몬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 인생의 경험, 신앙의 경륜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다윗을 거목에 비유한다면 이제 솔로몬은 묘목에 불과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인생의 경륜과 신앙의 깊이에 많은 차이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런 가르침,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찾으시나니...”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들의 계획을 분별하고 계시나니...” 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깊은 신앙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미 이새의 집에서 이름 없는 목동으로 양을 비롯한 짐승이나 치며 지낼 때도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추구하는 경건한 신앙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등극한 후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헤브론에서 7년을 다스렸고,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33년을 통치하므로 40년의 세월동안을 한 나라를 경영해간 제왕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제왕으로서의 그의 삶은 신앙과 연결할 때 결코 평탄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이 큰 범죄로 인해서 수없이 백성들이 온역으로 죽어 가는 징계의 과정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들이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집안 싸움도 보아야 했고 심지어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자기가 낳은 자식에 의해서 겁탈을 당하는 이 비극적인 상황도 모두 경험해야 했습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인생의 시련과 고난에 위기를 다 지났습니다. 싸움터에서 수많은 승리를 경험했고 나라를 경영해서 이스라엘의 어떤 왕보다도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고 모든 후세의 왕들이 다윗에 의해서 통치되던 이 왕국의 영광을 그리워할 정도로 성공적인 왕국의 경영을 했습니다.
그런 연고선서의 모든 삶을 살면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발견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분별력은 워낙 뛰어나서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가장하고 살아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시인 다윗은 뼈저리게 경험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다윗은 인구조사를 하는 범죄 사건과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의 사건을 통해서 영혼의 깊은 어두운 나락에까지 떨어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들에 대해서 놀랍게 눈뜨게 되었습니다. 범죄가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풍부함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가 범죄조차도 오히려 그가 깊이 있는 영성을 소유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특별히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뼈저리게 터득했습니다.
이 다윗의 역사 서에 나오는 다윗의 설교를 쭉 모아서 성경을 읽어보면 아주 유사한 성경이 66권 가운데 한 곳이 있습니다. 어디인지 아십니까? 신명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읽은 이 본문도 가만히 천천히 읽어보면 마치 모세가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은 신명기의 분위기와 아주 똑같습니다. 물론 다윗 시대에는 율법이 아주 중요한 성경이었습니다. 물론 선지자들의 글도 있었지만 그러나 선지자들의 글보다는 이 다윗이 오히려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경에다가 절대적인 권위를 두었습니다. 오경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신명기도 잘 이해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읽어보면 이것은 모세의 신명기를 읽으면서 배운 것을 지금 여기서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신앙생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그 진실한 경건의 실천들이 가져온 그런 결론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다윗의 입을 통해서 아주 체험적인 고백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위대한 번영도 경험했고 심지어는 원수들에게 쫓겨서 재를 무릅쓰고 맨발로 도망을 가는 비극적인 상황도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운데서 그가 깨닫게 된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오늘 이 다윗이 깊이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 그것이 다윗이 왕으로서, 장군으로서, 시인으로서, 행정가로서 일생을 살아오면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경험한 아주 뼈저린 체험이었습니다.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들을 가지고 살아도 하나님은 수가 많다는 이유 때문에 그 마음을 감찰하심에 있어서 실수하시는 적이 없고, 사람들의 한 마음속에 깃드는 생각이 수없이 많아도 그 생각의 계획들을 분별함에 있어서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윗이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훌륭한 신앙의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한결같았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생각들의 계획을 분별하신다” 라고 고백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마음을 찾으신다” 라고 다윗이 고백했을 때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감추면서 살아야 했던 영혼의 어두운 때를 생각하면서 이 고백을 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윗이 범죄한 이후에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서 비유로 말하면서 왕인 다윗을 꾸짖을 때까지 다윗이 깨트려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감추고 하나님 앞에 토설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숨겼을 때, 그는 바로 이렇게 자신의 모든 생각들의 계획을 하나님 앞에 감추며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는 고백하기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토설치 아니하므로 그 마음이 녹는 것과 같았고 여름에 가뭄과 같이 고통을 받았던 사실을 여러 군데서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에게도 이처럼 우리와 다름없이 한결같은 마음이 아니라 이중적인 마음을 하나님 앞에 품어본 때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시종일관 자기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생의 노년에는 하나님 앞에 신앙을 회복하게 만드셔서 오히려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성공의 가치를 새롭게 파악하고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사랑하는 아들에게 현실적이고 가슴에 와 닿는 신앙의 충고를 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한때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때가 없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인생 전체를 보면 그는 역시 한결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종여일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수많은 사람이 다윗 이전에도 이후에도 왕으로 등극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주님의 손에 쓰임을 받으면서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너무나 소수였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주님의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다윗은 한때 이새의 집에서 짐승들을 치는 비천한 목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억하셔서 다윗의 집안을 택하시고 다윗이 위에 앉음으로서 이제 유다 지파에 의해서 왕이 계승되고 그 왕위가 계속 이어져서 그 유다의 자손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되어 다시 영적인 왕위가 이어짐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위가 영원하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이 수많은 대적들을 이끌고 하나님 앞에 용맹을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되어서 주권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조차도 다윗을 잘 기억해주지 않는 이새의 집안에 한미 한 아들이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많은 학식도 뛰어난 용맹도 한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뛰어난 지략도 없었던 그때에 하나님이 유독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무엘 조차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이새의 아들 보잘 것 없는 다윗을 그렇게 기쁘게 여기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의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를 볼 때 기쁘게 만들어드렸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새의 집에는 다윗 말고도 훤출한 키를 가진 그림 같은 아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찾으시며 마음을 구하셨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구하는 그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을 만났으니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온 땅을 두루 살피시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사람은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더 주셔서라도 그를 주님의 그릇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완성된 사람들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갖추어진 사람을 고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갖춘 사람,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대신에 그 마음이 당신에게 합당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 필요한 것은 주시고 만드실 것은 만들게 하셔서 당신을 위해서 섬기고 일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새의 집안에 이름 없는 한 아들로서 사무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그 아이에게 기름 부으시는 하나님의 선택이 합당하다고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은 사무엘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이새도 동의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이상하시네. 키가 훤출한 우리 큰아들, 공부 많이 한 둘째 아들, 그리고 그 잘나고 말 잘하는 셋째 아들, 그리고 심성 좋은 그 다음 아들, 애들 다 빼버리고 하필이면 이 보잘 것 없는 어린 자식, 자기의 마음속에도 별로 기억되지 아들 다윗에게 이 기름을 부어주시다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과 사람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신자의 영적인 성장은 마음에 진실 됨과 순전함의 성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오랜 동안에 설교와 이 교회에서의 가르침을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의 가장 커다란 사명은 성화의 의무라고 하는 것을 배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성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됩니까? 우리의 삶을 날마다 거룩하게 하고 고쳐 가는 성화의 한복판에서 그 부패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 부패성을 정복하고 거룩하고 성결한 우리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는 거룩한 전진의 원동력이 바로 마음에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신앙생활에 피나는 투쟁은 자신의 마음과의 끊임없는 분투입니다. 한 사람이 부패하고 침륜에 빠질 때 그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는 부패한 마음과의 투쟁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그 부패함이 승리해버린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의 마음이 그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정직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고자 끊임없이 분투하며 피 흘릴 때 그의 거룩의 삶에는 진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그것도 귀합니다. 그것도 이제 귀하다고 해야지 가지를 않지, 작년에 그렇게 믿으려면 가라고 했더니 진짜 몇 사람이 갔습니다. 사실 내 의도는 그것이 아닌데. 귀합니다. 졸아도 교회에 나오는 것은 귀합니다. 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교회에 왔다 갔다가 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실으려고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것이 출발은 의무에서 했을지 모르지만 의무에 매이지 않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고 처음의 출발은 어떤 부담에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또 처음의 이 시작은 뭔가 이렇게 깨끗하지 못한 마음에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자원하는 마음이 되고, 점점 더 깨끗한 마음이 되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에 열정과 순결함에 진전이 있을 때 삶에도 진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신앙이 살아있다 라고 말할 때는 그 사람 자신이 자기의 마음과 부단히 싸우고 분투하는 이 상황이 있을 때 그가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한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나 지금은 거의 돌덩이처럼 굳어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예전에 받은 은혜가 거짓이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의 마음이 처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때 더 기꺼운 마음이 되고 더 순전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했던 그 참다운 마음에 작용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차갑게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그런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얼마나 될지 우리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이 자기의 주옥과 같은 대부분의 작품들을 불어로 남겼습니다. 불어로 남겼는데 그 불어로 남기는 작품 가운데 성도의 성화의 자원으로서의 마음을 설명하면서 그가 가장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불어 단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롱 듀후’ 라는 단어와 그 다음에 ‘인떼그리뜨’ 라는 단어입니다. ‘롱 듀후’는 우리말로 말하자면 ‘기꺼움’입니다. 기꺼움이 뭔지 아시지요? 아주 기쁘게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이것 좀 해줄래. 어! 그럼 해주고 말고. 걱정하지 마. 내가 해줄게. 더 필요한 것이 뭐야. 하는 이 마음. 이것이 기꺼운 마음입니다. 또 하나는 ‘인떼그리뜨’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순전함’ 하나님이 욥기에서 욥을 보시면서 사단에게 자랑하기를 너희가 욥과 같이 순전한 사람을 보았느냐. 여기서 그 순전함, 그 두 가지가 보다 더 완전하게 될 때, 그때에 우리의 성화의 삶도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남편에게 이끌려서 억지로 왔을 수도 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하도 그래서 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여러분의 아내가 하도 손을 잡아당겨서 자기는 전혀 예수를 믿을 마음이 없지만 가정평화를 위해서 할 수 없이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롱 듀후의 마음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이 점점 변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어거지로 왔는데 그 다음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그래서 정말 인도될 때에는 사람들에 의해서 어거지로 인도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기꺼움으로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섬기고 싶다 그런 마음, 그 자원하는 마음, 기꺼운 마음이 이 속에 들어 있어야지 만 마음이 더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제 순전한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을 때 동기가 불손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믿고 복이라도 받아서 나 잘될 때까지만 신앙을 이용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교회에 가면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서 신세라도 질까 하고 그렇게 발을 들여놓은 사람도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우리 친구들 가운데는 교회에 가면 여학생들이 많다고 해서 교회에 가서 지금은 목사가 된 사람도 여럿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마음이 3-40이 되도록 계속해서 교회에 가면 예쁜 여학생이 있데 하면서 그 마음을 유지하면서 다니기에 변화가 없다고 한다면 은혜를 받고 지금 목사가 되었겠습니까? 처음에 어떻게 왔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제사 지내기 싫어서 교회에 온 사람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시어머님이 불교 믿기 때문에 자기는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왜 시어머님이 하도 싫으니까. 어떻게 하든지 뭐가 달라야 되니까. 그래야 투쟁할 명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불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닦여지고 씻어져서 점점 순전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우리의 성화의 삶에 진전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은 놀랍게 운동력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마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마지막에 흙 이불을 덥고 숨을 거둔 후에야 우리의 마음은 멈추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작용을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수많은 부패성들이 우리의 마음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처음에는 오히려 기꺼운 마음이었던 것을 점점 타율적인 마음으로 바꾸어가고 처음에는 순전했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우리의 마음을 아주 더러운 마음으로, 그리고 잘못된 동기들로 가득 찬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억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이고 또 환경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과 더불어 싸우지 않으면 거룩함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온 생애가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연조가 깊어지고 그리고 예전에는 우리들이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외에는 하는 것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법 중요한 일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우리는 점점 익숙해지고 그리고 잘 훈련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한 교회를 유지해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사명,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성장하는 것만큼 우리 자신이 마음에 있어서도 성장하고 있는가 하고 물을 때는 우리는 왠지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기가 석연치가 않은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에 하나님 앞에 가졌던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그 희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처럼 쓸모 없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 라고 하는 기쁜 복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제일 빠른 변화는 우리의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가난하던 사람이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갑자기 부자가 된 것도 아니었고, 병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에 건강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의 변화와는 비교될 수 없는 중대한 변화가 우리의 본성 속에서 일어났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그 큰 십자가의 사랑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생전에 이 세상에 계실 때 강포하고 완악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처럼 따랐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목자 잃은 양처럼 유리하고 고생하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완전한 쉼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한때 예수님을 모두 모른다고 부인하고 주님을 떠났던 불행한 예수님의 그 제자들이, 그 모자라는 사람들이 성령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쳤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그들이 사도가 가르쳐준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온 놀라운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온 삶과 온 생애, 그들의 온 선포와, 그들의 온 사고는 모두 주님의 마음이 배어있었고 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고자 하였고 그 하나님의 죄인들을 향한 마음이 그들을 통해서 느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사도들의 선포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어떻습니까? 정말 예전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들이 비록 가난하고 볼품없고 그리고 죄악 투성의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께서는 씨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기꺼운 마음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삶의 목표, 우리의 마음에 가장 간절한 소원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었고, 주님의 마음이 순전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순전해지기를 원했으며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해 기꺼운 마음을 가지고 그 기꺼운 마음이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온 삶에 스며들어서 우리의 가진 것들은 모두 주님의 것이 되고 우리의 시간도 모두 주님의 것이 되고 마지막에는 우리 자신도 주님의 것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주님께 더 많은 사명도 받고, 더 많은 임무도 맡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성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자격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 자격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정말 여전히 처음 하나님 앞에 주님의 사랑을 알았던 그때의 깨어짐을 오늘도 우리가 간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 전체를 우리 주님이 오셔서 다스려주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었던 그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아직도 오늘 우리에게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젊고 어린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깨트려지는 것은 하나님이 조금 은혜를 주시면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있는지는 이제 처음 믿기 시작하는 젊고 어린 지체들을 보아서 만은 알 수 없습니다. 한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교회라면 그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기꺼움과 그리고 순전함에 있어서 성장을 경험하는 많은 나이든 성도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던 마음의 어두움을 나이가 들고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수록 그 자신의 마음의 부패를 볼 수 있는 분별력, 그리고 우리 주님을 향한 기꺼운 사랑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절 있는 신앙생활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그런 순전함이 자신의 인생에 정말 소중한 가치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를 원하기보다는 주님 앞에 더 순전해지기를 원하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자신들을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기꺼운 사랑의 마음을 유지하며 살고 싶어하는 그런 성도들로 하나님 앞에 다시 자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자기의 사람으로 여기시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특별한 마음으로 자기를 찾는 사람, 특별한 마음으로 자기를 부르는 사람들 가까이 계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누구였습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인정받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잘 훈련된 종교지도자들은 성막에 있었고 그리고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다윗은 보잘 것 없는 양떼들을 치는 목자의 불과했습니다. 훌륭한 학교를 나오고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거나 빛나는 가문의 출신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마음을 빼앗기신 가장 절대적인 이유는 오직 하나, 그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 시대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는 순전한 생애는 아니었습니다. 끊어지고 또 부러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더러움으로 자기의 인생을 오염시켰던 실패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끝까지 자기의 마음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게 하는 가장 탁월한 이유가 마음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순수한 마음을 되찾고자 처절하게 노력하였고 그리고 이제 이 고백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줄 때쯤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거룩한 사람으로 사랑하는 아들 앞에 서서 자랑스럽게 오랜 동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은혜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뜻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해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은 신앙생활은 시작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신의 마음에 기꺼움과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음에 순전함에 있어서 진보를 보기 위해서 철저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정복되는 영혼의 참된 변화 없이는 결코 그의 신앙생활에 거룩의 진전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그 거룩의 진전이 없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진전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껍질, 그리고 외형에 속한 것들을 언제든지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우리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님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도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자가 되는 비결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바로 한가지로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율법은 단수입니다. 율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라고 하는 것입니다. 범죄하고 다윗의 마음이 어두움에 휩싸이고 이중적인 위선, 그 속에서 잠시 살았습니다. 그때에도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존경했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예전에 기꺼움과 순전함을 잃어버리자마자 그는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위도 그에게 위로가 될 줄 수 없었고 수많은 사람의 칭찬과 존경도 그의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지 않는데 그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근본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맨 처음 주님을 알고 십자가의 그 큰사랑을 깨달은 날부터 이제까지 여러분들의 마음은 점점 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뜨거워지고 있습니까? 처음 주님을 만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목 매이던 그때보다 더 여러분들의 마음이 순전하고 성결하게 닦여지고 있는지 오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와 같이 때묻고 온전하지 못한 타율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자신의 마음이 더 순전해지기를 원하고 자신의 마음이 더 열렬해져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사모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모든 축복은 그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축복 중에 최고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변화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모든 마음에 변화를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동반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영혼의 변화 없이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다. 마음의 변화 없이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지옥과 같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은 우리들에게 새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오 그리고 그 새 삶은 바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심으로서 가능했습니다. 끊임없는 성령의 역사, 진리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새로워지기 전에는 우리의 거룩의 진전도 없고 하나님을 진실 되게 섬기고 사랑하는 참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신앙의 껍질에 만족하면서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타율적인 교회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나는 오늘 말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까? 억지로 주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오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정말 뜨거워집니까?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쁨이 없습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사람, 신앙생활이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움으로 바뀌어 가는 사람, 어찌하든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우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그리고 날이 갈수록 점점 하나님은 순전한 마음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주님이 맡겨주신 일은 많은데, 주님이 주신 사명은 큰데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불결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로 주 앞에 정결함을 구하는 사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깨끗함을 구하는 사람, 순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불안한 마음에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은혜를 구하는 사람,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자기를 깨끗케 하기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그 보혈로 우리의 양심 가운데 역사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정결케 하시는 작용을 의뢰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에 하나님 앞에 받았던 그 참된 사랑, 그 깨끗한 마음만을 추억하며 자랑하지 말고 오늘 우리 자신의 마음의 불결을 보면서 처음 우리가 구원의 문을 두드릴 때 그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하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까지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찾는 마음으로 우리를 섬기셨던 그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날마다 주님을 찾고 주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우리들이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다 되었다. 온전히 이루었다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하나님의 참된 마음을 우리들이 읽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정결할지라도 주님 앞에 감히 정결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을 깨달으며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을 어린아이처럼 닮아가도록 그렇게 힘쓰고 애쓰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력이 아무리 많아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아무리 깊어져도 우리들이 항상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이 자기 깨어짐의 경험들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서 우리들이 세상을 경멸하는 지혜들을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속에 진정으로 주님을 닮은 마음으로 변화되어 가는 정화의 작용들이 유지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많이 알고 다윗처럼 그 계시의 세계에 대해서 장엄한 경험들을, 지식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깨트려져서 그래서 그 마음에 기꺼움과 순전함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보여주는 다윗의 또 다른 충고는 “네가 하나님을 찾으면 저를 만날 것이요 네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너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가 전체 문맥에서 보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다윗은 성전을 짓는 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어떻게 지으라는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너는 하나님을 떠나면 안 된다.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첫째로 이런 사실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왜 다윗이 솔로몬에게 맡겨준 사명은 성전을 짓는 일이었는데 성전 짓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별로 안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실제적인 섬김의 행위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여야 할 의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이 바로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헌신적으로 섬겼고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그런 율법적인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고 찾는 하나님 앞에서 기꺼움과 순전함 속에서 살아가는 그 마음이 그 모든 율법 준수에 동기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대로 육신의 힘으로 자기들이 최선을 다해서 그 율법을 지키면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삶으로서 행위로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했지만 그 마음은 율법을 준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탐욕과 이기심에 의해서 뭉쳐진 그런 부패한 삶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행은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선행을 가장하면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마음과 삶의 불일치를 인해서 오히려 회개하는 창녀와 세리들을 훨씬 더 의롭게 생각하실 정도로 그들을 불쾌하게 여기게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 된 사랑과 기꺼움과 순전한 마음, 그것이 그들의 모든 율법을 지키고 봉사하는 모든 그 섬김 속에 동기가 되고 그 속에 배어있었더라면 그들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경험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옛날에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던 때 자기의 삶이 짐승과 같았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안 믿고 살아간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이유는 바로 착하고 의로운 삶의 원동력이 바리새인들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영혼을 향해 그런 관점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이야기를 해야되는 문맥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이야기하는가.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지을 준비를 나 다윗이 해놓았고 그리고 결국은 내가 준비해 놓았어도 내가 죽으면 지을 사람은 너다. 그러니 네가 그것을 지어야 하는데 노력 없이는 안 된다. 좋은 일군들도 부르고 자재도 가지고 보충도 해서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성전은, 그 여호와의 아름다운 성전은 결코 내가 준비해놓은 건축 재료들과 그리고 너의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수 있는 계획과 지략의 의해서 지어지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의 신앙을 보고 세워주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시면 그가 맡고 있는 일에 복을 주십니다. 안 믿어집니까? 확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보디발이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은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기쁘게 여기심으로 하나님이 요셉의 손에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셨고 요셉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고 그것이 결국 보디발의 집에 축복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참 사랑을 알 때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섬기며 충성하며 살도록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고 계시는지를 우리들이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떤지를 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만큼 인정해주시는지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건축을 위한 준비를 모두 끝냈고 네가 실행에 옮길 터이지만 그러나 잊지 말아라.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런 마음을 유지할 때 하나님의 집은 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사실 무대 보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지난주에도 성경을 읽다가 보니까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 눈물을 흘리며 도망을 가면서도 사람들을 탁탁 배치하고 하는 일을 보십시오. 아주 탁월한 지략 가였습니다. 얼마나 탁월한 지략 가인지 모릅니다.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놀라운 지혜와 지략들을 사용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것을 의지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가진 것이 좀 넉넉하고 재능이 많으면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덜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이 그 모든 갖추어진 것을 하나님이 사용해주셔도 정말 하나님 앞에 목마른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붙잡아주시지 않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되어서 가난하고 궁핍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늘 모든 것을 가진, 그리고 모든 싸움을 싸우면서 승리와 패배를 경험한 장군으로서 역사의 격동기를 지난 사람으로서 이제 이 다윗이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야, 내가 수많은 준비를 맞추었고 이제 실행만 하면 여호와의 집이 지어지겠지만 네가 그 과정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그러면 하나님의 집은 지어질 수가 없단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왜 이렇게 이분법일까? 즉, 하나님을 조금 찾을 수도 있고 덜 찾을 수도 있는데 왜 여기서는 찾느냐, 버리느냐. 흑백 논리인가. 다시 말하면 여기서 “버리면” 이라는 게 ‘아자브’라는 단어인데 떠나는 것입니다. 헤어지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 부모를 떠나는 것, 그러니까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 완전히 떠나서 이제는 거의 관계없는 독립된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면 그러면 하나님도 너를 영원히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다바끄’의 삶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딱 붙어있는 것, 그것에 정 반대의 단어가 ‘아자브’라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중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삶이 아니면 모두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그래서 한번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회고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강력하게 움직여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실 때는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으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안달복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담대하고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풍랑이 오고 시련이 막 닥쳐도 예수 믿기 전에는 무섭고 두렵고 어찌할 줄 모르고 심지어는 막 확 죽어버릴까 하는 그런 충동적인 생각까지 일어났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그 사랑에 우리를 주장하고 난 다음에는 세상에 어떤 환난이나 시련이 닥쳐와도 우리에게 담대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는 주님의 약속처럼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평안이 찾아옵니다. 막 큰 일이 일어나고 이제 이 상황에서 내가 펑펑 울고 어쩔 줄 몰라야 하는데 이상하게 거짓말 같은 평화가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평안한 것입니다.
마루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때 너 파문한다. 그 당시의 파문은 진짜 죽음으로,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너 지옥이다. 그런데 그 파문 장을 불사르면서 비텐 베르 성당에다가 95구 조항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른 찬송이 무엇인가 하면 내 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전에는 가난해지는 것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40억 빚진 사람이 죽어서 재산을 정리해보니까 60억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다 정리해서 20억 같고 새 삶을 살지, 그 이야기를 하니까 그 사람이 당신들은 그렇기 때문에 가난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60억을 가지고 있던 부자가 40억을 잃어버렸을 때 그 절망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없습니다. 진짜 그 사람들은 뭐가 통하는가 봅니다. 통해도 우리는 부럽지 않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려면 어떤가. 그러다가 막판에 가서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감사하지,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 대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안달복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야, 이상하게 오늘은 기도가 안돼. 하나님이나를 버리셨나. 몇 달째 월급을 못 받아도 걱정이 안 되는데 오늘 왜 기도가 안되지. 하나님이나를 싫어 하시나봐. 막 불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빌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 많이 은혜를 받았을 때는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보면 진짜 은혜 못 받았을 때는 죄 같지도 않은 것을 붙들고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저 사람의 마음속으로 잠깐 미워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전에는 귀싸대기 때리고 회개하지 않던 사람이 조금 마음으로 미워한 것도 아파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마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다윗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사울을 피해서 도망을 가는데 사울이 거기서 퍼 질러 자고 있는 것입니다. 가서 옷자락을 베고 물병을 훔쳐서 왔습니다. 그리고 보여주면서 보십시오. 내가 당신을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이 수가 있었는데 내가 안 죽였습니다. 나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장인어른, 하면서 막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 사실 기름부음은 무슨 기름부음입니까. 하나님이 버리셨는데 그런데 한때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던 종의 옷깃을 베인 것을 인해서 다윗이 그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주께서 기름 부어서 세우신 자의- 버리셨어도 하나님이 버리셨는데 -옷을 내가 베었다는 것 때문에 막 아파하는 그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깊은 은혜에 붙잡히고 나면 세상을 향해서는 아주 담대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소심하지가 않습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세상이나를 삼킬 듯이 덤벼드는데 네가 나를 삼킬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애들 말로 한번 나하고 한번 붙어보자.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안달복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그 마음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열렬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이고, 순전하게 살고자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지 않는 사람들은 더러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이 중립지대가 있을 것이라고 찾는 때는 언제인가 하면 그런 마음의 열렬함과 뜨거움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중립지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펄젼이 평소에 늘 설교하면서 외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회색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면 자랑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복음을 위해서 살면 살고 자기를 위해서 살면 사는 것이지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주님을 찾는 사람입니까? 주님을 떠나는 사람입니까? 정말 마음 한복판에 정말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열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던 그 십자가의 사랑이 준 그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왕 되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온 세상 가득히 그의 영광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를 안달복달하게 만듭니까? 정말 하나님의 쏟아지는 은혜, 그 사랑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 사랑을 못 받은 날이면 잠 못 이루고 그 사랑과 은혜를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은 좌절을 느낄 때는 밥알이 모래알처럼 깔깔하게 느껴지는 그런 하나님을 향해 고정된 마음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서 무엇할까 하는 자괴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주님을 섬기고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해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정말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셔도 일로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감동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높일수록 낮아지는 마음, 우리를 들어 사용하시면 사용하실 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서 고정된 마음, 그래서 모든 믿음 위에 뛰어난 주의 이름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그 마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성화를 시작하게 하셨으니 주님과 함께 정말 주님을 찾고 추구해서 주의 일들을 이루고자 원하는 그 마음, 그 마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고 싶어하시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더더욱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음으로 하나님의 일이 부흥할 것이고 하나님의 일의 부흥과 함께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의무와 책임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들을 데려다 세운 사명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과 피를 찢고 흘려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그 사랑을 깨달은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리인 줄 알고 가서 서신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 있습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인정해주시는 놀라운 증표들을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이 너무 소중하고 주님을 찾는 여러분들의 그 심령이 너무나 기특한 나머지 어찌할 수 없는 기쁨을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쏟아 붓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주님을 주님이 우리를 찾는 것처럼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숨질 때까지 이 세상에 있으면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의 성취를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의 악함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이 세상에서 주님이 보실 때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서 사람들이 많아도 여러분들이 주님의 눈에 띄고 마음들이 수없이 많아도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의 시선을 끄는 그런 성도의 마음이 되시기를 그렇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9.축복이 필요할 때 찾는 하나님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24:5-6)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문득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불결하게 느껴지고 마음에는 어두움이 오고 그리고 무엇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을 때에 자신의 신앙의 목표가 흐려지는 것 같은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우리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의 주인공인 다윗도 경험했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주의 자녀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험한 일입니다.
신앙심이 아주 뛰어나고 영성이 아주 탁월한 사람들도 때로는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업에 망하거나 직장을 실직 당하거나 불의에 질병으로 말미암아 병원에 입원을 하고 누워야지 만 환난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어려움은 우리의 영혼의 어려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처음 우리 주님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분명했던 목표들이 흐려지기 시작할 때, 그리고 마음에 신자로서의 진실함을 상실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의 위기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럴 때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이고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극복하는지에 대해 오늘 성경이 다윗의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도 고백하기를 하나님께 복을 받고 또 여호와께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게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결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두 가지 복을 베푸시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짜 축복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의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이상적인 신자의 상태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는 마음이 청결한 것이고, 두 번째는 뜻을 허탄한 곳에 두지 않는 것이고,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 즉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때가 검은 옷감에 묻어도 표가 별로 안 나지만 깨끗한 옷에는 작은 티가 묻어도 금방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깨끗한 마음, 죄에 대해서 예민하고 불결한 것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청결한 마음, 그리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는다는 의미는 삶의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지하고 열심 있게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목표와는 상관이 없는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생에 대해서 진실한 사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으면서 사는 비결전부는 아니겠지만 이 시인 다윗이 자신의 인생에 경험을 통해서 이 세 가지를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시인은 그 앞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냐”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은 바로 시온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대한 상징입니다. 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도 그러했고 예수 그리스도도 또한 변화 산에서 그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이 산에 올라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그 사람은 바로 마음이 청결하고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을 향해서 고정된 사람이고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 앞에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베푸시는데 하나는 복을 주시는 것이고, 하나는 그들에게 의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복을 베푸신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이 복은 우리의 육체와 정신, 우리의 영혼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삶에 있어서 기초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복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도 역시 성경에서 보면 시종일관 이 복에 대해서 똑같은 분량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처음 자기의 사람을 택하시던 아브라함의 선택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이 복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구체적으로 풍부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을 택하시던 때에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시대, 그 이후로 이어지는 모세와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또 다른 시대 이렇게 이어지면서 하나님의 복에 대한 개념이 점차 구체적으로 뚜렷해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조각가가 조각을 할 때 큰 돌덩이를 갖다가 처음에 두드릴 때는 사람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울퉁불퉁한 바위가 사람의 형상을 하면서 코, 입, 귀, 눈 구체적으로 다듬어지면서 비로소 아 이게 무엇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복에 대해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에게 가르쳐주실 때에는 다분히 그 축복이 현세적인 번영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야곱이 하나님을 벧엘에서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만약에 나로 평안히 내가 가는 길을 안전하게 가고 먹을 것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약속했을 정도로 그렇게 복에 대한 개념이 아주 순진하고 단순했습니다. 그래서 그 복에 대한 개념은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번영을 누리면서 보호받으며 안전하게 잘 사는 것이 복의 전부다’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직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없는 족장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실 때 그들이 확실히 그 시대에 문맥에서 자기들의 신앙의 수준에서 복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베풀어주심으로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우리의 신앙이 어리니까 어린 대로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초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에 대해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징계와 형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거의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백성으로 살아감으로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끔 하나님께서 여러모로 그들을 배려하시고 지도하시는 광경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개념은 점점 영적인 축복으로 이제 강조점이 옮겨져 갑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이 이 세상에서 받았던 많은 번영과 축복들이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때 받게 될 영적인 놀라운 축복들에 의해서 보다 구체화되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땅을 주시고 심지 않은 곡식을 거두게 하시고 짓지 않은 집에 살게 하심으로 커다란 번영과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 번영과 축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해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당부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그러나 한가지 너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 된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하신 나 여호와라.
그러니까 자기들이 차지한 그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심지 않고 농사짓지 않은 곡식들을 거두면서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단지 그것들을 누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번영한 상태에서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들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족속이며 그리고 주님이 은혜로 자신들에게 이 놀라운 것들을 혜택으로 주셨기 때문에 자신들은 일평생 그 하나님께 순종하고 공경하며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깨워주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행복은 그 땅 그 흐르는 젖과 꿀, 그리고 짓지 않은 집, 심지 않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들을 사랑하셔서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시편이 기록되었을 주전 10세기경에는 이미 지각이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인 신앙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주전 10세기경의 사람이었고 그 이전에 7-8세기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미 율법이 재해석되면서 이런 하나님의 축복의 진정한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풍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 하나님 자신이 그들과 동행해주시는 것, 그들을 모든 족속 가운데 뛰어난 선택된 족속으로 기억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독점적인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그들의 유일한 하나님이 되시는 이런 관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축복이라는 사실은 이미 다윗 이전에도 놀랍게 강조되었고 특별히 다윗과 같이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이제껏 자신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축복에 영적인 특성, 영적인 축복의 그 놀라운 가치에 대해서 끊임없이 확신하면서 살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오늘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바로 이런 복의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간 후에 예수님의 시대가 온 이후에는 이 복에 대한 생각이 보다 더 구체화되어서 오히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예수님께서는 복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거기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사실은 역으로 말해서 그로부터 약 10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서 다윗을 비롯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에 대한 그런 선언이 아주 깊이 다가오는 진실이었다고 이렇게 믿어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고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통곡하고 슬퍼하고 가난한 것, 그 자체가 축복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심령이 낮아지고 그리고 온유해지고 그리고 불의와 죄악을 보며 애통할 수 있는 그 사람은 이미 그 사람의 영혼 안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받지 못한 그 무엇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그 사람의 영혼 안에 일어난 진실하고 참된 변화, 그것이 아니면 애통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아니면 가난해질 수 없고, 그것이 아니면 온유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그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복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영혼 속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것이 후일 이제 에베소 1장 같은 곳에 가서 “하나님이 너희를 복 주시되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너희에게 복 주시고.....” 할 때 그 신령한 축복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는데 이것들은 바로 이 복에 대한 강조점이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축복으로 옮겨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고 나면 그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그 축복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축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 속에 행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만으로는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빚지고 있으며 그 하나님께 진 그 빚은 바로 그의 자비의 기초에서 우리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의 빛입니다.
오늘 새벽에 눈을 떠보니까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참 기뻤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가뭄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을 농사를 거의 못 짓겠다고 하는데 얼마나 비가 올지 모르지만 비가 내립니다. 내 속으로 ‘하나님의 축복이구나. 감사하다. 주일날 교회에 오는 성도들이 비를 맞고 차대는 우리 주차하는 지체들이 비를 좀 맞아도 교회당이 좀 지저분해져도 비가 내리는 것은 참 좋다. 참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설교하러 가기 위해서 지방에 내려가면서 야외를 한번 봤더니 올 봄에 모내기를 못해서 얼마나 애를 태웠습니까? 진짜 금년에 비 오게 해달라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농사가 너무 잘되어서 쌀이 너무 많이 추수가 되어서 정부가 골머리를 앓습니다. 큰 일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입장이 곤란하시겠습니다. 그래도 정부에서는 골치가 아플지 몰라도 어째든 풍년이 든 것은 농부들에게도 좋고 우리들에게도 참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추수하고 한쪽에서는 파랗게 익은 곡식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야! 정말 그때는 얼마나 다급했는지 양수기로 물을 퍼낸다고 했는데 그까짓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심지어 이제 10일만 비가 안 오면 이제 모내기 한 것을 다 퍼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내기한 논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못자리가 다 탔다고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얼마나 물도 다 마르고 해가 내리쬐어서 다 타니까 누가 담배 불을 던지니까 확 불이 타버린 것입니다. 그럴 정도의 상황이 왔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려움이 다 지나가고 어디도 할 것 없이 막 황금물결이 넘치는 그런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쌀이 남은 것을 뭐 고민합니까? 가난한 나라에 주고 그러면 되지. 그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누구의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참 감사하고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농협에 가서 쌀을 사먹어야 되는데 그렇게 마음이 부요 할 수가 없습니다. 들판을 보면서 기분에 다 내 것 같았습니다. 농사가 잘되어서 기분이 참 좋다. 그런데 눈물은 안 납니다. 그러니까 너무 감사해서 그냥 펑펑 울면서 하나님 금년 농사를 이렇게 풍년들게 하셨으니 이제 남은 생애 목회자로 바치겠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누가 진짜 하나님을 위해서 인생을 다 바쳐야겠다고 일평생 순교를 각오하고 선교사가 되겠다 그럴 때 왜 그렇게 하게 되었냐고 했을 때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거기에서 소명을 느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축복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주셨을 때 그때 우리는 그 정도 감사가 아니고 그냥 뿌듯해지고 야 참 좋다.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은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적어도 비가 오는 것도 감사하고, 들깨 농사가 잘된 것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콩 심은 것이 잘된 것도 감사한데 그것 붙들고 ‘내 평생 사는 동안은 주님의 뜻대로 살리라’ 그 정도가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영성이 짧아서 그런지 그 정도까지 안 됩니다. 그 정도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주님이 우리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다가오셔서 축복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섭리 속에 우리에게 내려주신 축복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우리의 영혼 안에 오셔서 주님을 만날 수 없이 어두움 가운데 살던 그 영혼에게 빛을 비쳐주셔서 주님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여주시고 그래서 나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감사하다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내 재산을 주님께 드릴 수도 있고, 그리고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수도 있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기회가 올 때 많은 사람들을 제쳐놓고 달려나가서 주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영혼에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별로 실감이 안 날텐데 다윗은 이런 종류의 영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축복과 현세적인 모든 축복을 함께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함께 받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에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고자 작정한 사람입니다. 사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을 때 다윗은 광야로 도망치는 목동에 불과했고 그리고 그를 추격하는 사울은 한 나라의 제왕이었고 그 나라의 군대를 다스리는 통속 권 자였습니다. 싸움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정말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하나님이 기름 부어 복 주신 그 다윗을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복 받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죽이고 그리고 그의 정치적인 생명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발버둥쳤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광야로 그리고 다른 나라의 망명의 길로 들판으로 끌고 다니시면서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놀라운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다윗이 그런 고난의 세월을 지나면서 하나님 앞에 받았던 놀라운 신령한 축복들은 한 알 한 알 진주처럼 그의 영혼에 맺혔습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그의 자비하심을 그 아름다운 성품을 알아간 다윗의 그 놀라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오히려 이런 고난을 통해서 자기의 것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감당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이 축복은 사실 우리의 생명입니다. 물론 육신 적인 혈기가 깃들여 있기는 했지만 야곱이 천사를 붙들고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실 수 없습니다 하며 매달렸던 그것이 사실 혈기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정말 이제는 그보다 훨씬 더 혈기 적인 고백이 아니라 신령한 고백으로서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분초마다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의 하는 일에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분 복이 없이는 우리는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를 붙드시고 매순간마다 주님이 우리를 어여쁘게 여기셔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을 충만히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들을 경험하고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이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렸던 말할 수 없는 행복은 무엇인가 하면 구원의 하나님이 의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묘사에 의하면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윗이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그랬는데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여기서 노래한 것을 보면 이것은 무엇인가 깊은 위기와 깊은 시련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특별히 일평생을 전장에서 산 사람이니까 전쟁에서의 구원은 승리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뭔가 커다란 시련, 뭔가 이렇게 격렬하게 투쟁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이렇게 건져내어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노래들이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시편을 읽으면서 “구원”이라는 단어를 빼놓고 거의 시편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1편부터 150편까지 거의 전편에 도배하듯이 깔려있는 단어가 바로 이 “구원”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대하면서 산다고 하는 말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위기가 닥치고 어려움이 오면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뜻하지 않게 고난이 닥치고 견디기 힘들게 가슴아픈 일들이 일어나면 여러분들은 누구를 의지하며 삽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고통 할뿐입니다. 인생에 견디기 힘든 시련들이 찾아오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배신을 당하거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올 때 그들은 아마 환각의 상태에서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거나 혹은 자신 혼자서 인생에 그 불행과 고통을 한 몸에 끌어안고 신음하고 병든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그 고통에서 구원해내실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그 백성을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셔야지 만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적으로 볼 때 이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사람, 의인을 악인이 이길 수가 없고, 악인의 번성함은 잠간이고 의인의 고난도 잠시입니다. 그래서 잠시는 악인이 번성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악인은 벤 풀과 같이 마르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점점 흥왕 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고 의인은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감람나무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은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이 원래 의롭고 진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의 편이 되어주셔서 그를 언제나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자, 실제로 이렇지 않습니까? 환난과 어려움을 만나고 큰 인생의 위기가 올 때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것은 아닙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담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 교황의 파문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가 자기를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그 거대한 로마 교회, 자기를 지옥에 떨어트리겠다고 파문하는 교황을 향해서 95개 조항을 비튼 베르그 성당에 내 걸고 ‘내 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요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하고 외치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비쳐볼 때 자기가 진리의 편에 서 있고 자기가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의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다라고 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자기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생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곤궁한 위기 가운데 혼자 버려 두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편에 산 사람, 그 사람 편에 서셔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의 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도 보호하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이 자기의 천사들을 통해 그를 보호할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일지라도 그를 헤하려고 에워싼 사람들보다 더 많은 하늘의 군대로 그들을 에워싸서 그를 보호하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시인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그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사울이 자객을 풀어서 자기를 죽이고자 일평생을 따라다녔지만 그러나 다윗에게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원수에게 칼을 받고 죽어야 할 정도로 그런 심각한 잘못을 하나님 앞에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면 좀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가끔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옳은 일만 하며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편에 서있다 라는 표현입니다.
다윗이 언제 왕이 되겠다고 그랬습니까? 사울이 다윗을 미워한 것은 오직 두 가지의 이유, 하나는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많은 백성이 그를 존경하고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언제 왕이 되겠다고 기름을 부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 한 적이 있습니까? 또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자기를 선전하고 자기가 그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려고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적이 있습니까? 다윗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자객을 풀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그렇게 추격했어도 그 위기 앞에서 항상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 편에 서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자기편에 서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 있게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로운 사람들을 하나님이 건져주시는데 그런 의로운 사람을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많이 본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세계에서 항상 이런 의가 그대로 통용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혼란이 일어날 적이 있습니다. 옳지 않은 적이 많습니다. 불의 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통함도 보고 그리고 착하게 살아가면서도 죽어라 고난도 당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나니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그 공평성을 절실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경험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그러면 다윗이 항상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삶만을 살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여호와께 의를 얻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잇샤’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한 의가 오는데 그것을 받아서 높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그 의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로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의롭다 하나님이 이렇게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이 사실은 성경에 많이 깔려 있습니다. 시편 31편 같은 곳에서는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의로 나를 구원하소서”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는 의가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그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구원해 줄만한 가치가 없는데 하나님 자신의 의로서 나를 의롭다고 생각하셔서 나를 건져달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들은 바로 다시 시인의 고백 속에서 다른 시편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들의 복에 대해서 고백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가 실제로 죄를 지었고 불결하고 더러운 사람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그와 맺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기억하시고 오셔서 그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불의 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의 경험은 반드시 진실한 회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범죄하고 난 후에 지은 시편에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밤마다 요를 적시고 눈물로 내 침상을 띄웁니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어떤 고백들도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 속에 있는 성령을 거두시고 구원의 기쁨을 모두 앗아가실 것 같은 영혼의 위기를 느끼는데 어느 한순간에 이 모든 것들이 확 풀리면서 이 시인이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으로 자기를 대적하는 수많은 사단과 원수들을 향해 외치는 선언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행악 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나를 떠날지어다 여호와께서 나의 곡성을 들으셨도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특별한 의입니다.
그러니까 최선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늘 인정받는 정직하고 진실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서 주님이 ‘너는 내 마음에 합하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고 차선은 무엇인가 하면 그렇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시인처럼 회개하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로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해주시는데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청결한 마음으로 고정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있는데 하나는 우리 모든 삶과 영혼에 베풀어주시는 탁월한 축복,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가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고 대적들에게 시달릴 때 우리를 그 곤궁함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이 놀라운 두 가지 일들을 하나님께서 행해주시는데 이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그리고 인생의 고정된 목표를 가지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온전함과 그리고 정결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시인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 드려서 그 온전하게 살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에 도전해보지 않고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드는 우리의 영혼 안에 행하시는 기이한 축복, 그리고 우리의 삶에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축복, 그리고 우리가 커다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났을 때 거기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능력 있는 축복 이런 것들에 대한 간증이 없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마음이 청결하다”라고 고백을 했는데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 마음 안에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홀 리스’ whole 홀 리스와 그 다음에 ‘훨리 미스’ 거룩은 이게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은 온전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거룩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자기의 인생의 목표를 고정시키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찌하든지 진실하게 살고자 애를 쓰는 사람의 인생 전체는 이런 하나님에 축복에 대한 간증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건져내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으로 가득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위기의 때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곤궁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동일하게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믿은 지 얼마 안되고 그가 비록 신앙적으로 어리고 그가 비록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적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온전히 정결해져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 하나님 자신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에 가득해서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께로 고정된 사람,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회개하던 세리와 같이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기를 원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축복에 대한 간증으로 가득합니다. 인생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은 그들을 복 주실 것이며 그리고 이 세상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로 작정한 그 사람을 거꾸로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주시기로 작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 주님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눈물 흘리며 고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의 때도 있고 고난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인생의 고난의 골짜기에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서 인생의 어느 골짜기에서든지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기를 의뢰하는 그 사람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 쌓였으나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키고 어거 하시면서 원수들을 무찔러 우리의 가는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든지 그만두든지 간에 한번쯤은 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한번 믿어보는 것입니다. 한번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나와서 남들이 예배드리니까 와서 예배드리다가 몇 시에 끝나는지 그냥 시계만 들여다보다가 끝나기가 무섭게 마음에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이 황급하게 돌아가는 그 발길, 신발이 닿도록 교회당을 밟고 다녀도 변화가 안 된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증인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싣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마음을 싣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든 행위와 말이 깊은 이 속에서 우러나오도록 그렇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지금은 지하수도 별로 없다고 난리인데 우리 어렸을 때 보면 물이 참 흔했습니다. 옛날에 수도가 없고 순 펌프였습니다. 그러면 그냥 기다란 쇠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밑에 구멍이 뚫리고 창끝 같은 것에 쇠 덩어리 몇 개를 걸어서 어른 장정 둘이서 쾅쾅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쑥쑥 들어갑니다. 그러면 한 10-12미터 박고 처음에 펌프를 움직이면 물이 잘 안 나옵니다. 막 푸고 그래도 찌걱찌걱 그러면서 잘 안 나옵니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면 물이 조금씩 올라옵니다. 그러다 조금 있으면 막 시커먼 물이 나오면 애들이 막 박수를 칩니다. 그러다가 하루종일 퍼내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얀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겨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내가 마음을 드려야지 할 때 잘 안 됩니다. 그냥 건덜건덜 와서 덜렁덜렁 가는 것은 그것은 쉬운데 뭘 해도 마음을 좀 드려봐야지 매일 마음을 내놓으라고 저렇게 하는데 그래도 한번 좀 해봐야지,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조금 마음을 드리는 것 같다가도 다시 마음이 달라지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낙심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치 샘에서 조금이라도 물이 솟아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그 구멍을 두들겨 파면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조금씩 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작을 지라도 거기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번에도 신령한 그리스도인과 육신 적인 그리스도인 그 책을 하나 썼는데 나는 세 삶을 다 살아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안 믿는 불신자도 살아봤고 그 다음에 육신 적인 그리스도인일 때도 살아봤고 그래서 ‘내가 마음을 왜 줘, 내가 줄 때가 없어서 교회에 와서 마음을 주나. 내가 여기에 와서 예배만 들이고 가는 것만 해도 목사님이 고마워해야지’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살던 때도 있었고 그 다음에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세 가지 때를 가졌다는 것이 큰 자랑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째든지 간에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저는 압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처음에 순간적으로 확 변화가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많은 경우는 작은 변화에서부터 좀더, 좀더 큰 변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진짜 마음을 드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봉사하는 그 모든 것, 하다못해 밥을 먹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도 건성으로 덜렁덜렁 말고 짧은 시간이라도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서 무엇을 하든지 그런 마음을 갖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 자신으로 차게 만드시고 그래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오늘 시인이 무엇을 고백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런 두 가지의 놀라운 복을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주시는데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마지막 6절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하나님께 고정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그 삶 속에 있는 다른 사람과 다른 내면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저희는 하나님을 찾는 족속이오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을 찾는 족속이오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족속이라”고 그랬는데 여기에 보면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라는 표현을 좀더 구체적으로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왜 굳이 하나님을 굳이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표현했을까 이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은 원래 영이시기 때문에 신체를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 주님의 등, 주님의 발 이런 이야기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묘사한 인간적인 화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예를 들자면 어렸을 때 가을쯤 되어서 소풍을 가면 애들아, 너네 가면 산에 올라가서 도시락은 먹어도 나무는 꺽지 마라, 꺾으면 나무가 아프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사실 아무리 꺾어도 나무가 아프다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무와는 다르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그리고 살아 계신 분이지만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그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를 묘사할 때 인간화한 어떤 표현을 사용해줄 때 그때 사람들이 아주 쉽게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손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하나님의 발을 봤다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등을 봤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에 과한 한 묘사에 지나지 않는데 특별히 하나님의 얼굴빛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이런 하나님에 과한 경험의 진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다양한 경험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경험의 최고로 정화된 그 진수, 그것을 하나님의 얼굴빛을 받는 그 경험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최고의 축복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팔 복에서도 최고의 축복은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오” 그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 그 축복입니다.
그 다음에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왜 그럼 하나님을 여기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까, 입니다. 사실 야곱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창세기에 나오는 네 사람의 계보 중에서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럴 때 야곱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의 별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왜 하필이면 야곱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별명일까? 이런 의문이 들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야곱을 벧엘에서 하나님이 그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나라의 이름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 호칭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가치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 이 두 단어는 사실 양립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야곱과 하나님의 얼굴 이 두 단어는 양립하기가 어려운 단어인데 같이 붙어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 네 사람이 족장인데 이 네 사람들이 물론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네 사람 중에 가장 별로 인 사람이 야곱입니다. 가장 별로 인 사람이, 요셉은 그래도 참 그 아버지 밑에서 그런 자식이 나왔을까 할 정도로 그렇게 진실하고 사기성이 없는 진실함의 대명사였습니다. 이삭은 또 온유함의 대명사였고 아브라함은 확실한 신앙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 각자 무엇인가 그래도 뭔가 하나님 앞에 좋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오죽했으면 이름이 야곱이겠습니까? 야곱은 ‘딱 잡았다’는 뜻인데 뭔가 이렇게 사기성이 있는 사람을 가르친 그런 단어입니다. ‘사기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형을 속여먹고 아버지를 속이고 가서 물론 하나님이 축복하신 방법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하여튼 라반을 뒤집어지게 만들고 하여튼 여러 가지 일들로 하도 잔머리를 굴리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인생의 위기를 만나니까 천사를 한번 꺾어보려다 그냥 허리만 다치고 말았지만 그런 식의 간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상 적입니까?
그러니까 벧엘에 올라가서 지존하신 하나님을 뵙는데 그러면 우리 같으면 깜빡 죽어서 엎드려져서 살려만 주십시오 한다든지 똑바로 살아라. 그러시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럴 텐데. 당신이 하나님이십니까. 우리 이야기를 합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나를 평안히 여행길을 가고 그리고 먹을 양식과 의복을 주고 그리고 거기서 돈을 벌어서 아버지 집으로 잘 돌아오게 해주시면, 세 가지입니다. 나도 세 가지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두 번째는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도 약속을 안 지켰지만, 그 다음에 내가 여기다 하나님의 집을 짓겠습니다. 삼대 삼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도의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야곱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는 신실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회주의적인 신앙의 대명사입니다. 그 사람은, 그런데도 오히려 그 기회주의적인 사람을 택하셔서 자기의 신앙의 역사들을 이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로 우리가 감동이 없습니다. 요셉과 같이 안 할 때가 훨씬 많으니까, 그런데 야곱의 하나님은 감동적입니다. 왜 야곱과 같이 비슷하니까, 반짝 반짝 이러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야곱도 하나님, 요셉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다고 하면 별로 감동이 아닙니다.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그 사람처럼 정결하지 못할 때도 많고 그 사람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지 못하기 때문에 감동이 덜한데 야곱은 감동적입니다. 야! 이 쓰레기 같은 인간, 날라리 같은 기회주의자도 하나님이 변함없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하나님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의 더군다나 얼굴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 그러니까 그런 기회주의적인 야곱. 그 야곱에게 한번 택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택함을 후회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그 얼굴빛을 그에게 비쳐주신 그 영혼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축복을 야곱에게 주셨기 때문에 야곱이 놀랍게 성화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이 족장 네 사람 중에서 야곱의 스토리가 가장 감동적입니다. 정말 감동적입니다. 참 대단합니다. 그런 이미지를 여기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까 말씀드린 누구에게 영 육간의 신령한 축복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가 하면 바로 그것을 찾는 사람, 그 하나님을 찾고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 자신의 처지는 비록 야곱과 같이 기회주의적이고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이득이 될까, 아니면 이렇게 주님을 안 믿는 사람처럼 행세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될까 하며 수시로 재면서 그렇게 간사하고 치사한 삶을 살고 궁할 때는 하나님을 찾고 좀 형통해지고 나면 하나님과의 약속은 깨끗이 잊어먹고 그러고 사는 은혜를 모르는 야곱과 같은 삶을 사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자기의 얼굴빛을 그들과 맺은 관계를 기억하셔서 비추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는 비록 야곱과 같을지라도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말 주님의 축복과 구원이 필요할 때, 그때는 주님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야곱과 같을지라도, 우리가 비록 요셉 같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그 마음이 우리를 정결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순전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찾고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마음의 작용은 죄로 말미암아 불결해진 우리의 마음을 세탁합니다. 욕망과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어두워진 우리의 눈에 눈껍풀을 벗겨내고 마음의 그림자들을 밝은 빛으로 몰아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 때 가질 수 있었던 신앙의 인식들을 새롭게 만들어주어서 선악간에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들을 회복시켜줍니다.
그러므로 가끔 기도를 많이 했다는 사람이 있는데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고 욕망과 욕심에 의해서 많이 지배를 받는 사람이 수개월동안 기도해서 자기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응답보다는 늘 정결하게 생각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이 더 정확할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아직 불결해 있어서 이렇게 깨끗하게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지 않은 사람이 기도를 오래 해서 스스로 얻었다는 그 결론보다는 정결한 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생각을 해서 얻은 판단이 그게 훨씬 정확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열심 있는 신앙생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행하고 거기에 자기의 마음을 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더 큰 은혜, 하나님의 더 큰사랑, 하나님의 더 큰 축복, 하나님의 더 놀라운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더 아름다운 사랑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그런 간절한 갈망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더 많이 복을 내려주신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신다면 우리의 영혼에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더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신령한 은혜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축복들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죄 가운데 곤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용서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곤궁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물질의 축복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모든 하나님께로부터 온 축복들을 우리들이 받고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고쳐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자신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곤궁한 형편을 통해서 우리의 고통받는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어하실 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의 뜻을 알아서 그래서 정말 주님이 보실 때 내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 하나도 하나님 앞에 건성으로 하는 것이 없고 마음을 드려서 진실하게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우리가 처음으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은혜를 받던 때, 그때 생각을 해보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예배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성경을 읽든지, 주님을 위해 봉사를 하든지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을 찾는 마음, 그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렇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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