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늘이 열릴 때(눅3:21) 2002.6.9 주일오전 1
2. 하늘이 열린 후(눅3:22) 2002.6.16 주일오전 13
3.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예수님(눅5:16) 2002.6.23 주일오전 24
4. 특별한때 특별히 기도하신 예수님(눅6:12) 2002.6.30 주일오전 36
5. 변화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눅9:28-29) 2002.7.7 주일오전 47
6.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눅11:1) 2002.7.14 주일오전 61
7.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눅11:1) 2002.7.21 주일오전 73
8. 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눅11:1) 2002.7.28 주일오전 87
9. 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예수님(눅22:39) 2002.8.18 주일오전 97
10. 피땀 흘려 기도하신 예수님(눅22:44) 2002.9.1 주일오전 107
11. 십자가에서 용서를 간구하신 예수님(눅22:44) 2002.9.8 주일오전 122
12. 자기 영혼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눅23:46) 2002.9.15 주일오전 135
1.하늘이 열릴 때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눅3:21)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기도들을 시리즈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복음서 전체를 오가면서 설교했는데 이번에는 누가복음 기록 중에서 예수님의 생애에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장면들을 더듬으면서 우리들이 한번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은혜의 기회로 삼을까 합니다.
누가복음은 기도복음서라고 불려질 정도로 기도에 대한 풍부한 기록들이 많이 나오는 복음서입니다. 누가가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특히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면에 대해서 많이 주의를 기울이고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살피면 다른 복음서를 통해 주님의 기도생활을 살피는 것보다 풍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구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그리고 그 기도들이 어떻게 응답되었는지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훨씬 상세하게 보석과 같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의 장면들을 마음에 새기면 우리들이 보다 더 좋은 기도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고 주님 따라가는 제자로서의 삶에 커다란 유익이 되리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당신 생애 기도하신 첫 장면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세례를 받으시던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냥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형체로 임하고 하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는 기록만을 남겼습니다만 누가복음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와 같이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 그 때가 바로 예수님이 기도하던 때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많은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자리에 참여하셨고 세례를 주던 사람은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이라고 불리는 예수님 보다 앞서온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이 세상에 먼저 와서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오실 길을 만들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의 예고는 이미 이사야 40장에 예고되어 있고 말라기 마지막 장의 예언에도 세례 요한이 예수님 앞서 와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할 것인지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서 예수님 오실 수 있는 길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 앞에서 깨트려지는 유대인들의 회개였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트려지고 회개한 사람들은 교만한 자들은 그 높아진 마음이 주저앉아 낮아지고 그리고 비굴하던 사람의 마음은 돋우어져서 편견 없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평탄한 마음의 대로를 열어놓는 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줄 때에 그의 말씀 선포를 듣고 깊이 회개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님 한 분이 함께 섞여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드러내시고자 하지 않았지만 세례 요한은 단번에 그 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례를 받는 것을 만류하고 자기가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례를 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함으로서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시며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죄 씻으심의 표적이 되는 세례에 참여하게 하신 것은 보다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대게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를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첫째는 그의 백성과 하나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사람들 속에 메시아로 인정받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당신이 그들의 한 형제요, 그들과 하나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그들 가운데 오셨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심으로서 그분은 비록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들이 받는 세례에 참여하심으로 이제 예수님의 온 생애는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았지만 죄인들의 편에 서서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 도고 하고 탄원하며 그들의 죄의 용서를 위해서 아버지 앞에 간절히 비는 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하셨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공적으로 취임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록 죄인들과 같이 되시기 위해서, 죄인들과 한 형제임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겸손히 세례를 받으셨지만 그 세례는 사실은 이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개인적인 생애를 접으시고 이제는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시는 취임식으로서 이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한 집안의 요셉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구세주로서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되어서 자기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실 목적에 자기를 다 드리시는 생애를 사시는 메시아로서의 공적인 취임이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도 예수님은 메시아였고 그리고 세례를 받으신 후에도 메시아였지만 그러나 이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메시아로서 취임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데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경륜이 계셨으니 이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께 놀라운 확증을 주시고 그리고 그 확증은 다시 두 방면으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강력한 확증을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신하게 하시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나갈 주의 종으로서 거기에 필요한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덧입는 기회로 이 세례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례의 장면은 성경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아주 놀라운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진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세례를 받으시는 한 자리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계실 때에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내려오셨고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하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는데 말씀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셨고 세례를 받으시는 분은 성자 하나님이셨으며 그를 권능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무장시키시기 위해서 평화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그 성령님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이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자리에 임재하시는 성경에 없는 아주 탁월하고 놀라운 구속사적인 사건을 만들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첫 번째 사건은 하늘이 열린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신 사건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제 첫 절 21절에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고...” 첫 번째 일어난 하늘이 열린 사건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하늘이 열렸다” 라고 표현할 때에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늘이 열린 것과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늘이 열린 것으로 나뉘어집니다. 긍정적인 하늘의 열림은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늘이 열림은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복 주고 당신의 교회를 축복하기 위해서 하늘을 여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늘을 여시고 당신의 분노와 진노를 열린 하늘을 통해서 이 땅에 쏟아 부으심으로 이 땅에 멸할 자들을 멸하시고 복수할 자들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 창조주로서의 엄 위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기록된 하늘의 열림의 기록은 부정적인 심판의 의미가 아니라 축복의 의미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하늘이 열린 것에 대한 기록들이 성경에는 풍부하게 나옵니다. 시간관계상 그 많은 하늘의 열림에 관한 기록들을 여러분들에게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중요한 기록들을 살펴봄으로서 하늘의 열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갖게 하고 싶습니다.
우선 에스겔서에 보면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그와 함께 하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의 열림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영적인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영적인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고 이제 선지자를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당신의 심정을 전해줄 일군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 하늘 열림의 사건을 통해서 에스겔은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탁월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고 되었고 열려진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혜의 영향력은 그를 강력하게 변화시켜서 한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아들이 되는 대신에 신본주의 적인 사상으로 무장한 계시의 말씀에 전달자가 되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 이런 것들이 열려진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또 하늘이 열린 것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계시록에 보면 하늘이 열리고 그 열린 하늘의 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축복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저희 교회 이름이 거기서 따온 것입니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문이 열리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축복해주시는 장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사건에 대한 보다 더 흥미 있는 기록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에 대해서 응답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응답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이 세상에 거할 처소가 그 성전이며 그 성전에서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을 말씀하시면서 거기서 자기의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거기서 하늘의 문이 열려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로 올라가고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거기를 열고 내려주시는 축복으로 상한 이 땅을 고치고 그리고 병든 자기의 백성들을 치료할 하나님의 탁월한 축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포괄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편의상 영적인 축복, 육적인 축복 이렇게 나누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의 구분일 뿐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축복은 나뉘어질 수가 없는 그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문을 통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은 분명하고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리고 죄가 많은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자기의 욕심을 따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세상보다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며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당신도 사랑하셔서 그들을 축복하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기독교의 근본적인 목적이 사람을 행복하기 위하고 돈 없는 사람들을 부자를 만들고 병든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이 목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탁월성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되는 죄에 대해서 궁극적인 해결을 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탁월성입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의 궁극적인 불행이 되는 죄와 하나님과의 불화의 문제에 대해서 복음으로 처방을 내리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불화 한 관계를 청산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본래 그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실 때에 그 창조주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바를 따라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사는 사람들을 그런 사람들로 바꾸어놓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을 성경은 담고 있고 기독교는 그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것을 붙들고 믿고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 거기에서 오는 영혼의 참다운 변화, 그것으로 말미암은 새 사람이 되는 길에 대해서 도외시한 채 하나님께로부터 신앙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이 부를 축적하고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려야 되겠다 라고 하는 욕망은 성경으로부터 지지 받을 수 있는 욕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저절로 하늘의 문을 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그분이 그 세례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문이 열릴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하늘의 문이 열릴 때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들이 낱낱이 다 묘사할 수 없지만 하늘의 문이 열릴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제일먼저 커다란 역사는 영혼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문이 열리고 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던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랜 동안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무지와 죄 가운데서 살았던 어리석고 바보 같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면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어오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었던 사람, 아예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접하는 것이 인내를 필요로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처럼 여겨졌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시면 그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두움 속에서 아무 좋은 것이 없이 그렇게 캄캄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면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배의 시간은 끝나기를 기다리며 참던 시간이었는데 주님의 말씀이 내려오기 시작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달콤하게 느껴지고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도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거울이 되어 비추어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 혼자 살았더라면 도무지 깨달을 수 없었던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래서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변화 받아야 되겠다 라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이 열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들리기 시작할 때 그때 그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과 함께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무미건조하고 아무 의미가 없었던 말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 하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음성이라는 사실이 체험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오지만 단지 그것은 건조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탁월한 그런 정서가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뼈저리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해 열린 마음이 없을 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무미건조하게 들리지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리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음성이 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해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런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함께 전해지면서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실 때 사실은 그 말씀을 하시기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 있었으니 그 마음은 바로 사랑의 마음이며, 그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당신이 구속해주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사는 것을 차마 보시지 못하고 하나님이 온 천하보다도 소중하게 여긴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핍절한 영혼으로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그 모습을 차마 보실 수 없어 하던 하나님의 안타까운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 오랜만에 부산에 집회를 갔습니다. 이틀 집회를 하고 끝나고 마지막 돌아오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교회 문을 막 나서는데 어느 청년이 목사님, 이것을 받으십시오. 그게 무엇인가 하니 모르겠다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자매가 건네주고 갔습니다. 사실 저는 선물에 관심이 없었고 축구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에 탄 다음에 가자, 궁금하니까 라디오를 틀어봐라. 라디오를 트니까 트는 그 순간에 골인!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거리가 전체가 완전히 민방위 훈련을 하는 것처럼 아무도 없습니다. 차를 타고 호텔에 갔습니다. 마침 그 교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묶는 그 숙소에다가 제 방을 잡아주었는데 뭐 안식이 없습니다. 축구 경기가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새카맣게 몰려왔는데 선수들은 경주인가, 울산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숙소에 들어와서 쇼핑백을 뜯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선물 하나하고 편지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선물은 아직 안 열어봤습니다. 넥타이가 분명한데, 제 마음에 맞는 색깔을 사오는 사람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딱 뜯었는데 편지를 보니까 그 사연을 읽으면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52세 된 가정주부의 편지내용-자기가 어두움 가운데 살았는데 방송설교를 들으면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트려지고 영혼이 변화 받고 나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오십이 된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갔다는 내용을 보며 두 가지 때문에 마음에 감동이 있었는데 하나는 그렇게 가난한 살림에 넥타이 하나 사서 보낸 것이고, 두 번째는 정말 인생에 있어서 절망이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
제가 청년들 귀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청년 때 주님을 만나고 신앙이 깊이 심겨지면 하나님을 버리기가 매우 어렵고 젊었을 때 방탕하게 살면 오십이 넘어서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그렇게 오십이 넘고 나이가 많아지면 변화를 받아도 이게 근본적으로 변화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왜 아니 반 백년을 살았는데, 반세기를 살았는데 이 세상에 오만 것이 얼마나 많이 집어 넣어주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도 변화는 일어나는데 그것을 다 퍼내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한 두 번 예배당에 와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진짜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진짜 성도로서의 성화의 삶을 열심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이든 성도님들이 훨씬 부지런해야지 됩니다. 우리는 새벽기도회에 나오는데 젊은 애들은 새벽기도회에 안나옵니다. 젊은애들보다도 늙은 사람들이 더 새벽기도회에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 앞에 많이 어루만져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지만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들의 펑펑 우는 회심을 여러분들은 본적이 있습니까? 너무 드뭅니다. 여기서 진짜 오십이 넘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 앞에 더 불꽃처럼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어나기 굉장히 힘든 일들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오십 년 동안 안된 것은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뭐 얼마나 많이 변하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다 포기하던 사람인데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리니까 그 사람은 열린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제가 누군 지도 몰라도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변화시키고 나니까 그 다음에 내가 생각이 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신학교까지 들어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정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하늘의 문이 열리고 그래서 우리 자신의 영혼에 놀라운 은혜의 빛이 깃들여서 그러면 이제껏 까지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던 실패한 삶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이제껏 까지 오랫동안 실패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의 좌절된 삶에 하나님이 놀라운 희망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열려진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사람이 되고 나면 그는 정말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도 참고 핍박도 이기면서 헌신합니까? 누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서 섬기고 남이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삽니까? 누가 그렇게 삽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만나고 변화 받은 사람이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이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이 헌신적인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헌신적인 삶은 삽니다. 헌 신발과 같은 그런 삶, 그래서 쓸모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런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께 깊이 주님을 만나고 은혜 받지를 못했는데도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사람들의 헌신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헌신하면서 사는 것 같아도 어느 한순간에 수틀리면 다 뒤집어엎을 수 있는 불안감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어떤 이유로 헌신적인 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했는데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헌신하다가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준다든지, 비교의식을 느낀다든지, 혹은 손해가 난다든지, 아니면 어려움이 온다든지 하면 그것을 인내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헌신이 아니라 그런 옥석을 잘 가려야 합니다. 그래서 진짜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 받는 사람들이 진짜 주님을 위해서 아름답게 헌신하고 부작용이 없는 헌신의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만나고 정말 변화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변화되게 되면 아주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제가 몇 번 여러분들에게 그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사랑하는 것처럼 거짓말로 고백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데도 그 고백을 못하면서 사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자식을 앞서 보낸 부모들이 한이 맺히는 게 무엇인가 하고 물어보면 아주 평범한 것, 우리 아들이 평소에 뭘 먹고 싶어했는데, 우리 아들이 평소에 뭘 갖고 싶어했는데, 그것을 못해준 게 마음에 한이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거짓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백하지 못하도록 억압을 받으면서 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받고 하늘이 열리고 주님의 놀라운 영혼의 변화의 축복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면 그는 헌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헌신이 없는 삶을 산다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가 병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병든 것입니다. 헌신이 없는 삶은 병든 삶입니다. 아직까지도 자기 사랑이 부서지지 않은 증거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증거이거나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현저하게 모자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었던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과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을 주신 그 사랑을 마음껏 맛보았던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시고 그 열려진 하늘로부터 신령한 은혜를 받아 누렸던 사람들은 모두 질그릇과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사자처럼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에 역사 하는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헌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고 달아보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담스러운 길로 인도하시기도 하고 무리하고 고통스러운 길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신자의 도리를 아는 사람들은 정말 헌신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헌신을 보면서 자신도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변화 받지도 못했으면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그런 탁월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많이 말해주고 있지만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이 세상보다 더 깊이 사랑하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계명들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그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서 더 진실하게 살고 싶어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고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그 축복 자체보다 그 축복 뒤에 계신 하나님이 더 소중해서 주님을 더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런 삶,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좋으시고 또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을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그런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은혜를 받고 나면 열린 하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진실한 변화가 일어날 때 사랑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정말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쁘게 보면 자기만을 위해서 살수 없는 아주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동물이지만 그러나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의 감화를 받고 나면 아무 것도 아까운 것이 없는 그런 생애를 살수 있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참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쓸모 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지만 정말 하나님만을 위해서 이 땅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처럼 이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에 속한 사람처럼 그렇게 주님만을 위해서 자기를 다 드리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이 있습니다. 정말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두려움을 내어쫓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많이 헌신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애쓸 시간이 없어도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지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옵니다. 주님을 위해서 많이 허비하고 심지어는 주님을 위해서 헐벗으리 만치 가난해져도 주님이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고 고아와 같이 나를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그 신앙을 붙들면서 살게끔 만들어주십니다. 이게 바로 정말 하늘이 열리고 영혼이 변화될 때 일어나는 헌신된 모습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면서 얼마나 할 일이 많은 세상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몇 달 동안 교회의 건축을 위해서 애를 썼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한 일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교회의 건축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제 시작일 뿐이고 이것을 도구로 해서 더 많은 사람들,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 그래서 교회에 왔지만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고 가르쳐준 사람이 없어도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여전히 목자 잃은 양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을 건져서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그것이야말로 주님의 가장 간절한 바램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당 하나가 지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그 동안에 많이 헌신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목회를 하면서 별 하는 것이 없이 이제껏 일생을 살았지만 교회 짓는 과정이 가장 저의 많은 노고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지어져 가는 광경을 보면서 오늘 아침에도 예배당으로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훅! 불어버리시면 날아가 버릴 하나님의 집 건물 하나를 짓는데도 이렇게 뼈를 깎는 헌신이 필요한데 이 땅에 아직까지도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하나 하나를 불러다가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벽돌로 삼아 하나 하나 쌓아올려서 웅장하고 하나님이 임재해 계실만한 영광스러운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까!
큰 교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아 보이는 교회 건물 하나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름 없는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두 기억할 수 없는 많은 성도들이 성전 건축 때문에 가난해졌습니다. 집이 있던 사람들 중에 교회당 건축 때문에 무주택자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모두 드렸기 때문에 노년에 의탁하며 살 예금 통장이 바닥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다녔던 직장에 퇴직금을 바치고 이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매달리며 살아야 할 그런 성도들도 있습니다.
보이는 이 교회당 하나를 짓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울었고 건강이 상하고 그리고 가난해지고 무주택자가 되고 그렇게 되어야 했던 보이지 않는 교회가 도저히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쓰일 수 없는 망가진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다듬으셔서 그렇게 세워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 거기에 이 교회가 없었더라면 목자 잃은 양처럼 유리하고 짐승의 밥이 되었을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주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행복으로 알게 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복된 교회가 되기까지 오늘날까지 우리들이 바쳤던 눈물의 기도와 가난해지는 헌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많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헌신적인 생애를 살게 하시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주택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해질 수도 있고 매일 눈물을 삼키며 그 눈물을 주야로 음식을 삼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해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면서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 아버지의 영광을 보면서 살았던 사람들, 세상이 시련과 고난으로 뒤흔들어도 그 무엇으로 흔들어놓을 수 없는 평화를 자신의 마음속에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 그래서 이 땅에 살았지만 그러나 이 땅을 지배하면서 살았던 사람들, 세상이 그를 멸하려 하였으나 주님이 내리신 축복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어떤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까?
그런 탁월한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주님이 주신 온갖 것들을 누리면서 살았던 복된 사람들 중에 안일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 앞에 헌신하고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무엇인가 움켜진 것이 없이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이 가난해지고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다 드리는 그래서 주님을 더 이상 헌신할 것이 없어서 괴로워하던 사람들, 그런 헌신과 희생의 사람들이 그런 탁월한 축복을 누리면서 이 세상을 살도록 하나님이 복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실 때 일어나는 일은 단지 영혼의 곤고함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만 끊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시니까 비조차 그쳤습니다. 아합의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닫고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시지 아니하자 이 세상에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사랑하던 모든 것들은 다 파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린 속에서 시달리게 되었고 그 기근은 정말 처참할 정도였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문이 닫히고 나면 영혼의 곤고함과 함께 우리의 삶의 어두움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보면 땅을 보면 그런 것을 잘 말해줍니다. 물이 넉넉하게 하천에 흘러가고 그리고 거기에 이제 숲이나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주 풍부한 생태계가 형성이 되고 그 물에서 물고기들도 많이 삽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옛날 우리 어렸을 때 그렇게 물이 득 하던 하천에 가보면 요즘 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때는 댐이 별로 없었고 지금은 댐이 많아서 다 가두어 나서 물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확 흘러가고 개울이 텅 비는 법이 없이 그냥 계속 물이 많았습니다. 특별한 가뭄의 때를 제외하고, 그러니까 지금 확실히 물이 적어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이 비가 많이 내리고 하천에 물이 넉넉하면 생태계가 형성이 됩니다. 그러나 하천에 물이 안 내려와서 이제 무수 천이 됩니다. 그러면 그 모든 생태계가 다 사라지는가 하면 아닙니다. 처음에는 생태계가 다 사라진 것 같은데 아닙니다. 물이 없어서 다 말라죽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시 물 없는 하천에서도 살수 있는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이 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자라나는 풀은 억세고 잎이 적어서 가시 같은 것들이 많고 그런 아주 조악하고 인간에게 도움이 안 되는 나쁜 식물들이 거기에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삶도 꼭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이 흘러 들어와서 그래서 그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서 잠겨서 살 때 만들어지는 삶의 생태계와 하나님의 은혜가 다 사라진 다음에 건조한 영혼 속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삶의 생태계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내리시는 축복은 포괄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인생을 살면서 곤고한 날을 만나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족간에 어려움이 오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하기 힘든 시련들을 만나게 되면 그때에 여러분들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문이 열렸는가. 정말 하늘의 문이 열렸는가. 정말 나는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돌아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할 때 하늘의 문이 열렸다고 되어 있습니까? 성경은 그 분이 기도하실 때에 하늘의 문이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전에도 예수님이셨고 기도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기도한 후에도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 기도를 열쇠 삼아서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문이 열리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메시아로서 취임하는 이 자리에서 영광과 함께 쏟아 부어졌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삶의 문제에 매어서 허덕거리고 근심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그 시간에 단 이분의 일이라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에 자기를 비추며 거울삼아서 자신의 삶이 곤고함이 하늘의 문이 닫힌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나는 너무 연약한 존재이고 마치 비 없는 하늘 아래서 농사를 짓는 것 같은 그런 농부와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은 나지만 하늘을 열고 비를 내리셔서 햇볕을 내리셔서 그 곡식들을 자라게 하셔서 가슴 가득 추수를 안겨주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런 은혜의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기도의 필요성을 자각해야 할 그런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 속에서 교회당을 옮겼고 꿈꾸는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 하심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큰일을 이룬 끝에 시험에 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실제로 일할 때가 있고 기도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많은 수고를 요하는 일에 지속적으로 헌신해왔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탁월한 기도 생활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 모두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기도 생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시 처음 시점으로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살던 그 신앙의 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돌아보고 이 큰일을 행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던 기억들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주셨던 은혜를 새기며 자신이 이 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자기를 드리지 못했던 것들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교회당 하나를 짓고 이제 쉴 때라고 하고 주저앉는다면 마귀는 박수를 칠 것입니다. 성령은 슬퍼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이제껏 이 교회를 짓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것은 겨우 그물을 짜시는 일이었고 이제 우리는 팔을 걷고 바지를 걷고 힘차게 이 넓은 바다로 나아가서 이 그물을 널리 던져서 고기를 낚을 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없이 살아가던 많은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 때문에 우리들이 누릴 수 있었던 성도로서 이 하늘 행복을 그들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해서 패역으로 가득 찬 이 땅에 예수의 계절이 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궁극적으로 이 교회를 통해서 하시고 싶으셨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에 자기를 다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갔을까요? 예수님은 당신 앞에 펼쳐질 당신의 생애를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메시아로서 전할 무거운 속죄의 부담과 우리를 위한 섬김의 모든 짐을 지고 공생애를 들어섰을 때 이제껏 까지 그분의 개인적인 생애는 폭우에 계신 것 같은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푸른 물결이 뒤웅치는 이 죄악 된 세상에 자기의 온 몸을 던져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앞에 두고 예수님이 제일먼저 하신 일은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하나님 앞에 새로운 각오로 기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변화되지 않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각오와 그리고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 기도하고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주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한 영혼, 한 영혼들을 아무도 소중하게 보지 않는 그 영혼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간절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우리 앞에 하늘을 여실 것이며 그 열려진 하늘을 통해서 이제껏 우리들이 누릴 수 없었던 하늘의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이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하늘이 열린 후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3: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린 일 말고도 두 가지 일이 더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일어난 일은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위에 강림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하늘로부터 성부 하나님 아버지 음성이 들려진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음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늘이 열리고 일어난 두 번째 일과 세 번째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우선 하늘이 열리고 두 번째 일어난 일은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위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우선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그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님의 인격성을 부인했던 많은 잘못된 사람들의 주장에 쐐기를 박는 성경에 증언을 만납니다. 기독교 역사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격적인 실제성을 인정했지만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실제 하는 인격이나 혹은 삼위일체 한 분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영향력이라든지 혹은 영적인 파워 같은 것으로 해석을 해서 성령님이 사실은 인격적인 하나님 삼위일체 중에 한 분이 아니라 성령님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영적인 세력이오, 힘이기 때문에 비인격적인 존재이고 따라서 인간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라고 하는 이런 논리들을 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런 주장을 백지로 돌리듯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그 현장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을 열어주신 그 하늘을 타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형체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심으로 성령이 단지 어떤 세력이나 어떤 영향력이나 감화나 에너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이신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인 실체라는 사실을 오늘 세례의 장면에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왜 하필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이 시간에 임하셨을까요? 왜 성령님께서 예수님이 이제 막 메시아로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시려고 하는 그때에 이렇게 임하셨을까요?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시기 전에도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사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셨고 죄 없는 생애를 사신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그분 위에 있었습니다. 이미 이런 일은 아주 어렸을 때, 더 가자면 이미 태어나던 때,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이미 마리아의 태 속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을 때부터 그분은 성령의 감화를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이신 것처럼 또한 성령은 아들과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 충만한 성령의 은혜 속에서 예수님께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지혜와 키가 자라면서 하나님께 사람들에게 더 많이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셨기 때문에 성령을 근심시켜드리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배신하는 어떤 잘못된 행동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고 또 사셨기 때문에 성령이 항상 그분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 자리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이 내려오게 하신 것은 다시 한번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살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보다 더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예수님께 입혀서 그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감당해나가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런 성령의 부어주시는 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는 숱하게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깝게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육적인 여러 환경에서 오는 좌절이나 슬픔 고통,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많은 꿈들의 좌절, 이런 것들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좀더 들어가 보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나서도 하나님의 뜻은 알았는데 그 뜻대로 변화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갈등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받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당신의 일을 수종들도록 당부하시는데 주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열매가 너무나 없기 때문에 낙심하고 그리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은혜 받지 않은 사람이야 꿈이 없으니까 좌절할 것도 없고 소망이 없으니까 낙심할 것도 없지만 한때 은혜를 받고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사람이 되고 싶고 또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면 그래도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진실한 소원이 마음속에서 싹트는 법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수종들기 위해서 섬기다보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일도 걸리고 저런 일로 걸리고 고통스럽고 여러 가지 시험과 근심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우리 믿는 신자들에게 일상적으로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팔아서라도 세상에서 한번 성공해보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또 주님의 일을 하다가 낙심하면 에이 씨 하면서 집어치우기도 하고 혹은 그래도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하면서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다투기도 하고 여러 모양으로 자신의 그 삶의 상황을 타개하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이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겪는 모든 갈등, 그 이면에는 대부분 한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모든 환경과 그리고 죄악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결핍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과거를 한번 조용히 회고해보십시오. 우리들이 믿음 생활을 하면서 정말 행복하고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래서 충만하던 때에 그때 반드시 우리의 삶의 환경이 좋았고 사역의 열매도 아주 많았고 그런 때였는가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도 많았고 주님의 일도 많았고 주님의 일을 하려면 거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래서 섬기기 위해서 고난을 받기보다는 거치는 일들과 싸우면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속이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참 많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옥상을 걸어서 이렇게 내려오면서 매일 보는 교회당이지만 다시 이렇게 쳐다보니까 얼마나 예쁘고 좋은지 모릅니다. 다음 주에는 널려져 있는 파이프들을 다 걷어버리고 나면 그러면 마치 마사지 한 여자가 얼굴에 팩을 뜯어낸 것처럼 아마 그 자태와 용모가 예쁘게 드러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정말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교회에서 교회 생활을 해 본적인 별로 없을 정도로 어디를 가도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오면서 여기 저기 만져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게는 한 1년 짧게는 한 5-6개월 동안 이 일들을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고 그리고 정말 백골난망입니다. 정말 감사하고 진짜 입이 백 개가 있어도 할말이 없습니다. 뭐 한 게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로 인도하신 것이 감사한데 그런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보면 이것을 하면서 얼마나 내가 많이 때묻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물론 예전에도 눈같이 순결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것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배우면서 물론 그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어떤 나쁜 마음으로 교회를 속이고 그 다음에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그렇게 해서 일을 그르치고 이런가 하는 것들을 다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또 어떻게 지혜로워해야 하는가 도 배우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혈기를 부릴 때도 있었고 마음이 상할 때도 있었고 그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언젠가는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일만 남아 있는 서글픈 상황이 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래도 마음속에 있었던 타오르는 확신은 무엇인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셨고 누군가는 진창에서 이 일을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해오면서 이제 모든 일이 거의 끝나 가는 시점에서 그런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물론 그 와중에서 저의 부족도 있었고 또 지혜롭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판단이 미숙해서 생전 처음 지어보는 이 공사에서 잘못 판단한 적도 있었고 여러 가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고 그리고 이것을 잘 감당해서 그래서 마지막까지 완수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만은 분명했고 그리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동안에 시달리면서 이전에도 눈같이 순결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가 필요 이상으로 너무나 많이 세상을 배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입당을 하면서 입당하기 전에 이때까지 있었던 그런 마음의 때들을 나는 물론이고 또 여러분들도 모두 말갛게 마음속에서 깨끗이 씻어내고 그리고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께 바쳐지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바쳐졌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때묻고 변화되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든 불만족한 삶, 고통받는 우리의 인생의 모든 삶에 궁극적인 원인이 아닐까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때가 없으신 분이셨고 더러움이 없으신 분이었지만 하나님이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서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죄 없으시고 순결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에 수종들고 주님의 일군으로 사시기 위해서 그런 성령의 부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했다면 예수님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더럽고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때의 패역이 뼈 속 깊이 배어있고 주님이 은혜를 주셔도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려고 하는 그런 본성들이 마음깊이 배어있는 우리와 같이 소망 없는 죄인들에게는 정말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주시고 그 충만한 은혜로 우리를 채워주시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집회하시고 오시는 길에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시고 유리창이 더러워 걸레로 닦고 나니 너무나 더러워 버리려다가 세정액으로 빨고 나니 너무나 깨끗해서 강 대 닦는 수건으로 사용하며 그 수건을 늘 보면서 쓰레기통에 버릴 걸레가 깨끗이 빨고 나니까 거룩한 강대를 닦는 수건이 된 것을 보며 죄인들을 향해 가지고 계 신 하나님의 소망이 모두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야기)
결국은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깊이 들어가 보면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원래 성령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죄를 깨닫게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절실히 믿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의 한가지고, 또 하나는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가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성령은 여러 가지 일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게도 하시고 또 기도할 때에 오셔서 충만한 능력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도 하고 여러 가지 힘을 주시지만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심적인 일은 첫째는 죄를 깨닫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하셔서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순결하게 하시는 그 일이 성령이 하시는 대표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도 돌아보면 은혜 받기 전에는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문제가 참 많은 것처럼 생각이 되는데 은혜를 받고 나서 보면 우리가 예전에 왜 그렇게 불행하고 어두운 인생을 살았을까 질문해보면 거기에 대한 답은 오로지 하나님의 깊은 성령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성령의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는 예수님을 더 순결하게 했고 그리고 그 예수님을 더 하나님과의 관계에 꼭 묶어주었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헌신해서 예전에는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자기를 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드릴 수 있는 구별된 헌신의 마음을 갖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성령의 은혜입니다. 5-10년 동안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난쟁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면하지 못하는 사람, 매일 매주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습관적으로 왔다가 갔다가 하면서도 자기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해보지 못한 사람, 끊임없이 설교를 듣고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한 삶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싹트지 않는 사람, 그래서 죄를 이기고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 할 때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아도 환난과 시련이 오고 나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회의적이 모든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성령의 은혜입니다. 사람의 말과 사람의 재주가 아니라 하늘을 가르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신자들의 마음에 역사 하시는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성령의 부어주시는 은혜만큼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다양한 문제들을 나는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놀라운 말씀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놀랍게 여러분들의 눈을 열어주셔서 여러분들의 문제가 무엇이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지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무력하던 사람들을 활기차게 만들고 사랑이 없어서 강퍅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서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고 그리고 신앙의 열정이 없는 사람의 마음에 감화를 주셔서 뜨겁게,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런 어떤 성령의 충만한 은혜, 그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 그런 성령의 은혜가 주어졌습니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도하실 때 주어진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일먼저 구해야 할 것이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 정말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을 가르쳐주시면서 그렇게 구하는 자에게 하늘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은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이 속된 사람이라면 속된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대한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진실한 신자라면 진실에 대한 욕망이 있을 것이고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이런 성령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성령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있는 예배는 곧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의 삶을 놀랍게 바꾸어놓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자신 때문에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변화되지 않은 자기를 보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를 고칠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은혜로 주님이 자기를 새롭게 해주시리라고 하는 그런 확신, 그런 은혜 속에서 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우리가 왜 병들고 고통 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연민의 마음이 안 생기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가에 감사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슬이 맺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많이 주셨는데도 그 주신 것을 인해서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광야에서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따라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만족이 우리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정말 주님의 성령이 이 시간에도 더 충만히 내 마음에 임해서 그래서 이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그런 사모함이 있습니까? 그런 은혜가 있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주님의 만져주심이 더 기다려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과 이 세상에 있는 부귀보다도 하나님이나를 사랑해주시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이 관계의 행복이 그 무엇보다도 행복한 것이라고 하는 그런 확신이, 그런 목마름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마름이 현저히 부족하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광야의 마른땅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메마른 삶을 살면서도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국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앙케트를 냈다고 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 뭐하고 싶다. 많은데 일 순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동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입증이 됩니다. 교회에서 교인들도 잘 안 우는데 한 골의 골이 들어갔다고 펑펑 웁니다. 콧물까지 흘리면서, 그게 결국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이 세상에 얼마나 메마른 세상이고 영혼을 움직이는 참된 기쁨,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참된 즐거움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은혜의 감격이 없는 가운데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그 속에서 은혜의 감격의 물이 그치고 나면 우리의 삶은 정말 쓸모 없는 열매맺지 못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제껏 까지 여러분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도의 제목들을 한번 이 순위 삼 순위로 밀어 던져 버리고 그리고 제일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의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성령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고 예전처럼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온 마음으로, 온 육체로 충만히 느껴서 그래서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것을 의식하며 살수 있는 그런 변화를 내게 주십시오. 그런 갈망,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간절히 기도하시자 열려진 하늘을 통해서 이런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비둘기와 같은 형체로 임하심으로 예수님이 후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이 평화를 위한 사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수많은 반대자들에게 에워 쌓이고 시시각각으로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전투적인 생애를 사셨지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혈기 부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런 모든 대적들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시면서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시며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 땅에 보편화되는 그런 날을 꿈꾸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역을 다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일을 열심히 하는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한 것만큼 다툼과 분쟁이 만들어내는 일군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또 한편으로는 세운 하나님의 나라를 허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정말 평화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 세상에서 용납될 수 없는 죄인들이 교회에서는 용납이 되고 뉘우치는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주고 그 한사람, 한사람들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주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교회에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런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성령의 은혜로 여러분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로워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또 하나는 하늘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실로 하늘이 열리고 정말 장구한 역사 끝에 주어진 하나님의 음성이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계시가 그치고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전달하는 예언자들의 섬김의 맥이 끊어진 상태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 하나님의 그 음성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정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사를 염두에 두신다면 하늘을 열고 들려온 음성은 이스라엘의 독립에 관한 예언이거나 혹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 혹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축복에 관한 말씀이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늘을 열고 수백 년만에 들려온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은 예수 그리스도 개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가지로 이루어져있는데 하나는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이 사건을 가르쳐서 이중의 인침이라고 불렀는데 첫째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라고 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에 대한 장엄한 확신을 그 성령의 임재를 통해 보여주신 것이고, 두 번째는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랬으니 예수님께서 이제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해나가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 구원사역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인쳐 주신 사건이 바로 두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심으로서 하늘을 여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성령을 보내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였으니 세 번째 주어진 하늘로부터 나는 이 음성은 첫 번째 두 번째 일어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그 두 가지 사건 모두를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쳐 주는 보증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림으로 열린 하늘과 내려오신 성령의 진실성에 대해서 인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비참한 신앙생활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비참한 상황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것은 기도할 수 없는 상황보다도 훨씬 더 비참한 상황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열렬한 기도는 얼마 가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의 기도는 그 열렬함이 얼마 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분별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릴 가능성도 그만큼 적습니다.
원래 이 기도라고 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과정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그 과정을 통해서 기도자의 마음이 녹아져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을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담아서 주님이 나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그 기도를 하면서 변화되는 것이 기도의 궁극적인 완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을 때에 기도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고 또 기도가 빗나가지 않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대로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기도, 그것을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먼저인가, 기도가 먼저인가 뭐 어느 것부터 먼저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뭔가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말씀에 깨달음은 없지만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가 보면 마음이 열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렇게 해서 변화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자기가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보니까 아주 분명하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무엇인지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리는 것, 그것이 있을 때에 그때 비로소 그 신앙생활이 변화될 수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을 깊이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천국에 사는 것 같은 분명한 신념을 갖게 되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하는 일을 인정해주심으로서 우리가 사람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나님 앞에서 담담하게 감당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매우 여린 사람이 되고 사람들 앞에서는 좀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잘합니까? 우리가 다 완전합니까? 우리가 모든지 다 판단이 옳습니까? 우리들이 모든지 다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우리들이 잘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사람마다 판단하는 바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일에 유능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런 일에 유능합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을 만드셔서 우리를 주님 섬기는 자리에 세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만들어 가시면서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우리들이 잘 감당해나갑니다. 그런데 결국은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이 있고 그리고 주님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주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열심히 감당해나가고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겸비함을 가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약하면서도 환경과 세상을 향해서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주님을 섬겨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 내가 지금 비록 환난과 시련을 만나고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러나 주님이나를 사랑하신다. 주님이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게 하셨으며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나의 환경과 그리고 나의 만족과 불만족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이 내 소망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오직 예수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나를 버리지 않네
이런 관계에 대한 확신, 그런 것들이 풍부한 기도 생활 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기도를 많이 하고 살아있는 기도생활 속에서 우리들이 진실하게 헌신할 동안에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역사하고 있을 동안에는 의심이 안 듭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연단 하시는가보다, 고난을 많이 겪으면서도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쏟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욥과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그래서 폭풍우 가운데서도 손 내밀고 나를 붙드시는 그런 하나님의 강력한 손길을 폭풍보다 더 분명하게 의식합니다.
요즘은 이렇게 세월이 흐르는 게 너무 야속하고 그리고 정말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참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나온 과거를 이렇게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얼마 안 되는 세월을 살았는데도 참 다시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생스러운 시간들이 참 많았구나. 거기 주님이 계셔서 주님 섬기고 주님의 사랑을 맛본 그런 감격을 조금이라도 주셨으니까 그것을 회고할 수 있지, 아주 돌아보기도 싫을 정도로 진저리쳐지는 그런 고통스러운 날들이 참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도 정말 신기한 게 고통에 대한 기억보다는 기도 안에서 기도하면서 살았을 때에는 고통에 대한 기억보다는 그 고통을 수단 삼아서 주님이 내게 주셨던 은혜가 훨씬 더 많이 기억이 나고 가슴에 파고듭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정말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냥 흔들리면서 아무 확신도 없이 그저 주일이니까 교회에 가고 끝났으니까 집에 가고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시지 않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나 하나님의 자녀야,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런 관계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또 하나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을 기뻐하시고 또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죄인이 아닌데 죄인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겸손해져서 죄인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은혜는 시냇물과 같아서 높은데서 항상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마음이 깨트려지고 통회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자기는 정말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고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무익할 뿐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들어서 예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에게 매우 유익한 사람으로 교회에 매우 유익한 사람으로 그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이 사용해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좀 이렇게 낮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능력도 좋고 확신도 필요하지만 능력과 확신이 있는 사람들, 또 충성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대부분 거칩니다. 겸비함이 모자라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이라는 미명하에 거칠게 살아가는 것이 말하자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실제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면 살수록 마음이 황폐해지고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궁극적인 모습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피할 수는 없다고 할 수는 없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순결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무리 사이에 줄서서 따라가시며 죄인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그 백성들과 하나 되시고 그리고 주님의 귀한 구원사역을 감당할 어린양으로서 자기를 준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낮추시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일을 사자처럼 열심히 하고도 어느 한순간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익한 종이고 내가 섬겼던 많은 날들은 더 잘 섬길 수 있었던 자리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누를 끼쳐드린 생애였습니다 라고 고백해서 오히려 주님이 우리의 어깨를 붙들고 일으켜 세우시는 그런 겸비함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또한 앞으로 해나갈 일이 그분께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은 아무도 없는 광야에 들어가서 사십일 동안 주리시며 시험을 받으시면서 한없이 고통 가운데 시험을 받으시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끝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지만 갈릴리로 돌아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뒤집어져서 회개하는 대신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많은 반대자들을 만났고 이제 능력 받은 예수님 앞에 기다리고 있는 삶은 피나는 고난과 시련 그리고 박해의 연속이었고 마지막에는 악한 무리들의 공교한 살인의 개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사람, 일만 명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또한 기도할 때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순결하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그렇게 자리를 낮추어 겸비하게 어린양으로서 죄를 받으실 때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거저 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또 하늘을 열어 그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 말씀하셨던 것을 보면서 정말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일이 꼭 필요한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예수님이 요단 강변에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면 예수님에게 부어주셨던 이 성령의 은혜, 하늘을 열고 들렸던 주님의 말씀,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려서 그래서 우리로 정말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는 진실한 신자의 길을 가게 하실 것이라고 이것을 굳게 믿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님처럼 기도하셔서 이런 은혜 속에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3.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5:16)
오늘 누가복음 5장에 나와 있는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이 모습은 마가복음 1장에 나와 있는 예수께서 새벽미명에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에 가셨다 라고 하는 그 기록과 병행기록이라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마가와 그 다음에 누가는 보는 관점도 약간 차이가 있었고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그 기록의 분량에 있어서도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렇지만 여기에서 두 기록은 아마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째든 한쪽에서는 새벽미명에 기도하시러 가셨다고 되어 있고 여기에는 그런 말이 빠지고 그냥 많은 사람이 몰려오되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에 가셨다 라고 되어 있지만 결국은 이 두 기사를 종합해보게 되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결국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고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아왔지만 그 많이 몰려드는 수많은 일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도 생활을 방해받지 않으시기 위해서 당신 나름대로 새벽기도를 계속 하셨다 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의 기록에 보면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기도하러 가셨다” 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몰려오는 병자와 말씀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팽개친 채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으로 간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지만 사실 문맥상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의 상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즉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신 시간이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는 그 시간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으로 예수님의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병 고쳐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몰려오는 그래서 점점 예수님께 도움을 얻고 싶어하는 백성들의 인파가 많아지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새벽에 기도하시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라고 하는 그런 내용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단적인 면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흔히 기도생활을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는 특별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우리는 특별히 기도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특별기도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상적인 기도생활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특별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는 물론 우리들이 특별히 기도해야 하지만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견고한 기도생활에 깊이 내리는 그런 일상적인 기도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난 많은 간증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기도하지 않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허기야 주일 예배 한번 드리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기도생활까지 요구한다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요즘 신앙생활에 형태에는 맞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고 우리의 신앙에 풍조는 어떻게 변해가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성경과 우리의 신앙의 경험은 공통적으로 기도생활이 없는 정상적인 신앙의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영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저 자기 자신이 많은 수양을 통해서 그저 사람 사는 올바른 이치를 찾아서 걸어가는 도덕적인 종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열광을 하면서 신들에게 아부를 하면서 복을 받고 사는 샤머니즘 적인 신앙도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영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영혼의 새로운 힘과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시고 그런 힘과 능력을 공급받은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잘 간수해나감으로서 그렇게 주님을 몰랐더라면 살수 없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런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축복해주시고 영혼과 그들의 삶에 복을 주시고 그 힘을 얻어서 또 더 하나님께 순종하고 섬기며 살수 있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생활의 힘은 여러 방면으로부터 오지만 근본적으로는 두 방면으로부터 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생활을 통해서 오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기도생활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실제적 영적 신앙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는 능력들을 공급해주도록 그렇게 원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깨달음이나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깊은 감동도 거의 없고 그리고 무지 가운데 지내고 더욱이 그렇게 무지 가운데 지내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에 받아보는 적도 별로 없고 또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자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니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지 되는지 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어두움 속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백 명의 교인이면 거의 오십 명 내지 육십 명이 넘는 교인이 일주일에 단 10분도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것이며 그리고 인생에 와서 부딪히는 수많은 유혹과 난관들을 기도로 이겨갈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은 매우 헛된 기도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순간 이렇게 영적 생활의 원리를 터득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살려고 노력을 할 때에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생활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감동은 기도의 문을 열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열렬한 기도는 성도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은혜가 계속 살아있게 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고 주일날 와서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뭔가 위로나 혹은 마음에 어떤 감정 정도나 받고 기도하라는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면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똑같은 생활을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개인적인 기도생활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숨쉬는 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그 기도생활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가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일에 에워 쌓이셨습니다. 말씀을 능력 있게 증거 하시니까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고 또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해서 너무 곤고하고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불치의 질병까지 나음을 얻으니까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만나고 새사람이 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많이 나아오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할 일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꼭 하시려고 했던 그런 일입니다.
즉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길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보면 해야 할 일들이 자꾸 늘어납니다.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셋씩 이렇게 태어나서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면 그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들이 얼마나 바쁘게 애를 써야 되는지 모릅니다. 요즘이야 그저 하나나 둘밖에 안 낳지만 옛날에는 5-6씩 애들을 낳으면 아침에는 학교에 갈 때 아이들이 나가는 모습은 고아원에서 나가는 것 같이 주르륵 나갑니다. 엄마 스케치북 사게 돈줘, 신발주머니 살 거야, 과제물 사야지 돼, 그것을 받아서 나갑니다. 아이들 도시락 싸서 한번 다 내보내고 나면 엄마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이 넋이 빠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아이들이 생기 있게 살아가니까 그런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중간에 어려서 죽어버린다든지 하면 그렇게 바쁘고 고생할 일도 없습니다. 정말 그런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 점점 줄고 신앙생활에 의욕이 없어진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목회자도 점점 목회하기 싫어지고 하나씩 둘씩 흩어져서 사라지고 나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습니다.
(예화: 새해 신방 때 바쁜 가운데 지방에서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할 기회가 되어 가셨는데 새해 신방을 하는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계시기에 궁금해 물어보니 목회를 하고 싶어도 성도들이 없어 못하시는 분들이라고 했다는 이야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점점 할 일이 많아진다 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힘들지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이제 더 많은 사람의 노고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토요일 저녁때도 우리 청년들이 나와서 청소를 하는데 여러분, 한번 보시면 감동적일 것입니다. 티셔츠가 온몸에 다 붙었습니다. 그래서 와서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밤 9시부터 청소하는데 한 7-8명이 와서 하는데 티셔츠가 몸에 달라붙었고 땀이 바지까지 철철 흐릅니다. 너무 딱합니다. 전에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는 청소를 누구보고 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2 사람이 와서 봉사하고 가면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땀이 철철 흐르도록 해도 청소다 해 놓고 각 방을 다녀보면 내 입장에서는 별로 만족스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넓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청소 한번 하려고 해도 20명이 와서 그래도 일을 한 2-3시간씩은 해야지 만 그래도 아! 그래도 청소를 한 것 같구나.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더 많은 섬김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로운 역사를 해서 그렇게 곤고한 백성들을 도와주고 그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면 일이 많아지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갈 때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도자이네 하고 자기들 앞에 있었지만 결국은 자기들을 타고 다닌 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진정으로 목자의 마음으로 자기를 섬겨주는 그런 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마음을 다 드려서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일이 많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팽개치신 것이 아닙니다. 어줍지 않은 경건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일과 경건이 마치 적대관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정말 소중한 하나님의 일을 하찮게 생각하고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 앞에 방치하고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일이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장의 같은 기사에 보면 사람들이 잔뜩 몰려옵니다. 그래서 저녁때도 사람들이 숙소에 줄을 이어서 하나씩, 하나씩 다 고쳐주시고 그리고 그 이튿날 새벽에 이제 한적한 곳으로 새벽기도 하러 나가는 그런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은 상황이었고 예수님이 기도하러 나간 시간은 새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이제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 때문에 기도를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들이 많이 밀려와도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매몰되어서는 안됩니다. 불안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기도는 하나도 안하고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혈기를 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가 일을 많이 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 하는 그런 고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일에 대한 열정보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항상 커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은혜가 일에 대한 욕망을 넘치도록 덮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렇게 많은 일과에 시달리시면서 그러면서도 기도하시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땅에 내려오셔서 예수님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셨습니다. 결핍 속에서 사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시작하자마자 예수님은 영적으로는 사단의 공격을 받으셔야 했고, 종교적으로는 그 당시 지도자들과 적대관계에 서셔야 했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해서 생명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자기의 양떼들은 자기가 목자인 것을 몰라보고 예수님을 미워했고 그리고 예수님께 대적했습니다.
누구 하나 예수님 편이 없는 그런 고달픈 인생을 사셨고 그리고 공생애 들어서셨을 때는 처음 시작하셨을 때는 오로지 혈혈 단신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자기의 일을 시작하셨지 어떤 동업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의 생명을 대속 제물로 주시기까지 힘에 지나도록 넘치게 고생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안락과는 거리가 멀고 주님의 생애는 명예와는 거리가 먼 그런 생애였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버리시면서 극도로 수고하시는 생애를 넘치도록 힘 바쳐 사셨습니다. 그렇게 힘에 넘치도록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면서 사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정말 일 천지였습니다. 여기에 가도 병든 사람, 저기에 가도 굶주린 사람, 그리고 이곳에 와도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사람, 저 동리 가도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게 된 사람, 오죽했으며 예수님께서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더라” 사람들이 이제 다 지치고 그리고 다 목말라서 이제는 울먹이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추수되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 그 밭을 보시며 당신 혼자 그 일을 다 질 수가 없어서 오죽했으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당부를 하시면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에게로 들어가도록 파송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그런 점에서 쉴 곳이 없는 그런 생애를 사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불편하게 사셨고 우리보다 훨씬 고통받으시면서 사셨습니다.
어느 사회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 중산층들이 누리는 생활 수준이 17세기의 왕족들이 누리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다 왕족입니다. 왕족 정도의 수준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17세기도 아닌 1세기, 왕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평민, 그 중에서도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그 삶에 상황이 우리는 도저히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정말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지상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 아들이셨지만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성품은 감추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그리고 보고 싶고 그립고 그런 인간이 느끼는 모든 정서, 죄만 없으셨지 인간이 갖는 모든 육체의 연약함을 함께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눈물도 많으셨고 배고픔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는 안타까움은 더더욱 말할 나위 없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은 그 연약함을 뛰어넘어서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시는 아주 중요한 비결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개인기도 생활이었습니다.
상황적으로 보면 우리도 예수님 못지 않게 바쁩니다. 새벽이면 아이들 학교 갑니다. 그리고는 밤늦게까지 공부합니다. 더군다나 고등학생쯤 되면 이제 두 시 세시까지 공부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한가합니까? 7시만 되면 인덕원 거리가 꽉 매어서 차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일찍 출근을 하고 밤에는 특근이다 야근이다 혹은 출장이다 하면서 밤늦도록 일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바쁘게 직장생활 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가족과 식사하면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바쁘게 삽니다.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 그냥 먹고살고 자기에게 맡겨주신 직업이니까 또 크리스천들이 게으르게 살면 되겠습니까? 매일 직장에서 지각한다고 야단이나 맞고 출장 가면 다른데 가서 놀고 온다는 그런 소리나 듣고 그렇게 되면 되겠습니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정말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그런 삶을 보면 그렇게 바쁘고 일이 많은 가운데 살아간다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과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님은 일이 기도를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생활이 일에 의해서 기도가 수시로 방해 당한다 라고 하는 것이 가장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이 일에 의해서 기도가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수도사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세속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경치가 좋은 곳에 한적한 수도원 하나 짓고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나 하시면서 사시기에 는 죄 많은 이 세상에 할 일이 너무나 많으셨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식으로 자족하는 신앙생활을 사는 것은 범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그런 수도원들을 다 정리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숲 속의 영성이 아니라 치열한 도시 속의 영성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 그리고 매순간 물질문명 속에 부디 끼며 살아가는 이런 도시 생활 속에서의 영성입니다. 자기 직업의 현장 속에서의 영성입니다.
그래서 제가 직장 생활하면서 신앙생활 할 때 이제 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직장 다니면서 야간에 학교를 다니고 그러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기도생활이었습니다. 늘 기도를 좀 많이 하고 싶은데 시간이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수시로 기도하면 된다 그렇게 하는데 수시로 기도하는 것은 지정된 규칙적인 기도생활이 풍성할 때 수시로 하는 기도가 힘이 있지 수시로 하는 기도만 하는 것은 안됩니다. 자기가 기도의 영이 이 속에 살아있을 때에는 어려움을 만나면 거기가 산골짝이든지 전철 속이든지 도시 한복판이든지 직장이든지 집이든지 상관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으로 도와달라고 기도하지만 자신 속에 기도의 영이 사라지고 나면 남들은 다 손가락질하면서 기도할 때, 그렇게 기도하면 큰일나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기도가 안 되는데 뭐 기도할 수가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무시로 하는 기도생활 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규칙적인 개인 기도생활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와 그리고 깊은 밤에 드리는 심야의 기도로 자기의 영적 욕구를 채워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어서 새벽에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새벽시간에 사람들이 아직 자고 있을 때에 당신의 잠을 줄이면서 기도하셔서 영혼들이 당신의 섬김을 필요로 할 때에는 나가서 섬기고 싶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이 당신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깨어 계시며 그들을 섬기셨고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는 시간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면서 다음의 섬김을 위해서 영적인 힘들을 비축하시는 그런 기도생활을 계속해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밖으로는 당신을 반대하는 종교지도자들과 영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의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또 가까이는 자기가 사랑했던 유대백성들에게 철저히 오해받으시면서 배척을 받으시는 가운데 예수님은 정말 혈혈단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제자들이라고 몇 명 있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런 무지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고독하셔서 그 고독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못하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기도를 의지하고 그렇게 기도에 철저히 헌신하는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이 일들이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는데 그 일도 방해하지 않고 기도를 한다고 하니 일을 희생하고 기도를 하면 좀 덜 힘들겠는데 일은 일대로 하면서 기도는 기도대로 해야되니 그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한 일주일이나 이주일 뚝 떠나서 경치 좋은 기도원에 가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그런 생활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매일 아침마다 부디 끼면서 출근하고 고달프게 살고 밤이면 파김치가 되어서 침대에 쓰러지면서도 그 모든 삶의 상황을 그대로 짊어지고서도 여전히 열렬히 기도하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정말 오늘날과 같은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꼭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저 되는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희생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 어떻게 고귀한 것이 얻어질 수 있겠으며 자기 절제 없이 어떻게 소중한 것이 획득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제 아직 젊었을 때 건강할 때에는 별거 아닙니다. 밤늦게 텔레비전보고 축구보고 떠들다가 누워 자도 아침에 벌떡 일어나면 건강합니다. 상쾌한 아침입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서 몸이 여기저기 아파 오기 시작하고 노쇠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러면 새벽에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렇게 하루 일과에 시달리다가 새벽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은 해보지만 그러나 이것과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새벽기도 체질이 아닌가보다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체질이 어디에 있습니까? 난 뭐 그럼 새벽기도 체질입니까? 나도 새벽에 얼마나 잘 자는데, 새벽기도 체질 좋아하네! 체질은 없습니다. 체질 있는 사람 손들어보십시오. 몰라. 나이가 더 많이 들어서 무릎에 바람이 들어서 새벽이 잠 안 오는 그때는 모를까, 그때는 교회에 나올 기운이 없습니다. 새벽기도 체질이 어디에 있어! 그런 말을 하면 군밤을 주고 싶습니다. 저는 새벽기도 체질이 아닙니다. 체질은 없습니다. 그럼 새벽 잠 체질입니까? 체질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새벽기도의 체질이 된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원래 새벽기도의 체질이 아니었는데 많이 분투하고 싸우는 중에 그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그게 몸에 배인 사람입니다. 이제는 어디에 가든지 간에 새벽기도 시간이 되면 자명종이 없어도 깨어납니다.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도 체질화되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도 몸이 너무 피곤할 때에는 한숨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목사인 나도, 그때 이기는 방법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렇습니다. 기억하고 있네. 좀더 자고 싶다 이럴 때 마음속으로 손을 머리에다 붙이고 ‘충성’ 그리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크게 웃으시는 분들은 처음 듣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이불 속에서 탁! 걷어내고 ‘충성’ 그리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면 하나님이 그 다음에 힘을 주십니다.
전 사실 태어나서 제일 황당한 기도를 했는데 어제 축구를 했잖아요. 이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내가 그렇게 기도를 하게 된 것은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이겨야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가 아니라 나는 신문을 통해서,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선수들의 가족들의 진짜 애달픈 중보 기도의 간증을 들으면서 이 축구를 위해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사실 좀 그렇다. 다른 것도 이겨야 할게 참 많은데 공 하나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은, 그렇지만 그 가족들, 그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신앙이 어린데 정말 의지할 바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이번 기회에 예수 믿게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그래서 나는 아주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기도 때문에 여기까지 올라간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생각이 나서 자기 신랑이 공을 차는데 못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못 넣은 사람이 자기 일기 속에서 고백하기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수많은 잔디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이 순간에는 자기가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무슨 공 하나 가지고 그런가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인생에 걸린 문제인데 그들의 가족들이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애달프게 매달리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주는 것을 경험하면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좋아지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2006년도에는 모르지만 2002년도에는 좀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들이 저렇게 기도하는데 하나님 좀 도와주십시오. 눈을 딱 뜨고 나니까 스페인 선수가 공을 뻥 차서 노골이 되었습니다. 즉시 응답을 받았습니다. 참 그것을 보며 체질은 없습니다. 언제나 힘듭니다.
여러분, 제가 아주 우스운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새벽의 기도의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푹 아침까지 자는데는 결단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다. 아침공기를 가르고 새벽기도에 나오려면 체질을 바꿔야지 만, 새벽 기도의 체질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은데 그럼 아침 체질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 것 있습니까? 새벽기도 체질로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을 받아야지 만 아침에 퍼 질러 자기 위해서는 노력할 게 별로 없습니다. 그냥 퍼 자면 됩니다. 특별히 노력을 안 해도 저절로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이기는 희생이 없이는 우리들이 새벽기도 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새벽기도만 불가능합니까? 다른 시간에 기도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실질적으로 새벽에 구조적으로 못 나올 수 있는 그런 가정주부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워낙 일찍 학교에 간다든지 그러면 아침 시간에 나와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대부분 우리들이 열심히 기도생활을 안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힘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렇게 열렬한 기도생활을 계속 하시면서 자기에게 몰려드는 수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적한 곳에 나아가서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영역을 비축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이 희생하셔야 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데 있어서는 우리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오래 걸어다니면 피곤하시고 그리고 또 잡수시지 못하면 허기지셔서 기운이 없으시고 그런 것은 우리와 똑같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우리의 기도생활을 힘차게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상황이나 우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여러분, 바빠서 기도 못하는 사람들 한가하면 열렬히 기도할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TV나 보면서 세월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 대한 묵상은 우리의 기도생활에 활기를 불어넣는데 아주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살다가 너무 어려운 일이 생기고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때로는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자기를 사랑해주던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거나 혹은 견디기 힘든 환난과 어려움이 다가와서 애매히 고난을 받아야 되거나 그런 때는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럽다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면 우리의 기도할 마음들이 많은 지장을 받습니다. 그때에도 이기는 방법은 가장 좋은 것은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럴 때 잘 부르는 찬송이 그것입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주님도 힘드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만이 당하는 어려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몰랐더라면 이런 갈등은 없었겠지만 그러나 죄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통 했을 텐데 그것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오, 그래도 거미줄 같은 믿음이지만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그렇게 살수는 도무지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조금이라도 예수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그렇게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육체는 안일한 것을 원하지만 그것을 타협하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상황은 너무 어렵지만 그래도 어떻게 기도하면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그런 신앙생활, 그게 그 사람의 신앙이 살아있다는 표입니다.
끊임없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말씀에 비추면서 말씀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버리려고 애를 쓰고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고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는 몰라도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 나 같이 쓸모 없는 인간에게 주님이 보여주신 그 분에 넘치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하고 살수 있는 그런 마음, 그게 기도생활 속에서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이 풍부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지상생활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 늘 주님의 도움으로만 살수 있도록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놓으신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바로 나는 능력이 없지만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 그 능력을 빌리기 위해서 내미는 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손을 내밀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마음 없이 드리는 형식적인 기도생활은 그렇게 크게 어렵지 않지만 이른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밀려오는 수많은 일과에 점령되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어느 한순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비우고 기도하고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 앞에 천국의 신령한 이슬로 자신의 영혼이 젖을 때까지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이 느끼시는 그 마음, 느낌 이런 것들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이런 은혜로운 기도생활은 자기를 버리는 철저한 헌신이 없이는 가질 수 없는 생애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안일하게 살아가는 게으른 생활과 열렬한 기도의 영은 한 사람의 인격 속에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무거운 세상살이의 짐을 지고 그리고 기도 속에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더욱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새벽기도의 헌신 속에서 산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렇지만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삶의 환경을 바라보면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힘든데,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는 힘들면 항상 휴식을 요구하고 힘들면 어느 정도 쉬어주는 것이 창조의 이치입니다. 그렇지만 때로 우리는 창조의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어도 그 이치를 거스르면서 살아야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의 삶을 보십시오.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것이 창조의 섭리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대신 박해를 받고 따돌림을 받는 것이 창조의 섭리였습니까? 아직까지도 목숨이 성성이 살아있는데 칼에 목이 떨어지는 것이 창조의 섭리였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게는 일반적인 창조의 섭리보다는 더 강력한 소명이 그들의 마음에 불붙고 있을 때에는 자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인데도 밤새워 기도해야 했고 때가 되면 먹고 쉬는 것이 사람의 일이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오히려 거스르면서 굶주림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쉬는 시간에 하나님 앞에 피를 토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쓰여져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정도의 삶을 산다는 것이 정말 쉽습니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우리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을 때 우리의 육체의 힘이 그런 헌신을 용납해주지 않을 때에는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은 몸부림과 필요성,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수 없는 육체 사이에 끼어서 우리의 곤고함은 더해갈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분이 있는데 그게 누군가 하면 피 흘리기까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시며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지상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 정말 곤고해질 때는 찬송이 좋았습니다. (?)와서 듣는 찬송 말고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지상생애에 대해서 묵상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찬송, 우리의 기도생활에 아주 놀라운 활기를 불어 넣어줍니다. 나는 교회에서 찬송도 좀 이런데 많이 집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의미도 없는 그런 것 말고 좀 이렇게 예수님의 지상생애에 대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많이 묵상해주는 찬송 그런 것을 부르고 나면 마음속에 다시 원기가 솟아납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고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님 모든 괴롬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주님의 생애는 안일과는 거리가 먼 생애였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한번에 예수님께 부어버린 섬김까지도 받으신 적이 있는 분이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일평생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 사셨던 분입니다. 예수님께도 새벽기도는 힘들었고 밤 기도는 고단한 일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리고 당신이 사명을 감당해서 구원해야 할 수많은 무리들에 대한 애정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남다른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은 모두 어려워도 주님을 그 환경의 어려움보다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든지 비집고 나와서 기도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때로는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해서 환경을 바꾸기도 하고 혹은 그 환경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긴밀한 기도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공급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시러 갔다고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에레모스’ 즉 광야로 기도하러 나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광야, 벌판, 혹은 빈들 그런 곳입니다. 이것은 풀과 나무가 아름답게 자라고 시냇물이 소리내어 흐르는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는 그런 아름다운 동산이 아닙니다. 거친 모래바람만 있고 그리고 찬바람 부는 그런 곳입니다. 밤이 되면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날이 추우면 모닥불을 피어야 추위를 면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이런 광야를 예수님께서 기도생활로 잘 택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 같은 빈들에서 자랐고 그리고 바울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모세도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해내는 영적인 인물이 될 때까지 미디안의 광야를 벗삼아서 고독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런 집중됨이 있는 그런 상황, 그런 환경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매주 뜻 없이 습관적으로 나오는 교회생활, 일이니까 그저 덜렁덜렁 해나가는 그런 일상적이고 사무적인 섬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런 빈들이 아닙니다. 정말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 서서 주님의 눈빛 앞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는 것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광야에 서 있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시간이 있습니까? 하루에 단 20분도 제대로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영적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거의 이 세상에 시류에 떠밀려가고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바로 그런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규칙적으로 교회 나올지도 모르고 여러분들이 이런저런 교회에서 시키는 일들을 해나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그냥 몸은 그렇게 교회 나오지만 마음은 이 세상의 시류에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여러분들이 어떤 은혜를 받고 어떤 수많은 간증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지금 오늘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들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강물이 따라 흐르는 물고기는 죽어서 물위에 뜨는 물고기들만 강물에 따라 흐르는 법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물고기는 물을 거스릅니다. 그리고 그 물을 거스르면서 자기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얼마큼 세월이 흐르면 여러분들이 기도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얼마큼 세월이 흐르면 여러분들의 환경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세월이 흐르면 여러분들의 몸이 건강해져서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펄펄 힘이 넘치는 그런 상황이 되겠습니까? 세월이 점점 흐르면 일은 많아지고 더 세월이 많이 흐르면 우리의 육체의 힘은 쇠하여져 갑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눕는 시간들이 많아집니다. 왜 죽을 때가 가까워오니까 사전 연습하는 것입니다. 모두 그렇게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육체와 싸우고 환경과 더불어 싸우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싸워야 합니다. 더군다나 조금만 노력하면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범죄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사무엘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는 죄를 범치 아니하리라”
신앙이 무엇입니까? 시류에 순종하고 자기의 마음에 복종하고 환경에 노예처럼 살아간다면 희망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도 그렇게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것들과 싸워서 이것들을 이기고 꺾어서 환경에 끌려 다니는 신앙, 자신의 마음에 노예노릇을 하는 신앙, 이런 것이 아니라 신앙이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게 만드는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생활은 우리 자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최고의 적은 마귀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기도가 살아있을 때에는 정말 기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기도해야지 되고, 기도가 죽어 있을 때에는 죽어 있기 때문에 기도해야지 됩니다. 우리의 삶의 상황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필요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어떤 때는 그 기도가 진통제 같기도 하지만, 막 아프고 괴로울 때 기도하면 즉시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우리의 규칙적인 기도생활은 보약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기도할 게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에는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기도하며 살기를 원하는 그 영적인 기도제목들은 여러분들이 눈이 어두워서 못 본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인생에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먹구름이 끼고 눈보라가 치고 천둥과 번개가 두루 때려서 그래서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런 삶의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긴밀하게 기도하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돈독히 은혜를 유지하며 산 사람은 폭풍과 어려움이 오게 되면 그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몸부림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를 이렇게 지어놓고 여러분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교회적으로도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그냥 껍질일 뿐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이제 여러분들의 무릎과 기도의 눈물로 하나씩, 하나씩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두 번째 지어지는 성전을 첫 번째 지어진 성전 못지 않게 소중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와서 교회가 20시간 열려있습니다. 언제든지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래서 규칙적인 새벽기도의 삶, 나아가서는 규칙적인 개인기도의 삶을 살아서 예수님처럼 능력 있는 삶을 살고 주님 잘 섬기는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의 기도로 보이지 않는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축복이 여러분과 교회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특별한 때 특별히 기도하신 예수님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공생애 들어서신 예수님의 생애의 시작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난의 마지막 사이에 한 분수령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택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열두 사도를 택하심으로서 단기적으로는 당신을 도와서 함께 당신의 사역을 감당해나가게 섭리하셨고, 장기적으로는 열두 제자를 통해서 신약시대의 교회의 초석을 놓고자 하셨습니다.
두 사건 다 동일하게 예수님의 사역을 뒤이을 때에도 그들에게 충만한 능력과 권세를 주셨고 신약교회 초석을 놓을 때에도 그 열두 사람 위에 성령의 물 붓듯 부어주시는 축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초석을 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택하신 이 사건은 본격적으로 당신의 이 지상 생애의 사역이 단지 당신 당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서 신약의 교회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주님의 사역에 뒤를 잇게끔 하시는 원대한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택하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열두 명의 사람을 택한 것은 처음 만나서 열두 명의 사람을 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당신이 알고 있는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열두 사람을 택해서 그들에게 ‘사도’라 칭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뒤잇게끔 계획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속에는 그렇게 중요한 때에 예수님이 이 일을 행하셨는데 왜 그러면 그 속에 갸롯 유다가 들어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그 사람이 자기를 팔자인지를 알면서도 그를 택하셨고 그를 도구로 해서 하나님이 더 원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지혜를 성취하실 것을 믿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명의 사람들을 주님이 택하셨습니다.
바로 그 엄청난 일이 있기 직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 때에 예수께서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아침이 되매 그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한밤을 기도로 지새우신 철야기도의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이 보여주는 세 번째 기도의 모본은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할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가 하고 성경이 오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다가 보면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는 때라고는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꼭 잡고 그렇게 걸어가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상적인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삶의 상황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아주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인도해주셔야 할 필요가 있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살면서 이렇게 특별히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한 그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슬픈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방황하고 위기와 어려움은 시시각각으로 닥치고 무엇을 선택해도 확신이 없고 또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 없이 무엇을 선택한다면 몇 걸음 걸어가지 않아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후회하게 되고 자신의 선택을 뉘우치게 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가 우리의 인생에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받는 것은 그렇지 않은 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그런 때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도 있었으니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도라 칭하는 열두 명의 사람들을 택하셔서 짧게는 자신의 사역을 뒤잇게 하시고 길게는 신약시대의 교회의 초석을 놓는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열두 명의 사람들은 오늘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께 잘 보인 사람들이 아니라 오랜 동안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그리고 가정과 집을 떠나서 참 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계셨고 또 사람을 깊이 꿰뚫어보는 안목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마음속에 간사함이 없는 것도 아셨고 처음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남성편력을 지닌 여인이라는 것도 즉시 알아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실 수 있었지만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인도를 받고 싶어하셨습니다. 사악한 갸롯 유다의 예수 팔려는 마음과 돈에 대한 탐심까지도 읽어내실 수 있는 분이었지만 이 특별한 지점에 와서는 당신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인 특별한 인도를 받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밤이 맞도록 산에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한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역의 위기를 만나거나 혹은 사역을 하면서 갑자기 하나님께서 사역의 방향을 바꾸실 때 하나님의 뜻이 이것인가를 몰라서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여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합니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한번 받고 보면 나중에 오랫동안 편안합니다. 한참동안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이 아닌 길을 택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야 하고 자기와 의지와 관계없이 아주 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역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상식과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각별한 인도를 따라서 도움을 받고 싶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가 꼭 그럴 때에만 선택의 기로에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는 죄가 있는 인간들이고 부패성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늘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이렇게 신령한 면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지극히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면 한 걸음도 옮겨놓을 수 없는 어려운 기로에 놓여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던 사업을 정리할 때나, 혹은 다른 사업을 시작할 때나, 직장을 옮길 때나, 직장을 그만둘 때나, 인생의 중대한 문제인 결혼을 앞두고 여러 가지 많은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한 때에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를 저절로 받으면서 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거스르면서 살기도 하고 주님이 가라는 길이 이 길인데도 불순종 때문에 저 길로 걸어가게 되는 일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이 언제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의 삶이 그렇게 불순종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속에도 죄와 그리고 불순종, 어두움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걸어가면서 삶의 기로 기로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한데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인도보다는 자신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으로 자신의 갈 길을 선택한 후에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고 시달리는 그리고 방황하는 지체들도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한번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다른 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보다도 훨씬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이 바로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도움, 주님의 인도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기로 결심하시고 산에 올라가서 밤이 맞도록 철야기도를 하심으로서 확신에 찬 가운데 내려오셔서 열두 명의 사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가. 우선 첫째는 산에서 드리신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들어서신 이후에 그 일생이 고단한 수고와 견디기 힘든 노역의 연대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안식과 휴식도 없으셨고 예수님의 생애에는 수많은 반대자들의 악랄한 박해와 그리고 무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순종에 에워 쌓이신 생애였습니다. 그렇게 고난에 넘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사도로 택하시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가신 그 날밤도 아마 그날 하루종일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고 이 동리 저 동리 다니시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자들을 고쳐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들을 가르치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하루의 일과였을 것입니다.
그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육신은 휴식하도록 예수님에게 요구하였지만 예수님에게는 잠시의 휴식보다도 더 큰 일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열두 사도를 택하셔서 자신의 일을 수종들게 하시고 신약시대의 교회의 초석을 놓게 하시는 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셔서 하루 밤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산 속으로 가신 것은 산 그 자체에 무슨 영험함이 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영성은 환경을 초월하는 영성이 정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영성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것을 환경의 핑계를 대고 상황의 탓으로 둘러댔지만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오히려 진짜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던 사람은 타락한 시대에서 오히려 샛별처럼 빛나는 믿음으로 살았고 모두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던 때에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시대가 춥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 사랑의 불꽃을 지켰고 그리고 그 시대가 어두웠기 때문에 오히려 빛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며 그 빛 안에 거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바로 이런 모습들을 우리들이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애 속에 정말 무지와 죄악으로 가득 찬 시대에 살았고 사악한 종교 자들 틈바구니에 에워 쌓여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산꼭대기나 한적한 광야로 나아가서 수도원을 설립하시는 대신에 예루살렘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우글거리는 거리거리를 다니며 주의 말씀을 가르쳤고 심지어는 부패하기 짝이 없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심지어 저 구약의 종교가 아닌 유대교를 가르치는 해궤망칙한 신앙을 전파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회당에 들어가서 진리의 참 복음을 전하심으로 비 진리와 함께 승부 하셨던 것입니다. 시대가 어둡고 캄캄할수록 빛 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들면서 살아야 하고 모든 시대가 캄캄할수록 빛 된 성도들이 자신의 온 삶과 그리고 신앙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방의 신상들이 득실거리고 반 하나님 적인 사상이 판치고 물질문명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시대에 고관대작의 자리를 두루 거쳤던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애굽 전역을 치실 때에 온 땅에 어두움이 삼일동안 가득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고센 지방에는 찬란한 빛이 있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필요성들이 너무나 증대되고 있는 때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다 제멋대로 인생을 살고 이런 인간 제일주의 적인 풍조는 교회 안에도 밀려들어와서 이제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지만 실권이 없는 입헌군주국의 왕처럼 하나님을 대하고 실제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모든 전권을 휘두르면서 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결정적인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받아야 된다라고 하는 말들이 그 사람들 마음속에는 크게 파고드는 말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가 하나님께 바쳐진 생애였지만 특별히 이 어려운 선택을 앞두고 하나님의 각별한 인도를 바라며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정말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영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도원을 지시는 대신 광야에 홀로 집을 지으시는 대신 예루살렘과 저자 거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과 사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항상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세계가 있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말하기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도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온 삶을 기도의 영으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늘 기도하고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살아감으로서 언제든지 기도하고자 할 때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기도가 언어로 용해되어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런 영적 생활을 항상 이어가라고 하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무시로 기도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가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의 세계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수시로 하나님 앞에 전철이든, 차안이든, 길거리를 걸어 가면서든, 장사를 하면서든, 직장에 있으면서든, 혹은 화장실에 있으면서, 혹은 어린아이의 기저귀를 빨면서도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렇지만 그렇게 무시로 드리는 기도생활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만 모든 환경으로 떠나서 자기만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런 시간과 장소가 있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언제 어디서 기도하십니까? 물었을 때 저는 특별히 정해진 기도 시간도 없고 정해진 장소도 없습니다. 저는 늘 기도하면서 살지요. 이런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거의 사도들의 수준에 육박하는 기도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들이 늘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런데 사실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짧은 시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서 기적에 가까운 역사를 베푸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짧은 시간 기도해서 하늘의 능력을 부음 받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는 놀라운 역사는 한순간에 간절한 기도만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성경에 보면 짧은 시간의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 내렸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필요한 시간에 간절히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이렇게 홀로 기도하는 깊은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에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에 개입하셔서 사건을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무시로 기도하면서 사는 순발력 있는 기도의 삶과 함께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누구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기도의 시간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기 위해서 산에 오르신 것은 산에 무슨 영험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산에만 계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어디에나 하나님은 계시고 전심으로 자기를 부르짖는 사람들 가까이 에서 오늘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하나님이 쓰셨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 위기의 때에 각별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래서 하나님께 위기를 통해서 오히려 영광을 돌렸던 영적인 인물들은 반드시 이런 광야를, 혹은 이런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미디안의 광야나 혹은 호렙산, 그리고 또 엘리야 선지자에게 있어서 광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불렸던 세례 요한과 그리고 광야 생활, 그리고 예수님의 초기 생애에 홀로 영적인 대적과 마주하기 위해서 들어서셨던 그 유대 광야와 시온산,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아라비아의 광야와 그리고 요한에게 있어서 밧모섬, 그리고 오늘 예수님에게 있어서 위대한 선택을 앞둔 산기도 모두 광야, 산, 들판, 벌판 이런 자연적이고 환경적인 요소들이 따라오는데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그런 시간, 그런 때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는 산이 있습니까?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과 홀로 대면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여러분들의 기도 생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일평생 하라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목놓아서 간절히 부르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어디서든지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만 그것은 보조적인 기도생활이고 그리고 제일 바람직한 것은 새벽기도의 시간을 떼어놓고 그리고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철야 기도를 하려고 교회를 가려고 일어났더니 너무 늦게 일어나서 통금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자고 내일 아침에 사업을 할까, 일을 하러 나갈까 그러다가 목사님과 다른 성도들은 밤을 새워서 교회당에서 난로를 펴고 그 추운 데 기도하는데 내가 어떻게 이 따뜻한 방에서 잘까 하고 그리고 따뜻한 아랫목을 일어나서 윗목에 차가운 데 가서 무릎을 꿇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도를 하는데 불도 제대로 못 때어서 썰렁한 방인데도 철야 기도하려고 올라갔는데 마지막 결론은 그 추운 방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밤새도록 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집사님 하는 이야기가 다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 이론이지 실제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와서 기도의 바쳐진 장소에서 기도하는 곳이 가장 효과적이다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 깊이 감화를 받았고 특별히 늘 4-5월이면 즐겨 읽던 데이비드 브레이너의 일기를 보면서 감동을 받아서 사당동의 산 기도를 한참 다닌 적이 있습니다. 총신 대 뒤에 산이 있는데 그때가 봄이었으면 좀 괜찮은데 그때 겨울이었습니다. 11월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기책에 보니까 이 브레이너가 눈이 많이 덮친 산에 올라가서 그냥 그렇게 하루종일 몸부림치면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도하고 일어나면 피를 토해서-폐결핵이었습니다 -눈이 시뻘겋게 이렇게 물드는 그런 장면을 보며 얼마나 찔림을 받았는지, 세상에 내가 진짜 사는 것인가. 이렇게 살다가 어떻게 가서 주님을 대면할까!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이제 본 교회는 너무 멀고 해서 산으로 갔습니다. 학교에 채플실도 있는데 그곳은 너무 편해. 그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얇은 담요 하나 가지고 산으로 갔는데 11월이 그렇게 간단한 날씨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서 방석 깔고 예배드리는 것도 아니고 의자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이렇게 기도하다가 산으로 갔는데 웬 산이 그렇게 돌이 많은지 가는 곳마다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석을 깔아놓고 엎드려서 그 산에 서리가 약간 내린 그 낙엽 위에 얼굴을 묻고 파카를 걸치고 엎드려서 기도하기를 수 주 했습니다. 몇 주 했는데 결국은 다시 예배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돌이 무릎에 배겨서 기도를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15분 기도하고 나면 몸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리 여기서 오늘 부러지자. 내일도 또 써야지 오늘 부러트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몇 주일을 가서 기도했는데 한시간 반 두 시간 기도하고 돌아오면 온 몸이 완전히 내장까지 얼어붙어서 녹이느라고 두 시간 또 걸립니다. 그래서 이것은 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했고 나는 그저 그 발에 못 미치는가보다. 그리고 하나님, 편한 예배당에서 좀더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으로 올라갔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에게 이런 세계가 있습니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어떤 지체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이 평신도의 삶을 너무 몰라서 그렇지, 목사님이야 새벽기도 하시고 올라가서 자면 되지만 우리는 출근합니다. 안 잡니다. 그 소리 할까봐 안 잡니다. 절대 안 잡니다. 진짜 몸이 아프기 전에는 안 잡니다.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해서, 안 잡니다. 똑같은 조건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구는 뭐 직장생활 안 해봤습니까?
그런데 물론 여러분들 중에는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개인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독립적인 환경이나 기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어느 지체는 목사님, 내 상황이 되어보십시오. 아침이면 6시 반이면 나가서 밤 11시나 되어야 돌아오는데 씻고 밥 먹고 나면 12시가 넘고 그리고 아침에 비몽사몽간에 일어나면 직장생활, 사업이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살다가 보면 그렇게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직장 다닐 때 직장에서 비상이 걸리고 위급한 일이 생기면 새벽기도 안 나가고 직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밤도 샜습니다. 해야지 예수 믿는 사람이, 다 집어치우면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한두 주일 몇 달은 예외적으로 그렇게 살수 있지만 일년 내내 그렇게 살라고 하면 그 직업을 바꾸어야 합니다. 집어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서 뭐합니까? 무슨 인생에 사는 보람이 있습니까? 떼돈을 번다고 해봐야 부자밖에 더 되겠습니까? 성도가 되기를 희생시키고 부자밖에 더 되겠는가 이런 뜻입니다. 심오한 이야기입니다.
(예화: 허세포드 라고 하는 목사님의 이야기- 어느 성도가 주일을 자꾸 지키지 않자 심 방을 가셔서 사연을 들어보니 소가 웅덩이에 빠져 구해내려고 하다보니 늦어 나 가지 않았다고 하자 자꾸 웅덩이에 빠지면 팔아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자기 직업에 대해서 열심히 없는 사람을 보면 정말 왜 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성실하게 안 살면 회사를 괴롭히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면 고객을 괴롭히고 사회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만들어놓고 가면 매일 고장나고, 그렇게 하면 안되지 열심히 살아야지, 그런데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도 허락을 해주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살라고 그렇게 하면 그 직장하고 결별하십시오. 그 사업과 결별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더 좋은 곳으로 예비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살아서 뭐 합니까? 마지막에 인생의 승리와 보람이라고 하는 것은 지위나 물질의 다과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토대 위에 있고 그 위에서 자기의 세계를 건축해 가는 것이지 아니 무슨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예배도 없고 신앙생활도 없고 심지어는 거의 구조적으로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3,4,5년 동안 일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밥 벌어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자기 성공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달려온 인생의 길이지,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의 구조를 필요하면 바꾸어야 하고 그리고 구조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구조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 속에서 게으름을 추방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새벽기도 못나옵니까?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지만 간단합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환경을 능가하는 탁월한 기도에 열망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기도의 마음이 그 가슴속에서 충만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왕의 신상 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 무엇을 빌거나 구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는 어명이 적힌 글에 어인이 찍힌 줄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 속에 있는 그 기도의 열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놓고 전에 하던 그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에게 그런 세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모두 힘듭니다. 독립적인 시간과 장소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모두 힘듭니다.
아이들을 기르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린아이들의 엄마들이 얼마나 힘들고 애를 씁니까! 그래도 교회에 오면 좀 밥이라도 좀 줄서면 먼저 서서 먹으라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얼마나 고생합니까. 애들을 데리고 주일날 와서 은혜 좀 받고 가야지 되는데 애들이 와서 소리를 지르고 부모를 못살게 합니다. 퀴즈렌드에 들어가라고 해도 또 안 들어가는 애들이 있습니다. 자기 닮아서 그렇게 고집에 셉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깊이 변화를 받아야 하는데 삶이 그것을 허락하는가 말입니다. 누구보고 그랬습니다. 너무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하지 말고 아이들이 잠들면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기도해라 했더니 하는 말이 목사님, 애들 자는 시간에 나도 자야지요. 그때가 겨우 내가 휴식시간인데,
그러니까 그만큼 삶이 고달프고 어려운 것입니다.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학생들을 붙들고 물어봐도 직장인들을 붙들고 물어봐도 모두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의 세계가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듯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역에 시달리시고 수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으시는 분이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받고 싶을 때 특별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여러분들이 잘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낙망하거나 낙심하지는 않았습니까? 주의 일을 하다가 넘어지거나 혹은 곤고해지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여러분들이 너무나 힘겹고 어려워서 주저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만져주심이 필요한 때가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거나 여러분들의 삶을 영위해나가다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지 않았습니까? 이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아닙니까? 이제껏 까지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 받는 삶을 살아왔지만 지금 여러분들의 영혼이 위험한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유혹과 시험과 주위에 의해서 넘어지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의 위기에 있지는 않습니까? 일상적인 기도의 생활이 여러분들의 영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느끼게 만들 때는 아닙니까? 이럴 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이 왜 하나님 앞에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특별히 매달리지 않습니까? 습관적인 직장생활, 습관적인 예배생활 기도도 거의 없는 그리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는 애원이 없는 마음으로 건성으로 중얼중얼 하는 그런 기도생활, 배게 닢에 얼굴을 묻고 오 분 십분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에 기도생활을 때우려고 하는 이런 나태한 생활로 여러분들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줄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특별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희에게 응답하겠고 너희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는 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들의 야비한 비난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오로지 무릎을 꿇고 지존하신 하나님만을 대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선생, 그 다음에 놀라운 치료자, 기적의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한 아들로서 무릎을 꿇고 주님을 홀로 대면하는 그런 시간, 그런 세계가 예수님에게는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깊은 기도로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인도를 받고 싶으셔서 산 속으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우선 기도할 수 있는 환경에 두어야 합니다. 각오가 필요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이 그 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밤이 마치도록,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할 그 시간에 드린 예수님의 기도가 장시간의 기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장시간의 기도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기도의 열렬함이 있었기 때문에 장시간의 기도를 드리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특별한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너무 간절히 받고 싶어하는 그 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자 하는 열정이 마음속에 있는 법입니다. 그 열정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는 잠깐을 기도하고 나서 시간을 보면 1-2시간 혹은 3-4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에 간절한 열정이 없을 때에는 기도의 열렬함이 없을 때에는 실로 긴 시간을 기도했는데도 시간을 보면 겨우 5분 정도 흘렀습니다. 20분도 안 흘렀습니다. 이것은 결국 긴 시간의 기도가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 기도의 영이 열렬하면 그 기도가 그렇게 열렬하고 간절하면 그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깊은 기도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고 그렇게 기도가 깊어지면 그 기도는 반드시 장시간을 하나님 앞에 매달리도록 만들어줍니다. 공중전화를 거는 것처럼 간단한 기도, 그 기도 말고 그것은 보조적인 기도고 그리고 그런 기도는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기도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바와 같이 정해진 장소를 규칙적으로 찾으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장시간에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장시간을 드려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기도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기도도 아주 능력 있게 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루종일 고된 사역에 시달리시고 자기를 다 소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피곤하고 연약한 육체를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원래 창조의 섭리는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밤이 되면 자는 것이 창조의 섭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루종일 피곤한 일과 끝에 쉬셔야 될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각기 자기 처소에서 잠자는 시간이었는데 당신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모든 사람들이 돌아간 고요한 홀로 있는 시간에 이제 쉬셔야 될 시간인데 예수님은 당신의 발걸음을 산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곤한 몸에도 불과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온 밤을 뜨거운 기도로 밤을 새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환경 때문에 쉽게 무너지고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는 생래적인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그래서 수시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그 고난의 생애를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받으시는 그 생애, 그 동안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 불연 듯 눈을 떠서 내가 이렇게 안일하게 살수가 없지,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보십시오. 매일매일 작은 일에 있어서 자기를 희생하고 작은 십자가를 지는 충성스런 삶이 없는 사람들이 장엄한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은 모두 영적인 허영입니다. 주님, 저를 받아주시옵소서. 제가 세계 선교에, 조국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의 제물로 드리겠으니 저를 받아주시옵소서. 좋습니다. 미래에 하나님이 그렇게 쓰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오늘 열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현실적인 삶에서 어느 부분을 쳐서 복종시켜서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하고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느 부분을 내가 개선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어야지 되겠다는 마음으로 그런 게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나를 받으소서 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나의 마음, 나의 몸 다 드립니다. 그것을 받아서 하나님이 뭐 하시겠습니까? 다 썩고 다 곪고 다 부패했는데 마음은 이미 다 나뉘어져 있고 말이지 기도에 헌신하는 것조차도 힘들다고 안하고 게으르고 그렇게 하는데 그 사람을 받아서 뭐에 쓰겠습니까? 무조건 받으라고만 그렇게 하지 말고 받으실만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주님께 드려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안 간다. 너는 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져가십니다. 전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쓰여질 수 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안 된다. 나는 너를 써야지 되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데리고 가십니다. 당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의 목자인 동시에 여러분 가운데서 취함을 받은 한 형제였습니다. 그대들과 똑같은 삶의 무게를 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여러분들의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보면서 여러분들을 새벽기도로 내몰기보다는 차라리 시원한 그늘 아래 베 보자기라도 펴고 여러분들을 무릎에 눕히고 한숨 자게 하고 싶을 정도의 충동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일주일의 삶이 고달프고 그리고 치열하도록 그렇게 생존경쟁에서 지치게 살아갑니다. 그런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의 고단한 인생에 대해서 갖는 위로와 긍휼은 잠시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기도의 은혜를 통해서 삶의 활력을 공급받는 그 아름다운 영적 생활은 여러분들에게 한순간의 위로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를 약속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지푸라기와 같이 연약한 사람들, 건드리면 깨질 질그릇과 같은 사람들, 그리고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많이 심령이 상해졌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결국은 그 모든 인간의 연약함을 딛고 장엄하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믿음의 사람들 중에 원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신앙의 사람들 중에, 십자가의 사람들 중에 원래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그런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두 우리와 똑같은 삶의 환경에서 죄에 시달리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세상 사회에서 찌들고 곤고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기도의 은혜를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렇게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살아서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쏟아놓으셔야 하는 생애를 사셨지만 변함없이 쏟아지는 은혜의 샘을 예수님은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그 샘을 소유하고 이튿날도 거룩한 사역을 영광 가운데 이어갈 수 있는 신령한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의 기도 생애를 열심히 지키셨고 특별히 이렇게 당신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이 아니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 혼자 하나님 앞에 살수 없어서 자기 혼자 서는 것이 믿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열광하는 인파도 없고 당신에게 깊은 경외를 표하는 제자들도 없이 남루한 옷을 걸치시고 깊은 산 속에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방해하지 않는 깊은 산 속에서 적막과 고요 속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특별한 인도를 받고 싶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계셨을 때 그분은 메시아도 아니고 위대한 능력의 구주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매순간 붙들어주시는 아버지의 손이 아니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아들, 하나님이 권능으로 무장시켜서 이 세상에 내려보내셨지만 예수님은 그 권능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를 더 깊이 의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각별한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인도를 받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은 산 깊은 밤에 홀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구하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고된 수고와 견디기 힘든 노역으로 점철된 생애였지만 예수님은 그런 수고로운 자신의 노고와 환경을 핑계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받아야 할 결정적인 기도의 순간을 태만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시면서 그 기도의 열정과 그 기도의 열렬함이 얼마나 가득했던지 예수님은 온 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로 새우셨습니다. 그 겟세마네 기도의 동산을 방불케 하는 자기를 바친 열렬한 기도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을 촛대 삼아서 기도로 태워드린 그런 기도의 밤이었습니다. 이 특별한 인도를 예수님이 받으셨기 때문에 열두 명의 사도들이 세워졌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실 수 있었고 신약시대의 교회 초석이 놓여서 오늘날 우리가 그 교회 터 위에서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에 자기를 드린 헌신적인 온 밤을 지새우는 기도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열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편안한 삶이 좋습니다. 고난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고난이 뭐가 좋습니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은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말 우리들이 바라는 삶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어떻게 우리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수 있겠습니까? 주님도 잡히시던 날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여기서 비겁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구주가 아니라 우리와 한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며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불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그 엄중함과 무서움을 아셨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이 백성을 구원할 또 다른 길이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시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당신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기도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다면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건강이 있다면 이것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아닙니까? 원래 우리의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에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꿈도 소망도,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건강도 모두 그분의 것으로 바쳐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자기 희생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지어졌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을 위해서 집을 팔고 무주택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을 위해서 다 허리가 휘도록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헌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는 돈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지어졌지만 이제 보이지 않는 교회는 성도들의 기도로 지어집니다. 모든 것은 편안하게 만들어 났습니다. 안락하게 만들어 났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은혜 많이 받은 여러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약한 지체들, 세상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교회를 만들어 났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서 교회가 지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열린 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이제 새로운 예배당 건축을 시작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이제는 빈부나 귀천이 상관이 없이 여러분들이 많은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바치지 못한 것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저렇게 변명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를 바치지 못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벽돌과 쇠로만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한 장 한 장 쌓여지며 보이지 않는 교회가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달픈 생애를 기억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으며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죽인 것을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의 짐을 지고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한 때마다 아버지 앞에 각별하게 매달려 기도하는 주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사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5.변화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 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8-29)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다섯 가지 대 사건을 꼽으라면 첫째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이었고, 그리고 그 다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죽음이었고, 그 다음에는 죽으신 후 사흘만에 다신 사신 부활이었고,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계시다가 하늘에 오르신 승천이었습니다. 그 네 가지 중 앞에 두 번째 들어가야 할 것은 변화산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변화,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 이 다섯 가지는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신다는 점에서 이 변화산의 사건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변화산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단순한 선지자나 하나님의 일군이 아니라 인류구속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더욱이 그 변화산에서 있었던 두 가지 놀라운 일 즉, 첫째는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모세와 능력의 선지자의 대표자로 불리는 엘리야를 만나신 사건과, 그리고 거기에서 용모가 희어진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경험하신 이 일이 인류구원을 위해 잠시 후에 있을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선 이 변화산에서 경험한 예수님의 첫 번째 경험은 신령한 세계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도 신령하신 분이었고 또 거룩하게 사셨기 때문에 신령한 것들을 많이 누리시면서 사신 분이었습니다. 특별한 영적인 능력이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그리고 평범한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놀라운 감화력이 예수님 곁에 항상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변화산에서 경험한 예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경험은 이때까지 있었던 경험을 훨씬 능가하는 아주 영광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찬란한 모습이 되어서 모세와 그리고 엘리야를 만나시고 그리고 거기에서 아마도 틀림없이 인류의 구속의 문제를 의논하시는 그런 대화의 현장까지 경험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변화된 이 용모는 이전에 이 산에 오르기 전에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몸과는 다른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찬란한 영광을 경험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다시 한번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교회에 다니기만 하는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는 우리들이 결코 새사람이 될 수 없고 결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우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은 우리를 교인 되게 만들지만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한 경험은 우리를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런 신령한 세계에 대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고 하는 것, 성경 말씀이 괜한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아니라는 것,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오,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가 있어서 그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가 오히려 보이는 세계를 움직이는 근원이 된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눈뜨지 않으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청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평범한 교회 출석 생활로는 결코 우리가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예전에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신령한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눈뜨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고 영이신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성품을 우리들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우리들이 날마다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고 순결하신 분이었는데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더 신령한 세계에 대한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한번 이렇게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각인 시키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매진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평이하고 날마다 반복되는 교회생활,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시간이 되면 교회에 오고 그리고 시간이 되면 교회에서 흩어져 돌아가고 주일 하루 달랑 나와서 예배드리고 그리고 누가 붙잡는 것처럼 신속히 교회당을 빠져 나와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그런 반복되는 삶 말고, 무엇인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말고 정말 영적인 세계가 있고 그리고 그 신령한 세계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그 사랑과 빛이 흐르고 있으며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영적인 관계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참된 깨달음이 있어야지 만 우리들이 정말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훨씬 더 크고 무한하고 넓은 세계입니다. 잠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한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세계, 하나님의 영적인 그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의 성품을 배우고 또한 우리도 함께 그 성품을 닮아갈 그런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감화고 그것이 바로 영적인 감화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신자가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지를 알고 그리고 이 세상 사랑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깊이 눈뜨게 되고 그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해 깊이 눈뜨게 됨으로서 그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랑하고 잠시 있을 세상보다는 다가올 미래의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면서 살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어떻게 하시다가 이런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셨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세계를 보려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으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이 무슨 기도제목을 안고 가셨을까요? 오늘은 반드시 신령한 세계를 봐야지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도제목을 가지고 신령한 세계를 볼 목적으로 변화산에 올라가기보다는 예수님이 늘 하시던 간절한 기도, 주기도문에 오히려 용해되어 있는 그 기도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라고 하는 갈망,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온전히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하는 처절한 염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만 말고 죄인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서 참된 회개와 복종을 통해서 이루어져야지 된다라고 하는 그칠 줄 모르는 탄원,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동행들 뿐 아니라 이 세상에 굶주린 많은 백성들이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들을 먹여달라고 기도하시는 인류를 위한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모두 용서해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그 타는 듯한 소원, 그리고 유혹을 받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시고 시험에 든 사람들은 악에 빠지지 말게 도와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주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그 예수님의 간절한 부르짖음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기도제목인 동시에 특별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타는 듯한 마음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셨고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신령한 세계를 보려고 기도하러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셨고 그곳에서 자기의 가슴에 사무친 간절한 기도의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다가 하나님께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시면서 예수님의 그 기도도 들어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님이 기도하지 않으셨던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미처 보신 적이 없으셨던 찬란한 영광의 세계를 보고 그리고 거기에서 구속에 관한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발견하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주 수준 높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이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지 않는다면 단지 기도제목이 멋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축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제목이 얼마나 그럴 듯 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그럴듯한 내용들이었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바리새인의 찬란하고 화려한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는 세리의 기도의 태도였습니다. 말문을 잇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목이 매어서 울면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열렬히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는 내용도 별로 없는 기도였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오히려 그 아름다운 기도로 장식된 바리새인의 기도의 현장보다는 오히려 하잘 것 없는 이 세리의 울부짖는 기도의 현장에 기울어지셨습니다. 죄의식을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습니다. 벌받지 않기 위해서 용서를 하나님 앞에 빌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너는 의로운 사람이라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내려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그런 경험 많이 합니다. 우리의 기도제목 자체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월세를 내야 하는데 월세 낼 돈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했더니 월세 20만원과는 비교될 수 없는 큰 은혜의 세계를 하나님이 보여주셔서 그래서 그로 하여금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 간증들, 있습니다. 많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대단한 기도제목이 아니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가슴이 타는 기도제목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 개인적인 문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보니까 하나님이 아주 놀랍게 생각지도 않던 은혜의 세계를 열어 보여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여름이 오면 정말 제 생애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예화: 전도사 생활 때 토요일마다 교회에 가셔서 청소를 하시고 나서 기도를 하시는데 무엇인가 강력한 영적 두려움을 느끼시면서 기도하시다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그 후에도 그 밤에 있었던 두려움의 비밀을 알기 위해 다시 몇 번의 시도를 통해 영 적 체험을 하고 나자 말씀에 은혜가 넘쳐 영혼들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
저는 하나님이 그런 세계를 열어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니까 놀라운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이 다 좋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알고 또 모르는 내용은 책을 찾아 확인하지만 신학교 선생이 되었는데도 성경은 항상 딱딱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성경은 아주 놀랍게 살아있는 책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성경에 흩어져 있는 진리와 교훈들은 아주 놀랍도록 하나로 엮어져서 하나의 아름다운 하나님 사상을 드러내는 책이 되었습니다. 어디를 성경을 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일단 하나님의 마음만 느껴지기만 하면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구를 전혀 안하고 설교한 것은 아닙니다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마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고 어떤 사람들은 더 강퍅하게 대적을 했습니다.
그런 은혜의 세계가 있는지를 저는 알지도 못했고 또 그런 세계가 내게는 꼭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었으니 내가 이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 이 세상에서 신자답게 살라고 이 영혼들을 내게 맡겨주셨는데 그런데 이 영혼들이 구원받지 못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 따라서 수없이 교회에 다녀도 전혀 하나님의 생명이 저 영혼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주일이면 공과공부 시간에 모여서 샌드위치나 먹고 헤어지고 그리고 나눔의 시간이라고 해서 선생하고 모여서 무슨 최수종이 팬클럽에 갔다온 이야기나 하고 너무 너무 아이들이 세속적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선생은 그 아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모든 시도를 포기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그것이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만났고, 아직 헤어지지 않고 하나님이나를 다른 곳으로 안 보냈다면 그러면 내가 정말 목자라면 변화되지 못한 이 영혼들의 이름을 들고 하나님 앞에 가서 이들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의 당연한 임무가 아닌가.
매주 토요일 혼자 기도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도 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변화 받은 선생님들이 한둘씩 모였고 변화 받은 아이들이 한둘씩 모여서 나중에는 30명이 토요일마다 철야했습니다. 11시에 물 한잔 마시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먼동이 훤하게 트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변화되지 못한 우리의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어린아이들이 변화 받지 못한 선생님들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새벽까지 기도하고 나서 주일날 밤에 집에 가서 러닝 셔츠를 벗어보면 가슴을 두드리며 기도한 나머지 가슴이 멍 자국이 퍼렇게 들어있었습니다.
계획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을 뿐이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다른 것 필요 없고 영혼들이 예수 믿고 변화되는 것, 그리고 정말 착실하고 모범적인 학생들로서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제목도 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세계를 보지 못했더라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을 그런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면서 저는 역사상 많은 신학자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에 한계가 어디까지이고, 그리고 신령한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얼마나 끝없는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눈을 열어 보여주시는 찬란한 은혜의 세계의 영광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것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마음을 거기에 싣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문에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그럴싸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믿음이 훌륭한 사람이 보기에는 하찮은 기도제목 같아도 녹는 것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하나님이 그 기도하는 기도의 소원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만족스러우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예수 안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사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개인적으로도 기도해야 할 제목들이 참 많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엄마 아빠를 비롯해서 회심하지 않은 우리 아이들,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내 남편, 교회는 나오지만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리 아내, 내게 맡겨진 주의 일, 내게 맡겨진 영혼들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의 제목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 많은 기도의 제목들, 그것이 어느 것이든지 간에 단 하나라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놀라운 세계에 대해 눈뜨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해야 할 때가 이르면 우리들이 예상치 못했던 기도제목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간구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무릎꿇게 만드시고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돈줄을 끊어서 하나님 앞에 돈 달라고 매달리게 하시고, 명예 좋아하는 사람들은 명예에서 떨어지게 만드심으로서 하나님이 그것을 해결해주시도록 매달리게 만듭니다. 그렇게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도록 만들어주시는 이유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림으로서 하나님 앞에 집중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다시 한번 정결하게 하신 후에 우리에게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열정이 없는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이미 병든 것입니다. 기도의 열정이 없이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마치 미지근한 물로 기관차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증기 기관차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물이 펄펄 끓어서 수증기가 화씨 212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힘이 되어서 휙! 하면서 공기가 나가서 엔진을 돌리고 바퀴를 돌립니다. 그러면 그 수백 명이 밀어도 밀리지 않는 기관차가 힘차게 철로 위를 달려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을 뗀다고 할지라도 미지근하게 떼어서는 그 기차는 일 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할 때 세상이 우리를 주님 섬기면서 살도록 내버려둡니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상처가 무서워서 봉사를 안 한다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입니다. 십자가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과 똑같은 인간입니다. 원래 상처가 많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와서 졸다가 가고 그리고 집에 가서 세상과 함께 짝하다가 주일날 와서 단지 교인으로 숨어서 예배나 드리고 가는 사람들은 상처가 없습니다. 주를 섬기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무엇인가 뜻을 세우고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고 이 뜻을 내가 세운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리고 주님이 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적들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할 수 있습니까?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판단을 받습니다. 목표가 있어서 한길을 달려가는 사람은 항상 방향이 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당하고 판단을 당합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서 죄악 된 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은 판단 받지 않습니다. 대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뜻을 세우고 분명하게 걸어왔던 사람들은 항상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대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고난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뜻을 세우고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찾아가는 사람은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이 주신 감동에 의해서 붙잡힌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연약한 인간입니다. 비난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아프고 오해하는 소문이 들려오면 괴롭습니다. 반대자들이 나서면 두렵고 그리고 난관이 생기면 주저앉고 싶습니다. 그게 연약한 인간이면 누구든지 가집니다.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항상 대적들의 손톱자국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많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버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사람으로부터 오는 위로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날마다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서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껏 알지 못했던 그 은혜의 세계를 내가 보여주마 그리고 하나님이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마음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주 나와 동행하면 전쟁도 겁 없고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전에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신령한 세계에 대한 찬란한 경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주 놀라운 확신을 갖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려는 이 길이 눈물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고 피 흘리고 나를 짖어서 내 백성 위에 죽어야 하는 길이지만 아버지께서 내가 가려는 이 길을 기뻐하시는구나. 그런 확신을 갖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기도하다가,
(예화: 아시는 자매 한 분이 기도를 하지 않고 지내는데 살고 있는 집세가 올라 방을 구하려니 돈이 부족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보니 생각지 않던 친척집에서 거저 얻다시피 좋은 방을 주셔서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됨으로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이 위급할 때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해주시는 분이시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 지만 그 사랑을 모르고 살던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새사람이 되었다는 이 야기)
그런 경험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기도 제목이 무엇이든지 간에 간절히 기도하는 게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 범죄를 구성하고 있는 기도가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수단으로 삼으셔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신 후에 하나님이 이처럼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제껏 여러분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고 그리고 이제껏 하나님 만나고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들이 진짜 존재하고 있는 은혜의 세계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보았을 뿐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알지 못한 더 원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습니까?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 더 신령한 은혜의 세계, 그리고 더 견고한 믿음 생활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하나님께서 그런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아가서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할 때 그 기도를 계기로 삼아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위대한 세계를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변화가 어떤 종류의 변화일까 에 대해서 신약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 변화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그 변화일 것이다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부활체 찬란한 영광으로 변화되어서 그래서 여기 오늘 희어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하얗게 되었다기보다는 눈부시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예수님의 형상이 에워 쌓여서 그래서 찬란한 영광스러운 광채를 띠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영광과 거룩, 그리고 그 광채가 관련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찬란하게 빛났던 것에서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용모가 아주 찬란하게 변화되시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되시려고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변화산이 지금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후에 사람들이 이 사건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 변화산이지 처음부터 변화산이 아닙니다. 그냥 이름 없는 한 산이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산을 구경하러 올라가시거나 혹은 변화되기 위해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고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고 기도하시자 예수님은 기도의 제목에 집중하셨고 그 기도의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응시했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몸에 놀라운 용모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찬란한 영광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를 대면할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 믿고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조잡한 인격이 그대로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에서 권찰이다, 집사다, 권사다, 장로다, 아니면 목사다 직분은 계속 새로, 새로 받았는데 직분이 계속 바뀌는 것만큼 인간성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믿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데도 여전히 인격이 너절하고 그리고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회개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 제목이 뒤따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지적인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끝나기가 십상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 둘, 셋, 넷 이치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달을 때 그 깨달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마음의 각성을 토대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깨닫고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담겼을 때 그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열렬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리석음과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야비함,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여전히 육체를 사랑하는 것, 우리 안에 있는 여전히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보다는 내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앞세우는 그런 하나님을 거스르는 우리의 모든 삶의 태도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깨닫고 끊임없이 자신이 깨트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열린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너져보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면서 깨트려지고 자신이 무너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정말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서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깨트려지고 여러분들이 정말 무너지는 참된 진실한 회개의 경험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의인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말합니다.
심령이 너무나 많이 병들어서 진리의 칼을 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몇 달 째, 몇 년째 교회당 마당만 밟으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나는 오늘 말합니다. 여러분들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까? 여기가 어디입니까? 지존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신 아버지의 집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여기에 오는 것입니까? 설교자의 눈물을 보기 위해서 옵니까? 교회 아름다운 시설을 보기 위해서 옵니까? 그리고 일주일 동안 만나지 못했던 교인들을 만나서 사귀기 위해서 여기에 옵니까? 여러분들에게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 라고 하는 마음의 각오가 있습니까?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날이면 내 안에 있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나를 만나주시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뜻 없이 되풀이되는 이런 교회 출석을 통해서 내 영혼이 어떻게 병들어가고 있는가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고 둘 중의 하나 명백하게 해야 합니다. 차든지 덥든지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으면 제대로 믿고 안 살아 계신 것 같으면 세상으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렇게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 박쥐처럼 믿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믿는 사람인 것처럼 자기를 과시하고, 안 믿는 사람 속에 있으면 자기는 예수와는 상관없는 세상 편인 것처럼 흉내내고 그렇게 이중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느니 차라리 죄악 된 세상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탕자처럼 돌아오는 것이 희망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교회 저 교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영혼에 좋은 날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실해져야 합니다.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그렇지만 여러분들 중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회개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죄와 구원의 테이프를 들으면서 자기의 죄를 가슴아파하며 십자가 그늘 아래 살기로 결심한 분도 계셨을 것이고 목자와 양을 들으면서 이제껏 나의 인생은 목자 없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병든 양떼였구나.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 이렇게 멀리 나갔구나.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짐승과 방불한 삶이었구나. 뉘우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읽으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난 예배를 드리면서 일평생 죄 가운데 살았구나.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라 를 공부하면서 진짜 나는 십자가가 없는 신자였구나. 울기도 많이 울고 깨트려지기도 많이 깨트려졌습니다.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껏 내가 깨달은 진리 전부 다 집어치우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형식적인 신자, 그렇게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가 거룩해져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고사리 같은 손을 쥐고 결심하고 그리고 뉘우쳤다면 이제는 정말 우리들이 날마다, 날마다 주님 닮아가야 합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예수 믿어서 2-3년 지났으면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보고 너는 예전에 네가 아니구나. 그 정도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 사랑하던 것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예전에 행하던 거짓들, 이제 버려야 합니다. 이제 어두움을 버리고 빛 가운데 속해야 합니다.
아울리우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더 유명합니다. 아들을 위해 일평생 눈물로 기도한 사람입니다. 수백 년에 한번 태어날까 말까한 천재였습니다. 너무 똑똑해서 성경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탕한 길로 갔습니다. 이미 벌써 17세도 되지 않아서 사생아를 낳았고 난잡한 여성 편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는데 돌아 온지 얼마 안 되어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어거스틴! 부르는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까 자기가 열렬히 사랑하고 몸을 섞던 그 여자였습니다. 어거스틴 저입니다. 저를 잊으셨나요. 당신을 사랑하던 여자입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돌아서서 그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그대는 바로 그대인데 나는 예전에 내가 아니라오. 나는 이제 그렇게 살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돌아섰습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데 그게 아니라 그냥 옛 사람이 잠깐 정신을 잃은 것처럼 신앙생활 하다가 주님 만나고 그럴 때는 조금 정신을 잃은 것처럼 새사람인 것 같다가 그 다음에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가는데 옛날에는 세상에서 세상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교회는 다니면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변화된 게 아니라 변화가 되려고 하다가 옛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세상에서 세상 짓 하다가 살았는데 이번에는 교회에서 세상에서 하던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님을 닮는 것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마음에는 내가 나인 것이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예전에 나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주님이나를 거룩한 사람 만드시려고 예수님까지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내 안에 성령님까지 보내주셨는데 예전에 못된 기질을 그냥 가지고 살아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도 내가 너무 싫습니다. 그런 고백을 가진 사람은 그래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심중에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뭐! 어때 이만큼 변화되면 됐지 뭐! 어때
우리 딸이 학교 시험을 보고 왔는데 썩 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밖에 못하냐 그랬더니 그 정도면 잘한 거지 뭘 그러세요. 다 합치면 평균 이만큼은 되는데. 한 과목 좀 못해도 그 정도면 잘한 것이지 뭘 더 바라세요. 아빠 우리 반에 나보다 공부 못한 아이들이 많아요.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게 할 때 얼마나 많습니까? 이만하면 됐지, 스스로 그렇게 말합니다. 옛날 생각해봐. 옛날에는 나는 술도 먹고 곤조도 부리던 사람인데 요즘 언제 내가 술을 먹어. 그리고 매주 교회에 나가잖아. 교회에 가서 졸지만, 정말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말해서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애야, 너는 진짜 많이 변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당신 옛날에 그 사람 맞아.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볼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변화된 사람이어야지, 아니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전혀 변화되지 않았고 목회자가 보기에도 성경 찬송 들고 예배 시간에 늦어서 허겁지겁 나오다가 축도 끝나자마자 도망가는 것 빼놓고는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자기 스스로 정말 변화되느라고 고생했다고 쓰다듬고 너무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은혜 받고 울고불고 눈물 콧물을 흘리고 그래도 안 변화되는 그 비결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덜 익어서 그렇습니다.
(예화: 군산의 횟집에 간사들과 함께 가셔서 생선을 시켜 생선을 오븐에 구어서 내왔는 데 젓가락을 대는 순간 피가 흘러 너무나 역겨워 한동안 생선을 못 드셨다는 이 야기)
조금만 변화되다가 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실 때 겉만 슬쩍 익혀서 젓가락 집어넣으면 피가 찍! 하고 쏟아져 나오는 생선구이와 똑같습니다. 주님 몰라서 막 살았을 때는 못 살았는데 이제는 아니까 변화되어 가야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말씀에 은혜를 받고 막 그렇게 하는 동안에 겉만 익었습니다. 속까지 깊이 익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하는가 하면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기도생활을 지속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계속 해서 우리 자신이 부패한 성품들이 변화되고 은혜로운 주님의 사람으로 순결하게 변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루 동안도 얼마나 더러운 것들을 많이 봅니까. 더러운 것들을 보면 보기만 합니까. 마음속에 더러운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스쳐지나갑니까. 눈으로 말로 귀로 얼마나 많이 범죄 합니까. 이런 것들은 많이 들어오는데 그런 것들을 씻겨내는 눈물의 기도가 없습니다. 씻어내는 성화의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계속해서 많이 쌓이고 내 속에 하나님이 옛날에 주신 예수의 생명은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속에 있는 부패와 죄가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은혜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말씀드린 것 같은 교회는 다니지만 아주 질이 나쁜 신자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결심을 하고 나쁜 신자들이 되려고 다짐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참회의 눈물로 자기 깨어짐의 아픔 속에서 날마다 주님이 심으신 은혜들은 간직하고 하나님이 심지 않은 죄와 더러운 것들은 뽑아버리는 그런 진실한 기도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타다만 나무토막처럼 굽다만 생선 한 토막처럼 그렇게 아주 불결한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범사에 절제력이 있고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 위기가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너무 기쁜 일이 있어도 경망스럽지 않은 언제나 신령한 명성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합시다. 그래서 좀 신자다운 신자가 되어봅시다. 우리도 좀 한번 옛날처럼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그 사랑을 입었는데도 이렇게 밖에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을 뉘우치면서 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울어봅시다. 그래서 더러운 욕심의 때, 세상의 사랑의 때, 주님을 섬긴다고 살아오면서 마음에 필연적으로 묻었던 이 찌꺼기들을 씻어냅시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서 얼마를 이 세상에 살든지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세상의 사람들도 우리를 보면서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을 알게 되는 그런 생활을 해야지 되지 않습니까? 정말 여러분, 그런 기도생활을 여러분들이 해나가셔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역시 여기에도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모습이 실마리가 되고 있고 성경에 카메라가 기도하시는 예수님에게로 비치고 거기서 예수님이 움직이시면서 당신의 기도하는 광경이 계기가 되어서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짧은 본문을 할 수 있으면 두 주에 걸쳐서 나누어서 생각해봄으로서 주님의 기도생활에 깊이 도전을 받고 우리도 또한 기도하고자 하는 그런 다짐과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한 14년 전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깊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여러 번 이 본문을 영광스럽게 설교하기를 애써왔습니다. 지금도 이 감동이 오늘날 제가 있게 만든 그런 중요한 성경 구절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 말씀에 깊이 사로잡히셔서 그래서 일평생을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복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선 첫째는 누가 기도했는가 입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에 표현에 의하면 기도하신 분은 예수님이셨고 기도하신 장소는 한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중보 기도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서 많은 간증을 담고 있습니다. 중보 기도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큰 능력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무너질 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롯은 전적으로 그 은혜를 그를 위해서 간절히 빌어주던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의 빚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불러와서 죄악의 도성 속에 함께 멸망되어야 할 롯을 구출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외적의 침입을 받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어떻게 그 나라가 다시 회복될 수 있었고 원수들을 누르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나라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왕을 위해 기도하거나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중보 기도를 들으셔서 왕을 다시 세우시거나 나라를 일으켜 붙드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한 축을 새롭게 놓았던 사무엘은 구약에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커다란 인물입니다. 그는 신정정치와 왕정 사이의 과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으며 이스라엘의 역사의 변환기를 붙들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경건한 사람, 믿음의 사람 불세출의 지도자 사무엘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기도로 태어났고, 그 아이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이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 어머니의 많은 중보 기도 속에 경건한 섬김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문제가 있는 모든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빼놓지 않은 부탁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기와 같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바울이 아버지이고 편지를 받는 교인들이 자식에 불과했지만 기도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이 그 자녀와 같은 자기의 양떼들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으니 그것은 그를 의뢰하는 마음이기보다는 그들의 기도를 듣고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사도 바울이 얼마나 중보 기도의 위대한 능력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성경 속에는 중보 기도 속에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수많은 간증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깨어있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셨습니다. 깨어서 당신과 함께 당신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해주기를 당부하셨던 것을 보면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렇게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중보 기도를 받고 싶으셨던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연약하지만 그 연약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중보 기도는 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의 삶을 바꾸고,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고, 잠든 교회를 새롭게 일깨우고 동토와 같이 얼어붙었던 땅에 선교의 불길을 지피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보 기도의 아름다운 능력과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염치를 불구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도를 받음으로서 자신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을 알기 때문에 염치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중보 기도는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역사하고 심지어는 중보 기도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역사해서 그래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리고 기도로 받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기도 받는 사람들의 삶 속에 구현되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탁월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여러분들은 혼자 예수 믿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동산에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과 같은 신앙을 피우기까지 많은 사람이 여러분들은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여러분도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서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날들 동안을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동시에 누군가 여러분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빌었던 그 간절한 중보 기도의 열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신자가 된 이후에 여러분들의 신앙이 자란 것도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여러분이 스스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은혜도 열심히 받아서 좋은 신앙으로 자란 것 같지만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교회에는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름 모를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탄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빌고 기도하는 그 중보 기도가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여러분들을 세워주었고 넘어졌던 여러분들을 일으켜 세워서 다시 하나님 앞에 살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이름도 잘 모르고 얼굴도 잘 모르지만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서 간절히 빌어주는 중보 기도의 끈으로 거미줄 같이 단단히 얽혀서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삼겹줄과 같은 아름다운 신자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면서 기도를 받기도 하고 기도를 해주기도 하면서 교회는 중보 기도의 은혜 속에서 교회는 탄탄한 영적 결속력을 갖추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속력을 갖춘 탄탄한 교회의 그물은 어두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들을 낚아 올려도 뜯어지지 않는 견고함을 가진 교회로 서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중보 기도의 이 위대한 능력을 우리들이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으며 중보 기도의 이 위대한 힘을 우리들이 어떻게 다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 중보의 기도로 사람들은 생기를 잃은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했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도 했으며 시험과 그리고 불같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키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교회는 바로 이런 중보의 기도로 애절한 기도가 그치지 않는 그런 곳에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교회 문을 닫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다니는 이 교회는 문자 그대로 열린 교회입니다. 언제든지 와도 열려있습니다. 본당은 중요한 비품이 많으니까 꽁꽁 잠가놓고 창고 같은 예배 실 하나 열어두는 교회가 아니라 활짝 열려 있어서 언제나 누구나 이곳에 들어와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루 종일 기도하는 사람들이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 음악도 예배당에 가득 흐르고 있습니다.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언제든지 오면 문이 열려있고 그 넘어서 기도하려면 12시 전에만 도착하면 간사들이 본당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곳에서 간절한 중보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교회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하려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중보 기도의 말할 수 없는 축복에 대해서 수 없는 간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요성을 우리에게 늘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중보 기도를 내가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수만 명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상당수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라다녔고, 그 중의 상당수는 열심히 전도했으며, 그 중의 상당수는 예수님을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렸고 그리고 아비와 사랑하는 가족들도 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해서 많이 중보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의 이 간절한 중보 기도 때문에 당신이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누구에게 위탁하지 아니하시고 몸소 기도하신 그 장면을 오늘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기도는 겨울날에 땅을 파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땅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에 땅을 파기 위해서 곡괭이 질을 할라치면 땅 속은 아직 덜 얼었겠지만 그것은 일 미터 이상 파나가야 하고 땅 겉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곡괭이로 쾅! 내려치면 땅이 파여지는 것이 아니라 불이 번쩍번쩍 날 정도로 그렇게 곡괭이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메마른 마음으로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메마른 마음으로 기도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꽁꽁 얼어붙은 겨울 땅파기와 같습니다. 그때에 지혜로운 인부들은 지혜롭게 그 일을 처리합니다. 어떻게? 땅을 파기 몇 시간 전부터 모닥불을 피웁니다. 모닥불이 훨훨 타올라가도 그것이 곧 땅을 녹이는 것은 아닙니다. 모닥불을 활활 피우고 그리고 불이 꺼지고 나서 숯이 빨갛게 되기 시작하면 이제 그것이 서서히 땅을 녹입니다. 몇 시간 지나고 나서 녹은 그 자리에 곡괭이를 꽂으면 땅이 푹 파이면서 가상 자리에 있는 얼어붙은 땅 껍질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고 삽을 집어넣고 발로 누르면 마치 봄날에 땅을 파는 것처럼 쑥 들어가면서 이제 땅파기가 시작이 됩니다.
먼저 우리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변화 받는 일이 제일먼저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 받고 변화 받고 나면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니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감화를 받고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도 기도의 일부입니다. 기도에 관해서 더 잘 기도하기 위해서 좋은 책을 읽는 것도 기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기도는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고,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고, 기도에 관해서 설교를 듣는 것은 설교를 듣는 것이지 그것이 곧 기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몸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자신이 직접 실천하는 그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그에게 주셨고 더욱이 죄가 없으신 순결한 분으로서 죄를 지으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의지하며 사는 데 있어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가족도 없으셨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나 별다른 직업이 없으셨기 때문에 우리처럼 세속에 시달리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목표는 오직 하나 죄인들을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한량없이 많으시고 죄는 없으신 순결하신 분이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 혼자의 힘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굳게 믿으셨습니다. 바람이 부는 새벽의 벌판 한적한 곳에서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아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거머쥐신 위대한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친근하게 살기를 원하고 어린아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을 붙든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아기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이 주신 능력이 아니라 자기의 손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면서 이 시련과 고난의 파도를 넘어서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들이 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예수님은 당신의 낮아지신 생애를 가장 잘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이신 아버지께 간절히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며 일평생을 사셨습니다. 주님의 고난받으시는 생애는 기도 속에 더 생생하게 나타났고 그래서 예수님은 인성 밑에 신성을 감추시고 그래서 부끄러운 사람의 몸을 입으신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자기 속에 있는 신성으로 해결하는 대신 하나님이신 아버지가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그 놀라운 도움으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만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며 주님 앞에 살았습니다. 순결했지만 자신의 순결을 믿지 않고 위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정결한 은혜를 구했고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았지만 항상 위로부터 내리는 그 능력을 의지하며 살았지, 자기 안에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느라고 주님 앞에 매달리기를 게을리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주님이 주신 수많은 능력과 그 순결함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며 살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더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를 사모했던 영혼들은 영혼을 건지는 그 일에 있어서 미련하고 무능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아파했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쓴 모든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와 더러움으로 인해서 처절하도록 절망해본 적이 모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 조용히 이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영적 전투의 한복판에서 주님이 주신 믿음을 순전히 붙들고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 위해서 그 일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합당치 않고 얼마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은 날마다 젖은 눈을 가지고 하늘을 응시합니다.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는 연약하고 심히 죄가 많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기억하시고 넘치는 긍휼로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 그것이 오늘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아버지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에는 항상 주님을 앙망하고 주님을 바라는 마음으로 눈물이 고인 마음이어야 합니다. 매 순간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고, 주님이 붙들어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내가 일평생 어린아이처럼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고 주님께 내 인생에 모든 것을 걸고 주님밖에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모든 선한 것이 오직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하며 기도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는 것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
인간의 어떤 강함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떤 지위도 주님을 머리 숙이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만 왕의 왕이시며 지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사면을 두루 살펴서 오늘 예수님처럼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능력대신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그래서 누구에게도 미루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을 오늘도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지고 가야할 그런 십자가이자 또한 즐거운 특권이기도 한 이것이 몸소 기도를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일에 모범을 보이셨으니 여러분도 이렇게 여러분 자신이 몸소 기도해서 세상도 이기고 자기 자신도 이기는 승리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어디서 기도하셨을까 입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토포티니’ 라고 적고 있는데 직역을 하자면 ‘어떤 곳에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정착된 삶을 사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정착된 삶을 사실 수 없으셨고 동 가식, 서 가식하시며 온 이스라엘을 떠돌아다니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섬기셨는가 하면 사마리아에서도 복음을 전하셨고 유대에서도 그리고 성전에서도 그리고 두로아 시돈에서도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시고 또 묵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곤고한 영혼들이 사면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한곳에서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시기보다는 곤고하고 상한 영혼들이 있는 곳으로 몸소 찾아가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들과 함께 주무시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를 얼마나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감람산에서 기록하셨다고 장소까지 명기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어떤 곳에서는 빈들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으니 이 다양한 기도의 장소는 곧 예수님이 얼마나 기도하시기 어려운 환경 속에 계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어디에 계시든지 어디를 가시든지 항상 기도에 자기를 바치며 사신 아름다운 헌신을 다 드린 생애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고자 할 때 우리의 환경이 기도하기에 어려움을 많이 줍니다. 육신의 연약함도 우리로 하여금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방해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찬 것도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합니다. 이른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직장에서 쫓기는 일과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는 육체의 힘을 남김없이 앗아가기도 합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과 어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고자 하는 에너지를 많이 빼앗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도 그렇게 기도하시는 생애를 살아가시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과 더불어서 동일하게 싸우고 견디고 이겨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제게 주신 선물이 참 많지만 그 중에 한가지는 참 건강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운동을 하는 것도 없고 특별히 건강을 위해서 애를 쓰지도 않고 오히려 건강에 무심한 채로 살아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제게 참 건강의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 사역에 뛰어든 이후로 저는 정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왔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아끼면서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려고 애를 써왔고 그런 결심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건강이 바쳐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 다니던 시절에 여러 지체들이 저를 보고 그랬습니다. 형님, 저는 형님만 보면 좌절합니다. 제가 나이가 좀 많았습니다. 그래서 왜? 어떻게 그렇게 부지런할 수가 있습니까? 저는 형님처럼 살면 한 달이 못 가서 병원의 신세를 질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자네는 잘났기 때문에 조금 움직여도 되지만 나는 못나서 몸으로 때우라고 하나님이 건강을 주셨다.
제가 33살에 신학대학에 교수로 갔습니다. 교수로 가서 제일 괴로운 것은 동료 선배 교수님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것이 싫은데 저는 그냥 학교 식당에서 사먹거나 햄버거라도 하나 먹고 나면 5분내지 길어야 10분이면 점심이 끝나는데 강의가 없는 날, 이 분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면 꼭 불고기 집에 갑니다. 그러면 숯불 피우고 굽고 굽다가 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고기 실컷 먹고 나면 냉면, 냉면 먹고 나면 식혜, 식혜 먹고 나면 과일, 과일 먹고 나서 커피까지 마시고 나면 식사시간이 1시간 반입니다. 물론 매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빨리 들어가서 책볼 것도 많고 연구할 것도 많고 강의 준비할 것도 있고 상담하겠다는 학생도 많고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이부 순서는 항상 목욕하고 갑시다. 제가 안 쫓아 갈 수가 없는 게 제가 제일 꼴찌였고 또 돈을 제가 쥐고 있었습니다. 회계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안 쫓아갑니까! 그러면 그 더운 여름날에 왜 그 찜통에 들어갑니까! 샤워냐 하고 얼른 나오지, 저는 목욕시간을 30분을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샤워하고 그냥 머리감고 툭툭 털고 나와서 빨리 옷 입고 가야지 되는데 그 더운 한여름에 사우나 굴속으로 들어갑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저는 갑갑해서 견디지를 못하는데 거기서 정치 이야기, 학교 이야기, 세상사는 이야기, 교회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정말 대화의 장을 펼칩니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 그리고 냉탕에 들어갔다가 온탕에 들어갔다가 그 정도만 하고 나와도 그 날은 참 괜찮습니다. 심하면 우리 저 수면 실에서 한숨 자고 갑시다. 그리고 학교에 돌아오면 보통 3시간 이상 걸립니다.
그 학교 언덕을 올라가면서 마음속으로 웁니다. 주님이 주신 시간인데 이렇게 살아도 됩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그래서 그때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을 했고 그리고 지금도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학생들에게 나는 건강하면서 6시간 이상 자는 그 놈들은 죄짓는 것이다. 내가 그랬습니다. 어떻게 코가 삐뚤어지도록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고 일어나서 기도가 되는가. 그것은 진짜 연구대상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10미터만 되도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뛰어가야지 왜 걸어가는가. 그 시간을 일평생 모아보면 얼마나 되겠는지!
그런데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그때 그 선배 교수님들이 왜 그렇게 목욕 가자고 했는지를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그분들처럼 오래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런데 하여튼 이해가 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정말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그 힘이 남아 있을 그때가 정말 찬란하게 꽃피우는 바로 그 시기구나. 흔히 연세 드신 분들이 그래도 아직 마음은 청춘입니다. 마음은 청춘이지, 몸은 청춘이 아닙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기도하려고 해도 지금 기도할 수 있는 이게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나올 수 있는 것, 기도할 수 있는 것,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을 정도로 아직은 무릎이 건강한 것, 그게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환경을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환경의 문제는 대부분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우선 순위에 두는가 그것에 의해서 환경은 조절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은 여기에 여러 젊은이들이 많이 있지만 여러분들이 건강합니다. 그래서 하루밤 새고 나서 한숨 자고 나서 툭툭 털고 일어나서 머리감고 나면 다시 생생합니다. 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7년도 채 안 되는 기간동안에 저는 약 20권의 저술을 했습니다. 가장 바쁜 목회의 시기, 그리고 심지어는 교수 생활을 하고 심지어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곳에 집회를 다니면서도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제 자신이 건강이 바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저녁 예배까지 다 드리고 심지어는 어떤 날은 세미나까지 하고 9-10시쯤 되어서 집에 들어와서 목욕을 하고 그 자리에 기도하고자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워서 책을 썼습니다. 4시 반에 일어나서 새벽기도에 가고 6시까지 새벽기도하고 집에 들어와서 한 2시간 자고 다시 집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집회에 갔다가 밤에 다시 돌아와서 깨끗이 씻고 앉아서 밤을 새웠습니다. 한달 정도 밤을 새우면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지금도 드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건강이 허락하고 그리고 우리의 육체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지탱해줄 때에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더 많이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중요한 비결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어느 곳에서 기도하셨는지 누가도 기록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예수님이 정해놓고 가시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고 그냥 한곳이었습니다. 어떤 곳이었습니다. 무슨 특이한 지형 지물이 있는 곳도 아니고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여기서 기도하셨지만 내일은 어디서 기도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동 가식, 서 가식하는 생을 사시면서도 예수님께서 잊지 않으신 것이 있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려서 간절히 호소하는 기도였습니다. 많은 환경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도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그 모든 어려움과 더불어 분투하면서 싸우셨고 그래서 당신의 기도의 세계를 지켜나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도 승리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하는 일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지난주간에 제가 두건의 수련회를 인도하느라고 강원도에 있었는데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월요일 화요일 새벽기도 하러 많이 나왔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여러분, 한두 번은 쉽지만 일생동안을 기도하면서 사는 그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결심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께도 그랬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실 수도 있었고, 물위를 걸어가실 수도 있었고, 열두 영이나 더 되는 하늘의 천사를 이 세상에 불러 내리실 수도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언제 자기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그 위대한 능력을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까? 벳세다 광야에서 굶주리고 허기진 영혼들을 먹이시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축사로 기적을 베푸셨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당신에게 달라고 기도하심으로서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똑같은 연약함을 가진 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사셨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이 기도생활은 언제나 노고를 요하는 그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분도 새벽시간에 일어나기보다는 푹 주무시는 것을 그 분의 신체가 원하였고 그리고 평안하고 안락하게 지내는 것을 고난과 시련 속에 분투하며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예수님의 몸이 원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전투적인 심정을 갖지 않고는 기도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학교 선생 할 때, 그때는 학교 선생은 사실은 목회자보다는 마음이 좀 강퍅합니다. 왜냐하면 옳고 그른 것만 따지니까. 막 야단쳤습니다. 6시간 이상 자면 회개하라고, 그리고 그 낭비한 시간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저 자신이 실천했습니다. 12시 다 되어서 집에 들어와서 6시 반에는 학교 뒷산으로 걸어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누구에게나 환경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은 쉽고 그것을 거슬려서 싸우는 것은 모두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뭐 하나만이라도 결심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갑자기 평안하던 주변의 환경이 일제히 벌떡 일어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렇게 그 결심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믿음의 길이 곧 싸우며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분투하고 끊임없이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자기의 신앙을 지키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의 모든 사정 중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사정은 거의 없습니다. 기도할 마음이 있으면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기도할 결심을 실천하기가 힘이 들고, 환경이 허락을 하면 마음이 기도의 은혜에 잠기지 않아서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너무 많아도 기도하기가 힘듭니다. 시간도 있고 그리고 기도할 마음이 있어도 고난과 시련이 워낙 거세서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를 흔들어놓을 때는 눈을 뜨기 어려운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 모두 기도할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고 기도할 수 없는 이유는 모두 눈물나는 사연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시야일 뿐이고 신앙적인 시야를 가지고 본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꼭 같이 그런 연약함에 둘러 쌓인 분이었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에서 이렇게 기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바치는 자신의 헌신과 수고, 그리고 고통이 바로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당신을 등진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삶을 규제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에 있는 강력한 소원을 당신 속에 있는 육체의 요구보다 더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고백을 기도의 정신으로 삼으면서 일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생을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장렬한 순교를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기보다는 매 순간 순간 내 작은 섬김이 모아져서 한 사람의 일생이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섬기며 산 생애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한 사람이 주님을 멀리 떠나서 자기의 육신을 섬기며 산 생애로 평가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이 광경을 보면서 어느 곳인지도 명기되지 않은 어떤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그 아침기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생애가 기도할 수 없는 환경과 부단히 싸우는 생애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이 그렇게 남기신 기도의 본을 따라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인과 더불어서 항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나태하고 아무렇게나 살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마음을 잘 다스리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불씨들을 간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의 불길을 활활 우리의 마음에 타오르기까지 우리의 마음을 지키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환경과 더불어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젊은이들은 새벽잠과 함께 싸워야 하고, 이 세상에 우수사려 속에서 살아가는 나이 드신 분들은 마음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염려와 근심과 더불어서 싸워야 합니다. 정욕에 쉽게 흔들리는 젊은이들은 자신의 마음과 육체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투쟁해야만 건강한 기도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가사와 그리고 직장에서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성년이 된 세대는 특별히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매일매일 자기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 분투하는 은혜생활을 통해서 건강한 기도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도할 수 없게 하는 요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종식될 수 있는 그런 요소들도 있겠지만 그들 중에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우리들이 지고 가야할 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환경을 파도처럼 생각하며 그 환경의 파도를 넘어서 그 파도에 막히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파도를 타고서라도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그 영적인 목적지에 도달하는 훈련들을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의 핑계를 대는 대신 오히려 환경을 극복하고 슬기롭게 그 환경을 이용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그 풍성한 기도의 은혜를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도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충성된 사람들은 잠시 육신의 고통을 지불하면서도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주님께 덜 충성된 사람들은 육신의 안일한 요구와 더불어 쉽게 타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이 기도생활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그 고단한 생애에도 불구하고 고난받으신 예수님의 그 생애, 결핍과 고통 속에서 시련을 벗삼아 사신 생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에게도 미루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도에 힘쓰는 그 일이었습니다. 환경과 더불어 끊임없이 분투하고 싸우면서 결국은 그 영적 성장의 세계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살과 뼈가 찢어지고 깨어지는 십자가의 형벌 한가운데서도 버림받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의 긍휼을 호소하기까지 그분의 기도의 세계를 넓혀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값지고 소중한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쉽게 얻어집니까? 가슴을 찢는 회개와 뼈까지 파고드는 참회의 고통을 통해서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들이 안일한 삶을 살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 시련과 도전 속에서 살았고 남들이 안일하게 살 때 그들은 몸부림치면서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움켜쥐고 노심초사하는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들은 매순간 분투했고 그렇기 때문에 분투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내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값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그래서 힘들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생각하며 부채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에 빚졌습니다. 내 머리를 삼아 신발을 만들고 내 살가죽을 벗겨서 주님의 옷을 지어도 다 값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빚을 졌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그 빚을 좀 값을 줄 알았는데 그 빚은 점점 늘어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양식은 하나님의 사랑이 되었고 우리의 인생에 자산은 하나님의 긍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평생 주께 빚진 자로서 살아가는데 그 부채의식을 가지고 그리고 주님이 내게 주신 마지막 십자가, 고난과 견디기 힘든 노역의 삶을 이어 가시면서도 마지막 십자가에서 자기를 쪼개어서 가르시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셨던 주님의 그 기도의 본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는 환경이 훨씬 낫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런 기도의 삶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도 걸어가야 하리라. 그런 착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액체의 생애라고 표현한다면 기도의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이마에 흐르는 땀이 있을 수 있었고, 땀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 생애였기 때문에 마지막에 하나님이 그 아들의 피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을 삼아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은 만세 전에 세워진 계획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는 아들의 피를 받기 전에 먼저 아들의 눈물의 기도를 받으신 후에 받으셨습니다. 제물로 삼으시기 전에 일평생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께 바쳐지게 하신 그 후에 제물을 삼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많이 입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쓰레기 같은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긍휼과 사랑을 양식으로 먹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정말 주님을 섬긴 날들이 우리에게 있었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주님을 위해서 산 날들이 그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날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었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것이 홀로 된 때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오히려 갈라진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못박는 삶을 우리의 일상처럼 생각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환경이 도와줄 때 우리들이 많이 기도해야 하지만 환경이 우리의 기도생활을 가로막을 때에는 더 많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함으로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환경에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기도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더 힘써 기도해야 할 것이고 기도할 수 없다면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죄악 된 세상에 태어나서 믿지 않는 사람과 다름없이 살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어도 주님을 위해서 변변히 섬긴 것은 없지만 그러나 일평생 기도하려고 애를 쓰며 살았습니다. 새벽기도의 사람으로 주님이 주신 은혜의 한도 안에서 나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나의 목자와 그리고 조국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느라고 애쓰면서 산 것이 그것이 여러분들의 마지막 재산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기도에 게을러 척박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완악하게 살았던 삶을 모두 기경하고 어린아이처럼 ‘주님 없이 살수 없다’라고 하는 고백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고 누릴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주옵소서”(눅11:1)
지난 시간에는 누가복음 11장 1절의 앞부분을 설교했습니다. 오늘 이번 주와 다음주에 이어서 두 주 동안 나머지 부분들을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었는데 우리들 자신이 직접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환경을 잘 극복하고 기도의 열심을 내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중보 기도를 받는 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힘이 되지만 그러나 중보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기도를 받는 자기 자신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몸소 기도를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배우면서 우리 자신을 더더욱 기도의 실천으로 우리 자신을 다그쳐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어떤 곳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모습을 뵈면서 예수님이 오늘은 여기서 내일은 저기서 이렇게 동 가식 서 가식하는 그런 여행하는 생애를 사셨지만 기도 시간만큼은 꼭 지키시면서 새벽 미명과 깊은 밤에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환경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시면서 자기의 기도를 파수하셨다는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적인 요인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들을 잘 극복하면서 결국은 기도의 세계로 나아 가야지만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시간으로는 둘째 시간이고 순서로는 세 번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마치시매” 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에파오사토’ 라는 단어인데 이 말의 히브리어는 ‘샤바트’이고 그 샤바트 라는 말은 바로 창세기 1장의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쉬셨다고 했을 때에 쓰여진 단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샤바트에서 안식일이라고 할 때에 의미하는 샤바트 데이, 샤바트라고 하는 영어 단어가 온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쉬심에” 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매 제자들이 나아와서 여쭙기를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라고 그렇게 예수님께 부탁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의 길이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쉬시매“ 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기도는 장시간을 요하는 기도였기 때문에 기도가 끝난 후에는 예수님이 장시간의 기도 속에서 소진하신 자신의 육체의 힘을 보충하시기 위해서 쉬셔야 했던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쉬셨다고 하는 사실은 새벽마다 드린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많은 육체의 노고를 요한은 헌신적인 노동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고 또 그 헌신이 얼마나 장시간 동안 바쳐진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의가 없지만 그러나 기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 자체가 매우 소박하거나 혹은 낭만적이거나 혹은 너무나 경박해서 그래서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약속들의 그 풍성함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충만히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디서든지 짧은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고 그 짧은 한마디의 기도로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했고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서 새 삶을 나누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짧은 기도 속에서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리셔서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서 위엄을 나타내신 이 광경은 정말 우리의 눈길을 끄는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짧은 기도로 상황을 움직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리고 임박한 재난을 면하고 그리고 마귀조차 물리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화려함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기도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여러 시간 고민하지만 이런 능력 있는 사람들은 한마디의 기도로 그 문제를 해결합니다. 능력이 없는 병든 사람들을 위로하러 심방을 나서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고쳐주러 갑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고통하고 갈등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오히려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러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당당함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속에는 이처럼 짧게 기도하면서도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었던 혁혁한 기도의 사람들이 성경에는 많이 나타납니다. 모세가 역시 그런 사람이었고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온 그 처절한 지도자로서의 생애는 정말 기도의 생애였고 그리고 그런 기도의 생애 속에서 모세는 수많은 응답을 받음으로서 그는 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많은 요인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 바로 앞에까지 인도하는 자기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속에는 짧은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치려고 할 때에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마주하게 되었고 날이 어두워지면 지리가 어두운 여호수아와 그의 군사들은 가나안 원주민을 진멸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그리고 해는 하늘에 멎고 달도 멎었습니다. 연장된 낮 시간 동안에 그는 가나안의 원수들을 진멸 할 수 있었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해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많은 기록들은 이처럼 짧은 기도로 이 땅에 놀라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거나 혹은 하나님의 놀라운 치료를 가져온 간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서 살아나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이 놀라운 광경도 역시 변형된 기도의 한 형태로서 짧은 시간 하나님을 부름으로서 위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온 예증들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은 사도의 발자취는 바로 이런 기도가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동토와 같이 얼어붙은 땅에 복음의 빗장을 풀기도 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모두 이런 짧은 기도 속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짧은 기도로 하나님께 큰 응답을 받는 간증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러나 성경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을 경험하고 산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짧은 시간에 아무리 진실 되게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짧은 시간에 이런 위대한 응답과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그 사람들이 평소에 장시간을 기도에 헌신하면서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축복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말을 타고 달리며 태양은 하늘 위에 멎고 달도 골짜기 위에 멈추라고 변형된 기도로 해와 달을 멎게 하기까지 그는 모세로부터 이 기도의 감화를 받으면서 일평생동안을 지도자로 그의 심성이 형성되어 오기까지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민족이 위기를 맞이했을 때에 회막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모세가 회막을 떠나고 백성들이 모두 회막을 떠난 시간에도 그는 홀로 남아서 그 회막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기도의 단을 쌓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장시간 동안에 기도의 헌신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위급한 때에 짧은 한마디의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려서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게 하시는 놀라운 기도의 역사를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에 눈에 보이는 그 광경은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그리고 명쾌하고 그리고 신나는 광경이었습니까! 죽은 자는 예수님의 한마디의 기도로 일어나고 앉은뱅이 된 자는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명령 한마디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온 몸에 하얗게 문둥병이 꽃이 피어서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이제는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진 자들이 예수님이 “나을지니라” 하는 한마디의 말씀에 그들이 모두 성한 자가 되었습니다. 뭉그러졌던 피부는 새살이 돋기 시작했고 한순간에 그들은 말끔한 사람들이 되어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귀신에게 평생 사로잡혀서 아무 희망 없이 살던 사람들에게 “나갈지니라”고 하는 한마디의 말씀에 귀신들은 쫓겨났고 그 사람들은 온전한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놀라운 역사는 모두 기도 응답의 점철로 엮어진 생애였고 그리고 그 생애에 모든 사역의 광경들은 정말 화려하기 그지없는 광경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예수님의 손에 의해서 행해지는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 놀랐고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 내려오는 그 청산유수와 같은 진리의 말씀의 감화를 받았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름진 사역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실 수 있었던 그 놀라운 역사 뒤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기도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7장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제목 가운데 하나가 “나의 기도를 항상 들으심에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해주시던 그 기도의 응답이 모두 긴 기도 끝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짤막짤막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응답해주셨고 예수님은 특별히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성취해 가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그 화려한 기도 응답의 역사, 그리고 그 기도 응답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엮어 가는 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섬김의 이 아름다운 생애의 이면에는 피를 짜고 땀을 흘리고 그리고 뼈를 깎는 눈물을 쏟는 이런 개인 기도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그것도 짧은 시간이 아니라 오랜 동안 매일같이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의 노고를 짜서 드리는 그런 기도의 아름다운 헌신이 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장시간을 요하는 노동이었으며 그 장시간의 기도 속에서 이룬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친교, 그분과의 말할 수 없는 친밀함이 바로 주님이 언제든지 부르면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역사 해주시는 그 위대한 능력에 응답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짧게, 짧게 기도하면 순간순간 응답해주시는 기도 응답의 달콤한 열매는 좋아하지만 그런 기도의 세계를 지니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마음을 깨트리고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피를 쏟는 처절한 자기 복종과 그 희생적인 기도의 헌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곧은 무릎을 세우며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한 위대한 기도의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생애에 감탄은 하지만 그러나 그들처럼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실제로 그들처럼 그렇게 기도에 직접적으로 헌신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면서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인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렇습니까?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여러분들의 짧은 신앙생활의 과거의 연륜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 살아온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던 때도 있었고 주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뜨겁게 주님을 사랑해서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주님과 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런 진한 사랑을 느꼈을 때도 있고 그리고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로부터 받는 그 충만한 사랑 때문에 고난도 시련도 이겨가던 어린아이와 같은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불행하게도 100미터의 달리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2킬로가 넘는 마라톤의 대장정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완주하고 우리 주님 품에 안길 때까지는 누구도 자신의 신앙을 승리했다고 그렇게 다짐할 수 없고 누구도 자신은 이제 믿음을 따라 살았노라고 그렇게 미리 예언할 수도 없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던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했고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던 때에는 대부분 주님보다는 이 세상살이에 관심이 더 많았던 때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밀려와서 주님의 그 은혜밖에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없을 때에는 정말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깊고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고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우리는 아무도 없이 주님과 홀로 대면하는 그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은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남녀가 깊이 사랑하고 연애할 때에는 어떻게 하든지 둘이 만 있고 싶어하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정말 순수해지면 순수해질수록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고자 하는 강력한 영혼의 욕구를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제껏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주님과 홀로 대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정말 주님의 은혜에 깊이 사로잡히고 나면 하나님 앞에 홀로 주님과 대면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긴 기도가 신앙생활에 목표일 수 없습니다. 긴 기도가 기도의 목표일 수가 없습니다. 기도의 목표는 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함을 이루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긴 기도는 그런 깊고 친밀한 기도의 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몇 시간을 기도하네, 몇 시간을 기도하네 라고 자랑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기도해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짧은 시간을 기도하면서도 하늘의 친교를 이 땅에서 누리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깊은 기도는 항상 긴 시간을 필요로 하고 그리고 긴 시간이 없이는 긴 시간을 기도에 헌신하는 것이 없이는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짧은 시간에 하늘의 능력을 맛보았던 위대한 사람들의 그 놀라운 기도의 경험은 그런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맛보기 전에 그들이 탄탄한 기도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고 탄탄한 기도의 세계는 장시간동안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면서 하나님 앞에 많은 시간을 기도 속에서 영적으로 단련되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비밀을 맛보면서 사는 그런 기도의 진실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양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의 열렬한 기도는 항상 마치 방향타가 망가진 채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처럼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그 기도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자리를 잡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강력한 감화가 있을 때 그 기도생활의 불이 붙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순간 갑자기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고 수없이 깨트려졌고 그리고 말씀에 의해서 많이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미끄러져서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못 받은 사람처럼 그렇게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미끄러짐이 모두 ‘갑자기’ 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갑자기 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또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섬기던 일이나 자기가 이제껏 붙들고 살았던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갑자기 미끄러지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100% 그런 갑작스러운 미끄러짐이 있기 전에 기도의 세계가 허물어지는 일이 먼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건의 세계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 능력 있고 풍성한 삶을 사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개인적인 경건의 생애는 그 옹달샘과 같습니다. 매일매일 새벽에 옹달샘에 가보면 맑은 물이 고여있습니다. 그 위에 뜬 나무 이파리 몇 개 깨끗이 건져내면 밑이 드러나 보이는 깨끗한 옹달샘이 가득 고여있습니다. 오늘 가득 퍼먹고 내일 가도 내일 또 고여 있습니다. 개인적인 은혜의 세계, 경건의 세계는 그런 샘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그런 은혜의 샘이 기도에 의해서 잘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면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성령께서 알게 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으면 도저히 기도할 수 없던 사람이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의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의 은혜의 그 불씨가 활활 타올라서 정말 역사 하는 경건의 능력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기도의 불씨를 주시고 또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셨을 때 실제로 자기 자신이 기도에 헌신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능력 있게 움직여온 하나님의 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기도와 그리고 성령의 은혜입니다. 칼날과 같이 번뜩이는 예리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간절한 기도와 바쳐진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역사 해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불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능력 있는 삶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었고 교회 적으로는 그 교회를 옛 영광으로 회복시켜주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말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가끔 그럴 때 있습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미국에 있는 사람인데도 지금 얼마나 발달되었습니까! 인터넷으로 카메라로 보면 서로 얼굴보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펙스를 주고받을 수도 있고 전화를 하면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너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뭐라고 말합니까? 만나서 이야기하자. 얼마나 발달되어 있습니까? 회의실에서 탁탁 스위치 누르면 전세계 흩어져 있는 자신의 상사 주재원들을 불러서 한꺼번에 화상 회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면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게 바로 직접적인 대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낮 시간 동안에 정말 화려하리 만치 능력으로 가득 찬 사령관과 같은 삶을 사실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홀로 있는 시간에 자신을 하나님께 많이 바치며 기도하시면서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깊이 기도하도록 만들었고 그래서 기도의 시간은 기도의 깊이를 더해갔고 기도의 깊이는 기도의 시간을 더해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기도의 세계는 점점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그런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인 친교를 누리고 거기로부터 낮 시간동안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거룩하고 진실한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받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좀더 집요하고 그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고 그리고 간절하고 집요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본 사람들은 모두 알지만 그 기도는 반드시 긴 시간의 길이를 필요로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대화는 내가 말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여유를 남겨놓는 것이 대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도 이 기도가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또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 속에서 내게 내 가슴속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들을 아로새기실 수 있도록 자기를 개방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너무나 육적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영의 생각을 새기시기까지는 우리의 마음에 육신적인 이 지각의 껍질들을 벗겨내고 거룩한 영적인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깊은 기도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놀라운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순발력입니다. 회사 일로 늘 바쁘고 집안 일로 늘 분주하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찬송 한 장을 부르고 나면 이 세상에 근심걱정들이 모두 사라지고 찬란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떠오르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내 마음이 고정되는 그런 영적인 순발력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바쁜 세상을 살면서도 수시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행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고 기계가 돌아가는 그 상황에서도 그 소음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운전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이 가능할 수 있는 그 배경은 바로 장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기도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생활을 한번 보십시오. 뭐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다 들으셨습니다. 다 듣고 나서 하나님이 이제 응답을 하시려고 기도를 다 들었는데 나는 사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응답을 해주려고 하니까 어디 가고 없어, 벌써 그러니 어디다 응답을 해주시겠습니까? 있어야지 좀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 텐데 가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뭐도 해주시고 뭐도 해주시고 막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이 다 들으셨습니다. 이제 응답을 해주시려고 하는데 자고 있습니다. 자기 할 이야기만 하고, 그런데 참 말은 쉽지만 오래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우선 첫째는 환경적으로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짜 무섭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전기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전기의 발명은 인간의 역사를 정말 엄청나게 바꾸어놓았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대게 일찍 잡니다. 요즘은 안 그렇습니다만 옛날에는 일찍 잤습니다. 왜 일찍 잡니까? 불이 없으니까, 석유 불 켜놓으면 빨리 끄고 자라 석유 닿는다. 그리고 불꺼지면 잡니다. 그러니까 해가 뜨면 일찍 일어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두워지면 일을 못하니까, 또 어두워지자마자 잤으니까 새벽에 먼동 틀 때는 허리가 아파서라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해 있을 동안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이 되면 자는 게 창조 섭리입니다. 대낮같이 밟혀 놓고 그렇게 일하면 안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참 좋지만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과로해서 죽어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밤늦게까지 그렇게 일하고 돌아오니까 새벽시간에는 비몽사몽간에 아직 누어서 자는 가족들 보면서 눈곱 떼면서 나가면서 출근을 합니다. 그러면서 남도 그렇게 사니까 거기에 휩쓸려서 정신없이 사는 것입니다. 자기도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안 그렇게 살면 불안해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고 그렇게 허우적대면서 살아갑니다. 환경 적인 것 때문에 사실은 1-2시간 이렇게 기도의 시간을 떼어놓는다는 것이 그게 정말 쉬운 게 아닙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건강도 사실은 많이 좌우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건강할 때에는 우리들이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있지만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고 나면 그렇게 1-2시간씩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이 그게 쉬운 게 아닙니다. 누워서 자는 것은 쉽지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매달리는 그 일은 육체에 많은 노고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의 심적인 요인들이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심적인 요인이라고 하는 것은 일에 대한 조급함 때문에 정말 우리들이 그렇게 시간을 충분히 떼어놓고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많은 사람들도 일만 열심히 할뿐 실제로 기도에 게을리 하는 일들을 얼마든지 보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해야 될 일들에 대한 조급함, 이런 것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째든 일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시간을 확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영적인 요인인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시간은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기도의 시간을 감당할 만큼 이 기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그렇게 충분히 기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의 요인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지만 네 번째 요인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오래도록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요인입니다. 마음의 죄가 있거나 기도의 은혜가 고갈되었거나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모두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시간이 있고 건강이 있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기도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가 있기만 하면 기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닌데 여러 가지 죄와 그리고 불 경건한 삶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사라져버린 고갈된 우리의 영혼이 우리로 하여금 좀더 깊이 있는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기도에 합당하도록 잘 지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짧은 기도와 장시간의 깊은 기도, 수시 기도와 정시 기도는 이런 점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살면서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보지도 않고 이 세상살이에 매몰되어서 열심히 산 사람이 그 이튿날 새벽기도에 열렬한 기도의 은혜를 되살린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살면서 수시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정말 필요합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이 수시 기도, 긴 시간이 아니어도 짧은 시간에 마음속으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 수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의 찌꺼기들을 씻어냅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애쓰며 살지만 그러나 이 모든 수고와 섬김이 영원을 잇대어 행해지는 수고와 섬김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이런 수시 기도 속에서 주님을 앙망 하는 삶이 하루 동안 계속될 때 이튿날 새벽기도에 나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좀더 깊이 있는 기도 속에서 정시 기도를 정말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래도록 기도에 헌신하지 않은 자신의 신앙생활, 경건 생활에 대해서 의심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기 성찰입니다. 어떤 종류의 의심,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가,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는가, 내 속에 기도의 은혜가 살아있는가, 그리고 내가 정말 열렬한 기도의 영을 얻고 싶어하는가. 이런 아주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질문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지금은 비록 그렇게 장시간동안 많은 시간을 기도에 헌신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기에 이와 같은 삶이 정당한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늘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며 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경건 생활에 어떤 문제도 발견할 수 없이 자기의 의에 차서 살아가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모습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자기 깨어짐을 발견할 수 있겠으며 그런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감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누구든지 모두 깊은 기도를 하고 싶어하고 기도가 깊어지면 기도가 반드시 넓어집니다. 기도가 얇으면 기도가 좁아집니다. 그래서 기도가 얇아지고 나면 기도가 할게 없어집니다. 그러나 기도의 은혜를 받고 기도를 하면서 기도가 점점 깊어지게 되면 기도해야 할 제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그리고 예전에 기도가 깊지 않았을 때는 건성으로 하던 저 땅 끝의 나라에 기도, 선교사를 위한 기도, 그리고 나라를 위한 기도, 그리고 이름 모를 지체들을 위한 기도조차도 우리 속에 뼈에 깊이 사무치는 그런 살아있는 기도의 제목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깊은 기도를 경험하게 되고 그 깊은 기도는 정말로 아주 넓은 기도의 지경을 넓혀가서 그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면서 살수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지름길, 그래서 그 깊은 기도가 결국은 긴 기도가 되어서 정말 나도 한번 그렇게 2-4시간씩 장시간의 기도를 드리며 살면서도 늘 자신의 기도에 부족한 것을 인해서 갈증을 느끼는 그런 충만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삶의 지름길이 무엇일까요? 이런 삶의 지름길을 이야기하는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저는 이런 깊고 아름다운 풍부한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은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들어가는 문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성을 공략할 때에 왜 침략군들이 수많은 병사가 그렇게 불화살을 맞고 쓰러지면서도 그렇게 정문을 공격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밧줄을 던지고 성벽을 타는 사람들도 성벽을 올라가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은 정문으로 가서 문지기들을 죽이고 그 문을 열어서 아군을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밧줄을 타고 수십 미터나 되는 성을 오를 때 수십 명이 오르면 한 명이 그 성벽에 도착할까 말까 고 올라간 사람도 위에서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50%이상입니다. 그러나 그 문을 부수고 나면 수백 명의 사람이, 수천 명의 사람이 순식간에 적의 성안으로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도 그런 문을 집요하게 노리면서 우리를 공격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도 바로 그 문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 깊고 깊어서 필연적으로 긴 그 기도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그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이 무엇인가 하면 진실한 마음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인간이 지어낸 열심이나 인간이 지어낸 어떤 인위적인 기도보다도 우리를 깊은 기도로 데리고 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편은 기도 시간에 진실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자세가 물론 확신에 찰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용기 있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세로 기도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확신과 용기가 한가지 사실을 능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순간 그는 아주 하찮은 피조물로 전능하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 그것을 능가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그 사람의 기도의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이 일정한 깊이에서 뱅글뱅글 돌다가 끝날 사람인지 아니면 끊임없이 기도에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인지가 구분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너무 믿음이 충만하고 확신이 강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 너무 담대한 나머지 하나님을 막 야단치는 기도, 하나님 이렇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러면 이렇게 하셔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되었을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계속 기도 속에서 구석으로 몰고 가서 무릎을 꿇어서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 조폭적인 기도, 그 기도는 아주 경망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주 불경스러운 기도입니다. 성경 구절을 막 기도 시간에 들이대면서 하나님을 항복시키려고 하는 그런 자세, 성경 구절은 자기보다 하나님이 더 많이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몇 장 몇 절까지 들이대면서 하나님 목에 칼을 겨누는 것 같은 그런 기도는 절대로 깊은 기도로 들어갈 수가 없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그 순간 자신이 엄청난 능력을 소유하고 권세 있는 자리에 섰다라고 하는 그런 느낌 때문에 지나치게 기도 속에서 교만해지는 것, 이런 것들도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만 시작하면 강력한 위엄 있는 톤으로 시작해서 청산유수처럼 흘러가는데 한참 듣다가 보면 그 청산유수와 같은 외침이 이상하게 영혼 깊은 곳에 울림이 없습니다. 그런 기도들은 우리를 결코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작용이고 깊이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면 그 기도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긴 기도가 됩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자기 자신이 기도의 문을 두드리면서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지 어느 한순간에 성령이 오시는 날을 깊은 기도 속으로 밀어 넣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기대만 가질 뿐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기도의 깊이를 더해가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것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정말 진실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자기 자신이 항상 아주 하찮은 피조물로서 지존하고 위엄 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하는 인식을 어떤 이유에서든 버리면 그것은 깊은 기도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교역자의 기도를 통해서는 은혜를 못 받는 적이 있어도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서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을 들으면서 아주 깊이 은혜 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은혜 됩니다. 나와서 횡설수설하지도 않고 잘 기도를 준비하고 온 것입니다. 와서 이 많은 사람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라고 하는 것은 정말 가슴 떨리는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 기도의 시간을 망치면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열납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준비도 없이 옵니다. 그리고는 뜻도 모를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이런 기도는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아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뜻도 알지 못하는 수식적인 어구를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기도가 열릴 때까지 계속해서 헛바퀴 돌 듯이 기도하면서 예배의 시간을 점령하는 이런 실망스러운 태도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교회 다니면 청산유수같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그 사람이 압니다. 지금 이 시간에 나와 여기에 있는 모든 회중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고 그리고 이 기도의 순간에 주의 신이 오셔서 지금 나를 감싸고 계시지는 자신이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기도를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야 되겠지만 그렇지만 더더욱 필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 그 자체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난 그런 기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제대로 쫓아가지 못할 때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언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뜻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정말 깊은 기도로 가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나이도 아직 어린데, 집사가 되어서, 혹은 권찰이 되어서 기도합니다. 뭐 우리 교회는 장로님과 안수 집사님만 기도하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집사가 되면 모두 돌아가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아직 신앙도 어리고 하니까 별로 기대를 안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그 순간에 정말 나를 기도의 세계로 데리고 갑니다.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의 그 기도의 강력한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진실한 기도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기도, 말이 빠르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방언을 못하면 어떻습니까? 목소리가 크지 않으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토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이런 방면에 있어서 노력이 게으른 사람입니다. 5분밖에 기도를 못하면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헬스클럽에 맨 처음에 가도 1-20분만 운동하고 집에 가라고 하는데 아니 처음 하면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았으면 기도의 문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그것을 열기 위해서는 누구 능력 있는 사람이 안수 기도를 해서 어느 한순간에 기도가 뻥! 터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인데 아니 그렇게 해서 될 것 같으면 평생에 자기 자신이 기도의 은혜를 간직하기 위해서 그렇게 씨름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정사의 삶을 살고 그렇게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말씀에 자기를 비추며 노력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 하나 고용해서 교회에 데리고 살면서 기도 안 되는 사람 머리 한번 눌러주라고 그렇게 하면 되지, 은혜의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입니다. 기도가 안되면 기도가 안되더라도 나와서 진실해지려고 해야 합니다. 아프면 아프다.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지었다. 기도가 안되면 안 된다. 괴로우면 괴롭다. 자기 속에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자신 속에 있는 것을 자기의 언어로 표현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가운데 이 진실의 깊이가 더해 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직 깊은 기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정말 깊고 넓은 것입니다.
제가 금요일이면 말씀을 준비하러 가는 곳이 있는데 여름 성수기가 되니까 숙박료도 장난이 아니고 사람들도 요즘 많습니다. 그래서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어디 산기슭 같은 곳에 쓰다가 버린 시골집이 많기에 그런 것이라도 하나 사글세로 주는 것이 있으면 벽지라도 발라서 거기 앉아서 호롱불도 켜놓고 그리고 거기서 말씀이라도 준비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저 시간 잠깐 내서 복덕방을 찾아갔습니다. 그 양반이 차를 타고 갔는데 굉장히 오랫동안 다녔고 또 어려서 자란 고향 같고 하니까 수없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길처럼 안 보이는데 들어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전혀 몇 년을 다녀도 볼 수 없었던 오지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펼쳐지는 광경이 정말 감탄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집은 마땅한 곳이 없었지만 어째든 그 골짜기가 보통 골짜기가 아니라 아스팔트까지 깔린 길인데 그렇게 몇 년을 다녀도 한번도 다닌 적이 없는 것입니다. 왜 들어가면 골목이 하도 후져서 저기까지 가다가 저 집 앞에서 끝나겠구나 생각했던 그 길이 산 넘고 물을 건너서 정말 이발소에 걸린 그 그림에 나오는 그런 동리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때 내가 그 양반 내려주고 혼자 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정말 우리가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구나. 늘 다니는 길, 수없이 다녀서 내가 다 안다고 그랬는데 500미터 들어가니까 내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옛날부터 거기 있었구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한 기도의 세계는 존재하는 기도의 그 아름다운 세계에 정말 일부분일 뿐입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노를 저어서 가보라, 저 망망한 바다로 정말 끝없이 펼쳐지는 기도의 세계, 거기에서는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과 마음들을 우리에게 털어놓습니다. 한 시대의 교회의 흥망성쇠를 알리시기도 하고 그리고 임박한 우리 가정에 어려움을 미리 경고해주셔서 피할 길을 보여주십니다. 오랫동안 죄와 어두움 속에 시들었던 우리의 영혼들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있습니다. 막막해서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을 것이라고 믿던 그런 위기 속에서 사실은 그 위기보다 더 큰 능력으로 우리를 돕게 위해서 둘러 쌓여 진치고 있는 불 병거와 불 말들을 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얕은 기도의 세계 속에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그 풍성함이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헌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지키기 위해서 매일매일 애쓰는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분주함과 고단한 우리의 삶의 일과를 말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는 3년밖에 안 되는 짧은 생애였지만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바와 같이 연한 순과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았습니다. 그분은 비록 하나님이셨지만 그 신성을 인성에 감추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피곤하기도 하시고 배고프기도 하시고 질병에도 감염되실 수 있는 그런 아주 연약한 육체를 지닌 사람이셨습니다. 얼마나 많이 모질고 고된 생애를 사셨는지 30이 좀 넘으신 그분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50세쯤 되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당하신 많은 고난을 생각해보십시오. 정신적으로는 끊임없는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리셔야 했고 그리고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돌보셔야 했습니다. 눈을 뜨면 병자들의 아우성 소리와 굶주린 자들의 울부짖음, 진리를 몰라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로 가득 찼고 그들을 노리고 있는 악한 영의 대적들과 끊임없이 마주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고달픈 노역에 연대기였고 자기 자신의 힘을 소진하기까지 쏟아 부어서 섬기면서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 위로하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에 매이신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쉬셨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푹 쉬시면서 그렇게 여가를 즐기신 기록이 나옵니까? 공생애 들어서신 예수님의 생애는 뼈를 깎는 것 같은 그런 고달픈 섬김의 연속이었습니다. 3년의 세월을 그렇게 섬기시면서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고달픈 생애를 사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간에도 예수님은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 명시는 안되어 있지만 이미 스토리는 뻔합니다. 하루종일 복음 사역을 위해 수고하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은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나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눈을 떠보니까 예수님은 간 곳이 없었고 당황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시는 것이 예수님의 새벽 습관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한적한 곳만 골라서 찾았고 그러자 한참 찾은 후에 예수님이 어느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계신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러나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하고 거룩한 명성적인 분위기 때문에 제자들은 가까이 범접할 수 없었고 종일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가 끝나고 예수님은 그 기도 속에 지친 자신의 육신을 추스르기 위해서 잠시 쉬시고자 하였을 때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직면하고 있었던 환경, 고달픈 삶의 모든 일과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새벽의 시간에 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장시간을 기도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렇게 뼈를 깎는 새벽, 눈물을 쏟는 밤, 피를 토하는 어두움 속에서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불사르듯이 나누어 주시면서도 고갈이 없는 낮 시간을 사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데도 이렇게 뼈를 깎는 치열한 기도 속에서 살아가실 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을까요? 이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모본을 통해서 끊임없이 감화를 받을 우리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화려하고 능력 있는 섬김으로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면서 일생을 사신 그 비결이 바로 이런 자신을 깎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깊고 장시간을 드리는 그 헌신적인 기도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을 알게 해주심으로서 우리같이 연약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를 통해 공급받는 그 은혜 속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로 몸소 쓰라린 고난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일생동안 우리들이 다 두고 애쓰며 살지만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날이 얼마나 될까요?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은 시간들이 얼마나 될까요? 나는 하고 싶은데 주님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하지 않은 일, 그리고 나는 너무나 하기 싫은데 주님이 너무나 원하셔서 이를 악물고 그 싫은 일을 하면서 살아온 시간들이 얼마나 될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아주 분명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단지 주님을 믿은 것으로 우리가 단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으시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가고 이루어 가는 포스트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그곳에서 나를 통해서 그 복음의 물이 흘러나와서 그것이 나 선 자리를 흥건히 적시고 내 주위에 앉아있고 서 있는 사람들을 두루 두루 적셔서 거기에서 복음의 꽃밭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정말 우리 안에 그런 샘이 있습니까? 나 자신이 먹고 다른 사람들을 나누어줄 수 있을만한 그런 삶이 있습니까? 그런 은혜의 물이 우리 안에 고여 있습니까? 그래서 사악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누르고 끊임없는 이 세상 사랑에 욕망들을 죽이며 우리의 평생의 소명인.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우리의 평생의 소명인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간 삶이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래 기도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영과 기도의 영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그것들을 극복하며 이렇게 오래도록 기도하며 사셨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접고 버리십시다. 직업이 우리를 도저히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직업이면 우리 열심히 기도해서 주님이 기도할 수 있을만한 직업을 새로 달라고 우리 기도합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이렇게 일평생을 새벽 미명에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바람이 부는 한적한 들판에 혹은 산에 나아가셔서 무릎이 부서지도록 그리고 팔이 아프도록 하늘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시며 피 흘리시기까지 기도하신 예수님의 그 헌신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실 수 있었고 그래서 우리의 구원도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이렇게 깊고 오랜 동안 기도의 은혜에 잠기셔서 여러분도 예수님이 맛보시는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몸소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누가복음 11장 1절을 보면서 우리는 크게 기도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워왔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을 통해서는 중보 기도를 받는 것도 우리에게 훌륭한 은혜의 한 수단이 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직접 기도의 삶을 실천해야지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배웠고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죄가 없으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몸소 기도하신 일생을 사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이 어떤 곳에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보면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환경과 부단히 싸우신 기도의 몸부림 속에 사신 생애였다는 사실을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쉽게 환경에 굴복하면서 기도생활을 포기하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반성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던 것처럼 분투하시는 시련을 통해서 또한 기도를 배워 가셨다는 말씀을 우리들이 살펴보면서 환경에 쉽게 굴복하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새롭게 기도생활에 도전해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우리는 세 번째 교훈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쉬셨다는 기록을 보면서 예수님의 기도는 짧은 기도가 아니라 장시간의 기도였고 예수님의 깊은 기도는 그렇게 장시간을 기도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들도 또한 이 기도가 깊어지도록 노력을 해야지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우리들의 기도가 정말 깊이 있어질 때 우리의 기도는 장시간을 요구하게 되고 그 많은 기도의 시간을 헌신하는 가운데 우리는 보다 능력 있는 기도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네 번째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이 갖는 영향력입니다. 기도 그 자체도 강력한 영향력이 있지만 기도하는 그 사람 자체가 영향력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사람의 영향력을 오늘 우리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기도는 배우는 것이라고 하는 진리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여쭙기를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이런 기도를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당시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그 당시의 관습을 따라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 같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주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당시 최고의 선지자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그 기도의 형태는 어쩌면 이 당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형태보다도 훨씬 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이처럼 많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기도를 가르쳐준 것을 보면서 오늘 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른 선생님들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그렇게 가르쳐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간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가 되는 그 즉시 그는 모두 완성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이제 배워야 할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저주받고 진노 받은 자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 모든 신분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완성된 것보다는 사실은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의 구원을 누린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고 그는 그렇게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즉시 하나님의 진리의 학교에 입학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자기가 믿게 된 예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하나씩 배워가야 하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하나씩, 하나씩 배워가고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앤드류 머레이가 지적했듯이 진리의 학교에 입학한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순종의 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철없는 우리들이 그 순종의 학교에서 때로는 그 선생님에게 사랑스러운 교훈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책망하는 야단을 맞기도 하고 그리고 틀린 것을 바로 잡아주는 교정의 아픔을 경험하기도 하고 그 다음에 무엇이 의로운 삶인지를 가르쳐주는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그 속에서 순종을 배워갑니다.
전에는 하나님 믿고 구원받고 나면 우리는 거의 완전한 신자가 된 것처럼 교만했지만 그 순종의 학교에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은 아직도 멀고먼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신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거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때로는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치열한 삶의 여정에서 고액의 과외 비를 지불하는 가운데 순종의 가치를 배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고난받은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만들어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그 시련과 많은 고난 속에서 잃어버린 것보다도 얻게 된 그 신앙의 교훈,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그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를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도 순종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엉터리없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종의 학교에서 회초리를 맞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화를 받으며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배우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정말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거기에서 배워 가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이 신자는 예수님의 자녀가 된 즉시 또 하나의 학교에 입학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의 학교입니다. 기도의 학교에 입학해서 걸음마부터 시작해서 우리들은 그곳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 기도의 학교의 교장은 예수님이시고 기도의 학교에 많은 선생님들이 있어서 그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기도의 비범한 세계에 대해서 공부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옛날에 엄청난 능력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기도에 대해서는 이것은 나는 초보라고 생각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그야말로 신앙에 있어서 기본이 아닌가, 나는 이미 주님을 위해서 예전에 내 자신을 모두 드렸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고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에게 신앙이 초보인 기도의 생활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과거에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열렬한 기도 속에서 살고 능력을 많이 받은 삶을 살았는지 그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미래에 하나님을 위해서 꿈꾸고 있는 아름다운 꿈은 아직 제단에 바쳐지지 않고 살아 돌아다니는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살아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짐승은 아직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 내일은 내가 저 훌륭한 수소를 하나님께 드려야지 하고 마음을 가졌다고 치더라도 그것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진짜로 그 놈을 잡아다가 각을 떠서 제단 위에 바칠 때 그게 정말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헌신적인 삶을 꿈꾸면서 그것 때문에 오늘 주님을 위해서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추구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허황 된 꿈을 꾸는 종교적 몽상가들입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만나셨을 때 예수님이 많은 사연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베드로에게 물은 질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였습니다. 이전에 나를 사랑했냐, 앞으로 네가 예루살렘 교회에 담임목사가 되면 나를 사랑할래. 미래형의 질문이 아니라 Do you love me?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 마치 네가 며칠 전에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한 죄가 있었다고 치더라도 내게 중요한 것은 지나간 너의 과거가 아니라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정말 나밖에는 너에게 없는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신앙의 경력이나 옛날의 헌신된 삶이나 미래에 꿈꾸는 그런 희생적인 삶이 아니라 지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추구하고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사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오늘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그랬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는데 예수님, 예수님도 우리에게 기도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갑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제자들이 방금 예수님께 전도 받아서 새 신자 반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모르니까 가르쳐주십시오. 그래서 교회에서는 창피한 질문은 없습니다. 모르면 물어보아야 합니다. 잘못 믿어서 손해보는 것보다 물어보는 것이 낫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 기도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럴 때 마치 우리교회를 말하자면 새 가족 반에서도 그런 질문은 안 합니다. 새 신자 반에 들어온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여기 지금 11장인데 9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서 사도를 삼으시면서 온갖 귀신을 제압하는 강력한 권세와 병든 자를 고치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기까지 충분한 영권을 주셨습니다. 그런 영적 권세를 주셨고 사도들은 상당한 기간동안 주님께로 받은 그 영적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사역을 하다가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 우리에게 기도를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는 아! 능력은 받았지만 기도는 안 하고 탱탱이 놀았구나. 그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심오한지 그렇게 능력을 많이 받은 사도가 되었는데도 이 기도의 길은 이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기도의 스승은 필요 없다. 나는 능력을 받은 그 순간 기도에 있어서는 대가가 되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배운 성경 지식이 어디로 도망갑니까? 남아 있습니다. 교회에서 듣고 배운 섬김에 지식들이 어디에 갑니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항상 현재적인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주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장성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묘목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펄펄 나는 기도의 은혜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불꺼진 굴뚝처럼 싸늘한 가슴을 안고 한마디도 기도할 수 없는 영적인 벙어리가 되는 일은 죽을 때까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이 기도의 학교에서는 나는 온전히 이루었다. 나는 이제 붙잡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조차도 그런 자신감 속에서 일생을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전혀 몰랐다기보다는 한적한 곳에서 장시간을 기도하시며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한 거룩의 명성 가운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계신 예수님을 뵈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의 세계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배웠고 이것은 기도의 세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것이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저 아름답고 고결한 기도의 세계 속에 우리도 들어가 볼 수 있을까? 그 마음이 예수님 앞에서 이들로 하여금 학생이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지 않아서 거들먹거리는 교만한 신자입니다. 그는 정말 일생을 메마른 채로 살아갈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대적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 그것을 구하면서 일생을 사는 껍질과 같은 인생을 이어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도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에 어떤 위기 속에 있고 어떤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살수 있습니다.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정말 살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언제나 그런 시련과 어두움 속에서도 안전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더운 여름철이 되어도 아이들이 잘 때는 꼭 엄마가 끌어안고 가슴을 토닥토닥 해주어야지 잠을 잡니다. 왜 그럴까요? 가슴에 특별한 신경조직이 있어서 거기를 두드리면 잠이 온다고 그렇게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잠이 드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가슴에 와 닿고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엄마의 그 손길을 통해서 자기는 눈을 감고 잠들고 있지만 엄마가 옆에 있다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어주는 한 방법이고 그것이 아이들에게 안정감을 주어서 깊이 잠들게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고난을 당할 때도 있고 시련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할 때도 있고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원수로 되 갚음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난할 때가 있는가 하면 부할 때가 있고 부할 때가 있는가 하면 쪼들리게 사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를 지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살수 있습니다.
큰 풍랑이 몰아치고 파도가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놓으면 마치 커다란 군함을 타고 바다를 여행하는 것 같은 안정감이 사라지고 어느새 우리는 바가지 만한 쪽배를 타고 그 뒤옹치는 파도에 휩쓸려서 그 안에서 우리 자신들이 정말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그런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기도하는 사람들은 살수 있습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정말 주님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살아온 우리의 길이 폭풍을 헤치고 온 길이었습니다. 흑암의 어두움을 지나온 길이었고 사망의 음침한 길을 누벼왔습니다. 그렇지만 기도의 은혜를 간직하고 그 삶의 고비 고비마다 그 기도 속에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을 붙들고 이제껏 걸어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넘어지지 않고 이만큼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가르쳐달라는 사람들은 여럿 만났습니다만 기도를 배우고 싶다는 사람은 많이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드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은 있어도 배운바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그 은혜를 간직하기 위해서 삶만큼이나 치열하게 기도해야 할 마음에 불붙는 열정을 지닌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이 세상이 삼층의 하늘로 이루어져있다고 믿었습니다. 일층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이오, 두 번째 이층 하늘은 공중권세를 잡은 자가 있는 하늘이고, 그리고 삼층천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주님의 엄위하신 보좌가 있는 그 하늘나라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시한 기도로는 그 삼층까지 뚫고 올라갈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기를 쏘자, 쏘자 오늘도 우리의 기도의 화살을 하늘을 향해 쏘자. 일층 하늘을 가르고 이층 천을 뚫고 마지막 주님의 보좌에 이를 때까지 하늘을 향해서 우리의 기도의 화살을 쏘자 라고 말입니다.
사실은 일층 천 이층 천 보다도 더 높은 하늘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 속에 있는 또 하나의 하늘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형성된 기도의 화살이 세상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 세상 번뇌로 어두워지고 더럽혀진 우리의 마음 한복판을 뚫고 그리고 첫 번째 두 번째 하늘을 갈라 마지막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기도는 보다 강력해져야 할 필요가 있고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강력하게 하는 힘은 바로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과 자기를 다 쏟아 붓는 중심의 기도와 그리고 그 기도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그 기도 학교에 아주 어린 학생들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그 기도의 학교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주도록 부탁하고 거기에서 한자, 한자 기도를 배워가며 그렇게 우리는 그 기도의 학교에서 기도의 사람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학생들을 입학을 시켜나도 똑같은 선생이 가르쳐도 열심히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사회에 유용한 인물이 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그 학생보다 훨씬 더 우수한 학생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서 학교를 나서는 졸업생들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학생들은 부지런히 배우고 공부하고 선생님이 가르쳐줄 때 자기 자신이 다 된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선생 되기 보다는 학생 되기를 더 많이 좋아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기보다는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서 배우는 것들을 더 행복해하는 그런 사람, 그런 학생들이 유용한 학생이 되어서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기도 학교에서 어떤 학생들입니까? 강의시간에도 도망가고 선생님 말씀도 안 듣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몹쓸 짓이나 하면서 삼 년 사 년 기도의 학교를 다녀도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 그런 비참한 영적인 영양실조에 걸린 학생들은 아닙니까? 만약에 우리들이 기도 학교에서 생활이 그렇게 낙제점수라면 우리의 영적 생활이 훌륭할 리가 없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름다울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기도의 학교에 입학시켜주면서 기도했던 아름다운 최상급의 포도가 아니라 쭉정이와 같고 아무 쓸모 없는 들 포도만 맺어서 나무를 버리는 그런 아주 나쁜 학생들이 되어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본분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많은 학교에는 졸업이 있고 진리의 학교에도 졸업이 있고 순종의 학교에도 졸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아버지의 뜻이 거기에서 저절로 이루어지고 더 이상 거기에서는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이 그 성경이 지식을 활용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도 아직 끝나지 않은 사역이 있으니 기도의 사역이고 우리의 기도의 학교에서 삶은 천국에서도 이어져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에 남아 있는 조국의 교회와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후배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영원히 그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런 깊은 기도의 사람들로 잘 자라가도록 이 학교에서 아름답게 훈련을 받는 사랑스런 학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예수님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에 감화력입니다. 그에 앞서서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고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으로부터 기도를 배웠습니다. 요한이 어떻게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했기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서 기도를 배워서 기도의 사람들로 세워질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침묵하고 있지만 이 세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선지자들을 세우셨는지를 잊지 않고 있다면 신약 성경에 구체적인 기록이 나오지 않아도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충분히 답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요한은 제사장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제사장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제사장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특권일 수는 없었습니다. 제사장의 집안에 태어나서 무슨 연고인지 모르지만 세례 요한이 아주 어린 나이였을 적에, 거의 갓난아이 적에 광야로 보내어졌고 그 광야에서 누가 돌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째든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면서 그 빈들에서 자라왔습니다. 요한의 생애는 불과 설교 몇 편을 남기고 그리고 헤롯의 손에 의해서 목이 땅에 떨어져 소반에 바쳐져서 어린 여아에게 주는 선물이 되어버리고 만 아주 지극히 짧은 생애였습니다.
설교 몇 편 남기고 간 이외에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없는 생애였지만 그 짧은 생애 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 위해서 요한은 30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그 광야에서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선지자가 어떻게 선지자가 되었는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3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약대 털옷을 걸치고 광야에서 고고한 외침으로서 잠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숨에 일깨우기까지 그는 광야에서 30년이 넘는 세월을 자랐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갔고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주님을 찾으며 그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교회들을 보며 아파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역사를 배우며 선지자의 거룩한 소명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고는 그 속에서 그는 점점 영적인 사람으로 빚어져갔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 80절은 말하기를 “아이가 자라매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으며 심령이 강하여져갔고 그는 드디어 한 시대의 역사와 마주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지닌 선지자로서 도전할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의 심령이 강하여지게 되었을까요? 거기에서 이 세상의 잡귀들이나 배우고 아주 세속적인 꿈이나 꾸면서 광야에서 살았더라면 그가 심령이 강하여질 수 있었을까요? 모두 그 시대의 보편화된 죄악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잠시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텐데 그 마음에는 예수님이 오실 수 없으니 너희들은 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외칠 수 있었을까요? 틀림없이 그는 장구한 세월을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점점 더 심령이 강하여져 갔습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모래바람만 부는 광야에서 세상 사랑의 모든 꿈을 접고 그 속에서 정직한 선지자로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온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열망을 갈망하는 가운데 기도에 자신을 드리고 그래서 그는 심령이 강하여져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헤롯은 세례 요한이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고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고 언제든지 제거하고 싶은 존재였고 또 자신이 언제든지 그는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인도 그를 두려워했고 헤롯은 더더욱 요한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책망할라치면 그는 일개 촌부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은 한 나라의 제왕이었지만 그러나 고통스러우면서도 세례 요한이 설교할 때 그는 오금을 떨면서 그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한 헤롯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을 보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기가 만약에 저 의로운 사람을 목을 매면 자신에게 무엇인가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하는 그런 두려움을 세례 요한을 통해서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의인의 감화력, 거룩의 영향력들이 세례 요한이 전심으로 30여 년의 세월동안 주님을 찾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광야에서의 처절한 기도의 몸부림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을 누가 부인 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전심으로 그렇게 주님을 찾는 그 간절한 기도와 주님을 향한 집중적인 추구 끝에 마지막에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고 그는 하늘의 권능을 소유한 그 시대의 선지자로 소명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강력한 영적인 영향력 이면에는 하나님을 향한 집중적이고 진실한 추구가 있었고 그리고 그 추구에 중심이 기도였다는 사실을 위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줄 수 있었고 제자들은 그 선생님을 통해서 기도를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설교는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살아있지만 그 사람이 끼친 신앙의 본은 죽어서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흠모의 마음을 더해갑니다. 더 이상 예수님의 설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끼친 그 아름다운 모본은 웅변처럼 우리의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고 우리의 생각을 고치고 냉랭해진 우리의 마음에 십자가 사랑에 불을 지피지 않습니까? 많은 교회의 중직들이 기도하는 목자의 본을 보며 감화를 받을 수 있고 그래서 배우고 싶어하고 그리고 장로들과 교회에 많은 일군들에게서 처음 믿기 시작한 신자들이 기도의 세계를 배우고 싶어하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러울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교사입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제자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저 선생님을 생각할 적마다 나는 기도하는 선생님의 그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는 저 선생님을 생각할 수 없다고 제자들이 여러분을 향해서 고백을 가지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을 보면서 기도하지 않던 영혼들이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심지어 기도하지 않는 자신의 나태한 모습에 대해서 정죄 의식을 느낄 정도로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선생님들입니까? 입술의 선생님이 아니라 마음의 선생님, 말의 선생님뿐만 아니라 삶의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역장입니까? 구역원들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혹시 구역 공부시간에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기도도 안하고 탱탱히 노는 주제에 입만 까졌구나. 구역원들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미 그 성경 공부의 영적인 분위기는 파괴된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가르쳐야 힘이 있습니다. 구역장인 여러분들을 보면서 구역원들이 나는 참 든든해. 왜냐하면 나는 연약해도 우리 구역장은 오늘도 나를 위해 기도할거야. 그 분의 기도하는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는 그 분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어. 비록 같은 집사지만 그 분은 내 마음에 기도의 선생님이지. 어떻게 하면 나도,
세상이 주는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그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 나보다 더 가난하게 사는데, 나보다 더 고달프게 사는데, 나보다 더 육신적으로 연약한데, 나보다 진 섬김의 짐이 더 무거운데 자기를 바쳐 기도하는 구역장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의 구역원들이 감화를 받습니까?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당당하게 기도의 세계라 하며 가르칠 수 있기까지 살아온 세례 요한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생애에 버금가는 고난으로 점철된 길을 걸었습니다. 삶처럼 기도했고 그리고 기도하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더욱이 오늘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그렇게 많은 엄청난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 어린애처럼 예수님 앞에 와서 기도하는 동안 접근하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보고 끝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 다가가서 예수님,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기도 좀 가르쳐주세요. 우리 이 속에서 능력 받은 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겸비한 어린아이와 같은 학생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기도의 세계에 문을 두드리는 이 제자들 앞에서 권위를 가지고 예수님이 그래, 애들아 기도란 이런 것이란다. 뭘 위해서 기도해야지 되는지 아니. 그리고 기도를 가르쳐주실 수 있기까지 예수님이 사신 생애가 어떤 생애였습니까? 안식도 없고 휴식도 없이 모두들 태만하게 잠들어 있는 그 시대에 하나님이 하신 그 근심과 거룩한 염려를 한 몸에 끌어안으시고 그리고 인박한 예루살렘을 위해서 가슴 저며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시기를 몸부림치며 기도하면서 사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면서 육신적인 온갖 연약함과 더불어 싸우시면서 자신의기도의 세계를 마치 주님의 보좌를 파수하듯이 지켜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33년의 짧은 생애였지만 그분의 생애를 대면하면서 아무리 그 심정이 돌맹이와 같은 사람들도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대면하면서 마음이 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와 꼭 같은 성정을 지니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기의 기도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애쓰시고 그래서 이 주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는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었고 땀에 적셔져 있었으며 눈물이 흠뻑 배어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기도의 가르침을 열면 거기는 언제나 끈적이는 피가 있고 그리고 눈물이 있고 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우리들이 기도의 사람으로 살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까요? 가장들이 신령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자기의 가족들을 영적인 권위로 영적인 아버지처럼 돌볼 수 있다면 그들의 자녀들은 얼마나 신령한 영향을 세상의 영향보다 더 많이 받으면서 이 세상을 거슬려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수 있기까지 예수님도 그 기도의 학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기도를 연습해 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신을 깊이 단련하며 거룩한 기도의 사람으로 형성되어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너무나 열정이 부족합니다. 육신의 연약함과 환경적인 어려움과 마음의 근심과 염려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의 영을 고사시키기 위해서 치열하게 애쓰지만 그러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정말 초라하고 정말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인지 우리의 생명과 그 모두를 예수의 사랑에 전적으로 빚진 사람들인지 자각하고 있는 신자들인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기도를 잃어버린 삶에 나태하게 끌려 다니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리고 요한이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줄 수 있는 기도의 스승이 되시기까지 스승다운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이 많으셨지만 예수님은 능력을 의존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힘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더 의지했고 하나님께로 말씀을 받았지만 주님이 주신 말씀을 의지하기보다는 매순간 하늘을 가르고 내려 보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신령한 은혜를 더 많이 의지하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언젠가 저는 다큐멘터리에서 아주 감동적인 자연의 광경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천으로 회기 하는 연어의 모습입니다. 어린 연어가 저 북태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그래서 자기가 태어난 그 모 천으로 회기 합니다. 몇 년만에 회기 합니다. 그런데 오직 자기 모 천으로 돌아가는 회기 하고자 하는 본성 하나를 가지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거리 그 태평양을 지납니다. 그리고 돌아옵니다. 수많은 낚시꾼들의 던지는 그 미끼의 유혹을 피하고 변화된 환경으로 말미암아서 오염물질이 배출되는 그 적응하기 힘든 강물을 거스릅니다. 폭포를 만나면 몸뚱이를 바위에 부딪히면서 두 번 세 번 뛰어오르면서 그 폭포를 뛰어넘고 그리고 치열하도록 모 천을 회기하고 회기 하는 그 연어들의 돌아오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들이 주님께로부터 많은 은혜와 사랑을 입었다면 우리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없는 연약함까지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리고 기도하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라”(눅22:39)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를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이미 예수님의 생애 말기에 기록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가 가까워진 시점에 일어난 일들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감람산으로 가셔서 거기서 자신의 진액을 모두 쏟으시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기도하셔서 십자가에서 지실 고난을 미리 감당하시는 장면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기도는 매우 특별한 기도였지만 그 특별한 기도는 일상적으로 계속되던 예수님의 습관화된 기도 생활 속에서 흘러나온 특별한 기도였다는데 우리들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감람산은 제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작은 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곳을 밤에 자주 다니셨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보면 낮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 가서 쉬셨다고 되어 있으니까 아마 이 감람산은 예수님이 하루 종일 자기를 쏟아 부어서 사역하시던 힘겨운 사역 끝에 이제 밤이 되면 사람들을 모두 물리시고 들어가셨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셔서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쉬시기도 하고 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밤 기도를 드리심으로서 영혼의 원기를 회복하시는 그런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 것이 바로 이 감람산입니다.
그래서 기도원을 보면 감람산 기도원이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적합한 말을 찾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원을 지은 사람들은 자기 기도원을 바로 그렇게 예수님이 물러가셔서 쉬시기도 하고 기도하시기도 하신 그런 감람산의 그 이미지를 자기의 기도원에 부합시키고자 하는 그런 소원을 갖는 것도 우리들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습관을 좇아” 그랬습니다. 이 습관은 희랍어로 ‘에도스’라는 단어인데 잘 번역이 되었습니다. 습관, 몸에 배인 버릇 그런 뜻입니다. 이 에도스는 ‘에도’ 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에도 라는 동사는 ‘익숙해지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한가지 행동에 계속 하다가보니까 그것에 익숙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인 그 어떤 버릇이나 습관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에도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순환관계에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생각에 계속되는 반복은 행동을 낳고 행동이 계속 반복되면 습관을 형성합니다. 습관이 계속 반복이 되면 인격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 사람의 존재와 결별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 되고 그 인격에 부합하는 어떤 버릇을 새롭게 창조하고 그 버릇은 다시 그를 규칙적인 어떤 행동을 유발 받도록 만들고 그리고 그 반복되는 행동은 다시 그 사람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버릇이라고 하는 것은 반복되는 행동에서 흘러나온 것이지만 일단 그 버릇이 습관이 되고 나면 그 습관은 거꾸로 그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게 되는 그런 양태를 낳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습관은 쉽게 떨쳐버리지만 나쁜 습관은 떨쳐버리기 어렵다고 그렇게 하는데 사실 그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지 간에 일단 자신의 몸에 배인 습관은 떨쳐버리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전 어렸을 때 직장에 다닐 때 꼭 시청에서 내려서 소공동 쪽 길을 지나서 명동 쪽으로 출근을 했는데 거기에는 호텔들이 많이 있습니다. 플라자호텔을 비롯해서 반도 조선호텔 프레지던트 호텔 그리고 저쪽 뒤편으로 코리아나호텔 등등 큼직큼직한 호텔들이 많아서 외국인들이 많이 묶는 그런 곳입니다. 아침에 출근 시간에 지금이나 그때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철에서 내립니까? 그리고 소공동 길이 인도가 한 세 사람이 어깨를 맛대고 걸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인도와 차도가 아주 좁습니다. 그런데 그 추운 겨울에 사람들이 다 정장 차림으로 혹은 코트를 걸치고 출근을 하는데 꼭 하루에 한번씩 누구를 만나는가 하면 수영 팬티 같은 것을 입고 그 다음에 팔이 없는 러닝셔츠를 입고 털이 북실북실 난 외국인들이 달음질하는 장면을 봅니다. 뛰려면 좀 일찍 일어나서 사람이 없을 때 뛰든지, 차를 타고 저 남산쯤 가서 좀 공기가 좋은 데서 뛰든지 하지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서 하필이면 남들이 바글바글 출근할 때 거기를 하얀 김을 헉헉 내뿜으면서 그냥 쩔쩔매고 사람들을 헤집고 한국은행으로 남대문으로 돌아서 다시 소공동 쪽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새벽에는 소위 스모그 현상이라고 그래서 배출된 매연이 새벽에 안개 비슷한 것과 습기로 뒤엉켜서 지면에 낮게 떠있습니다. 거기서 달음질을 하면 딱 높이가 사람 높이와 같아서 쭉쭉 빨려서 폐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건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서울 시내에서의 새벽조깅은 절대로 몸에 이롭지가 않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벽 시간에 헉헉거리면서 뜁니다. 또 뛰는 사람들 가운데 서너 사람 가운데 하나는 그저 저 사람이 뛰어서 도로가 손상을 입지 않을까 할 정도로 배가 나온 그런 사람들이 뜁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렇게 뛰어서 흘리는 땀으로 받는 운동의 유익과 출근하는 사람들조차도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전철 앞을 나오는 이 공기를 들이마셔서 폐에 주는 해독이 어느 게 더 유리할까 나는 참 훨씬 불리한 것이 많다고 생각이 되는데도 하여튼 매일 한두 사람 많으면 여러 명이 그 출근길에 봄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꼭 만납니다.
그 사람들은 아마 한국에서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업상으로 혹은 관광으로 잠시 서울에 들린 사람이고 내일이면 또 보따리를 싸서 동경으로 갈지 타이페이로 갈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서 달음질을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보고 어린 나이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본국에서 좋은 공기 속에서 아침마다 조깅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몸에 붙은 습관이 여기처럼 이렇게 환경이 열악한데도 저들로 하여금 아침 출근길에 인파를 헤치면서 달리기를 하게 만드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것은 습관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그렇게 조깅을 하던 그 사람이 만약에 조깅을 안 하면 소화가 안되고 기분도 우울하고 여러 가지 증세를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일단 습관이 형성되고 나면 그 습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고 하는 강력한 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감람산을 올라가신 것이 습관을 좇아서 버릇으로 올라가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날 처음 감람산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늘 이 감람산을 육체적인 휴식과 기도를 통한 영적인 재충전에 사용하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제 낮 시간동안 열심히 잃어버린 영혼들을 섬기시고 설교하고 치료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가르치시면서 자신을 소진하시다가 밤 시간이 되면 잠시 사람들로부터 일들로부터 물러나서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생활을 자신의 몸에 배게 만드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밤늦은 시간까지도 병든 자들을 섬기고 지체들을 가르치셔야 할 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외적인 때를 제외하고는 일상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밤이 되면 이 감람산으로 잠시 물러가신 가운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자신의 습관으로 삼았고 오늘도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습관을 따라서 예수님이 이런 기도의 동산으로 들어가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생애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 십자가를 앞에 놓은 피 쏟는 그 위대한 기도도 바로 이런 습관적인 기도생활의 루트를 타고 이루어졌던 것을 보면서 우리의 습관적인 기도생활, 다시 말하면 기도의 습관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때때로 하늘을 가르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기적과 같은 기도의 응답들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시련이 밀려들 때 그때 우리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응답이나 은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 그리고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부어주신 그런 축복들이 꼭 필요하고 또 그것들이 우리들의 신앙을 한 단계 성큼 올라가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고난이 끊임없이 밀려와서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는 이 고난과 핍박을 더 이상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때 우리는 일상적인 기도생활로는 충분하지 않고 생명을 건 그런 기도, 자신의 온몸을 다 던져서 살든지 죽든지 내 인생을 당신의 처분대로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어린애처럼 매달리는 그런 전심전력의 특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수많은 근심과 염려, 온갖 시험들 악한 원수들이 우리의 안팎에 있어서 갑자기 특정한 유혹이 기승을 부릴 때 우리의 일상적인 기도의 생활은 이런 유혹의 폭풍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특별히 매달려야 하고 거기서 우리는 두고두고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에 입에 오르내릴 아름다운 기적의 간증들을 우리는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밤에 자는 것이 창조의 섭리지만 밤새워 기도해야 하고 부부가 한방을 쓰면서 사는 것이 결혼의 이치지만 분방을 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고 고파도 참으면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응답을 받고 나면 두고두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간증을 우리들이 소유하게 됩니다.
홍해가 너 댓 번 갈라졌습니까? 하늘을 열고 만나를 내리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먹여 살린 기적과 같은 양식의 공급이 여러 세대동안 지속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두고두고 주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아 건네신 것과 그리고 그를 따르던 애굽의 병사들을 수장시키신 사건을 두고두고 찬송의 제목으로 삼고 애굽에서 행하신 그 위대한 해방의 역사를 두고두고 간증거리로 그들이 삼았습니다. 오고 온 세대에 그들의 간증은 수많은 후손들을 그 간증에 동참시켰고 자기들보다 더 비참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자기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그런 위대한 기도와 지축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경험해야 할 필요가 우리에게 꼭 있습니다.
그런 것을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나 그런 위대한 기도와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응답의 역사도 역시 일상적인 기도생활 그것을 무시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은혜는 그런 은혜대로 필요하고 그것보다도 오늘 더 시급히 필요한 은혜는 무엇인가 하면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하루를 살기에 필요한 은혜를 공급받고 하루에 자신의 죄를 자기 깨어짐과 참회 속에서 지워버리고 자기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는 이런 은혜의 옹달샘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가끔 사람들은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며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그 불평이 무엇인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진짜 거듭나고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은 너무 분명해. 그래서 어두운 죄악 길에서 손들고 주께 옵니다 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던 기억도 자기에게는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고 자꾸 십자가를 경험했는가 하고 물어보는데 자기는 정말 십자가를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교회에 와서 예전에는 몰랐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들으면서 자기는 얼마나 사악한 죄인인지 정말 우리를 위해 보배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 외에는 그 앞에서는 자기가 정말 지푸라기와 같고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경험했습니다. 기적을 맛보았는가 하는데 자기처럼 하나님이 살아 계신 확실한 간증을 보여준 그런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자꾸 세상으로 돌아갔으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주셔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뭘 빠지는가! 자 거듭나지를 않았나. 어떤 사람은 주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거듭났는지 안 거듭났는지 자기는 잘 모르고 엄마가 잘한다고 그런 소리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열심히 살았는데 너 십자가 경험했어 하면 고뇌에 쌓이는 사람, 자기는 십자가도 경험했고 그리고 열린 교회에만 오면 정리가 되었느냐고 그렇게 말하는데 자기는 진짜 잘 정리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진짜 뭐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은혜를 맛보기 위해서 다시 타락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옛날에 많이 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 기적과 같이 자기를 건지시는 은혜도 많이 맛보았고 다른 사람들은 교회에서 봉사도 안하고 뺀질 대는데 그래도 나는 교회 건축할 때마다 집 팔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누구보다도 많이 섬기고 애쓰고 수고하는데 그런데 뭐가 빠지는 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게 자기가 생각할 때 자기가 너무 야속할 정도로 너무 자주 뒤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을 때는 막 끌어 오르는 것 같고 십자가 도를 들으면서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는 펑펑 울지만 왜 그런지 그 눈물이 일주일도 가지 않고 한 달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해서 죽는데 까지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도마처럼 예수님을 의심하고 어떤 때는 베드로처럼 비겁하게 숨어버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왠지 뒤죽박죽 된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구에게 가서도 자기는 신앙에 있어서 나는 꿀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아니 그만큼 갖춘 사람은 또 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게 내 직업이 너무 바쁜 직업이기고 또 내가 회사 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가정이 복잡하고 하는데 다 쓸데없는 변명거리입니다.
오직 하나 무엇인가 하면 그런 사람의 공통점은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안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기도가 습관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경건의 삶이 상황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하게 구축되지 않은 사람들이 자주 하나님을 만나고 자주 미끄러지면 아까 말씀드린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니 이미 알고 있는 게 너무 많고 안 듣고 한번 살아보자니 그렇게 살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여튼 자신도 모르는 혼돈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고정된 기도 생활을 통해서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 혹은 없다고는 말못해도 은혜가 심히 부족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런 삶의 방식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나무나 풀 특별히 곡식이 철을 따라서 과실을 맺고 풍성한 열매를 가을에 수확하게 되기 위해서 어마 어마한 양의 강수량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때를 따라서 적당량의 비가 여러 번 내려주어야지 만 그 과실이 열매를 맺고 그리고 곡식들이 무르익어서 수확의 계절에 농부들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농사를 짓는데 일년에 천 밀리의 강우량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을 하나님이 골고루 분배해서 씨뿌리기 전에 내려주셔서 땅을 좀 이렇게 녹이신 다음에 씨뿌려놓고 나면 잠시 있다 싹이 날 때쯤 가랑비가 내려서 땅을 적셔주시고 마르려고 하면 또 비가 내려서 적셔주셔서 이른 비 늦은 비 거쳐서 마지막에 가을에 남극의 햇볕을 이틀만 더 주셔서 확 익게 만드셔서 그래서 걷어들여야 하는 것, 그렇게 해야지 만 농사가 되지, 천 밀리를 내리시는데 천 밀리면 일 미터입니다. 하나님이 씨뿌릴 때도 안 내리시고 있다가 이제 막 뭐가 되려고 하는데 한꺼번에 천 밀리를 확 부어버리시면 요즘과 같은 홍수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특별한 때 특별히 기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아야되겠지만 오늘 이 장면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우리에게 기도의 습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기도를 전혀 안 하시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런 기도는 매우 약합니다. 벽을 뚫어도 한군데를 계속 뚫어야지 만 구멍이 뚫리지 여기 한번 저기 한번 두들겨서는 결코 구멍이 뚫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기도의 습관이 몸에 배기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잘될 때도 그 기도시간은 지켜야 하고 안될 때도 그 기도시간은 지키고 비가 퍼부어도 그 기도시간은 지키고 눈이 와도 그 기도 시간은 지키고 그렇게 될 때에 그 기도가 하나의 습관이 되어서 자기의 몸에 배게 되는 것입니다.
습관화된 것은 그것을 행동화시키는데 에너지가 적게 들어가지만 습관화되지 않은 것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조금만 환경에 그것을 못하게 가로막으면 좌절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습관화되면 에너지가 아주 적게 들고 어떤 면에서는 에너지가 거의 없어도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거기로 끌고 가는 그런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습관은 처음에는 사람이 그 습관을 만들지만 습관이 형성되고 나면 습관이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처음에 습관이 형성이 안되어 있을 때는 사람이 규칙적인 행동을 통해서 습관을 세우지만 일단 습관이 되고 나면 그 습관이 사람을 끌고 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끌고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 무릎을 꿇고 주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의 세계로 우리를 끌고 가는 무언가에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데 얼마나 커다란 파격적인 도움이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축구선수들이 축구를 할 때 아니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사이클 선수들이 사이클링을 할 때 맛 바람을 맞으면서 달리는 것과 그 다음에 뒤에서 미는 바람을 등지면서 달리는 것에 의해서 세계의 기록이 몇십 초 씩 오고간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기도가 습관화되지 않은 사람이 기도하며 경건하고 살려고 애를 쓰는 이것과 그런 습관이 하나도 형성되지 않은 사람이 경건하게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애를 쓰는 그것과 이미 그 습관이 오래도록 몸에 배어서 자기로 하여금 그렇게 기도로 끌고 나아가는 습관이 몸에 배인 사람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차이인가 하면 좋은 축구화를 신고 펄펄 나르면서 뛰는 축구 선수와 한 선수는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뛰는 선수들이 두 팀을 나누어서 경기를 하는 것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습관화되지 않은 사람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결단을 내릴 정도의 사람이면 규칙적으로 기도를 습관화하기까지 행동합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습관화된 사람은 그 습관에 순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21살에 회심하고 제가 잘하나 못하나 새벽기도 생활을 한지가 2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어디에 가 있든지 새벽기도 시간이 되면 눈이 떠집니다. 그러나 목사이지만 여러분들 앞에 솔직히 고백하면 여전히 몸이 너무 피곤할 때에는 새벽의 시간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누워 자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20년 동안 새벽기도 하면서 몸에 배었지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고 기도하게 하신 것은 습관을 통해서 배이게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어떻게? 매일매일 기도의 통로를 가로막는 자기의 죄악과 부패한 욕심들을 자기 깨어짐 의 은혜와 참회를 통해서 씻어내고 날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가 내 속에서 다시 부어지는 매일 매일의 채워주심이 있을 때 그때 그 새벽의 시간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 되고 그 새벽의 시간이 주님의 은혜를 바랄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까 불쌍한 사람, 모두 많이 하고 모두 많이 했는데 자기 신앙생활은 서금서금 하다고 투덜대는 그런 사람처럼,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게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를 체험했는가 그것에 대해서 ‘네’ 라고 대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좀 어려운 말로 이제껏 설교 속에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십자가에 대한 무슨 체험? 그렇습니다. 현재적인 체험 이 사람에게는 과거적인 체험은 있습니다. 완료형의 체험은 있는데 그것이 계속되는 현재적인 체험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의 체험이 그렇게 빛나는 이유는 그 체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빛났다기보다는 그 이후에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 과거적인 이례적인 체험으로서는 충분히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현재적인 매일 매일의 죽고 다시 사는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을 통해서 주님을 더 많이 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빛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현재적인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도 생활의 습관이 없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헐적으로 체험하는 것만을 가지고는 성화의 삶이 효과적으로 완수될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날마다 비록 지축을 뒤흔드는 기적과 같은 위대한 역사는 못보고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한번 기도로 완성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하지만 그렇지만 오늘 날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기도 습관 속에서 참회의 눈물로 씻어내고 그리고 다시 자신 속에서 정말 그렇게 눈물로 그 더러운 마음을 씻어내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주 분명하게 보입니다. 멀었던 눈이 뜨여집니다. 그래서 뭔가 하면 내가 사람을 보니 정말 주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수 있는 수많은 길이 내 앞에 있어도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 의지하면서 사는 것 말고는 내 인생에 어떤 소망도 없다라고 하는 그 몸부림치고 싶은 사모함이 자신 속에 다시 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정말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많이 의지하고 믿을수록 우리는 크게 낭패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인간이 그래도 그런 연약함을 딛고 주님의 마음에 무엇인가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높은 성과 같이 자기의 세계를 쌓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그렇게 인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깨트려져서 주님의 손에 붙잡히고 넘어지고 깨어지면서도 다시 예수님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그런 삶이 아니면 우리 같은 이런 부패한 인간들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을 합니다. 목사님,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이 정말 좋을까요? 기도가 습관이 되면 기도생활 자체가 습관화되기 쉽고 기도생활이 습관화된 사람의 전형이 바로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러 올라가던 바리새인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요? 오히려 우발적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던 세리가 주님 만나지 않았습니까? 뭐 너무 완벽에 가까운 논리로 공격을 해오니까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다 쓸데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설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그것을 쉬운 말로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그러고 돌팔이가 사람을 죽인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보십시오. 기도가 습관으로 몸에 배는 것과 기도생활이 습관화되는 것은 이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이 습관으로 세워지는 것이 기도생활의 습관화를 막을 수 없고 다시 잘 들으십시오. 습관으로 세워지는 것이 그 기도생활의 습관화를 막을 수가 없고 기도생활이 계속되는 습관화가 결코 숙명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에 속한 문제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저는 어렸을 때 처음 은혜를 받고 새벽기도 나가는 자신이 너무 대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나가면서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갈 때 내가 이 새벽에 주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일로는 사실 예비군 훈련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새벽에 일어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내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감히 내가 이 새벽에 잠꾸러기가, 이 새벽에 주님을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분이 좋고 그냥 내가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신앙이 어렸을 때니까.
무슨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기도생활이 습관으로 굳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도하러 그 새벽이나 혹은 깊은 밤에 교회에 나가는 것 자체가 깊은 결단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새벽에 나가면 기도가 이상하게 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새벽에 일어나니까. 늘 일어나는 경우에는 새벽에 일어났으니까 그렇게 생각되는데 새벽에 그 졸음을 억제하면서 자명종을 두 개나 켜놓고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거기를 그렇게 자부심을 느끼면서 나가니까 교회에 가면 본전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내일 모래는 내가 올지 안 올지도 잘 모르는데 오늘은 본전 생각이 나서라도 오늘 기도 못하고 가면 내가 얼마나 억울하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뭔가 습관으로 굳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죽하면 우리 교회에서도 한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난 그 베드로를 설교하면서 여러분들 주님을 만나려면 그렇게 갈릴리 바닷가로 가야지 된다고, 이게 문학을 아는 사람들은 다 그 소리가 무슨 말인지 아는데 설교가 끝나고 집에 오려고 하는데 어느 자매가 오더니 물어보는 것입니다. 강사님, 갈릴리 바닷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 자매도 이제 이스라엘 성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어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지 갈릴리 바다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시간이 많이 지났고 피곤한데 물어봐서 자매, 새벽 기도에 다녀? 내일 마음의 각오 단단히 하고 일찍 일어나서 목욕하고 머리감고 새벽기도에 나와. 거기가 갈릴리야. 그러니까 그 자매가 알았다는 듯이 아! 그거였군요. 문학적인 사고력이 모자라면 신앙적인 탐구력이라도 있어야지 그렇게 물어봐서 답을 찾는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마음먹고 주님 앞에 딱 세우는 것입니다. 그게 갈릴리입니다. 주님 만나기 위해서 비행기 타고 이스라엘까지 날라 갈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서든지 주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기도의 습관과 습관화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습관화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신 무엇인가 하면 습관에 들지 않은 것은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가 너무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것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지구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헐적인 실천은 신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습관은 반드시 습관화를 가져오는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면 압니다. 또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니까 그렇지요.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셨던 분이셨습니다. 연약함에 쌓여 있는 그 분이셨지만 예수님이 밤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셨다고, 예수님 밤 기도가 형식화되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습관에 든 예수님의 새벽기도도 그러면 내용이 없는 것이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결국 정답은 기도의 습관을 세우는 것은 그런 의미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세워진 기도의 습관은 항상 습관화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더 정직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를 세우고 아까 저처럼 새벽기도를 오래 다니면서도 새벽기도에 나간다고 하는 것 때문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요한 마음을 갖고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경건한 삶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이 속에서 내가 주님을 만나고 내 자신이 영적으로 새로워진 은혜를 받지 못하면 고도의 기만하는 종교적인 껍질이 되어서 자기도 원하지 않지만 위선자가 될 수 있다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별도의 싸움입니다.
여러분, 삶의 환경이나 상황 모든 것들이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응답이나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조차도 우리에게 있어서 시험에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깨어 있는 길이고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어려울 때만이 아니라 24시간 간절히 깨어 있는 기도의 영혼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집을 지키는 경비병들, 국경을 지키는 파수대의 병사들이 전쟁에 임박한 징후만 있을 때에 망루에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온 병사들이 운동장에서 축구하고 노는 동안에도, 심지어는 적국과 우군 사이에 사람들이 오가고 평화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군인들은 실탄을 장전하고 그리고 높은 망루에서 지금이라도 자신의 국토를 침범할 적들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다라고 하는 개연성을 가지고 국경을 파수하고 정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이 생애를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고단한 생애를 사셨습니까? 3년밖에 산 생애였지만 30이 넘으신 그분을 사람들은 50쯤 되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고난과 그리고 가난, 그리고 시련과 고통을 많이 겪으면서 시달리신 생애를 사신 분입니다. 그렇게 고난과 핍박에 에워 쌓이시고 결핍과 시련 한가운데 서셔서 자신을 불태우면서 사신 그분의 에너지는 사실 낮 시간에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밤 시간에 기도의 습관으로 자신을 굳게 세우시고 그리고 거기에서 하늘의 위로와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인간의 정을 끊고 자기를 구속자로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를 위해서 살 각오와 결심, 삶의 동기들을 새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환경과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만큼 열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동안 안일한 삶과 나태에 길들여져 있고 그래서 우리는 쉽게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이라도 우리 자신과 싸워서 그래서 기도의 삶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담대하게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성공이 아무리 그 성공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생활을 하려고 해도 너무 성공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도할 수 없다면 그 성공을 버리면 하나님이 더 큰 성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사업이 그 사업을 하면서 는, 그 직장을 다니면서 는 도저히 기도할 수 없다. 기도를 하는 것과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누리면서 사는 것과 이 직업이 도저히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높은 지위라도 여러분들은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더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상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연약함이나 자신의 온 힘을 쏟지 않는 헌신의 부족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는 그런 요소들을 정직하게 찾아내서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것은 모두 누리고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고 욕심이 이끄는 대로 모두 자기를 충족시키면서 산 인생의 마지막은 짐승과 같은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분의 마음의 감동을 주고 아무 말이 없이 이 세상에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날 수 있는 진실한 성도는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입니다. 나태와 안일 속에서 성도들이 즐거움에 탐닉할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부족과 연약을 끌어안고 신음하며 모두들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때 절제하고 분투하면서 자기의 안일과 나태를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훼방될까봐 두려워하며 아버지 앞에서 자기를 다시 세우는 그런 진실한 몸부림이 없이는 결코 우리들이 성도다운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좋은 길이 있었더라면 예수님이 왜 습관을 좇아서 감람산으로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아가셨으며 오늘도 십자가를 앞두고 먹고 마시며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시지 왜 피와 땀을 부으시면서 아버지 앞에 처절하도록 매어 달리셨을까요?
그 분에게 있는 싸움이 우리들에게도 있으니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이 기도의 습관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이든지, 아니면 오전 시간에 자녀들을 모두 학교 보내고 어린아이가 잠들기 좋아하는 그 시간이든지, 아니면 가족들을 모두 물린 밤 시간이든지 어떻게 하든지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해서 여러분도 습관을 좇아 교회에 가더라, 습관을 좇아 다락으로 올라가더라, 습관을 좇아 예배당을 찾았더라 무엇인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여러분들의 삶을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기도의 습관 위에 굳게 서서 그래서 자기를 쏟아 붓는 기도의 헌신 속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정말 소중한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피땀 흘려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신 것은 습관을 따라서 가신 것이었지만 그 동산에서 이루어진 기도는 결코 습관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위대한 힘을 공급받으셨고 실질적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이미 십자가를 지고 이길 강력한 힘을 이 기도의 싸움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그래서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루어진 기도를 우리들이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셨기에 그렇게 생애 적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또 이렇게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중요한 기도의 밤을 어떻게 치르셨기에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실 수 있었을까? 이 부분을 우리들이 한번 살펴봄으로서 우리의 기도생활의 실제적인 도전을 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그랬습니다. 정확하지요? 그런데 이 부분이 한글 성경에서는 이렇게 두리 뭉실하게 되어 있어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좀더 그림처럼 생생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뒷부분,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었더라” 한 부분은 번역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만 앞부분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이렇게 되어 있는 부분은 좀 다릅니다.
먼저 우리말 번역대로 본다면 예수님이 힘쓰고 애써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자기 자신을 쏟으시는 장면이 힘쓰는 것, 애쓰는 것,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것 이렇게 삼중 적으로 기도에 자기를 쏟아 부으시는 모습만 기록이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안되어 있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자면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싸움 속에 계셨을 때에’ 혹은 기노마이니까 “그 분이 싸움 속에 들어가게 되셨을 때에 그때에 그분은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고 땀은 땅에 떨어지는 피같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뒷부분은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더니” 되어 있어서 말하자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처럼 된 것이 그저 자기를 쏟아 부은 기도 때문에만 비롯된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서는 ‘그 분이 싸움 가운데 들어가게 되셨을 때에’ 이것은 상황이고 ‘그때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씨름 가운데”라고 되어 있는 이 씨름이 희랍어로 ‘아곤’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게 씨름, 싸움, 격투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어의 에그니가 됩니다. 고뇌, 번민 이런 것을 가리키는 고뇌를 가리키는 ‘에그니’ 라는 단어가 여기서 왔습니다. 그래서 아곤 속으로 들어가게 되셨을 때에 예수님은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라고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이게 ‘에크테이노스’ 라는 단어에 비교급 중성 명사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에크테이노 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쭉 뻗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가 이렇게 가로막아도 그것을 헤치면서 쭉 뻗어 가는 것, 에크는 밖으로, 테이노는 내밀다 이렇게 뭔가 거침없이 쭉 내밀어서 방해하는 것들이 있으면 부셔버리고 쭉 뻗어버리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간절히’ 라는 수식어의 원래 뜻입니다. 그럼 이제 대충 정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우선 우리가 여기서 첫 번째 살펴볼 것은 기도의 씨름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과정에서 씨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떠날 때 처음 정지상태가 있고, 시동을 거는 상태가 있고, 그 다음에 기아를 넣고 부응하면서 부하를 받으면서 가는 때가 있고, 일단 이단 삼단 사단이 다 올라가서 그 다음에 달리는 때가 있듯이 기도에도 대게 이렇게 사람마다 약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세 개의 단계를 거쳐서 이렇게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째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단계는 자기가 그렇게 기도하려고 하는데 씨름을 경험하게 되는 단계, 그래서 그 씨름에서 이기고 나면 그 다음에 방해가 없이 하나님과 깊이 교통할 수 있는 기도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어떤 때는 이러다가 그 다음에 세월이 많이 흐르면 두 번째 단계로 가고 세월이 많이 흐르면 세 번째 단계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은혜의 상태에 따라서 얼마나 많이 씨름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것들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일단 모두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기도를 방해하는 씨름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것을 이기고 나서 그 다음에 기도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거의 공식입니다. 그런 때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흔히 생각할 때에는 그런 씨름들은 모두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물론 죄도 그런 영향을 많이 줍니다만 여기서 보면 예수님도 그런 씨름을 경험하셨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예수님도 그런 씨름 속에 들어가게 되셨을 때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고 순결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기도에 있어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즉 기도에서 수시로 기도의 은혜가 사라지고 죄와 내적인 부패성으로 인해서 영적인 민감함이 소멸되는 우리와는 달리 항상 예수님이 순결한 마음으로 그리고 유혹은 받으셨지만 그 유혹에 지거나 혹은 시험은 당하셨지만 죄는 지신 적이 없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쉽게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실 수 있는 상황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셨던 기도에 있어서 그런 유리한 점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그런 면을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지신 영적인 짐이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컸었다고 하는 점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쉽게 기도하셨다고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며,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비록 우리처럼 죄는 없으신 분이었지만 우리 인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지신 연약함에 둘러 쌓인 참사람이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겪는 인간으로서 기도하면서 겪는 많은 어려움을 이분이 역시 공유하셨다 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놓고 나면 예수님이 드리는 이 기도의 생활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많은 무거운 짐을 지고 그렇게 자기를 이기며 기도 속으로 가셨던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예수님이 씨름 속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라고 되어 있으니까 이때는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지 모르지만 어째든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너희들은 여기서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리고 예수님은 돌맹이 던지면 닿을만한 거리에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시다가 경험한 사실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면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기도하시다가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예수님은 강한 씨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셨습니다.
이 씨름은 결국 무엇일까요? ‘씨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한사람이 의도하는 바와 다른 사람이 의도하는 바가 서로 상충하면서 씨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기 좋은 환경 속에서 죄짓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 환경 속에 놓여있다면 씨름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이렇게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자면 새벽기도를 안 나오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명종 끄고 그냥 퍼 자는 그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이 게으르고 새벽에 그렇게 특별히 연세가 많이 드셔서 무릎에 바람이 나올 정도가 아닌 한 새벽에 그저 잠자는 것이 새벽에 눈을 비비고 일찍 일어나서 뭘 꼼지락거리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편하기 때문에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씨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있는데 환경이 너무 거룩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를 짓기 위해서 투쟁을 해야 합니다. 결심을 하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법이 잘되어 있고 통제가 심한 나라일수록 어떻습니까? 범죄가 아주 교묘하고 그리고 아주 지능적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엔논 사태를 비롯한 이런 경제범죄 같은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시스템이 잘되어 있는 사회이니까 아주 교묘하게 범죄를 합니다. 그게 거룩은 아니지만 그렇습니다. 또 반대로 자기는 경건하게 살고 싶은데 환경이 너무 죄악 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때는 또 씨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은 자신까지 포함해서 모두 죄로 쓸고 가고 싶어하고 자기는 그 환경 속에서 거스르고 살고 싶으니까 이게 사실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은 영원히 신자의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영원히 홈 경기가 아니라 아웃 경기입니다. 다른 나라 땅에 가서 에워 쌓인 수많은 인파가 응원을 하는데 자기를 응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도전하는 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들을 응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거기서 씨름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기도 속에서 씨름으로 들어가는 단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기도 속에서 예수님이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냉정하게 생각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들이 흔히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이 밤새도록 십자가를 지지 말게 애원하다가 나중에 포기하고 그러면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내려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공상입니다.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오히려 자기의 십자가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은 세 번이나 기도하셨지만 그것은 오히려 소수의 시간이었고 여기에서 많은 신학 학자들은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의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그 대제사장의 기도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밤에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와 그리고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면 홀로 남겨두게 되는 이 세상의 자기의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로 그 밤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씨름을 경험하게 되셨습니다.
무엇인가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도에 나아가지 못하게 씨름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이 나아가고 싶은 기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언제나 한가지 소원은 이 세상의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하나님 아버지와 깊이 아름답게 교통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 더불어서 아름답게 교통하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이 십자가를 지고 구속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지만 그러나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 이런 것들이 결국은 예수님이 이 기도의 밤을 통해서 주님이 도달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간절한 소원들이 어디에 절절히 배어 있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그 기도 가운데서 배어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위해서 용서해달라는 그 기도와 그 다음에 내 영혼을 받아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이 속에 모두 배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고자 하는 그 기도의 교통을 가로막은 것이 어떤 것이었는가 우리들이 먼저 그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첫째로 그런 기도를 가로막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크게 두 번째로는 그런 기도를 가로막는 방해들을 어떻게 극복하셨는가, 그리고 세 번째로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과 의미가 무엇인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로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실 때에 어떤 것들 때문에 이렇게 씨름하셔야 되는가. 우선 우리들이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사단과의 집요한 씨름이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중요한 시기마다 나타나서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이런 시험은 이미 예수님이 공생애 들어서기 시작하실 때에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유혹하는 것으로 마귀는 자기의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을 듣는 그 순간에도 사단의 생각은 여지없이 제자들을 넘어트리고 그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사명의 길을 걸어가서 우리를 위한 구속의 길을 여시는 대신에 이 세상에서 존귀와 영광을 받도록 그렇게 유혹하고 도전했습니다. 물론 사단은 십자가를 지면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게 사실은 사단의 지혜의 한계였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만이 아는 비밀이었고 그리고 당신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백성들만이 아는 구속의 비밀이었습니다.
사단은 오히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사람들을 사용해서 죽이면 인간을 구원하고 자기의 왕국을 파괴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계획이 좌절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갸롯 유다를 택했고 그리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팔 생각을 넣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까지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이 밤에도 그 음모는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사단의 도구들이었습니다. 그런 계획을 사단이 모르고 있었지만 그러나 하여튼 사단이 몸서리쳐지도록 싫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쏟아 부어서 기도하시는 그 장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역시 그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주리시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에 집요하게 사단의 방해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엇인가 기도하고 계셨고 그 기도는 자기를 쏟아 붓는 열렬한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아름다운 기도의 교통을 갖고 나면 그 아버지께로부터 무엇인가 좋은 것을 공급받을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 있게 할 것이며 그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꾸미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서 현격한 방해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단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요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실 때에 집요하게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도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리치지 않고는 당신 생애 마지막 에 기도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승리할 것이라고 하는 확실한 보증을 예수님이 받고 싶어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단의 도전을 더불어서 씨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때는 영적인 도전들이 없습니다. 신앙생활 그 자체가 얼마나 영적인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대목이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그 현장에 가보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버리는 것이 영적인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주님을 찾고 거룩하고자 몸부림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거기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사단의 역사도 어느 정도까지 얼마나 강해지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주목을 받을만해도 그 사람은 상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안하고 탱탱히 놀고 그리고 와서 예배 시간에 시계나 들여다보고 끝나면, 예배 끝나고 나서 반주가 나오는 것은 피아노 성능 검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말씀에 받은 은혜를 가슴에 간직하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거 2분 나오는 것도 못 견디고 벌떡벌떡 일어나서 기도하는 사람들 무릎을 치면서 나와서 그렇게 1분 빨리 가서 뭐 하려고 합니까? 그런 사람들은 사단이 눈길도 안줍니다. 뭐 어차피 자기 밥인데, 자기 시키는 대로 잘 사는데 왜 괜히 눈길을 줍니까! 사단도 지금 얼마나 바쁜데,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그런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타파하고 내가 진짜 똑바로 살아봐야 되겠다. 그리고 정말 내가 제대로 믿어야 되겠다. 그 마음을 가지려면 즉각적으로 이런 씨름이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씨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과 더불어서 싸우셔야 했습니다. 사단과의 싸움이 있습니까?
두 번째는 제자들의 모습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씨름해야 할만큼 그런 방해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장면은 마태복음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 이야기는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잤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고 나면 여기에 남아 있는 많은 양떼들을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돌보셨던 것처럼 그렇게 돌봐야 될텐데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12명중에서 3명은 특별히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더 가까이 데리고 오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게 하셨는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잠들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물론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를 제자들과 나누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면서 배신감을 느끼거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염려하셨습니다. 시험에 곧 들텐데, 제자들은 못 보지만 예수님은 다가오는 시험을 예수님은 감지하고 계셨습니다. 시험에 들텐데, 깨어 기도해야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간절한 바램을 뿌리치고 당신은 피 방울이 떨어지기까지 기도하시는 그 순간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예수님에게 적지 않은 씨름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제자들과 나누어지지 않았지만 만약에 그 밤에 제자들이 열렬하고 뜨겁게 예수님처럼 그렇게 땀이 피 방울이 되도록 쏟으며 예수님과 기도에 동참했더라면 아마 예수님은 이 씨름이 훨씬 더 가벼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무거운 짐도 예수님께 안겨주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예수님 당신이 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예수님이 비겁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이셨지만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 죽음의 성질 자체가 그냥 소멸되고 죽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었습니까? 한번도 끊어본 적이 없는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가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림을 받고 영적으로 형벌을 받는 과정이었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전혀 경험해보신 적이 없는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분이 성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런 저주의 형벌을 받고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버림받은 채 매달려야 하는 그런 위기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부담을 느끼신 것은 오히려 예수님이 참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담은 두 가지로 함께 작용을 했는데 죽음을 모르시는 그분이 죽으셔야 된다는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운 경험과 또 하나는 그 죽음의 성질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퍼부어지는 진노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짊어진 죄에 대한 진노를 의미한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무거움은 굉장했습니다. 이런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며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방해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때에는 마음만 가지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막상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아뢰려고 하면 우리에게 밀려오는 그런 기도의 씨름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단의 강한 공격은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양심의 가책, 율법의 송사, 근심과 많은 염려와 걱정들, 그리고 고난과 시련에서 오는 견디기 힘든 위축감, 그리고 오래된 영적 침체에서 오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을지 모른다는 정죄감 이런 것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에워 쌓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것을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씨름 속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크게 두 번째로 그럼 예수님이 그 씨름을 어떻게 이기셨을까? 그것에 대한 대답이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기에 쓰여진 단어는 쭉 뻗어서 방해물을 물리치고 개의치 않고 쭉 뻗어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알기를 ‘화살’이라고 하는 것은 손으로 활을 잡고 시위를 당겨서 그 시위에 화살을 당겨서 날려보내는 것, 그것이 활이라고 생각하는데 옛날에는 손으로 쏘는 활 말고 발로 쏘는 화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손으로 쏘는 화살보다 훨씬 활이 크고 그 다음에 시위의 줄이 굵습니다. 그리고 화살도 손으로 쏘는 화살보다 훨씬 큽니다. 그리고 대게 거기다가 불을 매달아서 원거리에서 쏴서 건물에 혹은 성에 불을 지르거나 워낙 멀리 떨어진 적들을 공격하는 수단에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누워서 두 다리를 높이 하늘로 올리고 거기에 활을 걸고 그 다음에 상체를 약간 일으킨 다음에 그 굵은 화살을 먹인 활시위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잡아당겨서 그래서 공중으로 높이 발을 치켜들고 상체를 땅에 떨어트리면서 시위를 힘껏 잡아당긴 다음에 손을 탁! 놓으면 벌린 그 두발 사이로 화살이 날아갑니다. 보통 손으로 쏘는 화살보다도 훨씬 먼 거리를 날아갑니다. 그리고 손으로 쏘는 화살은 사람이 맞으면 꽂히지만 그런 화살을 제대로 맞으면 화살이 아예 그 사람의 몸을 뚫어버립니다.
고대에 교부들은 기도를 하늘을 향해 쏘는 활에 비유를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흔히 생각하기에 하늘이 세 하늘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 두 번째 하늘은 공중 권세를 잡은 마귀가 있는 하늘, 세 번째 하늘은 천사와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 그것에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삼층천’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란 맥없이 기도하면 일층에 올라가다가 도로 떨어져버리고 조금 열심히 기도하면 이층까지 올라갔는데 마귀가 내리쳐서 뚫어져서 도로 떨어지고 정말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그 기도의 화살이 아주 빠르고 강해서 그래서 일층과 이층을 지나 삼층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지 만 비로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께 이르는 기도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흔히 노래하기를 ‘쏘자 쏘자 오늘도 기도의 화살을 쏘자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첫째 하늘을 뚫고 둘째 하늘을 꿰뚫어 세 번째 주님이 있는 보좌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기도의 화살을 쏘자’ 그랬습니다. 그림 같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늘이 있고 그 다음에 그 밑에서 손으로 당기는 활로는 만족이 안되어서 발 사이에 활을 걸고 상체를 젖히며 땅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향해서 큰 화살을 쏘아 올리는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활시위가 거의 사십도 삼십도가 되도록 확 휘어지면서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활 자루가 꺾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두 손을 떠난 활이 선명하게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릅니다. 첫 번째 하늘을 빠르게 지나고 두 번째 하늘을 꿰뚫고 그리고 주님이 계신 세 번째 하늘에 이르는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흔히 이런 기도의 능력의 비결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기도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탁월한 은사이기 때문에 이런 강력한 기도는 선택 된 소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기도의 축복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데 그런 생각은 전혀 성경에 의해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생각이 아닙니다. 기도의 강한 능력의 비결은 진실과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 다시 말해서 진실하다는 말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에 합당한 기도라고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실하고 정직한 기도에 제목과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에 쏟아 붓는 그 애절함이 그 기도의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활이 있고 화살이 있습니다. 화살이 날카롭고 뾰족하면 잘 꽂힐 것입니다. 그리고 좀 뭉툭하면 덜 꽂힐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에 기도에 있어서 무엇을 기도해야 될 것인가, 성경적으로 ‘이런 기도가 좋은 기도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지식이 만약에 잘 벼려진 기도의 화살촉이라고 한다면 간절함은 그 화살을 시위에 먹여서 잡아당기는 힘에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살촉이 예리하게 벼려졌다고 하더라도 퉁! 하고 가야금줄이 퉁기는 정도를 가지고 활을 쏜다면 그 번뜩이는 화살촉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과녁을 꿰뚫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뭉툭하지만 그러나 그 시위의 힘이 워낙 강하면 그러면 만족스럽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과녁을 찢으면서 뚫을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도끼로 물건을 자르는데 날도 예리하게 벼려져 있고 그 도끼도 묵직하면 정확하게 줄을 그어놓은 부분을 맞추어서 나무를 부러트리거나 대문을 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면도칼로는 문을 부술 수 없지만 날이 덜 선 도끼로는 부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아는 정확한 지식이 꼭 필요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간절함이 결핍되어 있으면 그것은 과녁까지 날아가지 못하는 예리한 화살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간절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흔드는 기도의 능력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오늘 생생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씨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셨습니다. 그 씨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셨을 때 그 씨름에서 굴복하면 그 기도는 실패한 기도입니다. 그 씨름에서 이기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더욱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교급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과 비교한 것일까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도 예수님이 하나님과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이때는 특별한 씨름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기도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비교급이고 또 이렇게 씨름이 느껴지지 않을 때 기도했던 것에 비해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을 것이라는 점에서 또 비교급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 때에 씨름을 의식하게 되자 그 씨름을 퇴치하고 그 씨름 속에 이기는 비결이 그 씨름 속에서 굴복하는 대신에 더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이었고 그것이 이 밤에 예수님의 기도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 생활 자체가 성화의 한 작용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기도의 깊은 경지로 들어가게 되면 자기가 기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자기는 다만 하나님이 껍질로 사용하시고 주님이 자기 몸 속에 들어오셔서 당신이 하고 싶은 기도를 다하고 내 몸에서 빠져나가시는 것 같은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깊은 경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사실 처음부터 그런 기도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기도에 시작이 있고 시작 속에 씨름이 있고 씨름 속에서 그것을 이기고 승리하고 난 후에 아무 것에 의해서도 거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하나님과 완벽한 교제 속에서 기도로 교통하는 그런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반드시 씨름이 있기 마련이고 그 씨름을 극복하지 않고는 그런 기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씨름을 극복하는 비결은 방해보다 더 강한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이야기하는 간절한 기도, 어떻게 하면 기도를 방해하는 그런 씨름에 에워싸인 그 상황에서 간절한 기도의 영을, 기도의 은혜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흐트러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모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서 탁! 엎드렸을 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모두 사라지고 오직 그 하나님 앞에 기도가 간절하게 쏟아져 나오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런 기도의 상태를 느끼는 사람들은 없는 것은 아닌데 굉장히 소수입니다. 아주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끊임없이 마음에 오가는 전혀 쓸데없는 생각들, 그것이 어떤 때는 아주 죄악 된 생각일 수도 있고 혹은 죄와는 상관이 없지만 전혀 쓸데없는 공상과 같은 생각들이 마음에서 계속 떠오릅니다. 마음에 떠오른 생각들은 생각이 떠오른 것은 마음이지만 떠오른 생각은 다시 마음과 별개가 되어서 마음을 향해서 공격을 하면서 그 생각이 마음을 흩으러 놓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간절해지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입니다. 햇볕이 비치면 그 햇볕을 받아서 햇볕 때문에 화재가 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까지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적도 밑에 가도 햇볕 때문에 화재가 나는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볼록렌즈 하나만 있으면 온 산을 태울 수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빛을 모으는 것입니다 가만 놔두면 이만한 공간에 펼쳐질 빛을 렌즈를 하나 가지고 조작해서 이만큼 퍼질 빛을 요만큼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종이를 불태우기 위해서는 접시 만한 볼록렌즈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만한 것, 안경돋보기 만한 것 하나만 있어도 됩니다. 요만큼 흩어질 빛을 요만큼만 모아도 종이를 태우고 그 종이에 붙은 불들이 온 집과 산을 태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집중의 힘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기도를 실패하게 하기 위해서 마음을 흩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새벽기도 가지 않고 잠재우는 것이 소원인데 그런데 하여튼 뿌리치고 일어나면 봐줍니다. 그러니까 양보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고 그 다음에는 항상 사단도 최선이 안되면 차선을 택합니다. 새벽기도의 습관이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못 말립니다. 그러면 이제 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새벽기도에 보내놓고 교회에 와서 기도하려고 하면 그의 마음을 흩어놓아서 기도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뭐 교회에 와서 어차피 기도하지 못하고 가는데 와서 한번씩 교회 만지고 지나가는데 그게 무슨 사단의 나라에 방해될 게 있겠습니까? 가고 싶으면 가라, 대신 기도만 안 하면 된다.
저는 실제로 예전에 직장에 다닐 때 석 달 동안 새벽기도에 나가서 한번도 기도해보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영적인 그런 침체 속에서 헤맸습니다. 시간이 되면 깹니다. 새벽기도에 나갑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기도가 안됩니다. 철벽을 내려놓은 것처럼, 그렇게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잘 모으는 사람이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모은 것은 한편으로는 집중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흐트러지려고 하는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기도도 그 마음 지킴의 교리와 아주 직접적인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도를 끝내놓고 다음 기도할 때까지 사는 그 삶이 기도를 위한 준비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해 벌래 하게 다 개방해놓고 아무렇게나 막 온통 짓밟히면서 살다가 기도 시간에 와서 그 마음을 갑자기 추스르려고 하니까 이게 추슬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금방 추슬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옵니다. 빨래 하나 널었을 때는 비가 쏟아지면 막 뛰어나가서 하나만 걷어서 오면 되는데 이불, 보자기, 홑이불, 빨래, 내복, 오버까지 다 빨아서 담장 전체에 널어 났는데 비가 쏟아지면 금방 걷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주부는 빗소리 듣고 빨래 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서 먼저 하늘을 봅니다. 비가 안 오지만 날이 흐리면 빨래를 걷기 시작합니다. 안 올지도 모르지만 걷습니다. 왜 빗소리 듣고 나가면 한 개면 뛰어가서 걷어오면 되는데 걷을 수가 없습니다. 비를 쫄딱 맞습니다. 빨래 다시 해야되니까 걷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아직 비는 안 왔습니다. 아직 기도는 시작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하늘이 벌써 컴컴해져오면 빨래 걷듯이 마음을 거두어야 합니다. 막 다 내버려두고 오밤중 2시까지 비디오보고 텔레비전보고 그렇게 하다가 습관을 따라서 일어나면서 역시 나는 이 습관이 붙었구나, 습관이 붙으면 뭐합니까? 그리고 와서 남들 열심히 기도하는데 저 구석에서 코고는 소리 내면서 자고, 코를 골아도 나오십시오. 나오기는 나오는데 코만 골다가 가면 안됩니다. 하도 안타까워서 가서 내가 이렇게 툭! 하고 칩니다. 때리지는 않고 이렇게, 얼마나 고단하면 그럴까 하고 칩니다. 그 시간에 집에서 퍼 자는 사람들은 웃을 자격이 없습니다. 또 얼마나 자는 모습이 경건합니까? 교회에 와서 자니, 흩트려지려는 마음을 잘 모아야 합니다.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몇 번 뒤집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뒤집어지듯이 회심하는 것은 이제 다시 새롭게 살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는 것이지 그것으로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마음을 지키면서 다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오후에도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전혀 믿음이 없는데, 오후에도 시험과 유혹 이김의 교리를 통해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의 질서가 새로 잡히면서 아! 이제 기도해야지 되겠다. 진짜 그렇구나. 마음을 갖고 갑니다. 그것을 오늘밤에 잘 간직해보십시오. 간직하고 그리고 한번 자보십시오.
내가 평소에도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성격이 아닙니다만 제가 혼자 있으면서 10일 동안 한번도 텔레비전을 안 봤습니다. 그리고 뉴스도 안 들었습니다. 이제 여기에 오면서 보니까 뭐 이런 일도 일어나고 저런 일도 일어나고 별일이 다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게 무엇인가 하면 굉장히 경건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 중에 루이스 벨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려면 세상에 대해서 꼭 필요한 이상으로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아는 것이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마음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마음을 추스르고 간수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마음을 개방하고 살아야지 그것을 해 벌래 하게 다 내어서 다 짓밟히면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언제 필요한가 하면 기도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삶 자체가 기도하기 위한 준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오고 기도하는 시간에도 가만히 있으면 오고가는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을 흩으러 놓습니다. 그것들과 싸우려는 의지가 없이는 새벽기도에 나와서 공상만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간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모으는 일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기도의 간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지침가운데 두 번째는 마음을 모으는 것과도 통하는데 항상 형식적인 기도를 경계하고 기도하는 한순간 한순간이 진실해지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요즘은 거의 없습니다만 대부분 우리 교회 교인들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사리분별 하는 사람들은 안 그렇게 하는데 새벽에 와서 기도를 하는데- 누구든지 와서 기도하는 것은 참 좋은데 -의자를 막 흔듭니다. 의자를 덜컹덜컹 흔들면서 기도하는데 왜 그럴까? 흔들면 제가 조금은 참지만 과하다 생각되면 땡! 하고 칩니다. 그래서 못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와서 기도하는데 자기 혼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 있을 때에는 소리를 지르고 기도해도 괜찮은데 자기가 그렇게 기도하면 다 자기처럼 기도하면 괜찮은데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도 있는데 기도소리가 자꾸 생각이 되어서 이 사람 속에 불러일으키니까 마음을 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워낙 탁월하면 그 기도를 들으면서 아멘! 하면 되는데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면 그 사람이 대표기도 한 것인데, 아니 그렇게 라도 하면 되는데 그런데 내용도 별로 신통치 않고 횡설수설하며 오락가락 하는 그런 기도, 그 다음에 와서 한 두 시간 내내 방언으로만 기도하다가 가는 사람, 자기도 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그것보다도 그냥 뜨거워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은혜로운 정서가 우리 안에 불러일으켜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함이 필요합니다. 수백 명이 모여서 막 왁자지껄하게 기도하고 막 엄청난 함성 소리가 되어서 건물을 뒤흔드는 것 같은 그런 기도만 생각하지 말고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자신의 중심에 있는 것을 기도하고 그래서 비록 그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두 손을 높이 들어서 부르짖는 함성소리가 교회 천장을 뒤흔들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린아이처럼 말에 말을 잇지 못하면서 자신 속에 있는 진심을 토해놓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그 모습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있는 기도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북소리와 장구소리 그냥 부르짖는 엄청난 함성소리가 있는 곳에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진실하게 기도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모아집니다. 왜냐하면 진실 그 자체가 뭘 요구하는가 하면 자기도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습관적인 표현들을 많이 이야기하는 그런 것 가지고는 진실해질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인데 진실한 기도를 하려고 하다보면 결국 마음이 모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들이 진실해지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여! 삼창 안 해도 다 큰소리로 부르짖자고 제안하지 않아도 그런 진실하게 기도하려고 할 때에 이 기도의 간절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름다운 표현이나 시를 쓰는 것 같은 섬세한 기도의 묘사가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에 말을 잇지 못해도 영혼 속에서 토해져 나오는 신음과 같은 진심,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려고 할 때 이런 기도의 간절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실제적인 기도의 지침은 기도에 있어서 이런 간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받으시기 직전에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이 기도를 묵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유지하도록 돕는 훌륭한 방편이 됩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는데 여기는 분명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만 되었는데 그런데 이 밤에 예수님께서는 통곡하시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히브리서에 나와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그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었느니라” 예수님의 전 생애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올린 기도였지만 특별히 히브리서 5장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장면이 바로 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의 사투의 장면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꽉 채우면 주님을 위해서 사는 일들이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꽉 채우지 아니할라치면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리고 어렵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예수님이 그 밤에 자기에게 다가오는 십자가, 실망 속에서 잠들어버린 제자들을 두고도 홀로 감람산 깊은 밤에 기도로 매달리셨던 그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정말 지금도 핍박과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는 너무 좋은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어디에 가서도 자랑하며 말합니다. 전 세계에서 한국처럼 완벽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가 없습니다. 나는 미국보다도 우리 나라가 훨씬 신앙이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교회를 아무 곳에나 세울 수 있습니다. 외국은 어림없습니다. 자기 땅을 가지고 있어도 주민들이 공청회에서 찬성해주기 전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는 관청에 신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층에 오늘이라도 가서 강대상 놓고 십자가 올리면 교회입니다. 그런 이층 교회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기도를 한다고 뭐라고 합니까? 전도를 한다고 뭐라고 합니까? 정말 우리에게 핍박과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오늘 정직히 물어봅시다. 정말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정말 핍박다운 핍박이 있습니까? 고난다운 고난이 있습니까? 내가 신앙만 포기하면 당하지 않는 그런 핍박, 피 흘리는 그런 고난이 내게 있습니까? 정말 지금도 여러분이 순교의 위기를 느낍니까? 그러나 여러분, 항상 한번 주님을 위해서 죽기를 결심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그런 결심을 유지하고 일평생 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십자가가 있다면 이 기도의 십자가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기도의 십자가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이렇게 잡히시던 날 밤에 자기를 쏟아 부어 간절히 기도하셨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신 그분이 자기를 쏟아 부으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게 오늘날 우리들이 편하고 안락한 시대에 마지막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묵상하는 것이 이런 간절함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어떻든지 간에 그런 기도의 씨름을 이기기 위해서는 저항하는 세력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매달릴 때 씨름의 순간이 지나가고 그리고 기도의 아름다운 교통의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러면 예수님의 이런 기도의 모습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기도의 씨름까지는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우리의 기도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가까스로 시름의 단계까지는 갔지만 그 씨름 속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해서 포기하고 쓰러져서 기도하려고 할 때에 도전하는 세력들은 느꼈지만 그것들을 꺾고 마지막에 승리의 깃발을 꼽는 동안까지는 못하면서 사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씨름 속에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를 지고 승리할 수 있는 찬연한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서 그의 몸을 찢어 피 흘리는 그 보혈을 받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지만 기도의 피를 흘리기 전까지는 아들의 몸의 보혈도 아버지가 받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땀과 눈물과 피를 받으신 후에 보혈에서 흘린 그 보배 피를 받으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참된 신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단지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자로서 산다는 것은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의 피가 흐르고 예수의 눈물이 고여 있고 예수의 땀이 배어 있어서 주님이 엎드리셨던 곳에 자기도 엎드리고, 주님이 땀흘리셨던 곳에서 자기도 땀을 흘리고, 주님이 눈물을 쏟으셨던 자리에서 자기도 아파하며 눈물을 쏟고, 주님이 피 흘리셨던 곳에서 자기도 피 흘리기까지 사는 삶 그 사람이 예수의 사람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기도가 얼마나 진하고 간절했는지 예수님이 흘린 땀이 피같이 땅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워낙 힘든 기도였기 때문에 땀이 많이 흘린 것을 묘사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한 일주일 정도 금식하고 소변을 보면 피가 섞여 나옵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밤을 새우고 일주일이나 이주일 과로를 하고 나면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옵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오신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쉼도 없이 우리들이 흉내도 낼 수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쏟아 부으면서 사신 그분의 생애는 살을 깎으시고 뼈를 깎는 생애였습니다. 그렇게 쏟아 부으면서 예수님이 사셨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체는 많이 쇠잔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30이 갓 넘은 예수님을 50쯤 된 사람으로 보았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조차도 감지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영혼의 밤, 육체의 죽음, 두고 가야 하는 사랑하는 어린 양떼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짊어진 어린양이 되는 것, 한번도 사랑을 못 받아본 적이 없는 하나님께로부터 폭풍우처럼 쏟아 부어지는 진노를 감당하며 십자가에서 제물로 죽어야 하는 형벌이 다가오는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그 수많은 것들과 더불어 씨름하고 당신 홀로 이기셔야 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제자들도 없었고 그리고 아무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과 홀로 대면했습니다. 천사들이 나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당신의 힘을 다 소진하고 나니까 천사들이 와서 도운 것입니다. 못 먹고 지치신 그분이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되 자기의 땀 속에 피가 가득 배어서 그 땀은 땀이 아니라 피를 머금은 붉은 액체가 되어서 땅바닥에 흥건하게 고이기까지 흘러내렸습니다.
누구를 위함이었습니까? 그분이 왜 그렇게 기도해야 했습니까? 그분이 자기의 죄를 회개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분이 무슨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까? 오로지 쓰레기 같고 아무 유익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좋으신 아버지 앞에 진노를 당하고 죽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흘린 피였고 우리들을 위해서 간구 하시면서 쏟으신 땀이었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어린양 보혈의 피 어이해 흘렸는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쏟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그 피로 교회를 사셔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거기에 모으시고 모으신 그곳에 당신의 이름을 두신 것은 지금 우리들이 이 교회를 겟세마네 동산으로 삼아서 주님을 옳게 믿고 변화되니까 우리에게 주신 복도 많지만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기업이지만 그러나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그렇게 피땀을 쏟으며 기도했던 것처럼 너희 교회도 이번에는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한번 이렇게 간절히 고뇌하기까지 매달려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가 안되어서 통곡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도해야 할 일은 너무 많고 온갖 세상의 죄와 시험들을 이기고 싶은데 기도할 수 없어서 기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이렇게 땀흘리기까지 우리 주님 앞에 간절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구원의 감격이 아무리 크고 분명해도 천국에서 보면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주님께로부터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았으며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이 예수를 위해서 살아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온갖 시험과 유혹이 우리를 에워싸고 안팎에 고난과 고통들이 우리들을 공격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외톨박이가 된 것 같고 버려진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수없이 예수님을 에워싸며 떡과 물고기를 먹으면서 배부르고 그렇게 좋았던 백성들,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찬송하던 사람들은 어디에 갔습니까? 마지막 기도의 순간에 예수님 홀로 계셨습니다. 제자들도 없고 홀로 하나님 앞에서 끌어안고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서 승리하시자 십자가는 아주 쉽게 지시고 이기셨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여러분들이 아닙니까? 오늘도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이루어져야 할 일들, 목마르게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기도해줄 사람이 없는 그런 지치고 병든 영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정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자기와 싸우며 힘겹다고 느낄 때마다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싸우고 우리의 싸움은 힘들지만 아직까지 피 흘리기까지 싸운 것은 아니고 기도에 있어서 고난이 있지만 그러나 통곡과 눈물로 피를 쏟기까지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고난받은 것은 아니다 생각하고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을 추스르고 기도 속에서 여러분의 은혜의 세계를 새롭게 세우는 주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 십자가에서 용서를 간구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22:44)
오늘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에 못지 않게 특별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 자체가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당신의 생애 동안 강에서도 기도하시고 산에서도 기도하시고 감람산에서도 그리고 한적한 곳에서 혹은 빈들에서도 광야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그런 곳 중에 하나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장소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매달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역시 예수님의 생애 속에 나타나는 기도의 장면이 되겠기에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이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기도의 생애를 엿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특별히 이 본문을 보면서 두 가지로 도전을 받고자 하는데 첫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상황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을 통해서 우리들이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죽음은 이미 오래 전 구약 시대부터 예고되어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은 그 언약을 따라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건기도 속에서 자기의 피를 소진하시기까지 아버지 앞에 매달리셨다는 이야기는 지난주에 우리들이 들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원수들은 다가왔고 그리고 입맞추는 가룟 유다의 간교한 행위에 의해서 예수님은 병정들에게 체포되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 중에 최고 우두머리였던 가야바의 뜰로 끌려가셨고 거기서 전임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엉터리 같은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예수님의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라고 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종교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사람을 사형에 처할 그런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종교 재판에 언도한 내용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인 로마의 권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방을 책임지고 있는 총독인 빌라도에게로 예수님을 끌고 가서 이 사람을 우리가 사형시켜야지 되겠으니 허락을 해달라고 요구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빌라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보아도 로마의 국법을 어기고 별로 죄지을 일을 한 적이 없는 이 사람을 굳이 자기가 사형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마침 그 분이 갈릴리에서 자라신 분이라는 소식을 듣자 마침 휴가 차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총독인 헤롯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버렸습니다. 그쪽에 가서 물어 보라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고 헤롯에게 갔을 때 헤롯은 굉장히 반가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 이는 바다도 걸어다닌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무엇인가 한번 마술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부답 하시고 그래서 거기서 심한 매를 맞으신 후에 다시 빌라도에게로 보내집니다. 빌라도는 어떻게 하든지 아내의 권유도 있었기 때문에 이 무죄한 자를 정죄하는 일에 끼어 들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흔히 말하기를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데모하면서 우리에게는 가이사 이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이 자를 죽이지 아니하면 또 다른 왕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라고 하면서 정치적으로 간교하게 협박을 했을 때 이 빌라도는 거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형언도가 내려지자 로마 병정들은 이 사람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 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그런 멸시와 그리고 고문과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다 벗기고 벌거벗은 채 채찍에 맞으시고 그리고 홍포를 걸치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갈대를 예수님의 손에 들려주셔서 왕의 흉내를 내게 만들었으니 그 모습은 정말 코미디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피투성이가 되어서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내동댕이쳐지듯이 끌려 나오셨고 그리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매고 당신이 죽으실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혹시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무슨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는 아랑곳없이 조용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고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던 권능이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러나 지금은 기적을 행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은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진 채 하나님 앞에 힘없이 죽음으로서 제물에 사명을 다하여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 사람들이 변방에 야만족이던 시절에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문명사적으로 보면 이집트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이쪽의 문명이 이제 에게를 지나서 헬라 쪽으로 가게 됩니다. 이제 크레타 섬이라고 하는 곳으로 가서 크레타문명이 나오고 거기서 그리스 사람에게로 건너가고 그리스에서 문화가 확 꽃피우면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마케도니아 제국 알렉산더 대제의 치세가 됩니다. 그때에 거의 전 유럽을 다 통일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북방에 쳐내려온 아주 포악한 민족인 로마 민족이 득세를 하면서 졸지에 이제 나라가 쪼개지고 이제 문명사 쪽으로는 그랬지만 군사적으로 무력으로 나라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발달된 그리스 문명을 받아들이다가 이제 찬란하게 로마 문화라고 하는 것을 꽃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명사 쪽으로 보면 사실 로마는 그리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맨 처음에는 그 사람들은 변방의 야만족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이 야만스러울수록 그들을 아주 엄격하게 다스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신사도가 유명하다고 그렇게 하는데 왜 그런가 하면 하도 사람들이 막대 먹어서 그것을 다스리게 위해서 엄격한 교육을 시키다가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을 다룰 때 웬만큼 다루어서는 죽음도 거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게 십자가 형벌인데 이게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죄를 지어도 이 형벌로 다스리지를 않았습니다.
이 십자가는 희랍어로 ‘스타오로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는 없고 그냥 ‘막대기’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에는 너 댓가지의 종류의 십자가가 유행이었는데 이렇게 엑스 자로 된 십자가, 그 다음에 똑바로 된 십자가, 혹은 거꾸로 된 십자가, 혹은 가장 흔한 것은 티자 형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매달리시던 십자가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끌어다가 못을 박는데 맨 처음에 가운데 박았는데 몸무게 때문에 자꾸 찢어지니까 사람이 떨어지니까 아예 손목에다가 동맥과 그 다음에 뼈를 관통하면서 기차 레일에 박는 그런 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거 두 개로 사람이 매달려 있어야 되니까 단단하게 박았고 그 다음에 세로 막대기를 땅에다가 세워놓은 다음에 도르래 같은 것을 이용해서 가로 막대기에 사람을 그렇게 매단 다음에 높이 들어올려서 거기에 걸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을 나무에 붙이고 발에다가도 못을 박아서 못 세 개 정도로 고정하게 하고 자꾸 떨어지니까 나중에는 이제 발바닥 이쪽 아래쪽에다가 나무 같은 것을 대서 흘러내리지 않도록 만드는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째든 그렇게 매단 것이 십자가의 형벌이었는데 이 십자가의 형벌의 참혹성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상황이 허락하는 한 가장 오래 살도록 놔두고 살아있는 동안은 최악의 고통을 맛보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한다는 점에서 이 십자가의 형벌은 정말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이 이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면 우선 많은 피를 흘리게 됩니다. 그렇게 나무에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못박기 위해서는 뼈를 관통해야 하고 뼈를 관통하기 위해서 못을 박다가 보면 필연적으로 동맥을 건드리게 됩니다. 그러면 많은 피가 흘러나오게 되고 피가 흘러나오게 되면 의학적으로 두 가지 신체적 증상이 뒤따르는데 첫째는 견디기 힘든 통증이고 또 하나는 견디기 힘든 목마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견디기 힘든 두통이 나는데 이것이 얼마나 심한지 지옥을 넘나드는 고통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십자가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굉장히 금기시 했고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그 자체를 굉장히 무서운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식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상황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버리고 도망간 제자 요한을 제외하고는 당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 중 아무도 없었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물고기와 보리떡을 받아먹었던 그 기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로 돌변했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오 라고 하며 찬송을 부르던 예루살렘 입성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펴서 깔던 사람들도 지금 물끄러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다만 얼마간의 여인들이 슬피 울면서 예수님을 따라왔을 뿐인데 절대적인 그런 고독 속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수많은 채찍과 매맞음, 그리고 굶주림과 잠자지 못하는 고문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이 구레네 시몬이 지는 그 십자가와 함께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분명히 예수님은 눕혀졌을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은 팔을 벌린 채 가로막대기에 못 박혔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장면을 생각해보면 그분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정말 그 손이 못 박힘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렇게 우리에게 나쁜 일을 행했습니까? 그 손으로 예수님은 넘치도록 수고하며 사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그 손으로 눈먼 자, 병든 자를 어루만지고 고름으로 가득 찬 문둥 병자를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굶주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물고기와 보리떡을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망치 소리 내 마음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틀림없이 그 예수님도 도르래 같은 것에 매달려서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들리 우셨을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 매달리셨습니다. 손에는 못 박히시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그리고 발에도 못 박히시고 맹렬한 팔레스타인의 뙤약볕 아래서 예수님께서는 서서히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수없이 흐르는 피가 그분의 뇌 속의 고통을 더했고 그리고 제자들마저 모두 도망가버린 외로움이 예수님의 고난을 더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예수님은 나에게 이 고통을 멈추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구해주십시오. 최소한 나의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기도하셨을 텐데 그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체 자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에 예수님은 거의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정말 기도할 수 있는 그런 환경입니까? 머리를 찌르는 가시 면류관에서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가 눈까지 흘렀고 얼굴로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온몸은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불같은 아픔을 맛보고 계셨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실 정도로 견디기 힘든 육체의 고통 속에서 그분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평소에 하시던 대로 그렇게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초인적인 기도를 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비록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육신은 우리의 육신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신체적인 조건들은 그분에게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그때부터 인간의 그런 조건 안에서 사시도록 하나님은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기에 순응하셨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환경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기보다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생을 기도하면서 살아오셨기 때문에 이 결정적일 때에도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그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를 맛보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에 있어서 어려운 점들을 환경의 탓을 많이 합니다. 물론 꼭두새벽에 직장에 나아가서 밤 11시 가까이 되어서 파김치가 되어서 돌아오는 오늘날의 무자비한 직장생활을 해나가는 여러분들의 형편을 깊이 동정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못지 않은 고달픈 생애를 사셨고 수도사적인 유유 자족하는 생활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사람들 속에 계셨고 지체들 속에 계셨습니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아픔과 유혹들을 모두 맛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어떻게 불구래 의지를 가지고 자기의 기도의 세계를 파수해왔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피나는 기도의 생활이 몸에 배어서 오늘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이 환경에서 그 환경을 뛰어넘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예수님의 생애, 사적인 생애도 그러했겠지만 특별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 이후에 그 분의 공적인 생애는 철저하게 무릎으로 걸어오신 생애였습니다. 빈들에서나 산에서나 성전에서나 그리고 길거리에서나 혹은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이나 그 분은 항상 자신의 생애를 무릎으로 걸으셨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어린양으로서의, 구속 주로서의 짐을 지고 소화해 낼 수 없는 무거운 일정들을 소화해 내시면서 주님은 자신의 기도의 세계를 파수해오셨습니다. 낮에 기도하면 기도가 영혼들을 위한 섬김을 방해할까봐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섬김을 받은 영혼들이 휴식하는 밤 시간에 기도하셨고 섬김을 받을 영혼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의 시간에 고적한 곳을 찾아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단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달콤함이 있었겠지만 기도하는 그 행위 그 자체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듯이 그것은 노동이었고 노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환경에 굴하지 않는 탁월한 열심으로 자기를 이기시면서 기도에 헌신해오셨고 그렇게 일생동안 기도 속에 살아오셨기 때문에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불에 대는 것 같은 치열한 고통을 온 몸과 영혼에 함께 느끼시면서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거기에서 하늘을 우러러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또 간구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십자가에 매달린 환경만큼 어려울 수 있을까요?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기도하기에 힘겹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매달려서 살이 찢어지고 동맥이 터져서 피가 넘쳐흐르는 그런 절명의 순간처럼 어렵지는 않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들에게 정말 이런 싸움이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라운 것이지만 그 은혜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화에 있어서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가 천국을 누리게 만드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은혜를 베푸셔도 그 은혜를 느끼지를 못합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환경에 쉽게 굴복하고 상황에 얼마나 쉽게 무릎을 꿇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싸움이 있었습니까? 기도하게 하지 못하는 환경과 더불어 분투한 적이 있었습니까? 정말 우리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환경을 향해서 도전을 선포하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내가 이것과 더불어 싸우리라고 하는 임전불투의 결의를 보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상황에 길들여지고 우리의 환경에 놀아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동안에 가벼운 많은 유혹의 속삭임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우리의 기도의 영을 바닥까지 날려버려서 이제는 기도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도 이번에는 우리 안에 기도할 수 있는 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궤계가 철저하게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실 하나를 믿고 여러분들이 온전히 축복만 누리면서 이 세상에 살다가 불 가마를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했다면 여러분들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런데서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받는 그 순간에 자기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헌납하는 증서에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내 것이 아니고 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심으로 나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무한한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우리 예수님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자기 아들의 몸을 찢어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보람을 느끼시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이 아름다운 교제 속에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분투합니까? 싸웁니까? 되면 하고 안되면 마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 제가 보기에 여러분들은 전설 속에 나오는 커다란 생명체 같습니다. 잠 잘 자는 그런 생명체, 어느 순간에 말씀이 바늘로 찌르고 하나님의 말씀이 물을 끼얹으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일어서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숙면보다 더 깊은 잠에 빠지는 자극은 많이 받아도 조금 반응하고 그리고 나태와 태만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신의 본분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들, 그 모두 분투하는 노력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오늘 기도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까? 그 분보고 일생을 사시면서 빈들에서나 그 장막 안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사시라고 했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생애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기에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어서 지금 십자가에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환경 때문에 우리들이 기도하지 못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되면 하고 말면 말고 여러분들에게 정말 환경을 이기려는 분투가 있습니까? 이것이 살아있는 신자의 표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루 이틀 일주일을 기도하지 않고도 여러분들이 조금도 마음에 불편함이 없다면 여러분들의 신앙 그 자체가 이미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환경에 핑계를 대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가운데서도 기도하시면서 그런 변명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며 자신의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이 기름져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감화가 있어야 합니다. 평생 새벽기도 작정하셨습니다. 잘 하고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만 만약에 그 작정하고 안하고 계시면 깊이 뉘우치고 돌이켜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길이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면서 정말 쓸모 없이 비천한 이 몸이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며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환경의 탓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래서 항상 그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그 치열한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감화로 우리의 게으름을 이겨내야 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환경의 탓이라기보다는 게으름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바빠도 하고 싶으면 합니다. 너무나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하든지 합니다. 잠을 덜 자더라도 자기가 너무 하고 싶은 것은 다른 일을 미루면서라도 하고 너무 하고 싶으면 해야 할 일을 포기하고서라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환경의 핑계를 대고 거기에 쉽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에 아시는 자매 한 분이 뺀질거리고 신앙생활 하다가 은혜를 받고 나니 엄격한 가족들 눈을 피해 새벽에 기도하러 다녔는데 은혜 받으면 누구 도 말릴 수 없다는 이야기)
사랑하는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만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력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육체가 좋아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죄악과 더불어서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한번 단 30분이라도 좋으니까 마음을 다 쏟아놓으면서 하나님이 내 마음을 다 알아주시는구나. 그런 기도를 최근에 언제 해보셨습니까? 정말 이렇게 냉랭할 수 있습니까? 정말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습니까? 정말 교회가 이렇게 냉랭하고 이렇게 차가울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정말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도 어떻게 그렇게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게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치 기도하지 않고 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고 그리고 기도하면 보너스의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이런 신앙생활은 일상적인 신앙생활이지만 가끔 별미로 주님께 대접하듯이 특별한 기도를 드리는 그때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이런 식의 삶, 이것이 정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삶입니까? 너무 냉랭합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간절히 보고 싶습니다. 정말 교회가 크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마당을 밟고 지나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정말 진실한 성도들이 이른 새벽이든지 한가한 낮 시간이든지 깊은 밤이든 끊임없이 교회에 오면 하나님의 영광과 잃어버린 영혼들과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자기의 모습을 아파하며 교회 한구석에서 흐느끼는 그런 성도들이 늘 있는 교회, 새벽기도회에 주일날 보다 더 많은 교인들이 나와서 기도하는 그런 교회, 여러분들이 천사의 설교를 듣고 학자에게 성경을 배우고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목회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는 대신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기도해야 할 그 몫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환경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채찍에 맞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환경이 어렵지만 십자가에 매달린 환경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정말 여러분들이 그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그렇게 주님 앞에 살기 위해서, 정말 기도의 세계를 파수하기 위해서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참 이것은 오늘 이겨도 내일 이긴다고 말할 수 없고 요즘 이긴다고 해서 먼 장래에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고 이기며 싸워야 할 싸움입니다.
개척교회 할 때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새벽에 기도를 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전화를 막 누릅니다. 새벽기도회에 안 나오려면 잠이나 깨라. 그리고 막 누릅니다. 지금도 그 사람은 미스터리입니다. 그 시간에 왜 그렇게 벨이 울렸을까? 전화를 받으면 나는 딱 끊어버립니다. 그러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4시 45분에 벨이 울리겠습니까? 요즘은 안 하니까 괜히 나 때문에 그랬다고 하지 말고, 그런데 정말 어떤 지체는 그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 목사님 일어나실 때 전화 좀 걸어주실래요. 자명종 어쩌고 그러냐고 하면 목사님 누른지도 모르고 잡니다. 그래서 그게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자기가 너무 미운 것입니다. 왜 이렇게 밖에 못살까? 그렇게 해서 1년 반씩 2년씩 새벽기도회에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싸우지 않고는 안됩니다. 정말 안됩니다. 저는 진짜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무슨 선물을 사주는 것보다, 밥을 한끼 맛있는 것 사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그 사람이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환경을 이기고 예수님 바라보면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한 것은 한 것이고 안한 것은 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과 더불어 분투하면서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살을 가르고 밀려오는 그 견디기 힘든 통증도 하나님 나 너무 아파요. 기도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뭐 그렇게 아플 때는 없지만 어떤 때 너무 아프면 그렇게 기도합니다. 아, 너무 아픕니다. 그럼 참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또 자기를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저들을 혼내달라고 기도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것은 그런 기도가 아니라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가 감람산이나 요단 강변에서 드려진 기도라면 감동이 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어떤 순간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제물로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렸으니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진 어린양 곧 제물로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면서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시는 중입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며 형벌을 당하는 이 고난이 바로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다면 당해야 할 형벌이라고 예수님이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렇게 못 박히시면서 당신이 기도해주어야 할 사람들이 얼마 후에 당하게 될 그 치열한 형벌을 한 몸에 받으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자신이 살 찢고 피 흘리는 그 극렬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는 대신 지금은 자기를 못박고 밑에서 자기의 옷을 제비뽑고 그리고 희롱하는 그 많은 막대 먹은 인간들이 미래에 받을지도 모르는 그 형벌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저희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사죄의 탄원을 간절히 올리고 계셨습니다.
구원하신 우리를 하나님이 왜 안 데리고 가시고 여기에 남겨두셨습니까? 우리들이 오늘도 예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인해서 고민하고 더 많이 깨어져서 예수님 닮은 사람이 되고 싶고 더 많이 섬겨서 그래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본받고 싶어하는 그 이유가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입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남아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의 생애는 선교적인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복음을 들고 해외에 나가서 전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 그 자체가 선교적인 그 존재가 되어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의 존재를 통해서 보여주고 그 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그의 온 존재를 통해서 보여주는 선교적인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여기에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이 세워놓으셨으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인해서 안타까워하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사는 것은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에게 너무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왜 사람들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지 아십니까? 왜 자신의 가족들이 전혀 예수를 모르고 죽어가도, 자기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죽어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할 만큼 그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변해 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기도의 은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뜨거운 구령의 열정과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면서 매달리는 이 철저하게 매달리는 기도의 은혜의 세계는 항상 함께 가는 것입니다. 기차의 두 레일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교회가 전도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영혼들을 정말 불쌍히 여기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는 전도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기도에 있어서 냉랭한 교회가 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입을 열고 기도하신 것은 자신의 유익이나 영광이나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도 아니었고 입을 열어서 기도하신 처음 그 기도는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지 않는 불신 가족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 영혼을 위해서 우는 뜨거운 눈물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전에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고 하나님 없이 살던 우리의 삶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며 희희낙락하던 십자가 아래 있는 군병과 같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우리들이 돌아와서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티끌만큼이라도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그분의 명예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어하게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원받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비셨던 그 사죄를 탄원하는 기도의 응답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내 아내와 남편,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병상에 누워있는 우리 아빠, 그리고 늘 만나기에 예수의 사랑을 전해야 할 의무와 부담을 느끼지 않는 우리의 이웃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정말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서 울어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등지고 예수의 사랑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어둡고 칙칙한 인생을 살아가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님을 등진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누군가가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차갑고 냉랭한 교회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얼음장같이 차갑고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돌같이 식어지고 굳어져서 예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그리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자들까지도 이런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모르고 그리고 그 사랑을 자신의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 영적인 은혜의 세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 아직까지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 영혼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버리겠노라고 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의 심장을 터트리고 쏟아져 나오는 솟구치는 눈물이 있다면 돌같이 강퍅한 심령도 그 눈물을 발라 하나님이 녹이실 것입니다. 정말 녹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언제 봤습니까? 그 분을 만져봤습니까? 그 분의 가슴 안에 기대봤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본 것보다 더 확실하게 그 분을 느끼고 오늘 그 분에 관한 진리가 증거 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분은 내 마음 안에 여러분들 마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 그 강퍅하던 마음속에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셨다면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말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 한이 되기까지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신자의 마음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보고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죄인들을 보고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위해서 울 수 없는 마음이라면 그들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만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주신 예수의 사랑 다 어디에 두었습니까? 하나님이 알게 하신 그 은혜의 비밀들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못 박히고 고난을 당하실 때에 그 사실을 깨닫고 흘렸던 그 뜨거운 눈물들이 여러분들 어디로 다 갔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냉랭합니까? 지식은 쌓여가도 차갑고 그리고 지식은 늘어가도 주님의 마음은 우리에게서 사라져갑니다. 주님이 눈물 흘렸던 세상에 가서 우리들은 놀다가 오고 주님이 마음 아파하셨던 우리들 안에 있는 죄와 더불어 악수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아닙니까? 모두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5월 달에 그렇게 가족들의 영혼을 보고 아파하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 회심과는 거리가 먼 가족들 때문에 쓰라려 했는데 그때 통곡과 가슴앓이를 오늘 여러분 속에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전도의 정신과 기도의 정신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 분의 생애는 당신 가까이 온 많은 양떼를 먹이고 입히시면서 그 분의 아픔은 우리밖에 있는 양떼들에게까지 뻗었습니다. 죄도 없으신 그 분이 빈들에서 광야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왜 그렇게 통곡하며 일생을 피 어린 무릎으로 사셔야 했습니까? 모두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사랑이 많으신 그 하나님의 큰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죄, 정말 교회가 단 한번이라도 온 성도들이 마음을 찢으며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의 이웃은 이 사랑을 모릅니다 라고 눈물 흘린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종종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 없을 것 같던 그런 영혼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왠지 그 앞에서 한없이 자신이 작고 초라해 보이게 만드는 그런 완고한 죄인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 사람이 우리 엄마고 우리 남편입니다. 그 사람이 우리 아내입니다. 그런데 참 안됩니다. 그런데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많이 기도하면 됩니다.
저는 실제로 지체들 중에 기적과 같은 가족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 기도하지 않고도 그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철야하고 금식하고 몸부림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담대함도 더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진짜로 영혼으로 볼 수 있는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넣어주십니다. 예전에는 내게 상처 준 아빠, 가정을 버린 엄마, 그리고 같이 살기 싫은 아내, 그리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남편 이렇게 생각됐는데 그 영혼의 버림받은 상태를 안타까워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 남편 아내 그리고 엄마 아빠로 보이는 게 아니라 영혼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번에 제가 외국에 나갔을 때 한번 그런 것을 봤는데 엄마가 좀 심정적으로 불안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막 분노하면 막 화를 내고 합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겠습니까? 그런데 그 딸이 엄마가 막 화를 내면 옆에서 기도하고 화가 끝나면 엄마를 꼭 안아줍니다. 그리고 목욕실에 데리고 가서 옷을 다 벗겨서 머리를 감겨주고 몸도 다 닦아준 다음에 새 옷을 갈아 입히고 머리를 말려주고 로션까지 발라주고 그리고 엄마 이제 자자. 그리고 침대에 눕혀놓고 자기가 엄마인 것처럼 엄마를 자기 무릎에 뉘이고 그리고 볼에다 볼을 대고 가슴을 토닥이며 재워줍니다. 우리 엄마 참 착하지. 자는 거야.
세상 모두 사랑 없이 냉랭함을 아느뇨
곳곳마다 소리치며 사랑 받기 원하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 아이를 깊이 사랑하시는 것을 이 아이가 깨달은 것입니다. 그 상처가 안되고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마십시오. 오죽 못났으면 평생을 상처의 노예로 삽니까? 내가 그랬습니다. 상처를 많이 받았으면 복수하십시오. 사랑으로 복수하십시오. 아니 아버지만 자식 사랑하고 엄마만 자식을 사랑하라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리사랑인데, 그 내리사랑은 하나님 사랑 많이 받은 사람이 내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먼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으면 여러분들이 이제 내리 사랑을 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가족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인해서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누가 내 남편을 위해서 울어주겠습니까? 누가 내 아내를 위해서 통곡해주겠습니까? 누가 불쌍한 우리 엄마 그리고 주님 등지고 살아가는 완악한 우리 아빠를 위해서 울어주겠습니까? 그들이 악해서 아직 하나님 앞에 못 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뜨겁게 울어 그 통곡의 눈물로 그 마음에 발라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트려지기를 주님이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이 기도하실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까? 온 몸에 쓰라린 고난을 당하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어 가시면서 예수님이 당신을 못박는 수많은 죄인들에게 다가오는 그 형벌을 너무 아파하시면서 그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처럼 부둥켜안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생애였습니다. 이제 그분의 생애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감상하라고 보여주신 생애였습니까? 그 분이 우리에게 그냥 보고 한번 즐기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애였습니까? 그 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다 던져 교재처럼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당신의 무릎으로 걸어온 피맺힌 생애를 보면서 그 마음의 굳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서 그 분이 가셨던 길에 가고 그 분이 기도하셨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 분이 부여안았던 영혼들을 자신들도 부여안고 예수님처럼 그렇게 기도하는 그런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자신의 온 생애를 우리에게 비밀 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속에 근심 그리고 밖에 수많은 걱정들 우리 안에 있는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이 부패한 본성과 그리고 뼈 속 깊이까지 배어버린 우리의 게으름들이 우리의 기도의 날개에 무거운 돌덩이처럼 추를 매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이렇게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십자가에서도 기도하고 그리고 거기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는 대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날마다 설교를 그림처럼 간직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지난주에 그림이 날 저문 캄캄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그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는 그 장면이 그림이었다면 지금은 가시면류관을 쓰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 높이 매달리신 그 주님이 그림입니다. 거기서 눈을 들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이 괴로움 모두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조용히 묵상해보십시오. 일생을 무거운 짐을 지고 마치 죄인들을 위한 밥처럼 사셨습니다. 곤고한 영혼들과 범죄 한 영혼들 가까이 그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며 일생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분에게 주신 것 중에서 우리를 위한 섬김이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분이 그토록 죽어 가시면서도 그 분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것은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가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양떼들,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울어주고 누군가가 죄의 용서를 위해서 섬겨주면 그러면 그 분의 마음이 한결 위로를 받으실 수 있을 텐데, 이런 주님의 마음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은 무엇으로도 그 사람들 속에서 흘러나오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통곡하는 기도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환난과 핍박이 잠시는 그들의 기도를 멎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는 그 기도의 불은 끌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영혼을 위하여 웁니까? 불쌍한 우리의 가족을 위해서 우리가 흐느낍니까? 그들의 이름이 우리의 눈물에 젖었습니까? 정말 우리는 어느 세월이든지 하나님이 징계를 하셔서 그들이 눈물 흘리고 돌아오는 나를 교만한 얼굴로 ‘것 봐’ 라고 말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이게 십자가의 정신입니까? 이게 예수님이 오늘 보여주신 그 본을 따르는 생각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우리의 눈물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 사랑 예수 마음을 가지고 홀로 있을 때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만나면 이 복음 전해서 그래서 십자가까지 끌고 가셨던 예수님의 이 기도의 생애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도 재현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자기 영혼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큰소리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에 마지막 장면에 도착했습니다. 지난주 우리에게 보여지는 장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기도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기도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생애의 마지막 기도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에서 매달려 당신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계시는 동안에 마지막 남기실 수 있는 말을 기도로 마치셨다 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 말하기를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은 오늘 이 성경을 먼저 해설해나가기 전에 당신의 생애 마침표를 기도로 찍으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생애 마지막에 하실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육신으로는 자신의 어머니요, 그리고 자신 때문에 마음에 많은 아픔을 겪었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도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의 어울리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 특별히 3년 동안 당신과 동고동락하던 사랑하는 제자들과 작별의 인사를 전하는 것도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당신의 생애 마침표를 기도로 찍으셨습니다. 당신의 공생애를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기도하신 것으로 시작하셨던 것처럼 또한 당신의 생애 마침표를 기도로 연 당신의 생애 마침표를 기도로 찍으시면서 당신의 생애를 닫으셨습니다.
일생동안 기도와 더불어 살아오신 무릎의 생애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에 사람들과의 작별 인사도 접어두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슬피 울며 언덕까지 따라온 사랑하는 여인들에 대한 작별 인사도 거두시고 오직 당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시는 것으로 마감을 하셨던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본문을 해설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이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줍니다. 우리의 생애도 그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리의 생애도 예수님의 생애처럼 이렇게 일생을 주님을 찾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속의 산 제물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그 분께 빚진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의 생애를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이 짧은 본문을 두 토막으로 나누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자세,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그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가.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을 기도하셨는가를 이어서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자세였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큰소리를 질러 예수님이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큰소리를 지르신 그 대목을 우리들이 보면서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우리들이 배우게 됩니다. ‘아더 핑크’와 같은 사람은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큰소리를 질러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자신 안에 힘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죽으신 것이었지 십자가에 못 박혀서 기운이 진하여 죽은 나머지 강도들의 죽음과는 달랐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해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비록 예수님이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몸을 입으신 분이었고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적과 같은 일을 일으켜서 이 십자가의 고난을 면하거나 고통 없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에 착안해서 이 상황을 본다면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이 아직 많은 힘이 남아 있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신 것이라기보다는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의 기력과 모든 힘이 다하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집중된 예수님의 정신, 그리고 집중된 그분의 영혼에 응시가 이런 남아 있는 모든 육체의 힘을 끌어올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예수님이 참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라고 하는 교리에 부합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이처럼 큰소리로 부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렇게 큰소리로 외쳐 부르실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난하고 결핍 가운데 사신 수고하신 그분의 전 생애를 차지하고라도 그 전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진액을 짜서 쏟는 기도로 헌신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어 달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체 육체의 모든 힘을 소진하셨습니다. 땀이 쏟아졌고 그 땀 속에 피가 배어서 흘렀습니다.
히브리서 5장에 기록된 대로 그 밤에는 예수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날 밤 기도는 액체의 기도였고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에는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과 그리고 솟아나는 땀과 그리고 솟구치는 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음 본 그런 기도가 아니라 남은 인생에 모든 날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그런 태도를 견지하시면서 그렇게 기도생활을 이어가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기도의 자리에는 항상 눈물이 있었고 땀이 있었고 그리고 흐르는 피가 있었으니 그분의 기도는 이 세 가지 액체에 깊이 절은 기도였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의 그 기도는 예전에 드린 어떤 기도보다도 간절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특별한 기도였고 그 특별한 기도는 예수님의 육체에 특별한 헌신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천사가 와서 붙들어주지 않으면 쓰러질 것처럼 당신의 모든 기력을 쏟아 부으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자 예수님은 체포되셨고 체포된 이후에는 가야바의 뜰로, 빌라도의 법정으로, 헤롯의 거처로, 빌라도의 법정으로, 그리고 간악한 유대인의 손으로, 그 뒤에 그 이전에 브라이도리온으로 끌려 다니시면서 모진 심문과 채찍을 맞으셨고 멸시와 조롱과 침을 당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과 통곡으로 쏟으신 그 기도에서 남은 모든 힘을 소진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로 들어서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자신의 육체의 기력을 모두 소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힌 상태에서 찢어지는 살과 흐르는 피, 거기에서 쏟아지는 땀과 눈물을 경험하시면서 무려 6시간이나 매달려 있었습니다. 해도 빛을 잃은 3시간의 암흑을 포함해서 6시간 십자가에 매달리신 동안에 고통을 잊게 하는 신 포도주마저 거절하신 예수님은 온몸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당하여야 하는 당신을 향해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고통을 한 몸으로 받으셨고 그래서 거기서 예수님은 고난과 형벌을 다 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어디 그분에게 힘이 남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지막 남기신 외마디와 같은 기도 속에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 안에 남아 있는 기운을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간절한 기도의 탄원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계시면서 수많은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셨습니다. 우리들이 즐겨 외우는 주기도문은 이 생애를 사신 동안 주님이 기도하셨던 수없이 많은 날들에 기도의 축소판입니다. 그 기도는 언제나 우리들이 외우는 주문과 같지 않고 아버지 앞에 드리는 펼쳐진 기도였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파하셨고 주님이 이미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아름답게 이루어지는데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께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이 땅을 보시면서 가슴 쓰라려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넉넉히 먹고 살수 있도록 나누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그리고 욕망 속에서 굶주리는 자들이 있는 것을 인해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애처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시는 것도 예수님이 매일매일 계속되는 기도였습니다. 미움과 그리고 다툼 속에서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불화가 주님의 성품에 얼마나 어긋나는 일이고 각자 마음속에 은혜의 지배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얼마나 커다란 방해 요인인 것인지 아셨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것과 함께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또한 쓰라려하신 것이 예수님의 기도생활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는 것을 마음 아파하셨고 그 시험 속에서 대부분 악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당신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도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주님 앞에 간구했고 주님의 그 권세와 영광이 온 땅을 뒤덮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도 주님은 늘 탄식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오신 것처럼 또한 이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간절함은 어느 한순간의 상황이 만들어낸 간절함이 아니라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그런 자기 복종 속에 살아오신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정신의 상태가 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간절히 탄원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리면 우리 모두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 보기에 평탄하고 아무 염려가 없는 상황에도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악에 위험을 감지하고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애처롭게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자기를 살려달라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간절한 기도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자신의 인생이 벼랑끝자락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마음이 둔해지고 담대해져서 주님을 찾아야 할 순간에 주님보다 세상을 의지하다가 하나님 없이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함은 바로 일생동안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으며 아버지 앞에 드렸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기 안에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에 자기를 쏟아 붓는 열정으로 하나님 앞에 애절한 탄원을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 라엘’은 그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죄는 기도의 영을 말리고 기도는 죄의 씨를 말린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안에 정결함이 가득하면 그 속에 신령한 은혜의 빛이 비칩니다. 우리가 수시로 우리의 마음을 닦고 갈아서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경외하고 우리의 마음의 모든 부분을 드려서 구석구석까지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부분이 없이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닦으면서 살지 아니하고는 우리들이 필요한 때 언제든지 순발력 있게 이처럼 간절한 기도를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생하고 간절한 기도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기도한 후에는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기도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이고, 마지막에 또 한가지가 있으니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전심으로 쏟아 부어 그 기도의 제목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탄원하는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이 너무 비참하다는 인식 속에서 이 기도의 제목이 성취되지 않는 불행한 현실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내가 이 기도의 제목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눈을 감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라고 생각하는 불퇴전의 믿음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는 그 간절함이 없이는 무엇으로도 기도의 능력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의 능력자체가 어떤 탁월한 은사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간절히 기도해도 그 기도가 능력이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어떤 사람들은 놀면서 기도해도 탁월한 능력이 기도 속에 담겨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성경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신앙의 초기에는 이런 허황 된 가르침에 많이 속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쓸데없는 공상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세리, 그 죄만은 사람이 격식도 파기하고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지도 못하고 가슴을 두드리며 가슴아파하고만 있을 때에 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를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여기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의 기도가 화려했습니까? 그가 뛰어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놀라운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이었습니까? 많은 기도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기도의 격식을 차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한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죄악 된 삶, 의가 없는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에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쏟아 붓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 외쳤습니다. 부르짖기는커녕 가슴아파하며 아버지 앞에 말문을 잇지 못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되뇌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우리의 부패한 욕심,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영적 생활을 든든히 세워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우리의 육신의 부패함과 또 마귀는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 결단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특별기도 하겠다고 결단하면 첫날부터 꼭 무슨 일이 생깁니다. 대부분, 그래서 결국 결심 전체가 흔들리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워낙 강하고 단호하게 결단하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그런다고 해서 마귀가 영원히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는 아주 충성스러운 일군입니다. 그래서 한번 양보했지만 영원히 물러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단을 하고 기도를 해야지 되겠다. 그러면서 이제 새벽기도를 해야지 그리고 결심하면 워낙 그 결심이 단호하고 강하면 마귀도 물러갑니다. 그 다음에 하는 일은 그 기도를 하게 하되 그 기도의 내용이 없게끔 합니다. 새벽기도에 나가봐야 영적인 소득이 없도록 만듭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습관이 많이 좌우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새벽기도에 늘 나오는 사람, 혹은 밤 기도를 늘 하는 사람들은 늘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게 굳어집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수준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의 그 연약함을 새벽기도가 증명을 합니다. 월요일 날 좀 많이 나옵니다. 주일날 너무 찔렸기 때문에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약발이 이틀밖에 안갑니다. 신약 구약, 그리고 수요일 날 되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목요일 날 되면 쭉 줍니다. 그러면서 이제 주일날 예배를 은혜롭게 드리려면 회개를 해야 하니까. 아마 그렇게 해서 회개할 제목을 축적하는 모양입니다. 주일날 와서 다 회개하고 월요일 날 또 나옵니다. 그러니까 습관이 배는 것만 해도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에 나와서 새벽기도를 하는데 처음에는 잘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내용을 다 빼버립니다. 그래서 그냥 습관적으로 새벽기도를 나옵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그럴 것입니다. 야, 세상에 어떻게 새벽기도가 습관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너무 위대하게 존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한 6개월만 노력하면 습관이 되고 한 1년만 노력하면 그 시간이 되면 깹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나와서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으로 만족을 합니다. 어쩌다가 새벽기도에 나온 사람들은 본전 생각이 나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 가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사경회 같은 때만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본전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잠도 못 자고 일찍 택시비까지 내고 왔으니까 기도에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가깝고 늘 새벽기도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오늘 못하면 내일하지 뭐 새털같이 많은 날 오늘만 날인가. 그리고 주님, 저 왔습니다. 그리고 한참 엎드려 자다가 저 갑니다 그리고 갑니다. 이런 새벽기도 하나마나 입니다. 그래도 나오는 것이 낫긴 낫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새벽시간에 변화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또 자리라도 채워주면 다른 사람들이 격려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간절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기도가 간절해지면 자기가 간절해지려고 애를 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애 타는 마음을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막 짜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셔서 날 짜십니다. 이렇게 꽉 짜서 눈물도 쏟고 합니다. 내 안에 통곡하는 기도가 정말 깊어지면 자기가 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누가 내 안에서 통곡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통곡하십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의 기도의 경험은 시작은 자기 자신이 그렇게 자기를 짜서 드리려고 노력하는데서 출발을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처음 출발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잠이 먼저 오면 자고 기도의 은혜가 먼저 임하면 기도하고 아무 것도 안 오면 엎드렸다 그냥 간다. 그런 작전은 그것은 기도에 싸우는 작전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배웠습니다. 기도의 씨름, 누가복음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에서 배웠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씨름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씨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자유함을 주시면서 자기를 다 쏟아 부어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그런 간증들을 우리에게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이제 막 결혼을 해서 얼마 안되었을 때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일정하지 않을 때였는데 직장 다닐 때 새벽에 교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날짜를 정해놓고 특별히 기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화: 허름한 교회였는데 한참 기도하다가보니까 아무도 없는데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들 어 그렇게 했더니 생애 잊혀지지 않는 놀라운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셨다 는 이야기)
(예화: 함께 신학교 다니던 형제도 같은 경험을 했는데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무릎이 너무 아파 일어나려다가 기도응답도 못 받았는데 무릎만 성하면 뭔가 하 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응답주시지 않으면 무릎이 상해도 일어나지 않겠다고 하자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이야기)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안 한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간절함, 자기를 쏟아 부어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로지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도록 그렇게 자기를 다 쏟아 붓는 그런 기도를 주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해주시고 싶으신 마음을 가지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간절함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는 SOS 와 같습니다. 놀러오라는 전화를 열통을 받고, 죽을 것 같으니까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전화를 건 사람에게 먼저 뛰어가겠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이처럼 전심으로 자기를 향해 간절하게 부르짖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이 육체의 힘이 많이 남아 있으셨기 때문에 큰소리를 지르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마지막 기도제목이 워낙 중요한 기도제목이었고 그리고 전심으로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몸에 흩어져 있던 평상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끌어 내릴 수 없는 예수님의 몸에 흩어져 있던 모든 기력을 모아서 마지막 피를 토하듯이 외마디의 기도를 외치고 어떻게 보면 그 기도에서 쏟으신 힘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우리의 기도에 간절함이 있습니까? 습관을 따라서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됩니까? 습관을 따라서 시간을 정해놓기만 하면 됩니까?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약속하는 것은 단지 주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를 준비하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기도의 영광은 주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영광은 그 기도 속에서 주님의 응답을 받는 것이고 그 기도 속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자신을 대면하고 그분께 감화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간절함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피는 고사하고 땀을 쏟으며 어린아이처럼, 혹은 자기의 죄를 인해서 애통하고, 혹은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인해서 아파하고, 혹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하나님의 나라에 성취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해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그런 것이 있습니까? 정말 이런 간절한 기도가 여러분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하실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마지막 자신의 모든 힘을 짜내시면서 까지 아버지 앞에 기도하셨던 이 장면을 가슴에 새기면서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꿈꾸고 그리고 마음을 드리고 아버지 앞에 자신을 다 드리는 그런 기도가 아니면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는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언제 어디서 기도하든지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정말 간절하게 기도함으로 주님의 시선을 붙들 수 있는 그런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소리질러 기도하신 기도의 제목이 다름이 아닌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합니다” 라는 기도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는 자신을 복종시키신 예수님의 정신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지막에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시도록 사신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고,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에게 이 세상은 잠시 지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첫째로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합니다” 라는 기도 속에서 예수님의 절대 의존적인 복종의 정신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자기 아들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고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 모태로부터 받은 성령의 충만함은 별개로 하고 한량없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권세를 그분에게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분을 당할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사망이나 권세나 그 어떤 피조물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고 그분은 정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놀라운 능력을 한 몸에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죽음도 그분을 어떻게 하실 수 없는 그런 권세를 한 몸에 가지셨고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서 그 기도가 성취될 수 있는 그런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애는 주님이 그렇게 한량없는 능력을 부어주셨어도 예수님의 생애는 단 한번도 당신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신 적이 없는 생애였습니다. 주님이 능력을 부어주셨지만 예수님이 의뢰할 것은 능력이 아니라 자기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의뢰하지 않고 오히려 날마다 매순간마다 자기를 붙드시는 주님을 의존했고 능력이 많으신 메시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기대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분은 많은 사람에게 스승이셨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분은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홀로 쥐신 권능의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홀로 계신 때에나 사람들과 함께 계실 때에나 그 능력을 의존하는 대신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고 세우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내어쫓고, 물위를 걸어다니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놀라운 이적의 현장에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도하신 동산에서 그리고 탄식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리는 광야에서 이전에 볼 수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는 메시아처럼 사셨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양처럼 사셨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그렇게 사셨습니다.
오늘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께 어울리는 기도입니까?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장엄한 메시아에게 어울리는 기도의 제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치 일생동안 죄 가운데 살아온 부끄럽기 짝이 없는 한 비루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마지막 은총을 호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런 정신으로 사셨습니다. 의로운 분이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탄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앞에 부탁하셨고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이 자신의 이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거두어주시지 아니하시면 자신은 정말 비참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거룩한 긴장감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위대한 메시아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창조주 중에 한 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붙들지 아니하시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절대 의존의 정신을 가진 복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주님이 많은 능력을 주시면 우리들은 얼마나 자주 주님대신 우리의 능력을 의지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많이 축복하시면 그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주님이 주신 그 복 때문에 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 자기 복종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다 드리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혁혁하게 쓰임을 받으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수많은 능력을 주셔서 그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절대 의존의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전적인 순복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마지막 때를 살아가야 할 우리 속에 깃들여야 할 기도의 정신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작게 두 번째는 예수님이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 라는 기도는 마지막에 우리의 영혼이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수많은 상황을 지납니다. 가난할 때도 있고 부요할 때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때도 있고 외롭게 홀로 여생을 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에 붙들려서 자신이 강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 때가 있는가 하면 자신은 정말 아무 능력도 없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무능한 전재라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되는 때도 있습니다. 어떤 인생의 상황을 지나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고 마지막에 우리의 인생의 결국은 우리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우리 인생 그 영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은행과 호도를 좋아하십니까? 은행이나 호도를 어떻게 추수하는지를 보시면 참으로 호두와 은행이 비싼 게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호도와 은행은 모두 씨를 이용하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이런 동그란 과일 속에 씨가 들어있습니다. 그게 호도, 혹은 가래, 혹은 은행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농부들이 거두어서 이제 그 과일이 떨어지는 것을,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떨어지면 그것을 가마니를 덮어놓고 썩힙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제가 들은 말로는 잘 안 썩으면 거기에 똥을 뿌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호도하고 은행을 안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똥을 뿌리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게 이제 가마니를 덮어놓습니다. 그러면 이제 습기가 축축하게 올라오면서 속에서 썩습니다. 그런데 잘 썩어야지 만 이제 작업이 쉬어져서 호도나 은행 알갱이를 쉽게 꺼낼 수가 있습니다. 푹 썩힙니다. 그래서 결국은 썩힌 다음에 장화를 신고 들어가서 막 밟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육을 전부다 썩혀서 없애버리고 마지막에 물에 씻어서 그 은행 호도 알갱이를 꺼내서 깨끗하게 씻어 햇볕에 말려서 이용하는 것이 호도와 은행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좀 잘 건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피곤하면 좀 쉬고 어떻게 좀 더 써야 되는데, 그래도 투덜대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스피아라도 있으면 거기에 다시 영혼을 집어넣고 새로 살면 좋겠지만 그렇지만 스피아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망가지면 고쳐서 써야 합니다. 그래도 한참 더 써야 되는데 그래서 고치고 찢어지면 꿰매고 잘라지면 붙이고 부러지면 다시 잇고 그렇게 하여튼 정성껏 고쳐서 그렇게 쓰지만 결국은 이것은 마지막에 벗어버려야 할 장막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육신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영혼의 영향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육신을 가지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고 하나님 말씀 간직하려고 하고 그리고 이 육신을 가지고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주님 앞에 매달리려고 애를 쓰고 주님이 주신 이 모든 기관들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성결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를 쓰면 죄로 때묻은 우리의 영혼이 정결하게됩니다. 성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이 육신을 가지고 짐승처럼 막 살면 영혼이 더러워지고 혼탁해져서 주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셔도 우리의 영혼이 그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깨닫지를 못합니다. 잘 인식을 못합니다. 물론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셔서 하나님 나라에 데리고 가시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의 인생을 다 살고 마지막에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앞에 우리의 죽음의 순간에 정말 자신의 거룩을 위해서 노력하고 주의 말씀을 따라서 진심으로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은 비교적 순결한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완전히 순결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의 살아온 삶의 반영이 그 영혼의 상태입니다.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 때 마지막 인생을 다 살았는데 자신의 영혼이 정말 혼탁하고 더러운 영혼이 되어서 그런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인생을 마치겠습니까? 아니면 마지막 그 죽음의 순간에 뛰어난 영적인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라 죽음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 닦여진 그 길을 지나 당신 앞으로 나아갑니다. 영광을 받으소서’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까? 무엇을 여러분들이 원합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결국은 우리들이 무엇을 하고 살든지 간에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줍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하루 기도 속에서 살려고 애를 쓰고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하며 죄를 이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간절한 몸부림들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정말 깨끗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그 영혼의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훌륭한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행한 그 기적,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행한 그 기적이나 팔복산을 뒤덮던 그 수많은 인파들, 그들은 모두 가버리고 예수님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마지막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온 영혼 하나 예수님에게 남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간 것입니다.
일생동안을 주님을 위해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충성되게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이처럼 담대하게 죽음의 순간에 제가 주님의 은혜로 이제껏 살았고 주님이 저를 지키셨으니 주님을 섬기며 살아온 내 인생을 받으시옵소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인생을 하나님 앞에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라는 이 기도는 언젠가 죽음의 순간이 오고 우리의 육신이 껍질을 벗는 날이 예수님에게도 우리에게도 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그들은 이 세상이 덧없다는 것을 함께 알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 세상을 장난처럼 살지는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분께로부터 받은 그 많은 사랑과 은혜의 빚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주님을 위해서 갚는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인생이라고 하는 것,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서 써 올릴 수 있는 사랑의 편지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가지고 주님을 섬겼고 주님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아름답게 섬기기 위해서 하늘의 신령한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그들은 무릎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며 짧은 자기의 생애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부어주셔서 더 많이 주님을 섬기고 자기 때문에 주님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언제나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기쁨이 크고 주님이 자기를 사용하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일도 귀하고 자기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세상에서 맛보는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도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죄 많은 세상이고 자신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지나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자기를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있고 날마다 하나님과의 나누는 아름다운 교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과는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참된 신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어떤 이유로든지 이 세상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천국이 제게는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한 성도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떠나온 본향보다 더 아름다운 본향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그네길에서 잠시 맛보는 즐거움 때문에 본향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이 순례자로서의 명분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고난과 역경이 겹치고 시련과 그리고 핍박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면 그런 위기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시는 기회로 삼았고 어두운 인생의 밤을 지나면서 천국의 소망으로 자신의 마음을 활활 태웠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으로 죽음의 공포도 이겼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관심들을 이 세상을 위해서 과도히 쏟고 있습니다. 너무나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나머지 잠시 후에 주님이 우리를 위해 부르시고 그리고 이 육신의 세계에서 우리를 불러 올려 영원히 거하게 될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우리 자신을 채우는 일에 게으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 세상의 거친 유혹 속에서, 집요한 시험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절히 이 세상을 경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헛된 것이며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사랑할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다라고 하는 그런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욕망을 죽이고 세상에 대한 사랑에 기력을 끊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리고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하늘나라에 소망을 품어서 순간을 살면서도 영원을 잇대어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그 아름다운 내세에 대한 명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 때에는 순서대로 모두 이 세상에 오지만 갈 때는 그런 순서와 상관이 없이 떠납니다. 지난주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떠날 것입니다. 그때 만약에 우리의 일생이 우리의 욕심을 따라서 우리의 구습을 쫓아서 살아온 지리멸렬한 인생이었다고 한다면 우리의 그 인생의 마지막이 얼마나 두렵고 비참하겠습니까?
그러나 죄악 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순간순간 주님이 주신 기쁨 속에서 함께 즐거워하지만 이 세상이 잠시 지나는 것이라고 하는 인식을 날마다 새롭게 하면서 마음의 창을 닦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던 사람들, 잠시 후에 이 육신의 탈을 벗고 영광스러운 주님을 대면할 것이라고 하는 그 감격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그 마지막의 순간에 얼마나 기쁨으로 가득 차겠습니까? 그들은 ‘아멘! 주 예수여 제가 갑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이 부르실 때 지체없이 달려갈 것이며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꿈에도 뵙고 싶던 사랑하는 예수님을 거기에서 뵐 것입니다. 일생동안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던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자국을 만지면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 탁월한 구속의 은혜를 거기서도 찬송할 것이며 하늘 나라의 모퉁이에서나마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이름을 높이는데 헌신하며 우리들이 거기에서 영광스러운 날들을 보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땅은 잠시 머무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33해를 사신 후에 이렇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우리는 언제 주님이 부르실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이든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영혼을 취하시려는 그 순간에 최고의 은혜의 상태가 되어서, 일생을 살아온 중에 가장 성결한 영혼의 상태가 되어서,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그리스도와 나 자신이 가장 뛰어난 영혼의 연합을 누리는 가운데 내 영혼을 주님의 손에 부탁하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그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사랑하며 무릎으로 눈물로 기도로 나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