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기도생활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은밀한 기도로 나아가라(마6:6) 2006.4.10 십자가사경회(새벽) 1
2. 새벽을 기도로 열라(막1:35) 2006.4.11 십자가사경회(새벽) 7
3. 기도로 하늘 문을 열라(눅3:21-22) 2006.4.12 십자가사경회(새벽) 13
4. 환경을 이기는 기도생활(눅11:1) 2006.4.13 십자가사경회(새벽) 19
5. 겟세마네의 기도(눅22:43-44) 2006.4.14 십자가사경회(새벽) 27
1. 은밀한 기도로 나아가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6:)
1. 외식의 위험
이 6장의 시작은 너희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의를 행치 말라는 외식에 대한 경고와 함께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서 구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예 처음부터 길거리 어귀에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예를 들면서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외식하는 기도이다. 그런 기도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참된 기도가 어떻게 드려져야지 되는가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말씀했습니다.
오늘날은 아마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길거리에서 손을 들고 길게 기도하는 것 같은 종류의 외식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가지고 있고 또 많이 기도하는 것이 참 좋겠다고 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당시처럼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영광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오늘날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외식의 위험보다는 자기 자신이 참된 기도가 아닌 것을 드리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제대로 된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하는 오해하는데서 오는 폐가 훨씬 많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주님을 만나 뵙지 못하는 혹은 기도해도 주님께서 대면하여 주시지 않는 그런 잘못된 기도의 자세를 드리면서도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과 횟수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충분히 많이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진실한 기도와 형식적인 기도
원래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갈증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기도가 간절함과 열렬함이 증대되는 것입니다. 이 갈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영혼의 갈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처음 기도하게 될 때 기도하게 한 동기는 자신의 인생의 많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삶에 특별히 어려운 상황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좀처럼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때때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 어려움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오게 되고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결심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그 동기는 그 문제였지만 그 문제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문제를 봅니다. 그리고 치료될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치료와 변화는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향하여 목마른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기도 안에 우리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놀라운 은혜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관계를 고치게 하시고 또 그 과정에서 우리의 본성의 변화가 오게 하시고 잘못된 것들은 깨트려져 부서지게 하시고 좋은 것들은 성장시켜서 자라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를 우리에게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 변혁의 작용, 자기 영혼과 본성의 쇄신되는 작용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영혼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과 정신에서 시작되는 그 기도가 마음을 움직이고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향하게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그 정신과 마음의 기도가 결국은 영혼과 본성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우리 안에 새로운 힘들을 창출해내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기도생활은 이런 작용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기도에 생활은 이런 종류의 작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형식 자체 안에서 만족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고 마음을 깨트려 쏟아놓게 만들고 그래서 그것이 물같이 흘러서 영혼 속으로 그 힘이 흘러들어가고 영혼의 새로운 성향을 창출해내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에 있어서 외식의 위험을 말씀하시면서 절대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여기에는 자기가 스스로 기도한 것에 대해서 만족감을 갖는 그것도 여기에서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절대로 기도하지 말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는 성품에 대한 진지함이 없이는 참으로 이 기도가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은밀한 중에 계셔서 은밀한 중에 보시고 또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밀하다고 하는 것은 잘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 주님이 계실 것이고, 하나님이 절대로 나 같은 것은 쳐다보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바로 그 시간에 주님이 보고 계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절대로 나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귀를 기울이고 들으신다는 사실, 이 하나님의 은밀한 존재성에 대해서 숙고해야지만 이 기도가 외식하거나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형식적인 기도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기도 회복의 원리
그래서 기도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미끄러졌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기도를 회복하는 그 길을 모색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부분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많이 쏟으면서 낭비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식어진 기도의 은혜를 보충하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해보기도 하고 또 열심히 다른 일에 분주히 봉사해서 그래서 기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자신의 영혼에 손해를 보충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잊어버렸을 때 가장 핵심이 오직 두 가지입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어두워진 영혼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영혼의 밝은 빛이 들어와야지 됩니다. 그 영혼의 밝은 빛이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도해야지 될지를 올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에 은혜를 회복하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보십시오. 외식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고치시려고 하는 예수님께서 제일먼저 가르쳐주신 것은 그들이 외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성품은 하나님이 은밀한 분이시란다. 그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안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장소에, 들으실 리가 없다고 하는 그 공간 안에 그 시간 안에 바로 거기 하나님이 계신다. 그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이 기도를 회복하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은혜를 잊어버린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한결 같이 충고하는 것은 기도가 되지 않을 때 기도하기 애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의 마음을 덥히라.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지 됩니다. 설교를 듣든지, 성경을 찬찬히 읽든지, 그 다음에 성경을 잘 풀어놓은 책을 읽든지 아마 마지막 세 번째가 가장 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마음을 먼저 덮어야 합니다. 마음을 집중하고 천천히 그 말씀을 하나씩 천천히 읽으면서 깨달아가야지 됩니다. 그러면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시간을 떼어놓고 방해받지 않고 은밀히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기에 적합한 장소와 시간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 가십시오. 그러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마음이 굳은 사람도 그 은밀히 계신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정말 느껴질까요? 제가 많이 미끄러졌는데. 반드시 느껴집니다. 중생한 신자에게는 반드시 그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느낄 수 없는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짜 무당의 염불이지 그게 어떻게 느껴지지 않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여러분들이 모여 있어서 내가 설교할 수 있지, 어차피 설교하는 것은 내가 설교하는 것이니까. 텅 비어있는 곳이라면 내가 설교하려면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사람을 느낄 수 있을 때 그 사람과 대화가 이루어지듯이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그게 기도의 첫걸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갑니다. 그러면 마음이 덥혀지면서 하나님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아주 꾸밈이 없고 솔직한 자세로 주님 앞에 진실해지는 것, 그게 두 번째 관건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영혼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 어떻게 하든지 단번에 힘을 많이 써서 단번에 거기에서 벗어나보려고 하는 그런 욕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막 큰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게 믿음으로 부르짖는 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큰 목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먼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모아지고 하나님을 느끼는 가운데 하나님께 진실해지면 그것이 그로 하여금 기도의 문을 여는 한 방법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잘 안될수록 한편으로는 이렇게 함께 드리는 기도의 모임에 참석에서 불을 붙이고 또 한편으로는 혼자 한적한 곳에 물러가서 단 한마디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언어로 하나님 앞에 아뢰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너무나 심각하게 기도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 기도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우리들이 많이 미끄러지게 되면 우리의 영혼의 혀가 붙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언어를 피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정도가 된 사람들에게는 내가 항상 권하는 방법이 쓰라는 것입니다. 천천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느린 언어로 하나님 앞에 기록하라. 그리고 천천히, 형식에 붙은 백 마디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끌어져 나오는 그 한마디 기도를 하십시오. 그래서 마치 물이 모두 고갈되어서 잘 보이지 않는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는 것 같은 마음으로 천천히 자신의 마음 안에서 언어로 된 기도를 길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중간에 자꾸 그만둡니다. 그래서 기도가 회복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이렇게 생각합니다. ‘며칠 금식해서 확 엎어버릴까!’ 그런데 대부분 실패합니다. 금식이든지 간절한 기도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마음이 잘 준비된 가운데 가야지만 그것이 성공합니다. 그래서 깊은 곳에서 언어를 길어내야지 됩니다. 그래서 두레박을 던져서 길어 올리는 것처럼 천천히 올려야 합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계속하지 않고 어느 시점에서 영혼의 싫증과 게으름, 그 다음에 낙심, 교만함 이런 것들 때문에 그만 두어버립니다. 그래서 회복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해야지 되는가 하면 기도의 은혜를 계속 유지하고 있을 때는 잠시 기도를 쉬어도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져있기 때문에 조금만 부르짖으면 기도가 금방 붙습니다. 그런데 이제 많이 미끄러지게 되면 이 아궁이가 차갑게 식은 다음에 거기에 불을 때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불이 잘 안 붙습니다. 그때는 절대로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불을 떼는 방법을 생각해보십시오. 커다란 장작을 갖다놓고 성냥을 한통씩 갖다가 그어대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가지들을 얹어놓고 밑에 낙엽을 깔고 불을 붙입니다. 그래서 성냥개비 같은 작은 나뭇가지들이 타기 시작하면 좀 더 큰 가지를, 그 안에서 자꾸 꺼집니다. 그러면 훅훅! 이렇게 불면서 연기에 눈물이 나지만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계속 불면서 불을 일으킵니다. 그러다 나중에 큰 장작을 얹습니다. 나중에는 젖은 나무 장작을 올려놓아도 서서히 마르면서 아주 큰 불길들이 들어가도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그런 과정들이 필요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솔직하게 진실해지는 것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로 나아가게 됩니다.
4. 진실한 기도를 위해
오늘 성경에 보면 그 같은 원리를 우리에게 명쾌하게 제공해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이것은 당시에는 이런 작은 골방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창고 같은 곳으로도 쓰는 그런 작은 골방인데 사람들이 거주하는 골방은 아닙니다. 그런 작은 골방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그 집안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잘 믿어지지 않게 되는 그런 종류의 방입니다. 벌써 이 골방이라는 말 자체가 암시하는 바가 은밀함입니다. 왜 대청마루에서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안방에서 기도하지 않고 골방이라고 했을까요? 거기가 바로 사람들이 방문하거나 사람들이 찾을 리가 없는 그런 종류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골방이라는 말이 주는 이 의미는 아주 심오합니다. 그러니까 은밀한 하나님을 만나기에 아주 적합한, 사람들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는 그런 은밀한 공간입니다. 이 자체가 벌써 은밀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기도하는 사람의 이 은밀함이 일치를 이루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은밀한 장소를 찾는 이유,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택하는 것, 이 모든 것을 가리켜서 골방이라는 말로 은유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은밀한 장소와 은밀한 시간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집중, 그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은혜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 자신이 그 신령한 사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엇은 보든지 하나님을 계속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은혜가 사라지게 되면 이게 불가능해집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방식으로 마음이 흘러갑니다. 그래서 내 생활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 정신세계입니다. 마음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서든지 장소를 뛰어넘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은혜에서 미끄러지게 되면 이게 불가능해집니다. 심지어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안 느껴집니다. 그러면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기도 시간에 기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느낄 수 없으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치유책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생활을 좀 단순화하십시오. 그리고 하루에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것을 여기서 골방이라고 은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골방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기도의 시간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사람은 그 골방에 거미줄이 잔뜩 쳐지고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그리고 골방의 문은 활짝 열려서 골방이지만 더러울 뿐만 아니라 은밀하지 않은 장소가 되어버린 실패가 거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물리쳐야지 됩니다. 그래서 정신을 우리들이 어디에 팔고 살아가는가에 의해서 이 기도의 은혜는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찬찬히 하나님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들어와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그러면 나머지 모든 삶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런 집중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서 “문을 닫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네가 은밀한 나를 찾는 그 시간에 세속의 일과 사람들의 시선, 나 이외에 다른 것들에 대한 상념과 그리고 마음들이 너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문을 딱 닫음으로서 그 골방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그 골방에 무릎을 꿇은 신자가 하나님께 집중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과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만 한 시간만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조용히 아침 시간에, 혹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밤에, 아침 시간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기도를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먼저 마음을 덥히십시오. 그래서 이미 다 알고 있는 교리 하나라도 다시 묵상하십시오. 천천히, 마음 지킴이든지 뭐든지 책은 많으니까 하나 붙들고, 혹은 설교를 듣든지, 혹은 성경 시편을 천천히 읽든지 그래서 천천히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을 녹이십니다.
내 마음을 녹이 셨네
녹이십니다. 그러면 가슴에 눈물이 꽉 찹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 헛되고 분요한 것들, 세상에 속한 수많은 욕망들이 사라집니다. 주님이 아주 명료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어둠의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그래서 마음지킴이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자기를 닦아내지 아니한 그 대가를 기도의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는 것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매일 그 신령한 소심함 속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시간이 없어서 더 이상 설교를 계속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대들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여러분 자신보다도 여러분이 더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오늘 당장 해보십시오. 오늘 당장 기도하고 조용한 곳에 물러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십시오. 천천히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순간 내내 마음속으로 하나님, 내 눈을 열어주십시오, 영혼의 어두움을 밝혀주십시오. 주님만이 나의 아버지십니다. 내가 주께로 갑니다. 주님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천천히 기도하십시오. 계속 기도하면서 읽어 가십시오.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마음이 열리고 어느 한순간에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덮으십시오. 다 읽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덮으십시오. 그리고 기도할 수 있을 바로 그때에 작은 모닥불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숨을 쉴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습니다. 살아있으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내 영혼에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제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그때 기도할 힘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작은 불꽃이 지펴지기 시작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 새벽을 기도로 열라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1. 밤늦도록 그리고 새벽 미명에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사셨던 이 땅에서 그 능력과 영감에 넘치는 삶에 비결을 궁금해 합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이 기쁘게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약점과 죄는 없으시지만 모든 연약한 것을 그대로 짊어지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시는 날 동안에 당신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사시기 위해서 져야 했던 그 짐이 오늘 우리의 짐보다 가볍지 않으셨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종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그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와 같은 삶, 그리고 영감과 그리고 헌신에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삶의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해 합니다. 이때마다 우리들은 아주 쉽게 결론을 내리는데 예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의 이 지상생애를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영감에 넘치고 능력에 넘치는 삶의 한복판에는 기도생활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헌신적인 기도생활이 예수님의 생애에 핵심이 됨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기도생활을 기초로 능력과 영감에 넘치는 삶으로 아버지를 섬기며 일생을 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생활만큼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것을 가장 잘 입증하는 대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생활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아버지께로부터 공급받는 모든 능력과 감화력 있는 삶의 그 원천을 연약한 인간들이 엎드려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기도의 노역을 통해서 공급을 받으셨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함이 있습니다.
2. 헌신이 있기 전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에 보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가버나움에서 그리고 안식일 날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안식일에는 모든 사람이 쉬는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오히려 이날 예수님께서는 많은 섬김으로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신 기록들이 나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으니까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거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 쏟아 부어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설교하셨을 것입니다.
이 설교의 신비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가르치는 이 설교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활동으로도 가능한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의 신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그때에 설교하는 사람은 물론 듣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 자기를 만나주시기를 앙망해야지 된다는데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세 시간을 강의하는 것보다는 한 시간을 설교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 설교자들과 똑같은 긴장을 가지고 그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말씀을 전하셨을 터이니 그것도 얼마나 고단한 일이셨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귀신들린 자가 나타나서 한참 소동을 피우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고치셨으니 또한 이것도 예수님이 하신 고단한 일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설교와 귀신을 쫓은 사역을 접으시고 심방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병자를 위로하고 또 그 열병이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외에도 성경이 기록하지 못한 많은 일로 예수님은 이 안식일에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밤이 깊어 숙소로 돌아오니 거기에는 낮 동안에 예수의 소문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던 수많은 각색 병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묵으시는 숙소에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인 사람들에게 오늘 나는 너무나 피곤한 일과를 보냈으니 내일 만나자. 얼른 돌아가거라. 하고 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신이 묵으시는 숙소에 모여 있는 그 각색 병들과 귀신들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내어 쫓아 온전케 하시고, 병든 자는 고쳐 건강을 회복하게 하시고, 예수님은 단지 의사로 오신 분이 아니시니 아마 이들의 육신만 고쳐서 보내지 않으시고 틀림없이 밤늦은 시간까지 오래도록 육신의 고침을 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차근차근 가르치심으로 그들의 영혼도 아울러 고쳐서 집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도대체 몇 시쯤 예수님의 사역이 끝났을까요?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만 그저 저의 느낌에는 아마 병자들까지 모두 고치고 사람들을 돌아가게 하신 후에 아마 이 시간은 새벽 1-2시는 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일어난 일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시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섬기고 봉사하신 고단한 사역의 수고가 있으신 그 이튿날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따라오는 것을 보니 아마 제자들은 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잠들어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일어나셔서 아직까지도 밝은 빛이 없는 캄캄한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셔서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 방해받지 않은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조용히 감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잠들어있는 그 발치를 지나 살금살금 문을 열고 캄캄한 어두움이 아직 가득한 빈들로 걸어 나가셔서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신 생애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 그 구원의 감격에 깊이 사로잡혔을 때 또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핍절한 삶 가운데 어찌할 수 없이 살아가던 때에 주님이 우리를 다시 만나주셔서 은혜의 감격을 누리게 하셨을 때 우리도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다 드리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예수님의 모범과 우리의 삶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삶은 구체적인 헌신이 있는 삶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그토록 고단하게 하루를 보내신 후에 그 이튿날 새벽에 오히려 미명에 잠든 제자들의 곁을 떠나 기도하러 빈들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이 새벽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18년 전에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왜 예수님이 그렇게 힘든 새벽시간에 기도하러 가셨을까를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도달했던 결론은 거기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신 것은 낮 시간에 기도할 수없기 때문에 새벽을 택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만약에 예수님이 낮 시간에 기도하시러 먼 곳으로 나아가 장시간 기도에 헌신했다면 병든 자는 누가 고치며, 귀신들린 자는 누가 치료하며, 말씀이 없어 핍절한 사람들에게는 입을 열어 주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러 나가시고 깊은 밤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생은 주님을 섬기며 사는 인생이어야 하고 그 모든 섬김의 중심에는 우리의 마음이 바쳐지는 그 헌신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통해 영광받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통해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지만 그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주님은 먼저 우리의 마음의 헌신 안에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로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내면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피 흘리셨을 때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그 보혈을 받으시고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용서해주셨으니 하나님이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은 바로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여 피 흘리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골고다 언덕에서 아들이 흘리는 그 피를 받으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그 기도의 땀을 받으신 후에 비로소 그의 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고 매일매일 성화의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성화의 삶을 살아갈 때 얼마나 많은 방해가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끊임없이 자기 사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우리 안에 부패한 자아의 성향, 끊임없이 눈에 들어오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그 표상에서 오는 정욕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게으름과 싫증들, 한때는 진리의 말씀에 깊이 사로잡혀 그 진리를 기뻐하지만 어느 한순간에는 그 진리를 싫증나하는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이 싫증들,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수많은 난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 안에 끊임없는 은혜로 말미암은 쇄신의 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쇄신의 작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자기를 드리는 헌신적이고 간절한 지속적인 그 기도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감화를 유지하고 역사하게 하여서 자신들을 쇄신시킨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너무나 게을러지고 나태하고 안일해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주셔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깨어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물러가면 우리는 다시 기도의 게으름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이 우리가 환경이라는 어려움이라는 채찍에 맞음으로서 비로소 기도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보다 깊은 영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생활이 환경에 휘둘리는 채찍에 의해서 기도하게 되는 그런 수준에 반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환경에 채찍과 같은 징계 받은 어려운 일, 연단 받을 고난의 길은 없다고 할지라도 착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던 지상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고 예수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삶, 그런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3. 쉼 없이 고생하나
주님의 일생은 기도로 살아가신 생애였습니다.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그때도 예수님께서는 유대광야에서의 40일의 금식기도로 공생애 첫 장을 여셨습니다. 많은 세월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그들을 사도로 세우실 때도 예수님께서는 온 밤을 지새우시며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위해 기도할 때도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다 드려 땀이 피처럼 흐르는 기도 속에서 내일 당하게 될 그 고난의 십자가의 맛을 보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도 예수님께서 남기신 일곱 마디의 마지막 말씀의 대부분이 기도였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자기를 다 드린 말할 수 없는 헌신의 삶이었고 거기에 자기를 다 바치신 생애였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추우면 춥고 굶주리면 배고프시고 고단하게 일하시는 것보다는 쉬시는 것이 더 편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이렇게 기도의 생애로 사셨던 것은 예수님께서 똑같이 자기의 육신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자기 극복의 과정들을 거치셨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이성적인 결론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흠도 없고 죄도 없으셨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하나님께 언제나 사랑으로 충만한 가운데 바쳐지셨기에 훨씬 쉽게 그 일을 하셨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마음 안에 부패와 더러운 욕망들, 자기 사랑에 깃들여있으니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보다 자기를 더 많이 죽이지 않으면 기도의 삶을 살수 없는 기도의 위치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그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기도하는 나를 죽여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순종하기 싫어하는 나를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나를 설득하고 일깨워야 합니다. 그 길이 어렵고 고통이 있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 길이 우리에게 가장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예수님이 고난에 넘치는 당신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쉼 없이 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기를 모두 쏟아 붓는 고역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30이 갓 넘으신 예수님은 얼마나 고단으로 넘치는 삶을 사셨는지 50이 된 사람처럼 보이셨으니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주님이 받으신 그 고난과 노역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착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됩시다. 마음을 세우고 우리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사는지를 하나님 앞에 거침없이 쏟아놓는 그 자기 중심적인 교만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삶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 헌신된 기도생활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고단한 생애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아무리 힘겹게 주님을 섬긴다고 할지라도 주님보다는 고단한 생애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채찍질함으로서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자신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께 싫증내고 기도에 헌신하기 싫어하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쳐서 복종시키는 그런 철저한 헌신을 통해서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갈 수 있고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우리 자신과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삶에 상황을 보십시오. 은혜의 단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열심히 쟁기와 호미로 땅을 파고 씨를 뿌리지만 은혜의 단비가 내리지 않아 싹은 나지 않는 수많은 섬김의 밭들을 봅니다. 그 위에 먹구름이 일고 은혜의 비가 내렸더라면 아마 지금쯤은 우리가 땀을 닦으면 허리에 손을 얹고 우리의 삶의 밭 주변에 정말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는 섬김의 밭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많이 수고하는 우리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고 우리의 많은 모략과 책략들은 허공중에 흩어집니다. 주님의 축복 없이 걷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리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에게 축복의 단비를 내리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의 역사로 그들을 축복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혼자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비를 내리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 아니면 살수 없을 것처럼 매일매일 눈물로 무릎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는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많은 능력을 주셨지만 능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많은 은사를 주셨으나 은사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많은 물질과 기회를 주셨으나 그것을 붙들지 아니하고 오직 매순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살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4. 기도 더하기
오늘 보십시오. 새벽미명에 일어나서 잠든 제자들의 발치를 살금살금 지나 캄캄한 어두움 속에 빈들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처절한 기도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 아버지 앞에 어린아이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렇게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매순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물이 흐르도록 주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도록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한순간도 그분 없이 살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우리가 따라가야지 됩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삶의 짐과 수고의 무게가 너무 크다고 느껴질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십자가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셨던 예수님의 그 일생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매일매일 그 십자가로부터 감화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런 감화의 연장선상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런 것이어야 합니다.
요즘 저는 큰 능력, 하나님 앞에 큰 축복 이런 것을 받은 성도들보다 착한 마음을 받은 성도들을 보고 싶습니다. 부족하고 약하나 착한 성도들,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고 혼자 넉넉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분초마다 주님이 붙들어주시지 않으시면 자기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래서 잘 몰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성도들, 어찌하든지 주님께 잘 보이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자기를 끊임없이 고치고 싶어 하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자기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사람의 유익보다는 주님의 유익을, 세상의 행복보다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깨트려서 평화의 도구로 주님 앞에 바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런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풍성한 기도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편인데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기도로 하늘 문을 열라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3:21-22)
1. 하늘 문이 닫혀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어느 때는 하늘이 막힌 것 같은 그런 캄캄한 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정말 영적으로 하늘이 막혀있는 그때입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밖으로부터의 어떤 도움도 없이 훌륭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게끔 그렇게 만들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살 수 있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불신자인 시절에는 갈급함 같은 것 그런 것 잘 모릅니다. 그냥 괴롭고 힘든 때는 있지만 갈급하고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거듭나고 나면 우리들이 이런 갈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늘의 문이 굳게 닫힌 것 같고 아무리 좋은 하늘의 자원이 우리에게 부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마치 장기간동안 비가 오지 않는 들판에 피어있는 풀꽃같이 마르기 시작합니다. 이때는 다른 무엇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그 열려진 하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생기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은혜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외적인 삶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시들고 하늘의 문이 닫히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 전체에 어려움이 오게 됩니다. 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다는 느낌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의 삶에 상황을 계속 막으신다는 느낌이 들 때 있습니다. 하늘이 닫혀있는 때입니다. 그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하늘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그 생기를 받은 영혼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상황을 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 없이 혼자 이 세상에서 씩씩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가운데 그렇게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매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은혜로 열려진 하늘을 통해 공급되는 그 공급된 자원을 통해서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늘의 문이 굳게 닫힌 것 같아서 내 영혼은 시들기 시작하고 나의 삶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의 축복이 더 이상 없는 것 같이 계속 어려움을 맞이하게 될 때 그 해결의 길은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인데 어떻게 그 문을 열수 있겠는가?
2. 하늘이 열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의 본문의 장면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백성과 함께 받으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신 분이셨기 때문에 죄 씻음의 표인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세례를 받으셨는데 하나는 이 세례를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공적으로 취임하시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그렇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 백성들과 모두 이렇게 하나가 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하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정확히 적용되는 진리이니 오늘 우리도 기도하면 우리의 영혼을 향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핍절하고 갈급하던 영혼에 하나님이 만족을 주십니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 이제 주님의 은혜가 다하였는가. 내가 아직까지도 주님께 무엇인가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애정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시는가? 이렇게 의문과 회의를 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오히려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이켜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쇄신시키시기 위해서 때때로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침묵하실 때도 있지만 기도가 하늘 문을 연다고 하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문이 열리면 곤고한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가 부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어떠한 말씀도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령이 둔탁하여져서 그렇게 환경 속에서 외치는 주의 음성도 들을 수 없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은혜의 단비를 내리시기 시작하면 그들의 영혼은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하늘의 문에 열릴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풀 수 없게끔 상황이 굳게 닫혀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하늘의 문을 열어서 인간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에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줍니다. 그리고 하늘의 문이 열리면 오랫동안 막혔던 삶의 상황들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정말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 애써도 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시면 우리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풀기 시작하십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심령의 곤고함은 물론 환경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도저히 풀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많이 애쓰고 힘쓴다고 할지라도 염려와 근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더럽히고 심지어는 신앙을 팔아서 인본주의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분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고 계시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이 문을 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너무나 기도하지 않은 우리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마음 아프시지만 사랑하는 우리들을 고난 가운데 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평범한 때는 들리지 않았던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그래서 삶의 상황 가운데 분투하고 씨름하다가 눈을 들어서 하늘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닫혀있는 문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하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아멘!
3. 성령이 비둘기처럼
두 번째는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것, 그것 하나가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축복을 해주시는데 성령이 충만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타락의 기회로 삼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지위를 높이시면 그 높은 지위에서 충만한 성령으로 주님을 섬길 것이고, 주님이 물질을 많이 주시면 그런데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그 물질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데 하나님이 그에게 건강을 주셨다면 그는 몸 바쳐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그에게 재능을 주셨는데 충만하다면 그 재능은 주님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고난이 온다고 칩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에게 고난이 오면 그때는 주님과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때가 되지 않겠습니까? 고난 속에서 세상을 향한 어떤 희망도 모두 끊고,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이제껏 제가 많은 책을 썼지만 이번에 쓴 자기 깨어짐을 오래도록 사랑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가장 아픈 시기를 지났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제게는 그때가 목회를 하며 제일 행복하던 시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주님의 은혜의 영이 제 안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어찌 고난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같이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시고 우리같이 무딘 사람들에게 신령한 은혜의 감각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같이 부패한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쇄신시키기 위해서 시시때때로 고난을 주십니다. 그런 고난의 때를 하나님께서 지나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난의 때를 지날 때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해보십시오. 그는 가장 치열한 고난의 때를 지나면서도 자기가 깨어지는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고난의 때를 지나면서 가장 자기 가까이 계신 주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돌아보면 고난의 때에 주님과 매우 가까웠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 특징은 성령님의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환경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다주십니다.
한번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까? 우리의 가슴에 주님의 마음에 흐르던 그런 눈물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돈 많은 사람, 그리고 능력이 많고 은사를 소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마음은 본성이니 그 본성을 따라서 사람은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섬기셨던 곳에 우리도 허리를 굽히게 하시고, 주님이 기도하셨던 곳에서 우리도 무릎을 꿇게 하시고, 또 주님이 눈물을 흘리셨던 곳에 주님과 꼭 같은 마음의 아픔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주는 이것이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이런 성령의 충만함이 언제 예수님께 임하셨나요? 예수님이 그 강에서 기도하실 때 이런 성령의 충만함이 주님께 임하셨습니다.
인생을 오래 산 것이 길게 산 것이 아니요, 인생을 짧게 마감한 것이 짧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섬겼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섬긴 인생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충만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영감 있는 사역을 했는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 삶에 여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부어지는 것은 기도할 때였습니다. 많이 섬겨도 열매가 없는 것은 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섬기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모양은 있으나 그 열매는 매우 작고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그 결실은 희박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의 섬김을 근본적으로 섬기도록 만들어주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이런 충만함이 여러분들에게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사모하십니까?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4.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
마지막으로 보면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청교도들이 이야기하는바 이중의 인침인데 하나는 관계에 대한 인침이고, 또 하나는 사역에 대한 인침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인을 쳐 주는 것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을 좋아하시는 그것을 인치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과 시련의 때를 지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린다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이 말씀을 해주시고 그 음성이 우리의 마음에 들리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에 가장 격렬한 폭풍의 때에 우리는 주님과 손을 꼭 잡고 사랑의 밀어를 나누며 인생에 가장 어두운 폭풍우 한복판을 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공생애 들어섰지만 이제는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고 죽으실 작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공생애 시작하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애야, 네가 고난을 많이 받을 것이야. 사람들이 너를 싫어할 것이야. 네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너를 모함하고 배신할 것이야. 그리고 결국은 네가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들이 너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야.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너를 기뻐한단다. 이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일생동안 예수님께서는 이 음성을 붙들고 사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 어떠한 때에도 그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때가 없이 심지어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는 그때조차도 가장 가까이 하나님 아버지를 느끼며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바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문제는 하나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만 한다면 어려운 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그래서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의미는 몰라도 이유는 몰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 때로는 그 고난이 너무나 심해서 눈을 감으면 다시 뜨고 싶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상한 고통의 때를 지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거기에서 내 손을 붙들고 계신다면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고난이 될 수 있겠습니까?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의 고난이 겹칠 때 저는 이 노래를 부르며 살아왔습니다. ‘주님이여 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여주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배운지 20년이 넘은 노래지만 언제나 고난이 올 때마다 제 마음에 울려 퍼집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원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에워싼 폭풍이 얼마나 심한지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 싸움은 어차피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도 우리 편이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내게 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기도하실 때 그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성도가 주님 앞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모습은 무릎을 꿇고 전심으로 주님을 구하며 자신이 깨트려져서 하나님을 등졌던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를 빚으시도록 주님께 허락해드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수 있는 최고의 모습입니다. 깨트려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음성이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들렸습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주 모습 내 눈에 안 보이고 그 음성 내 귀에 안 들려도 우리가 무릎을 꿇고 주님을 전심으로 구하면 주님이 쓰레기와 같은 우리 인생에도 찾아오십니다.
5. 열어주소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번 과거의 신앙의 경험을 회상해보십시오.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경험한 때는 언제나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 있었던 때였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용서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격하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막혔던 하늘의 문이 열리고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이 여러분들에게 다시 부어지고 그리고 다시 여러분들에게 친절히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뛰놀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이 기도는 어떤 경건서적 작가가 말하기를 이 기도는 마치 먼 바다에서 진귀한 물건을 동방에서 가득 실고 오는 배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 기도는 모두 좋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당신이 기도하실 때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기도에 본을 따라서 기도를 통해 이런 것들을 얻으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손을 얹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놓여 있는 삶의 상황, 엉클어진 것 같고 혼란스러운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조용히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환경을 보지 마시고 그것은 도구에 불과하니까 눈을 더 높이 들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막힌 하늘의 문을 여시옵소서, 나를 충만하게 하시옵소서, 나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십시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이런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환경을 이기는 기도생활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1. 예수께서 기도 하시다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이었습니다. 한 18년 전의 일인데 그때 저는 대학에 선생으로 있었습니다. 그때가 아마 봄날로 기억이 되는데 공부하던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그리고 오후에 시간에 혼자 개인교수실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창문 밖에는 바로 산이 있어서 아주 신선한 공기가 계속 내려오는 작지만 그러나 참 편안하고 제게 기쁨을 주는 방이었습니다. 그 창가에 성경을 펼쳐놓고 조용히 묵상을 하고 있는데 이 11장에 1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고 마치시매 제자중 하나가 여쭈어 가로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한 절을 읽는데 아주 강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절을 3시간 동안 읽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많이 녹이시고 이 1절을 그 당시 교회에 돌아가서 제가 한달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거나 책망하시거나 변화시키거나 바꾸실 때에 언제나 세월이 흘러가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놓으십니다. 기도할 수 없었던 사람의 마음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바꾸어놓는 것은 고난으로 가득 찬 환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수단에 불과하고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렬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신자가 편안한 환경이라고 해서 기도를 모두 포기하고 뒤로 미끄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마음과 정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영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잠들어있는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켜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의 기도에 불꽃이 담겨지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은혜를 잊어버릴 때마다 제가 여러분들 앞에 늘 부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에 깊이 자극을 받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거룩하고 신령한 자극을 받으려고 애를 써야지 됩니다. 기도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제일 먼저 회개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부주의하게 간수했다는 것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이런 진정한 회개의 자각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에 이 말씀이 깊이 꽂혀서 3시간 동안 읽고 읽은 것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그 진리를 묵상해가면서 한없이 많은 은혜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이 1절을 가지고 한권의 책을 쓰는 것이 저의 소박한 바램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1절에 담겨있는 깊은 기도에 관한 의미를 우리들이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한번 중요한 요점들을 살펴봄으로서 여러분들도 마음이 변화되고 뜨거워져서 18년 전에 저처럼 다시 기도에 불붙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제일 먼저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러면서 기도한 주체의 이름이 여기에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라고 하는 이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평범해 보이는 이 단어를 우리들이 좀 더 마음을 열고 생각해보면 사실은 이 글처럼 무모한 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그분도 기도하셔야 하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이 너무나 비참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도 속에서 많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도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죄가 수시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관계를 가로막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습니까? 유리창을 오래 닦지 않으면 오물과 먼지가 끼어서 밖을 칙칙하게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영혼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씻어냅니다. 그래서 맑은 창문처럼 맑은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듯이 하나님을 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의 지혜로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많은 삶의 상황들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서 그 의미를 터득해갑니다. 시련과 어두움을 만나면 왜 그런지 몰라서 갈팡질팡 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시련과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안정감을 가지고 다시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약점들이 사실 예수님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오늘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기도하신 데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핵심을 간추리자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 지상에서의 생애가 정말 사람의 몸을 입으시기까지 낮아지신 생애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나 여전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성의 유익을 감추시고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를 제외한 모든 약점을 스스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기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많으셨지만 능력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시고 또 의로우신 분이였지만 죄인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며 오히려 죄인들의 용서를 하나님 앞에 비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지만 주님이 아니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며 주님께로부터 지혜와 사랑을 공급받으시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지 아니하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눈에 보이게끔 가르쳐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당신이 친히 기도하심으로 우리가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기도에 생애를 사심으로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존재가 그분을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능력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셨습니다. 죄가 없이 순결한 분이심에도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리고 우리들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주님 앞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주님께로부터 사랑과 지혜를 공급받는 수단으로서 이 기도를 사용하셔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심으로 사람들에게 지혜 있게 말씀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사랑을 끝까지 사랑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기도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될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그분의 생애 전체는 자기 자신을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바친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본을 보면서 우리는 날마다 깨닫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이어가게 하셔서 거룩하고 신령한 능력이 우리 안에는 없구나,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도 하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았다면 죄가 가득한 악한 우리 죄인들은 얼마나 더 많이 주님의 신령한 은혜가 필요한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의 신자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냥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매순간 주님께 기도의 문이 열리고 순간순간 깨트려져 하나님 앞에 매달려 마음이 쏟아 부어지는 이런 자기 깨어짐의 은혜를 수없이 경험하는데도 아직까지도 하나님 앞에 다듬어지지 않은 그런 불결하기 짝이 없는 죄인의 모습이고 수시로 주님을 거슬려 불순종하기를 쉽게 여기는데 만약에 그런 깨어짐의 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악한 사람이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기도가 바로 그런 시간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 속에서 자기 의에 대해서 깨트려지고 부당한 자기 사랑에 대해서 못 박혀 그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릴 때 그의 마음과 영혼과 삶 전체는 부드러운 진흙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떻게 빚으셔도 순종하고 그분의 손에 의해서 빚어지는 한줌의 진흙이 되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앙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2. 한 곳에서 기도하다
두 번째는 한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희랍어 성경에서는 엔 토포이 티니(evn to,pw| tini.)라고 말하는데 직역을 하자면 어떤 장소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certain place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생활이 일관성은 있었지만 그 장소가 일관성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나그네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지만 내일은 저기서 말씀을 전하시고 또 여기서 말씀을 전하시지만 내일은 다른 곳에 가서 병자를 고치셔야 했으니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우리가 이제는 다른 동리로 가자.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살고 종교지도자가 있는 예루살렘에서만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과 같은 번화한 도시에도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은 상종도 하지 않는 버림받은 땅에 가시고 사마리아에도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계셨던 어린 시절이 계셨던 갈릴리에 가셔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예수님의 생애는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그렇게 다양하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곳에는 빈들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떤 곳에서는 산에서, 어떤 곳에서는 겟세마네에서, 어떤 곳에서는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으니 이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끊임없는 여행의 생애였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복음을 듣지 못해 곤고하고 살아가는 영혼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장소든지 그리고 정말 주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어떤 곳이든지 주님이 가셔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동가식서가숙하며 떠도는 생애였습니다. 그런 생애 속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장소를 택하셨고 어느 곳에 계시든지 일관된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으니 깊은 밤과 미명의 시간이 주님의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누가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하도 불규칙했기 때문에 이 글을 쓸 때는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어떤 곳이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평탄한 은자의 생애는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섬김과 그리고 공사로 이어진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새벽과 깊은 밤에 기도하신 것은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이른 새벽 미명과 그리고 깊은 밤이 바로 모든 섬김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당신의 수면을 할애하셔서 기도에 바치시고 그리고 쉬실 수 있는 그 시간은 모두 영혼들을 섬기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생을 섬기기 위해서 사신 생애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섬김을 모든 사람들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핍박과 도전과 그리고 논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원수들에게 둘러싸여있는 것 같은 그런 곤고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넘치는 생명력과 지혜와 사랑이 그 모든 것을 극복하며 살게 하셨으니 이 모든 자원을 공급받는 신령한 통로가 바로 새벽 미명의 기도시간과 깊은 밤에 간구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고단한 생애를 사시면서 당신 자신에게 공급되는 이 은혜의 통로를 기도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환경에 핑계를 대고 기도의 줄을 놓아버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오늘도 불규칙한 생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규칙적인 기도의 삶을 실천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얼마나 게으르고 나태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월요일은 주일날 열심히 섬겼으니까 피곤해서 기도를 쉬고, 화요일 날은 화나는 일이 있어서 기도를 쉬고, 수요일 날은 그냥 수수하게 기도를 쉬고, 목요일 날은 수요예배 참석하고 왔기 때문에 목이 부어서 기도를 쉬고, 금요일 날은 금에 정신이 팔려서 돈을 버느라고 정신 못 차리다가 기도를 쉬고, 토요일 날은 토할 것 같아서 쉬고, 일요일 날은 교회에 일이 많으니 쉬고 결국은 한주 간에 핑계 없는 날이 없어서 거의 기도를 못합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너무나 쉽게 환경과 타협하고 우리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로 된 십자가만 무성하지 실제의 십자가는 별로 없습니다. 그 십자가 중에서도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당하게 되는 그 상대적 십자가를 제하고 나면 그 다음에 진짜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마음이 어둡고 외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님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이 기도는 매일매일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는 영혼을 육체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기 극복의 노력 없이는 실천할 수 없는 덕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 속에서 당신의 공의를 가장 잘 보여주십니다. 고난과 역경,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선한 의지를 품고 매순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 섬김의 축복을 구하는 사람들, 그래서 수시로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그 은혜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그의 인격이 주님을 더 빨리 닮게 하십니다. 그의 일상생활에 복을 주시고 그의 섬기는 모든 일에 축복하셔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기쁨을 느끼게 하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매순간 자기와의 싸움에서 실패하고 뒤로 미끄러지는 사람들, 선한 의지를 간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스스로 악을 택하고 미끄러지는 사람들, 잃어버린 기도의 영속에서 곤고한 영혼을 안고 살아가게 하심으로서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꺾으시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자신이 너무나 게을렀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육체의 곤고함과 영혼의 곤고함을 아울러 경험하게 하심으로서 자신이 기도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몸소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겸손의 모든 영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모든 영혼의 특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꺾어지고 기도 앞에서 자신이 깨트려질 때 솟아나는 샘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격이 일천하고 그리고 그의 삶이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로 인해서 하나님께 헌신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수시로 기도의 세계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때문에 그 말씀 앞에 자신이 꺾어지고 그래도 기도의 은혜가 살아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자신이 물같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연약하지만 나중에는 강하게 될 것이고 지금은 오류에 빠졌지만 나중에는 참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죄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지만 결국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그들은 약하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경에 핑계를 대지 말고 기도해야지 됩니다.
옛날에 저희 할머니 살아계실 때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애들아, 가서 뭐 좀 하라. 싫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항상 할머님께서 몸소 일어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애들아, 어차피 죽으면 다 썩을 육신인데 뭘 그렇게 아끼느냐. 그러셨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고단한 노력의 연대기와 같은 삶 속에서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보다 넘치게 건강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계셨지만 주님 앞에 올곧음을 가지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겨야 합니다. 열렬히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쉬게 만들고 육신의 요구를 따라서 기도를 쉬면 그 다음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요구 상황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영혼에 아름다운 전일성이 다 파괴될 때까지 우리를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랬습니다. 여기서 “마치시매” 라고 하는 단어는 희랍어로 에파우사토(evpau,sato)인데 이 단어에 맞먹는 동치어가 히브리말로 샤바트(tb;v')이고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아는 안식일이라고 하는 Sabbathday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기도하고 마치시매” 라는 이 단어는 엄밀하게 말하면 “기도하고 쉬시매” 라고 번역되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의 시간이 장시간의 기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짧은 기도로도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평소에 오랜 시간을 기도로 바친 사람들에게 그런 역사가 나타나지 평소에 판판히 놀던 사람이 기도의 시간에 장시간 자기를 바치기 싫어서 짧은 시간에 승부를 보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사행심입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은 한마디의 기도로 하늘의 달과 그리고 해를 멈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하나님 앞에 깊은 기도 속에서 자기를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해서 하나님 앞에 공동체가 회개할 때 회막을 짓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거기 나가서 주님께 빌었습니다. 모세조차도 숙소로 돌아갔을 때 마지막까지 남아서 그 회막을 지키며 기도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던 것입니다. 바울이든지 또 심지어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짧은 기도 속에서 비상한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마디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쫒아내신 그 이면에는 이렇게 장시간을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치신 기도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가능합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경고가 됩니다. 주님이 주신 많은 자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됩니다. 주님이 주신 많은 기회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고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모든 것들은 주님이 사용하실 때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기도의 필요성이 감퇴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 많을수록 주신 것을 의지하지 말고 그 주신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며 방법들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우리들이 좀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것이 기도의 목표가 아니라 깊이 기도하려고 하면 그 깊이는 반드시 길이를 동반하게 되고 깊이 있고 그리고 긴 기도는 깊이는 있지만 짧은 기도보다도 훨씬 위대한 능력이 있고 만약에 길지 않다면 깊이가 있는 그 기도도 결국은 길이만큼 깊이도 얇아지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깊은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4. 기도를 가르치시다
마지막에 보면 제자 중 한사람이 나와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고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나가셨고 늦게 일어난 제자들이 허둥거리며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은 빈들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가까이 범접하기에 어려운 그런 비상하게 신령함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고 기도가 끝나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빌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생활이 감화력이 있는 기도생활의 모범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구역의 식구들이 여러분보고 배웁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보고 배웁니다. 기도안하고 판판히 놀면서 인생을 살아갈 때 여러분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하고 괴로운 인생이 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자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인생을 마름하고 죽는다면 자녀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기억이 나겠습니까? 늘 가계부를 붙들고 한숨을 쉬는 모습이 어머니인 여러분의 모습으로 자녀들의 마음에 남는다면 여러분들은 인생을 잘못 사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돈 통이나 매만지면서 통장이나 보면서 미소를 짓는 아버지의 모습이 여러분들의 자녀의 가슴속에 새겨진다면 여러분은 인생을 잘못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분쟁이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사람이나 욕하고 교회에 와서 지체들의 험담이나 하고 이런 모습으로 여러분의 모습이 자녀들의 마음에 새겨진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스스로 사랑하는 자녀의 영혼을 망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에 지위가 높지 않고 그리고 많은 제물을 우리에게 물려주지 않았어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기도하시던 모습, 침상에서나 식탁에서나 서재에서나 사업장에서나 어디서든지 주님과 교통하던 아버지, 언제나 기도의 자리에는 눈물이 고이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위로로 삼으며 기도하던 우리 아버지,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괴로울 때 늘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던 우리 어머니 무릎으로 우리를 길러낸 우리 엄마 그것이 자녀들의 가슴에 새겨져있어야 합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니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내게는 그런 경건한 엄마, 그리고 그런 기도의 눈물을 간직한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불행은 여러분대로 끝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자녀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늘 자녀를 안고 기도해주고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고단한 생애를 사시면서도 예수님은 그 어떤 제자들보다 더 많은 기도에 자기를 바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이 제자들의 가슴에 깊은 감화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우리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그 신령하고 심오한 기도에 회개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달라고 제자가 간청할 정도로 주님은 감화력이 있는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기도해야지 됩니다.
오늘 가서 조용한 시간에 자녀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애야, 엄마 이렇게 말하면 네 마음에 떠오르는 그림이 무엇이냐, 아빠가 죽고 나면 아빠의 일생 중에 어떤 모습이 네 가슴에 오래도록 새겨질 것 같으니?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더 많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그 자녀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던 아버지, 기도로 살던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에 새겨진다면 수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그 아이를 보호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믿은 사람들은 이제 믿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참 주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본보기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 하면 여러분 자신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체들에게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할지 모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겟세마네의 기도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3-44)
1. 하나님의 뜻을 구하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기도의 생애였고 이런 기도의 생애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으로부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순간까지도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로 마치기까지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그야말로 기도하신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기도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인데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육신이 자유로운 가운데서 드리신 기도로 마지막 기도로 성경에 적혀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금요일 날 아침 9시에 시작되어서 오후 3시에 끝났으나 영적인 고난은 이미 그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눌 때부터 예수님에게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영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그 가장 선명한 그림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이 속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많이 사랑하셨지만 특별히 세 제자를 아끼셨는데 베드로와 요한과 그리고 야고보였습니다. 이 세 제자를 데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곳 가까이까지 가셨고 그리고 거기에서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돌을 던지실 만큼 떨어진 그러니까 꽤 먼 거리에까지 예수님 혼자 떨어지셔서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놓고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겟세마네서 드리신 이 기도는 크게 세 가지로 그 자세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커다란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의 이 기도가 당신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면서 왜 할 수 있으면 이 잔, 십자가의 고난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을까? 의문을 표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괴로움을 모두 느끼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죄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 복종된 적이 없이 일생을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을 의미하는 이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셨을 때 하나님 앞에서 당하게 될 그 끔찍한 심판과 그 고난을 우리보다 더 많이 느끼셨기 때문에 아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복종하신 그것은 우리가 죽음에 숙명적으로 복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우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아직 십자가를 지시지는 않으셨지만 다가오는 십자가를 보시면서 이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번도 관계가 서먹해지거나 멀어진 적이 없이 완전한 연합 속에서 사셨던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십자가를 아직 지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의 온 마음과 영혼이 경험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또 다른 길이 있거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신 자신을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져 심판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룰 수 있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주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예수님의 이 기도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결국은 예수님이 마지막에 구한 것이 당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기도의 가장 높은 수준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 없고 주님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우리들이 그 기도를 통해서 변화되어 그래서 주님에 의해서 충분히 빚어지는, 주님 자신으로 인해서 충분히 변화되는 그런 우리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바라고 원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응답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가 정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가 아무리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의 자세와 정성이 하나님 앞에 충분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한 이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의 응답을 지연시키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많이 기도하고 온 마음으로 기도해도 만약에 그 기도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한번 우리는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이 정말 올바른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운 뜻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였습니다. 자기의 뜻을 다 포기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모두 버리고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을 알게 해주시면 우리가 그 주님의 뜻을 좇겠습니다. 하는 자기를 주님 앞에 전적으로 복종시킨 그런 순종의 자세도 또한 필요한 것을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자기를 굴복하는 사람의 짧은 기도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완고함을 가진 사람들의 긴 기도보다도 하나님께 호소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나아가는 사람은 항상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나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시든지 내가 그 뜻대로 하리라. 그리고 나의 이 부르짖는 기도도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 갈망 가운데 하나라는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훨씬 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얻어내려고 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 속에서 자기 포기를 먼저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일생을 사시는 동안에 사랑하신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분에게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뿐이었고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사랑 밖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마음에 포기할 것이 있는 것처럼 기도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아니하고 이기적이고 부당한 자기 사랑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려놓고 포기해야지 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이런 자기 포기의 정신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기적인 기도제목에 매달리게 되고 우리의 많은 기도의 정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기도의 제목 속에서 폐기처분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뜻을 다 버리고 주님의 뜻을 좇겠다는 그런 마음과 삶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뜻은 다 꺾어져도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그 고백,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유익을 포기하고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주님이 싫으면 내가 버리고, 나는 죽는다 할지라도 나의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택하는 믿음, 그래서 삶의 중심축이 내가 아니라 주님께 된 사람, 그 사람들은 통성으로 부르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비탄하게 하나님 앞에 목 놓아 부르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마음이 그렇게 정해진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할 때 그들의 마음이 녹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기도제목의 간절한 것 때문에 마음이 녹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을 때마다 지존하신 하나님과 그분을 거역하며 살려고 하는 자기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나 자주 처음에는 환경을 바꾸어주도록 목 놓아 기도했는데 기도가 깊어지면서 오히려 환경은 내버려두시더라도 나를 바꾸어달라는 기도로 이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도가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자기 포기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이 꺾어지는 포기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2. 천사가 도와주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이 기도는 천사가 와서 자신을 도와준 그런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의 기도에 많이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날 밤의 기도는 다른 날밤의 기도와는 달랐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때가 당신이 죽어야 할 때를 아셨고 제자들 중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죽음의 시간을 예수님 홀로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당신이 많이 사랑하는 제자에 의해서 배신을 받으며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게 될 그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고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당신 혼자이시지만 당신이 그것을 잘 감당함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많은 결실을 맺는 것처럼 그렇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셨고 육신을 가지신 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신은 그 기도 속에서 피곤해져서 당신 자신의 힘이 모두 소진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기도를 도와주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여기서 깨닫게 되는 사실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할 때 처음에 기도할 때는 우리가 기도하지만 우리가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기도해서 우리 자신이 소진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을 통해 도와주십니다. 기도의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내가 기도했으나 그래서 주님이 들으셨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 자신이 내 안에 오셔서 기도하시고 내가 그 기도를 들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힘을 내고 그리고 분산되려고 하는 내 정신과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기도할 때 갈리려고 하는 마음, 나뉘어 지려는 생각, 오가는 수많은 잡다한 상념들과 더불어 우리는 싸웁니다. 마치 흐르는 물줄기를 거슬려 헤엄을 치는 사람과 같이 우리는 이것과 더불어 부단히 싸웁니다.
그러나 그 초보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열렬히 무엇에 의해서 방해받지도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물의 흐름이 멈추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좀더 시간이 지나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부으며 기도하노라면 이번에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육신을 빌어서 당신이 하시고 싶은 기도를 하시고 우리는 그 주님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과 마음이 온전히 물이 되어 녹고 그리고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소원과 우리가 합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 같지만 주님이 오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할 때 우리들이 세웠던 기도제목과 기도의 계획들을 무시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로 우리를 이끌고 가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전수받게 만들어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혼신의 힘으로 기도하는 그 기도의 정수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기도의 정수 속에 들어가셨습니다. 온 몸의 힘이 탈진하게 되었을 때 천사가 도왔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열렬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평안하였더라면 결코 부서질 수없을 우리 자신의 자아를 깨트리십니다. 거기에서 통회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자복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 안에 있던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경향성들을 바꾸십니다. 본성을 쇄신시키십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자신의 육체의 힘이 다 소진하도록 매달리는 그 사람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힘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도 속에 육신의 힘을 소진해서 더 이상 힘이 없을 때 성령님께서 그들을 도우십니다. 그들을 약하게 하셔서 그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기도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죄가 있으신 분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외면하실 만큼 예수님께서 불순종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께서 당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고난과 핍박을 이 세상에서 겪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새가슴이 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자신의 온 육체의 힘을 소진하시기까지 매달려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당신 자신을 위하신 것이 아니라 그 중보의 기도를 통해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육신의 온 힘을 소진하시기까지 하나님 앞에 매달리셨고 그렇게 온 힘을 다 쏟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기도를 돕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많이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보실 때 정말 기도하는 네가 힘이 다하였구나. 내가 천사를 보내어 너를 돕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느끼실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에 우리 자신을 드린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육신에 즐거움을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를 말할 수 없이 고단하게 사용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을 위해서는 우리의 육신을 얼마나 아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 열렬한 기도라고 하는 것은 단지 육신으로 소리를 지르고 부르짖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기도와 성화’라는 책에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쏟는 기도를 ‘피의 펌프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정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모으고 그리고 온 마음을 끌어안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마치 심장이 피의 펌프질을 하는 것같이 마음이 오그라들었다가는 모아지고 모아졌다가는 다시 펴지고 펴진 마음이 다시 오그라지고 모아집니다. 이 일들을 반복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생각과 욕망으로 흩어졌던 우리의 마음이 그 펌프질을 통해서 나쁜 생각과 더러운 기억들을 모두 몰아내고 하나님을 향해 진지하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 피의 펌프질을 오래 하는 동안에 우리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하고 우리의 육신에는 힘이 진하고 그리고 우리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아파할 때 주님이 느끼시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처럼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도의 은혜를, 당신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진리를, 당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버지의 선하심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도움이 필요할 것처럼 누군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자기를 다 소진하며 드리는 기도의 세계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펌프질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기도가 신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 땅에 많은 날들을 주님을 믿으며 살지만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심장으로 피의 펌프질을 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때가 얼마나 적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은 기도가 아니라 고민 속에서 허공중에 흩어져서 우리의 삶으로 되돌아오고 우리가 섬기는 많은 날들은 기름부음 없이 고단한 노동으로 결과가 마쳐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매달려보십시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3. 고뇌하며 기도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님의 이 기도는 땀이 피가 되기까지 흘리며 기도하신 자기를 쏟아 부은 고뇌의 기도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땀이 피 방울이 되어 흐른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고 한 주간을 금식하며 기도했을 때 소변에 다량의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 진리를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온 힘을 소진해서 주님 앞에 매달리면 우리의 배설하는 땀이나 소변을 통해서 피가 섞여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 자신을 얼마나 짜서 바치셨는지 그 기도의 땀 속에 피가 되어 떨어졌습니다. 죄는 우리 인간들이 졌는데 자기를 짜서 자기의 기도의 땀 속에 눈물에 피를 섞여서 하나님 앞에 드린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죄를 지은 자들이 마땅한 형벌을 받고 죽은들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 안에 있는 또한 사랑의 성품이 주님의 자비의 속성을 자극해서 가치 없는 죄인들을 선대해주시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의 분신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4. 겟세마네 기도의 정신으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 자신의 육체의 진액을 짜서 그래서 그 기도의 땀 속에 피를 섞여 흘리게 했던 그렇게 자기 자신을 도말하여 바치신 그 기도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빌어야 했던 그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대신해주시기 위해서 이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마치 당신 자신이 죄 때문에 아버지께 저주를 받으신 것처럼 열렬히 용서를 구하며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 하셨고 그 기도의 열렬함 속에서 그분의 땀에는 피가 섞여서 땅에 떨어진 그 기도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스스로 곤고할 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곤고하고 괴로운 일을 만나도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피땀 흘려 기도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가 기도할 수 없을 때 중보자가 되셨던 것처럼 또한 이번에는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님과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 대신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나의 원수라고 할지라도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다면 그를 용서해주지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기도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며 사람을 향한 사랑을 그를 은밀하고 헌신적인 기도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입증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의 정신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자세를 배웁니다.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해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 안에서 까리따스의 사랑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고통을 준 원수의 모습 속에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형상을 봅니다. 마음으로 속박했던 모든 것들을 풀어주어서 그들을 자유하게 할 때 자신의 영혼 속에서 자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우리의 마음을 모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많이 섬겨도 열매가 없을 때,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고해도 남는 것이 없을 때, 어려움과 고난이 겹쳐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그때마다 여러분들은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땀이 있는 기도, 눈물이 있는 기도, 피가 있는 기도를 드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자신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도가 쉽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도가 매우 어려운 것이니 전자의 사람들에게는 기도하는 정신이 살아가는 삶의 정신이고 살아가는 생활의 정신이 바로 기도의 영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도가 쉬운 것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삶의 정신과 기도의 정신이 다르기 때문에 기도가 그만큼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숙명처럼 넓혀져 있는 많은 기도의 제목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많은 기도의 제목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 드려 매달렸더라면 얼마나 빨리 응답되었을까요? 그리고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변화되겠습니까? 기도의 시간과 양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예수님처럼 자신의 마음을 짜 바치는 기도의 집중과 헌신, 이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정신으로 기도하며 늘 이기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기도생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