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해야 할 때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번영할 때(신8:13~14) 2005.1.17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
2. 시련을 당할 때(단1:8) 2005.1.18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0
3. 유혹 받을 때(히3:13) 2005.1.19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7
4. 사명이 주어질 때(왕상3:10) 2005.1.20 새해말씀사경회(새벽) 23
5. 외로울 때(시102:7) 2005.1.21 새해말씀사경회(새벽) 34
1. 번영할 때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8:13~14)
우리들이 언제는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때가 없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래도 성경은 특별히 기도해야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특별한 때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시험이 있는 때 이때에는 더더욱 특별히 기도해야 하는 때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잠들어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시면서 “한 시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가 없더냐?” 그러면서 특별히 기도해야할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기도해야할 때가 있는 이유는 또 무엇 때문이냐면 대부분 우리에게 당하는 많은 시험들이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 그 다음에 나의 마음 안에 있는 이 내면의 움직임, 그 다음에 사단의 시험, 이런 것들이 모두 결합이 되면서 어느 한 순간에 우리를 급격한 위험으로 몰아가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때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특별히 기도해야 할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중에 하나가 번영할 때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모세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과 헤어져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제껏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남겼던 하나님의 말씀들을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 새기면서 들려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너희들이 이제 가나안땅에 들어갈 텐데 이렇게 광야해서 했던 것처럼 유리방황하고 고생하지 않고 그리고 그 광야에서 애썼던 것처럼 그렇게 애쓰지 않고 이제 거기에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지어놓은 집에서 살고 거기의 실과를 먹고 이제 곡식들을 거두고 그리고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될 텐데 그것은 염려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네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풍부하고 번영하게 될 때 은금이 많아지고 곡식이 많고 염려가 없는 그런 상황이 될 때 ‘네가 결국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텐데 그것을 네가 깊이 주의하고 경계해야 된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말하자면 번영할 때에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경을 보더라도 고난에 때에 훌륭하게 그 시련을 감당하고 믿음을 지킨 사람이 이 평안하고 번영할 때에 그 믿음을 잊어버리고 이 영혼이 욕망에 뒤엉켜서 그래서 타락한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 아닙니까?
전쟁에 나아가서 칼에 피를 묻히고 사선을 넘나들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전쟁하던 때에는 그렇게 올곧던 사람이 이제 부하들은 전쟁에 내보내고 자신은 왕궁을 슬슬 거닐면서 나태한 시간들을 보낼 때 그때에 깊은 시험이 빠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아사나 히스기야나 이런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제 이렇게 번영하고 모든 것이 잘 될 때에 그때 우리가 깊이 우리 스스로를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도 알지 못할 때에 깊은 영혼의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의 깊은 침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죄를 짓고 갑작스럽게 깊은 침체에 떨어지는 때도 없지는 않지만 그래서 존 오웬도 말하기를 “어떤 순간에 신자는 이해할 수 없게끔 단호한 마음으로 죄를 선택하고 떨어져버릴 때가 있다”고 그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되지를 않고, 먼저 깊은 시험에 들어가서 죄에 빠지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뜨려지기 전에 먼저 서서히 무너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작은 구멍하나로 서서히 물이 들어오면서 제방이 무너지듯이 말하자면 그렇게 우리 자신의 이 신앙이 무너지는 때가 대부분이라는 것이죠.
우리들이 시련과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그 시련과 어려움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물론 신앙이 있는 사람들 이야깁니다. 그러나 평안할 때에 평안한 가운데서 내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 네 가지 사이클을 그리면서 역사가 전개가 되는 거죠. 제일먼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죠. 그러면 그 백성들이 이제 타락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시죠. 그들이 회개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축복해주시죠. 축복해주시면 다시 타락하고 이것이 계속되풀이 되는 거죠.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라는 거죠.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말 하냐면 교만이라고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아주 덜 필요하게 생각을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그 태도, 그 마음가짐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이 교만은 자기 자신이 자기 스스로 교만하다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기가 가장 어려운 죄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죽 떠먹은 자리에 표 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이 다른 죄는 뚜렷하게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둑질을 했다든지 아니면 정결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든지 양심에 가책이 늘 되죠. 그런데 이 교만의 죄는 우리의 마음에 본성하고 너무나 잘 어울리는 죄, 그래서 우리의 본성 속에 숨어있기를 아주 좋아해요. 죄가 하나도 없던 때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것도 결국은 교만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과 같아질 수가 있으며, 또 같아지는 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느냐는 거죠.
오랜 기간동안 순종을 통해서 도달하게 될 수 있는, 이 영생을 확보 받는 그 상태를 단번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 얼마나 교만한 것이냐는 것이죠.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것, 그리고 자신이 혼자 넉넉히 살 수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만은 항상 파국을 몰고 오게 마련입니다. 본성 속에 숨어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런 교만을 이스라엘의 교만을 깊이 경계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항상 모든 것이 평안하고 그리고 부족한 것이 없을 때 그때 우리 마음이 교만하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럴 때 없습니까? 모든 것이 너무 평안해서 특별한 기도제목이 없을 때, 그런 경험해보신적 없으세요? 있죠? 있다고 그래요. 모든 것이 평안하기 때문에 이렇게 애달프게 매달려야 할 기도제목을 찾기 어려운 때 그런 때 있죠? 그것은 결국 뭘 보여 주냐면 환경이 평안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패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만약에 우리의 기도제목이 우리 자신의 행복만을 위한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이치가 성립이 되요. 그래서 사업도 잘되고 애들도 공부 열심히 잘하고 그리고 아내도 건강하고 주위를 돌아볼 때 큰 문제가 없어요. 그러면 자신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하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흔들려요. 돌아보면 모두 평안해요. 그래서 감사한 거죠
하나님 앞에 특별히 매달릴 제목이 없죠. 그 자체가 이미 벌써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평안하면 그것으로써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부패가 스며든 것이죠. 오히려 말이죠, 그 신자가 은혜에 깊이 붙잡혀 있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평안하게 해주셔도 자기의 기도의 지평을 넓히면서 고통 받는 이웃, 그다음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 임하여야 할 하나님의 나라,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이름, 이런 것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죠. 그것이 바로 정말 은혜 가운데 있는 신자의 모습이에요. 근데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에 번영할 때 경험하게 될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교만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큰 땅을 차지하고 자신의 힘으로 왔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모든 것이 풍족해질 때에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누리면서 살아가고, 그것이 결국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교만의 본성이다. 그렇게 될 때 결국은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들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들어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겸비해질 때 그때에는 항상 기도가 살아있다. 그래서 겸비해진 사람, 그 사람의 인격의 특징은 뭐냐면 하나님 앞에 눈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도하는, 그리고 범사에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그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우리도 한번 생각해 보십쇼. 우리도 이제 이렇게 주님을 믿고 처음 구원받은 은혜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우리가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은혜 받고 보니까 하나님, 정말 은혜 받기 전에는 몰랐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리고 나는 정말 더러운 죄인이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달게 되는 거죠. 그런 것이 바로 우리들이 받은 구원의 은혜의 경험이에요.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잊어버리지 말아라.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 거에요.
첫째는 뭐냐면 너희를 애굽땅에서 건져낸 것을 잊지 말아라. 구원을 잊어버리지 말아라.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라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차지하고 그 가나안에서 발달한 그 선진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 팔레스타인지역의 사람들과 어깨를 겨누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 비루한 삶을 살아가던 그 사람들이 그 먼 길을 걸어가서 그래서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되고 원주민을 물리쳤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자기를 그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을 하나님 앞에 늘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번영할 때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번영해있고 모든 것이 염려 없이 모든 것을 누리며 평안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본래 나는 이런 삶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다. 주님이 나를 살려주셨기 때문에 내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교만해질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주시고 번영을 누리게 하실 때에도 다른 약은 없어요. 인간이 너나 할 것 없이 본성이 악한데 시험이 없고 하나님 앞에 애달프게 매달릴 기도제목이 없고 그리고 영혼은 부패해 가고 삶은 점점 풍요로워지면 그들이 마지막 가는 곳이 어디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쇼. 신앙이 없고 돈 많고 시간이 있고 모든 것이 평안하고 게을러지게 되면 그가 마지막으로 가는 지점이 어디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쇼.
오죽했으면 지혜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나를 부요하게도 마시고 그리고 가난하게도 말게 해달라고 오죽 답답했으면 그렇게 빌었겠습니까? 부요하면은 하나님 잊어버릴까 또 너무 가난하면 비천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염려했던 그 지혜자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쇼. 주일날에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의 사명은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먹고 살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사명은 아닙니다.
나는 요즘 들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목회는 이런 목회가 아닌데 그래서 그냥 영화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시골에 조금한 교회에서 교인들 얼굴 모두 알고 서 그런 목회를 꿈꿨는데 영혼을 많이 보내주시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해 보잖아요. 여러분 크게 흐르는 강이 아름다워요 아니면 동네를 휘돌아 흘러가는 실개천이 예뻐요? 사실은 이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질문이다. 강은 강이고 개울은 개울이니깐 말이죠.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죠. 아름답기는 뒷동네를 휘들아 빨래터를 만들면서 흘러가는 실개천도 아름답고 큰 강도 아름다워요. 그런데 개울도 있고 그리고 강도 있어요. 우리는 어차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흘러가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는 어떤 교회는 실개천처럼 흘러가게 하시고 어느 교회는 강물처럼 흘러가게 하시는 거에요.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사람은 개울처럼 흘러가고 어떤 사람은 큰 강물처럼 흘러가요. 그런데 그것은 사실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우냐고 말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 자체가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죠. 강물은 흘러가면서 큰 평야를 만들어요. 개울은 흘러가면서 동네에 밭과 논을 적셔요. 그러니깐 개울이든지 강물이든지 흘러가는 것이 사명이고 흘러가면서 두루 적시는 것이 사명이에요. 그러면 영혼들을 하나님이 많이 보내주시면 그러면 그 많은 영혼들과 함께 이 땅에 자원, 하늘의 자원을 함께 섞어서 우리가 강처럼 흘러가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큰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 산이지만 에베레스트 산이 가장 예쁜 것은 아니에요. 우리나라에도 예쁜 산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래요. 그렇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냐면 우리 모두가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깊이 감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 때 주님이 주시는 많은 것들이 자원이 되잖아요. 사실 교회의 자원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교회의 그리스도의 피로 함께 맺어주신 지체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소유하도록 지정해 주신 것들이 모여서 그래서 그것이 교회의 자원이 되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고 열렬한 기도와 간구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교회를 가득채우고 그것이 이 척박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 자원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느냐가 아니라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순수하게 자기를 구원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자기가 주님이 주신 축복과 번영 속에 있지만은 그러나 자기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다는 것, 그래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를 구원해 주신 십자가의 은혜 이외에 아무것도 아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달게 되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의 지위를 높이시고 많은 물질을 주시고 우리를 풍요한 삶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이 예수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는 그 영적 생활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들이 건강할 수 있어요. 기왕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하늘의 자원과 이 땅에 자원을 주셔서 그래서 더 많이 흘러가도록 이 세상에 고통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셔야 되잖아요.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그 은혜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일 먼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영원토록 잊지 말고 가슴에 새기라고 가르쳐주신 말씀이 “너희들은 잊지 말아라 애굽에서 종 되었던 우리들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서 건져주셨다. 그것을 잊어버리지 말아라.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복주시고 우리를 번영하게 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돼. 뭘? 너는 본래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이었는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를 건져내셨습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두 번째에는 큰 어려움에서 건져주신 것을 시시때때로 건져 주신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닥친 위기가 한 둘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때 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부짖을 정도로 그렇게 두려워했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큰 손이 나타나서 그들을 건져주셨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물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기갈하여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반석을 터트리시고 거기에서 생수가 쏟아지게 하셔서 그 많은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이렇게 살아오면서 지금 우리들이 부족한 것이 없이 번영한 때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도 인생의 과거를 돌아보면 마른땅을 걷는 것 같고 마른 목을 붙들고 그 기갈 속에서 광야를 지나는 것 같은 그런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강한 손, 능력의 편 팔로 우리를 건져주신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겸비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이 많은 번영과 축복들이 사실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인생에 어려운 시기마다 시시때때로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가 있습니다. 인생에 벼랑끝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렇게 구출을 받았던 사람들이 너무나 빨리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신 그 큰 은혜를 잊어버린다는 것이죠.
한 5,6년 전에 제가 신학교에서 가르친 제자가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어떻게 한 번 와서 설교를 해달라고 세 번을 사정을 해요. 그래서 내가 무엇이관데 그리고 바쁜데 시간을 내서 갔습니다. 저 성남에 언덕바지에다가 지하실에 교회를 개척 했는데 잘 안되요. 여전도사가 개척을 했는데 근데 그것도 좀 잘 하려면 깔끔해야지 어떻게 교회당이라고 들어갔는데 설거지 그릇이 구석에 가득하고 어떻게 좀 뭐가 아니다. 그런데 들어갔는데,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 교인이 20명 모여앉아서 말씀을 들었어요. 그리고 나서 차를 한잔 마시고 가라하고 앉아 있는데 자기 속사정을 털어놓는 거예요. 목사님 제가 사명을 받아서 개척을 했는데 목사님 어쩜 그렇게 인간들이 악해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그러니 여전도사가 그 지하에서 별로 그렇게 감각도 없는 사람이 설거지 그릇까지 옆에 쌓아놓고 교회를 하니 그 왠만한 신사들이 오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라고 막 돌아다니면 맨 오는 사람이 말기 암환자. 이제 오고 갈 때 없어서 밥 먹여 줘야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오더라는 거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가 그렇게 기도했는데 말기암 환자들이 낳더라는 거죠. 자기는 그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는데 기도하니깐 유방암 걸린 사람도 낳고, 장암 걸린 사람도 낳고, 피를 토하고 이러던 사람도 낳고 그랬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이 감격하고 이제 딱 와서 교회에서 앉았을 때 이제 하나님이 죽을 고비에서 살려주시니깐 남은 인생은 보너스로 사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 저 사람들이 교회에 잘 충성되겠지 했더니 6개월도 안되어서 술 퍼먹고 돌아다니며 다시 타락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이제는 저들의 생명을 걷어주십쇼. 그렇게 기도를 했대요. 둘 중에 하나 교회에 보내주시든지, 아니면 데려가시든지. 눈뜨고 이교회 앞을 저렇게 담배피고 뻐끔거리면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저 교만한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랬습니다. 그러지 말라. 담배피고 다녀도 너의 양이고 교회에 와서 무릎꿇고 있어도 너의 양이지 목회자가 그러면 되냐 그랬지만 이해는 가요. 그 능력도 없어서 어떻게 어떻게 기도해서 고쳐놨더니 그 가서 술 퍼먹고 담배피면서 그 교회 앞을 뻐끔거리면서 지나갈 때 그 어떤 마음이겠어요. 그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어요. 우리들이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그런 위기가 있었죠. 그렇게 어려운 때에 인생에 험한 골짜기에서 주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그렇게 착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되면 안돼요.
그래서 번영할 때에도 항상 그것을 생각해야 해요. 하나님이 그때 나에게 어떻게 나타나셨고 그리고 인생에 그 고통의 골짜기에서 신음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건져주셨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면 그 만나를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라는 거에요. 그래서 이 만나를 먹이신 사건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니라고 하는 것이 이 만나를 먹이신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구속사적인 의미라는 거죠.
그러면 우리도 한번 생각을 해야 되는 거죠. 난 요번에 나온 열린 교회 회심이야기를 여러분 모두 한 권씩 갖고 가서 읽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그 다 옛날에 나온 이야기들이에요. 그런데도 어제도 그 중의 한편을 읽으면서 어떻게 눈물이 나는지 몰라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는데 이렇게 조용히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겉으로 보면 그냥 덜렁거리고 신앙생활 하는 것 같은데 한사람 한사람이 정말 뼈저린 사연을 안고 그게 나왔어요.
언젠가 우리 직원들하고 같이 하도 고생 하길래 저녁을 먹고, 그다음에 남한산성에 가서 같이 차를 한잔 이렇게 마시면서 그때 직원도 몇 명 안 됐을 때에요. 돌아가면서 자기가 어떻게 이 열린 교회 와서 간사가 됐는지를 얘기 하면서 우리 참 많이 눈물이 났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와서 살아가는 것 같은데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을 만난 흔적이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은혜의 손에 붙들려서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가지고 여기 심어서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간 이야기. 그 과거를 다 돌아보면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그런 위험한 때,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때에,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신 것, 그래서 그 은혜와 사랑에 깊이 붙잡혀서 그래서 그 주님 때문에 섬기게 된 거예요.
열린교회 회심이야기도 읽어보면 그 사람들이 모두 다 현재 교회에 남아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한 과거들을 다 가지고 있고 그 한사람 한사람이 은혜 받던 십년동안의 이 기억이 쭉 생각이 나요. 그렇게 하나님이 인생의 위기 속에서 건져주셔서 여기 이렇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건져 주셔서 그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실 때에는 반드시 만나와 같이 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건져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잊어버리지 말아라 이 얘기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의 위기의 곤고한 때를 이렇게 돌아보면 거기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어져요.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말씀의 떡을 우리에게 떼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우리의 위기를 보게 하시고 거기에서 벗어나서 이제 그 시련의 광야에서 벗어나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살게 해 주신 거예요. 그것을 번영할 때 잊지 말아라 이 얘기에요. 번영할 때 그것을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변화 받았는지를 깊이 생각하면 아마 아주 분명한 결론에 도달할 거에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선하시며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나를 인생의 이 위기에서 나를 건져 주셨구나. 이 내가 도저히 이 사랑과 이 은혜를 배반하고는 살수가 없구나. 그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그래서 신앙은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꿈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해서 끊임없이 회상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그 비참한 죄악 가운데서 건져 구원해 주셨고, 인생의 깊은 위기 속에서 몸부림 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를 이끌어 주셨고, 내가 핍절하고 굶주릴 때에 주님의 은혜의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붙들고 나를 이렇게 건져주셔서 살게 하셨구나.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그런 말씀에 은혜 속에서 계속 살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해요.
그래서 그 간증을 이렇게 읽어 보면서 그 은혜 받고 변화 받던 때 그것도 떠오르고 벌써 쓴지가 7년 8년 9년 심지어는 10년 지나갔으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다 알지. 그때 그렇게 간증했지만 사실 나중엔 미끌어 졌지. 그러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고. 그러니깐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이 건져주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를 주님의 손으로 붙들고 계실 때 그때에만 분초마다 주님이 사로잡고 계실 그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조금 번영한다고 평안하다고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는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도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시련을 당할 때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하고 환관장에게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구하라 하니”(단1:8)
어제는 기도해야할 때 중에서 첫 번째 상황 번영할 때 였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시련을 당했을 때 그때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는 거죠. 본문은 주전 605년경에 일어난 겁니다. 사실586년에 남왕국 유다가 망하지만은 그 이전에 이미 나라는 완전히 국세가 기울었고 그리고 이제 이 바벨론 사람들이 자기나라 속국처럼 아무나 원하는 때에 이제 이 유다나라에 와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 빼앗기도 하고 사람도 끌어가고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일어난 포로 끌려간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이제 바벨론 왕궁으로 끌려갔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 친구들은 아주 특별히 명민하고 재주가 뛰어나고 그리고 아주 특별하게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적국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가 그 곳에서 이제 이 사람들은 남의 나라를 위한 동냥으로 준비되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거기에서 이제 왕이 특별히 이들을 잘 길러서 자기네 나라를 섬기는 일꾼으로 쓰기를 원했으니까 이미 바벨론은 오래도록 이제 이들을 나라를 지배하려고 하는 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사실 어느 나라에서 하든지 간에 공통적인 것입니다. 한나라가 한나라를 점령하고 나면 그 나라를 가장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은 그 나라 사람들을 앞잡이로 세워서 그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참 가장 효율적이고 그리고 모양새도 있고 가장 쉬운 겁니다. 그래서 일제 시대 때에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부역을 했습니다.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던지 간에 이민족이 침략했을 때에는 이런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거죠. 그런데 이제 여기에 등장하는 이 다니엘이 아마 늘 다니엘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지만 다니엘이 이 세 친구와 함께 우두머리 격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매사에 다니엘이 늘 세 친구와 함께 등장하면서 맏이 노릇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자연스럽게 성경의 카메라가 다니엘에게로 옮겨가게 됩니다.
다니엘이 처한 상황도 역시 세 친구와 마찬가지 상황이었죠. 왕궁에서 나오는 왕의 상에서 나오는 음식으로 먹고 그리고 특별히 이 아이들을 잘 기르게 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그 큰 제국 바벨론의 왕의 상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게 된다 하는 것은 이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 세상으로 보면 참 큰 영광이었고 그리고 이세상적으로 보면 누구든지 다 한번 거기에 도달해보고 싶은 그런 영화의 상태였죠. 그러나 이제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뭐냐하면 왕의 상에서 나오는 이 음식을 먹는 것은 세상 적으로는 참 큰 영광이었지만 그러나 율법적으로 보면 율법에 금하는 음식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마 이 왕의 상에서 나오는 이 음식들은 어쩌면은 자신의 신들에게 먼저 제사한 음식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이것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신앙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다니엘이 이것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죠.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을 따라서 신앙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큰 번영처럼 느껴지고 성공처럼 느껴지고 축복처럼 느껴지는 것도 어느 한 순간에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려고 마음을 먹게 되면 그다음에 밀려오는 것은 뭐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모두 영광이고 기쁨인데도 하나님 앞에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면은 그것이 우리에게 시련이 될 때가 있는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오늘 여기에서 다니엘이 만난 시련은 자기의 죄 때문에 만난 시련이라기보다는 믿음으로 살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시련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사실 왕의 상에서 나오는 음식으로 먹인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영광이었고 왕의 매우 중요하고 구별된 호의였습니다. 이것을 만약에 싫다고 한다고 하면 자치하면 그것이 왕에 대한 결례일수 있고 포로로 끌려온 처지에 왕이 베풀어주는 이 많은 은덕과 커다란 호의를 무시하는 것이 될 수 있잖아요. 왕의 진노를 살만한 행동이 될 수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도 이 다니엘이 깊이 고민하면서 그 상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죠. 이처럼 우리가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면은 시련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다니엘의 행동을 보면서 참 나이는 어리지만 지혜롭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 사람이 좀 머리가 나쁘다든지 약간 좀 이렇게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이면 아마 이 순간에 순결을 불사하고 그러고 아마 그랬을 것에요. 왕의 상을 잘 차려가지고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상을 번쩍 들어 집어 던지면서 나는 여기에는 율법에 금하는 음식이 있어서 나는 못 먹겠다. 나를 죽이려면 죽여라. 이렇게 돈키호테같이 날뛸 수도 있었을 거라 이거죠. 그런데 이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고 가만히 보면서 자기들을 잘 돌보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을 한 거죠.
환관장이야. 그러니까 그 사람을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부탁을 한 거죠. 내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안 하고 왕의 상에서 나온 진미를 제가 좀 먹지 않고 물과 채소만 먹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이야기를 했으니까 아마 평소에 환관장과 다니엘이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거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떻든 환관장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을지 몰라요. 그렇게 해가지고 한거예요. 믿음의 용기는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무엇도 있었어요? 그렇지. 지혜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가끔 보면 이렇게 돈키호테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 상을 뒤집어엎고 죽일려면 죽여라 나는 못 먹겠다. 그렇게 하는 방법 말고도 이게 타협입니까? 아니면 신앙을 양보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죠. 그래서 충성스러운 삶, 결단, 용기, 이런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또 지혜와 슬기 이런 것도 함께 필요한 것이에요. 다니엘이 바로 그런 것을 가지 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서 살려고 마음을 먹지 않고 언제든지 타협할 준비를 하고 살아가면 사실 우리가 고생은 해도 믿음을 위해서 당하는 시련은 별로 없습니다. 수시로 야합하면서 살면 상당 고난을 많이 피할 수 있고 그리고 정말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이 아주 편리할 수 있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죠. 하나님이 그런 삶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신앙을 양보하면서 현실과 타협하면서 그렇게 살면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그런 식으로 살다보면 결국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결과가 오게 되요.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마음에 옳지 않은 생각 한번만 품어도 기도가 안 되는데 하물며 변절을 하면서 신앙의 시련을 피해 보기 위해서 이세상과 야합하고 환경과 타협하면서 이러면서 자기의 이익을 좇아서 이렇게 돌아다닐 때 결국 마지막에 어떤 것이 오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아주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보면 그 오늘 이 다니엘이 이렇게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니까 시련이 만나게 된다. 이런 시련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다니엘이 제일먼저 한 일은 뜻을 세우는 것이었어요.
뜻을 세운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어떤 시련 가운데 처한다고 할지라도 그 시련에 처해 우리가 의지를 꺾고 굴복하지 않는 한 그 시련이 우리의 신앙을 빼앗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련을 만났기 때문에 신앙을 다 털어먹고 빈털터리가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시련을 만났기 때문에 신앙이 더 불타오르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감격을 누리고 주의 영광을 보게 되는 이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차이가 무엇이겠어요? 첫 번째 사람은 야합하는 거고 두 번째 사람은 이 시련을 만났을 때 의지의 올곧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다니엘이 뜻을 세웠다고 할 때 그것은 자신도 쉬운 선택이 아니었어요. 그렇죠? 그냥 묻어서 남들 하는 것처럼 살아가면 되는데,
다니엘이 뜻을 세운 이유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그리고 이것은 자기의 의지를 곧추세우는 의지의 올곧음을 찾는 그런 행동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마음을 먹고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뜻을 세웠던 것이죠.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시련을 만나게 될 때 거기에서 극복하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은 먼저 여러분이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뜻을 세워도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뜻을 세우지 않고도 저절로 잘 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성과 우리의 정서도 보시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 하나가 뭐냐면 의지의 올곧음이에요.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그분을 배반하지 않고 그분께 사랑을 받고 그분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끊임없는 의지의 경향성이에요. 이것이 올곧음이에요. 그런 올곧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시련을 당할 때 너무나 의지가 쉽게 꺾여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이 의지의 올곧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마치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기름을 소쿠리에다가 받는 사람하고 똑같아요. 막 쏟아 부어지면 기쁨이 넘치고 막 한없이 부어지는 것 같은데 모이질 않아요. 구멍이 다 뚫어져서 줄줄거리고 다 새 나가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은혜는 의지의 올곧음이라는 용기의 담길 때 그때에 그것이 저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받으면 본성이 변하지만 그러나 완전히, 영원히 본성이 변합니까? 그렇지 않죠. 은혜 받으면 기도가 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항상 영혼이 기도하겠다 그럴 때 언제나 육체가 기쁨으로 따라나서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때에 육체를 다그치고 영혼을 격려하는 것이 바로 의지의 올곧음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을 해나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러한 결단이 너무 부족해요. 의지의 결단 이런 담대한 믿음의 결단이 너무 부족해요. 그리고 자신이 언제나 약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약한 자들은 긍휼히 여기셔요. 그러나 하나님이 악한 자들은 고치고 싶어하신다는 거에요. 이것은 이렇게 시련을 당할 때에 자기의 의지의 올곧음이 없고 이리저리 흔들려서 결국은 시련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다 팔아버리는 사람들은 연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경향성이 결핍된 사람들이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고자 하는 그 자신의 경향성에 은근히 야합하는 악한 사람들이란 말이죠.
그것이 중요하다 이 얘기에요. 그래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신자들에게 인생을 살아가서 어려운 때를 만나고 신앙의 손해를 봐야하는 위기를 만나고 고난을 만나게 될 때 주님을 의지하고 붙드는 것 말고 또다른 대안이 있으면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혹시 그런 대안이 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그 끝이 어떻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순전하게 지킴에 있어서 성경은 인내를 많이 말하는 거예요. 그 인내가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거예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이런 시련이 올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뜻을 정하는 것이에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그렇게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 다니엘처럼 오직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 당하는 시련이든지 혹은 자기의 죄를 인하여 당하는 시련이든지 간에 하여튼 어떤 시련이든지 오게 되면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시련을 만나도 이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시련 속에서 극복하리라고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를 않고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아무렇게나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도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을 길게 산다고 해서 그날이 다 하나님을 섬긴 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많이 돌린 신자는 모두 장수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련과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자녀의 길은 시련도 있고 유혹도 있고 풍부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가난할 때도 있고 그리고 높은 언덕 위를 걸어 다니는 것 같은 행복의 때가 있는가 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되는 때도 있고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 풀밭을 걷듯이 그렇게 푸른 초장을 다니는 때가 있는가하면 시련과 폭풍의 밤바다 한 복판을 지나가야 하는 때고 있는 거예요. 신자들은 이런 시련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런 시련을 만나게 되어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그 깊은 의지적인 결단, 그런 용기, 이것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이렇게 시련이 와서 시련이 왔기 때문에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미끌어지고, 또 번영할 때는 유혹이 와서 이기지 못해서 미끌어지고, 외로울때에는 외로워서 미끌어지고, 이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길게 살아봤댔자 주님을 제대로 섬긴 날이 없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는 날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면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련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의 신앙의 손해를 보지 말도록 뜻을 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의지의 올곧음이라고 하는 이 뜻은 어떻게 되느냐?
두 가지 필요한데 하나는 뭐냐면 용기가 필요해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결단을 내리는 거죠. 그래서 오늘 이 다니엘이 뜻을 정하였다 그랬어요. 무슨 뜻을 정한 거죠? 왕의 상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거나 하나님 앞에 범죄 하지 않기로 뜻을 세운 거예요. 뜻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뭐냐면 양보할 수 없는 전제로 세워놓고 그다음에 그 위에 지혜를 발휘해서 양보할 수 없는 그 길을 따라서 가는데, 그런데 나머지는 지혜를 발휘해서 자기가 가고자하는 이 뜻을 세운 길을 걸어가는 거라 이거죠. 이것을 보면서 감탄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결단을 잘 내리는 사람은 대부분 또 지혜가 좀 모자라요. 그래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에요 대개.
그래서 결국은 굳지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얼마든지 길이 있는데, 예수 안 믿는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가 경영하는 회사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꾀 있대요. 그래서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그런대요. 그래서 좀 이제 맘에 안 들고 그래서 야단을 치고 일 좀 제대로 하라고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그걸 핍박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이 예수를 믿는데 예배를 드리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그러나 일은 똑바로 해라 신우회모인 다고해서 두시가 되도 안 들어오면 회사일은 누가 하냐?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인데. 그것은 옳지 않지 않느냐? 문제를 삼는 건 너희들의 신앙을 내가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지키는 회사생활을 해야 되지 않느냐”는 거예요. 당연하잖아요. 회사에 출근해가지고 일은 안하고 맨날 주보나 만들고 앉았고 말이지 거기서 편지나 쓰고 안자있고 그러면 되냐 이거에요. 이거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전부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자기가 막 모두 핍박을 받는 것처럼 둔갑을 하는 거예요. 이건 모두 환상이에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거에요. 의지의 올곧음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딱 정해놓고 그다음에는 뭐냐면 유연하게 지혜롭게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가야 되겠다는 길을 놓고, 그다음에 이 지혜를 발휘해서 모든 사람과 평화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거예요. 그러나 어떻게 되요? 그런 길이 없다. 그러면 순교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있는 것이 바로 뜻을 정한 거죠. 이게 바로 다니엘의 훌륭한 신앙이에요. 그 하나님을 향해 올곧은 신앙위에 지혜가 있었어요. 그래서 남의 나라 땅에서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승진을 하게 된 거죠. 그러나 일체의 신앙의 양보가 없는 삶을 살아갔던 거예요. 그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어요?
누구든지 왕 이외의 다른 신이나 신상에게 절하면 사자 굴에서 집어넣는다는 그 조사의 어인이 딱 찍혔는데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이 다니엘의 신앙을 방해할 수 있었어요? 방해할 수 없었죠. 결정적인 시간에 자기가 세운 하나님을 향해서 살고자 하는 이 뜻을 결국 도저히 어떤 타협점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꺼이 고난을 당하고 아니면 사자 굴에 던져 넣어 죽임을 당하는 이러한 고난까지 받을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는 겁니다. 그런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이것이 다니엘의 신앙이고 믿음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그 길을 걸어간 거예요.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뜻을 세우지 않고 그 문어처럼 그렇게 흐느적거리면서 살아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우리들이 신앙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죠.
또 하나 우리들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뜻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의지의 단호함과 결단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결단을 남발하고 결심을 번복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그렇게 많이 결단하고 결심하고 이 모든 남발들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의지와 이런 것으로 수없이 결단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올곧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수많은 결단들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의지의 결단은 내가 내리지만은 이 의지의 결단을 유지하게 만드시는 힘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에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기가 결단하고 또 한편으로는 결단을 하고도 자신의 결단으로 이것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구해야 해요. 그래서 결단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의지, 용기를 가지고 결단을 내리지만 그 결단을 따라서 내가 지속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이러한 결단과 함께 역사하는 하나님의 내적인 은혜야. 그래서 뭐가 필요하냐면 이런 올곧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도생활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하고 특별한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 앞에 특별히 많이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부르짖고 간구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결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려움이 와도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신으로 그것을 이기고 그리고 우리의 결단으로 우리 안에 주신 그 은혜의 올곧음을 보호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올곧게 살아 갈려는 사람들에게 올곧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결단을 내리려는 사람에게 결단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용기와 결단, 지혜와 더불어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공급받으며 살수 있는 그런 기도생활이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우리들이 날마다 해나가야 하는 것이죠.
그랬더니 마지막으로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사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런 시도 였거든요. 결단을 내리고 왕의 상에서 나오거 다 먹지 않겠습니다. 그 굉장히 어려운 시도였는데 하나님이 그 순간에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 올곧게 살기 위해서 결단하고 시련이 왔을 때에 그 결단에 부합하는 인내의 삶을 살기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어요. 우리를 에워싸는 이 시련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우리의 힘과 자원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면은 너무 힘들지만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이렇게 움직여 주시면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해 주시는 거예요. 제가 아는 어떤 그리스도인은 직장엘 다니는데 그 직장에서 큰 건물을 짓는대요. 건물을 짓는데 그런 분을 몇 번 내가 봤는데 건물을 짓는데 하필이면 그 회사에 말하자면은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최고 책임자는 아니지만. 그러니 최고 책임자가 건물 짓기 전에 고사지내야 된다 그러는데 뭐 그렇게 자기가 그것에 대해서 어 난 죽어도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그런 입장이 아닐 경우 그런 경우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고민하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용기가 있어가지고 그 자리에서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마는 저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신앙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신앙의 용기를 갖고 또 평소에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어 그래 참 그럴 수도 있겠구나 어 허긴 고사를 한번 안 지낸다고 하더라도 너는 우리 회사에서 참 필요하고 유능한 존재지. 이런 게 형성 되 있으면 이게 일번이죠. 그것은 가장 좋은 거죠. 그런데 그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간절히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대요. 내가 이 회사를 그만 두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내 신앙을 팔아먹으면서 고사까지 지내고 돼지 머리한테 절하면서까지 내 이 직장을 다니지 않겠다. 그때 사장 멱살을 붙들고 나 더러워서 안 다녀! 이렇게 하지를 않고 지혜롭게 간절히 기도를 했더니 사장이 바뀌어 버렸어. 예수 믿는 사람이 와버렸어.
그러니깐 그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시련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간절히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얘기치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간섭 해주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이 위기를 극복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시련가운데도 주님을 의지할 때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찬송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새벽에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시련이 있죠.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죠, 뜻을 세우세요. 그래서 내가 번영하고 모든 것이 잘나갈 때는 흔들거리면서 하나님 뜻대로 못 살았지만은 그래서 이런 시련이 오게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올곧게 살아야 되겠다. 진짜 시련 속에서 내가 진짜 올곧게 살아야 되겠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되겠다. 내가 꼭 하나님께 붙어있고 이젠 주님을 의지해서 이 시련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세요. 그리고는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그 결단이 공수표가 되지 않고 기도를 해야지만 하나님이 그런 올곧은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우리 안에 주셔요.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때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많은 묵은 때를 씻어내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시고 그 은혜에 붙잡혀 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유혹 받을 때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3:13)
첫째 날은 특별히 기도해야할 때가 번영할 때라고 말씀드렸고 둘째 날은 시련을 당했을 때에 기도해야할 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 번째는 유혹 받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때다 그런 말씀 입니다. 그래서 이제 유혹받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때인데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은 우리들이 항상 시험에 노출되지만은 그러나 항상 똑같은 정도로 언제나 시험에 노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 생활을 해나가면서 우리들이 늘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만 그러나 모든 때에 하나님께서 똑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듯이, 시험도 역시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생활하면서 특별한 은혜의 때가 있듯이 시험도 또한 특별한 시험의 때가 있습니다. 이 특별한 시험의 때는 유혹이 집중되게 되고 그리고 집중적인 유혹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틀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리고 사단이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가 바로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시험의 때이다.
이럴 때에 우리들이 이런 시험의 때에 대처하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때를 잘 넘기면 오히려 그런 유혹의 때가 지나가고 나면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유혹의 때를 지나고 시험의 어려운 때를 지나고 나면 그 후에 은혜의 감격의 때가 찾아오듯이 똑같이 유혹을 잘 이기고 나면은 이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제 여기에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걸어가는 길에 사단은 수 없는 웅덩이를 파고 시험의 때를 우리에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달려가는 이 신앙의 길은 빨리만 달려가면 되고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서 지혜를 가진 가운데에 우리의 삶의 하루하루를 헤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우선 첫째는 자기를 유혹하는 환경에 대해서 그것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시탑의 망루에 서 있는 파수꾼이 깨어있기만 하면 그 사람이 적군을 무찌를 수는 없지만 적이 오는 것을 파악해서 성중에 알려서 전투에 대비할 수 있게는 하지 않습니까? 똑같이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아가다가 이렇게 시험이 오게 될 때 그 시험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되면 시험을 물리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가 않습니다,
시험을 물리치는 일이 항상 살고 죽는 어마어마한 결단을 동반해야지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당할 때 시험을 당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특별히 유혹을 당할 때 그것들을 물리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감시탑에서 이 적이 오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성문을 부수고 들어온 다음에 그 적과 더불어 싸우려고 하니깐 힘들어 지는 것이죠.
일단 전쟁이 나서 적군이 성문을 부수고 안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면 들어온 적을 무찔러서 이기고 승리하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미 벌써 성문이 부서지고 물밀 듯이 적군들이 밀려들어오게 되면 성안에 있던 군사들은 사기가 죽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먼저 환경에 대해서 깨어있는 것이에요. 왜 그러하냐? 그 죄의 유혹이 올 때 환경을 사용해서 죄의 유혹이 들어오게 됩니다. 환경을 사용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 혹은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불과 같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타오르는 성격이 있어요.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은 접촉하는 모든 것들을 다 태워버립니다. 이게 불의 경향이에요. 접촉하는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려요. 그런데 이 접촉해도 타오르는 불태우는 성격을 가진 불길이 다른 것들을 태우지 못하는 경우가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첫째는 아무리 가까워도 접촉한 물건이 탈 수 없는 불연제일 때, 그땐 안 타는 거죠. 자기의 마음속에 아무리 정욕이 타올라도 가까이 접촉하고 있는 상황이 타지 않는 상황이면 탈 수가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돈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고 그 물질에 대한 탐욕이 가슴에 활활 타오르는데 돈을 늘 만지는 회사에 근무를 해요. 그런데 시스템이 너무나 정확하고 법이 너무나 엄격해서 도저히 그 돈을 손을 될 수가 없어요. 이것은 비유하자면 타지 않는 물건이 불길 가운데 있는 것과 꼭 같은 거예요.
두 번째는 아무리 잘 타는 물건이라고 할지라도 타오르는 불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태울 수가 없어요. 모든 죄의 유혹은 환경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경 갈피갈피에 시험의 요소들이 숨어 있어요. 그러니까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펼쳐지는 환경, 혹은 수시로 변하는 환경 속에서 함께 흘러들어오고 있는 죄의 유혹을 보면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그 환경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묻어서 들어오는 죄의 발자취를 파악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깨어있다고 하는 의미죠.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으면 환경을 해석해 내는 능력이 참 뛰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하나도 거저 만들어 주신 것이 없고 주어진 환경 하나하나마다 하나님이 그 환경을 통해서 자기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 또 어떻게 자기를 도우시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이제 잘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깨어있다는 의미라고 하는 것이죠.
깨어 있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무슨 뜻이냐면 그 환경에 반응하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죠. 우리의 삶의 환경만 변하는 게 아니라 그 환경을 대면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도 시시때때로 변하는 거죠.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이에요. 원래 이 시험 혹은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없는 어떤 것을 집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악에 빠지게 하지는 못해요.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럼 한번 생각을 해 보죠. 우리 안에 무슨 욕심인들 없겠어요? 그 물질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욕심, 성적인 욕구,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지배욕……. 그런데 그렇게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있어도 우리가 그것으로써 가슴에 충만한 가운데 우리의 일생을 살아오기만 한 것은 아니거든요.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고 날마다 은혜 안에 살면서 십자가에 못 박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이것들을 죽이고 누르면서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우리 안에 그런 것이 있어요. 그런 것이 있는데 유혹을 한번 받아도 사실 너무나 오랫동안 은혜로 누르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들이 한두 번의 유혹으로는 끌어내리질 않아요. 그런데 여러 번 유혹을 받으면 끌어내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죄가 우리 안에서 융성하는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서 우리들이 깨어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거죠. 사람마다 똑같지가 않아요. 언젠가 한번 강아지를 놓고, 강아지를 놀리는 거죠. 강아지 앞에다 상자를 놓았는데 상자는 먹을 게들어 있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 상자가 그냥 상자가 아니라 그 상자 밑에다가 원격 조종장치를 해서 이쪽에서 스위치를 누르면 상자가 도망을 가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개를 여러 종류를 놓고 시험을 하는 거예요. 상자가 있고 거기 뼈다귀라도 하나 있으니까 개가 킁킁거리면서 가서 기분이 좋단 말이에요. 그래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고 그것을 한 번 물어 보려고 입을 내미는데 상자가 가는 거예요. 갠데도 성격이 다 틀려요. 먹으려고 침을 흘리면서 가까이 다가가서 날름거리다가 상자가 딱 가니까 기겁을 해가지고 도망가는 개가 있고 그 다음에는 발로 한번 그 상자를 탁 쳐보는 개가 있고 어떤 개는 상자가 도망가는데 계속 쫓아가서 결국은 그 안에 있는 뼈다귀를 물고야 말아. 내가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야 참 사람만 다양한줄 알았더니 이 개도 천성이 다 틀리는 구나. 보기에는 다 똑같은 갠데 어쩌면 이렇게 다 틀리나. 환경을 똑같은 걸 만나도 사람이 똑같지가 않은 걸요. 그러니까 자기가 일평생 살면서 이제 시험을 당하고 어려움도 당하고 은혜도 받고 하는데 자기가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잘 알아야 되죠. 돈에 대해서 늘 탐욕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돈을 많이 만지는 부서를 골라서 다니면 언젠가는 미끄러져요. 언젠가는 범죄 해요. 그러니까 마찬가지 아니에요. 환경 앞에 반응하는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잘 아는 지혜로운 통찰이 필요하고 그럼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은혜가 밀려올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성령의 인도가 있을 때, 자기가 어떤 인간인가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인도의 개개의 상황, 유혹받는 개별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런 것들을 잘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점에 대해서 논문을 몇 편 쓸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공을 해야 합니다. 남을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해요. 너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을 잘 알아서 깨어있는 것을 가리켜서 깨어있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바로 깨어있을 뿐만 아니라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 입니다. 특별한 시험을 받아서 유혹이 강한 힘을 얻게 될 때 이때가 특별한 시험의 때입니다. 예전에는 별로 유혹이 되지 않았는데 그 유혹이 상당한 힘을 얻게 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위험한 때이고 그 때가 바로 시험의 때입니다. 그 때를 조심하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시험을 당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가르치심으로서 시험을 이기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이렇게 시험이 오게 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것이죠. 우선 보면 시험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이 강퍅하게 됨을 면하라 그랬거든요. 그러면 유혹이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 그런 뜻 아니에요. 그러면 즉각적으로 의문이 제기되잖아요.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는데 그러면 예수님도 유혹을 받을 때 마음이 강퍅해 지셨겠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죠. 예수님이 세 번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볼 수는 없죠.
강퍅히 라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죄의 영향이기 때문에 만약에 예수님이 시험을 받아서 강퍅해 지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에게 이미 죄가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되니까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서는 왜 시험을 받으면 당연히 마음을 강퍅해지는 것처럼 이렇게 묘사를 하느냐는 거죠. 이것은 유혹이 객관적인 상태에서의 유혹이 있고 이미 주관화된 상태에서의 유혹이 있다 이 얘기죠.
밖에서 아무리 유혹을 해도 내가 아직 거기에 반응하지 않거나 혹은 단칼에 그것을 물리쳐버릴 때에는 유혹이 단지 객관적인 유혹일 뿐이지 그것이 자기 자신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거나 마음의 틀에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리 많이 유혹을 받아도 그것들을 한칼에 물리치거나 혹은 그 유혹에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은 수없이 유혹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강퍅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유혹을 받으면 그 유혹으로 인해 마음이 강퍅해질 거라고 가리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미 벌써 객관적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유혹에 대해서 마음 안에서 반응하기 시작한 사람이죠. 이런 유혹이 반복되게 되면 이 마음이 강퍅해지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에 깃들여 있는 죄는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 질 때에 가장 잘 우리 안에서 성장을 하고 그리고 강퍅해져야지만 반드시 산출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을 받아서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은 아이를 가진 여자의 배가 불러오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 강퍅한 마음의 환경 속에서 은혜는 서서히 죽고 자기 안에 있는 죄는 점점 더 힘을 얻고 거기에서 잉태된 욕심을 통해서 그 죄가 자라기 시작하고 장성하면 그 죄가 자기의 몸 밖으로 산출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음속에서 유혹에 굴복함으로 죄를 짓는 성도가 아니라 실제의 그 죄가 산출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유혹을 받을 때 그래서 마음이 강퍅해지려고 할 때에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선 시험이 객관적인 상태에 존재하지만 그러나 그 객관적인 상태의 시험이 계속 반복되고 나면 어느 한 순간 우리의 마음이 그 죄의 유혹에 대해서 반응을 하게 되고 반응을 하면 그 죄가 우리를 넘어뜨리기 아주 쉬운 조건이 되는 거죠.
어떤 광고 심리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봤습니다. 처음에 신문 광고에 약을 광고하면서 혹은 화장품을 광고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광고하면서 아주 말도 되지 않아 보이는 터무니없는 광고를 할 때가 있죠. 그래도 6개월만 계속 광고하면 그게 믿어진다는 것이 심리학자의 의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머리가 아프다 그러면 약국에 가서 머리가 아픈데 뭘 먹으면 되나요? 이러질 않고 무슨 약 주세요. 그러잖아요. 이건 벌써 광고비를 어마 어마하게 쏟아 부은 거예요. 최소한 20억 이상 쏟아 부어서 한 6개월 동안 신문과 반송에 집중적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6개월 정도만 하면 사람들 속에 딱 새겨지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가 아프면 자기가 뭘 알아요? 약사한테 가서 머리가 아픈데 뭘 먹어야 되요 그래야지, 머리가 아파요. 아 그 약 말고 딴 약 주세요. 그런다 이거지.
꼭 이상한 교인하고 비슷해요. 구약 가르쳐 주면 신약 달라 그러고 말이야. 그렇듯이. 그렇게 간다. 이렇게 새겨지는 거예요. 그래서 유혹이 계속 반복이 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고 반복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죄가 우리 안에서 성공할 기회를 얻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때에 기도를 간절히 하게 되면 그러면 이러한 시험이 살아지기도 하지만 또 이 시험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 나의 내면에 세계가 이 시험과 유혹에 대해서 반응을 안 해요. 그러면 몇 번 두드리다가 결국은 이 유혹은 물러가는 거라는 거예요. 사람이 언제나 일평생을 똑같은 유혹에 똑같이 시달리면서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어떤 때는 돈의 유혹을, 어떤 때는 불신앙의 유혹을, 어떤 때는 성적인 타락의 유혹을, 어떤 때는 명예의 유혹을, 이렇게 각각 받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것이 물러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이미 벌써 이 죄의 유혹을 받아서 마음이 굳어지고 있을 때에도 기도를 하면 그러면 마음의 부드러움을 회복하게 되고 그리고 이 유혹이 우리 안에서 힘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죠.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영혼의 시선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고정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진실함으로 기도하는 것이죠.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 앞에 매달리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 기도 속에는 거룩의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 기도의 실천 속에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성화의 효과가 있어요. 이 성화의 효과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죄를 죽이고 우리 안에 있는 은혜를 살려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우리의 영혼에 있는 이 은혜는 좋아하는 것이 두개가 있어요. 그 두개를 잘 하면 은혜가 계속 살아요. 그런데 그 두개를 잘 하지 못하면 우리 안에서 은혜가 자꾸 죽게 되는 것이죠.
그 두개가 무엇이냐면 죄를 죽이는 삶의 실천과 그것에서의 성공이에요. 이 두 가지를 하면 은혜는 계속 자라게 되고 그 대신 죄는 계속 죽게 되요. 그렇게 우리가 유혹을 받아서 우리 안에서 죄가 반응을 하려고 할 때에 이렇게 죄를 죽이고 실천하고 그래서 그 죄 죽임이 성공하게 되면 우리 안에 죄가 계속 죽는데 이렇게 우리 안에 죄를 죽이는 결정적인 영혼의 활동이 뭐냐면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의 실천이에요. 그런 기도의 간절한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계속 죽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보면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깨뜨려 질 수 없고 그것은 마치 소제 없는 번제와 같아서 하나님 앞에 다다르는 아름다운 상번제를 이룰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거죠.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영혼에 커다란 유익이 찾아오게 되죠. 무엇보다도 융성했던 죄의 활동들이 죽고 짓눌렸던 하나님의 은혜들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해요. 한번 보세요. 우리들이 이만큼 믿음 생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히 하고 믿음으로 살아오기 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애를 쓰고 수고하면서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시험이 이 많은 하나님 앞에서 쌓아온 이 아름다운 신앙을 한번에 무너뜨리는 엄청난 파괴력이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그날까지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되요.
이게 바로 지혜로운 처녀의 행동이에요. 지혜로운 처녀의 행동은 그래서 등불을 늘 예비하고 신랑 올 때를 기다리고 깨어있는 그 신부의 삶을 우리들이 날마다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죠. 누구도 한번 이김으로 모두 이겼다 말할 수 없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그렇게 믿음으로 신앙으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될 때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그런 신앙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은 번영이 올 때만 오는 것이 아니라 궁핍할 때도 시험이 오고 지위가 높아질 때도 시험이 오는가 하면 낮을 때도 시험이 오고 다양한 계기를 틈타서 우리의 신앙에 시험이 옵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때에 기도함으로 이기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유혹이 올 때 그때는 하나님 앞에 특별히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4. 사명이 주어질 때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시102:7)
어제는 우리가 유혹받을 때가 기도해야 할 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는 사명을 받을 때 그때가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솔로몬은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에 이어서 왕이 되었는데 솔로몬에게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왕이 되었을 때 오늘 본문에서 이 솔로몬이 고백하고 있듯이 나이가 어린 아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사실 인생의 이 나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먹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고도 지혜가 모자라고 나이가 어려도 총명한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나이 많은 사람의 인생이 경험을 총명 하나로 어린 사람이 극복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인생을 살다보면 경륜이 쌓이게 되고 세상도 잘 알게 되고 사람들도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다윗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었지만 아버지와 비교하자면 인생의 경륜이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짧았습니다. 그런 나이에 왕이 되었으니 얼마 어려웠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 같은 대신들 그리고 아버지나 혹은 삼촌뻘 되는 장군들을 거느리고 한 나라를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니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거죠.
두 번째는 뭐냐면 선왕인 다윗이 워낙 훌륭한 통치자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쁜 임금이 나라를 거의 망쳐 놓았으면 그 대를 이어서 임금이 된 사람이 웬만큼만 해도 백성들의 입에서는 그래도 그때 보다는 살기가 훨씬 낳았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정치면 정치, 군사면 군사, 경제면 경제, 외교면 외교, 무엇하나에도 빠지는 것 없이 탁월한 지도력을 가지고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그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대 판도에 그 국가를 건설한 사람입니다. 사실 다윗이 위에 있는 동안 그가 직면하였던 수많은 나라들과의 싸움, 전쟁, 거기에서의 승리, 그 복잡한 외교적인 역학관계 속에서도 훌륭하게 나라를 꾸려갔습니다.
솔로몬은 다윗같이 그렇게 담대하고 용기 있는 성품을 가진 인물이 아니고 유약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이 유약한 사람이 어린나이에 그것도 훌륭하게 한 나라를 이끌어 간 아주 영명한 군주의 뒤를 이어서 임금이 되었으니 이 솔로몬이 어떻게 맘 편하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비슷합니다. 교회도 워낙 선임목사님이 그 교인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워낙 훌륭하게 목회하다 간 자리에는 웬만한 사람이 가도 빛이 나지 않아요. 가면 자기는 죽으라고 하는데 교인들은 옛날 목사님은 옛날 목사님은 이런다는 거예요. 빛이 나지 않아요. 말하자면 솔로몬의 상황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솔로몬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재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처럼 법이 세밀하게 있어서 그 법을 가지고 이렇게 권력을 위탁받은 사람들이 정식재판을 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하나를 판단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그야말로 인생사는 이치를 가지고 판단을 해야 되는 것이거든요. 물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이 기준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율법하나만으로 그들의 인생사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그 많은 일들이 다 판단하고 처리해주기에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더군다나 재판 중 중대하거나 웬만한 판단으로는 도저히 판결되지 않는 것은 왕에게 가지고 왔으니 왕이 그것을 얼마나 슬기롭게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사실은 그 왕의 명성이 나고 또 그것을 보면서 그 나라의 공의가 시행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어떻게 그걸 판단할 수 있었겠습니까.정말 쉽지 않았겠죠. 더군다나 백성들의 수효가 많았단 말이죠. 물론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어린 나이에 왕에 오르고 나니까 그 수많은 백성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자기가 한없이 외소해지는 것을 경험했겠죠. 어떻게 내가 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판을 해서 아버지처럼 영명한 군주가 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나라가 계속 발전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정말 고민이었을 거라는 거죠.
이런 큰 어려움 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보면 솔로몬이 재판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두 여인이 있다가 한 아이가 죽었는데 두 여인이 서로 자기자식이라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것을 갈라서 나뉘어 주라. 이런 판결을 어떻게 율법을 보고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짜 놀라운 판결의 지혜이고 재판자의 아주 놀라운 총명이라는 말이죠. 이런 것들이 솔로몬이 자기를 생각할 때 정말 부족했다고 하는 것을 느낀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명이 주어지면 너무 자신만만해 하면은 안 됩니다. 그게 신앙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감당한다는 믿음은 있지만 그러나 주님이 주신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감에 있어서 그런 믿음은 있지만 그러나 그런 사명을 감당해 나감에 있어서 믿음은 있지만 그러나 자신은 이 사명에 어울리지 못하고 필적하지 못한다고 하는 자기 부족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자기 부족에 대한 인식이 자신에게 깊이 있을 때 그때에 비로소 자신이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하나님 앞에 일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란 말이죠. 오늘날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너무 극단적이죠. 뭘 좀 맡겨 보려고 하면 죽어도 안 한다 그래요. 그래서 저는 뭐 목회를 인격적으로 목회를 하고 싶은 마음 이니까 안 한다 그러면 뭐 그만 두라고 안하겠다는 사람 억지로 붙들고 어떻게 일이 되겠느냐. 뭐 딴 사람 찾아보지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되게 웃기는 거죠. 안하긴 뭘 안합니까? 아니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데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감당을 해야지 안하긴 뭘 안합니까? 또 그게 뭐 엄청난 일이라고 그걸 한 교회 안에서 합니다, 안합니다, 줄다리기를 하냐는 거죠. 한 적은 없어요. 안 한다 그러면 탁 놓죠. 그럼 뒤로 턱 넘어 지겠지. 줄다리기는 안하죠. 왜 그렇게 하는 게 아니죠.
그 마리아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극히 큰 능력이 너를 덮고 이제 네가 메시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랬더니 마리아가 뭐라 그럽니까? 저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무슨 교만이에요 자신 만만이에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큰 계획, 주님이 나를 쓰시려고 하는 큰 계획이 자기에게 다가오니까 자기는 주님 앞에 정말 쓸모없는 계집종이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써주십시오. 그런 순종의 자세를 보였던 겁니다.
전 그렇게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부족을 깊이 인식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는 정말 어린아이입니다. 오늘 이 솔로몬의 고백과 같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랬잖아요. 내가 너를 이제 이스라엘과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겠다. 하나님이 그러시니까 나는 아이라 하나님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겠습니까? 나는 너무 부족하고 주님이 나에게 맡기시려는 일은 너무나 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었잖아요.
그 심리는 뭐냐면 하나님의 일을 자기도 하고는 싶은데 그리고 기꺼이 주님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있는데 자기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누가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착한 마음이란 말이죠. 오늘날에 있는 사람들처럼 뭘 시켜주면 동기가 그게 아니라 힘든데 어떻게 해요. 어휴 내가 어떻게 그것까지 신경을 쓰면서 하겠어요? 뭐 잘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겠어. 이렇게 하면서 자기희생이 싫어서 발을 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동기라고 하는 거죠.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이 얘기에요.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 자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섬기고 일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부르실 때 그 원리가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섬기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저는 직장생활하고 학교에서도 있었고 교회에도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마음이 떠난 유능한 사람보다는 좀 모자라도 마음이 바쳐진 사람하고 일하는 것이 그 섬김에 현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럽니다. 재능이 뛰어나고 아무리 남들이 볼 때 여건이 훌륭해도 마음이 떠난 사람은 빨리 떠나보내는 것이 그 조직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다. 그는 그대로 갈 길을 가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마음 떠난 사람 말고 마음이 안 떠나고 마음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모아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죠. 그런 사람을 불러서 그래서 함께 일하면 그 사람이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진 기꺼운 마음,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또 영광을 받으시고 일하시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는 원리 중에 하나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세요. 뭔가 하나님께 섬길 일이 주어지거들랑 그거 거절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감사함으로 받으세요. 한 번, 두 번, 세 번, 거절하면 하나도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신 가까이 있어서 당신을 섬기고 당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말이 그거잖아요. 우리교회도 보면 연초에 제직을 임명할 때 하고 싶은 사람 신청하라 그러잖아요. 한번도 찾아가서 누구보고 집사 좀 해주십시오. 사정한 사람 없어요. 6년이고 7년이고 싫다 그러면 내버려 뒀어요. 부목사님들이 많이 권면하겠지만 억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마음 떠나간 유능한 사람 일만 명이 교회를 에워싸는 것 보다는 좀 모자라고 부족해도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한 사람이 일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더 큰 비결입니다.
왜?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땐대 마음이 떠난 사람이 기도 하겠어요? 마음이 떠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겠느냔 말이죠. 이런 것들을 배우면서 오늘 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나라를 물려받으면서 그러면서 사실 기도해야 될 제목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우선 제일 급한 게 무엇이었어요? 백성들의 민심을 사는 것이 가장 시급하지 않았어요?
다윗에 의해서 가려져 있는 자기, 이 어린 솔로몬을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보면 다윗은 천천이요 그리고 솔로몬은 만만이라 이런 소리를 들어야지만 사실은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죠. 국방은 또 어떻게 하고요? 이제 나라가 최대의 판도를 이루게 되었으니 그 나라에 변방도 많아졌고 그만큼 이제 나라를 지켜야 할 어려움도 많아졌는데, 이런 게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뿐만 아니죠. 당시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귀와 영화를 구할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 다 접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했습니다.
지혜를 구했는데 하나님이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의 기도를 보면서 깊이 감동을 하신 거예요. 그 감동한 것이 세 가지 이유였어요.
우선 첫째는 그것을 구한 동기자체가 참 훌륭했다고 하는 것이죠. 이 솔로몬의 마음에 지혜를 구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어요? 아버지보다 훌륭한 임금이 되어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아야지 그런 것이었어요? 아니었어요. 그러면 뭐냐 이거에요.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그리고 백성을 올바로 통치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설수 있게 할 것인가? 그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그가 지혜를 구하는 이 제목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제목이었고 그리고 오늘 성경에 뭐라 그러냐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다 이거죠.
솔로몬이 그것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에 꼭 들었다 이거죠. 그래서 이 솔로몬에 마음에 여호와께 지혜를 구하는 이것이 너무나 좋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 솔로몬의 구하는 기도를 아주 기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사명을 맡겨주셨으면 무엇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내가 이 사명을 맡았는데 맡은 자들이 구할 것은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으니 하나님, 나에게 충성된 마음, 올곧은 믿음을 주셔서 내가 이 사명을 감당하게 해 주시옵소서. 혹은 또 이것을 감당하려고 하는 나에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것을 감당하려고 하는데 나에게 놀라운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이것을 감당하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어울려서 사역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지체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악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비유로 드신 그 달란트 맡은 종들에게 나오는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가슴이 타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여기서 이일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 그러다가 한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사명을 맡겨주었는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준 사명을 위해서는 거의 매달려 기도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행복이나 구하고 자기가 닥친 문제들이나 해결하기위해서 매달리면서 하나님의 일은 뒷전으로 집어 팽개치고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 중에 이렇게 말할 사람 있겠죠. 목사님 전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런 거 없는 데요. 그러면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도 없는 거예요.
자신에게 하나님이 계시면 반드시 그것은 은혜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고 은혜가 주어졌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는 거예요. 그런 사명이 없는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한 것은 그의 마음속에 내가 왕으로써 이 세상에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부귀와 영화를 누려야겠다는 마음 하나도 없고 오직 이 마음속에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마음이 꽉 찼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착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앞에 받은 사명을 생각해 보세요. 정말 여러분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생각을 많이 해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해 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보셨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해보면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게 되는데 하지 않습니다. 그건 부끄러운 것이죠,
어느 목사님이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교회에서 때가 되면 장로도 세우고 권사도 세우고 그러잖아요. 그러더니 자기네는 항상 미리 광고를 못하고 한 주전에 딱 광고하고 곧바로 투표한다 이거에요. 미리 기도하고 그래야 되잖아요? 안 된대요. 왜 그러냐니까 김목사님 몰라서 그렇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럽니까? 한두 달 전에 광고를 했더니 선거운동들을 한다는 거예요. 전화통에 불이 난다는 거예요. 너 나 찍어야해. 아니면 사람들 내세워 가지고 이리 저리 교회 앞에 가가지고 야 우리 요번에 누구 밀어주자 왜? 우리 구역이잖아. 그러면서 막 돌아다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도 하여튼 투표를 해서 권사들이 뽑혔어요. 어쨌든 지간에 뽑혔으니까 감사하죠. 떨어진 사람 떨어지고 붙은 사람 붙어서 임직식을 할 때 까지는 좋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에 권사들이 됐어요. 권사님들이 옛날하고는 틀려서 지금도 젊은 권사님들이 많이 나와요. 되고 나서 그다음이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게 열열이 선거운동하고 된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슨 일만 시키면 안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그랬죠. 이해가 안 간대요. 안하겠으면 처음서부터 임직을 하지 말지 말이지. 자기 좀 시켜 달라고 온 교인들에게 전화를 걸어가지고 선거운동까지 해놓고 말이지. 되고 나서는 그 다음에는 무엇을 맡겨도 안한다고 그런다 말이지. 짜증나는 사람들이라고 말예요.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받은 직분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명예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솔로몬을 임금을 세우신 것도 부귀영화누리면서 한번 떵떵거리고 살아보라고 여기에 두신 게 아니잖아요. 어린 아이도 그걸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했더니 부귀도 필요 없고 영화도 필요 없고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맡겨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혜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근데 사람들이 참 어리석어요. 그 어리석은 게 뭐냐면 이 세상에 살아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제 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나이가 되면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자신의 일도 있으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사실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지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지 그렇게 깨달은 것이 없어요, 그래?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은 개떡같이 팽개쳐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팽개쳐서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자기 자신이 축복받기를 원하고 일이 안되면 왜 이렇게 일이 안되나 고민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발라야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뻐하시고 축복하시지 주님이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또 그들에게 물질을 축복해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위기 가운데 건져주시고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신 것은 그들에게 사명이 있어서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거든요. 그러면 그것을 해서 잘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야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 안중에도 없고 사명에 대해서는 일 푼어치도 마음이 없고 저 좋은 대로만 살아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현장에 축복이 없고 망가져 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이 사명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든 삶의 근원이고 축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우리들이 사명을 잘 감당해 나아가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가 넘쳐요.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이 사명에 자리에서 들어나는 것이에요.
오늘 이 아침의 시간에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봐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 나 좀 도와주고 나 좀 복주시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특별히 맡겨주신 사명을 개떡까지 팽개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 괘씸하게 생각하세요. 약하긴 뭐가 약해요? 약한 것은 악한 것 하고 달라요.
세미얼 볼튼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약한 것은 의지의 올곧음이 있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살려고 하는데 약한 거예요. 그게 약한 거예요. 악한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고집스럽게. 그게 악한 거예요. 올곧음이 없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대해서 헌신하고 그것을 잘 이루어야 되겠다고 하는 눈물이 없는데 약하긴 뭐가 약해요.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뭐가 약해요. 그게 약한 겁니까? 약한 것은 그 길을 따라가려고 애를 쓰고 분투하고 눈물을 흘리고 견딜 수 없는 환경을 참고 견디고 이기고 나아가려고 할 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 그것이 약한 거지. 마음에 하나님의 일이 가슴에 없는데 주님의 일이 가슴에 없는데 그것을 위해서 눈물 흘려 보지도 않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애지중지 해보지도 않았는데 약하긴 뭐가 약해요. 축복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다면 사기 떨어져서 어떻게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이 충성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맡긴 사명 개떡같이 팽개치고 제멋대로 마갈 대 소갈 대 살았는데 막 복을 받는다면 사기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을 하겠어요.
없어요. 그렇게 살면 안돼는 겁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시지 않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실 리가 있습니까? 왜 우리의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느냐 이거에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명을 맡겨주시면 그것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쁨으로 그것을 받고 받은 후에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이 일이 매우 중요하고 그리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정말 헌신해야 되겠다. 뭐가 필요할까? 나에게 용기가 필요하구나. 또 물질이 필요하구나. 그리고 아니면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맡은 사람들의 책임이잖아요. 은혜 주시면 뭐하겠어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은혠데 그렇게 팽개치고 살아가는 삶,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도 안 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 사람의 앞길에 늘 가시밭길이 있어요. 자신은 잘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세요. 그럴 수 없다는 거죠. 그렇게 살면 안돼요. 절대로 그렇게 살면 안돼요.
첫째는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고, 두 번째는 뭐냐면 그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거예요. 그래서 일천 번의 번제를 드리네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번제가 뭔지 이번에 다 배웠잖아요. 그걸 일천 번을 드렸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는 이 지점에서 정몽주의 시를 생각나게 해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일백 번이 아니라 천 번을 죽은 거예요. 번제 드리는 그 제물 자체가 죽여서 드리는 것인데 그 자체가 이미 벌써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 한 나라의 임금이었으니 비둘기를 갖고 가서 번제를 드렸겠어요? 수소를 가지고 드렸을 거 아니에요? 일천 마리의 소가 죽어 넘어 갔어요. 그리고 그것을 다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이제 이 한 나라의 왕이 천 번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거기 왔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먼저 자신의 번제를 일천 번이나 드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이죠.
여러분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여러분이 은혜를 안 받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은혜를 받으시기만 하면 하나님이 항상 사명을 주십니다. 은혜 안에는 사명이 깃들여 있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 사명을 받을 텐데 어떻게 해야지만 이 은혜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는지 아마 여러분들이 궁금할 겁니다. 그것은 뭐냐면 기도가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기도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경배가 필요하다 이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보니까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이 하나님 내게 맡겨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물질을 좀 주시옵소서.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펴서 제가 맡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에요 아름답지 않은 것이에요? 아름답죠. 그런데 그렇게만 하면 안 되고 자신이 먼저 물질을 바쳐야 되요. 또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텐데 보니까 자기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어요. 그때 어떻게 하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잖아요.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면서 먼저 우선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자기가 먼저 헌신을 하고 희생을 해야 되요. 자기가 힘을 써야지요. 어차피 혼자는 안 되는 거니까 사람이 와야 되니까 하나님 사람 보내 주실 때까지 내가 기다리겠습니다.
정말로 그 사명을 감당해나가야 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죠.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교회에서도 이렇게 직원들도 많고 교역자들도 많으니까 일을 시켜보면 어떤 책임을 부여받았을 때 이런 거 있잖아요. 그 어떤 사명을 맡았을 때 그 사명을 맡아가지고 일 하는 사람이 그것을 잘 감당해나가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먼저 자신이 희생을 해야 되요. 그래서 함께 일을 해보면 사람들의 이런 것들을 다 파악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책임을 부여받았을 때 것을 끝까지 이루어야 되겠다고 하는 그 의지가 너무 강해요. 강하니까 충분히 그 일이 이루어져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이 끝까지 이루어져야 되겠다고 하는 의지가 약해요. 약하니까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요. 그러나 환경과 상황이 어려워지면 포기해요. 그러고 나서 다시 확인을 하면 쭉 이야기를 하는데 안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을 하다가 왜 안 됐는지 변명을 듣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일을 경배의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완수한 것을 보고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이거죠. 의지가 박약하다 이거에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곽선희 목사님이 한번 당신 설교에서 그런 말씀을 하더라고요. 당신 할아버지한테 들은 말씀이래요. 아주 부잣집 양반이 종들을 다 모아놓더니 예들아! 내가 좀 피로하니까 새끼줄 좀 단단하게 꼬아라! 그러더래요. 그리고 시간을 딱 줬어요. 그냥 뭐 늘 있는 지시 상황이니까 종들이 맨 노닥거리고 놀면서 일을 게을리 했어요. 근데 어떤 종은 열심히 오늘도 주인이 명령하시니까 탄탄하게 열심히 꼬았어요. 어떤 사람은 요만큼 꼬고 어떤 사람은 이만큼 꼬고 어떤 사람은 아예 시작도 안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시간이 되서, 예들아 너희들이 꼰 새끼줄을 가지고 다 이리 온. 그래서 다 왔어요. 그동안 너희 내 집에서 오랫동안 정말 고생했다. 애도 많이 쓰고 내가 맡겨준 일을 너희가 너 자신의 일들처럼 그렇게 많이 희생하고 일했는데 이제 너희 가엾어서 더 못 보겠구나. 이제 내가 이번에 다른 노비를 구하도록 하고 너희는 내가 자유를 줄 터이니 나가서 살아라. 나가서 살려면 정착금이 필요하겠지? 지금 너희들이 꽈온 그 새꼬락지에다가 동전을 다 끼워서 가지고 나가라. 그러니 게으름을 펴고 조금 꼬아온 사람은 아무리 동전을 꽂아봐야 요것밖에 안되는 거예요. 이만큼 꼰 사람은 거기다 가뜩 꽂아서 나가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경배의 마음을 가져야죠. 그래서 제가 살아있는 신앙이 뭐냐고 말할 때 하나님의 자기를 향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눈물,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참회의 눈물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이 잘 감당되어야 하겠다고 흘리는 눈물. 이 세 종류의 눈물이 항상 그 눈에서 흘러야지만 그게 진짜 신자라 이 말이에요.
사명이 있어요? 물어보고 싶어요. 사명이 있어요? 목숨과도 바꿔야 할 사명이 있어요? 그리고 이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 사명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이 사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일이다.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좋은 길은 주님이 맡겨주신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길이다. 사명이 있어요, 여러분? 경배의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오늘 보십시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일천 번에 제사를 드리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세 번째는 이 기도의 끈질김이에요. 천 번의 제사를 드렸으니 하루에 한번씩 번제를 드렸어도 삼년가까이 제사를 드렸을 것이고 두 번 번제를 드렸어도 일년 반 가까이 번제를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이 얼마나 끈질긴 강청함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에요. 한 열 번 쯤 드릴 때 나타나시지 왜 일천 번이나 드린 후에 나타나실까?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당신을 시험 삼아 찾아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어제도 제가 우리아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들이 넘어보지 않은 삶과 죽음의 경계사이를 드나드는 가운데 자도자의 정신이 생겨나는 거다. 교역자들을 모아 놓고도 똑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내게 맡겨주신 그 일이 그냥 근근이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지도자가 가져야할 독특한 지도력의 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남이 할 수 없는 것까지 가본 사람, 죽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해 본 사람, 자신의 부족함과 이루어야 할 사명 사이에서 자신의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긴장을 경험해 본 사람, 거기에서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한 사람 거기에서 자기를 다 쏟아 붓는 토혈의 섬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 본 사람들만이 사람들이 모였을 때 연설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 그들 속에 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뒤로 물러서지 않는 끈질김,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주님의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용기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망가진다면 차라리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담대한 용기와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신앙이 중요하다 이거에요.
저는 이렇게 성경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원칙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게 됩니다. 새해가 되는 직전에 한 9월부터 마음이 조리기 시작하고 11월 12월정도 가서는 가슴이 막 타죠. 적재적소에 좋은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고 올 사람은 와야 되요. 그런 사람이 잘 세워지는 것이 주님의 일이 잘되는 비결이잖아요. 하나의 원칙이 뭐냐면 하나님은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자기 모두를 건사람, 모두 걸고 하나님 앞에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이거에요.
All IN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모두 걸어버리는 거예요. 자기의 사명이 있는 데 여기에 모든 것을 걸고 이 사명이 이루어지면 하나님 앞에 정말 내가 부족한 것이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을 건 그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거죠. 그런데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부업처럼 생각을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명예나 나타내는 것 정도로 생각을 한다 이거죠.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아요. 생색이나 내려고 하지 기도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 정말 매달려 부르짖는 그런 자기 깨어짐과 기도, 처절한 자기 죽임, 이런 것들이 없다 이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살아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것이라고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것이고 그렇게 감당해서는 그런 마음은 하나님 앞에 솔로몬의 마음이 아니에요. 이 지혜를 구할 때 솔로몬은 주시면 좋고 또 안주시면 할 수 없고 그게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걸어서 하나님 내가 나이도 어리고 아버지는 훌륭하게 성정을 펼쳤고 그리고 백성들의 수효는 많고 인생의 경험도 일천한데 내가 어떻게 이 백성들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지혜를 주셔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주셔도 되고 안주셔도 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 것이 없이는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체의 열렬함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던 것이죠.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여러 가지 사명들이 있고 직분이 있잖아요. 그게 눈물로 졌어야 해요. 직분을 맡고 사명을 맡았으면서도 기도 거의 안하고 희생도 하지 않고 하루바삐 그것을 벗어버릴 궁리나 하면서 산다면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쁜 신자들이라 이거죠.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요.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당신 자신을 보이시고 그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금년한해에는 절대로 작년에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선 안돼요. 아무리 여러분들이 애쓰고 스스로를 복 받게 하려고 몸부림을 쳐도 축복은 없어요. 그렇게 하면 안돼요. 마음이 올곧고 하나님을 향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해요. 그럴 때 이 사명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을 때 그때가 바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5. 외로울 때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 이다 (시 102:7)
복습을 해 보죠. 첫째 날은 번영할 때, 둘째 날은 시련이 올 때, 셋째 날은 유혹을 받을 때 어제 새벽에는 사명이 주어질 때 그 때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명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요. 자신에게 사명이 주어졌을 때 그 사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에요. 사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가슴에 끌어안고 잘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주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쓰는 사람, 그것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많이 고생하고 노력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깊이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사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마음을 다해서 잘 감당해 나가는 사람이 필요한 자리에 있는 것과 아니면 아무렇게나 감당해 나가고, 감당도 아니죠. 그냥 내버려두고 그 다음에 또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전혀 실지 않고 그리고 해 나아가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입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똑바로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 흔히 말하기를 사명이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다. 그 이유가 뭐냐면 사명이 없으면 그의 마음 안에 하나님도 안 계신 거예요.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와 함께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깊이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믿음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이거죠.
오늘 이제 마지막 새벽입니다. 어떨 때 기도해야 하냐면 외로울 때 기도해야한다는 거죠.
102편은 누가 이 시를 썼는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시가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문체도 비슷하고 그다음에 그 속에서 다루는 내용들도 다윗의 생애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라는 거죠. 102편은 탄원 십니다. 뭔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몸부림으로 주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간구들로 꽉 차 있습니다. 간구하는 시로 차 있는데 그래서 오늘 표제에 보면 곤고한 자가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는 기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토해놓는 기도이다 이거죠.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외로워 졌는지 사실 성경을 보면 이유가 아주 분명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 드셨다가 던지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진노하시고 그를 징계하셨다는 이야기라는 거죠.
그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를 징계하셨으니까 이 사람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던 모양이에요.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들어서 던지셨더니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매우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 얘깁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깊은 외로움 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관계로부터 멀어진다고 할지라도 잠시 동안 우리들이 세상에 팔려서 살고 잠시 동안 세상에 팔려서 정신을 못 차리면 우리가 잠시 잠깐 동안은 외롭지 않고 이 세상의 즐거움에 취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데서 오는 외로움들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려 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끊어졌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그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런 데서 오는 깊은 외로움 같은 것들이 느껴진단 말이죠. 그래서 결국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사랑을 받으며 살 때 비로소 이런 모든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하고 살면 그때에 우리가 외롭게 되는 거라 이 얘기에요.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데서 신자의 모든 행복이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하나의 진리다고 하는 것이죠.
이 시인이 느끼고 있는 외로움은 단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세속적인 이유에서 그냥 자기가 외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진 데서 오는 그런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이죠. 일단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하나님으로부터 뭘 느끼나하면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감을 느끼는 것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아주 깊은 거리감을 느끼는 되는 거예요. 그 거리감 안에서 신자는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신자 안에 있는 마음의 외로움이 마지막에 가져다주는 이 결과가 무엇이냐? 절대로 건설적인 결과들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인 결과들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하나님과의 사이가 아주 멀어지고 나면 거기에서 신자는 깊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결국은 자신이 죄를 사랑하고 죄를 좋아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멀리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그 깊은 거리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본성은 잠시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간섭을 피해서 저 좋은 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고 그의 영혼의 참다운 위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그 친교 속에서 지내는 그 안에서만 신자가 행복해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신자가 느끼는 외로움에는 거룩하고 신령한 의미의 외로움과 그리고 아주 타락한 정서에 부합하는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먼저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에 어울리는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인간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고립감이에요. 이런 고립감속에서 하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고립감을 느끼게 되면 인간이 필연적으로 좌절하고 낙망하거나 아니면 담대하게 자기 육체의 즐거움을 택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요. 왜냐하면 이러한 부패한 인간의 정서에 부합하는 외로움은 하나님을 찾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느끼는 깊은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탈피시켜 보려고 애를 쓰게 되는데 이때 선택하기 가장 좋은 것이 쾌락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에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살아가는 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결국은 깊이 파들어 가면 외로움에서 오는 것이고 그 외로움은 결국 사랑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겁니다. 오늘날 있는 이 세상에 우리나라에 있는 많은 남녀들이 우선 부부가 깊이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자녀들이 그 부모로부터 깊이 사랑받고 동기간들이 서로 우애해서 그 안에서 아주 자기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소속감을 느끼고, 이게 사랑하며 산다고 하면 말이죠 이렇게 세상이 향락에 치우친 이런 세상이 될 리가 없다 이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외국에 예를 들어서 안됐습니다만 저는 뭐 그렇게 썩 외국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객관적인 사람들이지만 유럽 같은데 특히 스위스 같은 나라 가보면 8시 넘어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아주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하죠. 그리고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남자들끼리 앉아서 밥 먹거나 술 먹는 사람들 다 기이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남자들끼리 새까맣게 몰려와가지고 와서 퍼먹고 그리고 밥 먹고 있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거의 8시 넘으면 철십니다. 문 다 닫고 몇몇 집들만 남아요. 대개 관광객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멀쩡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가지고. 우리나라 한번 보세요. 밤늦게 밤11시 12시 되도록 말이죠. 가정의 식구들 다 팽개치고 남자들끼리 몰려다니면서 퍼먹고 낮에는 또 여자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먹고 말이지. 낮에 음식 좀 괜찮은데 가 봐요. 아줌마들이 바글바글. 목소리는 또 왜 그렇게 큰지. 하여튼 걸쭉하게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면서 밥이 도대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여러분들은 절대 그러지 마요.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좀 생각을 해야지.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 유익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화합하는 세상이 되죠. 그게 예의범절이잖아요. 낮에는 그렇고, 밤에는 남자들이 그러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죠. 그러니 살아가는 삶이 어떻겠습니까? 정말 너무 불행하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 우선 관계에 있어서 서로 사랑을 하면 그게 안 되거든요. 그렇게 보이는 수많은 타락 향락 이런 것들 그 다음에 그 향락을 불러일으키는 그 외로움 그리고 그 외로움 뒤에 있는 것은 결국은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걸 여러분이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돈이 많고 얼굴이 잘생기고 떵떵거리고 살아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열등감이 있어요. 자녀들도 마찬가지에요. 자녀들도 공부를 잘하고 학교에서 모범생이라고 해도 부모에게 사랑을 깊이 받지 못하면 항상 열등감과 분노 같은 것이 있어요. 사랑 속에서 살아가게 돼 있는 거예요. 이런 타락하고 세속적인 정서에 어울리는 이 외로움은 특징이 하나님을 찾게 하지를 않아요. 그게 문제라는 거죠.
그런데 이제 거룩한 정서의 외로움이 있어요. 이 사람이 느끼는 외로움도 사실은 그런 거죠. 그래서 거룩한 정서로써의 외로움은 뭐냐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외롭지 않겠죠?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을 받으면 외롭겠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거룩한 외로움, 신령한 정서의 고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이런 거죠.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는 외로움이에요. 물론 사랑도 못 받고 있고 혹은 환란도 만났고 혹은 오늘 시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혼을 내셔가지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았어요. 이 시인이 얼마나 자기가 괴로우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 드셨다가 던져버리셨다. 사실 한 번 사람을 높이 들어서 던져 보세요. 어떻게 되겠나. 자기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하나님이 나를 분노하심으로 높이 드셨고 그래서 진노하심으로 나를 땅에 던졌습니다. 그래서 머리고 어깨고 허리고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이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 절름거리는 신세가 된 것이에요. 그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얼마나 괴로우면 그렇게 이야기 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외롭기 때문에 이 사람은 지금 쾌락을 찾아가거나 그런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종류의 외로움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사람을 이끄는 외로움이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이 인생의 대해서 허무감을 조금 느끼면 도덕적 회의가 찾아오게 되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젊어서는 안 그래도 나이가 좀 든 다음에 그러잖아요. 아이고, 그 담배 좀 작작 피시오. 그 뭐 몸에도 안 좋은 거. 아 그까짓 거 얼마나 산다고 좀 피다가 좀 일찍 죽지. 그런데 막상 담배 피다가 암이나 걸려봐 그러면 뭐 어차피 일찍 죽겠다 그랬는데 그냥 기다리지 그래요? 얼른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좀 살아보려고 애쓰는 게 인간의 마음이잖아요. 왜 그렇게 사냐 이거에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인간이 말이죠. 인간이 그 인생을 에 그까짓 거 뭐 이러면서 인생 그 자체에 대해서 조금 외로움을 느끼면 쾌락을 찾아 그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요. 그렇게 도덕적 회의가 오고 방종이 온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말이죠. 언제 기회 있으면 하겠지만요. 중년을 잘 살아야 되요. 중년을 잘 못 살면 그럼 인생이 망가지는 거예요. 근데 그 중년은 너무 진하게 어려운 인생의 시기에요. 나는 그 시기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시기다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성경을 한번 잘 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다 중년에 문제를 일으켰어요. 다윗도 중년에 문제를 일으켰죠. 그 다음에 히스기야나 아사같은 사람들도 결국엔 중년이 문제가 됐죠. 그래서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인간이 외로움을 인생 자체를 즉시 하다가 외로움을 느끼게 되면 도덕적 회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인생이 허무해 보이고 이까짓 거 살면 뭐하나 그러면서 도덕적 회의가 와요. 근데 그건 속된 외로움이에요.
신령한 외로움은 뭐냐면 인생 속에 깃들여 있는 허물을 깊이 직시하고 거기에서 외로움을 느끼는데 말하자면 거한 쾌락이나 도덕적 쾌락을 통해서도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는, 달래기를 거부하는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에요.
예를 들자면 오늘 이 시인이 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잠시 눈이 멀어서 어느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과의 거리감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깊은 외로움을 느낄 때 그때에 하나님의 엄위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 외로움을 깊이 느끼면서 내가 이렇게 외로운 것은 결국은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홀로두시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엄위를 생각하죠.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고 늘 나를 사랑해 주시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품으로부터 멀리 떠나있게 하시는 구나. 하나님은 정말 우리에게 온전한 삶을 원하시는 분이구나.
하나님의 엄위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때에 마음이 상하게 되는 거예요. 그 마음 상함의 핵심이 뭐냐면 외로움이에요. 이 세상에 있는 향락이나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좋은 것으로도 달랠 수없는 신령한 외로움 하나님을 갈망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란 말이죠.
그런 하나님의 엄위를 인식하거나 인생이 깊은 허무를 직시하게 되요. 그래서 그 허무가 얼마나 큰지 순간의 쾌락이나 타락으로 그것을 피하고 잊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깊은 허무감 그 마지막 끝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이때에 신자는 이제 무엇으로도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 수 없고 하나님이 오셔서 자기를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 세상에 다른 모든 것이 싫고 오직 그분께 사랑을 받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상한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고 그 은혜에 목마른 마음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다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어떤 경우든지 간에 외로움을 느낄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때다 이거죠. 세속적인 외로움을 느끼고 그 외로움이 부패한 본성을 자극할 때는 왜 기도해야 할까요? 타락하고 범죄 할 위험이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때다 이거죠. 떠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은혜,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신령한 외로움에 목말라서 상한 마음이 될 때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해요. 왜 기도해야 하죠? 이 상한 마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가 정말로 변화되고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에서 오는 외로움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상한 마음에 그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깨어진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깨어진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는데 그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 상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깨어진 마음이 되어야 된다는 거죠. 사실 이 상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레드 니슈바라 그러는데 사실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샤바르가
깨지다니까 탁 깨진 맘 이게 상한 맘이에요. 근데 통회하는 마음이 뭐냐면 무하흐다끄에요. 다끄에는 뭐냐면 짖니 겨 진 그런 뜻이에요. 결국 뭐냐면 상한 마음은 탁 깨어 졌지만 그래서 여러분 그릇 같은 거 생각해 보세요. 탁하고 깨뜨려 졌지만 그 잘 깨졌으면 살짝 갔다 가운데 접착제로 하고 붙이면 원래 모양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식으로 깨뜨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진짜 하나님이 깨뜨려지기를 원하는 마음은 어제 말씀드린 거 같이 하나님의 손으로 다시 빚으시려고 할 때 얼마든지 다시 빚어지는 마음 그런 걸 의미한단 말이죠. 그렇게 해서 다시 빚어진 마음. 비유를 하지만 도기가 있는데 아직 불에 굽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늘에 슬쩍 말렸어요. 말린 그거를 말이죠. 탁하고 깨뜨렸을 때에는 그 깨어지기는 했지만 원래의 형체가 남아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만약에 곱게 짖니 겨서 빻아서 고운 가루로 만들었다고 할 거 같으면 다시 거기다 물을 섞으면 아마 또 다른 토기를 만들어서 다른 형체의 그릇을 빚어낼 수 있을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그렇게 탁 하고 깨뜨려진 그런 마음이 아니라 자잘하게 부서져서 자신의 형체를 잃어버린 마음 거기에 성령이 은혜를 부어주실 때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그래서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오래도록 계속 그 마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아요. 그래서 은혜가 이길 때가 있는가 하면 죄가 이기고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이 있는가 하면 싫증으로 가득 찰 때가 있고 해서 그 끊임없는 변화가 우리의 마음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요. 그런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령한 외로움을 느껴서 상한 마음이 되었을 때는 그야 말로 쇠가 닳았을 때에요. 그때 두들겨야 돼요. 그때 기도로 두들겨야지만 그 상한 마음이 온전히 짖니 겨진 마음이 되어서 으깨어진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손에 의해서 다시 빚어지는 거예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에 뜨겁게 닳은 쇠가 식어지면 더 굳어지게 되듯이 하나님의 은혜에 가까이 갔던 이런 신령한 작용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 식어지고 나면 그 마음이 배나 더 강퍅해 진다고 말했어요. 그건 사실이다 이거죠. 그래서 이런 신령한 외로움으로 차 있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던 그 마음이 이 상한 상태에 있고 신령한 외로움을 느낄 때에 더욱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간절히 기도해서 그래서 그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으깨어진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은혜의 부으심을 통해 그가 새롭게 빚어지면 그 모든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과 함께 사는 거예요.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사는 거죠. 그러나 이제 그 시기를 놓치게 되면 그 마음이 더 단단하게 굳어져서 좀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름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런 외로움을 느낄 때도 우리들이 더더욱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큰 행복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그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외로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 가까이 계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친구들은 잠시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 주님은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간다고 할지라도 거기서도 주님이 함께 하시죠. 이제껏 까지 우리를 붙드셨고 지금도 붙잡고 계시며 앞으로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또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서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외로울 때
시편102편 7절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 이다
복습을 해 보죠. 첫째 날은 번영할 때, 둘째 날은 시련이 올 때, 셋째 날은 유혹을 받을 때 어제 새벽에는 사명이 주어질 때 그 때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명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요. 자신에게 사명이 주어졌을 때 그 사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에요. 사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가슴에 끌어안고 잘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주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쓰는 사람, 그것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많이 고생하고 노력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깊이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사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마음을 다해서 잘 감당해 나가는 사람이 필요한 자리에 있는 것과 아니면 아무렇게나 감당해 나가고, 감당도 아니죠. 그냥 내버려두고 그 다음에 또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전혀 실지 않고 그리고 해 나아가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입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똑바로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 흔히 말하기를 사명이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다. 그 이유가 뭐냐면 사명이 없으면 그의 마음 안에 하나님도 안 계신 거예요.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와 함께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깊이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믿음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이거죠.
오늘 이제 마지막 새벽입니다. 어떨 때 기도해야 하냐면 외로울 때 기도해야한다는 거죠.
102편은 누가 이 시를 썼는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시가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문체도 비슷하고 그다음에 그 속에서 다루는 내용들도 다윗의 생애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라는 거죠. 102편은 탄원 십니다. 뭔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몸부림으로 주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간구들로 꽉 차 있습니다. 간구하는 시로 차 있는데 그래서 오늘 표제에 보면 곤고한 자가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는 기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토해놓는 기도이다 이거죠.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외로워 졌는지 사실 성경을 보면 이유가 아주 분명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 드셨다가 던지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진노하시고 그를 징계하셨다는 이야기라는 거죠.
그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를 징계하셨으니까 이 사람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던 모양이에요.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들어서 던지셨더니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매우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 얘깁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깊은 외로움 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관계로부터 멀어진다고 할지라도 잠시 동안 우리들이 세상에 팔려서 살고 잠시 동안 세상에 팔려서 정신을 못 차리면 우리가 잠시 잠깐 동안은 외롭지 않고 이 세상의 즐거움에 취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데서 오는 외로움들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려 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끊어졌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그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런 데서 오는 깊은 외로움 같은 것들이 느껴진단 말이죠. 그래서 결국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사랑을 받으며 살 때 비로소 이런 모든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하고 살면 그때에 우리가 외롭게 되는 거라 이 얘기에요.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데서 신자의 모든 행복이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하나의 진리다고 하는 것이죠.
이 시인이 느끼고 있는 외로움은 단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세속적인 이유에서 그냥 자기가 외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진 데서 오는 그런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이죠. 일단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하나님으로부터 뭘 느끼나하면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감을 느끼는 것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아주 깊은 거리감을 느끼는 되는 거예요. 그 거리감 안에서 신자는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신자 안에 있는 마음의 외로움이 마지막에 가져다주는 이 결과가 무엇이냐? 절대로 건설적인 결과들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인 결과들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하나님과의 사이가 아주 멀어지고 나면 거기에서 신자는 깊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결국은 자신이 죄를 사랑하고 죄를 좋아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멀리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그 깊은 거리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본성은 잠시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간섭을 피해서 저 좋은 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고 그의 영혼의 참다운 위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그 친교 속에서 지내는 그 안에서만 신자가 행복해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신자가 느끼는 외로움에는 거룩하고 신령한 의미의 외로움과 그리고 아주 타락한 정서에 부합하는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먼저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에 어울리는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인간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고립감이에요. 이런 고립감속에서 하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고립감을 느끼게 되면 인간이 필연적으로 좌절하고 낙망하거나 아니면 담대하게 자기 육체의 즐거움을 택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요. 왜냐하면 이러한 부패한 인간의 정서에 부합하는 외로움은 하나님을 찾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느끼는 깊은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탈피시켜 보려고 애를 쓰게 되는데 이때 선택하기 가장 좋은 것이 쾌락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에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살아가는 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결국은 깊이 파들어 가면 외로움에서 오는 것이고 그 외로움은 결국 사랑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겁니다. 오늘날 있는 이 세상에 우리나라에 있는 많은 남녀들이 우선 부부가 깊이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자녀들이 그 부모로부터 깊이 사랑받고 동기간들이 서로 우애해서 그 안에서 아주 자기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소속감을 느끼고, 이게 사랑하며 산다고 하면 말이죠 이렇게 세상이 향락에 치우친 이런 세상이 될 리가 없다 이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외국에 예를 들어서 안됐습니다만 저는 뭐 그렇게 썩 외국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객관적인 사람들이지만 유럽 같은데 특히 스위스 같은 나라 가보면 8시 넘어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아주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하죠. 그리고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남자들끼리 앉아서 밥 먹거나 술 먹는 사람들 다 기이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남자들끼리 새까맣게 몰려와가지고 와서 퍼먹고 그리고 밥 먹고 있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거의 8시 넘으면 철십니다. 문 다 닫고 몇몇 집들만 남아요. 대개 관광객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멀쩡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가지고. 우리나라 한번 보세요. 밤늦게 밤11시 12시 되도록 말이죠. 가정의 식구들 다 팽개치고 남자들끼리 몰려다니면서 퍼먹고 낮에는 또 여자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먹고 말이지. 낮에 음식 좀 괜찮은데 가 봐요. 아줌마들이 바글바글. 목소리는 또 왜 그렇게 큰지. 하여튼 걸쭉하게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면서 밥이 도대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여러분들은 절대 그러지 마요.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좀 생각을 해야지.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 유익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화합하는 세상이 되죠. 그게 예의범절이잖아요. 낮에는 그렇고, 밤에는 남자들이 그러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죠. 그러니 살아가는 삶이 어떻겠습니까? 정말 너무 불행하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 우선 관계에 있어서 서로 사랑을 하면 그게 안 되거든요. 그렇게 보이는 수많은 타락 향락 이런 것들 그 다음에 그 향락을 불러일으키는 그 외로움 그리고 그 외로움 뒤에 있는 것은 결국은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걸 여러분이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돈이 많고 얼굴이 잘생기고 떵떵거리고 살아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열등감이 있어요. 자녀들도 마찬가지에요. 자녀들도 공부를 잘하고 학교에서 모범생이라고 해도 부모에게 사랑을 깊이 받지 못하면 항상 열등감과 분노 같은 것이 있어요. 사랑 속에서 살아가게 돼 있는 거예요. 이런 타락하고 세속적인 정서에 어울리는 이 외로움은 특징이 하나님을 찾게 하지를 않아요. 그게 문제라는 거죠.
그런데 이제 거룩한 정서의 외로움이 있어요. 이 사람이 느끼는 외로움도 사실은 그런 거죠. 그래서 거룩한 정서로써의 외로움은 뭐냐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외롭지 않겠죠?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을 받으면 외롭겠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거룩한 외로움, 신령한 정서의 고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이런 거죠.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는 외로움이에요. 물론 사랑도 못 받고 있고 혹은 환란도 만났고 혹은 오늘 시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혼을 내셔가지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았어요. 이 시인이 얼마나 자기가 괴로우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 드셨다가 던져버리셨다. 사실 한 번 사람을 높이 들어서 던져 보세요. 어떻게 되겠나. 자기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하나님이 나를 분노하심으로 높이 드셨고 그래서 진노하심으로 나를 땅에 던졌습니다. 그래서 머리고 어깨고 허리고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이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 절름거리는 신세가 된 것이에요. 그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얼마나 괴로우면 그렇게 이야기 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외롭기 때문에 이 사람은 지금 쾌락을 찾아가거나 그런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종류의 외로움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사람을 이끄는 외로움이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이 인생의 대해서 허무감을 조금 느끼면 도덕적 회의가 찾아오게 되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젊어서는 안 그래도 나이가 좀 든 다음에 그러잖아요. 아이고, 그 담배 좀 작작 피시오. 그 뭐 몸에도 안 좋은 거. 아 그까짓 거 얼마나 산다고 좀 피다가 좀 일찍 죽지. 그런데 막상 담배 피다가 암이나 걸려봐 그러면 뭐 어차피 일찍 죽겠다 그랬는데 그냥 기다리지 그래요? 얼른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좀 살아보려고 애쓰는 게 인간의 마음이잖아요. 왜 그렇게 사냐 이거에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인간이 말이죠. 인간이 그 인생을 에 그까짓 거 뭐 이러면서 인생 그 자체에 대해서 조금 외로움을 느끼면 쾌락을 찾아 그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요. 그렇게 도덕적 회의가 오고 방종이 온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말이죠. 언제 기회 있으면 하겠지만요. 중년을 잘 살아야 되요. 중년을 잘 못 살면 그럼 인생이 망가지는 거예요. 근데 그 중년은 너무 진하게 어려운 인생의 시기에요. 나는 그 시기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시기다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성경을 한번 잘 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다 중년에 문제를 일으켰어요. 다윗도 중년에 문제를 일으켰죠. 그 다음에 히스기야나 아사같은 사람들도 결국엔 중년이 문제가 됐죠. 그래서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인간이 외로움을 인생 자체를 즉시 하다가 외로움을 느끼게 되면 도덕적 회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인생이 허무해 보이고 이까짓 거 살면 뭐하나 그러면서 도덕적 회의가 와요. 근데 그건 속된 외로움이에요.
신령한 외로움은 뭐냐면 인생 속에 깃들여 있는 허물을 깊이 직시하고 거기에서 외로움을 느끼는데 말하자면 거한 쾌락이나 도덕적 쾌락을 통해서도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는, 달래기를 거부하는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에요.
예를 들자면 오늘 이 시인이 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잠시 눈이 멀어서 어느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과의 거리감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깊은 외로움을 느낄 때 그때에 하나님의 엄위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 외로움을 깊이 느끼면서 내가 이렇게 외로운 것은 결국은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홀로두시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엄위를 생각하죠.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고 늘 나를 사랑해 주시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품으로부터 멀리 떠나있게 하시는 구나. 하나님은 정말 우리에게 온전한 삶을 원하시는 분이구나.
하나님의 엄위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때에 마음이 상하게 되는 거예요. 그 마음 상함의 핵심이 뭐냐면 외로움이에요. 이 세상에 있는 향락이나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좋은 것으로도 달랠 수없는 신령한 외로움 하나님을 갈망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란 말이죠.
그런 하나님의 엄위를 인식하거나 인생이 깊은 허무를 직시하게 되요. 그래서 그 허무가 얼마나 큰지 순간의 쾌락이나 타락으로 그것을 피하고 잊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깊은 허무감 그 마지막 끝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이때에 신자는 이제 무엇으로도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 수 없고 하나님이 오셔서 자기를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 세상에 다른 모든 것이 싫고 오직 그분께 사랑을 받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상한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고 그 은혜에 목마른 마음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다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어떤 경우든지 간에 외로움을 느낄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때다 이거죠. 세속적인 외로움을 느끼고 그 외로움이 부패한 본성을 자극할 때는 왜 기도해야 할까요? 타락하고 범죄 할 위험이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때다 이거죠. 떠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은혜,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신령한 외로움에 목말라서 상한 마음이 될 때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해요. 왜 기도해야 하죠? 이 상한 마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가 정말로 변화되고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에서 오는 외로움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상한 마음에 그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깨어진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깨어진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는데 그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 상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깨어진 마음이 되어야 된다는 거죠. 사실 이 상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레드 니슈바라 그러는데 사실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샤바르가
깨지다니까 탁 깨진 맘 이게 상한 맘이에요. 근데 통회하는 마음이 뭐냐면 무하흐다끄에요. 다끄에는 뭐냐면 짖니 겨 진 그런 뜻이에요. 결국 뭐냐면 상한 마음은 탁 깨어 졌지만 그래서 여러분 그릇 같은 거 생각해 보세요. 탁하고 깨뜨려 졌지만 그 잘 깨졌으면 살짝 갔다 가운데 접착제로 하고 붙이면 원래 모양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식으로 깨뜨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진짜 하나님이 깨뜨려지기를 원하는 마음은 어제 말씀드린 거 같이 하나님의 손으로 다시 빚으시려고 할 때 얼마든지 다시 빚어지는 마음 그런 걸 의미한단 말이죠. 그렇게 해서 다시 빚어진 마음. 비유를 하지만 도기가 있는데 아직 불에 굽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늘에 슬쩍 말렸어요. 말린 그거를 말이죠. 탁하고 깨뜨렸을 때에는 그 깨어지기는 했지만 원래의 형체가 남아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만약에 곱게 짖니 겨서 빻아서 고운 가루로 만들었다고 할 거 같으면 다시 거기다 물을 섞으면 아마 또 다른 토기를 만들어서 다른 형체의 그릇을 빚어낼 수 있을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그렇게 탁 하고 깨뜨려진 그런 마음이 아니라 자잘하게 부서져서 자신의 형체를 잃어버린 마음 거기에 성령이 은혜를 부어주실 때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그래서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오래도록 계속 그 마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아요. 그래서 은혜가 이길 때가 있는가 하면 죄가 이기고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이 있는가 하면 싫증으로 가득 찰 때가 있고 해서 그 끊임없는 변화가 우리의 마음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요. 그런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령한 외로움을 느껴서 상한 마음이 되었을 때는 그야 말로 쇠가 닳았을 때에요. 그때 두들겨야 돼요. 그때 기도로 두들겨야지만 그 상한 마음이 온전히 짖니 겨진 마음이 되어서 으깨어진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손에 의해서 다시 빚어지는 거예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에 뜨겁게 닳은 쇠가 식어지면 더 굳어지게 되듯이 하나님의 은혜에 가까이 갔던 이런 신령한 작용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 식어지고 나면 그 마음이 배나 더 강퍅해 진다고 말했어요. 그건 사실이다 이거죠. 그래서 이런 신령한 외로움으로 차 있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던 그 마음이 이 상한 상태에 있고 신령한 외로움을 느낄 때에 더욱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간절히 기도해서 그래서 그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으깨어진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은혜의 부으심을 통해 그가 새롭게 빚어지면 그 모든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과 함께 사는 거예요.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사는 거죠. 그러나 이제 그 시기를 놓치게 되면 그 마음이 더 단단하게 굳어져서 좀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름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런 외로움을 느낄 때도 우리들이 더더욱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큰 행복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그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외로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 가까이 계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친구들은 잠시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 주님은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간다고 할지라도 거기서도 주님이 함께 하시죠. 이제껏 까지 우리를 붙드셨고 지금도 붙잡고 계시며 앞으로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또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서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