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
(2018년 주일오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8년 5월 27일-10월 14일
편집내용|녹취 원본
출 력 일|2019년 2월 21일
목 차
1. 기도의 모범, 예수님 2018.5.27. 주일오전 1
2. 기도, 영혼의 안식 2018.9.9. 주일오전 8
3. 마음의 우물에서 2018.9.16. 주일오전 17
4. 우리의 필요를 아심 2018.9.30. 주일오전 25
5. 기도 후에 용서를 가르치심 2018.10.7. 주일오전 32
6.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구하라 2018.10.14. 주일오전 39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1 2018. 5. 27 주일 낮 예배
< 기도의 모범, 예수님 >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I. 본문해설
II. 예수님의 기도 생활
A. 몸소 기도하심
B. 항상 기도하심
C. 오래 기도하심
III. 감화를 끼치심
- 배우고 싶었던 예수님의 기도.
a. 기도의 내용.
b. 기도의 방식.
- 기도의 감화 없이 제자는 없다.
IV. 적용과 결론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2 2018. 9. 9 주일 낮 예배
< 기도, 영혼의 안식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I. 본문해설
- 산상수훈의 가르침 중 외식에 대해 말씀하셨음.
- 그 후 구제에 이어 외식자들의 기도를 언급하심.
- 참된 영적 생활은 어떤 기도 생활인지를 보여줌.
- 예수님께서 책망하기보다 차분한 어조로 가르치심.
II. 기도, 내 영혼의 안식
- 영혼의 기능은 육체의 감각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
- 육체의 감각들은 마음에 무수한 인상과 정보를 남김.
- 따라서 마음은 쉼 없이 활동하며 분주하게 작용함.
- 침묵 중에 세상 감각을 덜어내고 하나님을 응시해야 함.
A. 기도시간을 가지라
- “너는 기도할 때”.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여기심.
- 말씀은 깨달음을 주지만 기도를 통해 힘을 주심.
- 신앙생활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 마음을 세속으로 가득 채워선 안됨.
- 마음에 빈 공간 없다면 무엇이 들어갈까.
- 세상 것들에 영적 관심사가 밀려나는 현실.
- 믿음은 하나님 바라보는 영혼의 응시임.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 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 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 하지 말라”(골 3:1-2)
- 감각에 마음을 방치할 때 세속적 욕망들이 솟아남.
- 기도는 하늘에 속한 것들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임.
- 기도에 관해 듣기만 하지 말고 직접 실천하라.
- 기도가 어려운 게 아니라, 마음이 어렵기 때문임.
- 그 마음이 변하는 길이 곧 기도이다.
B. 골방으로 들어가라
- “골방” 집안의 가장 눈에 띄지 않음.
- 복잡한 일상과 단절한 시간이 필요.
a. 환경적으로 : 미디어, 사람, 일.
b. 심리적으로 : 연상을 끊기, 주님께 집중.
- 홍수와 같은 감각과 정보의 물결 속에 비틀거림.
- 현대는 그것들을 이용해서 살아 가야 함.
- but, 그것들에 몰입해서 자기를 상실해선 안됨.
- 빛 감각에 빠진 곤충처럼 살아가지 말라.
-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세 단계.
a. 순발력을 잃어버림.(readiness)
b. 열렬함을 잃어버림.(fervency)
c. 형식을 잃어버림.(formality)
- 골방은 소란한 것들을 피하는 시간과 장소를 의미함.
- 당신의 골방은 어디인가? 어떤 상태인가?
-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요.
- 고요한 중에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가 필요함.
C. 하나님께 기도하라
- “하나님께…” 너무나 당연한 기도의 교훈.
- 기도를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에게 하는가?
- but, 하나님 임재 속에서 드리는 영혼의 기도임.
- 우리의 많은 기도가 그 분과 대면 없이 드려짐.
- 임재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보라!
a. 지루한 기도가 시간을 초월함.
b. 냉랭한 기도가 성품을 경험함.
c. 나 중심 기도가 주님 중심이 됨.
- 은혜 바다, 기도의 배를 생각해보라.
-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은 자에게 성령이 역사함.
- 쓰레기 같은 세상 것에 마음을 다 뺏기지 말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 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 하니”(요일 2:15)
- 간절한 기도는 사랑의 정동(情動)에서 나온다.
- 밀어가 없는 연애가 무슨 사랑인가?
- 깊은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라.
III. 적용과 결론
- 세상에서 우리의 영혼은 고단하다.
- 참된 양식은 주님을 만나는 데서 온다.
- 고요한 중에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라!
-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라!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3 2018. 9. 16 주일 낮 예배
< 마음의 우물에서 >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I. 본문해설
- 기도의 골방을 찾으라고 가르치심.
- 신앙에 있어 꼭 기도시간이 필요함.
- 참된 경건에 있어 개인기도가 중요함.
- 외식을 버린 참된 기도에 응답하심.
II.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라
A. 중언부언하지 않음
- “이방인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 batelogesete “헛되이 반복하다”
- 이것은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드리는 것인가?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 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 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마 26:43-45)
- 중언부언은 단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님.
- 이는 마음으로부터 분리된 언어만의 기도를 가리킴.
- 따라서 같은 기도를 반복함은 중언부언이 아님.
- 한번만 말해도 중언부언일 수 있음. 당시 이방인의 관습.
- 언어와 마음이 분리된 상태에서 하는 기도.
- 기도의 언어 자체에 주술적 힘이 있다고 봄.
- 예수님 가르침의 충격 : 하나님의 인격성.
- 그분의 성육신으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가르치심.
- 그들에겐 가까이 하기에 너무 멀리 계신 존재였음.
- but, 예수 인간성으로 하나님을 친밀하게 보이심.
- 참된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임을 가르쳐 주심.
- 언어 없는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님.
- 기도는 “신에 대한 관상”과 같은 심리적 몰입이 아님.
- 기도의 오류 : 언어만의 기도, 언어가 없는 기도.
-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언어 활동임. 경외심의 표현.
- 언어의 생성과 조합을 통해 마음의 틀을 바꾸심.
“어려운 일 때문에 주님 앞에 우리의 사정을 아뢸 때…주님 은 모든 것을 아시며,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이루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로써 우리 마음은 안식을 얻게 된다”「칼빈의 기도론」9쪽
- 기도의 실천을 통해 우리 마음을 바꾸심.
- 마음을 드리는 기도의 실천과 성령의 역사.
B. 마음에서 길어 올림
-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강조하심.
- 기도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차량과 같음.
- 마음의 시동이 멈추면 빨리 뒤로 미끄러짐.
- 뒤로 가려고 의도한 게 아닌데 미끄러진다.
- 마음의 엔진이 식으면 재가동하기 어렵다.
- 열렬한 기도가 멈추지 않도록 마음을 지킴.
- 기도 생활이 멈추면 죄와 정욕이 득세함.
- 많은 지식 있어도 기도가 없으면 생명력을 잃음.
- 죄를 이기는 기도 생활 : 열렬함 + 지속성.
- 기도의 은혜 안에 있다면 계속 기도해야 함.
- 기도의 은혜에서 멀어졌다면 더욱 기도해야 함.
- 만약 은혜에서 미끄러졌다면 어떻게 할까?
a. 마음을 따뜻하게 하라.
b.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c. 마음에서 언어를 길어 올려라.
d. 간절하게 기도하라.
-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라.
- 거절감을 느끼고, 용서에 대한 의심들이 생김.
- but,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 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 증하셨느니라”(롬 5:8)
- 양심의 송사와 정죄감에 복음으로 맞서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 어린 아이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라.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 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 리이다”(시 56:2-3)
- 주님은 자비로우사 당신만 의지하는 자를 돌아보신다.
- 기도로써 경외와 절대적 의존의 마음을 표현하라.
III. 적용과 결론
- 삶이 무거운 것은 은혜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는 충만한 영적 생명이 필요하다.
-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라.
-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기를 힘쓰라.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4 2018. 9. 30 주일 낮 예배
< 우리의 필요를 아심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8)
I. 본문해설
-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
- 하나님은 은밀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 마음에서 길어 올리는 언어의 기도.
-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제시함.
II. 우리의 필요를 아심
-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A. 우리의 필요를 아심
- “있어야 할 것을…아시느니라”
-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a. 육신의 필요.
b. 마음의 필요.
c. 영혼의 필요.
- 자신과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아심.
- 더욱이 당신의 자녀이기에 잘 아심.
-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지 認知가 아님.
- 자녀의 필요를 알고 돌보심을 뜻함.
B. 좋으신 우리 아버지
-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 우리의 기도 들으시는 분에 대한 가르침.
- 그분은 모든 것 아시는 하나님이심.
-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심.
- 단지 아실 뿐 아니라 공급하시는 주님.
-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기도한다.
- 모든 좋은 것이 오직 아버지께로 옴을 보여줌.
-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계시하심.
a. 세계와 구별되심 : 높고 위대하심.
b. 우리를 사랑하심 : 관계를 맺으심.
- 하나님의 선하심 불멸의 찬송 제목.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 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 신약에서 선함은 사랑으로 표현됨.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요 16:27)
-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 불 같이 뜨거운 사랑이 십자가에서 표현됨.
- 사랑이 우리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죽게 함.
- 그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실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 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 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 중요한 것은 인격적 위탁이다.
III. 적용과 결론
-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손 안에 있음.
- 하나님의 선하심의 지혜로 살게 되었음.
- 모든 것 주님께 내려놓고 기도하라.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5 2018. 10. 7 주일 낮 예배
< 기도 후에 용서를 가르치심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I. 본문해설
- 외식을 떠난 마음으로부터의 기도를 가르치심.
- 이어서 기도의 모범으로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셨음.
- 기도에 대한 가르침 후 용서의 교훈이 등장함.
- 산상수훈의 내용은 실제였으나 후대에 배열했을 것임.
- 마가복음에는 이 내용의 일부가 흩어져 있음.
- 누가복음에는 더 많은 내용이 길게 나옴.
- 용서가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줌.
II. 용서를 가르치심
A. 잘못을 용서하라
- “사람의 잘못…”(14)
- 연약함과 실수만 아닌 의도된 범죄까지 포함함.
- apete “용서, 탕감, 허락, 내버려 두다”
- 이것은 자기의 손해와 관련된 범과인 경우에 한함.
- 피해 당사자는 가해자에 대해 일정한 용서의 권한을 가짐.
- 이 권한은 분명해서 하나님의 용납에까지 영향을 줌.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 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 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욥 42:8上)
- 때로는 범죄에 대한 용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도 풀리리라”(마 18:18)
- 범죄와 과실들은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에서 옴.
- 중요한 것은 개인의 피해와 관련된 것이어야 함.
- 자기에게 있는 권한의 범위 안에서 용서할 수 있음.
- 용서하지 않아서 맺힌 사람이 없게 하여야 함.
B. 용서가 필요하다
- 잘못한 자를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임.
-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15)
- 우리 자신에도 다른 사람에게 대한 범과는 불가피함.
- 용서는 단지 사람에 베풂이 아닌 주님께 올리는 것임.
- 우리가 매일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임을 기억하라.
- 용서는 인간의 죄가 들어온 후 하나님의 경륜임.
- 사람과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은 사랑임.
- 사랑은 교통하는 덕(德)이며, 미움은 단절의 악(惡)임.
- 미움의 단절 극복하게 하시는 사랑의 계획.
- 용서의 희생과 고통을 통해 십자가를 배우게 하심.
- 사람과의 깨진 관계는 주님과 깨진 관계를 반영함.
-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채 기도할 수 없음.
- 주님 안의 형제만 아닌, “사람들”도 용서해야 함.
-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용서함.
- 열렬한 기도가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심.
-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함.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 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 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 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 라”(엡 4:30-32)
- 성령 근심 시키면서 열렬한 기도가 가능할까?
- 이것은 신자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너희 잘못을 용서치 않으시리라”(15)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 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 용서와 회개로 기도의 문을 열어라.
III. 적용과 결론
- 불멸하는 기도의 모범을 가르치셨음.
- 직후에 “이웃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심.
- 미움이 우리 기도의 문을 닫게 했다.
- 먼저 용서하라. 진심으로 기도의 문이 열릴 것이다.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6 2018. 10. 14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구하라 >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5-10)
I. 본문해설
-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후 이어지는 기도의 교훈.
- “또 이르시되” 주기도문과 연속된 것임을 보여줌.
- 주기도문은 기도의 형식, 본문은 자세 대한 교훈.
- 참된 기도 생활은 진실함과 함께 끈질김을 요구함.
II. 밤중에 찾아온 벗
- 한밤중 여행 중에 찾아온 벗을 위해 간청함.
- 굶주린 벗을 위해 떡 세 덩이를 구함.
-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 벗 됨으로 인해서는 주지 않으나 간청함에 들어줄 것임.
- 기도에 있어 중요함 : 진실함 + 끈질김.
- 억울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비유.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 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8:4-5)
- 끈질기게 간청함으로써 응답 받음을 보여 주심.
III. 필요한 것을 주심
A. 전인격적 접근
-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음.
- but, 열심히 기도하는 모든 것을 받지는 아니 함.
-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자신에 대해 배움.
-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전인격적 접근을 요구함.
- “구하라”(입), “찾으라”(눈), “두드리라”(손)
- 기도는 전인격적으로 간구하는 삶을 포괄함.
- 기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요구함. 기도의 어려움.
- 하나님을 뵐 때 삶을 질서 있게 하려는 열망을 갖으라.
-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이 필요함.
- 하나님을 알고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
- 표상 속에 찢어졌던 자신 속으로 돌아와 주를 바라보라.
B. 간절히 구함
-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아시는 주님이시다.
- but, 우리로 하여금 간절히 간구하게 하신다.
-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왜 그러실까?
- 이것은 기도의 목적과 관계가 있다.
- 우리로 하여금 당신만을 의지하게 하심이다.
- 이런 의존의 경험 속에서 순종을 배우게 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 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6-17)
- 신앙이 부족한 자는 필요한 것을 욕심 통해 얻는다 생각함.
- but, 기도를 통해 모든 좋은 것들이 주님께로부터 옴을 배움.
- 간절한 소원을 열심히 간구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배움.
- 그래서 기도는 우리 자신을 바꾸시는 과정이다.
- 하나님은 인색하지도, 능력이 부족하지도 않으시다.
- 기도를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 다시 한번 자신을 추스르며 기도로 나아가라.
IV. 적용과 결론
-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관계를 요구한다.
- 하나님 향해 간절히 열렬히 기도를 실천하라.
- 선하신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2018.5.27. 주일오전1)
기도의 모범,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본을 따라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기도를 알고 싶어 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은 신약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렌즈가 됩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간절히 기대하셨던 교회 공동체의 모습과 그리고 세상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에서 이 본문처럼 생생하게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준 곳이 흔치 않을 정도입니다.
II. 예수님의 기도 생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몸소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기도하신 주체가 예수님 자신 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본체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A. 몸소 기도하심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기도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몸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연약한 우리들처럼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심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 할지를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동안에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는 방편으로 이렇게 친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하나님의 본성을 인간의 본성 아래 감추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는 없으셨지만 연약한 한 인간의 몸을 입고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전심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너무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참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기도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몸소 기도하여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중보기도의 능력을 말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중보기도라는 말은 예수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사람이 중보자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섬김 기도라고 부르도록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섬김의 기도는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불신자이던 사람들이 섬김 기도를 해주던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예수를 믿게 되고, 은혜에서 물러가 있던 미끄러진 사람들이 지체들의 간절한 섬김의 기도로 다시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많은 섬김의 기도가 자신이 해야 하는 기도를 대치해 주지는 못합니다. 많은 사람의 섬김의 기도가 있어도 마지막 그 기도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사자가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섬김 기도해 주었지만 그가 구원을 받은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한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몸소 기도하심으로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 자신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모본을 보이심으로 어떤 때에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친히 기도함으로써 하늘의 능력을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몸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해야 할 기도를 제자들에게 미루시거나 위탁하지 아니하였으니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여러분들도 몸소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며칠 전에도 아파트 출입문 앞에 어느 피트니스 클럽에서 광고를 붙여놓고 갔습니다. 아주 날씬한 자매의 사진 하나를 붙여놓고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야, 언제까지 체중계만 보고 있을 거야? 운동을 해야지’ 라고 말입니다. 한 체육관에는 정문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운동을 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은 체육관에 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어려운 일을 지금 방금 해냈습니다. 나머지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에는 차의 시동을 앞에서 걸게 되어 있었습니다. 조수들이 그 일을 담당했는데 크랭크를 차 엔진 앞부분에다 끼우고 힘차게 돌리면 엔진이 털털 거리다가 결국 발동이 걸리게 됩니다. 겨울에 엔진이 식으면 발동 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여러 번 피식피식 소리를 내다가 힘들게 엔진이 걸립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엔진이 걸리고 나면 힘차게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멈춰있던 큰 몸집의 버스 혹은 트럭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한번 자신이 몸소 떨치고 일어나 자신이 직접 기도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떨치고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 시작하고 우리의 심령에 은혜의 발동이 걸리고 나면 기도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의무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위탁하고 맡길 수 있는 일이 있고, 자기가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는 바로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일입니다. 남이 아무리 밥을 많이 먹은들 내 배가 부를 일 없고, 다른 사람이 자기 다리를 아무리 긁은들 내 발이 시원해질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몸소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항상 기도하심
두 번째는 항상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한 곳’이라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엔토포티니’라고 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직역을 하자면 ‘어떤 장소에서’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가 끊임없이 여행해야 하는 생애이심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일정한 거처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일생이 동가숙서가식() 하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서는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 3장 21절에서는 예수님이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 5장 16절에서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한적한 곳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짧은 생애에 기도하는 장소가 이렇게 다양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만큼 사역에 무거운 짐을 지시고 분주한 일생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디에 가시든지 항상 그곳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아 기도 올리는 장소였습니다. 산에서나 강에서나 그리고 한적한 광야에서나 어디에서든지 그 분이 무릎 꿇는 그곳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리는 거룩한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이 싸우는 전투적인 삶입니다. 축구 경기를 합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그 경기장이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면 수만 명의 동포들이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가운데 힘차게 응원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은 홈경기가 아닙니다. 하늘에는 권세 잡은 자들이 포진하고 있고 온갖 시련과 고난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우리 안에도 죄와 근심이 있습니다. 안팎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칩시다. 세월이 하나님 얼마나 흐르면 모든 환경이 여러분들이 기도하기에 좋은 환경으로 변할까요? 시간이 있을 때에는 기도할 마음이 없고 기도할 마음이 있을 때에는 장소가 마땅치 않습니다. 세 가지가 딱 맞아야지 기도할 수 있을 텐데 이 세 가지는 날마다 어긋납니다. 기도할 수 있을 때에는 여건이 허락하지 않고 여건이 있을 때에는 기도할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의 인생은 바람처럼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는 매일매일 기도하기에 적합한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끊임없이 떠돌며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며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어디에 가든지 그곳은 곧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가 되었으니 그것은 환경을 능가하며 항상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은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그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신자에게 이 세상은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우리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수많은 함성 소리보다는 야유하고 비웃고 그리고 우리를 조롱하는 소리들이 가득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준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환경 타령하다가 인생 다 보내지 말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오래 기도하심
세 번째는 오래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희랍어 본문에는 “마치시매”라고 번역된 이 단어를 ‘에파오싸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쉬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창세기 1장에서 사용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샤바트’라는 단어이고 거기에서 안식일을 의미하는 영어의 ‘사바쓰데이(the Sabbath day)’가 왔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의 길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공중전화를 하는 것 같은 짤막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장시간을 몸과 마음을 쏟아 하나님께 간절히 비셨기 때문에 지쳐서 잠시 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장시간의 기도였습니다.
성경은 짧은 기도에도 큰 능력이 깃들 수 있게 된 많은 예들을 제시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길에 원주민을 추격하고 있었지만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달과 해가 그 하늘에 머물라고 명령했으니 이것은 기도의 변형된 형태였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사 하나님은 그 해를 하늘에 멎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삼손은 블레셋과 헷 싸움을 승리로 끝낸 후 죽을 것 같은 때에 내가 심히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호소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 앞에서 샘을 터트려 그 물을 먹고 마시고 원기를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짧은 기도에 깃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나타나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후 제자들의 사역 속에서 나타납니다. 짧은 기도로 수많은 병자들을 낫게 하고 기적을 이 땅에 불러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큰 권능이 짧은 기도를 통해 나타난 예는 얼마든지 성경에 나옵니다.
그러나 모든 짧은 기도가 이런 큰 능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짧은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내렸던 위대한 기도는 모두 그 이전에 오랜 시간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쳤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긴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는 아니지만 능력 있는 짧은 기도는 오랜 기도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길이가 깊이를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기도의 깊이는 반드시 긴 시간에 기도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대화해도 시간이 금세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의지하면 기도는 반드시 긴 시간을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단하고 바쁘신 사역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단하셨으면 풍랑 이는 바다, 배에서 주무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렇게 고단한 생애에도 불구하고 장시간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이 그의 육체의 힘을 소진하셨는지 기도가 끝난 후에는 쉬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자신을 쏟아 부은 장시간의 기간에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것도 해주시고, 저것도 해주시고, 이것도 해주시고 저것도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고 우리에게 응답을 해 주시려고 합니다. ‘드르륵’ 하늘의 문이 열리고 ‘얘야’하고 우리를 불렀지만 우리는 이미 딴 곳으로 가고 없다면 어떻게 그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일방적으로 하나님 앞에 퍼붓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에 배이게 하고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배이게 하는 사랑의 교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시간의 길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자주 기도하는데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뜨겁고 간절하게 매달리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장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셔야 했던 예수님을 뵈오며 여러분들도 그 분의 모본을 따라 장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장은 예수님처럼 긴 기도를 드릴 수 없어도 조금씩, 조금씩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며 하나님 앞에 더 친밀한 기도를 올리기를 힘쓸 때에 그만큼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은혜의 비밀이 크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더 오래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감화를 끼치심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감화를 끼치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뵈오니 그 모습이 얼마나 신령하고 감화력이 있었던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기도 속에서 진정으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지를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우고 싶어 하리만치 깊은 감화력이 있는 기도였음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두 가지를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첫째로는 기도의 내용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당시 요한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관습을 따라 예수님께 기도를 청했으니 이것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내용에 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즉석에서 지어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예수님이 일평생 간절히 기도하시던 그 기도의 내용을 그대로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알고 싶었던 것은 기도의 내용뿐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배우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감화를 끼치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평소에 하던 그대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놓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모습을 뵈었을 때 자신들은 도달해보지 못한 깊은 기도의 경지를 보았고 그리고 나서 제자들의 마음에서는 한 가지 소원이 불끈 솟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간절히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했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기도의 모본으로서 제자들에게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고 어떤 태도로 기도해야 되는지를 동시에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보다 더 분명하게 오늘 성경을 통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 기도를 통해 얼마나 더 많이 배워야 하겠습니까? ‘주님께 복을 주십시오.’ ‘돈을 주십시오.’ ‘결혼을 하게 해주십시오.’ ‘땅을 주십시오.’ 라고 비는 사람은 많지만 주님께 ‘그 넓고 깊은 기도의 세계를 주십시오.’ 라고 간구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사실 기도의 세계를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약하지만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가장 큰 것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배우고 신학을 공부하고 또 가슴이 비전에 불타 제자훈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기도의 감화 없이는 그는 결코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고단한 사역의 일정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이 머무시는 그 어느 곳을 택하여 주님께 올리는 기도의 처소로 삼으셨습니다. 당신 친히 기도하셨고 환경을 능가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헌신하셨습니다. 장시간 자신의 마음을 쏟아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기도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지체들에게 여러분들의 기도의 모습이 배우고 싶은 감화력을 끼치는 기도의 모습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전심으로 마음을 당신께 향하고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힘든 환경이라고요? 언제쯤 그 환경이 좋아지고 기도할만한 여건이 갖추어질까요? 어차피 우리 인간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시련과 고난에 시달리고 모든 일들이 우리의 뜻대로 되어서 행복하고 기쁠 때보다는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 강아지 코코를 옆에 놓고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먹고 나서 야채를 좀 뜯어서 강아지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면 배변이 잘 된다고 해서 먹였습니다. 그리고 맛있게 받아먹습니다. 그리고 맑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진짜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을 쳐다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도 참 힘들겠다. 낳은 지 3일 만에 애견센터로 왔다고 하니 엄마를 알았을 리가 없고 아빠는 진작 도망갔을 거고’ 그리고 애견 센터에서 불안 속에서 떨다가 우리 집에 오고 우리 집에 온 첫날 사진이 아직도 있는데 두려움이 가득 찬 표정입니다. ‘그런 강아지로서의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러고 보니까 살아있는 모든 것은 힘들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강아지뿐이겠습니까?
우리 인간도 살아있는 것 자체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힘든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저절로 좋아지는 그런 일들을 요행이나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면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힘든 인생이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 힘든 것을 극복하고 우리에게 없는 하늘의 생명과 은혜를 받는지를 배운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모두에게도 아마 간절히 기도를 드리며 은혜의 부흥을 누리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 속에서 기도의 부흥을 누리면서 살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고 행복했기 때문에 기도한 것도 아니었고, 모든 여건이 기도할 수 있도록 밀어주었기 때문에 기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힘들고 어려웠지만 기도 속에 몸부림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올 때에 그것을 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졌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고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힘들고 어려웠던 세월들을 믿음으로 이겼고 기도의 힘으로 극복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자녀들이 이러한 기도의 부흥을 누리고 심령에 큰 은혜를 받으며 살기를 얼마나 원하시겠습니까? 살았으나 죽은 자와 다름없는 인생을 살기보다는 그러나 살아있는 자답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하는 모든 사람을 용납하십니다.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죄를 용서해 주시고 힘이 없다면 힘을 주십니다. 갈 길을 몰라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진리의 밝은 빛을 비추어 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제자들에게 감화를 끼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이 오늘 예수님의 이 기도를 배운 제자들이 되어서 간절한 기도를 드림으로 또 다른 미래의 여러분들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감화를 끼치는 스승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여러분들의 지체들에게, 여러분들의 가족들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게 하고 간절한 기도 속에서 자신을 쏟아 붓는 기도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기를 원하십니다. 간절한 기도의 고통뿐만 아니라 기도 끝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수확에 대해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다시 기도 생활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미루지 아니하고 몸소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환경에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세속적인 시간들을 줄이고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감화를 끼치는 그런 깊은 은혜의 생활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힘겨웠던 인생의 모든 시간들을 떨쳐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능력 있는 힘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2018.9.9 주일오전2)
기도, 영혼의 안식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산상수훈의 가르침입니다. 6장에 이르러서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는 외식을 주의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외식은 진실한 신앙생활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외식의 원리를 기도 생활에도 적용해 주셨습니다. 기도는 고단한 우리의 영혼의 안식입니다. 왜냐하면 기도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참된 쉼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생활은 기독교에서 전하는 참된 영적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책망하기보다는 차분한 어조로 제자들과 거기에 모인 많은 무리들에게 기도에 관한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의 비밀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인 이 사람들은 관습을 따라 기도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들을 이미 기도하는 사람들로 보고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II. 기도, 내 영혼의 안식
말씀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지만 기도는 실제로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영혼의 능력을 줍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것이 비록 적극적인 의미에서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에 세상에 있는 것들로 가득차서 주님을 모실 공간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기도가 가능하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의 언어이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없으니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지어낸 대화인 것입니다.
A. 기도시간을 가지라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우리의 현실은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에 대한 관심사가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사에 의해 밀려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기능은 육체의 감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지고, 후각으로 느끼고, 입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들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은 출렁거립니다. 그리고 이 육체의 문을 통해 들어온 수많은 감각들은 우리의 마음에 수많은 정보를 실어다 나르고 인상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상상의 작용을 통하여 이런 것들은 있지도 아니한 또 다른 수많은 상상을 만들어 내서 우리의 오감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 이상의 느낌과 상상을 하게 만듭니다. 이러느라고 우리의 마음은 쉼 없이 부지런히 작용하고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영혼의 빈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 중에 고요히 하나님을 바랄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믿음은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성경 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고 한 이 구절은 바로 광야에서 있었던 한 사건으로부터 도입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린 사건이었습니다. 치명적인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을 때에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지팡이 끝에 달고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나음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입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곧 우리의 영혼에 응시는 하늘을 향한 응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육체의 감각에 우리의 마음을 방치할 때 그 감각들은 수많은 인상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마음의 상상의 작용을 가져옵니다.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더 많이 보고 싶고, 갖고 싶고, 만져보고 싶고, 맛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정신은 이 땅에 단단히 고정되게 됩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로 되어 있는 우리의 영혼이 이렇게 땅에 우리의 마음이 고정됨으로써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는, 날아오르는, 마음과 정신의 날갯짓입니다. 그렇게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그 모든 속박들을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줄이라면 회개하고 끊어야 할 것이고, 집착이라면 집착하는 그것이 헛된 것이고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생각에 매어 날아올라야 합니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은 이렇게 듣기만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서 부터라도 직접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의 사람은 기도를 어려워합니다. 근데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도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기도에 적합하지 않도록 변했으니 기도는 여러분들에게 마음에 없는 종교행위입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기도가 없이 기독교 신앙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다면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머리로 아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그리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살아가는 삶 사이에 괴리를 느낄 뿐입니다. 기도는 이 괴리를 없애주거나 혹은 좁혀줍니다. 그래서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무엇에 의해서도 침범 받지 않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실제로 기도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도전을 받고 기도를 실천해 본 어떤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도를 하면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안 되는 기도는 여전히 안 되고, 기도를 해도 여전히 응답은 없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깨달음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것 같다.’, ‘내가 기도하는데 왠지 내 기도에는 응답이 없는 것같다.’라고 하는 이 깨달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를 반성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기도만 하고 고쳐지지 않는 나의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자신의 기도가 드리기는 하지만 힘이 없는 기도가 되었는지를 반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로 시작해서 삶 전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반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감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무엇인가를 바꾸고 고쳐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자기를 데려갑니다. 결국 기도의 문제는 기도에만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을 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항상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며 기도의 교감을 하나님과 나눌 수 있다면 그는 삶 전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기도를 능가할 수 없고, 기도는 삶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반성조차도 기도할 시간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불문하고 기도할 시간을 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중 상당 많은 부분은 안 해도 되는 부분이고,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고, 안 해도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좋아서 하는 일들입니다. 그것을 덜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B. 골방으로 들어가라
두 번째는 ‘골방으로 들어가라.’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네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 기도하라”라고 말입니다. 골방은 집안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공간입니다. 이 골방은 창고도 아니고 사람이 기거하는 거처도 아닙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창고도 될 수 있고 사람이 거처하는 방도 될 수 있는 방과 창고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는 그러한 방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문학적인 은유입니다. 골방 속에 조용히 들어가 문을 닫으면 누구도 거기 사람이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들처럼 남의 평판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기도할 때에 마을 어귀에서 그래서 손을 높이 들고 길거리에서 기도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선생님은 정말 경건한 분이구나 하는 평판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학적인 은유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복잡한 일상과 그리고 이 어지러운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하나님 이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 이외에 관심 있는 것이 없는 그런 별도의 시간과 공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0년 전에 비하면 과학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을 했고, 우리의 삶은 매우 풍요로워졌습니다. 당시 주 5일 근무는 거론도 되지 않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드디어 주 5일 근무가 일반화되어 있고, 어떤 특별한 직장에서는 주 4일까지 근무한다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에 근무할 수 있는 총 시간을 법으로 규제하고 52시간 이상씩 더 이상 노동할 수 없도록 이렇게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예전보다 마음과 모든 것이 훨씬 편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노동하고 남는 시간을 우리가 고요히 우리의 마음을 정돈하고, 육체의 원기를 회복하고 이러는데 쓰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에너지를 들여서 우리의 즐거움을 찾고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발달한 미디어는 눈부시게 오늘날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면서 켜보는 스마트폰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한 번에 2시간 40분씩 폰을 들여다본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기에 보내는 것입니까? 더욱이 발달된 영상 문화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길을 끄는 영화와 게임, 그리고 도박, 그 이외에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수많은 영상들이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VR의 발전으로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입체적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는 동안에 지식의 양의 총량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예전에는 지식을 공급하는 생산자와 소비하는 소비자들이 나뉘어져 있지만 이제는 그런 공간이 없이 누구나 책을 내려고 하고, 누구나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좋다, 나쁘다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기술의 발전으로 사회가 진보해 가고, 그러한 발전된 기술을 누리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그 사회에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기계와 문명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젊은 학자는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한 권의 책 『사피엔스』인데, 인간이 누구이고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종 가운데 가장 치명적으로 위험한 종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순식간에 800만부가 전 세계에서 팔렸습니다. 두 번째 책은 『호모데우스』인데 직역을 하자면 ‘인간신’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제 과학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예전의 인간은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인공 지능을 뇌에 심고 인간의 사지백체가 기능하는 것 중에 열등한 것들은 제거하고 발달된 과학 기술의 생산물들을 몸에 끼워 넣어서 그래서 지금 인간보다는 지성적으로나 기능적으로 훨씬 뛰어난 품질의 인간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인류가 출현하여 이 사회를 이끌고 가고 있을 때에 종전의 자연산인 인간 종들이 과연 인간으로 취급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굳이 유발 하라리의 이런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홍수와 같은 정보의 물결 속에 살고 있고, 그리고 그것을 따라 잡고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에서 줄인 수많은 시간을 거기에 소비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느 정도는 이용해야지만 현대에서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티끌만큼의 해결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이 뛰어난 교통수단을 발휘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15분 내지 12분에 도착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런 튜브 트레인이 만약에 해저에 생겨서 그래서 한국과 서울과 뉴욕 사이를 한 시간에 갈 수 있다고 한들 그렇게 인간이 전철 타듯이 마음을 먹으면 다른 별나라의 세계를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게끔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복잡하게 남지 않을까요?
따라서 이러한 과학 기술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거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거기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해야 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몰입해서 자기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물으시는 여유조차 없이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암시교도나 이런 사람들처럼 과학기술을 죄악시하고 원시로 돌아가는 생활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학 기술과 폭발적으로 진화하는 이 사회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나의 독자적인 견해로 이러한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주체성이 있게끔 떨어질 것들은 떨어지고 가까이 할 것들은 가까이 하면서 자기를 자신이 스스로를 주체성 있게 돌보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이 과학 기술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오늘날 강물처럼 쓸려 내려가는 이 엄청난 문화의 물결에 순응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빛 감각 때문에 해충이 등이 있는 그 빛을 따라서 날아들다가는 전기에 부딪혀서 놀래서는 도망갔지만 5m도 날아가기 전에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시 불을 향해 돌진해서 그 불빛 앞에서 전기에 감전돼 죽어가는 곤충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골방으로 들어가도록 그것도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라고 충고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이렇게 이 세상에서 붙은 욕심들을 털어내고 그리고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밀려오는 이 기술 사회의 문명이 주는 혼란함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날들을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땅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를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님과 고요히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신앙생활은 없다.” 그만큼 기도를 통해서 진리의 빛을 발견하게 되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나 살 힘이 없을 때에 우리는 그 기도를 통해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기도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갖는 깊이만큼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오바마는 “용기란 자기 연민에 대한 무한한 격려입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자기를 위로할 필요가 없고, 나 스스로 나를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고, 다른 인간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이유도 없는 인간이다.’라는 충만한 의식이 용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나를 불쌍하게 여겨 깊은 연민에 빠져든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을 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려준들 그 사람들이 내 인생을 다시 살아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내 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난 상관없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온 죄는 가장 큰 관심사가 그 사람 안에 있는 기도의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 들어와서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순발력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은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이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삶의 상황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즉각적으로 기도로 반응합니다. 그래서 시련이 와도 그 시련 속에 담겨진 의미를 하나님 앞에 물으며 상황의 나쁨보다 자기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선함을 지지합니다. 기도 속에서 이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즐겁고 기쁜 일이 생기고 만사가 내 맘대로 되는 것 같은 때를 만납니다. 그때도 그는 기도합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기도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제일 먼저 허물어뜨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못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상황이 벌어지면 고민을 많이 하고 가슴은 두근거리지만 즉각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기도는 하는데 열렬함을 잃어버리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고 기도 시간도 있는데 예전처럼 마음을 쏟아놓으며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열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했으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었다는 마음, 그리고 이 간절한 기도에 주님이 귀를 기울이신다는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이제 기도라고 하는 그 기도 생활이라고 하는 형식 자체를 결국은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에 내가 이렇게 많이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이 없고, 하나님은 나를 차별대우 하시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기도의 형식 자체를 내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치열한 전쟁터에 이제 갑옷도 벗겨지고 방패도 버리고 투구도 벗어버리고 칼조차 내버려둔 채 맨 몸으로 던져진 사람입니다. 가벼운 상처 하나에도 치명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에 자기를 던져버린 것입니다.
골방은 바로 소란한 것들을 피하여 고요히 하나님 한분만을 의식하는 시간과 장소입니다. 이 골방 속에서 잃어버린 기도의 순발력을 회복하게 되고 그리고 잃어버린 기도의 열렬함을 복구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에 헌신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골방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골방에 들어갔지만 뒷문은 모두 놓고 기도는 하고 있지만 바깥마당에서 기도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칭찬할 사람들의 평판에 마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까? 아니면 골방에 들어왔지만 그러나 골방은 여전히 사람이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기에는 불결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 있는 그러한 방의 상태입니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인격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나 능력이 없는데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해서 이겨 내기 위해서나 모든 것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기도의 골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아름다운 영상과 부추기는 호기심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졌으니 우리는 눈을 조용히 감습니다. 수많은 소리들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으니 우리의 귀를 막습니다. 우리의 코를 현란하게 유혹하는 수많은 냄새와 향기들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부당한 정동에 혼란스러워졌으니 우리는 그 냄새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보드랍고 좋은 것을 만지기 위해서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정동되어 우리의 마음이 굳어졌으니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보드라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는 세상의 보드라운 촉감으로부터 우리의 손을 거둡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로 들어와 우리의 혀를 현란하게 만들었던 그 많은 음식이 우리에게 준 정동 때문에 우리의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여유가 있어도 잠시 우리는 거친 음식을 택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친 음식이 좋거나 혹은 소리가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약한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 모든 오감을 막아놓고 나면 우리는 마치 어두운 우주 공간 속에 던져진 존재처럼 됩니다. 이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깊은 우주의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우주 공간에 던져진 것과 같은 상태에서 눈을 들어 입으로 맛볼 수 없고 육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정신으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깨어나 하나님 한분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골방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들어오는 흙탕물과 같은 수많은 헛된 것들, 우리의 욕망의 솟구침에 샘을 막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의 자원을 공급 받으면서 우리가 참으로 사람답게 살고 어떠한 처지에 처하든지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데 그것을 성경은 사랑, 혹은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아무리 요동치고 변해도 고요한 중에 은밀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렸던 그 골방에서 다시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하나님께 기도하라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께 기도하라.’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당연히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지 하나님 아니면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를 올린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보다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온 교회는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람께 기도했을 리는 없으니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의 진수는 그 분께 단지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그 분의 임재 안에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충만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별로 기도하지 않지만 드린 그 기도 중에서도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대면이 없이 드려진 통보식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기도가 기도의 진수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우리가 성려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기도,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도는 지루한 기도를 시간을 잊어버린 기도로 만들어 줍니다. 냉랭한 기도가 열렬한 기도로 바뀌게 만들어 주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매여 있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비전으로 이동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나는 우리의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인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드넓은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쪽배와 같습니다. 바다가 평안할 때도 있지만 그래서 작은 배지만 평화로운 항해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파도가 밀려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라는 배는 집채만 한 파도에 매달려 있는 아주 작은 모양의 배입니다. 그 배를 파멸로 이끌기 위해 온 바다가 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하나의 파도가 방향을 바꾸기만 해도 우리의 인생은 솟구치는 파도 속에서 물속으로 잠수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인생의 바다에서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 주님을 의지하기로 서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에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나를 붙드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수많은 파도를 만나고 그 파도 속에서 요동쳐도 주님의 손이 나를 붙들고 있으며 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생사에 경계를 초월한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자기 연민으로 활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삶은 비겁한 삶입니다. 나의 인생의 태어난 것은 어차피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책임질 일이 없지만 그러나 이미 운명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거기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도 아주 깨끗하게 내가 그것을 선택했고, 그것이 나의 잘못이라 어거스틴이 고백한 바와 같이 “메아 꿀파” “나의 죄로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비겁하게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의 현실에 대해서 사람이 핑계를 대고, 상황에 탓을 하고 그리고 육체 이탈한 사람처럼 자신은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여기에 온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려고 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의 태도를 단호히 배격하고 우리는 이것을 역겨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루를 진지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런데 우리 자신은 아무리 진지하게 살아보아야 최선을 다해 보아야 최선의 결과를 뱉지 못합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인생을 주체성 있게 헤쳐 나가지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흔들리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나의 인생이 그 분의 손에 붙들려 있고, 그 분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는 반석이시니 그 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한 내 인생은 그분의 뜻 안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동치는 인생의 파도 속에서도, 풍랑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찬송할 수 있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긴 인생을 온갖 시련을 헤치고 여기까지 살아왔으니 앞으로 내 인생에 조그마한 인생의 풍랑이 더 일어난들 내 인생이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으랴.’ 이것을 믿으며 우리의 삶의 희망을 세상에 살고 있으나 우리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람의 의식을 바꾸어 놓아서 이런 신령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기도의 은혜밖에는 없습니다. 외로워지기 싫은 사람은 기도하면 안 됩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임재 속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많은 외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의 성품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다루시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은혜의 세계의 비밀들을 터득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드리는 기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 속에 만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달콤함은 쓰레기처럼 사라질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티끌만큼도 알 수 없는 신령한 세계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에 가장 잘 준비된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 2장에서 사도는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했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사랑의 정동에서 나옵니다. 기도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더 사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며 그 고민의 깊이만큼 기도는 더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하되 골방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아버지’라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골방에서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족 관계에서 불리는 ‘아빠’라고 하는 단어만큼 이 단어를 잘 번역한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빠처럼 무한히 자비하고 세심하시며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오래참고 그리고 자비를 베푸시는 그 어머니 같은 아버지의 사랑이 주님의 임재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의 가슴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반드시 계시다는 사실과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잠시 미끄러졌어도, 내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잠시 사라졌어도 주님은 선하고 신실하시며 그 주님은 지금도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분명한 믿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밀스럽게 나눌 밀회가 없는 연애가 무슨 사랑입니까? 사랑은 끊임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 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계속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과 연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애하는 지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연인과 같은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 마음이 성경을 읽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애하는 마음은 하나님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자의 기도의 동기입니다. 그러므로 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누구든지 기도의 시간을 내어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가까운 장래에 이런 임재를 그에게 보여주시고 아빠와 같은 사랑으로 선대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기도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이 특권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연애하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밀월을 기도 속에서 나누고, 그 분의 밀월을 성경 속에서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혼은 너무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매우 건조하고 그리고 거칩니다. 우리의 고단한 삶은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양식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이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양식은 주님을 만나는 데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고요한 중에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마음에 두 손을 모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전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 유혹, 그리고 이 세상에 문명과 기술이 주는 정신 산란함으로부터 여러분들을 정돈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누구도 이 은혜로운 경건의 삶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2018.9.16. 주일오전3)
마음의 우물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지난주에 우리에게 기도의 골방을 찾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참된 경건은 기도 생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기도시간, 특히 개인 기도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의 골방을 찾으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이제 그 기도의 골방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교훈하십니다.
II.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라
A. 중언부언하지 않음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첫 번째 요소는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말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바텔로게세타(batelogesete)’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헛되이 말을 반복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중언부언은 문자 그대로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26장 43절에서 45절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 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마 26:43-45)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동일한 말을 반복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이 세 번 반복된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같은 말로 세 번을 기도하시면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중언부언은 단순히 같은 말을 반복해서 기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기도의 언어가 마음과 동떨어진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기도해도 중언부언이 아닐 수 있고, 한번밖에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중언부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 번 반복해서 기도해도 기도하는 매순간 마음이 그 기도 속에 실려 있다면 말은 같아도 그 기도는 모두 새로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한번밖에 말하지 않았어도 마음이 실려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과 언어가 분리된 상태에서 드리는 모든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이고, 이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교훈을 가르쳐 주셨을 때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렸고 그 위에 그들은 자신들이 외식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사람들이 좋은 평판을 받을 것을 기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교훈을 주실 당시 이러한 유대인들의 기도의 태도는 성경으로부터 말미암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이교도들을 닮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언어 자체의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 속에 있는 신통력을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도려내시며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 친밀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분이고, 그리고 가까이 하기에는 위험한 분이었습니다. 너무 거룩하고, 그리고 심판에 능하셔서, 그래서 어떠한 죄인도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는 엄격하신 하나님을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에서 자비하신 하나님이 게시되었으나 그들은 역시 여전히 이러한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매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셔야 했기 때문에 완전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신령한 눈이 없는 사람도 일정한 키와 용모를 가진 예수는 볼 수 있었고, 그 손으로 그 분을 만질 수도 있었으며, 귀로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었고, 코로 그 분의 체취를 느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 것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그리고 위험하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그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리 만치 우리를 사랑하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게 교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그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할 만한 분이시며 그리고 아무리 가까이 해도 결코 위험한 분이 아니심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나누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뵈오며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예전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느끼게 해주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존재였지만 예수님은 인간성으로서 하나님을 친밀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심정을 담아 진리를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외로운 자의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억지로 짜낸 경건이 아니라 당신의 인격과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 같은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는 아들임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하나님과 연애하는 마음입니다. 연애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언어가 솟구쳐 오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대화는 지루하고 힘든 의무가 아니라 달콤한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모든 기도를 하되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되기를 바라셨기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언어가 없는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도는 신에 대한 깊은 관상과 같은 심리적인 몰입이 아닙니다. 기도의 오류는 두 가지인데 언어밖에 없는 기도와 그리고 언어는 없는 기도, 이 모두 올바른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마음만 그 분을 바라고 언어가 없는 것, 마음은 그 분을 떠나 있으면서 언어만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멸시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영혼의 언어활동입니다. 그리고 언어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실까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가 자신을 쏟아 부으며 열렬히 기도해야지만 겨우 겨우 움직이시는 것처럼 그렇게 일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사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바로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와 근심, 걱정, 때로는 유혹과 번민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혼란스러워질 때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심으로서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도는 언어활동입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찾아내고, 그 언어들을 생성하고, 생성된 언어들을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고, 이러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에서 언어가 흘러나오고, 언어는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자신의 기도록에서 이러한 기도의 섭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려운 일 때문에 주님 앞에 우리의 사정을 아뢸 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이루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처럼 마음으로부터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바꾸십니다. 그래서 냉담했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열기가 피어오르게 만드시고, 동토의 땅과 같이 얼어붙었던 우리의 가슴에 은혜의 물이 흐르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이 바로 언어가 마음과 떨어지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기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자체가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언제나 이렇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해서 안 됩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신앙적인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우리의 마음에 경건의 샘물이 흐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주께 하듯 하되 특히 기도는 그 주님 앞에서 올리는 경배의 행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B. 마음에서 길어 올림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우물을 긷듯이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길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바꿔 놓습니다. 적합한 언어를 찾고,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어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싣고 기도하는 일은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면 언제든지 무릎을 꿇으면 그런 기도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의 다수는 그럴 정도로 깊이 있는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중의 일부는 껍데기와 같은 신앙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와 심정이 일치가 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이런 기도를 마음 깊은 곳에서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들 중 얼마나 될까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나의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여” 시인이 고난을 받을 때에 울부짖었던 것같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차량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매우 가파른 언덕을 오르도록 임무가 주어졌다고 칩시다. 큰 트럭으로 출발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트럭을 저 멀리 뒤로 뺄 것입니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리고 기어를 넣은 다음에 가속 폐달을 밟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게 밟고는 계속 밟아서 단숨에 그 언덕을 넘어야 합니다. 만약에 중간에 브레이크를 밟고 서거나 혹은 엔진에 시동이 꺼진다면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무거운 트럭은 사정없이 뒷걸음질 치며 언덕 아래로 굴러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브레이크라도 파열되는 날에는 생각하기 끔찍한 결과를 빚어낼 수 있습니다.
기도 생활도 똑같습니다. 기도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차량과 같습니다. 일단 마음의 시동이 멈추면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주 빠르게 뒤로 미끄러지며 자신이 이런 나쁜 사람이었는지 상상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가게 됩니다. 그냥 기도를 멈추었을 뿐이지 뒤로 가려고 한 것은 아닌데 자기가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끊임없이 뒤로 미끄러져 끝없이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마음의 엔진이 일단 식어서 기도의 불이 꺼지게 되면 마음먹은 때에 한 번에 다시 시동을 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열렬한 기도가 된다면 그것을 멈추지 않도록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도 생활이 멈추게 되면 죄와 정욕이 득세하고, 이 마음에 있는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우리를 어두움에 가둡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 죄와 정욕이 번성할 때 그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너무나 명약관화합니다. 만약에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이 기도의 은혜에서 멀어졌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여기가 끝이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기도가 잘 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불이 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언덕 위를 힘차게 올라가고 있는 트럭입니다. 거기서 브레이크를 밟거나 시동을 끄면 올라온 것만큼 빠른 속도로 뒤로 미끄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됩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기도의 은혜에서 미끄러져 거의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종종 기도하려고 시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안됐을 것이고, 또 됐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를 계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마음의 기도의 시동이 켜지다가는 다시 꺼지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기도의 은혜에서 멀어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여러분에게 실제적인 네 가지 실천 지침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슴에 핫팩을 올려놓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 은혜의 세계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간절히 기도하면 되지만 기도의 은혜에서 멀리 미끄러졌을 때에는 이상하게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눈이 온 언덕길을 낡은 고무신을 신고 올라가는 것처럼 노력은 하는데 자꾸 미끄러집니다. 이럴 때에 먼저 기도하려고 애쓰지 말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으로부터 그리고 신문으로부터, 잡지로부터 좀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 이외에는 쓸데없이 만나지 않도록 우선 자신의 활동 반경을 좀 덜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듣는 음악이 있습니다. 꼭 찬송가가 아니어도 저는 명곡들을 들으면서 조용히 묵상하면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정돈되고 하나님께 기도할 자세가 됩니다. 근심과 걱정에 쌓여있을 때 듣는 음악도 있고, 이 세상 일이 모두 하찮아 보이고 허무해 보일 때 듣는 음악도 있습니다. 찬송을 들으면서 질이 높은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향하도록 변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은혜와 가까이 다가가야지만 마음이 덥혀지는 것입니다. 은혜 충만하고 겸손한 지체들과 나누는 따뜻한 교제는 우리의 속된 마음을 정리해주고, 하나님을 향해 살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논증적이고 복잡한 신학 서적 말고 쉽게 읽히면서도 마음에 찔림을 주고 격려를 주는 좋은 경건 서적들이 퓨리탄 도서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 책을 아주 쉬운 책을 하나 펼쳐서 천천히, 천천히 읽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두 번째 해야 할 지침은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혼자 있는 시간보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을 1번에 둔 이유는 이런 이유입니다. 혼자 있기만 한다고 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앙망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우울증에 있는 사람을 홀로 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끊임없이 염세주의적이고 자학적인 사람을 혼자 놔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낙심하고 절망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먼저 따뜻하게 한 후 그 다음에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쁩니까? 이른 아침서부터 밤까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우리는 바쁘게 보내고 그래서 마음을 쏟아 주님을 찾을 시간도 없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성경을 한 장 읽을 시간도 없이 보냅니다. 책은 언제 읽었는지 손에 책이 들려졌던 기억조차 없는 바쁜 삶을 삽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산 그 삶의 끝에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정말 영생의 열매와 평강의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거기에 있을까요?
우리가 하는 일중 대부분의 일은 안 해도 되는 일이고 덜 해도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도 건강했을 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줄 알았고, 그리고 하나도 내가 안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덜컹 병원에 갑자기 입원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꼭 해야 하는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집회를 약속했어도 ‘목사님 입원하셔서 수술 들어가셨습니다.’ 그게 끝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저는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러니까 집착을 내려놓으면 시간이 납니다. 그 시간을 세 시간, 네 시간, 열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 30분이라도 사람이나 어떤 것도 여러분들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으니 기도가 글씨라면 시간과 장소는 편지지입니다. 편지지 없이 아무리 사연이 많은들 연애편지를 쓸 수 있겠습니까? 너무 어렵습니다. 안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고 삶을 버텨 나갈 수 있는 은혜의 힘을 비축하는 것은 이리저리 쓰러지고 방황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보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과 장소를 가져야합니다.
세 번째 지침은 이제 마음에서 언어를 길어 오르는 것입니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날, 온 땅의 식물들이 가물어 타들어 갈 때 긴 길을 걷다가 기갈 하여 쓰러질 것 같은 때에 한 동네에서 우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낙네로부터 두레박을 넘겨받아 그 두레박을 던집니다. 저 깊은 곳에 두레박이 떨어지면 물에 닿는 소리가 나고 그때 물을 긷는 사람들은 그 두레박을 쓰러뜨립니다. 그래서 몇 번을 위 아래로 들어 올리며 첨벙첨벙 잠기게 한 후 그리고 오랫동안 그 두레박을 길어 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쏟아지는 그 물을 먹으며 해갈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서 우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습관이 좋지 않게 배어 있는 사람들은 육적으로 기도하려고 합니다. 일부러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의자를 흔들거나 아니면 자기도 뜻을 모르는 방언으로 기도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도는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담아 언어를 길어 오르고 그 단어들을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나열하여 사연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단어가 길어 올려지고 올려진 단어들이 문장을 이룰 때에 우리의 마음에 울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에 붙었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자기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그러면서 내 마음에 요동치는 갈등과 번민이 사라지고 영혼이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언어는 급속하게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렇게 마음에서부터 진심으로 언어를 길어 올리되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표현 같은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습관적으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의 마음도 담겨있지 않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기도했기 때문에 그 표현들을 계속 씁니다. 마음에 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기도가 아닌 기도입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언어를 천천히 길어 올리고, 그것도 도저히 불가능한 마음이 된다면 천천히 천천히 그 기도를 글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언어를 낭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지침은 이제 그렇게 기도를 올린 후에 아무리 반복해도 괜찮으니 간절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 지침을 실행하면 닫혔던 기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아주 쉽게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는 거절감이 느껴지고 내가 지은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자책감이 듭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까 라는 의심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맞서야 합니다. 복음의 약속으로 이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굳게 붙들며 주님 앞에 더욱 기도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잘못한 죄에 대한 양심의 송사가 있습니다. 율법의 정죄감 때문에 도저히 우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주님은 나를 버리셨을 것이라고 낙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기도해도 소용없으니 나는 그냥 하나님 없이 살아버릴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때에 복음으로 맞서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것이요”(요일 1:9) 이러한 모든 일들을 반복하면서 역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잡은 손을 놓지 말고 주 하나님만을 의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미워하는 원수들과 교만한 자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던 시인이 그 환란의 날에 하나님께 어린 아이처럼 의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시편 56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2-3)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자비로우셔서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나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기회입니다.
지진이 났습니다. 커다란 씽크홀이 생겼습니다. 빗물과 폭우가 들어오면서 금방 꺼진 땅은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아스팔트가 꺼지면서 미끄럼틀처럼 저 아래 싱크홀로 빠지고 거기 여러분들은 그 아스팔트로 미끄러져서 단번에 그 진흙창에 처박혔습니다. 물은 땅에 점점 발목부터 빠져 들어가기 시작해서 이제 여러분들이 몸부림치며 손을 허우적거려 구조를 외쳤으나 폭우 속에 여러분들의 부르짖음은 허공에 흩어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몸을 휘저어 몸부림쳤으나 이상하게도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오히려 더 깊이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진흙이 묻은 손 간신히 진흙위에 올라와 있고 이제 이 진흙탕 속에 여러분들의 입까지 잠겼습니다. 그때 구조대원이 헬기에서 내려와 여러분들을 향해 손을 뻗친다면 여러분들은 그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아마 사력을 다해서 이게 내 삶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구조대원의 손을 전심으로 붙들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결코 발휘해 본 적이 없는 괴력적인 힘으로 구조대원의 팔을 붙들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 진흙탕에서 헤어 나와 헬기에 매달려 씽크홀 위로 빠져 나오고 그리고 점점 지면으로 내려옵니다. 그때까지 여러분들은 구조대원을 잡은 그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괴롭지만 아직은 견딜만하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진짜 괴로워서 죽을 것 같으면 신앙이 없으면 죽어버리던지 신앙이 있으면 기도합니다. 그러면 얼마큼 더 가야할까요? 충분히 고통 받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곤고하지 않습니까? 충분히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기쁨의 삶을 살게 하셨는데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그런 기쁨의 마음을 근심으로 물들이고, 하나님 찬송하고 살 우리의 마음을 염려로 절어버리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시련을 당하나 곤고하나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그리고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교제하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찬송을 듣고 경건 서적을 읽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은 마치 발판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눈길에 낡은 고무신을 신고 미끄러지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런 노인에게 한번 밟고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미끄러지지 않고 힘을 실어서 한번 뛰어 오를 수 있다면 그 언덕을 넘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발판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마음이 따뜻해졌을 때 그 때에 틈을 놓치지 말고 제가 가르쳐 드린 이 네 가지의 지침을 따라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갖고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당신께 피하는 모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시련의 폭풍을 피하여 당신의 품으로 들어오는 어린 새와 같은 여러분들을 보호하고 여러분들을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가르쳐 주는 바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우리가 늘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태우고 우리의 모든 욕심과 그리고 욕망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안식이 없이 사는 날들이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 되겠습니까? 기도가 없이 그렇게 현실에 적응해 나가며 그냥 그냥 살아가는 날들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전에도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기도 생활 속에 누리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거기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지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돌이킨다면 하나님이 다시 우리의 기도를 불붙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로 이 모든 상황을 다스리고 이 모든 상황들을 통치하면서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삶이 버거운 것은 원래 인생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이 버거운 인생을 버겁게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충만한 영적 생명이 필요합니다.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십시오. 무엇보다도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메마른 삶에서 벗어나 하늘의 복을 누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되는 일이 없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고통 받던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주실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위로 받지 못하고 곤고한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2018.9.30. 주일오전4)
우리의 필요를 아심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2주간에 걸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기도에서 동떨어진 것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은밀한 분이시므로 은밀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물을 긷듯이 언어를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II. 우리의 필요를 아심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는 그렇게 드리는 기도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자의 신뢰를 뜻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삶의 상황 보다 훨씬 확실하게 믿으며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A. 우리의 필요를 아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제일 먼저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필요를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필요, 영혼의 필요까지 모두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연약한 육신이 매일매일 지상의 자원을 소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배가 고플지, 우리가 언제 헐벗을지 우리에게 언제 입고 마셔야 할 것들이 필요할지 모두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육체의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의 그러한 성품을 깊이 신뢰하고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염려와 근심 속에 우리의 마음을 태우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 속에서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문제까지 주님께 맡기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단지 육신의 필요만을 가지고는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정신에도 양식이 필요합니다. 즉, 따뜻한 교제, 나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음악과 문학, 예술, 그리고 기타 필요한 우리의 정신적인 자원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인간다운 삶은 이렇게 우리의 육신의 필요뿐 아니라 정신이 필요까지 활용하면서 살 수 있을 때 그것이 인간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육신과 정신이 아무리 좋은 것을 누리며 산다 할지라도 영혼의 지도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육신과 정신의 필요뿐만 아니라 영혼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분을 만나고 기도를 통해 그분과 교제하고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그 마음이 새로워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필요 아래 놓여있고 이 중 어느 것 하나만 결핍해도 우리의 삶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신앙이 없었을 때에는 우리가 꿈지럭거리고 돈을 벌며 우리의 육신의 필요를 채운다고 생각했지만 신앙을 갖고 난 후에는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나 그 수고의 열매를 얻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참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성도들이 모이는 이 아름다운 교제는 그 속에서 나누는 사랑의 교제는 우리의 마음에 이런 필요를 채워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향해 눈을 뜨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공동체 속에서 이런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혹시 남의 형편을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그 남을 아는 사랑은 전능한 사랑이 아닙니다. 알기는 알지만 전능하지는 않기 때문에 알아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실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이 원하는 도움을 우리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니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 당신의 손으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그렇지 않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당신께 모두 알려졌으니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지만 당신에게 모르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더욱이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자녀이시기 때문에 잘 아십니다. 당신이 낳으셨고, 당신이 창조하셨고, 당신이 선택하셨고, 당신이 낳으셨고, 당신이 돌보신 자녀들이기 때문에 숨소리 하나에도 하나님은 감각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자녀의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필요를 아실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들을 적극적으로 돌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염려와 근심 속에 요동칩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현실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염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큰 풍랑에 요동치는 배처럼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그것은 어느 정도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렇게 늘 요동치며 산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그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셨는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죄악으로 고통하고 방황하던 우리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건져내셔서 우리를 다시 살리셨는지를 생각합니다. 구원 받은 그 이후에도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여기에까지 나를 인도하셨는지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분이시라는 믿음, 그 안에서 우리는 요동치는 마음에 잠잠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염려와 근심은 종종 우리에게 쓰나미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신뢰를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러한 근심과 염려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근심과 염려가 일어날 때마다 우리의 정신이 거기에 따라가게 하지 말고 거기에 맞서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일이 있고, 이런 저런 일이 나를 염려스럽게 하지만 그 일은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니고 실제로 발생한 것도 아니고, 나의 인생은 우리 하나님 수중에 있으니 나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어찌하여 내 안에서 탄식하는고” 이렇게 타일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처한 이 모든 처지를 알고 모든 필요를 아시는 분이시니 내가 그 주님을 의지하리로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는 먼 이웃이나 친척처럼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기를 마치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 그 필요를 채워주시기까지 하면서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염려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으니 깊은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동치는 마음을 잔잔하게 하기 전에는 기도가 나올 수 없고, 또 요동치는 마음이 간절한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잠잠해질 수 없으니 이렇게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모두 아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리스도 예수께 회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구를 따라 그의 교회에 가서 수요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설교는 솔직히 별로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설교 전에 불렀던 한 젊은 자매의 찬송가가 제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찬송을 들으면서 깊은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당신에게 잘 하는 사람을 예뻐하시고, 당신에게 잘못하는 사람을 싫어하시는 분이라고만 막연하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부른 찬송은 내가 성령 충만하고 은혜에 넘칠 때만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약하고 지쳐 있을 때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 찬송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나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 만 생각합니다
라는 찬송이었습니다.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분이시니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썩여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 말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좋으신 우리 아버지
마지막 두 번째는 좋으신 우리 아버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의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무한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지만 우리와 상관없는 높고 위대하기만 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 높고 위대하시면서 동시에 우리를 낳으신 친아버지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또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정을 살뜰하게 돌보지 못한 무관심한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 완전한 아버지로서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기에 당신의 유산을 빼앗아 멀리 방탕한 길을 떠났는데도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완전한 아버지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우리는 그 하늘 아버지를 우리의 완전한 아버지로서 깊이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라고 할 때 따로 하나님 어머님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돌보시되 분업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엄마처럼 아빠처럼 모든 것을 알고 세심하게 사랑하시며 엄하게 우리를 꾸짖기도 하시는 그러면서도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아버지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만약에 그 아버지가 우리의 마음에 함께 계신다면 기도는 숨을 쉬는 것처럼 쉽게 여겨지겠지만 만약에 그 아버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가 우리 마음에 없을 때에는 우리가 언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의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심오한 교훈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먼저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에 대해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며, 또 너희를 구원해 내신 아버지이시며, 그 하나님은 너희에게 좋으신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분은 단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실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종종 우리는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만나고 시련에 시련이 겹쳐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그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그 속에서 그들을 건져내 줄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사랑이고 우리의 사랑은 유한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며 눈물을 흘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이 사람을 사랑하고 이 사람의 아픔 때문에 눈물 흘리는 것밖에 더 이상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눈물을 보시며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방면으로 길을 열어주셔서 이 사람을 살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능히 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기도하게 하신 후에 그것을 주십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우리가 그렇게 애절하게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주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가슴 저미도록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종종 어떤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한 후에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오직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약합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서 훈련되어집니다. 내게 없는 것도 주님께 구하면 있는 것이며,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도 우리 주님은 오히려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나의 인생을 이끄신다는 깊은 믿음을 갖도록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는 구별되는 높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서 이 모든 만물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만드신 이 세계와 구별되시는 하나님이 또한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관계를 맺으십니다. 우리를 서로 사랑하도록 도우시고, 그 사랑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알도록 이끄십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비할 데 없이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그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특히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들에 대해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찬송의 제목이 되었고 살아갈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시편 52편 9절에서는 시인은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요, 선하시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해 결코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식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노래했던 선함은 더 구체적으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요한복음 16장 2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불변하는 사랑으로 온 인류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피조물들을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좋으심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서 또한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게끔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면 우리도 선한 것을 원하실 것이고, 우리가 선한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또한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을 선하게 대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게시해 주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시는 동안 우리에게 보여진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불같이 뜨거운 사랑으로 나타나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이미 우리를 위해 아까운 것이 없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그런 선하신 하나님, 한없이 좋으신 아버지를 의뢰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신자의 생활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없으면 없는 것이었고, 그리고 내가 가지지 못했으면 결핍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갖기까지는 늘 안절부절못하고 안타까워하였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갖고 계신 하나님, 모든 것을 소유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압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자신까지 십자가에 못 박으신 예수님이 바로 온 우주를 지금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죽게 하셨으니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로마서 8장 32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맨 처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그 분을 믿게 되었을 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인생이라고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을 오직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렸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이제 그분의 수중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근심이 엄습할 때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내 맘이 불안할 때마다 나는 묵상해야 합니다. 나의 인생이 그 분의 수중 안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 인생은 모두 주님의 인생이고 주님의 인생은 내 인생인 것을 기억하고 우리 둘이 하나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인생이 우리 주님의 수중에 있으니 내게 아무것도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때로는 시련을 만날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으로 이별해야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물질이 궁핍할 때도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순간들은 항상 가슴이 아플 때는 행복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이별의 슬픔으로 마음이 찢어질 때에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물질의 결핍으로 고통 받을 때에는 만유의 주로서 모든 것을 갖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깊이 신뢰하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결핍을 느껴 염려하고 근심한다면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가 모든 것을 갖고 계셔서 그것들 중 일부를 우리에게 나눠 주신들 가난해지실 수 없는 하나님이 나를 왜 이런 결핍 속에 두셨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종종 결핍 속에서 우리가 다른 마음으로 당신을 찾을 것임을 알고 계시기에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종종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대신 고요히 우리가 당신께 매달려 기도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어리석게 뒤로 물러서 하나님 원망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소외감을 느끼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이 이제껏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셔서 여기까지 데려오셨는지를 생각하고,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인생 살아온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주님의 이런 사랑을 내가 배신할 수 없다고 마음에 다짐 하십시오. ‘세상 사람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눈에 보이는 상황이 나에게 무엇을 외치든지 나는 나를 붙들고 계신 우리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노라.’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믿으십시오. 그 마음을 기도에 실으십시오. 요동치는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십시오. 그리고 생사 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할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기도의 두레박을 던집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길어 올립니다. 닫혔던 기도의 문은 열릴 것이고, 잠자는 여러분들의 영혼은 신랑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기쁨 속에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그 선하신 지혜와 사랑의 손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의 그 선하심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핏방울 끝에 매달려 있는 존재입니다. 그 분의 보혈의 공로 없이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올리는 눈물의 기도 없이 우리는 주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들이니 우리의 모든 존재가 그 분의 핏방울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십시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던 자신을 십자가에 내려놓으십시오. 조용히 요동치며 소란한 마음을 떨치고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우리 주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의 가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길(2018.10.7. 주일오전5)
기도 후에 용서를 가르치심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 몇 주 동안 주님은 우리에게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버리고, 외식을 버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그 유명한 주기도문을 기도의 모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후에 기도에 관한 교훈이 모두 끝났을 때 오늘 우리가 읽은 용서에 관한 교훈이 등장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의 가장 완벽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교훈들이 마가복음에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고, 누가복음에는 그 중에 어떤 내용들이 확장된 채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하신 내용이 성경의 기록자들에 따라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II. 용서를 가르치심
A. 잘못을 용서하라
그러면 무엇 때문에 마태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마친 후 그 끝에 예수님의 또 다른 가르침인 용서를 배치하였을까요? 물론 예수님은 마태복음에 배열된 것처럼 주기도문을 마친 직후에 용서에 관한 교훈을 주셨을 수도 있고, 순서는 다른 교훈을 마태가 배치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무엇 때문에 기도에 관한 긴 가르침이 끝난 직후에 용서에 관한 교훈이 자리를 잡았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에게나 혹은 마태에게나 두 분 모두에게 용서와 기도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용서를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잘못을 용서하라’ 입니다. 14절에 보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였는데 이 ‘잘못’이라는 희랍어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많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은 연약함과 실수로 인해 우리에게 준 피해뿐만 아니라 또한 의도된 범죄를 가리킵니다. “용서하라”라고 되어 있는 이 번역의 희랍어 원어는 ‘아페테’입니다. 이것은 ‘용서하라’ 혹은 ‘빚을 탕감하라’ 혹은 ‘허락하라, 내버려 두라’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명령형 동사입니다. 이러한 용서는 자기가 손해를 본 것과 관련된 범과인 경우에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악을 행해서 나의 물질이나 몸, 혹은 명예에 손상을 입게 되었을 때 피해를 입은 나는 그 피해를 본 범위 안에서 일정한 정도의 용서 권한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피해를 입은 사람이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더해지고 용서해 주면 그 사람의 벌이 경감되는 그러한 뜻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바로 욥기 42장 8절 상반절에 나온 내용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욥 42:8上)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욥일 수도 있고, 혹은 번제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욥에게 잘못한 친구들, 그 사람들이 욥에게로 가서 용서를 빌고 욥이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도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한 용서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범죄와 과실은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누군가 개인에게 피해를 준 것이어야 하고, 자신이 피해를 본 그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교훈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너희들 사회에서 잘못하고 과실을 행하고 혹은 의도를 가지고 악을 행하여 남을 해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 그것으로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완전한 파멸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그들에게 용서를 빌고 또 그들을 용서함으로써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맺힌 것을 가지고 살지는 말아라. 왜냐하면 그것이 너희의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기도에 관한 긴 교훈 끝에 용서의 가르침을 두신 이유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서로를 용서하도록 가르치십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지체들끼리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고 서로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5절에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특히 14절에서는 그 한 아버지를 하늘 아버지로 묘사함으로써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영광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마태복음은 원래 의도된 독자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상기시키기에 하늘 아버지보다 훌륭한 표현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슴에 착착 붙는 언어로 그들이 알고 있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그 위대하신 하늘 아버지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이들도 용서할 마음을 갖게 하시기 위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 혹은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그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어떻게 보면 용서 받아야 할 사람을 위한 혜택인 것 같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용서해 주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 때로는 매우 악하게 우리에게 행하여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한다고 칩시다. 그를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향해 품었던 피 묻은 칼을 내려놓고, 그를 예수의 사랑으로 진심으로 용서해 줄 때 그 혜택을 처음 받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 우리 자신입니다. 그를 마음속에서 풀어주고 용서해 줄 때 우리는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 같은 해방을 경험합니다. 마음속에 미워하던 사람을 향해 품었던 칼을 내려놓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힘든 일이지만 일단 복수를 포기하고 나면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사라지는 대신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는지가 커다란 밀물처럼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용서를 해 준 우리가 제일 커다란 첫 번째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금은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하고 악을 행하였으나 그래서 나에게 용서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나도 내 안에 있는 죄와 연약함 때문에 수시로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을 하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매우 큰 것인데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또한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고 잘못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충만한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고백은 아담과 하와에게 뿐 아니라 그가 낳은 가인, 아벨, 이후에 태어난 셋, 그리고 그 세 사람에 의해 번성할 모든 인류들에게까지 적용될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거나 잘못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한 사람만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그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이 인간과 사회를 향한 계획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과 사회가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교통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서로에 대한 잘못과 죄로 인한 피해, 가해, 이것들을 해결하지 않으시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타락한 사회에게 주신 그러한 교통의 방법이 바로 용서였습니다.
이 용서는 모든 인류에게 특히 일반계시를 통해 제시되기도 하였고, 특히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 백성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교통하는 덕이고, 미움은 단절하는 악이 되었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이 미움을 그 사람 안에서 없애시고, 사회 안에서 단절시키고 극복시키심으로써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의 사회로 만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교훈이 구약 시대에는 대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중심으로 강조되었으나 신약에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강조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죄인들까지도 용서해 주는 신약의 윤리로 우리에게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많은 고통과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고 고통을 준 사람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위로는 복수를 꿈꾸고 그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내게 악을 행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것을 깊이 깨닫고 무릎을 꿇고 용서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왕이 용상에서 저 하찮은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용서를 시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에게 아주 작은 잘못을 한 사람이 가슴을 찢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용서를 빈다면 ㅇ나는 언제나 용서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훈은 그렇게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비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용서를 빌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자기가 나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용서해 주도록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용서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자연인의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번 미워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지는 않아도 한번 미워한 사람을 죽을 때까지 미워하는 놀라운 일관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용서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모든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돈이나 권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큰 지를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피해를 본 사람으로서 유일한 위로, 그를 생각하고 복수를 꿈꾸며 그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을 품으면서 살아가던 그 마지막 위로를 내려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고통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중 어느 것이 쉬운지 여러분의 마음으로 한번 대답을 해보십시오. 나에게 큰 죄를 지어 원한을 남긴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미워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원한을 품은 것은 원한이 맺힌 채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죽음 이상의 고통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 가운데 사는 우리 인간의 슬픈 본성의 한 단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를 하고 피해를 주는 것이 피해를 당하는 것이 그칠 수 없는 이 사회를 서로 사랑하는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위대한 용서를 인류를 위해 먼저 행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해 달라고 빈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오히려 당신을 대적하고 당신이 보낸 아들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들의 죄에 의해 피해를 본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화해의 손길을 먼저 인간에게 내미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인간들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후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용서를 빌지도 않는 인류에게 당신이 용서하는 손길을 내미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의 피로 용서해 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찾기도 전에 주님께 먼저 발견된 사람들이고, 우리의 죄에 용서를 빌기도 전에 주님이 용서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도록 내어주십니다.
B. 용서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은 예수의 핏방울 끝에 매달려 있는 인생입니다. 그런 용서의 은혜를 한량없이 받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 사랑을 안 사람들에게 큰 의무를 지워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너희에게 죄를 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용서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용서는 우리가 다시 하나님에게 사랑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용서였습니다. 그러니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 있는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사랑의 한 국면이었던 것입니다. 부부가 살아가고, 친구가 함께 살아가고, 그리고 형제가 함께 살아갑니다. 많이 손해를 보는 사람, 많이 희생하는 사람은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그 관계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갑질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당한 경우에라도 자기를 희생하고 오히려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함으로써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무한한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어떠하실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당신에게로 돌아와 용서를 빌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다시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그 사랑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경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를 기억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도록 부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제는 우리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뽐내지만 그러나 복음의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세상에는 오직 죄인들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직 용서를 받지 않은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이제 의로운 자가 되었다. 너희는 왕 같은 자녀다.’ 라고 말씀하실지라도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대해 인식하기를 ‘나는 의인이기 전에 왕 같은 제사장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전에 사실은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옵나이다.’ 이 고백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심지어는 주님께 받은 것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는 사람들을 낮추어 보고 주님께 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보다 우월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용서받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 세상의 가장 쓰레기 같은 죄인들이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은혜 때문이고, 우리의 인생은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핏방울 끝에 매달려 있는 인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허공 중에서 용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런 명령을 하실 만큼 우리에게 큰 용서를 베푸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그 용서의 정신을 따라서 나에게 아픔을 주고 손해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긴 세월동안 기도의 담장을 쌓고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원인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죄에 있음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잊히지 않은 긴 기도의 교훈 끝에 여기에 용서하라는 계명을 주셨으니 너희가 용서하면 아버지께 용서를 경험할 것이요, 그 용서의 경험은 너희의 기도의 깊이와 열정을 더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고, 너희 기도는 막힌 채 있을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열렬한 기도가 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용서하지 않고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근심시키시는 성령을 어떻게 힘입어 열렬한 기도를 드리며 은혜의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에베소서 4장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0-32) 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면서 어떻게 그 분을 힘입어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기도를 올릴 수 있겠으며 이 세상 시련과 환란에 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타오르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분명하게 죄를 지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죄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게으름의 죄이고, 하나는 용서하지 않는 미움의 죄입니다. 그가 나에게 행한 악이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에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나에게 행한 악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스러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나의 이 질문에 ‘저요.’ 하고 손 들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에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열렬한 기도를 올릴 수 있었던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기도할 때 제일 먼저 우리에게 누군가를 미워했던 것이 우리의 양심에 가책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되지 않을 때에는 제일 먼저 자신의 죄를 돌아보되 특히 누군가를 마음속에 깊이 미워한 죄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특별한 근거나 혹은 그래야만 할 마땅한 이유가 없으면서도 누군가에 대한 비난을 쉽게 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악한 뜻을 가지고 그를 비방했던 죄들을 우리들이 쉽게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최근에 이렇게 누군가를 비방하고 누군가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던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우리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그 사랑이 누군가의 마음에 부어지고 그 사람 마음에서 그 사랑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함으로 그들을 뚫고 사랑은 나아갑니다. 우주를 휘돌아 그 사랑은 다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은 설명일 뿐이지 사실은 이 모든 우주 속에 관통하는 교통의 작용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희생과 고통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 받았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고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 당신의 고통보다도 더 소중했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를 무한히 완전하신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서 죄 없는 당신은 하나님에게 형벌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지척거리며 기도 생활에 진전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의 미움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알고, 우리의 마음으로 느끼고, 우리의 의지로 돌이키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아무 대가도 없이 예수 때문에 거저 용서해 주셨으니 나도 주님의 희생을 본받아 내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겠습니다.’ 라는 깊은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인생의 날들을 그렇게 헛되게 사람들을 미워하고, 마음에 악을 쌓으며 살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의 문이 막혔던 것을 깊이 뉘우치고, 오히려 주님께 우리 자신이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용서와 회개 속에 기도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주님은 불멸하는 기도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고,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직후에 이웃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으니 이는 얼마나 자주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에 대한 미움이 우리의 기도를 닫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소란스럽게 법석 떨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유난히 나댈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주님 앞에 자기를 성찰하며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당하신 희생과 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 나의 이 불의함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떠한 복수도 꿈꾸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그를 심판하실지라도 오히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제발 그를 용서해 주시도록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당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아무것도 아까워하시지 아니하시니 그가 고통 가운데 있다면 건져내실 것이요, 궁핍 가운데 있다면 공급할 것이며 기도가 막혀 있다면 하나님은 단번에 그 기도를 열어 당신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잡하고 소란한 일상에서 잠시 여러분들의 정신을 거두십시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좀 닫고 조용히 자기를 성찰하며 내가 그 열렬했던 기도의 사람이 왜 이 기도를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무엇이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을까 생각 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주님께 미움을 내려놓고 주님의 용서를 빈다면 주님은 갈멜산 엘리야의 장작더미 위에 불을 내리셔서 그 모든 것을 살라버리게 하신 것처럼 여러분들의 기도에 불을 붙여 모든 염려와 근심을 불태우게 할 것이며 여러분들의 닥친 현실을 승리로 이끌어가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구하라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5-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후 마태복음에는 용서에 관한 교훈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바로 주기도문을 끝낸 후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또 이르시되…”라고 한 본문의 이 말씀은 두 교훈이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에 연속되어 나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주기도문이 기도의 형식, 곧 패턴에 대해서 가르쳐 준 것이라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기도의 끈기 있는 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긴 본문의 한 가지 주제는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시는 방법이 첫째 ‘인격적인 접근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딛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항상 그들이 구하는 것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는 일단 실천을 하면 기도가 되든지 안 되든지 그것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에 유익을 얻게 됩니다. 기도할 때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 살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기도가 잘될 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니 내가 더욱 주님을 의지할만 하구나.’ 하는 신앙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를 통해서든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게 되고, 또 그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내가 어떤 사람이가 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그저 간구가 아닌 전 인격적인 접근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교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받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같은 말처럼 보이는 이 세 가지 명령형 동사가 사실은 우리의 몸 전체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하는 것은 입으로 구하는 것이요, 찾는 것은 발로 걸어가 눈으로 찾는 것이며, 또 두드리는 것은 바로 원하는 그 집 앞에서 손으로 두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 전체의 기관을 사용해서 하나를 찾는 것입니다. 찾는 것은 눈으로 찾고, 구하는 것은 입으로, 그리고 두드리는 것은 손으로 두드리지만 이 모든 몸의 찾는 지체들은 한 가지 마음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단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우리의 온 몸이 하나가 되어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단지 마음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마음의 눈으로 간절히 우리의 바라는 것을 찾고, 또 믿음으로 막혀져 있는 것 같은 삶의 상황을 두드리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이 기도의 자세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한 게으름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도가 영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을 하면 그냥 일을 하지만 기도를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뵈옵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일을 하는 것은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지만 기도를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항상 그 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받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어려운 것이고, 사람이 다른 신앙적인 의무를 이행하기는 쉬워도 기도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표현이라고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올 때 삶을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하려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렇지 못했던 지난날의 삶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양심의 채찍질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에 대한 믿음으로 뚫고 통과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단호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다시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되고, 이 마음 안에서 우리는 기도 중에 만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야 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간절한 기도로 나오기를 원한다면 먼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기를 결단하십시오. 그러나 혹시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시지도 않는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는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는다든지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자녀를 기를 때에 너무너무 많이 화가 나면 잠시 그 아이와 아이 앞에서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 아이를 반성하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느끼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이 좀 더 자신으로 돌아가 자기를 성찰하며 하나님 앞에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그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기도할 때에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더 간절한 기도로 부르시는 한 과정이고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당신 앞으로 부르십니다. 기도 하나만 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살짝 타낸 후 다시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살아가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고 혹은 불순종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이 중요한 기도의 제목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고치시고 새 사람을 만들기 위해 기도로 나아오게 하신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공간을 숨 쉬고 삽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는 우리도 채 알지 못하는 각양 많은 욕망들이 용솟음칩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사물들을 보며 원해서 하나님이 사물을 주신 그 목적과는 벗어나는 표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표상들은 우리의 욕망과 함께 합쳐지며 우리에게 수많은 그릇된 또 다른 욕망들을 양산해 냅니다. 그런 표상의 물결에 우리들이 출렁거리며 떠내려갈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였던 우리는 그 시간과 표상 속에서 갈가리 찢어져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처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빛나던 삶의 아름다운 지혜는 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어느 곳에서도 우리에게 금욕적인 삶을 칭송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은 선한 것들이니 그 선한 것을 선한 의도를 가지고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만물을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도 합니다. 만물은 선하나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마음은 부패에 흐르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욕망을 절제하도록 그리고 지나친 세상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세상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전 인격적인 접근입니다. 한 사람은 그가 기도할 때에 그 사람을 능가할 수 없으니 그 기도는 그 사람됨 안에 갇히고 그 사람됨은 그가 하는 기도를 능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여러분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 모든 제약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그리고 풍부한 기도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삶 전체를 돌아보며 기도 생활을 고쳐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밤중에 찾아온 벗
마지막 두 번째 교훈은 “간절히 구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 바로 앞에는 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한밤중에 여행을 하던 친구가 자신의 집에 불현듯 찾아왔습니다. 여행길에 이 친구는 굶주렸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은 밤 자신의 집에는 양식이 없고 새로 떡을 만들 처지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친구가 생각이 나서 그에게 가 친구에게 줄 떡을 빌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렇게 간청하였을 때 이 친구가 “내가 이미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서 너에게 줄 수가 없노라. 그렇게 말하겠느냐?” 하고 예수님이 반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벗됨을 인해서는 주지 않으나 간청할 때에는 들어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뭔가 중간에 고리가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고리를 보고 나면 이런 스토리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네가 친구에게 가서 한번만 그렇게 부탁하고 돌아온다면 안 들어줄 지도 모르지만 계속 간청한다면 차라리 얼른 줘버리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것이 낫지, 저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 누워있지만 잠도 이루지 못하지는 아니하리라 친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에 있어서 간청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기둥과 같이 매우 중요한 실천적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실함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에 있어서 진실함은 모든 능력과 모든 신비한 체험을 능가하는 것이며 모든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도 속에 진실함이 없다면 그것은 모두 성령으로부터 말미암는 기도가 아닙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인간의 마음과 삶이 함께 부착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진리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붙어 있는 마음이 진실한 마음입니다. 진실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속임이 없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꾀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이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사람은 속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속을 리가 없으신 분이니 우리가 하나님께는, 주님께는 우리들이 속이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에게는 우리가 감추어진 것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우리가 이미 진실하게 고백하지 않아도 모두 알려졌으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는 것 이외에는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빛나게 하는 모든 은사를 주고도 사야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진실입니다. 이 진실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청렴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게 솔직해질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은 진실이라기보다는 때로는 뻔뻔스러움으로 귀착되기 일쑤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실천의 한 기둥은 진실함이고, 두 번째는 끈질김입니다. 한번 안 되는 것으로 멈추지 아니하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 이 기도를 단박에 들어주지 아니하시고 시간을 끄시는 것은 이 기도를 통해 망가진 나를 고치시기 위함이라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억울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그 재판장에게 나아가 자신의 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탄원하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당시에 과부는 사회적으로 소외 받고 위협을 받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무시당하고 사람들이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불이익을 많이 당했고, 그렇지 않아도 상처가 많은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이 더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억울한 사정을 법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재판장밖에 없었고, 그 사람을 존경하거나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 밖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리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가 울부짖으며 자기의 억울한 이 사정을 들어 판결을 내려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을 때에 이 재판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다가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8:4-5) 자기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이 과부의 억울한 형편을 풀어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자기가 계속 간청을 받으면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 억울한 한을 풀어주는데 하물며 선하시고, 좋으시고, 긍휼하신 하늘의 아버지는 그 자녀인 너희들이 간구할 때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III. 필요한 것을 주심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완전하게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며 살기에 충분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간절히 간구하게 하십니다. 어떤 기도는 한번 했는데도 들어주시고, 어떤 기도는 기도를 하지도 않고 마음으로 생각만 했는데 들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왜 그러실까요? 저는 최근에 어느 외국에 있는 한 학교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일군들을 길러내기 위한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기도를 했는데 미국에 있는 어느 독지가가 그 계획을 모든 들은 후에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우리나라 돈으로 약 50억의 돈을 쾌척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의 기부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그 학교에 관계자들이 미래의 계획에 대해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때까지 들어온 기부금과 학생들이 내는 소액의 등록금으로 학교를 운영을 하면 앞으로 한 5~6년까지는 계속이 되는데 그 후에는 계획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이냐를 염려하며 대책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앞으로도 5~6년 동안 계속할 수 있는 자금이 학교에 남아있다는 것은 너무 훌륭한 것입니다. 저희는 방배동에서 셋집에서 쫓겨나 이게 올 곳,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이 땅을 36억을 달라고 하는 땅을 39억을 주기로 하고 계약을 했고, 그리고 그때에 교회에 남은 돈은 1500만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온 성도들이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고, 저도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교인 중 한 사람이 3억을 빌려주어서 그것으로 계약금을 하고, 그 다음에는 기도 속에서 하나하나 이루어서 70억이나 되는 이 교회 프로젝트를 모두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하면 당신이 어떻게 이루실지를 하나님은 10년 치씩, 20년 치씩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면서 일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의지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눈앞에는 보이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이 선한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또한 마지막까지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이 교회 전체를 기본적인 설계를 제가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제가 군화를 신고 하이바를 쓰고 그리고 지휘를 하면서 일꾼들을 데리고 첫 번째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그때 잊히지 않는 일화가 있습니다. 와서 일하는 일꾼들이 많을 때는 70명씩이나 되었는데 이 사람들 중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신자였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미장일을 하고 있는데 그 어수선한 공사판에 의자도 없는 그 빈 예배당에 성도들이 밤중에 와서 서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남아있는 불신자인 일군들이 ‘저렇게 성도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예배당을 짓고 있으니 참 내가 잘해주어야지만 복을 받겠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누리고, 여행하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열렬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유독 하나님을 찾는 일에 있어서는 세상 것을 찾는 것보다 더 뜨거운 열심을 갖기를 게을리 하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있어야할 줄을 아시는데도 하나님은 왜 그렇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질 때까지 혹은 우리의 기도를 우리의 눈물의 병에 담기까지 하나님은 그 응답을 연장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기도의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기도의 목적은 바로 기도라는 매일 매일의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만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다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방면에서 순종해야 할 자신의 위치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욕망을 가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짓게 되고, 그 죄는 결국 그를 영적인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너희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그렇게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어 하나님 떠나지 말고 하나님 의지하며 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6-17)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가져야 하고 거기에 이끌려 그 욕망을 불태워야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르지만 너희는 속지 말아라 모든 좋은 것들과 은사는 그리고 온전한 모든 선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온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또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모두 주어지면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래전 명절에 제 방에 한 아이가 울며불며 무언가를 요구했습니다. 식구들은 모여 앉아서 떡을 썰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 잠깐 사이에 떡을 썰던 식구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고, 잠시 후에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어린 아이가 다들 놓고 떠난 떡 썰던 칼을 들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손을 배여서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위에 모든 어른들이 사라졌을 때 자신이 원하는 칼을 손에 넣게 되었을 때 이 아이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아이가 가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는 무엇이 필요한지 완벽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안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그것이 필요 없기 때문에 혹은 그것을 구한 것이 우리의 정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이고, 주신 모든 것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이 부족한 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욕심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결국 모든 좋은 것들이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배웁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고,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어도 마음에 억눌림이 없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간절한 소원을 끈질기게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연약한 자신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을 깊이 감동시켰던 시인들의 경건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리니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도, 위대한 통치자도 그 뛰어난 모든 시인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갈망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목회자와 장로들이 있는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나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눈물로 의지하는 하나님이 그들의 간구를 들어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이렇게 자신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한, 아빠가 그런 간절한 기도로 자기를 깨뜨리며 가정을 보호하고 있는 동안에는 가정이 깨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두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든지 하나님이 이 말씀으로 나를 그렇게 불러주셨다고 믿고 주님께 간구하여 하늘 문이 열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으시고 능력이 부족하시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끔 기도의 응답을 지연시키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간절히 열렬히 매달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린 시절 대장간에서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농촌에서 요긴하게 사용하는 낫이나 호미, 칼들을 만드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역청탄을 놓고 시뻘겋게 불을 피워 거기에 철판 쪼가리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잠시 후면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눈부신 빛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주 잠깐입니다. 길어봐야 7초 내지 10초 밖에 안 되는 시간만 그 상태가 유지되고, 뜨거운 그 숯에서 꺼내자마자 쇠는 식기 시작합니다. 식기 전에 아주 우람한 팔에 망치를 움켜쥐고 아주 빠른 동작으로 망치로 모루 위에 그 쇠판을 놓고 두드리면서 각양 도구들의 형체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다시 까만 쇠가 되어 식어지고 나면 더 이상 두드리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불속에 집어넣어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두드립니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이 간절한 기도 속에서 빨갛게 달구어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굳어져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두드리셔도 좀처럼 변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질러버리기나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변하되지 않는 마음을 절실한 기도 제목을 주셔서 치열하도록 연단의 숯불 속에서 붉게 달아오르도록 만들고,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 속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그렇게 달구어졌을 때 하나님은 말씀의 망치로 여러분들을 빚어 새 형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바꾸시는 것이니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꾸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열렬하게 간절히 그 일이 안 이루어지면 죽을 것처럼 기도하다가는 마지막에는 그 일이 이루어지던, 안 이루어지던 사실은 별 상관이 없는거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 자신이 주님 앞에 변화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일생에 걸쳐서 기도를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사람은 하나님 의지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니 언젠가는 하나님을 맞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잡다단했던 우리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그리고 조용히 한번 자신에게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없이 살수 없는 자신을 확인하십시오. 지친 자신을 추스르며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오롯이 하십시오. 그리고 상한 갈대처럼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처럼 그렇게 연약한 자신의 처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알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지혜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은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이 모든 삶의 상황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주님 안에 있는 영적인 부요함을 바라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