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심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께 꼭 상달되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실상 기도하는 것이 아니죠. 그런데 우리의 실제의 경험을 보면,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고 하는 느낌을 받지 못하면서 기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기도는 영혼의 오묘한 연주와 같아요. 저는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연주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하모니카나 조금 불 줄 알 뿐이지 별로 없는데 그 악기에 예민한 사람들은 날씨에 이 악기가 얼마나 민감해 하는지 모두 압니다. 특히 통이 울려서 소리를 내는 그런 종류의 악기, 그리고 전자 악기가 아니라 진짜로 통을 울려서 소리를 내는 그러한 악기들의 경우, 그 통이 주로 나무 종류로 제작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울리는 소리가 그 습도와 그 모든 것의 온도에 따라서 틀리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겠어요? 공기중의 습도에 따라서 울리는 소리가 틀리고 또 공기가 똑같다고 하더라도 이 나무의 건조상태에 따라서 울리는 소리가 틀리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악기를 가만히 벽장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연주를 하는데 이 악기가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내일은 또 오늘과 다르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악기가 예민한 것처럼 이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울림이에요. 영혼의 울림이 우리의 기도이기 때문에 이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 기도는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는 곡조를 연주해내는 그런 종류의 기도가 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지면에 모두 흩어지고 도저히 연주하는 사람이 기대하지 않았던 그러한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요. 그러면 궁금한 것은 우리의 기도가 영혼의 울림이라면 그러면 어떤 상태에서 울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잘 응답되는 아름다운 기도일까? 우리들이 사실 이 문제는 한 마디로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있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 앞에 영혼의 울림이 있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수가 없습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영혼의 울림이 있는 그러한 종류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없어요. 그건 우리들이 잘 알잖아요.
그렇지만 오늘 성경에 보면 오히려 죄 많은 세리는 하나님 앞에 영혼의 울림이 있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응답되었고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르게 산 바리새인의 기도는 땅 아래 모두 흩어져 버려서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기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죄 있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물리치시고, 그리고 의롭고 올바르게 산 사람의 기도는 힘이 있다.’는 기도의 평면적인 원칙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이것은 더 깊은 진리를 담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물론 죄가 없는 사람의 기도, 그리고 의롭고 올바른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경건하고 올바른 사람의 기도를 받으시고 죄인의 기도를 멸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그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마음의 겸비함’이에요. 기도에 있어서 이 마음의 겸비함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울림을 통해서 아름다운 기도의 가락을 만들어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영혼의 겸비함이 없는 죄 없는 사람의 기도보다는 영혼의 겸비함이 있는 죄인의 기도에 더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오늘 이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고 두 사람의 기도의 내용 중 진실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진짜로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기도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고 그리고 아마 소문난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그런 삶을 살다가 온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 같은 바리새인 입에서 나온 세리에 대한 비난, 여기에 보면 ‘토색하는 자와 같지도 아니하고’ 그렇게 나오잖아요. 이러한 세리와 같이 이렇게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리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한 적도 없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적도 없고, 동족들에게서 세금을 많이 걷어서 자기의 배를 불린 그런 더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아무런 허위나 과장 이런 거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받지 아니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 사람의 삶을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기도하러 나오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필요,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절박한 필요,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절박한 안타까움,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절대적인 비참함에 대한 고백, 이게 없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정말 낮아져 본 사람들은 두 가지가 보이지 않아요.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많이 한 공로가 보이지 않고, 두 번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해서 그 사람이 자기보다 더 더러운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에서 다행이라는 느낌을 갖는 그런 비교의식 같은 거 없습니다. 왜 그렇죠? 그를 정말 용납해 주어야 할 분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용납해 주셔야 할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에게 모든 관심의 초점이 모아져 있는 상태에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 가운데서 스랍가운데 계신 주님의 임재를 마주하며, 깊이 참회합니다. “화로다 나여 이제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 중에 있으며, 거룩하신 주님을 뵈었도다.” 그러면서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참회하게 될 때, 그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찾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해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베드로의 마음에 커다란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그리고 그 발아래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절절하게 고백했을 때,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느낄 수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는 감옥 속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고백할 때 ‘나보다 더 나쁜 놈들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이 사람 속에 떠올랐을까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들은 반복해서 하면, 익숙해지고 그리고 보다 더 잘할 수 있게끔 그렇게 요령이 생깁니다. 그러나 기도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경우, 없습니다. 어제까지는 주님의 일을 지혜롭게 잘 하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머릿속이 캄캄해지고, 머저리같이 일을 하게 되는 경우, 거의 없습니다. 어제는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 오늘 갑자기 아주 더러운 인간이고 상종하기 싫을 정도로 무례한 인간이라고 낙인찍히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제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은혜 속에서 기도 했었는데 오늘은 철문을 내린 것처럼 캄캄하고 입술조차 움직여 하나님 앞에 아뢸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신앙의 경력, 영적인 수준과는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를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겸비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이웬바운즈 목사님은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을 그 때, 그 사람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라.’ 그랬습니다. 엎드려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많이 사랑해 주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게 위로를 주시고, 그가 바른 길을 알지 못할 때에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능력이 모자라서 주의 능력을 구할 때 능력을 부어주시기까지 하나님이 인정하고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기도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대우받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거죠. 그 사람의 존재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약해보이고 그는 비록 가난해 보이고 그는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홀로 버려진 자 같아서 그래서 이 세상의 원수들이 보기에 그는 자신 앞에 한 밥 꺼리도 안 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를 건드리면 큰일 나요.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이것을 시인 다윗이 23편에서 노래하는 거예요.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 다음이 감격적이잖아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굉장히 커다란 밥상을 그에게 베푸셔서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이죠.
모든 신앙생활의 비극은 신앙생활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하나 다 분해해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생활은 기도생활 하나로 분리하고, 말씀생활은 말씀생활대로 분리를 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은 봉사하는 대로 분리를 하고, 이렇게 하니까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는 고민하지 않고 그 사람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기를 힘쓰는 그런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이 없이 기계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부르짖는 것이죠. 이것은 바로 이방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제사하던 방식이었어요. 이방의 신들은 제사를 할 때 제물이 무엇이고 제사를 어떻게 드리느냐에 관심이 있지, 이방의 신들은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자기 앞에 살다가 온 사람인가, 얼마나 고도의 거룩함과 도덕성을 지닌 그러한 겸비함을 지닌 인물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무라시기를 “너희가 나한테 제사를 드리는데 나는 이제 그런 제사에 다 싫증났다. 내가 아무리 배가 고픈들 너희들에게 짐승을 구하겠으며, 내가 짐승의 피를 찾겠느냐?”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모든 제사에 싫증이 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셨어요.
오늘 이 세리의 기도는 우리에게 그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것이죠. 옆에서 틀림없이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아마 세리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을 거예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어요. 그가 금식하는 동안에 자기는 퍼 먹으면서 살았고, 그가 십일조를 내는 동안에 자기는 동족들의 고혈을 짰어요. 더욱이 “여기에 있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아마 이 세리의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자기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거예요. 그러나 이 세리의 다음 태도는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는 비참한 죄인이라고 하는 철저히 낮아진 그런 겸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원하셔요. 당신 자신이 우리에게 필요가 되기를 원하시고, 당신 자신이 우리에게 향유되기를 원하셔요. 그래서 하나님 당신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나를 고통가운데서 건져줄 수 있는 능력, 주님의 물질, 주님의 소유, 이러한 것들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기도, 이 세리속에는 그것이 꽉 차 있었습니다. 지금 이 세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주시는 돈,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시는 것, 그리고 무슨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뭐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리에게 그냥 절실했던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차마 내가 하나님 앞에 다가가지 못하는데 그런데도 그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거예요.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것은 사실 그 당시의 관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기도는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르며 기도하는 것이 경건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들 수 없었고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슴을 쳤습니다. 왜 쳤을까요? 간절히 기도해 본 사람들은 가슴을 왜 치는지 알아요. 우리가 가슴을 칠 때는 주로 억울해서 가슴을 치지요. 그러나 이 세리는 하나님 앞에 억울할 게 없는 사람이지요. 왜? 자신은 죄인이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뿐이죠. 가슴을 왜 치는지 아세요? 간절히 기도하면 혈관이 응축이 되면서 감정적인 고조 때문에 심폐기능에 이상이 와요. 그래서 호흡이 어려워지는 거예요. 그 때에 두드려 주면, 의학적인 소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경험과 느낌이에요. 두드려 주면, 혈액 순환이 잘 되는 거죠. 그래서 이 가슴에 깊이 조여 오는 응축되는 고통을 덜어 주어요. 그래서 이 세리가 괜히 한 번 “하나님 날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할 수 없고, 그게 아니라 얼마나 장시간 동안 이 심폐기능에 고통이 올 정도로까지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렇게 매달려 보셨어요?
우리 주님은 일평생을 그렇게 기도하셨어요.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가끔은 그렇게 기도한다고 하지만, 죄도 하나도 없으신 그 분이 일평생을 그렇게 기도하셨어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이죠. 그러면서 마지막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자신의 온 몸을 쥐어짜는 가운데 그래서 땀에 피가 흥건히 q배어 b나오는 자신의 고혈을 짜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렸어요.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하세요? 땀을 흘리며 열심히 섬길 때.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순간이지요. 주님께 단정한 자세로 예배를 드릴 때, 그것도 아름다운 순간이지요. 말씀을 열심히 탐구할 때, 그것도 아름다운 순간이지요. 그래서 저도 여러분 보면, 다 아름다워요. 열심히 땀 흘리며 교회를 섬길 때, 아름다워요. 그리고 나한테 인사하기 위해서 허리를 굽히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주방에 있는 사람들 아름다워요. 여러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은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감동적이에요. 그러나 이것 하나를 능가하지는 못해요. 다른 아무에 대한 관심도 없이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열렬히 온 영혼의 힘을 다하여 깨뜨려짐 속에서 주님을 붙드는 간절한 기도의 시간 그것을 능가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은 그 순간 가장 깊이 감동을 받으셔요. 하나님 앞에 내가 천천의 수양과 번제로 주께 드리려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내 몸의 열매로서 주께 바칠까,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셔요.
제가 요즘 ‘자기 깨어짐’이라는 글을 쓰고 있어요. 쓰면서 하나님이 저를 참 많이 연단하시고 깨뜨리시고 그리고 어떤 때에는 위로하시고 그러면서 저는 요즘 꿈속에서 지냅니다. 오늘 저녁때에도 가슴 깊이 찬양이 울려 퍼졌어요.
주 하나님 크시 도다. 주 하나님 크시 도다.
그러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들면서 벼락이 막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받아요. 천둥과 번개가 치고 벼락이 막 떨어지면서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어요. 그냥 하늘에 주님이 계시고 이 땅에 내가 있으면 그것으로 족해요. 우리들이 자신이 깨뜨려지지 않은 채로 많은 추루한 욕망들을 가지고 그리고 그런 육욕 속에서 살아가게 되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서고자 하는 이 세리와 같은 치열하고 간절한 갈망, 그런 거 가질 수 없어요.
진짜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잘 들으세요. 진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달랠 수 없는 욕망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어야 해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진짜 주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달랠 수 없는 욕망을 이 속에서 가지고 있어야 해요. 이 세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이 심폐가 응축되도록 매달렸는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폐가 오그라드는 것 같아서 그래서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쳤는데 이 통증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어요. 자 그렇게 기도하는 세리에게 이렇게 말하면, 세리가 “네, 알았습니다. 오늘은 내려가겠습니다.” “얘야, 내려가자. 세금 많이 거둘 데가 몇 군데 오늘 생겼다.” 내려가겠어요? “내가 여지까지는 네가 세리였지만, 너를 로마의 시민권을 줄 테니 오늘은 빨리 내려가자.” 내려가겠습니까? 이 사람은 달랠 수 없는 갈증을 하나님을 향해 갖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무엇에 의해서도 달래지지 않는 것이에요. 내가 주님을 뵈옵기 전에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나는 감히 주님께 나한테 찾아와 주셔야 됩니다. 라고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직 하나만을 기대하는 거예요. 그게 뭐지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런데 사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자기가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불쌍히 여겨줄 수가 있어요.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잘 섬기려고 했는데 어려운 일을 만나서 고통을 당했을 때 해당되는 이야기 같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도리로 뻔뻔한 것과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 사이는 구분 되어야 해요. 주님을 향한 믿음과 이 두 가지는 구분 되어야 해요.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이 세리의 마음속에 있었어요. 이제껏 동족의 고혈을 짜 모은 재산도 위로가 안 되고 사회적인 신분이 상승된다고 해도 위로가 안 되고 다 필요 없고 오직 자신에게는 하나,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네가 일생동안 세리로서 죄를 짓고 살았지만, 이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너는 내 옆에 있어도 좋다. 라는 하나님의 이 인정, 이것을 받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겸비한 마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린 마음이에요. 그냥 낮아진 마음은 죄에 대한 추루한 사랑의 마음을 품고 낮아진 마음은 비굴한 마음이지 겸비한 마음이 아니에요. 예전에는 돈을 사랑해서 동족들의 고혈을 짰던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그 분 앞에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은총을 구하는 이 순간에는 이 사람의 마음에는 이제 돈도 필요 없고 세리라는 지위도 필요 없고 그리고 모든 것들이 이 사람에게 위로가 되지 않아요. 다 팔아서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다 팔아서라도 주님과 교통하고 싶은, 주님께 자신이 용납되고 싶은, 그 분께로부터 사죄의 은혜와 교통의 축복을 받고 싶은 마음이 이 사람의 마음속에 간절하게 들었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이 세리 안에 있었던 신앙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우리들이 각자가 다 영광을 가지고 있어요.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보다 영광스럽죠? 젊고 건강하니까. 돈이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보다 더 영광스럽죠? 세상에서는 그 사람에게 더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이지요. 공부를 잘 하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 무지하고 아무 지위도 없는 사람보다는 영광스럽잖아요. 성경적으로도 또 그런 걸 세속적으로 영광이라고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그 모든 영광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연상을 한 번 여러분들이 해 봐요. 중국의 황제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와서 황제와 이야기 할 수 없었어요. 사람이 지위에 따라서 가까이 올 수 있는 거리가 정해져요. 저 멀리 떨어져서 큰 소리로 왕에게 이야기 하거나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듣고 전해 주어요. 그렇게 엄청남 황제 앞에 사람들이 나아갔다고 쳐요. 어떤 사람은 동장이고 한 사람은 통장이고 한 사람은 반장이에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동네에 같이 살 때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어요. 지금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옛날에는 동장만 지나가면 온 동네 사람이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동장님, 동장님, 했고, 통장한테 잘 보여야지만 그래도 새마을 취로사업이라도 나갔습니다. 그런데 동장, 통장, 반장,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황제 앞에 나아갔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어요?
이 세상의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저 황금의 면류관은 광채를 잃겠네.
그저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이에요.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주님을 잘 섬기며 지내왔던 날들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것 다 잊어버리고 어제가 아니고, 내일이 아니고, 바로 오늘,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져야 할 비천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나는 주님의 손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할 정말 비천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면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쓰레기와 같은 인간이고, 이 시간에도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그 구속의 은혜,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고 나를 용납해 주시는 그 절대적인 은총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각 하는 것, 그것이 주님 앞에 용납되는 비결이에요.
겸비해지지 아니하고는 기도할 때, 자신이 빨려 들어가듯이, 기도를 깊이 하면 자신이 한 줄기의 연기가 되어서 존재 자체가 타 올라 주님께로 올라가잖아요. 그런 것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겸비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렇게 깊이 나는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 나는 죄와 악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꽉 찼습니다. 나의 살아온 날 중에 주님을 기쁘시게 한 날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비천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 마음으로 기도하러 나아갈 때 그가 죄 가운데서 살다가 온 사람이라도 주님은 그 사람을 똑똑하고 의롭게 살아온 사람보다 더 잘 받아주셔서 그래서 주님이 용납해 주셔요.
지금도 하나님은 낮은 데로 임하고 싶어 하셔요. 마음을 낮춘 사람, 그렇게 엎드려지듯이 겸비한 사람, 그들을 찾아 나서시는 거예요.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