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법을 지키는 자의 간구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119:153)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시편119편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생이 다하기 전에 한번 이 119편 전편을 설교해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언젠가 새벽기도회 때에 40일에 걸쳐서 마지막까지 강해한 적이 있는데 그것보다도 좀 더 깊게 그렇게 했으면~ 그런 마음이 늘 드는 그런 성경본문입니다.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고난을 보소서 그리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에 누구 앞으로 가야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고난당할 때에 누구 앞으로 가십니까? 여러분들은 고난을 당할 때에 누구께로 가십니까?
오늘 이 시인은 고난을 당할 때에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난을 보아달라고 탄원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기의 허물과 죄만을 보아달라고 고백하거나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 살고 있는 것만을 보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지 않았습니다.
신자의 참된 신앙은 형통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고난을 받을 때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백설이 온 땅에 내린 숲속에 들어가 보면 어느 나무가 사시사철 푸른 나무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얀 눈밭위에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파랗게 그렇게 자신의 푸른빛을 변함없이 자랑하고 있는 나무의 기상을 보십시오. 많은 나무들이 잎이 떨어지고 꽃이 졌습니다만 그러나 사시사철 푸른 나무는 추운겨울에도 여름의 창창한 빛을 잃지 않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 신자라고 안 아프거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고난을 당할 때에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고 하더라도 인간인지라 고난을 당하면 아프고 괴롭습니다. 사람을 통한 고난이 올 때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아픔은 마찬가지입니다. 뚱뚱한 사람이나 마른사람이나 찌르면 아프기는 마찬가지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고난을 당하였을 때에 어떻게 그 고난 속에서 마음까지 상처받지 않고 영혼의 손해를 입지 않는지 그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하나님 앞에 터득하며 살아가는 고난을 견디는 지혜 없이는 그의 인생이 아무리 몸부림친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과 그리고 그 고난은 어떻게 피했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절개를 잃어버린 영적인 손실과 그리고 또 그러한 것들도 잘 견디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 숱하게 찢어진 상처만이 우리의 인생의 재고품처럼 남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을 이기는 지혜로운 방법을 터득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이 많이 있지만 그 성경중에서도 이 시편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교훈과 신앙의 유익은 다른 성경과는 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인고? 하니 시편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고난을 당한 많은 시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뛰어난 믿음의 사람들이었지만 고난을 당할 때에 마치 불에서 타서 죽어가는 벌레가 몸부림치며 꿈틀거리는 것같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 못지않게 고난을 받으면서 아파하며 흐르는 피를, 가슴이 찢어져 흐르는 피를 한손으로 쓸어내고, 받아내며 진토에서 뒹구는 것과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들은 또한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아프고 시련을 당하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흙바닥에 구르는 것과 같은 그러한 영적인 그러한 곤고함을 고난 때문에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고난을 이기는지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떻게 그 고난에서 헤어 나오는지 그 비결을 터득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은 우리의 가슴에 깊이 다가옵니다. 우리와 같이 흐느껴 울고, 우리와 같이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흙바닥에 뒹구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우리와 같이 흔히 엎드려지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일으켜 세우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일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풀무불 가운데를 지나는 것과 같은 깊은 고난, 살을 에는 것과 같은 시련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죄와 환경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도움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 같은 영적이 절망감속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원인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모두 고난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는 고난이든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든 사랑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고통이든 이 시인들에게는 모두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모두 고난을 이기는 공통된 한 가지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상처와 자신의 시련과 자신의 살을 에는 것과 같은 그런 깊은 아픔을 이 시인들은 하나님 앞에 뵈었든 것입니다.
(예화:) 언제인지 저는 기억도 잘 안 납니다만 아무튼 어렸을 때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손을 어떻게 하다가 칼에 베었습니다. 베었는데……. 그때가 무슨 김장을 한다고 그럴 때인 거 같아요. 그러니까 물에다가 소금을 잔뜩 타놓았는데 그걸 몰랐는지 손을 집어넣었지요. 그랬더니 그 베인 상처 사이로 소금물이 들어갔는데 아주 펄펄 뛸 것 같은 경험을 했어요.
제가 어려서 그런 경험을 두 번을 했는데 한번은 그 소금물에 손을 넣고 펄펄 뛴 경험을 했고 또 한 번은 고추씨를 따 깠습니다. 그러데 왜 열심히 어른들이 고추 까는데 거들었느냐하면 그 때는 엿장수가 고추씨를 받아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따 깠는데 (그것을 까면서도 생각은 다른데 있는 것이죠!…….) 이제 고추씨를 받아가지고 이제 엿장수를 주어서 엿을 바꿔먹으려고 하는데 그 당시에 고추씨가 꽤 나왔습니다. 한 두어 사발쯤……. 그런데 그 고추가 깨끗하지가 않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손이 시꺼멓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손을 씻어야지 가서 엿을 바꿔먹든지 강냉이를 얻어먹든지 해야겠다고 손을 씻는데 아니 손만 씻으면 되지 그 손으로 세수를 했습니다.
야! 한번 해보십시오. 대단합니다. 막 그 이렇게 이렇게 두 번인가 세 번을 문질렀는데 막 불이 나기 시작하는데 진짜 데굴데굴 구르겠어요. 눈을 뜰 수가 없어요. 최루탄 먹었을 때하고 똑같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두 번을 큰 고통을 겪었는데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그렇단 말이죠. 그래서 ‘마음이, 가슴이 저미는 것 같다.’ ‘살이 에이는 것 같다.’는 것은 똑같은 말이죠. 에이는 것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살을 포를 떠내는 것이에요. ‘저민다. 라고 하는 것은 칼집을 내면서 깊이 집어넣는 것이란 말이에요. 표현자체가 참 끔찍한 표현이죠? 가슴을 저미고 살을 에는 것 같은 그런 깊은 아픔, 몸부림칠 것 같은 그런 고난이 있을 때에 이 시인들이 그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자기의 고난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고난을 많은 사람들 앞에 화젯거리로 삼고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 고난을 감추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자기의 고난을 모두 드러내서 보실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립니다. 자신의 안타깝고 눈물겨운 사정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통 하는 그 상황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난을 통해 축복을 맛보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에 이렇게 자기의 고난당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 앞에서는 감추는 것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감추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는 고난도 그 부끄러운 치부를 하나님께는 드러내보였습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자기의 죄를 보이고 죄로 말미암는 고난을 보인 사람들은 주님께로부터 허물의 사함과 죄의 가림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드러내면서 그 수치스러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는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고난당할 때에 어디로 제일 먼저 어디로 달려갑니까?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원하지 않는 깊은 시련을 만날 때에 여러분의 마음은 제일 먼저 누구를 찾습니까? 여러분들의 사정을 들어줄만한 대화의 상대를 찾습니까? 여러분들의 친구를 찾습니까? 부모를 찾습니까? 여러분 누구를 찾습니까?
오늘 이 시인은 자기가 고난을 당할 때에 여호와 앞에 보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보아달라는 말로 쓰인 히브리어의 ’레에‘라고 하는 단어는 보기는 보되 단지 눈으로 외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은 속에 있는 것들을 함께 들여다보는 직관적인 통찰로서 자신의 고통당하고 있는 사정, 고난의 내막을 살펴달라는 그러한 간구요 고백입니다. 그러한 명령형을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적으로 사용하면서 그는 고난을 하나님 앞에 보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고난은 때때로 하나님 앞에 고난을 털어놓는 것만큼 유익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당신 앞에서 당신께 보여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앞에 당신의 고난을 보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에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주신다는 것이죠.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이죠. 몸이 아프다고 그러는데 옷을 한번 벗어보아라’ 그러는 사람이 모두 고쳐주는 의사가 아니라는 것이죠.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아프다’ ‘옷을 벗어보아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모두 그를 고쳐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두 벗어보았더니 ‘이리 돌아봐라’, ‘저리 돌아봐라’, 신체 구석구석 부위를 짚어본 다음에 ‘병이 깊었군! 쯧쯧쯧……. 옷 입어’ 얼마나 부끄러운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그리고 고통을 하나님께 보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구경만 하고 덮으시는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주님의 고통을 능가하는 은혜를 경험하고 체험함으로써 그 고난의 때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깨닫는 때로 이어지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난을 보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고난은 단지 하나님이 한번 눈길을 주시도록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보아주시면 내 고난이 변하여 희락이 되고 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난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고 미련한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에 말상대를 찾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극한 마음으로 그들의 고난이 자신 앞에 보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마치 우리자신보다 더 뛰어난 감각과 판단과 마음으로 우리의 고난을 감찰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고난을 당할 때에 자신들의 고난을 들고 누구 앞에 나아갔습니까?
사람에게 어떤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싶거나 인간들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호소하며 사람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는 대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더 큰 위로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자기의 고통과 고난 받는 사연을 주님 앞에 고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에 자기의 고통과 고난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에 주님께서 보아주시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이 어떤 연유에서 고통을 당하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고통 받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더 큰 고통은 그들이 계속해서 그 고통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치료하고 고치십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치시고 자신에 대한 태도를 고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꾸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고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 받는 것을 보는 일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알아주시기를 소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참 이 신앙의 상태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참 좋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와 사랑의 깊이를 느낄 때에는 이 내가 당하는 고난을 주님 한 분 이외에는 아시는 분이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이상하게 격려가 되고 그 다음에 지극한 비밀스러운 위로가 되요. 다시 한 번, 우리가 생명이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친밀할 때에는 이러한 고난 받는 사정을 아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데려간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수 없게 하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명처럼 귀하게 느껴지게 하고 그래서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그런 참된 교제를 누리지 못할 때에는 고난을 받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밖에는 내 고난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가 서러운 자기연민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똑같은 고난인데도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누리며 사느냐에 따라서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의 비밀을 누리며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한분이 더 소중하고
(찬양)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오직 예수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질 않네!…….
사랑의 비밀은 고난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면 나의 이 고통스러운 마음과 겹치는 이 고난의 마음을 알아주는 분이 하나님밖에 없으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 고난 때문에 더 하나님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 고난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에 우리가 찾아가야 될 곳이 어디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 고난을 누가 보아주는 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겠습니까? 그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 것을 믿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 받을 그 때가 바로 하나님만 바라볼 때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지 아니하고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지나온 우리의 인생의 여정을 회상하는 것, 성경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결국은 믿음으로 이겼던 신앙의 선조들의 삶을 묵상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 길이 우리 홀로 걸어온 길이 아니라 우리 홀로 걸어간 것 같았지만 결국은 주님이 매 순간 붙들어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인생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폭풍우 흑암 속을 지날 때에도 사람들은 우리의 손을 놓고 도망갔어도 주님이 우리 손을 붙드셨습니다. 홀로 있는 것 같았지만 고난을 통과하고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나니까 거기에서 붙드시는 손이 주님의 손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아주셨을 때에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홀로 두시지 않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나간 인생이 그러했다면 지금은 어떠하겠으며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그 인생은 어떠할 것인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범죄할 때조차도 그분의 시선 앞에 있는 것이 소망이고 형통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고난을 받을 때에도 그분의 시선 앞에 사는 것이 소망입니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곁에서 모두 떠나는 것 같고 일평생 붙들고 싶었던 사랑하는 것들이 여러분들에게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될 때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증거이고 여러분들이 또한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마치 불결한 세탁물과 같아서 매 순간순간 위로 내리시는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눈 같이 희어지게 하는 세탁이 필요합니다. 때 묻고 더러운 우리의 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삶으로 그런 삶을 살고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더럽혀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정결하게 살아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없다 할 만큼 살 수가 없고 그것은 고사하고 매일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신령한 은혜의 빛이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으리만치 정결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주님이외의 사랑을 우리에게서 털어버리고 주님을 향한 신실한 소망 이외의 다른 것들을 바라는 탐욕 때문에 우리에게 더렵혀졌던 때 묻은 우리의 마음들이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로 씻겨지는 체험들을 날마다 해야만 비로소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세차게 흐르는 물살도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때를 벗길 수가 없고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로도 우리의 마음속에 눌어붙은 죄의 찌꺼기들을 태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주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정화하시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서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 한 분의 눈빛 앞에서 사는 방법을 배우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과 사연과 모든 슬픔의 이유들까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불꽃과 같은 그 시선 앞에 보이는 자리 앞에 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흐트러졌던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자신 속에 하나님 앞에서 서기를 거절하는 반항하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주님 앞에 자기의 고난 받는 모습을 보이고 나고,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 앞에서 그 친밀한 사랑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고난 때문에 주님 앞에 매달리고 고난 때문에 자신의 고통 받는 사정을 주님이 보아달라고 애원하였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눈과 같이 정결하게 희어지는 하나님의 정결케 하시는 은혜를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 가운데를 통과하지 아니한 순결한 금이 없듯이 시련 가운데서 고난을 이기며 통과한 신앙 없이는 정결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시인은 고난 받을 때에 하나님의 눈빛 앞에 서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고난도 드러나고 죄도 드러날 것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눈빛 앞에 드러나는 것이 사람의 눈앞에 감추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고난 받을 때에 주님 앞에 보이는 성도들이 됩시다. 사람 앞에 보이기보다 주님 앞에 보이고 주님이 우리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그리고 안타까움을 알아주시도록 거기에 소망을 두고 주님 앞에 여러분들의 고난을 보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여기에서 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 아뢰는 탄원의 기도입니다. 신자가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 취해야할 두 번째 태도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건져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난은 우리를 황폐하게 만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난은 우리의 인간성을 파괴해버립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에 너무나 곤고하고, 고난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기에 황폐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무너진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은 그러나 고난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가 모자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의를 위한 고난이든, 악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이든, 그것이 시련이든, 시험이든, 교회를 받는 고난이든, 개인을 위해 받는 고통이든 모두 그 속에는 독소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고난을 잘 받아들이고 그것을 감당한다고 하더라고 항상 거기에는 반드시 독소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자기의 죄를 위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들만 성격이 비뚤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고난을 받은 사람도 성격이 비뚤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화)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교수한분을 만났는데 이분은 박사학위를 세 개를 가진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와서 강의를 하는데 참 박식하더군요. 그런데 박사학위 세 개를 받았는데 이 세 개의 박사학위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명예박사가 아닌 다음에야……. 명예가 아닙니다. 이것은 제대로 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받은 박사학위입니다. 동경대로 가서는 법학박사학위를 받고나서, 그리고는 어떻게 어떻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말하자면 노르웨이로 갑니다. 거기에 가서 해적들이 옛날에 사용하던 언어를 연구해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국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서 어떻게 어떻게 우여곡절 끝에 사회학박사학위를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 자기가 고백하기를 자기는 17살 때 아버지가 만주지방에서 목회를 했는데 자기 아버지 이름을 대면 한국교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 알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17살 된 소년이 ‘내가 다시는 이집에 들어오나 봐라.’ 하고 뛰쳐나갔다는 것이죠. 왜 그랬나? 그 교회에서 권사님들하고 장로님들에게 말하자면 인격적으로 한없이 모독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그 부모를 보면서 성격이 굽어지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러면서 그는 기인과 같은 인생을 산 것입니다. 얼마나 외국에서 오래 살았는지 눈빛이 파랗게 변했어요. 버터만 먹어서 그런 모양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내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위해서 고난을 받든,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든 그 고난 속에는 모두 독소적인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독시키는 비결이 무엇 인고하니……. 기도입니다. 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목회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은 고난이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교회일선에서 섬기다가 만신창이가 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은 고난을 많이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겪을 때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독소적인 요소들이 자기의 마음과 인격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해독하는 은혜로운 해독의 비결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는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받을 때에는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도 있고 필연적으로 인간을 향한 원망도 있고 인간도 하나님도 원망할 것이 없으면 운명을 향한 원망이 있고 그것도 원망할 것이 없으면 그렇게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자기를 향한 강한 불신과 한 맺힌 원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모두 독소적인 요소가 되어서 그 사람의 인성에 깊이 배입니다. 성격을 굽게 만들고, 꼬이게 만들고, 잘못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라면 다릅니다. 고난을 받으며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느낍니다.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보고 계신 하나님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얼마나 커다란 관심거리이고 주님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기를 향해 침묵하시는 것 같으시지만 그러나 사실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고난을 받으면서 자기의 인간성 속에 인격 속에 스며들어오고 있는 독소적인 요소를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기도 속에 맛보는 은혜가 독소를 모두 해독시켜 버리는 것이에요. 그리고 고난이 주는 독소와 같은 요소는 모두 해독되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영양분과 같은 그러한 효과를, 효과만이 우리의 인간성과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온 심령 구석구석 배이도록 만들어주어서 유연한 인격을 갖게 만들어주고, 사람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을 갖게 만들고, 고통 속에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오히려 시련의 폭풍 속에서 사람들에게 평안을 증거하고 평안을 선포하는 주님의 도구가 되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해독이야말로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말씀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깊은 기도 없이는 인격적인 승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의 깊은 은혜,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사랑을 여러분들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진리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때리고 지나가고 여러분들이 가슴을 찢으며 애통한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그 진리를 붙들고 기도의 은혜의 물에 잠기는 일 없이는 여러분들의 그 지식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깊이 파고 여러분들 심령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일, 심연의 불 가운데로 통과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녹아지는 이 일들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고난을 견딘 사람들은 인간성이 뒤틀리고 기도 없이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은 사람들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두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합니다. 모두 고난이 가져다준 독소에 감염된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고난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를 건져주시고……. 하나님 앞에 건져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건져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할 때에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호소합니까? 여러분의 방법에 호소합니까? 여러분들의 재주와 지혜에 호소합니까? 도움이 될 만한 방백들과 인간들을 여러분이 의지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람의 재주나 방법이나 여러분들을 도울 수 있는 인맥을 찾아다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러분들이 이미 하나님께 보여드린 그 고난,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난 받을 때에 가장 좋은 약은 무엇입니까? 중보기도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도 받는 자신이 기도할 때에 더 크고 강력한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에 고난과 시련 속에서 혼자 있는 것과 같은 그 때에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고난 속에서 여러분들에게 더 큰 위로와 고난 속에서 꽃피는 하나님의 자유와 기쁨의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그 고난의 자리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난을 받을 때에 사람들은 신앙이 해이해지게 됩니다.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를 인생에서 부딪치는 어려움 때문이라고 호소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깊이 동정해주지 않을 수 없지만 신앙적으로는 가장 미련한 길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받을 때에 그 고난에서 이기는 길은 고난 받을 때에 주님의 율법을 잊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고난 받을 때에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비결은 율법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아도 아무 곳에나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혼돈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고난의 모래바람이 붑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속에도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당신의 자녀들이라고 하더라도 고난 받는 아무데서나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받는 곳에서도 당신의 백성들이 걸어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주님은 거기 계십니다. 그래서 고난 당한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고난당한 곳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고난 받았기 때문에 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시련이 겹치기 때문에 내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 아픔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앙의 길로 걸어가야 된다고 믿는 사람이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능가하는 위로와 시련을 초월하는 더 커다란 평안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폭풍의 언덕을 넘기도 하고, 사람의 힘으로서는 건널 수 없는 넓디넓은 계곡을 건너뛰기도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시련의 폭풍 속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며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을 때일수록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때일수록 우리는 진리에 매인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고난이 넘칠수록 우리는 고난이 가져다주는 아픔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는 은혜와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확신 가운데 우리는 서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손길을 더 가까이 느끼며 그분의 손을 붙들고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십여 년 전에 교회를 섬기면서 고난이 많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이면 좌석버스를 타고 교회를 갑니다.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앞뒤로 에워싸고 있는 많은 고난이 있는데 그 고난 속에서 내가 아무것도 내 힘으로 해결하거나 혹은 마무리를 해서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그런 힘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절실하게 가슴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다 떨어진 찬양집 한권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꼭 펼쳐서 접어놓았던 부분을 펼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양)
주님여 이손을 꼭 잡고 가소서 폭풍우 흑암 속 헤치 사 손잡고 인도하소서!)라는 찬송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더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관심을 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당신의 자녀들이 고난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아파할 때 주님도 아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순종하는 지혜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는 특별히 다윗이 하나님 앞에 고통 받을 때에 늘 기도하는 그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여 이 고난 속에서 나를 기억 하소서 내가 고난 속에서도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보십시오. 고난을 받을 때에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밑천은 자기의 유능함이나 재주나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보아달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 고난당한 것을 인하여서는 나를 주목하실 수 없을지라도 내가 어떻게 한결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쳐왔는지를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고난 속에서 종을 기억 하시옵소서, 나를 후대하사 살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다시 더 깨달은 주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백수가 될 때까지 전파하며 살겠다고 하는 것이 시인의 고난 속에 주님 앞에 부르짖는 패턴이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 그는 자기의 유익, 자기의 장점, 자기의 많은 충성,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는 자기를 바라보시면서 지켜보실 때에 그에게 기억났던 것은 자기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 - 내가 이제껏 걸어온 길도 주님의 율법을 좇아서 걸어온 길이요,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사람을 향하여 복수의 칼을 가는 대신에 오늘도 하나님께 나의 이 부끄러운 고난을 보이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오직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싶다. 라고 하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시인의 고난을 다른 사람들의 많은 고난과 같이 보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주의 율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받는 고난을 아픔 없이 지켜보시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신앙을 좇아 주 앞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주님이 차마 보시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날에도 순종하며 주 앞에 살았던 신앙의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자본이 됩니다.
여러분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 하였나이다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이 한마디를 고백하기 위해서 시인은 얼마나 많은 날 동안 마음을 바치고 정성을 드려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헤아렸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인은 그 앞에서 말하기를 여호와여 사람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와 관계없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주야로 눈물이 흐르게 하고 그것이 그의 영혼에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이 고난 받는 것을 주님이 어떻게 버려두실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주님이 그 영혼을 홀로 두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고난당할 때에 그래서 우리는 더 주의 율법에 준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산후에 주께서 우리를 물으실 때에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맑은 날은 주님을 섬겼고 폭풍우치고 비바람 부는 날은 내가 숨었습니다. 평안할 때는 주님을 믿었지만 고난이 올 때는 내 맘대로 살았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움이 멀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은 믿음으로 살지 아니한 많은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형통할 때에 주의 말씀을 지켰고 고난이 올 때는 내 신앙의 옷깃을 여미며 내 신앙의 허리띠를 동이고 더욱 비상시기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율법대로 살았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많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고난을 받을 때에 그것이 밑천이 되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하나님을 만난 추억들이 그에게 밑천이 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들이 그에게 밑천이 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 그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밑천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이제껏 특별히 고난을 받을 때에 더욱 주님의 율법대로 살고 싶어서 주님의 뜻 아니면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면서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온 그것이 고난 받을 때에 이렇게 담대하게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었고 살을 에는 것과 같은 고난 속에서도 고난이 가져다주는 독소에 오염되어 자기를 망치는 대신에 오히려 그 모든 고난이 가져다 준 독소들을 은혜의 물에서 기도와 은혜의 물에서 해독하는 방법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많이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119편의 저자로 여겨지는 다윗의 생애는 더욱 거룩한 생애가 되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보듬어 안을 수 있는 후덕하고 하나님의 ‘해세드’ 아가페의 사랑에 넘치는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그에게는 오히려 그를 만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그러한 고난 받는 것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대도 살고 싶어 하는 소원을 정화시켜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부흥의 은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가 순종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고난을 받을 때에 그 때는 더 순종해야 될 때입니다.
위기를 만나고 시련을 만날 때 그 때 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위해 열심을 내야 될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고난 속에서 오히려 축복하시고 유익을 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처럼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만 보이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간구하고 부르짖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럴 때일수록 순종하며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