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녹취자: 허혜숙
가족관계 시리즈 제 11강입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약 30년 전만 해도 이혼하는 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그것을 모두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어떻든 사회적으로 이혼을 하면 뭔가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이 되고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하든지 가정을 지켜야 되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혼율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데 이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봐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혼에 대한 설교를 했을 때 부부가 차를 타고 집에 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짜증을 내면서 말했습니다. “아니 우리 목사님은 주일 예배시간에 우리 중에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라는 설교를 그렇게 길게 하시는지 모르겠어. 나는 오늘 설교 정말 힘들었어.” 라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생각해 본 사람 여기 있거든?” 그만큼 부부관계에 있어서 서로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이혼을 한 번쯤 생각을 안 해 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고 너무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강의 제목을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로 잡아보았습니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데 종교지도자가 묻습니다. 문맥이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줘야 됩니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했더니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490번을 용서를 하라기보다는 무한히 용서하라 그것이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될 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어떤 이유가 있으면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가능합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을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여자를 버리면 안 된다고 말하면 모세의 율법에 여자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어서 여자를 버릴 수 있다는 가르침에 배치되는 것이고 만약에 버려도 좋다,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일흔 번에 일곱 번씩 용서하며 계속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평소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에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건 저렇게 하건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을 하시건 그것은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것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서 여자를 내보내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것은 원래 하나님이 주신 혼인제도와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예수님의 이런 설명을 들었을 대 종교지도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히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뜯어보면 모세의 가르침을 부인했다기보다 모세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더 심오한 의미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 당시에 그런 모세의 전통이 생기게 된 중요한 원인은 사람들이 너무 문란해 졌기 때문입니다. 살다가 여자를 버리고 다시 그 여자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이 남자에게 속한 여자인지 속하지 않은 여자인지 구분이 불분명해지면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사회적인 혼인의 명확성이 사라집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누구랑 결혼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이 혼인관계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결혼을 할 것 아닙니까? 내가 총각으로서 결혼을 하는데 한 번 결혼한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남편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어떻든 이 여자가 혼인관계에 메여있나 안 메여있나 그것을 확인을 하고 결혼을 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불명확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그러면 얼마나 많은 문란한 문제들이 일어나겠는가를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서 여자를 내 보내라 그러면 그 여자는 그 증서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는 혼인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덧붙이시기를 원래는 그렇지 않은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너무 완악했기 때문에 모세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것이 잠정적인 윤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 들어가는 말
그러면서 예수님이 여기 그림에 보면 예수님이 혼인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모세의 전통에서 끌어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렇게 이 안에 갇혀서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는데 왜 이것이 편리했을까요? 남자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니까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문화권에 있는 사람하고 한 번 이야기를 했는데 이슬람에서는 문자 세 번 보내면 이혼이 성립한다고 합니다. ‘너는 끝났다, 너는 내 곁을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 세 번을 보내면 그것으로 혼인관계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자로서는 그것에 대해서 법적으로 항의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이 이슬람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율법에 그것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혼증서를 써서 주면 문란함을 면하기 위해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조금 불편했을지 모르지만 그 전통을 따라고 있는 예수님 당시의 남자들에게는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세 번도 아니고 한 번만 써서 ‘너는 정리됐다, 직장에서는 해고 됐음. 하는데 너는 아내의 자리에서 잘렸음’ 그러니까 예수님이 원래의 혼인의 정신, 모세의 전통이 있던 원래의 혼인의 정신을 더듬어서 모세의 전통을 뛰어넘어서 창세기 2장으로 넘어가면서 이것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이 시대 사람들이 완악하지 않았다면 이것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남자를 지으시고 그 신체의 일부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시고 둘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면서 한 몸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이미 그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어느 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매일 그렇게 한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에 있어서는 탁월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혼인의 원리를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결함하여 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폴리캄(Polycarp)이라고 하는데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혼인생활을 하는 것들은 원래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도 구약시대에 잠정적으로 허용이 되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결정하신 혼인의 원리라기보다는 잠정적으로 그런 것들이 허락이 된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작가들이 여러 이야기를 하는데 이미 사회제도가 그렇게 되어있는 것을 하나님이 잠정적으로 그냥 묵인하신 것, 또 하나는 인구의 증산을 위해서 하나님이 잠정적으로 창조하셔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혼인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2장입니다.
II. 사람을 지으심
A. 세계와 사회의 계획
이것은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보면 1일 2일 3일 4일 5일 6일 이렇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하루가 끝날 때마다 하나님이 평가를 내립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가 5일 동안 계속되는데 마지막 날에는 ‘심히’라는 말이 첨가됩니다. 히브리말로 ‘메워드’라는 말인데 그것이 첨가됩니다. 이것은 ‘매우’, ‘심하게’ 란 뜻입니다. 1일부터 5일까지 창조된 것도 하루하루 좋았지만 이것도 여기에서 우주적인 완전한 완성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6일 날 무엇이 있었느냐? 인간의 창조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화룡정점과 같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성품을 인간에게 다양하게 부여하십니다. 그 중에서 남자에게는 정복하고 개척하는 성품을 주시고 여자들에게는 다스리고 돌보는 성품을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이 둘이 사실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 둘이 같이 합쳐지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사회가 정복과 개척 다스림과 돌봄에 의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류사화속에 구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B. 혼인의 원리
혼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함께 만나서 가정이라는 것을 이루었을 대 그 기반은 사랑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랑이 이루어져서 혼인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다음에 혼인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계속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혼인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한 몸처럼 사랑하며 살게 하시는데 이것이 되는 사랑이 있고 하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향입니다. 누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에는 마음이 동하여 스스로 그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독특한 특권처럼 여겨지고 무한한 긍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는 사랑’입니다. 그런 변화가 있으니까 누군가에게 몰입을 하게 되고 사랑을 하게 됩니다. 한 번 쯤은 누구나 다 그런 사랑을 하면서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문제는 처음에 연애를 할 때에는 그 사람이 절대 안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잘 쓰는 단어가 영원히, 죽을 때까지 변하지 말고, 우리 둘이만, 이런 용어들을 잘 쓰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살아보면 사실은 그렇게 되는 사랑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 참 내가 여자 보는 눈이 없었구나.’ 이렇게 후회하기도 하고 ‘아, 다음에 태어나면 다시 살아야지.’ 그렇게 남자가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다시 결혼을 한다면 이런 꿈을 꾸기도 합니다. 결국 되는 사랑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되는 사랑이 누구에게나 안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직장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제가 자매 한 분을 전도를 했습니다. 저보다 10살 쯤 더 많은 아줌마였는데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활달한 사람인 신입사원이었습니다. 결국 그 분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직장 그만 두고 10년 정도 연락을 했었는데 아마 지금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결혼을 집안에서 너무 반대를 했는데 남편하고 너무 사랑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결혼을 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서 밤까지 그렇게 행복했다고 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서 남편이 승진을 하게 되었고 지방으로 조금 높은 책임자로 가게 되었습니다. 주말부부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남편이 외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의 고백이 자기 인생에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예수님을 절대로 믿지 않았을 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자매의 아버지는 높은 고위 공직자 출신으로서 집안으로는 훨씬 더 낮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에 약간 기우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외도를 하니까 너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는 사랑을 배운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 불행하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모두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그렇게 한 것이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되는 사랑만으로 결혼관계를 이끌어가려는 환상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는 사랑’ 이것은 인간의 의지입니다. 그 사랑이 되는 사랑은 딱 끊어지고 하는 사랑으로만 가야 된다고 하면 결혼생활이 수두하는 것 같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 두 개가 꽈배기처럼 엮어지면서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 이혼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이혼을 허락하는 단 하나의 경우는 혼인 언약을 어느 한 쪽이 깼을 때입니다. 그래서 이혼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이혼의 조건에 대해서 훨씬 휴머니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가 혼인 언약을 깨지는 않았지만 성적 불능상태이고 아내가 가지고 있는 욕구가 해소가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의 신앙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에는 교회에 탄원을 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성적 불능상태이다 그런데 나는 이 생활이 너무 힘들다 그러면 교회에서 실사를 해서 이혼을 허락을 해줬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청교도들하고 너무 다릅니다. 그들은 그렇게 휴머니즘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혼인 언약을 한 쪽이 깼을 때입니다. 그 이후에 이혼을 하고 그 여자가 다른 곳에 시집을 가고 자신도 다른 곳에 결혼을 하면 그것은 간음한 것이라고 성경이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헤어지는 많은 것들이 혼인언약을 깨트려서 이혼을 하는 것도 있지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마지막에 성격차이라는 이름으로 이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적으로 보면 일치하는 혼인의 사유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결국 이혼이 허락된 경우도 있지만 더 좋은 것은 그것을 용서하고 결국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은 누가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의 선택입니다. 아무튼 혼인의 기초는 결국은 사랑이고 이 사랑이 될 때도 있지만 해야 하는 사랑도 있고 이것이 어우러지면서 부부간의 사랑이 실제로 실행이 됩니다. 그런데 이혼을 한다고 만약에 결정이 되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결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까 잘 모르지만 실제로 이혼을 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 인생의 뿌리가 흔들리는 사건인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더군다나 결혼을 해서 이미 오래 살았고 자녀들도 있고 이럴 경우에는 이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족전체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 참는 것도 있겠지만 실제로 실행을 하려고 할 때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때문에 실행에 못 옮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III. 이혼, 관계들의 파괴
A. 하나님과의 관계
어떻든 이혼을 하게 되면 찢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자녀들과의 관계도 끊어집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양육권을 빼앗아 와서 삽니다. 남편하고 그렇게 살게 되던지 아내와 그렇게 살게 되던지 자녀들과의 관계는 깨어집니다. 특히 아이들을 남편에게 두고 떠났을 때에는 완벽하게 깨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지면 그 가족관계는 다시 복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진짜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이미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나 아빠 한편이 그 아이들을 데리고 끝까지 운명을 같이 했을 때 그 때에는 같이 있었던 사람은 아이들에게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끝났을 때 더군다나 자기를 엄마한테 버리고 아빠는 헤어져서 다른 곳으로 장가를 가버리든지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세 번을 그렇게 했다든지 아니면 엄마가 그렇게 했다든지 하면 가족관계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혼을 할 때에는 그런 생각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혼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을 하니까 결행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끊어집니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자기와의 관계도 깨집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교회를 한 번 가면 좀처럼 옮기지를 않았습니다. 사역자도 햇수로 8년 있다가 열린 교회를 개척했는데 내 친구들 중에서도 그 당시에 한 교회에 그렇게 오래 있는 전도사는 없었습니다. 제가 안 옮겼던 이유가 내가 엄청난 믿음이 있어서 안 옮긴 것이 아니라 저는 새로운 교회에 가서 자기를 소개하고 그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헤어질 때마다 헤어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상상하기 싫었습니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버티는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에 내수동 교회에 있었는데 전체 80명 정도 되었는데 모두 정이 들었습니다. 제가 87년부터 가르쳤던 애들이 고등부로 올라왔으니까 약 6년이나 될 정도로, 제가 다닌 기간 동안까지 하면 7년이나 거기에 있었는데 그 동안 진짜 많이 내 속을 썩이고 내가 싫고 신학교 가게 되었다고 해서 ‘잘됐다. 너 가서 옛날에 너 같은 놈들 좀 만나봐라.’ 했었는데 마지막에 끝나고 “전도사님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는데 세 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울음바다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것이 너무 싫습니다. 악수례를 끝내고 나니까 탈수가 되어서 숨을 쉴 기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 왕성하던 나이에 그런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는 것도 너무 혼란스러운데 혼인관계가 깨어졌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차이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하자마자 정나미가 떨어져가지고 헤어질 준비를 하면서 약 10년 쯤 지내면서 더 이상 상처받을 것도 없을 정도였어도 그럴 경우에는 덜 힘들겠지만 그래도 역시 ‘나는 누구인가?’ 자기라는 것이 관계들 속에서 입증되었는데 딱 떨어져나갔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을 하고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솔직히 40일 금식하고 이혼하는 것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니까 인간적으로도 혼란이 생기고 영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가족이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끊어집니다. 그러고 나면 결국 가족이 찢어집니다. 이것은 고려해야 합니다. 물론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런데 상처받은 자녀들은 방황합니다. 오랫동안 의지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부모들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이 마음에 박히면서 결혼을 하게 되면 내가 저렇게 불행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서 이 결혼에 대한 기대를 빼앗아버립니다. 그래서 사실은 누군가를 쉽게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영적인 황폐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B. 자녀들과의 관계
이것은 더 심각합니다. 이혼을 함으로 타인이 됩니다.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가족관계가 해체가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정체성에 엄청난 혼란이 옵니다. 자녀들의 자기 형성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부모와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이것이 가족의 기본 관계인데 사실 자식한테 상처를 받아서 인생이 망가지거나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부모와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식과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식은 상처를 안 받아도 부모는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리했을 때 우리 인생에 어마어마하게 영향을 주는 두 관계가 부모와의 관계, 그 다음에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어느 자매를 사랑했는데 엄청난 상식이하의 배반을 당하면서 그런 것들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여자를 향해 마음의 문을 못 여는 것입니다. 이런 상처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식들 안에서는 그런 것이 잘 안 일어납니다. ‘첫째 기르고 너무 트라우마가 많이 일어나서 둘째를 낳을 수가 없었더라.’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엄마아빠는 각기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아가도 이런 관계의 깨진 속에서 남는 자녀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더군다나 이 아이가 이렇게 어린아이였을 경우에는 태어나서 제일먼저 맛보는 충격적인 정동이 ‘엄마가 나를 버렸다.’ ‘아빠가 나를 버렸다.’ 이것이 주어졌을 때 이것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마어마한 성격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C. 자신과의 관계
아까 설명한 이야기를 조금 더 확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둘이 살아가는데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더군다나 결혼을 했는데 아직 젊고 만약에 자신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정욕이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다면 이것은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혼을 했는데도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했지만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붙들고 살려고 하면 최선의 길은 아니겠지만 차선의 길로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겠지만 그렇게 해서 완전히 망가지는 사람들을 저는 여럿 봤습니다.
IV. 사랑으로 고난을 이김
A. 은혜가 필요함
결론은 사랑으로 그런 고난을 이겨야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넘칠 때는 정말 사랑하기 힘든 지체들을 사랑합니다. 똑같이 우리들이 남편도 도저히 가망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되고 이 혼인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진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애들이 헤어지려고 해도 부모들이 말렸습니다. 지금은 애들이 그래도 좀 살아보려고 해도 부모들이 나서서 그 혼인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뭘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남편과의 관계나 아내와의 관계가 아버지의 영향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훨씬 더 많이 받습니다. 아버지가 불러놓고 ‘이혼해라’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훨씬 더 낮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남편과의 관계에서 힘들게 버티면서 살아봐야 얻은 것이 없다고 하는 이런 불신앙적인 방식을 상처가 자녀들의 결혼생활에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방해를 놓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은혜로 극복을 해야 합니다.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실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이다’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보면 부부가 실패하는 이유가 이렇게만 사랑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관계에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 남편이 잘못 했는데도 계속 우겨서 부부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고 평소 같으면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것인데 그날따라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뭐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불똥이 되어서 터져서 부부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둘이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결혼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남편에게로, 아내에게로 향하게 되도록 그렇게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은 실망시킨 적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우리들이 극복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로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모자라도 용서하고 불완전한 존재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혼’하고 선언할 때는 많은 시련과 고통, 갈등, 번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라는 답이 있습니다. 은혜로서 이겨야 합니다.
B. 은혜로서 이김
현실에서 많은 갈등들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과거를 보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보다 더 어려울 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셨고 보호해 주고 사랑해 주셨고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이기게 해 주셨으니 현실도 이기게 해 주셔서 도와주실 것이다. 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지신 희생과 고난을 기억하면서 부부로 맺어주신 섭리를 생각하고 잠시 있는 이 세상의 허무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욕심을 버리고 하늘나라의 상급과 소망을 바라보고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우리 형편을 아시고 또 한 순간도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아프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런 사랑을 내가 받았으니까 나는 가정을 위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배운 내용은 여섯 가지입니다. 첫째, 남편과 아내를 한 몸으로 창조하셨다. 서로 사랑함으로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혼은 하나님과 자녀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려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QUESTION
Q. 교회의 섬김과 가정의 섬김 가운데 갈등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A. 믿는 남편일 경우에는 제일 중요한 것이 남편이 은혜를 받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는 것이 모두 충분한 것이 아니라 아내들이 일단 남편의 신앙이 약할 때는 대등한 위치에서 누리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내가 져줘야 합니다. 원리원칙이 있는데 사소한 것에 있어서 양보하고 큰 것에 있어서는 자신의 것은 찾는 그런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부분 남편들이 아내가 교회에 간다고 하고 신앙생활 하는데 짜증을 내고 하는 것은 대부분 가정생활에서 다른 영역에 있어서 만족이 안 될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교회 안 가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둘이 화투를 치고 놀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뭔가 가정의 생활 이런 것들이 자기에게 만족스럽게 모든 것들이 되지 않을 때 그런 불만을 아내에게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훨씬 더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남편이 함께 있자고 하면 주일예배에 나오지 말고 놀러가야 된다.’ 이런 식으로 원칙을 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훨씬 더 지혜롭게 해서 남편이 가정을 통해서 따뜻한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아내에게만 책임이 있느냐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선교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자인 남편일 경우에는 우선 불신자로서 가지고 있는 한계, 쉽게 이야기하면 주 안에서라고 하는 것도 소극적인 것이 있고 적극적인 것이 있습니다. 하면 좋은 것이 있고 어떤 것은 하면 죄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구분하면서 기본적으로 남편과의 결합을 완전히 깨트릴 정도로 위협이 되는 그런 행동을 삼가면서 해야 합니다.
결론은 사랑입니다. 불신자 남편을 둔 사람들은 희생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남들처럼 그렇게 대등하게 부부싸움을 하고, 힘들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라 그래서는 본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서 그것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좀 더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보면 부부가 갈등을 일으키는데 자매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정에 대해서도 희생적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굉장히 힘들어하는 그런 부분들이 있는데 눈치를 못 채고 자기 갈 곳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면에서는 아내가 잘 해 주는데 그것이 빛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가정의 경우 남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하나입니다. 집안이 정돈되어 있는 것, 그런데 아내는 성향적으로 그렇게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남편이 포기하고 살든지 아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인데 부부싸움을 하면 여러분들이 다양한 이유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의 한 두 개 내지 세 가지 똑같은 것을 가지고 계속 싸웁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습니다. 기왕이면 가정을 섬기려고 마음을 먹으면 자기가 그런 성향이 없다고 하면 인정을 하는데 남편이 다행히 ‘그래. 집안이 개꼴이라도 나는 당신이 좋다. 그냥 나는 살겠다.’ 아니면 더 나아가서 ‘내가 치워줄게 걱정 하지 마. 너는 교회 일만 해.’ 이러면 되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남편이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면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학교 요즘 많습니다. 석 달만 다니면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들어줍니다.
우리 교회에 그런 자매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다니고 나니까 ‘이것이 뭐가 문제냐?’ 이랬는데 그 학교를 다니고 나니까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못 사는 사람인데 정리를 잘 합니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집에 들어가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수건이라도 하나 개키고 의자라도 하나 제대로 놓고 방석이라도 제대로 놓고 그것이 남자의 몸에 기본적으로 배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