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기도
2023년
십자가사경회
설교기간 | 2023년 04월 03일 – 04월 05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05월 31일
목 차
1. 시험과 기도(마 26:39-41) 2023.04.03. 십자가사경회 3
2. 고난을 이긴 기도(눅 22:42-44) 2023.04.04. 십자가사경회 7
3. 말씀이 생각날 때(눅 22:60-62) 2023.04.05. 십자가사경회 10
1. 시험과 기도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그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도”(마26;39~41)
녹취자: 허혜숙
십자가와 기도 1(2023.04.03._십자가사경회 새벽)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체포되시기 전 마지막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대 제사장으로서의 이 간절한 기도는 당신 자신과 남겨두고 가는 제자들, 이루어질 미래의 교회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기도가 대조적으로 나오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조금 더 나아가서 땅에 얼굴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엎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였습니다. 당시로 보면 이것은 가장 간절함과 완전한 복종의 표시였습니다. 자기는 아무 가치가 없으며 이 의미로 얼굴을 땅에 대는 것이고 엎드리는 것은 ‘주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나는 받들겠습니다.’라는 자기 비하와 순종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두 토막으로 나누어보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했을 때 이 잔은 무엇이었을까요? 의심할 여지 없이 잠시 후 다가오고 있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도 하나님으로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으셨으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인간으로서는 이 죽음이 두려우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이고 영원히 살아계신 그 분이 맞이할 첫 번째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백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고백에서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셨다거나 연약해지셨다는 것을 느끼기보다 참 사람이었구나, 사람으로서 이 고난을 앞에 두고 계시는구나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저 당신 자신의 인성을 온전히 보여주시면서 그렇게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일체의 비겁함이나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그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한 연약한 인간으로서 주님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며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기도는 오래 한 기도가 아니라 잠깐 지나가는 사람으로서의 마음에 떠오르는 진심을 아뢰는 것이었고 곧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도 기도 응답을 못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이 기도에 대해 응답을 못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마지막으로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것이 예수님의 최종적인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드린 기도는 비겁함이나 변절의 기도가 아니라 더 완전한 하나님 앞에서 복종을 바라는 기도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복음서들이 여러 가지로 기록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이때 이렇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시던 그 때에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가 늘 기도하시던 생애였지만 특별한 기도를 쏟아부으시던 생애였습니다. 이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온갖 고초를 다 당하셨지만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십자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 세상에는 누구도 자기의 자리를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홀로 지셔야 했으니 예수님에게는 사람의 도움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지고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흐르는 눈물, 그리고 땀이 변하여 피가 되기까지 쏟아지는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잠시 후면 겪게 될 십자가의 고난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는 이미 겪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이 기도는 목숨을 건 기도였고 십자가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를 질 사명이 있었고 누구도 그 사명을 대신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매 순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나의 이 십자가를 위해서 누구도 도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의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가 져야 할 십자가이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십자가라면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주님의 도움만을 바란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예수님이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목숨을 바쳐 간절히 기도하셨던 그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내 십자가가 아니고 내 십자가는 그분의 십자가 안에 있었지만 이미 지신 십자가이기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매달리고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림으로써 주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이기셨으니 또한 그 십자가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에 당신처럼 매달리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려고 괴롭히고 우리의 심령을 찢어놓으시려고 주신 그런 계획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이길 수 있다고, 이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나처럼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감당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가 얼마나 위대하고 커다란 희생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여러분도 이기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잠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기도하나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우두머리 격인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제자들이 심경은 이해가 갑니다. 그 전날도 하루 종일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는데 유쾌하고 흥이 나는 만찬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고별설교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되는지 이미 명백히 가르치셨지만 이들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죽으신 후에 부활하실 것도 몰랐습니다. 우울한 얘기만 듣고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에 갔을 때 피곤이 밀려왔습니다. 생각으로는 기도해야 하는데 라는 것을 알았지만 몸에는 피곤이 밀려오고 마음에는 낙심으로 힘을 잃어버려 주 앞에 매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깊이 잠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것만이 잠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고 아무 대책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인 잠을 자게 됩니다.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배 밑창에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낙심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멸망시켰으면 좋을 나라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파송하시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낙심하여 깊이 잠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지지 않고 이기신 것을 보면 당신의 뒤를 따라오기 위해 온갖 십자가들을 질 때 예수 친히 우리를 홀로 버려두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자들의 이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됩니다. 낙심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줍니까?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줍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 겁을 먹고 덜덜 떠는 일들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은 자유를 앗아가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심하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예수의 것입니다. 그 분을 믿고 결코 이렇게 기도해야 될 순간에 낙심과 좌절로 잠드는 일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시험과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모습도 제자들이 시험에 들어있는 모습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험은 더 큰 시험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당신을 치면 양 떼들이 흩어질 것을 아셨고 그리고 잠시 뒤에는 양들을 치려는 핍박하는 세력들이 있을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래도 예수님의 그늘 아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는 제자들은 그 모든 일을 혼자 겪어야 될 것이었습니다. 그 때 겪어야 될 시험에 비하면 이것은 시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더 많은 시험이 찾아오게 될 것이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시험에 드는 것은 잠들고 기도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투를 합니다. 밤에 소강상태가 되었습니다. 적군도 피곤한 모양입니다. 그럴 때 탄약과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잠드는 군대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잠들지 않는 보초를 여기저기 충분히 세우고 그들을 믿고 군인들은 언제 깨어나든지 다시 전투할 수 있는 자세로 잠깐 눈을 붙이게 될 것입니다. 깨어 있는 보초병들은 사면을 주시하며 어둠 속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갈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바람소리, 냄새 ,불빛, 움직임 모든 것을 적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깨어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환경과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함께 손을 잡으며 우리를 위험으로 데려가는 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으면 이것들은 도둑같이 다가오게 되고 어느 날 그 도둑같이 다가오는 것에 의해서 맞고 찔리고 그리고 내려침을 당하여 결정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 타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원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육신이 약하기 전까지는 이 말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정말 연약해지고 나니까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한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왔습니다만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얼마나 육신이 연약하면 못 나올까? 그리고 이 시간에 있는 그곳에서 인터넷을 켜고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위급한 순간에 당신은 육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땀이 피가 되어 쏟아지기까지 매달리셨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간절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당부하러 가셨을 때 이미 예수님의 팔뚝에는, 얼굴에는 그렇게 간절한 기도로 흐르는 피로 얼룩져 있었을 텐데 워낙 마음이 잠들어 있던 이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도 마음을 떨치고 새롭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뜻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결정적으로 기도할 그 시간에 아무도 전심으로 기도하지 못했고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잠시 후 시험에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죽는 데까지 따라가던 제자들, 칼을 빼고 예수님을 잡으러 오던 자들의 귀를 떨어뜨리던 제자들이었는데 잠시 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살기 위해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국은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몸으로 고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놓여있는 처지가 어떤 처지든지 그 때가 힘들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신 것을 기억하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고통스러울 때 예수님을 떠올리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걸고 기도하시던 모습을 떠올리고 여러분도 그렇게 기도하신다면 하나님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게끔 여러분들에게 새 힘을 주실 것이니 이는 예수그리스도에게 능력을 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현실을 이겨 십자가의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와 기도 2(2023.04.04._십자가사경회 새벽)
2. 고난을 이긴 기도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더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2∼44)
녹취자: 김정호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신 마지막 기도의 광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이미 아셨고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사랑의 애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기도였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을 똑같이 느끼셨고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를 주님께서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은 만약 아버지께서 내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서도 이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어떤 비겁함이나 의무에 대한 회피나 사명을 저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그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 병 고침을 받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하나님은 보았습니다. 그러나 참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자로서 죄는 없으시지만 이렇게 연약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이 시험을 받으셨으니 시험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시험을 받고 그분은 죄는 없으셨어도 사람들의 악함 때문에 시험을 받으셨지만 똑같이 그렇게 시험과 고난을 당하시는 그분과 우리이기에 거기서 동일체가 된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종 우리에게 시련이 닥치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치료책입니다. 비록 나의 죄 때문에 일어난 고통스러운 시험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기억한다면 그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가는 영혼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예수님을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힘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자신을 모두 쏟아부으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인간의 힘이 모두 끝난 것 같은 때에 주어집니다. 참된 희망은 자신에게 깊이 절망하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았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배웠고 그러자 그는 깊이 절망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 중에 거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도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향한 일종의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때 이 절망하는 이사야를 찾아오셔서 그의 죄를 깨끗케 해주시고 소명으로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모든 힘을 기울여 하나님께 매달렸고 이것은 잠시 후 짊어지실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이 시간을 뛰어넘어 그분의 마음속에 물같이 밀려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절망과 고독 그리고 두려움과 고난 모든 것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라도 이 고난의 기도에 동참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들은 잠들고 있었습니다. 더욱 자신의 모든 힘을 기울여 하나님께 매달렸을 때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주었습니다. 종종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기도의 깊이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십니다. 시작은 내가 기도 제목을 찾아서 주님께 매달리는 것 같지만 기도가 깊어지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내 육체를 도구로 쓰셔서 당신 하시고 싶은 기도를 모두 하신 후 나에게서 빠져나가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를 모두 드리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다 드려 기도함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힘이 모두 소진되어 천사가 예수에게 힘을 주시지 않으면 지탱할 수 없으리만치 자신을 소진하셨습니다. 이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천사가 주는 힘으로 그 일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더욱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간절히’라는 말은 끊어지지 않고 쭉 뻗어가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서 더욱 간절히 끊어지지 않는 기도로 더욱 모든 힘을 쓰고 모든 애를 다 써서 그 기도가 하나님께 쭉 뻗어가는 기도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온 마음과 힘을 기울였는지 땀이 흐르셨고 그 땀에는 피가 배어 핏물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모두 드려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면 그냥 구원하시면 되지 만약에 십자가가 꼭 필요하면 그냥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 되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 이렇게 처절하게 기도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는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다 바치는 이 마지막 기도의 헌신 속에서 잠시 후 짊어질 십자가를 감당할 힘을 얻게 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앞둔 처절한 피가 떨어지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때 어떻게 주님 앞에 매달리고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자신을 모두 드려 간구하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우리의 몫의 태인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본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아들이 눈물로 드리는 기도를 받으신 후에야 그 핏방울을 받으신 후에야 십자가에 흐르는 보혈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기도의 눈물이 없는 십자가의 보혈이 없음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신 그리스도의 기도의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제자들도 모두 잠들어 있고 이제 자신에게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고 환호성을 지르고 저분을 임금 삼자고 외치던 무리들도 없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열렬히 환영하던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직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위해 당신 홀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우리들이 공동체로 기도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위해서는 자신이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외롭게 하셔서 당신만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 보십시오.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으며 주 앞에 매달릴 때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힘을 들여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정신으로 기도할 때 우리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힘이 솟아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가 솟아납니다. 어떻게 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희망을 주시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희망을 따라 살게끔 우리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절망스러운 상황 대신 보이지 않는 희망을 간직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우리 주님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십자가 정신을 가지고 사는 신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이 생각날 때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0~62)
녹취자 : 오지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체포되신 후에 먼저 가신 곳은 대제사장의 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종의 종교적인 심문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그때에 모든 제자들이 도망갔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있었습니다. 거기에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한 여종이, 그 불빛이 베드로를 향하여 비칠 때,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라” 그리고 지목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여자여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노라” 목격자는 많았습니다. 잠시 후에 또 다른 사람이 보고, “너도 그 예수와 함께 다니던 무리들중 하나가 아니냐” 하되, 베드로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부인했습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한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이는 갈릴리 사람이며,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구나”라며 변명할 때 닭이 울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닭소리와, 부인하는 베드로와,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시니 생각이 나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오늘 읽어드린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기도하지 않은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실상 마지막 기도의. 사투를 벌이셨고 그때 제자들이 어떻게 될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서 기도하라”라며 간절히 타이르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변심할 마음을 가진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잡기 위해서 온 대제사장 중 말고의 귀를 칼로 떨어뜨려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정말 예수를 위해 살고 싶었고, 예수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한 자신의 결심을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로 자신을 지키지 못했을 때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불과 몇 시간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심문당하시는 그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부인하는 목소리가 예수님의 귀까지 들릴 지경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결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는데, 결국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울 일이 적다. 하나님 앞에 신령한 이유로 우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비겁하게 눈물 흘릴 일이 적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받고 싶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깨어 기도함으로 본인이 깨뜨려져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으며 고통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을 누리기 위해 울겠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이렇게 주님을 배반하고,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종종 기도한 것이 응답되지 않는 때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도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 결과를 고스란히 우리 자신이 고통으로 돌려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가 올 때에 인자가 믿는 사람을 몇이나 보겠느냐” 하셨으니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빼앗기고 흩어져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마음을 쏟아 매달리지 못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이 생각나자 베드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가던 길을 돌이키고 바꾸는 모든 역사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날 때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언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봤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 만남이 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 가던 길을 돌이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깨닫는 일 없이는 결코 우리의 가던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을 만나는 일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이 더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고난의 주간에 예수를 다시 만난 베드로처럼, 주님과 마주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던 베드로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진정한 회개로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베드로가 이 말씀이 생각났을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자신의 죄를 기억하며 슬퍼했다고 한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갔고, 새벽닭이 울 때에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격렬하게 울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 말씀이 베드로의 양심을 깊이 찔렀고, 그것 때문에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에 비춰볼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심히 아픈 마음으로 통곡하였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울게 한 것이고, 양심이 그에게 고통을 준 것입니다. 그 고통의 크기는 본인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나쁜 일을 행한 크기에 비례한 고통이었습니다.
이렇게 심히 통곡하며 우는 마음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더라면, 베드로는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심문하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똑같이 울고, 통곡했으나 그 마음이 달랐고, 시간이 달랐습니다. 많이 울었지만 이 시험에서 졌던 것입니다. 얼마나 울고 통곡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느 때에 하나님 앞에 목매이게 매달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그날, 그 새벽에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를 보기 좋게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실패를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도 실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유언처럼 받들고 기도하며 살아야 된다고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이런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메마른 대지 위에, 이곳저곳에서 산불이 나고, 온 산하가 메말라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비가 내리니, 온 땅이 촉촉하게 젖어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은혜의 단비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메마른 여러분들의 영혼에 은혜의 단비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단비를 받고 예수의 생명을 충만하게 느껴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 다시는 예수님에 대한 배신 없이, 죽는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