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
2021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1년 06월 13일 – 09월 05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1년 9월 5일
목 차
1. 교회가 기도할 때(행 12:5) 2021.06.13. 주일오전예배 25
2. 마음을 같이 할 때(행 1:12-14) 2021.06.20. 주일오전예배 32
3. 개인기도를 회복하라(마 6:6)) 2021.06.27. 주일오전예배 39
4. 벼랑 끝에서 주신 은혜(렘 33:3) 2021.07.04. 주일오전예배 49
5. 기도가 어떻게 절망을 바꾸는가(스 10:1) 2021.07.11. 주일오전예배 60
6. 절망을 찬송으로 바꾸다(시 57:7) 2021.07.18. 주일오전예배 69
7. 마음을 토하는 기도(시 62:8) 2021.07.25. 주일오전예배 76
8. 주님께 다 말씀드리다(시 5:3) 2021.08.01. 주일오전예배 86
9. 외면할 수 없는 기도(시 39:12) 2021.08.08. 주일오전예배 93
10. 닫혔던 기도의 문을 열라(시 32:3-5) 2021.08.15. 주일오전예배 100
11. 마음이 약해질 때에(시 61:2-4) 2021.08.22. 주일오전예배 107
12.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히 5:7) 2021.08.29. 주일오전예배 114
13..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눅 19:41-46) 2021.09.05. 주일오전예배 122
<설교 프레임>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1 2021. 6. 13 주일 낮 예배
< 교회가 기도할 때 >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I. 본문해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본격적으로 자행되었다. 박해 속에서 기도하게 하셔서 교회를 강(强)하게 하셨다.
헤롯왕의 박해는 교회(敎會)의 지도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지도자인 사도(使徒)들을 처형하는 것이었다. 교회를 박멸하려는 시도였다.
개인의 기도와 공동체인 교회의 기도(祈禱)는 직물의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영적으로 경험한다.
교회를 위해, 교회와 함께 기도하면서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개인의 기도가 횃불이라면 공동체(共同體)의 기도는 거기에 불붙여주는 모닥불이다.
II. 교회가 기도할 때
오늘 본문은 커다란 위기 앞에서 교회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어떤 깊이로 함께 기도(祈禱)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A. 교회의 상황
첫째로, 교회의 상황(狀況)이 있었다. 교회는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 지도자의 사형이라는 구체적 상황이 있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았던 지도자 사도 야고보를 잃은 것이었다.
요한의 형제인 그는 헤롯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했다. 재판의 이야기가 생략되었으니 아마 그냥 살해(殺害)되다시피 했을 것이다.
야고보의 죽음을 두고 기뻐하는 유대인들을 보며, 헤롯은 더 끔찍한 일을 계획했다. 그것은 최고 지도자 베드로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잡혀 온 베드로(Peter)는 수감되었다. 사도 베드로까지 순교 당하고 나면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상황은 절망적(絶望的)이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4개조 16명의 훈련된 간수들에 의해 물샐틈없는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때는 유월절(逾越節)이었다. 명절이 끝나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면 사형(死刑)이 집행될 계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교회 온 교인들이 모였다. 기도 제목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베드로가 죽임 당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당신은 응답을 확인할 수도 없는 추상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은 입술에는 있으나 마음에는 없는 기도가 아닌가?
그런 기도에 과연 마음이 실리겠는가? 마음이 실리지 않은 기도에 무슨 능력(能力)이 나타나겠는가?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현실의 상황(狀況)을 직시하라.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을 찾으라. 자신의 무력함을 알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라.
그 일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獻身)할 마음을 가지라. 마음을 실어 또박또박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B. 교회의 선택
둘째로, 온 교회(敎會)가 기도하기를 선택했다.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기로 하였다. 절대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기도를 선택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인간적인 방법(方法)에 호소하지 않았다.
로마 조정에 올릴 탄원서를 작성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정부의 높은 사람들에게 줄을 대어 헤롯과 면담(面談)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수 부대 출신자들을 고용해 베드로를 탈옥(脫獄)시키는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다. 또한 간수들을 매수할 뇌물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기도(祈禱)였다. 오직 온 교인이 함께 마음 합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선택했다.
“… 교회는 그를 위하여 …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그들은 이 엄중하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오직 기도하였다. 그들은 단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교회(敎會)”의 지체로서 함께 모였다.
성도들은 교회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며 함께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개인(個人)의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혼자 있을 때 기도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공동체(共同體)의 열렬한 기도 없이 개인 기도의 능력이 지속되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서 꺼낸 장작의 불꽃이 오래 가지 않는 것과 같다.
* 온 산을 움켜쥔 거목의 뿌리들
교회적 위기를 만났을 때 예루살렘 교인들은 공동체적으로 기도하였다.
베드로가 투옥된 상황에서 그가 죽임 당하지 않도록 열렬히 기도했다.
기도하지 않고 핑계만 대는 것은 낙심하기만 하는 것만큼 나쁘다.
신앙(信仰)은 삶의 모든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절체절명의 위기(危機) 앞에서 한 장소에 모였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12:12)
그들은 마음을 함께 했다. 이것이 중요하다. 교회 밖에는 로마인들에 의한 핍박(逼迫)의 위협이 가득했고 교회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교회로 하여금 기도하려는 갈망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언제까지 팬데믹 상황을 핑계 삼을 것인가? 그러니 기도해야 할 것이 아닌가? 온 교회가 함께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자.
지금이야말로 물러설 곳이 없다.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누가 이 안타까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기도할 것인가?
C. 기도의 태도
셋째로, 기도의 태도(態度)에 대해 가르쳐 준다. 위기 앞에서 그들이 보여준 기도의 태도는 간절함이었다.
그리스어(Greek) 원문에서 이 단어는 "에크테노스"(ektenos)인데, 이는 "쭉 뻗어나가는"이라는 의미다.
야구장에서 타자가 때린 공이 하늘 높이 솟았다고 모두 멀리 가지 않는다. 강력한 타력으로 힘차게 쭉 뻗은 공이 담장을 넘는다.
공을 뻗어나가게 하는 것은 그것을 때린 힘이다. 행사하듯이 요란한 구호로 기도의 부흥(復興)이 오진 않는다. 각자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함에서 기도의 힘이 솟아난다. 하나님을 찾으라.
그들은 소수(少數)였다. 얼마나 두려웠을지를 생각해 보라.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들은 아무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온 교회가 간절히 기도했다. 결코 상황(狀況)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를 느꼈기 때문에 에 성도들은 온 마음으로 더욱 함께 열렬히 기도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성도가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쏘아 올리는 화살과 같은 기도였다.
* 초대 교부들의 기도 이해
성령(聖靈)께서 함께 하셨다. 그들의 기도는 너무도 간절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온 마음을 다해 드린 기도가 보좌를 움직였다.
D. 기도의 깊이
마지막으로 기도의 깊이(depth)다. 예루살렘 온 교회가 함께 드린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께”(to God) 드리는 기도였다.
누가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對象)에게 기도를 하겠는가? 다른 이에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도가 아니다.
적어도 교리적(敎理的)으로 볼 때는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어느 신자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神)에게 기도하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to God)라는 표현은 매우 특별한 의미(意味)를 가지고 있다. 이는 그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臨在) 앞에서 드려진 기도였음을 보여준다.
온 교회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交際)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말로만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공동체적(共同體的) 기도가 필요하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기도가 필요하다.
마음의 초점(焦點)을 하나님께 맞추라.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의 언어를 길어 올리라. 두레박으로 우물을 길어 올리듯이 마음을 다해 기도하라.
진심으로 기도하라. 거룩한 열정(熱情)이 불붙여지기를 간구하라.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리라. 은혜(恩惠)를 받으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서 기도하기를 갈망하라.
III. 적용과 결론
오늘날 세속(世俗)의 파도는 높고 경건의 능력은 약해져 있다. 복음의 영향력은 위협받고 있고 거룩한 열정이 식어가고 있다.
지금은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나뉠 때가 아니다. 나 혼자 살 길을 찾을 때가 아니다. 온 교회가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이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祈禱)하자. 우리의 심령에 거룩한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기도하자.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할 능력을 구하자.
놀라운 은혜(恩惠)를 교회에 부어주시도록 기도하자. 이 어려운 현실을 이겨낼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2 2021. 6. 20 주일 낮 예배
< 마음을 같이 할 때 >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2-14)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昇天)하신 후에 일어난 일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 아버지께서 약속(約束)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행 1:4).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라고 했으니 당시 율법대로 약 1km정도의 거리였을 것이다.
19세기 독일 주석가 Theodor Zahn은 그들이 모여 기도한 곳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일 것이라고 추정했다(행 12:12).
그것이 본문의 “다락방”이라는 단어와 합쳐져서 그들의 기도한 장소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행1:15절)
가정의 다락방에 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아마도 성전(聖殿)에 모인 사람들까지 포함된 숫자인 듯하다.
II. 마음을 같이 할 때
이때는 태풍의 눈 속에 있어서 고요한 순간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사(救援史)의 아침이 열리는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意味)인지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제자들조차 유대교(Judaism)의 종말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기적의 능력으로 로마를 무찌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옛날 다윗 왕국의 영광을 되찾게 할 것으로 믿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 1:6)
그러나 예수님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남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그 말씀은 승천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가 어떻게 이 세상(世上)에 이루어질지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들은 성령이 강림하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A. 마음을 같이 함
첫째로, “마음을 같이하여”기도했다. 로마의 핍박의 위협과 불안감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했다.
여기에는 사도(使徒)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女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육신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여기서 “마음을 같이 하여”(homothymadon)라는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동일한, 하나의(homos)”와 “정신, 감정, 마음”(thymos)의 합성어다. 사람은 여럿이었으나 마음은 하나가 된 것이다.
사람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음이 되었다.
무엇에 대한 한 마음이었을까? 경험해 보지 못한 성령(聖靈)의 부으심을 기다리는 한 마음이었다(행 1:5).
그들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성령 강림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約束)을 굳게 믿으며 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왜 교인(敎人)들이 모여서 기도해도 한 마음이 되지 못할까? 이는 그들 각자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여도 한 마음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시련과 고난(苦難)의 길을 걷던 성도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가가 있었다. 기도회에 참석해서 이런 찬송을 눈물을 흘리며 불렀다.
*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조국 교회에 이런 간절한 기도 모임들이 사라져 가는 원인이 무엇인가?
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信仰生活)은 이토록 건조하고 메말라 있을까?
도덕(道德)과 윤리를 강조하지만 자신들의 수준은 전혀 향상되지 않고 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장 큰 원인은 각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God)께 모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초점(焦點)이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날 성도(聖徒)들은 괴로울 때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경건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제는 대부분의 교인(敎人)들이 스마트폰 보는 시간의 1/10도 기도하지 않는다. 거의 경건생활 없이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한없이 편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온갖 허무(虛無)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
신자가 고생할 때, 믿음(faith)이 있으면 마음이 더욱 하나님께로 모아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흩어지게 된다.
마음이 하나님께 모아지려면 조건(條件)이 있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어찌 한 마음이 되겠는가? 그래서 열렬한 기도(祈禱)를 공동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교인들이 기도하려고 모여도 함께 기도드리는 힘을 잃는 것이다.
기도할 때 하나 된 마음은 그들이 성령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사랑으로 하나 된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마음은 서로 통(通)하며 지체들의 기도 제목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마음(heart)을 하나님께로 향하라. 지체들의 고통(苦痛)을 헤아리라. 그들과 한 마음을 가지려고 힘쓰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기도제목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B. 기도에 힘씀
둘째로,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행 1:14). 핍박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不安)으로 그들의 마음이 나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절망(絶望)과 두려움이 가득한 상황이었으나 마음은 하나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기 때문이다.
* 큰 위기 앞에서 마음이 평안했던 경험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논리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성(理性)의 논리를 초월하는 마음(heart)의 논리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마음이 기도하길 원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오로지 힘쓰더라”(proskarteruntes)라고 번역된 구절은 그리스 원어로 보면 “확고부동하게 계속하는”이라는 뜻이다. 용기(勇氣)나 단호함이 흔들림 없이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지난주에 설교 속에 나왔던 예루살렘 교인들의 기도회처럼 “쭉 뻗어나가는”(ektenos) 기도였다. 야구장에서 담장을 넘기는 타구(打球)처럼 힘 있는 기도회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승천하시면서 성령(聖靈)의 부으심이 “몇 날이 못 되어”이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날짜를 확정하지 않으셨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그날이 언제일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기도에 온전히 매달렸다.
드디어 성령이 임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았다.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이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불안(不安)과 걱정은 확신(確信)과 기쁨으로 변하였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능력 있는 설교자와 불타는 전도자들로 세워졌다.
온 교회는 구령(救靈)의 열정에 불타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가 되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集中)하는 성도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매달린다. 그들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 뵙기를 갈망한다.
* 스펄전의 기도와 측정계
사람의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보여주시기 위한 기회다. 문제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기회다. 이 문제와 그 능력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 사람이 일할 때, 기도할 때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聖靈)으로 연합된 한 몸임을 체험하는 탁월한 은혜(恩惠)의 방편이다.
우리가 지체들과 함께 뜨겁게 한 마음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향불같은 기도를 드린 적이 언제인가?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모두 밤바다와 같은 현실(現實)에서 인생의 배에 탄 사람들이다.
항해하려면 눈을 들어 밤하늘의 별(star)을 보라. 항로를 알려주는 것은 출렁이는 파도가 아니다. 하늘의 별이다.
문제는 땅에서 생기나 해답(解答)은 하늘에서 주어진다.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지라. 간절히 기도하라.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라. 한 마음이 되라. 꺾이지 않는 열렬함으로 간절히 기도하라. 주님이 도와주신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3 2021. 6. 27 주일 낮 예배
< 개인기도를 회복하라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I. 본문해설
산상수훈의 설교 중에 하신 기도(祈禱)에 대한 가르침이다. 마태복음 6장은 외식에 대한 경고로 시작한다.
예수께서 구제와 기도, 금식에 있어서 바리새인의 외식(外飾)을 비판하셨다. 이 맥락에서 기도에 관한 교훈을 주셨다.
국어사전적으로, 외식은 “겉만 보기 좋게 꾸미어 드러내는 것”이다. 성경적으로는, “사람에게 영광을 받을 목적으로 자기에게 없는 선한 성품이나 종교심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특징이었고(마 23:28), 신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죄 중 하나였다(딤전 4:2, 벧전 2:1). 이는 신앙의 진실성을 버리는 것이다.
외식을 경계하신 것은 마음이 하나님(God)께로 향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기도(祈禱)에 있어서 더욱 강조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마음의 교통이기 때문이다.
II. 개인기도를 회복하라
기도하는 교회(敎會)가 되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개인적으로 열렬히 기도함으로써 가능하다. 기도하는 개인 없이, 기도하는 교회 없다.
작은 나뭇가지로부터 큰 장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이 붙음으로써 활활 타는 모닥불이 된다. 따라서 신자 각 사람이 개인기도(個人祈禱)를 회복하지 않고는 기도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
A. 골방에 가라
첫째로, “네 골방으로 가라.” 골방은 잘 사용하지 않는 공간(空間)이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場所)다. 바리새인들이 즐겨 기도하던 “회당과 거리”와는 정반대인 장소다.
그들은 나팔 불 듯이 기도했으니, 이는 사람들에게 인정(認定)받고자 짐짓 경건하게 보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영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對面)하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를 하려면 골방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아무나의 골방이 아니라 “네 골방”이다. 이는 개인기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다른 사람의 섬김 기도는 힘이 된다. 그러나 남에게 기도 받는 것이 개인기도의 의무(義務)를 대신할 수는 없다.
남이 나를 위해 드려주는 기도도, 내가 기도할 때 역사하는 힘이 크다.
당신의 기도의 골방은 어떠한가? 사용하기에 깨끗이 청소되고, 늘 정돈되어 있는가? 사람의 온기(溫氣)가 느껴지는가?
혹은 오랫동안 찾은 적이 없어 지저분하지는 않은가? 거미줄이 쳐지고 죽은 쥐가 나뒹굴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신앙(信仰)을 떠나 있거나, 형식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 생활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많이 수고하고 애쓸지라도 그대는 소득(所得)이 별로 없을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메마르고 영혼은 곤고할 것이다.
“…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잠시 하던 일을 멈추라. 생각하라.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확인하라. 당신의 개인기도 생활을 점검하라.
B. 기도하라
둘째로, “너는 기도하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交際)는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거기서 영적 생명이 부어진다. 사랑의 힘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라. 봉사(奉仕)로 기도를 대신하거나 기도에 관한 책을 읽는 것으로 기도할 의무를 때우지 말라.
기도를 몸소 실천하라. 핑계대지 말라. 기도에 게으른 자신을 반성(反省)하라.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은밀(隱密)한 중에 계시고 기도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1. “네 아버지께”
기도할 때 필요한 믿음이 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Father)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마 6:9).
공동체(共同體)에 주신 기도였고, 이것은 개인기도 생활에 관해서다.
이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인격적(人格的) 교제임을 보여준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혼의 교제다.
그것은 인격적 관계다.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 “아버지”(pater)는 “아빠”다. 가족관계(家族關係) 안에서 부르는 호칭이다. 그 아버지는 부도덕하거나, 모순적이거나, 이기적이지 않다.
죄(罪)를 미워하나 죄인은 사랑하신다. 하물며 당신의 자녀(子女)에게랴?
우리가 그런 “아버지께” 개인적(個人的)으로 기도하는 것은 사랑으로 사귀는 것이다.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아버지께” 드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임재(臨在) 안에서 기도하라!
어떤 신자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멀리 계신 분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겉모습으로는 가까운 척 했으나 마음으로는 낯선 분이셨다.
그들은 진정으로 기도를 드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신(神)에게 기도했으나 아버지께 기도하지는 못했다. 친밀한 기도를 드리지 못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라. 아버지와의 친교(親交) 속에서 기도하라.
2. “은밀한 중에”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시다. 기도와 관련해서,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
첫째로는, 존재(存在)에 있어 은밀하시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靈)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에만 매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그러므로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성령(聖靈)과 말씀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만물을 초월하신 하나님을 뵙는다.
믿음이 깊은 사람들, 깨어 기도하는 신자(信者)는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라.
둘째로는, 행(行)하심에 있어서 은밀하시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faith)의 눈으로는 볼 수 있다. 이성(理性)의 논리가 아니라 마음의 논리로 알 수 있다. 그들은 늘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을 본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절망(絶望) 속에서도 희망을 갖는다.
은밀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기도할 때 진실(眞實)해져야 한다. 거짓된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다. 진실하라.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어떤 처지에 있는지 하나님 앞에 솔직하라. 정직하라. 진리(眞理)로 자신을 판단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 기도의 문이 열릴 것이다.
C. 갚으리시라
셋째로, “하나님이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祈禱)한 것을 갚아 주신다. 이는 채무자가 부채의 의무를 이행하는 그림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主人)이시다. 그분이 어찌 우리의 채무자가 되시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에 대해 우리를 격려하실 때 쓰시는 화법(話法)이다.
마치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라고 비유하신 것과 같다(잠 19:17).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갚아주신다.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應答)하신다. 우리가 잘못 구하거나 덜 좋은 것을 구하면 다른 것으로 바꿔서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안돼!”는 거절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신호다. 반드시 기도에 응답(應答)하신다.
땅에 떨어지는 기도(祈禱)는 없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올라간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은밀하신 아버지께 진심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기도는 거절(拒絶)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진 적이 없는 기도였다.
외식하는 기도였을 뿐, 참된 기도는 아니었기에 그들은 응답 받지 못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마 6:6)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臨在) 안에서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의식해야 한다.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한 믿음(faith)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라. 그분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을 가지라. 반드시 갚아 주신다.
III. 적용과 결론
믿음을 가지라.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子女)다. 당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신다. 기도하는 사람을 손해 보게 하지 않으신다.
개인기도(個人祈禱) 생활을 회복하라. 그래야 기도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검푸른 바다에 빠졌을지라도, 구조선의 밧줄을 붙잡은 사람에게 그 물의 깊이는 의미가 없다. 반드시 구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하는 10시간의 근심보다 10분의 간절한 기도(祈禱)가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 하나님이 갚으신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4 2021. 7. 4 주일 낮 예배
< 벼랑 끝에서 주신 은혜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I. 본문해설
예레미야는 주전 7세기에 활동했던 고난의 선지자(先知者)였다. 자신이 예고한 예루살렘의 멸망이 실현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지 약 136년 후, 남왕국 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예루살렘은 점령되었다.
그는 민족과 함께 역사의 벼랑 끝에 서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벼랑 끝에서 주신 은혜(恩惠)였다.
II. 벼랑 끝에서 주신 은혜
이스라엘은 그들의 범죄로 멸망했으나 하나님의 계획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 왕국이 썩어 없어지고, 영적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敎會)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 위대한 비전(vision)을 보여주시기 전, 그에게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A. 부르짖으라
첫째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렘 33:3). 예레미아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역사의 벼랑 끝에 있는 예레미아에게 개인기도를 촉구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에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나라는 망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제 살 길 찾기에 바빴다(애 1:11).
온 교회(敎會)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것은 간절히 기도하는 개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아니다. 우선 말씀을 깨달은 사람,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사람을 부르신다. 그들을 영적 부흥(復興)의 불쏘시개로 삼으신다. 개인기도로써 불타오르는 교회의 발화점이 되게 하신다.
“부르짖으라(qera elai).” 이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선포하거나 누군가를 부르는 동작이다.
이것은 일상적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에 억누를 수 없는 특별한 정서(情緖)에서 터져 나온 부르짖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역사의 벼랑 끝에 서있고, 선지자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었다. 그는 언제 사형(死刑) 당할지 모를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당신의 현실(現實)은 어떠한가? 시련 가운데 있지 않은가? 스스로 넉넉히 살아갈만한가? 하나님 의지(依支)하지 않고도 견딜만한가?
인생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 같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요행(僥倖)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비전(vosion)도 없이 그저 묵묵히 현실을 견디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시련은 마음으로 멀리하던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는 신호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는 뜻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주저앉지 말라.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 그 소원(所願)에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라.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느끼라. 의지할 데 없는 고립감을 하나님을 찾는 신앙(信仰)으로 승화시키라. 간절히 부르짖으라.
하나님 한분으로 마음을 채우라. 마음으로 기도(祈禱)하라. 언어에 진심을 담으라. 기도가 마음속에 피의 펌프질이 되게 하라.
B. 응답하리라
둘째로,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하신 말씀과 짝을 이룬다. 믿음으로 부르짖는 기도(祈禱)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지 보여준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모든 사람이 주님을 만나지 않는다. 마음을 다해 부르짖어야 한다. 그 사람에게 응답(應答)해 주신다. 거기서 만나주신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단지 육신(肉身)의 눈으로만 현실을 바라보지 말라. 낙심(落心)하게 된다. 거기 머물러서 주저앉거나 추락하고 말 것이다.
믿음(faith)의 눈으로 하나님을 찾으라. 해결의 방법도 그분께 맡기라. 단지 마음을 다해 부르짖으라.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시편 27:9)
사람들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두 가지 답안(答案)만 있는 줄 안다. 줄 타고 내려가거나 벼랑 끝에 버티고 있다가 추락하거나 둘 중 하나다.
*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아주신 하나님
이것은 믿음의 답안이다. 신앙(信仰) 세계에서 통하는 답이다. 누가 이성의 논리로 그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믿는 사람은 기적을 본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다. 자녀가 마음을 다해 간절히 부르짖는데 어찌 듣지 아니하시겠는가? 좋으신 아버지가 어찌 그러시겠는가?
현실에 불평(不平)하지 말라. 복을 받지 못한다. 투덜거리지 말라. 혼자만 힘든 세상 사는 게 아니다. 그런 넋두리로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 아무도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다.
당신은 신자다. 신자의 특권이 무엇인가? 생사 간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가? 부르짖어 기도하라. 응답(應答)하시는 하나님을 찾으라.
먼저 당신의 감정(感情)에 몰입하지 말라. 스스로 불쌍히 여기지 말라. 자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구하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계 2:5)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려고 애쓰라. 당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에 공감(共感)하기에 힘쓰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생각의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라. 기도는 그 다음이다.
그러고 나서 솔직해지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라. 거짓과 허위(虛僞)를 벗어버리라. 최상의 기도는 정직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다.
* 마음의 우물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기
시련을 만날 때 깨어있는 자는 즉시 기도한다. 기도가 필요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시험에 들었기 때문이다.
시련 중에 드리는 기도는 대개 즉각 응답되지 않는다. 응답은 지연된다.
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가? 무엇 때문에 오래도록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신 후에야 응답해 주시는가? 이는 인간 마음의 구조(構造)와 깊은 관계가 있다.
현실 속에서 기도할 제목을 주신다. 영적 위기를 깨닫지 못하기에 현실로 보여주신다. 괴로워서 전심으로 간절히 부르짖는다. 이때 마음은 출렁거린다. 고통(苦痛)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찾아간다.
이때 흔들리는 마음 안에서 죄와 헛된 욕망(慾望)은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러한 부르짖음 속에서 산산이 찢어졌던 마음은 하나가 된다. 이때 죄와 헛된 욕망이 털리고 떨어져 나간다. 거기서 하나님은 응답해 주신다.
기도의 시작은 고통 때문이었으나,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죄를 깨닫게 되고, 바르지 않은 관계를 회개(悔改)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고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육신의 정욕으로 흩어졌던 마음의 초점(焦點)은 다시 한 곳에 모아진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잘못 세워졌던 질서는 무너진다. 하나님을 최고의 정점(頂点)으로 삼는 질서가 다시 세워진다.
새로운 질서로 인생사의 중요도가 재배치(再配置)된다. 욕망은 사라지고 새 마음이 된다. 죄를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르짖게 하시는 이유다. 간절한 기도(祈禱)의 실천으로 망가진 마음을 고치게 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응답이 지연된다.
C. 보여주리라
셋째로,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이리라”(렘 33:3). 이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이다.
“ …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렘 33:6~9)
고통에는 뜻이 있다. 누구나 고난(苦難)과 시련을 당할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잘 모른다. 단지 괴롭기 때문에 기도한다.
그러다가 자기 마음을 살피게 된다. 비로소 문제가 자기 마음(heart)에 있음을 알게 된다. 죄를 회개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자에게 미래의 비전(vision)을 보여주시겠다는 일에는 세 가지 수식어가 붙어 있다.
첫째로는 “네가 알지 못하는.” 시련 속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간절히 부르짖는 자에게 사람의 생각을 초월해서 보여주신다.
둘째로는 “크고.” 시련 속에서 기도하면 이성(理性)으로 기대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큰 일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뤄진다.
낙심(落心)하고 염려하는 대신 간절히 부르짖으라. 사람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난다. 시련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셋째로는 “은밀한 일(bechulot)”, “숨겨진 일”이라는 뜻이다. 보이는 현실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감춰져 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에게 그것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III. 적용과 결론
기도해야 할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신앙(信仰)에 대해 다시 생각하라는 신호다.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새롭게 하라는 뜻이다. 이제껏 못 가본 길을 가게 하심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하라.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후에야 응답해주시는 것은 기도를 통해 우리를 훈련(訓鍊)시키시기 위함이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5 2021. 7. 11 주일 낮 예배
< 기도는 어떻게 절망을 바꾸는가? >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I. 본문해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을 다루고 있다. 에스라는 스룹바벨 이후 약 80년 후쯤에 이어진 2차 포로귀환을 다룬다.
어느 날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타락(墮落)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다. 예루살렘에 온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때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버리고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였다(스 9:14).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상황은 절망적(絶望的)이었다. 앞에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도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꿨다.
II. 기도는 어떻게 절망을 바꾸는가?
위기를 맞을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영적(靈的) 상태를 잘 모른다. 믿음이 없을 때, 고립감을 느낀다. 절망은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믿음(faith)이 있으면 절망은 기회가 된다. 왜냐하면 좌절하는 대신 하나님 밖에 의지할 이가 없다는 절박한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돌아보게 한다. 이것은 반드시 간절한 기도로 나타난다.
A. 한 사람이 기도함
첫째로, 한 사람 에스라가 기도(祈禱)했다.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비극적인 소문을 들었을 때 보여준 그의 태도가 말해준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스 9:3-4)
더욱이 지도자들이 이 타락한 일에 으뜸이 되었다(스 9:1). 끔찍한 죄악은 이스라엘 전체를 뒤덮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1. “성전 앞에서”
첫째로는, 기도한 장소(場所)다. 하나님의 성전이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성전 신앙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성전을 항해 기도했다.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 7:15-16)
개인적 문제이든지, 국가적 위기든지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올라가거나(삼상 1:7), 그곳을 항해 기도했다(왕하 19:14).
절망적인 소식을 들은 에스라가 찾아간 곳도 성전(聖殿)이었다. 이 성전은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세워진 것이었다.
아주 초라한 성전이었다. 솔로몬(Solomon)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기억하던 이스라엘의 노인들은 새 성전의 지대가 놓일 때 그 초라함을 보고 대성통곡하였다(스 3:12).
에스라는 곧바로 하나님(God)께로 나아갔다. 그는 절망 중에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 책임자를 문책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 앞으로 갔다(스 10:1).
육적 이스라엘 나라에서 성전은, 영적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본 예표(豫表)였다.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생의 위기(危機) 앞에서 당신은 어디서 도움을 찾는가? 그림자인 성전이 바라보던 실체(實體)이신 그리스도를 찾으라. 그분 앞에 나아가라.
절망의 위기에서 찾아갈 분 그리스도(Christ)뿐이시다. 문제는 세상에서 생기지만 해답은 신앙에서 주어진다.
어려움을 만나 염려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찾으라. 그런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교회(敎會)”를 만든다.
신자(信者)가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닌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고,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向)하여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닌가? 절망 중에 그리스도 앞에 서라!
2. “엎드려 울며”
둘째로는, 기도한 자세(姿勢)다. 에스라는 “엎드려 울었다.”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그는 낙망하였다. 그는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엎드려(mitnapel)”는 “자신을 던져서 떨어뜨려”라는 뜻이다. 이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어 신체적으로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지점에서, 에스라는 오직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恩寵)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울며(boke)” 이는 소리 내어 통곡하는 동작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절망 중에 자기 마음을 의지(依支)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다.
엎드린 것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와 복종(服從)의 표현이었다면, 통곡의 울음소리는 자기의 비참함을 인정하며 용서(容恕)를 구하는 표현이었다.
옛말에 “우는 자가 깨달은 자다.”라고 했다. 사람 앞에 우는 자는 잘해봤자 그들의 동정(同情)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신다(마 5:4). 절망에서 벗어날 길을 주신다.
그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이끌고 어떻게 예루살렘까지 왔는가?
수많은 난관과 역경을 겪었다. 많은 대적들이 매복하여 이스라엘을 멸하려 할 때(스 8:31), 그는 아하와 강가에서 백성들과 함께 금식(禁食)까지 선포하고 기도하지 않았던가?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통곡하는 에스라를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세상의 부귀와 명예로 할 수 없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이다(마 5:3).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만나주신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는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 그분 앞에서 울라. 자신의 죄와 이웃의 죄를 위해 울라! 반드시 구원(救援)해 주신다.
3. “죄를 자복할 때”
셋째로는, 기도한 내용(內容)이었다. “죄를 자복하였다.” 이는 죄에 대한 고백(告白)을 뜻한다. 무슨 죄인가? 에스라가 무슨 죄악을 저질렀는가?
개인적으로, 에스라는 이 죄(罪)와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에스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곧 자신의 죄였다.
절망적 상황에서 근심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방백들”이고 지도자들이었다(스 9:1). 그러나 에스라는 단지 근심하지 않았다.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댐의 물이 터지듯이 기도(祈禱)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통곡하였다. 그 죄가 자기의 죄라고 고백했다.
에스라 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가 절망을 희망(希望)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매달리는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다. 이것이 절망의 현실(現實)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B. 백성들이 통곡함
둘째로, 백성들이 통곡(痛哭)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홀로 성전을 찾아 기도했던 에스라의 통곡하는 기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온 이스라엘이 타락했다.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앞두고 있었다. 누가 그 절망적 상황이 쉽게 변화될 것이라고 믿었겠는가?
예루살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믿음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착해서 살고 있는 안정된 포로생활에서, 고난을 받더라도 예루살렘(Jerusalem)으로 돌아가길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感動)을 받았다.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고레스왕 원년의 선포를 듣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建築)하고자 하였다(스 1:5).
백성들이 모였다.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광고(廣告)와 선전 때문이 아니었다. 통곡하는 한 사람 에스라의 간절한 기도(祈禱)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타락한 현실에 무관심하던 “많은 백성들”이 모였다. 자기들의 죄(罪)를 깨닫고 크게 통곡했다. 에스라의 기도하는 마음이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문제는 백성에게서 시작되었으나, 해결은 에스라의 기도로 시작되었다.
범죄한 자들뿐만 아니라, 또 다른 많은 남녀(男女)가 모였다. 이 일에 연루되지 않는 “어린 아이의 큰 무리”들까지 모였다.
회개(悔改)의 긴 통곡의 시간이 지나고 스가랴라는 자가 입을 열었다.
“…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스 10:2-3)
커다란 영적인 각성(覺性)과 부흥이 일어났다. 그들은 죄를 회개(悔改)하고 다시 “주의 교훈과 명령”을 따르기로 결단하였다.
절망(絶望)은 마귀가 주는 사탕이고, 희망(希望)은 하나님이 주시는 쓴 약이다. 인간이 절망하기 위해서는 노력(努力)할 것이 없지만, 희망을 갖는 것은 꿈의 대가(對價)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만났는가? 인생의 위기를 겪고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음의 감정(感情)의 탁류에 쓸려내려 간다면 불신자와 무엇이 다른가?
한 사람 에스라의 기도는 절망을 희망(希望)으로 바꾸었다. 수많은 백성들의 돌 같은 마음을 녹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삶을 개혁하게 하였다. 기도하는 당신이 바로 그런 위대한 부흥(復興)의 불씨다.
III. 적용과 결론
신앙은 포기하지 않는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문제에 부딪혔으나 해결(解決)해 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당신의 절망(絶望)은 자신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친구, 이웃을 모두 불행(不幸)하게 한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절망(絶望)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고, 좌절(挫折)은 일어나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며 기도하는 자의 간증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좌절한 사람은 절망 속에 주저앉게 하는 사람인가? 낙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때문에 소망을 주는 사람인가?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6 2021. 7. 18 주일 낮 예배
< 절망을 찬송으로 바꾸다 >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57:7)
I. 본문해설
다윗이 블레셋으로 피신했으나 거기서 생명(生命)의 위협을 느껴 도망쳐 나와 유대땅으로 왔다. 그때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삼상 22장).
블레셋 가드왕 앞에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고 도망쳐나왔다(삼상 21:15).
그는 사울의 박해를 피해 아둘람 굴에 은신하였다. 소식을 들은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불쌍한 백성들과 함께 모였다(삼상 22:1-2).
이것은 위기 속에서 부르짖는 탄원시(歎願詩)다. 탄식으로 시작했으나 가슴 벅찬 찬양으로 끝난다. 그가 절망을 찬양으로 바꾼 것은 기도였다.
II. 절망을 찬송으로 바꾸다
다윗이 가장 크게 고통 받던 날에 쓴 이 시(詩)는 고난 받는 신자들에게, 특히 핍박 받는 성도들에게 큰 용기와 감화의 원천이 되었다.
A. 마음이 확정됨
첫째로, 마음이 확정(確定)되었다. 확정되었다는 것은 언젠가 흔들렸다는 뜻이다. 재앙 같은 죽음의 위협과 악인들의 비방으로 고통을 받았다.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 나의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 나는 노래하고 찬송할 것입니다”(KNJ 私譯, 시57:7)
“확정되고”(nakon)는 히브리어로 “세워지다, 견고하다, (도덕적으로) 바르게 정돈되다”라는 동사의 분사형이다. 그런 동작이 현재적으로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똑같은 고백이 두 번 반복된다. 이는 그 사실이 놀랍고 확실함을 보여준다. 그러면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 두 마음을 품지 않음
확정된 마음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두 마음은 서로 다른 사랑 때문에 나뉜 마음이며, 자기 이익(利益)을 잃지 않으려는 집착이다. 구약에서 이 마음은 크게 다음 네 가지를 가리킨다.
a. 전쟁: 싸우러 나가지만 물러서려는 마음(대상 12:33).
b. 섬김: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시 119:113).
c. 진리: 진실을 떠나 거짓을 말하는 마음(시 12:2)
d. 제사: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려는 마음(호 10:2)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신뢰(信賴)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는 확정함이 없다.
“…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두 마음은 질서(秩序)다. 잔잔한 호수에 이는 파문을 생각해보라. 큰 호수에 두 개의 돌이 던져진다면 결국 원을 그리는 두 개의 파문(波紋)은 서로 부딪히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평안(平安)을 얻을 수 없다. 확정된 마음은 하나님을 중심(中心)으로 질서가 잡힌 마음이다.
시련을 당하는 자신의 현실을 하나님(God)께 온전히 맡기고 모든 삶의 상황을 주님의 뜻에 맞춰서 해석하는 마음이다.
2. 주님을 항해 뜻을 정함
구약에서 좋은 의미에서 “(사람이) 뜻을 정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선한 일을 결심(決心)하는 것을 의미한다(에 9:27).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단 1:8)
사람의 마음은 원래 정(定)함이 없다. 변하는 것들에 마음을 두니 어찌 정처(定處)가 있겠는가? 뜻을 정한다는 것은 마음을 말씀에 묶는 것이다.
* 풍랑주의보에 배를 묶음
마음을 누가 확정하는가? 확정하는 주체(主體)는 나인가? 하나님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성경은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말한다.
첫째로, 우리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God)이시라고 말한다(빌 4:7).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둘째로, 또한 우리 마음의 주인이 우리 자신(自身)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마음이 행사된다고 말함으로써 책임을 강조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올바른 선택(選擇)을 할 때 마음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생명(生命)이 솟아나는 샘이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삶을 위한 생명은 고갈된다.
절망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heart)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지식은 마음 공부이고 은혜의 비밀은 마음 살림에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라”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라는 명령이 반복된다(신 4:9).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까지 명령하신다(롬 12:2).
그러나 누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새롭게 하겠는가? 하나님은 새롭게 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을 향해 선(善)한 뜻을 확정하는 것은, 성경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신자의 마땅한 도리(道理)로서 강조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 모든 공경의 의무(義務)를 다할 때 항상 따라서 제시되는 조건이 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신 4:29)
시인은 생애적인 시련(試鍊)을 당했다. 그는 자기가 직면한 현실을 “재앙들”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시 57:1).
비방하는 자들은 시인을 삼키려고 했고, 비난하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의 마음을 찔렀다(시 57:4).
그러나 그는 절망(絶望)의 순간에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했다.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과 온 세상에 가득한 영광(榮光)을 묵상하며 마음을 진리의 말씀에 묶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5)
요동하는 신자의 마음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니 하나님과 세상(世上)으로 찢어져 분리된 마음이다. 확정되지 않은 마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받을 수 없다(약 1:6). 이런 마음으로는 시험을 이길 수 없다.
당신의 마음(heart)은 어디 있는가? 세상 사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마음 간수하는 게 힘들어서 힘든 것이다.
이제 마음을 확정(確定)하라.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룰 수 있었던 게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로 다짐하라. 말씀에 마음을 고정시키라.
B. 하나님을 찬송함
시인은 마음을 확정(確定)했다. 그러자 절망적인 현실에 낙담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송(讚頌)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결단과 소망이었다.
“…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시 57:7)
이는 마음에도 없는 노래를 부르자는 뜻이 아니었다. 더욱이 복을 받는 조건(條件)으로서 찬양을 하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생사(生死) 간에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마음을 확정하였다. 그러자 시인에게 어려운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기(勇氣)가 생겼다. 은혜의 힘이다.
재앙과 같은 상황은 계속되었다. 악한 원수(怨讐)들에게 에워싸였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를 얻었다. 낙심하는 대신 노래 부를 수 있었다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때문에 존귀하게 된 자기의 영혼(靈魂)과 모든 악기에게 명령하였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찌하여 재앙처럼 느껴지던 절망적(絶望的)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었을까?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시인이 부르짖어 기도(祈禱)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련 중에서 억제할 수 없는 정(情)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모든 일을 선하게 이루실 줄 믿었다.
다윗은 그 믿음(faith)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다. 자비롭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였다.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오직 “그의 인자와 진리로” 자기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솟았다. 현실이 보여주는 비관을 딛고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전히 광야의 도망자 신세였다. 그러나 마음에 평화(平和)가 찾아왔다. 그가 부르짖어 주님을 찾았기 때문이다.
III. 적용과 결론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폭풍(暴風)을 만난 것 같은 인생의 바다에서 어디에 닻을 내리려고 하는가?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 6:19)
이 소망은 우리가 예수의 보혈(寶血)을 힘입어 휘장을 지나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소망이다.
절망의 벼랑 앞에 서있는가? 고통(苦痛)의 밤바다를 지나는가? 먼저 마음을 확정하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간절히 기도하라.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7 2021. 7. 25 주일 낮 예배
< 마음을 토하는 기도 >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
I. 본문해설
고난 받던 다윗의 찬양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依支)함으로써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노래한다.
성도는 요행과 불행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아야 한다. 끊임없이 인생의 덧없음을 묵상하고 거기서 의미 있게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시인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며 살았다.
II. 마음을 토하는 기도
시인은 악인(惡人)들에게 에워싸인 채 고난을 겪었다. 그는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오직 그분만이 “반석이시요 구원이시요 요새이심”을 고백한다(시 62:6).
고난 받을 때 고백(告白)의 힘을 생각하라.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고백은 마음에 놀라운 힘을 준다. 요동치는 마음을 잠잠하게 한다.
A. 주님을 의지하라
시인은 고난(苦難) 속에서 믿음으로 분투하면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依支)하게 되었다. 삶의 지혜와 사랑이 더욱 깊어졌다.
자신이 깨닫게 된 지혜를 믿음이 흔들리는 백성들에게 교훈으로 전했다.
1. “백성들아”
“암( )”이라는 이 단어는 “(왕권이나 종교적 의식과 관련해서) 사람을 가리키거나, 나라와 대조되는 인구(人口)로서의 사람을 가리킨다”
(Koehler & Batumgartel, 838). 국가가 아닌 족속(族屬)의 개념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언약백성(言約百姓)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언약에 참여한 우리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임을 잊지 말라.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자비, 긍휼을 베푸신다.
2. “시시로”
이것을( )을 히브리어 본문에서 직역하면 “모든 때 안에서, 모든 시각에”이다. 곧 “언제나, 항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때뿐 아니라, 모르고 있는 때도 우리를 지켜주신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지켜주신다(시 121:4). 배은망덕한 우리가 잊고 있을 뿐이다.
주님은 우리가 생사(生死) 간에 의지해야 할 유일한 피난처이시며 힘이시다. 신앙은 매순간 이 사실을 마음의 정(情)으로 느끼며 사는 것이다.
일생에 한번쯤 하나님을 의지(依支)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언제나 의지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복(福) 받으면 부족한 게 없어서, 고난(苦難) 받으면 부족한 게 많아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시시로 자신과 세상을 의지한다.
주님을 의존하는 마음은 단지 이성이 아니라 심정(心情)에 달렸다. 매순간 사람보다 주님과의 생생한 교제(交際) 속에서 살아야 한다.
3. “그를 의지하라”
문자적으로 “그분 속으로 의지하( )”다. 하나님을 의지하되 겉으로만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 속(into God)으로 의지하라.
성경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과 대적하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묘사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ἔχθρα εἰς θεόν)는 “하나님 속으로 적의가 되나니”다. 적의(敵意)는 반감과 대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지하는 것도 하나님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분 속으로 깊숙이 남김없이 기대며 도움을 기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과 겉이 어디에 있겠는가? 따라서 “하나님 속으로”라는 표현은 그분을 깊숙이 의지하는 우리의 마음을 가리킨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인데 누가 감히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는가? 문제는 정도(程度)다. 얼마나 진실로 의지하느냐다.
마음에 접어 감춘 부분은 없는가? 저 깊은 마음의 심연까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그 깊이가 기도의 울림이다.
B. 네 마음을 토하라
시인은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진 상황에서 구원(救援) 받았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가르쳐준다.
1. “마음을”
히브리어 원문에는 “레바브켐( )”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너희들의 한 마음”이다. 성도들은 서로 달라도 마음은 모두 하나임을 보여준다.
구약 성경에서 “마음”(heart)은 “(사람의) 내적 자아, 경향성, 성향, 이성, 양심” 등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 마음은 생각과 행동을 주관하는 정서(情緖)의 중심 자리를 가리킨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도 하고 대적하기도 한다. 신앙(信仰)의 자리는 어디인가? 죄(罪)의 자리는 어디인가? 사랑과 반역이 어디서 비롯되나? 모두 우리의 마음이다.
신자의 불행(不幸)은 마음을 간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자기 마음을 아는 것이다.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은 다시는 마음을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천사와 야수를 동시에 키우고 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것은 마음을 다스려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약(誓約)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신다. 마음 없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는 빈말(虛言)이 없다.
말씀에 담긴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聖靈)이시다.
마음을 말씀을 묶어두지 못한 채 이것저것을 소유(所有)함으로 행복해지려는 것은 마치 가라앉고 있는 배에 화물을 싣는 것과 같다.
그 배로 어디를 가려는가? 마음을 바르게 하라. 욕망(慾望)에 널뛰는 마음을 잠잠하게 하라. 정신(情神)을 하나님께 집중하라.
2. “그의 앞에”
이는 문자적으로 “그분의 얼굴 앞에서”( )다. 하나님께 앞뒤가 어디 있겠으며 멀고 가까움이 어디 있겠는가?
신자(信者)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다.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함께 있을 때나 동일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대낮에 걸어도 햇빛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홀로 누워도 이불에 숨길 것이 없다. 하나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다.
성경이 거짓과 위선(僞善)을 미워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악덕들과 친숙해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
능력은 결코 진실(眞實)함을 능가하지 못한다. 잠시 “승리한 악보다는 패배한 선이 더 위대하다”(M. Luther King).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이 하나님 뒤에서 웃는 사람보다 위대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추신 것이 있으시지만, 우리들 마음 안에 있는 것들 중 그분께 드러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내 아들 솔로몬아 …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하나님 뒤에서 살던 삶을 청산하자. 그분 앞에 오롯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현실이라도 용기 있게 직면하자. 은혜를 구하며 다시 시작하자.
3. “토하라”
이 단어는 “너희는 쏟으라”( )이다. 이는 “(물이나 피 같은 것을) 쏟아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크”의 명령형이다.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신 12:16)
돌 같은 마음은 쏟아지지 않는다. 바위 같이 굳은 마음이 어찌 쏟아지겠는가? 그것이 움직이기나 하겠는가?(겔 11:19)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물 같이 녹게 되는 두 가지 원인을 제시한다.
하나는, 공포(恐怖)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기적의 소문을 들은 가나안 원주민의 마음을 보라. 마음이 물 같이 녹았다.
“…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 정신을 잃었더라”(수 5:1)
커다란 환란을 당하던 시인의 마음도 또한 두려움으로 물처럼 녹았다.
“…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 내 마음은 … 내 속에서 녹았으며 …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 22:13-15)
그러나 그렇게 녹은 마음은 결코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비록 두려움으로 녹았지만 주님 앞에선 돌 같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은혜(恩惠)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으로 녹은 마음이다. 기도는 그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것이다.
죄에 대한 회개이며 옛 자아(自我)의 깨어짐이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만 차지하시게 하는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은혜로 물 같이 녹은 마음을 받으신다. 이런 마음은 상(傷)한 마음을 지나 통회(痛悔)하는 마음이다.
왜 기도하지 않는가? 기도의 기쁨이 왜 사라졌는가? 당신의 마음을 물 같이 쏟으며 기도의 자리를 눈물로 적신 적이 언제인가?
신자의 승리하는 생활은 기도 생활의 희열(喜悅)에서 온다. 거기서 엄혹한 현실(現實)을 이길 힘이 솟아난다. 그분께 마음을 토하라.
소중한 마음을 세상(世上)에 흔들리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라.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환희(歡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8 2021. 8. 1 주일 낮 예배
< 주님께 다 말씀드리다 >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I. 본문해설
역사적으로 아름다운 찬송가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때는 19세기였다.
18세기 말 나폴레옹 전쟁으로 시작해서 미국과 영국의 반목, 크림 전쟁,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이 유럽과 미국을 휩쓸었다.
이 시기에 더 많은 찬송가(讚頌歌)들이 작곡되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울려 퍼졌다. 고난 받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이겼다.
이 시는 널리 알려진 다윗의 탄원시다. 시련을 당할 때 믿음으로 하나님 품으로 파고들었던 은혜(恩惠)의 경험을 통해 교훈을 준다.
II. 주님께 다 말씀드리다
이 시는 아마도 사울로부터 정치적으로 박해 받던 때, 혹은 왕이 된 후 압살롬의 반역으로 망명(亡命)을 떠나던 시기에 썼을 것이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부른다. “여호와여!( )”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본명이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이후 계시된 존함이다(출 6:3).
시인은 시련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關係)를 생각했다.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慈悲) 안에 있는 사람임을 기억한 것이다.
A. 여호와께 드린 기도
1. “아침에”
“아침에( )” 그는 여호와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시간을 특정한다.
언제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침은 특별한 희망(希望)과 기적의 시간이었다.
애굽을 탈출할 때 홍해가 갈라진 것도(출 14:21), 가나안 정복에서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도(수 6:15), 기적의 양식인 만나가 내린 것도(출 16:13),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도(눅 24:22) 모두 아침이었다.
그들은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슬픔에 잠들었지라도 아침에는 은총(恩寵)이 깃든다고 믿었다. 여호와의 신실(信實)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2. “나의 소리”
“나의 소리( )”는 발화(發話)하는 음성을 가리킨다. 이는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정(情)에서 터져 나오는 간절한 부르짖음이다(시 5:2).
이것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다. 특별한 기도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열렬한 탄식(歎息)의 부르짖음이다.
특별한 열심을 차마 억제할 수 없어서 간절히 부르짖는 특별한 기도다.
평범한 시기에도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한 위기나 어려움의 시기에는 그 이상의 기도(祈禱)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특별한 상황을 주시는 것은 특별히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마음은 기도가 솟아나는 샘이다. 은혜는 사랑의 정서(情緖)를 불러일으키고 그 정서는 수많은 언어를 솟아나게 한다.
시련 속에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때 기도는 말이 되어 터져 나온다.
시인은 악인과 미워하는 자들에게 고통(苦痛)을 받았다. 그는 한없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했다.
시인(詩人)은, 비록 어제 저녁에는 커다란 슬픔 속에 잠들었을지라도 아침에는 기도(祈禱)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작정한다.
신앙은 세상과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운명처럼 지속되는 절망(絶望)의 밤은 없다. 인간이 스스로 절망하기로 작정(作定)하지 않는 한 희망은 끝난 것이 아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희망의 아침을 주신다.
우리의 절망은 우리가 처한 환경(環境)이 아니라 희망을 버리는 우리의 마음(heart)에서 온다.
더욱이 우리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자녀들이 아닌가?(롬 8:32)
저녁에는 슬퍼하다가 밤에는 절망(絶望)에 빠졌을지라도 오늘은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라. 자비로우신 하나님에게 희망(希望)을 가지라.
3. “들으시리니”
“당신은 들으실 것이다”( ).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들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미(意味)를 파악하고 그대로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동작이다.
“너희는 들을지어다”(시 50:7, 사 7:13). 이것은 율법(律法) 선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다.
또한, 이는 마치 사랑하는 엄마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자식의 소리를 귀를 기울여 듣는 것과 같은 애정(愛情)어린 동작이다.
인간(人間)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은 최고의 경외심(敬畏心)의 표현이다.
또한, 하나님(God)께서 기도하는 인간(人間)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최고의 애정(愛情)의 표현이다.
시련 속에서 하나의 믿음(faith)이 다윗을 살렸다. 자기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리라”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을 가지라.
B. 주님께 다 털어놓았다
1. “내가”
개인기도의 중요성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기도와 관련해서 말할 때, 시종일관 1인칭을 사용한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시 5:1).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시 5:2).
성경은 개인(個人)기도의 중요성을 공동체(共同體)의 기도의 중요성과 함께 나란히 강조한다.
개인기도라는 벽돌이 하나씩 쌓아올려지지 않고서는 결코 공동체적 기도라는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
개인기도가 중요하다. 기도하지 않는 개인은 아무리 많이 모일지라도 기도하는 교회(敎會)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개인기도 생활은 어떠한가?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 하고 있지 않은가? 가치 없는 일에 마음 빼앗기고 정신은 분산되지 않았는가?
기도는 왕이신 하나님의 어명(御命)이다.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그만 두어도 되는 일이 아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라는 표현이고 주님을 의지한다는 고백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지만, 사실상 마음은 아버지집에서 가출(家出)했다는 뜻이며,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경을 탓하지 말라. 사람 원망(怨望)하지 말라. 조용히 무릎 꿇으라.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신다. 기도의 의무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2. “기도하고”
“나는 당신께 모두 털어놓을 것이다”( ). 이 동사는 원래 “배열하다, (밥상을) 차리다, 항오를 벌이다”라는 의미다. 마치 아이가 엄마 품에서 고자질하듯이 심정을 터놓는 기도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에 쌓인 사연(事緣)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주님께 쏟아놓고자 기도할 뜻을 세웠다.
억울하고 괴로울 때 마음은 많은 사연을 갖게 된다. 이때 신자의 특권(特權)이 무엇인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엄습할 때 주님 앞에 상세히 호소(呼訴)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사람의 위로(慰勞)를 구하지 말라. 대신 그분의 귀에 대고 모든 사연을 기도로 고하라. 사람들은 우리의 많은 말에 싫증을 내지만, 주님은 불쌍히 여겨 모두 들어주신다.
하나님이 언제 기도가 너무 길다고 지겨워하신 적이 있는가? 같은 사연을 수없이 구해도 언제나 처음 듣는 얘기인 것처럼 귀 기울여 주신다.
마음이 곤고(困苦)한 사람일수록 사연이 많다. 정신에서 소화(消化)되지 않은 사연은 마음을 미끄러지게 하거나 병들게 한다.
* 마음의 사연을 쏟아놓을 상대가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 사연을 다 털어놓는 사람들은 응답(應答)을 받는다.
근심으로 굳은 마음이 녹아지기까지 은혜(恩惠)를 주신다.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라. 오직 주님께 당신의 사연을 낱낱이 아뢰라. 이것이 기도다.
3. “바라리이다”
“그리고 나는 밖을 쳐다볼 것이다”( ). 희망의 중요성이다.
현실에서 사방(四方)이 막혔는가? 현실의 창(窓)밖을 바라보라는 뜻이다. 믿음의 눈을 가지라.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라.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을 하나님 때문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당신의 불순종(不順從)과 죄로 말미암아 거기까지 간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사 53:6)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그분의 자녀(子女)로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그분께만 기대어 희망을 갖는다는 뜻이다.
당신의 불순종 때문에 인생(人生)의 벼랑 끝에 섰을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낭떠러지로 밀어버리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거기서 우리에게 구원(救援)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자, 너의 마지막 희망이다. 내 손을 잡거라!”
III. 적용과 결론
절망하는 당신의 희망은 무엇인가? 힘겹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 어디서 밝은 소망(所望)을 찾으려는가?
흔들리는 가시에 찔린 백합화는 더 많은 향기(香氣)를 바람에 날려 보낸다.
밤에는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잠들었을지라도 아침에는 희망(希望)의 햇살에 눈 뜨고 싶지 않은가? 지금 고요히 주님께 무릎을 꿇자. 기도하자.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9 2021. 8. 8 주일 낮 예배
< 외면할 수 없는 기도 >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I. 본문해설
다윗이 지은 참회시(懺悔詩)다. 언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밧세바와의 범죄를 기억하며 회개하는 시(詩)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죄를 지은 자의 기도는 거절(拒絶)된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 마음을 고치시기 위해 기도에 침묵하신다. 그러나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이 외면할 수 없는 기도가 있다.
II. 외면할 수 없는 기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王)이며 장군이었다. 거룩한 선지자이며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보았던 대철학자의 전범(典範)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의 큰 죄(罪)를 지었다.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강행한 사건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姦淫) 사건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人口調査)를 실시하였다. 행정적으로 문제가 없었으나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징벌로 7만 명의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다(삼하 24:15).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으로 그의 영혼(靈魂)은 피폐해졌다. 더욱이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아까지 교묘한 방법으로 살해하였다(삼하 11:15).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성경에서 쓰임 받은 인물(人物) 중 이만큼 큰 죄를 지은 자가 어디 있는가?
다윗만큼 윤리적(倫理的)으로 산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 그만 못한 사람보다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 천지에 많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는 하나님께 그토록 독점적인 사랑을 받았을까?
그에게는 특별한 믿음(faith)이 있었다. 그것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하나님 품을 파고든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다.
A. 부르짖을 때
“그리고 내가 울부짖을 때”( ). 이는 “내가 소리내어…”라는 말보다 훨씬 강(强)한 뜻이다. 위기 상황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부르짖음, 혹은 울부짖음의 동작이다. 얼마나 비통(悲痛)했는지를 보여준다.
시인은 극심한 죄책감(罪責感)에 시달렸다.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는 전쟁터에서 쏟아지는 불화살 같았다. 악인(惡人)은 처처에서 날뛰며 비난했다.
시인은 극단적인 고난 앞에서 인생의 허무(虛無)함을 깊이 자각했다. 언제나 의지(依支)할 분은 하나님뿐임을 믿었다. 오직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단지 악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인생의 허무(虛無)를 자각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애착의 끈을 놓았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 39:5)
그가 고뇌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關係)였다. 자신의 죄 때문에 징벌을 받고 있으며 쇠망하게 되었다(시 39:8,10).
정말 두려워했던 것이 있었다. 하나님과의 평화(平和)를 회복하지 못한 채 죽는 것이었다. 생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갈망(渴望)이었다.
그래서 그는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다. 울부짖음은 비명소리가 되었고, 그 비명소리는 기도(祈禱)의 화살이 되어 시인의 마음을 꿰뚫고 높은 하늘 위의 보좌로 솟아올랐다.
이것은 단지 악인을 물리치고 자기를 살려달라는 생존의 기도가 아니었다.
시인은 재물에도 욕심(慾心)이 없었다(시 39:7상). 그는 세상에 소망(所望)을 가지지 않았다. 오직 주님만 바라고 있었다(시 39:7하).
*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그대에게
부르짖음을 넘어선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것은 징벌(懲罰)을 피하자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었다.
하나님 없는 기도 응답이 무슨 소용(所用)이 있겠는가? 시인의 영혼이 주님께 버림받은 채로 남겨져 있다고 치자. 자기를 미워하던 악인들이 여기저기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과연 그에게 위로가 되겠는가?
그는 징벌을 받으면서 인생과 그 영화(榮華)가 헛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시 39:12). 시인은 비명(悲鳴)을 지르듯이 자기의 하나님을 찾았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시 40:12)
당신의 영혼은 어떠한가? 안전한 상태인가? 부르짖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나님 앞에 신음하라. 하나님께 비명 지르라. 하나님께 울부짖으라.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대의 영혼(靈魂)을 살려주실 것이다.
B. 눈물 흘릴 때
“나의 눈물들에 귀를 막지 마소서”
( ). 히브리어 단어 “딤아”는 “눈물, 울음, 흐느낌”이라는 뜻이다.
비명(悲鳴)을 지르는 듯한 울부짖음과 소리 없이 뺨에 흘러내리는 두 줄기 눈물이 이미지(image)의 대조를 이룬다.
1. 고통의 승화
그것은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변명하는 대신 하나님의 주권(主權)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8-9)
이는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昇化)시킨 것이었다. 다윗의 믿음이 준 해석의 능력이었다. 악인의 비난은 거칠었고 악의적(惡意的)이었다.
그는 고통 받는 현실(現實)을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거기서 자기를 고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은혜를 구하게 하심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혀로 범죄(犯罪)하지 아니하리라”고 다짐했다. 악인이 자기 앞에 있을 때 자신의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결심했다(시 39:1).
극심한 고통을 통해 참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2. 평화의 갈망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平和)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 갈망 때문에 시인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는 범죄(犯罪)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 시의 마지막에서 한 가지를 구하였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시 39:13 상).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를 떨어져서 보시옵소서”
( , Look away from me)라고 되어 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存在)인지를 아는 것은 하나님 사랑할 때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신이 사랑 받는 존재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시인은 악인에게 고통(苦痛)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평화 때문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은혜 충만(充滿)했을 때 악인을 보며 흘렸던 눈물과 얼마나 다른가?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
비록 범죄했으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망했다. 자기의 고통을 위한 눈물을 넘어서서 신앙에서 멀어진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경건(敬虔)을 회복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영혼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과의 평화(平和)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들이 고난 속에서 눈물 흘릴 때 외면(外面)하지 않으신다. 모른 체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고 평안을 누리라. 그리하면 복을 받는다(욥 22:21).
C. 나그네일 때
시인은 고백했다.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시 39:12)
여기서 “나그네”( )라고 번역된 단어는 정확히 “손님, 객식구”다. 그 땅에서 시민 혹은 국민으로서의 권리(權利)를 가지지 못한 자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으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외국인(外國人)의 처지를 생각해보라.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여년을 정착해서 살았으나, 애굽에서 어떤 대우(待遇)를 받았는가?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요단 건너편 타국(他國)으로 망명길을 떠났었다. 그때 이런 처지를 경험했으니 가슴에 와닿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였다.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여 버렸으나, 하나님은 함께 해주셨다. 시인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의(義) 때문이다. 죄를 지었어도 그분의 품을 파고드는 믿음(faith)을 보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셔도 악인이 해치는 것은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시련과 고통이 클수록 불타오르는 믿음(faith)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라.
III. 적용과 결론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두 가지 사실(事實)을 붙들고 놓지 말라. 하나님은 선(善)하시기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말씀(word)으로 우리를 건져주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사모하라!
현실에 눈물 흘리지 말라. 세상(世上)에서 나그네로 취급받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 범죄했을지라도 회개하면 된다. 하나님의 품에서 울라.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10 2021. 8. 15 주일 낮 예배
< 닫혔던 기도의 문을 열라 >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 32:3-5)
I. 본문해설
“마스길”( )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이는 “지혜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시를 많이 읽고 묵상하면 지혜(知慧)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스길은 탄원이나 슬픔을 담고 있지만, 지나친 훈계(訓戒)보다는 경험에서 내면화된 짧고 명확한 말씀의 교훈(敎訓)들을 담고 있다.
II. 닫혔던 기도의 문을 열라
시인은 깊은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의 경험에서 이것을 쓰고 있다. 당시 그의 영혼의 침체가 무슨 일과 관련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허물과 죄(罪) 때문에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냈다. 그때 자기의 내면(內面)을 보게 되었다. 마음은 침체됐고 양심은 정죄(定罪)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할 수 없었다. 영혼(靈魂)의 어두운 밤이 계속 되었다.
A. 기도하지 않을 때
“내가 입을 열지 아니 할 때에‥” 이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내가 침묵하고 있을 때에는…”( )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의 침묵(沈默)이 아니다. 범죄한 다윗은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祈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언어(言語)의 침묵이 아니라 마음(heart)의 침묵이었다. 죄를 지었으나 회개(悔改)할 뜻은 없었기에 그의 마음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는 기도하지 않고 있었다.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인다.
* 기억하는 큰 죄와 기억나지 않는 작은 죄들
윤리적(倫理的)으로 다윗보다 더 비난 받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러나 다윗만큼 열렬하게 기도한 자는 또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는 범죄(犯罪)했으나 하나님의 품을 파고 들었다. 그러나 다윗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기도하지 않던 침묵(沈默)의 시간이 있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도하지 않을 때 그의 내면(內面)은 어떠했을까?
1. 신음하는 영혼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 이 부분을 히브리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침묵하고 있을 때에는 온종일 신음소리 때문에 내 뼈들이 닳아 해어지나이다”(시 32:3, KNJ 私譯).
여기서 “신음한다”는 것은 내적인 고통(苦痛)을 견디다 못해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뜻한다.
송사하는 양심(良心) 때문에 받던 내적 고통이 심히 컸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변명할 수 없게 된 죄에 대한 자각(自覺)에서 온 것이었다. 곧 하나님의 진노(震怒)에 대한 경험이었다.
여기서 “뼈들( )”은 구약에서 신체의 뼈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마음 깊은 속”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골수”(骨髓)라고 번역되었다(애 1:13). 고통 속에서 “내 뼈가 숯 같이 탔다”고도 하였다(시 102:3).
또한 아담은 하와를 향해 최고의 사랑을 고백(告白)할 때 “뼈 중의 뼈요”라는 표현(表現)을 “살 중의 살이라”는 것보다 먼저 말했다.
그가 말한 “뼈”는 “심령 깊은 곳”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었다(창 2:23).
시인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영혼은 이토록 큰 고통(苦痛)을 느끼고 있었을까? 이렇게 회개(悔改)하지 않는 우리가 더 나쁜 사람이다.
시인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을까 생각하며 의심(疑心)의 눈길로 보지 말라. 기도를 막는 것은 꼭 큰 죄 때문만이 아니다(벧전 3:7).
크게 범죄한 시인의 마음은 양심의 창끝으로 찔림 받고 있었으나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심장(心臟)은 돌덩어리 같지 않은가?
파멸 당할지언정, 찔림은 당하지 않기로 운명 지어진 돌 같은 심장을 가진 우리를 위해 누가 먼저 울어줄까? 죄(罪) 때문에 신음하는 자들이 되자.
열렬히 기도하면서 사는 것은 기적(奇蹟)과 같은 은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무모하지 않은가?
이어서 시인(詩人)은 왜 자신의 뼈들이 너덜너덜하도록 해어지기까지 신음(呻吟) 소리를 토하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2. 주의 손이 누름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 32:4). 이 구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밤이 낮이나 당신의 한 손이 내 위에 (심히) 무거우므로 나의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개울) 같이 되었나이다”(시 32:4, KNJ 私譯)
회개하지 않는 신자의 마음 안에는 양심(良心)의 송사와 율법(律法)의 정죄가 있다.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영혼은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시인이 범죄(犯罪)하고 겪었던 내적 고통은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시 22:14)
범죄하고 괴로워하는 영혼(靈魂)으로 인해 육체의 모든 힘이 사라졌다.
뼈들은 너덜너덜해지기까지 해어졌으며, 그는 숨조차 쉴 수 없게 되었다.
주의 손이 누르셨기 때문이다. 살인자(殺人者)는 숨이 끊어져 죽으라고 누르고 주님은 회개하여 살라고 누르신다. 사랑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아아, 그런 돌멩이 같은 마음을 가진 교인(敎人)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이 회개하는 통곡하는 소리가 예배당에 가득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온 교회(敎會)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진실한 눈물로 회개(悔改)하던 때가 언제인가? 어떻게 하면 그런 복된 날이 다시 올 것인가?
죄를 지은 자에게 마음의 고통(苦痛)은 회개의 대문(大門)에 이르는 앞마당이다. 고통은 오직 한 가지, 곧 회개를 요구한다.
B. 허물을 자복할 때
불쌍한 시인(詩人)에게 그 끔찍한 신음의 고통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自服)하는 것이었다.
1. 내 죄를 고백함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시 32:5상)
“내 허물”이라고 번역된 단어 “페샤아이”( )는 “나의 죄과들”이다. 이는 넓은 의미의 모든 “죄과, 과오, 위반, 죄악들”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거역하고 따르지 않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모든 반역(反逆)이다. 그 잘못의 본질은 악한 마음에 있다.
시인은 이것들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두었다. 양심의 송사에 귀 막았고 율법의 정죄를 외면(外面)했다. 그러니 어찌 기도할 수 있었겠는가?
그때 돌아온 것은 영혼이 눌려 신음하고 피가 마르는 고통뿐이었다. 그는 자복하였다. 자기 죄악(罪惡)을 하나님께 고백했다.
“내가 말했습니다. 나의 죄를 당신께 알게 해드렸고 나의 불의를 숨기지 아니하였나이다.”(시 32:5상, KNJ 私譯)
그는 말했고 자기의 죄를 주님께 알게 해드렸다(시 32:5상).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찌 그것을 모르고 계셨겠는가?
따라서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의식(意識)의 표면에 떠오르게 하여 양심이 하나님의 진노와 고통을 느끼게 한다. 자기를 처벌(處罰)한다.
* 의식의 박막과 슬픔의 정동(情動)
고백에 있어 빠져서 안 되는 요소가 있다. ① 개별적 범죄의 시인, ② 총체적 죄성의 인식, ③ 자기 책임의 통감, ④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망함.
죄에 대한 고백(告白)은 기도의 문을 연다. 먼저 감추인 죄를 자복(自服)하라. 그것들을 주님께 고백하라. 용서(容恕)를 구하라.
먼저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祈禱)하라. 기도의 문이 열릴 것이다.
2. 죄악을 사하심
시인의 참된 죄의 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應答)을 보여 준다.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하)
“내가 나의 죄과들에 대해 여호와께 고백하였나이다. 그랬더니 당신이 나의 죄에 대한 책벌을 옮기셨나이다”(시 32:5하, KNJ 私譯)
이는 하나님께서 시인의 책임인 죄에 대한 책벌(責罰)을 번쩍 들어서 다른 데로 이동(移動)시키신 것을 보여준다. 사죄의 은총(恩寵)이다.
* 제물의 희생과 죄책의 이동
그래서 시인은 참으로 행복(幸福)한 사람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라고 하였다(시 32:1).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자기가 죄(罪)를 지었던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것은 죄의 상처보다 더 큰 은혜(恩惠)의 기억으로 남는다.
이로써 신자(信者)는 범죄했을지라도 용서 받고 은혜로 산다. 이것이 불완전한 신자가 믿음으로 사는 길이다.
III. 적용과 결론
당신 마음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을 뵙지 못해서 울부짖는 영혼(靈魂)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죄로 신음하며 고통 받고 있는가? 기도(祈禱)의 문이 닫혀있어 곤고한가?
당신이 그렇게 외롭고 힘든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대가 기도(祈禱)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가장 멀리 계시다고 믿는 그때에 가장 가까이 와 계시다.
“당신은 그들의 마음 안에, 여기 당신께 죄를 고백하는 자들과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들과 당신의 고단한 발자취를 따라 당신의 품 안에서 얼굴을 파묻고 울부짖는 자들의 마음속에 계시나이다”(…ecce ibi es in corde eorum, in corde confitentium tibi et proicientium se in te et plorantium in sinu tuo post uias suas difficiles…), Aurelius Augustinus, Confessiones, 5.2.2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悔改)할 때에 우리를 만나주신다. 신음하는 그 사람 마음 안에 이미 와 계시다. 다시 기도의 문을 열어 주신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11 2021. 8. 22 주일 낮 예배
< 마음이 약해질 때 >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셀라)”(시 61:2-4)
I. 본문해설
다윗의 탄원시다. 이 시는 “여두둔의 법칙”을 따라 부르도록 지시되어 있다. 그것은 당시 널리 알려진 그 음조(音調)에 맞춰 부르라는 뜻이다.
이 시(詩)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경건한 의존(依存)과 왕권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faith)을 보여준다.
II. 마음이 약해질 때
사람의 육체가 특별히 연약(軟弱)해지는 때가 있듯이, 인간의 마음(heart)도 그런 때가 있다. 이때에 시험(試驗)에 들어 영적인 침체에 빠지기 쉽다.
더 큰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한다. 위기(危機)를 극복하는 지혜(知慧)가 필요하다. 시인은 마음이 약해질 때에 무엇을 했을까?
A. 고백
첫째로, 고백(告白)이다. 여기서 고백은 “마음에 있는 생각들을 하나님을 높이고자 진심으로 진술하는 것”이다.
시련(試鍊) 속에서 하나님께 고백을 드렸다. 그것은 마음의 질서(秩序)를 되찾게 만들어주고 흐트러진 생각을 조율(調律)해 주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 61:3)
1. 피난처이신 하나님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시 61:3상). 여기서 “피난처”라고 번역된 단어는 “마흐세”( )다. 격렬한 전투(戰鬪)에서 몸을 엄폐할 수 있는 장소(場所) 뿐 아니라 “은신처, 도피처, 숨을 곳”등을 두루 가리킨다.
이 고백의 핵심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保護)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원수(怨讎)들이 시인을 발견할 수 없도록 숨겨주실 것이며, 또 발견해도 해(害)를 입지 않게끔 지켜주실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告白)은 먼저 자신에게 진술(陳述)하는 것이다. 말하는 자도 듣는 이도 자신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讚頌)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인생(人生)이 직조물(織造物)이라면 고백(告白)과 찬양(讚揚)은 씨줄과 날줄이다.
인간(人間)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그들도 마음이 연약(軟弱)해질 때가 있다.
그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性品)들을 묵상하는 것이다. 현실의 상황을 그것들과 연관(聯關)지어 깊이 생각하고, 입술로 고백(告白)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 중 그분이 모르시는 것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그러한 고백(告白)을 기뻐하신다.
고백의 내용을 찬양(讚揚)으로 드림으로써 마음은 새로워지고, 파리해졌던 영혼(靈魂)은 새 힘을 얻는다.
시인은 극심한 고난(苦難)의 때에,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상(默想)한다. 떠도는 생각들을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지어 정돈한다.
그렇게 할 때, 변화가 일어났다. 상황(狀況)에 요동치던 시인의 마음은 가라앉았고 혼란스럽던 정신(情神)은 명료해진 것이다.
그의 고백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避難處)이십니다.”
마음이 약해져 있는가? 그런 상태(狀態)에 머물러 있지 말라. 당신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다. 당신도 고백(告白)하라!
2. 성탑이신 하나님
이어서 고백한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시니이다”(시 61:3하).
여기서 “망대”( )는 사전적으로 “탑, 망루, 산성, 성곽, (무엇을 올려놓는) 대” 같은 것을 두루 의미했다.
이 단어는 긴 성벽 중에서 우뚝 솟아올라 있는 성탑(城塔)을 가리킨다.
가장 높은 곳이니 적의 접근을 관측(觀測)하기에도 매우 좋은 곳이었다.
또한 전투적 측면에서는, 많은 적들을 공격(攻擊)하기에 유리하면서도, 적들이 해치기는 어려운 장소(場所)였다.
시인은 고난의 때에 수없이 자기를 지켜주신 하나님을 생각했다. 그분의 품은 성벽(城壁)으로 둘러싸인 곳의 가장 높은 성탑과 같았다.
거기서 주님의 보호(保護)를 받는 것과 같은 안전(安全)을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현실(現實)로만 판단하지 말라. 당신이 어떠한 처지(處地)에 있든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 그리고 고백하라.
“당신은 나를 원수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성탑(城塔)이십니다”
B. 기도
둘째로, 기도(祈禱)다. 시인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간절히 기도했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2)
계속되는 시련에 그의 마음은 약(弱)해져 있었다. “약해질 때에”( ),이는 가뭄에 식물이 시들 듯 영혼의 생기(生氣)와 활력(活力)이 현저히 사라진 상태의 시기(時期)를 가리킨다.
신자는 영적 생명(spiritual life)을 받은 자이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生命)이니 곧 성령의 교통(交通)이다. 이것을 신자에게 영원히 주셨다.
이 생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쇠약(衰弱)해질 수 있다. 영적으로, 은혜(恩惠) 아래 있으면 강건하고 죄(罪)에 가까우면 쇠약해진다.
시인은 마음이 가뭄에 시든 풀잎처럼 연약(軟弱)해져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기도(祈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은 믿음(faith)이었다.
1. 땅끝에서
먼저 그는 자신이 기도(祈禱)해야 하는 처지에 대해 말한다.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시 61:2중)
여기서 “땅 끝에서부터”( )라는 표현은, 실제의 장소(場所)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絶望)의 상태를 은유하는 것이다(시 48:10).
마음이 약해질 때, 신자는 삶의 모든 상황을 낙심하는 쪽으로 해석(解釋)한다. 현실(現實)은 하나님의 모든 도움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땅 끝”(the end of the earth)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거기는 바로 희망(希望)을 포기한 지점이다.
세상 사람들이 낙심(落心)하고 좌절하는 곳이 신자(信者)에게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지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다.
당신의 “땅 끝”은 어디인가? 지금 있는 곳이 거기인가? 거기서 주저앉지 말라. 희망(希望)을 가지라. 시인처럼 기도(祈禱)하라!
2. 인도하소서
“땅 끝”과 같은 절망적 상황(狀況)에서 하나님께 호소한다.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2하).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오르기에는) 높은 바위 위로 나를 이끌어주소서”(시 61:2하, KNJ 私譯)
구약 성경에서 “바위”( )는 문자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구원”(救援)을 은유하였다.
그래서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반석”(盤石)이라고도 많이 번역되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시 18:2)
심지어 신약 성경에서는 구원(救援) 역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예표(豫表)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모세에게 속하여 …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2-4)
고난(苦難) 당하는 시인에게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God)만이 자기를 보호(保護)해 줄 바위며 반석이셨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우리에게도 하나님만이 피난처시며 성탑(城塔)이며 바위시다. 그래서 오직 그분께만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다(시 62:8).
마음이 약(弱)해질 때 주저앉지 말라. 모든 성도(聖徒)들에게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 하나님의 인도(引導)를 구하라! 기도하라!
C. 결단
셋째로, 결단(決斷)이다. 또한 시인은 자기의 미래에 대해 결단한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시 61:4)
그는 세상(世上)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 이제 시험(試驗)과 고난을 통해 자기가 있어야 할 곳과 피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
시인은 마음의 연약(軟弱)함을 극복하고 “영원히 주의 장막(帳幕)에 머물”기를 원했다.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길 원했다.
여기서 “주의 장막”은 당시의 성막(聖幕)을 가리킨다. 거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이었다. 죄와 용서(容恕)와 교제(交際)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길 원했다. 여기서 “날개 아래”는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가리킨다.
믿음으로 살던 시인(詩人)도 어느 때에 마음이 연약(軟弱)해졌다. 마치 땅 끝에 홀로 던져진 것 같은 절망적(絶望的)인 상황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반석(盤石), 곧 안전지대(安全地帶)에 자신을 올려놓으실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고자 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기를 결단했다.
III. 적용과 결론
시인은 신앙(信仰)이 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交際) 안에 살기로 했다.
시인(詩人)은 마음이 약해져 있는 때에 더욱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했다.
당신의 믿음(faith)은 어디 있는가? 이어지는 시련과 역경(逆境) 앞에서 당신의 결단은 무엇인가?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12 2021. 8. 29 주일 낮 예배
<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I. 본문해설
히브리서는 ‘신약의 레위기’라고 불린다. 구약의 레위기는 제사(祭祀)에 관한 수많은 규례(規例)들을 담고 있다.
구약에서 레위기의 핵심은 “불결한 죄인(罪人)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God)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이다.
신약에서 히브리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에서 찾는다. 예수님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시고 자신을 제물 삼으셨다.
예수님의 속죄(贖罪)의 죽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祈禱)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기도에 관해 교훈(敎訓)한다.
II.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十字架) 죽음을 앞두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것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기도하시던 방식이었다.
A. 간구하심
예수님은 간구(懇求)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다. 그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faith)으로 드린 것이었고, 통곡과 눈물로 올린 것이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상)
1. 주님을 믿음
예수님의 기도는 믿음(faith)으로 드린 기도였다. 그 믿음은 선하신 하나님의 능력(能力)에 대한 믿음이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에서 비롯된 인격적(人格的) 신뢰였다.
예수님께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신 분이었다.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실 것이었으나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救援)하실 이”를 믿으셨다.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셨다.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믿었다.
믿음은 기도의 뿌리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關係)에 대한 인격적 확신이다.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이 확신은 깊어진다.
한 사람의 신자(信者)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는 그의 기도(祈禱)생활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신뢰하는 깊이만큼, 기도(祈禱)는 열렬하고 지속적일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faith)의 기도다.
예수님은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셨다. 땀이 피가 되기까지, 진액(津液)을 다 쏟으시기까지 기도하셨다.
잠시 후 짊어지실 십자가 죽음의 고통(苦痛)이 예수님의 영혼(靈魂) 속으로 미리 밀려들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죽음의 고통 속에서 두려워하기 보다는 자기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믿었다.
기도에 응답받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을 믿으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믿으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데서 생겨난다. 말씀에 은혜를 받으라.
2. 통곡과 눈물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방식(方式)에 대해 말한다. 그 기도는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 부으신 기도(祈禱)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모두 바치는 온전한 헌신(獻身)의 기도였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그 기도의 방식(方式)은 “심한 통곡과 눈물”(μετὰ κραυγῆς ἰσχυρᾶς καὶ δακρύων προσενέγκας)로 드려지는 것이었다. 이 구절은 직역(直譯)하면 다음과 같다. “큰 울음과 눈물 드림과 함께”
예수님은 하나님께 간구(懇求)와 소원(所願)을 올리셨다. 이것은 결코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구원 받을 인류의 대제사장(大祭司長)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다(요 17장). 우리를 위한 기도(祈禱)였다.
모든 죄인들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대신 형벌(刑罰)을 받고자 희생 제물로 바치며 드린 기도였다.
예수님의 소원(所願)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진리 안에서 사랑(love)으로 하나 되는 것이었다(요 17:21~22).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교회(敎會)의 공동체를 통해 온 세상(世上)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death)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죄인(罪人)인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罪)는 미워하셨지만 우리는 사랑하셨기 때문에 기꺼이 화목제물로 죽으셨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 기도를 “심한 통곡과 눈물로”올리셨다. 우리는 죄(罪)가 있기 때문에 종종 회개(悔改)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분에게는 결코 죄(罪)가 없으셨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어떠한 불화(不和)나 거리감도 없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열렬히 기도하셨다. 특히 잡히시던 날 밤, 그분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이익(利益)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였다. 예수님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죄인(罪人)인 우리의 비참함 때문에 아파하시며 우시던 통곡(痛哭) 소리였다. 그 울음 속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이다.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기도(祈禱)의 불이 꺼져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라. 죄를 회개하라.
자신을 돌아보라. 먼저 자기의 연약(軟弱)함에 우는 자들이 되라. 그리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B. 경외하심
예수님의 간구가 응답(應答)된 것은 그분의 삶과 관계가 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셨기 때문이었다.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하).
기도자로서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敬畏)하는 삶을 사셨다. 본문은 이로써 기도의 응답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경건하심”(εὐλαβείας)은 “경외(敬畏)하심”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사실 때 삶 전체가 곧 하나님을 경외하신 생애였다.
기도해도 응답(應答)이 없는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낙심(落心)하거나 실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결코 쓸모없이 버려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응답을 지연(遲延)하시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신다.
자신의 기도는 그 중 아무것에도 해당되지 않은 듯 여겨질 때가 있다. 그때는 기도자인 자신(自身)의 삶을 돌아보라.
많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면 그 기도가 참으로 믿음(faith)으로 드리는 기도인지를 생각해보라.
자신은 믿음으로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응답(應答)이 없는가? 그렇다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을 돌아보라.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삶인가? 그분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삶의 동기(動機)가 되고 있는가?
모든 기도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동기에 확실히 매여 있는지 다시 살펴보라.
경외하는 삶은 경건(敬虔)한 삶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삶이다.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결국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열렬히 기도하고자 하는 자는 죽음(death)의 빛 아래서 삶을 보라. 응답(應答) 받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평가(評價)를 두려워하며 살라.
이 세상(世上)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 영원히 있다(요일 2:17). 그 사람의 기도에 능력(能力)이 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피(blood)를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의 눈물(tears)을 받으셨고, 기도의 눈물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그분의 삶(life)을 받으셨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심은 경외(敬畏)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또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심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심이다.
연약한 우리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祈禱)하며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참으로 기도(祈禱)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한, 온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더욱 열렬한 기도생활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다.
III. 적용과 결론
기도와 생활은 꽃과 향기(香氣)의 관계와 같다. 꽃이 진짜 꽃이면 향기가 나고 향기가 나면 진짜 꽃이다. 기도와 삶의 관계도 그러하다.
보다 깊은 기도(祈禱)로 나아가기를 원하는가? 열렬히 기도하라. 오래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지금 자신의 생활(生活)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인지 스스로 살펴보라.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며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라. 모든 삶의 중심(中心)이 하나님 사랑이게 하라. 당신의 기도는 응답될 것이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13(끝) 2021. 9. 5 주일 낮 예배
<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1-46)
I. 본문해설
본문은 잇달아 발생한 두 사건(事件)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과 성전을 정결(淨潔)케 하신 사건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그분을 환영하고 찬송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Jerusalem) 가까이 오시자 우셨다고 보도한다. 그냥 우신 것이 아니라 소리내어 우셨다.
예수님은 일평생 강(强)하셨다. 수많은 대적(對敵)들과 마귀(魔鬼)의 위협에도 기죽지 않으셨다. 그런 분이 왜 그렇게 우셨을까?
II. 만민이 기도하는 집
예수님이 우신 것은 “보셨기”(ἰδὼν) 때문이다. 영적 통찰로 보셨기 때문이다. 더욱 의아한 것은 그분이 목놓아 대성통곡(大聲痛哭)하신 이유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A. 평화를 모름
예루살렘은 평화(平和)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였다. 예루살렘(Jerusalem)은 문자적으로 “평화의 도시”였다.
예루살렘은 모세시대부터 예정하신 도성(都城)이었다. 일찍이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한 곳을 지정하여 거기서 제사(祭祀)하게 하셨다.
가나안 땅에 왕국이 세워진 이후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왕권(王權)이 행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원(所願)부터 국가적 위기 앞에 드리는 탄원(歎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성전에 가지고 왔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다.
거기에 와서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었다. 그럴 수 없는 이들은 성전(聖殿)을 향해서 기도했고 응답(應答)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했다.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은 안 가르치거나 잘못 가르쳤고, 백성들은 잘못 믿거나 타락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Jerusalem)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영적 통찰로 꿰뚫어 보셨다. 그리고 탄식하듯이 말씀하셨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4)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意味)를 몰랐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약 40년 뒤에 이 예언(豫言)은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게 포위당했다. 그때는 마침 유월절이었다. 약 100만 여명의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나갔다. 6월 24일 안토니오 요새가 점령 당하고 7월 6일 항상 드리던 성전의 희생(犧牲)제사가 그쳤다.
버티다 못한 예루살렘은 로마(Rome)에 함락되었다. 8월 27일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문(大門)이 불에 탔고, 9월 24일에는 전 도시가 디도(Titus) 장군 수중에 떨어졌다. 그날이 예루살렘 최후의 날이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제사를 드렸고 종교적으로 살았으나, 죄(罪)와 불순종(不順從)으로 하나님과의 평화(平和)를 깨뜨렸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회개(悔改)할 기회를 주셨다. 마지막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사 뉘우치게 하셨으나 돌이키지 않았다. 결국 이스라엘은 또 다시 멸망(滅亡)의 심판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다른 도시는 몰라도 예루살렘(Jerusalem)은 깨어 있어야 했다. 임박한 심판(審判)을 온 이스라엘에 알려야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잠들어 있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반역(叛逆)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것들이 감취어져 있다. 하나님의 진리(眞理)는 볼 수 없도록 숨겨져 있다.
예수님의 애통(哀痛)하는 마음을 아는가? 하나님과의 평화(平和)를 잃어버린 자들을 생각하며 통곡하는 심정(心情)을 아는가?
B. 잠든 성전
통곡을 그친 예수님이 방문하신 곳은 예루살렘(Jerusalem) 성전이었다. 목놓아 우시던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격렬히 행동하셨다. 그것이 바로 성전을 정결(淨潔)케 하신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성전(聖殿)에 들어가셨다. 마치 이변을 만나신 듯이 분노(忿怒)하고 흥분하셨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돈 바꾸는 자들과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상과 의자를 엎으셨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당시 성전에서 무슨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아니다. 제사에 쓸 동물들이 거래되고, 돈(shekel)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행(慣行)이었다.
제사와 헌금을 위해 이 일들이 이루어졌다. 아무도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으나 예수님은 진노하셨다. 하나님 시각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C. 기도하는 집
거기 있는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진노(震怒) 끝에, 예수님이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7)
이것은 원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것은 예언이었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를 보여준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기도의 집”(),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救援) 받을 또 다른 민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聖殿)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熱望)이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적(宣敎的) 열망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성전은 세속화(世俗化) 되었다.
성전(聖殿)은 마땅히 “기도의 집”이 되어야 했다. 구원 받을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교회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집”임이 뚜렷이 드러나는 그런 집이 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교회(敎會)를 항한 하나님의 기대다.
교회는 기도(祈禱)의 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집이 되어야 한다. 자신과 구원 받을 민족(民族)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교회는 존재의 목적을 다 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매매(賣買)하고 돈 바꾸는 일이 기도(祈禱)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때에도 성전에서는 여전히 기도와 제사가 드려지고 있지 않았는가?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淨潔)케 하신 사건은 교회와 기도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준다.
a. 기도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섬김이다.
b.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은 기도에 방해가 된다.
더 깊이 기도하지 못하는가? 기도에 능력(能力)이 나타나지 않는가? 먼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돈 바꾸는 상”을 둘러엎으라.
마음속에 있는 “매매하는 자”를 몰아내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라.
기도는 단지 언어(言語)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heart)을 드리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기도가 깊어지면 언어가 영혼(靈魂)의 신음소리로 바뀌는 것을 아는가?
말씀을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祈禱)하라. 세상의 헛된 일로 마음이 나뉘지 않게 하라. 그래야 열렬(熱烈)한 기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은 먼저 기도에 자신을 바친다. 기도에 헌신(獻身)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God)께 바칠 수 없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
기도의 세계(世界), 그것은 드넓은 바다와 같다. 끝없이 푸르고 변화무쌍한 바다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바다에서 하나님을 경험(經驗)한다.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가르쳐 주고, 기도는 그분을 아는 지식(知識)의 바다에서 헤엄치게 해준다. 거기서 은혜(恩惠)와 자유(自由)를 누리게 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Jerusalem)을 보고 통곡하셨다. 그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전(聖殿)에서 진노하시며 정결케 하셨다.
하나님과의 평화(平和)를 잃어버린 채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교회와 자기 백성(百姓)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생각해보라. 예수님의 생애(生涯)는 자신의 진액(津液)을 모두 짜서 바치신 기도의 연대기였다.
광야에서 40일 금식(禁食)하시고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도, 십자가(十字架)를 지실 때도 특별히 기도하셨다.
바쁜 일과 중에도 새벽 미명(未明)과 깊은 밤을 따로 떼어놓으셨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交際)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가 오늘날 게으른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III. 적용과 결론
심판을 앞에 둔 예루살렘성 한복판에는 잠든 성전(聖殿)이 있었다. 당신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교회(敎會)는 결코 기도(祈禱)하는 집이 될 수 없다. 깨어있는 성도가 모인 교회가 깨어있는 교회다.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민(萬民)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이 일을 위하여 당신이 먼저 기도(祈禱)의 사람이 되라.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1 (2021.06.13._주일오전)
1. 교회가 기도할 때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박해 속에서도 교회를 기도하게 하셔서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헤롯왕의 박해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박해와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인 사도들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씨를 말려 버리려는 잔인한 시도였습니다. 개인의 기도와 공동체인 교회의 기도는 직물의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얽혀 있습니다. 기도하는 개인이 교회가 함께 드리는 기도를 강하게 하고, 또 강한 기도를 드리는 교회에서 약한 교인들도 강한 기도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의 지체임을 영적으로 경험합니다. 교회를 위해, 교회와 함께 기도하면서 영적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개인의 기도가 횃불이라면 공동체의 기도는 거기에 불을 붙여 주는 모닥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신을 위해서도 교회는 불타올라야 하지만, 모든 교인들을 위해서도 기도의 불길이 꺼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II. 교회가 기도할 때
자, 그러면 교회가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커다란 위기 속에서 교회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어떤 깊이로 함께 기도해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A. 교회의 상황
첫 번째, 교회의 상황입니다. 교회는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의 처형이라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상황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세 영적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헤롯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왠지 재판의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 살해되다시피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허망하게 죽은 야고보의 죽음을 두고 예루살렘 교회는 커다란 절망에 휩싸이게 되었고, 또 야고보의 죽음을 두고 유대인들은 기뻐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더욱 아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정권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더 끔찍한 일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지도자인 베드로를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습니다. 잡혀온 베드로는 수감되었습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까지 순교당하고 나면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잡혀 온 베드로는 4조로 16명으로 훈련된 간수들에 의해 물샐 틈 없는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모이는 가장 큰 절기였습니다. 헤롯은 이때 베드로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두 흩어지고 난 후 예루살렘에 유대인들만 있을 때 베드로를 처형하므로 그들의 환심을 사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온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의 기도 제목은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개인의 기도제목은 간곳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모든 기도 제목의 중요성을 압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를 구원하여 교회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구체적이었습니다. 기도할 상황이 있었고, 그 기도의 상황이 기도를 구체적이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응답도 확인할 수 없는 추상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입술에는 있으나 아마 마음에는 없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런 기도에 과연 마음이 실리겠습니까? 마음이 실리지 않은 기도에 무슨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우선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될 제목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제목을 찾으십시오. 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달으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무엇이라도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마음을 실으십시오. 그리고 또박또박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B. 교회의 선택
둘째로 교회의 선택입니다. 이 엄중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기도하기를 선택했습니다. 너무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온 교인이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절대적인 위기의 상황 앞에서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석방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조정에 올릴 탄원서를 작성하기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높은 사람에게 줄을 대어 헤롯과 면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특수부대 출신자들을 고용해 베드로를 탈옥시키는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베드로를 석방하기 위해 간부들에게 줄 뇌물을 준비하여 그들을 매수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들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 한 분께 매달리기로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오직 온 교인이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이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본문 5절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이 엄중하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 모였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중차대한 이 사건을 자신의 어떤 일보다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온 마음을 실어서 기도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의 귀천이나 차별이 없었으니, 모든 사람이 여럿이었으나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개인은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혼자 있을 때 열렬히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모여야지만 모두가 기도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에 빠져 가는 사람이 그 사람의 팔을 붙들고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헤엄치는 사람은 하나고. 그를 붙들고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네 사람이라면 다섯 사람 모두 물에 가라앉습니다. 교회는 기도의 날개를 가져야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날개입니까? 날개에 매달린 무거운 물건입니까? 기도하십니까? 마음을 바쳐 주님을 간절히 찾는 시간이 있습니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시험에 든 증거는 죄 짓고 타락하는게 아닙니다. 그건 시험에 든 정도가 아니라 이미 범죄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시험에 든 가장 훌륭한 증거는 기도를 해야 할 상황에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 시험에 든 영혼의 상태입니다. 이처럼 개인의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공동체의 열렬한 기도 없이는 개인의 능력이 지속되기 쉽지 않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있습니다. 장작들이 함께 있을 때 그 불길은 거셉니다. 절대 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불붙은 장작 하나를 꺼내 보십시오. 처음에는 이글이글 불이 붙으나 꺼내서 바닥에 던져놓고 나면 잠시 후 까맣게 사위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보았던 산은 모두 민둥산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메아리'라는 동요가 있었겠습니까. "벌거벗은 붉은 산에 살 수 없어 같다오.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고 말입니다. 눈에 들어온 서울의 모든 산들이 거의 다 붉은 산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땔감이 없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톱을 들고 올라가서 야산에 있는 나무를 모두 베어 패서 장작으로 썼습니다. 시골에서는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불을 지르고 산을 일구어 거기에 감자와 옥수수를 심으며 살았으니, 이들을 화전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제 산에 모든 나무가 다 베어졌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번에는 톱이 아니라 곡괭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곡괭이로 그 나무를 뿌리째 캐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떠메고 혹은 끌고 혹은 리어카에 싣고 집에 와서 뒤뜰에 놓고 말립니다. 그리고는 톱으로 켜서 그렇게 불을 떼고 추위를 피했습니다. 그래서 비만 오면 무서웠습니다. 어마어마한 산사태가 일상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산에서 쏟아지는 모래들이 순식간에 판자촌을 덮치고 사망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랑스럽습니다. 푸른 강산이 아니라, 공중에서 내려다 보면 검푸른 산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산에 나무를 심은 덕분이었습니다. 나무마다 다르지만 뿌리가 긴 나무는 자기의 높이만큼 뿌리를 땅으로 뻗친다고 합니다. 그런 나무들이, 수 없이 거목들이 서서 뿌리를 뻗으며 뿌리와 뿌리가 엉켜서 산 전체를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각자 각자가 묘목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거목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그 기도의 뿌리로 서로 얽혀서 교회라고 하는 산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의 그 산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산이 되고, 생명의 기운이 깃든 산이 되고, 어떠한 풍파와 비바람과 벼락에도 요동하지 않고, 모든 산 가족들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산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근심하고 염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기도를 선택하셨습니까? 교회의 위기를 만났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한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베드로가 투옥된 상황에서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열렬히 기도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어떻게 그 기도가 응답될지는 계산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헤롯보다 높으셔서 상황을 바꾸실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기도하지 않고 핑계만 대는 것은 낙심하기만 하는 것만큼 나쁜 것입니다. 근심과 염려로 마음을 썩일 시간에 하나님께 그 썩은 마음을 토해 놓는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신앙은 삶의 모든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낙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함께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밖에는 로마인들에 의한 핍박이 살벌하게 가득했고, 교회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했습니다. 그러나 약해서 두려워 떠는 대신 자신들보다 더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한 분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온 교회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언제까지 팬데믹 상황을 핑계로 삼을 겁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의 예배도 못 나오고, 예배도 예배답게 드리지 않고, 기도도 기도답게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간절한 기도의 등불이라도 끄지 말아야 될텐데 여러분 기도하고 계십니까? 현저하게 기도가 약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예배에 나오고, 함께 기도하고, 목회자들의 목양을 받으면서 거미줄 같은 믿음을 유지해 왔지만, 이젠 여러분이 이 팬데믹 상황으로 동떨어져 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밤에 교회에 나와 보십시오. 여기저기서 흐느끼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태만해져 있습니다. 잠들어 있습니다. 상황을 핑계됩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어떻게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해야 할 것 아닙니까? 온 교회가 함께 마음을 합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전도하지 못한 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그러나 그동안에도 지옥은 불타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그 마음에 불꽃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사형을 앞두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 보십시오. 그리고 한 마음으로 그 뜻을 모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안타까운 주님의 마음을 느끼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기도를 선택하십시오. 이것이 본문이 주는 두 번째 메세지입니다.
C. 기도의 태도
셋째로 기도의 태도입니다. 위기 앞에서 그들이 보여준 기도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간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간절히"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에크테노스(ektenos)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쭉 뻗어나가는"의 의미입니다.
봄이 왔습니다. 파란 잔디가 잔뜩 돋아났습니다. 오랜만에 휴일을 맞아 수만 명의 관중들이 야구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경기는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9회말 2사에 만루가 되었습니다. 촉망받는 4번 타자가 등장했습니다. 온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첫 번째 공을 노려 타자는 전심으로 배트를 휘둘렀습니다.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은 하늘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쭉 뻗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야구장의 담장을 넘겨 버렸습니다. 수만 명의 관중들이 발을 구르며 일어나 박수와 환호성을 지르고, 네 명의 주자들은 천천히 뛰면서 두 손을 흔들며 홈으로 들어왔습니다. 경기는 끝났습니다. 야구장에서 배트를 맞고 높이 뜬 야구공이 모두 홈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쭉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공만 펜스를 넘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행사를 하듯 요란한 기도로 기도의 부흥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심령을 쏟아 놓으며 간절히 주 앞에 심령을 토하며 기도할 때, 그때 심장에서는 피의 펌프질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부흥의 불이 붙여집니다. 그 마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고, 그 마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에 기도의 부흥의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수였습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같이 떠받들었던 최고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 주님을 친히 뵈었고, 기적을 행했고,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까지 받았던 그 사람이 죄인처럼 한칼에 죽어 나갈 때 예루살렘 교인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더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의지하던 베드로조차 체포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실제로 그들은 아무 대책도 세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들으시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결코 상황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기를 느꼈기 때문에 성도들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은 화살의 역사를 아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화살은 그냥 손으로 들어서 겨냥하여 쏘는 화살이지만 역사를 보면 발로 쏘는 화살도 있었습니다. 더 멀리, 더 힘차게 쏘아 보내기 위한 화살이었던 것입니다. 요령은 간단합니다. 보통 손으로 드는 화살보다 3배 쯤 큰 화살을 만들고, 그리고 등을 땅이 대고 누워서 두 발을 하늘로 지켜 올린 채 활대를 밉니다. 그리고 거기에 보통 화살보다 큰 화살을 달고 앞에 불을 붙이고 힘차게 상체를 올린 채 잡아당겨서 그것을 쏘는 것입니다. 훨씬 더 먼 거리를, 훨씬 더 강한 힘으로 날아갑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기도를 하늘을 향해 쏘는 활쏘기로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쏘자. 쏘자. 기도의 화살을 쏘자.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째 하늘을 지나고. 악령들이 지배하는 두 번째 하늘을 뚫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의 보좌에 이를 때까지 쏘자. 쏘자. 기도의 화살을 쏘자."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간절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외면하기에는 그들의 기도가 너무나 열렬하고, 뜨겁고, 간절하고, 눈물겨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과연 당신의 약속대로 응답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옥에서 나왔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도자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단지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열렬히 기도했기 때문에 쭉 뻗어나가는 힘 있는 기도를 온 교회가 함께 드렸기 때문에 상황의 어려움을 꿰뚫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백 명의 일꾼보다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일할 때 일할 뿐이지만, 한 사람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오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이렇게 열렬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 기도의 깊이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의 깊이를 말해 줍니다. 예루살렘 온 교회가 함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기도를 가리켜 "...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지, 누가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에게 기도를 올리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기도가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기도일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교리적으로 볼 때는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어느 신자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를 올리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께, to God"이라는 이 표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 기도가 그냥 하나님께 올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려진 기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 교회가 간절히 기도했고, 그들은 그 기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열렬한 기도 속에서 온 교회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할 수 있었고,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전달되었고, 예루살렘 교인들의 안타까운 마음은 하나님께 전해졌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말로만 드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공동체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에게 하루에도 많을 때는 수십 통의 우편물이 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그중에 3분의 2는 열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 대부분 광고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어보기는 열어보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수 없이 인쇄된 인쇄물들, 그리고 이런저런 도움을 요청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버리지 않고 끝까지 읽어 보는 편지가 있습니다. 손으로 쓴 편지입니다. 보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결코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이 땅에서 드리는 성도들의 많은 기도는 하늘나라에서 찌라시 취급을 받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말은 하지만 그 안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무릎을 꿇으십시오.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눈물을 쏟으십시오.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토해내십시오. 그리고 부르짖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진심이 담긴 기도인 것입니다. 그 기도가 상황을 바꾸어 놓습니다. 마음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진 사람의 기도는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수많은 기도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의 언어를 길어 올리십시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올리듯이 마음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전심으로 간구하십시오. 거룩한 열정이 불붙여지기를 매달리십시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간절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은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 들어가기까지 주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날 세속적인 생각의 파도는 높고 경건의 능력은 약해져 있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은 위협을 받고 있고 거룩한 열정은 식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나뉠 때가 아닙니다. 자기 혼자 살 길을 찾을 이기적인 생각을 할 때가 아닙니다. 이 팬데믹 상황 속에서 조국 교회가 갈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늘의 신령한 복을 곤고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흘려보낼지 생각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구원받지 못한 채 여전히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척들, 이웃들을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해 주십시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온 교회가 물러가지 않고 이 위기적 상황에서도 간구하며 갈 길을 찾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 교회를 본받아 그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하늘의 거룩한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방황하고 유리하는 영혼들, 갈 곳이 없어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목자 잃은 양 같은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가엾이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놀라운 은혜를 교회에 부어주시도록 간구합시다. 그래서 이 팬데믹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일하실 놀라운 역사를 보는 기회로 삼읍시다.
말씀을 맺으며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목자로서 간절히 요청합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에 관한 설교만 듣지 마시고, 실제로 무릎을 꿇으십시오. 여러분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하며 사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안 해드립니까?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겠습니까? 어려움 속에 있는 여러분이 근심하고 염려하는 대신 당신의 얼굴을 찾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기도 없이 살아왔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그래서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2 (2021.06.20._주일오전)
2. 마음을 같이 할 때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2-1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분부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안식일에 가기에 알맞은 거리라고 했으니, 당시 율법대로라면 1km 이내의 거리였을 것입니다. 19세기 독일의 주석가 테오도르 잔(Theodor Zahn)은 그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일 것이라고 사도행전 12장 12절을 기초로 추정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락방이라는 단어와 합쳐져서 우리들에게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장소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한 가정의 다락방에 120명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다락방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요만이 아니라 당시 성전에 모였던 사람들까지도 포함된 숫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II. 마음을 같이 할 때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들이 "마음을 함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때는 태풍의 눈 속에 있어 고요한 순간과 같았습니다. 구원사의 아침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유대교의 편견에 사로잡혀서 이제 곧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셔서 다윗의 영광을 돌려주실 때가 이때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그 큰 권능으로 로마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독립시켜서 다윗 왕국과 같은 지상 나라의 영광을 회복하게 하는 때가 이때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도대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 1:6). 그러나 예수님은 알듯 모를 듯 한 말씀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이 말씀은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 세상에 이루어질지를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이 강림하시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오셔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고, 그 성령이 오셔서 그들의 영혼을 살려 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그 충만한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렸을까요?
A. 마음을 같이 함
첫째로 마음을 같이 하였습니다. 로마의 핍박과 그리고 위협과 불안 속에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여기에는 사도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육신의 동생들까지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여기서 “마음을 같이 하여”라는 단어는 “하나의”라는 단어와 “감정”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즉, 사람은 여럿이었으나, 마음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각기 자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인십색(十人十色)인 것처럼 십인십심(十人十心)입니다. 열 사람이면 열 사람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이 마음의 다름이 얼마나 뚜렷한지 심지어 평생을 함께 살기로 맹세한 부부 사이에도 마음이 하나 되기가 쉽지 않고, 가족들도 그렇습니다. 놀랍게 이들은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여럿이었으나 마음은 하나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한마음이었을까요? 이것은 바로 자신의 일상사를 다 내려놓고 오직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성령의 부으심이 무엇일까? 그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이 교회에 하나님이 부어주실 성령의 은혜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확실히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성령강림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그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데 매우 필요한 일이고, 그것 없이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약속 하나를 붙들며 온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왜 모여서 기도해도 한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모이지도 못하지만 혹시 모인다고 하더라도 한마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열렬한 기도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각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처지와 현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우리도 남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처한 현실이 각각 다르고, 기도 제목이 달라도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그 길로 나아갈 것이며, 결국 보좌 앞에서 우리 모두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도 다르지만 사람들이 각각 바라보는 것이 서로 다 다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형식적으로는 모여도 마음이 하나 되는 일은 어려운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니까 기도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는 집단적인 화살을 쏘는 것 같은 상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입니다.
불과 20, 30년 전 시련과 고난의 길을 걷던 성도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기도회에 참석해서 이런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찬송)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30년 전 신학교 채플실에 올라가서 설교할 때, 설교가 끝나고 나서 이런 찬송을 부르며 학생들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잠자는 심령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기쁨이 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찬송하고, 고통이 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주님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무지무각하게 되어서 시련이 일어나고, 고통이 주어지고, 슬픈 일이 일어나도 울 줄도, 아파할 줄도, 주님의 품을 파고들 줄도 모릅니다. 마치 기력을 다 잃어버리고 누워서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해서 등창이 나서 썩어 들어가고 있는 임종을 앞둔 환자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묻습니다. 행복합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이 살아서, 자기 스스로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묻고 싶습니다. 몸부림? 무슨 몸부림입니까? 그리고는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자기 힘들다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건 혼자 조용히 비밀로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삶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존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나의 인생을 당신의 계획 속에 품고 계시고, 지금도 내 손을 붙들고 이 폭풍과 흑암 속을 지나고 계시다는 자존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성도들이 열렬히 한마음이 되어서 목놓아 우는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겠습니까? 조국 교회에 이런 간절한 기도 모임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토록 무미건조하고 메말라 있는 것입니까?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지만 자신들의 수준은 전혀 향상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이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가장 큰 원인은 각 사람의 마음이 혼자 있을 때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초점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어 봐야 한마음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성도들은 괴로울 때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의 십분의 일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거의 경건생활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인데, 경건 없이 살아가니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겠으며, 어떻게 모든 삶의 상황을 해석해서 하나님의 뜻에 연결시킬 수 있는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불신자와 다름없이 세속적으로 살아가고, 죄짓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자기만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까지 불행하게 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한없이 편하기 때문에 기도 제목을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70년대에 사람들은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고 괴로웠기 때문에 애들을 둘러업고 밤늦게까지 직장에서, 공장에서, 막노동 판에서 일하다가 교회로 몰려와서 꼬박 밤을 새우며 금요철야를 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먹고살만하니까 사람들이 이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도 부자이고 돈 많은 사람들도 눈물 흘리며 철야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금요일 저녁에 술이나 먹고 집에서 노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경제적으로 좀 살기가 나아졌다고 치겠습니다. 그런데 마음도 그렇게 편안합니까? 어제도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요즘 영업이 어떻습니까?" "못 살겠습니다."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매달리지 못한다고 했던 모든 핑계가 믿음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을 찾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주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정신이 평안합니까? 더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작년에 죽은 20대 중 절반은 자살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일 때 마음을 같이 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고생할 때 믿음이 있으면 마음이 더욱 하나님께로 모아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 봐야 어찌 한마음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 사람은 이 마음, 저 사람은 저 마음, 그 사람은 그 생각, 또 저 사람은 저 생각을 하면서 모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그 기도회가 어떻게 열렬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이 기도하려고 모여도 함께 기도드리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 된 마음은 그들이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 하나 된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은 서로 통합니다. 지체들의 기도가 나의 애달픈 기도의 제목이 되고, 나의 기도가 형제들에게 자신의 기도에 제목처럼 받아들여집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성령 받은 사람들의 사랑입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지체들의 고통을 헤아려주십시오. 그들과 한마음을 가지려고 힘쓰십시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기도 제목을 여러분의 기도 제목으로 삼고,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기도에 힘씀
마지막 두 번째는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핍박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그들의 마음이 나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마음은 하나 되었습니다. 각 사람들이 예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습니다. 그 온전한 의존의 마음속에서 그들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다스려 주셨습니다. 아마 그런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래서 큰 고통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상하게 놀라운 평안을 주십니다. 경험했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깨어 있던 때입니다. 설명하라고 하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합니다. 간절히. 그러면 근거를 댈 수 없는 놀라운 평안이 마음을 꽉 채웁니다. 그래서 요동치 않습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기르리라
그래서 빌립보서 4장 7절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는 그 어떤 평화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마음의 논리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마음입니다.
"오로지 힘쓰더라"고 번역된 구절은 그리스어로 "확고부동하게 계속하는" 그런 뜻입니다. 용기나 단호함이 흔들림이 없이 지속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설교 속에서 예루살렘 교인들이 드린 기도회처럼 “쭉 뻗어나가는” 에크테노스(ektenos)의 기도였습 니다. 야구장에서 담장을 넘기는 타구처럼 힘 있는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승천하시면서 성령의 부으심이 몇날이 못되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날짜는 확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은 그 날짜가 언제일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온전히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 되었습니다. 모두 하나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승천하실 때 그 모습을 본 사람은 500여 형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기도회에 남은 사람은 120명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380명 정도는 마음이 변해서 떠난 것입니다. 안타깝게 그들은 첫 번째 성령강림의 목격자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대학생들이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리고 모여서 4박 5일인가 수련회를 했는데 별로 은혜를 못 받았습니다. 저기서 빵빵 거리면 관광버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내려가자고 하면서 내려갔습니다. 몇 명의 청년들이 '하나님, 이대로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는 떠났습니다. 놀랍게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돌아갔고, 거기에 모였던 소수에게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물 붓듯이 부어 주셨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절망적이고 심지어 은혜조차 사라진 것 같은 때도 하나님이 눈여겨보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고, 착하게 살고 안 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 찾고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하나님 찾는 흉악한 죄인들을 하나님 먼저 만나주십니다. 간절히 당신을 찾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만나 주십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었다고 치겠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절망적인 상황에 도달했다고 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신앙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어디 가서 그 양심의 가책을 떨쳐버리고, 누구에게 그것을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아왔던 것인데, 여러분이 시련 속에 있다고 치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을 버려야 될 이유입니까? 주님을 붙들어야 될 이유입니까? 힘들다고 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기도를 쉬어야 할 이유입니까? 더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힘을 얻어야 할 이유입니까? 그래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든 좋은 것들이 나쁘게 사용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나쁜 것들조차도 좋게 사용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 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오직 그 약속 하나를 붙들고 온전히 매달렸습니다. 드디어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제일 먼저 맛보았습니다.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이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불안과 걱정은 확신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능력있는 설교자와 불타는 전도자들로 세워졌습니다. 온 교회는 근심과 염려로 모였는데, 이제 성령을 받고 나서는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성도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들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 뵈옵기를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젊은 시절 제가 흠모했던 설교자 중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찰스 하든 스펄전이었습니다. 영국에서 목회하던 19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분은 일평생 설교하는 것 중 남아 있는 것이 3천4백 편쯤 됩니다. 한 설교도 같은 본문의 설교가 없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분이 말씀을 유능하게 잘 전했으면서도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를 보고 교회의 은혜의 상태를 측정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자기의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우리 테버너클 처치에 영적인 열정의 정도를 잴 수 있는 게이지 측정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매주 월요일 날 모이는 기도 모임입니다. 이때 저는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그 열기를 보고 우리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측정한다고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와서 말씀 조차 안 듣는 사람들은 이미 신앙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동의를 해도 그 사람들이 열렬히 기도하지 않는 한 강단의 말씀은 자기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살아낸 삶이 아니고, 설교 속에 나오는 사람들 혹은 설교자가 살아낸 삶입니다. 그걸 보고 박수 치는 게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그 삶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내는 게 신앙입니다. 거기 위대한 능력이 있고, 거기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멘. 이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언제까지 기도 없는 이 지루한 삶을 계속하시겠습니까? 마치 잠자기로 운명 지어진 거대한 공룡처럼 그렇게 잠만 자고 있을 겁니까? 이따금 한 번 찌르면 게슴츠레 눈을 뜨지만 다시 잠드시겠습니까? 왜 오늘은 아닙니까? 왜 깨어 주님을 간절히 찾는 그날이 오늘이 아니고, 또 내일이고, 모레이어야 합니까? 언제 시간이 지나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시겠습니까? 사람의 문제는 문제를 보면 문제지만, 신앙으로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고 은혜를 체험했던 모든 때 치고 문제가 없었던 때가 있습니까? 가정의 문제로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때 은혜를 주셨고, 사업의 문제로 힘들어할 때 주님을 간절히 찾으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만나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경험입니다. 문제와 능력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어느 선교회 사무실에 들어가니까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영어로 쓰여있는데 한글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일할 때 사람이 일한다. 그러나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온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팬데믹 이후로 여러분은 교회에 거의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묻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두렵고 연약한 분들은 못 나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있는 그 자리에서 교회에 나오는 때보다도 더 열렬히 기도해야지 겨우 옛날의 신앙을 유지할 것 아닙니까? 항상 마귀는 그럴듯한 이유로 우리를 물러나게 하고, 물러난 우리를 주저앉게 하고, 주저앉은 우리는 드러눕게 하고, 우리가 드러누운 다음에는 우리의 목을 조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교회에 자유롭게 나와서 열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영혼을 섬길 때보다, 집에 돈이 떨어져 있을 때는 두 배 이상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팬데믹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습니까? 누가 뭐라고 합니까? 누가 비난을 합니까? 감염병의 위험 때문에 교회 나올 수 없어서 못 갔다는데 누가 돌던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렇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 미끄러진 신앙으로 주저앉아 버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사람들이 두려우면 없는 때에 와서 기도하십시오. 간절히 주님 앞에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밤바다와 같은 현실에서 인생의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항해 하려면 눈을 들어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항로를 알려 주는 것은 출렁이는 파도가 아닙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만이 어두운 밤바다에서 갈 길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땅에서 생기지만, 해답은 땅에 없습니다. 해답은 언제나 하늘로부터 주어집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니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홀로 주님 앞에 고요한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은밀히 아뢰십시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형편인지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고하십시오. 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분이 나의 기도를 안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뭔가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으십시오.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십시오. 한마음이 되십시오. 꺾이지 않는 열렬함을 가지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3 (2021.06.27._주일오전)
3. 개인기도를 회복하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산상수훈 설교 중에 하신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 6장은 외식에 대한 경고로 시작됩니다. 구제와 기도, 금식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비판하셨습니다. 바로 이 맥락에서 그들의 기도를 비판하시면서 올바른 기도 생활에 관한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국어사전적으로 외식이란 "겉만 좋게 꾸미어 드러내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성경적으로는 사람에게 영광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에게 없는 선한 성품이나 종교심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에 의하면 이것은 신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앙의 진실성을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외식에 대해서 심각하게 경고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외식에 빠지게 되면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열납될 리가 없고,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응답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외적인 모양은 있으나 영적인 생명이 없어서 말라깽이처럼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도에 있어서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마음의 교통이기 때문에 일체의 외식이 없어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며 마음을 드리는 기도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II. 개인기도를 회복하라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개인 기도를 회복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되는 것은 기도하는 개인이 모여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개인이 없이는 결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개인 기도 생활의 회복 없이는 결코 기도하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생각해 보십시오. 손가락만 한 작은 나뭇가지로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장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이 붙어서 타오를 때 활활 타는 모닥불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 기도 생활을 통해서 그 마음이 기도의 영에 불 붙여질 때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크게 세 가지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A. 골방에 가라
첫째는 "골방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골방은 잘 사용하지 않는 공간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공간입니다. 골방을 대문 앞에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즐겨하던 기도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과 분주하게 다니는 거리였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비판하시면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나팔을 불듯이 기도했으니, 이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짐짓 경건하게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영적으로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를 하려면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시간,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골방이라는 말로 은유하고 있습니다. 아무나의 골방이 아니라 "네 골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개인 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는 그 기도는 내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은 본인도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본인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누구보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차피 그는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섬김의 기도는 내게 힘이 됩니다. 그러나 남에게 기도를 많이 받는다고 해서 나의 개인 기도의 의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남이 나를 위해 드려지는 기도가 아무리 열렬할지라도 내가 그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역사하는 힘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골방은 어떻습니까? 사용하기에 깨끗이 청소되어 있습니까? 모든 물건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습니까? 아침에도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에 여러분의 온기가 느껴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행입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기도의 은혜가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기도의 은혜로 여러분은 이기고 있는 중입니다. 어떠한 시험과 어려움이 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더욱 여러분의 기도의 골방을 찾으십시오. 거기에서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리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기도의 골방이 오랫동안 찾은 적이 없어서 지저분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미줄이 쳐지고 그리고 언제 사람이 들어갔다 나왔는지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는 쥐들이 싸 놓은 똥들이 마른채 굴러 다니고 있다면 여러분은 기도의 은혜를 떠난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가 필요한 때에 열렬하게 기도할 수 없도록 마음이 준비되지 못한 그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신앙을 떠나 있거나 혹은 떠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영적 생활이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속에 부어지는 경험이 없이 어떻게 우리들이 믿음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많은 핑계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많이 고달픈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세상의 근심을 홀로 지고 사는 것처럼 그렇게 궁상떨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힘듭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어렵게 살아 갑니다. 그러니 제발 혼자 모든 어려움을 짊어진 것처럼 그렇게 유별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마음을 터놓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다 들어보면 그 속에 신음 소리가 있습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의 바다를 지나는 것이니, 누구든지 마음에 무거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인생길이 어렵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 고통을 기쁨의 바다로 바꾸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어도, 신앙의 지혜로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가까이 항구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지금 사람들마다 펜데믹 상황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올라가는 부동산과 올라가는 주식, 그리고 요동쳤던 비트코인으로 일확천금을 한 사람이 제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여러분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또 해당된다고 치겠습니다. 그게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까? 많은 수고를 하고 애쓸지라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득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또 혹시 기도하지 않아도 부자가 되었다고 치겠습니다. 행복하겠습니까? 마음은 메마르고 영혼은 곤고할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바라는 삶입니까? 그랬더라면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고 물신(物神)을 섬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살고 있던 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부르짖었습니다. “…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사람이 흑암에 빠져 곤고하게 사는 것은 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이 모자라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때도 믿음으로 이겨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기도의 골방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어렵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거라면 우리가 불신자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낙심될 만한 상황을 만났기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그런 삶을 보면서 불신자들이 예수 믿기를 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있는 증거를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잠시 하던 일을 멈추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의 인생에 긴급동의입니다. 회의가 진행되다가도 긴급동의가 들어오면 의장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에 긴급동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던 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겹게 인생을 살아가고 난 그 끝에 내가 얻을 것이 무엇인가 회의를 느끼라는 것입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물레방아 돌아가듯이 바쁘게 돌아가는 삶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과연 기도의 골방이 살아 있는가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골방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은혜와 능력은 현실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비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개인기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개만 끄덕거리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오늘 이 설교를 듣고 나가서 하루 중 언제,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에서, 어느 만큼, 예외 없이 기도할 것인지 결심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살 수 있습니다.
B. 기도하라
두 번째, "기도하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 명령형입니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은혜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영적인 생명이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게 없던 사랑이 부어져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감당하여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교훈을 받으며 실제로 기도해야 합니다. 봉사로 기도를 대신하거나, 기도에 관한 책을 읽는 것으로 기도할 의무를 때우지 마십시오. 몸소 기도하십시오.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여러분이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은 했고, 아무리 귀찮다고 해도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는 수고하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기도에 게으른 자신을 반성하십시오. 그리고 결단하십시오. 뜻을 세우십시오. 내가 기도 없이 핍절한 삶을 살고 있으니, 이제 내가 다시 기도의 골방으로 돌아가므로 나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리라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인생의 놀라운 전환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믿었던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능력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고 가르칩니다. 기도할 때 필요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그분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에게 주신 기도였고, 여기서는 개인기도 생활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여기서는 "네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혼의 교제이고 마음의 사귐입니다. 그 사귐이 충만한 사람은 떨어져 있으나 가까이 있는 것이고, 그 충만함이 사라진 사람은 같이 있으나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염려와 근심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갈가리 찢어집니다. 여러분, 그림을 수백 조각으로 찢은 다음에 공중으로 확 뿌리면 그것을 맞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근심하고 염려하고 세상의 감각적인 것에 우리의 정신이 팔릴 때 우리의 마음은 수백 장으로 찢어진 그림처럼 산산이 흩어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주체성을 상실하고 나면 온갖 감각적인 것들에만 정신이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산산이 찢어진 정신들은 조각조각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조각 퍼즐을 맞추듯이 그림이 완성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여러분은 주체성을 찾게 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 마음을 가질 때 또렷한 주체성이 생깁니다. 그렇게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또 다른 주체이신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안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또렷하게 주체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걸 원하십니다. 그런 주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파테르(pater)입니다. 이것은 가족 관계 안에서 부르던 아버지의 명칭이었습니다. 그러니 굳이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아빠"쯤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가장 이해되지 않은 말이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 가슴에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김남준" "네." "너 가서 학부형 모시고 오너라." 그때는 "제가 뭘 잘못했어요?" 이렇게 대드는 시기도 아니었으니까, "네." 그리고 학부형을 모시고 오리고 해서 집에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식구 중 한 사람이 갔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 저를 경멸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고 합니다. "김남준 학생은 왜 바닥이 없는 양말을 신고 다닙니까?" 그때 우리 아버지 잘 사셨습니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아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부도덕하거나, 모순적이거나, 이기적인 아버지가 아닙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상하시고 그리고 한없이 자기의 자식을 아끼는 아버지이십니다. 심지어 죄를 지어도 죄는 미워하나 그 죄인은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럼 아버지께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울면서 기도하는 자는 무엇인가 깨달은 사람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통곡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알게 된 사람입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아버지께 드려지는 기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도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사랑을 온 마음으로 느끼며 그분의 임재 속에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아주 많이 기도 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기도의 편지를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자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겉모습으로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척했으나, 마음으로 하나님은 이웃집 아저씨의 삼촌만도 못한 멀리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기도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신에게 기도했으나 아버지께 기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도,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친밀한 기도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친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해결을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고,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니 거기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니, 여러분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할 때 그분은 성부 한 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신성으로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 삼위일체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에 "예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성령님 우리의 간구를 들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두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은밀하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이는 감각적인 것에만 생각이 묶여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어디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감각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조용히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즉,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분이 그 하나님을 만나느냐,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분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과 말씀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감각적인 사물들 너머에 계시는 만물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만나 뵙습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들, 깨어 기도하는 신자들은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을 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보이는 만물보다 또렷하게 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고 싶으면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최대한 적게 생각하려고 애쓰십시오. 생각이 밀려올 때마다 "그까짓 것 아무려면 어때."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게 정말 소중한 분은 하나님이야." "내가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할 거야."라고 말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에게 일깨우십시오.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얼마나 깊고, 강력하게 느끼느냐가 신앙의 깊이입니다. 그 아버지를 너무나 잘 알고, 그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버지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신앙이 깊은 사람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은 행위에 있어서 은밀하십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마음의 논리로 알 수 있으니, 기도하는 사람은 이 마음의 논리를 이해합니다. 이성의 논리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이 늘 행하는 것을 마음으로 봅니다. 육체로 보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목격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신뢰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는 이유도 바로 이렇게 은밀히 행하시는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은밀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분이 은밀하다는 사실은 죄 짓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오, 고난을 받으며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위로입니다. 거짓된 자는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짓고 시험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던 시인이 울부짖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제사가 짐승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죄 지었으면 죄 지은 대로 하나님 앞에 진실하기를 다짐합니다. 사람들을 속였던 그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심경을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어떤 처지에 있든지 기도의 문을 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대로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 직고하십시오. 오류에 빠졌으면 오류에 빠진 것을 아는 순간 여러분이 잘못된 것을 선택하였다고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사랑하면 그 마음까지도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내 마음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제 마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날 도와 주시옵소서." 간구해야 합니다. 진리로 자신을 판단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기도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친밀함 속에서 기도하십시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십시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십니까? 한낮을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한밤중에 여러분은 하루를 어떻게 마무리하십니까?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거기가 어디든지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드리십시오.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기도하십시오. 하루를 주님께 부탁드리십시오. 필요한 것을 주님께 구하십시오. 낮에 사는 동안 기도할 시간을 내십시오. 기도할 시간을 낼 수 없으면 짤막짤막한 기도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지혜가 부족할 때 지혜를 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회복을 구하십시오. 하루의 문을 어떻게 닫으시렵니까? 일과를 모두 끝내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 고요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하루의 삶을 반성하십시오. 주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비춰보십시오. 잘못한 것은 내일로 회개를 미루지 마십시오. 즉시 그 밤에 기도하십시오. 오늘 일은 오늘 하나님 앞에 끝내겠다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용서를 비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찬양할 이유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간밤에도 여러분에게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기도로 하루의 문을 닫음으로 우리 인생의 n분의 1(1/n)인 하루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을 잘 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공허한 구호를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관념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숨 쉬고, 먹고, 마시는 순간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기도의 영으로 사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기도하지 않을수록 여러분의 인생에서는 풀리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풀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더 기가 막히게 꼬일 앞날에 대한 예고편이 될 것입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까? 아멘.
워낙 기도가 안될 때는 사실 기도를 시작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때 이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바람이 확하고 부는 겨울입니다. 거기에 땅까지 눈에 젖어서 축축합니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합니다. 모닥불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산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바짝 마른 나뭇잎들을, 젖지 않은 나뭇잎들을 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를 해옵니다. 나뭇잎을 모으고, 그 위에 젓가락같이 얇은 바짝 마른나무들을 얹어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으면서 작은 불을 피우지 않겠습니까? 작은 나뭇가지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좀 더 큰 가지를 올려놓을 것입니다. 큰 가지에 불이 지펴지면 좀 더 큰 가지를, 드디어 장작을 올려놓고, 작은 불씨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되어서 추위에 언 몸을 녹여줍니다. 여러분의 기도생활도 그렇습니다. 하지도 못할 것을, 결심을 난발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공수표 아닙니까? 3시간, 4시간 기도하겠다고 결심하지 마시고, 한 끼도 못 굶으면서 며칠을 금식하겠다고, 그렇게 공수표를 난발하지 마십시오. 할 수 없는 건 나중에 하시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십시오. 가장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결심부터 하십시오. '매일 아침 눈뜨는 것과 함께 하나님을 찾으리라.' '점심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리라.' '퇴근 후에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리라.' '집에 일찍 들어가서 최소한 15분이라도 불을 끄고 기도하리라.' 이런 실현 가능한 결심을 하십시오. 성공하면 그 위에 좀 더 커다란 결심을 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다시 기도 생활을 회복하는 비결입니다. 개인 기도 생활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갚으시리라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갚으시리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갚아 주시는 아버지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시겠다고 합니다. 갚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마치 채무자가 부채의 의무를 이행하는 그림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근데 이게 얼마나 우스운 것입니까? 모든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인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빌려 쓰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 자체도 하나님의 덕을 입어서 이 세상에 왔고, 살아 있고, 또 그 덕을 입어서 주님의 품으로 갈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분이 우리의 채무자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서 우리에게 교육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 아콤모다치오(Accommodatio)라고 부릅니다. 수준이 너무 낮으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린애 같은 언어로,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화법은 매우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가 잘 안 하려고 하는 일을 하도록 분발시킬 때 쓰시는 화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러한 화법은 매우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가 안 하려고 하는 일을 하도록 분발시킬 때 사용하시는 특별한 화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는 불쌍한 사람이 없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서 돈이나 떡을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면, 그들이 마음이 분발하여 불쌍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소유를 나누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므로 아무도 핍절한 사람이 없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잘 안 합니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러한 화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잠언 19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잠 19:17). 이 말처럼 이상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모든 것이 풍족하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인간의 것을 빌리시겠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당신의 취하여도 아무 일도 아닌데, 하나님이 그것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닌데, 왜 하나님은 유치하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너무나 너무나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베풀어주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기도하기를 바라시지만, 우리가 웬만해서는 안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분발시키려고 이런 특별한 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성경에 드물게 나오는 특별한 화법입니다. "내가 갚아 주리라"고 하신 이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는 종종 돈을 꾸고도 안 갚는 이웃을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여유가 있는데도 사람들은 갚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예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못 갚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뻔뻔한 분도 아니고, 없으신 분도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이 갚는다고 하면 틀림없이 갚으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이 빚진 것처럼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거기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보다는 잘못하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아는데 안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잘못 알고 구하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가 진실하고 간절해지면 결국 잘못 생각했던 것들은 기도 속에서 올바르게 바로 잡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잘못 구하면 올바로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주십니다. 덜 좋은 것을 구하면 그것을 주시는 대신 더 좋은 것을 구하십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안돼"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신호입니다.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땅에 떨어지는 기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땅에 떨어진 기도는 이미 하늘로 올라간 적이 없는 기도입니다. 은밀히 계신 아버지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갚아주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기도는 거절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적이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갚아 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마음으로 찾는 사람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갚아 주십니다. 반드시 응답해 주셔서 그들을 시련 가운데 건져 주시고, 어려움 가운데서 구출해주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한 분이신지를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십시오. 단순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나의 기도를 갚아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십시오. 이런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나의 상황을 바꾸어 놓으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갚으시는 기도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냐고 자기 자신의 영혼을 타이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현실을 이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맺겠습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여러분 자신보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십니다.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개인 기도 생활을 회복하십시오. 그래야 기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 생활이 잃어버렸습니까? 기도회에 나오십시오. 간절히 기도해서 타오르는 모닥불에 불을 붙여 가십시오. 활활 타오르는 기도의 생활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불길을 기도회에 와서 보태십시오. 여러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도 기도의 불이 타오르게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모든 기도가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불이 되어 산불처럼 온 교회를 태우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런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풍랑 속에 아주 작은 고기잡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배가 파산했습니다. 그래서 내동댕이쳐지듯이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얼마나 깊은지 검푸른 바다입니다. 그리고 겨우 나무 조각 하나를 의지하고 허우적거리는데, 밀려오는 파도의 크기를 생각하면 숨 넘어가는 것은 순간의 일일 것입니다. 절망에 휩싸여서 울부짖고 있는 그때에 멀리 구름 사이에서 배 하나가 나타납니다. 구조선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들이 내가 빠진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옵니다. 그 배는 내 앞에 멎었습니다. 나는 이제 힘이 없어서 잡았던 작은 판자 조각도 놓쳤습니다. 그리고는 양팔을 휘저으면서 살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야속한 파도는 내 머리를 덮칩니다. 그때 구조선이 가까이 와서 흰 밧줄을 던졌습니다. 그 밧줄을 보자마자 내가 살 길은 저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오른팔에 칭칭 감았습니다. 그리고 왼팔 손아귀로 그 밧줄을 붙들며 양손으로 움켜쥔 채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서서히 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깊은 물에 빠져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체국장 할 때 동네 수영장에서 사람이 익사하는 광경도 봤습니다. 어차피 헤엄 못 쳐서 물에 빠지면, 자기 키보다 10cm만 더 깊어도 죽습니다. 1m 80cm 물에 빠져도 헤엄 못 치면 죽습니다. 구조되지 않으면 1m 70cm 물에 빠져도, 1m 50cm인 사람은 숨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구조된다면 검푸른 1000m 파도의 깊이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어차피 1000m 깊이나, 1m 80cm 깊이나, 헤엄 못 치고 구조되지 않으면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의 깊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려움의 깊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기도로 그 구조선의 밧줄을 붙들었느냐, 안 붙들었느냐 입니다. 그 밧줄에 붙잡힌 사람은 서서히 구조됩니다. 아가리를 벌리고 삼키려 드는 수천 미터의 깊은 물은 실망했을 것입니다. 한 번에 삼킬 수 있는 사람인데 구조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기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문제의 깊이를 보지 말고, 기도의 깊이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내가 얼마나 깊은 시험에 빠져 있는가 생각하지 말고, 얼마나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온 마음을 태우며 하는 10시간의 근심보다, 10분의 간절한 기도가 당신의 인생을 바꿉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바꿉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로 이 현실을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4 (2021.07.04._주일오전)
4. 벼랑 끝에서 주신 은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예레미야는 주전 7세기경에 활동했던 고난의 선지자였습니다. 자신이 예고한 대로 유다가 망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현실을 보아야 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망한 지 130년 후 남왕국 유다마저 바벨론의 말발굽 아래 멸망당하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는 민족과 함께 역사의 벼랑 끝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벼랑 끝에서 주신 은혜였습니다.
II. 벼랑 끝에서 주신 은혜
이스라엘은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멸망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오히려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육적인 왕국인 이스라엘이 썩어 없어지고, 영적인 왕국인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로 재탄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썩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비전을 보여주시기 전 예레미야에게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A. 부르짖으라
첫째로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 예레미야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역사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예레미야에게 개인기도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너는 기도하라"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전체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라는 이미 망해 버렸고, 사람들은 폐허가 된 예수살렘에서 보물을 꺼내 가지고 와서 저마다 양식을 얻기에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 기도하겠습니까? 각기 제 살기에 바빴다고 예레미야애가 1장 11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너는 기도하라고, 너는 부르짖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간절히 기도하는 개인 없이는 불가능한 그림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들의 마음에 각성을 주셔서 그들을 영적인 부흥의 불쏘시개로 쓰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의 기도로서 불타 오르게 하여 교회를 활활 타오르게 하는 기도의 기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이 바로 그렇게 부르시는 사람들입니다.
"부르짖으라"고 할 때 쓰여진 이 동사는 히브리어로 '케라'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릴 수 있도록 큰소리로 소리 내어 부르짖거나, 선포하거나, 이름을 호출하는 동작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일상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매우 특별한 기도입니다. 마음의 억누를 수 없는 특별한 정서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부르짖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를 드리도록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평온할 때에는 평온한 기도로 지나갔고, 평탄한 때에는 평탄한 기도를 드렸으나, 이 위기의 때는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의 벼랑 끝에 서 있었고, 선지자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망해 버렸고, 그리고 선지자는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당신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시련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넉넉히 살아갈 만한 인생입니까? 기도하지 않고도 하나님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라고 여러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면 교회는 왜 나오셨습니까? 인생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 같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도 없이 그냥 묵묵히 현실을 견디기만 하는 바보 같은 것도 결국 신앙의 힘이 아닙니다. 시련을 주시는 것은 마음으로 멀리 하던 하나님을 다시 간절히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싸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될 것이니, 이제 너는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라는 신호입니다. 그 신호가 지나가면 경고는 끝나고 현실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이 특별한 때에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주저앉지 마십시오.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과거의 괴로운 상처는 딛고 현실을 희망차게 살아가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은 그것을 밟고 일어서서 더 나은 미래로 나가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처 난 과거, 괴로움이 있는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이유입니다.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 소원을 억제할 수 없는 마음으로 가득히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느끼십시오. 의지할 때 없는 고립감을 하나님을 찾는 신앙으로 승화시키십시오. 간절히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 한 분으로 마음을 채우십시오.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언어에 진심을 담으십시오. 단 한마디라도 진실이 담긴 기도를 하십시오. 간절한 기도가, 부르짖는 간구가, 여러분의 심장에 펌프질이 되게끔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은 피 냄새가 나야 신앙입니다. 그 칼날 위에서 살고 죽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신앙의 효력이 나타납니다. 그런 사람이 신앙의 힘으로 어두운 세상을 이기고, 절망적인 현실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특별한 때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없이 살 수 있다면 살아 보십시오. 언젠가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여러분은 불같은 시련을 겪으면서 살 것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열정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있습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주님을 위해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까? 죄가 안타까워서 회개의 눈물을 쏟아 본 적이 있습니까? 이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으면 나는 희망이 없다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어서 주님 앞에 매달려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럼 묻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인생을 사십니까? 그 길로 가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비겁함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나는 14세 2개월 밖에 안됐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서 난 무신론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도 확 뒤돌아서 버렸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으면 고무신 거꾸로 신으십시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면 다시 부르실 것입니다.
도대체 신앙에서 피 냄새가 납니까? 예수 위해 살고, 예수 위해 죽고, 하나님 때문에 내가 살아 있고, 하나님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의 길을 간다는 비장한 결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실실거리고 희희거려서 기쁘기 때문에 하나님 찾을 여유가 없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괴로워서 하나님 찾을 힘이 없습니다. 그것은 안 믿는 사람도 다 하는 일입니다. 겨우 그까짓 삶을 살려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부르짖는 것을 아십니까? 울부짖는 것을 아십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사고로 죽고, 엄마는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통곡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것이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부르짖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바로 그때가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입니다. 그렇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B. 응답하리라
그것이 바로 응답하리라는 약속입니다. "...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 이것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라고 하신 말씀과 짝을 이룹니다. 믿음으로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선 모든 사람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이 벼랑에서 추락하거나 혹은 벼랑 끝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집니다. 소수의 사람이 그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섰다는 사실이 아니라, 거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거기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육신의 눈으로만 현실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더 낙심하게 됩니다. 거기 머물러 있거나 추락사 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해결의 방법도 그분께 맡기십시오. 어차피 그분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를 초월하니, 그분을 믿는 편이 우리를 믿는 편보다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시련의 때를 지났던 믿음의 사람 시인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시편 27:9)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인생의 계곡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변함없는 공식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두 가지 답안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줄 타고 빨리 내려 가거나, 아니면 벼랑 끝에 매달리고 있다가 추락사 하는 것, 둘 중에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추락사 하는 것보다는 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줄을 찾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어디서 몰려 왔는지 적군이 밀물처럼 쏟아져 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소수입니다. 이미 많은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고, 그리고 우리는 후퇴하기에 바쁩니다. 안개는 자욱이 꼈고 적군과 아군을 분간할 수 없이 함성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결국 미친 듯이 도망을 가다가, 아뿔싸 멈추게 되었습니다. 천길 벼랑 끝이 거기 있는 줄 모르고, 그곳으로 퇴로를 정한 것입니다. 쉬지 않고 밀려오는 적군의 함성 속에 한 걸음 더 뒤로 딛으려고 하니 절벽 끝에 돌이 부서지면서 천 길 아래로 돌가루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서려야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줄을 찾아본들 줄이 어디에 있겠으며, 설령 줄을 찾고 내려간다고 한들 그 줄을 적군이 벼랑 끝에 와서 내버려 두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 곳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서, 그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뒤로는 밀물처럼 군사들이 밀려오고, 앞에는 천길 벼랑 끝입니다.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거기서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하얗고 커다란 날개를 우리 등에 달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로 박차고 날아오릅니다. 눈앞에 펼쳐졌던 천길 벼랑은 발아래 희미한 거미줄처럼 보입니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적군도 먼지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료들과 함께 유유히 그 절망의 계곡을 비행하며 안전한 나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답안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통하는 답안입니다. 누가 이성의 논리로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믿는 사람은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자녀가 마음을 다해 간절히 찾는데 어찌 듣지 아니 하시겠습니까? 좋으신 아버지가 어찌 사랑하는 자녀의 울부짖음에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에 불평하지 마십시오. 살다가 살다가 죽을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죽지 마십시오.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죽을 것 같다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구조를 요청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뜻밖의 사람이 여러분의 그 애절한 소원을 들어주고 위로가 되어줍니다. 그러나 매일 그렇게 살지는 마십시오. 현실에 불평하지 마십시오. 복을 받지 못합니다.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혼자 힘든 인생 사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 고민을 받아주는 그 사람도 어쩌면 어젯밤에 내일 아침에는 하늘나라에서 눈뜨고 싶었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인생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제일 비겁한 게 뭔지 아십니까? 자기 책임 아래 있는 인생인데 마치 남의 인생인 것처럼 투덜거리고 불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체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서 좋은 날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하고 결혼하면 불행해집니다. 그런 사람을 부모로 만나면 매우 무책임한 부모 아래서 고통스러운 유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숙하고 엄연한 것이고, 부인해야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할 때는 자신의 인생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아침에 지독한 숙취에 머리를 움켜쥐고 쥐어뜯으며 일어나면, 펼쳐지는 것은 어젯밤의 질펀한 술자리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비겁한 인생이고, 그런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이 살다가 너무 힘들면 도움의 손길을 뻗치십시오. 반드시 누군가가 도와줍니다. 그런데 습관처럼 되어서 힘들다 힘들다 힘들다 말하면서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95%는 여러분의 이야기에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시쳇말로 개무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열등한 사람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남이 나를 그렇게 봐주는 것이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어느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습니까? 어차피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내 인생의 무게가 덜해지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힘들다고 말합니까? 그리고 습관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남의 인생처럼 말하면서 그렇게 인생을 허비합니까?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습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의 길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살려고 할 때에 비로서 이 세상에 대해서 쫄지 않을 수 있는 자존심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여러분이 되뇌었던 수많은 불평과 불만의 말이 부르짖는 기도가 되었다면, 여러분은 훨씬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입니다. 신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생사 간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아닙니까?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먼저 당신의 감정에 몰입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인생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 외로움의 끝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려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그렇게 원망하고 죽어 버리려고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항상 옳지 않고, 하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알아주셔서 따라가야 되겠습니까? 틀린 여러분이 옳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려서 그분을 따라가야 되겠습니까? 결국 누구의 말이 맞겠습니까? 계시록 2장 5절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려고 애쓰십시오. 당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에 공감하기에 힘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생각의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기도는 그 다음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고, 인생이 실타래처럼 얽힌 것 같을 때, 그때에 한 지혜가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처럼 보지 말고, 남의 인생처럼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3자의 입장에서 한번 보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야구에서 포수를 해보셨습니까? 저는 포수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포수의 자리에서 야구를 보는 것과 타자의 자리에서 야구를 보는 것, 외야수의 입장에서 야구장을 보는 것, 1루수 관중석에서 야구를 보는 것, 외야석에서 보는 것, 야구장이 모두 다른 모습입니다. 천의 얼굴입니다. 그러면 항상 있던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다른 지점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뜻밖에 해결의 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육신의 관점을 버리고 신앙의 관점에서 여러분의 야구장 같은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먼저 생각의 혼란에서 벗어나십시오. 혼란스러운 사람에게 저는 기도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권합니다. 왜냐하면 혼란스러운 마음으로는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알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십시오. 기도는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솔직해지십시오.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온갖 치장된 옷으로 위장하기보다는 훌떡 벗고 하나님 앞에 발가벗은 모습으로 창피를 당하십시오. 그것이 오히려 여러분의 인생에 희망이 될 것입니다. 거짓과 허위와 위선과 가식의 옷을 벗어 버리십시오. 최상의 기도는 큰소리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정직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의 능력이 그 솔직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날 때 깨어 있는 자는 즉시 기도합니다. 가을철이 됩니다. 그러면 농부들은 곡식을 거두어 드립니다. 그리고 벼를 털면 하얀 쌀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마니에 가득가득 담습니다. 창고에서 등급이 매겨지기를 기다립니다. 검사관이 와서 가득 쌓인 가마니에 후크를 푹 찌릅니다. 그러면 후크가 가마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가마니 속에 있는 쌀이 후크 속으로 확 쏟아져 나옵니다. 검사관은 그것을 들고 손에 쏟아 부으면서 빛깔과 크기, 모양, 색깔, 기름기 등을 보면서 쌀의 등급을 결정하게 됩니다. 기도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모든 신자의 마음에는 언제나 기도가 가득 차 있어서 기도해야 할 상황이 될 때 가득 찬 가마니를 찌른 후크에 찔렸을 때처럼 기도가 확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쏟아져 나오지 않는 그 자체가 이미 시험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교회를 왔다 갔다 하지만 그 마음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은 병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더 어려운 일들의 예고편인 것입니다.
시련을 만날 때 깨어 있는 자는 즉시 기도합니다. 기도가 필요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이 이미 시험에 든 증거입니다. 시련 중에 드리는 기도는 대개 즉각 응답되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밤에 울부짖는다고 해서 아침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왜 좋으신 하나님이 진심으로 울부짖었는데, 왜 하루 사이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왜 일주일이나 가게 하시는 것입니까?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응답하지 않고, 더 많이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인간의 마음의 구조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수도사업소에서 여러 번 물을 정화하고, 완벽하게 먹을 수 있는 물로 만들어서 분명히 보냈습니다. 가정에서 그물을 먹기 위해서 수도꼭지를 틀었습니다. 웬일입니까? 시뻘건 녹물이 쏟아지고, 뻘건 벌레까지 기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다 버립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수도사업소에서는 완벽한 물을 보냈고, 그리고 집에서는 틀자 도저히 음용할 수 없는 더러운 물이 나왔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중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파이프에 구멍이 뚫리거나 혹은 파이프에 가득 찬 녹이 물을 변질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찾아봅니다. 문제점을 찾기 위해서 파이프를 잘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일제 시대에 깔아 놓은 파이프입니다. 보니까 팔뚝만큼 긴 수도관인데, 남아 있는 것은 젓가락만큼도 안 남아 있습니다. 그 안에는 스케일이 잔뜩 껴서 시뻘건 녹이 가득 쌓였습니다. 그 속을 통과해서 오는 동안에 그 깨끗한 물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물로 변한 것입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고, 시험에 빠지게 될 때, 그의 마음의 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습니다. 작은 기도 제목이 생기면 영혼은 즉시 반응했습니다. 마치 방금 신병 훈련을 마친 사람이 "이병 김 아무개" 하면, 벌떡 일어나서 "충성. 이병 김 아무개", 이렇게 대답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죄가 끼고, 욕망이 끼고, 욕심이 끼고, 정욕이 끼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도할 수 있는 민첩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급한 일입니까? 마음을 고치는 것이 급한 입니까? 기도를 들어 주면 뭐합니까? 그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 못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선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당장 급한 불을 끄고 나면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른 마음이 되어서 또 뒤에서 호박씨 깔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그 마음을 고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마음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마음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켜켜이 쌓이고 녹이 슬 듯이 그렇게 운명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맑은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흘려보내 주어도 마음속에서는 온통 녹물이 되어서 여러분의 삶을 좀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고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고칠 수 있는 기간을 부르짖는 기간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저기 짐(gym)에 가니까 써 붙여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 흔들리는 것은 나뭇잎이 아니라 너의 살이다.' 시련의 바람이 붑니다. 폭풍이 몰아칩니다. 그 속에서 마음은 출렁거리게 됩니다. 죄의 헛된 욕망이 제자리를 잃고 출렁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게 마음에 붙어 있어서는 안되는 오물이었다는 사실이 확인이 됩니다.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마음은 더 크게 출렁거립니다. 고통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고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못된 질서에서 올바른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때 출렁거리고 요동치는 마음 안에서 죄와 헛된 욕망은 제자리를 잃게 됩니다.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계속되는 부르짖음 속에서 갈가리 찢어졌던 마음은 하나가 됩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기를 보는 것 같은 초점이 하나로 모아지게 됩니다. 이때 죄와 헛된 욕망이 털리고 떨어져 나갑니다. 간절한 기도 속에서 세상으로 가득 찼던 마음은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참함이 돈이 없고, 지위가 낮고, 직업이 후지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앞에 깊이 좌절하게 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허무하다는 느낌 받을 때 있지 않습니까?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십시오. 허무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위대한 철학은, 위대한 신앙은 평범한 것을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 각도에서 생각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커다란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왜 허무하다는 느낌이 듭니까? 이거는 놀랍게도 우리가 의미 있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증거입니다. 살다 보면 비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죠? 그거는 비참한 게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존귀하게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비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존귀함을 회복하고, 어떻게 그 의미를 찾아갈지를 묻는 것이 인생이고, 대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고통 때문이었지만,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죄를 깨닫게 되고, 바르지 않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의 정욕으로 흩어졌던 마음의 초점이 다시 하나님께로 모아지는 순간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잘못 세워졌던 내 마음의 거짓된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중요하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최고의 정점으로 삼는 새로운 질서가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인생사의 중요도는 재배치됩니다. 욕망은 사라지고 새 마음이 됩니다. 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부르짖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간절히 부르짖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금방 응답하지 않고 오래도록 부르짖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토마스 엘리엇(T.S. Eliot)은 "셀베이지즈"(The Dry Salvages)라는 자신의 유명한 시를 썼습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그 시를 단테의 신곡에 필적할 정도의 위대한 시라고까지 극찬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말했습니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의미를 파고들었더니 경험이 다시 살아났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을지라도 의미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의미를 다시 파고드십시오. 경험을 잃어버렸으나 다시 경험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너무 안타까운 것은 이것입니다. 왜 자신의 인생을 남의 인생처럼 사느냐 이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인생이라도 그렇게 살아주면 욕먹습니다. 살 겁니까? 안 살 겁니까? 살렵니까? 죽으렵니까? 행복해지시렵니까? 불행해지시렵니까? 천국을 가시렵니까? 지옥을 가시렵니까? 태도를 분명히 하십시오. 하나님이 있으면 믿으십시오. 없다고 확신하면,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십시오. 도대체 무엇입니까?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삶을 계속하는 동안에 우리의 아까운 인생은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우리의 인생은 덧없습니다. 우리는 늙어갑니다. 젊은 자는 늙어가고, 늙은 자는 죽어 가고,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침묵 속에 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행복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간절히 부르짖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실천으로 망가진 마음을 고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완전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자로서, 못 누리는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응답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보여주리라
마지막으로 "보여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까? 보여준들 그게 무슨 희망이 되겠습니까? 나라는 이미 멸망했고, 예루살렘 성은 짓밟혔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금과 은과 백향목을 들여 만든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겁탈당한 부녀자처럼 짓밟혔습니다. 성전의 온갖 아름다운 보석과 기명들은 이방인들의 탐욕 속에 약탈당했습니다. 어레미만 남아있는 초라하게 부서진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없다는 절망에 휩싸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까짓 제사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언제 사형당할지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 감옥 속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뭘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까? 이미 볼거 다 봤는데 뭘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보여주실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놀라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육적 이스라엘이 망하고, 물질로 지은 예루살렘 성이 부서지고, 예레미야 선지자 한 사람이 죽고 사는 것과는 비교 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그 무엇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33장 6절과 9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 …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 "…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 "…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즉, 육적인 이스라엘이 부지고, 망가지고, 역사 속에 사라지지만, 그것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영적인 교회가 탄생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가득 차게 될 영광의 하나님의 나라를 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 주신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누구나 고통과 시련을 당할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기쁜 뜻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이 괴롭기 때문에 한번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 보려고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기도가 깊어지면 자기의 마음을 살피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문제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큰 뜻이 나의 인생의 고난에, 그리고 나의 가정에, 슬픔에, 그리고 역사의 비극 속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뜻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자에게 비전을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첫째는 "네가 알지 못하는" 이라고 했습니다. 시련 속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이성의 생각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나타납니다. 저는 회심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마다 막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막으실까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시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훼방만 놓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다 막으셨습니다. 인생은 가는 길마다 꼬였고,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금 이 나이 들어서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저는 가슴이 벅찼습니다. 내 인생을 꼬이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내 갈 길을 막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내가 내 힘으로 찾았으면 얼마나 더 좋은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저는 그렇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네가 알지 못하는" 그것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그것은 "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말씀하셨습니다. 이 크다는 것은 시련 속에서 기도하면 이성으로는 도저히 기도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을 어떤 모양으로 살지 너무 관심을 많이 쓰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으로 살지를 고민하십시오.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사람이 훌륭하면 훌륭한 인생을 살게 되고, 훌륭한 인생을 살면 행복하게 마련입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요즘 꼭 쓰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세상에 공부 못하는 아이는 없다』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공부가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라면 못하는 애가 있고, 잘하는 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공부로 놓고 보면 이것을 못하는 아이는 반드시 저것을 잘 합니다. 저것을 못하는 아이는 반드시 이것을 잘 합니다. 유재석을 보십시오. 학교에서는 바닥을 헤맸지만 연예계에서는 정상을 달리지 않습니까? 여러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우등생이 아닙니까? 아니라고 하시는군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십시오. 무엇을 더 많이 누릴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얼만큼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인생을 살 것인가 생각하십시오. 가슴에 새기십시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적어도 내 인생의 주체다." 이런 믿음을 갖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큰일을 부르짖는 자에게 행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은밀한 일"입니다. 히브리말로 베추로트(bechulot)라고 되어 있는데, "감추다"라는 동사의 수동분사 여성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감추어진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한 개나 두 개가 아니라,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염려하는 대신 간절히 부르짖어 보십시오. 사람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납니다. 시련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이 보일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일이고 비밀이지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드러나는 일입니다. 보이는 현실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감추어져 있으니, 부르짖는 사람, 응답받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 설레지 않습니까? 이제껏 살아왔던 뻔한 인생, 그리고 갈 길이 정해진 것 같은 뻔한 인생, 삼류 드라마 마지막 회를 예고할 수 있을 것 같은 식상하고 너절한 이야기 같은 인생이 아니라, 비밀에 감추어졌던 일, 꿈꾼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고, 예견한 적도 없는 놀라운 일이 신세계처럼 여러분의 인생 앞에 펼쳐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익사이팅(exciting)한 일입니까? 가보지 않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그 즐거움은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고 계시니, 나는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두렵습니까? 무엇이 염려가 됩니까?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쫄지 마십시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고, 어차피 잘 살아도 못 살아도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영광도 잠시고, 괴로움도 순간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태어나게 하셨을까? 그리고 나에게 굽이굽이 수많은 인생의 사연을 겪으면서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내가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보석 같은 존귀한 존재이기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을까? 궁금한 건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밀한 일들을 부르짖어 응답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왜 또 내일입니까?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또 기도를 내일로 미루십니까? 한번 결심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젊은 날에 하나님 앞에 한번 결단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진흙탕에 빠진 것 같은 이 젊음의 시기를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이 불확실한 인생을 사느니 나는 여기서 인생을 접고 싶습니다. 하나님, 내 손을 붙들어 이 흑암 속에서 인도하시던지, 아니면 놔 버리십시오. 하나님, 주님은 좋으신 분이니 나를 놓으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테니 응답하시옵소서. 내가 알지 못했던 크고 위대한 일을 보여주십시오. 앞으로 남은 젊음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중년은 어떻게 맞이하시겠습니까? 그냥 이렇게 허우적거리면서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것처럼 질퍽거리면서 살다가 죽는다면 누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 주겠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은 있기나 한 것입니까? 나는 만약에 이렇게 질퍽되는 인생을 산다면, 나는 금식기도라도 하겠습니다. 아직 젊으시지 않습니까? 일주일 굶어도 죽을 리 없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게 기도 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나를 굶겨 죽이시든지, 응답하시든지,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보이시던지, 둘 중에 하나 결단을 내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며 절약되는 인생의 날들은 질척거리며 허비하는 인생의 날의 길이와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체적으로 사십시오. 쫄지 마십시오. 어차피 여러분이 살아야 될 인생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기도해야 할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선물입니다.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껏 못 가본 길을 가게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한 후에야 응답해 주시는 것은 그렇게 부르짖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훈련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주체적으로 사십시오. 남의 인생 같은 내 인생 필요 없습니다 내 인생 같은 내 인생을 사십시오.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고, 내가 감당한다는 마음으로 인생을 사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십시오. 허무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존재로 태어났다고 믿으십시오. 비참하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로 태어났다고 확신하십시오. 여러분은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 비밀을 보이십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아멘.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5 (2021.07.11._주일오전)
5. 기도는 어떻게 절망을 바꾸는가?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스룹바벨 이후 약 80년 후쯤 이어진 두 번째 포로 귀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타락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이주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버리고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였다고 9장 14절에서 말합니다. 경건한 에스라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이제 범죄 한 이스라엘 앞에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시간을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급기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II. 기도는 어떻게 절망을 바꾸는가?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절망을 바꾸는가? 위기를 맞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잘 알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을 때 괴로운 일을 만나면 고립감을 느낍니다. 절망은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다릅니다. 절망은 기회가 됩니다. 왜냐하면 좌절하는 대신 바로 그 절망하는 순간에 하나님밖에 의지할 이가 없다는 믿음의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격차에서 좌절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꺾어지는 순간이고, 이러한 마음은 반드시 간절한 기도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A. 한 사람이 기도함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첫째는 한 사람이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라였습니다.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었습니다. 비극적인 소문을 들었을 때 그가 보여준 태도 자체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말해 줍니다. 에스라 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스 9:3-4). 더욱이 지도자들이 이 타락한 일에 으뜸이 되었다고 9장은 말합니다. 끔찍한 죄는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어서 예루살렘까지 돌아왔고, 성전까지 지어졌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사람들이 이렇게 보편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으니 이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이 한 사람 에스라가 기도한 세 개의 조건을 보여줍니다.
1. 성전 앞에서
첫째는 "성전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성전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성전을 향하여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역대하 7장 15절과 16절에 기초한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곳에서" 즉, 성전입니다.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 7:15-16). 개인적인 문제든지, 국가적인 위기든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올라가거나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유복한 여자였지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첩에게 심한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그 괴로운 마음을 안고 찾아간 곳은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받으며 굴욕적인 항복 요구 문서를 받았을 때, 히스기야 임금이 그것을 펼쳐놓고 기도한 곳도 성전을 향해서였습니다.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절망적인 소식을 들은 에스라가 찾아간 것도 바로 이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아주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솔로몬 성전의 영광과 웅장함과 화려함에 비하면 이것은 정말 초가집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의 지대가 놓일 때 솔로몬 성전의 위대함을 기억하던 예루살렘의 노인들은 이 지대가 놓일 때 그 초라함을 보고 대성통곡하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에스라는 곧바로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그는 절망 중에 참모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를 문책할 계획을 세우거나, 누가 이방 여인과 통혼했는지 조사를 시작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떠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 앞으로 갔습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에서 성전은 영적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본 예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갑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 당신은 어디에서 도움을 받습니까? 그림자인 성전이 바라보고 있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십시오. 그분 앞에 나아가십시오. 절망의 위기에서 찾아갈 분은 오직 그리스도 뿐입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생기지만, 해답은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집을 찾으십시오. 아버지의 집에서 간절히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어려움을 만나 괴로워하며, 염려하느라 시간을 보내며,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찾으십시오. 그런 사람이 모일 때 기도하는 교회가 됩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성령 안에서 능력을 받으며,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닙니까? 절망의 순간에 그리스도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고, 여러분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엎드려 울며
두 번째는 "엎드려 울며"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도한 자세입니다. 그는 엎드려 울었습니다. "엎드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미트나펠(mitnapel)" 이라는 단어로 분사입니다. "자신을 던져서 떨어뜨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그는 충격적인 죄에 대한 소식으로 종교적인 절망감을 느낀 나머지, 몸을 지탱할 수 없어서 그냥 자신을 던져 떨어뜨려 버린 것처럼 엎드렸던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신체적으로 무너졌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타락으로 물든 이스라엘의 이 죄 때문에 그는 낙심하였습니다. 그는 엎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무너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며 에스라는 절망했습니다.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엎드린 채 울었습니다. "보케 (boke)"라는 이 히브리어 단어는 흐느끼는 소리가 아니라, 흐느끼는 울음이 아니라, 소리 내어 통곡하는 동작이 계속되고 있는 분사 형태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기도가 한 번에 끝나는 울음소리가 아니라, 계속 하루 종일 지속되는 통곡의 소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절망 중에 자기의 마음을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엎드린 것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와 복종의 표현이었다면, 통곡의 울음소리는 자기의 비참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옛말에 우는 자가 깨달은 자라고 했습니다. 사람 앞에 우는 자는 잘해봐야 사람들의 동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직접 위로해 주신다고 마태복음 5장 4절은 말합니다. 그것이 하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 앞에서 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 앞에서 우는 사람에게 절망에서 벗어날 희망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동굴에서 도저히 나아갈 곳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든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서 어디론가 달음박질하다가 넘어지고, 깨지고, 상처 입고, 길을 더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하나님께로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다. 거기서 엎드립니다. 거기서 자신이 무너지고 간절히 울부짖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이 어두운 동굴에서 헤쳐나갈 길을 열어 주십시오." 하나님은 한번에 폭탄이 터지듯이 동굴의 뚜껑을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 한 줄기 희미한 빛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빛이 있다는 것은 외부 세계와 통하는 길이 거기 있다는 뜻이고, 이제 비로서 어디로 나가야 될 지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런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상황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고, 너무나 상황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믿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처음 예수를 믿게 될 때 여유가 있고 모든 것이 평화로워서 예수 믿겠다고 결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인생의 벼랑 끝까지 내몰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점까지 갔기 때문에,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부르짖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틀렸습니까? 그러면 그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을 찾는 기회가 되었는데, 왜 지금은 이 어려운 순간이 좌절하고 낙심하는 기회가 됩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온갖 잡다한 것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감각적인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영상으로 마음을 물들인 나머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조차 없이 살아가면서, 불평만 늘어놓는 이 삶의 끝에 무슨 영광을 보겠습니까? 사람 앞에 우는 자는 기껏해야 사람의 동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매우 매우 드문 일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사람들 앞에 늘어놓아 보십시오. 열 명 중 아홉 명은 아무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한 명은 여러분을 개무시합니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갖고 나아가,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우는 사람들이 되어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주십니다.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가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어떻게 예루살렘까지 도달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고레스왕의 칙령이 떨어졌습니다. 제국에 있는 많은 나라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족속들의 종교의 자유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도 이 칙령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특별히 무너진 성전을 재건축하고 거기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꿈을 꾸는 것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기하는 많은 족속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것을 방해했고, 성을 짓거나 혹은 성전을 짓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수많은 난관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많은 대적이 매복하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했다고 에스라 8장은 말합니다.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서 가장 비천한 자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어린아이들의 길을 평탄하게 인도해 달라고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1년도 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모두 타락하고 이방인들과 통혼을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과거를 추억하면서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한 예루살렘인데, 어떤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여기에서 성전을 짓고 다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셨는가를 생각할 때 그는 성전에 엎드려 울며 통곡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통곡하고 있는 에스라를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주면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더 큰 기쁨을 주면 울던 이 사람의 통곡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말하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 천국을 통째로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사람에게 동정을 구하는 대신 그분 앞에서 통곡하십시오. 그분 앞에서 마음을 쏟으며 우십시오. 자신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죄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자원으로만 사는 줄 압니다. 자신이 힘든 것이 이 세상 자원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의 자원도 우리에겐 너무나 필요합니다.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는 안정적인 직업, 물질이 없는 사람에게는 물질, 그리고 건강이 없는 사람에게는 건강, 이 모든 것들이 지상의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도 지상의 자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고, 힘을 다해서 이 지상의 자원을 확보하면서 우리가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고, 이것만으로 인생의 모든 힘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지상 자원을 많이 가진 사람들 중에는 불행한 사람이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천상의 자원의 부족입니다. 지상의 자원으로 이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시절은 우리도 지상 자원이면 충분하다고 여겼고, 인간의 행복이 모두 거기에 달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서 비로소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단지 지상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천상 자원의 부족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청년 시절에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직업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실직을 하고, 하던 사업이 어려워지고, 그리고 고용이 불안정해집니다. 그래서 친구도 만날 수 없고, 그래서 교회도 나올 수 없고, 그래서 예배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사람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은 그때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간절히 하나님을 믿고 찾으라고 주신 것이 믿는 사람의 특권 아닙니까? 그래서 직업을 잃었으면, 이때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열심히 기도회에 나오고, 열심히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서, 바쁠 때 못했던 영적인 일에 힘쓰면서 주님을 만나 신앙적으로 크게 도약해야 되겠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까? 바로 이 때만큼 내 영혼을 돌볼만한 소중한 기회가 없고,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맡기고 아버지한테 한번 매달려 보려는 결심을 하라고 신앙을 준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여러분은 직업을 자랑하고, 여러분의 넉넉한 환경을 자랑하기 위해서 예배당에 모이고 친구들을 만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엎드려 울며 기도할 때, 그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는 자가 아는 자이고, 통곡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습니다. 눈물이 있는 기도 생활로 예수를 만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죄를 자복할 때
셋째로는 기도한 내용이었습니다. "... 죄를 자복할 때에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고백을 뜻합니다. 무슨 죄입니까? 에스라가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그가 이방 여인과 통혼을 했습니까? 그가 이방 여인을 며느리로 맞았습니까? 개인적으로 에스라는 이런 끔찍한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였지, 에스라가 지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지금 성전에 나아가 엎드려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죄를 자복했는데 남의 죄를 자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에스라에게는 이스라엘의 죄가 곧 자신의 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몸이라고 여기는 지체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끔찍한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고,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근심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들은 9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방백들이었고,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근심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스라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단지 근심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곧바로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집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엎드려 통곡하였고 죄를 자복했습니다. 댐에 물이 가득 차자 터지듯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찼던 슬픔이 둑처럼 터지면서 기도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실로 긴 시간 동안 그치지 않는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간구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가 바로 자기의 죄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에스라 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가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 바깥에서 수많은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시는 대신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엎드려 우는 한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불씨 삼아서 커다란 영적인 각성과 위대한 부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어서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의 현실로 바꾸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라고 여러분 가정에서 먼저 예수를 믿게 하셨고, 여러분 친구들 중에서 먼저 예수 믿는 사람이 되게 하셨고, 여러분 이웃 중에서 먼저 예수 믿는 사람이 되게 하셨고, 더 많이 말씀을 깨닫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죄를 자복할 때가 아닙니까?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이웃의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죄를 뉘우칠 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러분이 가족을 죄를, 지체들의 죄를, 그리고 이웃의 죄를 자복하면서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에 이러한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이렇게 죄를 자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백성들이 통곡함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통곡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겠습니까? 홀로 성전을 찾아 기도했던 에스라의 통곡하는 기도 소리는 쉼없이 이어졌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타락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는 눈앞에 있었습니다. 누가 이 절망적인 상황이 쉽게 변화될 것이라고 믿었겠습니까? 예루살렘에 따라온 이 사람들은 원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주전 722년이었고, 남왕국 유다가 망한 것이 586년이었습니다. 그리고 80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라서 고토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이미 타국에서 살았습니다. 물론 그들의 처지가 좋지 않았겠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나쁘진 않았을 것입니다. 돈도 벌고, 직업도 가지고, 어쨌든 가족도 거느리고, 어딘가 정착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레스 칙령의 소식을 듣고 중단되었던 성전이 다시 건축 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을 징집한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서 1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의 큰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자원해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겠다고 신청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레스왕의 선포를 듣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은혜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험한 예루살렘의 길로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도 되지 못해서 마음은 미끄러져서 죄를 짓게 되었고,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는 난잡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통곡하는 에스라를 보면서 그들의 양심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광고와 혹은 요란한 선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통곡하는 한 사람 에스라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은 완악한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타락한 현실에 무감각 했던 많은 백성들이 통곡하는 에스라 곁에 모였습니다. 처음에 에스라 혼자 통곡하고 있었고,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모였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크게 통곡했습니다. 설교를 듣고 통곡한 것이 아니라 에스라의 통곡하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을 느꼈고, 거기서 회개의 슬픔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에스라의 기도하는 애절한 마음이 설교가 없이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전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문제는 백성들에게서 시작되었지만 해결은 에스라의 기도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범죄한 자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많은 남녀가 모였습니다. 이 일에 연루되었을 리가 만무한 어린아이들의 큰 무리까지 모여 어른들이 지은 죄를 자신의 죄인 것처럼 뉘우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정에도 없는 통곡의 대기도회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회개의 긴 통곡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때 스가랴라는 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1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스 10:2-3) 이것은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커다란 영적인 각성과 위대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교훈과 명령을 따르기로 결단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흐느적거리며 살고, 기도하지도 않고 염려와 근심으로 휩쓸리면서, 세상 사랑으로 얼룩진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과연 이것으로 이 난감한 위기를 타개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어두운 길을 우리가 빛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많은 사람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부흥의 불씨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절망은 마귀가 주는 사탕이고, 희망은 하나님이 주시는 쓴 약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가 인간이 절망하도록 주기 위한 사탕은 우리로 하여금 노력할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갖게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의 대가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절망에 빠지고 싶으냐?" 마귀가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그 마귀의 음성을 들으면서 달콤하게 마귀의 말을 따르면 좌절하고, 절망하고, 실패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귀의 품에 안기는 뜨거운 사랑 있겠습니까? NO. 그런 건 없습니다. 마귀는 그런 것 자체를 원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파멸 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 구렁텅이 속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께 돌이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희망을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내게로 돌아오라. 너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엎드려 통곡하고, 그리고 다시 너의 죄를 자복하고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만나 주리라. 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너를 건져주리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너를 위로해 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 됩니다. 절망으로 부르는 사단의 속삭임은 사탕이지만, 희망으로 부르는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쓴 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치료되고 새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려움을 만났습니까? 인생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까? 에스라처럼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였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러운 마음의 감정의 탁류에 휩쓸려 내려간다면 여러분이 불신자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 에스라의 기도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의 돌 같은 마음을 녹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들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좌절했지만, 그러나 믿음이 있는 에스라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어찌하든지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집으로 가게 만들었고, 거기서 엎드려 울게 만들었고,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자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삶을 스스로 개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빛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기도하는 당신이 그런 위대한 부흥의 불씨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지도자였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가 지도자였다고 해도 만약에 타락한 지도자였으면 결코 이런 일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겉으로는 기도해도 마음속으로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순수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시기를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말씀하셨고, 그 약속은 우리에게도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만 잘될 뿐만 아니라, 여러분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이 여러분 때문에 신앙의 영향을 받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앙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사랑은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부딪혔으나 해결해 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절망은 당신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친구, 이웃을 모두 불행하게 하는 길이고, 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절망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고, 좌절은 일어나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며, 기도하는 자의 간증입니다. 이런 간증이 없는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좌절 속에서 슬픔을 곱씹으며 그렇게 사탄의 품에서 죽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그 절망 속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고 만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으십니까? 낙심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낙심한 사람들을 좌절로 이끄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친구, 여러분의 친척,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들의 운명이 달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절망을 위기로 바꾸는 기도의 능력을 맛보고 새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6 (2021.07.18._주일오전)
6. 절망을 찬송으로 바꾸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다윗이 블레셋으로 피난했으나 거기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다시 유대 땅으로 도망쳐 나왔고, 사무엘상 22장에 나오는 그때의 일을 배경으로 이 시는 쓰였습니다. 블레셋 가드 왕 앞에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는 사울의 박해를 피해 아둘람 굴에 은신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안사람들이 불쌍한 백성들과 함께 모였다고 사무엘상 12장 1절과 2절에서 말합니다. 이 시는 위기 속에서 부르짖는 탄원시입니다. 탄원으로 시작했으나 가슴 벅찬 찬양으로 끝납니다.
II. 절망을 찬송으로 바꾸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절망을 찬송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까? 다윗이 가장 고통받던 시기에 쓴 이 노래는 고난받는 신자들에게, 특히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큰 용기와 감화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짧은 성경 구절에서 이 주제와 관련해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A. 마음이 확정됨
첫째는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 시인의 마음이 확정되었다고 고백한 것은 언젠가 그의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재앙과 같은 죽음의 위협과 악인의 비방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상황만을 바라보았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 순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확정되었다"는 이 단어는 나콘(nakon)이라는 히브리어인데, "세워지다, 견고하다, 도덕적으로 바르게 정돈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분사형입니다. 그런 동작이 현재적으로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 똑같은 고백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는 그 사실이 놀랍고, 또 확실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마음이 확정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두 마음을 품지 않음
첫째는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마음은 서로 다른 사랑 때문에 나뉜 마음이며, 자기 이익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집착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두 마음은 크게 네 가지 범주로 구분이 됩니다. 첫째는 전쟁과 관련해서입니다. 싸우러 나가지만 물러서려는 마음이 동시에 있는 것, 이게 결국 두 마음입니다. 섬김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두 마음이라고 시편 119편에서 말합니다. 진리와 관련해서는 진실을 주장하면서도 거짓을 말하는 마음이 두 마음이라고 시편 12편이 말합니다. 제사와 관련해서는 하나님께 제사하면서도 우상을 동시에 섬기려는 마음이 두 마음이라고 호세아 10장이 말합니다. 그러니까 전쟁하러 나가지만 도망갈 마음도 있는 사람,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진실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거짓을 말하는 마음, 하나님께 제사하면서도 우상을 섬기는 마음이 바로 두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확정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싸우는 전쟁, 바치는 섬김, 전하는 진리, 그들이 올리는 제사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두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는 확정함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1장 6절과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한번 이런 그림을 그려 보십시오. 아주 넓고 넓은 산속에 큰 호수가 있습니다. 바람 한점 없어서 아주 잔잔한 호수입니다. 하늘에서 두 개의 돌멩이가 떨어집니다. 풍덩하고 빠지고 나면 당장은 상관이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두 돌멩이는 커다란 파문을 그리게 될 것이고, 중간 지점에서 두 물결은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섬기는 마음은 확정된 마음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가 잡힌 마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도 아니고 수없이 찢어 있으니, 그 돌멩이 하나가 공중에서 폭발하여 수백 개의 파편으로 변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물결이 호수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시련을 당하는 자신의 현실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삶의 모든 상황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해석하는 마음, 이것이 한 마음을 품은 마음이고, 이 마음이 확정된 마음입니다.
2. 주님을 향해 뜻을 정함
또 한 가지는 "주님을 향해 뜻을 정한" 마음입니다. 구약에서 "사람이 뜻을 정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선한 일을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 1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 다니엘은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워낙 학식이 뛰어나고 총명했기 때문에 바벨론에서도 그런 인재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극진히 그들을 대접하고 잘 길러서 제국을 통치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특별 대우는 식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왕이 먹고 마시는 상에서 나오는 음식과 똑같은 음식으로 먹을 수 있도록 특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다니엘은 그것을 먹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아마도 율법에서 금한 음식이 그 안에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어쨌든 그 음식을 먹는 것은 자기를 더럽히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었으니,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데 포로로 끌려온 자신이 또 죄를 짓는다면 이스라엘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다니엘은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목표는 자기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자기의 그 뜻에 맞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목숨을 잃어버리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뜻을 정하는 것이고, 이런 마음이 바로 확정된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원래 정함이 없습니다. 변하는 것들에 마음을 두는데 어찌 정처(定處) 있겠습니까? 뜻을 정한다는 것은 그냥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묶는 것입니다.
사이렌이 큰 소리로 울리고, 다급한 경고 방송이 해안가 마을에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큰 폭풍이 온다는 경보였습니다. 어부들과 선원들은 재빨리 바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던 자신의 배들을 바짝 항구에 붙이고, 평소 때보다 더 단단한 밧줄로 한 군데 두 군데 묶고, 그것도 모자라면 배끼리 단단히 묶어서 웬만한 타도가 밀려와도 배가 부서지지 않게끔 조치를 취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태풍이 온다고 하면 비싼 돈을 들여 기중기를 불러서라도 그 배를 물에서 건져 올려서 육지의 잠시 보관하기도 하는 것이 풍랑을 대비하는 어부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확정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누가 확정하는 것입니까? 확정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나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빌립보서 4장 7절에서 말합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탄식하고 있을 때 시인은 자신이 참회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변화되고 쉽지만 자신은 스스로 새롭게 할 힘이 없으니, 내 마음의 주인인 주님께서 내 마음을 재창조해달라고 탄식합니다. 시편 51편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것을 보면 우리 마음의 주인, 내 마음을 확정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또한 우리 마음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라고도 말합니다. 마음을 정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니 우리의 선택에 따라 마음은 행사되고, 그 결과에 대해 우리가 책임을 지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나님 아니면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없다고 핑계 대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은 너 자신이니, 네 마음을 너 자신이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에 "지키다"라는 단어는 적군에게 공격을 받을 때 성을 파수하는 것과 같은 동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올바른 선택을 할 때 마음은 올바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하나님께 미루지 말고 너 자신의 마음을 너 자신이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올바른 선택을 할 때 마음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생명의 힘을 공급해 주는 샘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마음은 고갈되고, 삶을 위한 생명은 사라지게 되어 말라깽이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두 가지 사실을 모두 말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확정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함께 강조합니다. 결국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확정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마음이 확정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확정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환경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지식은 마음 공부이고, 은혜에 비밀은 마음 살림에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신앙을 탐구해 가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 자기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신앙이고, 은혜를 통해서는 죽었던 자신의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함으로써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신명기 4장 9절에서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심지어 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라고까지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누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새롭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지 않으면 새롭게 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 새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새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새롭게 한 사람이니,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갖는 사람을 주님은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확정함에 있어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우리 안에서 일하심으로 확정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확정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선한 뜻을 확정하는 것은 성경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신자의 마땅한 도리로서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모든 공경의 의무를 다하라고 명령할 때마다 항상 따라서 제시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9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입니다. 시인은 생애적인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직면한 현실을 "재앙"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는 고생을 했습니다. 시편 57장 1절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비방하는 자들은 시인을 삼키려고 하였고, 비난하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서 가엾은 시인의 마음을 찔렀다고 시편 57장 4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니 그가 겪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절망적이었는지, 지금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닌 자의 삶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의 순간에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확정하고 또 확정하였습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과 함께 죽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재앙과 같은 절망적인 현실들의 그림은 사라지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것은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과 온 세계에 가득한 영광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에 자신의 마음을 묶은 시인의 마음에 평화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요동하는 신자의 마음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니, 하나님과 세상으로 찢어져 분리된 마음입니다. 확정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니 이 세상 사랑이 울고, 세상을 사랑하자니 하나님 사랑이 눈물을 흘립니다. 언제, 어느 시간에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시험을 이길 수 없다고 야고보서 1장 6절은 말합니다.
이 시간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든 것은 세상이 힘들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간수하는 게 힘들어서 힘든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버렸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 사는 게 힘들어서 힘든 것이라면 그 옛날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던 때는 그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았습니까? 고난과 시련이 겹치고 절망적인 상황이 덮칠 때에도 여러분은 마음을 오로지 하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주님의 품을 파고들고, 고난이 겹치면 겹칠수록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 사랑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마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 더 이상 마음을 방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확정하십시오.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룰 수 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로 다짐하십시오. 그분과 함께 살고 죽겠다고 다짐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은 이제 하나님을 떠나서 생존할 수 없는, 하나님에게 붙들려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고정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도 시인처럼 확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B. 하나님을 찬송함
마지막 두 번째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마음을 확정하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절망적인 현실에 낙담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단과 소망이었습니다. "···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편 57:7)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이 없는 노래를 부르자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복을 받는 조건으로써 하나님께 아부하듯이 찬양을 하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생사간에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마음을 확정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인에게는 어려운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확정된 마음에 부어진 힘이었습니다.
재앙과 같은 현실은 계속되었습니다. 악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실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가슴속에서 솟아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낙담하는 대신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온갖 좋은 것을 주셔서 다윗의 영혼을 존귀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별명으로 부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때문에 존귀하게 된 자신의 영혼과 생각나는 모든 악기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편 57:8)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와 신념으로 가득 찬 시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현실이 다가올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존재이니, 내 영혼아 깨어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비파와 수금아 모두 깨어나라. 이제 나와 함께 우리 주 하나님을 찬송하자. 아직도 밤이냐? 내가 깨워 새벽이 오게 할 것이다." 이렇게 선언하면서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인 재앙과 같은 모든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하나님과 함께 이 현실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담대한 선언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어찌하여 재앙처럼 느껴졌던 절망적인 현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할 수 있는 가벼운 영혼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놀라운 단서를 2절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편 57:2)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재앙적인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로 피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품 안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바라보는 대신 오히려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과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희망 사이에서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했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억제할 수 없는 정으로 시련 중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모든 일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며, 절망의 언덕에서 하나님께 손을 들었습니다. 다윗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자비롭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오직 인자와 진리로 자기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솟아났습니다. 그리고 현실이 보여주는 비관을 딛고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악인은 여전히 날뛰며 시인을 찾고 있었고, 그는 여전히 광야의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자기를 찾아와 준 사람은 늠름한 군대가 아니라, 사울의 치하에서 갈 곳이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눈앞에서 아귀다툼하는 악인들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절망하는 대신 하늘 위에 높이 들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과 함께 죽으리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모든 일을 이루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러자 재앙과 같이 절망적인 상황은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할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세상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힘든 여러분의 마음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십시오. 이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피난처로 도망가십시오. 그분의 품 안에서 여러분의 죄를 고하십시오. 여러분이 얼마나 힘겹게 살고 있는지 주님께 눈물로 아뢰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시인에게 주신 것과 같은 놀라운 은혜의 영광을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폭풍을 만난 것 같은 인생의 바다에서 어디에 닻을 내리려고 하십니까? 닻을 내리지 않고 떠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쓸려 다니며 여러분은 온갖 고생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이 소망은 예수의 보혈을 힘입어 휘장을 지나 담대히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소망이었습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 있습니까? 거기서 흐느껴 운다면 절망은 고통으로 변할 것입니다. 고통의 밤바다를 지나고 있습니까? 거기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마음을 확정하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이 시인처럼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려운 때를 믿음으로, 기도로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7 (2021.07.25._주일오전)
7. 마음을 토하는 기도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고난 받던 다윗의 찬양시입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함으로써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요행과 불행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인생의 덧없음을 묵상하고, 거기서 의미 있게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시인은 불같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묵상하며 이 고통스러운 시기를 견뎠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은 토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II. 마음을 토하는 기도
악인들에게 에워싸인 채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반석이요, 구원이시요, 요새이심을 6절에서 고백합니다. 고난 받을 때 고백의 힘은 위대합니다.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고백은 마음에 놀라운 힘을 줍니다. 요동치는 마음을 잠잠하게 하고, 기운을 잃어버렸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A. 주님을 의지하라
첫째는 '주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시편 62:8) 가장 고통을 받던 때에 시인은 믿음으로 분투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삶의 지혜와 사랑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자신이 깨닫게 된 지혜를 믿음이 흔들리는 백성들에게 교훈으로 전했습니다.
1. “백성들아”
제일 먼저 그는 "백성들아"라고 노래합니다. 히브리어로 '암'('am)이라는 이 단어는 왕권이나 종교 의식과 관련해서 사람을 가리키거나 신과 대조되는 사람을 가리키거나 혹은 나라와 대조되는 인구로서의 사람을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개념이 아닌 족속의 개념입니다. '암'('am)이라는 단어, 백성이라는 이 단어는 특히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관계를 맺으시면서 언약과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대해서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약 백성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언약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이야기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그 나라의 사람들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이 가장 위대하시며, 그분이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권능있는 분이시며, 지혜가 충만한 분으로서, 우리 하나님의 언약 백성 모두를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자비, 긍휼을 베푸시고,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가장 잘 아시는 통치자로서 우리의 갈 길까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우리가 그러한 관계를 하나님과 맺고 있는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고난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시시로”
그러면서 시인은 "···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라고 했습니다. '시시로', 히브리어로는 '베콜 에트'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 직역하면 '모든 때 안에서' 혹은 '모든 시각 안에서', 이런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나, 항상'이라는 말이 훨씬 정확한 번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도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121편 4절에서 노래하는 바와 같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아니하시는 분으로서 자기의 백성인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배은망덕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사 간에 의지할 유일한 피난처이시며 힘이십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매 순간 바로 이 사실을 마음의 정(情)으로 온전히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일생에 한 번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신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일생을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자는 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내가 말세에 너희들 가운데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 특별하게 받아드려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거의 기도하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시시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많이 받으면 부족한 것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또 고난을 받으면 부족한 게 너무나 많아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그 대신 시시로 자신과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시면 그 증거 때문에 하나님을 언제나 사랑해야 하고, 고난을 받으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수 없다고 상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했습니다. "네가 교회를 떠나면 언제쯤 양심의 가책이 깨끗하게 되어서 '하나님 이제 제가 떳떳하게 주님께 나옵니다.' 그럴 때가 오겠느냐. 너는 죽을 때까지 오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지옥에서 만납니다. “그대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 있는 그때를 위해서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존하는 마음은 단지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심정(心情)에 달려 있습니다. 매 순간 주님과의 생생한 교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어제 하나님을 만났던 것으로 자만하지 마십시오. 오늘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로 살아야 됩니다. '시시로' 아니,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를 의지하라”
그리고 이어서 "그를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히브리어에 전치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의지하라'가 아니라, '그분 속으로 의지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되 말로만 겉모양으로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속(into God)으로 속속들이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로마서 8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라는 이 구절도 그리스어 성경에는 "하나님 속으로 적의(敵意) 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적의(敵意)는 반감과 대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힌 죄인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대, 겉으로만 원수인 것처럼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속을 향하여 하나님을 속속들이 미워하고 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육신의 생각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겉모습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 드려 그분 속으로 깊숙이, 남김없이 파고들며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것은 사전적으로 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겉과 속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나님이 앞이 어디에 있고, 뒤가 어디에 있겠으며, 속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이것은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속속들이 미워한다는 것은 사람이 그 마음 속속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다는 부메랑의 뜻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속으로 의지하라'는 이 표현은 그분을 의지하되 깊숙이 우리의 마음속 어느 한 구석도 그분을 의지하지 않은 곳이 없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누가 감히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공언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정도입니다. 얼마나 진실로 마음속 깊이 의지하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에 감추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접어둔 부분이 있다면 깊은 심연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기도함으로써 응답을 받기 때문에 중요한 시간이 아니라, 그 기도를 하는 순간에 자기 내면의 상태와 영적인 상황을 측정해 보는 시간으로서 기도 시간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가 시작이 되었는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펌프질을 수없이 했는데 물이 쏟아지지 않습니다.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쉬'소리는 나는데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펌프와 수도꼭지가 문제가 아니라 저 밑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아닙니까? 그러면 결국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기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기도하기 직전까지 살아왔던 삶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마음에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 되니까 계속 기도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기도 시간이 그런 사람에게는 참는 시간입니다. 빨리 이 시간을 끝내고, 다른 일로 돌아가서 정신을 다시 분산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데 모으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결국 이것입니다. 기도하기 직전까지 죄를 지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의 조율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악기를 연주할 때 최고의 상태로 조율을 하고 연주를 합니다. 그것도 집에서 해 오는 게 아니라 연주 직전에 무대 위에 올라가서 모든 악기를 조율하는 것입니다. 최상의 소리를 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조율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그 시간에 마치 물을 틀면 수도에서 물이 확 쏟아져 나오듯이 한 번의 기도가 확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기도하기 직전까지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며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마음은 의존의 마음이고, 의존의 크기는 기도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때때로 말씀드렸지만 하나님 제일 싫어하는 게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걸 배워야 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는 찬양이 하나가 있습니다.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살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당연히 건강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질병으로 깊이 고생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가면, 옛날에 당연한 그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붙들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마음은 언제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슬픔 때문만이 아니라 기쁨 때문에,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에 그 마음을 좍 펼칠 때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서 그 눈물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의존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살았던 모든 위대한 인물들에게는 공통적인 인격적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온통 엄마를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B. 네 마음을 토하라
마지막 두 번째는 "네 마음을 토하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가르쳐줍니다.
1. “마음을”
제일 먼저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무엇입니까? 재미있는 것은 '마음'으로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레바브켐'이라고 나오는데 직역하면 '너희들의 한 개의 마음'입니다. 사람은 여럿인데 하나의 마음입니다. 결국 모양과 본성, 특징 재능, 기호, 모든 것이 달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모두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재능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다르고, 여성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다르고, 늙은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다르고, 어린애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다른 게 아니라, 똑같다는 것입니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달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한마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내적 자아, 경향성, 성향, 이성, 양심, 인식' 등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이 마음은 생각과 행동을 주관하고 있는 정서의 중심 자리를 가리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도 하고 대적하기도 합니다. 신앙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죄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사랑과 반역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모두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은 마음을 지키는 전쟁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에서 요동치면서 내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싶기도 하고, 대적하고 싶기도 하고, 순종하고 싶기도 하고, 불순종하고 싶기도 합니다. 신자의 불행은 그래서 바깥에 펼쳐진 환경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간수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자기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것은 다시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서약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천사와 야수를 동시에 키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수에게 먹이를 많이 주어 감당할 수 없는 짐승으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천사들을 잘 양육해서 하나님 닮은 마음이 됩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것은 이제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마음으로 삼겠다는 서약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지신 분이 가난한 사람처럼 사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를 온전히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까지 나누어 주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왜 예수님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으셨던 이유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으신 것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모든 일을 살아계시는 동안에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들이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감각으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본받기가 상대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감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오셔서 눈에 볼 수 있는 행동으로 모두 섬겼고,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음의 연상으로 떠올리고, 역사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의 마음을 본받도록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성화의 완성은 그 마음이 온전히 예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샘물에서 시냇물이 되어 행동으로 흐르고, 습관으로 흐르고, 인격의 강이 되어서 온 땅을 두루 적시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음 때문에 불행해졌는데,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깊은 병에 걸려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지만 자기 질병에 대해서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말씀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의 마음을 품은 모든 성도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조용히 아침에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어제도 사무실에 나와서 성경을 읽는데, 다음 주에 설교할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한 구절에 마음이 꽂히면서 한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 쓰레기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시나 라고 말입니다. 제가 그런 착한 마음을 어디서 전수받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식당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장소에서, 심지어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경치 좋은 곳에서도 그런 마음을 전수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마음의 보고(寶庫)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멀리하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삶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으며, 형통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룬 성공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하나님께 데려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종종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제일 이해 안되는 게 헤어질 때 '우리 언제 한번 만나서 밥 한번 먹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가서 언제나 올까 대기를 하고 있는데, 석 달이 지나도 안 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한국 사람이 흔히 하는 빈말이었습니다. 허언(虛言)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빈말이 없습니다. 아주 쉽게 얘기하면 마음이 담기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말로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을 느끼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졸다가 그냥 가는 말씀을 어떤 사람은 듣고 큰 감동을 받으면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은혜로운 보고를 받았는데, 진짜 전혀 예수를 안 믿는 몇 사람이 '아사밤'을 읽고 등록을 했다고 합니다. 콘서트를 봤다고 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성령님이 하나님을 모르던 그 사람의 마음에 말씀으로 조명을 하셔서 그 마음에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한순간에 눈꺼풀이 벗겨지면서 예전에는 이성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마음의 눈꺼풀이 벗겨지면서 마음의 논리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말씀에 묶어두지도 못한 채 이것저것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지려는 것은 마치 구멍이 뚫어져 가라앉고 있는 배에 화물을 잔뜩 실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구멍이 뚫어진 배인데 진귀한 화물을 잔뜩 실어서 어디로 갈 것입니까? 포구를 빠져나가기 전에 침몰하고, 배에 함께 탄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그 배를 타고 어디를 가려고 합니까? 마음을 바르게 하십시오. 욕망에 널뛰는 마음을 잠잠하게 하십시오. 어려운 때에 정신을 하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의 앞에”
'그분 앞에'라고 이야기합니다. "···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시62:8) 문자적으로 '그분의 얼굴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입니다.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함께 있을 때나 동일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대낮에 길을 걸어도 햇빛에 부끄럽지 않으며, 홀로 밤중에 누워있어도 이불에 창피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낮에 한길을 걸어도, 햇빛이 비추어도 부끄러움이 없고, 홀로 누워 있어도 이불에 숨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팎이 동일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거짓과 위선을 그토록 미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악덕에 친숙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시편 101편 7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
능력이 우리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능력이 있는 사람은 똑같은 일을 해도 잘합니다. 어디서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나가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업을 하면 돈을 많이 벌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못 법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공부하면 성과를 만들어내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못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한 가지 재주를 아주 훌륭하게 발휘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어떤 사람은 능력이 없어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능력을 갖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 능력은 진실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승리한 악보다 패배한 선이 더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은 하나님이 뒤에서 웃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추는 것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찾아가야 하지만, 우리들 마음 안에 있는 것들 중 그분에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더 이상 찾으실 필요가 없고, 그분의 눈앞에 모든 것이 현존하듯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다윗은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역대상 28장 9절에서 말합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자신의 뼈저린 경험이 모두 녹아 있는 유언과 같은 충고입니다. 하나님 뒤에서 살던 삶을 청산해보십시오. 그러면 신앙의 신세계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분 앞에 오롯이 서십시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현실이라도 현실을 핑계를 대며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많은 핑계와 변명은 우리를 구차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이 아니라 사람 앞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소망을 가지십시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세상이 요동을 쳐도 시선을 오롯이 하여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감추는 것 없이 모두 보여 드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뒤에서 행복해 보이는 길을 가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행복해 보이는 길을 가고 싶다고 고백하십시오. 어떠한 시련에 직면하고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반드시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십시오. 다시 그분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토하라”
마지막으로 성경은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토한다는 것은 음식과 같이 먹은 것을 울컥해서 게워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샤파크'라는 단어가 쓰여졌는데, 이것은 물이나 피 같은 것을 '확 쏟아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 중에 하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할 때 그 단어, 문장이 완벽한 히브리어입니다. "버리시나이까"에 쓰여진 단어가 '샤바크'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12장 16절에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할 때에 그 단어가 정확하게 이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샤파크'라는 단어는 이미 먹은 것을 토해낸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담겨있는 것을 그냥 질질 흘리는 게 아니라, 확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샤파크'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샤파크'가 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 물질이 액체 상태여야 합니다. 마음이 커다란 바위 덩어리입니다. 그것은 쏟아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러 나와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물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액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그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물처럼 되어서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광경을 보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히브리서 5장 7절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마음이 확 쏟아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마음을 녹여야 되는 준비가 필요 없이 항상 액체상태로 사셨기 때문에 어디에서든지 그것을 쏟아 놓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기도하러 나와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액체가 된 상태에서 찾아 와야 되는데, 돌이 된 상태에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쏟으려고 아무리 해도 바위 덩어리가 흐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안고 다시 돌아갑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결국 신앙은 형식에 그치게 되고, 경건 조차도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은 쏟아지지 않습니다. 바위 같이 굳은 마음이 어찌 쏟아지겠습니까? 에스겔 11장 19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굳어진 마음은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물같이 녹게 되는 경우를 두 가지 제시합니다. 첫째는 공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기적의 소문을 가나안 원주민이 들었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 어떻게 기적으로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자신들 앞에 있는 요단강을 그들이 법궤를 앞세우고 건널 때 물이 마르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여호수아서 5장 1절이 말합니다. “···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 정신을 잃었더라”(수 5:1) 이것이 이방인들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아름다운 시를 노래하고 있는 시인도 커다란 환란을 당했고, 믿음은 부족했을 때, 시인의 마음 또한 두려움으로 물같이 녹았다고 시편 22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 내 마음은 ··· 내 속에서 녹았으며 ···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 22:13-15) 두려움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물같이 되는데, 놀라운 것은 마음은 하나님 앞에 쏟아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물같이 쏟아졌다고 했는데 자신은 죽음의 진토 속에 있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공포와 위협을 느끼면서 정신이 혼돈해져서 자신을 의지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을 수 있는 은혜에 가득 찬 상태는 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인생의 밤을 지내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너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어쩔 줄 모릅니다. 신기하게 기도하러 나왔는데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녹은 마음이, 이렇게 녹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의 마음이 물 같이 녹는 경우가 있는데, 첫 번째는 공포입니다.
두 번째는 은혜 때문에 마음이 녹는데, 이 마음이 되어야지만 마음을 쏟는 기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은 마음입니다. 기도는 물같이 찰랑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쏟아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많이 만났다고 사람이 열렬히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고난이 없다고 사람들이 열렬이 기도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요즘처럼 마음이 편안해 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코로나로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는 것이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지만, 하나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십니다. 그런데 기도 시간에는 훨씬 더 눈물이 많아집니다. 이것이 은혜의 비밀입니다. 자기가 고통을 받고, 자기의 고통에 집중할 때는 기도제목이 온전히 자기에게만 매몰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놀랍게 자신의 문제는 그렇게 가슴 아프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나를 찌릅니다. 그들을 위한 기도가 풍성하게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은혜를 받았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확장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진짜 자신의 피붙이처럼 여겨야 할 가족도 타인처럼 느껴지고, 부모 자식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은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게 되면, 예전에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사람 때문에 내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 사람은 내가 자기를 위해서 매일 밤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지 모릅니다. 응답되어도 내 기도 때문에 응답되었다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입니다.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기도의 시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될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퍼내고 퍼내도 계속 샘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많이 기도하면 많이 기도할수록 내 기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친밀함이 내 영혼을 깊이 감싸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래서 깊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마음을 그분께 쏟아 놓으면, 사실은 하나님께 기도할 게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게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가 되고 그 이듬해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사울의 다메섹 체험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 경험이 없었으면 저는 아마 목회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교수로 편하게, 편하다고 하면 다른 교수님들께 죄송하지만 어쨌든 훨씬 다른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나의 모든 신학의 관심사가 대전환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때 정말 폭포수 같은 기도를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교수 생활하면서 3시간에서 4시간을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렷하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이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느 날 조국 교회를 위해서 통곡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마음을 많이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더 많이 마음을 쓰십시오." "저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게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간절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여러분의 마음을 물같이 하나님 앞에 쏟으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그렇게 마음을 물같이 쏟아 놓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기도에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을 주십니다. 놀랍게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셔서 골방에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조국 교회에 가득 차 있다면, 역사는 얼마나 많이 변하겠습니까? 좌파, 우파 손가락질하며 싸우는 대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큰 사랑을 이 땅에 물 붓듯 부어 주시도록 부흥의 은혜를 구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마음을 물같이 쏟는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은 마음입니다. 기도는 그런 마음을 하나님 앞에 그냥 물을 쏟듯이 쏟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을 버려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확 쏟아 놓으면, 하나님이 다시 마음을 가득 채우셔서 또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골방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회개인 동시에 옛 자아의 깨어짐이고, 자신의 마음을 오직 하나님만 온전히 차지하시도록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환희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물같이 녹은 마음을 받으십니다. 돌 같은 마음으로 의롭게 살아온 사람보다는, 죄인으로 살았으나 물같이 녹은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더 의롭다고 여기시고 안아 주십니다. 이런 마음은 상한 마음을 지나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 기도의 기쁨이 사라졌습니까? 왜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소한 것처럼 회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을 물같이 쏟은 것이 언제였습니까? 기도의 자리를 눈물로 흠뻑 적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할 때 눈물 흘렸던 그 교회당과 그 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의 승리하는 생활은 기도 생활의 희열에서 옵니다. 거기에서 엄혹한 현실을 이길 힘이 솟아납니다. 거기에서 그분께 마음을 토하며 살아 보십시오. 소중한 마음을 세상이나 물질에 흔들리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기에는 여러분의 마음은 예수의 피가 가득 담긴 마음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극치의, 환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기도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8 (2021.08.01._주일오전)
8. 주님께 다 말씀드리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역사적으로 아름다운 찬송가들이 가장 많이 쏟아져 나온 것은 19세기였습니다. 19세기말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시작해서 미국과 영국의 반목, 크림 전쟁,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이 유럽과 미국을 휩쓸었습니다. 이 시기에 더 많은 찬송가들이 작곡되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것은 고난받을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이 은혜를 사모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는 널리 알려진 다윗의 탄원시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 들었던 은혜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II. 주님께 다 말씀드리다
오늘의 주제는 '주님께 다 말씀드리다'입니다. 이시는 아마도 사울로부터 정치적인 박해를 받던 때, 혹은 왕이 된 후에 압살롬의 반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던 시기에 지어진 시일 것입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호와여 ···"라는 호칭이었습니다. 이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수많은 성함 중 가장 고유한 존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후에야 비로소 계시된 성함이라고 출애굽기 6장 3절이 말합니다. 시인은 시련 속에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이 언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은혜 언약 안으로 불러 주시고, 우리를 구속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제일 먼저 가슴에 새겨야 할 일입니다.
A. 여호와께 드린 기도
먼저 여호와께 드린 기도입니다.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시 5:3)
1. “아침에”
제일 먼저 "아침에"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케르'라고 되어있는 이 시간은 히브리어에서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서 아침까지 꽤 넓은 시간대을 모두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시간을 특정하여 "아침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고, 언제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에게 아침은 특별한 희망과 기적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혀 있었습니다. 이때 홍해가 갈라진 것도 아침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에서 여리고성이 기적적으로 무너진 것도 아침이었습니다. 기적의 양식인 생명의 만나가 하늘로부터 조용히 내린 것도 아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도 아침이었습니다. 그들은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슬픔의 잠들었을지라도 아침에는 은총이 깃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30편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는 변함이 없지만 아침 시간을 특정한 것은, 아침 시간이 특별하기보다도 저녁에는 슬픔을 느꼈을지라도 아침에는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때가 아침입니다. 기도하기 전까지는 어둡고 캄캄한 밤과 같은 일생을 지났을지라도,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그 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이 아침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놀라운 기적들을 여러분도 맛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에 희망의 아침을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나의 소리”
이어서 그는 말합니다. "···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 히브리어로 '콜리'이라는 이 단어는 공기를 울리며 발화(發話)하는 음성을 가리킵니다. 이는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정에서 터져 나오는 간절한 부르짖음임을 시편 5편 2절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특별한 기도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열렬한 탄식의 부르짖음입니다. 특별한 열심을 차마 억제할 수 없어서 간절히 간절히 부르짖는 마음에 한이 맺힌 것 같은 특별한 기도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평범한 시기에도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위기나 어려움의 시기에는 그 이상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상황을 주시는 이유는 특별히 기도하게 하시기 위해서 때문입니다. 이 모든 기도는 마음의 샘에서 솟아납니다. 은혜는 사랑의 정서를 불러오고, 이 정서는 마음에 시냇물이 고이게 합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언어가 솟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한없이 많은 기도가 쏟아져 나오고, 은혜의 샘에 물이 마르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그때의 기도는 말이 되어서 터져 나오게 됩니다.
시인은 악인과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없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그 은혜로운 때를 기억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그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의 제목들이 되었습니다. 기도의 언어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쏟아져 나왔던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는 커다란 슬픔 속에서 잠들었을지라도 아침에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신앙은 세상과 자신에게 실망하고 하나님께 희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운명처럼 지속되는 절망의 밤은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절망하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결코 희망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희망 그 자체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아침에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의 절망은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낙심하는 우리의 마음, 희망을 버리는 우리의 심정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저녁에는 슬펐어도, 밤에는 절망에 빠졌을지라도, 오늘은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나님 께 희망을 갖고 하나님 앞에 포부를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사정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는 뜻이고, 기도하라고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은 응답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사인(sign)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리를 하나님께 내고 있습니까? 억제할 수 없는 정이 언어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까?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들으시리니”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시편 5장 3절) 여기에 이 히브리어는 '샤마'라는 동사인데,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청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여러분 귀에 지금 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미를 파악하고, 그 의도대로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동작입니다. 시편 50편 7절, 이사야 7장 13절에는, "너희는 들을지어다"라는 웅장한 선포가 주어집니다. 이것은 율법의 공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또한 이는 마치 사랑하는 엄마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어린 자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아이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것과 같은 애정이 어린 동작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가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애정의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의 하는 말에 마음을 기울여 주시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애정의 표현입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의 믿음이 다윗을 살렸습니다. 두 개도 아닌, 단 하나의 믿음이 다윗을 죽음과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려냈습니다. 그 믿음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내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이 아무리 곤고하고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주님께 다 털어놓았다
마지막 두 번째는 '주님께 다 털어놓았다'라는 것입니다. 후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편 5:3) “
1. “내가”
“내가”라고 말합니다. 개인 기도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려움은 자신이 당하고, 기도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기도와 관련해서 말할 때 시종일관 1인칭을 사용합니다. 5편 1절에서 말합니다. "···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시편 5:1) 5편 2절에서 말합니다. "···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편 5:2)
성경은 개인 기도의 중요성을 공동체 기도의 중요성과 나란히 함께 강조합니다. 개인기도라는 벽돌이 하나씩 둘씩 쌓아 올려지지 않고는 결코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 기도는 아무리 아무리 강조해도 중요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개인은 아무리 많이 모일지라도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교회의 기도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마음을 다하여 개인기도에 힘쓰라고 8주째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움직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개인 기도 생활에는 변화가 찾아왔습니까? 8주 동안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변화되고 있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개인 기도를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치 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이 분산된 채 허둥거리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근심과 걱정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왜 오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 오늘도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내일로 미루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기도하지 않는 여러분 마음 안에서 탄식하며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지 않는 여러분의 기도하지 못하는 형편을 위해서 당신 자신이 친히 탄식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왕이 내리는 명령은 그냥 명령이 아니라 어명이라고 합니다. 다른 관리가 내린 명령을 어기면 조금 처벌을 받아도, 어명을 거역하면 대역죄로 다스려집니다. 어명에는 큰 어명과 조그만 어명, 다시 말해서 지켜야 하는 어명과 어겨도 되는 어명은 없습니다. 어의가 어지로 내리고, 그 어명이 반포되면 모든 백성은 그 어명을 받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여러분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내키면 할 수도 있고, 힘들면 집어치워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기도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어명입니다. 어길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은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한다는 고백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사실 마음은 하나님의 집에서 가출한 탕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몸은 아버지의 집에 있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기에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마음으로 이미 집을 나간 탕자입니다. 그런 탕자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위로부터 오는 어떤 좋은 것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까? 매 순간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냥 남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여러분 자신이 처한 환경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가련한 위치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믿을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잘났습니까?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모든 역경과 시련을 헤쳐나갈 수 있는 든든한 힘이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까? 없으십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마음으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살갑게 말을 거는 사람을 봤습니까?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을 싫어하고 여러분이 살 수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싫어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신 죄밖에 없는데,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까? 회개 하십시오. 그리고 돌이켜 서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지금 간절한 기도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힘들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하소연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여러분을 무시합니다. 정말 어렵고 기가 막힌 사정이 있으면 목회자를 찾아오십시오. 그리고 하소연하기 위해서 찾아오지 말고, 주님 찾을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 찾아오십시오. 그리고 모두 쏟아놓아 주십시오. 모든 목회자들이 들어줄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기도해 줄 것입니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사람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는 원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다른 것은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 줄 수 있어도, 기도의 의무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개인 기도의 의무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수만 명의 중보 기도를 받는 사람보다 혼자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가 빨리 응답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됩니다. 기도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기도하고”
사실 이 성경을 수없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히브리어 성경으로 시편 5편을 읽을 때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가 용솟음쳤습니다. 그리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 얘기를 여러분에게 오늘 하고 싶은 것입니다. 성경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시편 5:3) 그래서 진짜 "기도하고"라고 히브리어 성경에도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단어가 나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히브리어로 '에에라크 레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나는 당신께 모두 털어 놓을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아라크'라는 단어는 여러분이 시편 23편 강해를 들을 때에 5절에서 상세하게 설명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고 할 때 "베푸시고"라는 단어가 바로 이것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아라크'라는 단어는 원래 많은 군사들이 행오(行伍)를 짓기 위해서 대열을 짓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혹은 여러 개의 물건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동작을 의미하기도 했고, 밥상 같은 것들을 차려놓고 수많은 반찬을 늘어서 펴 놓는 것을 '아라크'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 5절에 그 말씀이 그냥 아무렇게나 차린 밥상이 아니라 정찬으로 차린 아주 훌륭한 밥상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는 자루 같은 데서 셀 수 없이 많은 물건을 하나씩 꺼내 놓으면서 정리하는 동작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인데,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인데 태어나서, 부모도 내 마음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 준 적이 없고, 내가 아는 많은 친구들도 내 사연에 귀 기울여 준 적이 없는데, 도대체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길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마음의 모든 사연을 다 말할 때까지 주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인가." 마치 골목에서 설움을 당한 어린아이가 역성을 들며 뛰어나오는 엄마의 품에 안겨서 고자질하듯이 심정을 터놓는 기도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에 쌓인 사연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수많은 난관을 겪었는데 사람 누구에게도 쏟아 놓을 수 없는 사연들이었기에, 또 들어줄 사람도 없었기에, 그는 주님께 마음 쏟아놓고자 기도할 뜻을 세웠던 것입니다. 억울하고 괴로울 때 마음은 수많은 사연을 끌어안게 됩니다. 이때 신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엄습할 때 주님 앞에 상세히 호소하는 것 아닙니까?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니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억울하고 괴로울 때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이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중 어떤 사람이 나의 길고 한 많은 사연을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조금만 이야기가 길어지면 지루해 하고, 조금만 이야기가 반복되면 싫증을 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억울하고 괴로울 때 우리의 호소하는 모든 고통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슬픔이 엄습할 때에 우리의 호소하는 간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사람의 위로를 구하지 마십시오. 대신 그 분의 귀에 대고 모든 사연을 기도로 고하십시오. 사람들은 우리의 많은 말에 싫증을 내지만, 주님은 불쌍히 여겨 모두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의 기도가 길다고 지겨워 하신 적이 있습니까? 같은 사연을 수없이 똑같이 구해도 언제나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귀 기울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등을 두드려 주십니다.
마음이 곤고한 사람일수록 사연이 많습니다. 정신에서 소화되지 못한 사연은 마음을 미끄러지게 하거나, 병들게 합니다. 하나님께 그 사연을 다 털어놓는 사람들은 응답을 받습니다. 사람에게 쏟아 놓는 사람들은 종종 멸시를 당하고 무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쏟아놓는 사람은 근심으로 굳은 마음이 물처럼 녹기까지 은혜를 주십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오직 당신의 사연을 하나님 아버지께만 낱낱이 아뢰십시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들어 마음을 모두 다 토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바라리이다”
마지막으로 시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편 5:3) 히브리어로 "··· 그리고 나는 바깥을 쳐다볼 것입니다"인데, 희망의 중요성입니다. 현실에서 사방이 막혔다면 현실의 창을 통해서 바깥 세계를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십시오.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을 하나님 때문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거기까지 간 것이지 하나님은 두 손을 이끌어 벼랑 끝에 여러분을 세우시는 분은 아닙니다. 이사야 53장 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사 53:6)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그분의 자녀로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만 그분께 기대어 희망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불순종 때문에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서 기도하는 당신의 등을 밀어 벼랑으로 굴러 떨어트리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낭떠러지에 서있는 우리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너의 마지막 희망이다. 내 손을 잡아라."
III. 적용과 결론
절망하는 당신의 마지막 희망은 무엇입니까? 힘겹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 어디에서 밝은 소망을 찾으시겠습니까? 흔들리는 가시에 찔린 백합화는 더 많은 향기를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밤에는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잠들었을지라도, 아침에는 희망의 햇살에 눈뜨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금 고요히 주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개인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분의 귀에 대고 여러분 마음의 모든 사연을 낱낱이 아뢰십시오. 그분께 모두 다 털어 놓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고, 여러분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창밖으로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희망인 것입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9 (2021.08.08._주일오전)
9. 외면할 수 없는 기도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다윗이 지은 참회 시입니다. 언제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은 추측하기를 이시는 다윗의 말년에 쓰였을 것이며, 아마도 밧세바와의 범죄를 기억하며 회개하는 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을 고치시기 위해 기도 속에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이 외면할 수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시인이 바로 그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II. 외면할 수 없는 기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며 장군이었습니다. 거룩한 선지자이며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대철학자의 전범(典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의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강행한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인구 조사를 실시하는 것은 행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인구 조사는 그냥 인구 조사가 아니라 국력을 측정하기 위한 인구조사였습니다. 인구 조사의 핵심은 백성이 얼마만큼이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인들의 수효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군인과 물자를 함께 조사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의 임금들이 자신의 나라의 부강함을 자랑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교만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나라라는 사실을 믿고 그만을 의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인구조사를 한 징벌로 이스라엘 백성 중 7만 명의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사무엘하 24장 15절에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두 번째 큰 범죄인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은 그의 영혼을 갈 때까지 가게 만들었고,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피폐한 상태로 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죄를 낳습니다. 죄를 은폐하기 위해 충성스러웠던 그녀의 남편 우리아까지 교묘한 방법으로 살인했다고 사무엘하 11장 15절에 나옵니다. 그토록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던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에 대해서 사무엘하 11장 27절에서 말하기를 “···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쓰임 받은 인물 중 다윗만큼 이렇게 큰 죄를 지은 사람이 흔하겠습니까? 성경을 뒤져 볼 때 다윗 정도의 윤리적인 수준으로 산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사람만 못한 사람들보다는, 그 사람 다윗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천지에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살인하셨습니까? 저는 살인한 적 없습니다. 간음하셨습니까? 근데 이상한 일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성경의 모든 인물 중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랑했으면 끔찍한 두 가지 죄는 짓지 말았어야 합니다. 죄 지은 사람을 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만 못한 사람이 별로 없었고, 웬만한 사람은 다 다윗만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그토록 독점적인 사랑을 받았습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그에게는 매우 매우 특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었습니다. 죄를 지었어도 그 죄를 지적받고, 그 자리에서 옷을 찢으며 통곡하면서 그래도 자기가 돌아갈 곳은 하나님의 품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성경은 오늘 하나님이 외면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A. 부르짖을 때
첫째는 그가 부르짖을 때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부르짖을 때"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웨사웨아티’라고 해서 "울부짖을 때"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내가 소리를 내어 기도하나이다'라는 말보다는 훨씬 강한 뜻입니다. 이 단어는 위기 상황에서 구조를 요청하거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울부짖음을 표현하는 동작입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비통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는 전쟁터에서 쏟아지는 불화살과 같았습니다. 악인은 처처에서 날뛰며 부당한 방식으로 시인을 잔인하도록 비난했습니다. 시인은 극단적인 고난 앞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깊이 자각했습니다. 언제나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했던지,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든지, 모든 삶의 상황에서 오직 자신이 파고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품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에게 호소했고, 그분의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악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인생의 허무함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애착의 끈을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그는 그 심경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 39:5)
지금 그가 고뇌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고뇌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징벌을 받고 있으며, 쇠망하게 되었다고 8절과 10절에서 말합니다. 정말 그에게 두려웠던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지 못한 채 죽는 것이었습니다. 생애 대한 애착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울부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울부짖음은 비명소리가 되었고, 비명소리는 기도의 화살이 되어 시인의 마음을 꿰뚫고 하나님이 계신 높은 하늘 보좌 위로 솟아올랐습니다. 이것은 악인은 물리치시고 자기는 살려달라는 생존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재물에도 욕심이 없었다고 7절에서 말합니다. 그는 세상에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고 있었다고 7절 하반절에서 말합니다. 부르짖음을 넘어선 울부짖음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징벌을 피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찾고 싶고, 나의 죄 때문에 상실했던 하나님과의 평화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울부짖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기도의 응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시인의 영혼이 주님께 버림받고 있는데, 악인들이 처처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 시인의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습니까? 시인의 영혼이 버림받은 채로 남겨졌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던 악인들이 처처해서 피를 흘리며 하나씩 죽어 갑니다. 그게 과연 그에게 위로가 되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는 징벌을 받으면서 자신의 죄 때문에 징벌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고난 속에서 인생과 영화가 헛됨을 깨달았습니다. 비명을 지르듯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때 심경을 시편 40편 12절에서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시 40:12)
당신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안전한 상태입니까? 부르짖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울부짖는 기도를 언제 드리셨습니까? 언제 하나님 앞에 신음하는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비명을 지르는 기도를 올렸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분께 울부짖으십시오.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의 영혼을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십시오.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눈물 흘릴 때
두 번째는 눈물 흘릴 때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시 39:12)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의 눈물들에 귀를 막지 마소서"입니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의 눈물들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지 마시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눈물이 들리는 소리일 리는 없으니까 굳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막지 말아 달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뭔가 조금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눈물이 결국은 울음 혹은 흐느낌을 은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나의 울음 소리에 귀 먹은 자처럼 되지 마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비명을 지르는듯한 울부짖음과 소리 없이 두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미지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인은 왜 눈물을 그렇게 폭포수처럼 흘렸습니까?
1. 고통의 승화
첫째는 고통의 문제입니다.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었고, 변명하는 대신 하나님의 주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도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8-9) 이는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믿음이 준 해석의 능력이었습니다.
악인의 비난은 거칠었고, 의도적이었고, 악의적이었습니다. 그를 옹호해주는 사람은 없었고, 비난하는 사람은 자기를 에워쌌습니다. 그는 이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고통하는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자기를 고치시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로부터 떼어놓음을 당했을 때 울면서 엄마의 품을 파고드는 그 아이를 엄마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았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품을 파고들어 젖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품 안에서 잠이 드는 것처럼, 눈물을 흘린 채로 어미의 젖을 먹고 잠드는 갓난아이처럼, 시인은 삶의 모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받던 날에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대신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악인이 자기 앞에 번성하고 불화살 같은 비난을 날릴 때조차도 그는 1절에서 자신은 자신의 입에 재갈을 물리리라 다짐하고 선한 말도 말하지 않겠노라고 벙어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자신의 슬픈 눈물을 닦아줄 수 있으며, 그분의 품에 파고드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시인을 위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간악한 원수들을 위해 칼을 가는 대신 자신의 마음을 갈았고, 자신의 더러운 마음을 씻으며 주님의 품으로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2. 평화의 갈망
또 하나 시인이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평화에 갈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에 깨졌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갈망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범죄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시의 마지막에서 한 가지를 구하였습니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시 39:13 上) 13절 상반절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나를 떨어져서 보시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있는 킹제임스버전 성경, 그리고 NIV 성경에서 모두 "Look away from me"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왜 히브리어로 시인이 가장 곤고할 때에 하나님이 가까이서 자기를 봐달라고 말하는 대신, 떨어져서 멀리 떨어지셔서 저를 봐주시옵소서 라고 했겠습니까? 가까이 봐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죄의 덩어리었고, 그의 심정은 죄악에 물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에서 보시면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을 가까이 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멀리서 보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가슴 아파하고 울부짖으며, 눈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며 불쌍히 여기시리라는 기대 때문에 "나를 멀리 떨어져서 봐주시옵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 이것을 의역하여 "주는 나를 용서하옵소서"라고 번역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입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 이스라엘의 평균치만도 못한 도덕생활을 하고 살인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가 피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의 품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인은 악인에게 한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평화 때문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은혜 충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시인은 자기를 위해 우는 대신 남을 위하여 울어주었습니다. 시편 119편 136절에서 그는 이렇게 울었습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 그는 경건했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모욕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짐승처럼 살아가는 고통받는 이웃 때문에, 경건한 눈물을 한없이 흘렸고,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은 시냇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가슴 아파하며 울고 있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다윗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죄를 지었으나 가슴 아프도록 하나님 앞에 통회한 사람이고, 눈물로 침상을 띄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눈물로 이불을 적신 사람이었고, 회개하는 눈물과 몸부림 때문에 온몸의 뼈가 드러나기까지 쇠약해질 만큼 철저히 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제가 다윗을 따라갈 수 없는 지점입니다. 사람들은 죄가 많기 때문에 비참하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죄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가 거의 없기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죄가 없다고 변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하나님 앞에 저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 없인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주의 의로 나를 건져 달라고,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받아달라고, 어린아이처럼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했으나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망했습니다. 자기 고통을 넘어서, 눈물을 넘어서서, 신앙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윤리적인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회개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그 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가슴을 여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 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모른 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화를 누리는 것보다 인생에서 더 큰 숙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욥기 22장 21절에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눈물을 흘리십니까? 저는 이 설교를 많은 눈물과 기도 속에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나의 의로움이 아무것도 없고, 그리고 이 세상에 나만큼 잘산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으로는 훌륭한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 소원은 내가 어떤 삶의 상황에서든지 주님의 품에 파고드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여러분도 나와 함께 이 기도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나그네일 때
마지막 세 번째, 나그네일 때였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여기에서 "나그네"로 번역된 히브리어 "게르"(גֵ֣ר)라는 단어는 정확히 "손님, 객식구, 남의 나라 외국인", 이런 뜻입니다. 그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그 땅의 시민 혹은 국민으로서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었으나 아직 할례받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외국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제사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이 넘게 정착해서 살았으나 애굽에서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히브리 사람들이라는 이름은 떠도는 방랑자들의 대명사였고, 멸시받던 이름이었습니다. 더욱이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남의 나라 땅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 시인이 이런 처지를 경험했으니 가슴에 와닿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나그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에게 이 세상은 타향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고 타향입니다. 영원한 우리의 본향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홀로 외롭게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라, 비록 오늘은 이곳에 내일은 저 곳에 머무는 순례자의 삶을 살지라도,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해주시는 나그네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여 버렸습니다. 버림받으면 버림받을수록 다윗은 사람에게 매달리는 대신 사랑의 하나님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너무 그리웠던 엄마를 만나는 아이처럼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듯이 하나님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시인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의 때문에 범죄 한 다윗을 받아주셨습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분을 파고드는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 가상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시인을 받아주셨습니다. 다윗보다 윤리적으로 사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는 대신 큰 죄를 지은 다윗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를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 이런 사람으로 살다가 그분의 품에서 죽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셔도 악인이 그들을 해치는 것을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가 이 세상에서 외로운 나그네의 길을 가면 갈수록, 그의 마음에 더욱 더 타오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여러분도 갖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두 가지 사실을 붙들고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시며 말씀으로 우리를 건진다는 사실입니다. 현실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나그네 취급을 받는 것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살던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나그네였습니다. 범죄 했을지라도 너무 후회만 하지 마십시오. 수많은 후회가 범죄에서 여러분을 구하지 못합니다. 진실한 회개가 범죄에서 여러분을 구원해줍니다. 세상 사람의 품에서 울지 마십시오. 혼자 우는 바보가 되지 마십시오. 주님의 품에서 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시 안아 주실 것입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10 (2021.08.15._주일오전)
10. 닫혔던 기도의 문을 열라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편 32:3-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다윗이 지은 이 시에는 '마스길'이라는 표제어가 붙어있습니다. 이는 '지혜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를 읽고 많이 묵상하면 지혜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스길은 탄원이나 슬픔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지나친 훈계보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내면화된 명확한 말씀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II. 닫혔던 기도의 문을 열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닫혔던 기도의 문을 여는 비결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깊은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당시 그 침체가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허물과 죄 때문에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냈습니다. 바로 그때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침체되었고, 양심은 정죄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 기도하지 않을 때
제일 먼저 기도하지 않을 때 그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시편32:3上) 이 부문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내가 침묵하고 있을 때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의 침묵이 아닙니다. 이것은 범죄한 다윗이 마음을 열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언어의 침묵이 아니라 마음의 침묵이었습니다. 죄를 지었으나 회개할 뜻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입니다. 그러나 죄가 그 마음에 융성했기 때문에 아름답던 그의 기도의 영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육신은 고깃덩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큰 죄만 기도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큰 죄던, 작은 죄던, 죄는 크기는 다르지만, 성분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작은 죄들도 회개하지 않고 쌓이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게 됩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죄의식이라도 있어서 자기가 어디에서 떨어지고 넘어졌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작은 죄들이 쌓인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언제 잘못했는지도 모르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더 깊은 영적인 침체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다윗보다 더 비난받을 만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또 다윗만큼 열렬하게 기도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는 범죄했으나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침묵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도하지 않을 때 그의 내면이 어떠했겠습니까?
1. 신음하는 영혼
제일 먼저 그는 자신의 영혼이 신음하였다고 고백합니다. 3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편 32:3) 이 부분을 히브리어에서 직역하면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을 때에는 온종일 신음소리 때문에 내 뼈들이 닳아 해어지나이다”(시 32:3, KNJ 私譯) 그러니까 여기서 신음한다는 것은 내적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송사하는 양심 때문에 받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명할 수 없게 된 죄에 대한 자각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뼈"라고 되어있는 이 부분은 히브리어 성경에 "뼈들"이라고 복수로 나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일반적인 신체의 뼈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은유적으로 마음 깊은 속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아애가 1장 13절에서는 이것을 "골수"라고 번역했습니다. "불이 골수에 사무친다"(렘 20:9)라고도 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내 뼈가 숯같이 새까맣게 탔다고도 시편 102편 3절에서 말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아담은 하와를 향해 최고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때 그는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뼈 중의 뼈"라는 고백을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보다 앞세웠던 것입니다. 아담이 말한 뼈는 그냥 뼈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 깊은 곳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 없이는 자신도 없다 라는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큰 고통을 느끼고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죄를 지은 다윗이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신음하고 있었으니 이렇게 회개하지 않는 우리가 더 나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그가 큰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기도가 막혔을까 생각하며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기도를 막는 것은 꼭 다윗이 지었던 그런 큰 범죄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보면 이 사실이 증명됩니다. 부부가 함께 다투거나 혹은 마음이 상해 있는 상태를 죄라고 생각하는 남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그것이 큰 잘못이라고, 회개할 죄까지 된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아내와 불화하게 되면 하나님이 기도를 막으신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결국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온전히 드려진 순종의 삶일 때 기도의 불을 끄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크게 범죄한 시인의 마음은 양심의 창 끝으로 찔림을 받고 있었으나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심정은 돌덩어리 같지 않습니까? 파멸당할지언정 찔림은 당하지 않기로 운명 지어진 돌 같지 않습니까? 그런 심정을 가진 우리를 위해서 누가 먼저 울어주겠습니까? 죄 때문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신음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렬히 기도하면서 사는 것은 기적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무모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침묵하고 있을 때 죄 가운데서 신음하는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신음하는 영혼의 고통 소리를 듣고 다시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문을 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의 손이 누름
이어서 시인은 왜 자신의 뼈들이 너덜너덜하기까지 헤어져 버렸는지 신음 소리를 토해내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손이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 32:4). 이 구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밤이 낮이나 당신의 한 손이 내 위에 (심히) 무거우므로 나의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개울) 같이 되었나이다”(시 32:4, KNJ 私譯) 바짝 가물어서 온 땅의 논들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집니다.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아름다운 시냇물 소리는 이미 오래전에 멎었습니다. 농지로 이어지는 개울에 이르기까지 바닥이 드러나고, 여기저기 죽은 물고기들의 사체가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어진 땅입니다. 물이 말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진액이 모두 빠져나가서 메말라 버린 영혼의 상태를 고통스럽게 고백하였습니다. 언제입니까? 그가 침묵하고 기도하지 않을 때 영혼은 그런 가뭄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신자의 마음 안에는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가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영혼은 극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시인이 범죄하고 겪었던 내적인 고통은 육체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편 22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시 22:14) 범죄하고 괴로워 하는 영혼으로 인해 육체의 모든 힘이 사라졌습니다. 뼈들은 너덜너덜하기까지 헤어져 버렸으며, 그는 육체적으로 숨조차 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이 그의 목을 누르고 계셨습니까? 살인자의 손은 숨이 끊어져 죽으라고 눌렀지만, 주님은 회개하여 다시 살아나라고 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고통을 겪지 않고 순순히 하나님 앞에 돌아올 당신의 자녀들이 없는 줄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그의 자녀들에게 회초리를 쳐서라도, 종아리를 때려서라도 주님께 돌아오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돌멩이 같은 마음을 가진 교인들이 이제는 교회에 얼마나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까? 이들이 회개하는 통곡 소리로 예배당을 가득 채우는 것을 정말 보기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진실한 눈물로 아버지 앞에 회개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던 때가 언제입니까? 일주일 동안 한 번도 회개한 적 없이 메마른 마음으로 예배당이 나오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지만, 그는 여전히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런 허무한 마음을 메꾸기 위해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비하고, 이런저런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니 어떻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날 수가 있게 됩니다. 모든 신앙의 초점은 회개입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말하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우리의 영혼이 충만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두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심정을 전달받고,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애달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의 마음에는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끊임없는 회개로 죄를 죽이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죄를 죽인 만큼 은혜는 충만해지게 되고,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 것만큼 죄는 소멸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없이는 누구도 충만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끝없는 은혜에 대한 사모함과 눈물 흘리는 진실한 회개의 기도입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 마음의 고통은 회개의 대문에 이르는 안마당입니다. 많은 고통은 오직 한 가지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누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은 회개하여 살라고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구나! 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주님을 찾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허물을 자복할 때
마지막으로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불쌍한 시인에게 그 끔찍한 신음의 고통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 내 죄를 고백함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시 32:5 上) "허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페샤아이"라고 하는데 "나의 죄과들" 혹은 "나의 죄악들"입니다. 우리말에서 허물은 상당히 자발적이지 않고 의도하지 않는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이 단어는 아주 넓은 의미에서 죄과, 과오, 위반, 죄악을 모두 총칭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따르지 않은 의식적이고도, 무의식적인 모든 반역입니다. 그 잘못의 본질은 악한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마음에 꾹꾹 눌러 두었습니다. 양심의 송사에 귀를 막았고, 율법의 정죄를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고개를 돌렸습니다.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어떻게 회개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영혼이 눌려 신음하고, 피가 마르는 고통 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복했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5절 상반절을 히브리어에서 옮겨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나의 죄를 당신께 알게 해드렸고 나의 불의를 숨기지 아니하였나이다.”(시 32:5상, KNJ 私譯) 그는 말했고, 자기의 모든 죄를 주님께 알게 해드렸습니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진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털어놓고 주님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것을 모르고 계셨겠습니까? 그는 말했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깨우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의식의 표면 위에 다시 떠오르게 해서, 양심이 하나님의 진노와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자기가 괴롭기 때문에 아팠지만, 나중에는 자신 때문에 괴롭고 아픈 하나님 때문에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회개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잔잔한 물의 표면이 있고, 거기에 온갖 물건들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수면에 부딪히는 순간 물결이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고, 그것들은 주욱 내려가서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리고 의식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은 3년전에 기뻤던 일, 눈물나도록 기뻤던 일 때문에 오늘은 왜 그렇게 기뻐하지 않습니까?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년 전에 괴로웠던 일이 오늘은 왜 그렇게 괴롭지 않습니까? 6개월 전에 그렇게 여러분을 외롭게 했던 일들이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의식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라앉아 버린 것입니다. 마치 음식을 먹을 때 혀끝에서 온갖 맛을 느끼지만, 위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다시는 그 음식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회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식의 수면에 비춰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메마른 영혼으로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 말씀의 기억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것을 의식의 밑바닥에서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주욱 떠오르면서 의식의 표면을 건드립니다. 다시 의식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의 슬픔과 고통, 모든 것들이 기억나면서, 자신의 그때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하는 것을 또렷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회개시키시는 방법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내 죄를 고백했다"고 하였는데, 이런 회개를 위한 죄의 고백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자신이 마음 전체가 죄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남의 탓이 아니라 자기 책임인 것을 통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죄의 고백에 있어서 빠져서 안 되는 네 가지 요소입니다. 죄에 대한 고백은 기도의 문을 엽니다. 먼저 감추인 죄를 자복하십시오. 그것들을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구해보십시오. 기도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아주 요란스럽고, 야단법석스러운 기도 속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홀로 예배당에 나와 앉아서 조용히 기도합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를 해도 도저히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기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기도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엄마, 아빠에게 큰 잘못을 하고 나면 한 번에 야단을 칠 때도 있지만 부모가 침묵하고 말대꾸를 안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며 깨달으라는 신호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믿었길래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오늘 여기에 나와서 이렇게 간절히 주님 앞에 기도하는데 주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일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잘못했던 것을 기억하며 다시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십니다. 한번에 크게 열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하나님 앞에 문이 열릴 때가 올 것입니다. 한줄기의 빛이 들어오고, 거기서 하나님께 간절히 주님을 찾을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결국 영혼의 고통을 이기다 못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모두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온 교인이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 자신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고, 자신의 죄과를 주님 앞에 고백하며,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구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늘의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질 것입니다. 시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2. 죄악을 사하심
이렇게 자신의 죄들에 대해 고백했더니 하나님이 죄악을 사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참된 고백은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줍니다. "···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下) 5절 하반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나의 죄과들에 대해 여호와께 고백하였나이다. 그랬더니 당신이 나의 죄에 대한 책벌을 옮기셨나이다”(시 32:5하, KNJ 私譯) "사하셨나이다"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나샤"라는 단어인데 "옮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즉, 죄를 지었으면 죄에 대한 책벌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 책벌을 번쩍 들어서 나에게서 다른 데로 이동시키신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사죄의 은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죄사함을 받아야 했고, 그 유일한 방법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형편과 율법의 규칙에 맞게끔 예물을 준비해 와서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짐승을 끌고 오면 제사장이 사죄를 위해서 이 사람의 죄를 제물에게로 옮기고, 그 제물은 죄를 지은 당사자를 대신해서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고 불에 태워져 버립니다. 이때 하나님은 헌제자의 죄책을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리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허물에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사람이라고 32편 1절에서 말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자기가 죄를 지었던 사실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에 상처 받아도 더 큰 은혜의 기억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했던 모든 사람은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죄가 사랑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을 하나님 사랑하며 살게끔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신자는 범죄했을지라도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삽니다. 이것이 바로 불완전한 신자가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자신의 죄를 주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고, 다시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당신의 마음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을 뵙지 못해서 울부짖는 영혼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기도할 수 없을 때라도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 때문에 신음하십니까? 고통받고 있으십니까? 기도의 문이 닫혀 있어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외롭고 힘든 인생을 살아갈 때 여러분을 사랑하시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더니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장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믿는 그때 그분은 가장 가까이에 와 계십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120번 이상 읽었습니다. 수많은 구절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는데, 그 중에 특별히 제가 사랑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5권 2장 2절에서 어거스트는 이런 질문을 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은 그들의 마음 안에, 여기 당신께 죄를 고백하는 자들과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들과 당신의 고단한 발자취를 따라 당신의 품 안에서 얼굴을 파묻고 울부짖는 자들의 마음속에 계시나이다”(Aurelius Augustinus, Confessiones, 5.2.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안에서 얼굴을 파묻고 울부짓는 자들, 자신이 죄를 지었노라고 눈물 흘리는 자들의 마음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할 때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신음하는 그 사람 마음 안에 이미 와 계십니다. 다시 기도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 한 주간 동안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간절히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11 (2021.08.22._주일오전)
11. 마음이 약해질 때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시 61:2-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다윗의 탄원시입니다. 이 시는 “여두둔의 법칙”을 따라 부르도록 지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널리 알려진 음조에 맞추어 부르라는 뜻입니다. 이 시는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경건한 의존과 왕권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이 약해질 때가 있었습니다.
II. 마음이 약해질 때
육체가 특별히 연약해지는 때가 있듯이, 사람의 마음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이때 시험에 들어 영적인 침체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이때 더 큰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시인은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는 때에 무엇을 하면서 이겼습니까?
A. 고백
첫째, 고백입니다. 여기서 고백은 마음에 있는 생각을 하나님을 높이고자 진심으로 진술하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질서를 되찾게 만들어 주었고, 흐트러진 생각을 조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시련을 이길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 61:3)
1. 피난처이신 하나님
제일 먼저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라고 고백합니다. "피난처"라고 번역된 단어는 마흐세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격렬한 전투에서 몸을 엄폐할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은신처, 도피처, 숨을 곳 등을 두루 의미했습니다. 이 고백의 핵심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이 시인을 발견할 수 없도록 숨겨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설령 시인을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해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바로 자신에게 진술하는 것이니,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자신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 고백은 하나님께 올리는 고백이었으니, 일종의 찬양이었던 것입니다.
시인이 시련 속에서 마음이 약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인생이 한 조각의 천이라면, 고백과 찬양은 씨줄과 날줄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또 찬양을 드림으로써 그것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인생이라는 옷감이 직조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입니까?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기에 마음 또한 연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시련과 고난이 겹치고 인생의 어둠과 괴로움이 몰려올 때, 그날들이 지속될 때, 신자는 마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묵상하고, 자기가 처한 현실의 상황을 하나님의 성품들과 연관지어서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깨닫게 된 올바른 이치를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 중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이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그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당신이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에 생각나게 해 주시고, 우리 마음의 모든 어두운 것을 깨끗이 밝혀 하나님을 바라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백의 내용을 찬양으로 드림으로써 걱정과 근심에 얼룩졌던 마음은 새로워지고, 파리해졌던 영혼은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극심한 고난과 시련의 때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성품을 묵상했습니다. 떠도는 생각들을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지어 가지런하게 정돈했습니다. 이렇게 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상황에 요동치는 시인의 마음이 가라앉은 것입니다. 혼란스럽던 정신은 제자리를 찾게 되고, 거기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이 시련 속에서 드린 고백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나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내가 살아오는 날 동안 수 없는 시련의 순간들을 맞이했으나, 그때마다 내가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당신의 날개 아래에 품어 피난처로 삼게 하셨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마음이 약해져 있습니까? 그런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그 결과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위기를 만난 여러분에게 피난처이십니다.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이 피하고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은신처가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여러분도 위기 속에서 이렇게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다시 용기를 얻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탑이신 하나님
성탑이신 하나님을 이어서 고백합니다. 3절 하반절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 61:3下) 여기서 망대는 탑, 망루, 산성, 성곽, 무언가를 올려놓을 수 있는 대(臺), 같은 것을 두루두루 의미했습니다. 본문에서 "망대"라고 번역된 단어는 긴 성벽 중에서 군데군데 우뚝 높이 솟아 있는 성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이니 적의 접근을 관측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굳이 "망루"라고 번역했을 것입니다. 또한 전투적인 측면에서는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들을 공격하기에 유리한 곳이었습니다. 또 많은 적들이 공격해 와도 해치기는 매우 어려운 장소였습니다.
시인은 고난의 때를 수없이 지났습니다. 그때마다 자기를 지켜 주신 하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분의 품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가장 높은 성탑과 같았습니다. 거기서 주님의 보호를 받는 것과 같은 안전을 경험했기에, 인생의 가장 곤고한 시기에, 마음이 약해져 있을 그때, 시인은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는 대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의 피난처시며, 자기를 지켜 주시는 견고한 성탑이심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로만 판단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고,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시련과 역경이 와도 주님이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고백하십시오. "당신은 나를 원수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성탑이시옵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B. 기도
두 번째로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먼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2) 계속되는 시련에 그의 마음은 약할 대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가뭄에 식물이 시들듯이 영혼의 생기와 활력이 현저히 사라진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신자는 영적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이고, 또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니,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자에게 영원히 주셨으니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사는 동안에는 이 생명이 충만하고 왕성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불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이 은혜가 쇠약해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은혜 아래 있으면 그 영혼은 강건해지고, 죄에 가까이 있을수록 쇠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은 가뭄에 시든 풀잎처럼 메말라 있었습니다.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비관하고 낙심하며 미끄러지는 대신, 하나님께 고백하며 기도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1. 땅끝에서
먼저 이 구절은 시인이 자기가 기도해야 했던 처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시편 61:2 中) 여기서 "땅끝"이라는 표현은 실제의 장소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를 은유하는 것인데, 시편 48편 10절에 나온 바와 같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바라보는 천체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또한 유대인들도 이 세계를 쟁반과 같이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땅이고, 위에는 천막처럼 둥그렇게 치어져 있는데, 이것이 하늘이고, 별은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는 천체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땅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용기가 없어서 간 사람도 없지만, 그 땅끝은 끝을 알아볼 수 없는 아주 깊은 낭떠러지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땅끝에 있다는 것은 바로 쟁반과 같은 땅의 맨 끝에 떨어질 듯이 매달려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일단 믿음에서 멀어져 은혜가 약해지고, 그래서 마음이 연약해집니다. 이러면 신자는 자기 삶의 모든 상황을 낙심하는 쪽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현실은 하나님의 모든 도움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일들은 비관적이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것을 이길 수가 없고, 자기 앞에 남아있는 것은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뿐이라는 좌절감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의 곁에 없다는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바로 땅끝에 있었던 시인의 심정이었습니다. 이때 믿음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바로 이럴 때 거기서 미끄러지고 주저앉음으로 더 깊은 시험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급기야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거기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땅끝과 같은 상황에서, 아무도 건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한 분만을 우러러볼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 믿음의 결심이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드러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현실은 하나님의 모든 도움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고, 자기 홀로 버려진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때 땅끝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 있습니다. 거기는 바로 희망을 포기한 지점입니다. 하나님이 소망이시니, 소망을 포기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도 함께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포기하고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낙심하고 좌절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자신이 세상 끝에 있을 때, 땅끝에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시인은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어린 시절부터 주님과 동행하고 살아오면서 수많은 땅끝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끝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붙드시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아버지 앞에 부르짖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그곳에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울부짖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팔을 내밀어 시인을 건져 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 은혜가 바로 지금도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당신의 땅끝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땅끝 거기에 계십니까? 거기에 주저앉지 마십시오.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가장 슬픈 비극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주저앉음으로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절망과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셨기 때문이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손으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주님을 깊이 만나셨습니까? 언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 속에 용암처럼 솟아났습니까? 언제입니까? 평탄한 꽃길을 걸으며 모든 것을 누리고 호의호식하던 때에 여러분이 주님을 만났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가시밭길을 헤치며 지나갈 때, 우리는 거기서 빛을 보았고, 거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결코 살아있는 한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그때에 시인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도하소서
무엇을 기도하였겠습니까? 땅끝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2 下).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내가 (오르기에는) 높은 바위 위로 나를 이끌어주소서”(시 61:2하, KNJ 私譯) 구약 성경에서 "쭈루", 이 바위는 문자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구원"을 은유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반석"이라고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유명한 시편 18편 2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시 18:2) 심지어 신약 성경에서는 구원 역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예표로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2-4) 고난을 당하는 시인에게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자기를 보호하실 바위며 구원의 반석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모든 원수에게서 번쩍 들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반석과 같은 바위 위에 자기를 두시기를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62편 2절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우리에게도 하나님만이 피난처이시며, 성탑이시며, 바위십니다. 그래서 오직 그분께만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다고 시편 62편 8절에서 말합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주저앉지 마십시오. 모든 성도에게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젊은 시절에는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겪습니다. 알만한 나이쯤 되면 젊음의 기운이 사라지고, 죽음의 기운이 육체 속에 스며들어오므로 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낙심하며 포기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끊임없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자신을 향한 불만 이외에 아무것도 털어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할 때가 있었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생의 시기에서 자기를 건져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분께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민과 근심 속에 흘려 보낸 날들은 우리의 육체를 상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아버지 앞에 찬양하고,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제껏 살아온 모든 삶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때에 지켜주셨던 돌보심 때문에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의지하며 주 앞에 부르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결단
마지막 세 번째는 결단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결단하였습니다. 4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시 61:4) 그는 모든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처럼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이제 시험과 고난을 통해 자기가 있어야 할 곳과 피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 연약함을 고백과 기도로 극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주의 장막"은 당시 다윗 시대에 있었던 성막을 가리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성전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 때에 지어집니다. 다윗 시대에는 당연히 성전이 없었고 성막이었습니다. 광야에 있던 성막이 몇 번 자리를 옮기기는 했지만, 그러나 거기에 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람들은 주님께 제사하고, 거기서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제사의 감격을 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예배의 감격을 누림으로써 험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듯이 말입니다. 주의 장막은 성막이었으니, 거기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죄지은 자가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곳이었고, 지체들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고 싶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기를 원했습니다. 날개는 새들이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는 중요한 몸의 지체입니다. 하나님도 감당할 수 없는데,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날개 아래 품으신다면 누가 우리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어려움을 만나면 만날수록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파고들었습니다. 그의 날개의 그늘 아래서 보호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갈망 때문에 시인은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간구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을 믿음으로 살았던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의 마음이 연약해졌습니다. 마치 땅끝에 홀로 던져진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반석, 곧 안전지대에 자기를 올려놓으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서는 수많은 원수가 양손에 창과 칼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아귀다툼을 할지라도 도저히 시인을 해칠 수 없는 높은 반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런 높은 반석 위에 두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구설의 다툼을 면하게 하시고, 시련과 환란의 고통을 피하게 하시며, 바로 거기서 은밀하게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결단했습니다. 그의 날개 아래 피하기를 결단했습니다. '내 남은 인생 길에 무슨 일이 닥치고, 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일들이 어떻게 격변을 일으키며 내 인생을 집어삼킬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으리로다.' '주의 장막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할 것입니다.'라고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여러분이 오늘 보여주어야 할 결단입니다. 바로 이 고백과 기도와 결단이 있었기에 땅끝에 있는 것 같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시인은 좌절하고 낙심하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살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았고, 거기서 주님을 만났고, 거기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 은혜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고백과 기도와 결단으로 주님을 붙들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시인은 신앙이 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안에서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시인은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더욱 믿음으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땅끝은 어디입니까? 거기서 여러분은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이어지는 시련과 역경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결단하기로 다짐합니까? 고백과 기도와 결단으로 모든 마음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주님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다12 (2021.09.05._주일오전)
12.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히브리서는 신약의 레위기라고 불립니다. 구약의 레위기는 제사에 관한 많은 규례들을 담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핵심은 불결한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입니다. 신약에서 히브리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리스도의 속죄에서 찾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제물이신 동시에 자신을 제사로 바친 대제사장이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서 더러운 죄인인 우리들이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 기도하셨던 모습입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에 관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II.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오늘 생각해볼 제목은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까지 살아왔던 예수님의 기도 방식이었습니다.
A. 간구하심
제일 먼저 오늘 성경에는 "간구하심"이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은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다고 했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린 기도였고, 통곡과 눈물로 드린 것이었습니다. 본문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히 5:7上)
1. 주님을 믿음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믿음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하나님은 전능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시는 것은 당신에게 이미 정해진 것이었지만, 죽어도 자기를 그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시 부활로 살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죽음에서 자기를 다시 살리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의 뿌리입니다. 이 믿음 없이는 결코 우리의 기도는 결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인격적인 확신에서 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이 믿음은 더 깊어지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수록 이 믿음은 점점 강해집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고 있는지는 그의 기도 생활에서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면 결국 그는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신뢰하는 깊이만큼 기도는 열렬하고 지속적일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늘 이런 식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피가 되기까지, 진액을 다 쏟으시기까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그 후에 있을 일이지만, 영적으로는 당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죽음이 이미 그 기도 속에서 스며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적으로는 이미 이 십자가를 자기의 마음속에서, 정신 속에서 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이 영혼 속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특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기를 살리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잠시 질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보다는 잠시 후에 다시 살리실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이 기도에 응답받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면, 믿음은 점점 연약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점점 어둠이 가득해질 것입니다. 기회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십시오. 그 말씀을 듣고, 읽고,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두터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안전히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정말 하나님께로 상달되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어떠한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해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방식입니다.
2. 통곡과 눈물
그 기도는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부으신 기도였습니다.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히 5:7上) 예수님의 기도 방식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죽음의 잔을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잠시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이 두려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곧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을 인류의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게 바로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모든 죄인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를 위해 당신 자신이 대신 형벌을 받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며 드린 대제사장의 기도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소원은 우리가 모두 구원을 받고,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고 요한복음 17장 21절과 22절에서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공동체를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형벌을 대신 당하시면서도 형벌을 받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아버지 앞에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미워하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자신을 화목제물로 바쳐 기꺼이 우리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바치는 헌신의 기도를 심한 통곡과 눈물로 올리셨습니다.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때때로 회개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일체의 죄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때로는 거리감이 있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어떠한 거리감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그리워하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죄도 없으시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까? 이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죄 때문에 멸망당할 우리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 자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인인 우리의 비참함 때문에 아파하시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그 통곡 속에서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에 오늘 주님의 그 기도에 힘입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연약한 믿음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은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만큼 부자연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기도의 불이 마음에 타오르고 있습니까? 혹시 마음에 기도의 불이 꺼져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여러분 자신을 보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잡히시던 날 밤에 어떻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그날뿐 아니라 육체에 계시는 모든 날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셨는지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생각하십시오.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없는 영혼이 되기까지 자신의 삶을 방치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셔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묶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무엇에 묶였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묶인 사람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웃고, 그 사랑 때문에 우는 사람이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신자의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자의 마음입니다.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실 수 있었던 예수님은 얼마나 행복하신 분이였겠습니까? 몸은 십자가에 매달려 찢어지지만, 당신 자신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심으로써, 그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사는 길입니다. 온갖 게으름과 나태, 이유와 핑계, 그리고 쓸모없이 낭비해 버리는 시간 속에서 여러분의 아까운 인생은 흘러갑니다. 더 많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우리 하나님을 섬기도록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각자 있어야 될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구원해주셨습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기도의 불을 켜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자신을 꾸짖으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으나, 주님을 향해 닫혀 있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경외하심
마지막 두 번째는 "경외하심"입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간구가 응답된 것이 그분의 삶과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7절 하반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下) 여기에서 "경건하심"은 "경외하심"입니다. 그러니 예전과 같이 “··· 경외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 번역이 더 좋습니다. 기도자로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본문은 이로써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낙심하거나 실망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결코 쓸모없이 버려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또 다른 뜻이 있으셔서 우리의 응답을 지연시키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하는 바가 간절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하게는 하시지만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기도가 이 둘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때는 기도자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많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면, 먼저 여러분 안에 참 믿음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믿음이 있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는데도, 만약에 응답이 없다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을 믿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은 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일평생을 사셨고 이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셨다고 말합니다. 모든 기도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동기에 확고히 매여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경외하는 삶은 경건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멸시받음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결국 우리는 그 삶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열렬히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죽음의 빛 아래서 삶을 보아야 합니다. 응답받고자 한다면 여러분의 모든 삶이 결국 하나님 앞에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영원히 있다고 요한일서 2장 17절은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면 사는 사람의 마음에는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를 거절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는 마치 예수님이 "···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삶과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안 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삶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해도 잘 안 된다면, 여러분의 그때까지의 삶이 하나님 앞에 살고 싶었지만 잘 안 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에는 하나님의 향한 기도의 영이 지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던 사람은 그 삶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마음을 모두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속죄의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눈물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눈물을 받으신 후에 비로소 십자가의 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항상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눈물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었던 것은, 통곡과 눈물로 드리는 기도 이전에 먼저 하나님이 주님을 위해 사신 그분의 삶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십자가의 피를 받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눈물을 먼저 받으셨고, 그 기도의 눈물을 받으시기 전 먼저 그분의 삶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공을 드리십시오. 삶의 한 순간이라도 낭비가 없도록 주님을 위해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연약한 우리 육신의 요구를 어디까지 들어주며 우리 육신을 돌 볼 것인지, 어디부터 단호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육체를 쳐서 복종시킬 것인지, 그 지점을 슬기롭게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뛰면 걷고 싶고, 걸으면 멈추고 싶고, 멈추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우리의 마음속에 정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일평생 우리는 한편으로는 육체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또 한편으로는 육체를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육체를 잘 다스릴 슬기를 갖지 않으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주일을 헛되이 낭비하고, 게으름과 허탄함 속에서 일주일을 허비하고 난 후 그가 감격에 넘치는 예배를 드릴 가능성은 없습니다. 단 하나, 그렇게 살았던 삶에 대해서 뼈저린 회개를 한다면 그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고자 한다면 먼저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눈물로 간구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그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삶으로 아멘을 말하십시오.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십시오. 먼저 여러분이 매일매일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다가 온 사람이어야만 여러분의 기도도, 예배도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삶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여러분이 살아있는 이 삶을 하나님의 사랑에 매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요한복음 9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이것은 예수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이었습니다. 죄인의 기도는 아무리 많이 드려도 듣지 않으셨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뜻대로 행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잘 들어주신 것을 우리도 같이 목격한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지 그냥 기도하게 하심이 아니라 그 기도 속에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더욱 하나님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시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살아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에 게으른 사람은 결국 게으른 삶을 살고, 게으른 삶을 살던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열렬히 살던 사람은 열렬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열렬히 기도하던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다시 열렬히 살 수 있습니다. 기도와 삶은 이처럼 서로 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기도 생활을 고치고 싶으면, 여러분 자신 전체를 하나님 앞에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하나만 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고쳐져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거운 영혼입니까?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의 영혼은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그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육체는 고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무겁고, 심각하고, 두려우니, 수시로 마음이 회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세상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국 알고 보면 그의 영혼이 목마른 듯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을 잘못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영혼으로는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그렇게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하니, 그렇게 살고 나면 영혼에는 무게가 더해져서 더 무거운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짊어지고 일어날 수도 없는 무거운 짐을 졌는데, 그 위에 더 많은 짐을 짊어져서 그 짐에 깔려 질식할 지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에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기도 잘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정말 무엇을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 밤에 나의 영혼을 주님께서 취하신다고 할 때, 내가 주님께 기도하고, 그 사랑을 흠뻑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가질 욕망이 더 좋은 것이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남아 있어도 괴롭고, 죽음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한 가운데에 놓여 있어서 아까운 인생의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열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깔보던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가지고 정욕을 따라 살던 사람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역사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일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그 기도를 중심축으로 삼아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셔야 됩니다. 나는 여러분이 열렬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무슨 일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모두 쏟아 놓을 수 있는 교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매일 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일생동안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산다면 우리의 기도는 활기차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명백하게 불순종하고 있는 것부터 회개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아닙니다. 거의 기도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방향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회개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 삶에서 돌이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기도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데서나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삶을 고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조용히 여러분의 생활을 반성하십시오. 하루 중 낭비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때가 언제인지, 습관적으로 하나님 앞에 짓는 무엇인지 생각하며 돌이키시고 삶을 고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기도부터 시작하고 싶으십니까? 기도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처해 있는 삶의 상황을 그대로 아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토해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처분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힘으로는 어떻게 달리 살 수 없다면 그 사실까지도 주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제가 다르게 어떻게 살 수도 없고, 다르게 기도할 수도 없사오니,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얼마 되지 않아서 여러분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졌던 진실은 여러분 마음에 진정으로 진실이 담긴 언어를 토해내게 될 것입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기 전에 여러분의 마음을 먼저 움직이게 될 것이고, 여러분은 눈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지금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 때문에,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어려운 때를 믿음으로 살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제는 예전처럼 모든 사람이 모이는 감격적인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이제는 10% 인원만 예배에 참석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들 중 예배에 집중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예배당에 와서 눈으로 보며 설교를 들어도 집중하지 못하던 사람이 모니터 앞에, 자그만 핸드폰 앞에, 마음을 드리며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 어려움 속에서 무엇으로 이 현실을 이기시려고 합니까? 염려와 근심 걱정으로 여러분이 살아 본들, 여러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겠습니까? 무엇으로 여러분은 이 현실을 이기고, 수시로 미끄러지려고 하는 여러분의 영혼을 붙들어 하나님 사랑에 붙잡아 맬 수 있겠습니까? 기도 아니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고, 깨달은 그것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신앙을 가지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이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삶을, 하나님 경외하는 삶으로 드리십시오. 그리고 다시 기도하기를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예배당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집에서, 직장에서, 어디에서든지 시간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주님 앞에 간절히 아뢰십시오. 아버지 앞에 여러분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처럼 심한 통곡과 눈물로 드려지는 기도가 되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비십시오.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니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 기도로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여러분 삶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경외하는 데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기도와 생활은 꽃과 향기의 관계와 같습니다. 꽃이 진짜 꽃이면 향기가 나고, 향기가 나면 진짜 꽃입니다. 기도와 삶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보다 깊은 기도로 나아가기를 원합니까?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오래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지금 자신의 생활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인지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모든 삶의 중심이 하나님 사랑이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도 변할 수 있고, 기도도 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을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3.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1-46)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본문은 잇따라 발생한 두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과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그분을 환영하고 찬송했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오시자 우셨다고 보도합니다. 그것도 그냥 우신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 우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강건하셨습니다. 수많은 대적과 마귀의 위협에도 결코 주눅 드시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 성 가까이 오셨을 때 통곡하며 우셨겠습니까?
II. 만민이 기도하는 집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신 것은 보셨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셨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통찰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도 의아한 것은 그분이 목놓아 대성통곡하신 이유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A. 평화를 모름
예루살렘은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모든 사람과 평화를 누리고 살고 있는 최선의 상태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모세시대 때부터 예정하신 도성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한 곳을 지정하여 거기서 제사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왕국이 세워진 이후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왕권이 행사되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첩에게 괄시를 받는 어느 여인의 개인적인 소원으로부터 외적이 침입하여 국가가 위기에 놓였을 때, 하나님 앞에 탄원을 드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일을 성전으로 가지고 나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거기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했습니다. 타락한 종교지도자는 안 가르치거나 잘못 가르쳤습니다. 백성들은 잘못 믿거나, 안 믿거나, 타락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영적인 통찰로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탄식하듯이 4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9:44)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의 의미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약 사십 년 뒤에 이 예언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끊임없이 로마에 반항하고 독립을 꾀하던 이스라엘은 결국 로마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주후 70년에 디도 장군을 파송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그때는 마침 유월절이었습니다. 약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보급이 끊기고, 기근이 덮쳤습니다. 포위당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 넘어갔습니다. 성 밖에서는 로마 군대가 흙을 산처럼 쌓아 예루살렘을 침공할 준비를 했습니다. 결국 6월 24일 안토니오 요새가 점령당했습니다. 7월 6일 항상 드리던 성전의 희생 제사가 그쳤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바칠 제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버티다 못한 예루살렘은 로마에게 함락당했습니다. 8월 27일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위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이 불에 탔습니다. 그리고 9월 24일에는 전 도시가 로마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습니다. 이날이 예루살렘 최후의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종교적으로 살았으나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그들을 돌이키게 하였으나 그들은 결코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멸망의 심판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42절은 말합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다른 도시는 몰라도 예루살렘은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다른 도시는 몰라도 예루살렘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그 경고의 나팔을 온 이스라엘에게 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하나님께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아부였고, 주님은 그런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것이 감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들이 볼 수 없도록 감춰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였습니다. 예루살렘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곧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통곡하시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이 통곡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통곡하셨겠습니까? '예루살렘' 이라는 이름은 원래 '예루'와 '샬렘'의 복합어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뜻은 '평화의 도성'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예루'가 '도시'이고 '샬렘'이 '평화'를 의미해서, 두 단어가 합쳐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얼마 안 있어서 당하게 될 심판이 예수님에게는 한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있는 것 같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바라보시고 통곡하며 우셨던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바로 이 예수의 마음을 품은 기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회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자들을 생각하시며 통곡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높은 건물이나, 모이는 사람들의 수요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깨어 있는 교회, 그리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하는 교회에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전수해 주십니다. 그 마음을 품은 교회들이 되어야지만 진정한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깨진 평화를 다시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평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기도하는데 기도가 잘 안되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기도가 되지 않을 때는, 그렇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복구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잠든 성전
통곡을 그치신 예수님이 방문하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우시던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성전에 들어가시는 장면이 보도됩니다. 왜 그런지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격렬히 행동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치 이변을 만난 듯이 분노하고 흥분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돈 바꾸는 자들과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상과 의자를 엎으시고, 격렬한 언어로 그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이렇게 화내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당시 성전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때도 변함없이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와서 헌금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돈 바꾸는 자들과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연은 이런 것입니다. 원래는 자기가 기르던 짐승들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기르던 양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물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양은 그 주인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임을 당하며 피 흘리고 죽어 갈 때, 그때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죄를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옮겨 주시고, 자기를 용서해 주시는 은총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드리는 제사 속에는 진심이 있었습니다.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피가 흐르고 불타며, 제물들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헌제자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짐승들을 가지고 오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후에는 아마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물을 사서 하나님께 바쳤고, 아예 성전에서 그런 제물들을 파는 사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사연이 이런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시대에 세 개의 돈이 함께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의 돈, 그리고 헬라의 돈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고 있는 히브리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돈과 헬라의 돈은 명목가치가 실질가치 보다 더 높은 이른바 악화(惡貨)였습니다. 500원짜리 동전을 놓으면 그 금속의 가치가 500원이 안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화폐에 표시된 금액과 실제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 돈은 하나님 앞에 드리기에 가증한 제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겔'이라는 돈을 썼습니다. 그것은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는 히브리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 돈과 로마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동네에 와서 히브리 돈으로 교환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성전 안에서도 돈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날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게 오래 전부터 성전에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 바꾸는 일과 제물을 파는 일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남겼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오히려 F. F. 브루스라는 학자는 아마도 그렇게 돈벌이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제사와 헌금을 위해 이 일이 이루어졌고, 그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을 바꾸는 자들과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상과 의자를 모두 뒤엎으시며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일찍이 당신의 생애 중 그런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심하게 진노하셨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적인 시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았을 때 예수님의 눈에 성전은 보통 큰 문제를 가진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C. 기도하는 집
왜냐하면, 그 집은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이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진노 끝에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11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7) 이것은 원래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예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40장부터는 이스라엘이 먼 훗날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다시 회복되는 광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그 문맥에서 이사야 56장 7절에 이 말씀 실린 것입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범죄함으로 하나님 앞에 평화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날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고, 거기서 번제와 희생을 드릴텐데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집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바로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이런 평화를 회복하기 전까지 그때의 예루살렘 성전도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었지만, 후일에는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집, 곧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을 또 다른 민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적인 열망을 저버렸습니다. 성전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지만, 영적으로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세속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은 단지 제사드리는 곳이 아니라 마땅히 기도의 집이 되어야 했습니다. 기도의 집이 되지 않고는 거기서 드리는 제사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구원받을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교회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집이 뚜렷이 드러나는 집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구원받을 민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이미 이사야에게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결코 교회는 존재의 목적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의문을 불러 일으킵니다. 매매하고 돈 바꾸는 일이 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었습니까? 그때도 성전에서는 여전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제사드리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이 사건은 교회와 기도의 관계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 기도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결국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가 회복될 때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의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된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또 다른 구원받을 민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곳, 그것이 바로 주님이 성전을 세워 놓으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열망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나 교회는 전혀 기도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회복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의심할 여지없이 영혼의 침체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할 수 없다면 지금 여러분의 모습을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 버린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점점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에는 어두운 밤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웅덩이에 빠졌으면 나오기 위해 몸부림 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배고프면 먹기 위해서 힘쓰지 않겠습니까? 목마르면 여러분이 물을 찾기 위해 갈급해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도할 수 없다면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고, 그 장벽을 어떻게 하든지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로도 많은 것을 가르치시지만, 침묵으로도 많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이 기도 속에서 침묵하실 때 여러분은 그 침묵 속에서 웅변보다도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왔길래 기도할 수 없을까? 왜 이렇게 여러 날 동안 내 마음은 건조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있을까? 내 마음은 이렇게 곤고한데 왜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인가? 수많은 생각을 하라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기도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그 삶에서 돌이키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때가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석 달 동안 여러분에게 기도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목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순종하여 열렬히 기도하러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뒤로 물러가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은 껍질만 그리스도인이고, 무늬만 신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제사는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제물을 갖다 바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성전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정은 통곡하시는 심정이었고, 이 심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이 예루살렘 성전을 기도의 집이 되는 것에 방해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돈을 남겼는지 안 남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관심사가 여기에 와서 기도하는 일이 아니라, 제물을 매매하고 돈을 바꾸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순서가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누가복음 18장에서 그 사람에게 헌금이 있었습니까? 제물이 있었습니까? 그 세리는 단지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자기의 마음을 제사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여겨주셨습니다. 마음속에 매매하는 자들이 여러분이 기도를 못하게 합니다. 마음속에 돈을 바꾸는 자들이 여러분이 기도를 못하게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기도는 단지 언어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막혔던 기도의 문도 열어주십니다. 죄를 지었어도 그 담장을 허물어트리고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품 안에서 뜨겁게 눈물 흘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기도가 깊어지면 언어가 영혼의 신음소리로 바뀌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한마디라도 말씀을 깨닫고 감화를 받으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얼어붙은 얼음과 같은 마음이 따뜻해질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이 녹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위험한 곳에 그대로 두지 마십시오." "나로 하여금 기도의 문을 열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가 기도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기도의 집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빌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모든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교회로 하여금 기도의 집이 되도록 일도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향해 떠오르려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오르지 못하도록 다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이야기하고, 즐거워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이에 비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순간이 하루에 몇 분(分)이나 됩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속에 있는 돈 바꾸는 자의 상을 둘러엎으십시오. 그리고 매매하는 자들을 몰아내십시오. 말씀을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세상의 헛된 일로 마음이 나뉘지 않게 하십시오. 그래서는 결코 열렬한 기도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은 먼저 자신을 기도에 바칩니다. 기도에 헌신하지 않고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세계, 그것은 드넓은 바다와 같습니다. 끝없이 푸르고 변화무쌍한 바다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바다에서 헤엄치며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 줍니다. 기도는 그분을 아는 지식의 바다에서 수영하게 합니다. 거기서 은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합니다. 그리고 결코 세상에 지지 않는 살아있는 신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이 그 이름값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도성이어야 할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기도의 집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임박한 심판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똑같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진노하셨고,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는 그 집으로 하여금 기도의 집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심판을 앞둔 예루살렘 한복판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잠들어 있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 성전은 기도하지 않는 껍데기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도 이스라엘에게 경고의 나팔을 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교회와 자기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 곧 십자가에 못 박히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실 것이었지만, 남겨진 우리를 위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우시기까지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땀과 눈물과 피의 생애였습니다. 그렇지만 순서가 있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아들의 피를 받으시기 전, 하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눈물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의 눈물을 받으시기 전, 온 백성을 힘을 다해 섬기시는 아들의 땀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땀을 받으시고, 눈물을 받으셨습니다. 눈물을 받으신 후 그의 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속의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고, 당신이 십자가를 친히 지시고 죽을 때를 앞두고도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특별히 기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쉴 새가 없는 바쁜 일과 중에도 예수님은 새벽 미명과 깊은 밤을 따로 떼어 놓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능력이 필요했고,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연약한 인간의 몸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안 잡수시면 시장하셨고, 주리면 배고프셨습니다. 그리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셨고, 많이 걸으시면 지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애 동안에 언제나 눈물의 기도로 당신의 삶을 가득 채워 가셨습니다. 그렇게 사시다가 마지막 십자가를 지실 때가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통곡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영적인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위해 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혹은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모든 교인이 이렇게 눈물의 기도를 드린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고, 주님을 경외함으로 응답을 받는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현실 속에 허우적거리며 인생의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로 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열두 번이나 기도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변화를 받고, 열렬한 기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듣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들었지만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이 기도하지 않고 세속화되어버렸을 때,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은 멸망을 했습니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족과 불쌍한 이웃, 그리고 생각나는 여러분의 모든 지인들, 특히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위해 누가 기도해주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기도의 자리에서 그들을 위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주십니다. 바로 그 일을 하라고, 반역하는 세상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 기도의 중재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다가오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신을 기도에 바치셨습니다. 게으른 여러분의 생활과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을 위해서는 시간들을 많이 허비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 앞에 거의 내어 드리지 않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혼은 바짝 말라 버릴 것입니다. 그나마 있던 은혜의 샘물도 고갈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곤고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깨우치게 하시기 위해 징계의 손을 드실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기도의 집이 되도록 얼마나 기여하고 있습니까? 혹시 교회는 기도의 집이 되고자 하는데, 여러분이 무거운 짐이 되거나,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애써서 온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며 공기 한 번 마셔 보려고 물 위로 떠 오르는 사람의 발목을 잡고 함께 가라앉는 것처럼, 여러분이 교회에 그런 누를 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은 여러분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영혼은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부터 개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작정하십시오. 그리고 아버지 앞에 기도함으로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심판을 앞에 둔 예루살렘 한복판에는 잠든 성전이 있었습니다. 잠들어 있는 성전 한복판에는 돈 바꾸고, 물건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교회는 결코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습니다. 깨어 있는 성도가 모이지 않고 교회가 어찌 깨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게 하십시오. 그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시간을 정하십시오. 장소를 세우십시오. 무엇보다도 뜻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김없이 그 시간에 기도함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해 여러분이 먼저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