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8 서른통 좌담회
서른통 좌담회 ‘세계관’
1부 : 앎과 삶의 괴리
Q 1. 목사님은 청년 때 서른 즈음이라고 하면 목사님 다 결혼 하시고 하셨을 때니까 이십대, 삼십대에 이때쯤에 어떤 고민을 많이 하셨습니까?
A. 그러니까 나이 삼십 됐을 때에는 결혼을 하고 4년이 됐을 때고 신학대학원을 31살 때 들어갔으니까 서른 살 때에는 내가 29살 때 우체국장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30살에 대학원에 가기 위해서 공부하고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 이야기 해봐야 여러분하고 별로 접촉점이 없을 거 같으니까 이미 갈 길이 분명해졌으니까 그래서 돌아봐보면 크게 두 시기로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하나는 회심하기 직전 20세. 그 때에는 너무 어리니까 접촉점이 별로 없습니다. 회심하고 제가 깊이 변화받기 전 그러면 여러분들이 질문하는 것 하고 비슷할 거 같습니다. 그 때가 언제였냐면 21살에 회심하고 두 번째 25살에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고 그 다음에 신학을 해야 되겠다고 맘을 먹고 그랬으니까 24살 그 때 즈음 얘기를 하면 여러분들이 질문한 의도에 맞는 답이 나올 거 같습니다.
그때는 제가 무엇을 했는가 하면 그때는 제가 공무원으로서 직장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주님을 만나서 회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긴 했는데 그리고 교회에서 교사로 그저 성실하게 봉사하고 그랬는데 내 삶에 중심에 신앙이 있진 않았습니다. 신앙이 마치 어떤 거었냐면 내가 살다가 바깥으로 나가서 너무 많이 나갈려고 하면 링에 ‘탁‘ 걸리는 것 그런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중심에서 나를 붙들고 있다기보다는 내 맘대로 막 갈려고 그러다 ‘탁’ 하고 걸리는 링이 있었는데 여기는 여기를 건너가면은 신앙으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거다 라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일 지키고 그리고 가끔 성경도 보고 그랬지만은 신앙이 이렇게 중심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이제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제일 내 마음에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어떻게 인생을 좀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회심하기 전에는 하나의 아이러니한 것 같은데 ‘인생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참된 길이 무엇인가?’ 이런 철학적인 논구를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니체도 읽고 꽤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근데 신기하게 회심하고 그게 딱 들어가면서 스위치를 딱 꺼버리게 되었습니다. 그게 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제가 제 인생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서 썼던 용어들을 교회에서 하나도 사용 안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 가치... 이 사람들은 모두 답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아주 시건방진 것이고 유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회심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그런 게 하나도 필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진짜 하나님 믿고 그냥 주님 의지하고 살면 다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책을 구입하는 것도 회심하기 전에 책을 많이 구입을 했지 회심한 다음에는 그런 책이 아니고 대게 공무원 시험 보는 그런 책들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좀 더 다른 시험을 봐서 나의 갈 길을 찾아볼까?’ 그런 생각도 하고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근데 게으르지는 않았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다 이야기 할 수 없지만 공부에 도전도 하면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또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면 이성적인 것이었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생겼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몇 있었는데 제 마음에는 별로 안 들었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별로 맘에 안 들었습니다. 고민이라기보다는 욕구 같은 것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세 번째 자리 잡은 것이 교회에서 여러 가지 느끼는 갈등들, 내가 해야 되는 일들에 대한 의미 이런 것들이었고 그 당시에는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나 이런 것들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회심하기 전에는 그런 책들을 읽고 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해서 관심도 많이 갖고 그랬는데 교회가 제가 생각하면 저한테 못할 일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스위치를 확 뽑아 버렸습니다. 그런 것들이 제가 회심하고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기 전에 경험했던 그런 문제들이었고 참 이상한 것이 은혜를 많이 받지 않습니까? 간헐적으로지만 은혜를 받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눈물도 흘리고 감동도 받고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굉장히 피안적이 되는 것입니다. 타계적이 된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주님의 품에 푹 안겨서 죽고 싶고 왜냐하면 돌아가는 일들도 내 맘대로 잘 안 되는 것도 많고 그런 혼란스런 시기들을 지났던 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면서 제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것들이 확고해 지기 시작하면서 그 땐 이제 인생관이나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기회가 많이 있는데 우리 자라던 시절에는 그렇게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 기회라고 하는 것은 열심히 공부해봐야 시험 봐서 공무원이 되던지 고시에 패스 하던지 그 때는 공기업체라는 개념도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있기는 있었지만 한국은행 같은 데서 채용시험을 보곤 했습니다. 그런 데 간다던지 근데 그 문 자체가 아주 굉장히 좁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일반 회사에 들어간다고 그러면 그것은 뭐라고 그럴까? 지금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이런 현실하고는 매우 어둡고 희망이 없는 그런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우관계 이런 것들은 제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 교회에 거하게 되면서 친구들과의 관계는 거의 끊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토요일 아니면 주일날 대게 만나게 되는데 주일날 토요일날 대부분 교회일이 있곤 하니까 신앙생활을 뜨겁게 하진 못했어도 그리고 가면 신앙은 별로 없는데도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술 먹으로 돌아다니고 이러는데 신앙은 없었어도 그것도 별로 그렇게 재미가 없고 이것도 별로 재미가 없는 그런 애매한 삶을 살았던 거 같습니다. 초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고 나서 초점이 없어졌습니다. 그 때 굉장히 치열했습니다. 회심하기 전까지 가치가 무엇이냐? 그러니까 니체 전집 스물 몇 권으로 이번에 완역됐는데 그거를 그 때 열 아홉 스물 고때 나인데 그 지금 나온 거 전체는 아니어도 반 이상 읽었습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원론 이런 책들 까지 다 읽었습니다. 쇼펜하우어를 좋아해서 쇼펜하우어 책들을 많이 읽고 톨스토이, 그리고 헤르만 헤세는 거의 완독했고 그 다음에 카프카를 비롯해서 실존주의 작품들, 그 다음에 샤르트르 한참 읽었습니다. 의미도 모르고 어마어마한 양을 읽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묻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독서를 지도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 고민을 누구한테 털어 놓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Q. 목사님 신앙을 갖게 되시면서 스위치를 뽑혀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지금은 사실은 더 제대로 된 쎈 전력이 흐르는 곳에 스위치를 또 꼽으셨지 않습니까? 그 터닝 포인트는 무엇이었습니까?
A. 그것은 이야기하면 깁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지난 화요일 날 항상 한 학기에 한번 씩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초정해서 여기서 잠깐 대화의 시간도 갖고 교회도 돌아보고 그 다음에 저녁도 같이 먹고 합니다. 어차피 제가 외국 갈 때는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펑크 내니까 보상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수강생이 70명 정도 됩니다. 예전에는 ‘모두 와야 된다. 안 오면 출석 부른다’ 이러면 다 옵니다. 보강이니까 그런데 저도 부담스럽고 70명씩 와서 여기서 막 판을 치고 고기값도 비싸고 그래서 올 사람만 오라고 했더니 35명이 왔습니다. 교회 다 돌아보고 6층에 올라가서 서재를 보고 설명을 다 듣고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에 쭉 앉아서 대화를 했습니다. 느낀 것을 이야기 해보라고 했더니 한 사람씩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저하고 같이 공부한 학생들은 공부에 도전을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공부해야 되겠다’ 생각합니다. 어느 학생이 ‘목사님 저는 오늘 여기 와서 참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젊은 나이에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뛸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 극복했습니다. 그런 스위치를 뽑아 버렸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내 잘못은 무엇이었고 또 그들의 잘못은 무엇이었는지 그러나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도 거의 동일한 현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통계적으로 보면 철학과 학생들 절대 예수 안 믿습니다. 예수 믿고 의도를 가지고 철학과 간 학생들은 종종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해서 내가 신학을 깊이 하겠다든지 이러는 사람은 있는데 그렇지 않고 철학과를 다니다가 전도가 돼서 예수 믿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제 그런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있다가 나오겠지만 세계관의 문제 그리고 어떻게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설교를 들었으니까 여태까지. 말로다 할 수 없지만 설교를 듣고 여러분들이 나름대로 이해를 한 사람들은 목사님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이 세상 창조세계와 우리가 인간이 사는 세계와는 동떨어진 신앙의 세계 속에서 이것을 붙들고 살아야 된다 라고 하는 외부와 담을 쌓은 어떤 것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하던지 여러분들의 목사님이 이 우주와 모든 세계를 한 품으로 보고 싶어한다 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의식을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별로 대답이 없는 것 보니까 의식을 못했나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옛날에 어떤 자매가 열린 신문에다 글을 썼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린 교회 오기 전에는 예배당에 들어 와서 예배를 드려야지 겨우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었는데 내가 여기서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는 들풀 한 포기, 하늘을 떠가는 구름에서도 나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포괄적인 세계관들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보다 훨씬 좋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아마 제 설교를 들으면서 예를 들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 아니면 이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 내가 하는 학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내가 가지고 있는 직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 하는데 최소한 스위치를 꺼버리던지 뽑아 버려야지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은 안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그런 판단을 했다면 여러분들이 나의 설교를 안 듣거나 아니면 대단히 심각하게 오해를 했거나 그런 것입니다. 공부를 잘 안했거나. 제가 이야기 하는 건 혼자서 열심히 독서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열린 교회에서 제공하고 있는 커리큘럼을 따라서 또 이상한 교역자를 만났으면 또는 부교역자를 만나면 이상해질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그렇게 따라오고 정상적으로만 이해를 했더라도 그런 인상은 안 가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보다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세계를 통일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안목을 가지고 우리들이 인생문제를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따로 질문해 주십시오.
Q. 목사님이 이야기하셨는데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청년1부 김원호라고 합니다) 방금 말씀하셨을 때 주님을 깊이 만나기 전과 후를 나누셨는데 주님을 깊게 만났을 때 그것을 철저한 성경 공부와 ? 속에서 주님을 깊게 만나셨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말씀이 다가와서 거기서 주님을 깊게 만나셨는지 그 부분이 궁금합니다.
A. 사실 제가 섬기던 그 교회에도 목사님이 50세도 안 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부도덕하고 그런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목사님이 순수하셨고 좋은 교회였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뭐냐하면 제가 그 당시에는 모든 설교를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한번도 설교를 들으면서 ‘아! 이것이구나, 이것이 진리구나 그리고 아! 내가 죄인이구나! 아 정말 하나님 사랑이 크구나!’ 그 교회에서 76년부터 5년을 넘게 다녔는데 한번도 없었습니다. 모두 예배에 집중하며 다 기록했습니다. 뭔가 전해야 되는 메시지 자체가 그렇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허무한 소리를 설교시간에 하는 것은 또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 노트가 어디 있을텐데 참 기이합니다. 그렇게 마음에 부딪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교인이 다 그랬습니다. 심지어 다른 교인들은 목사님 설교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 듣겠다고 했습니다. 교리적으로 깊이가 있어서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어느 것도 성경말씀이 아닌 것은 없는데 어느 것도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렇게 주님을 만났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변화시키실 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항상 설교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는 것이 열린 교회의 기본적인 경험이라면 사실 저는 그렇지도 않고 오히려 주일학교를 하면서 일꾼이 하도 없으니까 장년교인이 100명쯤 모이니까 전도사도 없었습니다. 저보고 주일학교를 책임 맡으라고 해서 24살에 집사가 되가지고 25살에 주일학교 부장집사가 되었습니다. 재직회 서기고 장로도 없는 상황에서 그분들 눈에는 신실하고 그렇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를 하라고 맡겼는데 제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일주일을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한 금식기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예전에 며칠씩 한 적은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목숨을 걸다시피 기도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일주일을 정확하게 말하면 5일을 했던 거 같습니다. 금요일 날 밤에 풀었습니다. 월요일부터 시작해서 5일 정도 했는데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주 의심할 수 없이 저를 목회사역으로 부르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 여름성경학교를 하면서 생생히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거기서 아이들이 깊이 회심하는 하나의 작은 부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 80명 정도 아이들이 모였었는데 동시에 모든 교회가 여름성경학교를 하는데 다른 교회는 교역자가 권면하면 집사님들이 휴가내고 와서 320명이 모였는데 예배당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서 길 바깥까지 돗자리를 깔고 길 바깥에서 문을 열어놓고 아이들이 예배를 드릴 정도로 그렇게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부터 세계와 이런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일원론적인 큰 안목이 생겨난 게 아니라 아주 확실한 것,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 다른 것은 나에게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 이런 것이 확고하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할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깊은 결단, 그리고 작은 일에 있어서도 그 분께 완전히 순종해야겠다 라고 하는 온전한 결심 그런 것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
Q.2번,3번 묶어서 질문드리겠습니다. 신학적인 부분은 거의 이해하지 못하시고, 교리적인 지식도 전혀 없는 할머니이신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정말 그 누구보다 진실하다고 느껴지는 분이 계십니다. 객관적인 지식의 양에 있어서만 제가 우월할 뿐, 실제 삶의 부분에서는 그 할머니보다 전혀 나은 것이 없는 저를 발견하고, 제 ‘앎’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진짜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삶의 변화는 미미한 채, 지식의 축척만 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앎’과 ‘삶’이 괴리된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A. 죽는 날 까지 그런 질문에 대해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앎의 대상이 결국은 진리이지 않습니까? 진리를 아는데 ‘나는 진리와 합치됐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곧 진리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한번도 그런 질문을 안 받아 본적이 없고 저 스스로 중세 교부 가운데 안셀무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켄타베리의 알셀롬이라고 배우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믿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오만한 사람입니다. 공부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태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다음에 잘 배워서 이 두 가지 신앙과 이성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된 가운데 그 아는 바와 사는 바가 합치된 생활을 해 나가는 데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할머닌지 모르겠는데 그 할머니가 있습니다. 교리적인 지식이 전혀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제 자기 판단이고 그 할머니에게도 교리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자기처럼 말로 끌어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풍부한 지식은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천국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라보시고 잘한 사람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잘못한 사람들에게는 벌을 주신다’ 라는 그런 것도 교리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의 양이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참된 지식이어야 합니다. 이럴 수 있지 않습니까? 지식의 양이 많아도 참되지 않을 수 있고 지식의 양이 아주 적어도 참 될 수 있습니다. 그 참된 지식에 자신의 삶을 합치할 때 거기에 진정한 안정감과 참된 행복 같은 것들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는 것이 참되다고 할지라도 삶을 거기에 합치시키지 않으면 오히려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불행하지 않겠습니까? 몰랐을 때는 맘이 되게 편안한데 알고 나서는 심경이 괴로웠던 적 없습니까?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상관 없는거였구나 하고 사는데 나중에 잘 탐구를 해보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매우 잘못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굉장히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예화) 불법 다운로드 보편적이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받아서 프로그램도 다 여기저기서 열쇠에 묶어 놓은 거 타 풀어가지고 친구하고 공유하면서 2백만원, 3백만원짜리 프로그램 돌려서 쓰고 누구는 다 모아가지고 보여주면서 이 프로그램이 1억원어치라고 자랑하고 그 때는 굉장히 좋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저작권법을 상세히 읽어보니까 큰일 날 일입니다. 걸리면 얄짤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쓰다가 누가 문을 퉁퉁 하고 두들겨도 ‘이거 경찰에서 온 거 아닌가?’ 그런 것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비록 하늘의 원소들을 다 셀 수 없고 나무의 크기와 부피와 길이를 자로 잴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내신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그 용도에 알맞게 쓰는 그 사람이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주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할머니가 그 할머니의 삶의 질이 훨씬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면 아주 올바르게 아는 작은 지식 하나를 올바르게 붙들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합치시키는 신실한 믿음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무슨 얘긴지 이해되십니까?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실수하는 게 뭐냐 하면 지식이 많으면 나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앎과 삶의 균열이 지식이 너무 많아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진리로부터 이탈된 삶의 균열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 순종의 부재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만약 지식을 줄이면 할머니처럼 되는 게 아니라 할머니처럼 모르면서 헛되게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도 그런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신실한 신앙.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신학적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을 하는 것,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은혜를 받는 것 이런 것들이 지식의 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런 것들이 더 간절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식의 축척으로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밑동서부터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띠에따스 경건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Q. 5.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대로 살고 싶은 소망이 있으나 그 속마음을 좀 더 파헤쳐 보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구해서, 불행하지 않은, 내가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욕구가 최종 목적인 저의 모습과 마주칩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이 먼저가 아닌, 내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 같은 느낌이 종종 듭니다. 그래서 잘 되면 감사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에는 잘못을 떠넘기고 마음껏 투정을 부리고 원망을 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순수하지 않은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고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A. 이것은 그래서 항상 제가 반복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뭐냐 하면 예전에는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내 행복이 가치의 최고 기준이라고 생각하던 삶에서 하나님이 중심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중심이라는 것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용이 수도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회심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설교 속에서 굉장히 이야기가 많이 됐지만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이야기는 있는데 자기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이야기는 있지만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 없는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이 바라보는 독특한 인간관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인간이 ‘나라는 존재는 행복할 가치가 없다. 그래서 나를 행복하라고 하지 않는다.’ 라고 하면 모순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왜 다른 사람은 나의 행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나옵니다.
(예화) 하나님이 어떤 형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성경을 다 연구하면서 찾아봐도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라‘ 라는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그러면 나보고도 이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살라고 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두 개가 다 똑같던지 아니면 아니던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나보고는 은혜를 많이 받았더니 ’이 형제가 굉장히 불행하니까 이 사람이 행복할 수 있도록 네가 도움을 줘라. 돈이 없으면 주고 외로우면 친구가 되어주고 아프면 네가 데려다가 고쳐줘라. 집이 없으면 같이 데리고 살아라.‘ 이렇게 하나님은 나에게 이 사람의 행복에 이바지 하도록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보고는 널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데 나보고는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우스운 질문 같지만 묘한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나보고 이 사람 사랑하라고 그러면 이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사랑의 대상이고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이 사람도 사랑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보고 사랑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정말 행복해지는 때가 언제냐 하면 자신의 사랑의 최종적 목표로 생각하며 최종의 목표로 여기며 살아갈 때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형제를 사랑하고 내게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을 이 형제에게 쏟아 부을 때 그 때에 그것은 이 형제를 최종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형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사랑이 전해 내려지면 이 사람이 나를 통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면 이 사람은 나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도구일 뿐이고 내 위에서 나에게 그런 감화를 주셔서 자기를 사랑하게 하신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나에게서 이 사람에게 이 사람에게서 또 옆으로 계속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기회기적인 큰 사랑의 흐름 속에 자신이 있을 때 자신이 진정으로 인간이 바로 그 자리에서 가장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근데 이제 문제는 예전에 주님 앞에 회심하지 않았을 때는 그런 구조가 아닙니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 자기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도덕관념이 있고 그다음에 사회 관습이 있고 바둑판같은 가치관의 네트워크 속에서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중심자체가 자기입니다. 이것이 회심에 의해서 무너지게 되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런데 그것이 항구적이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잔존하는 부패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내 영혼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 중심적인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아 있는 부패성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그렇게 요구하고 재촉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몸에 때가 끼듯이 잔디밭에 잡초가 돋아나듯이 계속 돋아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매일 매일의 회개입니다. 매일 매일의 회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나 자신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매일 매일 자신이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수한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까 말씀드렸던 진리로 자신을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합치시킬수록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는 날 까지 계속해야 될 싸움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번영주의라던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우리 기독교신앙에 해로운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신앙을 통한 거래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번영주의와 세속적 성공주의를 도입하는 신앙에서는 회심이나 회개, 자기 깨어짐 이런 것들이 중요한 가치로 등장해야 할 신학적인 근거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섬기면 나한테 이렇게 돌아올 것이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가 깊이 깨뜨려지고 변화돼야 될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큰 죄 안 짓고 주님을 위해서 티나게 봉사하느냐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이 갚아주시고 하면 나를 중심으로 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나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사이에 조화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조화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반드시 거기 적대관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5번에 해당되는 사람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회심을 안했던지 아니면 회심을 했는데 너무 회개를 안 하고 깨뜨려지지 않아서 버렸던 욕망과 성공을 위한 욕망과 죄들이 살아나서 하나님 중심적인 목표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목표를 지향하면서 살려고 하는 데서 나타나는 갈등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예수님 믿고 깊이 변화되어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라고 말해도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화) 예를 들면 우리가 사업을 하는 데 주님을 믿고 통일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면은 일원론적인 세계관, 통일적인 세계관에서는 사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이바지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이렇게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이 사람이 신학과 간다고 하고 이 사람도 신학과 간다고 가고 그래서 나도 하나님이 그렇게 불러주셨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그런 생각이 안들 때 ‘여기 뽑힌 사람은 주연이고 나는 돈이나 벌어다주고 보태줘야 되는 조연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통일적인 세계관에서 바라보는 직업관이 아닙니다. 전혀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 모퉁이를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사업을 한다고 하면 사업이 잘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러기 위해서 내가 지혜를 발휘하고 하나님 앞에 사업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위기 속에서 나에게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그런 지혜를 가지고 사업을 올바르게 하고 하는 이런 것들은 전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에 대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하게 그렇게 살아가고 그래도 궁극적인 목표가 만약에 그냥 행복한 가정 이루고 물질적인 풍요함 속에 살다가 그렇게 해서 이런 저런 꿈들을 이루면서 살고 교회 잘 다녀야겠다는 식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처음서부터 출발자체부터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으로서 적합한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이 아닌 것입니다.
Q. 둘째 계명이 이웃을 사랑하라 인데 앞에 보면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하셨잖습니까? 근데 내 몸과 같이 라는 것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사랑의 토대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렇게 본다면 자기에 대한 사랑, 죄성에 물든 사랑이 아니라 올바른 사랑의 기본 틀 안에서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내 몸과 같이 라는 게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A. 그 해석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생각을 해봅시다.)거기서 중요한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네가 네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도 그렇게 사랑하거라‘ 그런 뜻입니다. 거기에서 네 몸과 같이 라는 말에는 올바른 사랑이냐 아니냐의 가치판단은 배제된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몸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본능적이고 성향적입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춥습니다. 추우면 따뜻한 것을 입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목이 마르면 마십니다. 굉장히 육체의 필요에 아주 민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근엄하게 ‘내가 목마르다’ 그러면 다리가 열심히 가서 물 떠오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입니다. ‘추워’ 그러면 얼른 가서 보따리에서 이불 가져다가 덮는 것입니다. ‘시원한 얼음을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잽싸게 뛰어가서 아이스크림 사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남의 요구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하냐는 것입니다. 안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네 몸의 필요에 민감하고 철저하게 네 몸에 대해서 그러니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목마른데?’ 그러고 물을 뜨러 가면서 ‘아이시 귀찮아 왜 맨날 나만 시키는 거야’ 이렇게 생각 안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어디 갔다와’ 그러면 일어나면서 ‘아이시 엄마는 나만 시켜. 귀찮아 죽겠는데’ 이러면서 갈 때는 있지만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데 ‘아이시 나만 시켜 말이지 종이 있던지 누가 있어야지’ 이렇게 생각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네 몸과 같이 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자기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안 가르쳐 줘도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엄청난 은혜와 자기부인, 자기 꺽음, 자기포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게 하는 것은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저만 아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네 몸과 같이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Q. 그러면 운동이라든지 영양제를 먹는 습관을 만든다거나 하는 그런 습관을 만드는 과정도 어떻게 보면 자기사랑인데 그런 것도 보면 노력이 그만큼 필요하지 않습니까?
A. 제 말은 거기서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할 때 네 몸과 같이 라는 말이 가치를 배제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가치를 배제하고 본성적으로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게 되어있다는 것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 나는 영양제를 먹기 싫어하는데 근데 의사가 안 먹으면 너 영양실조 걸려서 3년 만에 죽는다고 한다면 나는 싫지만 억지로 먹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오늘 약 먹기 싫은 욕구에 굴복해서 3년만 살다 죽을 것이냐 아니면 이 욕구를 꺽고 그래도 약을 먹고 한 삼십년 살고 장가도 가 볼 것이냐 그 판단을 내린 결과 자기가 싫어도 억지로 먹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런 뜻입니다.
2. 요즘 영화 “도가니”가 난리입니다. 영화의 실제 모델인 광주 인화학교가 기독교 재단이고, 가해자인 원장이 장로라는 사실 때문에, 개신교가 함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불투명한 헌금사용이 기사화되고, 소위 소망교회 라인으로 불리는 고위직 내정자들의 불법행위들이 인사청문회를 통해 속속 알려지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욕먹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하시고 싶은 조언이 있으시다면? 또한 이 영화의 예, 그리고 과거 각종 고문 폭행 치사사건들의 예 등에서 나타난 교회 직분자들의 범법 행위에 대해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도가니”가 난리인데, 거기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장본인이 교회의 장로고 집사들 이런 사람들이 관여되어 있고 한국 역사에서, 근대사에서 걸쭉하게 일어났던 치욕스러웠던 사건들 속에 항상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거론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도가니”라는 영화를 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사실보다 더 오버해서 영화를 만들고 의도적으로 그 속에서, “밀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을 속된말로 하찌루집단처럼 만든 것입니다. 생각없는 사람들의 모임처럼 만들어서 경멸하는 그런 것들이 좀 과하게 제작이 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현재 사회에서 기독교가 욕을 먹는 저변에 깔려있는 것은, 특히, 기독교 중에 개신교가 욕을 먹고 있는 것은 현대에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무신론과 관련이 된다고 봅니다. 무신론적인 사상들이 있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불교나 유교는 어떻게 보면 신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이고 자연 자체를 신격화하고 인간 자체를 신격화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고 가톨릭은 이제는 종교 다원주의로 돌아섰기 때문에 종교 간의 갈등이나 그런 문제들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여전히 그런 독선적인 교리들을 신봉하고 있다고 믿고 그런데서 오는 무신론적인 태도들이 개신교에 대해서 반감을 훨씬 더 갖게 하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거보다도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실제로 도덕적인 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되어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두 가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첫째는, 사회의 전반적인 도덕의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러면 옛날에는 사회적으로 도덕이 강했느냐.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옛날에도 부정부패가 있고 그랬는데 그랬어도 사실은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옛날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신념들이 훨씬 더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 40년 전에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한 40년 정도로만 되돌려놓고 봐도 그때도 문제가 많았지만 사실은 지금처럼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러니까 나이드신 분들이 버스를 타면 당연히 그 자리는 학생들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노인들이 자리에 앉고 젊은 사람들은 아예 버스를 타면 자리에 앉아서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차례가 안오니까, 앉아있어도 벌떡 일어나야 되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사실은 보편적인 가치들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빨리빨리 나라가 성장하면서 비정상적인 뇌물이라든지 그런 사회의 부패한 요소들이 도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기본적으로 사회를 규약하는 공통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한 대중적인 합의가 지금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 4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현저하게 그런 도덕적인 수준이 사회적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회가 시스템이 좀 더 완전화되고 사람들이 소득이 조금 나아지면서, 옛날에는 자동차 세워두면 바퀴를 다 빼갔는데, 소득수준이 나아지면서 그런 유치한 범죄들이 줄어들게 되는 것들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개인적 도덕의 고민이라든지 보편 가치에 대한 확신 같은 것들은 현저하게 약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도 사실은 교회에 나오지만 교회에 가둬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니까 사회 가치 기준이 떨어지면서 자기도 같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지적되어야 될 요소이고, 고려되어야 될 요소이고, 두 번째는 무엇이냐하면 그러면, 사회가 그렇다고 해서 교회까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사회하고는 현저히 다른 윤리적인 수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깊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뀌고, 그 다음에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인가 하는 신념 같은 것도 생겨나고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결국 교회 건물이나 교육방법 이런 것들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어떤 것들이 주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나눌 때, hardware, software, spiritual-ware 그렇게 봅니다. hardware는 교회 위치라든지, 건물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교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인이 이렇게 많이 모이는데 우리가 토론회를 하는데 만약에 길거리 보도블럭 위에 앉아서 한다면 사실은 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hardware도 중요합니다. software는 어떻게 시스템을 가지고 교회가 작동하느냐 입니다. spiritual-ware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설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기꺼이 소금처럼 살아가게 만들고 그리고 칭찬받으면서 어두움으로 살기보다는 고난을 받으면서 빛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신앙심, 경건, 영적인 은혜,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단호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 입니다. 이런 것들이 주어져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수준이 사회의 도덕적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고 교회에서는 그런 것들이 현저히 떨어져서 이제는 분명한 어떠한 회심조차 없고 양심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도 세례를 주고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이런저런 직분을 받고 그 다음에 직분 받는 그것이 말하자면 사회적인 지위인 것처럼 생각하는, 국내에서는 조금 낫습니다. 이번에 외국에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 이제는 창피해서 골프도 못치고 다니겠다고 하여 왜 그러냐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은 다 장로인데 나는 아직도 집사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주 현저하게 그것은 그 교민 사회에서 자기의 지위, 그리고 사회적인 인정과 관련된 것입니다. 철저하게. 심지어는 돈을 주고 그런 것들을 사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교회에서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수준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별거인가. 자기가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뭐가 됐어도 사실 깊이 변화받은 적도 없고 매일매일 진리를 따라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신앙의 단호한 실천도 없고 그럴때에 세상의 정신에 물들고 부패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비단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면 옛날에 우리 초등학교 때만 해도 선생님 앞에 가면 숨을 고르게 쉴 수가 없었습니다. 왜. 너무 두렵고 떨려서. 그런데 적어도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아침이면 항상 운동모자 쓰고 운동화 신으시고 마당에서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그게 교장선생님의 일과 시작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게 교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다 표리부동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교회 범법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문제를 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말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고 교회가 정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에게 아주 분명한 자각을 주고 있는가 그리고 교회는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지만, 치리하고 그런 것밖에는 권한이 없지만, 정말 교회가 이렇게 비윤리적이고 타락하고 상당히 타락하고 나쁘게 될 수 있는 환경이 옛날보다 훨씬 더 좋아진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보다 더 많은 고통을 감당하고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훨씬 더 헌신된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에서는 아주 단호하게 죄와 악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리고 단호하게 율법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성과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사회적인 체면에 대해서 잘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희미한 윤리의식 속에서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는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교회가 막을 수가 있을까. 이런 현상들을. 앞으로도. 저는 막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악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형편에서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속에서 당장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과연 있을까. 만약에 우리들이 신앙적인 원리로 돌아가서 본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교회에 와서 항상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구나.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나는 그리스도인이구나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결국은 세 가지인데, 하나는 아까 이야기한 세계관인데, 하나님이 누구이고 인간이 누구이고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그 다음에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으니까 우리가 그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삶. 이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 모두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을 살게 할 수 있는 은혜의 힘. 이게 삼자가 완전히 맞아 떨어질 때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봅니다. 비관적이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교회의 수준이 사회의 수준과 아주 같게 하락해서 그렇게 되는 종교적인 위선과 이런 것들이 보편화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두움 점만... 그런데도 교회가 정신차리지 않고 참된 회개와 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자기가 깨뜨려지고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될 것들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받은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어떻게 쏟아 붓고 살아야 될 것인가 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윤리적인 지침들 그런 것들로 성도들을 끌어내고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반드시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어제도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용인, 수원 이런 지역에 있는 멀리 있는 지체들이 4,50명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사회를 봤는데 오히려 많은 성도들 중에는 은혜를 받고 그의 삶이 들어나지는 않지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장로들이 문제가 되고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 중에도 정말 주님 사랑하고 순수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다른 동기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오늘날의 문제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음은 4번 문제를 보겠는데, 앞 1부의 8번 문제와 연결해서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4. 7년간 증권투자를 해 오며 고민해 온 문제입니다.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일정한 기간 대비 일정한 수익률을 얻고자 한 결과, 좋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죄책감이 듭니다.
중개수수료가 존재하는 주식시장이라는 마이너스 섬에서 금융공학을 활용하여 매매를 통해 수익률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개인들과 경쟁하여 수익률을 차지한다는 점인데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파생상품이 지나치게 많아져 금융 자체에 구조적인 악이 존재하는 현 상황에서, 돈이 돈을 버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수익형 부동산, 매매차익을 위한 집 구매 등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자본증식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앞에 1부의 8번 문제를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8.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도 아니지만, 경제적 결핍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가난한 것은 게으르고 무능력한 것으로 보이고, 왜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가 답답하기도 합니다. ‘열심히 벌어서 열심히 모으고 안정되게 살아가는게 뭐가 나쁜가?’ 싶은 생각과 ‘경제적인 안정에 너무 신경쓰는 것은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노예로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공존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꼭 돈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하나요?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이 하나님 앞에 죄스럽게 느껴지는데 이것이 정상인가요? 그리스도인이 물질적 부요를 누리는 것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우선, 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성경은 어디에서나 가난 자체가 미덕이라고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난 자체를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의 전통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오히려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기독교를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물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성경은 물질에 대해서 중립적입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죠. 그래서 사람들도 타락하고 그래서 무지와 악과 죄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악과 고통의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럼 악과 고통적인 문제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 뿐 만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물직적인 것, 심지어는 자연적인 것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당연히 비용이 듭니다. 비용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증상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러면 그 비용이라는 것은 결국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영적인 자원이 필요한 것이고 그 다음에 그들의 physical한 측면에 있어서는 물리적인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하게 되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그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돈이 투입되면 증상을 상당히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제약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과 한참 대화를 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지금 우리 과학 기술로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치료제가 아직 안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제약회사가 명예는 얻을 수 있는데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려면 환자가 많은 것, 고혈압, 당뇨, 관절염, 두통 이런 약을 개발해야 떼돈을 벌지 그것은 아직 전 세계 인구에 비하면 수요자 자체가 아주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투입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투자한 만큼 회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이렇게 제안하면 되지 않겠어요? 내가 만약에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는 결정적인 약을 만드는 제약회사에 1조원을 조건없이 투자하겠다. 그래서 약이 생산되면 나는 권리를 하나도 주장하지 않고 그 약에 대한 특허권을 개발한 너에게 주겠다. 그러면 아마 박터질 것입니다. 그 정도 현상금을 걸면. 그러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돈 주고 약사서 뿌리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면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끝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돈의 위력이 얼마나 엄청난가 하는 것입니다. 온실가스 가지고 이렇게 난리치는데, 미국에서 나온 이론에 의하면 CO2 채집기를 전 세계에 설치하면 일도 아니라고 합니다. 금액이 나와 있었는데, 6,400조원정도 들여서 전 세계에 설치하면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돈의 크기나 아니면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는 물질을 축적하는 욕망 자체가 비난받아야 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축적이냐.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그 구절 생각나죠? 그런데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그럼 남을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은 어떨까요? 용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 오웬 목사님 같은 분은 매일 이 세상의 모든 자원은 원래 하나님 것이다. 그런데 불신자들이 불법하게 점령을 한 것입니다. 무단 점령한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뺏어서 우리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한 가지 답은 됐죠. 물질을 모으고 벌어야겠다는 욕망 자체를 갖는 것은 잘못 된 것이 아니다. 그럼 문제가 뭐가 하면, 동기가 문제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돈을 벌어서 분에 넘치는 주택에서, 인도에 있는 어느 부자가 자기 집을 지었는데 1조6천억원을 들였다고 합니다. 영화관이 두 개고, 모든 시설을 다 갖추었는데 그 집을 관리하기 위해서 매일 출근하는 직원이 640명이 됩니다. 과연 그게 행복할까? 집이라는게 좀 은닉성이 있고 그래야지 640명 직원들이 출퇴근하면 행복할까? 어쨌든 그 사람은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그런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분에 넘치는 호사를 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든지 그러니까, 물질을 소비하고 그 자체에서 어떤 깊은 쾌감을 느끼면서 그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기 위해서 돈을 모은다면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되어봐야 별 볼일 없습니다. 제가 명품 브랜드에 심방을 갔었습니다.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가봤는데, 완전히 ??되게 동전을 넣을 수 있는 지갑이 340만원이었습니다. 어깨에 멜 수 있는 가방은 보통 650만원에서 1,200만원 정도이고 1,200만원짜리 가방이 1년 예약이 밀려 있다고 합니다. 예약은 다 되었는데 생산을 못한다고 합니다. 본사가.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돈이 아주 많아졌다고 해도 거기에 가서 어깨에 메기 위해서 1,200만원자리 가방을 살까. 사고 싶은 욕망이 있어도 안사겠지만 욕망 자체가 안 생길 것 같습니다. 근데 또 모르죠. 개발하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호사비용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많이 벌어도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부자가 되어도 별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방향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돈이 돈을 버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인정할 수 있는 측면과 인정할 수 없는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적 정신에 의하면 하나님의 직업과 산업 활동에 대한 기본적인 성경적인 견해는 생산 활동에 우리가 종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후 세대에 유익을 주고 사물들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올바르게 이바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생산 활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제적인 재화들이 사실은 중립적입니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이 칼을 만들었는데 누군가가 자기네 회사 칼을 사서 사람을 찔러 죽였다면 칼을 제작하는 산업은 그리스도인이 할 수 없는 직업인가. 말이 되요, 안돼요? 안됩니다. 크리스천이 칼을 만들 때에는 생선 자르고 과일 깎아 먹으라고 만들었는데 그것을 잘못 사용했으면 자기네 책임이지 제작한 회사 책임은 아닙니다. 물론, 기가 막힌 칼을 만들어서 사람을 찌르려고 할 때는 갑자기 녹아 없어진다든지 아니면 갑자기 칼의 형태가 장난감으로 바뀐다든지 그런 것을 개발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어쨌든 재화의 난(?)을 생산하는 것이지 중립적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조금 다른 생각이 나올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재화를 생산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의미있게 하는데 이바지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성경적인 직업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돈을 꿔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굉장히 죄악시 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한테는 고리로 돈을 빌리고 신앙을 포기한 사람한테서도 고리로 돈을 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어떻게 정리했냐하면, 주기도문 해설을 하면서 정리한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이자가 어디에서 발생하느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첫째가 욕구억제설입니다. 이자가 발생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발생하는 재화를 써버리면 지금 내가 많은 쾌락을 누릴 수 있는데 그것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기회비용설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내가 다른데 투자했더라면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지고 투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 가지 학설들이 쭉 나와 있는데 결국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하든지간에 이 돈을 빌려줘서 이런 합리적인 기준에서 보상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이자를 받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3년 전에 4인 가족이 사는데 150만원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똑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는데 200만원이 들었다. 그러면 4년 동안 25% 정도의 이자를 받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알겠죠? 150만원을 맡겼을 때, 4년 후에 200만원 정도 되는 이자를 받는 것은 그 돈은 절대로 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오늘날과 같이 투자에 대한 개념이 돈을 놓고 그 돈 자체를 증식시키는데 그것이 합리적인 기준이나 선이 아니라 대박이 터지기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돈을 투자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권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권을 살 때 마음이 이렇게 해야지만 가난한 사람이 이 복권 판 돈으로 먹고 살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복권을 산다면 좀 낫겠지만 만약에 대박을 위해서 산다면 그 동기 자체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정리를 해 두세요. 그리고 또 이런겁니다. 뭐냐하면, 요즘에 고위공직자 되려는 사람들이 자녀교육에 들어가는 학비 문제 때문에 신문지상에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틴 루터는 이런 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일용한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꼭 빵과 포도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한 양식을 위해서는 거의 들게 없습니다. 겨우 목숨 부지하려면 빵 하나에 요구르트 하나만 먹어도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말을 합니다. 일용한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꼭 빵과 포도주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을 받는 것과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번화를 누리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보석반지는 거기에 안 들어간다고 정리합니다. 사치품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정도의 선에서 놓고 보면 우리들이 투자를 할 때에 돈이 돈을 구조해 욕망을 보태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브프라임 사태라든지 우리나라에 있었던 금융버블사태 이런 것들이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그런 고민은 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던 지체였는데, 자매인데,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연봉 1억원을 받았습니다. 1억원을 받았는데 자기 직업에 대해서 깊이 회의를 느끼고 그 월급의 절반 밖에 안주는 직장으로 옮겼습니다. 경제학 박사였는데, 증권회사에서 근무한 것이 아니라 경제 연구소에서 근무했었습니다. 경제 연구소라는 곳이 결국은 증권시장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돈버는 데 ㅇㅇㅇ(34:53).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자기가 뼈빠지게 유학 가서 배워온 그 학문을 이렇게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돈을 놓고 합당한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닌,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의 도박과 같은 투자를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에 자기가 그렇게 피땀흘려 공부한 것을 쓴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느낀 것입니다. 그런 회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증권투자를 해오면서 수익률을 올리는데 이것이 누구를 이롭게 하는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상당히 가치있는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우리나라는 불가능한데 외국에서는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기본적인 실력이 검증되면 교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특채같은 형식으로. 이 사람이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였는데 그만두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일생의 대부분을 죄있는 사람을 변호해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말 죄가 없는데 변호해줘야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게 돈 싸들고 와서 변호사에게 사정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피해가려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더 이상 그런 구차한 삶을 살기 싫다하면서 나와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증권을 투자하는 직장인인데 거기에서 10년 동안 월급을 받으면서 하고 있을 때,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람있는 직업으로 옮길 것이냐 말 것이냐는 개인의 깊은 선택의 문제이고, 또 그럴 수도 있잖아요? 증권회사에서 근무를 하는데, 내가 이렇게 가슴을 졸이고 투자를 해서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들은 대박이 터지게 하고 나는 그 수수료를 받아서 겨우 살면 아주 고상(37:35)한 삶이다.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실제적으로 개인적인 많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결함이 많은 삶을 산다면, 그러면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죠?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남의 돈을 몰래 사기쳐서 말하자면, 자금을 운영하다가 들통이 나서 감옥에 가고 횡령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개인적인 윤리적 삶이 방치된 가운데 이런 고민을 하면 사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중성 문제를 우리도 생각을 해봐야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직업이 절대적으로 종사하면 안되는 직업도 있고 그렇지는 않지만, 그러나 바람직하지 않은 직업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속에서 일하는 태도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그런 산업에 종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보탬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개연성을 가지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다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직업에 있어서 금융적인 면에 몰리는 현상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많이 잘 살게 되어서 제가 어떤 연봉을 받는다고 할 때, 저는 그것이 우리나라가 잘 살기 때문에, 전 세계가 지구촌이 되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내가 기껏해야 돈을 열심히 벌어봤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것을 흡수하기 때문에 예산이 한정되어 있었는데, 제가 줄일 수 있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반대적으로 생각해보면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점점 경제가 커지면서 제가 받는 연봉이나 급여가 분명히 제가 일하는 것보다는 많이 받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본 사회에서 우리가 능력대로 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뭐가 잘못이냐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점점 그 수준이 높아지면서 제가 느끼기에 착취한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제가 물건을 싸게 산 것들이 다른 데에서 착취해서 싸게 산 재화들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제3세계나 이런 곳에서 사람들은 정말 낮은 급여를 받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도 되는 것인지. 또 하나는 적합한 수준이라는 것이 참 모호한 것 같습니다. 우리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제가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살았으면 마티즈 정도만 타고 다녀도 행복하고, 잘 살았으면 나는 에쿠스 정도는 타고 다녀야지 이게 적정한 수준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 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몇 백만원 차이를 가지고, 멀리 제3세계까지 안가도, 유아부에서도 어떤 분들은 아이에게 헌금봉투를 주시는데 줄 헌금이 없어서, 물론, 핑계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적정한 수준이라는 것도 굉장히 모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질문 먼저 답을 하면, 칼빈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누리도록 하나님이 허락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차이는 이런 것 같습니다. 오늘 떡볶이를 먹었는데 사실은 맛이 없었습니다. 제가 사실 가장 사랑하는 요리 중에 하나가 떡볶이입니다. 제가 만드는 떡볶이는 오늘 먹은 것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물론 재료가 더 많이 들어가지만, 훨씬 낫고, 자타공인입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떡볶이를 해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아, 맛있다! 금욕주의는 이것을 싫어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자기의 혀나 이런 것들로 하여금 아, 맛있다! 이것을 느끼게 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떡볶이도 저렇게 놔두면 안됩니다. 저는 저것이 맛이 없다고 했지만, 저렇게 설탕도 넣고 하면 안됩니다. 소박하게 소금 조금 넣고 그래서 먹을 때에 아무런 즐거움도 못 느끼고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 먹어야 되는. 웃으면서 하는 소리가. 그게 바로 금욕주의의 정의입니다. 금욕주의에서 내리는 음식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맛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맛볼 수 있는 미각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그 많은 사물 중에 이런 새콤한 양념을 주신 것도 너무나 감사하구나, 정말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너무나 놀랍구나. 더 맛있게 만들어서 다 맛있게 먹으면서, 이야, 더 놀라운 세계가 있구나. 그러나 항상 과하면 안된다. 그럼 그 과한 것이 아까 말한 것처럼 어떤 기준이냐. 그것은 누가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획일적으로 정하는 그 순간 인간은 무슨 문제가 생기냐 하면, 율법적인 경우의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나는 그 선을 안 넘었다, 난 넘었는데. 그러니까 그것은 각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될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화를 이야기해주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수도원을 냈습니다. 수도권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규칙서가 있습니다. 그 규칙서에 보면, 어떻게 수도원 생활을 해야되느냐에 대한 상세한 규정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수도원은 세속을 다 버리고 와서 수도원복 하나 입고 생활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 믿어지겠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 차별을 했습니다. 수도사가 들어왔는데 별 볼 일없이 가난하게 노숙자처럼 살다가 수도원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그냥 보통 사람 해주는 것처럼 해줬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들어왔는데 귀족집안의 외동딸로 자라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방도 좀 좋은 걸로 주고 수도사 옷도 거친 것이 아니라 고운 옷감으로 짠 것으로 주고, 반찬도 낫게 줬습니다. 굉장히 아우구스티누스답지가 않지요? 왔으면 똑같이 하면 되지.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깥에서 원래 그 수준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줘도 손해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수도원 생활이 노숙자 생활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매는 수도원에서 특별대우를 받아도 귀족의 집안에서 너무 풍족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부분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랑의 원리는 남을 향해서는 너그럽게 봐주는 것입니다. 남을 향해서는 너그러운 기준을 적용해주는 것입니다. 그래, 아니야 너한테는 그건 사치가 아니야. 그러나 나한테는 좀 더 엄격한 기준을. 그렇게해서 오히려 이런 룰을 가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을 정죄하고 얕잡아보고 깎아내리고 하는 그런 소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첫 번째 질문은, 그런 것들이 사실은 외국에서는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는 기업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자면, 스타벅스. 몇 년전에 미국에 갔을 때, 스타벅스 본사가 시애틀에 있는데, 거기에 있는 스타벅스는 상세하게 자기 기업에 대해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자본주의는 어때요? 만약에 원두를 사온다면, 어디에서 생산된 것이든지 간에 좋은 것을 싸게 사오면 되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에 와서 비싸게 많이 팔면 되는 것 아니에요? 그 차액을 챙기는 게 자본주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사회적인 요소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윤리경영을 어떻게 했냐하면, 콩을 수입할 때에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물론 원두의 질도 다 보지만 그 공장을 직접 다 방문해서 계약을 맺을 때 우리가 10년 동안 당신네 이 원두밭에서 매년 10억원 어치씩 원두를 사겠다. 그리고 가격을 보장해준다. 그 대신, 미국의 근로기준법을 여기에서 적용해라. 절대로 10시간 이상 노동시키면 안 되고, 16살 미만인을 채용하면 안 되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어떻게 하고 하겠다는 것을 다 서약합니다. 그리고 노무 감독관이 가서 그 고용조건이 유지되고 있는지를 봐서 그 조건이 유지되지 않고 있다면 계약위반으로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국의 완구제품 수출하는 회사까지 다 해당됩니다. 모든 기업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기업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나라도 이제야 조금씩 눈을 뜹니다. 미국은 오래전서부터 해왔고. 예를 들자면, 중국같은 데서 일만 시켜주는 것만 하라지 했던 사람들이 저 회사에서는 외국과 무역관계를 맺으면서 근로대우가 달라졌다라고 했을 때 노동의식이 싹트는 것입니다. 노동의식이 싹터서 항의하고 삶을 개선해나가는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고려하면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물건을 싸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 그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이고 자기 사업에 자신이 있다면 우월한 지위에 있으면 우리가 당신네 회사에서 조리품을 매년 15만원 어치씩 살 테니까 그 대신 이런 조건들을 지켜야 한다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능력이 없으면 그런 식으로 물건을 구입하지 않고 보다 더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는 회사에게 인센티브를 주어서 그 회사가 더 많은 점수를 받고 입찰대우를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싼 물건을 사다가 비싸게 받아서 엄청난 차액을 남기려고 하는 그런 정신만 추구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도 어떻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숙제는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무 많이 빗나가긴 했지만, 똑같은 정형적인 제품일 경우에는 사실은 가격경쟁이니까 힘들잖아요? 그런데 예를 들자면, 여기에 새로운 기술을 적용해서 업그레이드했다고 할 경우에는 그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업을 안 하는 사람들이니까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기업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10원만 차이가 나도, 서점을 하고 있는 우리교회 장로님이 계시는데 돌겠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오면 그냥 사갔는데, 지금은 책을 쭉 진열해놓은 곳에 와서 핸드폰으로 두들겨서 어, 아저씨 다른 데보다 5천원 비싸네요. 여기보다 더 싼데 있네요. 이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20만원짜리를 팔아도 이익을 만원, 만오천원 이렇게만 보고 파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가 달려있습니다. 그 다음.
5.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양심과 사회적 책임에 대해 목사님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그건 너무 포괄적인 질문입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6. 전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주위에 성형수술을 하고 더 큰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친구들을 보면 때로는 성형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이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안에 외모지상주의적인 사상이 어느새 많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 풍조와, 젊은이들이 명품 옷이나 가방 등으로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는 태도 등에 대해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한 우리들이 이 문제에 대해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조금 너그러운 입장입니다. 우리가 명품이 아니라 외모의 문제.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성형을 해본 적도 없고 또, 해봐야 별다른 모습이 되겠어요? 사실은 외모지상주의 문제도 보면 30년 전에도 40년 전에도 예쁜 사람을 좋아하지 못생긴 사람을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외모지상주의를 반영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같이 모였을 때 남자들이 이야기하는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는 군대얘기, 또 축구얘기, 제일 싫어하는 것은 군대가서 축구한 얘기. 그러면,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뭡니까? 답은, 못생긴 여자가 하는 모든 이야기라고 합니다. 사실은 이런 농담이 30년 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놓고 누구를 예쁘다고 이야기하고 나는 예뻐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을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내숭을 떨면서라도 “아니, 그냥 얼굴이 예뻐서라기보다는..” 이렇게 얘기를 하도록 강요받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범죄하고 도망갔어도 팬클럽이 생겨서 그 여자 살려주라고 해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예쁘지 않느냐고 대답하는 비이성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성형수술을 하는 것인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가치기준에 항거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외모지상주의라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진짜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존재의 가치는 그것 아닌 선한의지의 크기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신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부분이 자신에게 결함이 있다는 생각이 아주 집요한 나머지 그것이 자기의 일상적인 생활에 심리적으로 현저하게 지장을 줄 정도가 된다면, 그래서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도 없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금 너그럽죠, 남자의 입장에서는. 실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의 경우에 어떤 경우가 있냐면, 눈꺼풀자체가 나이가 들면서 거적눈이라고 하죠, 눈이 아래로 내려옵니다. 주름이 생겨서 늘어집니다. 밑에서 보면 차양처럼 햇빛이 들어오면 차양같이 됩니다. 이게 살아가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저하게 그 사람 인상을 무기력하고 태만한 모습으로 만듭니다. 이런 경우에는 쌍꺼풀 수술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무리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점에서 조금 너그럽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까 이야기했듯이 더 좋은 것은 신앙인으로 잠시 머물 세상인데 그럴 돈이 있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을 구제하고 살아야겠다고 하면 더 좋겠습니다. 화장을 안하고 자기 얼굴을 잘 가꾸지 않는 여성들이나 남성들이 대부분 세상에 초연하고 욕망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게으름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수수하고 소박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시간과 많은 공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을 아껴서 열렬하게 기도하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명품이야기들이 왜 나왔냐하면, 점점 명품을 살 이유는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오메가 시계와 아닌 시계와의 차이가 너무나 현저했습니다. 뭐냐면, 매일 시계를 맞춰야 됐습니다. 시간이 틀려서. 그런데 지금은 중국에서 3천원 주고 시계를 사도 시간은 정확하게 맞고 오히려 몇천만 원씩 하는 시계들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코어추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몇 초까지 맞아야 되는가. 시계가. 여기가 그리니치 천문대도 아니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교회나 아니면 다방 같은 곳에서 신장개업이라고 준 장난감 시계 같은 것도 시간이 정확하게 맞습니다. 그래서 점점 명품을 사야 되는 이유들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명품들이 사람들에게 유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하면, 특권의식과 관련있는 것 같습니다. 특권의식. 그래서 제가 어느 잡지에서 읽었는데 헤르메스, 루이비통, 까르띠에 이런 것들도 진짜 수준 높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도 대중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부자들,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독점적인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제작을 해서 자신들이 쓴다고 합니다. 옛날 귀족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우리 집안에 반짇고리를 대는 사람. 이렇게 정해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똑같은 제품을 다른 귀족 집안에 납품을 하지 않는다는 약정을 하고 납품을 한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러니까 그런 식의 소유 생활을 합니다. 그거도 하나의 특권의식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번도 명품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다르게 평가해준 경험이 없는데 세상에서는 그런가 봅니다. 그렇게해요? 실제로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그러죠. 우리는 그런 가치에 항거하면서 사는 것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어느 잡지에 보니까 스티브잡스가 입은 옷들을 모두 합쳐봐야 2천불도 안된다고 합니다. 옷, 시계, 신발을 모두 합쳤는데. 전부다 안 되더라고. 450불짜리 안경에. 천불은 되겠지만 2천불은 안된다고 합니다. 헤르메스 매장에 갔는데, 저는 호기심이 좀 있는데, 정말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았습니다. 강남에 있는 매장이 얼마나 유지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래서 이렇게 손님이 없는데 어떡하냐고 물으니까, 목사님 걱정 안합니다. 하루 종일 손님 없다가 저녁에 두 사람이 와서 쇼핑백하나 사가면 그게 7천만 원씩 든다고 합니다. 그게 신상처럼 바글거리는 건 아니라고. 또 다른 이야기.
6. 담임 목사님께서 어거스틴이나 존 오웬을 멘토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나에게는 딱히 생각나는 멘토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멘토라고 할 만한 누군가가 없는 나의 삶, 무엇이 문제인지 조차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멘토를 구하기 힘들것입니다. 제게 찾아온 신학대학원사람들에게 가끔 제가 묻기를 ‘당신의 멘토가 누구냐’고 물으면 거의 얘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3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김구, 링컨, 이순신 등을 얘기했습니다. 왜 그렇나면 위인들의 전기를 굉장히 많이 읽었고 굉장히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안 읽혀요. 왜 그러냐면 위인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우리시대의 살았던 사람이나 3-400년 전에 살았던 사람 말고 여러분들의 기억에 살아있는 사람 중에 여러분들이 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위인이라고 하는 것은 나 혼자만 흠모하는 사람은 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15만에 조양원씨(양은이파)가 출소했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영화(보스)가 나오고 수많은 조폭지망생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카페가 생겨났고 카페의 팔로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결국 사기도 치고 해서 그 후에 감방도 2번이나 들어갔지만 그 사람이 핍박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팔로워들이 따라가 울었습니다. 당신의 나의 영웅입니다라고 했지요 그러나 위인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위인이 되려면 조건이 있는데 나만 그 사람을 좋아해서는 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위인이 되려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그렇게 평가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김연아에 대해서 안티라는 감정이 있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김연아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김연아를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피겨스케이팅을 배우는 조그만 아이들에게는 영웅이겠지요.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 김연아를 위인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위인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지만 그래도 위인이라고 할려면 모든 인류가 지지하는 보편가치에 있어서 탁월한 덕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보편가치 라는 것을 모두 버렸습니다. 넨스피어스의 설명에 의하면 상반된 가치체계가 현대사회에서는 두 가지로 작동한다고 합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도덕이 엄연히 존재하나 사회 전체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기업이 공사를 따내기 위해 뇌물을 주고 세금을 포탈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 구성원이 자기네 회사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똑같은 도덕적인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는 분노하지만 똑같은 일이 규모가 크게 자기가 소속된 회사에서 일어나거나 그룹에서 일어나면 우리는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면 어떤 의문이 나오냐면 우리가 분노하는 도덕관념이 근거가 있는 것이라면 위에까지 쭉 올라가서 우리 회사가 이랬다니 하며 온 직원이 일어나서 우리 회사가 탈세했다니 우리 회장이 첩을 두었다니 용납할 수 없다며 회장 당장 가정으로 돌아가라 아니면 퇴사하겠다라고 해야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 부도덕한 사회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모순 속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있는 도덕적인 기준, 이런 것들은 기반자체가 아주 취약합니다. 그래서 어떤 용감한 사람이 너 바람피었다며? 가정을 두고 그러면 되나? 그런데 이 사람이 정색을 하고 그게 왜 나쁜데 하면 그 사람은 할말이 없는거죠. 그러면 이러면 되죠.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냐? 그러나 이 사람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믿지 않는다면 할말이 없는거죠. 그래도 그렇지 도덕적으로 그럴 수 있냐? 도덕이 밥 먹여주냐? 15년 전에 나온 소설책에 아주 선정적인 카피가 있었습니다. 책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카피의 내용은 ‘나는 묻고 싶습니다. 도덕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이바지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남편에게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면 미친년이라고 하지만 그 남자에게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면 데려다줍니다. 나는 오늘도 고등학교 3학년 딸의 운동화를 빨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도덕이 나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해준 것이 있느냐고. 내 삶은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를 위한 예증이 아닙니다.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한순간에 사람의 마음을 확 녹이며 들어오는 가치였습니다. 그렇게 들어오게 되면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게 왜 나쁘냐. 이런 도덕의 가치기준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신은 없고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가치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확신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근본조차 공부를 안하기 때문에 유교적 관성에 의해 떠밀려온 도덕관념입니다. 유교적 관성에 의해 떠밀리고 있는 도덕관념인 것입니다. 자기도 그 근원을 모르고 근원까지 붙들고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데서 기독교인들은 그 뿌리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통일적인 사고방식, 세계관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은 멘토가 되기 위해서는 보편가치에 있어서 탁월한 덕을 보여야 됩니다. 보편적 도덕가치에 있어서 덕을 보여야 하는데 김연아가 스케이트를 잘 타는 것은 도덕가치가 아니라 자연적인 가치입니다. 우리들이 이태석 신부는 멘토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김연아를 멘토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덕가치가 아니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그러한 가치를 상실한 시대이기 떄문에 멘토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멘토의 개념은 그냥 조금씩이라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멘토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밥풀하나 물고가는 개미도 멘토가 될 수 있고 욕망에 떠밀려 사는 사람에게는 한가롭게 떠가는 구름도 멘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멘토 개념 자체가 상대화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튼, 존 오웬,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저의 멘토이지만 저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징 한두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멘토는 파셜 멘토가 있고 토탈 멘토가 있는데 파셜 멘토는 진정한 의미의 멘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멘토는 그의 사상과 삶 모든 것을 자기가 물려받으면서 살아도 그런 도덕적인 가치에 있어서의 탁월성을 앙모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멘토인 것입니다.
(청년의 추가질문)
가치상대주의에 대해서, 사람들 모두가 가치의 부재에 대해서 허망함을 느끼고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이 사회의 사람들이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시대이지만 불구하고 가치를 갖고 싶어 하고 그 가치를 따라서 살고 싶은 어떠한 속성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 왜 그럴까 이 사람들은 가치를 부정하면서도 왜 가치를 가지고 싶어할까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인간은 뿌리를 부인하고 근거를 잘라버리면 당장은 자유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할 수 없는 불안함이 밀려옵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이데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이다’ 그러한 모든 가치를 다 부인해버리고 이제 나를 완전히 우연적인 존재이고 내가 태어날 근거 같은 것도 다 부정하고(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으로 완전히 모든 가치에 대해 자유롭고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내가 그 가치의 세계와는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인이라고 할 때 그들도 인정하는 것은 무시무시함 무서움 우주에 혼자 던져진 것 같은 말할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 단절감, 그것을 그 사람들은 인간의 실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극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합니다. 실존철학자들은 내가 누구이냐 지금의 네가 너야 예를 들어 자기가 굉장히 허접하고 찌질해 그래도 그게 너다(상태가 안좋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미안한 얘기지만). 그래서 니체가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곱사등에서 혹을 떼어버리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다. 그게 다 같은 맥락에 있는 말입니다. 곱사의 등에서 혹을 뗴어 버려서 정상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다. 혹을 떼어서 정상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기반자체를 허물어 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인간이 잠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분명합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아버지가 죽으면 물려줄 유산을 미리 물려받아서 떠난 후 방탕하게 살다가 돈 떨어지고 나니 결핍이 찾아오니 잔소리하는 아버지는 없는데 완전한 자유가 자기를 미치게 만들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저는 요즘 생각하기를 지금 우리에게 전에 없는 선교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선교의 기회는 그물을 던져서 수천마리의 고기를 한꺼번에 낚던 옛날 60년대의 선교의 기회가 아닙니다. 완전한 자유를 누렸는데 너무 허망한 거에요. 도덕가치를 다 부인하고 마음대로 살아봤는데 채워지지 않는 거에요. 이런 사람들을 낚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하나씩 하나씩 이해하게 하면서 깊고 심오한 인생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때에 무릎을 치면서 아 그거구나 내가 여기로부터 왔고 이 세계는 이렇게 얼개가 되어있고 나의 위치는 이 격자망 속에서 여기에 있는거구나. 내 위에는 누가 있고 내 옆에는 누가 있고 내 아래에는 누가 있고 이런거구나 여기서 이렇게 내가 살아야 되는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면 빨려들 듯이 교리를 공부하고 세계를 공부하고 ..,.그러면서 이 사회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줄 때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이라는게 가치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뱀풀과 같다 훅 불면 근거도 없고. 뿌리도 없고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최근에 암흑물질에 대한 가설들이 나왔고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데 우주의 73%가 암흑 에너지로 가득찼는데 빛을 비추면 이 암흑이 없는 것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악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어도 진리의 빛이 비추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선교의 기회가 새롭다. 인간은 그런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박경철의 청춘콘서트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 질문의 내용에 대해 밑둥까지 다 해결해서 근거를 얘기해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근거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 깊이 자유로우면서도 굉장히 외로운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놀랍게 종교를 다 버린 속에서 미신이 놀랍게 유행처럼 번집니다. 지금은 주춤하지만 한때 사주카페가 굉장히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궁금한가. 자기운명을 점치는 것은 불안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자신만만한 사람은 그런 필요를 못느끼거든요. 7. 무엇인가 느낄 수 있는 체험, 분명한 경험이나 확증에 목말라하는 저를 봅니다. 놀라운 이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좀 더 특별한 무엇인가를 신앙 속에서 갈망하는 저 자신을 보며, 신앙을 신비주의인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 졌습니다. 이것도 은혜의 갈망이 맞는지요?
이것은 연애를 예를 들면 가장 잘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적합한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연애를 하면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점점 더 사람에게 친밀함을 느끼게 되면서 성적인 유혹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이라면 만약에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사랑을 표현하면 그 표현이 주는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에 심취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뒤에는 인격이 있잖아요. 예를 들자면 어떤 선물을 해줬다고 했을 때 집에 가져가서 이것을 볼 때 마다 그것을 예쁘게 포장하여 나에게 선물했구나 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그것은 선물의 가격때문이 아니라 저 사람이 저것을 고르면서 나를 얼마나 생각했을 까 하면서 미소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신비를 구하는 그 자체는 이런 감정이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이 선물을 보는 거죠.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추구해야 될 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인격체라고 생각을 하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깊이와 감정의 교류를 갈망하는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그 안에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신비와 달콤함을 경험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것은 인격적인 사랑의 결과이지 추구점은 아니라는 것이죠. 별로 친하지 않는 사람이 와서 우리 한번 키스해보자 할 때 무슨 느낌이 드는지 알아보려고 그러면 그 사람에게 키스해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요. 유치하지만 정확한 비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인격을 경험하게 해주시며 거기에서 오는 사랑의 신비한 경험, 저는 하나님의 관계에서의 신비한 경험이라는 것을 사랑의 신비 이외의 신비를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다 등등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고 신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사랑을 받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 이런 것들이 의미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지식과 정동이 결합된 형태의 관계로서의 사랑에 대한 경험, 그 속에서의 신비가 안전한 것입니다. 신비를 독자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리고 신비는 그 사람의 신앙을 깊게 해주지 않습니다.
9. 신앙을 가지고 나서 오히려 더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는 하면 뭐하나? 돈을 벌면 뭐하나?’ 싶습니다. 짓밟거나 짓밟히며 사회에서 아둥바둥 사는 것보다, 수도사들처럼 한적한 곳에 은거하며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도사들이 한적한 적이 있나요? 얼마나 고달픈 삶을 살았는데요. 예전에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곳은 성처럼 지어졌고 문이 없어요. 어떻게 다니느냐고 묻자 성벽 끝에 개구멍 같은 것이 문이라고 합니다. 높은 개구멍 같은 구멍을 통해 두레박을 타고 내려와야 된다고 합니다. 한번 내려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고 왔다가 다시 들어가려면 보통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될수 있으면 오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추위와 더위를 견디면서 거친 밥을 먹으면서 많은 시간을 노동을 바치면서 사는 사람들이 수도사입니다. 신앙을 가지면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앙이 확고하게 생기지 않았어도 인생이 참 덧없는 거구나. 사실 신앙을 갖기 전에는 인생의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감정 없이는 죽음을 직면하거나 직시하거나 죽음에 비취어 자신의 삶을 살펴보는게 어렵습니다. 유교든지 도교든지 스토아철학이던지 종교적인 사상이 있어야지만 죽음을 도입하면서 죽음과 삶을 나란히 두고 보게되는 것이지 의식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자신의 생각속에서 지웁니다. 연세많으신 분에게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더라도 장례식에 나오지 않더라도 실례가 되지 않습니다. 사회관습적으로 이해를 합니다. 노인에게 죽음을 직시하는 고통을 주지말자는 의미의 사회적 관습입니다. 신앙을 갖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신앙이 삶의 허무함을 직시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은총하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가를 알게해줍니다. 저는 신앙을 갖기 전에도 인생은 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기독교인이 아니고 스토아철학자이자 명상가)의 명상록을 1시간만 읽다보면 한숨이 푹 나오며 인생이 첨 허무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그다음 공부하면 뭐하나 돈 벌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죽으면 될텐데. 그러나 그것은 뭐냐면 신앙을 통해서 인생의 허무는 깨달았는데 신앙 안에서 이것을 위하여 살아야되겠다는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허무함 입니다. 그러면 그 가치를 어떻게 발견해야 될 것이냐, 그것이 바로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너무 사랑하고 이 세상은 나와 주님사이에 끼어드는 객군으로 세상을 이해합니다. 일주일간세상을 살았다는 의미는 애인이었던 주님과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삶을 회개하고 예배를 마친 후에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세상속으로 옮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작은 공간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으로 격하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청년수련회에서 제가 자기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신앙 안에서 발견해야한다고 간절히 호소한 것도 그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목숨을 걸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목숨 걸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청년은 차라리 주님을 모르고 목숨 걸 것이 있는 청년이 보다 훨씬 더 용기있고 진취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넌크리스찬입장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은 무기력과 동일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듯이 바둑을 두다가도 지니까 억울해서 피를 토하고 죽는데 우리에게 그런 정도의 가치 있는 것도 없는 것이냐 이런 얘기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너무 외형적인 데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있던 어떤 형제가 의료선교에 소명을 받았다면서 광운대도 떨어진 실력인데 연대 의예과를 지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제가 넌 안된다. 그러나 그 형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의료선교의 소명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럼 간호조무사라도 해라. 그랬더니 그것은 소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한 사회저명인사가 홀로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서 간호사가 잘 해주었을 텐데 아무튼 그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죽을 때 유언장을 써놨는데 그 간호원에게 570억을 물려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부자인 것을 몰랐습니다..그 간호원에게 대박이 터진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소명에 있어서도 너무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들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소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 의료소명이 있으면 의료소명은 내과의사나 외과의사만 의료소명인가, 거기 수술실에 있는 간호사도 의료소명이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소명이라면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가 되어도 되는 것 아닌가. 간호원으로 봉사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면 그것이 의료선교가 아닌가 그랬더니 그것은 의료선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청소년들이 너무 방황하니까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방황하니까 그들을 교육적으로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 소명이라는 것이 중심의 목적에 관련된 것이지 양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명을 느끼는데 교사가 될 실력이 안된다면 학원을 하면 되고 학원할 돈이 없으면 과외를 하면 되는 거고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찾지 못한 중요한 이유는 지식의 부족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의 순수성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이 여전히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12. 현대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사상적 공격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기독교적 세계관 또는 영적 사고방식은 무엇인지 간략하게 정리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여태까지도 우리가 교리를 열심히 봐왔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롭게 결심을 하고 여러분들을 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단순히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더 높은 수준으로서의 신앙과 세계관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은혜를 많이 받은 형제자매들인데 무엇인가 신앙적으로 받은 에너지를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방식으로 쏟는 삶을 살지 않는 형제자매들이 참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저에게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교리공부나 강의를 소화하면서도 현실문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데 설교를 들으면 바글바글 잠시 머릿속에서 끓다가도 현실 속에서는 싹 잊어버리고 나름대로 살아가고 그런 것들 때문에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강력한 군사들 특히 특전사들로 정말 주님을 위해서 필투하고 죽는 그런 사람들로 태어나도록 해야겠습니다.
7번을 하겠는데요. 12번도 목사님께서 잠시 언급해주시도록 하겠습니다.
7. 현대인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 속에서 살고 있으나, 사고의 깊이는 경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다른 사람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으나 관계는 형식적이고 얄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오히려 점점 더 고독해져 가는 인간을 보며 그리스도인의 생각하는 기술과 관계 맺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보통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모습은 무엇일까요?
제가 설교 시간에도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문명의 이기에 거리를 두세요. 핸드폰에 막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 걱정이 됩니다. 제 딸도 엄청 컴퓨터와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사색을 하고 그러려면, 그런 삶의 양식을 택하면 안 됩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너무 많은 감각적인 것들에서 시간을 빼앗기거나 마음을 빼앗기면 인생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서 현저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과 관계를 맺는 기술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우리 사역과는 관계가 되는 사람이었는데,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는데, 그게 몇몇 학교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부요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냥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화려한 교수생활은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항상 허리가 아파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도하는데 너무 안 되서 허리에 도움을 주는 의자를 샀습니다. 60만 원짜리였는데, 깎아서 45만원주고 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배달해줬습니다. 허리 아프니까 쓰라고. 그럼 여러분 같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내가 자기 형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허리가 아픈 것을 알고 60만 원짜리 의자를 들고 학교에 왔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비슷한 선물이라도 주던가 하는 그런 생각을 사람들이 안합니다. 아무것도. 그 다음에 세월에 많이 흘러가고 6개월 후에 만났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제가 잊어버렸는데 지난번에 의자를 보내주셔서 허리 아픈 데에 잘 쓰고 있습니다. 혹시 그 의자가 마음에 안 들었어도 그게 정상 아니에요? 그런데 말이 없어서, 제가 하도 궁금해서, 제가 의자를 보냈는데 받으셨어요? 하고 물었더니, 아, 예 받았습니다. 그게 끝이에요. 실제로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자매 한명이 교회 간사로 들어오겠다고 입사원서를 냈습니다. 이력서를 보니까, 대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그것도 좋은 대학교라서 제가 불렀습니다. 이렇게 좋은 대학교 나와서 우리 교회 직원으로 들어온다는 건 환영하는 바다. 그런데 왜 학교를 마치지 않고 휴학을 하고 직원으로 취직하려고 하느냐. 한 번 계약하면 2년은 근무해야 되는데 어떡하려고 하냐고 했더니 2년 휴학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력서를 보니까 전에도 휴학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쭈빗쭈빗하고 말을 안 하고 있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마지막 학기에 등록금을 못 내는 것이었습니다. 등록금이 얼마냐고 했더니 456만원이라고. 그래서 보내고 나서 고민을 하다가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교회 장학위원장님을 불러서 내가 백만 원을 낼 테니 당신이 조금 보태고 조금 보태서 불쌍한 학생 대학을 마치게 해주자. 그렇게 해서 불과 3일 만에 돈을 모아서 등록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의자 받은 사람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 연락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 그 자매를 다그치기 위해서 교역자를 불렀습니다. 어떻게 열린교회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살아온 사람이 이렇게 개념이 없냐. 그러면서 교역자를 많이 나무랐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목회를 잘 못합니다. 그 일이 있고 이틀 만에 허겁지겁 사과 6개를 싸가지고 왔습니다. “무슨 일이냐” 그랬더니, “목사님, 지난번에 계속 공부를 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두 사람 마음에 고마운 마음이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사람이 아니지.. 누구나 그 정도의 뜻밖의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맙다는 생각은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하면 이 사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가족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마도 그렇게 하면 섭섭해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런 혜택을 받았으면 ‘고맙습니다.’ 자기가 잘못했을 때는 ‘잘못했습니다.’ 자기가 피해를 끼쳤을 때는 ‘미안합니다.’ 아니면 자기가 더 많이 잘못했을 때는 ‘책임지겠습니다.’ 이런 자기 의사 표현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인간관계의 기술을 맺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이 현저히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책임지겠습니다.’ 이러면 거기에서 딱 끝나는데, 자기 마음속으로 ‘아, 내가 잘못했구나.’ 이러는데 말을 안하고,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는데,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는데 하겠다는 의사표시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관계가 자꾸 깨지는 것입니다. 제가 ‘개념없음’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러한 일들이 왜 생겼는가. 예전에는 학교 교육, 가정 교육, 심지어 학교 선배들을 만나도 맨날 듣기 싫은 소리로 “야, 인간이 그러면 안 되는거야 임마.” 그거 항상 쓰는 관용어구였습니다. “야, 인간이 그러면 안 되는거야, 임마.” 항상 그러고,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그러는 거 아니야. 임마.” 한번 얻어먹었으면 너도 한번 내야지 인간이 그러는 거 아니야. 임마“ 이러면서 모든 통로를 통해서 가정, 교우관계, 선후배 관계, 심지어 클럽에 들어가도 기본적인 개념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것에 몰두하면서 사람들이......(?) 심지어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우리교회 집사님이 얘기하는데, 대학 졸업하고 신입사원이 들어와서 회사 통장을 주면서 “이거 가지고 은행가서 정리하고 오너라.” 그리고 봤더니, 은행가서 통장을 들고 카운터에 가서 “아가씨, 이거 우리 회사 통장이거든요.” “그런데요?” “없애버리세요.” “아니, 이거 회사에서 쓰는 통장인데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없애버리세요.” 그래서 뒤에 마그네틱 떼어버리고 잔액 남은 것을 돈으로 받아서, 통장과, 잔액을 들고 회사로 가지고 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이게 뭐냐?” “통장 없애버렸습니다.” 그렇게 가지고 오니까 너무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야, 임마. 통장 정리하라니까” “정리하라는 게 없애 버리라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웃지만, 이 이야기할 때 안 웃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계속 사귀는데서 인생을 사는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낫고 훌륭한 사람들과 사귈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 잘 통하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과 사귈 뿐만 아니라 관계를 맺기 어려운 사람하고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관계를 수립해가는 행복, 기쁨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자기가 완성되어 가고 다른 사람들을 완성시켜가는 그런데서 기쁨을 느끼는 그런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이 훈련되어 가야지만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처세술에 관한 책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굉장히 시시껄렁하게 봅니다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히려 그런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처세술 책을 읽고 처세술을 잘하면 내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 처세술은 방법일 뿐이고 내가 워낙 몰라서 이것을 배우는 것이지만,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히려 처세술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소화해내야 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소통하기 어려워지더라도 그것을 여러분들이 극복하려면...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세상적인 현재 상황이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여러분도 아마 해당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관계를 맺을 때 신앙적으로도 말이 잘 통하고 지적으로도 자기 수준에 맞으면 활발하게 교류하는데, 딱 만났는데 사고가 나랑 너무나 다르고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면 왕따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케이스에 해당되는 사람은 나한테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결국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가식적으로 형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동지라고 하는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나누지를 않는 것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실은 최근에 네덜란드에 갈 때에 자유대학교에 있는 어느 교수 논문을, 저하고 같이 만나기로 해서 논문을 몇 편 읽으면서 갔는데 못 만났지만, 어쨌든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논문의 요지가 무엇이냐면 우리의 수준은 어디까지 왔냐하면 장애인들에게 비장애인들과 동일한 기회를 줘야 된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월급을 주고 취업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우리와 삶을 함께 공유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정적인 차원에서 자리하나 만들어주고 장애인을 취업시켜서 장애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월급을 덜 주거나 일을 조금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월급을 깎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대우만 해줘도 우리들은 할아버지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장애인이야, 이 사람의 삶은 나랑은 전혀 달라 그래서 이 사람하고 심정적으로 같이 일하면서도 함께 일하는 동료로써 정신적으로 교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학대라는 것입니다. 차별대우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랑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일반 사회는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학교이고 어디고 다 들어가면 선배나 후배들 사이에서 말이 잘 통하고 화통하고 은어로 말하자면 개념이 있고 괜찮다, 싹싹하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격이 좀 이상해서 대화도 잘 안되고 뭐라고 이야기하면 딴소리하고 사고방식이 달라서 몇 번 힘든 일 겪으면 상대 안 해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에 와서는 달라야 되는데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계속 소외됩니다. 그런데 소외되는 사람들은 제가 목사인데도 같이 이야기 하다보면 대화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막 쏠리거나.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그런 곳에 에너지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까지 저 사람이 차별대우를 받거나 내가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 때문에 저 사람 만나는 것을 노동으로 생각하면 저 사람은 어디에 가서 회복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교통하는 그것이 사실 교회 공동체 일원으로써 누릴 수 있는 하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고민을 많이 하라는 것. 그리고 절대로 지적인 탐구를 그치지 말고 그것이 우리 생존의 이유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적인 탐구를 즐기고, 독서, 명상, 사색, 그리고 자기반성 이런 노력들이 계속 있어야하고 특별히 교리를 배우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