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새벽예배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1~42)
녹취자: 양현정
가마리엘 교법사에 의해서 지혜로운 방법이 제시되었고 그래서 사도들은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도들을 가두고 문초하던 사람들의 인격은 교법사 가마리엘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순순히 사도들을 놓아준 것이 아니라 매우 심하게 채찍질 해서 그래서 그들을 박해하고 결국은 풀어주게 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지간에 하여튼 ‘핍박을 받는다’ 라고 하는 이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채찍과 핍박을 당하는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 속에서 이 사도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한번 보십시요. 누구든지 그런 핍박 받는 상황을 좋아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렇게 핍박을 받을 때에 사도들이 보인 반응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어떤 뜻에서의 기쁨이냐 하면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은 선택된 사람들이 받는 것이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고난 당하기에 합당하게 여김을 핍박당하기에 합당하게 여기심을 인하여 기뻐하였더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합당한 사람들을 고난 받게 하고 핍박 받게 하시지 하나님이 특별히 고난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합당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바울의 그 고백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사망은 우리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가운데 역사하느니라. 무슨뜻일까요? 고난과 핍박과 아무 괴로움을 주님을 위해서 담대히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제가 언젠가 우리가 나이가 많이 들게 되면 점점 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그런 말씀을 드렸죠. 그것이 기분 나쁜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우리의 육신이 부패해져 가는 과정이 육체적인 생명이 서서히 줄어들어 가는 과정이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쪽 반대편에서 보면 이제 생명이 역사하고 죽음이 역사하는 그래서 서서히 육체의 생명이 육체의 죽음에 의해서 삼켜가는 것, 마지막에는 더 이상의 생명을 지탱할 수 없어서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똑 같은 원리에 의해서 이 사도가 고백을 하는 것은 핍박을 많이 당하고 괴로움을 당해 이 무엇이냐 하면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영적인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럼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괴로움이 영적으로 죽음의 그림자이냐 하면 예수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 속에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큰 고통을 당하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연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가오는 육체적인 죽음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뜻을 세우고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려고 하니까 큰 고난과 핍박과 괴로움이 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핍박과 고난과 괴로움이 오는 그 이유는 이세상과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도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핍박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핍박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뜻을 세우고 복음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니까 박해와 고난이 계속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예수의 죽음이 자신 속에 스며들어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참예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진짜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뜻을 세우고 일생일 사셨을 때 진짜 이세상이 예수님을 그렇게 핍박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그 예수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오고 그러니까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그 죽음이 계속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을 하면서 자기를 죽음에 내어주면서 사니까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 전에 그들 안에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러한 예수죽음의 기운이 엄습합니다 육체의 죽음의 기운이 엄습하면 우리의 육체가 점점 힘을 잃고 쇄약해져 갑니다. 그런데 예수죽음의 기운이 엄습하게 되면 우리 안에 죄가 죽어가게 됩니다. 이 사도들이 그 모진 채찍질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핍박과 고난이 있을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정치적인 힘이나 물리적인 완력,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불어줬지만 내일이라도 다시 불러다가 박해를 하면 박해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기뻐하라. 왜 이렇게 예수죽음의 기운을 맛보게 하고 예수죽음에 동참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참 합당하게 여기셨구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빚어져 가고 그리고 주님의 영광과 그 은혜를 따라서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이 예수죽음의 기운이 우리 안에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가 전파된 이레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와 함께 죽어야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속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사도가 사망은 우리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가운데 역사하느니라 고백했을 때에 그 고백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우리들이 영혼을 돌볼 때에 그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 이처럼 예수죽음의 기운에 동참하게 되면 영혼들이 삽니다. 자기가 그 예수죽음의 죽음에 동참하지 않으면 자기는 살고 영혼은 죽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사망은 우리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가운데 역사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다못해 교사나 교역자는 말할 필요도 없고 교사나 구역장을 해도 그 사람이 예수죽음의 기운을 느끼면서 그가 죽으면 영혼 속에서는 생명이 역사합니다. 오늘 사도들이 그렇게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도 이것은 선택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고난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기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그런 아주 희망 밖의 고난을 당하면서 예수죽음의 기운이 느껴지고 자신들이 예수죽음이 동참하고 그때에 그들은 자기 안에 그 한없이 솟아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예수죽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귀하게 보시고 선택을 하셨으면 우리로 예수를 위해서 고난을 받아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게 하는 사람들로 삼아주셨을까. 거기에서 무한한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비밀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많은 것들 것 획득되어질 때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 속에는 쉽게 마르는 기쁨과 쉽게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들은 다 귀한 축복이지만 영혼에 직접 내리시는 축복은 이세상의 모든 축복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것이지만 영혼의 축복은 하나님의 그 사람의 영혼을 직접 만지시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오늘 그렇게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 이처럼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예수죽음에 동참하게 되었고 그 예수 죽음에 동참하는 사도들의 영혼을 하나님이 직접 어루만지시는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기쁨을 느끼니까 그들속에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망과 함께 기쁨의 생명이 고난의 사망과 함께 기쁨의 생명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에 이렇게 끊임없이 예수죽음의 기운에 동참하게 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뜻을 세우고 주님을 위해 잘 섬기려고 하다 보면 고난과 시련과 아픔이 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통증이 밀려옵니다. 이때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고간과 아픔이 올 때에 피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죽음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 죽으면 영혼들이 삽니다. 놀랍게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그런 생애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면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오히려 이 핍박과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는 이 핍박이 오히려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게 하고 큰 기쁨을 가져다 주니까 더욱더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하는 사명감에 이 사도들이 불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치열하게 예수의 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대개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졌겠습니다. 집에서는 개인적으로 사람들 하나하나를 붙들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들이 일어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바로 핍박을 받은 후에 사도들이 종사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핍박과 고난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와 하나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담대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고 그래서 복음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히려 핍박은 활활 불붙는 복음의 그 위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복음의 불길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중국을 다녀오면서도 느끼는 것인데 복음이 꼭 조선족에게서 먼저 일어난 것이 아니었겠지만은 중국이라는 이 지역에서 다시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리고 80,9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이 서서히 개방되면서 이 복음의 물결이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매일 중국에서는 200만 명 내지는 250만 명씩 회심한다고 통계가 되어있습니다. 1년이면 1억 가까이 늘어난 것입니다. 그 회심의 정도를 어느 정도나 볼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강력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미 복음이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쭉 전해져 가는데 동쪽에는 심양이나 북경이나 상해나 광주나 소주나 이런데를 중심으로 개발이 엄청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사람들의 소득이 890달러라고 하는데 상해 같은경우는 4500불 이상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복음에 대해서 싫증이 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국교회 안에서도 이미 벌써 우리가 옛 신앙으로 돌아가자. 지금 한쪽에서는 계속 영혼들이 거듭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이미 복음이 지나간 지역에서는 벌써 목회자들이 전도하는 서방이나 한국에서 보내준 후원비 갖고 생활하면서 전도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핍박과 고난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외칩니다. 1950년대로 돌아가자. 그 핍박과 살을 에는 고난 속에서 이 복음만을 붙들고 살았던 그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 많은 섬김 물질로 인해서 교회에 큰 역사하는 예수죽음의 기운에 동참해야 되겠다 하는 신앙의 아름다움과 결단과 결의가 점점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고난과 박해, 그리고 주님을 섬기고 일하려고 할 때에 당하는 괴로움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주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그리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그리고 그 고난속에서 이세상이 얼마나 철저하게 희망이 없고 껍질뿐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진정한 생명을 갈망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