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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새벽예배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3-31)
녹취자: 박은경
그렇게 큰 핍박을 받았지만 사도들이 담대하게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보라”고 응수했습니다. 결국 그런 박해를 받은 후에 놓여나게 되었고 박해를 받은 사도들은 이제 공동체로 돌아가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고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 공동체는 오히려 커다란 자극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며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박해를 받거나 신앙의 억압을 받을 때에 죽어 있는 신앙은 그 속에서 깊이 좌절하고 낙심하지만 살아있는 신앙은 오히려 신앙의 힘이 더 뜨겁게 분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기독교 역사를 보면 박해를 받을 때 그러지 않았습니까? 박해받기 전에는 그냥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신자들이었는데, 박해를 받게 되니까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아주 강력하고 뜨거운 사랑이 솟아나게 되었고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간절한 간구와 부르짖는 기도가 그 속에서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강력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도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잠자는 신앙, 죽어있는 신앙은 고난을 당하고 박해를 당할 때에 두려워하고, 깊이 좌절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으로 살아있는 신앙은 그렇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신앙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박해를 받을 때 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의존의 마음 그리고 그 일에 대해 깊이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신앙이고 참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목숨이 오가는 박해를 받은 적은 없지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방해요인들과 억압들을 만납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주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뜻대로 살기위해서 간절히 몸부림치도록 만들어주지만 죽어있는 신앙은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 깊이 낙심하고 좌절해서 그나마 희미하게 붙들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둘째로는 이들이 부르짖었던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선 그 내용은 자기들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일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이 박해와 고난이 이미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바를 그대로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박해를 받을 때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미 예고된 바이고 예고된 대로 이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들이 받았던 박해는 결국 그 당시 공동체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가 바로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을 때의 그 존재와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받는 고난과 어려움이 예수님이 생애 가운데 당했던 그 고난과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이 살았던 삶을 살려고 애쓰며 그런 동질성을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들은 박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 행하신 이 위대한 구원과 고난을 보면서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겠다고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뜻대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다 보면 이런 깊은 고난과 괴로움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공동체가 자신들이 당하는 이 고난을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당하신 고난과 연장선상에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자신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을 대적한다는 구약의 예언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오르셨는데 자기들을 박해하는 것을 곧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이것은 후에 바울의 회심기록으로 넘어가면 얼마나 이들의 관찰이 정확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러 달려가는 사울을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였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기록도 없는데 예수님을 언제 핍박했겠습니까? 그것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했느냐”가 아니라 “핍박하느냐”는 현재형입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남아있는 모든 성도들과 하나가 되어 영적으로 그들의 머리가 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그것이 곧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 됩니다. 똑같은 논리로 오늘 이들이 자신들이 당하는 박해를 예수님이 당하는 박해로 본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구하는 내용이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고,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 많은 박해, 무서운 핍박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그 후에는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이어질텐데 그런 속에서 자신들이 보호받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핍박 속에서 자신들이 보호받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 그 핍박 속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박해는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흘리신 보혈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보혈이 튀고, 흩어집니다. 흩어져서 떨어진 그곳에 다시 피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복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책 모서리를 보면 빨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복음이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며 내 손에까지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를 자신의 안전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신앙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기적과 놀라운 표적이 일어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표적과 기사라고 하는 것은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맥락입니다. 기사는 일어난 일의 놀라움을 주목한 것이고, 표적은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수단이 된다는 면을 중심적으로 보면서 서술한 두 낱말입니다. 같은 것을 어느쪽에서 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서 계속해서 역사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지 병자를 고치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이 그 시대에 드러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완고한 유대주의, 그리스도 예수를 볼 수 없는 가리워진 눈을 열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저한 기사와 표적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이러한 위대한 역사는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마지막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인 곳이 진동하면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기이한 경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하셨는데, 그 강림하신 성령이 자신들에게 다시 임하시는 것 같은 강력한 충만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강력하게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강력하게 사로잡히면서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두려움이 물러가고 오히려 그 박해로 인해서 더 강력한 신앙을 가진 공동체로 무섭게 변모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런 모든 일들이 박해 받을 때, 기도할 때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교회가 하나님 앞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