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25일 새벽예배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여러 해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유대인들이 있었으니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마 24:10-23)
녹취자 : 김세나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의 고소가 끝나고 이제 벨릭스가 바울보고 너를 이렇게 고소를 했으니까 네가 할말을 하라고 그러는 거죠. 그런데 바울이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나서 그러면서 자신을 이 사람들이 고소한 것이 왜 부당한지를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무엇인가 커다란 불법을 행하고 유대인들을 소란케 했다고 그러는데 자기는 이곳에 온지 12일 밖에 되지 않고 여기 와서 누구와도 변론을 하거나 싸우지 않고 다만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고 그리고 다만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결국 우리가 죽지만, 죽은 후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다. 그 소망을 나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 부활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부활일 것이고,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에 이르는 부활일 것이니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된다. 내가 이렇게 외친 것 밖에는 없는데 그게 뭐 그렇게 크게 잘못한 거냐. 그러면서 자신을 변명하는 장면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 볼 수 있는 사실은 그거죠. 첫째는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결국 끝까지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만다고 하는 것이죠. 사실 지금 이 사도바울에게 이처럼 고소하고 사도바울을 박해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아시아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아시아에서부터 복음이 전파되고 사도바울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 많은 영혼들이 변화되는 역사들이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무리들이 일어나는 아주 역동적인 복음전파의 현장을 보던 유대인들이 마음이 강팍해지면서 사도바울을 이렇게 박해한 것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이 역사하는 그 현장에서 진짜 주님을 믿고 변화되지 않으면 참 신기하게 인간의 마음이 성령이 역사하시면 역사하실수록 정반대로 강팍해져요. 그게 이제 큰 고통이죠. 이것은 하나의 일종의 하나님의 심판적인 성격이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마음을 주님이 계속 어루어 만지셔서 부드럽고 아주 온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잘 영향을 받을 수 있게끔 이렇게 만드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떠나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굳어지게끔 내버려두셔요. 그것은 무슨 뜻이냐,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수레 같은 것이 언덕에 서 있으면 불안하니까 수레 뒤에다가 돌맹이나 나무 같은 것을 받쳐 놓잖아요. 그런데 빼 버리면 수레가 그냥 굴러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멀쩡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강팍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 자체가 하나님을 떠나서 미끄러지려고 하는 마음인데 하나님이 그 억제하시는 은혜로 더 이상 못가도록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는 거죠.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이 빼 버리는 거죠. 그 다음에 내리막길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에요. 그렇게 마음이 굳어지는 역사가 언제 강력하게 일어나는가 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 이 때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들은 마음이 부드럽고 온유해져서 돌아오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데 하나님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만,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은 굳어지도록 만들어요.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막 쏟아지는 그 현장에 가장 마음이 굳어진 사람이 있다고요. 그래서 고통을 받게 되는 거죠. 그것이 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까지 쫓아와서 사도바울을 박해하게 만든 거죠. 때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려는 그 열심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도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슬리는 그러한 반역하는 행동들이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나요. 우리도 이렇게 보면 진리와 선한 뜻을 향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힘보다는 어느 한 순간에 은혜에서 미끄러졌을 때 하나님께 불복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려는 이 반작용이 훨씬 더 커요. 훨씬 더 크죠. 왜냐하면 그것이 이제 죄인들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역한 감정들이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에요.
이런 정도의 수고이라면 굉장히 큰 수고이잖아요. 아시아에서부터 여기까지 쫓아 올라오고 바울을 죽이기 전에 밥도 안 먹겠다고 하고 그리고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서 그 위증을 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사도바울을 박해하는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들이 들어갔겠어요. 사도바울이 바보에요? 얼마나 많은 에너지들이 들어갔겠어요. 그런 에너지들을 지불하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났겠어요. 그것은굉장한 거거든요. 그러한 에너지가 나와요. 그게 그들 속에 하나님을 거슬리고자 하는 그곳에서부터 엄청난 힘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어마어마한 에너지이죠. 그 에너지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그러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내는데 그것이 나오는 원천이 어디냐에요. 원천이. 그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죠. 혈기로 행하죠. 그 다음에 사랑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지독하게 미워하죠. 그러면서 결국은 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표가 설령 바울을 그렇게 죽이는 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자기들이 믿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한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그 목표가 선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루어가는 방법도 선한 것이어야 되잖아요. 그렇게 자기가 선하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판단내리는 내 편에 하나님이 서 계시다. 그렇다면 그 일을 이루는 방법 자체도 선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선하지 않아요. 없는 죄를 만들어서 고소하고 그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그리고 혈기로서 분내고 그리고 그를 말하자면 죽여 버리기 위해서 그래서 사람들을 규합하고 그리고 법을 어겨서 그가 고소를 하면서도 진짜로 법정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소를 해서 그 기회에 그를 길거리에서 죽여 버리려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만약에 목적이 올바르다면 올바른 수단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해야 되고 올바른 수단은 자기가 지정한 올바른 목적을 이행하기에 모자란 듯 보이면 모자라는 것은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이게 진리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자신감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하잖아요. 결국은 악한 무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분노하고 모욕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보여준 거죠.
두 번째로 보면 이 복음을 믿는 신앙은 그 어디에서든지 항상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이 박해의 원인이 된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바울이 같은 핏줄이고 유대인이며 함께 같은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렇게 속속들이 바울을 미워하고 왜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유대인들에게 무슨 나쁜 일을 했습니까. 그가 유대인들에게 한 일은 예수님과 한 일과 비슷했습니다. 그들을 돕고 섬기고 그랬어요. 그들이 싫었던 것은 그가 전파하는 복음이었어요. 그게 싫은 거예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선 다음에는 전하는 복음이 그 사람의 돌아선 마음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쁘고 감사하고 반갑고 그래요. 그런데 일단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그게 막 견디기 힘든 고통을 복음이 자신들에게 주는 거죠.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거죠. 이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에요. 사람이 어떤 다른 이유에 의해서 복음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좋아 보이는 표정과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자신의 마음이 깨뜨려져서 영혼이 거듭나서 은혜로 채워져서 하나님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그러한 내면의 진실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충분히 변화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복음을 향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어느 순간에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그러한 것들이 돌아서게 되어 있는 것이죠. 결국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죠. 말씀이 정직하게 권능 있게 선포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진리가 잘 선포되면 그것을 인해서 깊이 깨뜨려지면서 변화되어 하나님을 향해서 전향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더욱 강화하면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선하신 복음의 역사에 항거하거나, 둘 중 하나에요. 그 때 그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에 항거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반감 같은 것들이 굉장히 강하게 작용하면 역사해요. 그것이 사실 인간을 향해서 퍼붓는 것이 바로 핍박이에요. 핍박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주님이 받으셨어야 하는 것인데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시니까 주님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퍼붓는 것이 바로 핍박이에요. 그래서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이유가 당신이 받아야 할 모욕과 고난을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받으시니까 그렇게 기뻐하시는 거예요. 우리들이 말이죠. 정말 올바르게 박해를 받기만 하면 그 때에는 그 박해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위로가 넘쳐나게 돼요.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그 때에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가 느껴지잖아요. 오랫동안 올바르지 않은 태도였는데 그 태도에 대해서 깊이 말씀을 듣고 깨뜨려져서 하나님께 순종해요. 그렇게 되면 놀라운 위로, 그리고 변화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임하게 돼죠. 그렇죠.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행동하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잖아요. 그러니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니 복이 있나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도바울도 이러한 일들 때문에 깊은 박해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넘치는 오히려 소망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면 박해를 받을 때에 그렇게 그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해를 받을 때에 사람이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러워서 미끄러져 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거기에서 믿음이 나오는 거예요. 믿음이. 박해를 받는 상황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는 상황이 자꾸 우리에게 시인이 고백하였던 것처럼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이것을 자꾸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 너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도 너를 돌아보시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을 때 가장 우리를 위협하는 유혹이에요.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너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양심의 가책, 이런 것들이 계속 피어오르죠. 이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믿음이에요. 믿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환경일 때, 이성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주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여겨주시는 거죠. 거기에서 우리가 정말 우리를 의지하는 사람인가.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주님이 먼저 우리로 하여금 깨닫고 알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이끌고 인도하시고 그렇게 가시는 거예요.
마지막 세 번째로 보면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얼마나 진리에 대해서 담대한가. 그리고 물러서지 않으려고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이 그 그들이 고소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원하지 않아도 그것이 참 진리라고 하는 것을 사도바울이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도 항상 그렇게 살아야 되겠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이제 현실적으로 문제가 하나 대두되는 거죠. 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한번 양보하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것을 끝까지 양보하지 아니하고 이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들고 핍박을 받을수록 그것을 외치면서 죽어갔는가. 그리고 오늘날은 우리가 이렇게 진리를 증거하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들이 고난을 받는다든지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드믄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의 체험과 관련이 있는 거죠. 복음의 체험. 복음의 체험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가정에서 많이 보는데 가정도 교회와 유사하게 이 가족들 간의 이러한 연합을 깨뜨리려는 수많은 유혹과 환경 속에 있잖아요. 이 때에 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그러한 유혹을 이기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가족이 항상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경험의 테두리가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그런 것들이 올 때에 그것을 뿌리칠 수 있는 힘들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들과의 사랑의 관계와 똑같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의 마음속에서 계속 경험되고 영적으로 체험되어서 그래서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시고 귀하며 내게 전해진 이 복음 때문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용서받은 새 사람이 되었는가. 이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또 하나님이 나를 향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 나 같은 죄인을 향한 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경험되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뭘 통해서 경험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모두 복음을 통해서 경험이 되어요. 언제든지 복음을 통해서 경험이 되어요.
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무엇을 통해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은혜,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 그리고 내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신 은혜, 부족함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이러한 것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통로이고 복음의 위대함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도구들이거든요. 항상 하나님의 사랑은 복음을 통해서 경험이 되어지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경험되는데,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 그것 자체가 결국엔 복음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경험이 되니까 그 복음에 대한 확신을 사도바울이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이미 그랬잖아요. 밀레도에게 성령이 내게 증거 하시기를 각 성에서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하시지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가 생명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러면서 기꺼이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적인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복음의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익숙해지지 아니하고 날마다 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셨을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 이게 매일매일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야 해요.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 벌레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좋으신 주님이 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자기를 다 버리시는 고난의 길을 가셨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시고 우리는 구원 받아서 서 있게 된 이 자리가 한 번도 자연스럽게 않아야 해요. 그러한 모본을 바울이 보여주었던 것이에요. 옥중에 있을 때 뭐라 그랬어요. 끝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거예요. 이 그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그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자연스러운 게 아니에요. 왜 그러셨을까. 여기에 대한 넘치는 기쁨이 이 넘치는 기쁨이 바울로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이에요. 만들어 주었던 거예요. 우리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리게 되는 하나님이에요. 그 분만이 우리의 모든 기쁨이에요. 모든 기쁨이에요.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복음의 가치를 굳게 신뢰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이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바이고, 그것이 바로 신자의 행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