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3교구 순장 MT 새벽예배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 20:19)
녹취자: 정은숙B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것은 아니고 61년에서 63년경까지 로마에 갇혀 있다가 잠시 해방되고 석방되고 그 후 몇 년 있다가 순교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순교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후에 그렇게 판명이 나고 적어도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올려 내는 성도들도 그랬고 사도 바울 자신도 이 길이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밀레도에서 행한 장로들에게 베푼 연설은 그의 유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밀레도는 항구도시이고 여러 지방으로 가는 배편을 갈아타는 곳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밀레도로 장로들을 청해서 오게 하였고 거기서 연설을 한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에게 특별히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기가 아시아에 들어와서 3년 좀 넘게 사역을 했는데 에베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에 자신이 삶을 회고하면서 자기가 가고나면 홀로 남겨질 교회의 양떼들을 위해서 목회자로서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그러니까 3년 반 동안 아시아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역한 그것이 모든 사람들 앞에 볼 수 있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사도 바울이 장로들에게 한 고백이었습니다. 여기엔 어떤 긍지와 프라이드,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만큼 살았다고 하는 자기 과시, 이런 것들이 엿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했던 솔직담백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남긴 이 유연적인 설교의 앞부분을 해설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사역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결국 우리의 삶이 우리는 일에 관심이 있고 사역에 관심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냐 하는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자체가 신앙의 가르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꼬피아 도켄디 모두스비벤디 라틴어인데 직역을 하면 가르침의 풍부함, 삶의 방식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의 풍부함은 삶의 방식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가르침이 풍부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삶의 방식에서 할 말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영혼들을 어떻게 섬겨야하는지에 대한 풍부한 가르침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가르침과 가르침의 내용이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섬겼는지를 고백하는데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겸손과 눈물이었습니다. 이 겸손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 겸손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토대는 자기가 하나님이 자기를 아무리 훌륭하게 써 주셔도 본질적으로 자신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자각에서부터 겸손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겸손은 사람을 향해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내려놓는 그런 겸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데서 오는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결혼도 하지 않고 젊은 나이에 주님을 위해 헌신해서 일평생을 예수 위해 살았습니다. 사삽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온갖 죽을 고비를 맞고 유대인들로부터 모함을 당해 살해당할 위협을 수 없이 겪으면서 살았는데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말년에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죄인중의 괴수로다 그러면서 그 백발의 노사도가 되었을 때조차도 자신이 다만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은혜에 대해서 늘 감격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서 모든 겸손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전 가끔 목회를 하다가 힘들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있는 성도들은 내가 옛날에 예수 안 믿을 때 나빴을 때 보다 다 좋은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위로가 되고 겸손해집니다. 여러분 어제 순원들을 돌보다 이런 저런 고충을 이야기했지만 순원들을 돌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그것도 주님의 일인데 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만나주지도 않고 심지어는 구역모임에 나와서 깐죽거리고 순장이 싫어하는 일을 골라서 하고 옛날에 여러분 모습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에 미움을 품고 상처를 받고 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나 쉽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목양의 이 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인데 그게 쉽고 좋은 일이면 우리 차례가 왔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소명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언제나 단것만을 빨아먹는다면 그게 취미생활이지 소명일수가 있겠고 굳이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서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을 부르셔야 할 이유가 어디 이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항상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죄인들밖에 없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인과 이미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족속이라고 불러주셔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에 비하면 나에게 가혹한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요새 내가 책을 쓰다가 갑자기 멈추고 주기도문을 쓰고 있습니다. 14장으로 되어있는데 10장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다음 주까지는 마치려고 하는데. 쓰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얼마나 쉽게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가 사실 주기도문의 삶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이고 자기가 지금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혜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가 늘 얘기하지만 주기도문의 기도를 가슴을 찢으며 주 앞에 올릴 수 있으면 지상에 사는 성도로서는 최고의 스피리츄어리티입니다. 그런 겸손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만큼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주는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달으면서 세상에 붙은 욕심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 유럽에 갈 때 EBS에서 한 자본주의 시리즈 다섯 개를 밤새도록 비행기 타고 가면서 다 봤습니다. 굉장히 커다란 인상을 받았고 그 후에 SBS에서 창사특집으로 한 최후의 제국이라고 하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어제도 오면서 그것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몇 번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중국을 탐사하면서 산후조리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 2천만 원짜리까지 있는데 원하는 모든 꽃을 심어주고 백 평의 펜트하우스입니다. 고정적인 사람이 거기서 수발을 들어주는데 외국의 톱스타들도 한국에 와서 아이를 낳습니다. 중국은 한 술 더 떠서 한 달에 5천만 원짜리 산후조리원이 있습니다. 넓은 거기에서 여러 사람이, 대 여섯명이 전임으로 붙어서 그 사람을 관리해주는데 빨래해주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꽃심는 사람, 아기를 아예 엄마 품에서 떼어놓습니다. 젖을 먹일 수 있는 임산부들의 젖을 짜서 테스트해서 가장 좋은 젖을 가진 사람을 옆방에 상주시키고 아이를 그 사람에게 보내어 젖을 먹이고 원 엄마는 자기 가슴을 아름답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운동까지 다 시켜줍니다. 중국에서 국가 전체의 부의 41%를 1%의 사람들이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보여주는데 난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면서 미국에 대한 편견이 많이 깨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집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집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최고 호황을 누리는 직종이 창고임대업이라고 합니다. 컨테이너 같은 것을 야적장 데다 쌓아놓고 하나씩 빌려주면 집 잃어버린 사람들이 거기에다 짐을 넣어놓고 잠그고 가끔 와서 거기서 하나씩 꺼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를 보여주는데 너무 너무 비참합니다. 다섯 명 초등학생 중 한 명이 굶주립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다리 밑에서 사람들이 사는 데 그런 비참한 광경을 우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다 눈물을 흘리면서 살고 미국에 가면 길가에 모텔이 있지 않습니까? 모텔에 사람들이 수천 명이 살고 있습니다. 모텔은 보증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달 돈을 내고 사는 것입니다. 가정이 다 해체가 돼서 그렇게 사는데 얼마나 야박하냐하면 의원들이 의회에서 연설하는 것을 채집했는데 가난은 본인의 책임이니까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국부가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43%를 1%의 사람들이 독식을 해서 어떤 사람들은 휴가 갈 때 비행기를 타고가고 심지어 아침마다 자기 운동하는데 스파링해주는 사람한테 지불하는 금액이 1년에 20만 불입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쓰는 요트를 165억을 주고 구입해서 타고 다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대 빈곤층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아직도 미국에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4천5백만입니다. 그 사람들은 병이 걸리면 그냥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어느 섬에서 3,4백 명의 사람들이 3천 년째 행복하고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거기에 가기 위해서 서인도 열도에 도착을 해서 거기에서부터 배를 타고 13일을 간 것입니다. 돛단배를 타고 5마력짜리를 타고 13일을 갔는데 둘레 1킬로밖에 안 되는 섬이 나타납니다. 거기서 한 달 동안을 머무르면서 그 사람들의 생활을 취재한 것입니다. 거기서 물론 교육을 시키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이런 것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교육은 시키고 거기서 사람들이 가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300명이 환영을 하고 한 사람 한사람 전부 다 포옹하고 코를 맞추는 것입니다. 한 달 동안을 취재하고 오는 날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환송식을 해주는데 동그랗게 300명이 다 나와서 모래밭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며 환송을 해주는데 화음이 너무 아름다워서 순간적으로 이 피디가 관광객들을 위한 하나의 이벤트가 보다 했는데 3천년 동안 관광객이 온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오지니까, 그러면서 이별의 노래를 부르는데 300명이 전부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통곡을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헤어지는 것이 섭섭해서. 어떤 사람들 코를 여기까지 흘리면서 온몸이 마치 자기 어머니 돌아가신 것처럼.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가운데 죽 앉혀놓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도 눈물을 안 흘리고 표정이 너무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이 상황을 대응을 해야 되나 하고 막 고민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만한 아이부터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까지 거의 패닉 상태로 한 달 동안을 살았던 이방인들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 슬퍼서. 그런데 거기에는 에어컨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들이 너무 행복하게 뛰어놀면서 사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난 그것을 보면서 가슴이 정말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가 정말 유일한 소망이구나라는 것을. 이미 우리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자본주의적인 구조 속에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까도 어느 자매 그래픽 디자이너가 그렇게 막 새벽까지 일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가 자본주의 속에서 미친 듯이 매몰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사회 구조 속에서 돌아가고 같이 뛰지 않으면 거기서 이탈되어서 거의 죽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의 관계가 다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돌아보면 사람들이 전부 다 활짝 웃습니다. 그것이 사랑과 친절이 아니라 위험을 당하지 않기 위한 자기 보호입니다. 내가 갔을 때 최근에 일어난 일인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지 않습니까? 양쪽에서. 어떤 여자가 저쪽에서 기름 넣는 사람을 계속 쳐다본 것입니다. 우리는 잘 그러지 않습니까? 총을 꺼내서 그냥 그여 자를 쏴서 죽여 버렸습니다. 탁 쳐다보면 외국인이 맞는데도 활짝 웃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보호입니다. 미소의 의미를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다 관계가 찢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생산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 미친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가족 씨족 혈연 모든 관계들이 다 단절되어서 설교 시간에 얘기한 것처럼 요렇게 앉아서 자매가 작년 5월에 죽은 것이 최근에 발견됐습니다. 미이라처럼. 그렇게 모든 것들이 끊어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저 뭐냐면 인간의 진정한 인간됨은 관계에 있습니다. 그게 특별은총을 떠나서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공정하게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결론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번 하버드를 졸업한 840명을 대상으로 누가 행복한가를 10년 동안 조사했던 행복보고서를 설교 시간에 얘기 한 적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모두 관계입니다. 그런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장이 어디에 있는 가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씨족 단위의 생활은 다 끝났습니다.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뒷집에 있는 사람이 죽은지가 지난번에 한집은 2006년도에 사람이 죽었는데 6년이 지나도록 모른 것입니다. 거의 백골이 다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씨족의 전통 같은 것은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인데 가족도 혼자 노력이 소용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엄마도 바쁘고 아빠도 바쁘고 누나 형들이 다 바쁩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 어떤 생각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은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되나 그것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도시 생활 다 철수해서 저렇게 섬 하나를 사서 모여서 살 것인가. 그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마저 철수하면 이 세상은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희망이 없어도 결국은 하나님은 우리 끼리 모여서 외딴 섬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마처 철수해 버리면 무슨 희망이 있느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저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그 속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 대안을 가진 것이 유일한 대안이 교회다. 이 교회 안에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두 사이에 끼여 있지 않습니까?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회 구조 속에 끼여 있고 돈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자기 이익에 집중된 삶을 사는 것에서 어제도 글을 쓰다가 상처라는 말을 교회에서 쓸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성경에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자기중심적, 세속주의에서 나온 용어들입니다.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고 그런 것들을 어떤 식으로 추방하고 정리해야 될 것이냐 그런 속에서 미친 듯이 돌아가는데 이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이 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굉장히 발달한 시대이고 옛날과 다르다고 하지만 여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부유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노예들을 거느리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비참하게 살고 하는 것들이 언제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그 구조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구조 속에 살면서 얼마든지 객관적이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다이어트를 한다고 할 때 선식으로 돌아가서 일평생 그렇게 우리들이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기술적으로 그렇게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회식합시다하고 뷔페에 갔는데 자기는 볶은 곡식 꺼내가지고 먹으면서,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어마어마한 회사의 회장이 되어서 누구의 눈치도 안보는 처지라면 모르지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안한다고 우리들이 음식이 주는 폐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들을 컨트롤하면서도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임신택 목사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그런 이야기를 몇 달 전 했습니다. 목사님하고 있으면서 배운 중요한 한 가지가 있는데 어떻게 하던지 이 현실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어떻게 하던지 해결을 하려고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텍스트도 버리면 안 되고 컨텍스트도 버리면 안 됩니다. 컨텍스트를 버리면 파괴주의적인 신앙이 되고 텍스트를 버리면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세속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를 어떻게 하던지 일치시키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면서 자기가 그 사이에서 찢어지는 것이 오히려 성경적인 우리의 삶의 방식입니다. 현실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런 철저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갈 때면 결국 사도바울이 오늘 이야기하는 그런 모든 속에서 찢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여기에 나오는 눈물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사역을 눈물이라고. 이 사람은 엄청난 말씀의 능력,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는데도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아무리 능력을 많이 받아도 그것이 우리의 고난을 덜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런 점에서 여러분‘께는 교회가 이 속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삶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사역이 사실은 교회를 위한 사역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을 고치는 사역이다 생각을 하고 이 속에서 와서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들을 학문적으로 설득해서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이 비참한 그런 노예의 삶에 대해서 우리들이 설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결국은 그 이상의 삶이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그 속에서 체득하면서 알게 해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 다른 곳에서 받을 수 없었던 사랑, 관계의 소중함 그리고 그 속에서 아픈 것은 내가 지고 나쁜 것은 내가 짊어지고 좋은 것은 지체들에게 누리게 하는 희생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인생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 기독교의 모본을 통해서 가르쳐주어야지 우리의 인생의 전체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의 종교로서 일부분만을 가르쳐준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이원론적인 사람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생각을 하고 마음을 다 해서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결코 그냥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그 아프고 고단한 과정 그 차체가 우리가 성숙되어져가는 과정이고 그리스도의 그 남은 고난에 동참하면서 주님이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일생이 무엇인가 물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만할 때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는 세계가 그저 가슴안 에 들어오는 말하자면 핸드볼 공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까 정말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리라고 하는 프랑스의 혁명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일평생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하나님, 이 세상을 변화시키게 도와주십시오 라고, 나이가 들어서 중년이 된 다음에는 하나님, 우리 프랑스만이라도 제가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이제 사십이 넘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가족이 너무 이탈하니까 가족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마지막에 죽기 직전에는 나나 똑바로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실화입니다. 결국은 얼마나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하찮은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장로님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죽으면 그냥 교회 하나 남겨놓고 죽는 겁니다. 우리 중에 누가 영원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는 우리 밖에 있는 열린교회이기도 하지만 그 교회 속에서 몸부림쳤던 더 큰 보편교회 더 작게는 내 마음속에 새겨지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가 생각 합니다 그래서 섬기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저 당연한 것이 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너무 은혜롭고 사역이 쉬워 보이면 이것은 이변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이 특별히 일정기간 위로해주시는 것이지 항시 이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여러분들도 한 번 들어가서 보십시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할 것이고 토론 같은 거에 굉장히 재밌을 것 같습니다. 정말 현대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속에서 미친 듯이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이런 속에서 교회는 점점 더 필요한데 그런데 현실 교회가 그 욕구를 다 수용 못하니까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끝으로 여기 보면 유대인의 간계를 통한 시험을 참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메도디아 라고 복수로 나옵니다. methodology라는 영어 단어가 나온 건데 계교입니다. 간사한 꾀를 사용해서 사도바울을 그렇게 괴롭혔던 것입니다. 자객도 풀고 모함도 하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목적을 향해 갈 때 악이 가만두겠습니까? 수 없는 간사한 꾀들이 우리 주위에서 출렁거리고 춤을 추면서 어떻게 하던지 우리를 좌절시키고 낙심시키고 사랑하는 지체들끼리 이간질시키고 결국은 우리를 찢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오래 참는 것, 그것이 결국은 사랑의 가장 훌륭한 표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간교와 시련 그리고 간사한 계교들이 있어서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예수님이 이런 길을 가셨던 분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문헌에 예수님이 막달라마리아와 같이 살았던 것으로 나오고 다빈치코드에서도 보면 거기에도 자식을 낳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그런 후세에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이 퍼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이 세상ㅇ에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나님을 선을 찾아가는 삶 자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에 속한 사람들과 그리고 마귀에게는 거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그런 악의를 갖지 않아도 자기에게 악의로 대적하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일으키고 악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주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일평생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고난을 받고 그러면서 젊은이는 중년이 되고 중년은 노년이 되고 노년은 죽어가면서 우리의 인생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을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만나고 또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황하지 말고 마음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충성스럽게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리라 그리고 영혼을 위해서 살도록 불러주신 이 직분은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고 주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은 딴 일을 하지만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혼을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어쩌면 여러분들이 흔들리지 않고 이 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영혼들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 마음을 다해서 온 뜻을 다해서 하나의 영혼이라도 놓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세우기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실 이십년 가까이 교회를 했는데 이 12월에 제 마음이 정말 가난해졌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특별히 교인들이 속 썩이고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너무 가난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교역자들 가운데 건강이 안 좋고 그런 분들이 있었는데도 1월 1일부터 3일 아침까지 교역자들이 20년 만에 처음으로 금식을 단체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제목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양 사역에 복을 주십시오, 영혼들을 보내주시고 진정한 회심을 주시도록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임목사네 교회에 청장년 42명이 갔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주일에 54명이 등록을 했습니다. 요즘도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고 우리의 목양에 복을 주시도록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지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증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