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 새벽예배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아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행 25:1~5)
녹취자 : 장미라
이제 벨릭스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또 바울을 배척하기도 하였습니다. 두 마음이 그 사람 마음속에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어 볼까...”하는 마음도 생기고 또 한편으로는 “뇌물을 받을까...”하는 제물에 대한 사랑, 그리고 믿고자 하는 마음은 생기지만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을 믿고 변화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돌이켜서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결국 벨릭스 주님을 안 믿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이렇게 회심하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정말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또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이 믿어지기가 어려운데 우리가 믿었으니까 참 감사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벨릭스가 상당한 시간동안 바울과 함께 있었는데도 결국은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마 사회적인 지위나 이런 모든 것들이 그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용기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용기...
그리고 나서 그 후에 2년이라고 하는 긴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그 때까지 이 사람은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압박 같은 것도 많이 작용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베스도라는 사람이 후임으로 오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발령이 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스도라는 사람이 와서 유대인 들이 사는 그 지역에 자기가 왔으니까 아무래도 종교지도자들이나 이런 사람들 하고 정치적으로 관계를 괜찮게 지내야지만 자기가 그 지역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발령이 나면 관리들이 그렇게 싫어했다고 합니다. 인사가 유대인들이 있는 지역에 총독으로 발령이 나면 요즘 우리말로 말하자면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그런 정도의 고달픈 지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대게 자기들이 순리로 일을 할 수 있으면 폭동이 안 일어나지 았았을텐데, 그걸 못하게 하니까 폭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폭동이 일어나면 항상 로마에 대한 반대의 기를 드니까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맡은 임지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자기의 출세에 치명적으로 지장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록에 보면 로마의 관리들이 중앙에서 파송이 되는데 유대인 지역에 발령이 났다고 하면 ‘재수 없다’고 하고 왔다고 하고, 그 사람들은 우리로 말하자면 하여튼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하고 왔다고 합니다.
그러데 이 사람이 여기 예루살렘에 와서 그런 연유 때문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을 방문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이야기 하는데 그 때 이제 유대인들이 여기서 말하자면 수내부가 인사차 온 베스도에게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서 좀 재판을 해 달라” 그것도 왜냐하면 진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하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죄수를 이송하면 그 과정에 습격을 해서 죽여 버리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도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는 많은 특공대원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동원해서 보호만 하지 않으면 오는 길에 그를 죽어버리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사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제가 어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목표를 세워 놓는 것으로만 입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어떤 목표를 세웠으면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야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가 보면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은 언제 도착할 지 모를 정도로 돌아가야 되고, 좀 불신앙 적이어도 내가 직접 하는 것은 질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올바르게 하는 자들은 한 대 때려서 똑바르게 하라고 하는 것은 쉽지만, 이 아이가 정말 변화 돼서 지각이 있는 아이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이런 일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되 자기는 오래 참으시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고, 결국은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긴 세월이 걸려도 좋으니까 스스로 회개하게 하시고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 서도록 그렇게 다루어 주시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은 잘못하면 한 방 쥐어 패서 ‘손들고 옵니다’ 간증하는 방법으로 질서를 잡아주시길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섭섭하게도 다른사람도 사랑하십니다. 나만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도 아주 명백히 잘못하는데 참으십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오래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오래 참아야 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 사람의 단점과 결점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아픈 것입니다. 아프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게 아픈데 그 아픔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되냐면 나같은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리고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많이 아프고 고통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형편이고, 처지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왜 하나님을 그렇게 안 하실까. 그렇게 하신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한테 뭐 좀 잘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마음이 상해서 ‘아, 저 사람 저렇게 하면 하나님이 안 기뻐 하시는데’ 근데 그렇게 나를 마음 상하게 하다가 올 해도 아니고 그날 밤에 하나님이 한 방 치셨습니다. 그래서 혼자 밤에 손들고 철저히 회개 합니다. 아, 내가 아무개 한테 몇 시간 전에 마음 아프게 한 거 용서해 달라고 그러고 빌고 새벽이 되자마자 달려와서 바짓자락을 붙들고 깨달았다고, 하나님이 한 방 치셔서 내가 깨달았다고. 하여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인생 살아갈 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은 못 배울 것입니다. 사랑은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배울 수 있어도 아마 사랑은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의 진수는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을 참고 사랑 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러는 것이 사랑의 진수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가슴에 꼭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참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벌써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이 믿는 종교와 신앙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죽일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역사를 보면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납니다. 예배드리는 방법이 나와 틀리다고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믿는 신앙이 나와 틀리다고 불질러 버립니다. 화형 시켜 버립니다. 물론 내가 믿는 신앙이 올바를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믿는 신앙이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진리에 속한 문제니까 내가 믿는 신앙이 참 진리에 속했다는 것을 변증하고, 그 모든 인생과 역사의 질서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 호소해서 그래서 진리가 승리하게 해야합니다. 길거리에 숨었다가 재판받게 하자고 오면 찔러서 죽여버리고 도망칠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들이 지금도 일어납니다. 내가 옳다 그래놓고, 그 다음에 옳은 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아주 비 신앙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아주 야비하게 봅니다. 목표가 고상하다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아주 야비하고 불의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옳은데 내가 그것을 관철할 힘이 없고, 옳지 않은 저 사람은 옳지 않은 것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이야기하기를, 나라가 이미 벌써 다 망하게 되었는데 갈대아 사람들하고 내통하면서 우리로 말하자면 일제시대 때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님이 그 무질서해 보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를 차근차근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때를 통해서 하나님이 진짜 당신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골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제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나서 막 소리치듯이 신앙의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종류의 사랑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헤치는 수많은 대적자들을 만났지만 한번도 이런식으로 대적자들을 처리해야 할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런 모본을 보여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래참고, 그들이 비 진리를 따르고 심지어는 아주 타락한 인간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죄를 미워하셨지만 그들을 향해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길을 택할 수 밖에 없고 미련한 길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할 수 있는데도 말하지 말아야 하는 때도 있고, 들을 수 있는데도 듣지 말고 참아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신앙이 이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일을 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인가 중대한 일을 하고자 할 때, 꼭 될 것 같은데 그 일이 안될 때 ‘아,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시지 않는가’ 라고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지난번에 실패 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시는가’ 생각해야 될 텐데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혈과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이제 베스도가 제안을 냅니다. ‘나와 함께 가이사랴로 내려가자. 그리고, 거기에서 재판을 할테니 거기에서 일단 고소할 것이 있으면 거기에서 고소를 해라’ 거기서 그들에게 제안을 내는 슬기를 베스도가 보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이 세상에 살면서 오늘 여기에 나오는 유대인과 같이 하고 싶은 그 사악하고 무자비한 마음이 우리 안에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 사물들의 질서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특히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바와 같지 않을 때, 그 때 깊이 고통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그런 방식으로 다루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잘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는 것을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에게 두 모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래 참으시는 모본, 바울이 사울이었을 시절에 이런 짓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서 그 오래 참음의 모본을 보고 배우고, 자신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슬기를 배웠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 하고 똑같던 사람 바울이 사울로 그대로 있었더라면 권모술수에 있어서 이 사람들만 못했겠습니까. 혈기에 있어서 이 사람들만 못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그 모든 혈기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를 미워하나 사랑하였습니다. 바울처럼 자기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사랑하고, 핍박을 자신이 받을지라도 오래참고, 그렇게 하면서 이 고난의 때를 이기며 주님의 형상을 자신의 온 몸과 인격으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에서, 이 두려움에서 많은 범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요새 제가 며칠동안 신앙에 있어서 용기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주님의 방법과 뜻대로 살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주님의 방법과 뜻대로 행하다가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외톨이가 되면 그 길이 정말 옳다면 그리고 다른 길이 없다면 내가 그렇게 하리라.’ 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를 발휘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가리켜서 용덕이라고 합니다. 용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즉 애덕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용덕이 없으면 애덕이 일관성이 없고, 수시로 변질합니다. 한 여자가 남자를 향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수시로 변절을 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존재의 가치는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사랑에는 애덕과 함께 용덕이 필요한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이르면 이르리라. 그리고 내가 고통을 받으면 받으리라.’ 이러한 용덕이 필요합니다. 이 사람들처럼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