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 1:80)
녹취자 : 오희열
저는 성경을 읽어도 누구를 딱히 본받고 싶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교만해서가 아니라, 한 때는 사도바울을 좋아했는데 집사람을 만났더니 다윗이 너무 좋다고 하니까 다윗이 좋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바울도 좋지만 바나바도 참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윗도 훌륭하지만 요나단에게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하면서 지조도 없이 왔다 갔다 하다가 1991년도쯤 되었을 때니까 - 28년 전의 이야기지만- 성경을 읽다가 내 마음에 꽂힌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끝나고 신약성경이 세례요한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은 아주 미묘한 느낌을 우리에게 줍니다. 아무튼 이 세례요한은 나이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정상적으로 출산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태어났습니다. 성경은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제사장 가문이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이 아들을 애지중지했을 것이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 아이는 광야로 보내졌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돌봄을 받고 교육을 받으며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는 날까지 훈련되어졌습니다.
본문 80절에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등장해서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세례요한이 누군지를 알아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각기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주는 바에 있어서 결국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 아주 크게 쓰임을 받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지만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 앞에 쓰임은 받지만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크게 쓰임 받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났으니까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큰 이바지가 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긴장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용하시기 전에 충분히 우리를 준비시키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사용하십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준비되지 않은 헌신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첫째로 육체적인 준비를 들고 싶습니다. 세례요한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아주 가냘픈 체구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을 입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아이돌 같은 체격으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설교하는 모습을 그려낼 수는 없습니다. 건장한 체구에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우렁찬 소리로 외치는 세례요한의 음성을 듣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기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육체적으로 잘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장이라는 것은 그냥 나이를 먹어서 체구가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적합하도록 철저하게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여 그렇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서 기라성 같은 발자취를 남겼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50대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칼빈도 50대에 죽었고, 조나단 에드워즈도 50세에 죽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그렇게 죽은 이유는 그들에게 밀려오는 어마어마한 일의 양 때문이었습니다. 몸을 돌보지 않는 철저한 헌신 속에서 사람들은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고 사는 것은 주님의 손에 달렸지만 하나님의 거칠고 험한 일을 감당해도 넉넉히 일생동안 감당할 수 있는 몸으로 지금 여러분의 몸을 철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젊은 나이에 운동을 해야 합니다. 저도 시간이 아까워서 거의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 너무너무 후회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나이라면 운동을 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온 몸을 사용하는 운동을 하고 아직 젊으니까 격렬한 운동을 하십시오. 격투기나 레슬링 같은 격렬한 운동을 하면서 마음 안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평범한 사람 셋이 동시에 공격해도 모두 한 방에 제압할 정도의 육체적인 힘을 기르면서 여러분 자신이 적어도 건강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방해되지 않을 건강한 몸을 준비하는 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부지런히 활동하고 건장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육체적인 준비는 여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순결한 육체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 육체의 순결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많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인 순결입니다. 육체의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이런 문제에 걸려 넘어져서 신학교를 등지고 떠나가는 수많은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걸릴 수 있는 덧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세속적이고 욕망적인 문화로부터 적절한 거리감을 두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 위해 소중하게 구별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육체와 순결을 동시에 지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학문적인 준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일은 결국 진리를 전하기 위해 나타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던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싸울 것은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 일은 결국 진리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고도의 공부를 필요로 합니다.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공부의 수준을 아주 낮게 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날 기회를 주어도 그냥 그가 말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들은 너무나 평범하고 평신도들도 할 수 있는 일상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고 새로운 진리의 세계를 보여줄 능력이 모자랍니다. 그것은 결국 젊은 나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젊은 날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숨을 거두는 날까지 기도가 필요한 모든 날 동안에 책상 앞에 앉아서 학문을 공부할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몇 번을 자살하고 싶었지만 영어가 너무 재밌어서 자살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하루에 50개씩 단어를 외웠습니다. 이러한 열심은 신학교를 입학하고도 계속 되었습니다. 50개를 외우면 그 다음날 아침에는 25개쯤 생각이 납니다. 다시 외우고 외우기를 반복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뇌의 기능이 아주 최적화 되어 있는 가장 고성능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이 흘러서 남자 나이는 25세, 여자 나이가 23세에 이르게 되면 모든 몸이 퇴화되기 시작하고 머리도 퇴화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 세월이 더 많이 지나고 나면 밤에 열 개를 외우고 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두 개도 생각나지 않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나중에 500의 힘을 들여도 습득할 수 없는 지식을 지금은 200의 힘만 들여도 얻을 수 있는 때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독하게 마음을 먹고 하루에 네 시간씩 2년 정도만 하시면 웬만한 원서는 모두 읽어낼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저도 그렇게 영어를 좋아했는데 거의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 뉴욕타임지를 펼치니까 그냥 줄줄줄 읽혔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몇 개 정도 나올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저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이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들인데 그까짓 거 안 되겠습니까? 옛날에는 영어를 겨우 읽는 일에 헌신했지만 이제는 국제화 사회가 되어서 다니면서 그 영어를 모두 글로 쓰고 말할 수 있도록 능력을 향상 시킬 때, 여러분에게 나타나는 이스라엘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전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공부입니다. 학문의 모든 벽들은 언어에 의해서 세워져있기 때문에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면 할수록 전혀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지식의 세계가 열립니다. 그렇게 지금은 열심히 공부해야할 때입니다.
어학만이 아니라 지금 이맘때는 4학년 학생들에게는 늦은 감이 있지만, 1,2 학년 학생들은 소설도 열심히 읽고 문학전집도 읽고 요즘 나오는 소설 속에 들어있는 비판적인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읽어내면서 그 비판을 비판하면서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문학, 역사, 철학, 등등의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특히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법학이 매우 큰 도움이 되니까 법학도 공부하고,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학문에 접근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예전에 서울대학교에 가면 매월 1월에 80시간씩 공부해서 고전 라틴어, 고전 희랍어를 읽게 만들어주는 클래스가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곳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미친 듯이 공부해서 성경을 원전으로 읽고 영어의 벽을 넘나들면서 지식의 세계를 찾아내고 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사고들이 튼튼히 갖춰져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누구의 말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독자적으로 성경을 앞에 놓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성숙한 지성을 갖춰야 합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 때는 1년에 한두 번쯤은 응급실로 실려 갈 정도로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는 시간에 여러분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공부보다 훨씬 가치가 적은 일들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치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이 말을 하면 꼭 저에게 물어봅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공부하셨습니까?”, 그게 한국인의 심리입니다. 그렇습니다. 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제가 두 번 쓰러졌습니다. 조교로 있을 때 아무도 없는 교수님 방에서 말입니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공부했습니다. 그것을 우려먹으며 지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하셔야 합니다. 공부를 하기 싫으면 직업을 바꾸십시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택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사는 길이고 미래에 한국 교회의 사람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공부를 잘한 모든 사람들이 진실한 목회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지 않고도 진실한 목회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공부를 안 하면 안 할수록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치장해야 하고 자신을 부풀려야 하고 겸손을 배우기보다는 교만을 배우게 됩니다. 공부하셔야 합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세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세 번째는 인격적인 준비입니다. 지성적인 준비, 그 다음으로 인격적인 준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며 사는데 그림으로 전하는 것과 글로 전하는 임무, 이 두 가지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글로 전하는 것은, 여기에 화면이 있는데 글씨만 계속 나옵니다. 그러면 내용은 알겠지만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화면은 나옵니다. 그런데 대사가 나오지 않고 사람들만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보이는 동영상이 나오고 아래에 자막까지 나온다면 그야말로 최고일 것입니다. 지루하게 읽기만 하거나 보기만 하는 것보다는 화면에 음향까지 다 전달된다면 훨씬 호소력이 있고 우리의 공감능력은 100% 더 증가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면서 한 교회에서 몇 달 동안 목회를 하다가 떠날 거라면 말만 잘하면 될 수도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속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교회에서 10년, 20년, 30년, 40년을 목회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끊임없이 새로운 설교를 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교인들이 여러분의 설교를 한 1년이나 2년 듣고 나면 “아, 그 소리가 그 소리다.” 하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비교할 수 없이 열심히 공부해서, 쉽게 말해서 진리에 관한한 설교를 듣는 성도들과 여러분의 사이가 범접할 수 없는 격차가 나는 사람이 되어야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몸부림치며 공부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의 삶과 인격을 보게 됩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은 부모 앞에서 부모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교육을 받지만 그 아이가 사춘기가 지나고 커지게 되면 부모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교육을 받습니다. 부모의 인격과 생활을 보면서 그 교훈이 정말 일치하는 지를 보면서 아이들은 사람다운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릴 필요는 없지만 할 수 있는 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그것을 자기 속에 체득하면서, 자신도 그 진리의 사람으로 되어가는 기쁨이 없다면 목회하는 즐거움만으로는 일생을 버틸 수 없습니다. 이 길은 꽃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가시밭길이고 많은 고통과 괴로운 순간들이 기쁘고 즐거운 시간들보다 훨씬 많이 기다리고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그런 가운데 여러분은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인격적인 성숙의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해주신 이유는 아들이신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을 만드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같은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살게 만들었던 그 어떤 영혼과 정신, 그것을 본받게 하는 것이 형상입니다.
제빵사가 밀가루 덩어리로 각종 빵을 만듭니다. 토스트부터 시작해서 애플파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빵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반죽이 저절로 그 빵이 된 것이 아니라 제빵사의 기술이 있었고 기술 이전에 그의 머릿속에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런 빵을 만들 수 있는 관념이 형상입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서 목회를 한다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지금 여러분이 준비를 해서 한 10년 후쯤 목사가 되어 뭔가 말씀을 전할 때가 되었다고 해도 담임목사가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저는 서른아홉 살에 개척했지만 대부분 보면, 교회를 개척하고 뭐하고 하다보면 4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에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목회를 시작해서 기껏해야 20년에서 30년을 목회한다고 보면 결국에는 타의에 의해서라도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은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속히 지나갑니다. 그때 만약 일이 전부이고 목회사역이 전부라면 그 사람은 인생의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이 없다면, 그가 자신은 부족하지만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며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남이 모르는 기쁨이 없다면 그가 어떻게 그 일생의 마지막을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보십시오. 제가 설교를 하는데 저를 보지 않는 것은 저를 향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그러시려면 조용히 나가셔도 됩니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바위의 모습이 너무 인자한 어떤 사람처럼 생겨서 마을에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언젠가 저렇게 훌륭한 어른 같은 사람이 우리 마을에서 태어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저 큰 바위 얼굴의 사람이다!” 돈을 많이 번 사람도 나타났고 장군으로 출세한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자세히 본 사람들은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큰 바위 얼굴과는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그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게 여기면서 그 마을에서 평범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동안 여러 명의 큰 바위 얼굴의 후보자가 나타났지만 그 사람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어느덧 이 소년은 늙어서 인생의 황혼이 깃들게 되었고 이제는 인생의 끝자락을 밟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지는 저녁노을의 햇빛을 받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본 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 좀 봐! 우리가 그렇게 찾던 큰 바위 얼굴의 사람을 이 사람이 꼭 닮았어!”합니다. 그렇게 닮게 만들었던 힘은, 그가 가진 돈이나 권력이나 출세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큰 바위 얼굴을 흠모하고 그렇게 인자한 사람이 되고 싶고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끼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자신을 이상적인 그 사람에게 맞추며 끊임없이 사색하며 살다보니까 그 사람을 닮아간 것입니다. 그 큰 바위 얼굴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마지막에 여러분이 닮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을 존경하고 그분을 흠모하고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느끼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이유가 여러분이 오늘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준비입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육체적 준비, 지성적 준비, 인격적 준비를 했습니다. 하나만 하고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까, 두 개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좋습니다.
네 번째는 정서적인 준비입니다. 이 정서적인 준비는 열정입니다. 그 열정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는 열정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형제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좋은 자매를 만나서 깊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합니다. 이제 만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어? 잘 가.” 하고 말할 수 있다면 1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를 가는데?”, “꼭 가야하는 거야?”, “나를 이렇게 두고 가면 안 되지!”, “안 가면 안 돼?”하면서 꼬치꼬치 캐묻고 꼭 갈 수밖에 없는 이유라면, “나도 내 인생의 계획을 수정하겠어. 나도 같이 갈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전혀 공감이 안 되는 분위기인데,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마음의 공감이 없이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같이 있는 시간이 즐겁고 쾌락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유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데 그냥 육체적으로 좋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고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떠들 수 있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사귀는 것입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 의하면 그것은 자기만족적 사랑입니다. 또 유용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박애의 마음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아주 훌륭하게 쓰시기 위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거부하는 기독교 신앙을 여러분이 갖게 만드시고 좋은 부모님을 만나게 하셔서 열렬히 기도하게 하시고 이 학교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잘 준비시키셔서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진리를 전파하고, 무가치한 것을 찾아 헤매는 사회에서 가치 있는 것을 전하고, 사람답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참 인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나눠야 합니다. 공감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무슨 이유로 여기에 보내셨든지 나는 필요 없다. 나는 게임이나 하면서 즐기고 친구들과 술이나 먹으면서 다니고 육체적인 쾌락에 빠져서 다니고 가끔 학점이나 받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그렇게 때우면서 졸업하겠다. 졸업을 하고 나서 돈 많이 주는 일자리가 나오면 목회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가서 돈을 벌겠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 왜 와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여기에 다녀야 할 필연성을 가지고 여기에 있습니까? 아니면 이 대학 저 대학 지망하다가 안 되서 할 수 없이 수준에 맞춰서 여기에 들어온 것입니까? 이 과 저 과 집어넣다가 안 되서 신학과에 들어온 것이라면 지금 빨리 정리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으십시오. 이 세상에는 재밌게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수많은 직업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달픈 것을 따지자면 이 길만큼 고달픈 길이 없습니다. 저는 제 아들이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끝까지 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때 내 마음은, “내가 끝까지 말려서 말을 들으면 소명이 아닐 것이다.” 하고 끝까지 말렸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적용이 돼야 합니다. 신학생이 우르르 몰려온다면 지역에 있는 교회에서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총신대 신학과 학생 열다섯 명이 단체로 열린교회에 등록했다고 하면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왜 그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까?
미국의 어느 교회에 갔더니 신학생의 특징을 이야기해줬습니다. complaining, 불평이 많고, critical, 비판적이고, unfruitful,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신학생들이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요즘은 그렇게 오는 사람도 없지만 예전에는 교회에 신학생이 많이 모이면 매우 불길한 징조라고 했습니다. 그 불길한 징조를 우리 교회가 경험했습니다. 여기 이수사거리에 우리 교회가 있었는데 80명의 신학생이 나왔습니다. 한때 총신 분교였습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그리고 이사 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치열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대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 원서 한 자를 못 읽어서 쩔쩔매고 사전이나 뒤져서 겨우 영어점수를 받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학문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무신론에 마음이 불타는 사람들입니다.
2014년에 세상을 떠난 안토니오 플루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무신론에 관한 책을 서른한 권을 써서 전 세계의 무신론을 지배하다가 마지막에는 신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신론을 포기하고 죽었습니다. 그분이 예수를 믿은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의 무신론 학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신이 없다는 사람들도 그렇게 피를 토하는 열정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설복시켜서 하나님을 믿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을 위해서는 열정이 그것보다 능가해야 합니다. 불이 없으면 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영혼이 병든 것입니다. 기도원에 올라가보셨습니까? 한 일주일 쯤 금식해 보셨습니까? 어떤 기도제목이 있어서 그 기도제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여기서 하나님 나의 숨을 거두어주십시오!” 하며 매달린 적이 있습니까? 왜 교회에 가면 전도하지 않습니까? 왜 교회에 가면 가장 뺀질거리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신학생입니까? 왜 교회에 가면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가장 비판적인 사람들이 신학생입니까? 말만 많고 봉사하지 않습니다. 장학금이나 좀 주려나,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유급전도사로 써주지 않으려나, 하고 기웃거리며 다니는데 그게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벌써 하나님 앞에 깊이 붙잡혀서 쓰임 받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어렸을 때 자라는 모습 자체가 달라야 합니다. 뷔페에 가면 무순이 있습니다. 무와는 전혀 모습이 다른데 한 가닥만 입에 넣고 앞니로 씹어보면 거기서 무 맛이 난다는 사실에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여러분이 비록 목사는 아니고 아직 전도사도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여러분을 씹을 때 목사의 맛이 나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 세상의 사조에 휩싸여서 정신 못 차리고 남을 인도하기는커녕 자기가 갈팡질팡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목회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학교에서 10년을 넘게 가르쳤지만 제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여러분의 눈동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시간에 잠을 잡니까? 강의를 안 듣고 허공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묻고 싶습니다. 무슨 강의가 그대들의 마음을 뛰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말하면 잠자던 영혼이 깨어나서 그 정서가 뜨겁게 끓어오르게 만들어 줄 지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세상 것 아닙니까? 예쁜 여자? 아주 값진 소비? 화려한 여행? 신나는 놀이? 이런 것 아닙니까? 그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열정을 품은 사람을 보기가 참 힘들어졌습니다. 그런 열정을 이 안에서 준비해야 합니다. 제가 권하고 싶은 것은,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를 읽으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지를 알게 되고 사역자에 대한 높은 이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영적인 준비입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세례요한은 빈들에서 교육을 받았고, 성경에 “아이”라고 나오는데, 이 “아이”는 “파이디온”입니다. “파이디온”은 4~5세 정도 된 어린이들을 가리키지만 아마 청년이라는 말이 들어가려면 열세 살 이상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파이디온”이라는 희랍어 단어가 항상 어린이를 가리키는 단어로만 쓰이지 않고 복음서에 보면 baby라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세례요한이 빈들에 갔을 때 어린이가 되어서 간 것이 아니라 갓난아기 때 부모와 헤어지고, 혹은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버지가 “여기에서는 배울 것이 별로 없으니 어려서부터 이 아이는 거룩한 사람들에게 교육을 시켜야겠다.” 하고 보냈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그는 빈들에서 살게 되었고 그는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숙해오면서 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영적인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빈들”은 희랍어로 “에레모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히브리어 동치어는 “미드바르”입니다. “미드바르”는 “광야”입니다. 왜 도심이 아니고 광야였겠습니까? 광야는 그렇게 기분 좋은 곳이 아닙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밤이 되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모닥불을 피워야 하는 곳이었고 짐승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외롭고 힘든 벌판에 이 어린 아이를 세워서 점점 더 성숙해 가도록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그런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교회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죄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습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사과 씨앗을 하나 심는다고 해서 그것이 몇 달 있다가 사과 열매를 맺기를 기대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습니까? 싹이 나고 잎이 퍼져서 줄기가 나오고 가지가 뻗고 세월이 흘러가고 자라서 나무가 되고 나무가 되어서도 생산능력이 있을 정도까지 성장해야만 사과가 거기에 맺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목사가 되고 검정 가운만 둘러쓰고 나면 갑자기 새 사람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레티머가 말할 바와 같이 중심이 변하지 않으면 목사의 가운은 속이는 검은 옷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뭘 뒤집어써도 없는 것이고 인격이 안 되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갖다 놓아도 인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영적인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그를 어디에 갖다 놓아도 그는 준비가 안 된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정이 없다면 그는 열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있는 건 있는 것이고 없는 건 없는 것입니다. 있는 것도 결국은 그 결과를 드러내고 없는 것도 결국은 그 결과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면 영적인 준비는 무엇입니까? “광야”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 밖에 바라볼 수가 없는,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더 이상 바라볼 아무 희망도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이 어린 세례요한의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선포할 때 그 말씀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 제사장들까지도 회개하게 만들 정도의 놀라운 능력을 갖게 하신 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몸부림과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시는 놀라운 일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 일을 위해서 그가 부름을 받기 전에 하나님이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임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한 시대에 외쳐야 할 메시지를 주신 것이고 그것은 지극히 큰 성령의 능력과 함께 임하는 것입니다. 3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빈들에서 임하니라” 라는 패턴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는 것과 똑같은 패턴입니다. “말씀이 임하였다”, “하이야 데바르 엘로힘”이라는 관용구처럼 써있는 구절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단지 의사를 소통한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향해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그 음성을 그에게 주시고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똑같이 되게 만드셔서 하나님과 혼연일치된 정신으로 그 말씀을 외치게 해 주시는 것이 바로 말씀이 임하신 사건입니다. 어떤 선지자도 이것이 없이는 진정한 선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강력한 말씀의 체험을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 인간에 대한 생각, 세계에 대한 생각, 역사에 대한 생각, 그리고 자기 앞에 펼쳐진 모든 사물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지적이고, 영적이고, 정신적인 대변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삶의 변혁을 동반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시대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렇게 잔인한 정도로 광야에서 준비하느라 세월을 보냈는데 그가 마르고 닳도록 사역했습니까? 아닙니다. 기간으로 보면 아주 짧은 몇 년에 불과합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설교 몇 편을 남겨놓고 죽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실 정도로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었고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그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앞길에 사람들의 마음을 평탄케 하여 그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 외치시는 선포를 통해서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구약의 능력이 많았던 엘리야에 비교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인생에 대해서 너무 복잡한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불꽃처럼 하나님 앞에서 쓰고 자신은 사라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군대에서 조명탄을 “팡!”하고 쏘면 가느다란 실낱같은 줄기를 그리면서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화려하게 폭발합니다. 자신을 태우면서 낙하산에 매달린 채 땅에 떨어집니다. 그렇게 다 비추고 자기는 이름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조명탄 같은 존재가 목회자입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 자신을 유명하게 여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총신에 비석이 세워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기 이름 석 자가 거기에 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기념하고 매년 모여서 추모회를 갖는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런 것에 연연하고 애착하지 않습니다. 나는 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렇게 조명탄처럼 밝은 빛을 발합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미처 몰랐을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게 만들어주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다면 그것으로 내 인생은 끝났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도 좋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괜찮습니다. 굳이 나를 사랑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 “나는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한 순간을 불꽃처럼 태우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이 학교 신대원에 들어와서 다니며 공부할 때 서른 살이었습니다. 3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마치 2~3주가 지나간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똑같은 것을 겪게 될 것입니다. 잠깐 동안이면 지나갑니다. 지금 여러분은 30년 후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게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교회 저 교회 밀려다니다가 마지막 교회에서도 빨리 나가주기를 바라는 목회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하고 싶다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사십시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아주 빛나는 조명탄 같은 사람으로 쓰임 받고 싶다면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치열하게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