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북콘서트
녹취자 : 장미연
<82년생 김지영>이 2016년에 책이 나왔는데요. 제가 손에 넣고 읽은 건 2019년 이었습니다. 가을이었는데 너무 읽을 책이 많으니까 사실 손이 잘 안 가는데 이 책이 나오는 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82년생 김지영’ 그러고 너무 재미있어서 한 번에 쉬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
읽을 때 첫 번째 느낌은 화가 났습니다. 왜 화가 났냐면 ‘어떻게 이렇게 여자를 얕잡아 볼 수 있을까?’ 하는 개념에서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만나고 알고 있는 대다수의 여성은 이렇지 않은 여성들은 훨씬 더 많이 보는데 좀 심하게 생각해서 이것은 여자에 대한 일종의 가학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정도는 아닌데 왜 여자를 이렇게 보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공감했던 것은 우리들이 사람이 죽고, 전쟁이 나고, 테러가 발생하고, 대형 사고가 나고, 세월호나 삼풍 사고 같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하는 그런 것만 우리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아무도 느끼지 못하게 이루어지는 차별과 편견, 그리고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고용인과 피고용인, 심지어 여기서 강조하는 남성과 여성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 때문에 엄청나게 차별을 받고 있는 그 현실이 느껴지면서 많은 공감을 하게 됐고, ‘우리가 얼마나 의식 없이 대충 사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는 영화 같이 만들었더군요. 다 아시다시피 해피엔딩이고 김지영씨가 작가로서 대성할 것 같이 새 출발하는 그런 장면이잖아요. 보고 오는데 ‘이건 또 뭐지?’ 그랬습니다. ‘책에선 이렇게 놓고 영화에선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할까?’ 작품이 잘됐다 혹은 안됐다 얘기하기 전에 조금 짜증이 났던 게 저런 식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여성이 백 명 중의 몇 명이나 될까, 였습니다. 여러분, 가사가 짜증스럽다고 작가로 데뷔하시겠습니까? 제가 얼마나 위협을 느끼겠습니까? 육아의 어려움을 느끼는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된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저도 굉장히 힘들게 살아오면서 작가가 됐는데 저렇게 쉽게 작가가 되다니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불편한 느낌이 들었고요.
세 스테이지가 지났잖아요. 첫 번째는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두 번째는 2019년에 읽었을 때, 세 번째는 영화로,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여기 오기 직전에 제가 다시 한 번 또 읽고 나서 생각이 계속 발전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도달한 결론은 72년생 박지영이 82년생 김지영을 바라보면 우습겠다 생각했습니다. 저것도 고민이라고 하나, 했을 겁니다. 그 고민보다 두 배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신랑을 착한 신랑을 만났잖아요. 남하고는 공유하지 않은 공유를 만났잖아요. 누가 옆에서 그래요. “난 김지영보다 두 배 고생해도 저런 남편 만나면 가뿐히 이기겠다.”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사실 핵심에서 어긋난 이야기지요. 어쨌든. 72년생이 82년생을 볼 때는 82년생 때 겪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없거든요. 민주화도 81년도 때쯤 마무리되고 새 대통령 뽑히고 정치가 안정될 때고, 단 하나 1997년도에 IMF사태 때 아빠 사업이 망하고 그랬으니까 좀 힘들었겠지요. 그 다음에 최근에 금융사건 좀 있었고. 뭐 그 정도 아닐까요? 72년생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72년생은 태어나면서 북한과의 끊임없는 위협도 있고, 72년도에 아직 국민소득 천 불이 안 될 때였었고, (74년도에 천 불이 됐거든요) 말할 수 없는 가난한 시대 속에서 살았고, 유신부터 시작을 해서 대통령의 죽음에 긴 과정까지 다 봐야했던 사람이잖아요. 62년생 김지영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또 우스운 겁니다. 쟤네들은 장난하고 있는 거지요. 혁명의 시대를 지나면서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62년도에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거든요. 아주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죽을 때까지 안 잊어버립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한지 그 참상을 봤습니다. 돌아다니는 사진은 그렇게 실감을 못 줍니다. 완전히 폐허고, 2층 이상 올라간 건물들은 관공서 뿐 이었습니다. 집들이 몇 채 있긴 했는데 특수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요. 아래 있는 집들은 집이라기보다는 판자와 판자를 이어서 간신히 매달려 있는 그런 종류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소달구지가 콧김을 뿜으면서 연탄을 실고 짐을 장작을 실고 다니는 걸로 시작을 하고 차 한 대가 나타나면 온 동네 아이들이 뛰어와서 자동차 뒤에서 나오는 휘발유 매연냄새 좋다고 따라 붙습니다. 그게 62년생입니다. 52년생이 보기엔 어떻겠습니까? 52년생은 전쟁 통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62년생은 그래도 지어진 것을 봤지만 52년생은 그냥 죽어가는 시체들을 보면서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72년생이 보기에도 82년생은 꿀 빨아먹던 시대 정도로 밖에 안 보이거든요.
그런데 영화와 책을 보고 그 후에 김지영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하고, 또 기회 있으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도달하게 된 마지막 결론이 뭐냐 하면 어떤 한 인간의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평균화 시켜서 사회적인 측정 단위를 가지고 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게 속한 아픔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 사람만의 측정 자아를 가지고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살고 있다고 객관적인 데이터가 나와도 그 사람이 힘들다면 힘들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 자리에 있으면 춤을 추고 다니겠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상상이고 가정입니다. 김지영은 그렇게 이해심도 많고 얼굴도 잘생긴 남자랑 살고 나는 안 그런 남자하고 살고 있습니다. 또 우리 남편도 정유미(김지영 역 분) 같은 영화배우보다 조금은 덜 예쁜 나와 살고 성질도 조금 더 못된 나와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거니까 우리들이 그걸 이해해줘야 된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로 아내하고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사모들을 데리고 저의 추천으로 이 영화를 보러 갔다고 합니다. “사모님 저게 무슨 고생이에요. 호강을 해서 지금 병이 난거지. 아니 울 일이 뭐가 있어요?” 다들 그렇게 공감을 했대요. 우리의 삶은 저 이상인데.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목회가 잘 안 되는 거라고 말입니다.
조남주 작가도 맨 처음 쓰면서 이야기하잖아요. 김지영에 대해서 묘사를 하면서 자기도 써내려가면서 자기도 너무 안쓰러운 겁니다. 왜 이렇게 밖에 생각 못하고, 왜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힘들지 않을 일을 왜 힘들게 생각하면서 살까 했답니다. 그러면서 너무너무 안쓰럽고 안타까웠는데 김지영은 결국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보았고,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성장했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물건이 부러지거나 휘는 강도는 반드시 힘에만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물건은 힘을 엄청 줘야지 부러집니다. 두 개의 물건을 대조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쇠파이프입니다. 우리 중에 그걸 휘게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회자는 아마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휘게 할 능력이 없지요. 그러나 만약에 가느다란 구리철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다 휘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절대적인 고난의 양, 사회적인 구조 이런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심성이 그걸 그 정도밖에 이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전에는 아주 그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 취급 받았는데 지금은 만나보면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사람들이 양산되는가와 같은 문제를 이 자리에게 사회분석 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것은 또 별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없는 수많은 김지영들이 있는데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그 김지영을 어떻게 해야 할까? “네가 살아온 그 삶은 아무것도 아니야. 얘기할까요? 네가 그깟 일로 우울증이 걸렸다면 나는 아마 실어증이 걸렸을 거다. 네가 그 정도 가지고 낙심하고 좌절하지만 너보다 10배는 더 당학도 남편도 너를 버리고 애들만 덩그러니 남아서 가서 폐지라도 줍지 않으면 먹고 살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네 고민은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그렇게 돌을 던져야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냥 김지영이라는 한 특수한 인간의 한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사회 전체의 김지영이라는 보편적인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가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에 이 책이 의도한 바이기도 하지만 상기시키려고 한 것은 김지영이가 약하다든지 아니면 어머니에 비해서 연약한 존재라든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다섯 번째 드리는 이야기인데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입니다. 특히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성적인 차별. 이것은 폐미니스트들에게 아주 관심을 받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영화관에 가서 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계속 멀뚱멀뚱 그 영화를 봅니다. 그런데 감동을 안 받은 적은 없고 눈물도 흘렸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는 대목은 김지영씨가 우는 대목에서 우는 게 아니라 그 엄마. 엄마의 걱정 하지마라는 대사입니다. “지영아. 내가 다 해줄게. 내가 다 때려 치고 너 옆으로 가서 돌봐줄게.” 나만이 아니라 82년생 아래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대부분 감동 받은 장면이 그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다 해줄게.” 어마어마한 힘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작가의 의도는 아니잖아요. 거기에서 눈물 흘리게 하고 싶은. 그건 아니거든요.
시선을 돌려보면 강하게 존재하는 차별입니다. 대표적인 게 육아와 관련된 것입니다. 회사에서 임신한 사람 원할 리가 없지요. 예를 들면 아이를 가진 사람도 원 할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상으로 내가 A라는 회사에서 근무했는데 그 회사의 사정으로 육아휴가를 못 가고 아이를 낳은 상태에서 다음 직장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직장은 그 아이 낳은걸 보지도 못했는데 육아휴직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입사를 했는데 금방 육아휴직을 가? 우리 회사 다니면서 낳은 것도 아닌 아이를?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여러분들이 사용자라면 아마 이직을 해야 하나, 라는 느낌을 받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결혼의 계획이 있냐고 물어보는 거지요. 유도심문이지요. 없다고 하면 아주 좋아합니다. 더군다나 제가 결혼을 안 하려고 합니다. 회사에서 너무 좋아합니다. 지금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한 5년 동안은 생각이 없습니다. 각서 쓰라고 하진 않지만 일단 점수를 약간 더 받는 거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이런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아주 눈부시게 실력이 있고 잘 나가던 사람들도 사실은 육아라는 점에서 자기 인생의 발전이 멈추잖아요. 뒤에도 보면 의사인데 부인도 아주 잘 나가는 의사였는데 결국 아이 문제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병원을 하다가 그 다음에 페이 닥터를 하다가, 말하자면 파트타임 닥터를 하다가 그것도 때려치우고 아이만을 위해서 홀로 육아를 담당해야하는, 그렇게 공부도 많이 하고 사회적인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의사들도 그러는데 하물며 그만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떻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볼 때에 김지영이라고 하는 사람은 오늘날 우리들 속에서, 우리들과 함께 교회 생활을 하고, 목회를 받는 사람들 중에서 구역장들이 대단히 이해가 잘 안 간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왜 그러지? 착한 남편도 있고 돈도 많진 않지만 있을 만큼 있고, 건강하고 배우고 다 가질 것 다 가지고 있는데, 얼마나 불행한 자매들이 많은데 어쩜 저렇게 이상한 이야기나 하고 세상 뒤집어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나 하고, 왜 저러고 살까?’ 생각합니다. 그것을 그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서 이해해주는 것이 우리의 목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될 대목은 이것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을 전통적으로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여성의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여성의 일, 남성의 일 식으로 나뉘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하는 것은 여자가 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내자’라고 부릅니다. 안쪽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자기는 ‘외자’입니다. ‘자기는 바깥일을 다 관장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의 몸을 빌어서 아이를 생산하지만 그것은 여자만의 일이 아니라 좁게는 부부의 일이고. 가족의 일이고, 국가의 일이고, 그 다음에 사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 어떠하든지 간에 좁게는 부부가, 가족이, 국가가 다 같이 동참을 해서 그 일이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한 몸의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훨씬 신비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무에서 유를 태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생명의 보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원래 없는 사람이었잖아요. 정자와 난자가 만났다고 하는데 정자, 난자가 원래 있었습니까? 아기일 때는 없었잖아요. 어느 시점에 생기잖아요. 그리고 만나잖아요. 거기서 사람이 태어나는데 이건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입니다. 그렇게 생산해 냄으로써 이 인류 사회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게 되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특히 강조되고 있었던 육아의 몫을 아내가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들이 좀 벗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사에도 나왔지만 남자가 자꾸 도와주겠다고 하잖아요. 이것이 김지영씨 시점에서는 자꾸 짜증이 나는 겁니다. 이게 나만의 일이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일처럼 도와준다고 얘기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같이 해야 하는 일이지요. 아이를 낳는 그 순간, 남성들도 아내와 함께 이 아이를 양육할 책임을 져야하고 국가도 져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생각을 훨씬 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저항하는 생각이 필요하고, 이런 현실들과 혁명적인 방법으로 싸울 수야 없겠지만 자꾸 인식을 개선해 나가면서 사회를 고쳐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저희 교회 직원들도 교역자는 물론이고, 육아휴직을 줍니다.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결혼할 때가 되면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사직을 했고, 또 사직을 하라고 권유한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본인들이 사직을 했지요. 지금은 육아휴직을 갑니다. 제도가 정착되었습니다. 사실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지요. 왜냐하면 일을 하다가 아주 자리를 비워준 것도 아니고 1년을 놓고 가니까 (누군가가 그 짐을 함께 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많이 바꾸어서 이 사회가 있으니까 그 직원이 있고, (그 직원이 있으니까 사회과 있다고), 그리고 그 직원이 가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기에 와서 근무하는 것이고, 또 봉사하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얻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종국에는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조금씩, 조금씩 이런 생각과 시스템이 정착이 되면서 그게 당연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런 일들이 짜증나는 일이 되지 않을 때 가정과 가정이 바르게 서고, 인류사회가 지속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요소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고쳐나가고, 때론 필요하면 싸우면서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야 합니다. 고려시대까지는 안 그랬는데 조선시대 때, 특히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존여비사상이 강화되어 왔는데 이런 배경에서 오는 사상들, 말하자면 여자를 무시하고, 심지어 가정에 있어서도 여자들을 육아하는 기계. 혹은 육아를 담당하는 피고용인처럼 간주하는 사회의 모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들을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진 인간으로 보아야한다는 성경적인 가르침에도 심각하게 어긋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고쳐 나가는 그런 삶의 모습을 우리들이 찾아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Q. 1. 일반사적인 <82년생 김지영>을 담임 목사님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그리고 이 내용을 주제로 북 콘서트를 기획하신 동기가 궁금합니다.
A. 저 질문에 대한 답을 거의 다 이야기한 것 같고요. 읽었을 때에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여성을 하찮게 보고 이것을 쓸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다 읽고 후에 읽고 나서 2-3달 더 생각하고 영화도 보면서 느낀 것은 확실히 이 작가가 젊다는 생각, 젊으니까 사실은 자기가 뼈저리게 경험했고, 그것을 따끈따끈하게 공감하는 가운데 이걸 풀어내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함께 북 콘서트를 하자고 해야 될 필요를 느낀 이유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을 보면서 여성만 일방적으로 끊임없는 희생을 강요를 당하는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좁게는 남편이 이해한다고 했지만, 사랑한다고 했지만 핵심까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생각할지도 모르잖습니까? 더구나 아내를 사랑해서 그렇게 이해해준다고 했지만 그것은 김지영씨에 국한된 이야기지 같은 형편의 한국에 있는 모든 차별받는 여성을 남편이 그렇게 사랑해주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김지영씨도 그걸 원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런 몇몇 잘못된 반응들을 생각하고 (강의를 결심했습니다). 또 연세 드신 분들은 “아고. 저것도 고생이라고. 아이고. 참. 네가 62년생 김지영을 살아보면 너는 여러 번 죽었겠구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시 해주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북 콘서트를 하게 된 것입니다.
Q. 2.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질문인데요. 이 책과 영화가 페미니즘 사상을 강요한다며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기독교 시각에서 페미니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특별히 부모가 자녀들에게 어떻게 교육해야할지 궁금합니다.
A.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여성주의’ 이렇게 번역이 되는데, 그 번역이 아주 적절하지 않아서 페미니즘이라고 부릅니다. 페미니즘의 긴 역사를 얘기할 시간은 없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는 한결 같지는 않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차별을 넘어서 여성이 훨씬 더 남성을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야 된다고 주장을 하는 극단적인 페미니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페미니즘의 관심은 남성 중심주의에 사회에 의해서 여자를 남성의 하위에 있는 존재로 보거나 종속적인 존재로 보면서 쌓아올려진 모든 사회에 도덕과 관습과 질서들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운동입니다. 그렇게 한 번 세워져서는 그 많은 여성들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실제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다고 보고 이런 것들을 찾아내서 올바르게 돌려놓아서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차별받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공정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률적인 조건 속에서 똑같이 남자들과 경쟁하고 자기 능력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공정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입니다.
페미니즘 자체를 기독교가 동의하냐, 동의 안 하냐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할 거 같습니다. 이 질문은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을 기독교가 추종할 것이냐와 같은 질문과 같습니다.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지지할 것이냐? 기독교가 약간 수정된 자본주의를 지지할 것이냐? 아니면 사회주의를 주장할 것이냐? 아니면 공산주의를 주장할 것이냐? 이와 똑같은 질문입니다. 교회는 어느 한 주의를 ‘주의’라는 이유 때문에 주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주의’는 그 안에 반드시 진리와 오류가 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째로 ‘주의’라는 이름에서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면 우리가 기독교 정신에서 보면 공산주의 보다는 자본주의가 훨씬 더 성경에 가까운 사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자본주의를 지지한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공산주의는 그 반대입니다.” 다시. “자본주의는 결국 사람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공산주의는 그 반대입니다.” 반대가 뭐지요? 똑같은 것입니다. 원래의 공산주의는 유물론이고 자본주의는 유물론의 반대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통제 없이 극단화되면 결국은 유물론하고 똑같이 인심매매하고 저기 자기 업주 아들의 생명은 굉장히 하늘 높고 2차, 3차 하청업체의 종사자들의 생명은 책상에서 돈으로 계산되는 것입니다. 요즘엔 법이 많이 나아졌는데 예전에는 항상 건설업자들이 안전시설을 하는데 돈이 얼마나 드냐? 안 하면 몇 명이 죽냐? 죽으면 한 사람 앞에 얼마를 줘야 되냐?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해서 이익이 되는 쪽으로 선택을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자본주의가 극단적인 자본주의로 갈 때 유물론하고 만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장난치듯이 둘 다 다 똑같다는 얘기를 반대라는 말로 현혹 시키는데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성경적으로 꼭 인정되어있는 구별이 아닌 차별이라는 면에서 누가 누군가보다 더 많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차별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거부해야 된다. 그래서 그런 의식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우리 때 모두다 성취가 안 되도 김지영씨 자녀에게 희망을 걸어보듯이 그 다음 때에 가서는 여자라는 것이 취업하는데 전혀 분리하지 않고 능력이 있으면 공정하게 인정을 받고 “아기를 가졌습니다.” 해도 눈치 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갈 수 있고 오히려 축하를 받고 경력이 단절될 위험성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회사와 사회가 도와서 그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육아를 했다는 이유 때문만으로 뒤처지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회적인 장치들이 마련되는데 조금씩이라도 이바지하면서 산다면 30년, 50년 후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훨씬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Q. 3. 일명 ‘맘충’, ‘노키즈존’이 만연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 사회를 향한 어떠한 시각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할지가 궁금합니다.
A. 제일 분노해야 될 단어가 ‘맘충’이잖아요. 맘이라는 것은 엄마이고 충은 벌레인데. 생각이 없는 것에 대한 대명사잖아요. 작품에서도 김지영씨가 커피 집에 가서 커피 한 잔 먹는데 흘리는 거 보면서 ‘맘충’이라는 이야기를 듣잖아요. 그건 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둘 다 조심해야 될 거 같습니다.
(예화) 사람들이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데 편안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고 그 식당에 왔는데 아니면 기차를 일등석을 탔는데 아니면 비행기의 퍼스트 클라스를 탔는데 내 아이 하나가 비행기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한없이 울어서 정신을 돌게 만드나. ‘아 3등석을 타는 건데 왜 1등석 기차에 와서 이럴까?’ 이런 건데. 기본적으로는 우리도 그렇게 울면서 자랐으니까 그거를 이해를 해줘야 되고. 우리가 이렇게 불편하면 저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저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그것을 일종의 사회 병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이해를 해줘야합니다. 저는 가끔 가방에 사탕이나 껌 같은 걸 가지고 다니다가 울면 하나 이렇게 흔들어 줍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그걸 계기로 해서 울음을 그치고 즐거워하는 애도 있습니다. 물론 필요 없이 우는 애들도 있지만. 어쩌면 복불복이잖아요.
그러니까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뭐 하나라도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런 거니까 자기가 어디를 갈 때에는 이 아이 때문에 너무 큰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마음을 한쪽에서는 갖고 한쪽에서는 그 일이 일어나도 애들은 원래 저럴 수밖에 없다. 그런 거를 이해하면서 그것을 마치 학대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지 않도록. 우리 애들도 비교적 덜 눈치를 보며 키울 수 있는 관용하는 환경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Q. 4. 성경적 관점과 신앙 태도에 관한 질문입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자녀를 키웠던 것이 제게 보람이었고 희생 하면서 사는 것이 여자의 숙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세상을 보니 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여 나 자신을 너무 일찍 포기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적 세계관과도 자꾸 대치되는 이 흐름을 보며 혼란스럽습니다.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옳은 것일까요? 자기 사랑과 주체적인 삶은 어떻게 다른가요?
A. 누가 질문을 해주셨는지 아주 좋은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이걸 답하려고 제가 아까 남겨둔 건데요. 그러면 김지영을 우리가 보면서 거기에서 우리가 사회적인 폭력의 문제. 그 다음에 남녀 차별의 문제. 기회불균등의 문제.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다 한 번씩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김지영은 우울증 증세까지 나타나게 되었고 마치 빙의된 것처럼 때로는 친정엄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남편이 되기도 하면서 대사를 연출해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데 그런 것들을 쭉 보면서 우리의 삶과는 어떻게 연결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이겁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여자들을 얕잡아 볼까? 하고 느낀 것은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너무 없습니다. 김지영이 예를 들어서 어렸을 때 분유 좀 먹으면 할머니가 등짝을 때리는데 말은 안했지만 ‘감히 귀한 손주가 먹는 걸 네가 먹으려고 하냐?’ 그런 걸 받았잖아요. 그러면 그런 일을 겪었으면 이 사람은 그것에 의미가 뭘까? 라는 걸 독자 입장에서는 이해하고 싶은데 안 나옵니다. 그러고 뒤에 가서 독박육아를 하다가 이제 우울증까지 걸리게 됩니다. 자꾸 망각증세가 보이고. 괴롭다는 이야기잖아요. 그 괴로움 속에서 무슨 의미를 발견하는가? 이런 것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일부러 다 뺀 거 같습니다. 계속해서 마치 비유를 하자면 물위에 배가 가는데 한 군데도 닻을 못 내리게 하고 GPS도 없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배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만을 묘사했는데 실제 김지영이 그렇게 살았을 거라고 백퍼센트 안 믿습니다. 분명히 김지영은 김지영 나름대로 자기가 겪고 있는 일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의미를 생각하려고 했고 그 의미를 단단하게 묶을 수 있을 정도로 어떤 근거를 찾아냈느냐 못 찾아냈느냐는 별개이지만 인간은 의미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확실히 그런 의미를 찾아내서 묶는 것이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는데 김지영은 그런 걸 고려한다고 해도 약한 사람이었다고 우리가 분류해줄 수 있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전통적으로 엄마한테 아빠한테 위에서부터 쭉 교육을 받고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그렇게 교육을 받으면서 나의 사명은 자녀를 잘 키우는 거다. 그리고 이것은 사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것 보다도 더 가치 있고 더 중요한 일이다.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을 거 아닙니까? 대학까지 나오고 좋은 직장 다니다가 우여곡절 끝에 경단녀가 되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습니다. 그러면서 돌아다보니까 그렇게 이 회사, 저 회사에서 오라고 하고 능력도 있었는데 지금 와보니까 오라는데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아이도 좀 기르면서 하자고 그랬더니 기껏해야 가게에서 돈 받고 캐셔해주는거 그 직업을 무시하는게 아니라 그런 자리 밖에 안 나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이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삶이 맞나? 라는 회의를 느끼게 되고 또 그렇게 경단 되지 않고 심지어 극적으로 얘기해서 아이를 안 낳고 계속 뻗어나간 사람은 사회적으로 자기와 비교될 수 없고 자기는 겨우 마트 취업을 기웃거리는 동네 아줌마인데 자기보다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닌데 뛰어난 회사에 올라가서 벌써 부장을 지나서 상무보를 내다보는 이런 상황에 있다고 할 때 박탈감 같은걸 느낄 거 아닙니까? 쟤는 아직까지도 나이가 있으니까 더 뻗어 나가면 사장까지는 몰라도 상무정도나 잘하면 전무정도도 할 수 있겠구나. 이번에 대그룹 LG 임원 한 분이 우리교회 다니시는 자매님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30대들을 전부 다 상무로 발령 냈다고. 보통 얼마나 열심히 했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각도에서 보면 갑자기 가슴이 싸하고 나 혼자 뒤쳐진 느낌이 들고 그것도 속았다라는 느낌도 들 거 같아요. 도대체 누가 나에게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 보람이 있다는 거를 누가 얘길 해줬을까? 모든 걸 희생하며 아이를 육아하는데 애들이 항상 보람 있게 자라줘요? 보람 있게 자라 주는 게 아니라 안 키웠어도 이 만큼은 안 자랐을까?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아요? 결국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했다는 느낌이 드는 거지요.
저는 궁극적으로 목사니까 이걸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제 마음속에서 이렇게 정리를 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유구한 청교도의 정통을 따라 등록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적극 권장해서 직장을 그만두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많이 낳게 그게 청교도의 정통이다. 청교도에 피임이 없었으니까 청교도의 정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그렇게 놓고 셋, 넷, 다섯 이렇게 낳고 그 다음에 전심으로 전력해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미래의 세대들을 길러낸다는 선교사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어떻겠어요? 받아놓은 많은 유산이 있고 고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모르지만 그 쪽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제 더 많이 가정에 못 있고 더 많이 밖으로 돌아쳐야지만 다섯 식구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독박 육아를 해서 뒤집어 씌우려는게 아니라 이 가정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되는 상황도 남편에게 있는 거지요. 그러면 지금 목사님 이야기는 우리보고 그런 삶을 선택 하라는 건가? 하지 말라는 건가? 저는 그렇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이를 덜 낳고 그 아이를 자신의 부모님에게 맡기고 육아시설에 맡기고 이렇게 하면서 자기가 직업 활동을 할 것인가?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걸 안 하고 저거를 했다고 얘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엄마가 꼭 붙어 앉아서 육아하는데도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내가 생각해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못되게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엄마 바쁘고 그렇게 사는데도 아이들이 바르게 잘 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결국은 그렇게 그 하나만 가지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아이들을 기가 막히게 돌보고 영향을 끼치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만 있는데 있으나마나 그 아이들이 엄마로부터 뭔가 돌봄을 받았다는 느낌을 한 번도 못 받고 외롭게 크는 아이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상을 어느 것을 선택할까를 물을 때는 나는 전적으로 원하는 걸 하십시오. 원하는 걸 선택하고 거기에다 맞추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물론 된다라고 하는 말이 쉽지는 않지만 그러나 선택을 할 수 없는 것은 못하지만 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렇게 여러분 원하는 대로 해보려고 선택하고 누구도 여러분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다. 절대 후회 없이 하고 싶은 거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러분 하고 싶은 그 속에 맞추어서 가게끔 하고 오늘 왜 남성들을 오지 말라고 누가 질문을 하셨는데 남성이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를 우리가 하기 위해서 남성을 오지 말라고 한 게 아니고 우리끼리 이야기를 좀 편안하게 저 뒤에 남성이 이쪽에 쭉 있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남편은 나하고 생각이 다를 텐데? 그런 생각하지 말고 몰입해서 들으라는 면에서 그랬고. 그 다음에 아무나 오라고 하는 것보다 여자만 오라는 게 홍보효과가 높잖아요. 그래서 선택을 하십시오.
두 번째는 자기가 기도 많이 하고 자기가 딱 선택을 한 다음에는 절대로 자신의 선택을 믿고 후회하지 마십시오. 후회하게 하는 것은 육아를 선택했느냐 ,직장 생활을 선택했느냐 때문에 후회 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후회를 안 합니다. 그래서 내 주위에도 보면 아이 맡기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얼마나 많겠습니까?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어서 달려가야 하는데 아이가 엄청나게 아프고 다른 어른도 돌봐줄 사람이 없고 그럴 때는 미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도 즐겁게 내가 아이를 이렇게 기르기 위해서는 감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고 그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이렇게 하기 시작하면 괴로워서 일도 못하고 아이도 못 키웁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가족들을 설득해서 도움을 받도록 하십시오. 제가 결혼하고 인사하러 오면 항상 하는 이야기가 “가사를 함께 하라.” 통계적으로 보면 여성이 남성화된 가정보다는 남성이 여성화가 많이 되어 있는 가정이 훨씬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니까 남자들도 버려야 되는 게 내가 아내를 좀 도와줘야 되. 그런 말부터 없애야 합니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겁니다. 같이 나누어서 할 일인데 자기는 다른 일로 나가니까 아내가 혼자 했던 일들을 당연하게 같이 나누면서 하는 거지요. 그런 것들을 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으십시오. 이거, 이거를 도와달라고 이야기하고. 절대 사정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한 아이를 길러내고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짐을 나누어 져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을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십시오. 막 싸우지 말고 잘 설득하고 격려해서 도움을 받아내십시오. 온 식구들에게. 그거를 같이 짊어지고 나아가게끔 하면서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설령 직장을 안다니고 전적으로 육아만 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혼자서 하려고 하지 말고 기회 있는 한 남편과 가족들이 자기할 것들을 스스로 하게끔 그렇게 훈련을 시키십시오. 그렇게 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결을 시키는 겁니다. 의미를. 그것이 빠졌기 때문에 우리가 맨 처음 읽을 대 이 작품이 너무 여성을 생각이 없는 하찮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이를 낳고 혹은 안 낳고 직업을 갖고 혹은 직업을 안 갖고 결혼하고 결혼하지 않고 이렇게 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생의 본질은 아닙니다. 양상이지. 그런 양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양상 자체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비혼의 삶을 내가 이렇게 훌륭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 의지하도록 삶을 만들고 혼인의 삶을 이렇게 불완전한 남편을 만났고 이해심도 모자라고 때로는 희생정신도 없어서 이기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발견했는가? 결국 인간이라는 건 늘 말씀드리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안 되거든요. 남편이 맘에 안 들잖아요. 남편도 여러분들이 마음에 안 드십니다. 그리고 모두 다 원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게 우리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것인데 원하지 않은 일을 만났을 때 거기에서 그게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인데 그 의미는 여기에 없습니다. 의미는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걸 여기다 부여하는 겁니다. 그거를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이 가정을 만드시고 이 아이를 기르시는구나. 이 아이가 참 못된 점이 많은데 나를 사용하셔서 올바른 아이로 만들어가고 계시구나. 이런 것들을 찾는데서 깊은 의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제일 바보 같은 게 육아라고만 이야기했는데 당장 애 똥 치우고 오줌 치우고 제 시간에 밥 주고 유치원 데려가는 이야기밖에 안 나오잖아요. 사실 이것 더 위에 올라가면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부모를 괴롭힙니다. 진짜 왜 낳았을까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훨씬 고차원적인 문제로 나를 괴롭히면서 나를 고차원적인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거지요. 그것이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있었을 때 다른 사람 같으면 이 상황 자체를 지겨워하고 반발하고 폭발하듯이 이렇게 하면서 나가지만 나는 그거를 잘 견딥니다. 그러면서 그걸 견디고 이기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렇게 나빠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용되어서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들어 주시고 이 쓰레기 같은 나를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게 하신다는 그걸 경험하면서 우리는 세상이 흔들려도 능히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걸 붙들고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82년생 김지영들에게 심어주어서 그렇게 함께 의미를 찾으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완성되어가는 기쁨을 함께 느끼면서 사회를 변혁시키고 가정을 변혁시키고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모델이 사회도 변혁되어서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고 그렇게 섬기면서 살아가는 과정자체가 나를 성숙시켜서 궁극적으로는 나를 기쁘게 만드는 잠시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런 삶이 김지영이 우리에게 가르쳐줘야 될 삶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Q. 5. 한국인의 정서나 제도적인 미비함으로 직장 내의 남녀차별. 여성 경력단절 등 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 개인이 투쟁하며 살기에는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자체가 너무 거대합니다. 82년생 김지영보다 더 힘든 상황의 사람들도 많은데 정말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A. 이 내용들이 대부분 설교 속에서 다뤄지는 내용들이다 생각을 합니다. 우선 제일먼저 보면 직장 내의 남녀차별. 그 다음에 경단. 이런 문제가 야기되고 이런 것들을 개인이 투쟁하며 살기에는 사회 시스템 자체가 너무 거대합니다. 당연하잖아요. 너무나, 너무나 거대해서 그 거대한 사회조직 속에서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나고 인권의 박탈이라든가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한 사람이 이걸 바꾸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한 사람이 조용히 타협하면서 계속 살아가면 세상은 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를 겁니다. 솔직히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4명의 1명 정도는 공감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관에서 저 앞쪽에서는 소리를 내서 흑흑 거리고 우는 애들이 있는데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저 뒤에서는 쯧쯧쯧. 노인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결국은 우리들이 나에게 부딪힌 이 현실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는 거지요.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아닙니다.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그걸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 이런 얘기하면 우리 권사님들이 안 좋아하실지 모르겠는데 명절에 시댁에 가서 일하는게 너무 너무 힘들면 솔직히 이야기를 하세요. 인터넷에 보면 가짜 깁스가 있습니다. 1만 2천 5백 원입니다. 며느리들이 그거를 두르고 사진을 찍어서 시어머니한테 보낸다고 합니다. “제가 팔이 부러졌어요.” 그 팔은 이상하게 그다음주면 완전히 낫고 다음 명절 땐 또 부러집니다. 이거는 여러 가지 거짓말을 하고 이유를 대야하거든요. 그러지 말고 싸우려고 하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십시오. 제가 이런 점이 힘듭니다. 그런데 항상 누군가가 이야기를 할 때 100 : 0으로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이 완패를 해야 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제가 이게 너무 힘듭니다. 이건 하지 말고 여기까진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그게 시부모의 입장에서는 대사에도 나오지만 “고생했어. 언니.” 그러니까 엄마가 그렇잖아요. “고생은 무슨 고생이냐. 사랑하는 가족들하고 먹으려고 하는 건데. 재미지.” 모든 며느리들이 동의안 합니다. 연세 많이 드신 며느리들만 동의를 합니다. 며느리 있는 시어머니들, 시할머니들은 동의를 하지요. 그런데 그러지 말고. 하지 말도록 그렇게 주장을 하십시오. 내세우고. 절충선을 취하십시오. 우리 집에서도 보면 명절에 전도 부치고 저는 딸하고 조카하고 와서 부치고 뭐도 하고 그러는데 제가 제안한건 그거였거든요. 너무 힘들다 하지 말자. 송편도 꼭 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강력히 주장해서 이제 사먹습니다. 흰떡도 그렇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거실에 넓은 탁자하고 부르스타 한 3개 놓고 프라이팬 놓고 고기를 구워 먹으면 어떠냐? 그거는 남성들이 좀 치우고. 반찬 하지 말고 파 무침 하고 김치 정도 놓고 맛있는 돼지고기든 소고기든 사서 먹고 얼마나 좋으냐? 우리 집사람이 잘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노력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딸이 오면 며느리는 집에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하고 최대한 합의를 하고 힘들 때에는 절대 참고 있지 말고 힘들다는 것을 신경질 내면서 싸움하면서 말하지 말고 그러면 디스카운트 당하니까 어느 날 조용히 불러놓고 내가 이 정신이 한계에 오고 있다. 차분차분히 이야기해서 남편을 설득하고 시부모님을 설득하고 아이들을 설득하고 해서 여자로서의 감당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것이 취업이든지 육아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도움을 받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스트레스를 비롯해서 긴장이 계속 쌓이잖아요. 쌓이면 이게 대부분 정신을 뚫고 나옵니다. 김지영처럼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공항장애, 육아 우울증. 등등 우울증 증세로 나오고 가벼운 조울증으로 나오고 심각한 공항장애로 나옵니다. 사람이 맨탈이 강해서 그것을 견뎌내는 겁니다. 애들 말로 꼭지가 돌 상황인데도 주님 의지하면서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난 이겨낼 수 있어. 하는데 이게 아무리 치받아도 정신의 껍질이 탄탄한 겁니다. 그럴 때 이것이 잠복해 있다가 몸을 뚫고 나옵니다. 그래서 아주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도저히 이걸 들 수가 없는 겁니다.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3일을 진단을 받아도 이게 모든 과에서 결론이 안 나오는 겁니다. 영원히 안 나옵니다. 만약에 여기 핏줄이 터졌다고 하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안 나옵니다. 결국은 그 증세가 몸을 뚫고 나오는 겁니다. 한동안 회복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된 것은. 어떻게 보면 김지영처럼 정신을 뚫고 나오는 게 고마울 수도 있습니다. 육체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정신으로 뚫고 나오니까 맨탈이 강하다고 자만하지도 말고 그 다음에 자기가 맨탈이 강하면 강할수록 육체로 뚫고 나와서 한방에 훅 하고 가는 수가 있으니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가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기도로 이기면서도 가족들에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이야기 하십시오. “나를 좀 도와달라고.” 이만큼 이만큼은 내가 매우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그렇게 해서 이해를 받고 그러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왜냐하면 사람이 삶이라는 게 나 혼자 살아 가는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사람들과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돕지 않고는 그들도 온전한 삶을 살수 없고 그들이 나를 돕지 않고는 나도 온전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도움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의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의미를 부여받는 삶을 살아갈 때 지금은 역경을 겪고 시련을 겪지만 반드시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 것이 단순한 고통만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인생이 영글어 가는 한 과정이라고 보니까. 그래서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 받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한 번에 투사처럼 싸울 수는 없겠지만 또박또박 “그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여서 여러분들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시어머니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대항하는 의미에서 하는 건 아닌데요. 옛날에 우리 경우로 보면 명절 때 부쳐 먹고 하던 때 보면 식구들이 굉장히 많았잖아요. 한꺼번에 밖에 나가서 일할 때 내 기억에서도 보면 여성들이 8명, 10명 가까운 사람들이 일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땐 지금보다 더 복잡했잖아요. 쌀도 껍질 벗겨야 되고 겉피도 내야 되고 팥도 불려야 되고 심지어 두부도 만들어 되고. 할 수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노동에서 단련된 사람들이 아니라 조금만 하면 피로를 확 느낍니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오래 간만에 당신이 주도해서 이 모든 일을 하니까 신나는 거지요. 그 속에서 뭔가 내가 이 집안에 여성 최고 리더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자리 매김을 확인하는 겁니다. 왜냐면 자기보다 더 똑똑한 며느리들이 “어머니 간장 어디 있어요?” “이게 뭐냐? 너는 여기다가 설탕을 넣으면 안 되지. 저런 저런.” 이러면서 무안해하고 있는 거기서 굉장한 성취감을 느끼고 오래 간만에 우월성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습니다. 꼭 그거 하셔야 되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집에서 하는 송편보다 밖에서 사먹는 송편 훨씬 더 맛있습니다. 항상 집에서 할 때는 항상 넘치도록 해서 싸주거나 아니면 냉동실에 재워놓는데 맛없습니다. 이 과학으로 다 분석해서 요새 빚은 떡인데 너무 맛있습니다. 그거를 사다 먹는게 그렇게 불경스러운 것일까요? 비싸다 그러면 조금만 먹으면 됩니다. 할 때 이가 2만원 어치에서 150개 할 거면 그냥 살 때 100개만 사다가 먹자 이겁니다. 그러고 안 싸주면 어때요? 섭섭해 하지도 않습니다. 맛있게 먹고 탁탁 털고 가게끔. 그렇게 하면 어때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추석을 꼭 그렇게 집에서 해야 되요? 여유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아마 여행을 가자 그러면 며느리들이 너무 좋아하실 겁니다. 그리고 여행 가서도 한 채는 여기 한 채는 여기. 그래서 당연히 식당에서 만나자. 아니면 밥을 한 쪽에서 남자들 보고 하라 그래서 먹고 너희들은 설거지도 하지 말고 그냥 사라지자. 라든지 1년에 몇 번인데 그렇게 해서 좀 포기하는 연습을 하면 너무 좋겠다. “얼굴 보자.” 얼굴 보고 같이 예배드리고. “너무 좋다. 너희들 만나니까 너무 좋다. 고생스럽게 여기까지 와서 명절까지 와서 뭘 하고 그러지 말자.” 우리 동네에 맛있는 반찬 집들 많습니다. 조금씩만 사다가 놓고 어떻게 그래도 해 먹는 거지. 그게 편견일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그렇게 오는 가족들 일년 식사를 대조해 보면 남자들은 대부분 다 바깥에서 먹고 집에서 밥 먹는 적 별로 없습니다. 그 집안의 고유한 맛도 알까 말까입니다. 며느리들이 원하잖아요. 과감하게 며느리들이 하고 싶다는 대로 그렇게 육아와 이런 고통 받는 것에서 좀 벗어나게 해주고 그렇게 몇 번 하다가 한 번쯤은 시어머니 하자는 대로 그렇게 해드리십시오. 하나의 설이나 추석을 위한 노동봉사 하러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가서 어머니 하고 싶은 대로 놀이를 해드린다는 마음으로 최소한 것으로 하되 어머니 원하시니까 빈대떡 좀 부치고 그 대신 몇 번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자. 그러고 나서 이제 지금 X세대에 해당되는 아이들이 며느리들로 들어왔을 때 그 광경 자체를 보면 집안에 대한 혐오증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왜냐하면 지금 그런 큰일 치르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할머니 된 세대들은 두렵지도 않지만 그러나 지금 젊은 분들은 두렵고 그 밑에 갓 시집온 사람은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정도 까지는 접으면서 어느 한 가족이 힘들어 하는 것을 좀 덜 하면서 같이 보조를 맞춰갈 수 있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냐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젊은 분들이 내가 며느리가 들어와도 나는 좀 다른 방식의 명절을 지내겠다. 그거를 써 놓으십시오. 써서 붙여놓고 서서히 바꾸어 가길 바랍니다.
Q. 6. 영화나 책을 통해서 조금 전에 말씀하셨다시피 나이든 여성들이 공감하기 보다는 20대, 30대 아이들이 사실 더 난리를 치면서 가정에서나 어디서 이게 참 많은 화두가 되어 있어서 염려스러운 게 있거든요. 그 관점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뿐만 아니라 저도 며느리들을 셋을 봐야하는 입장이거든요. 그러면 이런 아이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이것들을 절충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 편으로는 겁이 납니다. 저는 우리 큰 아이하고 영화를 이야기하다가 남자들은 조금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좀 빠지고 싶어 하는. 그런데 본인들의 문제거든요. 그런 것을 봤을 때 저희들의 입장에서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궁금하고요. 저도 여자이긴 하지만 딸을 안 키운 입장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기가 힘듭니다. 저희들 입장에 있어서 엄마들의 세대는 이해하겠는데 앞으로 다가올 아이들에게 과연 어떻게 이야기를 해줘야할지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A. 이런 게 있거든요. 독한 시어머니 밑에서 지겹게 시집살이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한 며느리는 시집생활 하는 내내 치를 떱니다. 시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그런데 놀랍게도 며느리가 들어오면 그 시어머니의 빙의가 되서 그 시어머니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는 겁니다. 심리학에서 보복적 모방심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워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며느리를 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제일 정신없는 분들이 며느리를 자기 딸처럼 생각하다고 하는데 그 얘기 듣는 순간 “야, 참 며느리 진짜 힘 들겠다.”
(예화) 당찬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얘야, 나는 너를 평생 한 번도 며느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넌 내 딸이다. 넌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고 엄마라고 부르거라.” 며느리가 쌓였던게 터졌어요. “어머니, 그러면 내일 아침부터 당장 시누이하고 똑같이 행동해도 되지요?” 될까요? 안 될까요? 안돼요. 그렇게 안 되는 일을 왜 하냐고요. 시누이가 어때요? 밥 다하도록 안 일어납니다. 잠옷 바람으로 두드리고 이불을 잡아 댕겨도 굴러 덜어지면서 신경질을 내잖아요. 며느리가 독같이 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편한 쪽으로 하기 위해서는 딸 같다고 그러고. 그 다음에 진짜 똑같은 딸이 되기를 원하냐고 하면 원하지 않거든요. 왜 그렇게 하냐고요. 그래서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며느리하고 자기하고는 영원히 남이라고 생각을 하십시오. 그리고 남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대했는데 다행히 이 며느리가 자기를 어머니처럼 생각해서 추가적으로 더 많은 이해심을 가지면 그건 감사한 일이지요. 기본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겁니다. 피차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며느리를 너무 아랫사람으로 놓고 뭐든지 마음대로 하려고 그러지 말고 시어머니를 좀 한 인간으로 존중하라는 겁니다. 말을 듣고 안 듣고를 떠나서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으신 분들이 과감하게 접으셔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며느리에게 효도를 받아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1도 효도를 안 해줘도 내 행복에는 지장이 없다. 그렇게 주체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따듯하게 편지도 보내고 전화도 하고 손 편지도 쓰고 그럽니다. 우리 며느리도 그럽니다. 그러면 감격스러운 거지요. 이건 보너스다. “그럼 이 정도는 해야지. 이 정도보다 더 했어야지. 왜 이제야 편지를 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 자주 찾아가지 마십시오.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자라나는 세대하고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말씀을 주셨는데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되는게 아드님이 25이면 한 8년, 10년 정도 더 있어야 가겠네요. 걱정 너무 하지 마십시오.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 아무리 대화의 기술을 잘 익혀서 그 세대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혔다고 하더라도 며느리들이 보기에는 할아버지가 화장한 거 같아요. 무슨 뜻이냐면 소통이 안 되는 게 내가 기술이 없어서 소통이 안 된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랫사람들한테 인간성이 전혀 그렇지 않은 젊은이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부모가 자기한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혜택은 자주 안 만나는 겁니다. 그겁니다. 그럼 여러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며느리나 아이들은 어쩜 나한테 살갑게 이야기도 안 주고 그러는데 여러분은 그랬습니까? 여러분 16, 17, 18, 19 이때에 아빠 팔짱끼고 조잘조잘 얘기하고 엄마하고 저녁 내내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엄마 등을 주물러주면서 “그래서 나는 엄마 딸이라서 너무 좋아. 엄마 나 더 얘기하고 싶은 건 많은데 어떻게 오늘 자야 되는데. 어떻게. 우리 날 잡아서 더 이야기하자.” 손 들어봐요. 엄마는 하고 싶은 얘기가 수없이 많았지만 딸에게는 지겨웠습니다. 그래서 자꾸 그렇게 집착하려고 하지 말고 나는 너희 없어도 잘 산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이 행복하기만 하면 제일 좋다. 그렇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나는 그게 너무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집안은 나 혼자 하는게 아니라 아내가 있으니까 같이 결정해야 되는 일이지만 최소한의 의무를 자녀들에게 주고 그래서 진짜 부모를 인격적으로 존경하고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지 그거를 수많은 시간 속에서 녹여내서 물리적으로 접촉하고 해서 스트레스를 주고 그렇게 하지는 마라.
(예화) 그런데 어느 며느리가 있어요. 시어머니, 시아버지하고 명절에 헤어질 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며느리가 있고 명절날 내려갈 때가 되면 설레서 잠이 안 오는 며느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유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며느리가 있다면 그건 또 달라요. 고맙게 생각하고 그 며느리를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십시오. 그런데 유산을 물려준다는 애기는 마지막까지 하시 마세요. 진심을 확인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유산을 좀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들을 디스카운트해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결론은 이것입니다. 며느리 없이도 효성스러운 아들 없이도 나는 내 인생을 의미를 찾아가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이 사람들을 잘 돌보고 따듯하게 하면서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거다. 여러분, 너무 사랑하잖아요. 이해 안 해도 괜찮습니다. 꼬치꼬치 따지면서 이해를 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 안 하는 사람입니다. 이해를 하면 굳이 사랑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동의가 안 되는데 저 사람은 좋다고 합니다. 그럼 됐지. 내가 조금 참으면 되는데. 싫데. 하지말래. 내가 왜 하지 말아야 되는지 꼬치고치 캐묻지 않아도 안 하면 그게 사랑입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그렇게 살면서 여러분들을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로서 하나님 앞에 성숙한 인생을 살아가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 여성들 교인 가운데 최소한 3분의2 이상이 82년생 김지영입니다. 걔는 82년생이니까 80년생 김지영이지. 이 사람은 62년생인데도 정신이 82년생 김지영입니다. 그게 결국은 그런 사람을 보면서 아픔에 공감하게 해주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나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얼마나 아프겠니. “자녀 때문에 쩔쩔매고 정신 이상이 오고 난 다섯 키웠어. 시부모님 다 모셨어. 그러고 리어카 끌면서 야채 장사 다하면서 그렇게 살았어.” 그러면 폭력입니다. 죽어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답지 않으니까. 그런 얘기 하지 말고. “정말 힘들겠다. 얼마나 힘들겠니.” 공감해주는 그것이 결국은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