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9-11)
녹취자: 김경애
I. 들어가는 말
여러분들은 앞으로 목회를 할 사람들입니다. 선교사가 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전도하는 것 외에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선교사에 의해서도 이루어지기에 목회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안다고 해도 그대로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알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그렇게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회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목회라는 말을 떠올릴 때 너무나 다양한 목회자의 활동이 생각나기 때문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정하여야 할지도 사실 혼란스럽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전도하고 또 교회의 행정을 살피고, 교회를 건축하고,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시험에 든 성도들을 돕고, 교회의 거슬리는 악한 사람들을 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다양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목회가 무엇인지 아주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껏 성경을 읽었지만 이 구절만큼 목회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II. 목회의 세 목표와 궁극적 목적
먼저 목회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선한 것을 분별하고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목회를 하는 사람이 성도들을 크게 세 가지 목표로 돌보는 것입니다.
A. 분별함
첫째는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선한 것들과 선하지 않은 것들, 다시 말하면 더 좋은 것과 열등한 것들이 섞여있는 가운데 무엇이 가장 탁월하고 훌륭한 것인지, 또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성도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목회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기독교는 결국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선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선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종교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어떤 목표를 가지고 목적을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타락한 다음부터 인간이 그 목표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셔서 그로 하여금 참 신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신자가 좀 더 진실하고 아름다운 신자가 되어가려고 애쓰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되지 않은 것과 참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인생을 허무한데 낭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더욱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그에게 주신 많은 자원들을 악하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보기 바랍니다. 그래서 보다 더 선한 것을 분별해낼 수 있는 사람, 판단력을 갖게 하기 위하여 목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하면 잘할수록 그 사람이 목회자를 점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B. 진실함
둘째는 진실하게 하기 위하여 목회하는 것입니다. 진실(verum, veracity)이라는 단어는 진리(veritas)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합치된 마음과 정신이 바로 진실입니다. 그러면 결국 첫 번째로 선한 것을 분별하고, 두 번째로 진실해지는 이 모든 것은 진리라는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이 이루어놓은 지적인 요점들 가운데 그릇된 것을 모두 빼버리고 참된 철학만을 남겨놓고 그것을 계속 압축한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성경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참된 종교인 동시에 참된 철학인데 누구도 철학 자체를 통해서는 이 참된 철학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이성만을 원리로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참된 진리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를 하는 사람은 결국은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이 진리를 따라 참되고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C. 허물없음
셋째는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흠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덜 흠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과일이 똑같은 크기인데도 한쪽이 아주 손톱만큼만 짓이겨져서 상처가 난다면 제값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고급사과는 포장도 별개로 합니다. 일체의 흠이 없는 것은 흠 있는 것과 비교될 수 없는 아주 높은 가격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으로서 최대한 흠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우리들이 이 지구의 면 차제가 완전히 평평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커다란 삼각형을 아무리 정성껏 그려도 완벽한 삼각형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손으로 삼각형을 그릴 때 관념 속에서는 완벽한 삼각형을 생각하면서 삼각형을 그립니다. 흠이 없다는 말도 바로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앞의 두 가지 중 첫째는 사상과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 자신의 성품과 관련된 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윤리적인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길러서 의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목회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사를 짓기 위해 밭에 가득 과일 나무를 심었습니다. 과일을 딸 때가 되었는데 과일이 거의 없습니다. 과일이 있기는 있는데 상품성이 있는 것이 거의 없고 벌레 먹은 것 아니면 새들이 와서 찍어먹은 흔적을 가진 것들입니다. 이런 과수원은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저는 배를 참 좋아합니다. 아주 잘 길러서 거의 머리통만한 배, 그것도 흠이 하나도 없는 배, 깎으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주 아삭아삭한 배가 온 과수원에 노랗게 매달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엄청나게 가치 있는 과수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목회자로 삼으신 것은 여러분들의 목회를 통해서 교회와 사회가 이렇게 그 아름다운 열매로 꽉 찬, 그래서 하나님이 그 교회와 사회를 보실 때 한없이 만족하시고 그들도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목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부르심이 결국 목회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의 세 가지 목표는 현실이 그와 반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조차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을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예수를 믿어도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고,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목표는 살아있는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의 열매가 가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목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III. 사랑을 풍성케 하는 길: 지식과 총명의 목회
그러면 마지막으로 목회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옥 속에 갇혔어도 빌립보교인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랐는지를 이 기도가 보여줍니다. 결국 목회라는 것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면 그냥 모두 사랑으로 통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사랑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아가페의 사랑, 스톨게의 사랑, 필리아의 사랑, 에로스의 사랑 등으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구분보다도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연관이 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살펴볼 것이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A. 아가페와 까리따스
첫째,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할 대상이 없을 때도 하나님은 사랑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사랑이 되신 것이 아니라 아무 피조물이 없었을 때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관계 속에서 계셨는데 그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A는 B이다.’ 라고 할 때에는 조건이 붙으면 그 계산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 때문에 사랑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입니다.
둘째는 에로스적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고유한 사랑을 ‘아가페’라고 부른다면, (인간이 처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사랑은 ‘에로스적 사랑’입니다). 여기 한 인간이 태어납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하나님을 희미하게 알지만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타락했어도 사랑할 능력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데 사랑할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지만 이것이 그의 인생을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다가 누군가가 그에게 복음을 전해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피로 그들을 구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안 믿고 사는 것보다는 더 행복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믿음을 ‘에로스의 발로’라고 표현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복음을 내가 믿을 때에 그 믿음의 동기는 결국 나를 향한 사랑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보면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와 내가 처음 하나님을 믿은 사랑은 약간 다릅니다. 그런데도 나 자신이 하나님을 믿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이런 종류의 사랑을 믿음으로 보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 (신자 안에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있게 되는데, 곧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인 ‘까리따스의 사랑’이 넘쳐 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 그분이 베푸신 사랑은 단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생명이 강물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밀려들어오게 됩니다. 그때에 그 아가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으면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야겠다던 그 에로스적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이행합니다. 그것을 교부들은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어의 Charity가 거기서 나왔습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고, 동시에 아가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써 사람을 향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성도 안에 있는 까리따스의 사랑을 ‘아가페와 에로스의 지평융합’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사랑의 감화를 받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세 가지 목표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이 사랑을 신자 안에서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소명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지 설득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고, 믿은 사람들은 그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속에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전도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도이고, 목회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 속에 있는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해서 그것이 아주 큰 정도로 타오르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겨울에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 켠 바람에 꺼질 것 같은 그 불도 불이고, 모닥불도 불이고, 활활 타오르는 산불도 불입니다. 모두 다 불인데 그 불길의 정도는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명이 자신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칠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면 목회의 소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목회의 소명을 확인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닙니다. 평신도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목회자인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이를 위해 설교를 합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냉랭했던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단을 합니다. 냉담했던 사람들이 성경을 풀어서 공부를 시켜줄 때에 마음에 은혜가 되고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의 본질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할 수 있는 일인데 이것은 목회자가 자기가 직접 종사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사랑의 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B. 지식과 총명
마지막으로 무엇을 통해서 이 사랑이 그렇게 불같이 뜨겁게 타오르게 되느냐 입니다. 오늘 성경은 ‘지식과 모든 총명’이라고 말합니다.
1. 지식: 에피그노시스
여기서 지식이라는 단어는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입니다. 희랍어에서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무엇 하나를 일부분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말씀에 관해서 철저하게 알고 있는 지식, 단지 이지적으로 지식적으로 정리된 말씀이 아닙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전체적인’ 뜻을 가리키는 ‘에피’와 ‘지식’이라는 뜻을 가진 ‘그노시스’가 합쳐진 것인데 ‘그노시스’는 ‘기노스코’에서 온 단어입니다. ‘기노스코’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동치어는 ‘야다’ 입니다. 이 ‘야다’가 맨 처음에 쓰인 것이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라고 할 때 그 부부관계를 갖는 것을 ‘야다’라고 합니다. 영어의 ‘노’(know)라는 단어에 실제로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결국 이 지식은 단순히 이지적이고 분석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경험을 동반한 지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할 때에 그 단어도 ‘그노시스’입니다. 그러면 결국 목회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까리따스가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작은 나뭇가지가 하나 있었는데 불씨가 조금 붙어서 타는 듯 보입니다. ‘후’ 불면 그 불씨는 계속 타오릅니다. 그러나 계속 ‘후’ 분다고 해서 불길이 되어 타오르지는 않습니다. 그 위에 계속 장작을 얹어야 합니다. 이 장작이 바로 ‘에피그노시스’ 지식입니다.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그 사랑은 아무데서나 일어나는 것도 아니요, 목소리 높여 찬양을 부르거나 불을 끄고 통성기도를 한다고 저절로 타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말씀하심으로써 사랑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것이 진리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철저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책을 읽기가 싫으면 아주 분명하게 목회자의 소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아닙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면 절대로 소명이 아닙니다. 진리를 떠나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견딜 수 없는 것이 ‘소명’(ἀνάγκη, 아난케)이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운명을 느끼는 것이 소명입니다(고전9:16). 하나님의 강제력입니다. 목회자는 진리에 대해 ‘에피그노시스’ 지식으로 사랑을 풍성하게 하여야 합니다. 신앙에 대해서 하나를 가르쳐도 전체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그 아는 것을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공부해야 할 때입니다. 어느 정도로 말입니까? 제 경험으로는 한 10년 정도는 미친 듯이 공부해야지만 신학의 기반이 잡힙니다. 그 후에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신대원을 다닐 때에는 한 학기에 한번 정도는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웃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웃는 것이 나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들어야 변화될 텐데 무엇 하나 확고한 지식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다. 성경? 조직신학? 역사신학? 성경 신학? 성경원어? 심지어는 목회의 기술? 아무것도 정확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보내지만 이제 목회의 현장에 들어가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길은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웃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공부했습니까?’ ‘네, 그렇게 공부했습니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연구실에서 몇 번을 쓰러졌습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태어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아름다운 한강변에 있는 이 학교에서 누가 여러분들의 공부를 방해합니까?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몸이 특별히 아프지 않으면 6시간 이상 자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들은 웃을 수 있지만 저는 신학교선생이자 목회자로서 아주 단언코 이야기하는데 성경을 펴놓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체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일관성 있게 설교하는 것은 엄청난 지적인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제가 34살에 신학대학의 교수가 되어서 열심히 가르쳤는데 그때 학생가운데 하나가 열렬하게 내 가르침을 따라서 공부를 했습니다. 입학한지 2년쯤 지나서 저를 찾아와서 이야기 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이 매번 읽으라고 추천해주시는 책을 모두 적어서 읽었는데 꼭 한 학기에 한 키였습니다.’ 세워서 한 키가 아니라 눕혀서 한 키입니다. 그래봐야 3년 동안에 6키 밖에 안됩니다. 몇 권이나 되겠습니까? 그 어마어마한 기독교지성의 바다에서 그까짓 6키의 책은 태평양의 가랑잎 몇 개정도밖에 안됩니다. 게다가 기독교지성서만이 고민합니까? 일반지성서도 고민합니다. 그러니까 이유 없이 무조건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2. 총명: 아이스데시스
시간이 없어서 그 다음 마지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총명으로’ 라고 했는데 희랍어로 ‘아이스데시스’(αἴσθησις) 라는 단어입니다. 현대어 희랍어성경에서는 ‘노에시스’(νόησις)라고 했습니다. ‘누수’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스데시스’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원래 ‘아이스데시스’는 ‘아이소마이’라고 해서 ‘놀라다’라는 동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스데시스’는 어떤 사물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과 지식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우리가 공부해서 전달해주는 과외 같은 학습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우리도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초자연적인 계시입니다. 그러니까 이 초자연적인 계시를 우리가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오성의 활동입니다.
그러니까 목회하는 사람은 결국 이런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지식을 잘 습득해서 선명하게 성경의 진리들을 잘 전달하는 것이고, 그렇게 전달함으로써 믿음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를 만나기 전에는 신학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주워들었는데도 정리가 안 되었는데 이 목회자를 만나서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니까 또렷하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왠지 이분의 설교를 듣고 이분의 가르침을 받으면 안 믿어지던 마음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의 진리들이 아멘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마음속에 쑥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엄청난 힘으로 가슴속에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목회자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자신의 힘으로만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팔꿈치가 닳아야 하고, 치열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써 무릎이 닳아야 합니다. 그래서 ‘에피그로시스’가 팔꿈치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 ‘아이스데시스’는 무릎과 관련된다고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서 배우고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해서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더라. 아주 큰 믿음이 생기더라.’는 일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목회입니다. 이를 통해서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로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깊이 후회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열렬하게 공부하고 배운 지식을 사색 속에서 통합해서 하나로 해석할 수 있는 자기 소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에게 끼친 것과 똑같이) 매일 매일 자신 안에도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가 들어와서 자기 안에서 주를 향한 사랑이 풍성해져서 점점 더 선한 것을 잘 분별하는 신학생이 되고, 더 진실해지고, 더 흠 없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는 여기서 듣고 저기다가 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온 몸으로 체득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IV. 나가는 말
말씀을 맺습니다. 다 설교했으니까 이해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네 가지입니다. 좋은 목회자가 어떻게 됩니까? 첫째는 주님을 깊이 만나라. 두 번째 목숨을 걸고 공부하라. 그래서 성경, 원어,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라틴어, 영어는 물론이고 독일어, 필요하면 불어까지 최대한 많은 어학을 공부하고 절대적으로 많은 양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많은 양입니다. 그래서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서 1학년 입학해서 지금까지 읽은 책을 집에 가서 다 쌓아놓아 보십시오. 도서관에서 읽은 것까지 계산해서 쌓아놓아 보십시오. 일정한 분량의 지식 없이는 죽어도 그것이 사상이 될 수 없습니다. 깡다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부를 안 한 사람은 커다란 바다에 떠있는 2인승 쪽배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항공모함 같습니다. 공부만 가지고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치열하게 공부하십시오. 공부 안하는 사람과는 놀지 마십시오. 세 번째는 열렬하게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이 신학교 3년을 눈물의 기도로 보내십시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아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는 오직 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에게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설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