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죽음과 부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육신의 혈통으로 보자면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의 뜻으로 본다면 “육신에 관해서 성결의 영을 통해서”입니다. 즉, 육신에 관해서 말하자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을 통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성결의 영은 성령(聖靈)을 뜻하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의 부활(復活)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다. 두 번째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영(靈)이시다는 것입니다.
II. 바울이 경험한 혼란
신약 성경 중 기독교에 관한 진리의 기둥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알려져 있는 이 로마서의 저자는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이 서신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는 기독교의 대강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원래 그렇게 기독교에 대해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바울이 경험한 혼란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시고, 심문을 받고 처형되는 과정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이 있는 유대인들을 충동하였습니다. 그들의 거의 폭력 사태에 가까운 시위를 통해서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아주 정교한 종교적인 고안(考案)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A. 십자가와 처형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십자가와 처형입니다. 유대인 군중들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아 예수를 십자가의 형벌로 처형하라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백성들에게 무슨 나쁜 일을 하였을까요? 누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혹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런데도 신기하게 그들은 일치된 마음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13절에서 14절은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고 보도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였을까요? 또 혹시 잠시 어리석은 생각에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지라도 그냥 죽이면 되지 사형(死刑)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죽여야 할지 사형의 방법까지 꼭 찍어 지정해서 요구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교수형도 아니고, 참수형도 아니고,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는 형벌에 처해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의 형벌은 그렇게 흔한 사형 집행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사람이 고안해 낸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로마에서도 특수한 경우에 한하여 십자가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살인이나 민란이나 나라에 반역한 자 같은 사람들이 받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설령 그들이 잘못 판단하여 죄인으로 지목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죄질은 그런 정도의 사형에 처할 죄질일 수 없었습니다. 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집요하게 예수를 죽이는 것 못지않게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고 목 놓아 외쳤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여기에는 종교적인 음모(陰謀)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해서 반감을 품기 시작한 것은 많은 사람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예수의 죽음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종교적인 신념과 결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를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써 어떤 사실을 신앙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공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저주(咀呪)를 받아서 죽은 자로 여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양한 죽음의 방법 중 특히 나무에 매달려 죽음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죽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신 죽음이 아니라고 말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1장 23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두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를 처형하면서도 그들에게 두려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실 때 특히 생애에 말기에 다가왔을 때 당신은 죽어도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제자들에게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부활을 믿을 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감추고, 부활했다고 소문을 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이전에 유대인들의 마음과 결부되어 그들이 그 부활을 믿어버리고, 그 신념으로 사람들이 규합을 한다면 통제 불능인 종교적인 혼란의 상태가 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니 그 사실이 뒤집힐 수 없다는 것을 쐐기를 박아놓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하고, 또 제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B. 예수 부활의 사건
그런데 예수 부활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하기 전 사울은 정통 유대인으로서 두 가지 편견을 확신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심리적인 편견이었는데 유대인만 선택된 백성이며 나머지들은 모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라는 우월주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학적인 편견이었는데 나사렛에 젊은이 예수는 결코 메시야일 수가 없다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신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잡아서 핍박하고 없애버리는 것이야말로 더이상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끔 하나님의 명예를 보존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는 것이 의로운 자의 길이라고 믿었고,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입증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공문을 청하여 예수가 부활했다고 전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예기치 못한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나타나 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 경험이 사도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 얼마나 잊혀지지 않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는지 그는 사도행전에서 이 경험을 세 번이나 싣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그 위대한 선교사역, 그 깊이 있는 신학사역, 그리고 자신을 다 드린 헌신적인 목회 사역이 바로 이 한 가지 씨앗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믿던 이 사람을 바꾸어 놓아 예수를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보도를 사도행전 9장 3절과 5절에서 전합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예측할 수도 없는 경험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뜻밖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뜻밖의 경험이 가져다 준 충격은 모순(矛盾)되는 두 가지 사실의 대립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고로 그는 하나님의 저주(咀呪)를 받은 것이다. 두 번째, 예수가 부활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당신의 특별한 아들로 인정(認定)해 주신 증거다. 두 사건 그가 직접 보았습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사건이 모순 속에 대립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잠시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민간 신앙에서는 모세가 자연사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경에는 모세의 승천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부활했다고 믿은 것입니다.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는 사람, 혹은 죽었어도 다시 살아난 사람 이런 것은 아주 극도의 소수의 인물에 국한된 것입니다.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다윗도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죽어서 그 묘가 있다고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5장 24절에 보면 계속해서 죽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죽음을 보지 않은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2장 1절에 보면 엘리야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병거타고 하늘로 올리움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대단한 인물들만이 죽음을 보지 않는 그리고 모세와 같은 사람 정도 되어야지만 죽지 않거나 죽었어도 하나님이 살리실 정도가 된다고 믿는 것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표준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란은 여기에서 극도에 달하게 된 것입니다. 자, 만약에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을 이유가 없고, 만약에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옳은 분이었다면 하나님이 저주해서 죽이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목격한 바 이 두 가지가 모두 참된 사실이었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이미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본 바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이 저주를 받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음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그의 개인의 인생을 흔들어 놓은 역사인 동시에 기독교의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가지 사실,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 예수는 부활했다는 이 두 가지 사실에 혼란을 느꼈지만 그러나 그는 성령의 도움으로 즉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 죽음의 이유가 예수 자신의 죄(罪) 때문이라면 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과 부활했다는 사실이 양립할 수 없지만 만약에 예수가 저주를 받고 죽으신 이유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다면 오히려 예수는 그렇게 저주를 받고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위 그것 없이는 기독교가 기독교 될 수밖에 없는 대속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이 구원 받을 우리 모두를 위한 대신적(代身的) 죽음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결코 당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 인간들을 위한 대리적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이 감격을 다음과 같이 피력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를 일생동안 사로잡고 있던 두 가지 편견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사렛에 예수야 말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메시야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멀리 떠난 희망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껏 자신이 율법의 행위를 지킴으로써 그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속죄를 통해 이루신 그 의(義)로써 하나님이 당신을 믿는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지성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깊은 깨달음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코 우리의 공로와 그리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자신의 의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피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이렇게 우리를 구원(救援)받을 수 있게 하시는 동기가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3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곧 이 세상에 죄인들을 구원하실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분이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사 온 인류와 세상 만물의 주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길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빌립보서 2장 9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생명 없이 율법을 붙들고 살아가던 사울의 영혼의 어두움을 찢고 돌아오는 한 줄기 섬광이었습니다. 이 예수 부활 사건을 통해 그는 우주가 열리는 경험을 하였고, 그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 인생관, 그리고 가치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모두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자부심을 가졌던 육적인 이스라엘의 역사가 영적인 새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교회를 가르칠 그림자였고 그 세상 나라는 하늘나라를 위해 사라져 가야 할 임시적인 나라였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영생은 없었습니다. 종교를 믿고 있었지만 그냥 세상 자원으로 살아갔을 뿐이었습니다. 생명 없고, 차가운 율법과 그에 대한 복종은 결국 자신의 명예와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가치 없는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서 예전에 없던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그 충만한 영생의 자원이 자신의 심령 속에 부어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파편처럼 떠돌던 구약의 모든 진리는 일시에 질서를 갖추고 길게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고, 그리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어떻게 타락했고,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고, 어떻게 하나님이 은총으로 이 세상을 완성하시는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티끌처럼 사라져 가는 자신의 인생이 먼지와 같은 이 온 인류의 역사가 그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갖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그 사람 마음에 폭발하듯 불붙었으니 그는 예수 십자가의 사랑에 붙잡힌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모든 사람이 이 예수의 사랑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인간으로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福音)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뼛속까지 사무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에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조차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버리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生命)과 사랑(love)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죽어가는 누구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고, 미워하던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그 예수의 생명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이치는 동일합니다. 지상의 모든 생물은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식물은 화학 에너지로 바꾸고, 이것을 섭취함으로써 자신의 물질적 생명의 기원으로 삼는 것이 육체의 생명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써 태양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은혜를 받고 그 은혜로 감화된 사랑을 생명으로 삼아서 모든 죽음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 영생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결코 죄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죄인 중 가장 흉악한 자 중 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아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신 것은 당신이 그렇게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그런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당신은 죽음을 담당하시고, 우리에게는 당신 죽으심 때문에 생명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생명으로 모든 시련들을 극복하며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과 현실을 용기 있게 감당하고, 거기서 나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 어떻게 불꽃처럼 타오르는지를 보게 하시기 위해서 살아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가 남아있습니다. 이 세상도 불완전하고, 죄가 있습니다. 불이 있는 곳에 타는 물질이 있으면 언제나 불꽃을 발하게 되듯이 우리의 인생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그리고 복잡한 수많은 사연들은 그 자체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모든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나팔소리와 함께 부활하는 그 부활만이 아니라 오늘 나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예수 함께 죽는 것만큼 예수 함께 다시 살 놀라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시련이라는 이름의 고통, 역경이라는 이름의 괴로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갈등, 이 모든 것들이 예수 생명의 사랑으로 태워 불꽃이 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생명의 힘으로 삼아 그 감화된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하십시오. 2000년 전 모질게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울이라는 한 젊은이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기를 다 바치며 살았던 것과 같은 그 삶이 모든 인류 속에 재연되는 것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더욱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목자로 보내셨습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고통을 겪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어디에서도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으니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잠시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고향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당부입니다. 결국 인간의 고통은 지상과 천상의 자원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자원의 원천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죄인으로 살아가면서 악악거리며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면서 독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결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씀은 긴급동의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인 줄을 깨닫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으며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의 능력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마다 예수와 함께 잘 죽는 사람들 속에는 너끈히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이 부어지는 것이니 예수의 부활이 여러분들의 부활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