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6)
녹취자 : 김경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참 쉽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그리스 원어에서 보면 그냥 생각이 아니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육신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사망이요 성령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입니다. 이 구절을 번역한 영어성경 가운데 아주 잘되어있는 성경이 RSV성경입니다. RSV 성경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번역했느냐 하면 ‘생각을 육신에 고정시키는 것은 사망이요, 생각을 성령에 고정시키는 것은 생명과 평화이니라.’ 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생각’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생각은 우리의 마음 전체를 놓고 볼 때 어떤 사물을 인식하고 그 사물에 대해서 사색하는 기능입니다. 그것이 육체에 고정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읽은 바로 앞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영은 성령입니다. 영어성경에 대문자로 나옵니다. 단순한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성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생각하는 기능이 육신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결국 그 마음의 구조 자체가 마음의 성향 자체가 무슨 정보가 들어오든지 간에 육신에게 만족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육신이 기쁨을 누리는 쪽으로 모든 사물들과 상황들을 해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뜻밖의 삶의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마음의 조율이 헝클어집니다. 기타 줄을 기가 막히게 맞춘 다음에 쫙 피크로 긁으면 아주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조율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조율이 흐트러질 때 제일 먼저 흐트러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각의 조율이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죄는 생각의 기능에 아주 깊숙이 관여합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가는 통로가 생각을 통해서 들어가고 목표는 마음을 지배합니다. 목적은 악을 행하며 하나님에게 모욕을 돌리며 살게 하는 것이 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죄는 특정한 죄를 지으라고 인간에게 지시하지 않습니다. 창조의 목적을 떠나면 모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도박에 빠지고, 성에 빠지고, 쾌락에 빠지고, 욕망에 빠지고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이 창조의 질서들을 흐트러트리면서 살게끔 만드는 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목표와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우주적인 커다란 구도 속에서 죄가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 근원을 성경이 마귀와 육신과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이야기하는데 그 육신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총 사령부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 사령부에 생각을 통해서 정보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을 바보로 만드는 길은 간신배들이 모여앉아서 그릇된 정보를 끊임없이 올리면 그리고 철옹성을 치면 왕은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서 나라를 망국의 길로 끌고 갑니다. 결국은 그 생각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전혀 관심이 없던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그 통로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살면 사람들은 언젠가는 누군가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냐고 묻는 때가 오는데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도 해야겠으나 어떻든지 그 질문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답을 내놓을 수 있도록 우리가 생각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지의 헌신이 사랑이라면 우리의 그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지성의 헌신입니다. 결국은 나의 지성을 충동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고 싶은 지식의 갈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앙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고 나면 생각이 변할 것입니다. 지나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육신적으로 생각되어진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면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러면 이 생각의 기능이 헝클어집니다. 매우 좋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레이더를 무력화시킨 다음에 그 다음에 전투기들을 내보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탐지되어서 격추될 텐데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 식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두 번째는 허둥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이 헝클어진 속에서 내리는 판단은 대부분 육적인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이 꼭 무슨 쾌락을 즐기고 돈을 벌고 질탕하게 노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존 오웬의 그 한 구절이 제가 존 오웬을 공부할 때 충격을 주었습니다.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시험에 들었다고 하면 대개 기도도 되지 않고, 다른 생각이 자꾸 나고, 죄를 짓고, 미끄러지고 그럽니다. 존 오웬은 한칼에 정리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견해이면 성경적입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다. 그러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합니까? 안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있느냐고 제가 묻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허둥대지 않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에 고정시키고 모든 문제를 보면 휘말리면서 결국은 들어가서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하나님이 영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RSV에 의하면 ‘성령의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은’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의 생각을 고정시킨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사태가 일어나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조금 진정되었다고 그렇게 안심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에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일본을 보면서 너무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지금 현재 만 명을 돌파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 확진자가 열 배는 훨씬 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아무 뜻이 없다고 우리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모두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기뻐하실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수중 안에 우리들이 다 설명할 수 없는 뜻들이 그 안에 당연히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영원히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지금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속에서 그중 일부라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갖고 어떤 의지적인 결정을 할 때에 성령 생각은 또렷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 생각이 고정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을 슬퍼하십니다.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단지 육신에게 어떤 것이 더 많은 만족을 줄 것인가 육신적으로 고통을 피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덤뻑 덤뻑 자기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결정될 때 그때 결국은 인생에서 악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잘못이 일어났는데 두 번째 둔 수가 악수인데 두 번 세 번 될 때에는 아주 더 커다란 문제로 번지는데 몸으로 말하자면 작은 상처로 끝날 것이 결국은 팔다리를 절단해야하는 사태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지금의 상황에 적용시키자면 이런 것입니다. 끝없이 불평과 불만을 계속 늘어놓고 살거나 아니면 상황을 보면서 한숨을 쉬면서 계속 ‘나는 할 수 없어! 할 수 없어!’ 라고 하거나 심지어 진리의 말씀을 다 가르쳐주면 말씀을 다 듣고 나서 ‘그런데 나는 그럴 힘이 없어요. 그런 것이 싫어요.’ 이것은 연약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끊임없이 자기의 생각을 육신에 고정시키려고 하는 아주 완고함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럼 우리가 만약에 생각을 끊임없이 성령에 고정하고 고정할 때 어떤 유익이 있느냐 하면 눈에 보이면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이 현실이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증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이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지금 겪고 있습니다. G20 국가의 수지가 경제가 20% 이상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전 세계가 고통의 도가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끊임없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원망을 하고 한탄을 하고 특정 국가를 비난하고 끊임없는 원망을 토해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우리는 무슨 도움을 주겠습니까? 마음의 응어리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빨리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의 생각이 이렇게 육신에 고정시키려는 것은 우리의 죄성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을 끊임없이 주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가 의지적으로 성령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우리의 모든 처한 상황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게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유익을 얻게 되느냐 하면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첫째가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생명은 육체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은 영적 생명입니다. 뒤에 보면 ‘육신의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은 사망이요’ 할 때 물론 나중에 그렇게 살던 사람이 심판을 당하고 죽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육신의 죽음은 정해진 것이니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은 영적 사망입니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 이미 그 사망의 기운이 침투해 들어와서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렇게 영적인 사망이라고 하는데 사망이 무엇입니까? 생명이 없으면 다 사망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육신의 생각을 고정시키면서 살아서 끊임없이 육신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석하고 살게 되면 마음에 남아있는 모든 은혜가 고갈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에는 악으로 말하자면 극단적인 이런 사랑이 없는 곳에서 나오는 극단적인 악신들이 이 안에서 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무슨 열매가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끊임없는 파국이 일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사람들과 사랑하고, 용서하고, 감싸며 살아야할 모든 관계들이 다 단절되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생각 속으로 함몰되어 가는데 그것은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와 같은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당신을 한없이 슬프게 생각하며 밤새도록 울어도 하나님이 한순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자신 속에 그렇게 빠져들어 가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밖에 우리들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애들이 학교에 못 가니까 일기장을 썼는데 마귀를 몇 개 그려놓고 ‘엄마가 괴수로 변했다.’ 엄마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학교를 보내야지만 한숨 돌릴 텐데 이놈이 한 놈, 두 놈 심지어는 세 놈씩 학교를 가지 않고 들러붙고 그러다가 아빠까지 직장에서 자택근무를 하라고 하고 자기까지 5식구 밥을 해야 하니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빨랫감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가족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방송을 들으시는 남성분들 말입니다. 진심입니다.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면서 가능하면 아내가 신경을 덜 쓰도록 그렇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청소도 하고 어떻게 하든지 가족들이 서로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자매들의 하소연이 빗발칩니다. 정말 해결의 길은 무엇이냐 하면 미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길은 사랑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생각을 성령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하고 나면 한 번에 옛날에 무슨 신앙생활이었든지 필요 없이 한 번에 강물에 휩쓸리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실 때 하나님의 사람이지 하나님이 손을 놓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을 성령에 고정시키고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을 때 그때 이것보다도 훨씬 더 이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침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고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어떻든지 그럴 확률은 적습니다.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훨씬 더 작은 이유 때문에 가정이 깨집니다. 차이는 무엇입니까?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겨낼 수 있는 생명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막아주는 것이 옹달샘입니다. 퐁퐁 샘이 솟습니다. 애들이 짓궂어져 발로 막 밟아버립니다. 흙탕물이 됩니다. 잠깐 기다리면 퐁퐁 퐁퐁 다시 맑은 물이 됩니다. 물이 계속 솟아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보면서 애틋한 사랑을 느낍니다. 어떤 식으로 그 사랑이 솟아나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그 사랑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 그런 식으로 솟아나는 것입니다. 왜? 놀라운 힘으로 솟아나는 것입니다.
제가 심각할 정도로 건강을 잃어보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아픈 모든 사람은 정신이 해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즐겨했던 이야기가 ‘이차돈은 목이 잘리고도 1.5 미터인가 2.5 미터를 걸어갔다고 하더라. 왜 그렇게 아프냐?’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파보니까 아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인간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얘야, 힘을 내려면 밥을 따뜻하게 먹어야 한단다.’ 늘 더운밥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는 더운밥이 싫고 찬밥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제가 경험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조금 회복된 다음에 보니까 한 끼 식사를 즐겁게 웃으면서 맛있게 먹고 사실 먹지도 못하지만 1/3이나 반인분 정도 먹지만 확실히 그 다음날 아침에 몸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이라는 것이 아주 지난한 과정을 많이 통과해야만 겨우 따낼 수 있는 마라톤 일등 선수가 쓰는 월계수 면류관 같은 그런 식의 생명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솟아나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 구역공부를 하면서 그랬습니다.
(찬양)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정말 저는 막막할 때 우리 아내와 함께 즐겨하는 찬송입니다. 정말 막막할 때 그 찬송을 부르고나면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이상하게 내 안에서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어떤 신비한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가 그리스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이것은 그냥 느낌으로써의 평화가 아닙니다. 어떤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어느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화목입니다. 사람들과의 화목, 나 자신과의 화목, 그래서 이것이 영적인 생명(입니다). 우리 안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이런 낙심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결국은 잘 정돈된 가운데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자신 안에서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 이런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열등감이 느껴집니다. ‘나는 예수를 많이 믿었는데 모태신앙이었는데 왜 이럴까?’ 결국은 평강의 부족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이 이 평강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주실 때 그 평강은 생명과 항상 삼투압적인 효과를 가집니다. 다시 말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만큼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빠져나가면 평강도 함께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생명 충만이 평화 충만함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주위의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달려가서 기대면 아주 넓은 품으로 여러분들을 안아줄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럽니다. ‘네가 해라. 네가 해라.’ 결국은 누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과 평강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가엾이 여기고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그렇게 끌어안으면서 사는 동안 놀랍게 자신은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뭐냐 하면 아내를, 남편을 여러분들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여러분 자신을, 성령에 고정해서 저 영혼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 외로움의 고통 소리를 남편의 마음에서 아내의 마음에서 읽어내면서 그러면서 그들을 바라보시는 성령의 생각, 나 자신을 바라보며 슬퍼하시는 성령의 생각에 고정시키면서 내가 그 고정된 생각을 따라서 내가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 때 하나님이 놀라운 생명의 기운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 평화가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너무 너무 놀랍습니다. 그래서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모두 까서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증인입니다. 내가 증인입니다. 내가 그 사랑을 받으며 그 수많은 험난한 인생의 역경을 헤치면서 살아온 증인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생각을 고정시킨 사람은 영적인 사망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며 소멸된 삶을 살아가지만, 그 생명 속에서 사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선을 산출하며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방송을 듣고 있는 모든 지체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원망하지 말고 ‘다 알 수는 없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손안에 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그러면서 성령에 고정된 생각으로 생명과 평강을 충만히 누리면서 시련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