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과 이 빛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8-9)
녹취자: 양현정
하나님은 결국 생명을 주시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생명은 자연적인 생명과 영적 생명으로 나뉘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자연적인 생명까지 거두어가셨다고 한다면 세상은 무가 되었겠습니다. 하나님이 자연적인 생명을 계속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만으로는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참된 세상을 만드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적인 생명을 다시 주시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영적인 생명이 모두 사라졌던 것은 아니고 아담이 타락한 직후에도 하나님은 그 영적인 생명을 부분적으로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그가 칼빈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에 빛 아래 살다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추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성령이 오시기까지 하나님께 구원받았던 사람들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그 하늘의 생명을 부분적으로 누리고 맞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영적인 생명은 자연적인 생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모든 영광에 이르게 될 때 그 새로운 땅과 하늘에서는 자연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들이 만나 그 자연적인 생명도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생명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탄식하는 생명이 그것으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생명으로서 그 자연적인 생명과 영적 생명들을 동시에 주셔서 그래서 그 생명들을 마지막에 하나가 되게끔 하심으로써 이 세계는 극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생명을 주시는 방법이 믿게 함으로써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증인이 필요한데 바로 하나님은 놀랍게 증인들을 하나님이 천사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증인으로 삼으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미 이러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말씀이 수없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직접 목소리로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혹은 천사들을 보내어 말씀하시기도 하고 당신 자신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실체라고 말하나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위격과 결합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가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위격과 결합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여자의 아들로 오셨는데 그 여자의 아들이 위격과 결합되심으로 참사람이시면서 참 하나님이 되셨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의 모습은 그냥 하나님이 사용하신 껍데기가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유사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의 본성에 우리를 참여시킴으로써 당신과 우리 사이에 있는 차이점, 당신은 의로운 분이시고 우리는 죄스러운 존재라는 이 상이성을 구속으로 극복하게 하셔서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받아지도록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결국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생명인데 그 영적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신 방식이 구약 시대에 사람들에게 부분적으로 주시던 것과 꼭 같은 방법이었다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구약처럼 똑같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제사를 드려도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그 생명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 생명이라는 것은 결국 처음 사람이 창조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것이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음으로써 영적인 생명이 사라지고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육체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어야 참 생명인데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육체의 죽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고 육체의 죽음은 영혼과 분리되는 것인데 첫 번째 것은 우리가 원해서 스스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죽음이 찾아옵니다. 육체의 죽음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결국은 영혼과 육체 사이에 결별이 생겨나고 그 결별의 시점에서 인간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셨기 때문에 세계를 창조하실 때 모든 세계에 당신의 생명이 충만하게 하신 것이 의도였고 특히 인간이 당신과 연합됨으로써 당신의 생명을 충만히 누려서 그래서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께 합치시키고 하나님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충분히 전달받아서 하나님의 분신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자연의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만든 것이 충만한 생명이고 이 생명이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나타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따로 추구할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으면 사랑이 있는 것이고 생명이 없으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항상 속을 썩입니다. 지금도 속을 썩일 것입니다. 부모도 옛날에는 자기 부모 속을 썩였습니다. 내리 속썩임이라고 해서 내려가며 속을 썩입니다. 어느 부모는 그 자식이 그렇게 속 썩이는데 그걸 참고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냅니다. 어떤 부모는 두들겨 패서 여행 가방 속에 넣어 죽입니다. 우린 악행을 볼 때에 어린 자식을 살해한 부모가 남들이 안 가진 엄청난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남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었으면 그 가방 속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친 흔적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랑이 있으면 가만히 있었겠느냔 말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왜 사랑이 없습니까? 왜 다른 사람들은 다 그 정도는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며 사는데 왜 그렇게 남편하고 합작을 하여 자식을 죽일 정도로 밉고 아버지라는 자는 딸의 손을 프라이팬에 지져버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실 때에 생명이 없는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뜻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하지만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좀비하고 같이 살며 누리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충만한 생명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부분적으로 조금씩 받으면서 그 생명을 받으며 사는 것으로서 당신이 생각하는 충분한 세상을 만들기에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이전 방법과 달리 충만한 생명을 인간에게 주셔서 그 충만한 생명이 인간을 떠나지 않도록 만들게 하셔서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성부와 성령과는 달리 성자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 사건이 생명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생명에 참예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으셨다면 제물이 되실 수 없었고 사람으로서 죽으셨다면 그 재물은 하나님 앞에 받아질 만한 흠 없는 재물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면서 위대한 것은 사람의 생명의 참예하셔서 실제로 죽으신 것입니다. 목숨이 끊어지셨습니다. 육체의 삶이 끝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결코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당신 생명을 끝장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한편으로 죽으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당신의 죽음에 참여시켜 우리도 같이 죽게 하시고 살아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죽음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들에 의해 없어질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이 생명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마귀가 죽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능력이 없는 곳에서 겨우 기생하여 생겨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은 무한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는 죽임을 당했지만, 영으로서는 오히려 그것을 펼쳐서 생명이 이 세상에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지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 생명을 어떤 방법으로 주셨냐 하면 증언의 방법으로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바로 이 사실을 올바로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과 그것이 불행이라는 것과 자신은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존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 이것을 증언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이 증언이 무엇이냐 하면 참고인의 이야기는 증언이 아닙니다. 법정에서 증언이 되려면 증인으로 채택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의 자격은 학식이나 연령, 성별, 사회적 지위가 문제가 아니라 사건 현장에 거기에 있어서 그 사건을 목격한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말 못 하는 벙어리라도 그 사람은 충분히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증인의 이야기를 듣고 재판장은 판결을 내립니다. 자기도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누군가 본 사람의 이야기의 증언을 듣고 반박의 의견을 듣고 또 다른 의견을 들어서 모두에게서 그날에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결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났는데 스무 명이나 사형을 시켰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보상을 해줘야 하는데 보상을 해 준다고 죽은 아버지가 살아오지 않습니다. 사형제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이고 그런 사건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게 증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 증언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아주 특별한 증언자여서, 이 사람이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동시에 신약의 첫 번째 증언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지명하신 사람이 있는데 요한이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났나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 하였습니다. 그 한 명이 일어나는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이시지만 증언을 하는 사람에 의해서 그 일이 일어나는데 그 가장 중요한 조건은 생명의 현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희은 독서법을 이야기하면서 사람으로서 책을 읽는 것은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로 중요한 일은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는 사람이 책을 읽을 때 그 책이 제대로 읽히는 것이지 사는 사람이 아닌 사람이 책을 읽어봐야 오락에 불과하단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남과 다른 인생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알았다는 정도가 사뭇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내가 이성으로서 아무것도 안 깨닫는 사람은 진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깨달은 사람이 지구라면 진리는 인공위성입니다. 인공위성은 지구를 떠난 다음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고장 나서 영원히 돌 뿐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성을 굴려서 진리를 알았다는 사람은 진리의 물이 살갗으로 흐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자기가 깊이 숙고해서 소화시켜서 안 사람들은 그 진리의 물이 살 속으로 흐르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삶은 피부에서 나오지도 않고 살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저 밑에 우리의 골수로부터 나옵니다. 진짜 깨달은 사람은 그 진리의 말씀을 받고 그 진리 때문에 자신이 죽고 자신의 삶으로 그것을 살아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은 뼛속으로 그 진리의 물이 스며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요한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누구도 이분 없이는 그 생명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외칠 수 있었던 사람은 사실은 세례 요한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죽고 성령강림 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실 때 친척이고 같은 때에 태어나 그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깊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 빛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충만한 생명으로 들어가 모든 하나님에 관한 참 생명, 참사랑, 참 진리 모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삼등분 되어 진리, 사랑,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모든 언표는 하나님은 그것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생명, 빛, 의로움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참 충만한 생명이신데 그 참 생명을 예전부터 있었던 그 생명을 모든 인간이 그 생명과 연합해서 그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와서 열어 주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사건, 성육신, 십자가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마지막에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생명의 이야기를 하다가 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고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우리가 빛을 받는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영원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것이 빛을 받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생명을 누리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생명을 보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한다면 얼굴을 보는 것이 목적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얼굴을 봄으로써 보지 않고 생각할 때 느낄 수 없는 실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하늘나라에서도 이 진리를 우리가 관조하면서 그 진리를 보며 이것은 이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진리를 비추는 목적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전에 없던 더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으로 묘사가 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에게 결국 진리를 아는 이것이 그 생명으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기의 삼위일체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창조되었으니 마땅히 그분은 당신에 의해 창조된 모든 세계를 자기의 증인으로 삼으셔야 마땅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된 모든 만물이 그분을 증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벌벌 떨고 놀라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증인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더 찬란한 빛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때 그 믿음의 지식을 가지고 세계를 다시 하강하면서 보시면서 세계의 모든 만물들이 어떻게 그 하나님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되면서 모든 세계에 사물들 속에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보게 되는 것이라 얘기합니다. 참 빛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가장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오늘도 목숨을 끊습니까? 예배 시작하고 여기까지 36분이 지났는데 2분 전에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이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34분마다 자살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동기였을 뿐이고 그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서 다른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쁨도 없고 한 번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미워하고 살고 언제적일인데 그것을 잊지 못하고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피를 쏟으며 칼을 품으며 사는 이유는 생명이 없어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는 것 자체가 상처투성이입니다. 아이들을 기르면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고 집 약상자에 과산화수소와 빨간약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은 상처 속에서 사는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나의 존재 자체가 쓰라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한 것은 생각이 안 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한 것만 기억이 납니다. 그렇지만 우리 존재 자체가 남에게 쓰라린 상처입니다. 그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거대한 착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상처가 너무 많아서 인생이 힘든 것이 아니라 생명이 모자라서입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생각만 바뀌었을 뿐 어차피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에 허덕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걱정스러운 일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합니다. 그런 사람을 아무리 환경을 좋게 해서 편안하게 해 줘도 그는 또 다른 고민을 찾아 나섭니다. 끝이 없습니다.
충만한 생명이 모자란 것입니다. 그 아이도 부모를 힘들게 했겠지만 힘들게 한 모든 아이를 부모들이 그렇게 죽이지는 않습니다. 결국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주는 종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따라오지 못한 기독교의 힘입니다. 그래서 한 그리스도인이 생명 충만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선교에 이바지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선교에 방해가 됩니다. 예수를 믿은 것은 받은 증거가 많아야 하는데 증거가 없습니다. 그 증거는 생명에 의해 양산됩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무슨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는지 더 넓게는 먼저 구원받은 우리 자녀들은 어떤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는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참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줌으로써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하게 되고 그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증언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함으로써 그 사랑 때문에 충만한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 때문에 현실을 극복하고 살아갈 힘과 용기와 위로를 얻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그런 진실한 목마름과 몸부림이 없는 것은 그 자신 속에 생명이 없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명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남아 있는 생명의 힘으로 참 진리를 알아가려고 갈망할 때에 그 생명은 더 큰 생명으로 부어지게 되고 더 큰 생명은 간절한 진리에 대한 갈망을 불러오면서 그러면서 상승하면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얼마나 여러분들이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