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과 쓸모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녹취자 : 김경애
쓸모라는 것은 어떤 물건이 유용성이나 가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을 만들지만 모두 쓸모가 있어서 만들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될 때에는 인간은 만들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해가 되는 물건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의식하고 만드는 것이 아니거나 혹은 의식을 하지 않아도 자기에게만 혹은 자기욕망을 채우는 데에만 유용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결국에는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만드는 모든 물건은 이런 일에나 저런 일에나 쓸데가 있어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쓸모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도 하나님이 쓸모가 있어서 만드신 것입니다. 만든 모든 것이 쓸모가 항상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집에 보면 한번 쓰다가 버리는 물건이 지천일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것이 꼭 필요해서 사거나 만들었는데 그것 없이 불편할 것 같아서 쓸모가 있는 줄 알고 샀는데 지금은 쓸모없게 된 물건입니다. 사람도 쓸모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자기를 부리는 자’에게 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를 보낸 자’에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요한을 가리켜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맞나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만 하나님이 보내셨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 무지렁이 같은 나도 하나님이 뜻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내셨기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나는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남들도 나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쓸데가 있어서 나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의미에 눈을 뜨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쓸모 있게 만드셨다는 사실과 내가 그 쓸모를 발견하고 또 개발하고 끊임없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으로써 내가 진짜 실제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자기의 ‘목사와 설교’에서 수없이 쓴 표현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설교자 될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수없이 말하고 항상 맨 끝에 ‘그렇게 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Useless Man 그것 보다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지혜 자는 게으른 자는 자기를 보낸 자에게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에 초는 당시 발효시켜서 만든 식초를 뜻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 아교질이 벗겨져서 신경으로 바로 온도가 전해지고 쉽게 이야기하면 두꺼운 방화 복을 입은 사람은 불길에도 온도를 크게 느끼지 않지만 그저 가벼운 무명옷을 입은 사람은 더우면 그 불길이 느껴지는 것 같고 추우면 추위가 느끼지는 것처럼 이빨도 그렇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이가 많아서 아교질이 다 닳고 그리고 이제 무엇이든지 이에 닿으면 바로 신경에 통하는 사람에게 식초를 이빨에 들이부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이 세상에서 그런 끔찍한 고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이 자기를 보낸 사람에게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지혜 자는 이 글을 쓰면서 하인이나 혹은 신하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중대하고 급한 일을 위해 심부름을 보내는데 천성이 게을러서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 일을 그르치고 때도 놓쳐서 엉망으로 만드는 종을 바라보는 주인이나 혹은 그런 신하를 바라보는 임금을 생각하고 이 글을 쓴 것입니다.
눈의 연기라고 했는데 히브리어도 그냥 눈입니다. 아마 우리의 온 몸 중에서 가장 소중한 기관 중 하나가 눈일 것입니다. 심장은 엔진과 같아서 피를 돌아 우리를 살아있게 하지만 눈은 살아 있는 사람이 외부세계와 통하는 가장 큰 눈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눈을 보호할 많은 장치를 만드셨습니다. 이마에 눈썹을 붙여 무엇인가 흘러들어온 것을 막으시고 위아래 속눈썹을 촘촘히 박으셔서 검불이나 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호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눈꺼풀은 와이퍼의 역할을 해서 끊임없이 눈 안구 쪽으로 습기를 내보내고 그 습기를 이용해서 깜빡이면서 끊임없이 안구를 닦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이 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사람이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능을 주셔서 눈동자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기가 들어옵니다. 연기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태우느냐에 따라서 연기의 종류는 사뭇 다른데 장작을 기본으로 하자면 기본적으로 탄소의 미립자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들이 나무를 때다 보면 여러분들은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는데 물방울입니다. 액체 수증기입니다. 유증기입니다. 그리고 기타 휘발성 액체의 입자들이 불이 탈 때 연기를 내는 것입니다. 불완전 연소된 상태에서 연기가 납니다. 그러니 그 미립자가 우리의 살갗에 붙으면 우리는 느끼지는 못하지만 예민하기 짝이 없는 이 눈에 탄소 미립자를 비롯해서 수증기와 유증기의 액체 미립자들이 달라붙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물감이 금방 느껴지고 그래서 눈물이 쏟아지게 됩니다. 눈물이 쏟아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불순물을 제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에서 탈이 나고 장이나 위에 소화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설사가 납니다. 우리의 몸이 소화할 수 없는 이상한 물질이 장안에 있으니 온 몸에 신호를 보내어 수비총동원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온 몸의 수분을 모아서 장 쪽으로 보내고 그리고 거기서 확 물과 함께 소화시킬 수 없는 물질을 밖으로 배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입니다. 눈도 하나님이 그런 생리학적인 것을 만들어내셔서 눈물을 펑펑 쏟아지게 해서 그 눈물과 함께 탄소미립자를 여러 가지 입자들을 밖으로 쏟아내는 것입니다. 쏟아낸다고 할지라도 그 쏟아내서 밖으로 배출되기 전까지는 그 여리디 여린 눈 안쪽의 막과 결막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통증을 가져오는데 이것이 바로 연기를 마실 때 나는 눈이 매운 이유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을 지지는 것처럼 그런 끔찍한 고통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일상적으로 겪는 자연적인 고통가운데는 상상하기 싫은 고통입니다. 그것이 바로 게으른 사람이 자기를 보낸 자에게 주는 느낌입니다. 피고용인이 고용인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주는 느낌이 바로 그런 느낌입니다. 정작 게으른 사람은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의 그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이해를 못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게으른 사람들이 공감의 능력도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이 대부분 눈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 삶의 방식, 삶의 목표는 모두 하나님에게 열납됩니다. 그런데 삶의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삶의 목표가 이것이라고 부여를 받았는데 그런데도 게으르고 나태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의 초와 같고 그분의 눈에 연기와 같습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인생을 낭비하고 재능도 별로 없고 탁월한 지성도 현저히 모자라는데 그 위에 게으르기까지 하니 재난위에 재난이 덮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겠으며 빛나는 인생은 그만 두고라도 그런 사람에게 보람 있는 인생이 있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이 게으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가 게으르게 산 것에 대해서 눈물로 회개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정해진 인생의 시간은 촛불처럼 타들어가고 그리고 어느덧 죽음의 장막이 우리에게 드리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선악 간에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오늘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렇게 나태하고 게으르게 살아서 당신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종이 되라고 이 세상에 보내신 우리가 왜 그 긴 세월 동안 주인의 이빨에 초와 같고 그분의 눈에 연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 살다가 이렇게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는지를 주님이 이해할 수 있게 변명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그분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가 변명할 말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마 많이 변명할수록 우리의 죄는 배가 될 것입니다. 심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분 앞에 서서 비로소 이런 생을 산다는 것과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살아온 인생의 날을 보면서 살아온 여러분들을 손가락질하며 여러분들을 욕할 날이 올 것입니다. 미친것입니다. ‘그 아까운 세월을 그렇게 낭비하고 보내더니 너는 정신이 있는 사람이냐?’ 손가락질하고 울부짖어도 그 손가락질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니 여러분이 자신을 떠나서 어디로 갈지 생각해 보십시오.
서울대공원에 올 가을처럼 즐긴 해가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즐겼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저것이 인생이구나!’ 파란 새싹이 돋아나고, 푸름을 자랑하고, 파스텔 톤에서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고, 그리고 단풍이 들고, 그리고는 마지막에 허공을 맴돌면서 땅에 떨어져서 사람들에게 밟히니 부스러기가 되고 바람과 함께 허공에 날리는 그것이 인생입니다. 어차피 한번 살 인생이니 오늘 하루를 즐기자는 인생관은 예수를 만나기 전의 여러분들의 인생관이었습니다. 만나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말로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고 나는 천국을 가는 천국을 향한 순례자라고 하지만 사는 삶은 순례자 같지 않고 행락객 같다면 그것이 진짜 순례자입니까? 반짝 순례자입니다. 마음속에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밤에 내가 너를 데려가겠다고 주님이 말씀 하실 때 ‘주님 죽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나를 데려가소서. 그런데 이 땅에 두고 가는 이 일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 가슴 뛰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욕망!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한 거룩한 열망! 내가 이 일이 이루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는 일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없으니까 게으르게 사는 것입니다. 눈을 감지 못할 만한 일이 여러분들에게 있는가? 이것은 세상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삶에 의미에 대한 궁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바로 그렇게 게으른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하나님을 향하여 치열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지런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사람들은 올바르게 방향을 잡아주어 새 불을 주고 그리고 엔진이 꺼진 것처럼 도무지 가지 않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서 그래서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이 누구에게 불을 지르겠습니까?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전달해도 저 사람에게는 개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불꽃이 일어나서 던져도 그 사람의 마음에 다다르기 전에 공중에서 꺼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불이 없는데 무엇으로 그 사람의 가슴에 불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이 일에도 슬프지 않고, 저 일에도 환희가 없고, 이 일에도 가슴이 아프지 않고, 저 일에도 마음이 시원하지 않다면 도대체 우리를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 게으름에 대해서 이렇게 광범위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반복해서 계속 안타깝게 많이 이야기하면 대부분 그 사람 마음을 대부분 차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게으름에 대해서 경고하고 게으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부지런히 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거기에 빠질 위험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짧은 인생입니다. 주님의 이에 초와 같고 눈의 연기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추수하는 가을날에 땀을 흘린 추수 꾼들을 위해 한 사발의 냉수와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