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감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上).
I. 본문 해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해주었지만 은혜가 떨어지자 복음을 버리고 다시 유대인 거짓 교사들의 꼬임을 받아들여 율법주의로 가려고 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이고 하나님을 거슬리고 그리스도를 거슬리는 것인지 명백히 한 후 불후의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남기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II. “못 박혔다”의 의미
여기에서 “못 박혔다”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A. 일회적 사건
일회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한번 일어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강한 편견과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가 죽은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는 결코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훼방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셔서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아직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메섹을 향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뜻밖의 사건을 경험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에 빠졌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므두셀라나 혹은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엘리야 같은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거나 죽음에서 다시 일으킴을 받았던 모든 사건은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인정해주신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증해주신 증거였습니다.
예수가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고 믿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능력으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저주를 받고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이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을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커다란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고 죽으신 십자가를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신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만이 자기를 구원하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고백하고 그를 전심으로 의지할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이 전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도 바울에게는 처음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B. 반복적 경험
오늘 사도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하는 것은 옛날의 경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그 의미를 알고 자기가 회심하였던 과거적 사건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는 이 대목을 희랍어 성경은 ‘에스타우로타이’(έσταυρωται)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하는 의미를 가진 동사 ‘스타우로’(σταυρω)의 현재완료형입니다. 희랍어 문법에서 현재완료의 시제는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지금까지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회심하므로 자기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회심의 사건은 일회의 사건이었으나 그 후에도 사도 바울의 삶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의 경험은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6주 동안 심하게 예배시간에 견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드려야 할 예배시간이 배교에 가까운 태만으로 얼룩지고 예배를 드려도 마음에 어떠한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없이 졸음과 부주의와 집중하지 않는 방만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다가 영혼에 아무 유익도 없이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은 원래 그렇게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모든 뿌리를 더듬어 가면 둘도 아니고 하나의 사실로 귀착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 교회 와서 어둠 가운데 헤매고 무지 가운데 시달리다가 복음의 밝은 빛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월요일부터 주일을 기다렸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당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1부 예배부터 4부 예배까지 4번을 반복해서 예배를 드려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달콤했습니까? 예배시간 내내 진리의 말씀이 마치 자기 한사람을 위한 말씀인 것처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에 큰 기쁨 속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도서관의 tape을 빌려다가 일주일에 2개, 3개씩 설교를 들으면서 영혼의 양식을 삼고 위로를 삼으면서 믿음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까? 헌금 시간마다 마음이 아픈 것은 바치고 싶지만 너무나 가난해서 바칠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까? 이런 착한 예배자가 어느 새 마음에 기름기가 가득하고 심령의 얼굴에 개기름이 흘러 무엇도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이 없는 배짱만 남은 신자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환경이 바뀌어서 입니까? 예배당도 그 장소 그대로이고 설교자도 그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바뀐 것은 여러분들 마음 하나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설교자의 메시지가 세속적으로 돌변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한 가지가 사라지자 모든 것이 사라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큰 사랑, 이 벌레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 그것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감격이 사라지자 나머지 모든 예배의 생활과 헌신의 생활들이 한꺼번에 뿌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에서 일하고 선교, 전도, 구제, 봉사를 하고 부지런히 애를 썼지만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의 더 큰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으면 종교적인 노동일뿐입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는 마각을 드러내고 교회를 물을 날이 올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사도를 보십시오.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났고 회개를 한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의 삶은 행복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족들에게 버림 받고 가족들과 이별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박수 소리와 환영하는 인파가 아니라 핍박과 시련, 가혹한 음모와 죽음을 넘나드는 형벌 같은 고난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목회자에게 교회는 위로가 되었습니까? 물고 뜯는 더러운 교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한 때는 어머니 같은 사도 바울의 앞가슴을 풀어 헤쳐 젖을 물려 기른 새끼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길러 놓았더니 호랑이 같은 존재들이 되어 자기 부모를 물려고 덤벼드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그가 악을 복수로 갚지 않고 자기를 향한 미움을 원망으로 되돌려 주지 않고 교회를 위해 받는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며 자기를 성숙시키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사도 바울의 자연적인 인간성이 훌륭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라는 현재완료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삶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버려도 그리스도는 사도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해지는 순간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서 눈물 흘릴 때와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 아래서 그분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것에 대해 깊이 눈물을 흘릴 때 가장 순결한 마음으로 돌아간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에 대한 감격,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진실한 기쁨이 성도의 마음에서 사라지자 그는 부주의한 예배 생활, 마음을 쏟지 않는 기도생활, 세속의 감정으로 가득 찬 그러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전에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피 저리도록 눈물 흘려보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목회의 무거운 짐이 되지만 더 큰 짐은 한때는 그런 그리스도의 사건을 경험했지만 지금은 그 십자가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리고 차갑게 식어버린 신자들이 교회에 더 큰 고통과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쇠가 시뻘겋게 녹을 듯이 달아올랐다가 식은 쇠는 그런 적이 없는 쇠보다 훨씬 더 단단해집니다. 원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몰랐던 교인보다는 한번 은혜의 세계를 알고 뒤로 물러간 사람들의 마음이 돌멩이 같이 더 굳게 마련입니다.
III. 최고의 감사
사도는 커다란 고난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감사입니다. 나머지 모든 감사는 이 감사에 매달린 감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야 할 자기를 대신해서 주님이 대신 당하고 죽으신 그 고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자기가 받은 구원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신자가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복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영혼의 복이고 또 하나는 섭리의 복입니다.
A. 두 복: 영혼과 섭리
영혼의 복은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어루만지셔서 주시는 복입니다. 그 복은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의 본성을 바꾸어 놓아 그의 행동과 삶의 실천을 고칩니다. 새로운 사랑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근원이 되는 복입니다.
어떤 한 신자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고난의 십자가가 더 이상 현실로 다가오지 않고 구원이 일상적인 것으로 느껴져 아무런 감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면 그가 바로 그러한 영혼의 축복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마치 육체의 커다란 질병이 든 여인에게 여러 가지 화장을 시키고 분을 바르고 예쁜 옷을 입히고 고운 액세서리를 수없이 달아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서 그의 몸속에 있는 질병이 나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처지입니다. 그러나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높은 지위 없고 이 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예배 속에서, 말씀 속에서, 기도생활 속에서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큰 고난과 사랑이 현재적으로 느껴져 구원의 감격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의 영혼은 지금도 하나님이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니 큰 복의 상태에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친절과 위로를 베풀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며 자기를 드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그렇게 섬기는 것이 자신의 진정한 힘이요, 위로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에 붙잡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영혼들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고난이 오면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더 닮을 것이고 이 풍랑 인하여 주께로 다가갈 것이기 때문이고 순풍에 돛 단것 같은 인생이 계속되면 주께서 주신 많은 물질과 주께서 베풀어주신 복으로 영혼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복은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만약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동안에만 먹이시고 당신께 순종하는 동안에만 입히셨다면 우리 모두 굶어죽거나 핍절한 사람이 되어서 벌거벗은 몸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끄러질 때에도 먹이시고 우리가 불순종하고 심지어는 모질게 주님께 반역하며 죄의 길을 걸어갈 때에도 원기를 북돋을 수 있는 음식과 적절한 의복들과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직업과 따뜻한 가정과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줄 몰랐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모든 것들을 주셔서 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누군가를 구제하거나 도울 때에 칭찬을 받고 감사의 표시를 받을 요량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의도로 했다고 할 것 같으면 동기 자체가 매우 그릇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거나 호의를 베풀었을 때 그가 내게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때에는 그렇게 베풀어준 것을 통하여 더욱 더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더 깊은 관계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게 되지만 그가 내가 베푼 호의와 친절에 대해서 추호의 감사의 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그 호의를 베푼 것이 계기가 되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더 이상 진전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베풀어주실 그때에 우리에게 감사의 고백을 받으실 목적으로 그것을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비와 선을 베푸시고 한 해 동안도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살리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따른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넘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아들의 고난 받으시는 사랑에 대한 감사가 없는데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밝히 선언합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며 일 년 동안 받았던 우리의 크고 많은 물질의 복과 일반 섭리의 무수한 복들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구원의 은혜에서 비롯된 복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나의 인생은 이제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노라고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배반하는 우리들과 비교해서 하나님은 한번 우리를 택하여 당신의 자녀를 삼으신 후 우리의 신앙의 상태와 상관없이 신실하게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며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껏 우리가 산 것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우리가 모르는 동안에도 아버지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복 때문이었다고 믿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들, 구원의 감격이 사라졌기 때문에 눈멀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많은 증거들을 보면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B. 두 복의 관계
이 복의 관계는 마치 내심과 외연의 관계와 같아서 주님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격의 넘치는 내면의 세계에서 이것들이 흘러나와 마음을 적시고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리며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큰 사랑의 빚 진자로 살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복되게 하셔서 사물들의 질서를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변화시키셔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감사하기는커녕 한 해 동안 최악의 세월을 보낸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사업, 혹은 가정에 최대의 위기를 만나서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비록 그렇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혹은 그렇게 된 이유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충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하게 된 결과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명백히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징계하시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자식을 때로는 때리고 때로는 책망할 때도 있지만 사랑하는 부모의 궁극적인 의도는 그 자식이 참된 부모와의 관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풍족하고 부요하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십자가를 생각하지 아니할까봐 하나님께서 미끄러지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벼랑에서 붙들기 위해 여러분들의 영혼은 붙들고 여러분들의 육체의 삶은 절벽 앞에 세웠을지도 모릅니다. 이때에 여러분들이 최고로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거기서 가장 커다란 위기와 고난 속에서도 나의 영혼을 붙들고 계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맺은 언약을 지금도 변화시키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감사하십시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나의 인생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의미에 사로잡히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되었으니 주님의 뜻대로 나의 인생을 이끌어 달라고 깊이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형통한 자들은 형통한 대로 주 앞에 눈물 없이는 감사할 수 없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그 고난에 아픈 만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생각 때문에 주님께 감사의 정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Ⅳ. 결론: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감
우리는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고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우리가 간구할 바를 알지 못하여도 우리 대신 우리 속에서 간구하고 계시는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제껏 고난의 길을 헤치고 걸어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시고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고 교회가 있고 여러분들의 영혼의 목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미끄러졌다면 그곳에서 일어날 것이며 쓰러졌다면 주님이 우리를 그곳에서 일으켜 세워주셔서 우리로 새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에 불구하고 최고의 감사를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께 드려 여러분들의 영혼에 큰 위로의 시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