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은 누구인가?
녹취자 : 김경애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9-10)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가장 중요한 핵심은 증언의 목표는 믿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은 평가가 엇갈리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의 증언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러나 확실히 영향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분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부흥에 관한 것인데 그러나 그 당시의 가득 찼던 불신의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비록 모든 사람이 신실하게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들이 입증할 수 없듯이 그 나름대로 강한 말씀의 영향력이 끼쳤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이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이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여튼 하나님의 말씀을 광야에서 전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광야로 와서 회개를 하고 또 세례를 받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이 세례 요한의 출생을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앞길을 예비하기 위한 요한을 바라보며 그가 빛의 증거자였다는 것을 예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빛에 대해 증거하러 왔습니다. 증언의 목표는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무엇을 가리킬 때 그것은 손가락이 얼마나 예쁘고 혹은 흰 손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에 뭔가 괄목할 만한 일이 있으니 지켜보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목회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시대는 점점 목회가 안 되는 시대이니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많이 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고 목회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목회자로 빚어져 가느냐를 잴 수 있는 한 중요한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의 인격의 착함만도 아니고 그가 얼마나 교회라는 문맥에서 주어진 지시 사항들을 훌륭하게 수행해내느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물론 사람들은 당장 편한 것이 쉬운 것이니까 일을 잘하고 말을 잘 듣고 그리고 착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과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교회 전체적으로 굴러가는데 가장 소용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도 받고 인정도 받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저 자신도 그런 사람이 물론 좋습니다.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매우 바람직한 일이고 여러분 모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능하기는 참 유능한데 여러 사람과 같이 일을 하게 하면 결코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악의 사람은 전혀 유능하지 않으면서 혼자 두면 아무것도 안 하고, 여럿을 모아놓으면 분란만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에 비추어 본다면 아까 말씀드린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회를 한다는 것은 이제 결국은 자기가 그런 사람으로 얼마나 준비되었는가 하는 그런 것에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입니다. ‘금년에 나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전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울역에 가면 옛날에 대우빌딩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네모나고 가장 큰 건물이 서울역 맞은편에 있습니다. 뒤편에 보면 석조 건물로 지은 예배당이 아직도 있습니다. 남대문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42년 동안 목회를 하시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그 교회를 개척하셨는지는 모르지만 42년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고 배명준이라는 목사님이셨는데 저는 신학교 4학년 때 그 목사님께 목회 서신을 배우면서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분은 학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42년 동안 목회하시고 은퇴하신 것이니까 1970년대 말 정도에 은퇴를 하셨으니까, 6.25를 비롯해서 모든 것을 겪으신 분이셨습니다. 평양의 숭실학교를 나오셨는데 그분이 간증하는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아! 바로 저것이구나? 저것이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사람인가 아닌가에 대한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인가 고등학교도 되지 못하고 중학교인데 그 당시에는 하도 교역자가 없으니까 일단 기독교 계통의 중학교를 다니면 전도사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전도사라는 말을 쓰지 않고 도울 조(助)자를 써서 ‘조사’라고 했답니다. 그러니 이 쪼그만 시골교회가 있는데 그래도 교인은 몇십 명이 모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그때가 1930년도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우리도 전도사를 모셔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니까 온갖 수소문을 했더니 ‘평양에 있는 어느 중학교에 지금은 2학년밖에 안 되었지만 아주 신앙이 돈독하고 열렬한 조사감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결국 연락이 가서 우리가 몇 월 며칠 몇 시에 수요일 예배를 드리니 설교를 하러 오라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 양반이 대동강을 건너서 수요예배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어렸을 때 아주 가난해서 못 먹고 커서 그런지 키가 아주 작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몸집보다는 훨씬 큰 교복을 입고 모자를 썼는데 모자가 머리가 쑥 들어갈 정도로 그렇게 우스운 몰골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분이 좋은 분이라고 추천한 장로님이 나가서 맞이했는데 교인들이 예배 시간 전에 도착해서 보니까 어디서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님 한 분은 세상에 말이지 어디 사람이 없어서 저런 애송이를 데리고 왔느냐고 했습니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저도 보지 못했는데 대동강 그쪽에는 짜파구리라는 벌레가 있었나 봅니다. 그 벌레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데 큼직한 벌레가 있었나 봅니다. 참고로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이 까까머리 전도사가 모자를 벗으니까 더 볼품이 없었고 먹지를 못해서 말라서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교 2학년 정도 되는 체구로 올라갔는데 교인들이 그 당시에 신앙의 열심을 품은 사람들이고 한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앉아서 보면서 다들 ‘저것이 뭐를 하겠나?’ 하는 태도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성경을 펴서 읽고 설교를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교인들이 울기 시작해서 마지막에 설교가 끝날 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 되겠냐고 아주 크게 책망하는 설교를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는 설교를 해서 어쨌든 설교가 끝나고 나서 다 같이 기도하자고 할 때는 교인들이 의자에 못 있고 다 내려와서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를 정도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결국은 그 사람을 그 어린 사람을 전도사로 초청하고, 사람이 없어서 어디 저런 사람을 설교하라고 데리고 왔느냐고 짜증을 냈던 그 장로님이 전도사님께 얼마나 극진하게 하는지 결국은 자기 딸하고 결혼을 시켜서 나중에 사위로 맞았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단순히 길거리를 다니면서 전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빛에 대해 증언할 때 과연 사람들의 마음속에 울림이 있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믿을 마음이 생겨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영향력이 없으면 그는 아직 목회자로 준비된 사람이 아니고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월이 흐르는 것과 함께 자기가 설교할 때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대개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항상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신의 책 ‘설교와 설교자’라는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나에게 한줄기 희미한 빛이나마 보여줄 수 있다면 내가 하나님에 관한 무엇이라도 새롭게 깨닫게 해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회중들이 몰랐던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 빛이신 하나님을 믿게 해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냉엄하게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런 능력이 있느냐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영 그럴 영향력이 없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명심하여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빛에 대해 증언할 때 반드시 자신의 증언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고 어른들에게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세계의 설교역사를 살펴보면서 설교자로서 이 세계에 영향력을 끼쳤던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명을 받은 후에 그가 바로 이러한 말씀을 전할 때 나타나는 어떤 결과로써 그런 영향력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끼쳤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보기에는 전통적인 리폼드 라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사람들 중의 하나가 에크하르트라는 독일의 설교자입니다. 이 사람은 아마 경건주의 시대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사람은 다른 경건주의자들과는 달리 대단한 학식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주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비적인 경향을 띄고 있기는 한데 엄청난 말씀의 능력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깊은 하나님에 대한 명상 끝에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한 90여 명의 사람에게 설교를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다 실신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증언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인하여 주님을 믿게 하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위중한 수술을 마치고 난 의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수술 문을 나왔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대기하던 사람들이 달려와서 ‘선생님 환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수술은 잘 끝났습니까?’ 이 의사가 하는 이야기가 ‘환타스틱한 수술이었습니다.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은 새로운 방법으로 그리고 정교한 수술을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환자는 죽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수술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있는 것이지 수술이 최초로 하는 시술이라는 것을 보여주거나 혹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섬세한 손길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수술의 목적이 아닙니다. 죽어야 할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수술의 목적입니다.
오늘날은 아주 슬픈 시대입니다. 알렉산더라는 구 프린스턴의 교수가 한탄했듯이 오늘날 젊은 설교자들은 설교를 할 때 듣는 사람의 저 깊은 마음의 대양의 바다에 거기를 출렁거려서 거기를 흔들어 놓을 의지가 없이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매끈하게, 그리고 그냥 듣기 좋게, 그리고 듣고 나면 왠지 기분이 상쾌해지고 시원한 그런 것을 듣고 싶어 하고 또 그런 설교를 하면서 만족하고 또 이상하게 그런 설교를 하는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설교자의 소명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자기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믿게 될 때에 더 큰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이 바로 그 빛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이 그 빛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성경에 나와 있는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춘추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춘추는 세월을 이야기하는데 춘추화의 사고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설교를 못했던 사람치고는 춘추화의 사고를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설교에 탁월한 권능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 춘추화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존 낙스 같은 사람은 자신이 예레미아라는 춘추화에 빠지기도 했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결코 좋게 판단 받지 못하는 그런 수많은 영국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에 앞장서게 되고 영국 사람들은 그때 파괴된 교회를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종교개혁을 디스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때 내가 너무 좋아했던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자신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곧 죽습니다. 그 아들을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하는 춘추화에 말려듭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고에 말려들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면 이러한 사고로 이끌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극단화 되었을 때에 이만희를 비롯한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아주 춘추화 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격화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가슴에 새겨야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통해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이 생겨날수록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단호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그리고 나는 잊혀야 할 존재라고 하는 생각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능하고 영향을 많이 끼친 설교자 중에 겸손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교만해지는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것은 쓰시는 것이고, 교만한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신다는 사실이 교만을 덮을 수 없고, 또 교만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쓰신다는 사실을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는데 좋은 것들 때문에 나쁜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쁜 것 때문에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을 가려서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영향력이 없는 사람에게 그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고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빛의 증인으로 소명을 받았으니 내가 이 빛을 증거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하여 믿게 하시든지 아니면 나를 데려가시든지…….’ 이것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이 소명을 가졌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으로 못 사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못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신학화의 작업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몸부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울리는 것은 너는 그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빛에 대해서 단지 증거하러 온 사람이지 결코 너 자신은 빛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이 일단 목회에 성공하거나 말씀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빛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보여주는 사실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했으니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빛이 따로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 참 빛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입니까? 성자가 참 빛이시면 그러면 성부는 참 빛이 아닙니까? 성령은 참 빛이 아닙니까? 이것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삼위일체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참 빛은 하나님이시다. 성부도 참 빛이요, 성자도 참 빛이요, 성령도 참 빛이시다. 그분에게 빛이시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분은 빛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참 빛이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엇이 왔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셨습니다. 사람이 참 빛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이 참 빛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나 보좌 우편에 여전히 계셔서 그분은 성부와 함께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고 성령과 함께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성부, 성자, 성령 그 하나님이 참 빛이시고 그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성을 입으신 이유는 이 참 빛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계시해 주셨지만,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 이외에는 이 참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심으로써 참 빛이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셨을 때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자연 모든 만물을 가까이하시는지를 보여주게 하시기 위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의심할 여지 없이 볼 수 있는 감각적인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참 빛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분 홀로가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참 빛이신데 그 삼위일체에의 하나님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공통된 신적 본질을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빛이라고 할 때 그 빛은 성자의 빛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 빛이 아니라 한 빛입니다. 그 한 빛이신 하나님이 신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이 이 세상의 빛이 되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것만 설명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그 빛에 대해서 묘사를 합니다. 무엇이라고 묘사를 하는지 구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어떤 구절입니까?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동방박사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찾아 경배하기 위해 올 때 하늘에 떴던 그 별은 과학자들이 어떤 혜성의 주기와 일치한다고 보기도 하는데 아무튼 우리야 그 진실성을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그 진리의 빛은 그렇게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공중에 떠 있는 빛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어린아이와 같이 미련하다고 할지라도 각 사람에게 비추었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의 머리를 비추거나 혹은 가슴팍을 비추고 있다고 하는 물질의 빛은 물리적인 몸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면 각 사람에게 비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각 사람의 영혼입니다. 특히 각 사람의 영혼의 기능 중 지성에 비추는 빛이 있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태양이 뜨면 만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그 빛이 비추게 됩니다. 그것을 만물이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어느 그늘막 뒤로 숨는다면 그늘막을 비출 뿐이고 자신도 그 빛의 영향력을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태양이 뜨면 모든 만물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빛에 비춤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때 그것은 모든 사람 각사람 영혼에 비취는 찬란한 빛이었습니다. 누구도 그 빛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구약 때에는 그렇지 않았느냐 하면 물론 구약 때에도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비추는 진리의 빛의 방식이 구약시대와 똑같았더라면 특별히 신약시대의 축복성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셨는데 결국은 이것이 진리의 빛을 받는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이 진리의 빛이 아주 보다 명확하게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각 사람의 영혼에 비취는 빛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받아들였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보냄을 받은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 제일 먼저 가르쳐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도끼가 나무의 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는 자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설교하였을 때 하나님의 의로운 표징이 보였고 거기에서 벗어난 자신들의 죄가 보임으로 그 참 빛을 보지 못하게 했던 높고 교만해진 마음이 이사야 40장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무너져서 평지가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그 마음에 난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을 깊이 회개할 때에 그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때 그 빛이 각 사람의 영혼을 비출 때 어떤 사람은 그 빛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하게 그 빛을 거부하는 일들이 일어났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목회자의 사명이 그 빛을 증언할 때 사람들을 믿게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빛에 대해서 증언할 때는 온갖 심각성이 넘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해야 한다는 깊은 결기가 설교자 속에 묻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설교단에 설 때 그는 일평생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 한 시간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믿게 하는 것이지만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 진리가 선포될 때에 그 진리를 자신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비극인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존귀하게 생각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악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안 믿겠다고 하면 그 복음을 거절할 수도 있는 그 인간의 결정을 하나님이 존중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러한 자율에 대해서 마지막에 자신이 영원한 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비극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심각하지 않고, 듣는 사람도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신앙을 자기가 생각하는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좀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떤 도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을 깊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만약에 제가 여러분들이라면 모든 기도 제목이 필요 없고 오직 하나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시옵소서.’ 저는 50세가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신비한 하나님을 나는 30대 때처럼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저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제껏 살아왔던 설교의 세계에서 커다란 방향 전환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책이 2006년도에 나온 ‘자기 깨어짐’이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작하는 사람이 그랬습니다. ‘이제까지 나온 것과 전혀 다른 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얼마를 더 인생을 살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도 우리에게 매일 매일 일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보다 좀 더 젊었을까? 여러분만한 시절에 30대 초반에 교수가 막 되고 나서 열렬하게 읽던 책 하나가 우리말로 뭐라고 번역되었나요? XXXX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 있었던 위대한 설교자들을 짤막하게 한 권에 10명 정도씩 다루면서 10권인가 20권으로 되어있는 책이었는데 ‘세계명설교전집’ 이었나? 물론 설교도 읽었지만 전기를 3편 정도 읽었는데 전기를 읽으면서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설교를 누가 잘하나에 관심이 많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떻게 설교자가 되기까지 하나님 앞에 다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성공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누가 그 사람의 고생하던 때의 일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장 설교에 성공하게 한 내가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읽으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던 한 세기를 흔들어 놓았던 위대한 설교자들의 공통점은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경험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비전을 꿈꾸며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찾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전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몸부림을 치면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하는데 솔직히 얘기해서 기도를 시키면 못하겠습니까? 어느 한 교회에서는 출석부를 놓고 6개월마다 한 번씩 정리해서 교역자들을 내보낸답니다. 못하겠습니까?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형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그래서 코로나 때문에 심방도 하지 않고 열렬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없이 기도도 하지 않고 그런 사람이 오만가지를 배운들 그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집에서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똑똑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보다는 약간 능력이 모자라도 눈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