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생명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녹취자: 이새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뜻을 따라 행복하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반드시 행복하려다가 불행해지는 것이지 불행해지려다가 불행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깨닫는 사실 하나는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길은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욕구가 크면 클수록 그는 필멸하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오늘 성경은 세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참 빛이신 하나님 그리고 그 빛을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빛을 받고 그래서(받습니다.) 이제 어거스틴은 이 빛을 삼위일체 안에 있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 빛을 받아서 그 빛을 가지고 이 하나님과 이 창조하신 세계를, 또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될 때에 인간이 진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진리의 빛 때문에 행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방향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가장 큰 유익은 사랑을 질서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나를 향한 사랑이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대상과 질서가 누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지혜로운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열정이 있다는 이야기는 욕구가 크다는 것인데, 그의 삶의 방향이 올바르게 정해질 경우에는 그 열정과 욕구가 그를 뛰어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그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는 오히려 매우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역사 속에 있었던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그 미친 사랑을 했는지를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무려 다섯 번 정도 부인을 바꿉니다. 그러고 이상하게 부인을 바꿀 때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전쟁과 평화』 같은 대작들이 터집니다. 그런 엄청난 작품들을 쏟아내지만 그의 마지막 삶은 매우 비참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총을 물려받고 어머니로부터는 바이올린을 물려받았는데 마지막에 총으로 자살해서 죽습니다.
결국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는 진리의 빛이 없이는 인간은 방향을 잡을 수 없고, 방향을 잡을 수 없다면 그 모든 가지고 있는 열정과 생애의 열의와 욕구, 이런 것들도 결국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때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끊임없이 모순적인 삶을 살았고, 육체의 욕구나 혹은 욕망을 멸시하는 삶을 선택하면서도 톨스토이의 집에 매일 오는 식객들이 수십 명씩 됐다고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같은 사람도 톨스토이에 의해서 엄청나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럽과 인도 같은 데서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 사람은(사람들은 그의) 철저한 금욕생활에 감화를 받았지만 정작 자기는 부엌에 숨어서 고기를 먹어야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톨스토이에게 깊이 끌렸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도스토에프스키가 더 인간적이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끊임없이 금욕을 말하면서도 부인은 항상 임신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또 그것을 폭로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금욕적인 삶에 동의하지 않는 자식들을 보면서 전부 도움이 안 되는 자녀들이라고, 자녀들을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고 결국 기차역에서 쓸쓸히 노숙자로 죽습니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표독스럽게 반응을 하고 교회를 향해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자기는 참회록에서 근원도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구름 위에 떠 있는 탄탄한 기반이라고 이야기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왜 삼위일체는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그런 의문을 품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탁월한 예술적 천재성을 지니고 있고 심지어 학문적인 탁월성을 지니고 있거나 철학적인 재능이 특출하다고 할지라도 그 앞에 펼쳐지는 삶의 전망은 거칠고 허무한 땅입니다. 그래서 주전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그리스의 탁월한 철학자 중 굉장히 많은 숫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진리의 빛이 없이 인간이 전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술이나 문학이나 철학이나 모든 학문이 결국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올바른, 더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의 빛을 찾는 것이고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진리를 감각으로 표현한 것이 예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영향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하게 말하면 광란의 삶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행복한 천재들이 드물었던 이유는 천재성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빛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빛이 없을 때 더 불행해지거나, 아주 미천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빛이 없어도 행복하거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뛰어난 천재들도 진리의 빛이 흠뻑 들어올 때에는 행복한 삶을 살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만큼 평범한 사람들이 고민하지 않는 더 많은 것을 괴로워하며 씨름해야 했고 그에 비해 가난한 사람은 비록 천재들이 도달하는 그런 우주적인 기쁨은 못 느낄지라도 자기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리의 빛을 알고 그 진리의 빛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한 번 후배 목회자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할 때가 됐고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이제 졸업을 해서 부교역자를 하고 있는데 진로를 끊임없이 불안해하면서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개척을 할까, 유학을 갈까, 교회를 옮겨볼까 등 별생각을 다 하는 것입니다. 개척에 대해서 물어봐서 내가 그랬습니다. “개척을 하는 것도 좋고 선교사로 가는 것도 좋고 뭐가 나쁘겠냐,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데. 근데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다. 뭐냐 하면 개척을 해서 외치지 않으면 안 될 말씀이 당신의 가슴 속에 있냐? 그것을 그냥 묻어두고 살 수 있으면 아직은 그렇게 개척을 할 사람이 아니다. 도저히 내가 전하고 싶은 게...” 교회를 세우는 것 자체가 목표일 수 없잖습니까? ‘내가 이것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라는 참 빛에 대한 증언이 있는데, 주님을 깊이 만난 흔적이 없으니까 그것을 전해야 할 다급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선교를 가면 뭐하고 교회를 개척하면 뭐 하냐는 것입니다. 개척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린교회에 있었던 교역자 한 사람이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해서 “넌 안 된다” 그랬더니 “정말 안 되겠습니까?” “김남준 목사의 명예를 걸고 너는 절대로 교회해도 안 된다” 그래도 하겠답니다. 그래서 도와줬습니다. 안 될 줄 알고도 도와줬습니다. 안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가장 큰 자산은 아빠가 큰 교회 목회자도 아니고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을 장모님으로 둔 사람도 아니고 돈 많은 장로님을 아버지로 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훌륭한 목사님의 후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미래에 대한 준비는 외치지 않고는 피를 토할 것 같은 빛에 대한 증언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 데나 던져놔도 결국은 교회를 합니다. 왜, 교회란 진리를 증거하고 그 진리에 감화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물론 그가 기가 막히게, 지금으로 말하자면 하남시와 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갖다 놓으면 좀 더 큰 교회가 될 수도 있고 달동네에 갖다 놓으면 작은 교회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는 본질이 아니잖습니까? 어쨌든 그 말씀을 듣고 변화 받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땅’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희랍어 성경에는 자기의, 자기 자신의 소유, 그게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 나온 대로 땅, 세상의 땅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정확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냥 그 두 개가 하나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서 땅을 뜻하는 ‘에레츠(אֶרֶץ)’가 거민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땅과 사람이 신토불이, 하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도 땅도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 빛에 대한 증언은 그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피조물이고 너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래서 창조된 너희와 창조된 이 모든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세계도 그 뜻을 따라 흘러가고 너희도 그 뜻을 따라 살아가고 모든 인류도 그 뜻에 따라간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라. 그것이 너희의 행복이다. 결코 그것을 떠나서는 너희들이 행복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그 참 빛에 대해서 증거함으로써 우리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지으심 받은 존재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그토록 존귀한 존재라는 것 그것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감화를 받고 세계와 자신의 존재 전체가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욕망의 방향이 올바르게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한없이 존귀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그 위대한 창조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이고 그것을 위해서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세상에 계셨고 또 세상에 오셨고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는데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랬습니다. 이 말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알지 못하였다’라는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랑하지 못하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다’라고 하는 것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특히 하나님에 관해서는 그렇습니다.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알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경배하기 위해서 당신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지, 호기심을 가지고 당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신학자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일학교 학생이 하나님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는 것만큼 사랑하게 되고 그것이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세상의 가장 큰 문제는 뭡니까? 그를 알지 못하는 것,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 이게 결국 가장 큰 문제입니다. 목양하지만 수많은 순원들이나 아니면 구역원들 보고 주위 사람들을 보면 처한 문제들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부부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사업의 문제,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직장생활의 문제, 성격적인 부조화의 문제, 별문제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껍데기입니다. 표상들입니다. 그 밑으로 들어가 보면 마지막에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목양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을 다 십자가에서 갈가리 찢어 내어주시면서 마지막에 이 세상에 주고 싶으셨던 것이 뭐였습니까? 당신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자들이 다 통곡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이 아주 오래간만에 침묵을 깨뜨리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아라” 왜 그러셨습니까? 여자들의 사랑은 순수했지만 다분히 육신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있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나 부활의 전망 같은 것 다 몰랐습니다. 예수님 사랑한 것입니다. 그 육신이 떠나가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며 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날 위해 울지 말라. 나에게는 그런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결국 예수님이 그 모든 생애를 통해서 가장 가슴 아파하셨던 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었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할 수 있도록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결국은 이 백성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셨는데 자기 소유인 사람들 속에 오셨는데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결국 뭐입니까? 지식과 사랑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가 형상이시고 그의 본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셨던 그 일을 계속해서 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뒤이어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요한은 첫 번째 증인으로서, 우리는 두 번째 증인으로서, 당신 자신은 증언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실체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에 대해서 증거하시는 증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이것입니다. 결국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큰 문제이고 목회는 그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훌륭한 미래에 대한 준비는 하나님을 아는 충만한 지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뼛속 깊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갈 때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를 던져놓으면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증언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 오늘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