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난 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녹취자: 박지성
이제 드디어 그렇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영접하는 자”라는 것은 그리스어로 보면 ‘람바노(lambano)’에 ‘엘라본(ἔλαβον)’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취한다’, ‘받아들인다’ 혹은 ‘삼는다’, 심지어는 ‘제한다’ 등등의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그림을 보여주냐면 그렇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세계와 모든 인류와 자신의 인생 의미를 설명해주는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 그의 삶의 의미를 확정해 주고 그렇게 살아가게끔 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 나란히 하나를 더 말하자면 예수님은 진리의 빛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사는 사람, 그렇게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권세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라는 그리스어 단어인데 이것은 형식적인 권세가 아니라 실제로 유효한 권세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산으로 파송하시면서 온갖 능력을 주실 때 쓰인 단어가 ‘권세’ 바로 ‘엑수시아’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권세도 ‘엑수시아’이고, 교회가 성도들에게 가지고 있는 권세도 ‘엑수시아’이고,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권세도 ‘엑수시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유효한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서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그 진리와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실재적으로 유효한 권세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그 뒤에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나란히 차례대로 나오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면 ‘토이스 피스튜우신(τοῖς πιστεύουσιν)-믿는 사람’, 누구를 믿습니까? ‘에이스 토 오노마 아우투(εἰς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빛으로 오시고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에는 그분이 계셨지만 사라지고 나도 이름이 이 땅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이제 그분을 믿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믿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자들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뭐냐하면 ‘엘라본(ἔλαβον)’이라는 분사입니다. 그를 받아들이는 자, 그를 취하는 자, 그것과 ‘토이스 피스튜우신(τοῖς πιστεύουσιν)-믿는 사람’, ‘믿다’라는 말에 전치사가 뒤따르는데 ‘에이스(εἰς’)‘라는 전치사가 붙습니다. 이것은 ‘인 투(in to)’로 전치사에서 이동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 속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믿음이 가져다주는 것, 그리스도와의 놀라운 연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하면 그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고 내가 그를 사랑하면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감정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믿음이 바로 그런 효과를 가져옵니다.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은 비행기를 타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는다든지, 오늘 내가 밥을 먹으러 목우촌에 가서 점심을 퍼지게 먹어도 절대로 코로나에 안 걸릴 것이라는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확률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관계로 설명하면 딱 맞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내가 그 사람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면 그가 내 속에 들어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런 정도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분과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영접하는 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를 취하는 자’. ‘그를 받아들인 자’. ‘취한다’라는 것은 우리가 사물을 취하듯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처 없이 헤매던 인생길에서 그분을 취함으로써 그분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일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누구를 향해 가야 하는지 하는 것을 모두 깨닫게 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크게 두 기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진리의 빛과 생명입니다. 진리와 생명, 이 두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뒤에 이어서 설명이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과는 좀 다릅니다. 어떻게 나오냐면 이런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등등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에는 ‘피로부터도 아니오 육체의 뜻으로부터도 아니오 사람의 뜻으로부터도 아니오’라고 나옵니다. 똑같은 단어입니다. ‘뗄레마토스(θελήματος)’라고 ‘오직’ 혹은 ‘그러나’, ‘낫 다시(not-)’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니라’.
여기에서 ‘육정으로’, ‘혈통’이라고 하는데 사실 혈통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피’입니다. 그것을 ‘혈통’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 ‘그들은 피로부터 난 사람들이 아니오’ 그것을 ‘혈통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혈통’이지 않습니까? 유대인으로서의 혈통, 철저한 순혈주의, 순수한 혈통.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편견이었습니다.
그런데 피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죄에 대해 속죄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특권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는 피를 흘림으로써 제사가 이루어지고 그 피 흘리는 것을 통해서 죄 용서를 받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정확하게 이 말을 어떤 뜻으로 썼는지 알 수 없고 확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한편으로는 사람의 혈통이라는 뜻도 되지만 결국은 제사, 피를 흘려서 짐승들을 죽여서, 그런 식으로 얻어지는 (속죄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오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혈통이나’ 그다음에 ‘육신의 뜻’이나 그냥 뜻입니다. ‘사르코스(σαρκὸς)-살코기’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죄와 결탁한 몸이라고 할 때는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처럼 중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육’의 반대는 ‘영’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께로 부터 태어나는 그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영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지 육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뜻이 아니오’는 이렇게 됩니다. ‘혈통이 아니오’ 그럼 뭐입니까? 혈통으로 번역한다면 ‘혈통이 아니요’라고 한다면 이것은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아들이 유대인이고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육신의 뜻이 아니오’ 라면 영의 뜻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다음에 ‘사람의 뜻이 아니오’ 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나오는데) 여기에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문장으로 보면 ‘육신의 뜻이나 혹은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았으니 이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라고 해야 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에크 떼우(ἐκ θεοῦ)-하나님께로부터’, ‘에겐네스떼산(ἐγεννήθησαν)-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하나님께로 부터 난다. 태어난다.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결국, 이런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직접 나으신다. 제사를 드리는 그런 피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해서, 육신의 뜻이 아니라 영의 뜻에 의해서,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부터 직접 태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당신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부터 태어난 것과 우리가 태어난 것은 다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이신 진리와 하나님이신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진리의 밝은 빛과 생명의 충만함을 누림으로써 이제 죄 가운데 하나님과 끊어져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었던 ‘엑수시아(ἐξουσία)’ 권세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권세는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30t씩 되는 트럭들이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요즘은 나아졌는지 모르겠는데 (예전에는) 돈을 더 벌기 위해서 24t짜리 트럭에 30t을 싣고, 32t 트럭에 40t씩 싣고 달렸다고 합니다. 요즘은 차가 좋아져서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에 트럭 기사분을 만나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렇게 싣고 100km씩 달릴 때는 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없어서 브레이크 잡는 것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더 위험한 것은 기사들이 기름을 아끼기 위해서 내려오는 길에서는 시동을 끈다니 너무 끔찍합니다.
그렇게 (빨리) 달리면 포항에서부터 서울까지 올라올 때 만 오천 원, 왕복 삼만 원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남은 기름은 빼내 팔아 자기 수입으로 합니다. 그런 차들이 미친 듯이 달릴 때 인간은 (그저) 바람에 구르는 낙엽처럼 보일 뿐입니다.
지금은 하얀 옷으로 바뀌었지만 파란 옷 입은 사람의 손짓 하나에 이렇게 무섭게 달리던 차가 천천히 와서 멈춥니다. 줄지어서 멈춥니다. 그가 경찰이기 때문입니다. 그 손끝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권세입니다. 나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가 있으므로. 누가 뭐라고 해도 미친 듯이 달리던 차들이 그 손가락 하나에 다 멈춰 섭니다.
인생을 살 때 자기 인생을 살아야 인생이지 인생에 끌려가는 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왜냐면 주체적으로 살지 않으면 그것을 우리는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다’라는 단어 자체가 (그렇습니다) 인생을 산다고 할 때 그 단어는 인간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개가 사는 것을 인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굳이 견생이라는 말도 안 씁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생과 비교할 수 있는 의미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내 인생을 살 수 있는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빛으로 그 성령의 생명으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립적 본질인 인격을 가진 주체로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따라서 사는 것이 인생을 권세 있게 사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에 푹 찌들어서 살아가는 것은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고, 살아있다는 그 사실에 목이 채여서 줄로 끌려다니는 것이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와 생명을 충만하게 가지고 바람처럼 지나는 이 짧은 인생을 아주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존재로서 무엇에도 무너지거나 꺾이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일체의 비굴함과 꺾임이 없이 담대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연약하니까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진 그 자리에서,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남의 인생을 바라볼 때 어느 한 토막 잘한 것에 대해서 열열한 박수와 갈채를 보내고 한 토막 못한 것에 대해서 돌을 집어 던지고 침을 뱉습니다. 그런데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전자도 그 사람의 인생의 다가 아니고 후자도 그 사람의 인생의 다가 아닙니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없으신 하나님은 이미 그런 인생을 살아갈 것을 모두 아시고 한눈에 보시면서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진리의 빛과 사랑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넘어진 것이 오늘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나의 발목을 붙들거나 또 어제 잘 산 것이 오늘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 우연적인 모든 단면들을 뛰어넘어서 하나님 앞에 여전히 존귀한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하는 가련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며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부터 시작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까지를 모두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진리의 빛과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