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이 된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녹취자 : 송미옥
I. 본문해설
오늘 성경은 가장 중요한 주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하였습니다. 우선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는 말은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로고스’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신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고, 정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고원리의 영역에 속한 것인데 비해서 ‘육신이 되었다‘ 할 때의 ’사르크스‘라고하는 것은 살코기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바사르엔, 그래서 이것은 가장 물질적인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리스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이 로마에도 전수되고 플라톤 사상들에 물들어있던 사람들에게 물질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정신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면서 결국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개별성을 띠게 되고, 개별성을 띠게 되면 띠게 될수록 그것은 선을 결핍하게 되어서 ’모든 물질에는 악이 깃들여 있다.‘ 라는 사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철학적인 사조인 스토아 학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약간 범신론 사상을 가지고 있는 학파였는데 눈에 보이는 많은 물질들은 우리를 현혹하는 것들이고 그리고 이런 것들은 진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있는 것들의 배후에 있어서 있는 것들을 잊게 만드는 없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관조하고 사는데서 인간의 희노애락에 시달리지 않는 안정적인 삶을 살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인은 지혜자는 사물에 있고 없음, 변화, 생겨남과 사라짐. 이런 것들에 의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현자였고, 누구도 그런 태도 없이는 지혜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같은 것들은 그런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허무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의 사람들이 보던지 결국 ’로고스‘ 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 사람들의 스페르마티코스 라고 하는 사과나 배의 반을 짤라서 보면 정중앙을 나누는 중간에 요만한 씨가 나옵니다. 배종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사과 전체가 무엇인지를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그 씨앗이 다시 심겨질 때에 똑같은 나무가 생겨나고 그 나무에서 똑같은 과일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로고스‘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로고스가 그렇게 신이 모든 세상을 그것을 씨앗삼아서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스페르마티코스 배종과 같은 존재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세계에 속한 신적인 존재가 살이 되어서 이 세상에 왔다. 그 살 속에는 결국 악이 깃들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런식으로 왔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신의 실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다음에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 해놓고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을 때에 그것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접근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복음진리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이 익히 할고 있는 세계관과 그들의 용어를 사용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용어의 생각을 빼 버리고 기독교적인 생각을 가득 채워놓아서 그들에게 밀어 넣으면서 너희들에게는 로고스가 생명이 없고 인격이 없는 원리에 불과하지만 기독교에서는 바로 그것이 생명을 가지고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다는 것으로 시작을 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이야기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예수가 세상을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 때문에 보냄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에는 기적과 기적에 대한 해석들이 시간과 상관없이 주제별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중에서 가장 선교적이고 신학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자 그럼 하나씩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에스케노센이라고 하는 그리스어 인데 이것은 ‘텐트를 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샤칸’이라는 말에서 한자씩 히브리어에서 따와서 나온 히랍어가 된 말인데 히브리어에서 ‘샤칸’이라는 말은 ‘쉐키나 하나님이 거하다’라는 동사입니다. 샤칸하고 야샤부의 다른 말은 야샤부는 집을 짓고 거주(?)하는 것이고 야칸은 임시적인 거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가운데 텐트를 치셨으니 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텐트를 수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 눈에는 우리의 몸이 살아있는 자체를 텐트라고 본 것입니다. 텐트는 유목생활하는 사람들이 치고 텐트가 서 있을 수 있도록 볼대를 세우고 줄을 묶음으로써, 텐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텐트는 수동성을 갖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텐트를 쳐줌으로써, 텐트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은 필요할 때만 거주하다가 떠날 때는 다 거두어서 떠납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 바로 그렇게 뼈와 살로 이 세상에 왔지만 하나님이 영혼을 주셔서 그것을 볼대 삼아서 우리를 붙들고 우리에게 정신의 힘을 주셔서 이것을 줄로 삼아서 우리를 붙들고 있음으로 텐트처럼 서 있는 존재다. 라고 보았고, 때가 되면 우리의 장막을 하나님이 거두시니까 우리는 그 섭리에 순종하면서 결국 거두어 들여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들이다. 이렇게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장막처럼 우리의 육신이 펼쳐진 것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펼쳐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육신은 성경에서도 육신을 두 가지로 이야기 하는데 죄와 관련된 육신 죄와 관련이 없는 육신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죄가 없는 육체일 뿐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져서 이럴 때의 육신은 이미 죄가 들어간 육신입니다.
여기에서는 순수한 물질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질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크게 3가지의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레데오스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한 책을 쓰면서 하나님이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은 감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라고 했습니다. 믿는 것은 지성의 활동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가시적 사물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가지적 사물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고도의 정신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고도의 정신을 하나님이 한순간에 우리의 눈을 열어서 부여하시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러면 그 분을 볼 때에 당연히 체구가 있고, 모양이 있고 눈으로 그분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다 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은 지성의 크기가 없는 사람이라도 다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징검다리 삼아서 그를 믿게 하게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두 눈으로 똑바로 뜨고 보고 심지어는 같이 밥을 먹고 그 품에 안겼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지성이 멈추는 한 결코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여주신 육체적인 많은 것들이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현실이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적입니다. 갑자기 그런 일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엄청나게 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복음서 전체가 병든 자를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고 문둥병자가 나음을 받고 귀신들이 쫒겨나고 하는 어머어마한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이러한 분이시라고 보지만 그분이 행하시는 그분을 통해서 보시는 기적적인 역사를 보면서 그분의 내면을 꿰뚫어 보라 그러면 너희들이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도는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기적에 주목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적 그 배후에 있는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삼위하나님으로서 당신과 함께 하시는 사실을 보고 그 하나님의 판단을 가지라고 그렇게 기적을 행하신다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에 관심을 가질 때 조금도 기뻐하시지 않으셨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적을 징검다리 삼아서 당신 안에 있는 신성을 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혼자는 알 수 없었던 사실 하나님이 우리가 이제껏 믿었던 하나님이 저렇게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이시구나 결코 죽음도 우리를 최종적으로 굴복시키실수 없고 그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도 건져내주시는 분이시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리는 자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실 때에 예수그리스도의 뺨에 흐르는 눈물에서 시선이 멈추지 않고 저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런데 우리는 감각에 들어오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당신의 마음을 몰랐었구나 이런 방식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신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굳이 사랑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사랑과 영원함과 완전함과 긍휼과 선과 자비와 모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는 그 책망 속에서 단지 의협심에 불타는 젊은 유대인을 보아서는 안 되고 이렇게 인간을 한편으로 사랑하시면서도 당신을 그릇된 방법으로 섬기는 인간의 무지와 악에 대해서 저렇게 싫어하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바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듭니다. 그때 사람들이야 예수를 봤지만 우리는 예수도 못 보고 성령도 못보고 성부도 못 보는데 그렇게 오신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나?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다면 복음서가 기록이 되었을리가 없습니다. 복음서가 없으면 그것을 해석하는 서신서가 존재할 수가 없고, 두 개가 없다면 미래를 예언할 책도 없었으니 신약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이 유대인과 무엇이 달랐겠습니까? 아마 어머어마하게 성경에 창념하고 순수한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못 만났지만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약성경이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복음서가 성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가 신약성경의 어떤 구조를 이루게 되느냐 하면 제일 밖이 계시록입니다. 그 안쪽이 사도행전이고 그 다음이 서신서이고, 그 다음이 복음서가 들어오고 복음서 한가운데는 예수그리스도의 삼일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40년의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전체의 그리고 삼일이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이 3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파문처럼 확장되는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면 우리에게 항상 사람으로 오신 에수를 생각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신 그 분을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구약시대에 사람들에 비하면 굉장히 쉬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은 굉장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보다 큰 사람은 없다. 거의 예수님을 세례요한을 다윗이나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은 수준에 놓고 말씀하시는 것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강조점은 세례요한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이보다 크다. 그 천국이 미래에 완성될 초월적인 나라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세례요한보다 크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행복에 있어서 요한과 비교될 수 없는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놀라운 복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구속사적으로 영원히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같이 계셨는데, 시간 속으로 오시는 순서가 먼저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으로서 살다가 죽으십니다. 그 다음으로는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일은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사업을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사업을 하라고 응답해 주시는 것이 주 임무가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그 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오신 것 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셔서 지금은 안 계시고 그러나 생생하지 않습니까? 가본 사람도 있고 못 가 본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본 사람이 성경을 읽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왜나하면 제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바다’하면 여러 가지 기억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김희보 박사님은 구약을 평생 가르치시던 목사님이 예루살렘을 한 번도 안가셨다고 합니다. 김수영 박사님도 예루살렘에 간 게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놀랍습니다. 전혀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결국은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걸어 다니고 섬기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모습을 상상하는 것 없이는 복음서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그려낼 수는 없습니다. 항상 예수라는 영화에도 뒷모습만 나오지 않습니까? 누가 감히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보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새부스의 증언에 의하면 굉장한 미남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류학자들이 그려낸 두개골을 보면 이상한 사람처럼 만들었는데, 어쨌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생생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깊은 바닷가 거닐 때’ 찬송가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그렇게 쭉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에수그리스도의 모습이 왜 갈릴리와 유대와 사마리아 이 지역에서만 계시게 하셨을까? 더 많은 지역으로 다니시게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를 눈에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어마어마한 세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이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것을 그립니다. 그릴 때에 그 당시에 봤었던 사람처럼 똑같이 예수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바다를 잔잔케 하고 이런 것 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기 잡는 어부가 풍랑을 만났다는 상상을 하면서 지금도 예수님이 오셔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셔서 우리가 침몰되게 않게 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것을 뛰어 넘기셔서 바다가 잠잠해지는 광경을 보면서 바다가 아니라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인지를 알게 만드셔서 그분께 ’귀의‘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귀의‘ 한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산다는 것이 ‘귀의’입니다. 그런 ‘귀의’? 하는 마음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차피 나타나야할 영광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청교도들과 특히 교부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몸을 입고 언젠가는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견해를 가집니다. 그래서 ‘때가 차매’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인간의 본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보내셔서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감각세계를 뛰어넘는 믿음으로 보게 하시는 그 일이 그때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담이긴 하지만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온 것이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어떤 유익을 무엇을 가져다주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모습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모든 만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돌보며 순종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만 했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갑니까?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그의 사람됨과 우리 사람됨이 같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같이 않았겠지요?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보여주시는 인격과 삶과 모든 모습들은 역시 타락하지 않았던 인간에게도 찬란한 빛을 던져 주었을 것이고 무엇인가 그분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그렇지 못한 삶으로 우리를 이끌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교훈은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경을 사랑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신 유익입니다. 그분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성경 속을 여전히 안개와 어두움에 가려진 채로 유대인들이 참된 구약 종교를 떠난 것처럼 우리도 또 다른 형태로 그렇게 떠날 수도 있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그분에게는 수치요 치욕이었으나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다음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